법문과 수행

산골 노승의 화려한 점심-향봉

수선님 2023. 10. 15. 13:43

 

글을 쓰게 된 이유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일까?

불교의 수많은 경전에는 깨달음의 내용이며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길이 담겨 있다. 그러나 커피를 마시고 커피 맛을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룬 후 부처로서 깨달은 내용을 얼마만큼 말씀으로 담아낼 수 있었을까? 사람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부처의 말씀을 듣고 그 후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얼마만큼 기억해 경전에 옮겨 담았을까?

 

마흔이 다된 나이에 늦게야 철이 들어, 인도와 네팔, 티베트에 머물 때 천지개벽하는 듯한 깨달음의 아름다운 체험을 하게 된다. 누가 무엇을 물어도 의혹됨이 없어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 않는 좋은 스승이자 착한 벗이 되는 것이다. ‘참 앎(知)’과 ‘참 봄(見)’의 ‘텅 빈 충만’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중국에서 7년 동안 머물며 중국의 고어(古語)를 익히며 숱한 경전과 선어록의 숲을 순례한다.

불교의 핵심사상인 연기법칙과 무아, 중도사상을 바르게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된다. 영혼이 없다는 내용, 하나만으로도 불교도들은 많이 당혹해하며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미 경전에서 밝히셨지만 영혼 따위는 없는 것이다. 육도윤회도 없는 것이다. 당생윤회(當生輪廻)와 현생정토(現生淨土)가 있을 뿐이다.

 

49재를 아무리 잘 차리고 준비해도 귀신 따위는 오지 않는다. 다녀갈 영혼이나 귀신 따위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49재는 죽은 자를 위함도 있지만 산자의 빈 가슴을 채워주는 의식임도 잊지 말 일이다.

 

‘중(中)’은 ‘정(正)’인 것이다. ‘가운데 중(中)’으로 헤매지 말고 ‘누릴 중(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중(中)과 정(正)에는 변두리와 모서리, 좌(左)와 우(右)도 없는 것이다. 대(對)와 변(邊)에서 자유로운 것이 중(中)이요, 사(邪)와 미(迷)에 얽매임이 없는 게 정(正)이기 때문이다. 발길 닿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요 정토(淨土)이며, 만나는 사람이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불교는 전생과 내생을 키우지 않는다. 불교는 오늘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영원하다. 영원한 오늘의 주인공으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리며 살 일이다. _244쪽

 

 

 

불교는 오늘의 종교이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의 주인공으로 오늘의 세계를 누리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전생을 묻거나 내생을 알고자 하면, 침묵으로 답변하신 큰 스승이시다. 연기법칙과 중도사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여주시고 있는 것이다.

 

육바라밀(六波羅密)과 팔정도(八正道)는 수행자가 갖출 덕목으로 실천하면, 누구나 마음의 평화와 행복, 자유를 누리게 된다. 또한 불교의 대표 가르침은 무아사상이다. 무아사상과 연기법칙은 둘이 될 수 없는 하나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도 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그 무엇 하나도 같은 것은 없으며, 변화하고 변모해감을 일깨워주고 있다. ‘생주이멸(生住異滅)’과 ‘성주괴공(成住壞空)’에는 생멸의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인도 고대 사상에서의 만물의 창조주 브라흐만도 인정할 수 없지만, 내 몸 안의 주재자 아트만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열반의 사덕(四德)인 상락아정(常樂我淨)도 부정의 의미가 아닌 현실세계에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긍정의 의미임을 알아야 한다. 영원불변하는 그 무엇도 인정할 수 없는데 무엇이 주체가 되어 육도윤회를 하겠는가?

 

사람은 살아서 윤회하는 존재이다(當生輪廻). 살아서 극락정토를 누리는 주체임(現生淨土)을 잊지 말 일이다. _213쪽

 

 

 

부처님은 『잡아함경』, 『상응부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장미꽃은 장미 줄기나 잎이나 대궁이나 뿌리에서 찾을 수 없다.

뿌리와 줄기와 대궁과 잎이 건강할 때,

그리고 그 기능이 작동될 때 장미꽃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햇볕과 흙, 수분과 바람, 자양분이

알맞게 골고루 갖추어져 있을 때 장미 줄기는 자라고,

줄기가 건강할 때 장미꽃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도 눈·귀·코·몸·뜻이 색깔과 소리, 향기와 맛, 느낌과 분별의 작용에 의해 생각의 윤회를 거듭할 뿐, 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의 기능이 사라지면 사람의 존재도 사라짐을 일깨워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연기법칙과 무아는 둘이 될 수 없는 하나의 진리이다. 사람의 신체구조는 ‘흙, 물, 바람, 불’의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운이 서서히 기능을 상실해가면 뇌 작용과 신경세포도 멈추게 된다. 온갖 작용과 기능이 멈춘 상태에서 무엇이 실체로 남아 있어 윤회를 거듭한다는 것인지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_210쪽

 

 

 

‘당생윤회(當生輪廻) 현생정토(現生淨土)’이다. 사바세계를 떠나 정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발길 닿는 곳이 곧 정토요 만나는 사람이 그대로 부처이다.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다. 선지식은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이요 착한 벗인 것이다. 깨달음을 신비주의로 몰아가지 말 일이다. _215쪽

 

 

 

깨닫기 이전에도 사람이요 깨달은 이후에도 사람이다. 깨닫기 이전엔 ‘눈, 귀, 코, 입, 몸, 뜻’으로 경계에 따라 윤회를 거듭하는 사람이지만, 깨달은 이후엔 오온(五蘊)과 육경(六境)에서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임제록』에서 말하고 있는 참사람이 되는 것이다. _216쪽

 

 

 

모든 것은 변한다. 집착하지 말 일이다. _218쪽

 

 

 

집착은 키울수록 병이 되고 욕심은 버릴수록 아름다운 것이다. _93쪽

 

 

 

“아가야! 마음이 몹시도 아프구나. 이 세상에는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란다. 우리처럼 이렇게 만나면 이내 헤어지는 아픔 속에서 나날이 철이 들고, 철이 들면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이란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_135쪽

 

 

 

한 생각이 일어나되 그 생각에 머물지 않는, 머묾 없는 머묾이다. 이것이 바로 평화와 행복과 자유를 누리는, 깨달은 자의 삶이다.

그러한 삶은 혼자 있어도 부족하지 않고 열이 있어도 넘치지 않는다. 비어 있으나 가득하고 가득하나 비어 있기 때문이다. 명예나 재색(財色)으로 윤회하지 않고 있으면 있는 대로 행복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유롭다. 오면 오는 것이요 가면 가는 것일 뿐, 있고 없음에 꾸미거나 드러내거나 감추지 않는다.

 

비우고 버리며 나누기를 생활화할 뿐 변두리와 모서리를 키우지 않는다. 발길 닿은 곳이 정토(淨土)요 만나는 사람이 부처이다. 더러는 흔들리고 헐떡이나 머묾이 없어 자취가 없다. 목마르면 물 마시고 졸리우면 잠자는, 평범한 보통사람으로 열린 세계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르주나(용수)는 그의 저서인 『중론』의 귀경게(歸敬偈)에서 그 유명한 팔불게(八不偈)를 남기고 있다. 해탈자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 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천지개벽하듯 한 바퀴 돌아오면, 꽃은 꽃이고 산은 산이며 물은 물인 것이다. 오면 반갑고 가면 서운하며, 여름에는 삼베옷이 좋고 겨울에는 솜바지가 좋은 것이다.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며 감사할 줄 아는 일상의 평범한 보통사람이 참사람이기 때문이다. _198쪽

 

 

 

한거사와 나눈 대화이다. 거사가 물었다.

“불교의 근본사상이 무아인데, 그럼 영혼의 존재를 불교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까?”

다음은 나의 답변이다.

 

저의 대답 대신 경전에 담겨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한 브라흐만(Brahman)의 존재를 불교에서는 인정할 수 없듯이, 육체의 주인이라는 영혼의 존재인 아트만(ātman)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모이고 머물며 흩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연기법칙(緣起法則)이라 합니다. 정신작용도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상호 연관관계의 존재론적 반응일 뿐. 하나하나의 기능이 소멸되거나 기능이 멈추게 되면 정신작용도 정지됨을 무아라고 합니다. 아트만을 인정하면 브라흐만도 인정해야 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사라지면 이것도 사라진다’고 연기법칙을 설하고 있습니다. 하여, 세상에는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변하지 않는 게 없는데 무엇이 변하지 않고 존재해 윤회를 거듭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수행자는 『기실론』의 진여(眞如)에 집착해 희망의 불씨를 살리려는 어슬픈 몸짓도 보게 되는데,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무아임을 사무치게 깨달을 일입니다. 불교는 전생과 내생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바로 현생, 오늘의 종교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은 오늘의 정토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 행복과 평화 자유를 누리는 가르침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형이상학 쪽보다 형이하학 쪽에 방점을 두는 오늘의 종교임을 잊지 말 일입니다.

끝으로 『백론(百論)』에 있는 게송을 옮깁니다.

 

과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

전생에 있었던 내가

금생에 내가 될 수 없도다. _204쪽

 

 

 

내 죽거든

이웃들에게 친구들에게 알리지 말길

관이니 상여니 만들지 말길

그저 입은 옷 그대로 둘둘 말아서

타오르는 불더미 속에 던져버릴 것

한 줌 재도 챙기지 말고 버려버릴 것

 

내 죽거든

49재다 100재다 제발 없기를

쓰잘 데 없는 일로 힘겨워 말길

제삿날이니 생일이니 잊어버릴 것

죽은 자를 위한 그 무엇도 챙기기 말 것

죽은 자의 사진 한 장도 걸어두지 말 것

 

내 죽어

따스한 봄바람으로 돌아오리니

피고 지는 들꽃무리 속에 돌아오리니

아침에는 햇살처럼 저녁에는 달빛처럼

더러는 눈송이 되어 더러는 빗방울 되어 _144쪽

 

 

 

별것 아닌 것들의 소소한 행복이 나를 기쁘게 하고 들뜨게 한다. 산이 쩡쩡 울릴 만큼 바위벽의 얼음이 녹아내리면, 여전(旅錢) 한닢 마련 없이도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 남은 미역국에 밥 말아 먹으니 세상이 배 안에 담겨 부족함 없이 행복하다. 누군가 법당의 부처님 앞에 사과 한 알을 놓고 가, 그 사과로 후식까지 즐기고 있으니 이만하면 산골 늙은이의 화려한 점심을 마친 셈이다.

 

오전에는 수원에서 왔다는 어떤 할머니가 정다운 스님을 찾아 사자암엘 다녀갔다. 사주관상의 권위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자칭 도사할머니는 글쎄 정다운이 사자암에 없는 것은 예견하지 못함인지 헛걸음을 한 셈이다.

 

익산에 산다는 어느 할머니는 전화기 속에서 징징징 울고 있다. 시집간 딸이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사위와 이혼하고 딸아이 하나 기르다가 작년 이맘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본인도 국가에서 매달 지급되는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어, ‘가난이 웬수’라며 딸의 49재도 치르지 못했단다. 최근 죽은 딸이 꿈에 자주 나타나니 천도재를 지내고 싶지만 ‘돈이 없으니 어쩌면 좋겠냐’며 울먹인다.

 

나도 울먹이며 말하였다. 그럼 그 죽은 딸의 어린 딸은 누구랑 살고 있느냐고. 초등학교 2학년인 손녀딸은 외할머니인 본인과 함께 지낸다고 한다. 하여, 동정이 아닌 편안한 마음으로 천도재 날짜를 알려주었다. 손녀딸에게도 사자암 운영회에서 용돈을 마련해 주겠다며 배 3개, 사과 3개만 준비하라고 일렀다. 다른 일체 준비물이나 비용은 사자암 운영회에서 기꺼이 책임질 터이니 빈손으로 오시라며 마음을 덮어드렸다.

 

사자암에는 49재나 천도재가 가뭄에 콩 나듯 일 년에 서너 차례 치러진다. 내용은 다르긴 하나 대개는 사연 있는 자들의 희망에 의해 이루어진다. 당연히 경제적 부담은 없고, 목탁 울리는 시간은 10분 안팎이다. 목탁 염불소리로 귀신 오지 않는다며, 죽은 자를 위함보다는 산 자를 위한 종교의례임을 미리 밝혀 둔다. 사자암에서 십수년을 머물고 있지만 신도들에게 권선문 한 차례 내민 적 없고 대학입시 합격기도 한 번 치른 바 없다.

 

목마를 때는 자신이 물 마셔야 목마름이 가시고 오줌 마려울 때도 자신이 화장실에 다녀와야 개운한 이치를 여러 차례 설명해서인지, 사자암 신도들은 자기 불공은 자기가 법당에서 절하고 염불하며 축원까지 하고 있다.

 

주지도 바쁘다. 사자암에는 공양주가 없어 세 끼니 식사 담당은 주지 몫이다. 풀 뽑고 마당 쓸며 도량의 허드렛일도 머슴처럼 부지런히 일 잘하는 주지 담당이다. 게다가 주말이면 찾아드는 다양한 방문객과 인생 상담, 신앙 상담 등 상담자가 되어야 하고 이웃처럼 친구처럼 편한 대화를 해야 한다.

 

산이 텅텅 비어 있는 날엔 사자암 주지는 빨래나 바느질을 즐긴다. 늙디 늙은 할배지만 시력과 청력이 정상이다. 사장암에는 주지 도반이 많은데, 진돗개 2마리와 고양이 9마리가 좋은 스승이자 착한 벗이다.

 

할 일 없는 늙은이로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살고 있지만 마음이 편하다. 조건 없이 행복하다. 개운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글쎄, 있으면 있는 대로 행복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꾸미거나 드러냄 없이 감추거나 속이는 일 없이 바람 부는 대로 꽃잎 지는 대로 순리에 순응하며 자연인으로 살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자암 주지 향봉이는 복이 골고루 넘칠 만큼 행복한 스님이다.

 

생활이 가난하나 불편하지 않고, 바라는 바가 없으므로 목마름이나 배고픔이 없다. 울고 싶을 때는 잔잔히 울고 기분 좋은 날엔 유행가도 부른다. 넘침과 부족함 없이 ‘날마다 좋은 날’의 평화, 행복, 자유를 누리는 오늘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다. _75쪽

 

 

 

사자암의 삼성각 불전함에 일주일 간격으로 500원짜리 동전이 버티고 있었다. 그것도 두 달 넘게 한 개씩 정확하게 불전함을 지키는 끈질김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루는 산신님께 투덜거리듯 말했다.

 

“500원 동전으로는 새우깡 한 봉지도 살 수 없고 붕어빵 한 개라면 모르지만. 아무튼 물가 상승도 고려해 동전 숫자가 늘어나도록 관심 좀 가지세요.”

 

그런데 사자암 주지의 염치도 없는 얼토당토한 주문이 열흘도 안 돼 불전함 속에서 이루어졌다. 500원 동전이 열한 개나 담겨 웃고 있었던 것이다. 동전 옆에는 한 장의 편지도 놓여 있었는데, 철딱서니 없는 사자암 주지를 울리고 만다.

 

“부처님, 저의 딸아이는 일곱 살인데 소아마비를 앓고 있습니다. 걸음걸이의 장애가 있어 유치원에도 보내지 못합니다. 아내는 북부시장에서 채소를 팔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올 때 아이가 좋아하는 사탕이나 과자를 사오며 동전을 딸아이에게 주곤 합니다. 그때마다 딸아이는 그 동전을 사자암 부처님께 올리라며 제게 주었습니다. 엊그제는 좋은 사람을 만나 채소 값을 후하게 받았다며 딸아이한테 동전 열 개를 주었습니다. 딸아이는 그 돈에 한 개를 더해 오늘은 동전 열한 개를 올리러 왔습니다. 부디 저의 아이가 나날이 건강이 좋아져 밖에서 뛰놀며 학교에 갈 수 있게 도와 주소서.”

 

나는 편지와 동전 열한 개를 촛대 사이에 올려놓고 큰절을 하며 그 가족과 딸아이의 건강을 염원하였다. 동전 열한 개가 번뻔하고 염치없는 사자암 주지를 잔잔하게 울리고 있었다. _82쪽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메시아를 키우지 않는 종교이다. 불교는 어제, 내일이 아닌 오늘의 종교이다.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육바라밀의 실천수행이 있고 팔정도의 생활덕목이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에 담긴 구절구절을 설명해 생활의 등불, 삶의 나침반이 되도록 해야 한다.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평생을 퍼마셔도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인 것이다. 가정집이 최고의 영험 깃든 법당이요 도량이며 가족이 최상의 부처님임을, 『법화경』에서는 인불사상(人佛思想)으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여는 글

 

마음을 열어 누군가와 말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군불 지피듯 이해를 넓혀갈 수 있는 디딤돌과 버팀목이 그리운 오늘이다.

행복과 자유, 그리고 빛을 향해 떠나는 게 인생의 나그넷길이다. 그러나 빛은 짧고, 어둠은 길게 허무의 그림자처럼 누워 있다.

젊어서도 늙어서도 빛과 그림자는 타는 목마름으로 외로움의 터널에 갇혀, 헐떡이는 호흡처럼 더러는 흔들리고 더러는 방황하며 철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늦게 철이 드는, 작아지는 아이이다. 세월의 무게에 따라 작아지는 것은 어른의 키뿐이 아니다. 마음속에 쌓여 있는 생활의 파편처럼, 두 눈 멀거니 뜨고도 가위눌리고 멀미하며 졸아드는 행복과 자유를 느낄 터이다.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찾아 종교와 신앙 쪽으로 접근해봐도, 이 땅의 성직자들은 돈타령의 끌어당김이 달인 수준이다. 순수와 진솔함을 잃어버린 채, 흥정하듯 거래되는 잘못된 신앙이 빈터의 외로움을 더해준다.

생각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리는 법이다. 집착은 키울수록 병이 되고, 욕심은 버릴수록 편안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진리는 멀리 있거나 높은 곳에 있는게 아니라 물, 공기, 빨래처럼 널려 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가정이 최상의 법당이요, 내 가족이 살아 움직이는 부처이자 보살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올 오늘이다. 오늘은 오늘뿐이다. 영원한 오늘의 참 주인공으로 행복과 자유를 누리며 날마다 좋은 날로 살 일이다.

 

2023년 5월

이향봉 합장

 

 

 

저자 소개 : 향봉

 

익산 미륵산 사자암 주지. 상좌도 공양주도 없이 홀로 밥 지어 먹고, 글 쓰고, 산책한다. 어린 시절에 백양사로 출가했고, 해인사 선방을 거쳐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부사장을 지냈다. 조계종 총무원 포교부장, 총무부장, 중앙종회 사무처장, 중앙종회의원 등을 역임하며 불교계 ‘실세’로 활동하기도 했다. 반면에 1973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서, 수필집 『사랑하며 용서하며』가 60만 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 저자로 유명세를 떨쳤다.

 

지은 책으로는 『작아지는 아이』, 『무엇이 이 외로움을 이기게 하는가』, 『일체유심조』, 『선문답』 등 20여 권을 펴냈다. 또한 경찰청(치안본부) 경승실장과 조계종 경승단 초대단장을 역임했으며, 청평사, 보광사, 내장사 주지를 지냈다. 늦은 나이에 철이 들어, 인도, 네팔, 티베트, 중국으로 15년의 치열한 구도행을 떠났다. 이후 돌아와 20년째 사자암에 머무르며, 머리와 수염이 허연 미륵산의 한가로운 노승으로서 할 일 없이 평화와 자유 누리며 살고 있다

 

 

 

출판사 리뷰

 

산골 노승이 온몸으로 펼쳐 보이는

삶의 애환, 그리고 깨달음의 기록!

 

“남은 미역국에 밥 말아 먹으니 세상이 배 안에 담겨 부족함 없이 행복하다. 누군가 법당의 부처님 앞에 사과 한 알을 놓고 가, 그 사과로 후식까지 즐기고 있으니 이만하면 산골 늙은이의 화려한 점심을 마친 셈이다.” -본문 중에서

 

노인들을 보면 간혹 부러울 때가 있다. 그들이라고 어찌 인생이 쉬웠겠는가.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숱한 위기와 위험의 나날들을 견뎠고 살아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견고한 삶의 지혜마저 자연스레 형성되었을 터이다. 늙어가며 죽을 날이 가까이 다가온다는 건, 그만큼 고통스런 날들도 차츰 소멸되어 간다는 의미도 품고 있다. 오늘의 삶에 충실하며 당당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노인들을 보면, 몹시도 부러울 때가 있다.

 

산골 노승, 향봉 스님은 말한다. “무엇이든 나누면 기쁘고 덜어내면 가뿐하다. 있으면 있는 대로 행복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유롭다.”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함의 여유와 당당함의 결기를 잃지 않는 모습에서 진정한 자유인의 경지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스님의 젊은 시절 모습은 어땠을까? 스님은 솔직하다. “젊은 시절 별명은 ‘일방통행’이거나 ‘불칼’이었다. 성질이 지랄처럼 급하고 말투와 행동이 거시기하게 거칠었던 탓이다. 그러긴 하나 쉽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며, 마음이 여리어 영화를 보면서도 눈물을 찔금거리는 못난이 바보였다. 강한 자에겐 더욱 강하였고, 적당히 타협하는 어설픈 일 따위는 체질상 맞지 않아 ‘전쟁’ 아니면 ‘평화’였다.”

 

오죽했으면 해인사 ‘똥물 사건’과 ‘곡괭이 사건’의 주동자였을까. 어찌 보면 이 책 『산골 노승의 화려한 점심』은 향봉 스님의 ‘구도기’이자 ‘깨달음의 기록’이다. 1장은 젊은 날의 자화상, 2장은 산골 사자암의 일상, 3장은 치열한 구도행의 흔적, 4장은 스님이 확철하게 깨친 진리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향봉 스님이 이끄는 대로 웃다가 울다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한층 성장한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삶의 본질적인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된다. “나는 누구이고, 이 세상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아직 답을 섣불리 말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을 곁에 두고 오래도록 곱씹다 보면 답은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목차

 

1장 반쪽짜리 자화상

뻐드렁니와 똥배꼽 / 어른불알과 땅개 / 반쪽짜리 자화상 / 옹골찬 싸움꾼도 노승이 되어 / 어떤 스님의 러브스토리 / 육군하사 이용주 / 창건주 할머니와 군법사 대행 / 〈섬집아기〉와 〈고향땅〉 / ‘똥물 사건’과 ‘곡괭이 사건’의 주동자 / 법거량과 선문답 / 베스트 셀러, 『사랑하며 용서하며』 / 그때 그 시절의 해제비 / 승려시인회 / 사람다운 사람 / 돌이켜보면 눈물뿐인 바람 / 타는 목마름의 원초적 본능 / 누나의 웃음과 형님의 울음 / 간절하게 철이 드는 때 / 돈과의 인연 / 투사와 보살 / 어머니의 태몽 이야기 / 책은 길이요 빛이다 / 야단법석 / 절반의 남자 / 뒤끝이 좀팽이인 사자암 주지

 

2장 더러는 눈송이 되어 더러는 빗방울 되어

동화 속의 암자 / 산골 늙은이의 화려한 점심 / 바느질을 하며 / 여름궁전 겨울궁전 / 동전 열한 개 / 어느 퇴임 교장 이야기 / 황소불알스님과 양주 / 두 할배의 겨울나기 / 어느 중년 여인의 가르침 / 정훈희의 〈스잔나〉 / “이 아이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요?” / 총각거사 / 사자암 주차장의 1인용 텐트 / “그렇다면 사자를 보여주시지요?” / 성직자가 필요 없는 세상 / 그렇고 그렇다네 / 나의 생활 염불 / 도반 모임이 있는 날 / 지리산 순례 / 새벽녘 뜰을 거닐며 / 참 세상 간단하다 / 천사와 보살 / 적막강산의 외톨이 / 스님, 저 왔어요 / 좋은 도반 도법 스님에게

 

3장 아픔 속에서 나날이 철이 들고, 철이 들면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

세상은 길이고 인생은 여행이다 / 세상의 주인공은 나 / 1996년 12월 1일, 티베트에서의 기록 / 새끼염소와의 이별 / 의문투성이의 수상한 여행자 / 덫과 올가미 / 처연하고 슬프디 슬픈 / 고산증세로 쓰러지며 / 안간힘을 다해 쓴 글 / 어젯밤의 누군가 / 또 하나의 탈출 / 예배당에서 사탕 받아먹던 아이는 / 온몸이 박살 나는 아픔 속에서 / 장거리 여행길의 화엄세계 / 7대 건강 진단법 / 화 삭히는 방법 / 먹이를 찾는 두 노인 / 순간의 실수와 순간의 선택 / 사모님과 아줌마 / 네 명의 남편과 한 명의 아내 / 인디아 갤러리의 음모 / 흰 가루의 비밀 / 위기의 순례길 / 칼춤의 현장 / 뚱보 미인과의 짧은 만남 / 바람을 닮은 적멸의 자유인 / 인도의 어느메쯤에서

 

4장 무아를 사무치게 깨닫는다면 변두리와 모서리를 키우지 않는다

우리네 인생 / 사람이 사는 이유 /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도인의 삶 / 깨달은 사람에 대하여 / 챙김과 멈춤 / 영혼은 없다 / 무아를 사무치게 깨닫는다면 / 영혼의 덫 / 중도의 가르침 / 오늘의 세계를 누리라 / 사람이 부처 될 때 / 모든 것은 변한다 / 생활의 지혜 / 큰 바다는 또랑물을 마다하지 않는다 / 미운 사람 / 경쟁과 전쟁놀이 / 설법의 다섯 가지 원칙 / 곁에 있어도 그리운 친구 / 떠난 사랑은 떠나게 하라 / 부채질하는 여인 / 움직이는 선원 / 스님은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 사라지면 그뿐인데 / 글을 쓰게 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