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의 기원 및 유래
보통 불교 관계 모든 일반상에 대하여 막연히 불상(佛像)이라 부르고 있
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상은 부처의 존상(尊像)에 한정되는 명
칭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아닌 보살이나 제천(諸天), 명왕(明王), 불제
자(佛弟子)상 등을 불 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불교상이라
고 부르는 것이 올바르다.
불교상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제천상(諸天像)이며 범천(梵
天), 제석천(帝釋天), 길상천(吉祥天)등은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
미 고대 인도 조각 가운데 나타났었다. 그러나 이들은 불교상으로서 존
재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상에서 본다면 불상이 가장 먼저 만들어
지고 다음에 보살상이 만들어졌으며 제천상을 비롯한 다른 불교상은 휠
씬 이후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불상 가운데서는 물론 석가상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최초의 불상은
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가장 일찍 편찬되었다고 하는『아함경(阿含
經)』을 비롯한 여러 경전의 전설적인 서술에 의하면 코삼비(Kaus mb )
국의 우다야나왕이 향나무로 석가의 모습을 조각하도록 했다는 것이 불
상조각의 시초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로서 전하는 이야기일 뿐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석가의 유적지로서 가장 오래된 붓다가야 (Buddlhagay , 成道의
땅)의 조각에도 그 다음 시기의 바르하트(Bh rhut)탑, 산 치(Sanch )탑, 등의 조각에서도
불상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 탑에서 우리 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석가가
표현되어야 할 곳에 불좌(佛座), 보리수(菩提樹), 불족적(佛足跡), 보륜(寶輪)등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중인도의 바르하트, 산치 또는 남인도의
아마라바티(Amaravat ) 같은 인도 초기의 불교 미술인 BC 1세기 무렵의 대탑(大塔)에는
부처의 모습이 표현되지 않았다. 이들 탑의 양식은 복발형(復鉢形)으로 상부에는
평두(平頭)를 놓고 다시 그 중앙에는 상륜(相輪)을 꽂았으며 그리고 탑을 돌아서
난간이 있고 사방에 탑문(塔門)을 세웠는데 주로 이 난간과 탑문에 석가 생애의 중요한
장면 이라든가 본생담(本生談, J taka)을 주제로 한 조각이 있다. 그런데 이 조각에
주인공인 석가를 표현하지 않았고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석가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원칙은 바르하트로부터 산치, 아마라바티 조각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다.
실제로 불상이 출현하게 되는 것은 휠씬 이후가 되는 대개 석가 입멸 후 500 년(기원
전후)무렵이다. 이처럼 석가 입멸 후 500년이 되기 전까지 불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은 부처의 신성(神性)에 대한 모독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부처는 정신적으로
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히 불상을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최초의 불상 제작을 제천(諸天)의 공장(工匠)인
비수갈마천(毗首鞨磨天, Visvakman)의 공으로 돌 리고 있는 사실을 미루어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입장은 기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가 공인 종교가 될 때까지
조형 예술의 작품을 예배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카타콤에서도 엄 격한
규제 아래 겨우 허용하는 정도였다. 그것도 초상화는 엄금되고 다만 상징 적인 그림만을
허용했는데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경우 새끼양이나 비둘기, 물고기, 포도나무,
조합문자 등으로 표현했던 것은 물신적인 대상이 아 닌 그 정신에 입각한 신앙의
입장을 고수하려는 데 근본 뜻이 있었다.
바로 이 것이 고대 교회 및 교부들의 기본 입장이었다. 그래서 3세기까지도 예수를
조형 예술로 표현하는 것은 성서에 대한 위반이고 우상숭배라고 주장하였다. 예 수를
그린 작품은 4세기에 이르러서도 거의 드물었고 그 표현은 5세기에 들어 기독교의
세력이 신장되면서 가능해졌던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석가는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이후 대부분의 생애를 대중
앞에서 설법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소분의(掃糞衣)를 걸치고 나무 밑 암 석 위에
거처하며 탁발(托鉢)의 생활을 했다.
불교도가 신성한 곳으로 생각하며 경건하게 참배하는 석가의『법화경』설법 장소인
인도 영취산(靈鷲山, Grdharakuta)은 당시에 시체를 가져다 버리는 장소였다. 영취산은
고대 인도 마 가다국(Magadha)의 수도 왕사성(王舍城)에서 십 리 남짓한 거리에 있는
거친 바위산이다. 이곳에서 석가는 시신에게 입혔던 옷으로 기운 가사를 걸치고 제자들과
함께 머물렀다.
이와 같은 석가 생전의 모습을 본다면 그가 입멸에 든 후 불상을 만들어 예 배
공양한다는 행위는 석가의 근본정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며 도리어 그의 정신과는
먼 것이었다. 석가의 가르침과 직접 만났던 당시의 불제자나 불 교도들은 다만 석가의
정신을 사모하고 따랐던 것이다.
도선(道宣, 596 667)의『속고승전(續高僧傳)』에서 볼 수 있는 초기 중국 선 종사(禪宗史)의
두타(dhuta, 頭陀)행자들의 용감하고 장부다운 맹렬한 고행과 구도정신은 이러한
석가의 근본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지엄(智儼)은 좋은 가 문에 태어나 영화로운
무인(武人)의 길을 버리고 사십 세가 넘어 능가종(稜伽宗)의 중이 된다. 그는 나병환자들의
곁을 지키며 그들의 상처에서 흐르는 고름을 입으로 빨아 내고 옷을 빨아주며 만년을
바친다.
혜가(惠可)와 승나(僧那), 혜만(慧滿)등 능가종의 초기 승려들은 모두가 두타계행(頭陀戒行)의
용맹스러운 실천자들이었다. 혜만의 경우 그가 죽은 후에 남긴 것이라고는 몸에 걸치는
누더기를 기우기 위한 바늘 두개가 전부였다. 이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안일한 삶이었다. 이처럼 불교 근본주의의 철저한 입장에 초기 선종 승려들의
말과 행위, 삶의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연전에 성철 스님이 입적(入寂)한 후 사리가
많이 나와 화제가 되었고 유품으 로 기운 가사 한 벌과 석장 하나를 남겼던 사실이
불교도들에게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같은 일련의 입장은 불교의 근본주의에
그 자취가 있는 것이다. 성철 스님의 사후 그의 제자와 신도들이 조상을 만들고 수식하고
부연한 다는 것은 본뜻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석가의 입멸 후 오랫동안 불상을 만들지 않았던 이유를
이해할 수도 있다. 불교 미술사상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를 일컬어 무불상 시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무불상 시대에 인도 불교도들이 부처를 기억하고 예배했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그 첫째 예배대상은 부처의 몸을 다비(茶毗)해서 얻은 사리(舍利, ar ra)였으며
이 사리를 모시기 위한 탑은 일찍부터 만들어졌다. 바로 이 부처의 사리를 모시고
예배했던 인도에서의 탑이 우리나라에서 불교 전래 이후 전 시기를 통해 많이 조성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석탑(石塔)의 연원이 된다.
다음으로 예배대상이었던 것은 금강보좌(金剛寶座)와 보리수(菩提樹) 그리고 보륜(寶輪)과
불족적(佛足跡)등이 있다. 이러한 상징적인 표현은 불교 이전부터 있어왔다. 불교
이전의 고전적이고 성스러운 표상들로서 이 표상들이 불교 도상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금강보좌는 석가가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 앉았던 자리(台座)이다. 당나라 현 장의『대당서역기』에
보면 "보리수에 에워싸인 한가운데 금강보좌가 있는데 아득한 옛날부터 천불(千佛)이
여기 앉아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금강좌라 한 다"고 서술했다. 금강좌란 금강(金剛)처럼
귀하고 견고한 자리라는 뜻이다. 한편 이 금강보좌를 사자좌(獅子座)라고도 부른다.
백수의 왕이며 용맹한 짐승이 사 자이기 때문에 부처를 사자로 비유하고 부처가 앉은
자리를 사자좌라고 불렀던 것이다. 초기 불상의 대좌에는 실제로 사자가 표현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불상에도 좌대에 사자가 표현된 예들이 있다.『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월성 동쪽 신궁의 남쪽에는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고
그곳은 곧 전불시대 (前佛時代)의 절터이며 한번 보았는데 돌의 높이가 5, 6자나
되고 그 둘레는 세 발 정도이며 우뚝 섰는데 위는 편편했다."라는 서술이 있다.
이 가섭불의 연좌 석인즉 금강좌인 것이다.
보리수는 원래 비파라수(卑波羅樹)인데 그 나무 아래서 석가가 보리(菩提)를 성취했다
하여 보리수로 불리게 된 것이다. 비파라수는 인도에서 이미 5천여 년 전부터 신성시되던
나무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 아래서는 거짓말하기를 두려워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古代)에 신단수(神壇樹)를 천신(天神) 강하의 신 성한 장소로 여겼던 성수(聖樹)
숭배의 기원이 있다.
현장의『대당서역기』에 의하면 금강좌 위의 보리수는 핍팔라(畢鉢羅)나무인데
옛날 부처의 재세(在世) 시에는 높이가 수백 척이었고 가끔 벌채했음에도 아직 높이는
4∼5장(丈)이 된다고 적고 있고 부처님이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보리수라
부른다 고 하여 줄기는 황백색이고 가지와 잎은 푸른데 겨울이나 여름이나 잎이 지는
법이 없고 윤이 난다.
그러나 해마다 여래(如來)의 열반일(涅槃日)이 되면 잎이 모두 떨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무성해진다고 한다. 그날이 되면 여러 나라의 군왕, 승려, 속인 등 수천만
명이 모여들어 향수와 향유를 붓고 음악을 연주하고 향화를 바치고 등불을 켜서 밤낮없이
공양한다는 당시의 소식을 적고 있어 우리는 보리수를 통해 석가를 기억하고 예배
공양했던 사실을 또한 알 수 있다.
보륜(寶輪) 또는 법륜(法輪)은 부처 설법의 표지이다. 불법(佛法)의 바퀴를 돌린다는
의미이다. 보륜은 본래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칠보(七寶)가운데 하나였던 것인데
불교 설법(說法)의 상징 표시가 된것이다. 보륜상(寶輪相)은 부처의 32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흔히 불상의 손바닥과 발다닥에 표현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고려
불과(高麗佛畵)불상의 손바닥과 발바닥에는 어김없이 보륜이 금니 (金泥)로 그려넣어졌다.
불족적(佛足跡)은 바라문교의 주신(主神) 비슈누(Visnu, 毗紐)의 족적(足跡)예
배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현장의『대당서역기』에는 인도 불족적 유적에 대한 내용이
여러 군데 나온다.
아쇼카왕 탑으로부터 멀지 않은 정사(精舍)에 큰 돌이 있다. 여래가 밟은 곳으로
두 발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길이는 1자 8치 남짓, 너비는 6치 남짓된다. 양쪽
발자국에는 모두 윤상(輪相)이 있고 10개의 발가락에는 모두 꽃무늬 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계림(鷄林)의 남쪽에 백률사(栢栗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에는 부처의 상이 있다. 그것을 만든 시초는 알 수 없으나 영험이 자못 뚜렷하다
민간에서는 이 부처가 일찍이 도리천(桃利天)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법당(法堂)에
들어갈 때 밟았던 돌 위에 난 발자국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 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바로 佛足跡 숭배와 그것의 조형상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또 일본의『약사사
연기(藥師寺 緣起)』에는 백제왕이 보낸 것이라고 하는 불족적석(佛足跡石) 2개,
관음상(觀音像), 홍종(鴻鐘)이 있었다고 하므로 일 찍이 불족적선이 만들어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불상을 대신하여 사리를 모신 탑, 금강보좌, 보리수, 불족적 등이 석가의
모습 대신 표현되어 오다가 석가의 입멸 후 500여 년이 지난 기원 전후 무렵에 들어서
비로소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는 물론 예배상으로서 불상을 만들고자 하는
요구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상을 만들어도 석가에 대한 신성모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불상의 조성이 가능해질 수 있었으며 동시에 앞서 말했던 불교 근본주의의 입장이
희미해져가는 데 그 원인이 있었다.
불교의 교세가 커지면서 많은 불교도들은 신앙의 실체로서 가시적인 대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인도 불교도들은 석가가 열반에 든 후 얼마 동안은 석가의 모습과 가르침을
기억하고 석가의 인격적인 교화를 사모했다. 또 직접 석가를 만 나지 못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소식을 생생하게 전해들었고 사리를 모신 탑, 금강보좌, 보리수, 불족적
보륜 등을 예배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부처가 입멸한 지 5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에
오셨던 위대한 인류의 스승으로서의 부처의 모습은 희미해져가고 초인 간적, 초자연적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불상을 만들려는 욕구가 따르게 되었다.
마침내 인도에서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하는데 최초의 불상은 인도의 서북부 간다라(Gandlh
ra) 지방과 북부 마투라(Mathrur )지방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마투라는
오래 전부터 종교도시로 알려져 있었으며 델리의 남쪽 갠 지즈 강의 지류인 자무나
강 중간 서안(西岸)에 위치하여 인도 서북부 및 서해 안을 연결하는 대륙간 교통의
요지로서 중개무역의 거점이었다.
마투라의 불교 조상은 인도 고유의 조형성과 소박한 고대 인도 미술의 전통을
계승했다. 간다라는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변경 지역으로서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는 실크로드로 나뉘어 인도 내륙을 통과하는 동서교통의 간선로에 인접하여
예로부터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고 동시에 동서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졌던 중요한 지역이다.
또한 마투라와 간다라 두 지역은 쿠샨 제국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간다라의 불상은 그리스 신상(神上)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간다라 미술의 중 요한
중심지 탁실라(Taxilla)를 중심으로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다. 간다라 지방 과 마투라
지방 어느 곳에서 먼저 불상이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어 왔으나 대개 거의 같은 무렵에 만들어졌다는 결론 에 이르고 있다. 당시의
역사 사정은 인도사에서 가장 불명한 시기로 편년(編年)이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의 인도 미술 유품의 제작 연대는 매우 막연하고 불분명하다. 인도 문학에서
보면 여기에 나타나는 시간도 근단적으로 표현되는 무한한 시간이 아니면 아주 미분화된
미세한 시간이다. 겁(劫, Kalpa)이라든가 찰나(刹那, Ksana)같은 우주적인 시간이다.
인도인들은 명확한 시간에 대한 생각이 희박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현재의 시간 속에서도
변화하는 현상보다는 그 현상계 뒤에서 움직이는, 시간이 흘러가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멸의 것을 추구하는 인도의 철학사상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인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 자연히 주변 국가의 기록들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간다라 미술은 그리스 헬레니즘, 고전 로마 미술의 영향이 크고 사실적인 표 현이
두드러지는 한편 추상적이고 동양적인 표현방식으로 변했다. 간다라 미술은 불탑(佛塔)과
조각이 주로 있고 회화는 남아 있지 않다. 조각은 전기에는 청 회색의 간다라 석불상이
만들어지고 후기에는 쇠퇴해져가던 석조 불상 대신 소 조 불상(塑造佛像)이 만들어지는데
여기에 채색이 가해져서 한층 우아해졌다.
마투라 불상은 인도 전통 미술의 계승이어서 간다라 불상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쿠샨 왕조 이전의 인도적인 육체성이 강조되는 전통을 이어받는다. 마 투라 미술
역시 불상 조각이 주이며 힘있는 표현의 마투라 불상은 굽타기의 조각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인도의 불교 미술은 아쇼카왕 시대를 출발점으로 하여 상당히 융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미술은 원시 소승 불교시대의 것이어서 수법이나 양식의 전개 는 있으나
내용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때는 아직 불상이 출현하지 않았던 시대로 서기
1세기에 쿠샨 왕조가 성립된 이후 비로소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고 간다라 및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마투라, 사르나드, 아마라바티 등 인도 전 지역과 중앙아시아, 서역, 중국,
우리나라에까지 이르게 된다.
쿠샨 제국이 몰락 한 후 굽타왕조가 일어나 그 초기에 불교는 또 한번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전시 대의 불교 미술의 집약으로서 굽타의 불상은 아시아 전역에서 전형적인
모델이 된다. 굽타 불상은 마투라 불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간다라적인 요소도 갖고 있다. 이후 8세기에 들어서 밀교가 일어나 11세기 또는 12
세기까지 지속된다. 이와 같이 인도 불교는 중앙아시아, 서역,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나라 불상의 유래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고구려는 372년)로서, 현존하는
삼국시대 초기의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서울 근교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이다.
이것은 중국의 북위 초인 5세기 초나 중엽의 불상양식과 유사하여 중국에서 전해져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초기에는 대체로 중국식 불상양식을 모방하거나 그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네모난 대좌 위에 두 손을 앞에 모은 선정인의 모습을
한 불좌상은 한국에서 제작된 불상 중 가장 초기의 형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옛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 원오리 폐사지의 소조 불좌상과 옛 백제의 도읍인 부여의 규암면 신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 등이 있다.
신라에서도 불교가 공인된 이후 6세기 후반에는 대규모의 불상조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566년(진흥왕 5) 완성된 거대한 절 황룡사의 절터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장륙의 금동삼존불상의 커다란 석조대좌가 남아 있다.
6세기 후반의 삼국시대 불상 중에는 삼존형식이 많으며,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
제72호)과 황해도 곡산 출토의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제85호) 등은 명문이 포함되어
있다. 표현양식은 중국의 북위 말기 및 동위시대의 조각양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세부표현이나
광배의 화염문양, 연화대좌의 표현양식은 중국의 불상들보다 단순화되었고 세부 묘사가
생략된 투박한 기법을 보인다.
석조불상으로서 환조는 별로 없으며, 대부분 암벽에 부조로 표현된 조각이 많다.
그 중 옛 백제지역인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의 태안마애삼존불(보물 제432호),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 등이 삼국시대의 대표적 보살상 형식이다.
또한 반가사유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서산마애삼존불의 좌측 협시, 경주
근교의 단석산 신선사의 마애불상군 중 반가사유보살상, 고구려의 금동미륵반가상(국보
제118호) 등이 전하고 있다.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 중엽에는 법의 표현도 자연스러워지며, 상의측면·뒷면의
묘사에도 관심을 두어 입체조각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7세기의 석불상으로는 경주배리석불입상(보물
제63호)·경주남산삼화령석조삼존불상 등이, 금동불상으로는 백제 규암리사지의 금동보살입상
2구, 경상북도 선산(善山) 출토의 금동보살입상 2구(국보 제183호·제184호) 등의
관음상이 대표적이다. 삼국시대 말기 보살상의 표현에 있어서는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의 불상양식의 영향이 반영된 조형적 특징들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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