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부중도(八不中道)>
‘팔부중도(八不中道)’란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의 중관사상(中觀思想)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도(中道)는 불교의 중요한 교의로 대소승을 막론하고 널리 중시되고 있으며, 각 종파에서도 모두 중도를 교리의 핵심으로 하고 있다. 각 종파의 중도설 가운데 가장 알기 쉬운 것이 팔부중도로 대승불교 중관학파와 삼론종의 중요한 이론이다.
여덟 가지 바르지 못한 견해를 바로잡는 정관(正觀)으로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여덟 가지 그릇된 개념을 연기법(緣起法)으로 타파해 분별과 집착이 소멸된 공(空)의 지혜를 드러내는 것으로 팔부중도(八不中道), 팔부정관(八不正觀), 팔부중관(八不中觀), 팔불(八不), 팔사(八事), 무애중도(無碍中道)라고도 한다.
※‘불(不)’ 자 다음에 ㅈ과 ㄷ이 오면, 불을 부로 적는다. 그래서 팔불중도가 아니라 팔부중도라 해야 옳다. 그리고 불상불단(不常不斷)이 아니라 불상부단이라 해야 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해야 한다.
중생들은 일체 존재를 잘못 알고 생(生), 멸(滅), 거(去), 래(來), 일(一), 이(異), 단(斷), 상(常)이라는 그릇된 고집을 일으키므로 이것을 깨뜨리기 위해 일체 현상이 모두 자성(自性)이 없다는 도리를 밝히고 불생, 불멸, 불거, 불래, 불일, 불이, 부단, 불상의 팔불(八不)의 정관을 닦는 것을 팔부중도라 한다.
즉, 모든 법의 참모습은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며,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같은 것(一)도 아니고 다른 것(異)도 아니며, 단(斷)도 아니고 상(常)도 아니어서, 유(有)를 여의지 않고, 무(無)에 떨어 지지 않는 중도(中道)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팔부중도(八不中道)는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인연법으로 허망하고 사악한 이론들을 모조리 때려 부순 것을 말한다. 이를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 한다.
그러니까 <중론>의 첫 구절 ‘귀경게(歸敬偈)’는 용수가 부처님의 진리 중 으뜸인 연기법을 가지고 당시에 횡행하던 잘못된 이론들을 모조리 타파한 후에 부처님께 자랑스럽게 절하는 용수의 자부심을 나타낸 문장이다.
‘귀경게(歸敬偈)’란 부처님을 기리는 노래란 뜻으로서,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이런 인연을 능히 설하시어 여러 희론(戱論)을 소멸시키시니, 설법자 가운데 최고인 분에게 나는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라고 하면서 팔부중도(八不中道)를 제시했다.
이 ‘귀경게’의 팔불 게송이 <중론>의 핵심이다. 즉,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연기의 이법(理法)이 생(生)⋅멸(滅)⋅상(常)⋅단(斷)⋅일(一)⋅이(異)⋅내(來)⋅거(去)의 여덟 가지 잘못된 견해[팔사(八邪)]를 떠난 것임을 파악할 때, 참다운 공(空)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고, 팔사가 떨어져 무소득(無所得)의 바른 견해에 머무르는 것을 팔부중도라 했다.
※여기서 ‘불(不)’이란 「다 버리고 다 포용하는 원리」이다. 그것이 바로 공의 세계이며, 개체와 전체를 모두 살리는 중도의 원리이다.
팔부중도는 우리가 존재로 여기는 모든 그릇된 고장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 설해진 여덟 가지의 부정(否定)이다. 그러므로 사물이 존재한다[유(有)]고 하는 판단도,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무(無)]는 판단도 모두 「연기 ― 공」의 입장에서는 부정되는 것이며, 이런 존재론적인 유와 무의 두 견해를 끝없이 부정해가는 바에 참된 중도가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팔부중도는 어리석고 삿된 견해를 끊어 없애는, ― 파사현정(破邪顯正) 하는 바른 가르침이다. 그러나 범부 중생은 망상에 빠져 생멸(生滅)ㆍ상단(常斷)ㆍ일이(一異)ㆍ거래(去來)를 실체적인 법이라고 고집한다. 그 결과 생사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공(空)의 팔불(八不)이 중도임을 깨달아 열반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① 불생불멸(不生不滅)---부처님이 깨달으신 중도의 이치는 모든 법이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없이 갖가지 인연(因緣)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기법(緣起法)에 근거해 설해진 것이다.
그리고 인연에 의해서 나타난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는 공한 것으로 극단적인 양변을 여의었다. 그러므로 중도는 곧 연기의 법이며, 공한 법이고, 일체의 차별과 대립을 떠난 적멸의 법이라는 것이다.
즉, 불생불멸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이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因)과 연(緣)이 화합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망념 된 중생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일어남이 있고 사라짐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실상은 거짓 모습이다. 즉, 삼라만상은 인연의 있고 없음에 따라 생멸변화 할뿐이요, 현상 그 자체에는 아무런 자성(自性), 즉 실체성이 없음을 말한다.
마음도 그와 같아서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만법이 사라진다. 세계를 만들고 파괴하는 것이 마음이지만 그 마음은 원래 형체가 없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 세계와 우주를 만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마음이 가정과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주인공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겠는가. 마음은 원래 생한 적이 없고(不生) 그렇기 때문에 멸하지도 않는다(不滅).”라고 했다.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일찍이 규명한 이론이다. 비눗방울 하나도 아예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렇게 허망하게 보이는 비눗방울도 아주 없애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어디엔가 어떤 또 다른 형태로 변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형태는 변하더라도 그 질량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컨대, 종이가 있다고 하자, 그것을 태우면 외형은 사그라지지만 종이를 태운 에너지와 재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주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니 불멸이다. 그리고 어떤 작은 물질도 새로 만들어낼 수 없으니 불생이다. 이처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연기 ― 가합(假合)」 해서 잠깐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 종이 한 장도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새롭게 생기게 하지도 못하는 이것이 불생불멸의 진리이다. 이것을 공(空)이라 한다.
② 불상부단(不常不斷)---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어느 한 극단에 사로잡혀 중심을 얻지 못하는 그릇된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윤회 상에 있는 중생의 몸과 영혼은 항상 하지 않음을 말한다. 즉, 모든 법은 영원함도 끊어짐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들이 있고 반대로 순간적으로 끝나는 것들이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그 역시 치우친 견해로서 망념 된 마음의 소산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용수가 불상부단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은 존재자의 연속성에 관한 논의이다. 여기서 상(常)이란 상주(常住)로서 변하지 않는 자성을 가지고 계속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며, 단(斷)이란 단멸(斷滅)로서 연속성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연기(緣起) ― 무자성(無自性) ― 공(空)」의 입장에서의 불생불멸이 이미 불상부단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상(不常)은 일단 생한 존재자가, 생(生)이란 상태를 계속해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부단(不斷)은 멸한 존재자의 멸(滅)이란 상태가 계속 유지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유가 발효돼 버터나 치즈가 됐을 때, 버터나 치즈에는 우유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불상이다. 그러나 전생(前生)과 내생(來生)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우유가 없이는 버터나 치즈가 생길 수 없기 때문에 부단이다.
이와 같이 우유와 치즈 간의 모든 관계는 상도 아니요 멸도 아니다. 이렇듯 인과란 자성이 없이 일어나는 것이어서 연기적이며 상대적이니, 단상(斷常)이라는 양극단의 견해에 떨어지지 말고, 「연기 ― 무자성 ― 공」의 입장에서 인과관계를 봐야 한다는 것이 불상부단이다.
③ 불일불이(不一不異)---불일불이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서로 다르나 그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동일한 것이기에, 다르다거나 영원히 동일하다는 집착을 부정한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이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하나인 관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불일불이란 연기(緣起)로 생한 현상적 존재들은 독립체로서 고정적인 자성(自性)을 갖고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나타난 거짓 상(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들의 참 성품은 동일한 진여법성(眞如法性)으로서 하나이다. 그러므로 현상적 존재들은 서로 다르면서 별개의 존재가 아닌 한 몸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하나도 아니면서 다르지도 않다는 것이 불일부이의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ㅡ)’이란 원인과 결과가 같다는 인과동일(因果同一)의 입장이며, ‘이(異)’란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는 입장이다.
원인과 결과는 연기론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용수는 이를 능동적으로 생겨나게 하는 것으로서의 능생(能生)과 수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으로서의 소생(所生), 즉 능소(能所)의 관계로 파악하면서 이 관계를 불일불이라고 했다.
이를 원자(原子)의 세계에 견주어 살펴보면,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가 결합해 물 분자를 이룬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 물을 이룬다는 관계에서 본다면, 수소와 산소는 물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므로 능생이며, 물은 수소와 산소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므로 소생이 된다. 즉, 수소와 산소는 능생이며, 물은 소행이다.
<중론(中論)>에서의 중요한 테마는 이 능생과 소생의 관계가 불일불이라는 것이다. 물의 성질이 수소와 산소의 성질과 동일할 수는 없으므로 불일(不一)이다. 그러나 수소와 산소를 떠나서는 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전혀 관계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이(不異)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서로 연기에 의해 성립할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각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무자성적(無自性的)인 것이다. 그러니 불일불이 역시 「연기 ― 무자성」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④ 불래불거(不來不去)---<중론> 제2장 관거래품(觀去來品)의 첫 번 째 게송이 다음과 같다.
“이미 지나간 것에는 간다는 것이 없으며,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에도 간다는 것은 없다.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을 떠나 지금 지나가는 것에도 또한 간다는 것은 없다(己去無有去 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제2장 1게).”라고 돼 있다.
이 게송은 과거, 미래, 현재에 대해 ‘간다’는 작용이 불가득(不可得)임을 논증하는 상당히 사변적인 게송이다.
과거에 이미 간 것에나 미래에 아직 간 일이 없는 것에는 ‘간다’는 동작이 이미 완료됐거나 그 동작이 실현된 일이 없기 때문에 ‘간다’는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재 지나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은 간다는 작용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용수는 이것마저 부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반은 가고, 아직 반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작용마저도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동작을 관찰하는 사람은 자신이 현재 지나가고 있는 작용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미 방금 지나간 과거의 동작을 파악하고 사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불래불거(不來不去)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과 ‘가고 옴’이라는 운동을 다루고 있다.
모든 법은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고 어디를 향해 간 바도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왔다가 저곳으로 가는 것이 모든 존재들의 흐름 같지만 그것 역시 형상에 집착하는 망념 된 마음에서 그렇게 보일뿐 실지로는 움직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여래(如來)’ 한 마디에 집약된다. 여래(如來)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명호이다. 여래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되고 있으나 근본 뜻은 언제든지 와 있다는 말이다. 즉,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다. 여래라고 하는 것은 불거불래(不去不來)이다. 여래(如來)에서 ‘여(如)’ 자는 항상(常)이라는 뜻이다. ‘언제나’라는 글자로서, 언제나 부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인간세계에 와 계시다고 해서 여래라고 한 것이다.
팔부중도는 존재의 근원에 대해 그 허망함을 밝히고, 진정한 존재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존재에 대한 진실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해탈이요, 열반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존재는 하나인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다. 영원한 실재가 아니라 연기적이며, 고정된 실재가 없는 공이다.
이렇게 설명은 했지만 이와 같은 팔부중도를 우리들로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힘들다. 비유를 든다면 바다와 거품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바다에 거품이 생겼다고 하자. 전체적인 바다의 입장에서 볼 때 많은 거품이 생겨나고 없어지지만 바다 자체에서는 생겨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즉, 파도가 생겨나고 없어지면서 많은 거품이 일지만 바다 자체는 생겨남과 없어짐이 없다. ―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 그리고 거품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품이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파도가 일면 또 생긴다. ― 불상부단(不常不斷)이다.
• 거품과 바다가 같은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바닷물이 파도라는 인연을 만나 거품이라는 다른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거품과 물이 아주 다른 것이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거품은 물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다. ― 불일부이(不一不異)이다.
• 거품이 왔다거나 갔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바다의 입장에서 볼 때 거품은 가고 온 곳이 없다. 바람을 따라 왔건 바람을 따라 갔건 그것은 하나의 허망한 현상이지 바닷물은 그대로인 것이다. ― 불래불거(不來不去)이다.
바다를 전체로 봤을 때 바다는 종일토록 물결치면서도 ‘바다’ 그 자체에는 아무른 변화가 없다. 겉모습에서는 물결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변하는 듯 보이지만 그 본체인 바다는 늘 그대로인 채로 늘고 주는 일이 없고, 가고 오는 일도 없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다른 일상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이 곧 ‘불생불멸 불래불거’의 이치이다. 그리고 이렇게 바닷물처럼 그대로인 법이 중도법이다. 연기법에 의해 형성된 우주의 모든 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니 결국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고, 상주(常住)하지도 단멸(斷滅)하지도 않는다.
<중론(中論)>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 ‘귀경게(歸敬偈)’가 팔부중도(八不中道) 전체내용의 요지이다.
모든 법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모든 법은 영원한 것도 끊어짐도 아니며,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서로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다.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고 어디로 향해 간 바도 없다는 팔부중도(八不中道)는 용수(龍樹, Nagarjuna)가 말한 중도이론의 핵심이다. 성철 스님은 이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라 하셨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중도는 이와 같은 팔부중도가 아니라 팔정도(八正道)를 지칭했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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