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관사상(中觀思想)의 이해
불교학과
2003. 6. 10
머 리 말
<반야경(般若經)>의 공사상(空思想)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사람이 용수(龍樹, N g rjuna: 150∼250경 C.E.)이며, 이 용수의 대표적인 저술인 <중론(中論)>을 중심으로 한 사상을 일반적으로 중관사상(中觀思想)이라 말하며, 또 그 중관사상의 흐름을 이어받는 불교 논사들을 중관파(中觀派)라 부른다. 용수는 <중론> 외에도 다수의 저작을 남기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중론>으로 이후 많은 주석서가 씌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용수는 <중론>을 저술하여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 <중론> 속에서 용수는 공사상의 이론적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중론> 제24장 18게에서 ‘무릇 연기하고 있는 것, 그것을 우리들은 공성(空性)이라 설한다. 그것은 임의로 시설되어진 것이며, 그것은 중도(中道) 그 자체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게송에서 볼 수 있듯이 용수는 <반야경>에서 공이라고 설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연기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가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제는 모든 사물이 각기 독자적인 존재의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진 까닭에 연기의 관계를 떠나있는 독자적인 성질로서 자성이나 실체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용수는 이러한 연기의 인연관계를 떠나 있는 것을 자성(自性)이라고 부르고 따라서 자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사물이 연기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실체인 자성에 의해 생긴다고 한다면 그 때는 자성이 서로 연기한다는 모순이 될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곧 자성이란 인(因)과 연(緣)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립적인 것이며,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일없는 항상 고정불변한 존재이지만 실제로 그와 같은 것은 생겨날 수도 있을 수도 없음을 용수는 지적하고 있다.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因)과 연(緣)의 상호관계로 생겨나는 것이고 따라서 그와 같은 것은 곧 자성이 없는 까닭에 공(空)인 것이다.
이처럼 용수가 고정불변한 자성의 개념을 부정한 것은 그 자성의 관념이 우리 인간들의 망상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이 자성의 개념은 다양한 인연의 관계를 초월해 영원한 동일성을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특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 내재한 본질적 속성을 가리키고 있다. 즉 우리의 삶의 세계는 수많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약속에 의거한 언어적 세계로서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불변의 세계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어를 불변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해 그로 인해 번뇌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론>은 그와 같은 불변적인 성질로서 자성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 삶의 세계가 연기의 이치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중론>이 이처럼 연기법을 바탕으로 무자성, 공에 대한 논리를 수립하여 <반야경>의 공관에 대한 이론적인 체계를 세우고 있지만, 이러한 이론적 체계에 무엇보다 중요한 관점을 용수는 이제설(二諦說)의 정립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2제에 대한 교설은 공에 대한 이해와 직접적인 관계를 보이는 것은 물론, 동시에 용수 이후 <중론>의 주석가들 사이에서 그 견해 차이로 인해 중관파가 둘로 나뉠 정도로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교설이기도 하다. <중론> 제24장에서 용수의 반대자는 만약 일체가 공이라면 사성제, 사향사과(四向四果), 삼보(三寶) 등의 일체도 공하여 모두가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용수는 그 반대자가 공용(空用), 공성(空性), 공의(空意)에 대해 무지한 까닭에 그와 같이 스스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한 뒤 이제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세속제(世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의 2제는 불타가 의거해 설하는 것으로 이 2제에 대한 바른 이해는 진실한 뜻을 아는 관건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2제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용수 이후 <중론>의 주석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나아가 용수는 ‘연기와 공성을 파괴한다면 세간의 일체 언어습관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라고 하여 연기와 공의 이치야말로 세간을 성립시키는 근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세간의 언어 습관인 세속제가 다름 아닌 연기와 공을 바탕으로 성립하므로 만약 연기와 공을 부정한다면 세간의 삶을 부정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의 세계가 언어의 세계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변의 자성세계가 아니라 약속과 습관에 의거한 연기의 세계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와 같이 세속제를 성립시키는 바탕으로서 연기와 공의 이치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제일의제를 알 수도 없고 또한 열반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기와 공의 이치는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경지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반야바라밀의 세계는 곧 제일의제의 진리세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다시 말해 세간의 언어 습관인 세속제가 성립하는 근저로서 연기와 공에 대한 이해야말로 승의의 진리를 알고 열반을 얻게 하는 구체적인 지혜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용수는 2제설을 통해 연기와 공의 이치가 세간을 세간답게 하고 제일의제와 열반을 얻게 하는 구체적인 지혜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였다.
용수는 <중론>에서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관을 연기설과 같은 위치에 놓음으로 공관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대승불교의 역사적 위상을 확립시켰다. 이로 인해 <반야경>으로 대표되는 대승불교는 역사적으로 그 연원이 불타에게 유래되었음이 분명해지고 아울러 대승불교의 역사적 의미는 더욱 공고히 되었다.
① 중관파(中觀派)는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중관론의 약칭)을 근저로 하여 반야 공관(般若空觀)을 선양한 학파로서 후에 유식(唯識)을 설하는 유가행파(瑜伽行派)와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2대 사상이 되었다. 《중론》의 설은 모든 존재가 연기성(緣起性)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空)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공은 유 ·무의 극단이 없는 것이므로 중도라는 것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데에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 용수의 제자 제바(提婆)는 《백론(百論)》 등을 저술하여 외도(外道)와 소승의 교의를 논파하고, 제바의 제자 나후라발타라(羅聳羅跋陀羅)는 《중론》의 팔불(八不)의 의의를 주석하였다.
그러나 중관파가 학파로서 명확한 형태를 취한 것은 불호(佛護) 시대부터인데, 교학의 근본은 무에 집착하는 일이 없는 공의 입장이다. 불호 이후 공(空)의 인식방법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2파로 나뉘었는데, 불호의 계통인 필과성공파(必過性空派) 또는 귀류논증파(歸謬論證派)와 청변(淸辨)으로 대표되는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이다. 전자로부터는 월칭(月稱)이 나와 중론의 주석서 《Prasannapad 》를 쓰고, 《중관에의 입문》을 저술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티베트에 널리 유포되었다. 후자에는 같은 시기에 관서(觀誓)가 나오고, 또한 이어서 적천(寂天)도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등의 중요한 논서를 저술하였다.
8세기에는 적호(寂護), 연화계(蓮華戒)가 중관파와 유가행파를 종합한 입장에서 중관파를 발전시켰다. 또한 그 계통은 티베트로 전파되어 번영하였는데, 그 대표자가 아티샤(982∼1055)이고, 중국에서는 용수의 《중론》 《십이문론(十二門論)》, 제바의 《백론》을 소의(所依)로 하는 삼론종(三論宗)이 발전하였다.
② 중론(中論)은 한역으로는 청목(靑目)의 주석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다소 가필하여 409년에 번역한 것이 있다. 《중론》은 용수의 초기 작품으로 27장 449게(한역은 445게)로 이루어져 있다. 그 내용은 《반야경(般若經)》에 기초한 대승 공관(空觀)의 입장에서 원시불교 이래의 연기설(緣起說)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해, 부파불교뿐만 아니라 인도철학사상 일반도 비판하였다. 그 중심사상은 연기(緣起) → 무자성(無自性) → 공(空)으로 귀결된다. 또한 제24장 〈사제(四諦)의 고찰〉 제18게의 "연기(緣起)인 것 모두를 우리는 공성(空性)이라 설한다."
그 공성은 상대적인 가설(假設)이며 그것이 곧 중도이다"라는 점에 있다. 이것은 《중론》의 '중'도 공관이 유·무를 초월한 중도이며, 그것이 불교의 근본적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용수의 생각을 표명하는 것이다. 용수의 《중론》은 대승불교에 이론적 기초를 부여한 것으로, 그후 대승불교의 사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도에서는 이 책에 의해 중관학파(中觀學派)가 일어났으며, 유가행파(瑜伽行派:唯識派)와 더불어 인도 대승불교의 2대 사조를 형성하였다.
유가행파도 《중론》의 공사상을 계승하면서 현실세계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으로, 삼계유식설(三界唯識說)·삼무성설(三無性說)이 유명하다. 또한 중관학파와 유가행파가 혼합된 것이 티베트로 전파되어 총카파 교학의 기초가 되었다. 중국에는 청목이 주석한 《중론》이 번역된 이후 용수의 《십이문론(十二門論)》 및 그의 제자 제바(提婆)의 《백론(百論)》과 합하여 삼론(三論)이라 불려 삼론종이 성립되었다. 그 후 삼론종의 대성자 길장(吉藏)의 《중관론소(中觀論疏)》는 《중론》 연구의 궤범이 되고 있다.
또한 천태종(天台宗)의 지의(智勞)는 앞에서 말한 《중론》 제24장 제18게에 기초하여 '공(空)·가(假)·중(中)'의 삼제설(三諦說)을 세워 천태종의 근본교리로 삼았다. 《중론》에는 무외(無畏)·불호(佛護)·청변(靑辨)·무착(無着)·안혜(安慧)·월칭(月稱) 등의 주석이 있으며, 월칭의 《Prasannapad》는 현존하는 유일한 산스크리트 원전이다. 1995년 《나가르주나》(박인성 역)라는 제목으로 완역, 출판되었다.
목 차
Ⅰ. 중관사상(中觀思想)이란 무엇인가? ( 7 Page)
1. 中觀思想이란?
2. 중관사상의 역사적 배경
3. 중관사상의 역사적 전개
4. 나가르쥬나의 변증법
5. 공(空)의 철리(哲理)
6. 이중의 진리
Ⅱ. 중론(中論)이란 무엇인가? ( 21 Page)
1. 중론(中論) 이란...
2. 중론(中論)의 성립배경
3. 중론(中論)의 주석서
4. 중론(中論)의 구성
5. 중론(中論)의 내용
6. 중론(中論)의 주요사상
7. 중론(中論)의 영향
※ 중론송의 내용과 사상 개관 (김 철)
Ⅲ. 용수보살(龍樹菩薩) ( 44 Page)
1.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
2. 용수보살 전기의 성격
2. 용수보살의 저서
Ⅳ. 이종철교수의 불교강좌 - 중관사상 ( 60 Page)
Ⅴ. 중관학파(中觀學派) - (김 철) ( 83 Page)
1. 중관학파의 의미
2. 중관학파의 사상적 특징
3. 중관학파의 분류
4. 중관학파(中觀學派)의 형성과 역사
5. 중관학파의 학자들
Ⅵ. {中論} 귀경게 八不의 배열과 번역 ( 101 Page)
Ⅶ. 中觀的 緣起論과 그 應用 ( 112 Page)
Ⅷ. 용수의 중론송(김성철 교수 번역) ( 121 Page)
Ⅸ. 靑目釋(한문본) ( 214 Page)
Ⅰ. 중관사상(中觀思想)이란 무엇인가? ( 7 Page)
1. 中觀思想이란?
나가르주나(N g rjuna 150-250), 즉 龍樹의 대표적인 저술인『中論(M dhyamika-K rik )』에 나타난 사상을 宣揚한 일군의 학파인 中觀派(M dhyamika)의 사상을 말한다. 이 중관파는 唯識派와 더불어 대승불교철학의 2대 지주가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관파는 용수 이후 그의 직제자인 아리야데바( ryadeva, 제바 혹은 聖天이라고 함. 170~270경)를 비롯하여 라후라바드라(R hulabhadra, 200~300경), 바바비베카(Bh vaviveka, 淸辯, 490~570경), 찬드라키르티(Candrak rti, 月稱, 600~650경), 즈냐나가르바(J nagarbha, 8세기), 샨타라크시타( antarak it, 寂護, 728~788경)등으로 이어져 인도 대승불교사상의 큰 흐름을 형성시켜간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시대적인 추이와 함께 고찰하여 오늘날 학자들은 중관파를 초기·중기·후기의 중관파로 구분한다. 곧 용수를 비롯한 직제자인 아리야데바등을 초기중관파로 구분하며, 용수의 『중론』에 주석을 가한 일군의 사상가를 중기중관파, 그리고 유식파를 비롯한 타학파와의 대립 가운데 중관의 입장에서 사상체계를 펼쳐나간 사상가들이 후기중관파이다. 이와같이 중관파의 역사적 전개에 있어 출발이 된 것이 다름 아닌 용수의 『중론』으로, 용수는 이 『중론』외에도 10종이상의 저술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그의 영향은 대승불교사상사에서 「8宗의 祖師」「제2의 佛陀」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거대한 足跡을 남기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큰 영향을 남긴 용수의 사상을 그의 주저인『중론』을 통해 살펴보고, 아울러 그 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중관파의 역사적 전개에 대하여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용수의 『중론』은 기본적으로 二諦說에 근거한 中道思想으로서 緣起·空의 도리를 설하고 있다. 즉 勝義諦와 世俗諦의 이제설에 의거하여 부처님의 근본입장인 중도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이 중도의 입장을 연기·공의 용어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용수는 이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 부처님은 二諦에 의거해 법을 설하시는데,
첫째는 世俗諦이고, 둘째는 第一義諦이다.(중론, 24-8)
二諦의 구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 깊고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24-9)
世俗諦에 의하지 않으면 第一義諦는 설해지지 않고 第一義諦에 의하지 않으면 涅槃을 얻을 수 없다.(24-10)
이와같이 용수는 세속제(世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 勝義諦)를 설해, 이 둘의 구별을 모르면 부처님의 깊고 진실한 뜻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제의 올바른 구별은『중론』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근본 전제로서, 따라서 용수 이후 중관파의 사상가들은 이 이제의 올바른 구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론』의 주석가들에 의하면 승의제란 궁극적으로 「言說을 떠나 戱論(prapa ca)이 寂滅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후기중관파의 즈냐나가르바는 유마거사의 침묵이야 말로 진정한 승의제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승의제는 궁극적으로 언표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바바비베카와 같은 주석가는 언설을 통해 승의제가 간접적으로도 표현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용수에 있어서 구체적인 이제의 설명은 그다지 자세히는 나타나지 않지만, 열반을 證得한 근거가 되는 승의제는 세속제를 통하여 표현되어진다고 명확히 언급되고 있다. 이 세속제란 世間에서 인정되어지는 言說이나 慣習등으로, 곧 세간 일반에서 승인되어지는 까닭에 진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언설의 세간 진리로서 용수가 『중론』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緣起·空의 용어이며, 이 연기와 공의 용어를 사용해 용수는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연기와 공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개념임을 용수는 三諦偈로 일컬어지는 제24장 18게에서 말하고 있다. 곧 다음과 같다.
"緣起하고 있는 것, 그것을 空性이라 설한다. 그것은 임으로 施設된 것이며, 곧 그것은 中道이다.(24-18)"
이와같이 연기와 공성은 동일하며 더우기 그것은 임으로 시설된 것(언어에 의한 표시, 假名)으로, 이렇게 아는 것이 곧 중도(madhyam pratipad)인 것이다. 따라서 이 연기로서의 중도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해 가는 것이『중론』의 전체적인 내용이지만, 그러면 왜 용수는 이러한 연기의 논리를 전개했던 것일까. 그것은 용수 在世시대의 사상적 동향과 관련하는 것으로, 이러한 동향은 그의 저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중론』에서는 반대자의 견해를 먼저 든 뒤 용수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서술하고 있으며, 다른 저술인『廻諍論』에서는 인도 제학파 가운데 실재론자로서 니야야(Ny ya)학파를 비판하고 또 동시에 같은 불교내의 說一切有部(Sarv stiv din)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특히 이 有部에 대한 비판은 『중론』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용수는 유부의 사상적 특성으로서 「法有」 사상의 근저를 이루는 自性(svabh va)의 개념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 이 자성이란 연기·공의 개념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유부는 일체 현상의 근본인 법이 자성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용수는 이 자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성이 緣과 因에서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성이 연과 인에서 생긴다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될 것이다.(15-1)"
"그런데 어찌하여 자성이 실로 만들어진 것이 될까.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고,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인 까닭이다.(15-2)"
이처럼 자성이란 因緣에 의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용수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자성의 개념은 연기의 입장과 위배되는 것이며 공의 개념과도 배치되는 것으로, 이러한 자성의 개념을 용수는『중론』 전체에 걸쳐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곧 유부에서는 일체 현상의 작용을 가능케하는 근본 실체로서 법의 자성을 인정한 것에 대하여, 용수는 모든 사물에 그러한 실체적 성질은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모든 사물이 실체적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연기하고 있는 것으로, 곧 공인 까닭에 緣由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와 공의 입장에 서서 자성의 개념을 비판하며, 아울러 사물이 연기, 공성의 존재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중론』의 근본 의도이었던 것이다. 이 연기에 대하여 『중론』 歸敬偈에서는 유명한 八不의 부정사로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緣起는 不滅·不生·不斷·不常·不來·不去·不異·不一하며, 戱論이 寂滅한 것이며, 吉祥한 것임을 가르쳐 주신 正等覺者, 說法者 가운데 최고인 그에게 나는 歸依합니다.(0-1, 2)"
곧 이 귀경게는 연기의 이법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생겨난 것이 아님을 여덟가지 부정으로서 보여주는 유명한 팔불(八不)의 연기를 설하는 것으로, 따라서 용수는 이 귀경게에 이어 제1장 觀緣品에서 일체는 생겨남이 없다는 불생(不生)의 이치를 밝히고 있다. 곧 일체는 스스로든, 다른 것으로부터 든, 무엇인가 실체적인 존재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밝히며, 일체는 다름 아닌 연기도리에 의거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이 가능한 것은 연기의 삶인 까닭이며, 이 연기의 삶인 까닭에 일체의 삶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릇 이 緣起를 보는 자야말로, 실로 苦·集·滅·道를 본다(24-40)」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용수는 연기의 이치를 바로 볼 때 우리들의 근본 번뇌인 고통도 없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고통에 가득찬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삶을 연기의 도리가 아니라, 자성의 개념등으로서 잘못 보는데 기인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연기의 이치를 바로 보는 것은 곧 자성의 허구를 아는 것이며, 곧 그것은 無自性·空의 이치를 아는 것으로서 중도의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중론』에서의 연기는 공(空)·무자성(無自性)·중도(中道)와 동일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기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言說에 의한 言表의 세계, 즉 世俗諦에 의거하는 것으로, 달리 말하면 세속의 언설(言說)인 연기의 용어를 빌려 무자성·공성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연기라는 용어는 비록 세간의 언설로 표현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연기의 이치는 佛陀 覺證의 세계에서 획득된 진리로서, 곧 승의의 진리가 언설로 표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각증의 세계를 체득한 뒤 그러한 상태에서 보여진 진실된 세계의 모습이 언설에 의지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진 것이 연기·공인 것이다. 따라서 연기·공으로 표현된 세속제에는 승의의 진리가 간접적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용수는 "고통으로 가득찬 윤회의 세계도 실은 연기의 세계로서 열반과 다르지 않다(25-19)"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용수의 『중론』은 이상과 같이 세속제에 의거해 구체적으로 표현된 연기의 용어로서 자성의 개념을 비판하고 일체세계가 연기의 이법에 따르고 있음을 논증한 저술이다. 따라서 『중론』 저술의 의도는 연기의 이치를 바로 나타내 보임으로서 일반 중생을 승의의 열반세계로 이끌고자 한 것이라 생각된다. 즉 언설로서 연기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지만, 실은 승의의 세계를 나타내 보인 것이 『중론』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용수는 佛陀의 중도사상을 二諦說에 의거해 재정립하고, 세속제의 연기로서 승의의 세계를 밝히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용수에서 출발하는 중관사상은 불타가 설한 중도의 이치를 二諦說을 통해 재조명하고, 자성을 주장한 유부등과 관련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해 연기의 이치를 재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이 용수의 사상에 의해 출발점이 된 중관사상은 대승불교사상의 체계를 공고히 하고, 또 그 내용을 深遠化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2. 중관사상(中觀思想)의 역사적 배경
龍樹의 중관사상은 앞 절에서 보았듯 二諦說에 기초한 中道사상으로, 世俗諦로서 勝義諦인 覺證의 세계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곧 각증(覺證)의 세계에서 체득된 이치가 言說로 나타난 것이 緣起·空으로, 이 연기·공의 개념과 배치되는 外道나 有部의 自性등의 개념을 논리적으로 비판한 것이 용수의 『中論』 및 그의 다른 저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용수의 중관사상은 佛滅後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 불교 역사상 부파불교의 전개와 대승불전의 발생과 같은 역사적 정황을 전제로 나타나지만, 이미 『중론』에서도 밝히고 있듯 용수는 그의 사상적 근본이 불교의 개조인 불타에게서 출발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앞절에서 본 『중론』의 귀경게에서도 용수의 입장을 볼 수 있지만,『중론』의 마지막 게송에서도 그가 불타에게 사상적 출발을 두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체의 [잘못된] 견해를 끊기 하여, 愍心에 가득차, 正法을 설하신 그 고타마 붓다에게 나는 귀의합니다.(중론, 27-30)"
이처럼 용수는 그의 사상적 출발점이 불타에게 비롯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지만, 그러면 용수는 어떠한 면에서 불타를 그 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먼저 필자는 正覺
을 얻은 고타마 싣타르타, 곧 불타가 설법하기를 주저한 소위 「梵天의 勸請」장면은 중관사상의 근간인 이제설의 출발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불타는 6년간의 수행을 통해 고행에 의한 수행 방법이 마음의 평안을 가져오지 않음을 깨닫고, 피팔라(Pippala) 나무 아래에서 禪定에 들게 된다. 그리하여 얼마 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불타가 되고 그 깨달음의 희열을 만끽하게 되지만, 막상 그 심오한 깨달음의 내용을 타인에게 설하고자 하였을 때, 불타는 도리어 다음과 같은 염려를 하고 있다.
"지금 내가 얻은 이 법은 너무나 깊어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지극히 미묘하고, 最上으로, 賢聖은 아는 바이지만, 愚者는 배우는 바가 아니다. 중생은 異見·異忍·異欲·異命으로, 異見에 의지하여 巢窟을 즐긴다. 중생은 이 소굴을 즐기는 까닭에, 緣起의 법이 깊고 깊은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 깊고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있다. 모든 욕망이 멸하여 愛가 다한 涅槃인 이곳을 또 한 보기 어려운 까닭에, 내가 지금 설법하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고, 곧 내가 오히려 피로하고 괴로울 뿐이다.(四分律, 32권)"
이것은 불타가 正覺의 내용이 너무도 미묘하여 사람들이 알지 못할 것이라고 염려하는 부분으로, 소위「범천의 권청」으로 알려진 대목이다. 이 범천이 불타에게「세간에는 번뇌가 적고 총명하여 쉽게 제도할 수 있는 자가 있다」라고 청하여 불타는 법을 설할 것을 결심하지만, 이처럼 언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각증의 세계가 곧 二諦 가운데 勝義諦의 연원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甚深微妙한 각증의 세계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初轉法輪을 통해 언설로 표현되고, 따라서 그 언설에 의한 설법은 붓다의 입멸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불타가 최초로 설법한 초전법륜에 의하면, 2邊의 양극단을 떠나는 中道의 이치가 설해지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으로 四諦에 대한 가르침이 설해지고 있다. 이 최초의 설법에 나타나는 중도의 이치는 불타 사상의 근본으로, 이 중도사상이 불교의 근본사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타가 각증의 세계에서 체득한 이치란 무엇일가. 그것의 앞의 사분율에서도 나타나듯 구체적으로는 緣起(pratityasamutp da)로 표현되는 이치이다. 곧 각증의 체험 그 자체는 언표되기 어렵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이 연기라는 말에 함축되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 연기의 구체적인 세계를 자각한 불타가 최초로 언표한 것이 중도(中道, majjhim pa ipad )의 원리이고, 사제의 원리이었던 것으로, 곧 그러한 원리는 연기에 대한 확신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타가 이처럼 연기의 세계에 대해 확신을 가진 것은 당시의 사상적 분위기와 어떠한 관련을 갖는 것일까. 그 시대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불타시대에 이르기까지 고대인도 사상의 전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의 고대사상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베다(Veda)로 대표되는 聖典에 의해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베다는 고대인도 아리야인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신에 대한 찬가 및 각종제사의식등을 모은 것으로 고대 인도인의 사상 및 문화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이 베다에 대한 연구는 종교학, 언어학 등의 학문을 태동시키는 바탕이 되지만, 무엇보다도
고대인의 정신적 발달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즉 상히타(Sa hita)·브라흐마나(Br hma a)·아란야카( ra yaka)·우파니샤드(UpaniSad)의 네부분으로 이루어진 베다는 시대적으로 인간의 사색단계가 깊어지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대 인도의 종교형태는 제사와 의례가 주된 것이지만, 의례를 담당한 제관에 의해 각종 찬가가 신에게 바쳐지고 있으며, 그러한 신에 대한 찬가도 시대에 따라 보다 근원적인 神格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프라쟈파티, 비슈바카르만으로써, 리그베다 상히타에서는 궁극의 존재를 단지 「一者(Tad ekam)」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탐구는 베다의 네부분에서 각기 나타나는 것으로, 특히 그 궁극적 존재에 대한 탐구는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極致(Veda-anta)라는 의미에서 베다의 結晶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인도 정통의 베단타 철학으로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최초의 우파니샤드는 불타 탄생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에서 베다의 사상적 전통은 기원전 1500년 정도부터 최초 우파니샤드의 발생시기인 기원전 600여년 까지 무려 천여년에 걸친 사상적 단계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오랜 전통을 갖는 베다의 사상은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그 절정을 맞이하고, 그 사상적 정점에서 등장한 것이 아트만( tman, 我)의 개념이었던 것이다. 즉 궁극의 존재로서 아트만에 대한 知가 절대적으로 추구된 것이 우파니샤드의 전체적인 분위기였고, 아울러 아트만에 대한 정의는 우주의 궁극적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과 함께 당시 사상가의 뇌리를 사로잡았던 중요한 테마이었던 것이다.
우파니샤드에 등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인 야즈냐발캬는 브리하드 아란야카 우파니샤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실로 일체는 그 일체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아트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일체가 사랑스러운 것이다. 실로 마이트레이여, 보여지고, 들려지고, 생각되어지고, 이해되어지는 것이 바로 아트만이다. 실로 그 아트만이 보여지고, 들려지고, 생각되어지고, 이해되어지는 것에 의해 일체는 알려진다.(BAU.2·4·5)"
이처럼 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은 궁극적 존재로서 아트만에 대해 아트만이 모든 만물의 근
본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각 기능도 아트만에 의해 작용하는 것이라고까지 이
론을 전개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궁극적 존재로서 아트만에 대한 탐구는 불타 탄생이전에 이미 인도의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불타도 또한 어떠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까닭에 불타의 최초 교설이 담겨있는 阿含經에는 이러한 궁극적인 문제와 그 당시의 다양한 견해등이 상세히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불타가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十四無記」「十難無記」등은 잘 알려진 것이며, 또한 불타는 당시의 견해를 宿命論·尊祐論·無因無緣論등으로 종합해 비판하고 있으며(중아함, 度經), 또 당시의 여러 사상을 62見으로 나누어 비판하고 있다(장아함, 梵動經). 이러한 비판은 불타시대에 이미 다양한 사상이 난립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며, 특히 無我說로서 아트만을 비판한 것은 전통적인 베다의 사상을 거부하는 강렬한 메시지이었던 것이다. 이 비판이 불교의 三法印 중의 하나인 諸法無我의 법인으로, 불타는 이미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이 무엇이며, 그것
이 인간에게 어떠한 고통을 수반하는지를 냉철히 파악하고 있었다. 불타는 그 아트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그 때 세존은 여러 비구에게 말했다. 色은 我가 아니다. 만약 색이 아니라면 마땅히 색에서 病苦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마땅히 색에 있어서 이와 같이 하고자 하거나 이와같이 하고자 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색에는 아가 없는 까닭에, 색에는 병이 있고 고가 생긴다. 또한 색에 있어서 이와같이 하고자 하거나 이와같이 하고자 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受想行識도 또한 그와 같다.(잡아함 No. 33)"
곧 불타는 현상의 사물, 즉 色 가운데 아트만이 있다면, 변하거나 바뀜이 없이 영원히 고정
된 것으로 변화되지 않을 것이지만, 실은 그러한 아트만이 없는 까닭에 변화와 고통이 생긴
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변화되고 고통이 일어나는 것은 곧 우리의 五蘊으로, 따라서 오온인 이 신체에는 아트만이 없는 것이다. 이 오온에 아트만이 없다는 것은, 일체는 불타가 각증의 세계에서 체득한 연기의 도리로 이루어져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곧 연기의 이치로 일체가 이루어졌음에도 아트만의 실체에 의해 세계가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서 고통이 발생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불타가 아트만을 안아트만(an tman) 즉 無我로서 부정하는 것은, 그 근저에 일체는 연기의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곧 일체는 서로 인연생기로서 결과를 갖는 것이지, 고정적인 실체가 원인·결과에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타는 연기를 설함으로서 당시의 주된 사상적 과제인 아트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그러나 불멸후 불교의 역사적 전개속에서 아트만과 같은 근본실체에 대한 문제는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 stiv din)에 이르러 「자성(自性, svabh va)의 실재」에 대한 문제로 바뀌었으며, 또한 이 실체적인 자성에 대한 반발이 초기대승불전 가운데 공사상의 천명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성의 개념을 용수도 더이상 방관할 수 없었으며, 더우기 불타가 설한 연기의 이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자성의 개념을 불교의 정통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용수의 중관사상은 불타 각증의 세계와 언표의 세계에 대한 분립을 이제설의 명확한 제시를 통해 통합시키고, 아울러 불타의 연기설을 재천명함으로서 불타의 본면목을 밝히고자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중관사상(中觀思想)의 역사적 전개
용수는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中論』외에도 다수의 저작을 남기고 있으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廻諍論』『空七十論』『六十頌如理論』『廣破論』『寶行王正論』『勸誡王頌』
『因緣心論』『菩提資糧論』『大智度論』『十住毘婆沙論』『十二門論』등을 들 수 있다. 하
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중론』으로, 이것은『중론』에 대한 주석서가 다수 제작되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용수 在世時에 제자로서 용수 사상을 선양한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리야데바( ryadeva, 제바 혹은 聖天이라고 함. 170~270경)와 라후라바드라(R hulabhadra, 200~300경)이다. 성제바는 용수의 사상을 선양하고 특히 外敎의 사상을 심하게 비판한 사람으로 유명하며, 그 격렬한 비판으로 인해 論敵에게 암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성제바는『四百論』『百論』『百字論』등을 남기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백론』은 용수의 『중론』『십이문론』과 더불어 중국에서 三論宗의 기본 전적으로 중요시 되었다. 라후라바드라는 용수와 성제바의 제자로서, 이미『중론』에 대한 주석서를 지었다고도 전해지지만 현존하지 않고, 그의 현존하는 저술로는『般若波羅蜜多讚』『法華讚』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 성제바와 라후라발다라는 용수와 함께 초기중관파로 분류되어지며, 용수의 사상을 선양하고 중관사상의 기틀을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용수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선양하여 중관파를 형성시키고 아울러 중관사상을 완성시키는데 기여한 사람들이 소위 중기중관파의 논사들이다. 그리고 이들 중기중관파의 논사들에게 공통되는 것이 모두 용수의 『중론』에 대한 주석서를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觀誓(Avalokitavrata,『般若燈論廣釋』의 저자)에 의하면『중론』의 주석가는 모두 8인으로, 용수 자신의 주석외에 붓다팔리타, 찬드라키르티, 데바샤르만, 구나슈리, 구나마티, 스티라마티, 바바비베카등이 주석서를 남겼다고 전하고 있다. 물론 한역으로만 전해지는 것으로 靑目釋의 『중론』과 無著의『順中論』등이 있지만, 실제 중기중관파로서 중관사상의 역사적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붓다팔리타, 바바비베카, 찬드라키르티이다. 이들의 생몰연대와『중론』에 대한 주석서는 다음과 같다.
불호 佛護(Buddhapalita: 470∼540경 C.E.) 근본중론주 根本中論註(M lamadhyamakav tti)
청변 淸辨(Bh vaviveka: 500∼570경 C.E.) 반야등론 般若燈論(Praj prad pa)
월칭 月稱(Candrak rti: 600∼650경 C.E.) 명구론 明句論(Prasannapad )
이 불호, 청변, 월칭의 각 견해는 후에 중관파를 두개의 학파로 구분할 정도로 용수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 사상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곧 그러한 사상적 차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월칭의『명구론』제1장 觀緣品으로, 월칭은 그의 저술 속에서 불호를 비판하는 청변의 견해를 다시 비판하여 불호의 견해를 옹호하고 있다. 즉『명구론』에 의하면 청변은 불호가 證因(hetu)이나 유례(喩例, d t nta)등 논리식의 전개를 등한히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월칭은 중관파가 스스로 자립적 논증을 행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며 청변을 비판하고 있다. 아울러 월칭은 청변의 緣起에 대한 이해와 또 청변이 주장명제에 「勝義에 있어서」라는 한정어를 붙이는 것 등에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명구론』에 보이는 이러한 비판은 근본적으로 용수의 이제설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청변과 월칭의 승의제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차이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청변의 견해를 보기로 한다. 청변은 승의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勝義는 2종이다. 첫째는 現行없이 일어나며, 출세간적이고, 無漏, 無戱論인 것이다. 둘째는 현행을 동반해 일어나 福德과 智의 資糧에 수순하고 淸淨世間智라 일컬어지며, 희론을 갖는 것이다.(中觀心註 思擇焰)"
이와같이 청변은 승의를 두종류로 나누며, 특히 청정세간지로서 일컬어지는 智를「聞思修로 얻어진 般若 智慧」라 부르며 그러한 반야지는「올바른 세속에 대한 簡擇」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세속에 대한 바른 이해는 승의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 청변은 「眞實의 樓閣에 오르는 것은 올바른 세속이란 사다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中觀心論頌 3-12)라고 말하고 있다. 즉 청변에게 있어서 세속에 대한 바른 분별력은 승의의 반야지를 얻는 수단이 되는 것으로 따라서 그러한 구체적인 수단으로서 논리식이 중시되어졌던 것이다.
이에 반해 월칭은 승의제란 모든 言說과 境界를 떠난 「無戱論의 勝義」만이 있을 뿐으로, 그것은 곧 正見의 境界라고 말하고 있다. 월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체법은 正見과 虛妄見에 의해 법이 성취되어지는 2종류를 취해야 한다. 정견의 경계는 진실(=승의제)이고 허망견은 세속제라고 설하셨다.(입중론 제6-23)"
즉 월칭에 의하면 승의제는 부처님 정견의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구체적인 언어로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언표 가능한 것이란 오직 세속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월칭은 세속을 眞實世俗과 非眞實世俗의 2종으로 나누며, 세간에서 일반인이 진실로 인정하는 진실세속은 聖者의 입장에서는 단지 唯世俗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세간적인 언표에 의해 승의가 표현되어진다고 하는 청변의 입장과 언표불가능이라고하는 월칭의 입장이 상호대립하여 나타나는 것이 중기중관파의 역사적 전개로서, 이러한 차이는 월칭의『명구론』에서 청변에 대한 비판을 통해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후대 티베트에서는 청변 계통을 자립논증파 自立論證派(Sv tantrika), 불호·월칭 계통을 귀류논증파 歸謬論證派(pr sa gika)로 命名해 분류하여 중관의 2학파로서 간주하고 있다. 중기 중관파에서 이와 같이 사상적 차이를 보이고 있는 二諦說은 후기중관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중관의 중심 개념으로서 이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람이 후기중관파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즈냐나가르바(J nagarbha, 8세기)로서, 그는『二諦分別論』이라는 저술을 지어 이제에 대한 바른 이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곧 『이제분별론』을 저술하는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二諦가 이미 구별되어 있음에도 大論師들 조차 어리석은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설에 어떠한 목적이 있겠는가. 그 까닭에 나는 이제를 구별한다.(제1송)"
이처럼 즈냐나가르바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이제에 대한 바른 이해는 역설되고 있으며, 그
것을 위해 그는『이제분별론』은 저술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이제분별론』의 저술에는 후
기중관파에 이르기까지 같은 불교내에서 서로 대립되었던 중관파와 유식파의 사상적 대립이
라는 역사적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그러한 사상적 대립은 청변과 월칭의 유식 비판
에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청변에 의한 유식비판에는 중관의 이제설과 유식의 三性說이 명
확하게 대립되어 나타나지만, 이러한 중관과 유식의 사상적 대립으로 인한 이제설에 대한 재정립이 중관파에게 요청되어졌으며, 그러한 사명을 수행한 사람들이 곧 후기중관파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즈냐나가르바는 『이제분별론』을 저술해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설을 통해 사상적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고자 한 사람이 후기대승불교의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샨타라크시다(Santara-ksita,ca.725-783)이다. 그는 이미『攝眞實論』(Tattvasamgraha)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지어 인도의 모든 사상을 불교의 입장에서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며, 아울러 주저인『中觀莊嚴論』을 저술해 자신의 사상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중관장엄론』은 전체 97게송과 자신의 주석으로 이루어진 저술로, 곧 샨타라크시타 자신의 이제에 대한 견해를 밝힌 저서이다. 그에 의하면 승의제란 구체적으로「戱論이 寂滅」된 상태를 가리키지만, 승의제가 나타나는 言表의 형식은 승의에 있어 무자성에 대한 논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일체법 무자성을 논증하기 위해 샨타라크시타는 불교이외의 모든 사상을 비판하며 또한 불교내의 사상에 대해서도 有部·經量部·唯識思想의 순서로 비판하여 일체법이 無自性·無我임을 논증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을 위해 그는 『중관장엄론』제1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自派와 他派가 설하는 일체의 존재는 진실에 있어서는 無自性이다. 一과 多의 자성을 떠나있는 까닭이다. 影像과 같이."
이것이 유명한「離一多性의 證因」으로 샨타라크시타는 이 증인을 사용해 승의에 있어 일
체법 무자성을 논증해 가며, 그리고 그러한 무자성이란 결국 무아라고 말하고 있다(92게). 즉 샨타라크시타에 이르러서도 무아, 무자성의 논증은 절대적으로 중시되며, 아울러 그러한 논증의 사상적 흐름은 붓다, 용수의 근본사상을 이어받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샨타라크시타의 사상적 영향은 그의 제자인 카말라실라를 비롯해 하리바드라, 캄발라, 지타리, 아티샤등으로 이어져 후기중관파로서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으며, 특히 샨타라크시타, 카말라실라, 아티샤등은 티베트 불교 교단의 확립에 중요한 공헌을 하는 까닭에 이 후기중관파의 사상은 불교가 인도에서 쇠망한 뒤에도 티베트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인도의 중관사상은 7세기 후반 인도를 여행한 義淨(635-713)에 의해 전해지고 있지만, 실제 용수의 사상에 대해서는 西域의 鳩摩羅什(344-413)이 용수의 저술을 번역하면서 알려지게 된다. 이 구마라집이 번역한 용수의 『중론』과 『십이문론』, 성제바의 『백론』은 삼론으로 중시되어 후에 三論宗으로 발전하게 되며, 특히 隋나라 吉藏(549-623)에 이르러 삼론종은 대성하게 된다. 길장은 앞의 세 논서에 대한 주석서를 포함해 전 26부에 달하는 저술을 남기고 있으며, 특히 중관의 기본 개념인 이제에 대해『二諦章』을 저술해 자신의 이제에 대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길장에 의해 대성한 삼론종은 당의 현장(602-664)이 전한 유식계통의 法相宗이 성행하면서 급격히 쇠퇴하게 되어, 삼론교학에 대한 연구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 삼론에 대해 고구려의 實法師·印法師·慧灌등이 연구하였다고 전해지며, 특히 혜관은 일본에 삼론종을 전달해 일본 삼론종의 初祖로서 추앙받게 된다. 신라에서도 元曉에 의해 『二諦章』『三論宗要』『中觀論宗要』등과 같은 중요한 중관 계통의 저술이 지어졌다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4. 나가르주나의 변증법
모든 사고나 견해는 한쪽에 치우친 것으로 필연적으로 내면적인 모순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사고에 의해 파악되는 것은 남김없이 배척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나가르주나는 생각했다. 나가르주나의 변증법이란 모든 견해나 주장이 내면적인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는 시도이다. 상대적인 것, 타에 의존하는 제약된 존재가 논리적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을 그는 폭로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사고를 초월하고 있는 까닭에 마침내 그것은 불확정적인 것으로서 이해하는 이외에 달리 길이 없다라고 나가르주나는 생각했다. 나가르주나의 변증법 속에 우리들은 이성에 대한 그의 조소를 발견할 수가 있다. 인간의 이성 혹은 사고에 대하여 그는 철저한 불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사물이 독립의 존재이기 위하여는 자성(自性, svabh va)을 가지지 않으면 않된다. 그리고 사물에 자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사물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물에 의존하고 있는 한 사물은 독립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현실의 문제로서 우리들의 인생에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신만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사물에는 자성이 결해 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tattva)은 그 자신만으로 존재하여 조금도 다른 사물에 좌우되지 않는다. 타트바에 대하여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 적정인 것, 산만한 논의(=희론)에 의해 부연되지 않는 것, 망상을 떠나 있는 것, 일의적인 것, 이것이 진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의 특징이다.(『중론』18-9)"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다른 사물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 자신만으로 존재한다. 이 존재를 이성 내지 사고를 통하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일체의 사물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과의 관련에 있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이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과 관련하여 존재하는 상태를 나가르주나는 <연기(緣起, pratitya-samutp da)>라 이름하였다. 전세계가 <관계의 그물> 속에 던져져 있어 본질적으로 연기이며, 따라서 비실재인 것을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는 것(=연기)을 우리들은 空性이라 이름한다. 그것은 비유적인 명칭이다. 그것은 곧 중도이다.(『중론』24-8)"
중관파의 논리에 의하면 이 세상의 일체 사물운 자성에 있어 공이다. 사물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생기한다. 그런 까닭에 <연기>가 바로 공의 의미이다. 그러나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 <비존재>, <그 둘> 및 <그 둘 모두 아닌 것>이라는 네가지 논점(四句分別)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이것들 네 개의 논점이라고 하는 네 개의 극단 즉 인간의 견해를 떠나 있다. 네가지 논점이라는 인간이 사고할 수 있는 일체의 사고 범주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여 그것을 백일하에 드러내고자하는 논리적 조작 곧 중관체계의 변증법이다. 나가르주나 자신은 인간의 모든 사상, 견해를 비판하고, 논적의 주장이 일면적인 것으로 더욱이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철저히 논박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어떠한 견해도 갖지 않고 어떠한 입장도 지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긍정적 주장에는 근거가 없으며, 일체 인간의 사고가 모순에 빠져있는 것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나가르주나는 “모든 견해가 공이다(『중론』13-8)”라고 하는 것을 명쾌히 논증했다. 그리
고 동일한 것이지만 ‘모든 견해의 방기(『중론』27-30)’를 강조했다.
이 목적을 위해 나가르주나가 사용한 이론적 무기가 그 독자의 변증법이다.
5. 공(空)의 철리(哲理)
『능가경』(sag tha, 167)에 의하면 “인식(buddhi)에 의해 식별되는 사물에는 자성이 확
정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그것들은 언어로써 표현이 불가능하고, 자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서 나타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구는 나가르주나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나가르주나는 이성 혹은 사고에 의한 사물의 이해를 단념했다. 왜 그는 이와 같은 이해를 방기한 것일까. 그는 사물을 <불생>으로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겨나지 않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생겨나지 않는 사물은 본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사고의 대상으로 하고, 그것들을 인식에 의해 확인하려고 하는 정신의 작업은 무익한 열정이다. 더욱이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 소멸한다고 하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다. 나가르주나가 <타트바>라 부르는 진실된 존재는 생기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이 타트바는 실로 불생인 까닭에 인간의 사고에 의해서는 결코 파악되지 않는다.
『중론』 서두의 문구로서 유명한 귀경게는 대담하게 八不을 선언한다. 팔불이란 사물의 <
소멸>, <생기>, <단절>, <영속>, <동일성>, <부동성>, <도래>, <퇴거>에 대한 부정이다. 사물은 결코 어느곳에서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나가르주나의 확신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결코 어느 곳에 있어서도 사물은 자기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것으로부터, 그 양쪽으로부터, 또 원인이 없는 것으로부터 생겨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1-1)”라고 선언했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 사물의 진정한 성질이다. 사물 그 자체는 “환영과 같으며, 꿈과 같으며, 건달바성과 같다. 생기도 그와 같고, 지속도 그와 같으며, 붕괴도 그와 같다고 예증된다(7-34) ”고 말하고 있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자성의 생기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자성은 왜 생기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결코 다른 사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15-2).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생사도 혹은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현재·미래는 상대적인 것으로, 독립의 존재는 아니다. 나가르주나는 시간을 부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전·이후·동시라고 하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데 생, 노 및 사에 대하여 어떻게 사람들은 산만히 논할 수 있겠는가.(11-6)
결국 자성에 있어서는 세계는 생겨나는 일도 없으며, 멸하는 일도 없고, 정지되어 있으며, 갖가지 상태로부터 자유롭다(24-38). 『중론』에 대한 주석인 『프라산나파다』에서 찬드라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존재자가 자성으로서 존재할 때에는 자성은 만들어진 것이 아닌 까닭에 또 그것은 사라지는 것도 아닌 까닭에 이 세계는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을 것이다. 세계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정지된 것과 같이 될 것이다."
중관의 체계에서는 현상계에서 자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세계는 자성을 결하고 있다. 사물의 성질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18-7)라고 나가르주나는 말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공(空)이다. 그러면 공이란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하여 찬드라키르티는 “다른 것에 의존해 있는 상태가 공이다. 따라서 공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프라산나파다』)”라고 말한다.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사물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물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만약 사물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타트바)이다. 그런데 일상적인 세계에서는 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성을 결하고 있다(24-38). 따라서 사물이 자성을 결하고 있는 것이 곧 공이다. 그리고 이 공이 사물의 생기와 소멸을 설명하는 원리 즉 연기인 것이다. 사물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에 의해 생기하는 것이 <연기>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고 하는 연기의 법칙은 공(空)을 뒷받침하는 공식으로 이해된다.
그런 까닭에 나가르주나는 “우리들은 연기를 공성(空性)이라 부른다. 그것은 비유적인 명칭이다. 그것이 곧 중도이다(24-18)”라고 말한다.
공에 기초하지 않으면 사물의 생기와 소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은 본래적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며 멸하는 것도 아니다.
나가르주나의 공의 철리는 이와같이 이중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6. 이중의 진리
이중의 진리에 관하여 나가르주나는 “두가지 진리, 즉 세속적인 덮힌 진리와 절대적인 진리에 기초하여 모든 붓다는 법을 설했다”(24-8)라고 말하고 있다. 최고의 진리(Param rtha, Paramaartha-satya, 眞諦, 勝義諦)란 사물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지식이다. 그것은 사고 내지 인식의 어떠한 작용도 미치지 않는 사고작용의 영역을 초월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에 대하여 덮힌 진리(俗諦, 世俗諦)는 상대적인 진리를 나타낸다. 만약 우리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표현한다면 최고의 진리는 열반이며, 덮힌 진리는 윤회이다.
최고의 진리에 입각하면 이 세상의 일체 사물은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늙어서 죽는 것도 없다. 사물이 생겨나고 멸하며, 인간이 늙어서 마침내 죽는 것은 최고의 진리에 관한 한 <덮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 <덮힘>을 제거하면 일체의 사물은 불생, 불멸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한 이 <덮힘>은 현실이다. 나가르주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포함해 일체의 사물을 공이라고 간주했지만, 현상상태로서 그것들의 실재를 결코 논박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 관한 한 나가르주나는 머리칼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꿈이나 환영과 유사하다. 눈을 뜨기까지 그것들은 가슴을 괴롭게 할만큼 현실이다. 그러나 일단 눈을 떠버리면 꿈은 아침에 생긴 이슬과 같은 것이다. 더 이상 꿈속에는 한 조각의 진리도 발견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는 연기의 법칙이 지배한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을 필요로 하며, 다른 것과의 관련에 있어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와같은 상태가 <덮힌> 것이다. <덮힘>이란 연기에 속하며, 본질적으로 다른 것에 제약을 받고 있다. 그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며, 다른 것을 필요로 한다.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일상생활을 중관파는 <관습>이라 이름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일상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그것은 세간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잠정적인 약속이다. 그것을 우리들은 세간의 말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덮힘>에 대해 찬드라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덮힘이란 모든 면으로부터 덮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지는 모든 면으로부터 모든 사물의 진정한 성질을 덮어 숨기는 까닭에 <덮힘>이라 말하는 것이다. 혹은 <덮힘>은 상대성으로서 상호의존을 의미한다. 혹은 또 <덮힘>은 결정(기호) 혹은 세간적인 관습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명칭과 명칭의 대상, 인식과 인식의 대상등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프라산나파다』p.492)
중관파의 체계에 관한한 <최고의 진리>와 <덮힌 진리>의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가는 무의미하다. <덮힌 진리>도 또한 진리이다. <덮힘>을 제거만 하면 최고의 진리는 자연히 드러난다. 만약 지성 내지 사고라고 하는 형식을 통하여 관찰하면 최고의 진리는 덮혀져 버리고 연기의 세계로 된다. 그러나 일체의 사고작용을 정지시켜 버리면 덮힌 세계도 그대로 최고의 진리, 혹은 열반으로 된다. 그런 까닭에 나가르주나는 윤회와 열반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라고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윤회와 열반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회와 열반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열반과 윤회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열반의 극한은 윤회의 극한이다.
그 둘 사이에는 조금의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25-19∼20)"
<덮힘>이 없으면 덮혀 감추어져 있는 진리를 드러낼 방법도 없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는 <덮힘>이 필요하다. 그런 까닭에 <덮힘>은 수단이며, <최고의 진리>는 목표이다. 일상
생활을 손상시킴 없이 매일매일의 생활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중관파의 가르침이다. 그런 까닭에 나가르주나는“일상적인 관습에 의존하지 않고 최고의 진리는 표현되지 않는다.”라고 선언했다.
[湯田豊『인도사상사』에서]
Ⅱ. 중론(中論)이란 무엇인가?
1. 中論이란...
2. 中論의 성립 배경
3. 中論의 주석서
4. 中論의 구성
5. 中論의 내용
6. 中論의 주요 사상
7. 中論의 영향
1. 中論이란...
中論은 오백 首(수)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龍樹보살께서 지으신 것이다. 中으로 이름을 삼아 그 實(실)을 조망하였고 論이라는 호칭을 붙여 그 말의 이치를 모두 나타내었다. 이름이 없으면 實을 알 수 없기에 中이라는 낱말에 의지하여 그 뜻을 펼쳐 보였고 풀이가 없으면 말이 그 이치를 나타낼 수 없기에 論이라는 낱말을 빌어서 그 뜻을 밝혔다. 그 實이 이미 펼쳐졌고 그 말이 이미 밝아졌으니 보살께서 道場(도장)에서 밝혀주신 이치가 밝디 밝아서 우리 중생들은 거꾸로 매달린 듯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중론은 4권으로 되었는데 중송(中頌, Madhyamaka-k rik , 中에 기초하는 詩頌)이라고도 불리운다.
〈중론〉은 대승 불교의 아버지 八宗의 祖師, 第 二의 부처라고 칭송되는 용수보살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용수는 불멸후 6, 7백년경, 즉 서력 기원 후 150-250년 경 인도 남부 지방을 무대로 대승 불교를 홍포하며 활약했던 大思想家이자 宗敎家이다. 용수 탄생 당시 인도 불교계에는 전문 수행인들을 위한 방대한 아비달마 불교가 20여 종의 교파로 난립되어 있었고 한편에서는 이에 불만을 품은 혁신적인 佛敎徒(불교도)들을 중심으로 대승경전의 편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 佛敎外的으로는 전통적인 바라문교의 六派哲學(육파철학)이 하나 둘 정비되어감과 동시에 대중적인 힌두교가 서서히 그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상계의 혼돈 속에서 不世出(불세출)의 사상가 용수는 탄생하였다.
용수는 수많은 저술을 통해, 本末(본말)이 아비달마 교학의 法有論的(법유론적)인 교리 해석에 메스를 가했을 뿐만 아니라 실재론적인 바라문 철학체계에까지 통렬한 비판을 퍼부었다. 용수의 세계를 받은 인도 불교는 결국 대승 불교로서의 꽃을 피우게 되었고 최고의 힌두 사상가 상캬(S khya)의 不二論(Advaita)철학 역시 용수의 사상을 모태로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中論>은 불교인들의 실재론적 교리 이해를 타파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용수의 저술 중 비교적 초기의 論書다. 그 당시 인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각 교파의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붓다 在世時(재세시) 교설된 교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노력을 벌이고 있었는데 교설 자체의 法相(법상)을 정밀하게 추구하다 보니 오히려 부처님께서 45년 간 설법하신 의도는 망각하고 그 문자에만 집착하는 愚를 범하게 되고 만다. 즉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을 위해 교시된 교법을 철저하게 신봉하다 보니 거꾸로 그 교법에 만은 속박되고 만다는 자가도착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아비달마적인 승원 불교를 小乘(소승)이라고 폄하시키며 등장했던 반야계 경전의 空(공)사상을 추구하는 대승 불교인들 중에도 인식의 진정한 淨化(정화)없이 空(공)사상을 수용하다 보니 空(공)을 실재론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부류가 생기게 되었다. 이를 후대 유식불교에서는 惡取空者(악취공자)라고 부르지만 용수가<中論>을 저술할 당시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고 <중론>에서는 이들을 대승 불교 내의 邪見人(사견인)이라고 부른다. <中論>은 이렇게 소승의 실재론적 교리 해석과 대승의 실재론적 空觀(공관)을 시정하기 위한 두가지 목적 河(하)에 저술되었던 것이다.
중국 三論學의 大成者인 吉藏(길장)의 中觀論疏(중관론소) 序文(서문)에 의하면,"羅什三藏(라십삼장)의 문하생인 曇影(담영)은 수십 명의 註釋家(주석가)가 있었고, 河西(하서) 道朗(도랑)은 70家가 있었음"를 듣고 있음이 보인다. 그러나 티베트의 기록에 의하면 '八大註釋家' 즉 용수(Klu-Sgrub)·불호(Buddhapalita, 470~540)·월칭(Candrakirti, 600~650)·제바설마(Devasarman, 5~6세기)·구방사리(Gunasari, 5~6세기)·덕혜(Gunamati, 5~6세기)·안혜(Sthiramati, 510~570)·청변(Bhavya, 500~570) 등 여덟 분이 주석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날 현존하는 주석서는, 450여게 모두를 해석한 것들(漢譯 3종, Tibet역 5종 이상, Sanskrit본 1종)과, 그 일부만 다루었던 것들 (漢譯 1종, 藏譯 3·4종)로 나누어 정리해 볼 수 있다.
偈頌 모두를 해석한 것으로 현존하는 주석서들을 성립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① 作者未詳이라고 의심되기도 하지만 용수의 自主로도 보아지는 『無畏疏(무외소)』(9C. 藏譯)를 비롯해, ② 靑目釋(청목석)인『중론』4권(5C. 초 漢譯), ③ 佛護釋(불호석)인『根本中疏(근본중소)』(藏譯), ④ 淸辯釋(청판석)인 『般若燈論釋(반야등론석)』15권(唐代漢譯, 藏譯), ⑤ 安慧釋(안혜석)인『大乘中觀釋論』(대승중관석론)18권(송대 한역), 그리고 7세기에 산스크리트語로 쓰여져 유일하게 현존하고 또 티베트어로 번역된 ⑥ 月稱釋(월칭석)인 『Prasannapada』淨明句論), ⑦ 中論本頌 (중론본송)그대로가 티베트역 되었다는 『藏譯別行中論本頌(장역별행중론본송)』등이다. 그리고 티베트의 宗喀巴(종객파) 全集(전집)에는 그가 주석했다는 『正理海(정이해)』가 포함되어 있지만 中論本頌(중론본송) 그대로의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中論本頌(중론본송)의 일부 品(품)이나 게송만을 주석한 것으로 無着釋(무착석)인 『順中釋(순중석)』2권(6C. 초 한역)이 현존하고, 최근 연구에 의해 德慧(덕혜)(5c. 말)가 일부게송의 全2句를 해석한 내용이나 提婆設摩(제파설마)의 『煖生論(정생론)』, 寂天(적천)(8c.)의 『入菩提行論(입보제행론)』과 이의 '細疏(세소)'에 일부 게송을 주석한 내용들이 밝혀졌다. 그리고 450여의 모든 게송을 해석한 위 주석서들로부터 게송들만 여섯가지를 뽑아내어, 한 눈에 비교할 수 있도록 앉혀 일본어로 번역하고 註를 달아 한 권으로 묶은 책이, 최근 筑波(축파)대학 三枝充悳교수에 의해 『中論頌總覽(중론송총람)』이라는 이름으로 출판(東京第三文明社 1985)되었다. 이책에는 『Prasannapada』로부터 추출한 범어게송과 두 가지의 藏譯頌들을 왼편에 두고, 靑目釋·淸辨釋(청변석)·安慧釋(안혜석) 등에서 보이는 세 가지의 漢譯 偈頌(게송)들을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4. 中論의 구성
중론은 모두 27장 448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관인연품(觀因緣品) : 연의 고찰(16게)
2. 관거래품(觀去來品) : 가는 것과 오는 것의 고찰(25게)
3. 관육정품(觀六情品) : 눈등의 지각 기관의 고찰(8게)
4. 관오음품(觀五陰品) : 집합체의 고찰(9게)
5. 관육종품(觀六種品) : 과의 고찰(8게)
6. 관염염자품(觀染染者品) : 탐욕과 탐내는 자의 고찰(10게)
7. 관삼상품(觀三相品) : 지어진 것의 고찰(34게)
8. 관작작자품(觀作作者品) : 행위와 행위자의 고찰(13게)
9. 관본주품(觀本住品) : 선행자의 고찰(12게)
10. 관연가연품(觀燃可燃品) : 불과 연료의 고찰(16게)
11. 관본제품(觀本際品) : 전후의 궁극의 고찰(8게)
12. 관고품(觀苦品) : 고의 고찰(10게)
13. 관행품(觀行品) : 형성작용의 고찰(8게)
14. 관합품(觀合品) : 연합의 고찰(8게)
15. 관유무품(觀有無品) : 자성의 고찰(11게)
16. 관박해품(觀縛解品) : 속박과 해탈의 고찰(10게)
17. 관업품(觀業品) : 업과 과보의 고찰(33게)
18. 관법품(觀法品) : 아뜨만의 고찰(12게)
19. 관시품(觀時品) : 시간의 고찰(6게)
20. 관인과품(觀因果品) : 집합의 고찰(24게)
21. 관성괴품(觀成壞品) : 생성과 괴멸의 고찰(21게)
22. 관여래품(觀如來品) : 여래의 고찰(16게)
23. 관전도품(觀顚倒品) : 뒤바뀜에 대한 고찰(25게)
24. 관사제품(觀四諦品) : 성스러운 진리의 고찰(40게)
25. 관열반품(觀涅槃品) : 열반에 대한 고찰(24게)
26. 관십이인연품(觀十二因緣品) : 십이지의 고찰(12게)
27. 관사견품(觀邪見品) : (잘못된)견해의 고찰(30게)
5. 中論의 내용
27품 중 첫 번째 품인 관인연품의 16게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1. 어떤 것이든, 어디에서든, 자기로부터, 타자로부터, 그 둘로부터, 또는 무원인(無原因)으로 부터 존재자가 발생하는 일은 없다.
2. 오직 네가지 연(緣)만 있을 따름이니, 인연(因緣), 소연연(所緣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증상연(增上緣)이 그것이다. 다섯 번째 연(緣)은 없다.
3. 존재자의 자성(自性)은 연 따위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이 없다면 타성(他性) 또한 없는 것이다.
4. 작용은 연(緣)을 갖는 것도 아니며, 연(緣)을 갖지 않는것도 아니다. 연은 작용을 갖는 것도 아니며, 작용을 갖지 않는 것도 아니다.
5. 그것들에 연해서 이것들(다른 것들)이 생겨나므로 그것들을 연(緣)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다른 것들)들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들은 비연(非緣)이라 하지 않겠는가?
6.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 연도, 결과가 존재하는 연도 모두 타당하지 않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연이 그 무엇의 연이 될 수 있겠으며, 결과가 존재한다면 연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7. 존재하는 사물(dharma, 法)도, 존재하지 않는 사물도,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사물도 산출되지 않는 것이니, 그럴진대 어떻게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이 타당하겠는가?
8. 존재하는 사물은 소연연을 갖지 않는다고 교시되었다. 사물이 소연연(所緣緣)을 갖지 않는다면 소연연이 있어 무엇하겠는가?
9. 사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소멸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물이 소멸했다면 연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러니 등무간연(等無間緣)은 타당하지 않다.
10. 자성이 없는 존재자는 존재성이 없으므로 "저 것이 존재할 때 이 것이 존재하게 된다."는 진술은 타당하지 않다.
11. 연들이 분리돼 있든, 결합돼 있든, 그 속에 결과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연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연에서 나온다 할 수 있겠는가?
12. 만약 결과가〔연속에〕존재하지 않는데도 연에서 나온다 한다면, 어찌 비연(非緣)에선 나오진 않겠는가?
13. 결과는 연으로 만들어지지만 연은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으로 만들어진 결과가 어떻게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에서 생겨 날수 있겠는가?
14. 그러므로 연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도, 비연(非緣)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도, 모두 존재한지 않는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거늘 연이나 비연은 어디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제 1 관인연품을 통해 용수는 아비달마적인 연기설인 사연설(四緣說)을 비판하는 것이다. 즉 緣起法으로 緣起法을 논파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空사상의 白眉인 空空사상과 軌를 같이한다. 즉 모든 개념에 대해 空으로써 논파하지만 그 空을 다시 實體視하면 문제가 되기에 空空이라는 自淨的선언을 통해 惡取空을 경계하듯이 용수는 진정한 연기관에 입각해 邪見을 논파하지만 그 邪見중에는 그릇된 연기 이해, 즉 실체론적 연기관도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제 2 관거래품 이후 다양한 因果雙, 즉 가는 주체와 그 작용, 눈과 그 대상, 불과 연료, 행위와 행위자, 탐욕과 탐욕의 주체, 前刹那의 五蘊과 後찰나의 오온 등을 십이연기설에서 채득한 <中道 因果論>에 입각해 하나하나 검증하며 논파함으로써 대승적인 法空 思想을 선양한다. <중론>후반부로 가면서 有無, 如來, 成塊, 涅槃, 四諦 등 2차 개념으로 그 논의의 소재가 바뀌지만 논파하는 논리는 역시 중도 인과론에 입각해 있다. 마지막으로 제27 관사견품을 통해 정형적인 私見 즉 無記設의 계기가 되는 여러 가지 難問(난문)에 대해 논의하면서 제 1 관인연품 귀경게에서와 유사한 歸敬頌으로 <중론>을 끝맺고 있다.
6. 주요 사상
중론의 중요사상의 核(핵)은 한마디로 <緣起> 사상이다. <중론> 第 1 관인연품 서두의 歸敬咽 (귀경게) 통해 용수는 八不이 <緣起>의 진정한 의미라고 선언한다. 용수 당시 아비달마 교학에서는 부처님 교설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는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設)이건 생학적 인과설이건 단순한 인과 관계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인과설은 불교뿐만 아니라 상캬(S khya), 와이셰시까(Vai e ika) 등 외도들도 공유하는 사상이었다. 상캬 학파에서는 쁘라끄르띠(Prakrti)라는 原質(원질)속에 결과로서의 만사가 내재한다는 인중유과설(因中有果說, satk ryav da)적인 인과론을 주장했으며 와이셰시까 학파에서는 결과란 원인과 단절되 있다는 인중무과설(因中無果說, asatk ryav da)적인 인과론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단순한 인과론이 연기의 의미일 수는 없다. <중론>에서는 인중유과론적인 인과론은 상견(常見)이라고 비판하고 인중무과론적인 인과론은 斷見(단견)이라고 비판하면서 그런 극단적이 견해를 떠난 <중도적인 인과론>이 연기의 진정한 의미라고 천명한다. 이렇게 <연기>가 <중도적 인과 관계>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표한한 구절이 바로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거불래 불일불이인 연기"라는 귀경게의 선언인 것이다.
①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삼라만상은 인연의 있고 없음에 따라 생멸변화 할 뿐이요, 현상 그 자체에는 아무런 자성(自性) 즉 실체성이 없음을 말한다. 예를 들면 노끈은 삼과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시적 거짓에 불과하며 노끈이라는 고정적인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노끈의 생멸이란 것은 노끈의 자성을 인정한, 노끈의 자성을 중심으로 한 인식상의 분별망념일 뿐이요, 실체로서의 노끈은 생한 적이 없었으며 또한 멸하는 바도 없는 것이다. 본래 무생(無生)이다.
② 불상부단(不常不斷)이란 윤회상에 있는 중생의 몸과 영혼은 항상하지 않음을 말한다. 우유가 발효되어 버터나 치즈가 되었을 때, 버터나 치즈에는 우유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전생(前生)과 내생(來生)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우유가 없이는 버터나 치즈가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③ 불거불래(不去不來)란 진리의 당체는 가고 오는 체성(體性)이 아니며 시방에 편만한 채 한결같이 변함없는 여여부동(如如不動)임을 말한다. 만일 법성(法性)에 가고 옴이 있다면 일체 존체와 그 생멸변화에 대해서 시방에 일관하는 상주법성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④ 불일불이(不一不異)란 연기(緣起)로 생한현상적 존재들은 독립체로서 고정적인 자성을 갖고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나타난 거짓 상일 뿐이다. 그 존재들의 참성품은 동일한 진여법성으로서 하나이다. 그러므로 현상적 존재들의 서로 다르지 않다. 별개의 존재가 아닌 한몸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하나도 아니면서 다르지도 않다.
이와 같이 팔부중도(八不中道)는 어리석고 삿된 견해를 끊어 없애는 바른 가르침이다. 따라서 팔부중도의 참뜻을 알면 일체의 어리석고 삿된 견해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팔부중도라는 생각까지도 그 안에서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즉 십이연기의 삼세 양중 인과 관계가, 더 나아가 각 支分(지분) 간의 인과 관계가 <중도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기에 대한 중도적 파악은 물론 용수의 창안은 아니다. 원시경전에서 산설된 여러 가지 유형의 연기설은 자칫 단순한 인과 관계로 오해할 소지가 있는 經文도 있지만 斷(단)·常(상)이나 有(유)·無(무)의 양극단을 떠난 中道(중도)로서 연기를 설한 經文 역시 적지 않다. 또 斷見(단견)과 常見(상견)등 邪見(사견)으로 인해 발생하는 十四難問(십사난문)에 대한 無記答(무기답)과 관계시켜 연기가 설해진 경문도 많이 보인다. 아비달마 논서에서도 사견으로 인한 癡心(치심)의 對治法(대치법)으로 연기관을 처방한다. 용수는 이러한 경문(經文)에 의지하여 연기설의 진정한 의미를 포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설에 알아보면 불교는 모든 것이 일어나는 원인을 아는 것과 그 결과로 나타난 모양을 아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며, 그 아는 방법을 두 가지로 나누어 진제와 속제라 부르고 있다. 진제는 여러 경전에서 승의제·최승의제·제일의제라 하였으며 세속을 초탈한 세계의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속제는 세속제·세제라고도 하여 세간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에 무슨 세간적이니 출세간적이니 하는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을 할 수도 있으나 쉽게 말해 속제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진리, 즉 모든 것은 인(因)과 연(緣)으로 이루어진 과(果)이며, 이것은 생멸의 원리로 되어 있으며 생멸은 공의 상태이며 신진대사의 원칙에 따르고 있다는 등의 비교적 초보적인 것을 말한다. 진제는 이와 같은 원칙을 기준으로 해서 점차로 고차적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체를 부정하고 언어를 초월하며 불생불멸하고 비인비과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7. 中論의 영향
용수의 중론은 대승불교에 이론적 기초를 부여하였음은 물론 대승불교의 사상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인도에서는 중론을 중심하여 용수학설을 조종으로 삼아 중관학파(中觀學派 Madhyamika)가 흥기하고 이에 반하여 무착 세친을 중심한 유가행파(唯伽行派 Yogacara)가 일어나 인도대승불교의 쌍벽을 이룬 2대사상 조류의 대맥이 되었다.
이러한 중관학파에서도 불호(佛護 Budhapalita 470∼540)가 중론해석을 시도하였으며 이것을 다시 비판한 청변(淸辯 Bhavaviveka 490∼570)의 자재논증파(自在論證派)와 불호를 옹호하고 나온 월칭(月稱 Candrakirti 600∼650)의 필과성공파(必過性空派)의 양파로 분열되었으며, 이 양파들은 서로 달리 공(空)의 사상을 전개하여 적극적인 논증식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특히 월칭은 추론을 배척하여 과오부수(過誤附隨 Prasanga)의 교묘한 부정논법을 종횡으로 구사하였다. 그 이후 이 양파의 중간적인 것이 유가행파와 혼합하여진 것이 나타나 티벳으로 이입되어 황모파(黃帽派)의 촌가파(Tson-kha-pa) 교학을 이루었다.
유가행파의 무착(武着 Asanga 310∼390)은 중송을 주석하여 순중론(順中論)을 저술하였고, 세친(世親 Vasubandhu 330∼390)은 불성론(佛性論)에 중론을 많이 인용하였다. 특히 안혜(安慧 Sthiramati 470∼550)는 대승중관석론(大乘中觀釋論)을 저작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중송을 해명하려하였다. 본래부터 유식설은 중론의 공의 사상을 계승하므로 이 현실세계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한것이며 그들의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논증은 삼계유식설(三界唯識說)이나 삼무성설(三無性說)로 유명한 것이 있다.
청목주석의 중론이 중국에서 구마라집에 의하여 번역된 것은 중관파학문의 새로운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중국인이 소유할 수 없었던 사유방법이 생기한 것이다. 즉 무의 체계적이 논리가 전개된 것이다.
이 중론이 불교사상에 남긴 업적은 空·假·中의 논리이며 이것은 연기·무자성·공의 변증법적인 논리의 구현과 동시에 통일의 논리를 극명한데 있다. 헤겔의 삼단논법인 正·反·合의 논리의 시원도 용수의 중론·十二문론에서 전개된 논리이며, 제바의 백론에서 추론된 불교의 통합의 논리인 것이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의 모순을 부정하는 것이지, 현실세계의 현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하는 불합적이고 불윤리적이고 무궤도적인 생활양상을 부정함도 물론 파사현정의 현존을 여기에 있게끔하려는 것이 삼론학파의 신앙이며 논리전개의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삼론종에 대해 알아보면 삼론종은 용수(龍樹)의 《중론(中論)》과 《십이문론(十二門論)》, 제바의 《백론(百論)》을 소의(所依)로 성립된 종파이다. 성종(性宗)·공종(空宗)·파상종(破相宗)이라고도 한다. 중국에 삼론을 전하고 번역했던 인물이 구마라집(鳩摩羅什, 355∼413)이기 때문에 그를 삼론종의 개조로 삼고 있다. 이후 도생(道生 355∼434)·담제(曇濟)·도랑(道朗)·승전(僧詮)·법랑(法朗, 507∼581)·길장(吉藏, 549∼623)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법맥이 상승(相承)되었다.
삼론종에서는 길장 이전을 고삼론(古三論), 이후를 신삼론(新三論)이라고 하는데 일부 학자는 승랑 이후를 신삼론이라고도 한다. 승랑은 고구려인으로 구마라집 문하에서 교학을 배워 《삼론종(三論宗)》을 썼고 양무제에게 대승법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삼론종의 교학은 파사현정(破邪顯正)·진속이제·팔부중도(八不中道)의 삼과(三科)를 기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별로 인해 일어난 무명을 제거하는 파사(破邪) 그대로가 현정(顯正)이라고 하며 중생을 위하여 세속의 가르침으로 제일의(第一義)의 진리를 설하는 진속이제를 제시하고 있다. 팔부중도는 《중론》의 첫머리에 나오는 '생멸거래 일이단상'의 여덟 가지 미혹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길장은 또 삼론종에서 비진비속의 중도의를 불성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길장에 의한 삼론종의 교판은 이장삼륜(二藏三輪)이 있다. 이장은 성문장(聲聞藏)·보살장(菩薩藏)이고 삼륜은 근본법륜·지말법륜·섭말귀본법륜을 말한다.
삼론종의 대성자인 길장은 특히 승랑을 중시하여 섭산대사·섭령대사·대랑법사 등으로 칭하였다. 승랑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학승으로 삼론을 공부했던 인물로는 고려의 실법사·인법사·혜관 등이 있다. 혜관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삼론종의 초조가 되기도 하였다.
< 중론송의 내용과 사상 개관 > (김 철)
1. 중론송(中論頌)의 내용(內容)
중론송은 대승반야공관(大乘般若空觀)이야 말로 근본불교정신인 '연기(緣起)·무아(無我)·중도(中道)'를 가장 옳게 실현하는 것으로 보고, 이 공관에 입각한 특수부정논리 즉 양도론법(兩刀論法)이나 오구문파(五求門破)와 같은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논리 이론으로, 불타(佛陀)의 진의를 알지 못한채 교리 개념만을 집착·분별·회론하는 잘못들을 냉엄 철저히 파척(破斥) 불식하였다.
즉 당시 불교계에 정형화된 중요한 교리개념 대부분을 27 품목으로 거론하여, 이들을 실체 실유시(實有視)하여 분별(分別) 희론하는 사견(邪見) 오류(誤謬)를 없애버리고자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특수형식의 논리를 구사하거나, 이 냉엄한 부정비판 끝에 마침내 도달하는 참다운 진리세계인 양극(兩極)초월의 중도정법(中道正法)이 열려짐을 밝혀 나가는데, 이러는 동안 '제법일체는 왜 공(空)하며, 또 어째서 불생불멸(不生不滅 ,無生無滅)인가'에 대한 까닭이나,'일체개공(일切皆空)이 왜 강조되며, 이 공(空性)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내용등을 밝혀내기도 한다.
그 27품목(品目)은 (인·연(緣)·과(果)·오온·십이처(십二處)·십팔계(十八界), 육계(六界),유위(有爲), 무위(無爲), atman, pudgala, 시간, 탐욕, 번뇌, 전도, 고(苦), 십이지(十二支), 사구(四句) 사유(思惟), 생사윤회(生死輪廻), 심지어 여래(如來)·열반마저) 거론하여 철저하게 비판 부정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27품(品) 중 관법품(觀法品) 제18에서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진실의 특징, 진리성·법성(法性))은 아(我)·아소(我所)의 관념을 여읜 희유인(希有人)에게만 보이고, ,심행언어단 , 적멸무희론(寂滅無戱論)·무이무분별(無異無分別)인 것이라거나, 불일역불이(不一亦不異) 불상역부단(不常亦不斷)인 것, 이것이 감로(甘露)와 같은 세존교설의 정법(正法)이라고 주장하여 중도실상(中도實相)의 정법(正法)세계를 경쾌히 밝혀내기도 한다. 특히 관사체품(觀四諦品) 제24에서는, '일체개공(一체皆空)'의 공성(空性)에는 '공용(空用)·공성(空性)·공의(空義)'의 세 내용을 갖고 있다거나, '공성에 의해 일체법이 성립한다', '여래(如來)는 중생을 위해 이체(二諦)( 세속제와 제일의체(第一義諦) 곧 공(空)에 의해 설법하신다', '중인연생법(衆인연生法)은 공성(空性)이요 가명시설(假名施設)이며, 중도(中道) 실상(實相)이다'등을 주장하기도 한다.
Ⅱ. 중론의 구성 품명(品名) 및 게수(偈數))
이상과 같은 중론송을 이루는 각 품의 대체적인 내용과 함께 그 구조를 살펴보기로 한다.
오늘날 용수의 중론게송은 그에 대한 주석서를 통하여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청목(靑目 Pi gala 4세기 전반)이 주석한 것을 5 세기 초에 구마라집(鳩摩羅什 Kum rajiva 344-414)가 한역한 중론 4 권 과 청변 ( Bh vaviveka, 470 -540 년경)의 주석을 당대의 천축 사문(大唐 中印度三藏) 바라파밀다라(波羅頗蜜多羅 Prabhakaramitra)가 한역한 것( 반야등론석 )
그리고 안혜(安慧 Sthiramati,510-570년경)가 주석한 것을 송대의 惟淨 과 法護가 한역한 것 18 권 ( 대승중관론석 ) 등이 있다.
그 외 산스크리트 본으로 월칭석 Prasannapada( 7 c 산스크리트) 기타 티벳역 (월칭 석), 티벳역 무외소 불호석 청변석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청목(靑目 Pi gala 4세기 전반)이 주석한 것을 통해 그 품명을 나열하고 게송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로 다른 주석본에 나타나는 해당 품목과 게송수를 다음과 같이 약어형태로 표시한 뒤 품명중 중심 단어만을 옆에 명기하기로 한다.
========================================================================
<기호설명>
청목석을 기준으로 품명을 적은 뒤
<변> - 청변석
<안> - 안혜석
<월> - 월칭석 Prasannapada
<장> - 티벳역 월칭 석
<무> - 티벳역 - 무외소 불호석 청변석을 나타낸다.
품명은 그 가운데 논의 대상을 나타내는 중심 단어만을 옆에 명기하기로 한다.
옆의 숫자는 게송수를 나타낸다.
========================================================================
각품의 요지
귀경게(歸敬偈) 2 게
제법은 불생불멸(不生不滅)‥‥불래불거(不來不去)이다. 이처럼 희론을 없애고 길상(吉祥)(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인 연기(緣起)를 설해주신 정각자(正覺者)께 나는 예배한다.
1. 관인연품 제1 (16게)
<변>연(緣) 16 <안>연(緣) 16 <월>Pratyaya 연(緣) 14 <장>연(緣) 14 <무>연(緣) 14
제법(諸法)은 사종불생(四種不生)이다. 연(緣) 사연(四緣)은 무자성(無自性)이어서 성립하지 않고, 결과(結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연(緣) 비연(非緣)도 없다.
2. 관거래품 제2 (25게)
<변>거래(去來) 25 <안>거래(去來) 21 <월>Gata - gata 거래(去來) 25 <장>거래(去來) 25 <무>이거(已去) 미거(未去) 왕(往)(거시(去時) 25
과거 (過) ·현재 (現)·미래(未)의 삼시(三時)중 거(去)(운동·감)이 없다.
삼시(三時)중 거(去)의 시발(始發)도 지식(止息)도 없다.
거용(去用)과 거(去)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이다.
거자(去者) 거용(去用) 소거처(所去處)는 없다.
3. 관육정품 제3 (8 게)
<변>육근(六根) 8 <안>육근(六根) 8 <월>Cak ur di -indrya 안등근(眼等根) 9
<장>근(根) 9 <무>처(處) (입入) 8
안(眼)은 자신을 못 봄으로 타물(他物)도 못보고 삼시(三時) 중에도 봄이라는 것은 불성립한다. 따라서 견자(見者)도 없다. 능견(能見) 소견(所見) 없으므로 식촉수애취(識觸受愛取)역시 耳鼻舌身意등 육근(六根)의 나머지도 이와 같다.
4. 관오음품 제4 (9게)
<변>오음(五陰) 8 <안>오온(五蘊) 10 <월>Skanda 온(蘊) 9 <장>온(蘊) 9 <무>온(蘊) 9
색(色)과 색과 그 원인 ( 작인(作因) 즉 지수화풍의 사대(四大)은 서로 떠나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 그 어느 쪽이 원래 먼저 존재하거나 원래 없거나 한 것도 아니며, 서로 상사(相似) 불상사(不相似)도 아니다. 수상행식(受想行識)이나 일체법(一切法)도 이와 같다.
서로 문답을 주고 받을 때는 공(空)으로 논파(論破) 힐난(詰難)해야만 과실이 없게 된다.
5. 관육종품 제5 (8게)
<변>육계(六界) 8 <안>육계(六界) 9 <월>Dh tu(界) 8 <장>계(界) 8 <무>계(界) 8
허공(虛空)은 유(有)도 무(無)도 아니고 상(相)(모습) 도 가상(可相-상을 맺힐 대상)도 없다. 지수화풍식(地水火風識) 모두 그렇다. 제법(諸法)의 유무(有無)를 보는 것은 천박한 지혜자가 하는 것이며 이런 자는 멸견(滅見)의 안온법(安穩法)을 보지 못한다.
6. 관염염자(染染者) 제6 (10게)
<변>염염자(染染者) 10 <안>염염자(染染者) 9 <월>R ga -rakt 염 염자(染 染者) 10
<장>염(染)·염자(染者) 10 <무>염법(染法)·염자(樂者) -(탐욕 탐자). 10
탐욕(貪欲)과 탐욕하는 자는 전후(前後)하는 것도 아니고 동시(同時)일 수도 없고 불일불이(不一不異)이므로 합(合, 同) 불합(不合, 不同)은 성립하지 않는다. 일체도 결합(結合) 불합(不合)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7. 관삼상품 제 7 (35게)
<변>유위상(有爲相) 33 <안>유위(有爲) 33 <월>Sam k ta(有爲) 34
<장>유위(有爲)생주멸(生注滅) 34 <무>생주멸(生注滅) 34
유위(有爲)의 삼상(三相)인 생(生)· 주(住), 멸(滅) 각각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유위(有爲)는 존재하지 않고 또한 무위(無爲)도 없다. 삼상(三相)은 환(幻) 몽(夢) 신기루 (건달바성)과 같다.
8. 관작작자품 제8 (12게)
<변>작자업(作者業) 11 <안>작자작업(作者作業) 12 <월>Karma -k raka 업(業) 작자(作者) 13
<장>업(業)·작자(作者) 13 <무>업작자(業作者) 13
행위(업)와 행위자(작자) 각각은 사구사유(四句思惟)로 관찰해 볼 때 별개적 실체가 아니고 서로 연(緣)하는 것들이다. 수(受)와 수자(受者)도 이렇게 관찰하라. 일체법에도 이렇게 관찰하라
9. 관본주품 제9 (12게)
<변>취자(取者) 11 <안>선분위 11 <월>P rva 선주(先住) 12
<장>선주 12 <무>취자취(取者取)(수수자(受受者) 12
안(眼)등 육근(六根)이나 고락(苦樂)등을 소유하는 주체는 안(眼) 수(受)에 선행(先行)즉 본주(本住)하지도 않으며 또한 동시로도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유무로 분별(分別,想定)함도 정지된다.
10. 관연가연품 제10 (16게)
<변>신화(薪火) 15 <안>신화(薪火) 15 <월>Agni -indhana (화신) 16
<장>화(火)·신(薪) 16 <무>화신(火薪) 16
화(火)와 신(薪-땔감)은 불일불이(不一不異)요 의존(依存) 비의존(非依存)도 아니며 삼세중에 존재하지 않음이요 오종추구(五種追求)로 관찰할 때도 불가득인 것들이다. 여기서 오구문파(五求門破)의 논리가 나타난다. 오구문파는 일체의 모든 것들에 대해 (1) 상호간 서로 같은 것인가. (2) 서로 다른 것인가. (3) 어느 하나는 다른 하나를 갖고 있는 것인가. (4) 어느 하나 안에 다른 하나가 있는 것인가. (5) 반대로 다른 하나에 그것이 있는 것인가를 관찰해 -오종추구(五種推求)하여 동일(同一) . 별이(別異) , 소유(所有), 상호(相互)간 서로에게 내재(內在)함을 모두 부정함으로서 그 실체적 존재성을 부정하는 논리방식이다. 이 비유로 불변자성의 실체인 아트만과 취(取)(제법)관계나 일체법에 실체 없는 관계가 밝혀진다.
11. 관본제품 제 11 (8게)
<변>생사(生死) 8 <안>생사(生死) 8 <월>P rva -aparako,ti ( 전(前) 후제(後際) )
<장>본제(本際) 8 <무>윤회(輪廻) 8
생사윤회에 시종의 극한(본제((本際)도 그 중간도 없으므로 이들에게 전후 동시(共-동시)의 순서는 불성립한다. 인(因)과 과(果)나 상(相)과 가상(可相) 및 수(受)와 수자(受者) 사이들도 이와 같다.
12. 관고품 제 12 (10 게)
<변>고(苦) 9 <안>고(苦) 10 <월>Duhk a 10 <장>자작(自作)· 타작(他作) 10 <무>고(苦) 9
고(苦)는 자작(自作)으로도 타작(他作) 공작(共作) 무인작(無因作)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苦) 뿐만 아니라 그 밖 일체 만물에게도 이 네가지 내용이 적용된다.
13. 관행품 제13 (9게)
<변>행(行) 8 <안>행(行) 8 <월>Sa sk ra 8 <장>행(行) 8 <무>진성(眞性) 8
세존께서 제행(諸行)을 허망(虛妄)하고 변이(變異)하며 무자성(無自性-자신의 영구 불변 고정된 실체성이 없음)인 것이라고 설하심은 공(空)함을 밝히기 위함이다.
공(空)함은 제견(諸見)을 버리고 떠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에 오히려 집착하면 부처님도 교화시킬 수 없다.
14. 관합품 제 14 (8게)
<변>합(合) 7 <안>합(合) 8 <월>Sa sarga (결합(結合) 8 <장>합(合) 8 <무>합(合) 8
능견(能見- 봄) 가견(可見- 볼 것, 볼대상) 견자(見者-보는 주체)나 염(染-(번뇌에)물들음) 가염(可染-물들여질 대상) 염자(染者-물들이는 주체)는 셋으로도 둘로도 화합 않는다. 번뇌(煩惱) 및 다른 감관(入 -육입 眼耳鼻舌身意 6가지 감관)도 이렇다. 일법(一法)도 이법(異法)도 합하지 아니하며 합자(合者- 합하는 이) 합시(合時- 합하는 때) 합법(合法- 합하는 법) 모두 없다.
15. 관유무품 제 15 (11게)
<변>유무(有無) 11 <안>성(性) 11 <월>Svabh va 자성(自性) 11 <장>자성(自性) 11 <무>유무(有無) 11
자성(自性)도 타성(他性)도 인연(因緣)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이들의 유(有-존재) 무(無)도 성립하지 않는다. 자성 타성으로나 유성(有性) 무성(無性)으로 보면 불교의 참 뜻을 보지 못한다. 유견(有見) 상견(常見-항상하다는 견해) 무견(無見) 단견(斷見-아주 없다는 견해)의 잘못이다.
16. 관박해품(觀縛解品) 제16 (10게)
<변>박해(縛解) 10 <안>박해(縛解) 10 <월>Bandhan mok a 박해(縛解) 10
<장>박해(縛解) 10 <무>박해(縛解) 10
제행(諸行)은 윤회(輪廻)하지 않는다. 푸드갈라(윤회하는 주체)는 온(蘊) 처(處) 계(界) 가운데 오종으로 추구해봐도 없다. 이들은 생멸하는 것 속박되지도(縛) 해탈되지도(解) 않는다. 속박은 삼세가운데 없다.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은 무이(無二) 무분별(無分別)이다.
17. 관업품 제17 (33게)
<변>업(業) 33 <안>업(業) 31 <월>Karma -phala 업(業)·과(果) 33
<장>업(業)·과(果) 33 <무>업과(業果) 30
업(業)도 행위주체도 없는데 그 과보나 과보를 받는자가 있겠는가? 그 각각의 실재성이나 영원불변의 실체성은 없다. 모든 번뇌 모든 업(業) 작자(作者- 짓는 주체) 과보는 환(幻-환상 허깨비)와 같고 꿈(夢)과 같고 염(炎-아지랭이), 향(響-메아리)와 같이 실체가 없는 것이다. .
18. 관법품 제 18 (12게)
<변>법(法) 12 <안>법(法) 10 <월>Atma (我) 12 <장>아(我) 12 <무>아법(我法) 12
아(我-나의 실체) 아소(我所)를 멸하면 무아지(無我智-나의 실체 없음의 지혜)를 얻고 이렇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매우 드물며 제법의 참모습(實相)을 본다 제법실상은 마음과 언어가 끊긴 상태이고(心行言語斷) 무생무멸(無生無滅)이며 열반(涅槃)과 같다. 불일불이(不一不異) 불상부단(不常不斷)이 모든 부처님의 감로(甘露)와 같은 가르침이다.
19. 관시품 제 19 (6게)
<변>시(時) 6 <안>시(時) 6 <월>K la 시(時) 6 <장>시(時) 6 <무>시(時) 6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은 (그 실재성, 실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중하(上中下)나 일이(一異- 동일함과 다름)도 그렇다. 시주(時住-시간의 머무름) 시거(時去-시간의 감) 역시 얻을 수 없으니(不可得) 시간의 모습(時相)도 없다. 물건에 인(因)하여 시간이 있으나(因物有時) 물건도 있는 바가 없으니(物無所有) 어찌 시간이 있으리.
20. 관인과품 제 20
<변>인과(因果) 23 <안>인과(因果) 20 <월>Sa agr 24 <장>집합(集合) 24 <무>인과(因果) 24
삼세중 각 원인(因)은 삼세중 각 결과(果)와 화합하지 않는다. 인과(因果)는 불일불이(不一不異) 화합 불화합으로는 결과를 낳지 않는다. 연(緣) 과(果) 화합(和合)은 존재하지 않는다.
21. 관성괴품 제21 (20게)
<변>성괴(成壞) 21 <안>성괴(成壞) 16 <월>Sa bhaya -vibhava ( 성 괴 ) 21
<장>성괴(成壞) 21 <무>성괴(成壞) 21
생성은 괴멸(壞滅)을 떠나서거나(離) 함께하거나(共)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생성과 괴멸은 각기 서로를 떠나서도 서로와 함께해서도 성립하지 않고 그 둘을 함께 한다고 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 둘이 모두 아니므로 어떤게 이룸(成)이 있겠는가?
서로는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이다. 존재(有)는 자생(自生-자체로부터 남)도 타생(他生)도 자타생(自他生)도 아니다. 삼세중 존재의 상속(생성)은 없다.
22. 관여래품 제 22 (16게)
<변>여래(如來) 16 <안>여래(如來) 14 <월>Tath gata 여래(如來) 16
<장>여래(如來) 16 <무>여래(如來) 16
여래(如來)는 제온(諸蘊-색수상행식)과 동일하지도 않으며 다르지도 않다(不一不異), 모든 온(蘊)에서 여래와 오음(색수상행식)은 5가지 방식(五種)으로 추구하여보아도 찾아지지 않는다. 여래는 거짓 명칭(假名)으로 말할 따름이며 희론(戱論)을 초월하는 것으로 무자성(無自性)이다. 또한 이와 같이 세계도 무자성이다.
23. 관전도품 제 23 (24게)
<변>전도(顚倒) 21 <안>전도(顚倒) 20 <월>Vipary sa 전도(顚倒) 25
<장>전도(顚倒) 25 <무>전도(顚倒) 24
전도(顚倒-뒤바뀌어 집착함)는 자성(自性)이 없다. 번뇌(煩惱)와 염자(染者-번뇌에 물들이는 주체)는 5자지 방식(五種)으로 추구해도 얻을 수 없다. 육근(六根) 육경(六境)은 꿈(夢)과 같고 거울 속의 그림자(鏡中像)와 같이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 가착(可着-집착될 것 ) 착자(着者-집착하는 이) 착(着- 집착함) 착법(着法- 집착하는 법) 모두 적멸의 모습(寂滅相)이다. 삼세(三世)중 전도(顚倒) 전도자(顚倒者)가 없다.
24. 관사제품 제 24 (40게)
<변>사제(四諦) 39 <안>사제(四諦) 37 <월>Arya -Satya 성제(聖諦) 40
<장>성제(聖諦) 40 <무>성제(聖諦) 40
공(空)과 공의 인연(空因緣) 공의 이치(空義)를 모르니 번뇌를 낸다. 여래는 이제(二諦- 세속제와 제일의제)에 의해 설법하여 열반(涅槃)을 얻게 한다. 뭇 인연에서 나는 법(衆因緣生法)은 무(無)인 동시에 거짓인 이름(假名)이며 또한 중도의 뜻(中道義)이다. 모든 법은 인연에서 나타나며 따라서 공하다. 공하므로 이런 바탕에서 모든 현상이 나타날 수 있으며, 온갖 법이 공하지 않다면 일체는 이루어질 수 없다.( 若一切不空 則無有生滅 )
25. 관열반품 제25 (24게)
<변>열반(涅槃) 19 <안>열반(涅槃) 23 <월>Nirvana 열반(涅槃) 24 <장>열반(涅槃) 24
<무>열반(涅槃) 24
얻음도 없고(無得) 도달함도 없고(無至) 항상함도 아주 없어짐도 아니며(不常不斷)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면 이를 열반이라 한다. 열반은 있음(有) 없음(無) 있음과 없음을 합한 것(有無 合 - 亦有亦無), 또는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님(非有非無)등의 사구(四句)방식으로 사유(思惟)할 때 열반은 이 모두가 아니다. 열반과 윤회(세간)는 무차별이다 모든 법은 얻을 수 없고 온갖 희론이 사라지며 사람도 처소도 없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도 없다. (諸法不可得 滅一切戱論 無人亦無處 佛亦無所說)
26. 관십이인연품 제 26 (9게)
<변>세제연기(世諦緣起) 12 <안>몽환(夢幻) 12 <월>Dvada a -a ga 십이지(十二支) 12
<장>십이지(十二支) 12 <무>십이유지(十二有支) 13
십이인연의 유전문(流轉門- 무명- 행 - 식 - 명색 - 육입- 촉 -수 - 애 -취- 유- 생- 노사 )로서 고음(苦陰 -고통의 쌓임)이 생기니 무지한 이(無明者)가 짓는 바이며, 지혜로운 이는 짓지 않는다. 이 일이 사라지면 저 일도 사라지니 이 고(苦)의 쌓임도 이와 같이 사라진다.(십이인연법의 환멸문(還滅門).
27. 관사견품 제27 (30게)
<변>사견(邪見) 27 <안>제견(諸見) 24 <월>D i i (견(見) 30 <장>견(見) 30 <무>견(見) 30
유무(有無)나 상(常) 무상(無常) 변(邊) 무변(無邊)등을 사구사유(四句思惟)로서 부정한다.
일체법(一切法)은 공하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법을 말씀하시어 온갖 사된 견해를 모두 끊으시니 이제 머리숙여 예를 올린다.
Ⅲ. 중론송의 분과(分科)
앞에서 대략 살펴본 바와 같은 중론송의 내용에 대해 그 체계를 세워 분류해석을 하는 분과로는 후대의 많은 주석서 중에서 현재 두가지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중국의 삼론학을 집대성한 가상(嘉祥) 길장(吉藏 549-623)의 과장론(科章論)이고 다른 하나는 티벳 불교 개혁자요 황모파(黃帽派) 라마교의 초조(初祖)인 쫑까파(宗喀巴 1357-1419)에 의해 이루어진 과문(科文)이다. 이 둘을 아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A. 중론에 대한 길장의 과장론
길장은 중론 27 품 전체의 내용구조를 분석하여 크게 3 단으로 묶고 있다.
<길장의 3 단 과장도>
중론 27 품
제 1 단 - 破大乘迷失 明大乘觀行 --- 제 1- 25 품
제 2 단 - 破小乘迷執 辨小乘觀行 --- 제 26 , 27 품
제 3 단 - 重明大乘觀行 推功歸佛 --- 맨 끝 2 게
길장의 과장론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다음 두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는 내용을 단계적으로 밝혀 중론 27 품의 내용을 첫 단계 대승관행 둘째 단계 소승관행 셋째 단계에서 다시 대승관행을 밝히고 이런 가르침을 주신 불타에게 귀의함을 밝히고 있다.
또 하나는 그의 과장 방법이 3 단으로 전개되더라도 27 품은 결국 대승 관행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총괄하고 있다.
B. 宗喀巴의 과문
쫑까파는 중론 27 품 전체의 구조를 연기라는 법칙 진리성 하나를 중심으로 하여 과문을 제작하고 있는 특징이 보인다.
즉 연기는 생멸 등 팔변을 여의게 하는 것 ( 귀경게 일부) , 연기이기에 제법은 무자성 공이고 ( 제 1, 2 품) 인법은 무아이며 ( 제 3- 23 품 ) 연기를 증득해야 윤회를 끊을 수 있고 ( 제 26 품 ) 또 사견도 없어짐 ( 제 27 품 ) 등과 같이 연기라는 근본 불교 진리에 의거 총괄 체계화한 것으로 보인다.
< 쫑까파의 과문 총괄도>
1 제명 해석
2 본문 해석
1) 연기가 이변을 여의게 함을 설해주신 대사 께 찬양귀의한다. ---- 귀경게
2) 연기가 팔변을 여의게 함에 대한 해석의 모습
논 본문 수지 차제를 세움
논 본문의 각 품 해석
A 연기요 자성 공임을 밝힘
㉠ 그 내용 +- 이무아(二無我) 약설(略說) - 제 1, 2 품
+- 이무아(二無我) 광설(廣說) - 제 3 , 23 품
㉡ 이상에 대한 논쟁을 끊음 ---- 제 24, 25 품
B 연기를 증득함과 못함에 따라 윤회의 생기(生起)와 끊고 버림 있음 - 제 26 품
C 연기를 증득하는 때에 사견은 그치고 쉬게 됨 ---------- 제 27 품
3) 이상과 같은 불타의 은혜를 생각하며 경례함 ------------ 제 27 품
IV. 중론송에서 나타나는 공 사상 (반야공(般若空)의 논리)
연기법의 새로운 해석
대승의 공사상은 초기 불교의 무아 · 연기사상을 바탕으로 붓다. ,본래의 의도를 더 심오하고 명백하게 드러내 보인 사상이다. 공사상은 대승불교사상의 기초이자 반야경의 핵심사상이 된다.
중관 불교학의 창시자 용수(龍樹), N g rjuna 150∼250 C.E.)는 "어떤 것이라해도 연기인 것, 그것을 공(空)한 상태, nyat 라고 우리는 말한다. "고 하였다 그는 연기법을 공의 논리로 재해석하여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를 완성하였다. 용수는 주저인 『중론송」의 귀경게에서 자신의 종교적 귀의처와 중심입장을 다음과 같이 명백히 밝히고 있다. "모든 희론을 적멸하는 연기(緣起, Pr titya-samutp da)는 모든 설법 중에서도 가장 수승하다. 그러므로 연기를 설한 정각자 부처님께 귀의한다. " 이 게송은 용수가 연기설을 불교의 중심교설로 인정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의 중심 사상도 이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공(空)
공(空)이라는 용어는 's nya(텅빈)'라는 형용사나 unyat (공한 것 , 공성)'라는 명사의 번역어로 본래 '아무 것도 없는 팅 빈 상태'의 의미이다.
이 공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견해가 있으나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석존은 우리가 보는 일체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설법한다. 이를 무상(無常)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무상한 현상에 있어서 '영원불변 고정적인 실체는 없다고 설법하며 이를 곧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으로 표현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대하고 보는 무상(無常)한 현상의 이면(裏面)은 과연 무엇으로 되어 있으며 무엇에 의해 이 현상이 나타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 현상의 이면은 그 안에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는 동시에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현상안에서 분별하는 모든 성질로서 규정할 수 있는 바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듯 '없다'와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이는 있다 없다 또는 --이다. -- 아니다 등의 모든 성질규정을 떠나고 언설을 떠난 상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공(空)은 이렇게 말을 떠나 표현 할 수 없는 그러한 상태를 막연히 가리키기 위해 붙인 임시적인 가칭(假稱)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가리키고 볼 수 없는 달을 가리키기 위한 손가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공이라는 단어가 갖는 기능이라고 할 것이다.
공이라는 용어는 초기 경전에도 보이고 있으나, 초기 경전에서 공성의 의미는 주로 무상과 무아를 관한 결과 얻어지는 삼매의 상태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공삼매(空三味)는 무상(無常) '무원('無願)삼매와 함께 삼해탈문의 하나로 여겨졌다. 「대공경(大空經) 등에는 청정하고 맑은 정신 상태를 '공에 주한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다. 부파불교의 논서인 「사리불아비담론」에도 6공(六空)의 이론이 있고 대비바사론에도 10공설이 있다. 대승불교의 근본 경전인 「대품반야경」과 그 주석서인 「대지도론」에는 공의 의미를 열여덟 차원(십팔공(十八空)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내공(內空) : 인식의 주관인 몸과 마음의 요소, 즉 감각, 지각, 사고, 인식의 작용을 일으키는 요소가 다 공함을 말한다.
2) 외공(外空) :인식의 대상이 되는 외적 객관이 공함을 말한다.
3) 내외공(內外空) :이것은 앞의 두 가지를 함께 부정한 것이다.
4) 공공(空空) : 공도 또한 공함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요소가 다 공하다고 하면, 공이라는 것은 존재할 것이라는 공개념의 실재화의 오류를 논파하기 위함이다.
5) 대공(大空) :시방(十方)과 허공 등의 공간이라는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체적 사유는 반드시 공간적 관념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6) 제일의공(第一義空) : 제일의는 궁극적 진리의 본체인 진여(眞여)나 열반 등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진리상도 사실은 공하다는 의미이다. 궁극적 진리나 진실의 실상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면 이미 그 이름에 집착하여 진리를 관념화하는 희론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7) 유위공 :유위는 제법을 말한다. 인연에 의해 생성된 모든 현상의 존재들은 변화하고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무상의 현상을 행공(行空)이라고도 한다.
8) 무위공(無爲空) :인연에 의해 생기지 않는 허공, 열반등과 같은 무위법도 공하다.
9) 필경공(畢竟空) :불교외의 사상에서 말하는 실유관(實有觀)이나 불교의 나와 법에 집착하는 실유관 등을 모두 부정한다. 유위와 무위법이 다 공함을 말한다.
10) 무시공(無始空) :시간적으로 세간이나 중생, 모든 사물에 어떤 시작이 있다는 관념을 부정함이다.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으므로 태초와 종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11) 산공(散空) :현상계는 인연에 의해 생성되므로 인연의 화합이 없어지면 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12) 성공(性空) : 일체 존재의 자성이 공이라는 의미이다. 인연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본래의 실체가 공하다는 것이다. 불성공(佛性空) · 자성공(自性空)이라고도 한다.
13) 자상공(自相空) : 성공이 불성과 진여는 본체가 그대로 공함을 말하는 총상(總相)이라면 자상공은 온갖 만물의 개별적인 존재성인 별상(別相)을 부정함이다.
14) 일체법공(一切法空) :앞에 말한 일체 제법의 공함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15) 불가득공(不可得空) :인식론적으로 무엇을 알고 얻을 것이 있다는 관념조차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를 무소득공 또는 절대공이라고도 한다. 구할 진리도 없고 깨달을 법도 없다는 것이다.
16) 무법공(無法空) : 현상의 모든 법이 이미 없어진 상태로 이미 공이라고 한다.
17) 유법공(有法空) : 눈 앞에 드러나고 있는 현상은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가유일 뿐 그 본질은 공하다는 것이다.
18) 유법 ·무법공(有法無法空) : 시간적 존재뿐만 아니라 공간적 존재까지도 다 공함을 통틀어 의미한다.
이상의 18공에 대한 설명은 공의 의미를 종과 횡, 시간과 공간등의 다차원적 시점에서 해석하여 모든 존재 현상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요컨대 공사상이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일체 존재의 실체가 없는 연기적 존재임을 밝히는 사상이다.
공사상의 불교사적 배경
용수이전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은, 모든 존재의 요소는 무아이며 그 실체가 없다고 하면서도 그 자체를 하나의 법으로 인정하고, 제법은 항상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불교 전통의 무아 연기설에 배치되는 교학체계를 구축하였다. 설일체유부식의 연기적 인과론은 비록 실체를 부정하지만 일면 실재를 주장하는 것으로서 부처님의 연기교설과 명백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용수의 공사상은 이러한 유부의 잘못된 연기관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
용수의 연기관
용수는 연기하는 존재 사이의 관계성과 그 주체간의 언어적 개념차에서 오는 실체적 사유 방법을 논파하기 위해 소위 변증법적 공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용수가 해석하는 연기론은 "어떤 연(pratyayat )에 인연하여 어떤 법이 있다. "는 연기의 상호상의성 (相互相依性)를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모든 존재는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으므로 연기적 존재이다.
이 연기적 존재라는 것은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로 각 존재는 그 실체가 없는 무자성의 존재인 것이다. 제법은 무자성적 상의(相依) 관계에 의한 생성인연 곧 연기에 있다. 사물의 상의 상관성을 말하는 '연기 (pratiy samutp da) '라는 말은 사물은 반드시 원인에 의해 생기함을 의미한다.
월칭( Candrakirti)은 그의「 Prasannapada」에서 '연기'의 어의를 "사물이 원인과 조건을 기다려 (pratitya : prapya) , 즉 의존하여 (apeksya) 일어난다. "는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인과관계는 모든 존재의 동시적인 상호작용의 동일성과 상대성 등의 관계도 나타낸다.
용수의 「회쟁론」은 "제법을 연해서 존재하는 것(pratityabhava)을 공(空性, s nyat )한 것이며 또한 무자성성(asvabh vatva)이라고 이른다. "라고 연기와 공성과 무자성의 논리 관계를 밝혔다. 모든 존재는 그 실체와 본질을 찾을 수 없으므로 모든 존재는 공하다는 것이다(svabh va `s nya). 이러한 연기-무자성-공의 논리가 용수가 전개한 연기론적 공의 해석의 주요 골자이다.
사물은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님을 반야경에서는 모든 존재는 불생불멸 (不生不滅)이라고 설한다. 사물이 생한다고 보는 것이나 멸한다고 보는 견해는 일상적인 언어에 의한 관념일 뿐 실제로 그 생멸의 실체와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의 존재는 무자성의 존재이므로 다 공한 것이다.
모든 사물이 연기의 원리로 존재함을 중론송 제 1 게는, "모든 존재는 언제 어디서나 결코 그 자체에서 스스로나, 타로 부터나, 또는 자와 타의 양자로 부터나 원인이 없이도 생기지 않으며,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생한 것은 없다. "고 표현한다. 연기사상은 모든 존재의 스스로의 창조나 다른 존재로부터의 창조는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모든 존재는 여러 원인이 서로 관계됨으로써만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원리는 인간 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요소까지 유기적 인과의 관계 속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
공과 중도
반야의 일체법 공사상의 귀착점은 연기설의 근본 정신인 중도(m dhyama pratipada)와 중관M dhyamika)의 선양에 있다. 연기와 공과 중도의 관계를 논증하기 위해 「중론송」의 첫 장은 이른바 '팔부중도(八不中道)'를 설한다.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영원한 것도 없고 단절 됨도 없다.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不生不滅 不常不斷 不一不異 不來不去). " 여기에 서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유물론이나 유심론등 무엇이 먼저 존재한다는 전제적 철학 사상은 모두 부정된다. 생과 멸 등의 8가지 이원적 상태의 인과의 주체와 객체간에는 본래부터 결정된 어떤 본성이나 그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연기설은 상호의존적 관계 외에 독립적인 존재의 생을 부정하며 무로부터의 창조설이나 상응론적 존재론도 부정한다.
여덟 가지 부정을 통한 중도설은 결국 어떤 사물도 그 자성이 있어서 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유와 무를 떠난 대승의 연기관은 초기 불교의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비판하여 중도를 제창한 정신을 상속하는 것이다. 「중론송」은 "연기하는 것은 곧 공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이것은 소인에 의거한 인식을 위한 가명이며, 그것이 즉 중도(中道)이다. "라고 설한다. 여기에서
공과 가명과 중도의 원리가 제시되어 있다. 연기를 공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의 언어 시설이다. 이러한 분별 작용을 넘어서 개념이나 언어적 사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중도의 세계는 열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초기 불교의 중도사상이 공의 철학적 배경이 되고 공사상은 대승의 실천수행의 길을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물을 언어에 의한 허구에 의하여 실체화하여 만들어 내는 분별과 희론의 형이상학을 공의 원리에 논파하는 것이 중관학의 실천적 목적이다. 그러나 공도 실재로 존재하는 실체나 진리 자체가 아니라 하나의 시설이며 가명이다. 이러한 언어와 사물을 이원적으로 분별하는 마음작용을 떠나는 곳에 중도의 연기실상은 열리는 것이다. 공사상을 실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사상이며, 인과설의 긍정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창조적인 삶을 살아 나가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반야의 중도사상은 그러므로 희론 적멸에 의한 공성의 체득과 그 실천의 길인 보살도로 이어지는 것이다.
⑥ 공과 진리
불타의 교법이나 공의 교설이 객관적 진리라고 집착할 때 그것은 공의 진의와 거리가 멀게 되는 것이다. 공 역시도 공의 입장에서 부정하는 것이 공관의 태도이다. '공 또한 공[공역부공(空亦復空)' 하기 때문이다. 공설의 진의는 존재의 실체성에 대한 고착과 집착을 벗어나는 데 있지 결코 절대 허무적 진리를 주장하는데 있지 않다.
공설은 진리를 밝혀 주는 방법이자 길에 불과한 것이지 그 자체로 어떤 형이상학적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용수는 연기인 그 공성도 인시설(因施設), 무엇에 의한 시설, up dy praj apti)일 뿐이라고 말한다. 세간적 실용의 목적 때문에 임시로 알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법의 내적 구조를 용수는 세속의 진리와 궁극의 진리로 나누어 부처님의 설법 방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모든 부처님은 세속과 승의(勝義)의 두 가지 진리에 의해 중생에게 설법한다. 이 두 가지 진리를 구별하지 못하면 모든 부처님의 설법의 깊은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세속에 의하지 않으면 승의는 설시되지 않고 그 승의를 요해하지 않고서는 열반을 증득할 수 없다. " 경전언어는 중생을 구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경전 언어의 두 구조인 진속(眞俗) 이제(二諦)는 궁극적 진리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두 가지의 진리의 영역을 나타내는것도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여래의 언어들은 방법적으로만 진실하다고 할 수 있다.
붓다의 교법은 그것을 설한 맥락적 이해 안에서만 진실하다. 불교의 경전 언어에 있어서 진리와 방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붓다의 가르침은 단지 방법과 길 (m rga) 일 뿐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어떠한 진리 개념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용수는 육십송여리론에서 "만일 교법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와 같은 사상은 자신의
교법에 대한 애집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타종교에 대한 증오에 의해 애증의 갈등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반야중관학사상은 어떤 진리, 어떤 실재의 관념도 버릴 것을 가르친다. 진리에 대한 무집착이야말로 참된 진리로 향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야경은
여래가 설한 법설까지도 절대 진리로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⑦ 공과 불이(不二)사상
반야의 지혜는 이원적 집착에서 벗어난 불이(不二)의 지혜이자 중도의 가르침이다. 중도는 분별된 이원적 사유를 치우친 견해라고 본다.
이러한 사견을 버리고 진공(眞空)이 바로 묘유(妙有)임을 드러내는 것이 곧 불이적 중도이다. 불이사상의 이론적 기초는 물론 앞에서 살펴본 연기와 공사상에 있다. 중도는 생과 멸, 동일성과 차별성, 성과 속,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그리고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불이사상은 공의 정신을 실천적인 보살사상으로 살려내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열반을 번뇌의 소멸된 상태로 이해한 면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번뇌의 단멸과 부정으로서 열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공의 논리로 볼 때 번뇌와 열반을 대립된 개념이나 둘로 보는 것은 열반의 실체를 인정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오온이 소멸된 상태라고 하는 경우 오온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오류가 있다. 모든 집착이나 번뇌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집착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러한 열반에의 집착이나 번뇌에의 집착은 분별적 사고로 아직 불이의 공을 체득한 것이 아니다. 열반을 번뇌와 대립된 이원적 사유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직 번뇌에서 해탈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론」은 "열반의 건립도 없고 윤회의 해탈도 없는데 어떻게 윤회와 열반이 분별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본래 번뇌도 열반도 그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생사윤회와 열반을 분별하지 않은 것이 진정한 불이의 지혜의 의미이다. 대승의 열반 해석은 생사(sa sura) 밖에서 열반을 찾지 않는 데 있다. 열반은 생사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며 열반에 안주하여 집착하는 것도 참된 깨달음이 아니다. 보살의 행원도 이러한 불이적 열반관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상은 보살이 되돌아와서 보살의 수행을 완성할 수 있는 수행의 도량이다. 이 세상에서의 보살행 곧 열반의 길인 것이다. 열반은 윤회의 부정인 동시에 긍정인 것이다. 대승 보살은 열반에의 안주보다는 오히려 윤회의 세계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참된 열반은 윤회를 떠나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생사윤회의 세계 속에서만 실현된다.
용수는 "윤회는 열반과 어떤 차이도 없다. 열반은 윤회와 어떤 차이도 없다. 열반의 한계는 윤회의 한계와 같다. 이 양자 사이에는 어떤 미세한 차이도 없다. "고 설하였다. 열반은 버려지는 것도 없고 얻어지는 것도 없고, 끊을 것도 없고 변치 않는 것도 없고 소멸도 없고 영원함도 없는 것이다. 이 논리의 바탕에 깔려 있는 종교적 의미는 어디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는 무주착의 마음이다. 이러한 공관에 의한 해탈은 여래와 이 세상 사람의 본성을 둘로 보지 않으며, 이 양자의 본체도 본래 없는 것으로 본다. 또한 윤회와 열반도 그 영역이나 시간에 있어서 조금의 구분도 없다는 불이적 예지를 체득한다.
이와 같이 반야공의 사상은 절대부정을 통한 절대긍정의 삶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반야공의 진리는 이러한 불이적 지혜로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도 모든 것을 긍정한다. 텅 빈 것(emptiness)은 가득찬 충만(fullness)이며 있는 그대로의 진여(如如, suchness)이기 때문이다.
⑧ 공과 제법실상(諸法實相)
궁극적 진리로서의 공성(空性)의 의미에 대해 「중론」은, "궁극적 진리는 다른 것에 의해 알 수 없고(aparapratyaya), 적정(santa)하며, 온갖 희론에 의해 희론되지 않고(prapancairaprapancita), 무분별(nirvikalpa)로서 차별적 의미가 없는 것(ananartha)이 진실한 모습'이라고 밝히고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은 이러한 공성의 경지를 반야바라밀이며 이것이 곧 제법실상(諸法實相, Tathata)이라고 한다. 용수는 '희론과 일체의 유소득(有所得)이 적멸한 곳에 안온과 길상의 세계가 열린다'고 설한다. 월칭 (Candrak rti)은 이 게송에 대해 "궁극적 의미는 인식의 활동조차 없는 곳이다. 거기에 어떻게 모든 언설과 문자의 논의가 있을 것인가." 라고 해석하였다. 제법의 참모습은 일체의 언설을 초월하는 불생불멸의 세계이며, 언어와 인식의 대상과 주관을 떠난 불가언설 (不可言說)로서 인식할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 anupalambha)의 진실상이다. 공의 변증법은 모든 사유와 언어를 궁극적으로, 침묵을 항해 해체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최고의 지혜인 반야지의 체득은 인간에게 새로운 세계와 생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공의 다양한 의미를 정리해 보면, 존재적으로는 연기와 무자성의 상의상관성을 나타낸다. 이를 인식론적 측면으로 보면 공은 불가득이며 얻을 바가 없는 것이다. 심리적 태도로 보면, 머무를 데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는 무집착과 절대 자유의 마음이자 해탈이다. 논리적으로 공은 불이(advaya)론이다. 여기에서 윤리적으로 자타불이의 보살행과 무아의 동체자비행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공의 진리는 종교적 수행으로 보면 번뇌와 희론을 타파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공의 여러 차원은 공의 연기론적 의미인 공의(空義), nyat rtha)와 공의 목적 효용 동기인 공용( nyat y m prayojanam)과 진실상 평등일미 승의제 진여 제법 실상으로서의 공성( nyat )이라는 차원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후에 전개된 모든 대승불교사상은 모두 이 공사상을 기초로 전개된 것이다.
- 終
Ⅲ. 용수보살(龍樹菩薩)
1.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
2. 용수보살 전기의 성격
3. 용수보살의 저서
1.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
K-1041(30-671). T-2047(50-184). 요진(姚秦) 시대(A.D. 401∼413) 번역. [역] 구마라집(鳩摩羅什). [약] 용수전(龍樹傳).
용수 보살의 전기이다.
용수는 브라만 족속으로 남인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브라만들이 외우는 4베다를 듣고서 다 외울 수 있었으며 그 뜻도 모르는 바가 없었다. 천문, 지리, 도술 등에도 능통하여 이름을 널리 떨쳤다.
한때 뜻을 같이하는 친구 세 명과 함께 변신술을 배웠다. 그들은 왕궁에 몰래 들어가서 궁녀들을 희롱하였는데, 궁녀 중에 임신하는 자가 나오게 되었다. 이를 안 왕이 이들을 붙잡으려 하였는데, 결국 친구들은 모두 붙잡혀 죽고 용수 혼자서만 겨우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비로소 욕망이 괴로움의 근본이며 모든 화(禍)의 뿌리이고, 패덕(敗德)과 몸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 모두 이 욕망으로부터 일어남을 깨닫게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스스로 서원을 세우고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90일 만에 3장(藏)을 다 외우고 나니 더 이상 읽을 경전이 없었으므로 새로운 경전을 찾아 설산(雪山)으로 갔다. 설산에서 한 노비구(老比丘)를 만나서 대승 경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는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대룡(大龍) 보살을 따라서 용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90일 동안 엄청난 양의 대승 경전을 읽고 불도를 깨달았다.
용궁에서 돌아온 뒤 용수는 대승 불교의 이치를 밝히는 저술 활동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 기록된 것은 우파제사(優波提舍) 10만 게, 장엄불도론(莊嚴佛道論) 5천 게, 대자방편론(大慈方便論) 5천 게, 중론(中論) 5백 게, 무외론(無畏論) 10만 게 등이다.
용수가 죽은 뒤 남인도의 여러 나라에서는 사당을 짓고 부처와 같이 받들고 공경하였다 한다. 마지막으로 나무 밑에서 태어났으며 용에 의하여 성불하였으므로 용수라 부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비록 전설적인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지만, 용수의 전기로서는 유일한 문헌이다.
姚秦三藏鳩摩羅什譯
직역 : 용수보살은 남천축 범지 종족에서 출생하였다. 천성이 총명하고 깨달음이 기이하여 일을 다시 생각하지 않았다. 갓난아이였을때, 여러 범지가 각 게송이 32자로 이루어진 4베다 경전 각 4만게를 외우는 것을 듣고 그 문장을 모두 외고 그 뜻을 깨달았다. 약관의 나이에 여러나라에 이름을 떨쳐 독보적이었고, 천문, 지리, 도위, 비참 및 여러 도술을 종합하여 알았다. 계합한 친구 세 명도 역시 한 시대의 호걸들이었다. 서로 의논하여 말하길, '천하 이치로 신명을 열고 심오한 뜻을 밝히고 아는 일은 우리가 이미 다 마쳤는데, 다시 무엇으로 스스로를 즐겁게 할 수 있는가? 욕망을 끝까지 채움이 일생의 최고 즐거움일 것이다. 그러나 범지의 힘은 왕의 힘과는 다르니 어떤 방법으로 그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오직 은신법이 있어 그 즐거움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네 사람은 서로 마음에 거스름이 없었으므로 술가에 가 은신법을 구하였다.
의역 : 용수보살은 남인도 바라문 종족 출신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깨달음이 기이하여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법이 없었다. 갓난아이였을때, 여러 브라만이 각 게송이 32자로 이루어진 4베다 경전 각 4만게를 외우는 것을 듣고 그 문장을 모두 읊고 그 뜻을 이해했다. 약관의 나이에 여러나라에 이름을 떨쳐 독보적이었고, 천문, 지리, 도위, 비참 및 여러 도술을 종합하여 알았다. 뜻이 맞는 친구 세 명도 역시 한 시대의 호걸들이었다. 서로 의논하여 말하길, '천하 이치로 신명을 열고 심오한 뜻을 밝히고 아는 일은 우리가 이미 다 마쳤는데, 다시 무엇으로 스스로를 즐겁게 할 수 있는가? 욕망을 펴서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해 보는 것이 일생의 최고 즐거움일 것이다. 그러나 브라만의 힘은 왕의 힘과는 다르니 어떤 방법으로 그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오직 몸을 숨기는 술법이 있어 그 즐거움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네 사람은 서로 마음에 거스름이 없었으므로 술가에 가 은신법을 구하였다.
직역 : 술사는 생각하기를 '이 네 범지는 한 세상에 이름을 날리며 군생들을 초개와 같이 여긴다. 지금은 은신술때문에 굴욕스럽게 나에게 왔지만, 이 네 범지는 재주가 밝아 절세적이고 알지 못하는 것이 오직 이 천한 법뿐이다. 내가 만약 그것을 가르쳐 주면 얻고 나서 반드시 나를 버리고 가히 다시는 나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그 약을 주어 사용하되 알지 못하게 하면 그 약이 떨어지면 반드시 와서 영원히 나를 스승으로 섬기도록 해야 겠다.' 각자에게 푸른 약을 한 알씩 주며 말하였다. '너희들은 조용한 곳에 있으면서 물에 그것을 갈아서 눈꺼풀에 바르면 너희의 형체는 숨겨져서 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용수는 이 약을 갈 때에 그 기미를 듣고 즉시 모든 것을 알고 숫자의 많고 적음을 나누었는데 조금도 빠진 것이 없었다. 돌아가 약사에게 얻은 약이 70여 종으로 나뉘었음을 고하니 많고 적음이 모두 그 처방과 같았다. 약사가 묻기를, '그대는 무엇으로 그것을 알았는가?' 대답해 말하였다. '약 자체에 기미가 있으니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술사가 탄복하였다.
의역 : 술사는 생각하기를 '이 네 명의 바라문은 세상에 이름을 날리며 모든 생명들을 풀뿌리와 같이 여긴다. 지금은 은신술때문에 굴욕스럽게 나에게 왔지만, 이 네 바라문은재주가 비상하여 절세적이고 알지 못하는 것이 오직 이 천한 법뿐이다. 내가 만약 그것을 가르쳐 주면 얻고 나서 반드시 나를 떠나고 다시는 나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그 약을 주어 사용하케 하고 약의 제조법은 알지 못하게 하면 그 약이 떨어지면 반드시 와서 영원히 나를 스승으로 섬길 것이다.' 각자에게 푸른 약을 한 알씩 주며 말하였다. '너희들은 조용한 곳에 있으면서 물에 그것을 갈아서 눈꺼풀에 바르면 너희의 형체는 숨겨져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용수는 이 약을 갈 때에 그 약기운을 알아채고 약성분의 많고 적음을 나누었는데 조금도 빠진 것이 없었다. 돌아가 약사에게 얻은 약이 70여 종으로 나뉘었음을 이야기하니 많고 적음이 모두 그 처방과 같았다. 약사가 묻기를, '그대는 무엇으로 그것을 알았는가?' 대답해 말하였다. '약 자체에 기미가 있으니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술사가 탄복하였다.
직역 : '이런 사람은 소문을 듣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서로 만났으니 어찌 나의 천한 술법이 아까워 하겠는가?' 즉시 갖추어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네 사람은 술법을 얻고는 뜻대로 자유롭게 항상 왕궁에 들어갔다. 궁중의 미인은 모두 능욕을 당하였다. 백여일 후에 궁중 사람 가운데 임신한 자가 있어 두려워 하며 왕에게 고하고는 죄를 면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을 크게 기뻐하지 않으며 '이 무슨 상서롭지 못한 괴이함인가?' 모든 지혜로운 신하를 불러 이 일을 꾀하게 했는데 노신이 있어 말하기를, '무릇 이와 같은 일에는 응당히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혹은 귀신, 혹은 방술이니 가히 미세한 흙으로써 모든 문가운데 두어 병사로 하여금 그것을 지키게 하고 모든 다니는 사람을 막아야 합니다. 만약 방술이라면 그 발자취가 나타날 것이니 가히 무기로써 제거하고, 만약 귀신이라면 들어와도 발자취가 없을 것이니 가히 방술로써 멸할 수 있습니다. 즉시 문지기에게 법을 갖추어 시험케 하니 네 사람의 발자취가 보였다. 빨리 달려가 왕에게 고하니 왕이 장수, 역사 수백인과 궁으로 들어가 모든 문을 닫게 하였다.
의역 : '이와 같은 사람은 소문을 듣기조차 어려운데 하물며 서로 만났으니 어찌 나의 천한 술법이 아까워하겠는가?' 즉시 갖추어 모두 가르쳐 주었다. 네 사람은 술법을 얻고는 뜻대로 자유롭게 항상 왕궁에 들어갔다. 궁중의 미인은 모두 능욕을 당하였다. 백여일 후에 궁중 사람 가운데 임신한 자가 있어 두려워하며 왕에게 고하고는 죄를 면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을 크게 기뻐하지 않으며 '이 무슨 상서롭지 못한 괴이함인가?' 모든 지혜로운 신하를 불러 이 일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나이든 신하가 있어 말하기를, '무릇 이와 같은 일에는 응당히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혹은 귀신, 혹은 방술이니 가히 미세한 흙으로써 모든 문에 뿌려 병사로 하여금 그것을 지키게 하고 다니는 사람을 막아야 합니다. 만약 방술이라면 그 발자취가 나타날 것이니 가히 무기로써 제거하고, 만약 귀신이라면 들어와도 발자취가 없을 것이니 가히 방술로써 제거할 수 있습니다. 즉시 문지기에게 명령하여 시험케 하니 네 사람의 발자취가 보였다. 빨리 달려가 왕에게 고하니 왕이 장수, 역사 수백인과 궁으로 들어가 모든 문을 닫게 하였다.
직역 : 모든 역사로 하여금 칼을 휘둘러 허공을 베게 하니 삼인이 즉사했다. 오직 용수만이 왕의 머리곁에 의지하였는데, 왕이 머리 7척 곁에는 칼이 이르지 못하였다. 이 때에 욕망이 괴로움의 근본이며, 모든 화의 근본임을 깨달았다. 덕을 패하고 몸을 위태롭게 하니 모두 이것에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곧 스스로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약 탈출할 수 있다면 마땅히 사문에게 나아가 출가법을 받으리라.' 곧 탈출하여 산에 들어가 한 불탑에 나아가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구십일 동안에 삼장을 다 외우고 다시 다른 경을 구하였으나, 얻을 곳이 없었다. 마침내 설산에 들어갔다. 산중에 탑이 있었고, 그 탑안에 늙은 비구가 있었는데 마하연의 경전을 그에게 주었다. 용수는 외우고 받들며 사랑하고 좋아했으며 비록 실제의 뜻을 알았으나, 날카롭게 통함을 얻지 못했다. 모든 나라를 돌아다니며 다시 남은 경을 구하였으나, 염부제 가운데서는 얻지 못했다. 외도 논사와 사문의 의종을 모두 다 꺽어 항복케 하였다.
의역 : 모든 역사로 하여금 칼을 휘둘러 허공을 베게 하니 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오직 용수만이 왕의 옆에 붙어 의지하였는데, 왕이 머리 7척 곁에는 칼이 이르지 못하였다. 이 때에 욕망이 괴로움의 근본이며, 모든 화의 근본임을 깨달았다. 덕을 패하고 몸을 위태롭게 하니 모두 이것에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곧 스스로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약 탈출할 수 있다면 마땅히 사문에게 나아가 출가법을 받으리라.' 곧 탈출하여 산에 들어가 부처님탑에 나아가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구십일 동안에 삼장을 다 외우고 다시 다른 경을 구하였으나, 얻을 곳이 없었다. 마침내 설산에 들어갔다. 산중에 탑이 있었고, 그 탑안에 늙은 비구가 있었는데 대승불교의 경전을 그에게 주었다. 용수는 외우고 받들며 사랑하고 좋아했으며 비록 실제의 뜻을 알았으나, 날카롭게 통함을 얻지 못했다. 모든 나라를 돌아다니며 다시 남은 경을 구하였으나, 염부제 가운데서는 얻지 못했다. 외도 논사와 사문의 의종을 모두 다 꺽어 항복케 하였다.
직역 : 외도의 제자가 말하길, '스승은 일체지인이나, 지금은 불제자이지요. 제자의 도는 묻고 받들기에 부족하니 아직 충분하지 못하오. 하나의 일이라도 족하지 않으면 일체의 지혜라 할 수 없소.' 말이 궁하고 마음이 굴복하여 즉시 삿되고 교만한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였다. 세계의 법 가운데 나룻터나 길이 될 만한 것은 많다. 불경이 비록 오묘하나 이치로써 미룬다면 짐짓 극진하지 못함이 있다. 극진하지 못한 속에서 미루어 부연하고 그것으로써 후학을 깨우친다면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일에 잘못이 없으니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이 일을 생각하고 나서 곧 그것을 행하고자 스승의 가르침과 계율을 세우고 다시 의복을 지어 불법을 부촉하여 조금 다름이 있게 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음을 보이고 날을 택하고 시기를 가려 가르침을 주었다. 제자에게는 새로운 계를 받고 새로운 의복을 입으라 이르고 자신을 홀로 조용한 곳에 수정으로 지은 방에 있었다. 대용보살이 이것을 보고 그를 애처롭게 여기고 불쌍히 여겨 즉시 그를 제접하여 바다에 들여보내어 궁전에 있는 칠보장을 열었다.
의역 : 외도의 제자가 말하길, '스승은 일체지인이나, 지금은 불제자이지요. 제자의 도는 묻고 받들기에 부족하니 아직 충분하지 못하오. 하나의 일이라도 충분하지 않으면 일체의 지혜라 할 수 없소.' 말이 궁하고 마음이 굴복하여 즉시 삿되고 교만한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였다. 세계의 법 가운데 나룻터나 길이 될 만한 것은 많다. 불경이 비록 오묘하나 이치로써 미루어 생각하면 짐짓 극진하지 못함이 있다. 극진하지 못한 속에서 미루어 부연하고 그것으로써 후학을 깨우친다면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일에 잘못이 없으니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이 일을 생각하고 나서 곧 그것을 행하고자 스승의 가르침과 계율을 세우고 다시 의복을 지어 불법을 부촉하여 조금 다름이 있게 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음을 보이고 날을 택하고 시기를 가려 가르침을 주었다. 제자에게는 새로운 계를 받고 새로운 의복을 입으라 이르고 자신을 홀로 조용한 곳에 수정으로 지은 방에 있었다. 대용보살이 이것을 보고 그를 가련히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즉시 그를 받아들여 바다에 들여보내어 궁전에 있는 칠보장을 열다.
직역 : 칠보화로 꾸며진 함을 열고 모든 방등의 심오한 경전과 한량없는 묘한 법을 그에게 주었다. 무량한 오묘한 법을 주니 용수보살는 받아 읽은지 90일만에 통하여 이해함이 많아 그 마음은 깊이 들어 보배로운 이익에 들어가 체득하였다. 용이 그 마음을 알고 물어 말하였다. '경은 두루 보았는가?' 답해 말하길, '그대의 모든 함속의 경전은 많기가 한량이 없어 다할 수 없다. 내가 읽은 것이 이미 염부제보다 열 배는 된다.' 용이 말하길, '나의 궁중에 소유한 경전은 다른 곳의 경전과 비교하면 셀 수가 없다.' 용수보살가 이미 모든 경의 한 모양을 얻고 무생이인을 구족하였다. 용이 돌려보내자, 남천축에 부처님법을 크게 홍포하고 외도를 꺽어 항복받았으며 마하연을 널리 밝혔고 우바제사 십만게를 지었다. 또 무외론 십만게를 지었는데 중론은 그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의역 : 칠보화로 꾸며진 함을 열고 모든 방등의 심오한 경전과 한량없는 묘한 법을 그에게 주었다. 무량한 오묘한 법을 주니 용수보살는 받아 읽은지 90일만에 통하여 이해함이 많아 그 마음은 깊이 들어 보배로운 이익에 들어가 체득하였다. 용이 그 마음을 알고 물어 말하였다. '경은 모두 읽어 보았는가?' 용수보살이 답해 말하길, '그대의 모든 함속의 경전은 많기가 한량이 없어 다할 수 없다. 내가 읽은 것이 이미 염부제보다 열 배는 된다.' 용이 말하길, '나의 궁중에 소유한 경전은 다른 곳의 경전과 비교하면 그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용수보살가 이미 모든 경의 한 모양을 얻고 무생이인을 구족하였다. 용이 돌려보내자, 남인도에 부처님법을 크게 홍포하고 외도를 꺽어 항복받았으며 대승불교를 널리 밝혔고 우바제사 십만게를 지었다. 또 무외론 십만게를 지었는데 중론은 그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직역 : 때에 어떤 바라문이 주술을 잘 알았는데, 자신의 능력으로 용수보살와 승부를 겨루고자 천축국왕에게 고하기를 '내가 능히 저 비구를 누를 수 있습니다.' 왕은 당연히 그것을 시험하였다. '그대는 크게 어리석구나. 이 보살은 밝기가 해와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투며, 지혜는 성인의 마음과 더불어 비춘다. 그대는 어찌하여 겸손하지 못하여 받들어 공경하지 않느냐?' 바라문이 말하길, 왕은 지혜로운 사람인데, 어찌 이치로써 시험하지 않고 억눌림을 당하십니까?' 왕은 그 말이 극진함을 보고 용수보살에게 다음날 정천전 위에 함께 앉기를 청하였다. 바라문이 나중에 와서 곧 대궐 앞에 주술로 큰 연못을 만들었는데, 넑고 길며 청정하였다. 가운데 천개의 연꽃이 있어 스스로 그 위에 앉아 용수보살에게 과시하였다. '그대는 땅위에 앉아 있으니, 축생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도 청정한 꽃 위에 앉아 있는 대덕지인과 말을 겨루어 논의하려는가?' 이에 용수보살 또한 주술을 사용하여 여섯이빨의 흰 코끼리로 변하고 연못의 물 위로 가서 그 꽃좌석에 나아가 코로 감아 연꽃좌석을 비틀어 뽑아 높이 들어 땅에 던져 버렸다.
의역 : 때에 어떤 바라문이 주술을 잘 알았는데, 자신의 능력으로 용수보살와 승부를 겨루고자 천축국왕에게 말씀드리기를 '내가 능히 저 비구를 누를 수 있습니다.' 왕은 당연히 그것을 시험하였다. '그대는 크게 어리석구나. 이 보살은 밝기가 해와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투며, 지혜는 성인의 마음과 더불어 비춘다. 그대는 어찌하여 겸손하지 못하여 받들어 공경하지 않느냐?' 바라문이 말하길, 왕은 지혜로운 사람인데, 어찌 이치로써 시험하지 않고 억눌림을 당하십니까?' 왕은 그 말이 극진함을 보고 용수보살에게 다음날 정천전 위에 함께 앉기를 청하였다. 바라문이 나중에 와서 곧 대궐 앞에 주술로 큰 연못을 만들었는데, 넑고 길며 청정하였다. 가운데 천개의 연꽃이 있어 스스로 그 위에 앉아 용수보살에게 과시하였다. '그대는 땅위에 앉아 있으니, 축생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도 청정한 꽃 위에 앉아 있는 대덕지인과 말을 겨루어 논의하려는가?' 이에 용수보살 또한 주술을 사용하여 여섯이빨의 흰 코끼리로 변하고 연못의 물 위로 가서 그 꽃좌석에 나아가 코로 감아 연꽃좌석을 비틀어 뽑아 높이 들어 땅에 던져 버렸다.
직역 : 그 바라문은 허리를 다치고 끝내 힘이 빠져 용수에게 귀명했다. '제가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대사를 훼하고 욕되게 하였습니다. 원컨대, 가련히 여겨 저를 받아 주시어 이 우매함을 열어 주소서.'
또 남천축 왕이 모든 나라를 다 거느리고 사도를 믿고 사용하여 사문석자는 한번도 볼 수가 없었는데 나라의 사람들은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그 가르침을 따랐다. 용수보살이 생각하여 말하길, '나무는 뿌리를 베지 않으면 가지가 기울지 않고, 사람의 주인도 교화되지 않으면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 그 나라의 정치하는 법에 왕가에서 돈을 내어 숙위를 고용하는데 용수보살이 이에 응모하여 그 장수가 되었다. 창을 메고 앞을 달리며 행오를 정돈하고 마음을 다스림에 위엄을 엄하게 안해도 명령이 시행되었으며, 법을 들어내지 않아도 사람이 따랐다. 왕이 매우 그를 기특히 여겨 물었다. '이는 어떤 사람인가?' 시종이 답하여 말했다. '이 사람은 모집에 응하였으나, 녹은 받지 않고, 또 돈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에 있어서는 공정하고 삼가하며 한가할 때 익힘이 이와 같습니다. 그 뜻이 무엇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의역 : 그 바라문은 허리를 다치고 끝내 힘이 빠져 용수에게 귀명했다. '제가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대사를 훼방하고 욕되게 하였습니다. 원컨대, 가련히 여겨 저를 받아 주시어 이 우매함을 열어 주소서.'
한편 다른 남천축 국왕이 주변 나라를 다 거느리고 사도를 믿고 사용하여 사문과 부처님제자는 한번도 볼 수가 없었는데 나라의 사람들은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그 가르침을 따랐다. 용수보살이 생각하여 말하였다. '나무는 뿌리를 베지 않으면 가지가 기울지 않고, 사람의 주인도 교화되지 않으면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 그 나라의 정치하는 법에 왕가에서 돈을 내어 숙위를 고용하는데 용수보살이 이에 응모하여 그 장수가 되었다. 창을 메고 앞을 달리며 행오를 정돈하고 마음을 다스림에 위엄을 엄하게 안해도 명령이 시행되었으며, 법을 들어내지 않아도 사람이 따랐다. 왕이 매우 그를 기특히 여겨 물었다. '이는 어떤 사람인가?' 시종이 답하여 말했다. '이 사람은 모집에 응하였으나, 녹은 받지 않고, 또 돈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에 있어서는 공정하고 삼가하며 한가할 때 익힘이 이와 같습니다. 그 뜻이 무엇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직역 : 왕이 그를 불러 물었다.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 대답해 말했다. '저는 일체지인입니다.' 왕이 크게 놀라 물었다. '일체지인은 광대에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대가 스스로 말하니 무엇으로 증험하겠느냐?' 대답해 말하길, '지혜가 있슴을 알고자 원하면 왕은 마땅히 보고 물은 것을 얘기해보십시요.' 왕은 즉시 스스로 생각하길, '나는 지혜로운 임금으로 대논의사인데, 물어서 능히 굴복시켜도 오히려 이것이 명예롭지 못한데 일단 굴복시키지 못하면 적은 일이 아니다. 만약 묻지 않으면 바로 한번에 굴복을 당함이라.' 주저하고 의심하며 한참 있다가 마지못해 그에게 물었다. '하늘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용수보살이 대답하길, '하늘은 지금 아수라와 더불어 싸우고 있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비유하면 사람이 목이 막혀 토하지도 못하고 또 삼키지도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 말을 비판하고자 해도 다시 증거할 수 없었고, 그 것을 인정하려 해도 일을 가히 밝힐 수 없었다. 말하지 않는 사이에 용수보살이 다시 말하였다.
의역 : 왕이 그를 불러 물었다.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 용수보살이 대답해 말했다. '저는 일체지인입니다.' 왕이 크게 놀라 물었다. '일체지인은 세상에 오직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대가 스스로 일체지인이라 말하니 무엇으로 증험하겠느냐?' 용수보살이 대답해 말하길, '지혜가 있슴을 알고자 원하면 왕은 마땅히 알고 있는 것을 얘기해보십시요.' 왕은 즉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지혜로운 임금으로 대논의사인데, 물어서 능히 굴복시켜도 오히려 이것이 명예롭지 못한데 일단 굴복시키지 못하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만약 묻지 않는다면 바로 한번에 굴복을 당함것이 되니.' 주저하고 의심하며 한참 있다가 마지 못해 그에게 물었다. '하늘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용수보살이 대답하기를, '하늘은 지금 아수라와 더불어 싸우고 있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말하자면 사람이 목이 막혀 토하지도 못하고 또 삼키지도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 말을 비판하고자 해도 다시 증거할 수 없었고, 그 것을 인정하려 해도 일을 가히 밝힐 수 없었다. 말하지 않는 사이에 용수보살이 다시 말하였다.
직역 : '이는 헛된 논의로 승리를 구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왕은 잠시 기다리시오.' 잠깐 증험하는 말이 끝나자 공중에서 문득 창과 병기가 서로 얽혀 떨어졌다. 왕이 말했다. '창과 방패가 비록 전투하는 무기이나 그대는 어찌 반드시 이것으로 하늘과 아수라와 싸우는 것인지 알 수 있겠소?' 용수보살이 말하길, '헛된 말을 꾸밈이 실제의 일로 비교함만 못합니다.' 말을 마치자 아수라의 손과 발가락 및 그 귀와 코가 허공으로부터 내려왔다. 또 왕과 신하, 백성, 바라문의 무리가 허공 가운데 맑게 개이어 양쪽 진이 서로 대치함을 보게 하였다. 왕은 곧 머리를 조아리고 그 법의 교화에 감복되었으며, 대궐의 일만 바라문이 다 묶은 머리를 버리고 성취계를 받았다. 이 때에 한 소승법사가 있어 항상 분하고 비뚤어진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용수보살이 장차 세상을 떠나려 하면서 묻기를 '그대는 내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느냐' 대답하기를 '진실로 원하지 않소.' 물러나 한가한 밤에 들어가 여러날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으므로 제자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마침내 매미가 껍질을 벗은 듯이 가버렸다.
의역 : '이는 허황된 논의로 승리를 구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왕은 잠시 기다리시오.' 잠깐 증험하는 말이 끝나자 공중에서 문득 창과 병기가 서로 얽혀 떨어졌다. 왕이 말했다. '창과 방패가 비록 전투하는 무기이나 그대는 어찌 반드시 이것으로 하늘과 아수라와 싸우는 것인지 알 수 있겠소?' 용수보살이 말하길, '헛된 말을 꾸미는 것보다 실제 한번 보는 것이 낫습니다.' 말을 마치자, 아수라의 손과 발가락 및 그 귀와 코가 허공으로부터 내려왔다. 또 왕과 신하, 백성, 바라문의 무리가 허공 가운데 맑게 개이어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함을 보게 하였다. 왕은 곧 머리를 조아리고 그 법의 교화에 감복되었으며, 대궐의 일만 바라문이 다 묶은 머리를 깍아 버리고 성취계를 받았다. 그 당시에 한 소승법사가 있어 항상 분하고 비뚤어진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용수보살이 장차 세상을 떠나려 하면서 묻기를 '그대는 내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느냐' 대답하기를 '진실로 원하지 않소.' 물러나 한가한 밤에 들어가 여러날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으므로 제자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마침내 매미가 껍질을 벗은 듯이 열반에 들었다.
직역 : 이 세상을 떠난 이래로 지금에 이르러 백세가 지났는데 남천축의 모든 나라는 그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공경하여 받들기를 부처님같이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나무아래에서 그를 나았는데 거기에 연유하여 아주타나라 했는데, 아주타나는 나무 이름이다. 용으로 인해 그 도가 완성되었으므로 용을 글자에 배하여 호를 용수라 한다.
의역 : 용수보살이 열반에 드신 이래로 지금에 이르러 백년이 지났는데 남인도의 모든 나라들이 그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공경하여 받들기를 부처님같이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나무아래에서 그를 나았는데 거기에 연유하여 아주타나라 했는데, 아주타나는 나무 이름이다. 용으로 인해 그 도가 완성되었으므로 '용'을 글자에 배치하여 호를 용수라 한다.
2. 전기(傳記)의 성격
쿠마라지마는 인도인이 아니다. 그는 서역 출신으로 나가르주나의 사후 100년 경 출생하였다. 서북인도에서 유학을 하였지만, 나가르주나의 주요 활동무대이었던 남인도에는 간적이 없다. 또한 이 전기의 후반에 있는 신과 악마의 투쟁을 시현하여 국왕을 신복시켰다는 이야기는 나가르주나의 제자 아리야데바(Aryadeva, 성제바)의 전기-이것도 쿠마라지바의 번역으로 전해진다.-에도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쿠마라지바역의 나가르주나 전 에는 2본이 있지만, 비교하여 보면 세부에는 상당한 동이가 있다. 이와 같이 전기의 텍스트 그 자체에 혼동이 있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많다. 어떠한 경우라도 소위 나가르주나의 전기는 다소의 사실과 상당한 상상. 신비화가 혼합된 것이라는 점, 그것은 나가르주나의 전기라기보다는 그의 사후 100년 경의 사람들에 비친 나가르주나의 이미지를 전하는 것이라는 점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전기중에는 사실로 생각되는 몇가지의 기록이 보이며, 나가르주나의 사람됨을 방불케하는 묘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전기에 따르면 나가르주나는 남인도에서 태어나고 남인도에서 활약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현대의 일반적 학설에서도 그는 남인도 데칸고원의 비다르바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후에도 남인도의 안드라왕국에서 활약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은 그가 반야경 사상의 철학적 대성자이며, 이 반야경이 남인도에서 성립되고 점차로 북인도로 유포되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나가르주나가 그의 저작중에서 바라문교학을 정확히 이해하고 예리한 비판을 하고 있는 사실을 생각하여도 그를 바라문출신이라고 하는 전기의 기술은 신뢰하여도 좋을 것이다. 출가 후 먼저 소승의 경전을 공부하였다고 하는 것도 그의 그후의 저작과 활동이 무엇보다도 우선은 설일체유부등 소승의 제학파의 아비달마철학에 대한 비판을 의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나가르주나가 용궁에서 대승경전-아마도 반야경을 중심으로 하는 것-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지 않은 동안 그 경전은 용왕의 관리 아래 바닷속에 비장되어 있었다는 대승불교도 일반의 신앙의 표현으로 이상할 것은 없다. 샤키야무니 붓다의 사후 수세기 후부터 세상에 유포되기 시작했던 대승경전을 불설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대승교도는 이와 같은 설화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나가르주나가 출가이전, 은신술을 익혀 궁중에 숨어 들어가고 용궁으로부터 남인도로 돌아왔다는 것, 기적과 신통을 통하여 국왕과 바라문을 교화하였다는 이야기 등은 모두 나가르주나를 신비화하기 위한 전기작가의 의도를 나타낸다. 쿠마라지바 시대의 중국인은 나가르주나를 불교신비가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혜원(334~416)은 소승불교 학습기의 나가르주나가 숲속에 혼자 앉아 명상을 하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또한 나가르주나는 명상의 수행에서 불위에 다음가는 십지(보살의 수행의 단계를 10위로 나눈 것 중 최고위)의 계위에 도달한 보살이라고도 한다(出三藏記集). 고대의 인도에 있어 종교적 행위자가 우선적으로 행하는 것은 요가(명상)이다. 마술. 은신술은 요가가 가져오는 결과의 하나이다. 나가르주나가 신비가의 계보에 들어가 있는 것은 그가 반야경의 신비주의의 계승자라는 점과 관련하여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 나가르주나
나가르주나가 은신술로써 궁중에 숨어들어가 여자를 유혹하였다고 하는 것은 쾌락의 추구와 그 결과로서의 괴로움의 출가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으로, 이는 전기작가가 잘 사용하는 기법이다. 샤키야무니 붓다가 청년시대에 영예와 쾌락으로 충만한 생활을 보냈으나 이러한 생활의 공허함의 자각이 그를 출가. 수행케 하였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출가의 동기에 대해서는 두 이야기가 동일하다 하더라고 샤키야무니 붓다의 경우는 기품이 있고 정서가 담긴 것으로 묘사되어 있음에 대하여, 나가르주나의 경우에는 죽음을 건 쾌락의 추구와 그 후에 닥친 절망으로 묘사되어 있다. 붓다의 원만한 그리고 평화로운 생애에 대하여, 나가르주나는 기성의 윤리와 제도에 격렬히 반항하는 니힐리스트의 이지미가 부여되어 있다. 다음에 언급할 그의 사상도 종래의 불교의 전통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점에서 니힐리즘의 정신으로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우연한 일인가 그렇지 않은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격정적이며 인간관계에 좌절이 있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점은 많은 공의 철학자에 공통적이다. 나가르주나의 제자인 아리야데바도 인도교의 신전에 들어가 신상의 눈을 뽑고 신과 대결하였으며, 그의 거리낌없는 비판이 재난을 불러와 격한 투쟁의 생애의 마지막에는 이교도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쿠마라지바도 장안에 오기까지는 서역의 여러 나라에서 긴 유랑의 생활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동안 구자국(龜玆國)에 있던 때에도 또한 장안에 온 후에도 그는 왕에 강요되어 술을 마시고 여자를 범하여 계율을 어기게 되었다. 일찍이 감숙성(甘肅省)에 있던 때에는 불교의 사상가로보다는 음양술수의 대가로 취급을 받았다. 만년의 성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종 비탄스러운 출가생활을 보냈다. 후대의 중관학자 샨타라크쉴라도 종교적. 정치적 투쟁의 와중에서 살해되었다.
이러한 전설의 진위와는 관계없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중과사상가들의 생애는 그 철학과 명상이 지시하는 절대의 적정과도 흡사하며 파란만장한 것이다. 그들의 변증은 그 변증이 전하는 공의 세계의 청명함에도 불구하고 불과 같은 치열한 논리였다. 이 세계를 꿈. 환영으로 본 그들이 현실에서 발견한 것은 숲에서의 폐쇄된 생활이 아니라 추한 인간세의 악몽이었다. 이러한 것이 중관의 사상과 전혀 관계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태의 핵심은 악몽의 고통을 모르는 자에게 이 세계를 꿈. 환영으로 보아야 함을 말하고자 함에 있을 것이다.
생몰연대(生沒年代)
남인도의 하이데라바드에서 동남으로 흘러가는 크리슈나강의 오른쪽 언덕에 나가르주나콘다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이 부근은 최근 대규모의 댐이 건설되었었지만, 그 공사와 병행하여 유적의 고고학적 조사도 진행되었다. 서력 기원 전후의 수세기 사이에 사타바하나왕조(안드라왕국)가 남인도 일대에 군림하고 있었는데, 나가르주나가 이 왕조의 한 왕과 친교를 맺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전기의 기술과,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 그가 국왕에게 준 교훈적 서한(suhrllekha, 龍樹普薩權戒王頌)등으로부터 추정될 수 있다. 다만 그 왕이 이 왕조의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어 일정하지 않다. 서력 80~104년 또는 106~130년이 어느 때에 재위하였던 곤다미푸트라 샤타카루니왕이라는 학자도 있으며, 2세기 후반(173~199)에 재위하였던 야즈나슈리(슈리야즈나 샤타카루니)왕이 나가르주나의 지우(知友)라는 설도 있어 확실히 판단할 수 없다.
중국에 전해지고 있는 전설로써도 나가르주나의 연대를 확정하기는 어렵다.쿠마라지바와 동시대인이었던 혜원(慧遠). 승조(僧肇). 승예(僧叡) 등은, 나가르주나가 샤키야무니 붓다의 사후 800년 이상을 지나 세상에 나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길장은 중국에 전해지고 있는 나가르주나의 연대론을 정리하여 기술하고 있지만, 최근 에띠엔느 라모뜨 교수는 이를 비판적으로 고찰하여 나가르주나는 붓다멸후 880년에 태어난 것으로 확정하고 있다. 쿠마라지바와 그 제자들은 붓다의 죽음을 기원전 637년 - 이는 물론 현대의 학설과 큰 차이가 있다. - 으로 생각하였으므로, 불멸후 880년은 서기 243년이 된다. 한편 앞에서 인용한 쿠마라지바 번역의 전기에 기록되어 잇는 바와 같이, 나가르주나의 사후 100년에 남인도의 사람들이 그를 붓다와 같이 숭아하고 있다는 기술은 쿠마라지바의 시대가 나가르주나의 시대에 1세기 늦음을 암시하고 있다. 쿠마라지바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에 걸쳐 활약했던 인물이지만, 그로부터 100년을 소급한 시기를 나가르주나가 죽을 때로 생각하면 그는 3세기의 인물이 된다.
그러나 앞에서의 사타바하나왕조와의 관계를 중시하면 나가르주나는 2세기에 이미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나가르주나를 서력 기원후 150~250년 사이에 위치시키고 있다. 나가르주나의 저작의 내용과 여러 문헌을 비교하여 획득한 추정도 2세기~3세기라는 그의 연대의 폭을 더욱 좁히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신자료가 발견되기까지 우리는 나가르주나의 연대를 확정할 수 없다.
3. 용수보살의 저서
1) 中論(그의 기본저서)
2) 空七十論(空의 사상을 70偈頌으로 설함)
3) 廻諍論(인도 논리학파인 니야야학파의 사상을 비판, 공의 이론 해명)
4) 六十頌如理論(공의 이론을 60頌으로 정리)
5) 廣破論(초기 니야야학파를 비판)
6) 寶行王正論(서간문의 형태로 국왕의 통치 등에 대하여 서술함)
7) 勸誡王頌(서간문의 형태로 왕의 일상생활등에 대해 권계함)
8) 大乘二十頌論(유심사상적인 내용을 설함)
9) 因緣心論
10) 菩提資糧論
11) 大乘破有論
12) 大智度論(대품반야경의 주석서, 鳩摩羅什역)
13) 十住毘婆沙論(十地經의 주석서, 칭명염불 및 아미타불에 대한 찬양등 보임)
14) 十二門論(중론을 12항으로 나눠 간략히 설한 것)
15) 기타
* 나가르주나 교학의 전개
1) 중관파의 전개
A) 초기 중관파
* 聖提婆(Aryadeva)--百論, 四百論 등
* 라후라바드라(Rahulabhadra)--讚般若婆羅蜜偈 등
B) 중기 중관파
* 붓다팔리타(Buddhapalita, 佛護)--붓다팔리타注
* 바바비베카(Bhavaviveka, 淸辯)--般若燈論
* 찬드라키르티(Candrakirti, 月稱)--프라사나파다(淨明句論)
* 기타
C) 후기 중관파
* 쥬냐나가르바(JNYaanagarbha, 智藏)--二諦分別論
* 샨타라크시타($antarakSita, 寂護)--攝眞實論, 中觀莊嚴論
* 카말라실라(KamalaSiila, 蓮華戒)--攝眞實論細疏, 中觀莊嚴論細疏, 中觀明
* 기타
2. 중기 중관파의 전개
1) 中論 주석에 관한 쟁론
* 바바비베카의 붓다팔리타 비판
* 찬드라키르티의 붓다팔리타 옹호 및 바바비베카 비판
* 붓다팔리타 <-- 바바비베카 <-- 찬드라키르티
2) 歸謬論證과 自立論證
* 귀류논증(PrasaNGgika)--찬드라키르티
* 자립논증(Svatantrika)--바바비베카
3. 바바비베카
* 500-570년 경
* 남인도 출신
* 그 이후 중관파와 유식파의 논쟁이 일어남(청변,호법의 空有의 논쟁)
* 반야등론의 중심내용
1) 중론의 게송을 논리학적인 관점에서 이해
2) 언설을 초월한 진실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추론식을 사용
예) 勝義에 있어서 火와 薪은 같지않다.(宗)
왜냐하면 작용주체와 작용객체인 까닭에.(因)
예를들면 절단하는 것과 절단되어지는 것과 같이.(喩)[10-1의 釋]
3) 二諦說
* 勝義諦--勝義 그 자체(언설을 초월)
勝義에 隨順하는것(반야 지혜로 언표된 것, 논리 등)
世俗諦--일상적 언어, 세간적으로 올바른 것
4. 찬드라키르티
* 600-650년 경
* 남인도 출신
* 귀류논증파의 祖
* 프라사나파다의 중심 내용
1) 바바비베카의 논리주의 비판
2) 二諦說
* 勝義諦--聖者의 지혜에 의해 나타나는 것
世俗諦--眞實世俗(범부의 건전한 인식으로 지각되는 것)
虛妄世俗(범부의 불건전한 인식으로 지각되는 것)
* 唯世俗(성자에게 있어 집착의 대상이 되지 않는 세속)
3) 승의제와 세속제의 단절--종교적 실천주의로 극복
후기중관파
1. 후기중관파란
쥬냐나가르바,샨타라크시타등을 중심으로, 나가르주나의 전통을 이어받으며 아울러 불교논리학에도 정통한 중관파의 一群.
2. 후기중관파의 특색
1) 나가르주나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지만 불교논리학파, 그 중에서도 특히 다르마키르티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것.
2) 대부분의 사람이 자립논증파의 계보에 속하고 있는 것.
3) 불교내의 유부, 경량부, 유식 등의 제견해를 중관의 입장에서 흡수 재정리하고 있는 것.
3. 후기중관파의 인물
1) 쥬냐나가르바
* 700-760경
* 주요저서
二諦分別論, 瑜伽修習道 등
* 티베트에서는 일반적으로 3인의 쥬냐나가르바가 나타나고 있음.
2) 샨타라크시타
* 725-783경
* 나란다 승원의 대학자, 티베트에 불교를 전한 장본인
* 주요저서
타트바상그라하(Tattvasamgraha,섭진실론),중관장엄론,이제분별론세소, 諍正理註細說義 등
3) 카말라실라
* 740-797경
* 샨타라크시타의 제자
* 샨타라크시타의 유언에 따라 티베트에 들어가 중국의 선승 마하연과 삼예사 원에서 논쟁을 벌임--소위 삼예의 논쟁
* 주요저서
섭진실론세소,중관장엄론세소,중관광명론,진실광명론,일체무자성논증론, 수습차제 등
4) 기타 논사
*슈리굽타 *하리바드라 *캄바라 *지타리 *아티샤
4. 중관장엄론에 대하여
* 샨타라크시타의 대표적 논서이자 후기중관파의 근본저서
* 쥬냐나가르바의 이제분별론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됨
* 특색
(1) 離一多性證因에 의해 일체법무자성을 논증, 특히 知의 一性과 형상의 多性 간의 모순을 논하는 소위 형상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
(2) 불교의 제학파를 유부,경량부,유식파의 순서로 단계적으로 배치, 비판하면서 중관의 입장을 최고로 두는 것.
(3) 유식등의 이론도 유정을 윤회로 부터 해탈로 이끄는 방편으로서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
*二諦說과 관련한 후기중관파 정의에 관한 논쟁--유가행중관파의 의미
5. 후기중관파의 3대논서
이제분별론, 중관장엄론, 중관광명론
Ⅳ. 이종철 교수의 불교강좌
공사상의 근원적 질문 안고 불교사상 탐구 시작
흔히 연기(緣起)라던가 공(空)이라는 말로 불교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합니다. 어찌 보면 지극히 간단한 말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인가 많은 사람들이 연기니 공이니 쉽게 말하며 불교 사상의 핵심을 다 파악하고 있는 듯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연기가 무언데, 공이 무언데 하고 캐묻기 시작하면 어느새 대답에 궁해지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연기’나 ‘공’이 불교 이외의 다른 사상 체계에서는 쓰이지 않는, 불교만의 특이한 전문 용어임을 감안한다면 이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어떤 이는 ‘연기’가 부처님의 깨달음에 직결되는 용어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적 알음알이로 헤아려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성적 파악은 아예 불가능하니 헛된 노력은 집어치우고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 덧없는 인생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공’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합니다. 깨달음의 저 깊은 곳에서 보면 다 일리 있는 말이고 저마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진지함이 깃들어 있는 말입니다. 불교 텍스트에서도 같은 언급에 자주 접하게 됩니다. 공성의 세계나 연기의 세계는 언어가 끊기고 알음알이가 멈춘 지점에서 저절로 열리는 세계, 스스로 증득해야 알며 깨친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로 묘사되곤 합니다. 우리가 긍정하든 부정하든 적어도 불교 텍스트에서는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는 입장에 서있는 저로선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문화가 어느덧 대승불교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주의적인 형태인 선불교에 친숙해있기 때문에, 이성이나 언어에 대한 불신이랄까 회의가 비교적 널리 퍼져있는 편이지요.
그렇지만 연기나 공의 체험적 측면을 강조한 나머지, 언어나 논리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사태는 심각해집니다. 부처님의 마음만 취하고 말은 버려도 좋다는 이야기로 비약할 수 있으며, 또한 불교 사상가들이 세계 사상사에서 이루어낸 혁혁한 공적들이 사장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식들이 판치는 세상도 당연히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 텍스트에 비추어보아도, 연기나 공이 언어나 논리를 부정한다는 말은 아무런 근거 없는 억측에 지나지 않으며, 이 역시 무언가 잘못된 선입견이 만들어낸 착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하게 말하라! 공사상은 공성의 체험적 측면을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공성의 표현을 중시합니다.
구마라집 보다 조금 이른 4세기 말에 중국의 도안(道安)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노자의 첫 구절을 원용하여, 도에는 가도의 도와 상도의 도가 있다고 보고 이를 각각 속제와 진제에 배당시켰습니다. 이는 나가르주나(龍樹 150~250)가 〈중론송〉에서 표명하고 있는 이제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공성의 체험적 측면과 언어를 동시에 존중하는 이, 진제와 속제를 동시에 바라볼 줄 아는 눈 밝은 이, 곧 ‘두 눈(複眼)을 가진 이’의 모습을 우리는 〈중론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재에 앞서 우선 전제로 삼아야하는 근본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공사상은 기본적으로 본질주의자의 입장과 양립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현상을 넘어 또는 현상의 저 밑바닥에, 내 안이나 내 밖에서, 그 어떤 자기 원인적 존재론적 본질을 설정한다면, 이는 본질주의자입니다. 다른 한편 존재론적 본질이 부정된다고 해서 현상마저 부정해버린다면, 이도 본질주의자입니다. 현상과 본질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결국 같기 때문입니다. 삶의 세계에서 현상이 있으면 거기에 반드시 존재론적 본질이 있어야 하는가, 또는 정말로 있는 것인가? 공사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을 안고, 이제 우리는 나가르주나와 함께 꽤 긴 여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나가르주나에게 부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논서(論書)를 쓰려는 사람은 자신의 스승이 얼마나 위대한 지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먼저 스승의 수승한 능력을 찬탄하면서 스승에게 경배를 올린다.”
이는 와수반두(世親, 320~400)가 지은 〈구사론〉 첫머리에 나오는 말로, ‘귀경게’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논서를 보면 흔히 첫머리에 저자가 자신의 스승을 칭송하는 게송이 붙어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망갈라쉴로까(magalaloka)’, 일반적으로 ‘귀경게(歸敬偈)’라고 부르는 이 게송이 언제부터 논서 첫머리에 붙게 되었는지 그 정확한 연원은 확정짓기 어렵지만, 대충 인도에서 여러 학파의 원형이 성립되기 시작한 시점 곧 기원 전후로 추정됩니다. 어쨌든 2~3세기의 불교사상가 나가르주나의 〈중론송(中論頌)〉도 스승을 찬탄하는 귀경게 두 수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이야기도 이 귀경게 풀이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존재는] [영원불변한 원인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며(不生), 또한 [완전한 無로]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不滅). [원인에 해당하는 존재는, 영원불변한 실체로서] 상주하는 것이 아니며(不常), 또한 [결과에 상관없이] 단멸하는 것도 아니다(不斷). [원인에 해당하는 존재와 결과에 해당하는 존재는 서로] 동일한 것이 아니며(不一), 또한 [서로 무관한] 별개의 것도 아니다(不異). [존재는 영원불변한 원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不來), 또한 [영원불변한 원인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不去/不出). [존재의] 이러한 [인과관계, 곧] 연기(緣起)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며, [그 자체] 완전한 해방의 영역이다. 이와 같은 연기(緣起)를 가르쳐주신, 설법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설법자이신 정각자(正覺者=부처님)께 경배를 올린다.”(1-1; 1-2)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 없다고요? ‘존재’니 ‘실체’니 ‘인과관계’니 잘 들어보지 못한 철학적인 용어가 나오니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 도망치고 싶지요?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르겠습니까! 괄호와 같은 기호도 많아서 복잡하지요? 참고로 이번 연재에서 제가 쓰는 몇 가지 기호에 관해서 보충 설명하지요. 각진 괄호 [ ]안에 든 말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원문에 없는 말을 문맥에 따라 보충한 것이기 때문에, 제 나름의 원문 이해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둥근 괄호 ( )안에 든 말은 간단한 설명이나 대체 가능한 용어인데, 필요에 따라 한역(漢譯)이나 산스크리트어를 첨가하는 수준에 그치겠습니다. 어지간하면 괄호 없이 쉬운 문장으로 만들어보도록 애써보지요. 게송을 인용할 때 ‘(1-1)’, ‘(3-2)’와 같이 썼는데, 이는 각각 첫 번째 장의 첫 번째 게송, 세 번째 장의 두 번째 게송을 뜻합니다.
그럼, 다시 귀경게로 돌아가겠습니다.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나가르주나가 부처님을 어떤 분으로 보았는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사상도 그 핵심은 결국 부처님의 깨달음(正覺)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귀경게는 좋은 소재가 됩니다. 나가르주나는 귀경게에서 부처님을 ‘설법자 가운데 최고가는’ ‘스승’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와수반두도 〈구사론〉의 귀경게에서 부처님을 ‘일체지자(一切智者)’로, 대비심(大悲心)을 지닌 ‘스승’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와수반두의 설명에 따르면, ‘스승’이란 정법(正法) 곧 진리를 가르쳐서 중생을 윤회의 수렁에서 구해내지, 결코 신통력이나 소위 ‘은총’ 따위를 베푸는 이가 아닙니다. 나가르주나가 부처님을 ‘스승’으로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진리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귀경게에서 보듯이, 나가르주나는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진리를 ‘연기’라고 못 박습니다. ‘연기’의 심층적인 의미도 문제 거리이겠습니다만, 어쨌든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이 바로 이 ‘연기’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겠지요? 〈중론송〉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끝납니다.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말미암아, [윤회의 원인인] 잘못된 견해를 깡그리 끊어버리도록 진리를 설해주신, 그 분 가우따마(Gautama=부처님)에게 귀의합니다.”(27-30)
중생을 향한 가없는 대비심(大悲心)을 지니고, ‘연기’라는 진리를 설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삿된 견해를 없앨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윤회의 수렁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의 모습, 〈중론송〉의 처음과 끝에는 바로 이러한 부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부처님을 향한 신앙은 맹종도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도 아니다
나가르주나와 와수반두, 이 두 인물은 대승불교가 배출한 가장 걸출한 불교 사상가입니다.
각자 대승불교의 쌍벽을 이루는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의 비조로서 추앙받는 인물이지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부처님을 ‘스승’으로 부른다는 것은 우리의 종교적 감성에 비추어볼 때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전통적으로 대승불교 문화권에 속해있는 데다가 근현대에 들어서서 기독교와 같은 타종교의 영향이 가미되면서 우리 마음속에 어느덧 부처님은 신적인 존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부처님을 일체지자(一切智者) 곧 전지자(全知者)로서 모셨던 전통적 시각이 전능자(全能者)에 대한 ‘신앙’으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에게서 그러한 신적인 모습을 띤, 전능자 부처님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신통력을 부린다든지 점을 친다든지 신적인 은총을 내린다든지 하는 일은, 부처님이 스승으로서 제시하는 구제의 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윤회의 수렁에 빠진 중생에게 부처님은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손을 내밀어줍니다. 그 손을 붙잡고 수렁에서 나오는 일은 중생 각자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나가르주나에게 이 진리는 ‘연기’라는 한마디로 응축됩니다. 이 즈음에서 나가르주나를 거울삼아, 불교에서 말하는 ‘신앙’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겠습니다.
현대 사회는 ‘다종교 사회’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종교학자들은 이를 ‘종교다원주의’로 묘사하여 다종교 간의 상생(相生) 관계를 꾀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상계를 휩쓸면서 ‘절대적 진리’의 고전적인 아성을 우스개 거리로 만들고 있습니다.
다종교 사회에서 한 종교만의 진리성을 주장하는 일은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격이 될 것입니다. 해체를 주장하는 곳에서 설립을 주장하면 뺨맞기 십상입니다. 후세의 사가들이 ‘상대주의 시대’로 칭할는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하신 말씀, 곧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본다”는 말씀, 더불어 “여래가 이 세상에 태어나든 태어나지 않든지 이 법성(法性=緣起)은 정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깨달음이 당신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옛 부처님이 가셨던 길을 가셨을 뿐이라고 겸허하게 말씀하십니다. 옛날 부처님이 가셨고 지금 부처님이 가시고 훗날 부처님이 가실 길이 정해져 있고 그 길이 ‘연기’라고 한다면, 연기는 비록 사변의 대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미 절대적 진리 또는 궁극적 진리(불교에서는 이를 ‘진제(眞諦)’라고 부릅니다)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따라서 ‘연기’를 존중하는 입장과 ‘상대주의 시대’와는 어딘가 걸맞지 않으며, 심지어는 서로 모순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앙’도 이러한 진리관에 뿌리박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을 ‘신(信)’자 하나를 들어볼까요? 제가 확인해 본 바로 ‘신(信)’(범어로 ‘쉬랏다 raddh’)은 결코 단순한 종교적 신앙, 곧 우리가 체험할 수 영역을 ‘믿습니다’ 하나로 다 인정해버리는 비지성적 태도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信)’은 ‘진리에 대한 확신’, 중생을 고의 굴레에서 완전하게 해방시켜주는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확신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절대적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는 그것이 절대적 진리로 향하는 도정에서 제시된 방법론적 회의나 상대적 진리가 아닌 한,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연이 먼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은 연기를 보신 분이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칭송 받습니다. 우리가 연기를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진리, 한 치의 우연이나 상대성도 허용하지 않는 냉혹하리 만치 엄숙한 진리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교 신자의 신행(信行)은 이와 같은 절대적 진리에 대한 확신, 부처님 말씀 속에 절대적 진리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나가르주나가 머리 속에 그렸던 ‘연기’에는 이러한 진리관, 부처님에 대한 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연기와 희론
“연기(緣起)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는 접근할 수 없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송(中論頌)〉 귀경게에 나오는 이 구절은 대승불교(大乘佛敎) 사상의 핵심을 건드리는 말입니다.
‘세간(世間)의 무수한 속설로는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은 한역(漢譯)에서는 흔히 ‘희론적멸(戱論寂滅)’이라는 멋들어진 말로 옮기고 있습니다. ‘적멸(寂滅)’이야 ‘소멸된다’ ‘없어진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좀 복잡한 문제는 제가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 풀이한 ‘희론(戱論)’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이 말은 대승불교 사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한 용어이기 때문에 2회에 걸쳐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희론’은 범어 ‘쁘라빤짜(prapaa)’의 한역인데, 이는 어근 pra-pa 또는 pra-pac (상세히 설명하다; 흩뜨리다)에서 나온 명사형입니다. 원래는 현시, 전개, 확장, 확산, 확대, 다양화, 상세한 설명을 뜻하는 말인데, ‘흩뜨리다’는 뜻이 우세했는지 점차로 철학적 영역에서는 ‘현상’ ‘현상계’ ‘환상’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희곡에서는 ‘어리석은 말’을 뜻하게 됩니다.
대승불교를 주요한 모태(母胎)로 삼은 한역에서는 ‘희론(戱論), 허위(虛僞), 망상(妄想)’과 같이 좋지 않은 뜻으로만 쓰입니다. 한역만 보아도 대승불교에서 ‘쁘라빤짜’를 상당히 안 좋게 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아마도 ‘흩뜨리다’라는, 어근의 뜻을 살려서, 무언가 진상을 꿰뚫지 못하고 언저리로만 얼쩡거리는, 알갱이를 꿰차지 못하고 모호하게 흩뜨리는 말이라는 뜻으로, ‘희론’이라 옮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연기를 왜 ‘희론적멸’로 표현했는지 〈중론송〉의 다음 게송(偈頌)을 대비시켜 생각해보면 그 의의가 좀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업(業)과 번뇌(煩惱)가 소멸함으로써 해탈(解脫)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심(分別心, vikalpa)에서 생기고 분별심은 희론(戱論, prapaa)에서 생기지만, 희론은 공성(空性)에서 소멸한다.“(18-5)
이 게송에서 공성(空性)은 연기(緣起)와 같은 말입니다. 〈중론송〉에서는 “‘연기’ 바로 그것을 우리는 ‘공성(空性)’이라 말한다. 〈중략〉”(24-1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업이나 번뇌는 생사윤회(生死輪廻) 세계를 가리키기 때문에, ‘희론’은 생사윤회의 원인(原因)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되고, 연기(緣起)와 대극적(對極的)인 자리에 놓입니다.
‘분별심(分別心)’이란 말이 나왔으니 유식사상(唯識思想)에 빗대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유식사상에서는 우리 마음을 표층적(表層的) 영역과 심층적(深層的) 영역으로 나눕니다.
심층 영역에 해당하는 마음이 소위 ‘알라야식’이지요. 그런데 유식사상의 용어법을 보면, 표층마음과 심층마음을 같이 싸잡아서 곧 우리의 오감각(五感覺)과 의식(意識), 마나식, 알라야식을 전부 ‘위깔빠(vikalpa)’ 곧 ‘분별심’이라고 부릅니다.
‘분별심’은 생사윤회의 대해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 중생(衆生)의 마음을 뜻합니다. 흥미로운 일은 ‘분별(分別)’이란 말로 중생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 마음의 현 상태까지 그려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분별’이라 하면 여자-남자의 분별, 적-친구의 분별 등 수많은 차별상(差別相)이 언급되겠지만 이 모든 분별은 나와 대상의 분별 곧 주관(主觀)-객관(客觀)의 분별(分別)로 통합될 수 있습니다.
유식사상에서는 이 분별심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지 못하는 한, 주관과 객관으로 경계선이 그어진 분별심이 있는 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고 이 때문에 업과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이 분별심이 희론에서 생긴다고 하는군요. 왜 그럴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이 바로 짠드라끼르띠입니다. 그는 ‘희론은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희론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무언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말하고 있지요?
이 즈음에서 언어의 어떤 점이 생사윤회와 관련되는지 캐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어는 보기에 따라 여러가지 기능 및 속성이 있습니다. 인간을 ‘호모 로스(Homo loquens, 언어적 인간)’라고 해서 다른 동물 종(種)과 확실하게 구분하는 표식으로 언어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최근에는 기호학적 사유가 진행됨에 따라, 인간에게 있어 언어의 중요성을 새로운 관점에서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언어에 관해서, 불교 사상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분절(分節) 기능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분절’이 말 그대로 대나무를 마디마디 쪼개나가는 것을 뜻하듯이, 언어의 분절기능이란 온전한 존재의 세계, 통짜인 존재의 세계를 갈래갈래 나누어 ‘갈라진 세상’으로 만드는 기능입니다.
좀 까다로운 이야기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어의 분절기능은 ‘의미’의 형성과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한 예로 ‘희다’라는 말의 의미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볼까요? 유명한 불교 논리학자 진나(陳那, 디그나가)의 설명을 따라가 보면, ‘희다’라는 말은 우선 ‘희지 않은 것’을 동시에 내세우게 되고, 그 다음에 노란 것이 아니다, 까만 것도 아니다, 붉은 것도 아니다 등등 다른 색을 배제함으로써 ‘희다’의 의미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같이 언어는 일차적으로 자타(自他)의 분절을 꾀한 뒤, 차례대로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의미를 구축합니다. 나가르주나가 말한 ‘희론’이 언어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언어의 분절 기능 때문이고, 이 점 때문에 희론은 주관-객관의 분별로 대표되는 분별심의 토대로 자리 잡습니다.
유식사상에서 알라야식을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고도 하지요? 말 그대로 종자란 종자는 모두 알라야식 안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알라야식을 일체종자식이라 합니다.
그런데 종자 가운데는 ‘업종자(業種子)’라고 부르는, 전생에서 행한 업의 과보를 때가 되면 싹틔울 씨앗도 들어있지만,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 불리는 특이한 씨앗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명언종자가 바로 언어능력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마음은 하얀 도화지 같이 그 안에 아무것도 칠해져있지 않은 백지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선천적으로 다양한 종자들을 지니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알라야식 안에 명언종자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표층마음에서뿐만 아니라 심층마음에서도 언어활동이 존재한다는 말이 됩니다. 심층마음에서 진행되는 언어활동을, 유식사상에서는 ‘의언(意言, manojalpa: 마음의 속삭임)’이라고 표현하여, 조용히 속삭이듯 진행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표층마음에서처럼 그렇게 확연하게 언어의 분절 기능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언어의 분절기능은 여전히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묵직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지요.
표층마음에서 심층마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마음속에는 언어의 분절기능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관한 그 어떠한 말도 언어의 분절 기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결국 통짜인 존재의 세계를 갈가리 찢어놓는 꼴이 되기 때문에, 깨달은 이의 눈으로 보면 ‘놀고 있네!’ 라는 한마디밖에 들을 수 없게 됩니다. 구마라집의 역어(譯語) ‘희론(戱論)’의 배후에는 이러한 숨은 맥락이 있지 않을까요?
희론이 사라질 때, 언어의 분절기능을 벗어나 존재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통째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분별심을 떨쳐버리고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듯한 생사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희론 적멸’에 관한 나가르주나의 의중은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가르주나가 ‘희론이 적멸한’다고 표현한 ‘연기’는 연기를 깨달음으로써 증득하게 되는 ‘해탈’, ‘열반’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중론송〉 귀경게에는 연기에 관한 또 다른 수식어 ‘완전한 해방의 영역’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한역에서는 ‘길상(吉祥, iva)’이라 옮긴 이 말도, ‘연기’가 해탈을 뜻하기 때문에 수식어로 사용되었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이제 제가 〈중론송〉 귀경게의 뒷부분을 “연기(緣起)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며, 그 자체 완전한 해방의 영역이다.”이라고 옮긴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났는가요?
연기는 존재를 인정하나 본체는 부정한다
귀경게 첫 부분에 대한 해석에서 저는 연기를 ‘존재의 인과관계’라고 풀이했습니다. ‘연기’란 말 자체가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만의 고유한 전문술어이고, 또 불교의 생명과도 같은 중요한 교설이기 때문에, ‘연기’에 관해서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학자는 학자대로 비전문가는 비전문가대로 저마다 깊이 생각한 바가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송〉은 그 전체가 부처님이 설하신 ‘연기’를 대승불교의 공사상으로 풀어냄으로써 한편으로는 대승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 밖의 다른 학파와 불교 안의 아비다르마 불교를 대승불교 안으로 포섭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가르주나의 연기에 관한 성찰과 관련시켜, 연기에 관한 제 생각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놓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연기를 ‘존재의 인과관계’라 풀이했을 때, 제가 말하는 ‘존재’는 저 유명한 ‘다르마(dharma)’의 현대적 풀이입니다. 범어 ‘다르마’에는 현상, 존재, 진리, (부처님의) 교설 등 참으로 많은 의미가 들어 있어서 어느 한 가지로 단순화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철학적 영역에서는 주로 ‘현상적으로 있는 것’ 곧 ‘존재’를 뜻합니다. 한역에서는 일반적으로 ‘법(法)’으로 번역하지요.
〈아함경〉에서도 이미, 우리의 삶의 세계에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곧 ‘다르마’를 ‘5온’, ‘12처’, ‘18계’라는 범주로 분류 고찰하고 있고, 대승불교에서도 특히 유식사상에서는 ‘오위백법(5位 100法)’이란 범주 하에서, 존재의 특성 및 존재 상호간 인과관계를 면밀하게 살핍니다. ‘존재’라 하면 상당히 정적인 분위기를 지닌 말이지만 불교에서는 이 존재에 ‘연기’라는 빛을 쪼이기 때문에, 존재는 흐르고 흘러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으며 인과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서로 역동적으로 관계 맺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해서 세상의 부단한 변화를 말합니다. 그렇지만 존재와 존재가 끝임 없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인과관계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연기를 중시하는 사고에서는, 존재를 하나의 과정(process) 또는 사건(accident)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인식까지 포함해서 존재 일반을 ‘인과관계내 존재’(이는 ‘緣生法’이란 말로 표현됩니다)로 바라봅니다.
서양철학의 현상-본질 구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존재 저 너머에 또는 존재 저 안에 불변의 실체로서 도사리고 있는 존재론적 본질 또는 본체(本體)를 상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상사에서 본체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인도 같으면 창조주 브라흐만, 내 안에 유령처럼 도사리고 있는 아뜨만 등의 이름을 붙일 터이고, 서양 사상 같으면 제일원인, 유일신, 영혼, 절대정신 등으로 이름 붙일 것입니다.
중국 사상계에서도 한때는 ‘공(空)’을 본체로서의 ‘무(無)’로 이해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사상에 따르면, 이렇게 본체를 전제로 삼는 견해는, 전에 설명했던 소위 ‘언어의 분절기능’에 얽매인 희론, 분별심의 산물일 뿐입니다. 관계성을 중시하는 연기적 사고에서 관계망에서 벗어난 또 하나의 초월적 본체를 인정한다는 것은 무언가 자기모순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같은 맥락에서 나가르주나는, 아비다르마 불교 시대 때 각 부파가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법체(法體: 존재의 자성 또는 존재의 본체)에 관해서 예리한 메스를 들이댑니다.
나가르주나의 용어법에 따르면, ‘자성’(自性, svabhva)도 자기 원인적 존재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본체와 매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배후에 본체를 상정하는 사유 경향을 한 묶음으로 통틀어서 ‘본체론적 사고’라 명명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이와 같은 사유 경향을 고집하는 입장을 ‘본질주의자’로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공사상에서는 자성이 없는 다르마의 세계, 곧 본체가 비어있는 존재의 세계만을 이 세계의 전부로 제시합니다. 연기 또는 공사상과 ‘본질주의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자연과학이나 서양철학에서 쓰이는 ‘인과관계’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연기에 관해서 ‘불교적’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 ‘불교적 인과관계’로 표현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 양 항에 본체가 배당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인과관계로 얽힌 존재’가 배당되기 때문입니다.
논서명 〈중론송〉에서 ‘중(中)’의 의미-나가르주나의 논적은 본질주의자이다
중도의 자리서 열반길로…대승불교의 공사상은 전형적으로 “x에 y가 없다”는 언어표현법을 씁니다. 숨어있는 문맥을 고려하면, 이 때 x는 어김없이 존재 또는 연생법(緣生法)을 가리키고, y는 본체 또는 자성(自性)을 가리킵니다. 간단히 말해서 존재는 인정하나 본체는 부정합니다. “책상이 공(空)하다”는 말은 ‘책상에 본체가 없다’는 뜻이지 ‘책상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책상이 있다”고 할 때, 그 말은 ‘책상이 단지 인연에 따른 현상으로서 있다’는 뜻이지, ‘책상이 본체를 지닌 것으로서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연기를 중시하는 공사상이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존재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공(空)’을 과대 적용하여 현상적 존재마저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피해야 할 함정입니다. ‘있다’는 말을 과대 적용하여 존재에 본체가 깃들어 있다고 본다면 이도 역시 피해야 할 함정입니다. 전자는 엄연히 있는 존재마저도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변(無邊)’이라는 심연에 빠지고, 후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본체를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변(有邊)’이라는 수렁에 빠집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하니 존재의 수가 늘어나지요. 그래서 유변은 ‘증익변(增益邊)’이라고도 합니다. 엄연히 있는 존재를 없다고 하니 존재의 수가 줄어들지요. 그래서 무변은 ‘손감변(損減邊)’이라고도 부릅니다.
유변과 무변은 존재의 진상을 왜곡하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여실지견(如實知見)’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유변과 무변의 두 가지 상반된 그릇된 견해를 떠난, 존재의 진상에 부합하는 견해를 ‘중도(中道)’라 합니다.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은 바로 이 ‘중도’라 언명한 자리를 굳게 지키며 열반성(涅槃城)으로 향해 묵중한 걸음을 옮깁니다. 나가르주나가 자신의 저서 이름을 〈중론송〉이라 했을 때, 왜 그 이름에 ‘가운데 중(中)’자 하나를 깊이 새겨 넣었는지, 이제 우리는 이해가 갑니다.
유변에 빠진 이들은 본체 없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무변에 빠진 이들은 본체가 없으면 존재도 성립할 수 없다고 합니다. 유변이나 무변은 둘 다 본체를 존재의 성립조건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존재와 본체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합니다. 둘 다 결국은, 존재의 배후 또는 존재의 저 밑바닥에 본체 곧 존재론적 본질을 상정하는 ‘본질주의자’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공사상은 기본적으로 본질주의자의 견해와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없으며 본질주의자의 입장에서 나온 갖가지 다양한 모습을 띈 주장을 모두 ‘희론(戱論)’ 곧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 간주합니다. 여기에서 〈중론송〉의 주된 논적(論敵)이 본질주의자임이 역력하게 들어납니다.
공사상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 가운데 하나는 허무주의(虛無主義)로 보는 해석일 것입니다. 곧 ‘공(空)’을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음’(虛無/全無)으로 파악하는 해석입니다. 본질주의자는 본체를 존재의 성립근거로 보기 때문에 본체를 부정하는 것은 곧바로 존재마저 부정하는 것으로 연결 지웁니다. 앞에서 보았던, 중도와 양립할 수 없는 무변이죠. 그렇다면 공사상을 허무주의로 보는 해석은 결국 무변에 빠진 본질주의자에게나 가능한 일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본질주의자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물음을 빠뜨리고 있군요. 본체를 존재의 성립근거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의 타당성은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무튼 본질주의자는 자신의 그릇된 세계관 때문에 공사상을 제멋대로 허무주의로 오해하고서는 “너는 우리 앞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세계를 통째로 부정하려 드느냐”고 따지고 들지만, 나가르주나가 볼 때 상황은 정반대로 허무주의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은 연기론자나 공성론자(空性論者, nyat v din)가 아니라 바로 본질주의자이다. 이같은 적반하장격의 상황을 〈중론송〉은 다음과 같이 해학적으로 묘사합니다.
“(본질주의자인) 너는 네 자신의 잘못을 우리에게 돌리고 있다. 말을 타고 있으면서 말을 잊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네가, 본체를 근거로 삼아 뭇 존재가 실재한다고 본다면, 그렇다면 너는 뭇 존재가 인연 없(이 생기)는 것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24-15;24-16)
‘유무(有無)’와 ‘공(空)’의 구별
앞에서 우리는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이 어떻게 본질주의자가 빠지기 마련인 유무의 양변을 비켜 가는가, 어떻게 중도를 일관성 있게 걸어가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공사상과 중도의 관계를 좀더 깊이 다루어보기 위해서,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있다(有)’와 ‘없다(無)’, 이 두 가지 상반된 말과 ‘비어있다(空)’라는 말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알아볼까 합니다. 왜 이러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다루어야 하는가? 여기에는 실로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 한 가지만 들면, 공(空)과 무(無)를 같은 것으로 보는 시각이 의외로 깊이 뿌리박혀 있어, 이 영향 때문에 공사상의 정체성이 손상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시각의 뿌리는 멀리는, 동아시아에서 공사상의 수용과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위진 시대에 형성된 ‘현학(玄學)’입니다. 현학의 주요 주제는 ‘본말(本末)’, ‘유무(有無)’와 같은 현상계와 본체계의 관계였습니다.
공사상 입장에서 무엇보다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점은, 현학이 이 세상의 성립 기반을 ‘본(本)’, ‘무(無)’와 같은 본체에 두었다는 점입니다. 본체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현학은 본질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공사상의 주요 논적은 본질주의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공사상의 입장에서는 현학의 ‘무’가 ‘공’으로 탈바꿈하지 않는 한 결코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겠죠? 이러한 심각한 문제가 간헐적으로 제기되기는 하였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동아시아 사회에서 유무(有無)와 공(空)의 관계를 명확하게 ‘해결한’ 사람은 구마라집과 그 제자 승조가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회 연재를 본 분은 눈치 채셨겠지만, ‘있다’(有)는 말과 ‘없다’(無)는 말에는 제각기 두 가지 상이한 차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없다’(無)에는 ‘본체가 없음’(nisvabhva 無自性)과 ‘존재마저 없음(虛無/全無)’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으며, ‘있다’(有)에는 ‘존재가 인연에 따른 현상적 존재로서 있음’(緣生有)과 ‘본체가 있음’(sasvabhva 有自性)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구분해 보면, 같은 ‘유무’라 하더라도 본질주의자와 공사상가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곧 본체와 존재에 관해 정반대인 ‘유무’를 뜻하고 있음이 판연하게 드러납니다. 본질주의자의 ‘무(無)’는 존재마저 없다는 허무로 빠지고, ‘유(有)’는 존재에 본체가 있다는 유자성(有自性)으로 흐릅니다.
이에 반해 공사상의 ‘무(無)’는 존재에 본체가 없다는 무자성(無自性)을 가리키며, ‘유(有)’라 하면 존재가 인연에 따른 현상으로서 있다는 연생유(緣生有)를 가리킵니다.
이른바 ‘쌍차쌍조(雙遮雙照)’로 공사상의 핵심을 갈파하는 이도 있습니다. ‘유무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유무를 살린다? 무언가 알쏭달쏭 신비한 의미가 깃든 것 같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가보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하지요. 원효가 말한 ‘불연지연(不然之然)’도 같은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이 그렇다, 틀린 것이 옳다?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은 이렇게 모호한 신비주의적 연막술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렇게 해석해보면 어떠하겠습니까. 본질주의자가 쓰는 ‘유무’를 틀렸다고 부정하면서 공사상가가 쓰는 ‘유무’를 옳다고 긍정한다고.
존재에 본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논쟁거리로 등장할 때, 본질주의자의 입장에서 ‘있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공사상가의 입장에서 ‘없다’고 말하는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는 어정쩡한 제3의 입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본체의 ‘유무’에 관해서는 소위 ‘배중률(排中律)’의 법칙이 고수됩니다. 〈중론송〉에서도 여기저기서 ‘비유비무(非有非無)’에 해당하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이를 문맥을 무시하고 자구에만 매달려 해석해서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한역만 보는 이는 한문 번역문의 모호성에 기인한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오히려 해석자의 지평이 모호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중론 청목소〉에서 다음과 같은 ‘유무’에 관한 명확한 언명을 볼 수 있습니다.
“유(有)와 무(無)는 상호 모순개념이다. 어떻게 한 존재에 ‘서로 모순된’ 두 가지 규정이 적용될 수 있겠는가?”
연기와 존재
‘연기(緣起)’가 무엇입니까 묻자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라고 답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라고 답하십니다. ‘이것’과 ‘저것’ 자리에 각각 원인과 결과를 대비시켜 보면 ‘연기’가 뜻하는 의미 내용이 알기 쉽게 드러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말하는 원인과 결과는 연생법(緣生法) 곧 인연에 따라 생긴 존재입니다. 존재의 생성 소멸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원인마저도 생성 소멸한다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이지요.
일견 간단해 보이는 이 메시지에 따르면, 우리의 존재 세계는 어떠한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단지 수행이 부족한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부처님을 ‘일체지자(一切智者)’라고 부르는 것은 연기를 깨달은 부처님만이 이 모든 필연적 인과 관계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회남자〉에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사람의 머리는 왜 둥글며 발은 왜 평평한가?” 불교 논서에서도 이와 유사한 질문이 나오지요. “공작새 꼬리에 있는 반점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 〈회남자〉에서는, 사람의 머리는 하늘을 닮아 둥글고 발은 땅을 닮아 평평하다고 답하지만, 부처님 같으면 그런 식의 우화적인 대답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인과관계를 상세히 풀어내셨을 터이니 말입니다.
불교 논서에서는, 공작새 꼬리의 반점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부처님만이 그 모든 필연적인 인과의 연쇄고리를 풀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삶의 세계 또는 존재의 세계가 털끝만치도 우연론(偶然論)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필연성’이란 말이 나오니 조금 차가운 감이 드는가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업(業)의 인과응보에 관한 메시지를 새겨듣는다면, 불교의 한쪽 얼굴은 참으로 냉혹하리만치 차갑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라 하더라도 업의 인과응보에서 비껴갈 수는 없다고 하니까요.
두 번째 메시지에 따르면, 존재의 세계에는 그 어떠한 상존하는 본체도 없습니다. 존재의 세계는 쉼 없이 생성 소멸하지만 이 생성 소멸의 과정을 초월해 홀로 실재하는, 그러한 상존하는 원인은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존재 세계의 성립기반으로 신이나 영혼과 같은 초월적 실재를 상정하는 종교적 또는 철학적 본체론도 배제됩니다. 존재의 세계는 그 어떤 고정적 일점(一點)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인과관계에 얽힌 채 생성 소멸의 흐름에 합류되어 쉼 없이 흘러갑니다. 이렇게 보면 존재는 하나의 ‘흐름’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모습을 불교에서는 ‘상속(相續)’이라고 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존재의 모습. 상존한다고 할 수 없으니 ‘불상(不常)’이고, 그렇다고 해서 단절된다고도 할 수 없으니 ‘부단(不斷)’입니다. 상존도 단절도 아닌 시계(視界)에서 존재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제 우리는 〈중론송〉 귀경게와 관련시켜 한 가지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존재가 생성 소멸하는 상속(相續)이라면, 왜 〈중론송〉 귀경게에서는, ‘존재’에 ‘생기는 것도 아니요(不生)’, ‘소멸하는 것도 아니요(不滅)’ 등 수식어를 덧씌우는가?” 〈중론송〉 범어 원전을 보면 ‘존재’ 자리에 ‘연기’가 들어갑니다. ‘불생’이니 ‘불멸’이니 하는 수식어가 원전에서는 ‘연기’를 수식하는 말로 돼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원전의 ‘연기’ 자리에 ‘존재’ 곧 인연에 따라 생성 소멸하는 ‘연생법(緣生法)’을 대체시키겠습니다. 구마라집의 한역도 ‘연기’ 자리에 ‘인연(因緣)’을 놓아 역시 저와 같이 ‘존재’로 풀고 있으니 저 혼자만의 독단적 해석은 아닙니다.
〈반야심경〉의 한 구절도 ‘불생’, ‘불멸’을 ‘존재’에 연관시키고 있으니 좋은 참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뭇 존재, 곧 본체가 없는 존재는 생기는 것도 아니요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諸法空相 不生不滅) 제 풀이가 〈중론송〉이 본질주의자를 주된 논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불생’ 등을 ‘연기’보다는 ‘연생법’ 곧 ‘존재’에 관련시킨 것이라고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범부와 성자의 구별
구마라집이 번역한〈중론 청목소〉에서는,〈중론송〉귀경게가 “제일의(第一義) 곧 궁극적 진리를 약설(略說)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혜가 제일가는 사람(第一) 곧 최고가는 지혜를 지닌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경계(義)라는 뜻이 들어있으므로, ‘궁극적 진리’는 당연히 일반 범부가 알 수 있는 경계는 아니겠지요. 곧 ‘궁극적 진리’라는 말속에는 벌써 범부와 성자(聖者)의 구별이 들어 있습니다.
왜 이러한 구별이 있는지 의아해 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이 불교를 무언가 신비적인 것으로, 범부인 우리로서는 인연이 먼, 경원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비판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생과 부처가 하나요, 열반과 번뇌가 하나요, 등등 ‘무차별적인 하나’를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표어(標語)만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라온 우리에게는 낮선 말일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만 복잡성의 세계를 지나지 않은 단순성의 세계는 그 공허한 단순성, 내용 없는 형식 때문에 정치적 캐치프레이즈에 다름없습니다. 무차별적인 ‘하나’로 그쳐서는 안 된다, 차별적인 수많은 ‘구별’을 통과해야 비로소 내용이 풍부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고(苦), 고의 원인, 고의 소멸,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진리를 말합니다. 이를 각각 ‘고제’, ‘집제’, ‘멸제’, ‘도제’라 하여 통틀어 ‘사성제(四聖諦)’로 부르지요. 그런데 ‘사성제’에는 ‘성스러울 성(聖)’ 자가 들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성제’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로 풀이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에 부딪힙니다. 어떻게 고통이나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가 ‘성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가? 더구나 즐거움 등의 경험도 ‘고’라 하여 이를 ‘고제’ 또는 ‘고성제’라고 부르는 걸 보면 이러한 의문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해석을 달리해 ‘성스러울 성(聖)’자를 ‘성자(聖者) 성(聖)’으로 이해하면, 쉽게 그 의문이 풀립니다. ‘사성제’를 ‘성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네 가지 진리’로 풀이할 수 있단 말이지요. 이런 비유를 들어보지요.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놓여있을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똑같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가면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겠죠. 머리카락은 무상한 현상입니다. 손은 범부이고, 눈은 성자입니다. 성자만이 무상한 현상을 보고 고통을 느끼지, 범부는 손바닥과 같아서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비유입니다. 이걸 보면 ‘사성제’란 말도 범부와 성자의 구별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범부와 성자의 구별 때문에, 불교는 종교인지 철학인지 일률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워집니다. 성자가 겪은 체험 곧 선정(禪定) 체험이 불교의 교리 체계 곳곳에, 불교 텍스트 구석구석마다 빠짐없이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철학이 경험 세계의 경계선을 늘리고 넓혀서 선정체험까지 그 경계선 안에 담아둘 수 있다면, 생과 생의 경계를 뛰어넘는 문제, 예를 들어 ‘윤회’나 ‘중유(中有)’의 문제까지 다룰 수 있다면, 불교는 ‘철학’이라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최고가는 지혜를 지닌 이는 연기를 깨달은 이입니다. 대승불교적인 표현을 빌리면 공성을 깨달은 이가 됩니다. 그런 이의 지혜는 분별심이 끼어 들 여지가 없기 때문에, 아니 이미 분별심이 남김없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불립니다.
‘아니다, 아니다’로 부정되는, 생멸(生滅), 단상(斷常), 일이(一異), 내출(來出) 등은 분별심에서 나온, 존재에 관한 갖가지 속설들을 8가지 범주로 정리한 것일 뿐입니다. ‘분별심’이라 하면, 언어의 분절 기능에 얽매인 본질주의자가 연상되지요? 그렇다면 ‘불생(不生)’ 등 8가지 부정적 표현방식은 모두 본질주의자의 존재에 관한 갖가지 속설을 부정하는 것임을 알 수 있겠지요?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생멸’ 등의 말은 본질주의자의 분별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반면에 ‘불생, 불멸’등의 말은 무분별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언어라 해도, 언어의 분절 기능에 얽매인 사람의 말과 언어의 분절 기능에서 벗어난 사람의 말, 이 두 차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릇된 언어관에 현혹되어 언어를 깡그리 부정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구정물을 버리려다 옥동자마저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죠!
‘불상부단(不常不斷)’에 관해서
〈아함경〉에서,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에 부처님은 있다 없다 가타부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부처님이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해서 침묵을 지킨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따지는 것 자체가 생사윤회의 고통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빠지지 말고 실질적인 고통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라는 뜻에서 ‘침묵’을 보이신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그럴듯한 해설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 사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첫째,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영혼이라는 본체에 관련된 질문이기 때문에 본체를 부정하는 연기론 또는 무아론의 입장에서는 결코 모호하게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질문입니다. 둘째, 부처님은 ‘일체지자(一切智者)’라 불릴 정도이니 당연히 어떤 질문이든지 대답할 수 있는 분인데 왜 굳이 말씀을 안 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는 것을 ‘불기(不記)’라고 하는데 이는 ‘침묵’과 같을까요? 모르기 때문에 침묵에 잠길 수 있겠고, ‘알면서 침묵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부처님의 ‘불기(不記)’는 ‘알면서 침묵’에 해당하겠지요? 그렇다면 답을 알면서 왜 말씀하시지 않고 침묵을 지켰을까요?
부처님의 설법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합니다. 상대편의 근기에 따라 말씀을 한다는 뜻이지요. ‘근기’라 하면 지적 능력, 종교적 능력도 포함되겠지만 상대편 내면에 깊게 뿌리박힌 세계관도 중요한 요소로 등장합니다.
만약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물어보는 상대편이 본체론적 세계관을 지닌 본질주의자라면 과연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있다’고 대답하면 상대편은 틀림없이 영혼이라는 본체가 실재한다고 믿어버릴 겁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제법무아’ 사상과 상충되지요? ‘없다’고 대답하면 이 본질주의자는 ‘아하!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는 말이구나!’라고 생각하고는 낙담한 나머지 허무주의에 빠질 겁니다.
‘신은 죽었다’고 갈파했던 니체가 허무주의의 대변자가 되었던 연유도 여기에 있을는지 모릅니다. 본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구마라집의 제자 승조는〈조론〉첫머리에서 위진 현학에서 쓰던 용어 ‘본무(本無)’를 공사상을 풀이하는데 원용합니다. 그렇지만 내용은 ‘무를 본체로 삼는다(以無爲本)’는 원래의 본체론적 뜻을 환골탈태시켜, 본체가 ‘본래 없다’로 됩니다.
상대편이 본질주의자일 때, 그것도 어떤 광신도처럼 본체론적 세계관에 푹 빠져 옴짝달싹 못하는 때에, 영혼이 ‘있다’고 대답하면 상대편은 본체가 상존한다고 상견(常見)에 빠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혼이 ‘없다’고 대답하면 본체가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단견(斷見)’에 빠질 것입니다.
〈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 ‘불기(不記)’하신 상대편 대화자가 지독한 본질주의자임을 알 수 있겠죠? 부처님께서는 상대편이 본체론의 속박에서 벗겨나도록 영혼이 있다든지 없다든지 가타부타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셨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요? 영혼이란 본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니 말입니다.
〈밀린다왕문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밀린다왕은 나가세나 존자에게 영혼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둘 중에 하나를 명확하게 말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나가세나 존자는 이 물음에 대해서 ‘불기(不記)’하고, 역으로 다시 밀린다왕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궁궐 안에 있는 망고는 그 맛이 시던가요 아니면 달던가요?” 궁궐 안에는 망고나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밀린다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있지도 않은 망고에 대해서 그 맛이 신지 단지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결국 밀린다왕도 나가세나 존자의 물음에 ‘불기(不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렇게 보면 ‘상존(常)’이니 ‘단절(斷)’이니 하는 것은 본질주의자가 본체에 대해 지니는 견해 가운데 하나입니다. 연기나 공사상에서 영혼이란 본체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대해서 상존한다느니 단절되었다느니 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중론송〉귀경게에서는 ‘아닐 불(不)’자 하나를 앞에 붙여 본질주의자를 향해서 ‘불상(不常)’이라고 ‘부단(不斷)’이라고 하는 겁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에 관하여
〈중론송〉귀경게에서 무슨 뜻으로 ‘존재’는 ‘생기는 것도 아니요(不生)’, ‘소멸하는 것도 아니요(不滅)’라고 할까요?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으로 구체화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존재의 세계는 무상하여 생성 소멸하기 마련인데 이를 ‘생기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제행무상(諸行無常: 뭇 존재는 영원하지 않다)’에 어긋나지 않는가? 둘째, 게다가 ‘생기는 게 아니다(不生)’란 말은 인도철학에서 ‘생기지 않은 아뜨만’, ‘생기지 않은 브라흐만’과 같이, 본체에 관한 수식어로도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불생’이니 ‘불멸’은 본체론적 세계관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어찌 보면 당연한 물음이지요? 그렇지만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중론송〉귀경게에 등장하는 ‘불생(不生)’, ‘불멸(不滅)’의 의미가 좀더 명확해집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기서 부정하고 있는 ‘생’이니 ‘멸’은, 본질주의자가 생각하는 ‘생성’ ‘소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중론송〉귀경게는 본질주의자가 상정하고 있는 생성과 소멸을 부정할 뿐. 존재 세계의 생성 소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본질주의자는 대체 어떠한 ‘생’을 말하기에 나가르주나는 이를 부정하는 걸까요?
존재의 ‘생’이란 무엇입니까? 존재가 예전에는 없다가 지금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멸’이란 무엇입니까?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생이란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멸이란 뜬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존재 세계를 뜬 구름에 비유하고 있으니 존재 세계를 바라보는 허허로운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뜬 구름’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인연에 따라 생기고 소멸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공사상에 따르면 본체를 전제로 삼을 필요 없이, 생성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질주의자는 존재의 생성 소멸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본질주의자는 현상의 배후에 상존하는 존재론적 본질, 존재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본체를 존재 세계의 성립기반으로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존재가 생성 소멸할 때 본체는 존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주요한 관심거리로 떠오르기 마련이고, 본체가 생성의 직접적 원인으로서 자리 잡게 됩니다. 곧 자기동일성을 지닌 상존하는 본체에서 존재가 생긴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세계에서 존재 생성의 으뜸가는 원인을 탐구하는 학문을 ‘제일철학’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나중에 ‘형이상학’으로 불리게 됩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형이상학에서 제일원인으로서 신(神)을 상정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神)은 뭇 현상의 첫째가는 존재 원인입니다. 신은,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일체의 존재를 움직이는 자, 곧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라는 묘한 말로 표현됩니다. 어떻습니까? 부동의 원동자! 말은 그럴싸하지만 어딘지 본체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면 대사상가로 손꼽히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한 편으로는 본체론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군요. 곧 공사상가와 대립되는 본질주의자의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주의자와는 달리 공사상가는 본체를 부정합니다. 연기를 ‘존재의 인과관계’라 풀었을 때, 원인과 결과 양 항에는 존재 곧 연생법이 놓인다는 점을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원인 쪽에 본체가 오면 그 구도는 공사상가가 구상하는 구도와 ‘단순한 차이’를 넘어 ‘대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존재의 생성을 본체로부터 유출(流出)로 보는 생각, 또는 존재의 생성을 어떠한 본체가 있어 제어하면서 이끌어간다는 생각, 이 모두 본질주의자의 세계관입니다. 가령 인도의 상키야 철학 같으면 전자, 헤겔 철학 같으면 후자의 방향을 취하고 있습니다.
공사상은 이와 같은 생성의 모습, 본질주의자의 생성에 관한 생각을 부정합니다. 생성을 부정하니 당연히 소멸도 부정하겠죠? 그래서 존재는 ‘생기는 것도 아니요(不生)’, ‘소멸하는 것도 아니(不滅)’라고, 나가르주나는 말하고 있습니다.
‘不一不異’, ‘不來不出’에 관하여
씨앗에서 싹이 나고 싹이 자라서 줄기가 되며 다시 줄기에서 열매가 생겨 씨앗을 맺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스런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존재의 성립기반으로 본체를 상정하는 본질주의자는 이러한 상식적인 세계상에 대해서 삐딱한 시선을 던집니다. 곧 ‘씨앗’하면 씨앗의 본체, ‘싹’하면 싹의 본체를 결부시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씨앗에서 싹이 생긴”다고 할 때, 본질주의자는 씨앗의 본체와 싹의 본체는 동일한 것인가(一) 서로 별개의 것인가(異) 하는, 겉으로는 상당히 고상해 보이는 ‘사이비 물음’을 제기합니다. 왜 ‘사이비 물음’이냐 하면, 존재하지도 않는 본체를 놓고 같으니 다르니 따지는 것은 애초에 문제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신을 인정하는 본질주의자는 씨앗이니 싹이니 이 모든 만물은 만물의 본체인 ‘신에게서 나와(來) 신으로 돌아간다(出)’고 말합니다. 또 만물의 본체로 무(無)를 인정하는 본질주의자는 만물이 ‘무에서 나와 무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철학의 종언, 형이상학의 종언을 갈파하는 철학자들은, 특히 비트겐슈타인 같은 ‘비둘기의 발처럼 조용히 다가온 혁명가’는, 철학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천재들이 대개 이러한 ‘사이비 물음’으로 수많은 시간을 허비했다고 폭로합니다. 나가르주나가 〈중론송〉 귀경게에서 ‘일이(一異)’, ‘내출(來出)’을 부정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그 타겟은 본질주의자입니다.
‘내출(來出)’ 곧 오고 감이 화제가 되었으니 승조의 시 한 수가 떠오릅니다. 승조의 〈조론〉가운데 〈물불천론〉이라는 짧은 글이 있습니다. ‘물불천(物不遷)’은 ‘사물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게 사물인데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니 모순적인 문장이죠? 승조가 읊은 시 한 수는 갈수록 사람을 당혹하게 합니다. “돌개바람은 산악을 쓰러뜨리나 항상 고요하며, 강하는 다투어 흐르나 흘러가지 않는다. 먼지는 흩날리나 움직이지 않으며, 일월은 하늘을 지나나 돌지 않는다.”(旋嵐偃嶽而常靜 江河競注而不流 野馬飄鼓而不動 日月歷天而不周.) 중국의 대유학자 주희는 〈주자어류〉(126권)에서 이 시를 인용하고는, 승조의 공사상이 장자의 설을 도습(盜襲)한 ‘환망적멸지론(幻妄寂滅之論)’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겉으로 보면 주희의 말이 그럴 듯 하지요? 승조가 왜 이렇게 요상한 말을 하는지 그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면 주희의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론송〉에서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미 가버린 것이 어디에 가는 일은 없다. 아직 가지 않은 것도 어디에 가는 일은 결코 없다.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지금 가고 있는 것도 어디에 가는 일은 없다.”(2-1) 이 게송의 취지는, ‘가는 자’라는 본체를 전제로 한 행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곧 “가는 자 가지 않는”다고 말할 때, ‘가는 자’는 본질주의자가 몽매에 떨쳐버리지 못하는 본체로서의 행위자이고, ‘간다’는 행위는 그러한 본체의 행위입니다. 공사상가로서는 당연히 이 양자를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게송의 취지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승조의 알쏭달쏭한 시를 해명할 수 있는 열쇠를 손에 쥔 게 됩니다.
승조의 시에 등장하는 돌개바람, 강하, 먼지, 일월, 이 모든 존재는 공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본체가 없는 현상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렇다 할 ‘본체’의 작용은 없습니다. 현상을 현상으로만 볼 때 돌개바람은 있는 그대로 산악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만큼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상의 배후에 그 어떤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본질주의자는 자꾸 현상의 힘을 본체와 결부시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주의자가 상정하는 본체 및 본체의 작용을 부정하면서 내놓은 표현이 ‘돌개바람은 항상 고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승조의 시는 위진 현학적인 ‘무(無)의 본체론’을 교정함으로써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재로만 보라는 주문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교에 대한 주희의 무지를 이렇게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곧 승조는 〈장자〉의 설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장자〉를 공사상의 입장에 따라 재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왜 〈중론송〉을 지었는가?
이제까지 〈중론송〉 귀경게에 관해서 꽤 긴 해설을 했습니다. 이 귀경게를 통해서 나가르주나가 불교의 핵심 교설 곧 연기(緣起)에 대한 이해를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해설로,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연면히 이어지는 ‘한 맛(一味)’을 느끼셨으면, 제 의도는 충족된 셈입니다. 귀경게에서도 또렷이 드러나듯이 〈중론송〉의 주제는 ‘연기’입니다. 나가르주나가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첫 번째로 손꼽았던 게 바로 ‘연기’였던 것입니다. 저는 ‘연기’를 ‘존재의 인과관계’로 풀어 귀경게를 해설했고, 나가르주나의 타깃을 본질주의자로 규정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중론송〉 본문에 대한 해설로 넘어갈까 합니다. 그렇지만 그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군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나가르주나는 〈중론송〉을 저술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중론송〉은, 경전과는 달리, 치밀한 체계와 논리를 중시하는 철학적 논서입니다. 와수반두가 〈석궤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논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비로소 ‘논서’라 부를 수 있습니다. 첫째, 배우는 이의 번뇌를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배우는 이를 삼악도(三惡道: 지옥, 아귀, 축생) 및 윤회 생존에서 구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철학서’와는 그 용도가 판이하지요? 논리학마저도 해탈에 이르기 위한 길로 수용하는 인도 전통에서는, 불교의 철학적 논서가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때 열반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논서의 쓰임새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중론송〉의 저술 의도도 간략하게나마 〈중론송〉 귀경게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본질주의자가 제시하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을 잔가지 치듯 제거하여, 배우는 이로 하여금 ‘완전한 해방의 영역’인 열반으로 안내하기 위하여 〈중론송〉을 썼다고 말입니다.
한편 구마라집이 번역한 〈청목소〉는 〈중론송〉의 저술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시바神에게서 생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시간에서 생겼다고 하고, … 어떤 사람은 자기원인적 존재(自然)에서 생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원자(微塵)로부터 생겼다고 한다. 이러한 잘못 때문에, … 갖가지 사견(邪見)에 빠져, 갖가지 방식으로 ‘나’나 ‘내 것’을 말하며, 진리를 알지 못한다. 부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갖가지 사견을 끊고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하여, 먼저 성문승(聲聞乘)을 대상으로 한 법문에서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설하셨으며, 이미 십이인연을 익히고 행하여 큰마음(大心)(=보살심)을 지녔으며 깊은 진리를 받아들일 만한 바탕이 형성된 사람을 위하여, 보살을 대상으로 한 대승 법문(大乘法)을 통해 존재의 실상에 관해서, “뭇 존재는 생기는 것이 아니며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동일한 것이 아니며 별개의 것도 아니다(一切法, 不生不滅, 不一不異)” 등등 [뭇 존재는] 끝없이 공(空)하여 [본체는] 그 어떤 것도 없다(畢竟空無所有)고 설하셨다. …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오백 년이 지난 상법(像法)시대에 사람들의 인식능력은 둔해지고 뭇 존재에 깊이 집착한 나머지, 십이인연(十二因緣), 오음(五陰=五蘊), 십이입(十二入=十二處), 십팔계(十八界) 등에 관한 확정적 정의만을 구하고, 부처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문자에만 집착하여, 대승 법문 가운데 ‘끝없이 공하다’는 설법을 들어도 왜 [뭇 존재가] 공(空)한지를 알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의심을 품었다. 곧 만약 모든 것이 끝없이 공하다고 한다면 죄복(罪福) 및 그 과보에 관해서 어떻게 구별한단 말인가? 이같이 [죄복 및 그 과보의 구별이 없]다면 일상적 진리(世諦)와 궁극적 진리(第一義諦)의 구별도 없어지지 않겠는가? 이같이 ‘공’의 자구적 정의만을 취하여 탐착을 일으켜 [뭇 존재가] 끝없이 공하다는 사태(畢竟空)에 대해 갖가지 오류를 일으켰다. 용수보살(龍樹菩薩=나가르주나)이 이러한 오류를 없애기위하여 이 〈중론(송)〉을 지었다.”
〈청목소〉를 보면, 공사상에 대한 갖가지 오해를 시정하기 위해서 〈중론송〉을 쓴 게 됩니다. 공을 허무로 보는 본질주의자의 오해에 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지요. 여기서는 공사상과 윤리의 문제를 짚어 보겠습니다.
공사상에 뿌리박은 윤리
대승불교의 공사상은 선악(善惡)의 상대적 관점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소위 ‘윤리’ 문제와 관계없다고 보는 이가 있습니다. 심하게는 공사상을 받아들이면 윤리를 해치게 된다고까지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모든 게 공하다”고 한다면, 소박한 윤리 의식마저 성립할 여지가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지요. 그럴 듯 하지요? 이러한 비판은 실상 공사상을 처음 접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던 물음 가운데 하나입니다.
〈중론송〉에서도, 공사상이 윤리를 해치는 게 아니냐는 반론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한다면, 당신은 (존재의) 생성도 소멸도, (더 나아가) 네 가지 성자의 진리(四聖諦)도 없다는 (허무론적인)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24-1) ‘사성제’란 말이 쓰인 것을 보면, 여기서 반론자는 아비다르마 불교의 논사(論師)입니다. 아비다르마 불교에서는 존재의 구별원리로 ‘자성(自性)’을 내세웁니다. 이 ‘자성’을 나가르주나가 부정했던 존재론적 본질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인식론적 본질로 볼 것이냐, 이 자체 불교 사상사에서는 큰 논란거리입니다. 가령 유식사상에서는 ‘자성’을 인식론적 본질로 받아들여 ‘자상(自相)’과 거의 같은 뜻으로 씁니다. 그렇지만 아비다르마 불교에서는 거의 존재론적 본질 곧 본체의 뜻으로 쓰인 것 같습니다. 아비다르마 불교 시대 때 유력한 부파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교학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명제로 ‘법체항유(法體恒有: 존재의 자성 곧 본체는 상존한다)’를 내세웠다고 평가할 정도이니까요. 이러한 평가에 따른다면, 생멸· 선악 등으로 규정되는 뭇 존재는 서로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론적 본질 곧 ‘자성’을 지니고 있고, 이 ‘자성’으로 인해서 ‘이 존재는 고다’, ‘이 존재는 고의 원인이다’ 등 ‘사성제’에 관한 구별이 성립한다고 보는 게 아비다르마 불교입니다. 공사상은 이러한 존재론적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강한 부정입니다. 따라서 공사상의 논리에 좇으면 결국 ‘사성제’와 같은 불교 윤리의 근간이 뿌리 채 뽑혀 나가게 된다는 것이 아비다르마 논사가 우려하는 사항입니다.
존재에서 존재론적 본질을 제거한다고 해서 윤리 체계가 부정되는가? 나가르주나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나가르주나는 존재에 대한 관점의 전회(轉回)를 요구합니다. 180도 거꾸로 생각해서, 존재에는 존재론적 본질이 본래 없기 때문에, 존재 간의 구별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공사상이 윤리 체계의 토대로 자리 잡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중론송〉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지요.
“공성(空性)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뭇 (존재)가 성립한다. 공(성)을 부정하는 자에게는 뭇 (존재)가 성립하지 않는다.”(24-14)
고통(苦)을 예로 들어볼 수 있겠습니다. 고통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본질주의자의 생각처럼 고통에 존재론적 본질이 있다면, 고통은 인연에 따라 생긴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어찌해도 그 고통을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한 고통은 관념으로만 있을 수 있을 뿐 실제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고통은 공성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중론송〉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났는가요? 고통이 현실적으로 성립해야 차례대로 ‘사성제’가 성립합니다. 사성제가 성립해야 고통을 ‘알고’ 고통의 원인을 ‘끊으며’, 고통이 없어진 해탈을 ‘증득하고’ 고통의 원인을 끊기 위해 ‘수행하는’ 것 등 윤리적 ‘선(善)’이 성립합니다. 이렇게 선(善)을 실천하는 사람이 성립할 때 승가 공동체가 성립합니다. 이런 식으로 존재 세계 및 윤리 체계는 공성 안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에,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인연에 말미암지 않고는 그 어떤 존재도 생겨날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공(空)하지 않고서는 (곧 존재론적 본질을 지니고서는) 그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다.”(24-19)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본질주의자가 제시하는 것과 같은 본체이지, 존재나 윤리적 덕목 그 자체는 결코 아니라는 것, 이 점을 다시 한번 새기고, 이제 그만 말머리를 본문 쪽으로 돌리겠습니다.
마음의 네 가지 원인 〈끝〉
〈중론송〉의 첫 번째 장은〈원인에 대한 고찰〉입니다. 구마라집의 한역에 따르면〈관인연품(觀因緣品)〉이지만, 범어 원문에서는〈연(緣)에 대한 고찰〉로 되어 있습니다. ‘연(緣)’이란 원인 일반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아비다르마 불교에서는 이를 네 가지 유형으로, 곧 인연(因緣), 소연연(所緣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증상연(增上緣)으로 구별합니다. 이 말들은 현장 이후 널리 쓰인 역어입니다만, 구마라집 같으면 이를 각각 인연(因緣), 연연(緣緣), 차제연(次第緣), 증상연(增上緣)으로 번역합니다. 구마라집이 장 제목을〈관인연품〉이라 붙인 것은, 네 가지 유형의 원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연’을 보았기 때문이지 이 장이 인연만을 다루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첫 번째 장을〈원인 일반에 대한 고찰〉로 보면 무난하리라 생각합니다. 원인은 결과에 상대하는 말이지요? 그리고 제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기서 우리가 ‘원인’이니 ‘결과’니 하는 것은 ‘원인이나 결과에 해당하는 연생법(緣生法)’ 곧 인과관계로 얽혀 있는 존재를 뜻합니다. 그러니〈중론송〉첫 번째 장은, 어떠한 존재가 생길 때 그 원인에 해당하는 존재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을 논의 주제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네 가지 유형의 원인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번거로우시겠지만 사전 지식으로서 이에 관해서 간단하게 파악해두죠. 우리 ‘마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불교에서 ‘마음’이라 하면, 심층영역의 마음도 있겠고 표층영역의 마음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흔히 시각 청각 등 감각을 마음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불교에서는 다섯 가지 감각과 의식을 모두 표층영역에 속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또 이 마음을 인과 관계에 얽혀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생길까요?
아비다르마 불교에서는 마음의 생성 조건 또는 원인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합니다.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우선, 눈·귀·코 등 감각 능력이나 정신과 같은 사유능력이 ‘지금’ 온전하게 있어야 하지요? 이러한 현 찰나의 감각 능력이나 사유능력은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 직접적인 원인 노릇을 하기 때문에 이를 ‘인연’이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색깔·형태·소리·냄새 등 감각 대상이나 개념·관념과 같은 사유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대상이 없이 마음이 생겨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인식 대상들을 ‘소연연’이라 불러 마음의 생성 원인에 끼워 넣습니다. 세 번째, 마음은 ‘존재’이기 때문에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부단히 흐르는 ‘상속(相續)’(이에 관해서는 전에 설명했죠?)입니다. 따라서 현 찰나의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한 찰나 전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구요? ‘찰나(刹那)’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 단위입니다. 원자핵이 한 번 진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비유할 수도 있겠고, 또는 앞으로는 그 보다고 더 작은 시간 단위를 생각해낼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 단위라 보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존재 세계를 ‘무상(無常)의 상(相) 하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존재는 한 찰나 한 찰나 생성 소멸이 이루어지는 ‘찰나적’ 존재일 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존재든지 어떤 찰나에 생성되기 위해서는 전 찰나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존재는 흐름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죠? 마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부단한 흐름인 한, 바로 직전 찰나의 마음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현 찰나의 마음이 생깁니다. 이를 ‘등무간연’이라 부르는데, 현 찰나의 마음과 시간적으로 붙어있고(無間) 그 질이 거의 같기(等)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겁니다. 네 번째,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그 생성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 없어야 합니다. 가령 눈이 말짱하고 정신도 정상적으로 제 기능을 다하고 있으며, 시각대상이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햇볕이 없으면 시각이 생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 햇볕이 있는 것은 시각이 생기기 위한 보조적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보조적 원인을 모두 통틀어서 ‘증상연’이라 불러 생성 원인 항목에 추가합니다.
이렇게 네 가지 유형의 원인이 고루 갖춰지면 마음이 그 결과로 생겨나게 됩니다. 조금 까다롭지만 그 치밀한 이론적 구성에 감탄스럽지 않습니까?
Ⅴ. 중관학파
1. 중관학파의 의미
2. 중관학파의 사상적 특징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등의 비판
반야공관에 입각한 부정논리
중도실상 연기 무아 무자성 공 등의 사상
3. 중관학파의 분류
4. 중관학파(中觀學派)의 형성과 역사
5. 중관학파의 학자들
초기 중관학자들
중기 중관학자들
후기 중관학자들
1. 중관학파의 의미
이른바 중관학파[中觀學派 M dhyamika, ∼v dinah]는 중파(中派), 중도파(中道派), 중사(中師), 중도사(中道師)라고도 한다. 龍樹(梵 N g rjuna)의 중론(中論)을 기초로 하여 공관(空觀)을 선양(宣揚)한 학파를 일컫는 말이다.
A. 중관학파를 나타내는 범어 - M dhyamaka, M dhyamika의 뜻
중관학파는 산스크리트어(梵名)으로는 M dhyamaka, 또는 M dhyamika 라고도 한다.
이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들이 있다. .
㉠ Edgerton설(說)에 의하면 , 'Madhyamaka'라는 말은 madhya[중(中)의]라는 형용사의 최상급인 Madhyama[가장 중앙(中央), 가장 가운데(中)의]에 접미사(接尾辭)(또는 조사) -ka 가 붙여진 것이다. 때로는 -ika가 붙여져 'M dhyamika' 라고도 쓰인며, 다같이 "중(中)에 기초하는, 중(中)에 관한, 중(中)을 말하는" 등을 뜻하는 동의어(同義語)로서, 이들이 명사화되어 '중(中), 중도(中道)의 사상(思想)내지 사상가(思想家)'을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관(觀)'자(字)가 없지만 훗날에는 '중관파'라 불리게 된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 Murti 설에 의하면 이 양자를 구분하여 'Madhyamaka'라는 말은 '중도(中道)내지 중도설(中道說)'를, M dhyamika 는 광의(廣義)로 그것을 포함하는 '학파(學派)'를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 또는 Madhyamika의 의미를 단순히 '중도를 걷는 자'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B. 중관학파를 나타내는 다른 말
중관학파는 그외로 Madhyamkak citta [중(中), 중도(中道)를 마음에 지닌다]
또는 Madhyamak v din [중·중도(中道)의 논자(論者)] 라고도 불리웠다.
또는 스스로를 'S nyatav din [공성론자(空性論者] 라고도 이름했다.
C. 중송을 나타내는 말 - 'Madhyamaka karika' 또는 'M dhyamika karika'
'Madhyamaka 나 'M dhyamika '라는 말 뒤에 'karika' 라는 말이 'Madhyamaka karika'라거나 'M dhyamika karika'라는 말이 이루어졌다.
'karika'라는 말은 종교나 철학 문법서 등의 강요를 기억하기 쉽게 요약한 시구(詩句) 나 시송(詩頌)으로서 게(偈)·송(頌)·게송의 뜻을 갖는다. 이런 용어가 prasannapad 의 서명(書名)에 보였고, 티베트에서도 이 범어 서명(書名) 그대로 사용된다.
때로는 그 앞에 'Mula'(근본, 기저)가 추가되기도 한다
D. 중론 - Madhyamaka - stra
stra는 논이라는 뜻이다. 본래는 sastra[논(論)]가 붙어 있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경(經)·율(律)·논(論)으로 분류하는 방식에 따라 나집(羅汁)삼장이 '중론(中論)'이라고 이름하였다. 오늘날은 범어로도 'Madhyamaka - stra' 즉 중론(中論)이라고 일반적으로 표기되고 있다.
2. 중관학파의 사상적 특징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등의 비판
불멸후(佛滅後) 6·7백 년이 지난 용수 당시의 인도불교는 붓다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당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sarvastiv da)는 세상 모든 것들을 오위(五位)75법(法)으로 나누어 이들 각각을 영원불변의 실체성(實體) 내지는 실재성(實在性)을 지닌 것들로서 파악한 다음, 이들이 여러 형태로 상응(相應) 상반(相反)하는 관계에 의해 모든 형상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였다. 이는 일면 붓다의 교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붓다의 교설 내용을 절대시하는 가운데 형성된 관념체계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그 어떤 사유 판단에 영원불변의 실체적(實體的) 내지 외부에 실재하는 존재가 전제되고 있다면, 이는 벌써 근본불교의 본질에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이는 '무상(無常)·무아(無我)·연기(緣起) 중도(中道)'라는 석존교설(釋尊敎說)의 근본 정신에 위배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석존의 근본 뜻은 석존 자신과 설법내용을 포함한 일체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 것들이며 연기(緣起)하는 것들임을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봄이 옳다. 그리고 석존은 이런 연기법등을 통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중도(中道)(madhyama pratipada)에 의해서 정각(正覺) 열반에 도달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만일 설일체유부와 같이 다원론적 존재가 삼세에 실재한다는 전제하에서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이는 근본 불교와 어긋나는 잘못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용수는 이를 비판하고 시정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대승경전인 반야경의 '공관'을 다시 심화시켜 밝히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용수의 중론은 상주(eterbakusm)와 단멸(annihilationism), 아(我)와 비아(非我),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 실체와 과정, 단일과 다수, 긍정과 부정, 동일과 차별 등 모든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이원론을 피하고, 불타의 가르침의 참된 정신인 중도를 밟고자 한 것이었다.
이런 용수의 입장을 계승한 중관학파는 용수의 견해에 의거해 일체의 모든 존재는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존하는 복합적인 존재이고 무상(無常)한 것으로서 여기에 영원불변한 실체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으며 공(空)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영원불변하며 단일한 실체는 개념이나 말을 실체화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허구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용수의 입장을 계승한 학자들에 의해 중관학파가 형성되어지는 것이지만 이를 계승한 학자마다 주장하는 방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또한 용수는 많은 저술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오늘날 그 각각의 진위를 판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중관학파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은 결국 <중론>이 되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그 사상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중론송의 반야공관에 입각한 부정논리
중론송은 대승반야공관(大乘반若空觀)이야 말로 근본불교정신인 '연기(緣起)·무아(無我)·중도(中道)'를 가장 옳게 실현하는 것으로 보고, 이 공관에 입각한 특수 부정논리 즉 양도론법(兩刀論法)이나 오구문파(五求門破)와 같은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논리 이론으로, 불타(佛陀)의 진의를 알지 못한채 교리 개념만을 집착·분별·회론하는 일부 아비달마 논사들의 잘못들을 냉엄 철저히 파척(破斥) 불식하였다.
즉 중론(中論) 27품(品) 450 여게는, 반야경들이 역설하는 일체개공관(一切皆空觀)을 바탕으로 당시 불교계에 정형화된 중요한 교리개념 대부분을 27 품목으로 거론하여, 이들을 실체 실유시(實有視)하여 분별(分別) 희론하는 사견(邪見) 오류(誤謬)를 없애버리기 위해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특수형식의 논리를 구사하며 동시에 중도실상(中도實相)의 정법(正法)세계를 경쾌히 밝혀낸 것이다.
중론송에 일관되는 부정논리는 반야(般若) 공관(空觀)에 입각하고 있다.
본래 반야경전들에는 일체 유위법은 몽환포영(夢幻泡影)과 같고 일체법은 불가득(不可得), 무소유(無所有)이며, 제법(諸法)은 공(空)·무자성(無自性)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하다는 내용이 밝혀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제법(諸法)의 공함을 관행(觀行)하는 '반야바라밀(Praj aparamit )'은 보살행의 기초요 목표로 될 뿐만 아니라 불(佛)·세존(世尊)의 일체지(一切智)(sarv j a , 살파야(薩婆若)와 직결함을 지적하였다.
한편 방대한 반야경전의 내용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낸 반야심경에서는 오온 ,육근(六根), 육경(六境)등과 십이연기의 요소 내지 사성제(四聖諦) 그리고 이를 통해 얻어지는 '지(智)' 내지 열반(涅槃)을 '얻음'등이 모두 '공(空)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반야심경에서 나열되고 있는 바는 바로 석존(釋尊)에 의해 모든 현상의 구성요소나 변화과정의 요소로서 제시되어진 것들로서 바로 석존의 설법내용의 중심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다. 결국 이는 석존의 설법 내용을 포함한 일체제법(一切諸法)이 모두 무자성이요 공함을 여실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일면 설일체유부등이 외도의 주장은 부정하지만 석존의 설법 내용은 실유하는 요소로서 절대시하는 경향을 불식시키는 측면도 갖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중론송(中論頌)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불생불멸(不生不멸), 불래불거(不來不去)'인 까닭 이유를 매우 깊이 논증해 나간다.
중론송은 이런 부정논리를 통해 어떤 개체적 존재나 그 구성요소들(인(因)·연(緣), 온(蘊) 처(處) 계(界)·육계(六界)등) 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개체나 구성요소들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가령 생(生), 멸(滅), 거(去), 래(來), 작(作), 견(見), 염(染), 수(受), 취(取), 전도(顚倒) 고(苦)·낙(樂) 등에 대해서도 실체적(實體的)으로 항유(恒有)한다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을 밝혀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용수가 사용하는 부정논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a
그 현상들은 사종불생(四種不生)이다.
즉 자생(自生)·타생(他生)·공생(共生)·무인생(無因生)아니다. (관인연품(觀因緣品) 제1 ),
또한 과거(過)·현재(現)·미래(未) 삼세(三世)가운데 불생(不生)이며, 무시(無始)·무종(無終)이다.
또한 그 현상들을 일으키는 주체(主體)나 현상 자체는 유(有) 무(無) 역유역무(亦有亦無) 비유비무(非有非無)와 같은 방식의 사구사유(四句思惟)로도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이므로 불생(不生)·불래(不來)이다.
나아가 그 반대현상들도 부정되어 불멸(不滅)·불거(不去) 비무(非無)가 아닐 수 없다고 논증한다.
b
또한 그 현상이 일어나는 주체(主體)와 관련해 인과(因果)관계나 능소(能所)관계로 그 현상들을 분석 검토해 봐도, 서로가 동일(同一)하지도 합일(合一)되거나, .공존(共存)하지도 않으므로 불일(不一). 불상(不常), 불공(不共), 불합(不合)이고,
또 반대편으로 서로는 전혀 관련성 없는 별개적 이체(異體)인 것들이라고도 할 수 없으므로, 불이(不異)·부단(不斷)·비무(非無)가 아닐 수 없다고 논증해낸다.
(양도론법(兩刀論法),
c
또 이 논증을 확대 심화한 오구문파(五求門破)의 논리를 구사하기도 한다. 오구문파는 일체의 모든 것들에 대해 (1) 상호간 서로 같은 것인가. (2) 서로 다른 것인가. (3) 어느 하나는 다른 하나를 갖고 있는 것인가. (4) 어느 하나 안에 다른 하나가 있는 것인가. (5) 반대로 다른 하나에 그것이 있는 것인가를 관찰해 -오종추구(五種推求)
동일(同一) . 별이(別異) , 소유(所有), 상호(相互)간 서로에게 내재(內在)함을 모두 부정함으로서 그 실체적 존재성을 부정한다.
d
한편 서로를 동일(同一, 合一)하다고 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다른 것들(別異, 不合)이라 보면 단견(斷見)이 생기는 모순·오류·불합리(不合理)에 빠지고 만다는 등의 귀류논증법(歸謬論證法)을 종횡 구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중론(中論)은 대승반야공관에 입각하여, 온갖 회론을 없애기 위해, 불생(不生)이나 불거(不去)인 까닭을 밝혀내는 그 특수 논중논리로써 , 생(生),멸, 상(常),단(斷), 일(一), 이(異), 래(來), 거(去), 유(有), 무(無) 등의 양극단을 초월한 불생불멸(不生不滅) 내지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中道) 실상(實相) 세계에 참다운 진리성이 있음을 밝혀내었던 것이다.
중도실상 - 연기 무아 무자성 공 등의 사상
이렇게 용수가 부정논리를 통해 밝혀낸 연기 중도 무아 무자성 공의 사상을 대략적으로 요약해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A. 연기
용수는 <중론>의 처음에서 '길상('吉祥한 연기'를 설하신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즉 <중론>의 귀경게에서 "不生不滅 不斷不常 不一不異 不來不去"로써 능히 모든 희론을 적멸시키는 길상한 연기를 설하셨고, 모든 설법자 중 가장 훌릉한 정각자에게 경배드린다"고 하면서 석존의 근본사상을 연기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해명하는 것을 <중론>의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용수가 원시불교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B. 연기와 팔부중도
그러나 그 연기를 불생불멸 등의 '팔부중도(八不中道)'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십이연기에 입각한 원시불교보다 그의 입장이 진일보했음을 알 수 있다. 원시불교에서도 중도는 설해지고 있다. 예컨대 <초전법륜경>에는 '고락(苦樂)중도'가 설해지며, <상응부>에는 자아의 연속, 비연속과 관련하여 '不常不斷의 중도, ·비유비무의 중도가 설해지고 있다. 따라서 <중론>의 '팔부중도'는 이 전통을 잇는 것이지만, 그 밑바탕에 '공'사상이 있다는 점에서 <반야경>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겠다.
C. 이제(二諦)
<중론>은 이제(二諦)의 입장에 서 있다. 이것은 <대품반야경> 권25에 "보살은 2제에 주(住)하여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한다.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가 바로 그것이다" 라는 가르침을 계승하는 것이다. <대품반야경> 권22에는 세제의 '여(如)'와 제일의제의 '여(如)'는 같다고 되어 있다. 즉 세제와 제일의제로 나타나는 진리는 동일하지만, 방법이 다른 것이다. 본래 중생이라는 실체는 없다. "2제 중에서는 중생은 불가득이지만,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방편력을 갖는 고로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한다"고 말해지는 것처럼, 2제에는 방편 up yakau aly(선교방편善巧方便)의 지혜가 있으며, 이 방편에 입각하여 중생(세속제)이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편은 반야바라밀의 실천에서 생긴다. 이것이 제일의제이다. <중론> 에서는 제24품에서 "제불은 2제에 의거하여 법을 설하신다. 세속제와 제일의제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설하는 등이 <반야경>의 설을 계승하고 있다.
세간의 존재는 모두 무상하며 변화해간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이것'으로 파악할 수 없다. 파악하는 순간 상태가 바뀌어버리기 때문이다.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다른 말로 일체개공(皆空)이라고 한다. 이 공 nya 의 입장에서 '존재' 즉 법 dharma을 이해하는 것이 제일의제 param rtha -satya의 입장이다. 따라서 존재는 그 본성에 있어서는 유라든가 무라든가 하는 형태로 파악되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시간적 존재자의 진실된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제법은 공이지만, 현상은 천차만별로 현현하고 있으며, 이로써 시간적 세계가 형성되어간다. 공이라는 것도 진실이지만, 동시에 나와 너의 상대적 세계가 성립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연기의 상대적 관계에서 성립하는 '법이 본래 모습이다. 이러한 상대적으로 성립하고 있는 개체를 인정하는 입장이 세속제 lokasanlvrt satya이다. 이것은 개개의 존재를 상대성에 입각해 바르게 이해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연기 pratityasamutp da를 바르게 앎으로써 '연기에 의해 성립하는 법 pratityasamutpann dharma(연이생법(緣已生法)을 바르게 아는 입장이다. 여기서 나와 너, 선과 악, 고와 락 등에 의거한 세속의 세계가 바르게 알려진다.
이른바 세속의 명언(名言) 개념을 통하여 획득한바 인식내용들은 모두 희론의 범위에 속하여 이른바 속제라 칭한다. 오직 불법의 이치에 의하여 바로 직관하고 증득한 제법실상을 진제라 한다. 속제(俗諦)에 따라 말하여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이 되고 일체는 모두 있다고 한다. 진제에 의해 말하되 일체는 모두 그 실체의 자성이 없으며(一切皆無自性) 모두 마침내 공하다(畢竟空)고 한다. 그리하여 世俗의 있음은 필경 공하다. 필경공한 즉 세속에 존재할 수 있다. 만일 속제에 의하지 않는다면 제일의를 얻지 못하고 열반을 얻지 못한다.
이론상으로는 품성에 있어 공함과 방편을 통일한다.
인식상으로는 명언(名言)과 실상(實相)을 통일하고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를 통일한다.
종교실천(宗敎實踐)으로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번뇌(煩惱)와 열반(涅槃)을 통일한다. 이른바 假有 性空,有無 二邊에 치우친 관점이 없음을 중관이라 이름한다.
D. 八不中道와 이제법
이 2제의 배경을 이루는 것이 '팔부"의 연기이다. 즉 제일의제에서 말하면, 일체는 '무아'이지만, 연기의 상관관계(상호관대(相互觀待) parasparapek a)에서 상대적으로 개체(제법)가 생기한다. 연기를 괄불의 비유비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제일의제가 되며, 유와 무라는 측면에서 보면 세속제의 세계가 된다. 이처럼 용수는 연기를 2제와 팔부(八不)로 해석했다. 이것은 연기를 '상호의존(상호관대)의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E. 상호관대의 관계
상호관대가 개체가 성립하는 조건이지만, 상호관대하는 개체가 없으면 관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대하는 개체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면, 상호관대가 개체가 성립하는 조건이라고는 말할수 없다. 즉 관대하는 개체가 없으면 관대는 성립하지 않지만, 개체가 이미 존재하면 관대는 필요치 않게 된다. 이처럼 '상호관대'라는 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상호관대의 연기는 논리를 초월해 있다.
이처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상이 존재의 실상, 즉 '제법의 실상 <dharmat , tattvasya lak anam '이다. 그 때문에 <중론>에서는 "제법의 실상은 마음으로써 사유할 수도 없으며,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것은 적멸하여 마치 열반과 같다"고 설하고 있다. 그것은 나와 너의 대립, 선과 악, 고와 락 등의 상대적 가치가 없어진 세계, 즉 공의 세계이다. 이상과 같은 용수의 연기에 대한 해석은, 공에 의거한 상호관대에 의해 연기의 '연(緣) pratyaya'을 바르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연기에는 '기(起) utp da'라는 측면도 있는데, 용수의 이해방식에서의 '기(起)'나 '생(生)'의 의미는 희박하다.
F. 희론적멸 파사현정
제법실상(존재의 진실한 모습)은 사유를 초월해 있으며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것을 희론적멸 prapa c upa ama이라 한다. 회론은 분별 vikalpa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불완전한 판단을 말한다. 존재는 일반적으로 시간적이고 유동적이지만, 우리의 인식(식(識) vij na)은 그것을 유동적인 모습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유동적인 존재를 정지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인식한다. 다시 말해서 '개념화'한다. 그리하여 판단이나 인식과 현실의 진실상 사이에 필연적으로 괴리가 생긴다. 더구나 이러한 인식의 배후에는 욕망이나 분노, 집착 등의 번뇌가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집착에 근거하는 유한한 인식을 '분별"이라고 한다. 분별은 현상의 진실상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인식이나 판단에는 항상 논리적인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자기동일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가 변하고 있다고 본다. 인식에 이러한 모순이 생기는 것은, 유동적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반야의 이해와, 똑같은 유동적인 존재를 개념화하여 이해하는 식(識)의 인식이라는 두 가지 앎이 있기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식의 근저에는 '무명지라는 것이 있다.
중관파는 인식이 안고 있는 모순을 철저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분별을 물리친다. 이것을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한다. 이것은 파사가 그대로 현정이다. 파사 후에 현정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판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설하면 거기에도 모순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관파에 의하면 시간적 존재자·연기에 의해 성립하는 존재자는 한편으로는 유한한 면을 갖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영원한 성격, 전체적 성격을 갖는다. 이 양면성을 갖는 현상을 유한이라는 쪽에서 이해하면 세속제의 입장이 되고, 무한 ·전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면 제일의제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G. 중도
세속제와 제일의제의 조화가 중도 madhyama pratipad이다. 그러나 중도는 세속제와 제일의제 속에 해소되어 있는 것이며, 제3의 제(諦)(진리)로서 중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세속제에 있어서 현상(제법)을 인식하는 것은 '지(智) j na'이지만, 이것이 제(諦)이기 위해서는 식이 집착이나 무명을 버리고 '반야'에 동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에 제일의제에 있어서 제법을 인식하는 것은 반야(praj 혜(慧))이다. 반야란 영원이나 전체를 아는 전체적 직관, 혹은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는 유한자를 아는 인식주체이며, 반야는 무한자를 아는 지혜이다. 반야로써 알려지는 법의 본성은 공이다. 여기서는 법의 개별적 ·차별적인 면은 사라진다. 지가 유한자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대상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야의 인식, 공의 통찰이 그 이면에 있으면서 식의 인식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 공의 인식이란 '무집착 ·무분별'을 말한다. 식이 반야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그 인식은 집착적이게 되며, 자아에 대한 집착(아집), 외계에 대한 집착(아소집)이 생기고, 거기서 인식되는 것은 개체이지 법은 아닌 것이다. 연기의 도리에서 성립하는 개체를 보는 곳에서 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법이란 영원의 상(相)에서 보이는 유한자이다.
H. 공
'공'은 허무라는 의미는 아니다. 공이란 현상이 변화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무상이라는 말과 같다. 다만 무상이 현상을 직접 인식하는 면에서의 파악이라면 공이라는 것은 그 현상의 이면에 대한 파악을 시도할 때 그 안에 어떤 실체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서 그 어떤 현상적인 개념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상태를 일컫기 위해 공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리고 현상 일체의 이면은 공이라는 것은 어떤 공이라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空空)
그러나 이 공의 파악을 잘못하여 일체가 공하기 때문에 인과가 없으며 선악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존재의 본성이 공이기 때문에 연기의 도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공하지 않고 어떤 실체가 있고 또는 어떤 모습으로 실재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고정되어 있어야 하므로 변화하여 나타난다는 현상이 있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공하다는 면은 반대로 현상법에서 연기의 도리가 나타나게 하는 전제적 기반이 되어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공의 활동에는 법칙성이 있다. 공은 연기라는 것과 같다. 이 점을 <중론>(제24품 제 7게)에서는 공성 nyat 과 공의 의의 nyat rtha, 공의 활동 nyat -pra yo-jana 등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용수는 또한 공에 있어서 성립하는 개체를 '가(假)(praij apti, 상대적으로 성립한 것 up daya praij apti 인시설(因施設)라고도 부르고 있다. 법(존재)은 무상전변(無常轉變)의 공에 있어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컨대 특정한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그 이름은 '가명' 이다.
I. 지의의 3 제설과의 관계
이 연기 ·공 ·가 등의 관계를 <중론> (제24품 제18게)에서는 "연기로 성립하고 있는 것(중인연생법(衆因緣生法))을 우리는 공성이라고 설한다. 그 공성이 그대로 상대적인 가(假) 이다. 또한 그것이 중도이다"라고 하면서 공(空) ·가(假) ·중(中)의 3제를 설하고 있다. (단 <중론>에는 3제라는 용어는 없다. 이것을 3제라고 보는 것은 천태대사 지의의 입장이다). 앞의 2제에 적용시켜 말한다면, 공성은 제일의제이며 가명은 세속제이다.
세속제란 언어로써 표현되는 진리라는 의미도 된다. 그리고 중도는 이 공성과 가명의 별명이다. 공성이 주체적으로는 그대로 중도이다. 그래서 길장은 제일의제 속에 중도가 있고 또한 세속제 속에도 중도가 있으며, 제일의제와 세속제 속에도 중도가 있다고 하면서 진제중도 ·세제중도 · 2제합명중도를 설한다. 즉 연기를 주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도이다. 동시에 그것은 무집착의 실천이다. 연기의 도리를 모르면 공이 허무로 잘못 이해되어 제일의제가 제(諦)(satya, 진리)라는 의미를 잃게 된다.
<대승이십송론>에는 '삼계유심'의 사상이 있는데, <중론>에는 유심론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론>의 게문에는 '분별 vikalpa'이라는 용어가 보인다. 이것은 유식설에서 인식의 미망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개념이 된다.
중론에 있어서 연기는 불생불멸 등의 '팔불', 공 ·가 ·중의 3제, 그리고 제일의제와 세속제로써 설명되고 있다. 이 용수의 2제설을 계승하여 중도를 해명한 것이 길장(549-623)의 <중론소(中論疏)이다. 이에 대해 월칭 Candrakirti (600-650년경)의 <중론주(註) 프라산나파다 prassnnapada > 에서는, 연기에 포함되는 '상호의존(paraspar pek 관대(觀待), 인대(因待)라고도 함)'이 자세히 설해지고 있으며, 상호인대로부터 공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지의(538-597)는, 불성사상을 도입하여 중도를 제3제라 보고 공가중(공가중(空假中))의 3제를 설하는 점에서, 앞의 두 사람과는 다른 새로운 입장에 서 있다고 하겠다. 이것을 '원융
3제'라 하여 '원융'이라는 말로 연기를 설명하고 있는데, 3제를 설정하는 점에서 길장과는 입장이 다르다. 그러나 <중론>의 해석으로서는 길장의 것이 용수에 가깝다.
J. 불타관
용수시대에는 <법화경>이나 <화엄경> · <아미타경> 등, 웅대한 불타를 설하는 대승경전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불타관에는 그러한 불타가 반영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좋다.
용수의 불타관은 대승경전에 나타난 불타의 이론적 토대가 되고 있다.
단 <중론>은 공을 설하기 때문에, <관여래품>에서는 "여래는 유무를 초월해 있으며 적멸상이다"라고 할 뿐, 적극적인 불신론은 설하고 있지않다.
이것이 설해지는 것은 주로 <대지도론>이다. <대지도론> 권9에는 법성신(法性身)과 부모생신(父母生身)이라는 2종의 불신이 설해져 있다.
또한 <대지도론> 권10에서는 불신을 신통변화신과 부모생신으로 나누고 있기 때문에 법성신은 신통변화신으로도 불리는 것이다. <대지도론> 권39에서는 보살에는 2종이 있다고 하면서, 업에 따라 태어나는 보살과 법성신을 얻은 보살을 언급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대지도론>에 의하면, 불타나 대보살의 본질은 법성신이지만, <중론>의 (관여래품)에 있어서는 여래는 적멸상이며, 그 몸은 유라고 할 수도, 무라고 할 수도 없다고 설하고 있다. 제법실상은 미묘적멸하며, 필경청정한 제법실상이 여래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여래는 분별이나 희론을 떠난 지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을 살펴본다면 용수의 불타관은 이신(二身)설(說)에 입각한 것으로 보인다.
3. 중관학파의 분류
티베트의 종의서(宗義書)인 '학설보환(學說寶環)'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인도에서 중관학파는 다음과 같이 그 흐름이 나뉜 것으로 보인다.
즉, 중관학파는 먼저 귀류론증파(歸謬論證派 pr san,gika)와 자립논증파(Sv tanrika)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중 자립론증파(自立論證派)는 다시 유가행(瑜伽行)중관파(Yog c ra M dhyamika)와 경량행(經量行)중관파(Sautrantika M dhyamika?)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그 중 유가행중관파는 형상진실파(形象眞實派)와 형상허위파(形象虛僞派)로 다시 나누어졌다.
그리고 그 중 형상 허위파는 유구론파(有垢論派)와 무구론파(無垢論派)로 양분되었다.
오늘날 티베트의 종의서(宗義書)인 '학설보환(學說寶環)'의 내용에 따라, 중관학파의 학승들은 그 형성시기의 초기(初期), 그리고 불호(佛護)와 청변(淸辨)에 의해 양분되는 중기(中期), 그리고 적호(寂護)와 연화계(蓮華戒) 등이 활동하던 시기의 후기(後期)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위 학파별로 정리된다.
< 중관학파의 계도 >
+-초기 - [ 용수(龍樹) 제바(提婆) 라후라(羅喉羅) 청목(靑目) 바수(婆藪) ]
|
|
+-중기 +- 귀류논증파 [ 불호(佛護) 월칭(月稱) 적천(寂天) ]
| +- 자립논증파 [ 청변(淸辨) 계통 ]
| |
| +--+- 경량행 중관파(經量行中觀派)
| +- 유가행 중관파(瑜伽行中觀派)
| │
| │
| │
| │
+-후기(後期 -----------+--- 형상진실파(形象眞實派) [ 적호(寂護) 연화계(蓮華戒) ]
+--- 형상허위파(形象虛僞派) --+----- 유구론파(有垢論派)
+----- 무구론파(無垢論派)
4. 중관학파(中觀學派)의 형성과 역사
중관학파의 형성
용수에 의해 중론송(中論頌)이 쓰여졌던 시기를 중관학파의 형성의 원시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어떤 다른 불교내 흐름과 뚜렷이 구별되어지는 독립된 학파로의 형성은 그 보다는 늦게 형성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는 중관학파(中觀學派)라는 이름을 갖는 학파가 형성되었던 것은 유가행파가 나타난 이후 유가행파와 중관학파가 그 경향이 구별되어짐으로서 비로소 형성되어진 것으로 보게 된다.
가령 용수의 제자인 제자(提姿)나 나후라발타라(羅喉羅跋陀羅)가 활약하고 청목(靑目)이 중론송을 주석했던.때까지도, 무착(無着)(A a ga, 310∼390 년경 / 또는 395-470 )이나 세친(世親)(Vasubandu, 330∼390 년경/ 또는 400-480 년)이 중론송을 해석하거나 이것에 의해 타학설(他學說)을 비판했던 점 등으로 보아, 용수의 중론송은 대승불교 전체의 공유 성전(聖典)으로 연구 해석되고 의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론송을 기초하면서도 인식론적(認識論的) 색채를 띈 유식학설(唯識學說)의 체계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중론송에서 밝혀진 공성(空性)(s nyat )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로 달라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중론송(中論頌) 그것에 돌아가고자 하거나 유식학설에 대항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이 운동을 중심하여 마침내 중관학파가 형성되었던 것으로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는 중관학파가 형성되어지는 시기는 유식설(唯識說)을 주장하는 유가학파(瑜伽學派 Yog c ra)와 관련해서 대략 4세기 경에 형성되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중론송이 지어진 이래, 이것을 기본성전의 하나로 의식하게 되는 시기, 그리하여 학파로서 기반을 갖추게 되는 시기를 중관학파의 초기로 보면 용수(龍樹) 제바(提婆) 라후라발타라(羅喉羅跋陀羅) 청목(靑目) 바수(婆藪) 등이 이에 해당되게 될 것이다.
중기(中期) 중관학파 - 귀류논증파와 자립논증파
A. 불호 귀류논증방법
용수나 제바 이후 200여 년이 지난 때에, 중론송의 사상을 계승 부흥한 논사는 불호(佛護)이다. 그는 용수보살이 자주 구사했던 논증형식인 귀류법을 사용하여, 즉 대론자의 주장이나 학설이 모순을 내포하고 불합리에 빠지게 됨을 지적하는 논증방법으로, 중론송의 본질을 간접적으로 밝혀내고자 했다. 귀류법(歸謬法)은 배리법(背理法), Prasa ga 또는 Prasa g anum na 라고 한다.
그는 중론송 주장의 공성(空性)은 '적극 표출되지 않고, 상대의 주장이나 견해를 파척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B. 청변의 자립논증
중관학파(中觀學派)에서는 그 중기에 바바비베카Bhavaviveka(청변(淸辯), 500-570무렵)가 디그나가의 논리학을 채용하여 공의 사상을 추론식에 의해 논증하고자 하였다.
즉 "공을 적절한 논리로 적극적으로 밝혀 낼 수 있다"는 입장에서, 당시 진나(陳那 Dign ga)가 정립했던 신인명론(新因明論)에 의한 정언적(定言的) 추리(推理)형식의 논증법을 구사한 청변(淸辨)은 위의 불호(佛護)를 비판했다.
즉 붓다팔리타 Buddhap lita(불호佛頀, 470-540 무렵)가 나가르주나의 (중론(中論))을 주석하면서 귀류(prasa ga, reductio ad absurdum)만으로 논의하는 것을 비난하고 자신은 이른바 정언적(定言的) 추론식(推論式)에 의해 공의 진리를 증명하려 하였다. 이 추론식은 후대자립논증이라고 불려졌기 때문에 바바비베카의 계통을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Sv tantrika)라고 하게 되었다.
C. 스바탄트리카파(派)
이 파는 공사상을 나타내는 데 스바탄트라 아누마나 'svatantr num na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스바탄트라'란 다른 힘을 빌리지 않고 자력으로 활동한다는 의미이며, '자립(自立) · 자기(自起) ' 등으로 번역된다. 아누마나는 추론(비량) '논증이란 의미이다. 즉 불호는 프라상가의 논법을 써서 상대방의 입론을 파척했지만, 그것은 파척에 머물러 있으며, 적극적으로 공사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청변은 공의 입장을 논리에 의해 적극적으로 나타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용의주도한 논증식을 사용하면, 프라상가(과오(過誤)의 부수(附隨))에 빠지지 않고 공사상을 논증식으로써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러한 논리를 스바탄트라 아누마나(자립적 논증 ·독립의 추론)라고 불렀다. 그리고 불호의 프라상가 논법을 평하여, "인(因)과 유(喩)를 설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논증식으로 되어 있지 않다. 타인들의 논란에 회답을 하고 있지 않다. 상대방의 과실을 지적할 따름이므로, 불호의 논법을 사용하여 그 주장과 전혀 반대되는 주장이 그대로 성립하는 모순을 낳는다"고 하면서 역(逆)의 논증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청변은 공을 나타내는데는 프라상가 논법으로는 불충분하며, '독립된 추론'으로 공을 논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청변은 용수의 <근본중송>을 주석하여 <반야등론석>을 짓고 불호의 설을 비판하여 스바탄트라 아누마나를 구사하여 중관파의 입장을 천명했던 것이다. 이처럼 청변은 논리를 중시했지만, 공성 자체는 논리를 초월해 있으며, 공성은 논리적 사고가 미치지 못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승의의 입장에서는 논리학을 부정하면서 도 세속(언설(言說), vyavah ra)의 범위내에서는 공성을 논리에 의해 증명하려고 했다는 점에 청변의 독자성이 있다. 이 청변의 사상적 입장이 스바탄트리카 Svatantrika라고 불린 것이다. 이것은 '자재론증파(自在論證派)'혹은 '자립파(自立派)'등으로 번역된다.
이 청변의 입장은 동시대의 진나에 의해 불교의 논리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그것에 영향을 받아 중관사상에 논리학을 도입하여 성립한것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당시는 일반적으로 논증식에 의해 철학설을 표현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청변의 입장은 월칭의 입장보다도 유가행파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나는 480-540년경에 생존했으며, 청변은 490-570년경에 생존했다. 따라서 동시대인이면서도 청변쪽이 약간 후배였다 단, 청변은 '일체는 유식이다'라고 하는 유가행파의 입장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세속으로서는 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를 경량부중관파(Sautr ntik Madhyamika, Madhyamik Sautr ntika)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월칭도 세속으로서는 외계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청변과 월칭은 세속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다. 여하튼 그들은 승의제를 '언망려절(言亡慮絶)의 세계로 보기 때문에, 그것을 유(有)라고 할 수도 없고 무(無)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점에서는 청변과 월칭 모두 유가행파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후에 나타난 적호(寂護) ntiraksita(725-790년경)는 유가행파의 설에 영향을 받아, 세속으로서는 외계가 무(無)라고 설하지만, 승의로서는 마음도 자성무(自性無)라고 설했다. 유식설은 심(心)(식(識))의 유(有)를 설하기 때문에, 적호의 설은 이 점에서 유가행파와 다르다. 그 때문에 그는 유가행중관파 Yogacar Madhyamika라고 불렸다. 즉 청변은 스바탄트리카파였지만, 적호를 비롯한 유가행중관파에서 보면, 그의 입장은 경량부중관파로 불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프라상기카파, 스바탄트리카파라는 명칭은 인도불교에서는 없고, 티베트불교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즉 종카파의 <보리도차제론(Lam-rim)에 "설산취(雪山聚)(즉 티베트)에서 불교학자가 중관사(中觀師)를 프라상기카파와 스바탄트리카파로 나누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부톤은 즈냐나가르바(700-760년경) ·슈리굽타 ·샨티라크시타(적호(寂護)) ·카말라실라(연화계(蓮華戒), 740-795년경) ·하리바드라 등을 유가행중관파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 후기불교의 중요한 학자들은 대부분 이중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후기에는 불교가 점차 중관 ·유가의 융합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보아도 좋다.
D. 월칭의 청변에 대한 비판
그 뒤 월칭(月稱)은 이 청변(淸辨)을 비판하면서 스승 불호(佛護)를 옹호했다. 그는 귀류논증법의 교묘한 부정 논리를 종횡으로 구사하여 모든 사견(邪見)을 없애고자 했고, 특히 청변계(淸辨系)를 통렬히 공박했던 것이다.
- 자립논증파와 귀류논증파의 분열
이리하여 중관학파는 불호(佛護)·월칭(月稱) 계통의 귀류론증파(歸謬論證派)(Pr sangika,) 와 청변(淸辨) 계통의 자립론증파(自立論證派 Svatantrika,) 로 갈라졌다고 보아진다.
귀류논증파는 달리 필과공성파(必過空性派)라고도 하며 자립논증파는 자의입종파(自意立宗派)라고도 한다.
그 후에는 적천(寂天) 등이 귀류논증파의 계통을 이었고, 관서(觀誓)등은 자립논증파 계통에 속했었다.
E. 귀류논증파의 귀류논증
찬드라키르티 Candrak rti(月稱, 600∼650 무렵)는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하는 중관(中觀)의 진리는 논리를 초월한 것이며, 따라서 오직 반론자의 주장을 모순으로 유도하는 귀류만이 중관자에게 있어 유효한 논증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논리학의 중관철학에의 적용을 반대하여 붓다팔리타를 변호하고 바바비베카를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학문적 계통을 귀류론증파(歸謬論證派) Prasa gika 라고 한다. 중관학파 역시 이렇게 자립논중파와 귀류논증파로 분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귀류는 가언적인 간접논증이지만 인도에서는 니야야학파에서나 불교논리학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확실한 추리로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도논리학이 정언적(定言的) 추리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체의 모든 존재는 공이라고 주장하는 중관학파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명사(名辭)는 실재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 논증은 반드시 가언적(假言的)이어야 하지 정언적(定言的) 추론식을 구성할 수는 없다. 바바비베카는 특수한 한정을 가한 후 형식적으로는 다수의 정언적 추론식을 구성하였지만 그것들은 실제적으로 귀류와 같은 가언적인 것이었다.
다르마키르티는 그가 만년에 지은 (바다 느야야, V dany ya(논쟁의 논리))에서 순간적 존재를 논증(-찰나멸론(刹那滅論)하면서 가언적 추리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싼타라크시타의 제자 카말라씨라Kama1a i1a도 프라상가 아누마나Prasa gaanum na라고 하는 명칭 하에 귀류추리를 인정하였다. 11세기가 되면 즈냐나쓰리미트라, 라트나키르티, 그리고 특히 라트나카라산티에 의해 가언적추리의 이론이 완성되어 귀류도 빛을 보게 되었다. 이 단계에서는 중관의 두 파의 분열도 자연스럽게 해소되어 버린 것이다.
F. 경량부중관파와 유가행 중관파
그리고 한편 자립논증파 계통도, 청변(淸辨)은 유식설(唯識說)에 반대하여 외계의 실재(實在)를 인정하므로 경량부중관파(經量部中觀派)라 불려지게 된다.
반면, 적호(寂護)나 그의 제자 연화계(蓮華戒)는 유식사상을 도입했으므로 유가행중관파(瑜伽行中觀派)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분열의 시기를 '중기 중관학파'라고 보면, 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는 불호(佛護) 청변(淸辯) 월칭(月稱) 관서(觀誓) 적천(寂天),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 Praj karamati(950∼1030년 경)도 중기에 넣기도 한다.
후기(後期) 중관학자(中觀學者)
위와 같은 중기 중관학파에게서는,
중론(中論) 주석을 기본하고 있는 점과, 논증방법의 상위에 따라 귀류논증파(歸謬論證派)와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로 나누어진 점, 그리고 유가유식학파에 대한 강한 대항의식을 가졌던 점 등의 특징이 보인다.
그러나 그 후의 중관학자들에게서는, (1)용수를 기준함에 적지 않게 법칭(法稱)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점, (2) 대부분 자립논증파에 속하는 점, 그리고 (3) 적호(寂護)나 연화계(蓮華戒)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경량부(經量部) 및 유식파(唯識派) 등을 중관파의 입장에서 종합했듯이 유가행파(瑜伽行派)의 학설을 흡수했던 특징이 보인다.
이 후기에 속하는 학자들은 J nagarbha(8c.), 적호(寂護), 연화계(蓮華戒)(Kamalasita, 745∼795년경) , Vimuktisena(8c.), Haribhadra(800년 경) 등을 들 수 있다.
중관학파의 영향
이들은, 대승불교 초기부터 인도불교의 최후(13C경)까지 존속하여, 인도불교의 여러 학파 중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많은 문헌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sarv stiv da)나 경량부(經量部)(Sautr ntika) 그리고 유가행파(伽行派)(Yog c ra) 등의 불교학파를 종합흡수하는 사상과 철학체계를 완성하게 된다.
이들의 학설(Madhyamak dar ana)은 중원대륙(中原大陸)으로 전파되어, 한자(漢字)문화권(文化圈)에서 찬란히 꽃피을 대승 원융무애(大乘 圓融無碍)사상의 원천으로서 삼론(三論)교학을 형성시키거나, 천태(天台)· 화엄(華嚴)·선(禪)·정토(淨土)·밀교(密敎) 등의 현란한 교학 수립 전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티베트불교 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또 이들을 바탕한 삼론사상(三論思想)은 일본에 처음 불교를 보급하고 남도불교(南都佛敎)의 첫 종파를 형성시켰다.
5. 중관학파의 학자들
이하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중관학파를 구성하는 학자들에 대해 다시 한번 그 저서등을 중심으로 대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初期) 중관학자(中觀學者)
㉠ 용수(龍樹) : 대승불교의 기반을 확립 심화했다. 저서(著書)(한역장경에는 20부 154권, Tibet장경에는 95부) 중에는, 『중론송(中論頌)』이나 『십이문론(十二門論) , 『육십송여리론 『회쟁론(廻諍論)』, 등과 같은 대승공사상에 관한 철학서가 있다.
대승보살의 실천수행법을 설명하는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 『보리자량론 (菩堤資糧論)』, 그리고 올바른 정치와 왕도 및 그 덕목(德目)을 밝히는 『 보행왕정론(寶行王政論) , 권계왕송』 등이 있다. 그의 많은 저서 중 주저(主著)는 중론송이다. 다른 저서에 이것의 내용이 번번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 용수가 후세에 끼친 영향
용수는 팔종(八宗)의 개조라고 말해지며, 후세의 불교에서 용수를 종조(宗祖)에 포함시키는 종파가 많다. 이것은 그만큼 용수의 학문의 폭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수는 중관파 Madhyamika의 개조라고 하는데, 이것은 <근본중송>에 기초한 학파이다. 동시에 이것은 <반야경>의 공사상을 조술한 학파이다. 이것은 중국에서는 제바의 <백론>을 추가한 <중론> · <백론>· <십이문론>을 소의로 하는 '삼론종'이 되거나, 여기에 다시 <대지도론>을 추가하여 '사론종'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천태종의 사상으로도 발전해간다. 인도에서도 중관파는 유가행파와 더불어 후세까지 오래도록 번영했다. 그러나 중관파에는 화엄 계통의 사상은 계승되지 않았다. <십주비바사론>이나 <대승이십송론> · <보리자량론> 등에는 화엄사상이 설해져 있다. 이들은 공사상과 아울러 무착이나 세친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밀교와도 사상적으로 관계를 맺어간다. <십주비바사론>에 (이행품)이 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인데, 여기에는 아미타불의 신앙이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정토교의 원류가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용수의 사상은 다방면으로 발전해가지만, 직접적으로는 중관파로 발전하는 것이다.
㉡ 제바 ( rya -deva, 성천(聖天), 170∼270년 경)
백론 (S.atasastra, 2권 20품 50게)과 『사백론』(Catuh astra, 16품 400게), 『백자론』및 그 주(註)등을 지었다. 중론송에 가르쳐진 파사적(破邪的) 활동에 힘썼다.
<제바보살전>에 의하면, 제파(提婆) ryadeva는 남인도의 바라문 출신이라고 하는데, <사백론(四百論)>에 대한 월칭의 주(註)에 의하면, 제바는 세일론 출신으로서 왕자였는데, 왕위를 포기하고 출가하여 남인도로 와서 용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대당서역기> 권10에는 제바가 주리야국(珠利耶國)(다냐카타카와 칸치푸라 사이에 있는 나라)의 성 서쪽에 있는 가람에 머물면서 아라한과 논의했다고 한다.
㉢ 라후라발타라(羅喉羅跋陀羅)(R hulabhadra, 200∼300년 경 )
: Ppraj paramlt stotra (찬반야바라밀게, Saddharmapun,dar kastava (묘법연화찬(妙法蓮華讚)) 등지음.
티베트의 전승에는 라훌라바드라가 용수의 스승이었다는 설이 있다.
㉣ 청목(Pin.gala, 4c. 초) 중론송을 주석(註釋)하였다. 나집(羅什)삼장에 의해 그 게송과 해석문(장행석(長行釋)이 함께 '중론(中論)'이라는 이름으로 한역되어, 중론송의 주석서로는 가장 오랜 것으로 제일 많이 읽혀지고 있다.
㉤ 바수(婆藪)(Vasu) : 제바의 백론(百論)을 해석찬 백론소(百論疏) 9권을 지었다.
중기 중관학자들
㉠ 불호(佛護 Buddhap litaa, 470∼540년 경) :
귀류논증 형식으로 중론송 일부를 해석하여 (티벳역으로만 현존) 중관사상을 부흥시켰다.
㉡ 청변(Bhavaviveka, Bhavya, 490∼570년 경)
중론송에 대해 주석했다. 이것은 한(漢)·장(藏) 양역(兩譯)되어 현존하는데 그 한역본이 반야등론석(般若燈論釋)이다. 이 밖에 독자적인 저서로 『중관심론송(中觀心論頌)』(범어 티벳어 모두 존재한다.) 『사택염(思擇炎)』 (중관심론주(中觀心論註), 장역(藏譯), 『대승장진론(大乘掌珍論)』 등을 찬술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는 자립적인 정언적 논증형식(Svatantr anum na)을 구사하여 불호를 비판했다.
㉢ 월칭(月稱)(Candrakirti, 600∼650년경 ) :
Prasannapad 라는 유일한 중론송 범어 주석서를 남겼다. (티베트역으로도 되어 있음). 그가 청변(淸辨)을 공박하고 스승 불호(佛護)를 옹호함으로써 중관학파의 분열이 뚜렷해졌다.
『십지경(地經)』의 십 바라밀(波羅蜜)에 따라 중관사상을 밝혔고, 중관불교입문서인 『입중론 즉 『Madhyamak vat ra(장역(藏譯)뿐)을 짓거나, 오온론(五蘊論) (Pa caskandaprakaran,a), 사백론(四百論), 공칠십론(), 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 등에 주
석했다.
㉣ 관서(觀誓 Avalokitavrata, 7c) : 불호(佛護)의 중론석 비판, 청변의 반야등론(般若燈論)을 주석하는 반야등론광석(般若燈論廣釋)』(Praj pradipat ka, 장역(藏譯)뿐)을 지어 인도철학이나 불교 각 학파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 적천(寂天)( antideva, 650∼750년 경) : 육바라밀(六波羅蜜)을 기준으로 보살의 학행(學行))에 관한 교훈을 모은 『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 (S'iks samuccaya,학처요집(學處要集), 27 게와 그 주석 및 경증(經證), 범장본(梵藏本) 현존)과 초심자에게 보살행을 밝혀 주는 『보리비결(菩提翡潔)(Bodhicary vat ra, 입보리행론, 10품(品) 900여게, (범어본 티벳본 현존), 그리고 『경집(經集)』(S trasamuccaya) 등 지었다.
㉥ Praj karamati(950∼1030년 경) : 위의 『입보리행론 』을 주석한 『입보리행론 세소(細疏)』(Bodhicaryavatrapanjika, 범본 현존)를 지어 경량부나 유식파 비판하였다.
후기 중관학자
㉠ J nagarbha(8c.) :
적호(寂護)의 스승으로 『이체분별론(二諦分別論)』(Satyadvayavibha ga, 46게, 티벳역뿐임 )이나 『이제분별주(諦分別註)』(satyadvayavibha g v t 티벳역뿐임) 및 『유가수습도(瑜伽修習道)』(Yogabhavanamarga, 티벳역 뿐임.) 등을 지었다..
㉡ 적호(寂護) ' ( antaraksi 728∼788년 경) :
외교제파(外敎諸派)와 유부 및 경량부 등의 이론을 소개 비판하는 『진실요의(眞實要義)』(Tattvasa graha, 3645게, 범장본 현존)와 『중관장엄론(中觀莊嚴論)(Madhyamak la k ra) 및 이에 대한 자주(自註)(∼vrti)를 지었고, 스승의 『 이제분별론』을 주석하였다.
싼타라크시타(725-784무렵)는 인도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해박한 지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바바비베카 학통(學統)에 속해 있었지만 다르마키르티의 인식론과 논리학에 정통하였으며 유식학파의 장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유식의 이론을 중관교학의 일부로서 수용하였기 때문에 유가행(瑜伽行) 중관학파(中觀學派)라 불려지기도 하였다. 싼타라크시타는 자신의 철학체계를 유부(有部) ·경량부(經量部) ·유식학파(唯識學派)의 이론에서 최고의 진리인 중관(中觀)으로 향해 을라가는 단계로서 설정하였는데, 말하자면 그는 불교의 4대 학파와 지식론학파의 이론을 종합하였던 것이다. 那爛陀寺(梵 Nalanda)의 학자로 靜命大師라고도 칭한다..
㉢ 연화계(蓮華戒)(Kamalasita, 745∼795년경) :
스승 적호의 『진실요의(眞實要義)』와 『중관(中觀) 장엄론 』에 대한 주석서인 『진실요의세소(眞實?義細疎)』(범어본 티벳본 현존)와 『중관장엄론세소 (中觀莊엄론 세소) 』(티벳역뿐)를 저작했고, 『중관명(中觀明)』(Madhyamak loka)와 『진실명』(Tattv loka) 그리고 『 일체법무자성논증』 등 독자적 저서 남겼다.
㉣ Vimuktisena(8c.) :
Haribhadra의 스승으로서 , 이만오천송 반야경(般若經)을 해설한 『현관장엄론(現觀莊嚴론)을 주석하는 『현관장엄론주(現觀莊嚴論註)』(Abhisamay -la k ra -vrti) 지었다.
㉤ Haribhadra(800년 경) · 『팔천송반야해설(八千頌般若解說) 현관장엄(現觀莊嚴)의 광명(光明)』이라는 대작(大作) (범장본 현존) 남겼다 .
- 終
Ⅵ. {中論} 귀경게 八不의 배열과 번역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金 星 喆
目次
1. 문제의 제기
2. 八不의 배열
3. 八不의 번역
4. 종합적 고찰
Ⅰ. 문제의 제기
1. 八不 배열의 문제
인도에서 저술된 {中論}에 대한 1차적인 주석서 중 현존하는 것은 龍樹(N g rjuna: 150∼250경 C.E.)의 自註라고 전승되는 {無畏疏}, 鳩摩羅什(Kumaraj va: 350∼409C.E.)에 의해 한역된 {靑目疏}, 佛護(Buddhapalita: 470∼540경 C.E.)의 {根本中論註}(M lamadhyamakav tti), 中觀 自立論證派(Sv tantrika)의 시조인 淸辨(Bh vaviveka: 500∼570경 C.E.)의 {般若燈論}(Praj prad pa), 唯識論師인 安慧(Sthiramati: 510∼570경 C.E.)의 {大乘中觀釋論}, 月稱(Candrak rti: 600∼650경 C.E.)의 {淨明句論}(Prasannapad ) 등이 있다. 이 중 {정명구론}은 산스끄리뜨본과 티베트역본으로 현존하고, {청목소}와 {대승중관석론}은 한역본만으로 현존하며, {무외소}, {불호주}는 티베트역본만으로 현존하고, {반야등론}은 한역본과 티베트역본으로 현존한다.
그런데 이들 주석서에서 귀경게 八不의 배열 순서는 일치되지 않는다. 현존하는 유일한 산스끄리뜨본인 {정명구론}의 귀경게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소멸하지도 않고(不滅) 발생하지도 않으며(不生), 단멸하지도 않고(不斷) 상주하지도 않으며(不常), 같지도 않고(不一) 다르지도 않으며(不異), 오지도 않고(不來) 가지도 않으며(不去), 희론이 적멸하며 상서로운 연기를 설해 주신 정각자에게, 설법자들 중 으뜸이신 그 분께 예배드립니다.
여기서 전반부의 八不偈는 ①不滅→②不生→③不斷→④不常→⑤不一→⑥不異→⑦不來→⑧不去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한역본 중 {반야등론} 역시 이와 동일한 순서에 의해 八不을 배열하고 있으며, {대승중관석론}의 경우 八不偈 중 앞의 四不만 인용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주석에서는 {정명구론}과 동일한 배열에 의해 八不을 소개하고 있다. {중론}에 대한 직접적인 주석서는 아니지만 {중론}의 이치에 의거하여 반야경의 공 사상을 이해시키기 위해 저술된 無着의 {順中論義入大乘般若波羅蜜經初品法門}에도 이 세 논서와 동일한 순서에 의해 八不이 배열되어 있다.
그런데 구마라집 번역의 {청목소}의 경우는 八不이 ②不生→①不滅→④不常→③不斷→⑤不一→⑥不異→⑦不來→⑧不去의 순으로 배열되어 前 四不의 배열 순서가 산스끄리뜨문과 다르다. 한편 티베트 역본의 경우, 모두 ①不滅→②不生→③不斷→④不常→⑦不來→⑧不去→⑥不異→⑤不一의 순으로 배열되어 後 四不의 순서가 산스끄리뜨 원문과 다르다. 심지어 산스끄리뜨문 월칭소를 그대로 직역했다고 생각되는 티베트역본에서조차 이와 같은 배열을 보인다. 이렇게 {중론}에 대한 제 주석서에서 八不을 다르게 배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첫 번째 목표이다.
2. 八不 번역의 문제
또 八不의 '不'은 산스끄리뜨어에서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사 'a' 또는 'an'의 번역어이다. 한역본 귀경게의 경우 八不 중의 'a'나 'an'은 그대로 '不'로 번역되지만 주석에서는 '無'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비단 八不偈뿐만 아니라 {중론} 내 다른 게송에 대한 번역, 또 {중론}뿐 아니라 다른 모든 한역 경전에서 부정표현을 번역할 때, '不', '無', '非' 등의 번역어가 혼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중 어느 하나만이 올바른 번역어일까, 아니면 모두 다 쓰일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다양한 번역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八不 중 不一不異(anek rtham an n rtham)와 不來不去(an gamam anirgamam)는 諸 번역본에서 다르게 번역한다. {청목소}에서는 anek rtham an n rtham 중의 'artha'를 무시하고 不一不異라고 번역하지만 {순중론}에서는 '義'라는 말에 의해 이 의미를 살리고 있다. 또 티베트역본의 경우도 'don'이라는 말에 의해 'artha'의 의미를 그대로 살려 번역한다. 또 不來不去 중 '去'의 경우 유독 {청목소}에서만 '出'이라고 번역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올바른 번역은 어떤 것일까? 이렇게 八不 번역의 문제에 대해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두 번째 목표이다.
Ⅱ. 八不의 배열
(1) 不生不滅과 不常不斷
이러한 八不偈의 원형은 무엇일까? 어째서 龍樹는 八不 중 不生不滅과 不常不斷을 {반야경} 등의 일반적 배열과 달리 不滅不生 不斷不常의 순으로 배열하였을까? 먼저 전재성도 지적하고 있듯이 前半 四不의 산스끄리뜨 원문을, 구마라집의 한역본에서와 같이 ①不生→②不滅→③不常→④不斷의 순으로 배열할 경우 loka의 운율에 어긋나고 만다. loka에는 Pathy 형과 Vipul 형의 두 가지가 있는데, Vipul 형은 다시 네 가지로 나누어지며 그 운율은 다음과 같다.
Pathy 형
① ···· --· ···· - ·
Vipul 형
②·- - · ···· - ·
③· -- · ···· - ·
④·- - - · ···· - ·
⑤·- - -,--· ···· - ·
그런데 八不 중 앞의 四不을 한역본에서와 같이 'anutp dam anirodham a vatam anucchedam'의 순으로 배열할 경우 다음과 같은 운율을 갖게 된다.
-- - - --
여기서 둘째 P da와 넷째 P da의 운율이 loka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loka 作詩法에서 이와 같은 배열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청목소} 이외의 다른 주석에서와 같이 ①不滅→②不生→③不斷→④不常으로 배열해 보면 그 운율은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 -- - -
이는 Pathy 형 loka이다. 따라서 前 四不의 원래적 형태는 '不滅不生 不斷不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유독 구마라집만은 어째서 이를 '不生不滅 不常不斷'로 표기하며 그 순서를 바꾸었을까? 이는 그 당시 유포되어 있던 다른 불전들에서의 일반적 배열 순서에 따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산스끄리뜨 원문의 경우 loka 운율에 맞추기 위해, 피치 못하게 일반적 배열에서 벗어나 前 四不의 배열 순서를 顚倒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不一과 不異
그러면 後 四不에 대해 조망해 보자. 앞에서 보았듯이 後 四不의 경우는 티베트 번역본에서만 일관되게 ⑦不來→⑧不去→⑥不異→⑤不一의 순으로 배열하고 있다. 산스끄리뜨 원문이나 한역본에서 마지막에 위치하는 不來不去가 앞에 배열되고, 不異不一을 마지막에 배열된다. 또, 산스끄리뜨 원문이나 한역본의 不一不異가 티베트 번역본에서는 일률적으로 不異不一로 되어 있다. 八不偈의 티베트譯文은 다음과 같다.
'gag pa med pa skye med pa, chad pa med pa rtag med pa/(無滅無生, 無斷無常/)
'ong ba med pa 'gro med pa, tha dad don min don cig min//(無來無去, 非異義非一義//)
과거의 譯經家들은 불전을 번역할 때 그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의 복원도 중시하였다. 즉, 운문은 반드시 自國語의 운문의 형식을 빌어 번역하였던 것이다. loka의 경우 중국에서는 五言 古體詩의 형식으로 번역하였고, 티베트의 譯經家들은 마지막에 Synalepha를 갖는 3 P da의 詩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보듯이 산스끄리뜨 원문의 不一→不異의 배열이 티베트역문에서는 不異→不一(非異義→非一義)로 도치되어 있다. 이렇게 不一과 不異를 도치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不一不異 즉, 'anek rtham-an n rtham'은 티베트어로 'tha dad don min don gcig min'(非異義非一義)으로 번역되는데 각 음절의 강세는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강(1) 약(0) 강(1) 약(0) 강(1) 약(0) 약(0)
tha dad don min don gcig min
異 義 非 義 一 非
여기 인용한 티베트譯 게송의 시형식을 우리말의 음조로 飜案할 경우, '강약강약 강약약'의 4×3調에 해당될 것이다. 이 번역문은 不一不異의 배열이 바뀌어 있기는 하지만 anek rtham-an n rtham이라는 산스끄리뜨 원문의 의미가 남김 없이 담겨 있다. 그런데 산스끄리뜨 원문의 의미를 모두 담으면서, 원문의 순서도 복원하고자 할 경우 不一不異는 티베트어로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1 0 1 0 1 1 0 0
don gcig min pa don tha dad min
즉, 3음절(100)이어야 할 후반부가 4음절로 증가될 뿐만 아니라, 운율도 흐트러지고 만다(1100). 그러나 여기서 tha dad don min을 선행시킬 경우, tha dad don min don cig min으로 표현 가능하여 4×3조 시송의 운율 구조에 부합하게 된다. 용수가 八不을 loka의 형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不生不滅과 不常不斷이라고 표현되던 前 四不을 不滅不生과 不斷不常이라고 倒置시켰듯이, 티베트의 역경가들은 不一不異를 티베트 시송의 운율에 맞추기 위해 불가피하게 不異不一로 倒置시켰던 것이다.
그러면 또 티베트역 주석서에서 不來不去와 不異不一의 배열이 바뀐 것은 무엇 때문일까? 티베트譯 {반야등론}은 물론이고 산스끄리뜨문이 현존하는 티베트譯 {정명구론}에서조차 後 四不의 순서는 ⑦不來→⑧不去→⑥不異→⑤不一로 되어 있다. 또 그에 대한 주석에서의 배열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러면 전재성의 주장과 같이 티베트역 八不의 순서가 원래의 순서라고 보아야 할까? 그런데 한역 {반야등론}의 경우 八不偈는 물론이고 주석 역시 이와 달리 ⑤不一→⑥不異→⑦不來→⑧不去의 순으로 後 四不을 배열한다. 한역 {반야등론}과 티베트역 {반야등론}이 저본으로 삼았던 산스끄리뜨문 {반야등론}이 각각 달랐을까? 그렇다고 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어느 쪽이 원래의 배열일까?
이런 難題에 대한 실마리가 {무외소}에서 발견된다. 인도의 J nagarbha와 티베트의 Klu i Rgyal Mtshan이 共譯한 {무외소}에서는 八不偈와 八不偈에 곧바로 이어지는 八迷에 대한 語義 해설에서는 다른 티베트역본에서와 마찬가지로 ⑦來→⑧去→⑥異→⑤一의 순으로 그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어서 {佛母般若波羅蜜多經}의 경문이 인용된 후 두 차례에 걸쳐 八不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계속되는 데, 그 두 경우 모두 八不을 ①不滅→②不生→③不斷→④不常→⑤不一→⑥不異→⑦不來→⑧不去의 순으로 설명하고 있다. 산스끄리뜨문의 배열과 일치하는 것이다.
티베트에서, {반야등론}의 번역자나, {정명구론}의 번역자는 八迷, 또는 八不에 대한 주석을 번역된 귀경게에 맞추어 용의주도하게 모두 재배열하였는데, {무외소}의 번역자는 八不偈 직후의 주석만을 재배열하고, 나중에 다시 등장하는 八不에 대한 주석은 산스끄리뜨 원문 그대로 번역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귀경게의 배열을 도치시킬 필요가 없었던 {반야등론} 한역자의 경우 八不을 원문의 순서에 맞추어 그대로 번역했던 것이다.
(3) 不來不去와 不異不一
그러면 또 티베트의 譯經家들이 귀경게를 번역하면서 不來不去와 不異不一의 순서를 바꾼 까닭은 무엇일까? 八不 중 다른 부분은 모두 '○ ○ / med pa / ○ med pa'로 되어 있다. 즉, 두 번째 P da는 'med pa'이고 세 번째 P da의 Synalepha 부분 역시 'med pa'로 되어 있다. 그러나 'tha dad don min don gcig min'(不異不一)의 경우 두 번째 P da는 'don min', 세 번째 P da의 Synalepha 부분은 'gcig min'으로 다른 六不과 그 형태를 달리 한다. 따라서 不來不去와 不異不一의 순서가 바뀐 것은 시송의 운율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티베트역자는 八不이 부드럽게 낭송되게 만들기 위해 '두 번째 P da(med pa)와 Synalepha(med pa)'가 동일한 前 六不을 먼저 배열한 후, 마지막에 이들과 이질적인 '두 번째 P da(don min)와 Synalepha(gcig min)'를 갖는 不異不一을 배열했던 것이다.
(4) 非異義非一義의 문제
그러면 또, 八不 중 다른 六不의 경우는 'med pa'라는 부정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유독 不一不異에 대해서만 'min pa'라는 부정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無異義無一義라고 번역하지 않고, 非一義非異義라고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반야등론}의 영역자 Ames는, '티베트어 번역자가 다른 六不은 bahuvr hi(소유복합어)로 간주했던 반면 不異不一만은 karmadh raraya(동격한정복합어)로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야등론}에서는 八不偈를 주석하면서 '하나의 의미가 아니다(don gcig min)'라는 말은 '하나의 의미가 있지 않음'(don gcig yod pa ma yin pa)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있지 않음'(yod pa ma yin pa)의 의미는 '없음'(med pa)과 동일하다. 즉, 不一不異에서 말하는 부정의 의미는 다른 六不에서 말하는 부정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 즉, 'don gcig min'은 'don gcig med'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이런 주석을 읽고 이해했던 티베트의 역경가가 八不 중 不異不一만을 karmadh raraya(동격한정복합어)로 다르게 해석했다고 추측할 수는 없다. 八不에서 말하는 부정에 대한 번역의 일관성을 중시한다면 不異不一은 'tha dad don med don gcig med'라고 번역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번역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artha의 번역어인 don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산스끄리뜨어 artha는 '목적, 의미, 대상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한편 이에 대한 티베트어 번역어인 don은 '의미, 생각, 진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즉, artha는 대부분 don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don에는 artha로 환원될 수 없는 의미도 있다. 'don min'이라고 말할 경우 don은 '의미'라는 뜻을 갖게 되기에 'don min'은 산스끄리뜨 원문의 취지와 같이 '의미가 아니다'라는 뜻이 되지만 'don med'라고 번역할 경우, 'don med byis pa'(thoughtless boy)라는 용례에서 보듯이 'don'은 '생각, 앎'이라는 뜻이 되고 'don med'는 '사려 깊지 못한'(thoughtless)을 의미하게 되어 된다. 의미에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다. 不一不異의 부정에 대해 'med pa'가 아닌 'min pa'를 사용한 것은 티베트 번역문에서 artha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don gcig min'은 '수식어가 피수식어의 뒤에 위치한다'는 티베트어의 일반적 語順 규칙에 합치한다. 그러나 'tha dad don min'의 경우 '수식어가 뒤에 온다'는 규칙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don tha dad min'이라고 쓰여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배열할 경우, 앞의 두 P da의 강세가 '[강약] [약약]' 이 되고 말아 '[강약] [강약]'의 운율 원칙에 어긋나게 된다. 따라서 'tha dad don min don gcig min'은 원문의 의미도 해치지 않고 운율 원칙도 어기지 않으면서, 不一不異의 뜻을 티베트어로 近似하게 번역해 낸 最善의 번역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논의를 종합해 볼 때 八不偈는 원래, 산스끄리뜨본인 {정명구론}과 한역본인 {순중론}, {대승중관석론}, {반야등론}에서와 같이, ①不滅→②不生→③不斷→④不常→⑤不一→⑥不異→⑦不來→⑧不去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주석에서 그 배열을 달리 한 이유는 철학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 언어학적인 데 있다 하겠다.
Ⅲ. 八不의 번역
(1) a나 an의 번역
an tman(無我)의 접두사 an을 無로 번역해야 하는지 아니면 非로 번역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와 같이, 'anirodham anutp dam anucchedam a vatam/ anek rtham an n rtham an gamam anirgamam'이라는 八不偈에서도 부정의 접두사로 사용된 'a(an)'의 번역이 문제가 된다. 八不偈의 'a(an)'은 한역본에서는 不이나 無로, 티베트역본에서는 'med pa'(無)나 'min'(非)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 역시 사상적 문제라기보다 언어학적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印歐語에서는 존재에 대한 부정과 인식에 대한 부정이 언어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be' 동사는 우리말의 '있다'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이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며, 그에 대한 부정표현인 'be not' 역시 우리말의 '없다'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아니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없다'는 존재부정이라고 규정할 수 있고 '아니다'라는 것은 인식부정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산스끄리뜨어는 영어와 마찬가지로 印歐語族에 속하는 언어이기에, 'na'와 같은 否定의 副詞, 또 'a'나 'an'과 같은 否定의 接頭辭만으로는 존재부정과 인식부정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문이나 티베트어, 한국어에서는 이들 부정을 구분하여 표현한다. 한문의 경우 존재부정은 無라고 표현되고 인식부정은 非라고 표현된다. 티베트어의 경우 존재부정은 'ma yod pa', 또는 'med pa'라고 표현되고, 인식부정은 'ma yin pa' 또는 'min pa'라고 표현된다. 한국어의 경우 존재부정은 없다로 표현되고 인식부정은 아니다로 표현된다. 이에 덧붙여 작용을 부정할 때 한문에서는 '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한국어에서는 '∼지 않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산스끄리뜨문에 쓰이는 부정의 접두사 'a(an)'에는 이러한 '無', '非', '不'의 의미가 모두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a'나 'an'을 한문이나 티베트어, 한국어 또는 한문으로 번역할 경우, 無(없다), 非(아니다), 不(∼지 않다)이라는 번역어 중 어느 하나만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문맥에 의거해 적절한 번역어가 선택되어야 한다. {중론} 내 다른 게송에서 八不의 논리가 구사될 때에도 문맥에 따라 이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발견된다. 이를 예시해 보자.
먼저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 anutp da는 無生, 즉 '生에' 대한 존재부정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 어떤 것이든 그 어디서든, 自體로부터든 남(他)에서든 그 兩者에서든 無因으로든 사물들의 발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청목소}의 번역가 구마라집 역시 이를 無生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 anutp da는 '生'에 대한 작용부정, 즉 不生의 의미로 사용된다.
생하는 중인 것, 생한 것, 생하지 않은 것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去時, 已去, 未去에 의해 그와 같이 파악된다.
anirodha(不滅)의 경우 7-27, 17-21 등에서 부정은 '滅'에 대한 작용부정, 즉 不滅을 의미하고, 7-33 등에서 부정은 존재부정, 즉 無滅을 의미한다.
그러면 不常不斷의 용례를 보자. 적대자의 게송이긴 하지만 {중론} 第17 觀業品의 第8偈를 우리말로 번역할 경우 '常과' '斷은' 인식부정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존재부정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인식부정>
종자로부터 상속이, 또 상속으로부터 열매가 生起하며 종자가 선행하는 열매이기에, [종자와 열매는] 끊어진 것도 아니고 이어진 것도 아니다(非斷非常).
<존재부정>
종자로부터 상속이, 또 상속으로부터 열매가 生起하며 종자가 선행하는 열매이기에, [종자와 열매 간에는] 끊어짐도 없고 이어짐도 없다(無斷無常).
觀去來品은 不來不去(出) 중 不去를 논증하는 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게송의 전반부에서는 '去'에 대한 작용부정, 즉 不去를 노래하며, 후반부에서는 존재부정 즉 無去를 노래한다.
실재하며 실재하지 않는 것은 가는 작용 세 가지를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는 것이나 가는 놈이나 가야 할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티베트역문에서 不一不異는 非一非異, 즉 인식부정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는 '異'에 대한 존재부정을 노래한다.
다른 것이 다른 것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이는 대상' 등의 경우 다름은 존재하지 않는다(無異). 그러므로 그것은 결합에 이르지 못한다.
물론 이 게송에서 '다름'의 의미로 사용되는 anyatva는 귀경게에서 다름(異)의 의미로 사용되는 n n rtha와 다른 단어이다. 그러나 이렇게 術語(technical term)가 다르다는 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론} 전반에 걸쳐 수많은 異音同義語가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음 게송 중의 전반부의 'na anyat'는 존재부정으로도 해석 가능하고 인식부정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을 緣하여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이 다른 것을 떠나서 다른 것이 아니다(다름은 없다). 어떤 것이 또 어떤 것을 緣할 때 그것과 그것이 다름은 성립하지 않는다.
八不을 한문이나 티베트어, 또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 無나, 非, 혹은 不이라는 세 가지 의미를 갖는 번역어 중 어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각 언어의 어법에 맞을 경우 셋 중 그 어떤 번역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2) artha의 문제
또, 八不 중 다른 부분과 달리 不一不異에는 artha(義)라는 말이 삽입되어 있다. artha는 의미, 대상, 목적 등의 뜻을 갖는다. 다른 六不과 달리 유독 不一不異에만 artha가 삽입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八迷의 語義에 대한 {반야등론}의 주석에서는 artha(don)가 붙지 않은 채 一과 異에 대한 설명이 나열되는 문장이 발견된다. 또 구마라집의 경우 artha에 대한 번역을 무시하였고, 다른 제 주석서에서도 artha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artha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不一不異에 첨가된 것이 아니라 loka詩의 운율에 맞추기 위해 삽입된 調音語라고 생각된다. 즉, nirodha(滅), utp da(生), uccheda(斷), vata(常), gama(來), nirgama(出/去) 등이 모두 3음절의 단어인데 一과 異를 의미하는 eka나 n n 의 경우는 2음절어이기에 그 앞에 부정의 접두사를 붙여도, 4음절로 이루어진 다른 六不과 달리 음절수가 3음절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artha라는 단어를 삽입할 경우 anek rtha(不一)와 an n rtha(不異)와 같이 4음절어가 될 뿐만 아니라, loka의 운율에도 부합된다. 즉, 八不에 쓰인 artha는 음절수를 맞추기 위해 삽입된 것으로 특별한 사상적 의미를 갖는 말이 아니다.
(3) nirgama의 문제
또 八不 중 마지막의 nirgama를 구마라집은 出로 번역하였고 다른 한역자들은 去로 번역하였다. 'nir'는 'away'의 의미를 갖는 접두사이다. 따라서 nirgama란 엄밀하게 말해 'go away'의 의미일 것이다. 不去를 논증하는 품인 第2 觀去來品에서 去의 의미를 갖는 단어는 gati와 gamana와 gantum이다. 第1 觀因緣品에서 不生을 논증할 때 쓰인 utp da가 귀경게 八不에서 그대로 사용되듯이, 관거래품에서 不去를 논증할 때에 쓰인 이 세 단어 중 하나가 八不 중 不去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gati와 gatum으로 不去를 표현할 경우 agati와 agantum이 되어 3음절 단어가 만들어질 뿐이다. 따라서 4음절의 P da를 만들고자 할 경우 이 두 단어는 선택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또, gamana에 부정의 접두어 'a'를 부가할 경우 agamanam으로 되어 4음절의 P da가 만들어지긴 하지만, 그 운율이 ' '로 되어 loka 시형식에 어긋나고 만다. 앞에서 보았듯이 Pathy 형이든 Vipul 형이든 loka에서 마지막 P da의 운율은 ' - ·'이 되어야 한다. 즉 두 번째 음절에 長母音이 와야 한다. 따라서 agamanam 역시 不去를 표현하는 술어로 채택될 수 없다. 이렇게 관거래품에서 去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 술어는 모두 不去를 표현하는 하나의 P da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귀경게 八不에서 사용된 anirgamam의 운율은 ' - '이기에 loka의 운율 규칙에 부합된다. 따라서, 龍樹가 귀경게를 작성하면서 第2 觀去來品에 용례가 없는 anirgamam이라는 새로운 단어에 의해 不去를 표현해 낸 것 역시, 不一不異에 'artha'를 삽입한 의도와 마찬가지로 운율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구마라집은 gamam에 부가된 'nir'의 의미를 살려 '去'보다 강한 표현인 '出'을 번역어로 선택했던 것이다. 不去에서 사용된 'nir'란 2음절어인 'gama'를 3음절 단어로 만들기 위해 삽입된 調音語로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不出은 단순히 不去를 의미할 뿐이다.
Ⅳ. 종합적 고찰
지금까지 八不의 배열 순서와 번역의 문제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우리는 이상의 논의를 통해 {중론}에 대한 제 주석서와 그에 대한 번역본에서 八不의 배열과 번역에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사상적인 데 있지 않고 언어적인 데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먼저 배열의 문제를 보자. 八不의 원형은 {정명구론} 등에서와 같이 '不滅不生 不斷不常 不一不異 不來不去'이었다. 그러나 {청목소}의 漢譯者 구마라집의 경우는 이미 유포되어 있던 불전의 배열 순서를 따르기 위해, '不生不滅 不常不斷 …'으로 前 四不의 배열을 바꾸었으며, 티베트역자들의 경우는 티베트 詩頌의 韻律에 맞추기 위해 '不來不去 不異不一'로 後 四不의 배열을 바꾸었던 것이다.
번역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종합된다. 印歐語族인 산스끄리뜨어의 'a'나 'an'이란 접두사에는 존재부정과 인식부정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게다가 작용을 부정할 경우도 'a'나 'an'이 사용된다. 그러나 한문에서는 일반적으로 존재를 부정할 경우는 '無', 인식을 부정할 경우는 '非', 작용을 부정할 경우는 '不'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티베트어에서는 존재의 부정과 인식의 부정을, 각각 'ma yod pa(= med pa)'와 'ma yin pa(= min pa)'로 구분한다. 우리말도 이는 마찬가지다. '無'와 '非'와 '不'은 각각 '없다', '아니다', '∼지 않다(∼지 않는다)'로 표현된다. 따라서 산스끄리뜨문의 a나 an을 한문이나 티베트어 또 우리말로 번역할 경우 위의 모든 번역이 허용될 수 있다.
또 산스끄리뜨문 귀경게의 'anek rtham an n rtham'(不一不異)에 쓰인 'artha'나 'anirgamam'(不去)에 쓰인 'nir'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loka의 음절 수를 맞추기 위해 삽입된 조음사이기에 번역문에서 굳이 이 단어를 살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논의에 입각해 八不을 우리말로 번역할 경우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모두 가능하게 된다.
소멸하는 것도 없고 발생하는 것도 없으며(無滅無生)
단멸하는 것도 없고 상주하는 것도 없으며(無斷無常)
같은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없으며(無一無異)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無來無去)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非滅非生)
단멸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며(非斷非常)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非一非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非來非去)
소멸하지도 않고 발생하지도 않으며(不滅不生)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으며(不斷不常)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不一不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不來不去)
그리고 이러한 존재부정(無), 인식부정(非), 작용부정(不)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는 문장의 맥락에 의거해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Ⅶ. 中觀的 緣起論과 그 應用
김성철(동국대 불교문화대 불교학과)
Ⅰ. 中觀이란?
Ⅱ. 中觀的 緣起論에 대한 재해석
1. 中觀的 緣起論과 四聖諦
2. 分別의 발생과 소멸
3. 순환구조
Ⅲ. 中觀的 緣起論의 應用
1. 환경문제의 원인과 해결
2. 사회적 처벌과 규범의 역할
3. 相談에 대한 緣起論的 조망
Ⅰ. 中觀이란?
中觀學이란 대승불교의 아버지, 또는 제2의 부처라고 칭송되는 龍樹(N g rjuna: 150∼250C.E.)의 思想에 淵源을 두는 불교학의 한 분야를 가리킨다. 中觀이란 술어는 중국적 중관학인 三論宗의 대성자 吉藏(549∼624C.E.)이 고안해 낸 용어로 용수의 대표적 저술인 {中論}의 '中'자와 {중론} 내 각 장의 명칭 중에 사용되는 '觀'자를 조합함으로써 만들어졌다. 그래서 吉藏은 {중론}에 대한 자신의 주석서를 {中論疏}가 아니라 {中觀論疏}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중론}은 총 27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에서는 독특한 反論理的 논법에 의해 갖가지 '개념(法)'들의 실체성을 비판하고 그런 개념들의 조합에 의해 작성되는 다양한 '판단'의 사실성을 비판하며, 그런 판단의 나열을 통해 도출되는 '추론'의 타당성을 비판한다.
전통적으로 印度의 論書는 列擧(udde a)와 定義(lak a a)와 檢討(par k )라는 세 단계에 의해 작성되었다. 인도의 논서에서는 먼저 자기 학파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들의 명칭을 '열거'하고 그런 갖가지 개념들의 의미에 대해 '정의' 내린 후 마지막으로 그런 정의의 타당성을 논쟁형식에 의해 '검토'한다. {니야야수뜨라(Ny yas tra)}의 16句義, {와이셰시까수뜨라(Vai e ikas tra)}의 6範疇, {상캬까리까(S khyak rika)}의 25諦 모두 '열거'와 '정의'와 '검토'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각 학파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근본 개념으로 정립되는 것이다. 불교의 경우에도, 俱舍學에서 말하는 5位 75法, 唯識學에서 말하는 5位 100法 모두 각 교학의 세계관을 구성하기 위해 열거된 근본 개념들이다.
그런데 {중론}을 위시한 중관논서들은 불교 내외의 제 논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기술 방식을 갖는다. 즉, 열거와 정의와 검토 중 검토(par k )만으로 이루어진 논서인 것이다. 물론 {중론} 내 각 품에서는 열거와 정의의 문형을 취하고 있는 게송도 다수 발견된다. 그러나 그런 게송들은 중관학적 세계관을 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판의 대상으로 도입된 것들이다. {중론}은 다만 검토만을 목적으로 삼는 논서이다. 그리고 {중론}의 漢譯者 鳩摩羅什(344∼413C.E.)은 이런 검토(par k )를 觀이라고 번역했던 것이다.
{중론}에서 말하는 觀(par k )이란 止觀(samatha-vipa yana)수행에서 말하는 觀(vipa yana)과 그 원어도 다르고 의미도 다르다. {중론}에서 말하는 '관'이란, {중론}은 물론 인도 내 제 학파의 논서가 공유하는 기술방식으로 단순한 '논리적 검토'를 의미할 뿐이다. 결코 신비한 용어가 아니다. '곰곰이 논리적으로 따져 보는 것'이 바로 {중론}의 '觀'인 것이다. 즉, 비판의 대상에 대해 논리적으로 면밀히 검토해 보는 것이 '觀'이다. 예를 들어 {중론} 제1장인 觀因緣品(pratyaya-par k )에서는 연기적 발생에 대한 갖가지 이론들을 검토함으로써 그런 이론들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고, 제2장인 觀去來品(gat gata-par k )에서는 '감(去: gamana)'과 결부된 갖가지 개념들을 검토함으로써 그런 개념들의 실체성을 비판하고 있다. 十二緣起說을 그대로 소개하는 제26장을 제외한 {중론} 전체는 모두 아비달마 교학에서 말하는 갖가지 개념들의 실체성과 그런 개념들이 조합됨으로써 작성된 판단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할애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검토할 때 비판의 잣대가 되는 것이 바로 연기사상이다. {중론}에서 용수는 연기의 진정한 의미에 토대를 두고 다양한 개념들의 실체성과 갖가지 판단들의 사실성을 논파한다.
불교의 핵심을 中道라고 말한다. 수행의 영역에서는 극도의 고행이나 극도의 쾌락을 止揚하라는 의미에서 實踐的 중도인 苦樂中道를 말하고 사고의 영역에서는 斷滅論이나 常住論과 같은 극단적 사고방식(二邊)을 제거하라는 의미에서 思想的 중도인 斷常中道, 또는 有無中道를 말한다. 그리고 '緣起'란 이 두 가지 中道說 중 사상적 중도의 구체적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吉藏이 '中觀論'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을 때 이는 '사상적 중도인 연기에 입각하여 검토하는 논서'라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중론}에서는 말하는 사상적 중도로서의 연기란 무엇일까? 앞에서 얘기했듯이 {중론}에서는 적대자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개념과 그에 대한 정의의 타당성을 비판할 뿐 自派의 세계관을 표명하지 않는다. 연기의 경우에도 적극적인 방식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연기를 긍정적으로 정의하기 위해서는 정의에 동원된 개념들의 실재성을 상정해야 하며, 그럴 경우 결국은 중관적 방식에 의해 비판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론}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분별해 낼 때, 다시 말해 우리의 사고가 이 세계의 實相인 緣起性을 위배하고 사물이나 사태를 분할하여 개념을 창출해 낼 때 발생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소극적 방식에 의해 연기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친다.
{중론}에서 緣起의 진정한 의의를 드러내기 위해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불교 내의 邪見, 즉 阿毘達磨(Abhidharma) 교학의 실재론적 세계관이었던 반면, 용수의 직제자 阿利耶提婆( ryadeva: 170∼270C.E.頃)는 시선을 불교 밖으로 돌려 상캬(S khya), 와이셰시까(Vai e ika) 등 外道의 세계관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용수와 제바가 연기에 입각해 비판한 것은 당시의 특정한 敎派에서 구축한 세계관이었지만, 연기가 이 세계의 실상이라면 현대 사회의 제 문제에 대해서도 연기사상에 의거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해결점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本稿에서는 중관논서를 통해 추출된 연기사상, 즉 중관적 연기론에 의거하여 현대 사회의 제 문제를 조망해 보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환경문제(제Ⅲ장 제1절), 사회제도와 규범(제Ⅲ장 제2절), 상담심리(제Ⅲ장 제3절)라는 지극히 이질적인 세 가지 분야에 대해 중관적 연기론을 적용하여 조망해 보았다. 이 세 가지 분야는 서로 무관한 듯이 보이지만 그 모두가 우리 인간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인간에 의해 지어진 모든 문제의 근저에는, 그것을 야기한 특정한 세계관(邪見)이 잠재되어 있는 법이기에, 갖가지 세계관(d i: 見)에 대해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중관학이 그런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유용한 知的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를 위해서 먼저 중관학에서 말하는 緣起의 의미를 현대 사회의 제 문제에 적용 가능한 모습으로 재해석해 보기로 하자(제Ⅱ장).
Ⅱ. 中觀的 緣起論에 대한 재해석
1. 中觀的 緣起論과 四聖諦
{중론}에서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는 緣起公式 중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는 還滅門만을 논리적 오류가 배제된 명제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 명제에 갖가지 개념 쌍들이 대입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화 한다.
만일 '가는 놈'을 떠난다면 '가는 작용'은 성립되지 않는다. '가는 작용'이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가는 놈'이 성립하겠는가?
'色의 因'이 없으면 '色'은 포착되지 않는다. '色'이 없어도 '色의 因'은 보이지 않는다.
'허공의 相'이 있기 이전에는 그 어떤 '허공'도 존재하지 못한다. 만일 相이 있기 이전에 [허공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相이 없이 존재한다는 오류에 떨어진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중론}에 표현된 연기설의 환멸문이 십이연기설의 환멸문과 그 형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가는 놈'과 '가는 작용'과 같이 연기관계에 있는 두 개념 쌍을 A와 B라고 할 때 위에서 보듯이 {중론}에서는 'A가 없으면 B가 없고 B가 없으면 A가 없다'는 식으로 A와 B를 상호의존 관계로 표현하는 반면, 초기불전의 십이연기설에서는 식과 명색 간의 관계를 제외한 십이지 각각의 전후 관계가 'A가 있으면 B가 있고, A가 없으면 B가 없다'는 일방적 의존관계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를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중론}의 연기설: A ↔ B
초기불전의 십이연기설: A → B → …
安井廣濟는 전자를 相依相待(parsapar pek a)的 연기관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彼緣生果(idampratyayat )的 연기관이라고 부르며 용수는 연기의 의미를 재해석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중론}에 와서 연기의 의미가 달라진 것일까? {중론} 靑目疏에서 말하듯이 용수가 佛說의 眞意를 부흥하기 위해 {중론}을 작성한 것이 진실이라면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십이연기설의 彼緣生果의 연기설이 {중론}에서 相依相待的 연기설로 바뀐 것일까? 論者의 拙見으로는, {중론}에 와서 緣起觀을 적용하는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즉, 십이연기설에서는 자아의 실체성을 비판하기 위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不可逆的으로 살아가는 有情類의 삶에 연기관을 적용하였기에 12支 각 支分의 관계에 대해 불가역적인 피연생과의 형태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반면 {중론}은 '가는 자'와 '가는 작용', '色'과 '色因' 또는 '눈(能見)'과 '시각대상(所見)', '불'과 '연료' 등 동시 공존적인 法의 실체성을 비판하는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기에 각 法들의 관계를 可逆的인 相依相待의 형태로 표현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 교학에서 말하듯이 십이연기설은 주로 我空을 가르치기 위해 說示되었고 {중론}은 法空을 가르치기 위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론}에 이르러 연기의 의미가 변한 것이 아니라 연기를 적용하는 대상이 '自我'에서 '法'으로 바뀐 것일 뿐이다. 중관학과 십이연기설에서 말하는 연기의 본질적 의미는 결코 다르지 않다.
이는 四聖諦의 교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성제의 교설을 연기공식에 대입하면 '집이 있기에 고가 있고 집이 없으면 고가 없다. 집이 생하기에 고가 생하고 집이 멸하면 고가 멸한다'는 형식의 문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초기불전의 경우 도처에서 집이란 渴愛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갈애가 있기에 우리가 체험하는 오음이 熾盛한 고통(五陰盛苦)이 발생했으며 갈애를 멸하면 오음성고 역시 사라진다는 말이다. 즉, 주로 我空을 설하기 위해 교시된 것이 초기불전의 사제설이었다. 그런데 {중론}에서는 사성제의 논리구조 역시 法空을 설하기 위해 응용되고 있다.
앞에서 인용했던 {중론}의 게송에서 '가는 놈'이 집이라면 '가는 작용'은 고에 해당된다. 따라서 '가는 놈'이 존재한다면 '가는 작용'이 있겠지만 '가는 놈'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에(집의 소멸) '가는 작용'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이다(고의 소멸). 즉, 이 게송은 '가는 놈'과 '가는 작용'이라는 법에 대해 사성제의 논리구조를 적용하여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緣起的이다. 예를 들어, 긴 것은 본래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짧은 것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더러운 것도 마찬가지이다. 깨끗한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다른 무엇을 더럽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를 四聖諦의 교리에 대입하면 더러운 것이 있다는 분별은 苦(du kha)에 해당되고 깨끗한 것이 있다는 분별은 集(samudaya)에 해당된다. 集이 있기에 苦가 발생하고 集을 제거하면 苦가 消滅한다. 즉, 인연이 있기에 문제가 발생하고 인연이 멸하면 그 문제 역시 소멸한다. 또, 긴 것과 짧은 것의 관계를 예로 들면, 긴 것은 苦에 해당되고 짧은 것은 集에 해당된다. 짧은 것에 대비하기에(集) 그 어떤 것에 대해 긴 것이라는 판단이 발생하게 되며(苦), 대비시켰던 짧은 것이 없어지면 긴 것이라는 판단 역시 무의미해진다(滅). 따라서, '더러운 것'도 본래 그 실체가 없어 空하고 '긴 것' 역시 그 실체가 없어 空하다. 이것이 중관학에서 말하는 緣起와 四諦 그리고 空의 의미이다.
2. 分別의 발생과 소멸
모든 法은 空하다. 즉, 모든 존재는 그 自性이 없다. 그 어떤 사태든 그 어떤 개념이든 독립적 실체가 없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 '불'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료가 필요하다. 연료가 개재되지 않은 불은 결코 없다. 이를 {중론} 제10장 觀燃可燃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만일 불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다른 것[= 연료]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타오름은 원인 없는 것이 된다. 게다가 항상 탄다면 [점화의] 시작이 헛수고가 되는 과실에 빠진다.
불뿐만 아니라 연료 역시 마찬가지이다. 헛간에 쌓여 있는 장작도 불이 붙어야 비로소 '장작'이라는 이름이 붙을 수 있는 것이다. 장작으로 쓰기 위해 헛간에 쌓아 놓은 나무토막들을 집을 수리하는 데 쓴다면 그것은 '집 짓는 재료'라는 이름이 붙었어야 하며, 방망이를 만드는 데 쓴다면 그것은 '방망이의 재료'라는 이름이 붙었어야 한다. 따라서 결과가 발생하기 이전의 상태에서는 그 나무토막들을 '장작'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비단 장작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물이건 그에 대해 고유한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조건과 결과의 관계에서도 결과가 존재하기에 그에 대한 조건이 규정되는 것이다. 아직 결과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결과에 대한 조건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다. {중론} 제2장 觀因緣品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들을 緣하여 발생하기에 실로 이것들을 緣들이라고 한다. 이것들이 발생하지 않는 그런 경우에 어떻게 非緣이 아니겠느냐?
예를 들어 항아리 공장에 점토가 쌓여 있을 때 우리는 그 점토를 '항아리의 원료'라고 부른다. 여기서 점토는 항아리를 만드는 조건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항아리가 만들어 진 다음에야 우리는 그 점토가 항아리의 원료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 항아리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항아리 공장에 쌓여 있는 점토라고 하더라도 그에 대해 '항아리의 원료'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그 점토로 만일 기왓장을 만들었다면 이는 '기왓장의 재료'가 되었어야 하고, 벽돌을 만들었다면 이는 '벽돌의 재료'가 되었어야 한다. 아직 결과가 발생하기 전에는 '무엇에 대한 원료나 재료(= 緣, 조건)'라고 이름 붙일 수가 없다. 즉, 無名이다.
모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어떤 길이의 막대가 있을 때 우리는 그 막대의 길이에 대해 '길다'거나 '짧다'는 말을 붙이지 못한다. 더 긴 막대에 대비시키는 경우에 그 막대는 '짧은' 막대가 되고, 더 짧은 막대에 대비시키는 경우에 그 막대는 반대로 '긴' 막대가 되고 만다. 동일한 하나의 막대의 길이가 그것에 대비시킨 막대의 길이에 따라 길어지기고 하고 짧아지기고 한다. 길다거나 짧다는 판단은 그와 대비되는 것에 견주어진 후 緣起的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그 막대는 본래적인 길이가 없다. 즉, 길이의 차원에서 無相이다.
항아리 공장에 쌓여진 '점토'의 경우 결과로서의 항아리에 대비시키면 '항아리의 원료'라는 이름이 붙게 되고 기왓장에 대비시키면 '기왓장의 재료'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의 시각작용에 대비시키면 '시각대상'으로서의 점토의 모습이 되며, 地·水·火·風 四大와 대비시키면 四大가 화합한 '물질'로서의 점토가 된다. 동일한 점토이지만 상황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하나의 막대의 길이는 상황에 따라 '긴 것(A)'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짧은 것(=길지 않은 것: ∼A)'이라고 불릴 수도 있으며,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A∩∼A)'거나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다(∼A∩∼∼A)'라고 표현될 수도 있다. 중관학에서는 이런 식으로 정리된 네 가지 판단을 四句라고 부른다. 이 네 가지 중 어떤 것도 그 막대의 길이에 대한 진정한 묘사가 아니다.
지금까지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중론}에서는 모든 사물의 독립적 실재성을 부정하기에 그 어떤 사물이든 그 어떤 사태든 본래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서 그 어떤 규정도 불허한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내 눈앞에 보이는 하나의 컵은 보는 시점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진다. 위에서 보면 동그랗고 옆에서 보면 네모지며 눈앞으로 가져오면 컴컴한 벽이 되고 멀리 떨어지면 하나의 점이 되며 더 멀리 떨어지면 텅 빈 허공이 된다. 컵의 모습은 그것을 보는 시점에 따라 무수하게 많아진다. 그 모든 모습 중 그 어떤 것도 컵의 본래적인 모습은 아니다. 즉, 컵의 본래적인 모습은 없다. 본래는 아무 이름이 없는 나에게 어떤 하나의 호칭이 부여되는 것은 나와 특정한 관계에 있는 상대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학생에 대해 나는 선생이 되며, 자식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되고 아내에 대해서는 남편이 되는 것이다. 본래는 아무 모양이 없던 하나의 컵, 뒤집어 말하면 상황에 따라 모든 모양이 가능한 하나의 컵에서 어떤 하나의 모양을 파악하는 것은 그 모양을 파악하게 만든 특정한 관점을 취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 부여되는 호칭이나 모양은 본래 그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조건에 의해 연기적으로 발생한 것들이다. 끝없이 변화하는 잡다한 세상만사는 절대부정과 절대긍정의 심연에서 연기적으로 명멸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얽혀 있다. 즉,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항상 그와 대응되는 것을 수반하며 함께 발생한다. 긴 것은 짧은 것과 얽혀 있고 더러운 것은 깨끗한 것과 얽혀 있으며, 눈은 시각대상과 얽혀 있고 불은 연료와 얽혀 있으며, 원인은 결과와 얽혀 있고 주체는 작용과 얽혀 있으며, 나는 남과 얽혀 있고 삶은 죽음과 얽혀 있다.
원래는 긴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으며, 눈도 없고 불도 없다. 원인도 없고 주체도 없고 나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다. 긴 것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기에 그에 대응한 짧은 것이라는 개념이 발생하고, … 삶이란 개념을 만들어 내기에 그에 대응한 죽음이란 개념이 발생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지금의 나는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죽음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연기에는 이렇게 분별을 타파하는 측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연기적이기에 분별이 타파되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연기적이기에 분별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緣起는 緣滅과 緣生의 양 측면을 갖는다. 연멸은 眞諦를 체득하기 위한 과정에서 소용되는 조망이며 연생은 世俗의 발생 원리이다.
3. 순환구조
모든 것은 緣起的이다. 즉, 얽혀 있다. 그 어떤 개념이나 사태라고 하더라도 연기의 고리를 절단하는 분별에 의해 발생한 것들이기에 원래 독립된 실체가 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는 그런 개념과 사태의 발생 기원을 망각하고 실체시한 후 개념과 사태간에 갖가지 관계를 설정하거나 그를 소재로 다양한 체계를 구성한다.
여기서 악순환이 발생한다. 認知的인 차원에서 연기의 고리를 절단하여 한 쌍의 개념을 만들어 낸 후 양자를 관계시킬 경우 자가당착이라는 논리적 오류에 빠지고 情緖的인 차원에서 연기의 고리를 절단하여 나와 남을 구분한 후 남에 대해 어떤 행위를 할 경우 自業自得이라는 인과응보가 발생한다. 자가당착이나 자업자득은 모두 그 구조가 순환적이다.
먼저 자가당착적 순환의 예를 들어 보자. 불과 연료는 연기적으로 발생한 사태들이다. 연료가 없으면 불이 있을 수 없고 불이 없으면 연료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불이나 연료의 연기적 발생을 망각하고 각각을 실체시한 후 다시 관계시킬 경우 악순환이 발생한다. {중론}에서는 불과 연료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악순환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만일 불이 연료에 의존해 있고 연료가 불에 의존해 있다면 그 둘 중의 어느 쪽이 미리 성취되어 있어서 불이나 연료가 의존하는 것이겠느냐?
만일 불이 연료에 의존한다면 성립된 불이 [또다시] 성립된다. 이와 같은 경우 불 없는 연료 역시 존재하리라.
불과 연료는 서로를 內含하고 있다. 불에서 연료를 제거하면 불이 있을 수 없고, 연료에서 불을 제거하여도 연료는 연료라는 규정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불과 연료의 이러한 연기관계를 '불은 연료에 의존한다'고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경우 위와 같은 논리적 오류가 발생한다. 지금 어떤 연료가 불타고 있을 때 연료와 불 각각을 따로 떼어 낼 수가 없다. 마치 닭과 달걀의 관계와 같다. 닭의 근거로서 달걀을 말하지만 달걀 역시 그 근거를 닭에 두고 있다. 양자 모두 본래적 존재가 아니다. 긴 것과 짧은 것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긴 것과 짧은 것의 연기관계를 '긴 것은 짧은 것에 의존하여 존재한다'고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경우 악순환이 발생한다. 어떤 막대가 '긴 것'이라고 규정되기 위해서는 그 보다 '짧은 것'과의 대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대조하기 위해 동원되는 '짧은 것'은 본래 짧은 것이 아니라 다시 '긴 것'에 대조됨으로써 '짧다'는 규정을 받은 것이다. 즉, 긴 것이라는 판단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표명하기 위해 '긴 것은 짧은 것에 의존한다'는 말을 하지만 이 말에 사용된 그 어떤 개념도 확고한 것들이 아니다. '긴 것'이나 '짧은 것'은 물론이고 '의존' 역시 확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에] 의존하여 성립되는 그런 존재 그것이 아직 성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이미 성립된 것이 [다시] 의존한다는 것도 의존에 있어서는 타당하지 않다.
불을 규정하기 위해 연료의 존재를 동원하지만 그렇게 동원된 연료는 다시 불을 內含해야 한다. 불을 규정하기 위해 다시 불의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된다. 惡循環이다. 긴 것을 규정하기 위해 짧은 것에 대한 의존을 말하지만 긴 것이 의존해야 하는 짧은 것은 다시 긴 것을 내함해야 한다. 긴 것을 규정하기 위해 다시 긴 것의 존재가 요구되는 것이다. 악순환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대표적인 예가 역설(paradox)이며 역설은 중관학에서 사고의 한계를 지적할 때 애용하는 논법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문자를 세우지 말라(不立文字)'라는 말을 할 경우 '不立文字'라는 말 역시 문자에 속하기에 自家撞着에 빠지고 만다. '문자를 세우지 말라'라는 말을 하는 당사자는 '세간에서 세워지는 일반적인 문자'와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문자'는 다른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문자 전체의 세계에서 '일반적인 문자'와 '불립문자라는 문자'를 구분하여 서로 다른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불립문자' 역시 엄연한 문자이다. '불립문자'라는 말을 한 당사자는 분할할 수 없는 문자의 세계를 분할해 내어 '일반적인 문자'를 배척한 것이다. 그래서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認知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分割을 불교용어로 分別(vik lpa)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緣起的이다. 언어와 의미의 세계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불과 연료, 긴 것과 짧은 것을 분할하여 각각을 독립적 실재로 간주할 경우 악순환에 빠지듯이 '不立文字'라는 말을 하여 '일반적 문자'를 배척할 경우 자가당착이라는 논리적인 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은 우리의 情緖의 차원에서도 발생한다. 그러나 쉽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요, 남을 도와주는 것이 나를 돕는 일이라는 因果應報의 법칙은 우리의 정서의 차원에서 발행하는 순환이다. 나와 남을 분할하여 실체시한 후 남에게 대해 행하는 행위는 모두 나에게 되돌아오는 것이 因果應報, 自業自得의 순환이다. 원래 나와 남은 분할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그 어떤 것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육체(色)나, 느낌(受), 사고(想)나 의지(行), 마음(識)의 다섯 가지 중 그 어떤 것도 항구불변한 것은 아니다. 즉, 흔히 자아라고 생각되던 色, 受, 想, 行, 識의 五蘊 중 그 어떤 것도 自我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런 五蘊 이외에 자아가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나'이기 위해서는 불변의 自己同一性(self-identity)을 가져야 한다. 십 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와 동일해야 한다. 그러나 십 년 전은 고사하고 어제의 오온 중에도 오늘 변하지 않은 것은 전혀 없다. 오온은 모두 찰나 생멸한다. 그래서 나는 없다. 내가 없기에 남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 비단 타인뿐만 아니라 이 세상 만물 중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業에 의해 顯現된 갖가지 요소(法)들이 瀑流처럼 흘러갈 뿐이다. 나의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닌 要所的인 法들이 부단히 흘러가는 것이 이 세상의 모습인데 이에 대해 無知하여 나와 남을 분할한 후 남에 대해 惡業을 짓는 것은 사실은 자신의 마음 밭에 惡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그 씨앗의 결실인 苦果는 결국 내가 거두게 된다. 善業으로 인한 樂果의 획득 역시 그 과정은 마찬가지다. 이는 情緖的 차원에서 발생하는 순환이다. 마치 부메랑을 던지듯이 타인을 향해 행한 업은 나를 향해 되돌아온다.
지금까지 고찰해 보았듯이 모든 것이 얽혀 있다는 연기의 실상을 위배할 경우 認知의 차원에서는 자가당착의 순환이 발생하고 情緖의 차원에서는 자업자득의 순환이 발생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의 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연기론적으로 접근하는 경우, 이와 같은 緣起의 순환적 성격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볼 수 있다.
Ⅲ. 中觀的 緣起論의 應用
제Ⅱ장에서 중관학적 조망을 통해 추출된 연기론의 패러다임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모든 개념(法)은 知的인 분할을 통해 발생한 것으로 실체가 없다. 둘째, 연기는 緣生과 緣滅의 두 측면을 갖는데 연멸을 통해 분별이 타파되고 연생을 통해 분별이 발생된다. 셋째, 모든 것은 연기적이기에 그 고리를 끊어 버리는 경우 自家撞着이나 自業自得의 순환이 발생한다. 그러면 연기론에서 추출된 이와 같은 세 가지 패러다임을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適用해 보자.
Ⅶ. 중론(中論)
중론은 모두 27장 448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관인연품 : 연의 고찰(16게)
2. 관거래품 : 가는 것과 오는 것의 고찰(25게)
3. 관육정품 : 눈등의 지각 기관의 고찰(8게)
4. 관오음품 : 집합체의 고찰(9게)
5. 관육종품 : 과의 고찰(8게)
6. 관염염자품 : 탐욕과 탐내는 자의 고찰(10게)
7. 관삼상품 : 지어진 것의 고찰(34게)
8. 관작작자품 : 행위와 행위자의 고찰(13게)
9. 관본주품 : 선행자의 고찰(12게)
10. 관연가연품 : 불과 연료의 고찰(16게)
11. 관본제품 : 전후의 궁극의 고찰(8게)
12. 관고품 : 고의 고찰(10게)
13. 관행품 : 형성작용의 고찰(8게)
14. 관합품 : 연합의 고찰(8게)
15. 관유무품 : 자성의 고찰(11게)
16. 관박해품 : 속박과 해탈의 고찰(10게)
17. 관업품 : 업과 과보의 고찰(33게)
18. 관법품 : 아뜨만의 고찰(12게)
19. 관시품 : 시간의 고찰(6게)
20. 관인과품 : 집합의 고찰(24게)
21. 관성괴품 : 생성과 괴멸의 고찰(21게)
22. 관여래품 : 여래의 고찰(16게)
23. 관전도품 : 뒤바뀜에 대한 고찰(25게)
24. 관사제품 : 성스러운 진리의 고찰(40게)
25. 관열반품 : 열반에 대한 고찰(24게)
26. 관십이인연품 : 십이지의 고찰(12게)
27. 관사견품 : (잘못된)견해의 고찰(30게)
4권. K-577(16-350). T-1564(30-1). 요진(姚秦) 시대(A.D. 409) 번역. [역] 구마라집(鳩摩羅什). [저] 용수(龍樹). [범] Praj n mam ladhyamakak rik . [장] Dbu-ma rtsa-ba i tshig-le ur-byas-pa es-rab ces-bya-ba. [별] 정관론(正觀論), 중관론(中觀論).
부처의 근본 교설인 연기설을 반야경의 사상에 입각해서 무자성 공 등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귀류법(歸謬法) 등의 논법을 예리하게 구사하여 외도와 소승의 사견과 편견을 논파하는 용수(龍樹)의 중송(中頌)에 대한 주석서이다.
청목(靑目)이 본 불전의 제1품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처는 각종 사견(邪見)을 끊고 불법(佛法)을 널리 알리고자 먼저 성문(聲聞)을 위한 가르침으로 12인연을 설하고, 나중에 대승을 위한 가르침으로 다시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일(不一), 불이(不異) 등의 인연상(因緣相)을 설했는데, 불멸(佛滅) 후 500년이 되자 사람들이 대승에서 말하는 필경공(畢竟空)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과오를 일으키게 되었으므로, 용수가 그 과오를 바로 잡기 위해서 때문에 중송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본 불전은 27품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는 모두 445개의 게송과 장행이 들어 있다. 이 가운데 게송은 용수의 저술이고 장행은 청목의 저술이다. 청목은 중송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반론자와의 문답 형식으로 중송에 주석을 가하고 있다. 편의를 위해 품명 뒤에 각 품에 들어 있는 게송의 수를 적었다.
제1 관인연품(觀因緣品) : 16송. 인연을 논파하여 법의 생성에 대한 여러 희론을 제거한다. 첫머리에 다음의 귀경게, 즉 8불(不) 게(偈)가 있는데 이는 중송(中頌)의 핵심 사상을 드러낸다.
"불생(不生)과 불멸(不滅), 불상(不常)과 부단(不斷), 불일(不一)과 불이(不異), 불래(不來)와 불출(不出)의 인연을 능히 설하여 여러 희론(戱論)을 제거했으니, 여러 가르침 가운데 가장 뛰어난 가르침을 설하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이어서 여러 게송을 주석하면서, 결국 여러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비연(非緣)으로부터 생하는 것도 아니라고 설하고, 공(空), 즉 8불(不)의 새로운 인연설을 주장한다.
제2 관거래품(觀去來品) : 25송. 운동과 운동의 주체가 무자성(無自性) 공(空)임을 논한다. 여기서 '간다'는 말은 '없어진다'는 말과 통하는 것이므로, 가는 것을 부정함은 결국 8불(不) 중에서 불멸에 대해서 논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거자(去者) 거법(去法) 소거처(所去處)의 3법은 유(有)와 무(無) 가운데 어느 하나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허망(虛妄) 공 무소유(無所有)로서 다만 가명(假名)일 뿐이라고 설한다.
제3 관육정품(觀六情品) : 8송.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6정(情) 즉 근(根)이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여러 게송을 주석하면서, 견(見) 즉 보는 작용과 견자(見者) 즉 보는 주체와 가견(可見) 즉 보여지는 대상이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는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하고, 이어서 견과 가견이 없기 때문에 식(識) 촉(觸) 수(受) 애(愛) 등의 4법(法)이 없고, 애(愛)가 없기 때문에 4취(取) 등의 12인연분(因緣分)도 없다고 설한다. 이어서 이(耳) 등의 5정(情) 즉 근(根)과 성(聲) 등의 5진(塵) 즉 경(境)도 역시 이와 같다고 논한다.
제4 관오음품(觀五陰品) : 9송. 색, 수, 상, 행, 식의 5음(陰)이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예를 들어 색(色)은 지 수 화 풍 등의 색인(色因)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색인을 떠나서 있을 수 없으며, 색인도 색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색과 색인의 관계는 옷감과 실의 관계처럼 독자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자성을 가지고 있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서 수 상 행 식의 4음과 그 밖의 모든 법도 색과 동일하다고 설하여 5음이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제5 관육종품(觀六種品) : 8송. 6종(種)은 각기 특정한 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여기서 6종이란 지 수 화 풍 공(空) 식(識)이라는 여섯 가지의 근본 요소를 말한다. 먼저 허공을 예로 들어 논한다. 색(色)이 없는 것을 허공상(虛空相)이라고 하는데, 색은 만들어진 법으로서 무상(無常)하다. 따라서 색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는 색의 소멸도 없을 것이고, 그때는 허공상도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허공에 특정한 상이 있다고 하는 주장은 논파된다. 이어서 나머지의 다섯도 허공과 같다고 설하여 6종이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제6 관염염자품(觀染染者品) : 10송. 탐욕 진에(瞋喪) 우치(愚痴) 등의 염법(染法), 즉 번뇌와 그 번뇌에 물드는 중생인 염자(染者)가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즉 염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염과 염자의 결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염과 염자가 자성적 실재라면 합(合)도 불합(不合)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에(喪) 치(痴)도 또한 그와 같고, 일체의 번뇌도 역시 그와 같다고 논하고 있다.
제7 관삼상품(觀三相品) : 35송. 유위법의 3상(相)인 생(生) 주(住) 멸(滅)이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생(生)이 유위라면 3상(相)을 가질 것이며, 생이 무위라면 유위의 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3상은 한 곳에서 동시에 있을 수 없다. 또 만약 생 주 멸에 다시 유위의 상이 있다면 그것은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따라서 3상은 자성적 실재라고 할 수 없으며, 환영이나 꿈과 같이 불가득(不可得)이라고 설한다.
제8 관작작자품(觀作作者品) : 12송. 작업(作業)과 작자(作者)가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즉 작자는 작업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고 작업은 작자로 말미암아 있게 되는 것이므로, 만약 자성적인 작자와 작업이 있다면, 그 작자와 작업은 곧 무인(無因)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수(受)와 수자(受者)도 그와 같다고 설한다.
제9 관본주품(觀本住品) : 12송. 본주(本住), 즉 자아가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자아는 모든 감각 기관과 정신 작용의 소유자 통일자 유지자가 되므로 감각 기관 등에 우선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주장에 따르면 본주뿐 아니라 안(眼) 등도 모두 자성적 실재가 된다. 그것들이 모두 자성적 실재라면 그들 사이에는 인과가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자성적 실재로서의 본주는 성립할 수 없다고 설한다.
제10 관연가연품(觀燃可燃品) : 16송. 불과 땔감의 공 무자성을 논하고 있는데, 이는 불과 땔감의 비유를 통해 앞에서 논의한 작업(作業)과 작자(作者), 근(根)과 본주(本住) 등의 공 무자성을 재차 설하는 것이다.
제11 관본제품(觀本際品) : 8송. 흔히 모든 사물이나 현상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중에서 최초의 시작이 되는 시점을 전제(前際)라 하고, 최후의 끝이 되는 시점을 후제(後際)라 한다. 본 품에서 설하는 본제란 곧 전제의 다른 말이다. 여기서는 생(生) 사(死), 즉 윤회에는 시작과 끝이 있을 수 없음을 논하고 있다. 즉 생이 먼저 있고 노(老) 사(死)가 뒤에 있다면, 노 사 없이도 생이 있고, 생 없이도 노 사가 있게 될 것이다. 또 노 사가 먼저 있고 생이 뒤에 있다면, 그 노 사는 원인이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또 생과 노 사는 동시에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생 사에는 전(前) 후(後) 동시(同時)가 모두 성립하지 않으므로 생 사에는 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법에는 본제가 없다고 설한다.
제12 관고품(觀苦品) : 10송. 고(苦)가 불가득임을 밝힌다. 일반적으로 고를 짓는 자와 고를 받는 자는 5음(陰)이라고 생각되는데, 만약 고나 5음이 모두 자성적 실재라면 본래 고를 가지고 있지 않던 5음이 고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고가 자성적 실재라면 자작(自作)과 타작(他作) 공작(共作)과 무인작(無因作)의 4구(句)가 모두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는 무자성 공이며 결국은 불가득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모든 사물이 그와 같다고 설한다.
제13 관행품(觀行品) : 9송. 행(行)이란 사물이나 현상을 작용과 변화의 측면에서 포착한 것이다. 5음(陰) 12처 18계의 모든 존재는 이 행의 힘 때문에 성립하며, 때로는 그 법들 자체를 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는 이 행이 무자성 불가득임을 설한다. 여러 행을 5음이라고 부른다. 이 5음은 모두 허망하여 정해진 상(相)이 없다. 또 여러 법은 다름이 있으므로 모두 무자성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법은 공이기 때문에, 무자성의 법 역시 없다. 세존이 공법(空法)을 설한 것은 여러 견해를 떠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공이 있다고 한다면 여러 부처도 교화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설한다.
제14 관합품(觀合品) : 8송. 일반적으로 인식은 근(根) 경(境) 식(識) 등이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3법이 자성적 존재라면 결국은 결합이 있을 수 없음을 논한다. 즉 근(根)이란 견(見)이고 경(境)이란 가견(加見)이며 식(識)이란 견자(見者)인데, 이것들은 무자성 공으로서 다른 상이 없으며, 다른 상이 없으므로 결합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염(染), 가염(可染), 염자(染者)와 그 밖의 입(入) 즉 처(處)와 그 밖의 번뇌도 역시 이와 같다고 설한다.
제15 관유무품(觀有無品) : 11송. 여러 법이 무자성이라는 주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존재에 대한 유(有) 무(無)의 2견(見)을 논파한다. 먼저 병(甁)에 병의 자성이 있고 옷감에 옷감의 자성이 있는 것처럼, 여러 법에는 각기 자성이 있고 작용이 있으므로 실재함을 알 수 있으며, 이 자성은 중연(衆緣)의 화합에서 나온다는 주장을 소개한다. 이에 대해서 중연으로부터 나온 것은 작법(作法)이고 작법에는 정성(定性)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법에 자성이 있다면 중연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고 논파한다. 이어서 여러 법에 자성이 없으므로 타성(他性) 역시 있을 수 없고,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는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으므로 존재가 성립되지 않으며, 존재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비존재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고 논한다. 또 유와 무를 보고 자성과 타성을 본다면, 이는 곧 불법(佛法)의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제16 관박해품(觀縛解品) : 10송. 계박(繫縛)과 해탈이 필경공(畢竟空)으로서 불가득임을 설한다. 계박이란 윤회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왕래(往來)라고 표현되었다. 여러 행(行)이 왕래한다고 하지만, 행이 상(常)이라면 왕래할 수 없고, 무상이라고 해도 왕래할 수 없다. 또 생멸의 상을 가지고 있는 여러 행은 계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으며, 중생도 이와 같이 계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는다고 설한다. 이어서 경전에서 열반이 곧 생사요,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설한 것과 같이, 제법(諸法) 실상(實相),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생사와 열반이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설한다.
제17 관업품(觀業品) : 33송. 업이 마침내 공임을 밝힌다. 업은 공이라고 하나 단절이 없고, 유(有)라고 하나 영원한 것이 아니다. 부처는 업과 과보의 부실(不失)을 말했다. 여러 업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본래 불생(不生)이고, 불생이기 때문에 불멸(不滅)이다. 업은 연(緣)으로부터 생하는 것도 아니고, 비연(非緣)으로부터 생하는 것도 아니니, 업을 일으키는 자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한다.
제18 관법품(觀法品) : 12송. 자아와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을 없앰으로써, 모든 법이 공이고 무아(無我)라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음을 설한다. 즉 만약 자아가 곧 5음(陰)이라면 그 자아는 곧 생멸할 것이며, 자아가 5음과 다르다면 그 자아는 5음의 상(相)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아가 없다면 아소 역시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자아와 아소에 대한 집착을 없애서 무아의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다. 또 여러 부처는 자아를 설하기도 하고 무아를 설하기도 하지만, 여러 법의 실상 속에는 자아도 없고 비아(非我)도 없으며, 법의 실상은 무생(無生) 무멸(無滅)로서 열반과 같이 적멸이라고 논한다. 이어서 여러 법의 불일(不一)과 불이(不異), 불상(不常)과 부단(不斷) 등이 여러 세존이 가르친 법의 감로미(甘露味)라고 설한다.
제19 관시품(觀時品) : 6송. 자성설은 시간이 자성을 가지는 찰나적 단위라고 생각하여 과거를 원인으로 해서 현재와 미래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시간이 자성적 실재라는 그와 같은 주장을 논파한다. 즉 만약 과거로 인해서 미래와 현재가 있다면, 미래와 현재는 마땅히 과거 속에 있어야 하지만, 자성적 실재인 과거 속에 자성적 실재인 현재와 미래가 함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 만약 사물로 인해서 시간이 있다고 한다면, 사물을 떠나서는 시간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사물은 실재하지 않으므로 시간 역시 실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20 관인과품(觀因果品) : 24송. 자성설에서는 여러 인연이 화합해서 과가 생겨난다고 하지만, 인 과가 자성적 실재라면 결국 인 과가 성립할 수 없음을 밝힌다. 즉 과에 자성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므로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또 그때 원인에는 원인으로서의 자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과(果)는 연(緣)의 합(合)이나 불합(不合)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으며, 과가 없으므로 합법(合法)도 있을 수 없다고 설한다.
제21 관성괴품(觀成壞品) : 20송. 성괴를 밝힌다. 성괴란 생겨나고 무너지는 것, 즉 형성과 파괴를 뜻한다. 또 형성은 생성을, 파괴는 소멸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형성과 파괴에 대해서 고찰함으로써 자성설에서는 인과의 상속(相續)이나 인과의 생멸이 성립할 수 없음을 논한다. 즉 자성적 실재는 형성될 수도 없고 파괴될 수도 없으며, 원인이 될 수도 없고 결과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또 자성설에 있어서는 인과의 상속이나 윤회도 인정될 수 없다고 설한다.
제22 관여래품(觀如來品) : 16송. 여래는 모든 세간 중에서 가장 존귀하므로 마땅히 실재한다고 해야 한다는 주장을 논파한다. 5음(陰)은 여래가 아니고, 5음을 떠나서 여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여래 속에 5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5음 속에 여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여래가 5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로 구해도 불가득이므로 여래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서 여래에 자성이 없는 것은 세간에 자성이 없는 것과 같다고 설한다.
제23 관전도품(觀顚倒品) : 24송. 전도(顚倒)란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모든 것이 무아 부정(不淨) 무상 고인데, 그것을 아 정 상 낙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전도 때문에 탐 진 치 등의 여러 가지 번뇌가 생긴다고 생각되었다. 여기서는 정과 부정의 전도를 예로 하여 이 전도와 번뇌 등이 모두 무자성 공이며, 따라서 생겨난 바도 없고 끊을 바도 없음을 설한다. 정(淨)과 부정(不淨)의 전도에 의해서 3독(毒)이 생긴다면 3독은 곧 무자성이며, 번뇌는 실체가 아닐 것이다. 또 정 부정의 전도에 자성이 없다면, 번뇌는 그 둘로 인해서 생길 수 없다. 만약 번뇌에 자성이 있고 누구에게 속해 있다면, 그것은 끊을 수 없을 것이며, 또 만약 번뇌가 허망하여 자성이 없고 속하는 바 없다고 해도, 그것은 능히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도와 번뇌는 무자성 공으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한다.
제24 관사제품(觀四諦品) : 40송. 4제(諦)와 관련해서 2제의 본성을 밝히고, 공에 집착함을 경계하여 이로써 법의 실상을 드러낸다. 먼저 공관(空觀)에 대한 반론을 소개한다. 즉 만약 일체가 모두 공이라면, 곧 4성제와 4도과(道果)와 불 법 승의 3보(寶)도 있을 수 없으니, 공법(空法)은 인과를 무너뜨리고 죄와 복을 무너뜨리며, 나아가 세속의 모든 법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한다. "너는 무엇이 공상(空相)이고, 어떤 인연으로 공을 설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또 공의 뜻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의혹이 생긴다. 여러 부처님은 2제(諦)를 가지고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한다. 첫째는 세속제(世俗諦)이고 둘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만약 2제를 분별해서 알지 못하면 곧 깊고 깊은 불법의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속제에 의하지 않고는 제일의를 얻지 못하며, 제일의를 얻지 못하고는 열반을 얻을 수 없다. 또 공의 뜻이 있으므로 모든 법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공의 뜻이 없다면 일체는 성립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나는 공이라고 설한다. 왜냐하면 중연(衆緣)이 화합해서 사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사물은 여러 인연에 속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다. 그러나 공도 또한 공이다. 그것은 다만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가명(假名)으로 설한 것이다. 또 그것은 유(有)와 무(無)의 2변(邊)을 떠났으므로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오히려 만약 일체가 공이 아니라면 곧 생멸이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곧 4성제의 법 등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공이 없다면 얻지 못한 것은 영원히 얻을 수 없을 것이며, 번뇌를 끊을 수 없고, 고통이 다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어서 만약 공의 뜻이 무너진다면 인연성이 무너지고, 인연성이 부서지면 3보가 무너진며, 3보가 무너지는 것은 곧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설한다.
제25 관열반품(觀涅槃品) : 24송. 해탈과 열반이 마침내 공으로서 불가득임을 설한다. 즉 "만약 여러 법이 공으로서 생도 없고 멸도 없다면, 따로 끊고 멸해서 열반이라 할 것이 없으며, 만약 여러 법이 불공(不空)이라고 해도 생이 없고 멸이 없어서 따로 끊고 멸해서 열반이라 할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유 무의 2변(邊)으로는 열반에 도달하지 못하나니, 소위 열반이란 얻을 것도 없고 도달할 것도 없으며, 단멸(斷滅)도 아니고 상주(常住)도 아니다. 불생(不生)인 동시에 불멸(不滅)이니 이를 이름하여 열반이라고 한다. 또 열반이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유와 무의 합(合)도 아니며, 비유(非有)인 동시에 비무(非無)도 아니다. 모든 시간과 모든 곳에서 열반의 상을 구하나 불가득이다."라고 논하고, 이어서 열반과 세간은 아무런 차별이 없으며, 세간과 열반 역시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설하고 있다.
제26 관십이인연품(觀十二因緣品) : 12송. 12지 인연의 발생과 소멸을 설한다. 여기서는 단지 12지를 설명하고 있을 뿐 자성설에 대한 논란이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은 본 불전이 12연기를 과제로 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설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본문을 보면 12지 인연의 발생을 순서에 따라 설하고, 이어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일은 모두 생(生)으로부터 있고, 또 이 인연으로 대고음(大苦陰)을 모은다. 이는 생사와 여러 행(行)의 근본으로서 어리석은 자가 짓는 바이며 지혜로운 자가 짓는 바가 아니다. 이를 여실하게 봄으로써 무명이 멸한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여러 행도 멸한다. 인(因)이 멸했으므로 과(果)도 역시 멸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제27 관사견품(觀邪見品) : 31송. 여러 가지 사견을 논파함으로써 정견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인다. 여기서는 주로 3세를 통하여 자아가 실재한다는 사견을 논파하고 있다. 즉 "나는 과거세(過去世)에 있었는가 없었는가, 세간은 영원한가 하는 등의 견해는 모두 과거세에 의한 것이고, 나는 미래세(未來世)에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세간은 유한한가 등의 견해는 모두 미래세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과거세에 내가 있었다고 하는 등의 일은 있을 수 없다. 과거세 중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견해들은 모두 사견이다. 또 과거세의 내가 있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과거세 중의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공이니 세간이 영원하다는 등의 견해가 어디서, 어느 때, 누구에게서 일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논하고, 다음의 게송으로 논을 끝맺는다.
"모든 견해를 끊기 위해서, 자비심을 가지고 이 법을 설하신 위대한 고타마에게, 나 지금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중송은 반야경에서 설해진 바와 같은 공관(空觀)이야말로 불법(佛法)의 진정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상사적 의의를 가진다. 또 중송은 대승 불교에 이론적 기초를 부여한 최초의 논서로서 대승 불교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중관 학파는 용수의 중송을 중심으로 하여 발생하여 유식 학파와 함께 인도 대승 불교의 양대 학파를 형성하였으며, 중국에서는 백론(百論) 십이문론(十二門論)과 함께 삼론종의 발생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중송의 주석서로 용수의 근본중론무외소(根本中論無畏疏)와 십이문론, 청목의 중론, 무착(無着)의 순중론의입대반야바라밀경초품법문(順中論義入大般若波羅密經初品法門), 안혜(安慧)의 대승중관석론(大乘中觀釋論), 불호(佛護)의 근본중소(根本中疏), 청변(淸辯)의 반야등론석(般若燈論釋), 길장(吉藏)의 중관론소(中觀論疏), 담영(曇影)의 중론의소(中論義疏) 등이 있다.
龍樹의 中頌
N g rjuna의 Madhyamaka K rik
歸敬偈(2偈) 禮敬의 詩
0-1)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0-2)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새롭게) 생겨나지도 않고 (완전히) 소멸하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어디선가)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 나가는 것도 아니다. 능히 이런 인연법을 말씀하시어 온갖 희론을 잘 진멸시키시도다. 내가 (이제)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하오니 모든 설법가운데 제일이로다.
0-1) anirodham anutp dam anucchedam a vatam
anek rtham an n rtham an gamam anirgamam//
0-2) ya prat tyasamutp da prapa copa amam ivam/
de ay m sa sa buddhasta vande vadat varam//
소멸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며 동일한 의미도 아니고 다른 의미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緣起), 희론을 寂滅하며 吉祥인 緣起를 가르쳐 주신 正覺者, 제일의 설법자이신 그 분께 예배합니다.
第1 觀因緣品(14偈) 因緣에 대한 관찰
pratyayapar k n ma prathama prakara am 緣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장(14게)
1-1) 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
모든 法은 스스로 생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하는 것도 아니며 그 양자에서 함께 생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원인없이 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無生임을 알아라.
1-1) na svato n pi parato na dv bhy n pyahetuta /
utpann j tu vidyante bh v kvacana ke cana//
그 어떤 것이건 어느 곳에 있건간에, 自體로부터건 남(他)에서건 그 兩者에서건 無因으로건 사물(존재)들의 발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1-2) 如諸法自性 不在於緣中 以無自性故 他性亦復無
諸法의 自性이 緣 가운데 있지 않듯이 자성이 없기에 他性도 없다.
1-3) na hi svabh vo bh v n pratyay di u vidyate/
avidyam ne svabh ve parabh vo na vidyate//
실로 사물들의 자성은 緣 따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自性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他性은 존재하지 않는다.
1-3) 因緣次第緣 緣緣增上緣 四緣生諸法 更無第五緣
인연과 연연 차제연과 증상연의 사연이 諸法을 생하며 第五의 緣은 없다.
1-2) catv ra pratyay hetu c lambanamanantaram/
tathaiv dhipateya ca pratyayo n sti pa cama //
緣은 네 가지이다. 인연과 연연과 차제연 그리고 또 증상연이다. 第五의 緣은 존재하지 않는다.
1-4) 果爲從緣生 爲從非緣生 是緣爲有果 是緣爲無果
결과는 緣에서 생하는가? 연이 아닌 것에서 생하는가? 이 연은 결과를 갖는가? 이 緣은 결과를 갖지 않는가?
1-4) kriy na pratyayavat n pratyayavat kriy /
pratyay n kriy vanta kriy vanta ca santyuta//
作用(單數)은 緣(단수)을 가진 것이 아니다. 작용(단수)은 緣(단수)을 안 가진 것이 아니다. 작용(復數)을 갖지 않은 것은 연(복수)이 아니다. 작용(복수)을 가진 것도 역시 그러하다.
1-5) 因是法生果 是法名爲緣 若是果未生 何不名非緣
이것으로 인하여 결과가 생할 때 이것을 연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 결과가 아직 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非緣이라고 하지 않겠느냐?
1-5) utpadyate prat tyem nit me pratyay kila/
y vannotpadyata ime t vann pratyay katham//
이것들을 연하여 발생하기에 실로 이것들은 연들이다. 이것들이 생하지 않는 그런 경우에 어떻게 非緣이 아니겠느냐?
1-6) 果先於緣中 有無俱不可 先無爲誰緣 先有何用緣
緣 속에 미리 결과가 있다거나 또는 없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불가능하다. 미리 없었다면 무엇을 위해 연이 되며 미리 있었다면 연은 어디에 쓸 것인가?
1-6) naiv sato naiva sata pratyayo 'rthasya yujyate/
asata pratyaya kasya sata ca pratyayena kim//
(결과로서의) 사물이 존재했거나 존재하지 않은 緣이 있다는 것은 모두 타당하지 않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緣이 무엇을 위해 있겠으며 존재한다면 연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1-7) 若果非有生 亦復非無生 亦非有無生 何得言有緣
만일 결과가 有가 생한 것도 아니고 無가 생한 것도 아니고 有無가 생한 것도 아니라면 연이 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1-7) na sann sanna sadasandharmo nirvartate yad /
katha nirvartako hetureva sati hi yujyate//
어떤 존재(法)가 있을 때 그것은 있던 것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던 것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처럼 나타난 것에 <因緣>이 있다는 생각이 도대체 어떻게 타당하겠느가?
1-8) 果若未生時 則不應有滅 滅法何能緣 故無次第緣
존재(法)가 아직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소멸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소멸한 존재가 어떻게 연이 되겠느냐? 그러므로 차제연은 없다.
1-9) anutpanne u dharme u nirodho nopapadyate/
n nantaramato yukta niruddhe pratyaya ka //
사물들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소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속된다는 것(次第性)은 타당하지 않다. 또 소멸했다면 무슨 緣이 있겠느냐?
1-9) 如諸佛所說 眞實微妙法 於此無緣法 云何有緣緣
諸佛께서 說하신 眞實하고 微妙한 法과 같이 無緣인 이 법에 어떻게 연연이 있겠느냐?
1-8) an lambana ev ya san dharma upadi yate/
ath n lambane dharme kuta lambana puna //
실로 존재하는 이런 법은 攀緣되는 것이 아니라고 교시되었다. 그래서 攀緣되지 않는 法이라면 다시 어떻게 攀緣이 있겠는가?
1-10) 諸法無自性 故無有有相 說有是事故 是事有不然
諸法은 無自性하므로 '있다'는 相이 없다. <이것이 있음에 이것이 있다>고 說함은 옳지 않다.
1-10) bh v n ni svabh v n na satt vidyate yata /
sat damasmin bhavat tyetannaivopapadyate//
무자성한 존재물들에는 존재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있음에 이것이 있다>고 하는 이 사실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1-11) 略廣因緣中 求果不可得 因緣中若無 云何從緣出
요약해서 보건 넓혀서 보건 인연 중에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인연 중에 없다면 어떻게 연에서 나올 것인가?
1-11) na ca vyastasamaste u pratyaye vasti tatphalam/
pratyayebhya katha tacca bhavenna pratyaye u yat//
따로 따로건 모두 합해서건 연에 그 결과는 없다. 연들에 없는 것, 그것이 어떻게 연들로부터 (生한다는 것이) 있겠는가?
1-12) 若謂緣無果 而從緣中出 是果何不從 非緣中而出
연에 결과가 없어도 연에서 (결과가) 나온다면 이 결과는 어째서 연이 아닌 것으로부터 나오지 못하는가?
1-12) ath sadapi tattebhya pratyayebhya pravartate/
apratyayebhyo 'pi kasm nn bhipravartate phalam//
그런데 그것이 없어도 (=만일 결과가 연에 없어도) 그 연으로부터 (결과가) 나타난다면 연이 아닌 것에서는 무엇 때문에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1-13) 若果從緣生 是緣無自性 從無自性生 何得從緣生
만일 결과가 연으로부터 생한다면 이 연은 무자성하다. 무자성한 것에서 생하는데 어떻게 연에서 생할 수 있겠는가?
1-13) phala ca pratyayamaya pratyay c svaya may /
phalamasvamayebhyo yattatpratyayamaya katham//
결과란 연으로부터 형성된다(고 하고), 연은 非自發的으로 형성된다.(고 한다. 그러나) 비자발적인 것으로부터 이루어진 결과, 그것을 어떻게 연으로부터 형성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1-14) 果不從緣生 不從非緣生 以果無有故 緣非緣亦無
그러므로 결과는 연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연이 아닌 것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결과는 없다.) 결과가 없기 때문에 연이나 연이 아닌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1-14) tasm nna pratyayamaya n pratyayamaya phalam/
sa vidyate phal bh v tpratyay pratyay kuta //
그러므로 緣으로부터 형성되거나, 非緣으로부터 형성되는 결과는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연이라거나 비연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
第2 觀去來品(25偈) 去來에 대한 관찰
gat gatapar k n ma dvit ya prakara am 가는 것과 오는 것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장(25게)
2-1) 已去無有去 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
이미 가버린 것에는 가는 것이 없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역시 가는 것이 없다.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 가는 것은 없다.
2-1) gata na gamyate t vadagata naiva gamyate/
gat gatavinirmukta gamyam na na gamyate//
'간 것'은 가지 않는다. '가지 않는 것'도 역시 가지 않는다. '간 것'과 '가지 않는 것'을 여읜 '가는 중인 것'은 가지 않는다.
2-2) 動處則有去 此中有去時 非已去未去 是故去時去
움직임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이 있다. (또)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있는) 그 가운데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이 있다. 그러므로 가고 있는 중인 것은 간다.
2-2) ce yatra gatistatra gamyam ne ca s yata /
na gate n gate ce gamyam ne gatistata //
움직임이 있는 곳, 그곳에 '가는 것'이 있고, 또 그 움직임은 '가는 중인 것'에 있기 때문에 '간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니라 '가는 중인 것'에 있는 움직임이 '가는 것'이다.
2-3) 云何於去時 而當有去法 若離於去法 去時不可得
어떻게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 가는 작용이 있겠는가? 가는 작용을 떠난다면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을 얻을 수 없다.
2-3) gamyam nasya gamana katha n mopapatsyate/
gamyam ne dvigamana yad naivopapadyate//
'가는 중인 것'에 '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가는 중인 것'에 두개의 '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2-4) 若言去時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時 去時獨去故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이 간다고 말한다면 이런 사람은 허물이 있다. 가는 것 없이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이 있어서 가고 있는 중인 것이 홀로 가기 때문이다.
2-4) gamyam nasya gamana yasya tasya prasajyate/
te gatergamyam na gamyam na hi gamyate//
'가는 중인 것'이 '가는 작용'이라고 하는 자, 그 자는 '가는 것' 없이 '가는 중인 것'이 있다고 하는 오류에 빠진다. 왜냐하면 '가는 중인 것'이 가기 때문이다.
2-5) 若去時有去 則有二種去 一謂爲去時 二謂去時去
만일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 가는 것이 있다고 하면 두 종류의 가는 것이 있게 된다. 첫째는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이고 둘째는 그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서의 가는 것이다.
2-5) gamyam nasya gamane prasakta gamanadvayam/
yena tadgamyam na ca yacc tra gamana puna //
'가는 중인 것'에 '가는 작용'이 있다고 하면 '가는 작용'이 둘로 되는 오류에 빠진다. '가는 중인 것'인 그것과, 다시 거기(=가는 중인 것)에 있는 '가는 작용'에 의해서 (둘로 되는 오류에 빠진다).
2-6) 若有二去法 則有二去者 以離於去者 去法不可得
두 개의 가는 것이 있다면 가는 놈이 둘이 있게 된다. 가는 놈을 떠나서는 가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2-6) dvau gant rau prasajyete prasakte gamanadvaye/
gant ra hi tirask tya gamana nopapadyate//
'가는 작용'이 두 개라는 오류에는 '가는 놈'이 둘이라는 오류가 수반된다. 왜냐하면 '가는 놈'을 떠나서 '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2-7) 若離於去者 去法不可得 以無去法故 何得有去者
가는 놈을 떠나서는 가는 작용은 얻을 수 없다. 가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가는 놈이 있을 수 있겠는가?
2-7) gant ra cettirask tya gamana nopapadyate/
gamane 'sati gant tha kuta eva bhavi yati//
만일 '가는 놈'을 떠난다면 '가는 작용'은 성립되지 않는다. '가는 작용'이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가는 놈'이 성립하겠는가?
2-8) 去者則不去 不去者不去 離去不去者 無第三去者
가는 놈은 가지 않으며 가지않는 놈도 가지 않는다. 가는 놈과 가지 않는 놈을 떠나서 第三의 가는 놈은 없다.
2-8) gant na gacchati t vadagant naiva gacchati/
anyo ganturagantu ca kast t yo hi gacchati//
'가는 놈'은 가지 않는다. '가지 않는 놈'도 역시 결코 가지 않는다. '가는 놈'이나 '가지 않는 놈'과 다른 第三의 어떤 놈이 도대체 가겠는가?
2-9) 若言去者去 云何有此義 若離於去法 去者不可得
만일 가는 놈이 간다고 말한다면 그런 일이 어떻게 있겠느냐 ? 가는 작용이 없다면 가는 놈은 얻을 수 없다.
2-9) gant t vadgacchat ti kathamevopaoatsyate/
gamanena vin gant yad naivopapadyate//
'가는 작용'이 없는 '가는 놈'이 실로 성립하지 않는다면 '가는 놈'이 간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2-10) 若去者有去 則有二種去 一謂去者去 二謂去法去
만일 가는 놈이 가는 것을 갖는다고 하면 가는 것이 두개가 있게 된다. 첫째는 가는 놈의 가는 것이고 둘째는 가는 작용의 가는 것이다.
2-11) gamane dve prasajyete gant yadyuta gacchati/
ganteti cocyate yena gant sanyacca gacchati//
만일 '가는 놈'이 간다면 '가는 작용'이 둘이라는 오류에 빠진다. '가는 놈'이라고 말하는 것과, 존재하는 '가는 놈', 그 놈이 또 간다는 사실에 의해서.
2-11)若謂去者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者 說去者有去
만일 가는 놈이 간다고 말한다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허물이 있다. 가는 것 없이 가는 놈이 있고 가는 놈에 가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2-10) pak o gant gacchat ti yasya tasya prasajyate/
gamanena vin gant ganturgamanamicchata //
가는 놈이 간다고 하는 주장, 그런 주장을 한다면 다음과 같은 오류에 빠진다. 가는 작용 없이 가는 놈이 있고 (또 그) 가는 놈의 가는 작용을 추구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2-12) 已去中無發 未去中無發 去時中無發 何處當有發
이미 가버린 것에는 출발이 없다. 아직 가지 않는 것에서도 출발은 없다.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서도 출발은 없다. 어느 곳에 출발이 있을 것인가?
2-12) gate n rabhyate gantu gantu n rabhyate 'gate/
n rabhyate gamyam ne gantum rabhyate kuha//
이미 가버린 것에서 간다는 사실이 시작(출발)되지 않고 아직 가지 않은 것에서도 간다는 사실이 시작(출발)되지 않으며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서도 간다는 사실이 시작(출발)되지 않는다면 간다는 사실은 어느 곳에서 시작(출발)될까?
2-13) 未發無去時 亦無有已去 是二應有發 未去何有發
아직 출발하지 않았으면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도 없고 이미 가버린 것도 없다. 이 두가지 경우에 응당 출발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어떻게 출발이 있겠는가 ?
2-13) na p rva gaman rambh dgamyam na na v gatam/
yatr rabhyeta gamanamagate gamana kuta //
가는 작용이 출발하기 이전에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은 없고 (이미) 가버린 것도 없다. 가는 작용은 거기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아직) 가지 않은 것에 가는 작용이 어떻게 있겠는가?
2-14) 無去無未去 亦復無去時 一切無有發 何故而分別
이미 가버린 것도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고 없고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도 없다. 어디서건 출발이 없는데 어떻게 분별하겠느냐?
2-14) gata ki gamyam na kimagata ki vikalpyate/
ad yam na rambhe gamanasyaiva sarvath //
실로 어디에서건 가는 작용의 출발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가버린 것이건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이건 아직 가지 않은 것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2-15) 去者則不住 不去者不住 離去不去者 何有第三住
가는 놈은 멈추지 않는다. 가지 않은 놈은 멈추지 않는다. 가는 놈과 가지 않은 놈을 떠나 어떤 第三의 것이 있어서 멈추겠는가?
2-15) gant na ti hati t vadagant naiva ti hati/
anyo ganturagantu ca kast t yo 'tha ti hati//
이미 가버린 놈은 멈추지 않는다. 그처럼 아직 가지 않는 놈도 역시 멈출 수 없다. 이미 가버린 놈과 아직 가지 않은 놈이 아닌 제삼의 어떤 놈이 멈추겠는가?
2-16) 去者若當住 云何有此義 若當離於去 去者不可得
가는 놈이 혹시 멈추리라는 말, 이런 이치가 어떻게 있겠느냐? 가는 작용을 떠나게 되면 가는 놈을 얻을 수 없는데
2-16) gant t vatti at ti kathamevopapatsyate/
gamanena vin gant yad naivopapadyate//
가는 작용 없이 가는 놈(이 있다는 것)이 실로 성립하지 않을 때 (=않는다면) 가는 놈이 멈춘다고 하는 것이 실로 어떻게 성립하겠느냐?
2-17) 去未去無住 去時亦無住 所有行止法 皆同於去義
이미 가버린 것이나 아직 가지 않은 것은 멈추지 않는다.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도 역시 멈추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이 流轉되거나 還滅되는 법칙도 모두 가는 것과 같다(가는 작용의 경우에서와 똑같이 논파된다).
2-17) na ti hati gamyam n nna gat nn gat dapi/
gamana sa prav tti ca niv tti ca gate sam //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가버린 것이나 아직 가지 않은 것에서도 역시 그러하다(=멈추는 것이 아니다). 流轉되거나 還滅되어 가는 과정도 가는 작용의 경우와 동일하다.
2-18) 去法卽去者 是事則不然 去法異去者 是事亦不然
가는 작용이 바로 가는 놈이라는 사실은 옳지 않다. 가는 작용이 가는 놈과 다르다는 사실 역시 옳지 않다.
2-18) yadeva gamana gant sa eveti na yujyate/
anya eva punargant gateriti na yujyate//
실로 가는 작용 그것이 바로 가는 놈이라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가는 놈이 가는 것과 다르다는 것도 결코 옳지 않다.
2-19) 若謂於去法 卽爲是去者 作者及作業 是事卽爲一
만일 가는 작용이 그대로 가는 놈이 된다고 한다면 作者와 作業이 하나인 꼴이 된다.
2-19) yadeva gamana gant sa eva hi bhavedyadi/
ek bh va prasajyeta kartu karma a eva ca//
만일 가는 작용이 가는 놈이라는 사실, 그런 사실이 도대체 있을 수 있다면 행위자와 행위가 하나의 존재라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2-20) 若謂於去法 有異於去者 離去者有去 離去有去者
만일 가는 작용이 가는 놈과 다르다고 한다면 가는 놈 없이 가는 작용이 있고 가는 작용 없이 가는 놈이 있게 된다.
2-20) anya eva punargant gateryadi vikalpyate/
gamana sy d te ganturgant sy dgaman d te//
그렇다고 해서 가는 놈이 가는 것과 다르다고 분별된다면 가는 놈 없이 가는 작용이 있을 터이고 가는 작용 없이 가는 놈이 있으리라.
2-21) 去去者是二 若一異法成 二門俱不成 云何當有成
가는 작용과 가는 놈의 두가지가 서로 같은 법으로 이루어졌다거나 다른 법으로 이루어졌다는 두가지 경우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그 두가지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는가?
2-21) ek bh vena v siddhirn n bh vena v yayo /
na vidyate tayo siddhi katha nu khalu vidyate//
(가는 작용과 가는 놈이) 동일한 존재라는 것에 의해서건 서로 다른 존재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건 성립되는 것을 볼 수 없다. 그 양자간에 도대체 어떻게 성립이 있을 수 있을까?
2-22) 因去知去者 不能用是去 先無有去法 故無去者去
가는 작용으로 인하여 가는 놈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가는 놈이) 그 가는 작용을 사용할 수는 없다. 미리 가는 작용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가는 놈이 간다는 사실은 없다.
2-22) gaty yayocyate gant gati t sa na gacchati/
yasm nna gatip rvo 'sti ka cit ki ciddhi gacchati//
가는 것 그것에 의해서 가는 놈이 간다고 말하지만 그것(=가는 놈)이 그것(=가는 것)을 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는 것이 있기 이전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로 누가 무엇을 가겠는가?
2-23) 因去知去者 不能用異去 於一去者中 不得異去故
가는 작용으로 인하여 가는 놈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가는 놈이 그것이 속하지 않은) 다른 가는 작용을 가는 것은 아니다. 가는 놈 하나가 (그것이 속하지 않은) 다른 가는 작용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2-23) gaty yayocyate gant tato 'ny sa na gacchati/
gat dve nopapadyete yasm deke pragacchati//
가는 것, 그것에 의해서 가는 놈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 (=가는 놈)이 다른것 (가는 놈이 속해 있지 않은 가는 것)을 가는 것은 아니다. (그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 둘이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2-24) 決定有去者 不能用三去 不決定去者 亦不用三去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가는 놈은 가는 작용 세가지를 행할 수 없다. 결정되어 있지 않은 가는 놈도 역시 가는 작용 세가지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
2-24) sadbh to gamana gant triprak ra na gacchati/
n sadbh to 'pi gamana triprak ra gacchati//
實在하는 가늠 놈은 가는 작용 세가지를 가지 않는다. 실재하지 않는 가는 놈도 역시 가는 작용 세가지를 가지 않는다.
2-25) 去法定否定 去者不用三 是故去去者 所去處皆無
가는 작용이 결정적으로 존재하건 안하건 가는 놈은 세가지를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는 작용이나 가는 놈, 또 가야 할 곳 모두 없다.
2-25) gamana sadasadbh ta triprak ra na gacchati/
tasm dgati ca gant ca gantavya ca na vidyate//
실재하며 실재하지 않는 것은 가는 작용 세가지를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는 것이나 가는 놈이나 가야 할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第3 觀六情品(8偈) 六根에 대한 관찰
cak ur d ndriyapar k n ma t t ya prakara am 눈(眼)등의 지각 기관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3장(8게)
3-1) 眼耳及鼻舌 身意等六情 此眼等六情 行色等六塵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은 육정인데 눈 등의 六情은 色 (聲, 香, 味, 觸, 法) 등의 六塵에서 작용한다.
3-1) dar ana rava a ghr a rasana spar ana mana /
indriy i a ete dra avy d ni gocara //
보는 작용(시각), 듣는 작용(청각), 냄새 맡는 작용(후각), 맛보는 작용(미각), 촉감을 느끼는 작용(촉각), 생각을 떠올리는 작용(사고), 등은 여섯 가지 인식능력이다. 보여져야 할 대상 등(의 여섯 가지)은 이것들의 (=여섯 가지 인식능력의) 활동영역이다.
3-2) 是眼則不能 自見其己體 若不能自見 云何見餘物
이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 (=눈)을 볼 수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3-2) svam tm na dar ana hi tattameva na pa yati/
na pa yati yad tm na katha drak yati tatpar n//
실로 보는 작용은 그 스스로에 있어서 그것 (=눈 자신)이 그것 (=눈 자신)을 보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3-3) 火喩則不能 成於眼見法 去未去去時 已總答是事
불의 비유는 눈으로 본다는 법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이미 가버린 것 아직 가지 않은 것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서 이미 이에 대해 충분히 답변했다.
3-3) na pary pto 'gnid nto dar anasya prasiddhaye/
sadar ana sa pratyukto gamyam nagat gatai //
불의 비유는 보는 작용의 증명을 위해 적절치 않다. 그것(=불의 비유)은 앞에서 설명했던, '가는 중인 것, 간 것, 가지 않은 것'에 의해 보는 작용과 함께한다.
3-4) 見若未見時 則不名爲見 而言見能見 是事則不然
보는 작용이 보고 있지 않을 때는 본다고 말할 수 없는데 보는 작용이 능히 본다고 말한다. 이런 일은 옳지 않다.
3-4) n pa yam na bhavati yad ki cana dar anam/
dar ana pa yat tyeva kathametattu yujyate//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다면 보는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는 작용(見)이 본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타당할 수 있겠는가?
3-5) 見不能有見 非見亦不見 若已破於見 則爲破見者
보는 작용에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보는 작용이 아닌 것에도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미 보는 작용을 논파했다면 결국 보는 놈도 논파된다.
3-5) pa yati dar ana naiva naiva pa yatyadar anam/
vy khy to dar anenaiva dra c pyupagamyat m//
보는 작용이 보는 것도 결코 아니고 보는 작용이 없는 것이 보는 것도 결코 아니다. 보는 작용에 대해 (이처럼) 설명한 것을 가지고 보는 놈도 이해해야 한다.
3-6) 離見不離見 見者不可得 以無見者故 何有見可見
보는 작용을 떠나서건 떠나지 않건 보는 놈은 얻을 수 없다. 보는 놈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는 작용이나 보이는 것이 있겠느냐?
3-6) tirask tya dra n styatirask tya ca dar anam/
dra avya dar ana caiva dra aryasati te kuta //
보는 작용을 배제하건 배제하지 않건 보는 놈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놈이 없다면 보이는 것(=대상)이나 보는 작용, 그것들이 어떻게 있겠느냐?
3-7) 見可見無故 識等四法無 四取等諸緣 云何當得有
보는 작용과 보이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識등의 四法은 없다. 四取 등의 緣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3-7) dra avyadar an bh v dvij n dicatu ayam/
n st ty up d n d ni bhavi yanti puna katham//
보여지는 것과 보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識등의 네 가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取 따위의 것이 존재하겠는가?
3-8) 耳鼻舌身意 聲及聞者等 當知如是義 皆同於上說
귀, 코, 혀, 몸, 생각과 소리나 듣는 놈 등의 이치도 모두 앞에서 설한 것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8) vy khy ta rava a ghr a rasana spar ana mana /
dar anenaiva j n y cchrot rotavyak di ca//
앞에서 설명했던 듣는 작용, 냄새 맡는 작용, 맛 보는 작용, 촉감을 느끼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 등은 보는 작용(에 대한 논파)에 의해 알 수 있으리라. 또 듣는 놈과 들리는 것(=소리) 따위도…
第4 觀五陰品 (9偈)五蘊에 대한 관찰
skandhapar k n ma caturtha prakara am 집합체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4장(9게)
4-1) 若離於色因 色則不可得 若當離於色 色因不可得
만일 <色의 因>을 떠난다면 色은 얻을 수 없다. 만일 色을 떠난다면 <色의 因>은 얻을 수 없다.
4-1) r pak ra anirmukta na r pamupalabhyate/
r pe pi na nirmukta d yate r pak ra am//
<色의 因>이 없으면 色은 포착되지 않는다. 色이 없어도 <色의 因>은 보이지 않는다.
4-2) 離色因有色 是色則無因 無因而有法 是事則不然
<色의 因>을 떠나서 色이 있다면 이 色은 因이 없(이 존재하는 꼴이 된)다. 因이 없이 법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4-2) r pak ra anirmukte r pe r pa prasajyate/
hetuka na c styartha ka cid hetuka kva cit//
<色의 因>이 없이 色이 있다(고 한다)면 無因의 色이 있다(고 집착하)는 오류에 빠진다. 無因인 사물은 어떤 것이건 어디에건 존재하지 않는다.
4-3) 若而色有因 則是無果因 若言無果因 則無有因處
色을 떠나서 그 因이 있다면 이것은 결과 없는 因이다. (그러나) 결과 없는 因이 있다고 말하면 전혀 옳지 않다.
4-3) r pe a tu vinirmukta yadi sy dr pak ra am/
ak ryaka k ra a sy d n styak rya ca k ra am//
그와 달리 만일 色과는 별도로 <色의 因>이 있다고 한다면 결과 없는 因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결과 없는 因은 없다.
4-4) 若而有色者 則不用色因 若無有色者 亦不用色因
만일 이미 色이 있는 것이라면 <色의 因>은 소용없다. 만일 色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色의 因>은 소용없다.
4-4) r pe satyeva r pasya k ra a nopapadyate/
r pe 'satyeva r pasya k ra a nopapadyate//
色이 존재한다면 <色의 因>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色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色의 因>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4-5) 無因而有色 是事終不然 是故有智者 不應分別色
因이 없이 色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혜를 가진 사람은 色을 분별해서는 안된다.
4-5) ni k ra a pun r pa naiva naivapapadyate/
tasm d r pagat n k cinna vikalp n vikalpayet//
또한 無因의 色이 있다는 것은 결코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色에 관해서는 어떠한 분별도 분별해서는 안된다.
4-6) 若果似於因 是事則不然 果若不似因 時事亦不然
만일 결과가 因과 같다고 하면 이런일은 옳지 못하다. 만일 결과가 因과 같지 않다고 하면 이런 일은 옳지 못하다.
4-6) na k ra asya sad a k ryamityupapadyate/
na k ra asy sad a k ryamityupapadyate//
因과 같은 결과라고 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因과 같지 않은 결과라고 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4-7) 受陰及想陰 行陰識陰等 其餘一切法 皆同於色陰
受陰과 想陰, 行陰과 識陰등 그 이외의 모든 法은 모두 色陰의 경우와 같다.
4-7) vedan cittasa j n sa sk r ca sarva a /
sarve meva bh v n r pe aiva sama krama //
受와 心과 想과 갖가지 行에 있어서, 또 모든 존재들에 있어서 철저하게 色과 같은 경로를 밟는다.
4-8) 若人有問者 離空而欲答 是則不成答 俱同於彼疑
만일 누군가가 물어보는데 空을 떠나서 답변을 하려고 한다면 답변이 성립할 수가 없고 함께 (애초의) 그 의문과 똑같게 된다.
4-8) vigrahe ya par h ra k te nyatay vadet/
sarva tasy parih ta sama s dhyena j yate//
空性에 의해 지어진 논파에서 누군가가 (어떤 이유에 토대를 두고) 반박을 말한다면, 그것(=논파)의 모든 것은 반박되지 않으며 (그 이유에서도) 소증과(s dhyena) 동일한 것(sama )이 생한다.
4-9) 若人有難問 離空說其過 是不成難問 俱同於彼疑
만일 누군가가 난문이 있는데 空을 떠나서 그 잘못을 설명한다면 난문이 성립되지 못하여 함께 (애초의) 그 의문과 똑같게 된다.
4-9) vy khy ne ya up lambha k te nyatay vadet/
sarva tasy nup labdha sama s dhyena j yate//
空性에 의해 지어진 해설에서 누군가가 (어떤 이유에 토대를 두고) 비난을 말한다면, 그것(=해설)의 모든 것은 비난되지 않으며 (그 이유에서도) 소증과 동일한 것이 생한다.
第5 觀六種品(8偈) 六界에 대한 관찰
dh tupar k n ma pa cama prakara am 界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5장(8게)
5-1) 空相未有時 則無虛空法 若先有虛空 卽爲是無相
허공의 相이 아직 존재하지 않을 때는 虛空法은 있을 수 없다. 만일 (相이 있기 이전에) 미리 虛空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相이 없이 존재하는 꼴이 된다.
5-1) n k a vidyate ki citp rvam k alak a t/
alak a a prasajyeta sy tp rva yadi lak a t//
虛空의 相이 있기 이전에는 그 어떤 虛空도 존재하지 못한다. 만일 相이 있기 이전에 (虛空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相이 없이 존재한다는 오류에 떨어진다.
5-2) 是無相之法 一切處無有 於無相法中 相則無所相
이런 無相의 法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無相의 法 중에서 相은 相을 띠지 못한다.
5-2) alak a o na ka cicca bh va sa vidyate kva cit/
asatyalak a e bh ve kramat kuha lak a am//
어떤 無相의 존재도 어디에건 존재하지 않는다. 無相인 존재가 없다면(=일체가 相을 갖고 있다면) 相은 어디서 (없다가 생기는 식으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
5-3) 有相無相中 相則無所住 離有相無相 餘處亦不住
相이 있는 곳이건 없는 곳이건 相이 머무르는 바는 없다. 相이 있는 것과 相이 없는 것을 떠난 다른 곳에서도 역시 머무르고 있지 않다.
5-3) n lak a e lak a asya prav ttirna salak a e/
salak a lak a bhy n pyanyatra pravartate//
특징(=相)이 없는 것에서건 특징(=相)이 있는 것에서건 특징(=相)의 출현은 없다. 특징(=相)이 있는 것이나 특징(=相)이 없는 것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역시 출현하지 않는다.
5-4) 相法無有故 可相法亦無 可相法無故 相法亦復無
相(을 띠게 하는) 法이 없기에 띠는 相도 없다. 띠는 相도 없기에 (相을 띠게 하는) 法도 없다.
5-4) lak a sa prav ttau ca na lak yamupapadyate/
lak yasy nupapattau ca lak a asy pyasa bhava //
能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所相은 성립하지 않는다. 所相이 발생하지 않을 때에는 能相도 生하지 않는다.
5-5) 是故今無相 亦無有可相 離相可相已 更亦無有物
그러므로 이제 能相도 없고 所相도 없다. 能相과 所相을 떠나서는 다시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5-5) tasm nna vidyate lak ya lak a a naiva vidyate/
lak yalak a anirmukto naiva bh vo 'pi vidyate//
그러므로 所相은 존재하지 않고 能相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所相과 能相을 떠난 사물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5-6) 若使無有有 云可當有無 有無旣已無 知有無者誰
有가 없어졌는데 어떻게 無가 있을 수 있겠는가? 有와 無가 이미 없는데 有와 無를 아는 놈은 누구인가?
5-6) avidyam ne bh ve ca ksy bh vo bhavi yati/
bh v bh vavidharm ca bh v bh vamavaiti ka //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비존재가 존재하겠느냐? 존재나 비존재가 부정됐는데 누가 존재나 비존재를 認知하겠는가?
5-7) 是故知虛空 非有亦非無 非相非可相 餘五同虛空
그러므로 虛空은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며 能相도 아니고 所相도 아니다. 나머지 다섯가지(地, 水, 火, 風, 識)도 虛空과 마찬가지다.
5-7) tasm nna bh vo n bh vo na lak ya n pi lak a am/
k am k asam dh taya pa ca ye pare//
그러므로 虛空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能相도 없고 所相도 없다. 다른 다섯가지(地, 水, 火, 風, 識) 요소도 虛空과 마찬가지다.
5-8) 淺智見諸法 若有若無相 是則不能見 滅見安隱法
지혜가 얕은 사람들은 諸法에서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相을 본다. 이런 경우는 所見이 사라진 安隱法을 보지 못한다.
5-8) astitva ye tu pa yanti n stitva c lpabuddhaya /
bh v n te na pa yanti dra avyopa ama ivam//
그러나 실재한다거나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지혜가 얕은 사람들은, 그들은 사물들에 있어서 보여져야 할 것인 寂滅의 吉祥을 보지 못한다.
第6 觀染染者品 (10偈) 汚染과 汚染된 者에 대한 관찰
r garaktapar k n ma a tha prakara a 탐욕과 탐내는 자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6장(10게)
6-1) 若離於染法 先自有染者 因是染欲者 應生於染法
만일 <물들이는 法>을 떠나서 미리 <물든 놈>이 있다면 이 <물든 놈>으로 인하여 <물들이는 法>도 生해야 한다.
6-1) r g dyadi bhavetp rva rakto r gatirask ta /
ta prat tya bhavedr go rakte r go bhavetsati//
만일 貪慾이 있기 이전에 貪慾과 관계없는 <탐내는 놈>이 있다고 한다면 (원래는) 그놈을 緣하여 탐욕이 있으리라. (즉) <탐내는 놈>이 존재할 때에 貪慾이 있으리라.
6-2) 若無有染者 云何當有染 若有若無染 染者亦如是
<물든 놈>이 없다면 <물들이는 法>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물들이는 法>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물든 놈>도 역시 그와 같다.
6-2) rakte 'sati pun r ga kuta eva bhavi yati/
sati v sati v r ge rakte 'pye a sama krama //
그와 달리 <탐내는 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貪慾이 도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상 1偈와 2偈의 전반부에서 밝힌 대로) 貪慾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그러하듯이 <탐내는 놈>에서도 그것은 절차가 똑같다.
6-3) 染者及染法 俱成則不然 染者染法俱 則無有相待
<물든 놈>과 <물들이는 法>이 함께 성립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물든 놈>과 <물들이는 法>이 함께하고 있으면 서로 상대하지 못한다.
6-3) sahaiva punarudbh tirna yukt r garaktayo /
bhavet r garaktau hi nirapek au parasparam//
그와 달리 <탐욕>과 <탐내는 놈>의 양자가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도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탐욕>과 <탐내는 놈>의 양자는 서로가 서로에 의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6-4) 染者染法一 一法云何合 染者染法異 異法云何合
<물든 놈>과 <물들이는 法>이 하나라면 하나의 法이 어떻게 合하겠는가? <물든 놈>과 <물들이는 法>이 다르다면 다른 法이 어떻게 合하겠는가?
6-4) naikatve sahabh vo 'sti na tenaiva hi tatsaha/
p thaktve sahabh vo 'tha kuta eva bhavi yati//
만일 하나라면 結合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자체와 結合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다르다면 도대체 어떻게 結合할 수 있겠느냐?
6-5) 若一有合者 離伴應有合 若異有合者 離伴亦應合
만일 하나인데 合하는 것이라면 짝 없이도 合함이 있어야 하고 만일 다르면서 合하는 것이라면 이 역시 짝 없이도 합해야 하리라.
6-5) ekatve sahabh va cet sy tsah ya vin pi sa /
p thaktve sahabh va cet sy tsah ya vin pi sa //
만일 하나인 중에 합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合할) 짝이 없이도 그렇게 되는 꼴이 되고 만일 다른 것에 합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合할) 짝이 없이도 그렇게 되는 꼴이 된다.
6-6) 若異而有合 染染者何事 是二相先異 然後說合相
만일 다르면서 합한다고 하면 <물들이는 법>과 <물든 놈>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兩者의 相이 미리 차이지고 난 다음에 結合하는 相을 설하는 것이다.
6-6) p thaktve sahabh va ca yadi ki r garaktayo /
siddha p thakp thagbh va sahabh vo yatastayo //
만일 서로 다른 것이면서 結合한다고 하면 貪慾과 <탐내는 놈>의 兩者가 어떻게 서로 각각인 존재로 성립되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성립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 兩者가 結合하고 있기 때문이다.
6-7) 若染及染者 先各成異相 旣已成異相 云何而言合
만일 <물들이는 法>과 <물든 놈>이 미리 서로 다른 相을 이루고 있다면 이미 다른 相을 이루고 있는데 어떻게 合한다고 말하느냐?
6-7) siddha p thakp thagbh vo yadi v r garaktayo /
sahabh va kimartha tu parikalpayase tayo //
또는 만일 <貪慾>과 <탐내는 놈> 양자가 서로 다른 각각의 존재로 성립해 있다면 그대는 무슨 目的으로 그 둘이 결합된 존재라고 상정하는가?
6-8) 異相無有成 是故汝欲答 合相竟無成 而復說異相
서로 다른 相이라는 것은 성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합한 相이라고 대답하려 하지만 합한 相이 성립하지 못하니 (그대는) 다시 서로 다른 相이라고 說하는구나.
6-8) p thagna sidhyat tyeva sahabh va vik k asi/
sahabh vaprasiddhyartha p thaktva bh ya icchasi//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그처럼 結合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다시 결합된 존재임을 논증하기 위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희구한다.
6-9) 異相不成故 合相則不成 於何異相中 而欲說合相
서로 다른 相이 성립하지 않기에 結合된 相도 성립하지 않는데 어떤 다른 相 중에서 합한 相을 說하려 하느냐?
6-9) p thagbh v prasiddhe ca sahabh vo na sidhyati/
katamasmin p thagbh ve sahabh va sat cchasi//
서로 다르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결합됐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서로 다르다는 이런 것에서 어떻게 당신은 결합된 존재를 희구하느냐?
6-10) 如是染染者 非合不合成 諸法亦如是 非合不合成
이와 같이 染法과 染者는 結合하거나 結合하지 않은 채로 成立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도 역시 이와 같아서 결합하거나 결합하지 않은 채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6-10) eva raktena r gasya siddhirna saha n saha/
r gavatsarvadharm siddhirna saha n saha//
이와 같이 <탐욕>의 성립은 <탐내는 놈>과 결합된 것도 아니고 결합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탐욕>과 같이 모든 법의 성립은 결합된 것도 아니고 결합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第7 觀三相品(35偈) 三相에 대한 관찰
sa sk tapar k n ma saptama prakara am 지어진 것(諸現象, 有爲)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7장(34게)
7-1) 若生是有爲 則應有三相 若生是無爲 何名有爲相
만일 生이 有爲라면 응당 三相을 가지리라. 만일 생이 無爲라면 어떻게 유위의 相이라고 부르겠느냐?
7-1) yadi sa sk ta utp dastatra yukt trilak a /
ath sa sk ta utp da katha sa sk talak a am//
만일 生이 有爲法이라면 거기에서 三相은 타당하다. 그런데 생이 無爲法이라면 어떻게 有爲의 相이 타당하겠는가?
7-2) 三相若聚散 不能有所相 云何於一處 一時有三相
(生住滅의) 三相이 모여 있건 흩어져 있건 相을 가질 수 없다. 어떻게 一處 一時에 三相이 있겠는가?
7-2) utp d dy strayo vyast n la lak a akarma i/
sa sk tasya samast syurekatra kathamekad //
生等(生住滅)의 세가지가 각각의 것들이라고 하면 有爲相의 작용으로는 적합치 않다. (이와 반대로 그 세가지가) 결합되어 있다고 하면 어떻게 一處, 一時일 수있겠는가?
7-3) 若謂生住滅 更有有爲相 是卽爲無窮 無卽非有爲
만일 生,住,滅에 다시 有爲의 相이 있다면 그것은 無窮하게 (계속)되고, 없다면 (생,주,멸은) 유위법이 아니다.
7-3) utp dasthitibha g n manyatsa sk talak a am/
asti cedanavasthaiva n sti cette na sa sk t //
生,住,滅에 있어서 또다른 유위법의 相이 있다면 그야말로 무한하게 된다. (반대로) 만일 없다면 그것들(=생,주,멸)은 유위법이 아니다.
7-4) 生生之所生 生於彼本生 本生之所生 還生於生生
生生의 生한 바는 저 本生을 생하고 본생의 생한 바는 다시 생생을 생한다.
7-4) utp dotp da utp do m lotp dasya keval!am/
utp dotp damutp do maulo janayate puna //
生生은 오직 根本的인 生의 生일 뿐이며 근본적인 생이 다시 생생을 생한다.
7-5) 若謂是生生 能生於本生 生生從本生 何能生本生
만일 이 生生이 능히 本生을 생한다면 생생은 본생에서 생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능히 본생을 생하겠는가?
7-5) utp dotp da utp do m lotp dasya te yadi/
maulen janitasta te sa katha janayi yati//
그대에게 있어서 만일 生生이 本生을 생한다면 그대에게 있어서 본생에 의해 생해지지않은 그것(生生)이 그것(本生)을 어떻게 생하겠는가?
7-6) 若謂是本生 能生於生生 本生從彼生 何能生生生
만일 이 본생이 능히 생생을 생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본생은 그것에서 생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생생을 생하겠는가?
7-6) sa te maulena janito maula janayate yadi/
maula sa ten janitastamutp dayate katham//
그대의 의견대로 만일 본생에 의해 생해진 것 그것이 본생을 생하게 한다면 어떻게 그것(생생)에 의해 생하지 않은 본생 그것이 그것(생생)을 생하게 할 것인가?
7-7) 若生生生時 能生於本生 生生尙未有 何能生本生
만일 생생이 생할 때 능히 본생을 생하는 것이라면 생생이 오히려 없는데 어떻게 본생을 생하겠는가?
7-7) ayamutpadayam naste k mamutp dayedimam/
yad mamutp dayitumaj ta aknuy dayam//
만일 (생생의) 非生이 이 (본생의) 생함을 있게 하는 것,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대의 의견대로 이 (생생의) 生時가 이것을 발생하게 하리라.
7-8) 若本生生時 能生於生生 本生尙未有 何能生生生
만일 본생이 생할 때 능히 생생을 생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 본생이 오히려 없는데 어떻게 생생을 생하겠는가?
7-7) ayamutpadayam naste k mamutp dayedimam/
yad mamutp dayitumaj ta aknuy dayam//
만일 (본생의) 非生이 이 (생생의) 생함을 있게 하는 것,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대의 의견대로 이 (본생의) 生時가 이것을 발생하게 하리라.
7-9) 如燈能自照 亦能照於彼 生法亦如是 自生亦生彼
마치 등불이 능히 자신도 비추고 또 다른 것도 비추는 것처럼 生法도 역시 이와 같아서 스스로도 생하고 또 다른 것도 생하게 한다.
7-8) prad pa svapar tm nau sa prak yit yath /
utp da svapar tm n vutp dayettath //
등불이 自와 他 兩者를 함께 비추는 것처럼, 그것처럼 生은 自와 他 양자를 生하는 것이리라.
7-10) 燈中自無暗 住處亦無暗 破暗乃名照 無暗則無照
등불 그 자체에는 어둠이 없다.(등불이) 머무는 곳에도 역시 어둠은 없다.어둠을 파괴하기에 등불이라 이름하는데 어둠이란 것이 없는 것이라면 비춘다는 것도 없는 것이다.
7-9) prad pe n ndhak ro 'sti yatra c sau prati hita /
ki prak ayati d pa prak o hi tamovadha //
등불 (그 자체)에는 어둠이 없다.또 그것이 머무르고 있는 장소에도 (어둠은 없다). (그렇게 어둠이 존재하지 않으니) 등불이 무엇을 비칠 것인가? 언필칭 비춤은 어둠의 파괴자인데…
7-11) 云何燈生時 而能破於暗 此燈初生時 不能及於暗
어떻게 등불이 생하는 바로 그 순간에 능히 어둠을 쫓을 수 있겠는가? 이 등불이 처음 (켜져) 생하는 그 순간에는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7-10) kathamutpadym nena prad pena tamo hatam/
notpadyam no hi tama prad pa pr pnute yad //
어떻게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등불에 의해 어둠이 물리쳐짐을…(말할 수 있을까?) 실로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등불이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7-12) 燈若未及暗 而能破暗者 燈在於此間 則破一切暗
만일 등불이 어둠에 미치지 아니하고서도 능히 어둠을 타파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속에 있는 등불이 곧 일체의 어둠을 타파하리라.
7-11) apr pyaiva prad pena yadi v nihata tama /
ihastha sarvalokastha sa tamo nihani yati//
혹은 만일 (불빛이) 도달하지 아니하고서도 등불에 의해 어둠이 타파된다면 여기에 존재하는 그것(=등불)이 모든 장소에 존재하는 어둠을 타파하게 되리라.
7-13) 若燈能自照 亦能照於彼 暗亦應自暗 亦能暗於彼
만일 등불이 능히 스스로도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추는 것이라면 어둠도 역시 자기 스스로를 어둡게 하고 또 능히 다른 것도 어둡게 할 수 있으리라.
7-12) prad pa svapar tm nau sa prak ayate yadi/
tamo 'pi svapar tm nau ch dayi yatyasa ayam//
만일 등불이 自와 他 양자를 (비춰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면 어둠도 역시 의심의 여지 없이 自와 他 양자를 덮으리라.
7-14) 此生若未生 云何能自生 若生已自生 生已何用生
이 生이 만일 아직 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능히 스스로 생하겠는가? 만일 생하고 나서 스스로 생하는 것이라면 (이미) 생하고 났는데 (다시) 생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7-13) anutpanno 'yamutp da sv tm na janayetkatham/
athotpanno janayate j te ki janyate puna //
生하지 않은 이 생이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생할 것인가? 더우기 이미 생한 것이 (다시) 생하게 한다면 이미 생한 것인데 (거기서) 또다시 무엇이 생해질 것인가?
7-15) 生非生已生 亦非未生生 生時亦不生 去來中已答
생은 생하고 나서 생하는 것도 아니고 생하지 않은 것이 생하는 것도 아니다. 생하고 있는 중인 것 역시 생하지 않는다. (이는) 去來品에서 이미 답했다.
7-14) notpadyam na notpanna n nutpanna katha cana/
utpadyate tath khy ta gamyam nagat gatai //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것, (이미) 생한 것, (아직) 생하지 않은 것은 결코 생하지 않는다. 去時,已去,未去에 의해 파악되어진 것처럼….
7-16) 若謂生時生 是事已不成 云何衆緣合 爾時而得生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것(生時)이 생한다고 하는 것, 이런 일이 이미 성립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러 가지 인연이 모인 그때에 생할 수 있겠는가?
7-15) utpadyam namutpatt vida na kramate yad /
kathamutpadyam na tu prat tyotpattimucyate//
발생의 현장에서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것이 작용하고 있지 않을 때에 어떻게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것이 발생을 緣한다고 말해질 것인가?
7-17) 若法衆緣生 卽是寂滅性 是故生生時 是二俱寂滅
만일 법이 여러가지 인연에서 생한다면 이것은 곧 적멸한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生과 生時 이 두가지는 모두 적멸이다.
7-16) prat tya yadyadbhavati tattacch nta svabh vata /
tasm dutpadyam na ca ntamutpattireva ca//
緣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그것은 自性으로서는 적멸이다. 그러므로 生時도 적멸이고 또 생도 마찬가지다.
7-18) 若有未生法 說言有生者 此法先已有 更復何用生
만일 未生인 법이 있어서 생함이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면 그런 법은 이미 미리 존재했는데 또다시 생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
7-17) yadi ka cidanutpanno bh va sa vidyate kva cit/
utpadyeta sa ki tasminbh va utpadyate 'sati//
만일 무언가 未生인 존재가 어디엔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생하리라. (그러나) 그것이 없는데 어떤 존재가 생하겠느냐?
7-19) 若言生時生 是能有所生 何得更有生 而能生是生
만일 지금 生하고 있는 중인 (生時의) 生이 능히 그 生한 바를 갖는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또 다른 生이 있어서 그 生을 능히 生할 수 있겠느냐?
7-18) utpadyam namutp do yadi cotp dayatyayam/
utp dayettamutp damutp da katama puna //
만일 이 生이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것(=生時)을 생하게 하는 것이라면 또 다른 어떤 生이 그 生을 生하게 할 것인가?
7-20) 若謂更有生 生生則無窮 離生生有生 法皆能自生
만일 다시 생이 존재한다면 생의 생은 무한하게 된다. (그와 달리) 생의 생을 떠나서 생이 있다면 모든 법은 능히 스스로 생하게 된다.
7-19) anya utp daytyena yadyutp do 'navasthiti /
ath nutp da utpanna sarvamutpadyate tath //
다른 것(생)이 그것(생)을 생하게 한다면 생은 무한소급이 된다. 그런데 만일 無生으로 생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그와 같이 생해지리라.
7-21) 有法不應生 無亦不應生 有無亦不生 此義先已說
존재하고 있는 법은 생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법도 역시 생하지 않는다.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 법도 또한 생하지 않는다. 이런 이치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7-20) sata ca t vadutpattirasata ca na yujyate/
na sata c sata ceti p rvamevopap ditam//
존재하는 것에 있어서건 또 존재하지 않는 것에 있어서건 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에 있어서건 生(이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앞에서 그렇게 설명하였다.
7-22) 若諸法滅時 是時不應生 法若不滅者 終無有是事
만일 제법이 滅하는 중일 때라면 이때는 生할 수 없다. 법이 멸하지 않는다는 것, 끝내 그런 것은 없다.
7-21) nirudhyam nasyotpattirna bh vasyopapadyate/
ya c nirudhyam nastu sa bh vo nopapadyate//
지금 滅하고 있는 중인 존재에 있어서 生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멸하고 있는 중이 아닌 존재, 그런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7-23) 不住法不住 住法亦不住 住時亦不住 無生云何住
머물러 있지 않은 法은 머물지 않는다. 머물러 있는 법 역시 머물지 않는다. 머무르고 있는 중인 법 역시 머무르지 않는다. 생함이 없는데 어떻게 머물겠느냐?
7-22) na sthitabh vasti hatyasthitabh vo na ti hati/
na ti hati ti am na ko 'nutpanna ca ti hati//
(이미) 머물러 있던 존재는 머물지 않는다. (아직) 머물러 있지 않은 존재는 머물지 않는다. (지금) 머무르는 중인 존재는 머물지 않는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어떤 것이 머물겠느냐?
7-24) 若諸法滅時 是則不應住 法若不滅者 終無有是事
만일 諸法이 멸하고 있는 중이라면 이것들은 머무를 수 없다. (그렇다고) 법이 만일 멸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코 옳지 못하다.
7-23) sthitirnirudhyam nasya na bh vasyopapadyate/
ya c nirudhyam nastu sa bh vo nopapadyate//
지금 滅하고 있는 중인 존재에 있어서 머무름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滅하고 있는 중이 아닌 그런 존재는 성립하지 않는다.
7-25) 所有一切法 皆是老死相 終不見有法 離老死有住
존재하는 일체의 법은 모두 늙고 죽는 모습을 띄고 있다. 어떤 법이 있는데 그것이 늙고 죽음을 떠나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결코 볼 수가 없다.
7-24) jar mara adharme u sarvabh ve u sarvad /
ti hanti katame bh v ye jar mara a vin //
언제나 일체의 존재가 늙고 죽는 법인데 늙고 죽음이 없는 존재들이 어떤 것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7-26) 住不自相住 亦不異相住 如生不自生 亦不異相生
머무름은 스스로의 모습을 띄고 머무르는 것도 아니며 다른 모습을 띄고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生이 스스로 생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모습을 띄고 생하는 것이 아님과 같다.
7-25) sthity nyay sthite sth na tayaiva ca na yujyate/
utp dasya yathotp do n tman na par tman //
머무름에 있어서 머무름은 다른 머무름에 의해서건 그것(자신)에 의해서건 타당하지 않다. 이는 마치 생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다른 것에 의해서도 생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7-27) 法已滅不滅 未滅亦不滅 滅時亦不滅 無生何有滅
(어떤) 法이 이미 멸했다면 (그것이 다시) 멸하지 않는다.아직 멸하지 않았어도 멸하지 않는다. 지금 멸하고 있는 중인 것도 멸하지 않는다. 生이 없는데 어떻게 滅이 있겠느냐?
7-26) nirudhyate n niruddha na niruddha nirudhyate/
tath pi nirudhyam na kimaj ta nirudhyate//
(아직) 멸하지 않은 것은 멸하지 않는다. (이미) 멸한 것은 멸하지 않는다.(지금) 멸하고 있는 중인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어떤 無生의 것이 멸하겠느냐?
7-28) 法若有住者 是則不應滅 法若不住者 是亦不應滅
법이 만일 머무르는 것이라면 이것은 멸할 수없다. 법이 만일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도 역시 멸하지 못하리라.
7-27) sthitasya t vadbh vasya nirodho nopapadyate/
n sthitasy pi bh vasya nirodha upapadyate//
머무르고 있는 그런 존재에 있어서 滅함은 성립하지 않는다. 머무르고 있지 않은 존재에 있어서도 역시 멸함은 성립하지 않는다.
7-29) 是法於是時 不於是時滅 是法於異時 不於異時滅
이 상황의 이 법은 이 상황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상황의 이 법은 그 다른 상황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7-28) tayaiv vasthay vasth na hi saiva nirudhyate/
anyay vasthay vasth na c nyaiva nirudhyate//
실로 그 어떤 상태는 결코 그 상태로 절멸되지 않는다. 또 어떤 다른 상태는 결코 다른 상태로 절멸되지 않는다.
7-30) 如一切諸法 生相不可得 以無生相故 卽亦無滅相
일체의 모든 법의 生하는 모습을 얻을 수 없듯이 生하는 모습이 없기에 滅하는 모습 역시 없다.
7-29) yadaiva sarvadharm mutp do nopapadyate/
tadaiva sarvadharm nirodho nopapadyate//
실로 일체법에 있어서 生이 성립하지 않을 때 그 때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일체법에 있어서 滅이 성립하지 않는다.
7-31) 若法是有者 是卽無有滅 不應於一法 而有有無相
만일 (어떤)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멸하지 않는다. 하나의 존재에 있음과 없음의 모습이 (함께) 있을 수는 없다.
7-30) sata ca t vadbh vasya nirodho nopapadyate/
ekatve na hi bh va ca n bh va copapadyate//
존재가 존재하는 한 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一性인 것에 존재와 비존재(라는 대립적인 두가지가 있음은)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7-32) 若法是無者 是卽無有滅 譬如第二頭 無故不可斷
만일 어떤 존재(法)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滅하지도 않는다. 비유하자면 마치 第二의 머리는 (아예)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과 같다.
7-31) asato 'pi na bh vasya nirodha upapadyate/
na dvit yasya irasa chedana vidyate yath //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치 第二의 머리가 잘라지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7-33) 法不自相滅 他相亦不滅 如自相不生 他相亦不生
존재는 자기 스스로의 모습이 멸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모습이 멸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스스로의 모습도 생하지 않고 다른 모습도 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7-32) na sv tman nirodho 'sti nirodho par tman /
utp dasya yathotp da n tman na par tman //
멸은 그 자체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다.멸은 다른 실체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생에 있어서 생이 그 자체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실체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닌 것처럼.
7-34) 生住滅不成 故無有有爲 有爲法無故 何得有無爲
生住滅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有爲는 있지 않다. 유위법이 없으므로 어떻게 無爲가 있을 수 있겠느냐?
7-33) utp dasthitibha g n masiddhern sti sa sk tam/
sa sk tasy prasiddhau ca katha setsyatyasa sk tam//
生住滅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有爲法은 없다.유위법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無爲法이 성립하겠느냐?
7-35) 如幻亦如夢 如乾달婆城 所說生住滅 其相亦如是
幻과 같고 꿈과 같고 신기루 같다. 앞서 말한 生住滅은 그 모습이 역시 이와 같다.
7-34) yath m y yath svapno gandharvanagara yath /
tathotp dastath sth na tath bha ga ud h tam//
마치 환상같고 꿈같고 신기루같다고 생함과 머무름과 멸함이 각각 그와 같이 설명되었다.
第8 觀作作者品(12偈) 행위와 행위자에 대한 관찰
karamak rakapar k n m ama prakara am 행위와 행위자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8장(13게)
8-1) 決定有作者 不作決定業 決定無作者 不作無定業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자라면 결정적인 행위를 짓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도 결정적이지 않은 행위를 짓지 못한다.
8-1) sadbh ta k raka karma sadbh ta na karotyayam/
k rako n pyasadbh ta karm sadbh tam hate//
실재하는 행위자 그것은 실재하는 행위를 행하지 못한다.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도 역시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시도하지 못한다.
8-2) 決定業無作 是業無作者 定作者無作 作者亦無業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에는 작용도 없고 행위자도 없다.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자에게는 작용도 없고 행위도 없다.
8-2) sadbh tasya kriy n sti karma ca sy dakart kam/
sadbh tasya kriy n sti kart ca sy dakarmaka //
실재로 존재하는 것(행위)에 있어서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 행위는 행위자가 없는 존재이리라. 실재로 존재하는 것(행위자)에 있어서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 행위자는 행위 없는 존재이리라.
8-3) 若定有作者 亦定有作業 作者及作業 卽墮於無因
만일 행위자도 결정적으로 존재하고 행위도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면 행위자와 행위는 無因論에 떨어진다.
8-3) karoti yadyasadbh to 'sadbh ta karma k raka /
ahetuka bhavetkarma kart c hetuko bhavet//
만일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가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한다면 행위는 無因의 것이 되리라.또 행위자도 無因의 것이 되리라.
8-4) 若墮於無因 則無因無果 無作無作者 無所用作法
만일 無因論에 떨어진다면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으며 작용도 없고 행위자도 없고 행위도 없게 된다.
8-4) het vasati k rya ca k ra a ca na vidyate/
tadabh ve kriy kart kara a ca na vidyate//
원인이 없다면 행위의 결과도 행위의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작용도 행위자도 수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8-5) 若無作等法 則無有罪福 罪福等無故 罪福報亦無
만일 작용등의 법이 없다면 죄나 복(등의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죄나 복(등의 법)이 없기에 죄나 복의 과보도 없다.
8-5) dharm dharmau na vidyete kriy d n masa bhave/
dharme c satyadharme ca phala tajja na vidyate//
작용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法과 非法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법과 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生한 과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8-6) 若無罪福報 亦無有涅槃 諸可有所作 皆空無有果
만일 죄와 복의 과보가 없다면 열반도 역시 없다. 또 있을 수 있는 모든 작용도 모두 空하여 그 결과가 없다.
8-6) phale 'sati na mok ya na svarg yopapadyate/
m rga sarvakriy ca nairarthakya prasajyate//
과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해탈을 위한, 昇天을 위한 道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일체의 작용들이 무의미하다는 오류에 빠진다.
8-7) 作者定不定 不能作二業 有無相違故 一處則無二
결정적으로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두가지 행위를 할 수 없다. 有와 無가 서로 위배되므로 한 곳에 (그 有와 無의)두가지는 없다.
8-7) k raka sadasadbh ta sadasatkurute na tat/
parasparaviruddha hi sacc saccaikata kuta //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가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는 것, 그것은 옳지 않다. 서로 상반되는 <존재>와 <비존재>가 실로 어떻게 한 곳에서 (있을 수 있는 것)일까?
8-8) 有不能作無 無不能作有 若有作作者 其過如先說
有가 無를 지을 수 없고 무가 유를 지을 수 없다. 만일 행위와 행위자가 있다면 그 과실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8-8) sat ca kriyate n sann sat kriyate ca sat/
kartr sarve prasajyante do statra ta eva hi//
행위자의 有에 의해 無가 지어지지 않고 또 행위자의 無에 의해 有가 지어지지 않는다.왜냐하면 그 모든 곳에서 틀림없이 그런 과실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8-9) 作者不作定 亦不作不定 及定不定業 其過如先說
행위자는 결정적이거나 결정적이지 않거나 결정적이면서 결정적이지 않은 행위를 짓지 못한다. 그 과실은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다.
8-9) n sadbh ta na sadbh ta sadasadbh tameva v /
karoti k raka karma p rvoktaireva hetubhi //
실재하는 행위자가 실재하지 않는 행위 또는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실로 행하지 못한다. 이는 실로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이다.
8-10) n sadbh to 'pi sadbh ta sadasadbh tameva v /
karoti k raka karma p rvoktaireva hetubhi //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도 실재하는 행위 또는 실재하며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행하지 못한다. 이는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이다.
8-10) 作者定不定 亦定亦不定 不能作於業 其過如先說
행위자가 실재하건 실재하지 않건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건 행위를 행할 수 없다. 그 과오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8-11) karoti sadasadbh to na sann sacca k raka /
karma tattu vij n y tp rvoktaireva hetubhi //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행위를 행하지 않는다.그런데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이유에 의해 이해하리라.
8-11) 因業有作者 因作者有業 成業義如是 更無有餘事
행위로 인하여 행위자가 존재하고 행위자로 인하여 행위가 존재한다. 행위가 이룩되는 이치는 이와 같아서 다시 어떤 다른 일은 없다.
8-12) prat tya k raka karma ta prat tya ca k rakam/
karma pravartate n nyatpa y ma siddhik ra am//
행위자는 행위에 緣하며 행위는 그 행위자에 緣하여 일어난다. 우리들은 그것 이외의 다른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원인의 성립을 보지 못한다.
8-12) 如破作作者 受受者亦爾 及一切諸法 亦應如是破
행위와 행위자를 논파하듯이 取와 取者도 마찬가지다. 또 일체의 존재도 역시 응당 이와 같이 논파해야 하리라.
8-13) eva vidy dup d na vyutsarg diti karma a /
kartu ca karmakart bhy e n bh v n vibh vayet//
이와 마찬가지로 取에 있어서도 행위와 행위자가 타파된다고 알지어다. 행위와 행위자에 의해서 나머지 존재들을 고찰하거라.
第9 觀本住品(12偈) 근본주체에 대한 관찰
p rvapar k n ma navama prakara am 先行者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9장(12게)
9-1) 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誰有如是事 是則名本住
눈과 귀 따위의 모든 감각기관과 苦,樂 따위의 모든 존재는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있는 바 그것을 바로 本住(근본주체)라고 부른다.
9-1) dar ana rava d ni vedan d ni c pyatha/
bhavanti yasya pr gebhya so 'st tyeke vadantyuta//
무릇 보는 작용, 듣는 작용 등과 감수 작용등이 속하여 존재하는 것, 그것은 先行하여 존재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說한다.
9-2) 若無有本住 誰有眼等法 以是故當知 先已有本住
만일 本住(근본주체)가 없다면 눈 따위의 法을 소유한 놈은 누구이겠는가? 그러므로 미리 本住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9-2) katha hyavidyam nasya dar an di bhavi yati/
bh vasya tasm tpr gebhya so 'sti bh vo vyavasthita //
왜냐하면 지금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 있어서 <보는 작용>등이 도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확립되어 있는 그 존재가 그것들에 先行하여 존재한다.
9-3) 若離眼等法 及苦樂等法 先有本住者 以何而可知
만일 눈 따위의 존재와 苦,樂 따위의 존재를 떠나서 미리 本住(근본주체)가 존재한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겠느냐?
9-3) dar ana rava dibhyo vedan dibhya eva ca/
ya pr gvyavasthito bh va kena praj apyate 'tha sa //
보는 작용 듣는 작용 등,또 感受 작용 등에 先行하여 확립되어 있는 존재, 그것은 그러면 어떻게 認知되겠는가?
9-4) 若離眼耳等 而有本住者 亦應離本住 而有眼耳等
만일 눈이나 귀 등을 떠나서 本住가 존재한다면 응당 本住를 떠나서 눈이나 귀 등도 존재하리라.
9-4) vin pi dar an d ni yadi c sau vyavasthita /
am nyapi bhavi yanti vin tena na sa aya //
만일 보는 작용 따위 없이도 그것(=本住)이 확립되어 있다면 그것들(=보는 작용 따위) 역시 그것(=本住) 없이 존재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다.
9-5) 以法知有人 以人知有法 離法何有人 離人何有法
法(=사람의 구성요소)이 있음으로 인하여 사람이 있음을 안다. 사람이 있음으로 인하여 법이 있음을 안다. 법을 떠나서 어찌 사람이 있겠으며 사람을 떠나서 어찌 법이 있겠는가?
9-5) ajyate kena cit ka cit ki citkena cidajyate/
kuta ki cidvin ka citki citka cidvin kuta //
무엇인가에 의해 누구인가가 표시되며 누구인가에 의해 무엇인가가 표시된다. 어떻게 무엇인가가 없이 누구인가가 있겠으며 어떻게 누구인가가 없이 무엇인가가 있겠는가?
9-6) 一切眼等根 實無有本住 眼耳等諸根 異相而分別
눈 따위의 모든 감각기관에 실로 그 本住는 없다. 눈이나 귀 따위의 모든 감각기관은 그 모습을 달리하여 분별된다.
9-6) sarvebhyo dar an dibhya ka citp rvo na vidyate/
ajyate dar an d n manyena punaranyad //
보는 작용등 일체의 것 배후에 그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더우기 보는 작용 등은 (그 각각이) 다르다는 점에 의해, (그 작용하는 시기가) 다른 때라는 점에 의해 (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9-7) 若眼等諸根 無有本住者 眼等一一根 云何能知塵
만일 눈 따위의 감각기관 모두가 本住를 갖지 않는다면 눈 따위의 감각기관 각각이 어떻게 능히 대상을 지각하겠는가?
9-7) sarvebhyo dar an dibhyo yadi p rvo na vidyate/
ekaikasm tkatha p rvo dar an de sa vidyate//
만일 보는 작용 따위 모두에 선행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는 작용 따위의 각각에 선행하는 것, 그것이 존재하겠는가?
9-8) 見者卽聞者 聞者卽受者 如是等諸根 則應有本住
보는 자가 듣는 자이고 듣는 자가 감수하는 자라면 이런 여러 감각기관은 응당 本住를 가지리라.
9-8) dra sa eva sa rot sa eva yadi vedaka /
ekaikasm dbhavetp rvam eva caitanna yujyate//
만일 그가 바로 보는 자이고 그가 바로 듣는 자이고 그가 바로 감수하는 자이라면 각각의 것보다 이전의 그 무엇이 존재하리라. 그러나 그것은 그런 식으로 타당하지 않다.
9-9) 若見聞各異 受者亦各異 見時亦應聞 如是則神多
만일 보는 것과 듣는 것이 서로 다르고 감수자도 역시 다르다면 볼 때도 응당 들어야 하리라. 이렇다면 神我는 여러개가 된다.
9-9) dra nya eva rot nyo vedako 'nya punaryadi/
sati sy ddra ari rot bahutva c tman bhavet//
그런데 만일 보는 자도 따로 있고 듣는 자도 따로 있고 감수하는 자도 따로 있다면 보는 자가 있을 때 듣는 자가 있겠는가? 또 아뜨만이 여러 개가 되리라.
9-10) 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所從生諸大 彼大亦無神
눈과 귀 따위의 모든 지각기관과 苦,樂 등, 그것들이 비롯하는 여러 大들(=四大) 그 大에도 역시 神我는 없다.
9-10) dar ana rava d ni vedan d ni c pyatha/
bhavanti yebhyaste ve a bh te vapi na vidyate//
그런데 보는 작용, 듣는 작용과 感受 작용 등이 비롯되어 존재하는 그 大種 (=四大)들에도 역시 이것(=아뜨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9-11) 若眼耳等根 苦樂等諸法 無有本住者 眼等亦應無
만일 눈이나 귀 등의 감각기관과 苦, 樂 등의 모든 법이 本住를 갖지 않는다면 눈等도 역시 응당 없으리라.
9-11) dar ana rava d ni vedan d ni c pyatha/
na vidyate cedyasya sa na vidyanta im nyapi//
그런데 보는 작용이나 듣는 작용 따위 그리고 감수 작용 등이 속해 있는 그것(=본주)이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들(=보는 작용等) 역시 존재하지 않으리라.
9-12) 眼等無本住 今後亦復無 以三世無故 無有無分別
눈 따위에는 本住는 없다. 지금이나 나중에도 역시 다시 없다. 三世에 없으므로 있다거나 없다는 분별도 없다.
9-12) pr k ca yo dar an dibhya s prata cordhvameva ca/
na vidyate 'sti n st ti niv tt statra kalpan //
보는 작용 따위 以前도 동시도 나중도 존재하지 않는 그것(=本住)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분별들은 여기서 사라진다.
第10 觀燃可燃品(16게) 불과 연료에 대한 관찰
agn ndhanapar k n ma da ama prakara am 불과 연료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0장(16게)
10-1) 若燃是可燃 作作者則一 若燃異可燃 離可燃有燃
만일 불이 그대로 연료라면 행위와 행위자는 동일하리라. 만일 불이 연료와 다르다면 연료 없이도 불이 있으리라.
10-1) yadindhana sa cedagnirekatva kart karma o /
anya cedindhan dagnirindhan dapy te bhavet//
만일 연료인 것, 그것이 불이라면 행위자와 행위가 동일성의 것으로 된다. (반대로) 만일 불이 연료와 다르다면 (불은) 연료 없이도 존재하리라.
10-2) 如是常應燃 不因可燃生 則無燃火功 亦名無作火
이와 같다면 항상 타올라야 하리니 연료로 인해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불타게 하는 공능도 없는 꼴이 되며 짓지도 않은 불이라고 이름하게도 된다.
10-2) nityaprad pta eva sy daprad panahetuka /
punar rambhavaiyartyameva c karmaka sati//
실로 영원히 타오르게 되며 타오름의 원인이 되는 것도 없게 되리라. 더우기 (점화의) 시작이 헛수고가 될 테니 이와 같다면 행위도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
10-3) 燃不待可燃 則不從緣生 火若常燃者 人功則應空
불이 연료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인연에서 생하지도 않는다. 불이 만일 항상 타고 있는 것이라면 사람의 (불 지피는) 행위도 응당 공허하게 되리라.
10-3) paratra nirapek atv daprad panahetuka /
punar rambhavaiyarthya nityad pta prasajyate//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타오름은 원인 없는 것이 된다. 더우기 항상 탄다면 (점화의) 시작이 헛수고가 되는 과실에 빠진다.
10-4) 若汝謂燃時 名爲可燃者 爾時但有薪 何物燃可燃
만일 그대가 지금 타오르고 있는 중인 것을 연료라고 부른다면 그런 때는 다만 장작만 존재하는데 무엇이 연료를 태우겠느냐?
10-4) tatraitasm didhyam namindhana bhavat ti cet/
kenedhyat mindhana tatt vanm tramida yad //
10-5) 若異則不至 不至則不燒 不燒則不滅 不滅則常住
만일 다르다면 도달하지 못한다.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태우지도 못한다. 태우지 않으면 소멸하지도 않는다. 소멸하지 않는다면 常住하리라.
10-5) anyo na pr psyate 'pr pto na dhak yatyadahan puna /
na nirv syatyanirv a sth syate v svali gav n//
(서로) 다르다면 도달하지 못한다. 도달하지 앟는 것은 타버리지 못하리라. 더우기 타지 않은 것은 소멸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소멸하지 않은 것은 自相을 갖고 머물러 있으리라.
10-6) 燃如可燃異 而能至可燃 如此至彼人 彼人至此人
불이 연료와 다르면서도 능히 연료에 도달하는 것은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도달하고 저 사람이 이 사람에게 도달하는 것과 같다.
10-6) anya evendhan dagnirindhana pr pnuy dyadi/
str sa pr pnoti puru a puru a ca striya yath //
만일 연료와 다른 불이 (있어서 그것이) 연료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여자가 남자에게 도달하고 또 남자가 여자에게 도달하는 것과 같다.
10-7) 若謂燃可燃 二俱相離者 如是燃則能 至於彼可燃
만일 불과 연료 이 두가지가 모두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불은 그 연료에 능히 도달할 수 있으리라.
10-7) anya evendhan dagnirindhana k mam pnuy t/
agn ndhane yadi sy t manyonyena tirask te//
실로 연료와 다른 불이 연료에 기꺼이 도달하리라. 만일 불과 연료가 서로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라면….
10-8) 若因可燃燃 因燃有可燃 先定有何法 而有燃可燃
만일 연료로 인해 불이 있고 불로 인해 연료가 있는 것이라면 먼저 어떤 것이 정해져 있어서 불과 연료를 존재하게 하겠느냐?
10-8) yad ndhanamapek y gnirapek y gni yad ndhanam/
kataratp rvani panna yadapek y gnirindhanam//
만일 불이 연료에 의존해 있고 연료가 불에 의존해 있다면 그 둘 중의 어느 쪽이 미리 성취되어 있어서 불이나 연료가 의존하게 되겠느냐?
10-9) 若因可燃燃 則燃成復成 是謂可燃中 則謂無有燃
만일 연료로 인해 불이 존재한다면 불이 성립되고 나서 다시 성립되는 꼴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연료중에 불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10-9) yad ndhanamapek y gniragne siddhasya s dhanam/
eva sat ndhana c pi bhavi yati niragnikam//
만일 불이 연료에 의존한다면 성립된 불이 (또다시) 성립(되는 꼴이)된다. 이와 같은 존재라면 불없는 연료 역시 존재하리라.
10-10) 若法因待成 是法還成待 今則無因待 亦無所成法
만일 어떤 존재가 의존적으로 성립한다면 이 존재가 거꾸로 의존 받음이 성립되리니 지금은 의존함도 없고 성립될 존재도 없다.
10-10) yo 'pek ya sidhyate bh vastamev pek ya sidhyati/
yadi yo 'pek itavya sa sidhyat kamapek ya ka //
만일 의존되어질 것, 그것이 무엇인가에 의존하여 성립되는 그런 존재, 실로 그런 것(=존재)에 의존하여 성립한다면 무엇이 무엇에 의존하여 성립할 것인가?
10-11) 若法有待成 未成云何待 若成已有待 成已何用待
만일 어떤 존재가 의존하여 성립되는 것이라면 아직 성립되지 않은 것에는 어떻게 의존할 수 있겠는가? 만일 성립되고 나서 의존하는 것이라면 이미 성립이 끝났는데 의존할 필요가 무엇 있겠는가?
10-11) yo 'pek ya sidhyate bh va so 'siddho 'pek ate katham/
ath pyapek ate siddhastvapek sya na yujyate//
(무엇인가에) 의존하여 성립된 그런 존재 그것이 아직 성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이미 성립된 것이 (다시) 의존한다는 것도 의존에 있어서는 타당치 않다.
10-12) 因可燃無燃 不因亦無燃 因燃無可燃 不因無可燃
연료에 의존한 불은 없다. (연료에) 의존하지 않아도 불이 없다. 불에 의존한 연료는 없다. (불에) 의존하지 않아도 연료는 없다.
10-12) apek yendhanamagnirna n napek y gnirindhanam/
apek yendhanamagni na n napek y gnimindhanam//
불은 연료에 의존하지 않는다.불은 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연료는 불에 의존하지 않는다. 연료는 불에 의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10-13) 燃不餘處來 燃處亦無燃 可燃亦如是 餘如去來說
불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불타는 곳에도 불은 없다. 연료도 역시 이와 같으니 나머지는 去,來에 대한 설명과 같다.
10-13) gacchatyanyato n gnirindhane 'gnirna vidyate/
atrendhane e amukta gamyam nagat gatai //
불은 다른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불은 연료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연료에 있어서 다른 것들은 去時,已去,未去에 의해 설명되었다.
10-14) 可燃卽非燃 離可燃無燃 燃無有可燃 燃中無可燃 可燃中無燃
연료는 불이 아니다. 연료를 떠나서 불은 없다. 불은 연료를 갖지 않는다. 불 속에 연료는 없다. 연료 속에도 불은 없다.
10-14) indhana punaragnirna n gniranyatra cendhan t/
n gnirindhanav nn gn vindhan ni na te u sa //
더우기 불은 연료가 아니다. 또 불은 연료와 다른 곳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불은 연료를 가진 것이 아니다. 불에 연료들이 있지도 않고 그것(=연료)에 그것(=불)이 있지도 않다.
10-15) 以燃可燃法 說受受者法 及以說甁衣 一切等諸法
불과 연료라는 존재에 의해 감수 작용과 감수하는 주체를 설명하였다. 또 병이나 옷감 및 일체 모든 존재를 설명함으로써…
10-15) agn ndhan bhy vy khy ta tmop d nayo krama /
sarvo nirva e e a s rdha gha apa dibhi //
불과 연료의 양자에 의해 아뜨만과 취착의 모든 절차가 남김없이 설명되었다. 병과 옷감 따위들과 더불어…
10-16) 若人說有我 諸法各異相 當知如是人 不得佛法味
만일 어떤 사람이 자아가 있고 모든 존재는 서로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런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의 묘미를 포착하지 못한 것임을 마땅히 알지어다.
10-16) tmana ca satattva ye bh v n ca p thak p thak/
nirdi anti na t nmanye sanasy rthakovid n//
어떤 사람들은 아뜨만의 참된 성질과 사물들의 개별성을 말하는데 나는 그들이 교법의 의미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第11 觀本際品(8偈) 根本 限界에 대한 관찰
p rv parako ipar ik n maik da ama prakara am 前後의 窮極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4장(8게)
11-1) 大聖之所說 本際不可得 生死無有始 亦復無有終
大聖께서는 한계(=本際)는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바 生死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11-1) p rv praj yate ko irnetyuv ca mah muni /
sa s ro 'navar gro hi n sy dirn pi pa cimam//
이전의 끝(=시작점)은 인식되지 않는다고 大聖者께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윤회는 始終이 없으니 그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이다.
11-2) 若無有始終 中當云何有 是故於此中 先後共亦無
만일 시직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중간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여기서 先도 後도 同時도 역시 없다.
11-2) naiv gra n vara yasya tasya madhya kuto bhavet/
tasm nn tropapadyante p rv parasahakram //
실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에 있어서 그것의 중간은 어디에 존재하리요. 그러므로 여기서 前과 나중과 同時라는 여러가지 체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11-3) 若使先有生 後有老死者 不老死有生 不生有老死
만일 생이 먼저 존재하고 老死가 나중에 존재한다면 老死 없이도 生이 있는 꼴이 되고, 生 없이도 老死가 있는 꼴이 된다.
11-3) p rva j tiryadi bhavejjar mara amuttaram/
nirjar mara j tirbhavejj yeta c m ta //
만일 生이 앞선 것이고 老死가 나중의 것이라면 老死 없는 生이 되리라. 또 죽지도 않은 것이 生하리라.
11-4) 若先有老死 而後有生者 是則爲無因 不生有老死
만일 老死가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生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無因인 꼴이 되고 生하지 않고 老死가 존재하는 꼴이 된다.
11-4) pa c jj tiryadi bhavejjar mara am dita /
ahetukamaj tasya sy jjar mara a katham//
만일 生이 나중이고 老死가 먼저라면 無因이며 生이 없는 老死가 어떻게 존재하리요?
11-5) 生及於老死 不得一時共 生時則有死 是二俱無因
生과 老死는 동시에 함께 존재할 수 없다. (함께 존재한다면) 生하는 순간에 사망하게 되고 이 (生과 死) 兩者 모두 無因인 꼴이 된다.
11-5) na jar mara enaiva j ti ca saha yujyate/
mriyeta j yam na ca sy cc hetukatobhayo //
실로 老死와 生이 동시적이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것이 죽어버리게 될 것이며 또 그 兩者가 無因의 존재가 될 것이다.
11-6) 若使初後共 是皆不然者 何故而戱論 謂有生老死
만일 먼저 있다거나 나중에 있다거나 함께한다는 것이 전혀 옳지 않다면 어째서 生이나 老死가 존재한다고 지껄이며 戱論하는 것이냐?
11-6) yatra na prabhavantyete p rv parasahakram /
prapa cayanti t j ti tajjar mara a ca kim//
前이라거나 後라거나 同時라는 여러 가지 체계들이 성립되지 않는 상황인데 그런 生과 그런 老死에 대해 戱論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11-7) 諸所有因果 相及可相法 受及受者等 所有一切法
11-8) 非但於生死 本際不可得 如是一切法 本際皆亦無
존재하는 모든 因과 果, 相과 相을 띈 존재, 感受작용과 感受者 등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은
단지 生死뿐만이 아니라, 그 本際를 얻을 수 없다. 이처럼 일체의 것 역시 모두 그 本際가 없다.
11-7) k rya ca k ra a caiva lak ya lak a ameva ca/
vedan vedaka caiva santyarth ye ca ke cana//
11-8) p rv na vidyate ko i sa s rasya na keval!am/
sarve mapi bh v n p rv ko na vidyate//
결과와 원인, 특징을 띈 것과 특징, 感受작용과 感受者같은 事體들은 그 어떤 것이건,
단지 윤회에 있어서만 그 궁극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 있어서도 그 궁극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第12 觀苦品(10偈) 苦에 대한 관찰
du khapar ik n ma dv da ama prakara am 苦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2장(10게)
12-1) 自作及他作 共作無因作 如是說諸苦 於果則不然
스스로 짓거나 남이 짓거나 함께 짓거나 無因으로 짓는다는 등과 같이 갖가지 苦를 說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에 있어서는 옳지 못하다.
12-1) svaya k ta parak ta dv bhy k tamahetukam/
du khamityeka icchanti tacca k rya na yujyate//
어떤 사람들은 苦를 스스로 짓는다, 남이 짓는다, (스스로와 남의) 兩者가 짓는다, 無因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것(苦)이 지어지리라는 것은 불합리하다.
12-2) 苦若自作者 則不從緣生 因有此陰故 而有彼陰生
苦가 만일 스스로 지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緣으로부터 발생하지 말아야 하리라. (緣인) 이 陰(=蘊)이 있음으로 인하여 (苦果인) 저 陰(=蘊)이 발생하는 것이다.
12-2) svaya k ta yadi bhavetprat tya na tato bhavet/
skandh nim nam skandh sa bhavanti prat tya hi//
만일 스스로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무엇인가를 緣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로 이 여러 蘊들(五蘊)을 緣하여 저 여러 蘊들(五蘊)이 발생하는 것인데…
12-3) 若謂此五陰 異彼五陰者 如是則應言 從他而作苦
만일 (因인) 이 五陰이 (果인) 저 五陰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렇다면 다른 것으로부터 (果로서의 오음인) 苦가 지어진다고 말해야 하리라.
12-3) yadyam bhya ime 'nye syurebhyo v m pare yadi/
bhavetparak ta du kha parairebhiram k t //
만일 이것들이 저것들과 다르다면 또는 저것들이 이것들과 별개의 것이라면 苦는 어떤 다른 것이 짓는 꼴이 될 것이며 별개의 것인 이것에 의해 저것이 지어지리라.
12-4) 若人自作苦 離苦何有人 而謂於彼人 而能自作苦
만일 사람이 스스로 苦를 짓는 것이라면 苦와 관계없는 어떻게 사람이 있겠으며 그 사람이 능히 스스로 苦를 짓는다고 말하겠느냐?
12-4) svapudgalak ta du kha yadi du kha punarvin /
svapudgala sa katamo yena du kha svaya k tam//
만일 苦가 個體 스스로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면, 그렇다면 苦를 스스로 짓는 어떤 個體가 苦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겠는가?
12-5) 若苦他人作 而與此人者 若當離於苦 何有此人受
만일 苦가 다른 사람이 지어서 이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苦를 떠난 이 사람이 어떻게 존재해서 그것을 받겠는가?
12-5) parapudgalaja du kha yadi yasmai prad yate/
pare a k tv taddu kha sa du khena vin kuta //
만일 다른 個體가 生한 苦라면 다른 놈에 의해 지어지고서 그 苦가 <그>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그>는 苦가 없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12-6) 苦若彼人作 持與此人者 離苦何有人 而能授於此
苦가 만일 저 사람이 지어 그것을 갖고 이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면 苦를 떠나서 어떻게 (짓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 능히 이 사람에게 주는 것이겠느냐?
12-6) parapudgalaja du kha yadi ka parapudgala /
vin du khena ya k tv parasmai prahi oti tat//
만일 다른 個體가 생한 苦라면 苦없는 상태에서 (苦를 生하는) 작업을 해서 다른 個體에게 그것(=苦)을 떠넘기는 다른 個體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
12-7) 自作若不成 云何彼作苦 若彼人作苦 卽亦名自作
스스로 짓는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놈이 짓겠느냐? 만일 저 사람이 苦를 짓는다면 (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곧 스스로 짓는다고 부른다.
12-7) svaya k tasy prasiddherdu kha parak ta kuta /
paro hi du kha yatkury ttattasya sy tsvaya k tam//
스스로 짓는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다른 놈이 짓는 苦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 왜냐하면 다른 놈이 짓는 苦, 그것은 그 (다른) 놈에 있어서는 스스로 짓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2-8) 苦不名自作 法不自作法 彼無有自體 何有彼作苦
苦를 (苦가) 스스로 짓는다고 말하지 못한다. 사물은 스스로 사물을 짓지 않는다. (다른 것인) 저 놈이 그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저 놈이 苦를 짓겠는가?
12-8) na t vatsvak ta du kha na hi tenaiva tatk tam/
paro n tmak ta cetsy ddu kha parak ta katham//
우선, 苦는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자신)에 의해 그것(자신)이 지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놈이 그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苦가 다른 것에 의해 지어지겠는가?
12-9) 若此彼苦成 應有共作苦 此彼尙無作 何況無因作
만일 이 놈과 저놈이 苦를 성립시킨다면 응당 함께 짓는 苦가 존재해야 하리라. 이 놈과 저 놈도 오히려 짓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물며 無因으로 짓는 것이겠느냐?
12-9) sy dubh bhy k ta du kha sy dekaikak ta yadi/
par k r svaya k ra du khamahetuka kuta //
만일 (自와 他) 각각이 짓는 苦라면 兩者가 함께 짓는 것이 되리라.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또) 다른 것이 짓지 않고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닌 苦인데 어떻게 無因의 것이겠느냐?
12-10) 非但說於苦 四種義不成 一切外萬物 四義亦不成
단지 苦에 있어서만 네가지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일체 만물도 네가지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다.
12-10) na keval!a hi du khasya c turvidhya na vidyate/
b hy n mapi bh v n c turvidhya na vidyate//
단지 苦에 있어서만 四種의 知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외계에 있는 존재들에 있어서도 역시 四種의 知가 존재하지 않는다.
第13 觀行品(9偈) 行에 대한 관찰
samskarapar ik n ma trayoda ama prakara am 형성작용(行)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3장(8게)
13-1) 如佛經所說 虛광妄取相 諸行妄取故 是名爲虛광
佛經에서 말한 바와 같이 虛광한 것은 허망하게 取한 相이다. 모든 行은 허망하게 취해진 것들이라서 虛광이라고 부른다.
13-1) tanm mo adharma yadbhagav nityabh ata/
sarve ca mo adharm a sa sk r stena te m //
거짓된 사물, 그것은 헛된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디서건 <형성 작용(行)>들은 기만적인 성질을 갖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것들(行)은 헛되다.
13-2) 虛광妄取者 是中何所取 佛說如是事 欲以示空義
虛광하여 허망하게 취하는 것, 이 중에서 취할 것은 무엇이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이런 것을 설해 주심으로써 空의 이치를 보이고자 하셨다.
13-2) tanm mo adharma yadyadi ki tatra mu yate/
etatt kta bhagavat nyat parid pakam//
거짓된 존재들, 그것들이 헛된 것이라면 거기서 무엇이 홀리겠느냐? 그런데 세존에 의해 이것이 설해져서 空性이 훤히 드러났다.
13-3) 諸法有異故 知皆是無性 無性法亦無 一切法空故
모든 존재는 달라지기 때문에 그 모두가 無自性임을 알아라. 無自性인 존재도 역시 없다. 일체의 존재가 空하기 때문이다.
13-3) bh v n ni svabh vatvamanyath bh vadar an t/
asvabh vo bh vo n sti bh v n nyat yata //
모든 존재는 無自性性이다. 존재가 변모함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無自性인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존재가 空하기 때문이다.
13-4) 諸法若無性 云何說영兒 乃至於老年 而有種種異
만일 모든 존재가 그 自性이 없다면 어떻게 갓난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모해 간다고 說하겠느냐?
13-5) 若諸法有性 云何而得異 若諸法無性 云何而有異
만일 모든 존재가 그 自性이 있다면 어떻게 변화할 수 있겠느냐? 만일 모든 존재가 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화가 있겠느냐?
13-4) kasya sy danyath bh va svabh va cenna vidyate/
kasya sy danyath bh va svabh vo yadi vidyate//
만일 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물이 변모되겠느냐? 만일 自性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사물이 변모되겠느냐?
13-6) 是法則無異 異法亦無異 如壯不作老 老亦不作壯
같은 존재는 변화하지 않는다. 다른 존재도 역시 변화하지 않는다. 젊은이가 늙은이로 되지 못하고 늙은이가 늙은이로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13-5) tasyaiva n nyath bh vo n pyanyasyaiva yujyate/
yuv na j ryate yasm dyasm jj r o na j ryate//
존재는 바로 그것(=동일한 것)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것(이 변화 한다는 것)도 역시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젊은이가 늙어지지 못하고 늙은이도 늙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13-7) 若是法卽異 乳應卽是酪 離乳有何法 而能作於酪
만일 같은 존재가 변하는 것이라면 우유는 응당 야구르트이어야 하리라. 또 우유를 떠나서 그 어떤 존재가 있어서 능히 야구르트로 되겠느냐?
13-6) tasya cedanyath bh va k rameva bhaveddadhi/
k r danyasya kasya ciddadhibh vo bhavi yati//
만일 존재가 바로 그것(=같은 것)에서 변한다면 우유가 그대로 야구르트로 되리라. 또 (이와 반대로) 우유와 다른 그 어떤 것이 있어서 야구르트라는 존재로 될 것인가?
13-8) 若有不空法 則應有空法 實無不空法 何得有空法
만일 空하지 아니한 존재가 있다면 응당 空한 존재가 있어야 한다. 실제 空하지 아니한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空한 존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13-7) yadya nya bhavetki citsy cch nyamiti ki cana/
na ki cidastya nya ca kuta nya bhavi yati//
만일 空하지 아니한 그 무엇이 존재한다면 空한 그 무엇이 존재하리라. 그런데 空하지 아니한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空이 존재하겠는가?
13-9) 大聖說空法 爲離諸見故 若復見有空 諸佛所不化
위대한 성인께서는 갖가지 견해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空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空이 있다는 견해를 다시 갖는다면 (그런 자는) 어떤 부처님도 교화하지 못하신다.
13-8) nyat sarvad n prokt ni sara a jinai /
ye tu nyat d ist nas dhy n babh ire//
空性이란 일체의 見解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러 勝者들에 의해 교시되었다. 그러나 空性의 見解를 가진 사람들은 구제불능이라고 말씀하셨다.
第14 觀合品(8偈) 결합에 대한 관찰
sa saragapar ik n ma caturda ama prakara am 結合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4장(8게)
14-1) 見可見見者 是三各異方 如是三法異 終無有合時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 <보는 자> 이 셋은 서로 다른 데 있다. 이처럼 셋이 다르니 끝내 합하는 때가 없다.
14-1) dra avya dar ana dra tr yet ni dvi o dvi a /
sarva a ca na sa sargamanyonyena vrajantyuta//
<보이는 대상>, <보는 작용>, <보는 자> 이 三者는 두 개씩 두 개씩이건 한꺼번에건 서로 결합한 상태로 되지 않는다.
14-2) 染與於可染 染者亦復然 餘入餘煩惱 皆亦復如是
<탐욕>과 <탐욕의 대상>과 <탐욕을 내는 자>도 역시 그러하며 나머지 知覺領域(入處)과 나머지 번뇌도 모두 역시 그와 같다.
14-2) eva r ga ca rakta ca ra jan ya ca d yat m/
traidhena e kle ca e y yatan ni ca//
이와 마찬가지로 <탐욕>과 <탐욕을 내는 자>와 <탐욕의 대상>이 관찰되어져야 하며 餘他의 번뇌와 餘他의 入處들도 세 가지로… (관찰되어져야 한다).
14-3) 異法當有合 見等無有異 異相不成故 見等云何合
서로 다른 존재라면 마땅히 합하겠지만 <보는 작용>등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相이 성립하지 않는데 <보는 작용>등(의 세 가지 것)이 어떻게 합하겠느냐?
14-3) anyen nyasya sa sargastacc nyatva na vidyate/
dra avyaprabh t n yanna sa sarga vrajantyata //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다른 것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이는 대상>등(의 세 가지) 는 서로 다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합에 이르지 못한다.
14-4) 非但見等法 異相不可得 所有一切法 皆亦無異相
단지 <보는 작용>등의 존재만 서로 다른 相이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물 역시 다른 相이 없다.
14-4) na ca keval!amanyatva dra avy derna vidyate/
kasya citkena cits rdha n nyatvamupapadyate//
비단 <보이는 대상> 따위에 있어서 서로 다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에 있어서건 그 어떤 것과건 共히 서로 다름이 성립하지 않는다.
14-5) 異因異有異 異離異無異 若法從因出 是法不異因
다른 것은 다른 것으로 인해 다르다. 다른 것이 다른 것을 떠나면 다름이 없다. 만일 어떤 존재가 어떤 원인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이 존재는 그 원인과 다르지 않다.
14-5) anyadanyatprat ty nyann nyadanyad te 'nyata /
yatprat tya ca yattasm ttadanyannopapadyate//
다른 것은 다른 것을 緣하여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이 다른 것을 떠나서 다른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 또 어떤 것을 緣할 때 그것과 그것이 다름은 성립하지 않는다.
14-6) 若離從異異 應餘異有異 離從異無異 是故無有異
만일 (이쪽이 저쪽의) 다른 것을 떠나서 다르다면 응당 (저쪽의) 상대되는 다른 것은 (이쪽과 상관 없이) 다름이 있으리라. 그러나 다른 것을 떠나서는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다름은 없다.
14-6) yadyanyadanyadanyasm danyasm dapy te bhavet/
tadanyadanyadanyasm d te n sti ca n styata //
만일 어느 한 쪽과 다른 한 쪽이 서로 다르다면 상대방 없이도 그러하리라. 그 어느 한 쪽과 다른 한 쪽은 서로 상대방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14-7) 異中無異相 不異中亦無 無有異相故 則無此彼異
다른 것에는 다른 相은 없으며 다르지 않은 것에도 역시 없다. 다른 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것과 저것의 다름도 없다.
14-7) n nyasmin vidyate 'nyatvamananyasmin na vidyate/
avidyam ne c nyatve n styanyadv tadeva v //
다르다는 성품은 다른 것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르지 않은 것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르다는 성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이건 같은 것이건 존재하지 않는다.
14-8) 是法不自合 異法亦不合 合者及合時 合法亦皆無
동일한 존재는 스스로 합하지 않는다. 다른 존재도 역시 합하지 않는다. 합하는 놈과 합하는 순간과 합하는 존재도 역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14-8) na tena tasya sa sargo n nyen nyasya yujyate/
sa s jyam na sa s a sa sra ca na vidyate//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과 결합하는 것도, 또 다른 것이 다른 것과 결합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또 지금 결합되고 있는 중인 것, 이미 결합된 것, 결합하는 놈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第15 觀有無品(11게) 有와 無에 대한 관찰
svabh vapar ik n ma pa cada ama prakara am 自性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5장(11게)
15-1) 衆緣中有性 是事則不然 性從衆緣出 卽名爲作法
여러 인연 가운데 그 自性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못하다. 自性이 여러 인연에서 나온다면 지어진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15-1) na sa bhava svabh vasya yukta pratyayahetubhi /
hetupratyayasa bh ta svabh va k tako bhavet//
自性이 여러 因과 緣에 의해 生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因과 緣이 모여 생기는 自性은 作爲된 것이 되리라.
15-2) 性若是作者 云何有此義 性名爲無作 不待異法成
自性이 만일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떻게 말이 되겠느냐? 自性이란 지어지지 않고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된 것을 일컫는다.
15-2) svabh va k tako n ma bhavi yati puna katham/
ak trima svabh vo hi nirapek a paratra ca//
더우기 어째서 그야말로 自性이 만들어진 것이겠느냐? 왜냐하면 自性이란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또 다른 것에 의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5-3) 法若無自性 云何有他性 自性於他性 亦名爲他性
존재가 그 自性이 없다면 어떻게 他性이 있겠는가? 他性에 있어서 自性은 역시 他性이라고 부른다.
15-3) kuta svabh vasy bh ve parabh vo bhavi yati/
svabh va parabh vasya parabh vo hi kathyate//
自性이 없다면 어떻게 他性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다른 존재에 있어서의 自性은 他性이라고 불려지기 때문이다.
15-4) 離自性他性 何得更有法 若有自他性 諸法則得性
自性과 他性을 떠나서 어떻게 다시 사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自性과 他性이 존재한다면 모든 사물은 그 自性이 있을 수 있다.
15-4) svabh vaparabh v bhy m te bh va kuta puna /
svabh ve prabh ve v sati bh vo hi sidhyati//
더우기 自性과 他性 兩者를 떠나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왜냐하면 自性이나 他性이 존재할 때에 (비로서) 사물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15-5) 有若不成者 無云何有成 因有有法故 有壞名爲無
有가 만일 성립하지 않는다면 無가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有라는 法이 있기 때문에 有가 파괴될 수 있고 그것을 無라고 부른다.
15-5) bh vasya cedaprasiddhirabh vo naiva sidhyati/
bh vasya hyanyath bh vamabh va bruvate jan //
만일 존재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비존재도 실로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가 변화함을 사람들은 비존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15-6) 若人見有無 見自性他性 如是則不見 佛法眞實義
만일 有나 無를 보거나 自性이나 他性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佛法의 참된 意義를 보지 못한다.
15-6) svabh va parabh va ca bh va c bh vameva ca/
ye pa yanti na pa yanti te tattva buddha sane//
自性이나 他性, 존재나 비존재를 (있다고) 보는 사람들,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
15-7) 佛能滅有無 如化迦전延 經中之所說 離有亦離無
가전연을 교화하던 경전에서 설하신 바 有도 떠나있고 無도 역시 떠나있다고 하신 것과 같이 부처님은 능히 有와 無를 壞滅시키신다.
15-7) k ty yan vav de c st ti n st ti cobhayam/
prati iddha bhagavat bh v bh vavibh vin //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兩者는 까뜨야야나에게 내리신 설법에서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해 보여줌으로써 세존에 의해 부정되었다.
15-8) 若法實有性 後則不應異 性若有異相 是事則不然
만일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다시 변하지는 않아야 하리라. 만일 自性이 달라지는 모습을 띈다면 이것은 옳지 못하다.
15-8) yadyastitva prak ty sy nna bhavedasya n stit /
prak teranyath bh vo na hi j t papadyate//
만일 有가 근본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有)의 無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근본이 변화한다는 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15-9) 若法實有性 云何而可異 若法實無性 云何而可異
만일 사물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만일 사물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15-9) prak tau kasya c saty manyath tva bhavi yati/
prak tau kasya ca saty manyath tva bhavi yati//
本性이 존재한다면 무엇에 있어서 變異가 존재하겠는가? 本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있어서 變異가 존재하겠는가?
15-10) 定有則著常 定無則著斷 是故有智者 不應著有無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됨에 집착하는 것이고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斷滅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있다거나 없다는데 집착해서는 안된다.
15-10) ast ti vatagr ho n st tyucchedadar anam/
tasm dastitvan stitve n r yeta vicak a a //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常住에 대한 집착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斷滅的 견해이다. 그러므로 明晳한 者는 존재성이나 비존재성에 依據해서는 안된다.
15-11) 若法有定性 非無則是常 先有而今無 是則爲斷滅
만일 사물이 결정적인 자성을 가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恒常(되다는 말)이(되)고, 미리 존재하다가 지금은 없어졌다면 斷滅(했다는 말)이 된다.
15-11) asti yaddhi svabh vena na tann st ti vatam/
n st d n mabh tp rvamityuccheda prasajyate//
실로 自性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그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는다면 <常住함>(이라는 過失에 떨어지고),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은 <斷滅함>이라는 過失에 떨어진다.
第16 觀縛解品(10偈) 속박과 해탈에 대한 관찰
bandhanamok apar k n ma o a ama prakara am 속박과 해탈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6장(10게)
16-1) 諸行往來者 常不應往來 無常亦不應 衆生亦復然
諸行이 往來한다면 恒常되어도 往來할 수 없고 無常하여도 왕래할 수 없다. 중생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16-1) sa sk r sa saranti cenna nity sa saranti te/
sa saranti ca n nity sattve 'pye a sama krama //
만일 형성작용들(諸行)이 윤회한다면 그 (諸行)들은 항상된 것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며 無常한 것들이 윤회하는 것도 아니다. 중생에 있어서도 이것은 같은 절차를 밟는다.
16-2) 若衆生往來 陰界諸入中 五種求盡無 誰有往來者
만일 衆生이 往來한다면 五陰, 十二入, 十八界 중에서 다섯 가지로 추구해 보아도 (그런 個我는) 모두 존재하지 않는데 누가 往來하는 者이겠느냐?
16-2) pudgala sa sarati cetskandh yatanadh tu u/
pa cadh m gyam o 'sau n sti ka sa sari yati//
만일 個我가 윤회한다면 蘊, 處, 界 들에서 다섯 가지로 조사해 보아도 그것(=個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 윤회하겠는가?
16-3) 若從身至身 往來卽無身 若其無有身 則無有往來
만일 몸에서 몸으로 왕래한다면 몸이 없는 꼴이 된다. 그렇게 몸이 없다면 왕래도 없다.
16-3) up d n dup d na sa saran vibhavo bhavet/
vibhava c nup d na ka sa ki sa sari yati//
(하나의) 집착(取)으로부터 (다른) 집착(取)으로 윤회하는 자는 신체가 없는 자가 되리라. 신체가 없고 또 집착(取)이 없는 者는 어떤 者이겠는가? 또 그것이 어떻게 윤회하겠는가?
16-4) 諸行若滅者 是事終不然 衆生若滅者 是事亦不然
諸行이 만일 소멸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중생이 만일 소멸하는 것이라면 이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16-4) sa sk r na nirv a katha cidupapadyate/
sattvasy pi na nirv a katha cidupapadyate//
형성작용들(諸行)의 경우에 있어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중생에 있어서도 또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16-5) 諸行生滅相 不縛亦不解 衆生如先說 不縛亦不解
諸行의 生滅하는 모습은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는다. 중생도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는다.
16-5) na badhyante na mucyanta udayavyayadharmi a /
sa sk r p rvavatsattvo badhyate na na mucyate//
生과 滅의 성질을 갖추고 있는 것인 형성작용들(諸行)은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는다. 앞에서와 같이 중생도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는다.
16-6) 若身名爲縛 有身則不縛 無身亦不縛 於何而有縛
만일 몸을 속박이라 부른다면 몸이 있는 경우는 (그것이 다시) 속박되지 않고 몸이 없는 경우도 (아예) 속박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떠한 상태에 속박이 존재하겠는가?
16-6) bandhana cedup d na sop d no na badhyate/
badhyate n nup d na kimavastho 'tha badhyate//
만일 집착(取)이 속박이라면 집착(取)을 (이미) 갖고 있는 자는 속박되지 않고 (지금) 집착(取)이 없는 자는 속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태로 되는 것이 속박되는 것이겠는가?
16-7) 若可縛先縛 則應縛可縛 而先實無縛 餘如去來答
만일 속박되는 者가 먼저 속박되어 있다면 응당 속박된 者를 (다시) 속박해야 하리라. 그러나 실제 속박이 먼저 있을 수는 없다. 나머지는 去來品의 대답과 같다.
16-7) badhn y dbhandhana k ma bandhy tp rva bhavedyadi/
na c sti tac che amukta gamyam nagat gatai //
만일 속박되는 者에 앞서서 속박이 존재한다면 (그 자는) 기꺼이 속박되리라. 그런데 그것(속박)은 (속박되는 자에 앞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외의 것은 去時, 未去, 已去(觀去來品)에 의해 이미 설명하였다.
16-8) 縛者無有解 無縛亦無解 縛時有解者 縛解則一時
속박되어 있는 자는 해탈하지 못한다. 속박되어 있지 않은 자도 해탈하지 않는다. (또) 속박되어 있는 중인 자가 해탈하는 것이라면 속박과 해탈이 동시인 꼴이 된다.
16-8) baddho na mucyate t vadabaddho naiva mucyate/
sy t baddhe mucyam ne yugapadbandhamok a e//
우선, 이미 속박된 者는 해탈되지 않는다. 또 속박되지 않은 者는 결코 해탈되지 않는다. 이미 속박된 者가 지금 해탈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면 속박과 해탈이 동시에 있는 것이 되리라.
16-9) 若不受諸法 我當得涅槃 若人如是者 還爲受所縛
만일 모든 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열반을 획득하리라. 만일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라면 도리어 받아들임에 속박된 꼴이 된다.
16-9) nirv sy myanup d no nirv a me bhavi yati/
iti ye grahaste mup d namah graha //
<취하는 요소가 없는 나는 열반할 것이다. 나에게 열반이 존재할 것이다>라고 집착하는 자들은, 그들은 취하는 요소에 대한 커다란 집착이 있다.
16-10) 不離於生死 而別有涅槃 實相義如是 云何有分別
生死를 떠나서 따로 열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實相의 뜻이 이러하니 어떻게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겠는가?
16-10) na nirv asam ropo na sa s r pakar a am/
yatra kastatra sa s ro nirv a ki vikalpyate//
무릇 열반을 꾸며내지 않고 윤회를 무시하는 일도 없는 경우에는 어떠한 윤회와 어떠한 열반이 분별되겠는가?
第17 觀業品(33偈) 業에 대한 관찰
karamaphalapar k n ma saptada ama prakara am(33게) 業과 果報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7장
17-1) 人能降伏心 利益於衆生 是名爲慈善 二世果報種
사람은 능히 그 마음을 억누르고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이것을 慈善이라고 부르며 (이것은 현세와 내세의) 二世의 과보를 초래하는 씨앗이다.
17-1) tmasa yamaka ceta par nugr haka ca yat/
maitra sa dharmastadb ja phalasya pretya ceha ca//
자신을 억제하고 타인을 이익되게 하는 자애로운 마음은 (사람이 행해야 할) 法道이다. 그것은 今世에도 後世에도 果報의 씨앗이다.
17-2) 大聖說二業 思與從思生 是業別相中 種種分別說
위대한 성인께서는 두가지 업을 설하셨는데 <생각의 업>과 <생각이 끝난 후의 업>이다. 이 業 개개의 모습 속에서 갖가지로 구분하여 설하셨다.
17-2) cetan cetayitv ca karmokta paramar i /
tasy nekavidho bheda karma a parik rtita //
최고의 聖人은 <생각하는 業>과 <생각한 후의 業>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 業에는 갖가지 구별이 있다고 宣言되었다.
17-3) 佛所說思者 所謂意業是 所從思生者 卽是身口業
부처님께서 설하신 <생각>이란 것은 이른바 意業이고 <생각으로부터 生한 것>은 바로 身業과 口業이다.
17-3) tatra yaccetanetyukta karma tanm nasa sm tam/
cetayitv ca yatt kta tattu k yikav cikam//
그 중에서 <생각>이라고 설한 業, 그것은 意(業)에 속한다고 전해진다. 또 <생각한 후>라고 설한 것은 身(業)과 口(業)에 속한다.
17-4) 身業及口業 作與無作業 如是四事中 亦善亦不善
17-5) 從用生福德 罪生亦如是 及思爲七法 能了諸業相
①身業과 ②口業과 ③作業과 ④無作業의 네가지 중에는 善한 것도 있고 善하지 못한 것도 있다. ⑤그 작용에서 생한 복덕과 ⑥죄가 생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며 ⑦또 생각까지 일곱가지 法이 되는데 (이것들이) 능히 모든 業의 모습을 망라한다.
17-4) v gvi pando 'viratayo y c vij aptisa j it /
avij aptaya ev ny sm t viratayastath //
17-5) paribhog nvaya pu yamapu ya ca tath vidham/
cetan ceti saptaite dharm karm jan sm t //
①말과 ②(신체의) 동작과 ③(번뇌에서) 아직 떠나지 않은 無表라고 불리는 것과 또, ④같은 종류로 (번뇌에서) 떠나 있는 다른 갖가지 無表라고 전해진다. 또 ⑤受用과 결합된 福, ⑥同種의 非福, ⑦생각, 이런 일곱가지가 업을 나타낸다고 전해진다.
17-6) 業住至受報 是業卽爲常 若滅卽無業 云何生果報
業이 (그대로) 머물러서 果報를 받는 것이라면 이 업은 常住하는 것이 된다. (반대로) 소멸한다면 業이 없어진 것이니 어떻게 果報를 생하겠는가?
17-6) ti aty p kak l ccetkarma tannityat miy t/
niruddha cenniruddha satki phala janayi yati//
(만일) 業이 익을 때까지 존속한다면 그것은 常住하는 것이 되리라. (반대로 업이) 소멸해 버린다면 소멸한 존재가 어떻게 과보를 생하겠는가?
17-7) 如芽等相續 皆從種子生 從是而生果 離種無相續
싹 따위가 상속하는 것이 모두 씨앗에서 생기는 것 같이 그것(싹)으로부터 결실이 생기고 씨앗 없이는 상속도 없다.
17-7) yo ' kuraprabh tirb j tsa t no 'bhipravartate/
tata phalam te b j tsa ca n bhipravartate//
싹에서 시작하는 연속(상속)은 씨앗으로부터 출현한다. 그것(=싹)으로부터 열매가 (출현한다). 씨앗이 없다면 그것(=연속체)은 출현하지 않는다.
17-8) 種有相續 從相續有果 先種後有果 不斷亦不常
종자(씨앗)로부터 상속이 있고 상속으로부터 果實이 있다. 종자가 먼저 있고 다음에 과실이 있으므로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다.
17-8) b j cca yasm tsa t na sa t n cca phalodbhava /
b jap rva phala tasm nnocchinna n pi vatam//
종자로부터 연속이, 또 그 연속으로부터 果實이 生起한다. 종자는 果實에 先行하기 때문에 (종자와 과실의 관계가)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다.
17-9) 如是從初心 心法相續生 從是而生果 離心無相續
이처럼 初心으로부터 心法이 상속하여 생한다. 그것으로부터 결과가 생하고 마음을 떠나서는 상속도 없다.
17-9) yastasm ccittasa t na cetaso 'bhipravartate/
tata phalam te citt tsa ca n bhipravartate//
무릇 마음의 연속(상속)은 그 마음에서 나타난다. 거기서 結實이 (나타난다). 그것(=마음의 연속)은 마음을 떠나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17-10) 從心有相續 從相續有果 先業後有果 不斷亦不常
마음으로부터 상속이 존재하고 상속으로부터 결과가 존재한다. 업이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그 과보가 있는 것이기에 (업과 과보의 관계가)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다.
17-10) citt cca yasm tsa t na sa t n cca phalodbhaba /
karmap rva phala tasm nnocchinna n pi vatm//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연속(상속)이 또 연속으로부터 결과가 生起한다. 업이 선행하고 결과(과보)가 있는 것이므로, 그러므로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다.
17-11) 能成福德者 是十白業道 二世五欲樂 卽是白業報
능히 복덕을 성취시키는 것은 十白業道이다. 二世의 五欲樂이 바로 白業의 果報이다.
17-11) dharmasya s dhanop y ukl karmapath da a/
phala k magu pa ca dharmasya pretya ceha ca//
十種의 희고 꺠끗한 業의 길(十白業道)은 理法을 달성하는 수단이다. 다섯개의 欲樂은 금세와 후세에 있어서 理法의 과보이다.
17-12) 若如汝分別 其過則甚多 是故汝所說 於義則不然
만일 그대의 분별과 같다면 그 잘못은 매우 크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한 바는 그 뜻에 있어서 옳지 못하다.
17-12) bahava ca mah nta ca do syurapi kalpan /
yadye tena naivai kalpan tropapadyate//
만일 이와 같은 분별이 존재한다면 엄청난 잘못이 있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런 분별은 여기서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17-13) 今當復更說 順業果報義 諸佛 支佛 賢聖所稱歎
이제 또 다시 업에 순응하는 과보의 의미를 설명하리라. (그것은) 모든 부처님들과 벽지불들, 또 賢聖들께서 칭찬하시고 찬탄하신 것이다.
17-13) im puna pravak y mi kalpan y tra yojyate/
buddhai pratyekabuddhai ca r vakai c nuvar it m//
다시 모든 부처님들과 벽지불들과 성문들에 의해 칭송되었고 이 경우에 적합한 사고방식을 나는 (이제) 설명하리라.
17-14) 不失法如券 業如負財物 此性則無記 分別有四種
<없어지지 않는 法>은 채권과 같고 業은 빚진 財物과 같다. 그것의 성품은 無記性이고 분별하자면 네 종류다.
17-14) pattra yath 'vipra astath amiva karma ca/
caturvidho dh tuta sa prak ty 'vy k ta ca sa //
예를 들어 <없어지지 않는 것>은 債券과 같고 행위는 負債와 같은 것이다. 그것 (=없어지지 않는 것)은 界로 말하면 네 종류이며 본성으로 보면 無記性이다.
17-15) 見諦所不斷 但思惟所斷 以是不失法 諸業有果報
四諦의 관찰(見道)에 의해 끊는 바가 아니고 오직 思惟修(修道)로 끊어진다. 이런 不失法으로 모든 業이 그 과보를 갖게 된다.
17-15) prah ato na praheyo bh van heya eva v /
tasm davipra ena j yate karma phalam//
(見道의 四諦 관찰을 통한 끊음인) 斷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실로 修道에 의해서 끊어진다. 그러므로 없어지지 않는 것(=不失法)에 의해 갖가지 업의 과보가 生하는 것이다.
17-16) 若見諦所斷 而業至相似 則得破業等 如是之過咎
만일 四諦의 관찰(見道)에 의해 끊어져도 업이 비슷하게 이르른다면 업을 破하는 따위의 그런 허물이 있게 된다.
17-16) prah ata praheya sy tkarma a sa krame a v /
yadi do prasajyera statra karmavadh daya //
만일 (그 不失法이 見道의) 斷에 의해 혹은 業의 移轉에 의해 끊어진다면 거기서는 業의 파괴라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17-17) 一切諸行業 相似不相似 一界初受身 爾時報獨生
일체의 모든 행업은 비슷하건 비슷하지 않건 하나의 계에서 처음 몸을 받는 그 때에 그 과보가 홀로 생한다.
17-17) sarve visabh g n sabh g n ca karma m/
pratisa dhau sadh t n meka utpadyate tu sa //
同類 또는 同類가 아닌 같은 계의 모든 業들이 결합할 때에는 그것(不失法) 하나만이 발생한다.
17-18) 如是二種業 現世受果報 或言受報已 而業猶故在
이처럼 두가지의 業은 현세에 그 果報를 받는다. 혹은 과보를 받고 나서도 그 업은 아직 존속한다고도 말한다.
17-18) karma a karma o d e dharma utpadyate tu sa /
dviprak rasya sarvasya vipakve 'pi ca ti hati//
두가지 종류의 모든 業 하나 하나의 경우 현재 눈 앞에서 그 법이 生하기도 하지만 또는 (과보가) 익을 때(까지) 존속하기도 한다.
17-19) 若度果已滅 若死已而滅 於是中分別 有漏及無漏
혹은 과보를 건너고 나서 소멸하거나 혹은 죽고 나서 소멸한다. 거기서 有漏와 無漏를 분별한다.
17-19) phalavyatikram dv sa mara dv nirudhyate/
an srava s srava vibh ga tatra lak ayet//
그것(불실법)은 과보를 초월하고 나서 혹은 죽고 나서 소멸된다. 거기서 有漏, 無漏의 구별이 認知될 것이다.
17-20) 雖空亦不斷 雖有亦不常 業果報不失 是名佛所說
비록 공하지만 단멸이 아니고 비록 존재하지만 상주는 아니다. 업과 그 과보가 잃어지지 않음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17-20) nyat ca na coccheda sa s ra ca na vatam/
karma o 'vipra a ca dharmo buddhena de ita //
부처에 의해 교시된 業의 不失이라는 法은 空性이나 斷滅이 아니며 윤회하나 常住가 아니다.
17-21) 諸業本不生 以無定性故 諸業亦不滅 以其不生故
모든 業은 그 결정된 성품이 없기 때문에 본래 生하지 않는다. 모든 업은 생하는 것이 아니기에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17-21) karma notpadyate kasm n ni svabh va yatastata /
yasm cca tadanutpanna na tasm dvipra a yati//
무엇 때문에 업은 生하지 않는 것일까? 왜냐하면 自性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발생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소멸하지도 않는다.
17-22) 若業有性者 是則名爲常 不作亦名業 常則不可作
만일 業이 그 성품이 있다면 그것은 常住한다는 말이 되고 짓지 않은 것도 역시 업이라고 부르게 된다. 상주하는 것이라면 지어질 수 없다.
17-22) karma svabh vata cetsy cch vata sy dasa ayam/
ak ta ca bhavetkarma kriyate na hi a vatam//
만일 業이 自性(실체)을 갖는 존재라고 한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그것은) 常住하리라. 또 業은 지어지지 않는 것이 되리라. 왜냐하면 常住하는 것은 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17-23) 若有不作業 不作而有罪 不斷於梵行 而有不淨過
만일 짓지도 않은 業이 존재한다면 짓지도 않고 罪가 있게 되고 梵行을 끊지 않았는데도 不淨하게 되는 오류에 빠진다.
17-23) ak t bhy gamabhaya sy tkarm k taka yadi/
abrahmacaryav sa ca do astatra prasajyate//
만일 지어지지도 않은 業이 존재한다면 짓지도 않았는데 (과보를) 받는다는 두려움이 있게 되리라. 그리고 그 경우에는 梵行에 머물지 않는다는 오류에 떨어지게 된다.
17-24) 是則破一切 世間語言法 作罪及作福 亦無有差別
그것은 세간의 모든 언어법칙을 파괴하게 된다. 죄를 짓거나 복을 짓는 것도 역시 차별이 없어진다.
17-24) vyavah r virudhyante sarva eva na sa ayah/
pu yap pak tornaiva pravibh ga ca yujyate//
(그렇다면) 일체의 언어관습과 모순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복덕을 행하는 자와 죄악을 행하는 자를 구별하는 것도 실로 불합리하게 된다.
17-25) 若言業決定 而自有性者 受於果報已 而應更復受
만일 업이 결정적이어서 그 자성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과보를 받고 나서 다시 또 받아야 하리라.
17-25) tadvipakvavip ka ca punareva vipak yati/
karma vyavasthita yasm ttasm tsv bh vika yadi//
만일 業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그 때문에 自性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미 익은 과보(異熟)가 그야말로 다시 익게 될 것이라는 꼴이 된다.
17-26) 若諸世間業 從於煩惱生 是煩惱非實 業當何有實
만일 세간의 갖가지 業들이 번뇌로부터 생기는 것이라면 이 번뇌는 참된 것이 아닌데 업이 어떻게 참될 수 있겠느냐?
17-26) karma kle tmaka ceda te ca kle na tattvata /
na cette tattvata kle karma sy ttattvata katham//
또 이 業은 번뇌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갖가지 번뇌들은 진실된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갖가지 번뇌들이 진실되게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업이 진실되게 존재하겠느냐?
17-27) 諸煩惱及業 是說身因緣 煩惱諸業空 何況於諸身
모든 번뇌와 업은 몸뚱이의 인연이다. 번뇌와 모든 業이 空한데 하물며 모든 몸뚱이는 어떠하겠느냐?
17-27) karma kle a ca deh n pratyay samud h t /
karma kle a ca te ny yadi dehe u k kath //
業과 번뇌들은 身體들의 緣들이라고 설해지고 있다. 만일 그 업과 번뇌들이 空하다면 신체들에 있어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17-28) 無明之所蔽 愛結之所縛 而於本作者 不卽亦不異
무명에 덮이고 渴愛에 묶여 있고 본래의 짓던 놈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17-28) avidy niv to jantust sa yojana ca sa /
sa bhokt sa ca na karturanyo na ca sa eva sa //
살아 있는 놈은 無明에 덮이고 渴愛에 매여 있다. 그는 (업의 과보를) 받는 者이다. 또 (업을) 지었던 者와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그것(=같은 것)도 아니다.
17-29) 業不從緣生 不從非緣生 是故則無有 能起於業者
業은 緣에서 生하는 것도 아니고 緣 아닌 것에서 생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능히 업을 일으키는 者는 없다.
17-29) na pratyayasamutpanna n pratyayasamutthitam/
asti yasm dida karma tasm tkart pi n styata //
이 業은 緣에서 生起(緣起)하는 것도 아니고 非緣에서 생기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때문에 업을 짓는 주체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17-30) 無業無作者 何有業生果 若其無有果 何有受果者
業도 없고 짓는 자도 없는데 어떻게 업이 (그) 과보를 生하겠는가? 만일 그렇게 과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과보를 받는 자가 존재하겠는가?
17-30) karma cenn sti kart ca kuta sy tkarmaja phalam/
asatyatha phale bhokt kuta eva bhavi yati//
만일 업도 업을 짓는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業에서 生한 과보는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더우기 과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보를) 받는 者는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17-31) 如世尊神通 所作變化人 如是變化人 復變作化人
17-32) 如初變化人 是名爲作者 變化人所作 是則名爲業
마치 세존의 신통력으로 지어진 변화인, 그런 변화인이 다시 변화인을 지어내는 것과 같다.
마치 처음의 변화인은 짓는 者라고 부르고 그 변화인이 지은 것은 바로 業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17-31) yath nirmitaka st nirmim ta ddhisa pad /
nirmito nirmim t nya sa ca nirmitaka puna //
17-32) tath nirmitak k ra kart yatkarma tatk tam/
tadyath nirmiten nyo nirmito nirmitastath //
마치 신통력을 갖추고 있는 敎主(부처)께서 變化人(=신통에 의해 나타난 허깨비)을 幻出해 내고 그 변화인이 다시 다른 변화인을 환출해 내는 것처럼,
그것처럼 업의 주체는 변화인의 姿態를 하고 있다. (그의) 행위는 지어진 것이다. 마치 다른 변화인이 변화인에 의해 幻出되는 것처럼.
17-33) 諸煩惱及業 作者及果報 皆如幻與夢 如炎亦如嚮
모든 煩惱와 業, 짓는 者와 果報는 모두 幻想과 같고 꿈과 같으며 아지랑이와 같고 메아리와 같다.
17-33) kle karm i deh ca kart ra ca phal ni ca/
gandharvanagar k r mar cisvapnasa nibh //
煩惱들과 業들과 身體들 또 業의 主體들과 果報들도 신기루의 姿態를 띄고 있으며 아지랑이나 꿈과 같다.
第18 觀法品(12偈) 法에 대한 관찰
tmapar k n m ada ama prakara am(12게) 아뜨만(自我)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8장
18-1) 若我是五陰 我卽爲生滅 若我異五陰 則非五陰相
만일 自我가 五陰이라면 자아는 生滅하게 되리라. 만일 자아가 오음과 다르다면 (자아는) 오음의 相(을 띄는 것)이 아닐 것이다.
18-1) tm skandh yadi bhavedudayavyayabh gbhavet/
skandhebhyo 'nyo yadi bhavedbhavedaskandhalak a a //
만일 自我(아뜨만)가 五蘊이라면 (자아는) 生滅을 가진 것으로 되리라. 만일 (자아가) 오온과 다르다면 (자아는) 오온의 모습(相)이 아닐 것이다.
18-2) 若無有我者 何得有我所 滅我我所故 名得無我智
만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나의 것>이 존재하겠는가? <나>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어지므로 無我의 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
18-2) tmanyasati c tm ya kuta eva bhavi yati/
nirmamo niraha k ra am d tm tman nayo //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아에 속한 것>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자아와 이기심이 소멸함으로 인해 <나의 것>이라는 관념도, <自意識>도 사라진다.
18-3) 得無我智者 是則名實觀 得無我智者 是人爲希有
無我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은 바로 진실을 보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데 無我의 지혜를 터득한 者, 그런 사람은 드믈다.
18-3) nirmamo niraha k ro ya ca so 'pi na vidyate/
nirmama niraha k ra ya pa yati na pa yati//
<나의 것>이라는 관념을 떠나고 <自意識>이 사라진 그런 者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것>이라는 관념을 떠나고 <나>라는 관념을 떠난 것을 보는 자는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18-4) 內外我我所 盡滅無有故 諸受卽爲滅 受滅則身滅
안이건 바깥이건 <나>와 <나의 것>이 모두 사라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取가 사라지게 되고 取가 사라지면 몸도 사라진다.
18-4) mametyahamiti k e bahirdh dhy tmameva ca/
nirudhyata up d na tatk ay jjanmana k aya //
바깥에 관해서도 자신에 관해서도 <나의 것>이라든가 <나>라는 관념이 소멸할 때에 집착(取)이 억제된다. 그런 소멸로 인해 (다시) 태어남이 소멸한다.
18-5) 業煩惱滅故 名之爲解脫 業煩惱非實 入空戱論滅
업과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부른다. 업과 번뇌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空에 들어가면 戱論이 소멸한다.
18-5) karmakle ak ay nmok a karmakle vikalpata /
te prapa c tprapa castu nyat y nirudhyate//
업과 번뇌가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에서…(일어나고), 그것(=분별)은 희론에서…(일어난다), 그러나 희론은 空性에서 사라진다.
18-6) 諸佛或說我 或說於無我 諸法實相中 無我無非我
모든 부처님께서는 때로는 <自我>를 설하셨고 때로는 <無我>를 설하셨다. 諸法의 實相에서 보면 <自我>도 없고 <無我>도 아니다.
18-6) tmetyapi praj apitaman tmetyapi de itam/
buddhairn tm na c n tm ka cidityapi de itam//
모든 부처님들에 의해 <自我(가 있다)>라고도 假說되었고 <無我>라고도 敎示되었으며 <自我이거나 無我인 어떤 것이 아니다>라고도 敎示되었다.
18-7) 諸法實相者 心行言語斷 無生亦無滅 寂滅如涅槃
諸法의 實相은 마음의 작용이나 언어가 끊어져 있다.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으며 寂滅하여 열반과 같다.
18-7) niv ttamabhidh tavya niv tte cittagocare/
anutpann niruddh hi nirv amiva dharmat //
마음이 작용하는 영역이 사라지면 언어의 대상이 사라진다. 실로 발생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法性은 열반과 마찬가지다.
18-8) 一切實非實 亦實亦非實 非實非非實 是名諸佛法
일체는 진실이다, 진실이 아니다, 진실이기도 하고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 진실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것을 모든 부처님의 法이라고 부른다.
18-8) sarva tathya na v tathya tathya c tathyameva ca/
naiv tathya naiva tathyametadbuddh nu sanam//
<일체는 진실이다.> 혹은 <(일체는) 진실이 아니다.>, <(일체는) 진실이며 진실이 아니다.> 또 <(일체는) 진실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교설이다.
18-9) 自知不隨他 寂滅無戱論 無異無分別 是則名實相
스스로 알며 다른 것에 끄달리지 않는다. 寂滅하고 희론이 없으며 다르지 않고 분별도 없다. 이것을 實相이라고 부른다.
18-9) aparapratyaya nta prapa cairaprapa citam/
nirvikalpaman n rthametattattvasya lak a am//
다른 緣에 의해서가 아니며, 고요하고, 희론들에 의해 희론되지 않고, 무분별이며, 다양하지도 않은 것이 진리의 相이다.
18-10) 若法從緣生 不卽不異因 是故名實相 不斷亦不常
만일 사물(法)이 (因)緣에서 生한다면 (그것은) 因(緣)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實相은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18-10) prat tya yadyadbhavati na hi t vattadeva tat/
na c nyadapi tasm nnocchinna n pi vatam//
어떤 것이 어떤 것에 緣하여 존재하는 그 때에는 그것이 그대로 그것인 것은 아니며 또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 양자는)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다.
18-11) 不一亦不異 不常亦不斷 是名諸世尊 敎化甘露味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다. 이것이 모든 세존들께서 교화하신 감로의 맛이다.
18-11) anek rthaman n rthamanucchedama vatam/
etattallokan th n buddh n an m tam//
동일한 의미도 아니고 다른 의미도 아니며 단절도 아니고 상주도 아니다. 이것은 세간의 救護者이신 부처님(깨달은 분)들의 甘露의 가르침이다.
18-12) 若佛不出世 佛法已滅盡 諸 支佛智 從於遠離生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아 佛法이 이미 소멸해서 없어졌을 때 모든 벽지불들의 지혜가 遠離行으로부터 生한다.
18-12) sa buddh n manutp de r vak puna k aye/
j na pratyekabuddh n masa sarg tpravartate//
부처님(완전히 깨달은 분)들께서 태어나지 않을 때에, 또 聲聞들이 사라져 버렸을 때에 獨覺들의 지혜가 遠離行으로부터 나타난다.
第19 觀時品(6偈) 時間에 대한 관찰
k lapar k n maikonavi atitama prakara am(6게) 시간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9장
19-1) 若因過去時 有未來現在 未來及現在 應在過去時
만일 과거의 시간을 因하여 미래와 현재가 존재한다면 미래와 현재는 응당 과거의 시간에 존재해야 하리라.
19-1) pratyutpanno 'n gata ca yadyat tamapek ya hi/
pratyutpanno 'n gata ca k le 't te bhavi yata //
만일 현재와 미래가 과거에 의존하고 있다면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되리라.
19-2) 若過去時中 無未來現在 未來現在時 云何因過去
만일 과거의 시간 속에 미래와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래와 현재의 시간이 어떻게 과거의 因이 되겠는가?
19-2) praryutpanno 'n gata ca na stastatra punaryadi/
pratyutpanno 'n gata ca sy t kathamapek ya tam//
만일 또 현재와 미래가 그 (과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그 (과거)에 의존하여 존재하겠는가?
19-3) 不因過去時 則無未來時 亦無現在時 是故無二時
과거의 시간을 因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현재의 시간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兩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19-3) anapek ya puna siddnirn t ta vidyate tayo /
pratyutpanno 'n gata ca tasm tk lo na vidyate//
게다가 과거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그 양자(현재와 미래)의 성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19-4) 以如是義故 則知餘二時 上中下一異 是等法皆無
그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머지 두가지 시간대도 안다. 上中下나 一異 등의 法도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19-4) etenaiv va i tau dvau krame a parivartakau/
uttam dhamamadhy d nekatv d ca lak ayet//
이런 절차에 의해 남은 두가지 (시간대)가 展開가 있다. 또 上과 下와 中 따위와 同一性 따위(一異)를 관찰할 것이다.
19-5) 時住不可得 時去亦파得 時若不可得 云何說時相
시간이 머무르는 것은 얻을 수 없고 시간이 흘러 가는 것도 역시 얻을 수 없다. 시간이 만일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시간의 相을 說하겠는가?
19-5) n sthito g hyate k la sthita k lo na vidyate/
yo g hyet grh ta ca k la praj apyate katham//
머물러 있지 않은 시간은 포착되지 않는다. 또 이미 머물러 있는 시간이 포착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포착되지 않는 시간이 어떻게 파악되겠는가?
19-6) 因物故有時 離物何有時 物尙無所有 何況當於時
사물을 因하여 시간이 존재하니 사물을 떠나서 어떻게 시간이 존재하겠는가? 사물도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시간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느냐?
19-6) bh va prat tya k la cetk lo bh v d te kuta /
na ca ka cana bh vo 'sti kuta k lo bhavi yati//
시간이 사물을 緣하여 존재한다면 사물을 떠나서 시간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그리고 어떠한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시간이 존재하겠는가?
第20 觀因果品(24偈) 因果關係에 대한 관찰
s magr par k n ma vi atitama prakara am(24게) 集合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0장
20-1) 若衆緣和合 而有果生者 和合中已有 何須和合生
만일 여러가지 인연이 화합하여 결과가 발생한다면 화합중에 이미 존재하는데 어떻게 화합힐 필요가 있겠느냐?
20-1) heto ca pratyay n ca s magry j yate yadi/
phalamasti ca s magry s magry j yate katham//
만일 원인과 緣들의 결합에 의해 (결과가) 생하고 또 그 결과는 (이미) 결합에 존재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결합에 의해 生하겠는가?
20-2) 若衆緣和合 是中無果者 云何從衆緣 和合而果生
만일 여러가지 인연의 화합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러가지 인연들로부터 화합하여 발생하겠는가?
20-2) heto ca pratyay n ca s magry j yate yadi/
phala n sti ca s magry s magry j yate katham//
만일 원인과 緣들의 결합에 의해 (결과가) 발생하고 그 결합에는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어떻게 결합에 의해 발생하겠는가?
20-3) 若衆緣和合 是中有果者 和合中應有 而實不可得
만일 여러가지 인연의 화합 가운데 결과가 존재한다면 화합 가운데 존재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거기서) 얻을 수 없다.
20-3) heto ca pratyay n ca s magry masti cetphalam/
g hyeta nanu s magry s magry ca na g hyate//
만일 원인과 緣들의 결합에 의해 결과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결과는) 결합에서 파악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결합에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20-4) 若衆緣和合 是中無果者 是則衆因緣 與非因緣同
만일 여러가지 인연이 화합한 가운데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이나 緣들은 인연이 아닌 것들과 마찬가지가 된다.
20-4) heto ca pratyay n ca s magry n sti cetphalam/
hetava pratyay ca syurahetupratyayai sam //
만일 원인과 緣들의 결합에 의해서 결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원인들과 緣들은 원인이나 緣이 아닌 것들과 마찬가지인 꼴이 되리라.
20-5) 若因與果因 作因已而滅 是因有二體 一與一則滅
만일 원인 결과에 주는 원인이고 (그렇게) 원인을 짓고 나서 소멸하는 것이라면 그런 원인은 그 실체가 둘이 되니 하나는 주는 것이고 하나는 소멸하는 것이다.
20-5) hetuka phalasya dattv yadi heturnirudhyate/
yaddatta yanniruddha ca hetor tmadvaya bhavet//
만일 원인이 <원인이 되는 것>을 결과에 주고서 소멸하는 것이라면 <준 것>과 <소멸한 것>이라고 하는, 그 실체가 두개인 원인이 존재하게 되리라.
20-6) 若因不與果 作因已而滅 因滅而果生 是果則無因
만일 원인이 (원인을) 결과에 주지 않고 원인 노릇을 하고 소멸하는 것이라면 원인이 소멸하고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니 이런 결과는 원인 없는 것이다.
20-6) hetu phalasy dattv ca yadi heturnirudhyate/
hetau niruddhe j ta tatphalam hetuka bhavet//
만일 원인이 원인을 결과에 주지 않고서 소멸된다면 원인이 이미 소멸한 때에 생한 그 결과는 원인 없는(無因의) 것이 될 것이다.
20-7) 若衆緣合時 而有果生者 生者及可生 則爲一時共
만일 여러가지 인연이 화합할 때에 결과의 발생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발생케 한 놈이나 발생한 놈이 한 순간에 함께 한다는 꼴이 된다.
20-7) phala sahaiva s magry yadi pr durbhavetpuna /
ekak lau prasajyete janako ya ca janyate//
더우기 만일 결과가 결합과 동시에 출현하는 것이라면 발생케 하는 것과 발생된 것이 같은 시간에 존재한다는 꼴이 된다.
20-8) 若先有果生 而後衆緣合 此卽離因緣 名爲無因果
만일 먼저 결과의 발생이 존재하고 나중에 여러가지 인연이 결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연을 떠난 것으로 無因의 결과라고 부른다.
20-8) p rvameva ca s magry phala pr durbhavetyadi/
hetupratyayanirmukta phala ahetuka bhavet//
또 만일 결과가 결합에 선행하여 출현하는 것이라면 그 결과는 원인과 緣을 벗어나서 원인 없는 것이 될 것이다.
20-9) 若因變爲果 因卽至於果 是則前生因 生已而復生
만일 원인이 변하여 결과가 된다면 원인은 결과에 도달한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앞에서 발생한 원인이 발생하고 나서 다시 발생한다는 말이 된다.
20-9) niruddhe cetphala hetau heto sa krama a bhavet/
p rvaj tasya heto ca punarjanma prasajyate//
만일 원인이 소멸할 때 결과가 있다면 원인은 移行하는 것이 되리라. 또 먼저 발생했던 원인이 다시 출현하는 꼴이 된다.
20-10) 云何因滅失 而能生於果 又若因在果 云何因生果
어떻게 원인이 소멸하여 소실되었는데 능히 결과를 生하겠는가? 또 만일 원인이 결과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원인이 결과를 生하겠는가?
20-10) janayetphalamutpanna niruddho 'sta gata katham/
ti hannapi katha hetu phalena janayedv ta //
이미 滅하여 상실된 것이 어떻게 이미 발생해 있는 결과를 발생시키겠는가? 결과에 가려진 상태로 머물러 있는 원인도 역시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키겠는가?
20-11) 若因遍有果 更生何等果 因見不見果 是二俱不生
만일 원인이 결과에 편재해 있다면 다시 어떤 결과들을 生하겠는가? 원인은 결과를 만나건(見) 안 만나건(不見) 두 경우 모두 (결과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20-11) ath v ta phalen sau katamajjanayetphalam/
na hyad v v d v v heturjanayate phalam//
그런데 결과에 덮이지 않은 그것(원인)이 어떻게 결과를 發生시키겠는가? 왜냐하면 원인은 (결과를) 보건 보지 않건 결과를 발생시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20-12) 若言過去因 而於過去果 未來現在果 是則終不合
或 과거의 因을 말하지만 과거의 결과와 미래 및 현재의 결과에 대해 결코 결합하지 않는다.
20-12) n t tasya hyat tena phalasya saha hetun /
n j tena na j tena sa gatirj tu vidyate//
과거의 결과가 과거의 원인과 함께하지 않는다. (과거의 결과가) 아직 생하지 않은 것(미래)과 이미 생한 것(현재)과 결합함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0-13) 若言未來因 而於未來果 現在過去果 是則終不合
或 미래의 因을 말하지만 미래의 결과와 현재 및 과거의 결과에 대해 결코 결합하지 않는다.
20-14) n j tasya hi j tena phalasya saha hetun /
n j tena na na tena sa gatirj tu vidyate//
아직 생하지 않은 결과가 이미 생한 원인과 함께하지 않는다. (아직 생하지 않은 결과가) 아직 생하지 않은 것과 이미 멸한 것과 결합함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0-14) 若言現在因 而於現在果 未來過去果 是則終不合
或 현재의 因을 말하지만 현재의 결과와 미래 및 과거의 결과에 대해 결코 결합하지 않는다.
20-13) na j tasya hyaj tena phalasya saha hetun /
n t tena na j tena sa gatirj tu vidyate//
이미 생한 결과는 아직 생하지 않은 원인과 함께하지 않는다. (이미 生한 결과가) 과거의 것과 또 이미 생한 것과 결합함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0-15) 若不和合者 因何能生果 若有和合者 因何能生果
만일 화합하지 않는다면 因이 어떻게 결과를 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화합한 것이라면 因이 어떻게 결과를 生할 수 있겠는가?
20-15) asaty sa gatau hetu katha janayate phalam/
saty v sa gatau hetu katha janayate phalam//
서로 결합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어떻게 원인이 결과를 생하겠는가? 또 서로 결합한 것이 존재하는 경우에 어떻게 원인이 결과를 생하게는가?
20-16) 若因空無果 因何能生果 若因不空果 因何能生果
만일 因이 空하여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因이 어떻게 결과를 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因이 空하지 않은 결과(가 존재한다)라면 因이 어떻게 결과를 生할 수 있겠는가?
20-16) hetu phalena nya cetkatha janayate phalam/
hetu phalen nya cetkatha janayate phalam//
만일 원인이 결과에 대해서 空(虛)하다면 어떻게 결과를 생하겠는가? 만일 원인이 결과에 대해 空하지 않다면 어떻게 결과를 생하겠는가?
20-17) 果不空不生 果不空不滅 以果不空故 不生亦不滅
결과가 空하지 않다면 不生이다. 결과가 空하지 않다면 不滅이다. 결과가 空하지 않으므로 不生이기도 하고 不滅이기도 하다.
20-17) phala notpatsyate ' nyama nya na nirotsyate/
aniruddhamanutpannama nya tadbhavi yati//
空하지 않은 결과는 발생하지 않으리라. 空하지 않은 것은 소멸하지 않으리라. 空하지 않은 그것은 不滅이며 不生으로 되리라.
20-18) 果空故不生 果空故不滅 以果是空故 不生亦不滅
결과는 空하기 때문에 不生이고 결과는 空하기 때문에 不滅이다. 결과가 空하기 때문에 不生이기도 하고 不滅이기도 하다.
20-18) kathamutpatsyate nya katha nya nirotsyate/
nyamapyaniruddha tadanutpanna prasajyate//
空한 것이 어떻게 생하겠는가? 空한 것이 어떻게 멸하겠는가? 空한 그것은 不滅이기도 하고 不生이라는 오류에 빠진다.
20-19) 因果是一者 是事從不然 因果若異者 是事亦不然
원인과 결과가 하나라는 것 그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는 것 그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20-19) heto phalasya caikatva na hi j t papadyate//
heto phalasya c nyatva na hi j t papadyate//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는 것도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는 것도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20-20) 若因果是一 生及所生一 若因果是異 因則同非因
만일 원인과 결과가 하나라면 발생케 하는 것과 발생된 것이 하나가 된다. 만일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원인은 원인 아닌 것과 같은 꼴이 된다.
20-20) ekatve phalahetvo sy daikya janakajanyayo /
p thaktve phalahetvo sy ttulyo heturahetun //
원인과 결과가 하나라면 발생하는 것과 발생될 것이 일치하리라. 원인과 결과가 별개라면 원인은 원인 아닌 것과 동등한 것이 된다.
20-21) 若果定有性 因爲何所生 若果定無性 因爲何所生
만일 결과가 결정적으로 그 성품이 있다면 (결과는) 원인이 무엇을 위해 생한 것이겠는가? 만일 결과가 결정적으로 그 성품이 없다면 (결과는) 원인이 무엇을 위해 생한 것이겠는가?
20-21) phala svabh vasadbh ta ki heturjanayi yati/
phala svavbh v sadbh ta ki heturjanayi yati//
결과가 실체로서 실재한다면 원인은 무엇을 생하게 하겠는가? 결과가 실체로서 실재하지 않는다면 원인은 무엇을 生하게 하겠는가?
20-22) 因不生果者 則無有因相 若無有因相 誰能有是果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 원인이라면 원인의 相을 갖지 않는다. 만일 원인의 相을 갖지 않는다면 능히 누가 그 결과를 갖겠는가?
20-22) na c janayam nasya hetutvamupapadyate/
hetutv nupapattau ca phala kasya bhavi yati//
또 지금 발생하고 있는 중이 아닌 것에서 원인인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 원인이 되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결과가 존재하겠는가?
20-23) 若從衆因緣 而有和合生 和合者不生 云何能生果
만일 여러가지 인연으로부터 화합이 존재하여 발생한다면 화합한 것은 발생하지 않는데 어떻게 능히 결과를 생하겠는가?
20-23) na ca pratyayahet n miyam tm nam tman /
y s magr janayate s katha janayetphalam//
緣과 因들의 총체인 이것은 스스로緣과 因들의 결합이 스스로 자신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키겠는가?
20-24) 是故果不從 緣合不合生 若無有果者 何處有合法
그러므로 결과는 緣과 결합하거나 결합하지 않고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결합이라는 法이 있겠느냐?
20-24) na s magr k ta phala n s magr k ta phalam/
asti pratyayas magr kuta eva phala vin //
(인연들의) 총체(=결합)에 의해 지어진 결과는 없다. (인연들의) 총체가 아닌 것에 의해 지어진 결과는 없다. 결과가 전혀 없는데 연의 총체란 것은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第21 觀成壞品(20偈) 생성과 괴멸에 대한 관찰
sa bhavavibhavapar k n maikavi atitama prakara am 생성과 괴멸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1장(21게)
21-1) 離成及共成 是中無有壞 離壞及共壞 是中亦無成
生成을 떠나건 생성과 함께하건 그 중에 壞滅은 없다. 괴멸을 떠나건 괴멸과 함께하건 그 중에도 역시 생성은 없다.
21-1) vin v saha v n sti vibhava sa bhavena vai/
vin v saha v n sti sa bhavo vibhavena vai//
괴멸은 생성을 떠나서건 함께하건 결코 存在하지 않는다. 생성은 괴멸을 떠나서건 함께하건 결코 存在하지 않는다.
21-2) 若離於成者 云何而有壞 如離生有死 是事則不然
만일 생성을 떠난다면 어떻게 괴멸이 存在하겠는가? 탄생을 떠나 죽음이 存在한다는 것처럼 이것은 옳지 못하다.
21-2) bhavi yati katha n ma vibhava sa bhava vin /
vinaiva janma mara a vibhavo nodbhava vin //
생성 없는 괴멸이 도대체 어떻게 存在하겠는가? (存在한다면 그것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죽는 것이다. 출생하지도 않은 것은 괴멸하지 않는다.
21-3) 成壞共有者 云何有成壞 如世間生死 一時俱不然
생성과 괴멸이 함께 存在한다면 어떻게 생성과 괴멸이 存在하겠는가? 마치 세간에서 生과 死가 동시에 함께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경우에서 보듯이.
21-3) sa bhavenaiva vibhava katha saha bhavi yati/
na janmamara a caiva tulyak la hi vidyate//
어떻게 괴멸이 생성과 함께 存在하겠는가? 왜냐하면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은 그와 같이 동시에 存在하지 않기 때문이다.
21-4) 若離於壞者 云何當有成 無常未曾有 不在諸法時
만일 괴멸을 떠난다면 어떻게 생성이 성립하겠는가? 無常은 모든 法에 있지 않을 때가 없다.
21-4) bhavi yati katha n ma sa bhavo vibhava vin /
anityat hi bh ve u na kad cinna vidyate//
도대체 어떻게 생성이 괴멸을 떠나서 存在하겠는가? 왜냐하면 사물들에 無常함이 없는 것은 그 언제건 存在하지 않기 때문이다.
21-5) 成壞共無成 離亦無有成 是二俱不可 云何當有成
생성과 괴멸이 함께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고 떠나 있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 두 경우가 모두 불가능하니 어떻게 (생성과 소멸이) 성립하겠는가?
21-5) sa bhavo vibhavenaiva katha saha bhavi yati/
na janmamara a caiva tulyak la hi vidyate//
어떻게 도대체 생성이 괴멸과 함께 存在하겠는가? 왜냐하면 태어남과 죽음은 결코 동시에 存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1-6) sah nyonyena v siddirvin nyonyena v yayo /
na vidyate tayo siddhi katha nu khalu vidyate//
서로 함께한다고 해도 또 서로 떠나 있다고 해도 양자의 성립은 存在하지 않는, 그러한 兩者의 성립이 실로 어떻게 存在할까?
21-6) 盡則無有成 不盡亦無成 盡則無有壞 不盡亦不壞
사라진다면 생성은 存在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아도 생성은 存在하지 않는다. 사라진다면 괴멸은 存在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아도 역시 괴멸하지 않는다.
21-7) k ayasya sa bhavo n sti n k ayasy sti sa bhava /
k ayasya vibhavo n sti vibhavo n k ayasya ca//
사라진 것에 생성은 存在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은 것에는 생성은 存在하지 않는다. 사라진 것에는 괴멸은 存在하지 않는다. 또 사라지지 않은 것에도 괴멸은 存在하지 않는다.
21-7) 若離於成壞 是亦無有法 若當離於法 亦無有成壞
만일 생성이나 괴멸을 떠난다면 이때도 역시 사물(法)은 存在하지 않는다. 만일 사물을 떠난다면 역시 생성이나 괴멸은 存在하지 않는다.
21-8) sa bhavo vibhava caiva vin bh va na vidyate/
sa bhava vibhava caiva vin bh vo na vidyate//
사물을 떠나서 생성이나 괴멸은 결코 存在하지 않는다. 또 생성과 괴멸을 떠나서 사물은 결코 存在하지 않는다.
21-8) 若法性空者 誰當有成壞 若性不空者 亦無有成壞
만일 사물이 空한 것이라면 무엇이 생성이나 괴멸을 갖겠느냐? 만일 自性이 空하지 않은 것이라면 역시 생성이나 괴멸은 存在하지 않는다.
21-9) sa bhavo vibhava caiva na nyasyopapadyate/
sa bhavo vibhava caiva n nyasyopapadyate//
空한 것에 있어서는 생성과 괴멸이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또 空하지 않은 것에 있어서는 생성과 괴멸이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21-9) 成壞若一者 是事則不然 成壞若異者 是事亦不然
생성과 괴멸이 만일 동일하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생성과 괴멸이 만일 다르다면 그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21-10) sa bhavo vibhava caiva naika ityupapadyate/
sa bhavo vibhava caiva na n netyupapadyate//
생성과 괴멸이 동일하다는 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또 생성과 괴멸이 다르다는 것도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21-10) 若謂以眼見 而有生滅者 則爲是癡妄 而見有生滅
만일 눈에 (역력히) 생성과 괴멸이 보이니 생성과 괴멸이 存在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어리석어서 생성과 괴멸이 存在한다고 보는 것이다.
21-11) d yate sa bhava caiva vibhava caiva te bhavet/
d yate sa bhava caiva moh dvibhava eva ca//
생성과 괴멸이 보인다고 그대에게 떠오른다면 생성과 괴멸은 실로 어리석음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21-11) 從法不生法 亦不生非法 從非法不生 法及於非法
法(=存在)에서 法을 生하지 않고 法 아닌 것을 생하지도 않는다. 법 아닌 것에서 법이나 법 아닌 것이 生하지 않는다.
21-12) na bh v jj yate bh vo bh vo 'bh v nna j yate/
n bh v jj yate 'bh vo 'bh vo bh v nna j yate//
存在는 存在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存在는 非存在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非存在는 非存在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非存在는 存在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21-12) 法不從自生 亦不從他生 不從自他生 云何而有生
존재는 스스로 생기지 않으며 他者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나 他者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생함이 있겠느냐?
21-13) na svato j yate bh va parato naiva j yate/
na svata parata caiva j yate j yate kuta //
존재는 스스로 생기지 못한다. 또 他者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거나 他者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생기겠는가?
21-13) 若有所受法 卽墮於斷常 當知所受法 爲常爲無常
만일 받아들이는 존재가 있다면 斷滅論이나 常住論에 떨어진다. 받아들이는 존재는 常住하거나 無常한 것이 됨을 알아야 한다.
21-14) bh vamabhyupapannasya vatocchedadar anam/
prasajyate sa bh vo hi nityo 'nityo 'tha v bhavet//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常見과 斷見의 오류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常住한 것이거나 無常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1-14) 所有受法者 不墮於斷常 因果相續故 不斷亦不常
받아들이는 존재가 있는 者는 斷見이나 常見에 떨어지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가 상속되므로 단절도 아니고 상속도 아니다.
21-15) bh vamabhyupapannasya naivocchedo na vatam/
udayavyayasa t na phalahetvorbhava sa hi//
존재를 인정하는 者에게는 斷絶도 없고 常住도 없다. 왜냐하면 이 생존은 결과와 원인 兩者의 발생과 소멸이 계속(相續)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1-15) 若因果生滅 相續而不斷 滅更不生故 因卽爲斷滅
만일 원인과 결과의 生滅이 상속되어 끊어지지 않는다면 소멸한 것은 다시 生하지 않으므로 원인은 斷滅되고 만다.
21-16) udayavyayasa t na phalahetvorbhava sa cet/
vyayasy punarutpatterhet cceheda prasajyate//
만일 이 생존이 결과와 원인의 生滅의 연속이라고 한다면 소멸한 것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 (결과와) 斷絶된다는 오류에 빠진다.
21-16) 法住於自性 不應有有無 涅槃滅相續 則墮於斷滅
존재가 그 自性에 머물러 있다면 有가 無로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열반에서는 상속이 소멸하니 斷滅에 떨어진다.
21-17) sadbh vasya svabh vena n sadbh va ca yujyate/
nirv ak le coccheda pra am dbhavasa tate //
그 본성(自性)상 실재하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또 열반에 들 때에는 생존의 연속이 멈추므로 斷滅이다.
21-17) 若初有滅者 則無有後有 初有若不滅 亦無有後有
만일 최초의 生存이 소멸한다면 나중의 생존은 존재하지 못한다. 처음의 생존이 만일 소멸하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나중의 생존은 존재하지 않는다.
21-18) carame na niruddhe ca prathamo yujyate bhava /
carame n niruddhe ca prathamo yujyate bhava //
최후의 것이 소멸한다면 최초의 생존(이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최후의 것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해도 최초의 생존(이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21-18)若初有滅時 而後有生者 滅時是一有 生時是一有
만일 처음의 생존이 소멸하는 순간에 나중의 생존이 발생하는 것이라면 소멸하는 순간이 하나의 생존이고 발생하는 순간이 (다른)하나의 생존이(라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21-19) nirudhyam ne carame prathamo yadi j yate/
nirudhyam na eka sy jj yam no 'paro bhavet//
만일 (현생의) 최후의 것이 소멸하고 있는 중인 때에 (내생의) 최초의 것이 발생한다면 前者는 소멸하는 중인 것이고 後者는 발생하고 있는 중인 것이 되리라.
21-19) 若言於生滅 而謂一時者 則於此陰死 卽於此陰生
만일 발생과 소멸이 동시에 있다고 한다면 이 五陰에서 죽어 (같은) 이 五陰에서 生하는 꼴이 된다.
21-20) na cennirudhyam na ca j yam na ca yujyate/
s rdha ca mriyate ye u tesu skandhe u j yate//
만일 지금 소멸하는 중인 것과 지금 발생하는 중인 것이 함께하는 것이 타당하다면 죽은 바로 그 五蘊에서 生하지 않겠는가?
21-20) 三世中求有 相續不可得 若三世中無 何有有相續
삼세 중에 생존이 상속하는 것은 포착되지 않는다. 만일 삼세 중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생존의 상속이 존재하겠는가?
21-21) eva tri vapi k le u na yukt bhavasa tati /
tri u k le u y n sti s katha bhavasa tati //
이와 같이 세가지 시간(三世)에서도 生存이 연속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三世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생존의 연속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第22 觀如來品(16偈) 如來에 대한 관찰
tath gatapar k n ma dv vi atitama prakara am 如來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2장(16게)
22-1) 非陰不離陰 此彼不相在 如來不有陰 何處有如來
五陰도 아니고 오음을 떠난 것도 아니며 이것(여래)과 저것(오온)이 서로 內在하는 것도 아니다. 여래는 오음을 소유하지도 않으니 어디에 여래가 존재하겠는가?
22-1) skandh na n nya skandhebhyo n smin skandh na te u sa /
tath gata skandhav nna katamo 'tra tath gata //
(如來는) 五蘊이 아니고 오온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 분(여래) 속에 오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들(오온) 속에 그분이 있는 것도 아니며 여래가 오온을 갖는 것도 아닌데 이런 가운데 어느 것이 여래이겠느냐?
22-2) 陰合有如來 則無有自性 若無有自性 云何因他有
오음이 화합하여 여래가 존재한다면 그 自性은 없다. 만일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것으로 因해 존재하겠는가?
22-2) buddha skandh nup d ya yadi n sti svabh vata /
svabh vata ca yo n sti kuta sa parabh vata //
佛陀(여래)가 五蘊에 의존(取)한다면 自性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自性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어떻게 他性으로서 (존재하겠는가)?
22-3) 法若因他生 是卽爲非我 若法非我者 云何是如來
존재가 만일 다른 것을 인연으로 하여 발생한다면 그것은 自我가 아니다. 만일 존재가 自我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여래이겠느냐?
22-3) prat tya parabh va ya so 'n tmetyupapadyate/
ya c n tm sa ca katha bhavi yati tath gata //
他性(다른 실체)을 緣하여 있는 것, 그것은 無我임이 성립된다. 그런데 無我인 것, 그것이 어떻게 如來가 되겠느냐?
22-4) 若無有自性 云何有他性 離自性他性 何名爲如來
만일 自性이 존재하지 않으면 어떻게 他性이 존재하겠는가?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무엇을 如來라고 부르겠는가?
22-4) yadi n sti svabh va ca parabh va katha bhavet/
svabh vaparabh v bhy m te ka sa tath gata //
만일 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他性이 존재하겠는가?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무엇이 그 如來이겠는가?
22-5) 若不因五陰 先有如來者 以今受陰故 則說爲如來
혹 五陰을 因하지 않고 먼저 여래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지금 오음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여래라고 말한다.
22-5) skandh nyadyanup d ya bhavetka cittath gata /
sa id n mup dady dup d ya tato bhavet//
만일 五蘊을 의존(取)하지 않고 그 어떤 如來가 존재한다면 그는 지금 의존(取)하리라. 그래서 의존(取)하여 존재하리라.
22-6) 今實不受陰 更無如來法 若以不受陰 今當云何受
이제 실제로 오음을 取하지 않는다면 여래라는 존재는 결코 없다. 만일 오음을 취하지 않는다면 이제 어떻게 取하겠는가?
22-6) skandh n c pyanup d ya n sti ka cittath gata /
ya ca n styanup d ya sa up d syate katham//
또 오온에 의존(取)하지 않아도 역시 그 어떤 여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오음을) 의존(取)하지 않고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어떻게 의존(取)하겠는가?
22-7) 若其未有受 所受不名受 無有無受法 而名爲如來
만일 취함이 아직 없다면 취한 것은 取라고 부르지 못한다. 취함이 없는 존재가 없기에 여래라고 부른다.
22-7) na bhavatyanup dattamup d na ca ki cana/
na c sti nirup d na katha cana tath gata //
의존(取)하지 않는 그 어떤 의존(取)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존(取함)이 없는 여래는 도저히 존재하지 않는다.
22-8) 若於一異中 如來不可得 五種求亦無 云何受中有
만일 同一이나 別異 중에 여래가 있을 수 없다면 다섯가지로 추구해도 역시 없는데 어떻게 取함에 존재하겠는가?
22-8) tattv nyatvena yo n sti m gyam a ca pa cadh /
up d nena sa katha praj apyate tath gata //
同一性과 別異性에 의해서 다섯가지로 추구하여 존재하지 않는 여래가 어떻게 의존(取)에 의해 파악되겠는가?
22-9) 又所受五陰 不從自性有 若無自性者 云何有他性
또 취해진 五陰은 自性으로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他性이 존재하겠느냐?
22-9) yadap damup d na tatsvabh v nna vidyate/
svabh vata ca yann sti kutastatparabh vata //
이런 의존(取)도 自性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또 自性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他性으로서 (존재하겠느냐?)
22-10) 以如是義故 受空受者空 云何當以空 而說空如來
이런 의미에서 취하는 작용도 空하고 취하는 者도 空하다. 어떻게 空으로 空한 여래를 說하겠는가?
22-10) eva nyamup d namup dat ca sarva ah/
praj apyate ca nyena katha nyastath gata //
이와 같이 의존(取)하는 작용도 의존(取)하는 주체도 모든 점에서 空하다. 空한 것에 의해 空한 여래가 어떻게 파악되겠는가?
22-11) 空則不可說 非空不可說 共不共 說 但以假名說
空은 말할 수 없고 非空도 말할 수 없다. (空과 非空이) 함께건 함께가 아니건 말할 수 없다. 단지 假名으로 說한다.
22-11) nyamiti na vaktavyama nyamiti v bhavet/
ubhaya nobhaya ceti praj aptyartha tu kathyate//
空이라고 혹은 不空이라고 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리라. 또 양자나 양자가 아닌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교훈을 위해 說해진다.
22-12) 寂滅相中無 常無常等四 寂滅相中無 邊無邊等四
寂滅한 相 중에는 恒常하다든지 無常하다는 등의 네가지가 없다. 적멸한 相중에는 끝이 있다든지 끝이 없다든지 하는 등의 네가지가 없다.
22-12) vat vat dyatra kuta nte catu ayam/
ant nant di c pyatra kuta nte catu ayam//
寂靜의 경지, 거기에 어떻게 常住나 無常 따위의 네가지가 (있겠는가)? 또 寂靜의 경지, 거기에 어떻게 有邊이나 無邊 따위의 네가지가 (있겠는가)?
22-13) 邪見深厚者 則說無如來 如來寂滅相 分別有亦非
사견이 깊고 두터운 사람은 여래가 없다고 설하고 여래의 적멸한 모습에 대해서도 있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분별한다.
22-13) yena gr ho grh tastu ghano 'st ti tath gata /
n st ti sa vikalpayan nirv tasy pi kalpayet//
그러나 깊은 집착에 붙들려 "여래는 존재한다."라든가 "여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분별하는 그런 者는 열반에 든 자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상상하리라.
22-14) 如是性空中 思惟亦不可 如來滅度後 分別於有無
이처럼 그 自性이 空한 가운데 여래가 열반에 든 다음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별하는 思惟는 불가능하다.
22-14) svabh vata ca nye 'smi cint naivopapadyate/
para nirodh dbhavati buddho na bhavat ti v //
自性으로서 이것(여래)이 空하다면 열반 이후 붓다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22-15) 如來過戱論 而人生戱論 戱論破慧眼 是皆不見佛
여래는 희론을 넘어서 있는데 사람들이 희론을 낸다. 희론은 慧眼을 파괴하니 그들 모두 부처를 보지 못하다.
22-15) prapa cayanti ye buddha prapa c t tamavyayam/
te prapa cahat sarve na pa yanti tath gatam//
戱論을 초월해 있어서 不滅인 붓다를, 희론者들이 모두 희론하여 해쳐서 (그들은) 여래를 보지 못한다.
22-16) 如來所有性 卽是世間性 如來無有性 世間亦無性
여래가 갖는 자성은 바로이 세간의 자성이다. 여래는 그 성품이 없으니 세간도 역시 그 자성이 없다.
22-16) tath gato yatsvabh vastatsvabh vamida jagat/
tath gato ni svabh vo ni svabh vamida jagat//
여래의 自性 그것은 이 活動界(世界)의 자성인데 여래는 無自性하니 이 活動界는 無自性하다.
第23 觀顚倒品(24偈) 顚倒에 대한 관찰
vipary sapar k n ma trayovi atitama prakara am 뒤바뀜에 대한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3장(25게)
23-1) 從憶想分別 生於貪에癡 淨不淨顚倒 皆從衆緣生
망상분별로부터 貪慾과 瞋에와 愚癡가 生한다. 淨과 不淨이라는 顚倒는 모두 여러 가지 인연에서 生한다.
23-1) sa kalpaprabhavo r go dve o moha ca kathyate/
ubh ubhavipary s n sa bhavanti prat tya hi//
貪慾과 瞋에와 愚癡는 사고작용에서 生한다고 설해진다. 왜냐하면 淨과 不淨의 뒤바뀜(顚倒)을 緣하여 (貪瞋癡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23-2) 若因淨不淨 顚倒生三毒 三毒卽無性 故煩惱無實
만일 淨과 不淨의 顚倒를 因하여 三毒心이 발생한다면 삼독심은 그 自性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는 그 실체가 없다.
23-2) ubh ubhavipary s n sa bhavanti prat tya ye/
te svabh v nna vidyante tasm tkle na tattvata //
淨과 不淨의 뒤바뀐 오해를 緣하여 발생하는 것들, 그것들은 自性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번뇌는 진실로는 없다.
23-3) 我法有以無 是事終不成 無我諸煩惱 有無亦不成
자아라는 法의 有와 無, 이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자아가 없으니 모든 번뇌의 有無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23-3) tmano 'stitvan stitve na katha cicca sidhyata /
ta vin stitvan stitve kle n sidhyata katham//
自我의 存在性과 非存在性은 도저히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자아) 없이 번뇌들의 존재성과 비존재성이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23-4) 誰有此煩惱 是卽爲不成 若離是而有 煩惱則無屬
누가 이런 번뇌를 소유하는가? 이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만일 이것을 떠나서 존재한다면 번뇌는 그 소속이 없는 꼴이 된다.
23-4) kasya ciddhi bhavant me kle sa ca na sidhyati/
ka cid ho vin ka citsanti kle na kasya cit//
실로 이런 번뇌들은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라고 부르는 그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누군가 어떤 사람이 없기 때문에 번뇌들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3-5) 如身見五種 求之不可得 煩惱於垢心 五求亦不得
몸이 있다는 견해 그것을 다섯가지로 추구해 봐도 얻을 수 없듯이 번뇌는 (번뇌로) 더러워진 마음에서 다섯 가지로 추구해도 얻을 수 없다.
23-5) svak yad ivatkle kli e santi na pa cadh /
svak yad ivatkli a kle e vapi na pa cadh //
자신의 신체가 있다고 보는 견해와 마찬가지로 번뇌들은 번뇌하는 者에 다섯 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체가 있다고 보는 견해와 마찬가지로 번뇌하는 者는 번뇌에 다섯 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23-6) 淨不淨顚倒 是則無自性 云何因此二 而生諸煩惱
淨과 不淨의 顚倒, 그것은 自性이 없다. 어떻게 그 양자로 因하여 모든 번뇌가 발생하겠는가?
23-6) svabh vato na vidyante ubh ubhaviparyay /
prat tya katam n kle ubh ubhaviparyay n//
淨과 不淨의 뒤바뀜은 自性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떠한 淨과 不淨의 뒤바뀜을 緣하여 번뇌들이 있겠는가?
23-7) 色聲香味觸 及法爲六種 如是之六種 是三毒根本
色과 聲과 香과 味와 觸, 그리고 法은 여섯 가지인데 이런 여섯 가지는 三毒心의 뿌리이다.
23-7) r pa abdarasaspar gandh dharm ca a vidham/
vastu r gasya dve asya mohasya ca vikalpyate//
형상과 소리와 맛들, 냄새들과 감촉들, 그리고 생각의 내용(法)들은 탐욕과 瞋에(화)와 愚癡의 여섯 가지 대상이라고 분별된다.
23-8) 色聲香味觸 及法體六種 皆空如炎夢 如乾달婆城
色과 聲과 香과 味와 觸, 그리고 法 그 自體의 여섯가지는 모두 空하여 아지랑이나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다.
23-8) r pa abdarasaspar gandh dharm ca keval! /
gandharvanagar k r maricisvapnasa nibh //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 그리고 생각의 내용은 오직 신기루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아지랑이나 꿈과 같다.
23-9) 如是六種中 何有淨不淨 猶如幻化人 亦如鏡中像
이처럼 여섯가지 중에는 어떻게 淨이나 不淨이 존재하겠느냐? 마치 환상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같고 역시 거울 속의 모습과도 같은데.
23-9) a ubha v ubha v pi kutaste u bhavi yati/
m y puru akalpe u pratibimbasame u ca//
(六入이) 허깨비와 같고 비친 모습과 같다면 거기에(=六入에) 淨이나 不淨이 역시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23-10) 不因於淨相 則無有不淨 因淨有不淨 是故無不淨
淨의 相을 因하지 않는다면 不淨은 없다. 淨을 因해 不淨이 있으니 不淨은 존재하지 않는다.
23-10) anapek ya ubham n stya ubha praj apayemahi/
yatprat tya ubha tasm cchubha naivopapadyate//
淨에 의존하지 않는 不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에 緣하여 淨이 있다고 우리들은 이해하리라. 그러므로 淨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23-11) 不因於不淨 則亦無有淨 因不淨有淨 是故無有淨
不淨을 因하지 않으면 淨도 역시 없다. 不淨을 因하여 淨이 있으니 淨은 존재하지 않는다.
23-11) anapek y ubha n sti ubha praj apayemahi/
yatprat ty ubha tasm da ubha naiva vidyate//
不淨에 의존하지 않는 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에 緣하여 不淨이 있다고 우리들은 이해하리라. 그러므로 不淨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23-12) 若無有淨者 何由而有貪 若無有不淨 何由以有에
만일 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말미암아 탐욕이 존재하겠는가? 만일 不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말미암아 瞋에가 존재하겠는가?
23-12) avidyam ne ca ubhe kuto r go bhavi yati/
a ubhe 'vidyam ne ca kuto dve o bhavi yati//
淨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탐욕이 존재하겠는가. 不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瞋 가 존재하겠는가?
23-13) 於無常著常 是則名顚倒 空中無有常 何處有常倒
無常을 常이라고 집착하는 것 이것을 전도라고 부르지만 空에는 常이 없는데 어디에 常이라는 전도가 존재하겠는가?
23-13) anitye nityamityeva yadi gr ho viparyaya /
n nitya vidyate nye kuto gr ho viparyaya //
或, 無常인 것을 常住한다고 하는 이와 같은 집착이 顚倒라지만 空(의 입장)에서 (보면) 무상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집착이 전도이겠는가?
23-14) 若於無常中 著無常非倒 空中無無常 何有非顚倒
無常을 무상이라고 집착하는 것이 顚倒가 아니라지만 空 가운데는 무상도 없는데 어떻게 전도 아님이 존재하겠는가?
23-14) anitye nityamityeva yadi gr ho viparyaya /
anityamityapi gr ha nye ki na viparyaya //
만일 無常한 것에 대해 (거꾸로) 恒常되다고 하는 집착이 顚倒라면 無常하다고 하는 집착도 空(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전도가 아니겠는가?
23-15) 可著著者著 及所用著法 是皆寂滅相 云何而有著
집착될 것, 집착하는 자, 집착, 또 집착에 쓰이는 것은 모두 그 相이 寂滅한데 어떻게 집착이 존재하겠는가?
23-15) yena g h ti yo gr ho grah t yacca g hyate/
upa nt ni sarv i tasm dgr ho na vidyate//
집착하는 수단과 집착과 집착하는 자 그리고 집착되는 것은 모두 寂滅되어 있다. 그러므로 집착은 존재하지 않는다.
23-16) 若無有著法 言邪是顚倒 言正不顚倒 誰有如是事
전도는 나쁘다고 말하고 비전도는 옳다고 말하지만 만일 집착이라는 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을 소유하는 주체는 누구이겠는가?
23-16) avidyam ne gr he ca mithy v samyageva v /
bhavedviparyaya kasya bhavetkasy viparyaya //
집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옳건 그르건 누구에게 전도가 존재하고 누구에게 비전도가 존재하겠는가?
23-17) 有倒不生倒 無倒不生倒 倒者不生倒 不倒亦不生
전도가 존재해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고 전도가 존재하지 않아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전도된 자는 전도되지 않고 전도되지 않은 자도 역시 전도되지 않는다.
23-17) na c pi vipar tasya sa bhavanti viparyay /
na c pyavipar tasya sa bhavanti viparyay //
이미 전도된 자에게는 전도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아직 전도되지 않은 자에게도 역시 전도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23-18) 若於顚倒時 亦不生顚倒 汝可自觀察 誰生於顚倒
만일 전도되는 중일 때도 역시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누가 전도를 생하는지 스스로 관찰할 수 있으리라.
23-18) na viparyasyam nasya sa bhavanti viparyay /
vim asva svaya kasya sa bhavanti viparyay //
지금 전도되고 있는 중인 것에는 전도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전도들이 발생하는지 그대 스스로 고찰하거라.
23-19) 諸顚倒不生 云何有此義 無有顚倒故 何有顚倒者
모든 전도가 불생이라는 것,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느냐? 전도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전도된 者가 존재하겠는가?
23-19) anutpann katha n ma bhavi yanti viparyay /
viparyaye vaj te u viparyayagata kuta //
불생이 도대체 어떻게 전도이겠는가? 전도가 生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도에 빠진 자가 있겠는가?
23-20) na svato j yate bh va parato naiva j yate/
na svata parata ceti viparyayagata kuta //
존재는 그 자신에서 발생하지 않고 결코 他者에서 발생하지도 않으며 자신과 他者에서도 아닌데 전도에 빠진 자가 어떻게 있겠는가?
23-20) 若常我樂淨 而是實有者 是常我樂淨 則非是顚倒
만일 常과 自我와 樂과 淨, 이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常과 自我와 樂과 淨은 전도가 아니다.
23-21) tm ca uci nitya ca sukha ca yadi vidyate/
tm ca uci nitya ca sukha ca na viparyaya //
만일 自我와 淨과 常과 樂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自我와 淨과 常과 樂은 전도가 아니다.
23-21) 若常我樂淨 而實無有者 無常苦不淨 是則亦應無
만일 常과 我와 樂과 淨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無常과 苦와 不淨, 이것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3-22) n tm ca uci nitya ca sukha ca yadi vidyate/
an tm ' ucyanitya ca naiva du kha ca vidyate//
만일 自我와 淨과 常과 樂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無我와 不淨과 無常과 苦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3-22) 如是顚倒滅 無明則亦滅 以無明滅故 諸行等亦滅
이와 같이 顚倒가 멸하면 無明도 역시 소멸한다.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諸行 따위도 역시 소멸한다.
23-23) eva nirudhyate 'vidy viparyayanirodhan t/
avidy y niruddh y sa sk r dya nirudhyate//
이처럼 顚倒가 소멸되기 때문에 無明이 소멸된다. 무명이 소멸할 때에 行등이 소멸된다.
23-23) 若煩惱性實 而有所屬者 云何當可斷 誰能斷其性
만일 번뇌의 자성은 실재하고 그것(=번뇌)이 속한 자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 번뇌를) 끊을 수 있겠으며 또 누가 능히 그 (번뇌의) 자성을 끊을 수 있겠는가?
23-24) yadi bh t svabh vena kle ke ciddhi kasya cit/
katha n ma prah yeran ka svabh va prah syati//
만일 자성으로서 존재하는 그 어떤 번뇌가 그 누군가에게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 번뇌를) 제거하겠는가? 누가 자성을 제거하겠는가?
23-24) 若煩惱虛妄 無性無屬者 云何當可斷 誰能斷無性
만일 번뇌가 허망한 것이라 자성도 없고 소속된 자도 없다면 어떻게 끊을 수 있겠으며 또 누가 능히 자성도 없는 것을 끊을 수 있겠는가?
23-25) yadyabh t svabh vena kle ke ciddhi kasya cit/
katha n ma prah yeran ko 'sadbh va prah syati//
만일 자성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번뇌가 그 누군가에게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 번뇌를) 제거하겠는가? 누가 실재하지도 않는 존재를 제거하겠는가?
第24 觀四諦品(40偈) 四聖諦에 대한 관찰
ryasatyapar k n ma caturvi atitama prakara am 성스러운 진리(聖諦)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4장(40게)
24-1) 若一切皆空 無生亦無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
만일 일체가 모두 空하다면 生도 없고 滅도 없다. 그렇다면 四聖諦의 法도 존재하지 않는다.
24-1) yadi nyamida sarvamudayo n sti na vyaya /
catur m ryasaty n mabh vaste prasajyate//
만일 이 모든 것이 空하다면 일어남(起)도 없고 소멸함도 없다. (그래서) 그대는 四聖諦도 존재하지 않다는 오류에 빠진다.
24-2) 以無四諦故 見苦與斷集 證滅及修道 如是事皆無
四聖諦가 존재하지 않기에 苦의 見과 集의 斷과 滅의 證과 道의 修, 이런 것들이 모두 없다.
24-2) parij ca prah am ca bh van s k ikarma ca/
catur m ryasaty n mabh v nnopapadyate//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게 아는 知>와 <(번뇌의) 끊음>과 <실천하는 수행>과 <깨달음의 증득>도 성립하지 않는다.
24-3) 以是事無故 則無四道果 無有四果故 得向者亦無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지 道果는 존재하지 않는다. 四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向을 얻은 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4-3) tadabh v nna vidyante catv ry ryaphal ni ca/
phal bh ve phalasth no na santi pratipannak //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四果도 존재하지 않는다. 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果에 오른 자도 없고 (그 果로) 向하여 나아가는 자(四向)도 존재하지 않는다.
24-4) 若無八賢聖 則無有僧寶 以無四諦故 亦無有法寶
만일 여덟가지 賢聖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僧寶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法寶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4-4) sa gho n sti na cetsanti te ' au puru apudgal /
abh v cc ryasaty n saddharmo 'pi na vidyate//
만일 그런 여덟가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僧伽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正法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4-5) 以無法僧寶 亦無有佛寶 如是說空者 是則破三寶
법보와 승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보도 역시 없다. 이처럼 공을 설하는 자는 삼보를 파괴한다.
24-5) dharme c sati sa ghe ca katha buddho bhavi yati/
eva tr yapi ratn ni bruv ah pratib dhase//
法과 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佛이 존재하겠는가?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대는 三寶를 파괴하는 것이 되리라.
24-6) 空法壞因果 亦壞於罪福 亦復悉毁壞 一切世俗法
空이란 법은 인과도 파괴하고 죄와 복도 파괴하고 일체의 세속적인 존재를 모두 훼손하고 파괴한다.
24-6) nyat phalasadbh vamadharma dharmameva ca/
sarvasa vyavah r ca laukik n pratib dhase//
空性을 주장한다면 그대는 果報의 실재와 非法과 法과 세간에서의 일체의 언어 관습을 파괴하게 된다.
24-7) 汝今實不能 知空空因緣 及知於空義 是故自生惱
그대는 지금 空과 空인 까닭과 空의 意義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고뇌를 생한다.
24-7) atra br ma nyat y na tva vetsi prayojanam/
nyat nyat rtha ca tata eva vihanyase//
여기서 우리들은 말한다. "그대는 空性에서 (그) 효용과 空性과 또 空性의 意義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처럼 저항한다."라고.
24-8) 諸佛衣二諦 爲衆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一義諦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二諦에 의거하여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 첫째는 世俗諦로써, 둘째는 第一義諦로써.
24-8) dve satye samup ritya buddh n dharmade an /
lokasa v tisatya ca satya ca param rthata //
부처님들의 敎法은 二諦에 의거한다. (그것은) 세간에서 행해지는 진리와 勝義로서의 진리이다.
24-9) 若人不能知 分別於二諦 則於深佛法 不知眞實義
만일 사람이 二諦를 분별함을 알 수 없다면 심오한 佛法에서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
24-9) ye 'nayorna vij nanti vibh ga satyayordvayo /
te tattva na vij nanti gambh ra buddha sane//
이 두가지 진리의 구별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는 深遠한 진실을 알지 못한다.
24-10) 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 不得第一義 則不得涅槃
만일 俗諦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第一義諦를 얻을 수 없다.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을 수 없다.
24-10) vyavah raman ritya param rtho na de yate/
param rthaman gamya nirv na n dhigamyate//
(세간의) 언어 관습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최고의 意義는 가르쳐지지 않는다. 최고의 의의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열반은 증득되지 않는다.
24-11) 不能正觀空 鈍根則自害 如不善呪術 不善捉毒蛇
空을 올바로 觀할 수 없어서 둔근기는 스스로를 해친다. 잘못된 呪術이나 잘못 잡은 毒蛇와 같이.
24-11) vin ayati durd nyat mandamedhasam/
sarpo yath durg h to vidy v du pras dhit //
잘못 파악된 空性은 지혜가 열등한 자를 파괴한다. 마치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 닦은 呪術과 같이.
24-12) 世尊知是法 甚深微妙相 非鈍根所及 是故不欲說
세존께서는 이 법이 아주 깊고 미묘한 相이어서 둔근기가 미칠 바 아니라고 아셨다. 그래서 설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24-12) ata ca pratyud v tta citta de ayitu mune /
dharma matv sya dharmasya mandairduravag hat m//
그래서 이 법이 미천한 사람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하셔서 (釋迦)牟尼(=聖者)의 설법하려는 마음은 후퇴하였다.
24-13) 汝謂我著空 而爲我生過 汝今所說過 於空則無有
그대는 내가 空에 집착하여 내가 허물을 내었다고 말하지만 그대가 지금 말하는 (그런) 허물은 空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24-13) nyat y madhilaya ya puna kurute bhav n/
do aprasa go n sm ka sa nye nopapadyate//
그대는 다시 空性인 것에 집착을 짓는다. 오류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집착)은 공성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24-14) 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 若無空義者 一切則不成
空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 만일 공의 이치가 없다면 어떤 존재도 성립하지 않는다.
24-14) sarva ca yujyate tasya nyat yasya yujyate
sarva na yujyate tasya nya yasya na yujyate//
空性이 타당한 것, 그것에서는 모든 것이 타당하다. 공성이 타당하지 않은 것, 그것에서는 모든 것이 타당하지 않다.
24-15) 汝今自有過 而以廻向我 如人乘馬者 自忘於所乘
그대는 지금 스스로 과오가 있는데 (그것을) 나에게 돌린다. 마치 말을 탄 사람이 스스로 탄 것을 잊고 있는 것처럼.
24-15) sa tva do n tman y nasm su parip tayan/
a vamev bhir ha sanna vamev si vism ta //
그러한 그대는 자신에 속한 과오들을 우리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마치 그대가 말을 타고 있으면서 그 말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이.
24-16) 若汝見諸法 決定有性者 卽爲見諸法 無因亦無緣
만일 그대가 모든 존재들이 분명히 自性이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모든 존재들이 因도 없고 緣도 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24-16) svabh v dyadi bh v n sadbh vamanupa yasi/
ahetupratyay n bh v stvameva sati pa yasi//
만일 그대가 존재들이 자성으로서 실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와 같다면 그대는 존재들을 因과 緣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24-17) 卽爲破因果 作作者作法 亦復壞一切 萬物之生滅
그것은 곧 인과와 행위와 행위자와 행위되는 것을 파괴하는 것이며 일체 만물의 生滅을 다시 파괴하는 것이기도 하다.
24-17) k rya ca k rana caiva kart ra kara a kriy m/
utp da ca nirodha ca phala ca pratib dhase//
그대는 결과와 원인과 행위의 주체와 수단과 작용과 발생과 소멸과 과보를 파괴한다.
24-18)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여러가지 인연으로 生한 존재를 나는 無라고 말한다. 또 假名이라고도 하고 또 中道의 이치라고도 한다.
24-18) ya prat tyasamutp da nyat t pracak mahe/
s praj aptirup d ya pratipatsaiva madhyam //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들은 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공성)은 의존된 假名이며 그것(=공성)은 실로 中道이다.
24-19)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인연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존재는 공 아닌 것이 없다.
24-19) aprat tya samutpanno dharma ka cinna vidyate/
yasm ttasm da nyo hi dharma ka cinna vidyate//
緣하여 生起(연기)하지 않은 존재(=法)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空하지 않은 존재는 그 무엇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4-20) 若一切不空 則無有生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
만일 일체의 것이 공하지 않다면 生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四聖諦의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24-20) yadya nyamida sarvamudayo n sti na vyaya /
catur m ryasaty n mabh vaste prasajyate//
만일 이 모든 것이 공하지 않다면 생기는 존재하지 않고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류에 빠진다.
24-21) 若不從緣生 云何當有苦 無常是苦義 定性無無常
만일 緣으로부터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苦가 존재하겠는가? 無常은 苦의 이치이지만 결정된 自性으로는 無常도 없다.
24-21) aprat tya samutpanna kuto du kha bhavi yati/
anityamukta duhkha hi tatsv bh vye na vidyate//
緣하지 않고 生起(緣起)한 苦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왜냐하면 "無常한 것은 苦이다"라고 말해졌는데 그것(無常한 것)은 自性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4-22) 若苦有定性 何故從集生 是故無有集 以破空義故
만일 苦가 확고한 자성을 갖는다면 어떻게 集에서 생하겠는가? 그러므로 공의 이치를 파했기에 集은 존재하지 않는다.
24-22) svabh vato vidyam na ki puna samude yate/
tasm tsamudayo n sti nyat pratib dhata //
자성으로서 지금 존재하고 있는 그 무엇이 다시 生起하겠는가? 그러므로 空性을 파괴한다면 集起는 존재하지 않는다.
24-23) 苦若有定性 則不應有滅 汝著定性故 卽破於滅諦
苦가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소멸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대는 확고한 자성에 집착하므로 滅諦를 파괴하게 된다.
24-23) na nirodha svabh vena sato du khasya vidyate/
svabh vaparyavasth n nnirodha pratib dhase//
自性으로서 존재하는 苦에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자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소멸을 파괴하게 된다.
24-24) 苦若有定性 則無有修道 若道可修習 卽無有定性
苦가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修道는 존재하지 못한다. (반대로) 만일 道가 修習할 수 있다면 확고한 자성은 존재하지 못한다.
24-24) sv bh vye sati m rgasya bh van nopapadyate/
ath sau bh vyate m rga sv bh vya te na vidyate//
道가 자성으로서 존재한다면 (道의) 修習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道가 수습된다면 그대가 말한 자성으로서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24-25) 若無有苦諦 及無集滅諦 所可滅苦道 竟爲何所至
만일 苦諦 존재하지 않고 集諦나 滅諦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苦를 滅할 수 있는 것인 道는 마침내 어떻게 도달되겠는가?
24-25) yad du kha samudayo nirodha ca na vidyate/
m rgo du khanirodhatv tkatama pr payi yati//
苦와 集과 滅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苦의 滅로부터 있게 되는 道가 어떻게 도달되겠는가?
24-26) 若苦定有性 先來所不見 於今云何見 其性不異故
만일 苦가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앞서서 보지 못한 것인데 지금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그 자성은 變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4-26) svabh ven parij na yadi tasya puna katham/
parij na nanu kila svabh va samavasthita //
만일 자성으로서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의 완전한 파악이 다시 있겠는가? 실로 확립되어 있는 것이 自性 아닌가?
24-27) 如見苦不然 斷集及證滅 修道及四果 是亦皆不然
苦를 파악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처럼 集을 斷하고 滅을 證하며 道를 修하는 것 및 四果도 역시 모두 옳지 않다.
24-27) prah as k tkara e bh van caivameva te/
parij vanna yujyante catv ryapi phal ni ca//
<(苦諦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斷滅>도 <깨달음의 획득>도 <修習>도 또 四果도 그대에게 있어서 타당하지 않다.
24-28) 是四道果性 先來不可得 諸法性若定 今云何可得
이 네가지 도의 과보의 자성은 원래 포착되지 않는 것인데 모든 존재의 자성이 확립되어 있다면 지금 어떻게 그것을 포착하겠는가?
24-28) svabh ven nadhigata yatphala tatpuna katham/
akya samadhigantu sy tsvabh va parig h ata //
자성이 보전되어 있다면 자성으로서 증득되지 않는 (四)果, 그것을 다시 증득함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
24-29) 若無有四果 則無得向者 以無八聖故 則無有僧寶
만일 四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四向을 획득한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八聖이 존재하지 않기에 승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24-29) phal bh ve phalasth no na santi pratipannak /
sa gho n sti na cetsanti te ' au puru apudgal //
(四)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果에 도달하는 자도 없고 그 과로 향해 나아가는 자도 없다. 만일 이들 八賢聖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僧伽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24-30) 無四聖諦故 亦無有法寶 無法寶僧寶 云何有佛寶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법보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법보와 승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불보가 존재하겠는가?
24-30) abh v cc ryasaty n saddharmo 'pi na vidyate/
dharme c sati sa ghe ca katha buddho bhavi yati//
(四)聖諦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正法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法과 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佛이 존재하겠는가?
24-31) 汝說則不因 菩提而有佛 亦復不因佛 而有於菩提
그대는 菩提를 因하지 않고서 佛이 있고 또 佛을 因하지 않고서 보리가 있다고 말하는 꼴이 된다.
24-31) aprat ty pi bodhi ca tava buddha prasajyate/
aprat ty pi buddha ca tava bodhi prasajyate//
깨달음을 緣하지 않고도 佛이 있다는 오류가 그대에게 있어서 발생한다. 또佛을 緣하지 않고도 깨달음이 있다는 오류가 그대에게 있어서 발생한다.
24-32) 雖復勤精進 修行菩提道 若先非佛性 不應得成佛
비록 다시 부지런히 정진하여 보리도를 수행하여도 원래 佛性이 없으면 성불할 수 없으리라.
24-32) ya c buddha svabh vena sa bodh ya gha annapi/
na bodhisattvacary y bodhi te 'dhigami yati//
그대의 말대로라면(te) 자성으로서 부처가 아닌 자, 그자가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여도 보살행에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리라.
24-33) 若諸法不空 無作罪福者 不空何所作 以其性定故
만일 모든 존재가 空하지 않다면 죄나 복을 짓는 자도 없다. 空하지 않은 것은 그 자성이 확고히 있는데 어떻게 지어지겠는가?
24-33) na ca dharmamadharma v ka cijj tu kari yati/
kima nyasya kartavya svabh va kriyate na hi//
또 어느 누구도 法(=善)과 非法(=惡)을 作爲하지 못하리라. 空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이 作爲되겠는가? 왜냐하면 자성은 작위되지 않기 때문이다.
24-34) 汝於罪福中 不生果報者 是則離罪福 而有諸果報
그대는 (空하다면) 죄나 복을 지어도 과보가 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不空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죄나 복을 떠나서 모든 과보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24-34) vin dharmamadharma ca phala hi tava vidyate/
dharm dharmanimitta ca phala tava na vidyate//
그대(의 주장)에서는 法과 非法(을 행함)이 없이도 과보가 존재하는 꼴이 된다. 그대(의 주장)에서는 법과 비법으로 인한 과보는 존재하지 않는 꼴이 된다.
24-35) 若謂從罪福 而生果報者 果從罪福生 云何言不空
만일 죄나 복에서 과보가 생기는 것이라면 과보는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나 복에( 의존해)서 생기(기에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不空이라고 말하느냐?
24-35) dharm dharmanimitta v yadi te vidyate phalam/
dharm dharmasamutpannama nya te katha phalam//
혹은 만일 그대에게 있어서 法과 非法으로 인한 과보가 존재한다면 법과 비법에서 生起한 과보가 그대에게 있어서 어떻게 不空이겠느냐?
24-36) 汝破一切法 諸因緣空義 則破於世俗 諸餘所有法
그대가 일체법의 모든 인연과 空한 이치를 파괴한다면 그것은 곧 세속에 있는 다른 모든 존재를 파괴하는 꼴이다.
24-36) sarvasa vyavah r ca laukik n pratib dhase/
yatprat tyasmutp da nyat pratib dhase//
그대가 緣起이고 空性인 것을 파괴한다면 그대는 또 세간에서의 모든 언어 관습을 파괴하는 꼴이 된다.
24-37) 若破於空義 卽應無所作 無作而有作 不作名作者
만일 空의 이치를 파괴하면 지을 것도 없다. 지은 것도 없는데 지었다고 하고 짓지도 않았는데 지은 놈이라 부르게 된다.
24-37) na kartavya bhavetki cidan rabdh bhavetkriy /
k raka sy dakurv a nyat pratib dhata //
空性을 파괴하는 자에게는 작위할 그 어떤 대상도 없으며 작용이 시작함도 없으며 행위자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게 되리라.
24-38) 若有決定性 世間種種相 則不生不滅 常住而不壞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세간의 다양한 모습들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常住하여 壞滅되지 않는 것이리라.
24-38) aj tamaniruddha ca k astha ca bhavi yati/
vicitr bhiravasth bhi svabh ve rahita jagat//
자성이 있다면 세계(활동계)는 갖가지 상태를 떠나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常住不動인 것으로 되리라.
24-39) 若無有空者 未得不應得 亦無斷煩惱 亦無苦盡事
만일 空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직 획득되지 않은 것은 획득할 수 없고 번뇌도 끊을 수 없으며 苦가 모두 사라지는 일도 있을 수 없다.
24-39) asa pr ptasya ca pr ptirdu khaparyantakarma ca/
sarvakle aprah na ca yadya nya na vidyate//
만일 空하지 않다면 아직 획득되지 않은 것이 획득하는 것도 苦를 종식시키는 행위도 또 모든 번뇌를 제거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꼴이 된다.
24-40) 是故經中說 若見因緣法 則爲能見佛 見苦集滅道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연기의 법칙을 본다면 능히 佛을 볼 수 있고 苦, 集, 滅, 道를 본다."고 설한다.
24-40) ya prat tyasamutp da pa yat da sa pa yati/
du kha samudaya caiva nirodha m rgameva ca//
이런 緣起를 보는 자, 그는 이것을 본다. 즉 苦와 集 그리고 滅과 道.
第25 觀涅槃品(24偈) 열반에 대한 관찰
nirv apar k n ma pa cavi atitama prakara am 열반에 대한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5장(24게)
25-1) 若一切法空 無生無滅者 何斷何所滅 而稱爲涅槃
만일 모든 존재가 空하여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다면 무엇이 끊어지고 무엇이 소멸되기에 열반이라 稱하겠는가?
25-1) yadi nyamida sarvamudayo n sti na vyaya /
prah dv nirodh dv kasya nirv ami yate//
만일 이 모든 것이 空하다면 生은 존재하지 않고 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제거나 소멸로부터 열반이 추구되겠는가?
25-2) 若諸法不空 則無生無滅 何斷何所滅 而稱爲涅槃
(그대의 말대로) 만일 모든 존재가 空하지 않다면 (오히려)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으니 무엇이 끊어지고 무엇이 소멸되기에 열반이라 稱하겠는가?
25-2) yadya nyamida sarvamudayo n sti na vyaya /
prah dv nirodh dv kasya nirv ami yate//
만일 이 모든 것이 空하지 않다면 生은 존재하지 않고 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제거나 소멸로부터 열반이 추구되겠는가?
25-3) 無得亦無至 不斷亦不常 不生亦不滅 是說名涅槃
획득되는 것도 아니고 도달되는 것도 아니며 단멸된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며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닌 것 이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
25-3) aprah amasa pr ptamanucchinnama vatam/
aniruddhamanutpannametannirv amucyate//
제거되지도 않고 도달되지도 않으며 斷滅의 상태도 아니고 常住하는 것도 아니며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발생하는 것도 아닌 이것이 열반이라고 說해진다.
25-4) 涅槃不名有 有則老死相 終無有有法 離於老死相
열반은 존재라고 할 수 없다. 존재라면 老死의 모습을 띈다. 老死의 모습을 떠난 존재는 전혀 없다.
25-4) bh vast vanna nirv am jar mara alak a am/
prasajyet sti bh vo hi na jar mara a vin //
우선 열반은 존재가 아니다. (열반이 어떤 존재라면) 老死의 모습을 갖는다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老死를 떠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25-5) 若涅槃是有 涅槃卽有爲 終無有一法 而是無爲者
만일 열반이 존재라면 열반은 有爲法이리라. 無爲法인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25-5) bh va ca yadi nirv a nirv a sa sk ta bhavet/
n sa sk to hi vidyate bh va kva cana ka cana//
열반이 만일 존재라면 열반은 作爲된 것(=有爲法)이리라. 왜냐하면 그 어디서건 그 무엇이건 작위되지 않은 것(=無爲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5-6) 若涅槃是有 云何名無受 無有不從受 而名爲有法
만일 열반이 존재라면 어떻게 (五陰인) 取가 없다고 부르겠느냐? (五陰인) 取에 기인하지 않는데 존재(=有)라고 부르는 法은 없다.
25-6) bh va ca yadi nirv amanup d ya tatkatham/
nirv a n nup d ya ka cidbh vo hi vidyate//
또 만일 열반이 존재라면 그런 열반이 어떻게 (五陰에) 의존(=取)하지 않는 것이겠느냐? 왜냐하면 그 어떤 존재도 (五陰에) 의존(=取)하지 않고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5-7) 有尙非涅槃 何況於無耶 涅槃無有有 何處當有無
존재가 오히려 열반이 아닌데 하물며 비존재는 어떠하겠느냐? 열반에는 존재가 없는데 어디에 비존재가 있겠느냐?
25-7) yadi bh vo na nirv amabh va ki bhavi yati/
nirv a yatra bh vo na n bh vastatra vidyate//
만일 존재가 열반이 아니라면 어떠한 비존재가 열반이겠느냐?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곳, 그런 곳에는 비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25-8) 若無是涅槃 云何名不受 未曾有不受 而名爲無法
만일 비존재가 열반이라면 어떻게 취하지 않음이라고 부르겠느냐? 취하지도 않고 비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없다.
25-8) yadyabh va ca nirv amanup d ya tatkatham/
nirv a na hyabh vo 'sti yo 'nup d ya vidyate//
만일 비존재가 열반이라면 그 열반이 어떻게 의존(=取) 없이 존재하겠느냐? 왜냐하면 의존(=取)함이 없는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5-9) 受諸因緣故 輪轉生死中 不受諸因緣 是名爲涅槃
여러 인연을 취해 生死를 윤회하는 중에 그 모든 인연을 취하지 않는 것, 그것을 열반이라고 부른다.
25-9) ya java jav bh va up d ya prat tya v /
so 'prat ty nup d ya nirv amupadi yate//
(五蘊에) 의존(取)하거나 緣하여 생사를 왕래하는 존재, 그것(존재)이 의존(取)하지 않고 緣하지 않기에 열반이라고 敎示되었다.
25-10) 如佛經中說 斷有斷非有 是故知涅槃 非有亦非無
불경에서 설했듯이 생존도 끊고 비생존도 끊는다. 그러므로 열반은 존재도아니고 비존재도 아님을 알지어다.
25-10) prah a c brav cch st bhavasya vibhavasya ca/
tasm nna bh vo n bh vo nirv amiti yujyate//
또 스승께서는 생존과 비생존의 제거를 설하셨다. 그러므로 열반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다.>라는 것이 타당하다.
25-11) 若謂於有無 合爲涅槃者 有無卽解脫 是事則不然
만일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이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존재와 비존재가 바로 해탈이리니 이것은 옳지 못하다.
25-11) bhavedabh vo bh va ca nirv amubhaya yadi/
bhavedabh vo bh va ca mok astacca na yujyate//
만일 비존재와 존재의 兩者가 열반이라면 해탈은 비존재와 존재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25-12) 若謂於有無 合爲涅槃者 涅槃非無受 是二從受生
만일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이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열반은 取함이 없는 것이 아니리라. 그 양자는 取함에서 생한다.
25-12) bhavedabh vo bh va ca nirv amubhaya yadi/
n nup d ya nirv amup d yobhaya hi tat//
만일 열반이 비존재와 존재의 양자라면 열반은 의존(取)함이 없는 것이 아닌 꼴이 되리라. 왜냐하면 그 양자 모두 의존(取)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5-13) 有無共合成 云何名涅槃 涅槃名無爲 有無是有爲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하여 이루어진 것을 어떻게 열반이라 부르겠는가? 열반은 無爲이고 존재와 비존재는 有爲인데.
25-13) bhavedabh vo bh va ca nirv amubhaya katham/
asa sk ta ca nirv am bh v bh vau ca sa sk tau//
어떻게 열반이 비존재와 존재의 양자가 되겠느냐? 열반은 作爲되지 않은 것(無爲法)이며 존재와 비존재는 작위된 것(有爲法)인데.
25-14) 有無二事共 云何是涅槃 是二不同處 如明暗不俱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하는 것이 어떻게 열반이겠는가? 그 양자는 밝음과 어둠이 같이 있지 못하듯이 한 곳에 있지 못한다.
25-14) bhavedabh vo bh va ca nirv a ubhaya katham/
na tayorekatr stitvam lokatamasoryath //
어떻게 열반에 비존재와 존재의 양자가 되겠는가? 이 양자는 같은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밝음과 어둠과 같다.
25-15) 若非有非無 名之爲涅槃 此非有非無 以何而分別
만일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열반이라면 이런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무엇으로 분별하겠느냐?
25-16) naiv bh vo naiva bh vo nirv a yadi vidyate/
naiv bh vo naiva bh va iti kena tadajyate//
만일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열반이 존재한다면 비존재도 아니고 존재도 아니라는 그것이 무엇에 의해 표시되겠느냐?
25-16) 分別非有無 如是名涅槃 若有無成者 非有非無成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고 분별하여 그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만일 존재와 비존재가 성립한다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성립한다.
25-15) naiv bh vo naiva bh vo nirv amiti y ' jan /
abh ve caiva bh ve ca s siddhe sati sidhyati//
열반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고 상정하는 것,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의 성립이 존재할 때에 성립한다.
25-17) 如來滅度後 不言有與無 亦不言有無 非有及非無
如來가 滅度한 후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말라.
25-17) para nirodh dbhagav n bhavat tyeva nohyate/
na bhavatyubhaya ceti nobhaya ceti nohyate//
世尊이 入滅한 후에도 존재한다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兩者라고도, 兩者가 아니라고도 결코 생각되지 않는다.
25-18) 如來現在時 不言有與無 亦不言有無 非有及非無
여래가 지금 존재할 때 있다거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또 있으면서 없다거나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하지 말라.
25-18) ti ham no 'pi bhagav n bhavat tyeva nohyate/
na bhavatyubhaya ceti nobhaya ceti nohyate//
지금 머물러 있는 중인 世尊도 역시 결코 존재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兩者라고도, 兩者가 아니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25-19) 涅槃與世間 無有少分別 世間與涅槃 亦無少分別
열반은 세간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세간도 열반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25-19) na sa s rasya nirv tki cidasti vi e a am/
na nirv asya sa s r tki cidasti vi e a am//
윤회가 열반과 구별되는 점은 그 어떤 것도 없다. 열반이 윤회와 구별되는 점은 그 어떤 것도 없다.
25-20) 涅槃之實際 及與世間際 如是二際者 無毫釐差別
열반의 참된 限界와 세간의 한계, 이 양자의 한계는 털끝 만큼의 차이도 없다.
25-20) nirv asya ca y ko i sa sara asya ca/
na tayorantara ki citsus k mamapi vidyate//
열반에 있어서 限界인 것은 윤회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 양자의 사이에는 그 어떤 미세한 틈도 존재하지 않는다.
25-21) 滅後有無等 有邊等常等 諸見依涅槃 未來過去世
入滅 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有邊등, 常住등의 견해들은 열반과 未來世와 過去世에 의존해 있다.
25-21) para nirodh dant dy vat dy ca d aya /
nirv amapar nta ca p rv nta ca sam rit //
(여래) 入滅 후, 有限등, 常住등의 견해들은 열반과 後의 한계와 前의 한계에 의거한 것들이다.
25-22) 一切法空故 何有邊無邊 亦邊亦無邊 非有非無邊
모든 존재가 空하므로 무엇이 有邊이고 無邊이며 유변이면서 무변이기도 하고 유변도 아니고 무변도 아니겠느냐?
25-22) nye u sarvadharme u kimananta kimantavat/
kimanantamantavacca n nanta n natavacca kim//
모든 존재가 空하다면 무엇이 無限하고 무엇이 有限하며 무엇이 무한하면서 유한하고 무엇이 무한하지도 않고 유한하지도 않는 것이겠느냐?
25-23) 何者爲一異 何有常無常 亦常亦無常 非常非無常
무엇이 같거나 다른 것이겠으며 무엇이 상주하거나, 무상하거나, 상주하면서 무상하거나, 상주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 것이겠느냐?
25-23) ki tadeva kimanyatki vata kima vatam/
a vata vata ca ki v nobhayamapyata //
무엇이 바로 그것(=같은 것)이고 무엇이 다른 것이며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무엇이 영원하지 않은 것이며 무엇이 영원하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이고 거기서 또 무엇이 그 兩者도 아닌 것이겠느냐?
25-24) 諸法不可得 滅一切戱論 無人亦無處 佛亦無所說
모든 法은 잡을 수 없다. 모든 희론이 사라졌으며 사람도 없고 장소도 없으며 부처님께서도 역시 말씀하신 것이 없다.
25-24) sarvopalambhopa ama prapa copa ama iva /
na kva citkasya citka ciddharmo buddhena de ita //
모든 知覺이 寂滅하고 희론이 적멸한 吉祥이다. 어디서건 누구에게건 그 어떤 法도 부처님에 의해 敎示되지 않았다.
第26 觀十二因緣品(9偈) 十二緣起에 대한 관찰
dv da gapar k n ma a vi atitama prakara am 十二支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6장(12게)
26-1) 衆生癡所覆 爲後起三行 以起是行故 隨行墮六趣
중생들은 어리석음에 덮여 나중을 위해 세가지 行을 지어낸다. 그런 行을 짓기에 그 行에 따라 六趣에 떨어진다.
26-1) punarbhav ya sa sk r navidy niv tastridh /
abhisa skurute y stairgati gacchati karmabhi //
無明에 덮인 자는 나중의 生存을 위해 세가지 형성작용(行)을 지어낸다. 그런 행위(業)에 의해 趣로 간다.
26-2) 以諸行因緣 識受六道身 以有識著故 增長於名色
諸行을 인연으로 識이 六道의 몸을 받는다. 識의 집착이 있기에 名色을 키운다.
26-2) vij na sa nivi ate sa sk rapratyaya gatau/
sa nivi e 'tha vij ne n mar pa ni icyate//
형성작용들을 緣으로 하는 識이 趣에 들어간다. 그래서 들어간 識에서 名色이 나타난다.
26-3) 名色增長故 因而生六入 情塵識和合 而生於六觸
名色이 자라나기에 그것을 因하여 六入이 생긴다. 六情(=六根)과 六塵(六境)과 六識이 화합하여 六觸을 生한다.
26-3) ni ikte n mar pe tu a yatanasa bhava /
a yatanam gamya sa spar a sa pravartate//
名色이 나타날 때에 여섯 가지 감각영역이 발생한다.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 의존하여 접촉이 출현한다.
26-4) cak u prat tya r pa ca samanv h rameva ca/
n mar pa prat tyaiva vij na sa pravartate//
눈이 형상(色)들과 注意力을 緣하여, 그렇게 名色을 緣하여 認識이 출현한다.
26-4) 因於六觸故 卽生於三受 以因三受故 而生於渴愛
六觸을 因하기 때문에 세가지 受가 발생한다. 세가지 受를 因하기 때문에 渴愛가 발생한다.
26-5) sa nip tastray yo r pavij nacak u m/
spar a sa tasm tspar cca vedan sa pravartate//
형상(色)과 인식과 눈의 세가지가 화합하는 것, 그것이 접촉이다. 그 접촉으로부터 感受작용이 출현한다.
26-5) 因愛有四取 因取故有有 若取者不取 卽解脫無有
愛로 因하여 네가지 取가 존재한다. 取를 因하여 有가 존재한다. 만일 取하는 者가 取하지 않으면 바로 해탈하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26-6) vedan pratyay t vedan rtha hi t yate/
t yam a up d namup datte caturvidham//
感受 작용에 緣하여 慾望(=渴愛)이 있다. 왜냐하면 감수된 대상을 慾求하기 때문이다. 慾求하는 중인 것이 네가지 종류의 取함을 취득한다.
26-7) up d ne sati bhava up d tu pravartate/
sy ddhi yadyanup d no mucyeta na bhavedbhava //
取함이 존재할 때에 取하는 자에게서 생존(有)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만일 취함이 없다면 해탈할 것이며 생존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6-6) 從有而有生 從生有老死 從老死故有 憂悲諸苦惱
有로부터 生이 존재한다. 生으로부터 老死가 존재한다. 老死로부터 憂와 悲 및 모든 苦惱가 존재한다.
26-8) pa ca skandh sa ca bhavo bhav jj ti pravartate/
jar mara aduhkh di ok saparidevan //
그리고 그 생존(有)은 五蘊이다. 생존에서 生(태어남)이 발생한다. 老死와 苦 등, 悲哀와 悲嘆을 가진 것들이 (발생한다).
26-7) 如是等諸事 皆從生而有 但以是因緣 而集大苦陰
이런 모든 일들은 다 生으로부터 존재한다. 단지 이런 까닭으로 막대한 苦의 蘊이 모인다.
26-9) daurmanasyamup y s j teretatpravartate/
keval!asyaivametasya du khaskandhasya sa bhava //
낙담(落膽)과 초조, 이것들은 生(태어남)에서 나타난다. 이처럼 오직 苦뿐인 집합체(蘊)가 발생한다.
26-8) 是謂爲生死 諸行之根本 無明者所造 智者所不爲
이것을 生死하는 諸行의 근본이라고 한다. 無明한 者가 짓는 것이지만 지혜로운 者가 하는 것은 아니다.
26-10) sa s ram l n sa sk r navidv n sa skarotyata /
avidv n k rakastasm nna vidv stattvadar an t//
그래서 無知한 자는 윤회의 뿌리인 형성작용들(諸行)을 짓는다. 그러므로 無知한 者는 (그런 것들을) 짓는 者이다. 知者는 진실을 觀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26-11) avidy y niruddh y sa sk r masa bhava /
avidy y nirodhastu j nen syaiva bh van t//
無明이 사라질 때에 형성작용들(諸行)은 발생하지 않는다. 무명의 소멸은 이 (十二緣起의) 지혜를 修習(念想)함에 의한다.
26-9) 以是事滅故 是事則不生 但是苦陰聚 如是而正滅
이것이 사라지므로 이것이 생하지 않는다. 오직 苦뿐인 이 陰의 덩어리가 그렇게 하여 제대로 사라진다.
26-12) tasya tasya nirodhena tattann bhipravartate/
du khaskandha keval!a 'yameva samyagnirudhyate//
이것 저것(=十二支의 前支)이 소멸함에 의해 이것 저것이(=後支)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여 오직 苦뿐인 이 집합체(蘊)가 올바르게 사라진다.
第27 觀邪見品(30偈) 邪見에 대한 관찰
d ipar k n ma saptavi atitama prakara a (잘못된) 견해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7장(30게)
27-1) 我於過去世 爲有爲是無 世間常等見 皆依過去世
내가 過去世에 존재했나 존재하지 않았나, 世間은 常住하는가 등의 견해는 모두 과거세에 의존한 것이다.
27-1) d ayo 'bh va n bh va ki nv at te 'dhvan ti ca/
y st vatalok dy p rv nta samup rit //
도대체 내가 과거세(前生)에 존재했었나 존재하지 않았었나, 세간은 常住했는가 등의 見解들은 <以前의 限界>에 의거해 있다.
27-2) 我於未來世 爲作爲不作 有邊等諸見 皆依未來世
내가 미래세를 짓겠는가 짓지 않겠는가, 有邊인가 등의 여러 견해는 다 미래세에 의존한 것이다.
27-2) d ayo na bhavi y mi kimanyo 'n gate 'dhvani/
bhavi y m ti c nt dy apar nta sam rit //
내가 미래세에 존재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존재하겠는가, 또 限界등의 견해는 <나중의 限界>에 의거해 있다.
27-3) 過去世有我 是事不可得 過去世中我 不作今世我
과거세에 내가 있었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과거세에서의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않는다.
27-3) abh mat tamadhv namityetannopapadyate/
yo hi janmasu p rve u sa eva na bhavatyayam//
과거세에 나는 존재했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전의(전생의) 생애들에서의 것, 그것은 결코 이것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27-4) 若謂我卽是 而身有異相 若當離於身 何處別有我
내가 바로 그것이지만 몸은 다른 모습을 띈다고 하겠지만 만일 몸을 떠난다면 어디에 따로 <나>가 존재하겠는가?
27-4) sa ev tmeti tu bhavedup d na vi i yate/
up d navinirmukta tm te katama puna //
그것(=전생의 나)이 바로 나(=自我)라고 하겠지만 取가 구별된다. 취를 떠난 그대의 <나>는 다시 무엇이 있겠느냐?
27-5) 離身無有我 是事爲已成 若謂身卽我 若都無有我
몸을 떠나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은 이미 성립했었다. 만일 몸이 그대로 자아라면 그대에게는 자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27-5) up d navinirmukto n sty tmeti k te sati/
sy dup d namev tm n sti c tmeti va puna //
取를 떠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 取가 바로 자아가 될 것이며 그대의 견해대로라면(va ) 다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꼴이 된다.
27-6) 但身不爲我 身相生滅故 云何當以受 而作於受者
몸은 결코 자아가 아니다. 몸의 相은 生滅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取로써 取하는 者를 짓겠느냐?
27-6) na cop d namev tm vyeti tatsamudeti ca/
katha hi n mop d namup d t bhavi yati//
또 取가 바로 자아(나)는 아니다. 그것(取)은 滅하고 또 生한다. 도대체 取가 어떻게 取하는 主體가 되겠느냐?
27-7) 若離身有我 是事則不然 無受而有我 而實不可得
만일 몸을 떠나서 자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取 없이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런 것은 포착될 수 없다.
27-7) anya punarup d n d tm naivopapadyate/
g hyeta hyanup d no yadyanyo no ca g hyate//
더우기 取와 다른 자아는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다르다면 취가 아닌 것이 포착될 터이지만 (그런 것은)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27-8) 今我不離受 亦不卽是我 非無受非無 此卽決定義
지금의 자아는 取를 떠난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자아인 것도 아니다. 取가 없는 것도,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이치이다.
27-8) eva n nya up d n nna cop d nameva sa /
tm n styanup d no n pi n stye a ni caya //
이처럼 (자아는) 取와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取 그것도 아니며, 취가 없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이것이 정확한 지식이다.
27-9) 過去我不作 是事則不然 過去世中我 異今亦不然
과거의 나는 있지 않았다는 이런 일은 옳지 못하다. 過去世에서의 내가 지금과 다르다는 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27-9) n bh mat tamadhv namityetannopapadyate/
yo hi janmasu p rve u tato 'nyo na bhavatyayam//
<過去世에 나(自我)는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것,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전의 생애들(=前生들)과 다른 이것(今生)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7-10) 若謂有異者 離彼應有今 我住過去世 而今我自生
만일 다르다면 그것 없이도 응당 지금이 존재해야 한다. 내가 과거세에 머물러 있지만 지금의 나는 스스로 생한 꼴이 된다.
27-10) yadi hyaya bhavedanya praty khy y pi ta bhavet/
tathaiva ca sa sa ti hettatra j yeta v m ta //
만일 이것(금생의 나)이 (前世의 나)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전생의 나)을 배제하여도 (이것, 즉 금생의 나는) 존재하게 되리라. 바로 그와 같이 그것(전생의 나)이 같은 상태로 존속하거나 혹은 거기서 죽지도 않은 것이 태어나게 되리라.
27-11) 如是則斷滅 失於業果報 彼作而此受 有如是等過
그렇다면 단멸되어 업과 그 과보가 소실된다. 저 놈이 짓고 이 놈이 받는, 그런 따위의 허물이 있다.
27-11) uccheda karma n as tath nyena k takarma m/
anyena paribhoga sy d evam di prasajyate//
斷滅이고, 業들의 소멸이다. 그래서 다른 이에 의해 지어진 業들이 다른 이에게 수용되는, 그런 따위의 오류에 빠지리라.
27-12) 先無而今有 此中亦有過 我則是作法 亦爲是無因
먼저는 없었는데 지금은 존재한다는 이 말에도 과실이 있다. 자아가 지어진 존재가 되기도 하고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27-12) n pyabh tv samudbh to do o hyatra prasajyate/
k tako v bhaved tm sa bh to v pyahetuka //
존재하지 않았는데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過失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자아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되든가 혹은 원인 없이 발생하는 것이 되리라.
27-13) 如過去世中 有我無我見 若共若不共 是事皆不然
그처럼 과거세에 내가 있었다, 없었다, 있으면서 없었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았다는 견해, 이것은 모두 옳지 못하다.
27-13) evam d irat te y n bh mahamabh maham/
ubhaya nobhaya ceti nai samupapadyate//
이와 같이 과거세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존재했다>, <그 兩者다>, <兩者가 아니다>라는 견해, 이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27-14) 我於未來世 爲作爲不作 如是之見者 皆同過去世
내가 미래세에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을까? 이처럼 보는 것은 모두 過去世의 경우와 동일하다.
27-14) adhvanyan gate ki nu bhavi y m ti dar anam/
na bhavi y mi cetyetadat ten dhvan samam//
<未來世에 도대체 나는 존재할 것인가?>라든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런 견해는 過去世(에 관한 견해)와 동일하다.
27-15) 若天卽是人 則墮於常邊 天則爲無生 常法不生故
만일 (전생에 천신이었다가 죽어서 현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경우) 天神이 바로 지금의 인간이라면 常見이라는 극단론에 빠진다. 천신은 生함이 없(이도 존재하)는 꼴이 된다. 常住하는 존재는 生하지 않(고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27-15) sa deva sa manu ya cedeva bhavati vatam/
anutpanna ca deva sy jj yate na hi vatam//
그 天神 그대로가 인간이 된다면 그와 같은 것은 常住하는 것이 된다. 또 천신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리라. 왜냐하면 常住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27-16) 若天異於人 是卽爲無常 若天異人者 是則無相續
만일 天神이 인간과 다르다면 그것은 常住함이 없다는 말이다. 만일 천신이 인간과 다르다면 상속도 존재하지 않는다.
27-16) dev danyo manu ya ceda vatamato bhavet/
dev danyo manu ya cetsa tatirnopapadyate//
만일 인간이 天神과 다르다면, 그렇다면 常住하지 않는 것이 되리라. 만일 인간이 천신과 다르다면 相續이 성립되지 않는다.
27-17) 若半天半人 則墮御二邊 常及於無常 是事則不然
만일 半은 天神이고 반은 인간이라면 두가지 극단(二邊)에 빠진다. 즉 常住와 無常이다. 이것은 옳지 못하다.
27-17) divyo yadyekade a sy dekade a ca m nu a /
a vata vata ca bhavettacca na yujyate//
만일 일부분은 天神에 속하고 일부분은 인간에 속한다면 非常住와 常住가 (동시에) 존재하는 꼴이 되리라. 그러나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27-18) 若常及無常 是二俱成者 如是則應成 非常非無常
만일 常住와 無常의 양자가 함께 성립한다면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 것 역시 성립해야 한다.
27-18) a vata vata ca prasiddhamubhaya yadi/
siddhe na vata k ma naiv vatamityapi//
만일 非常住와 常住의 兩者가 함께 성립한다면 상주도 아니고 비상주도 아닌 것도 멋대로 성립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27-19) 法若定有來 及定有去者 先死則無始 而實無此事
어떤 존재가 만일 오는 것이 확실히 있고 가는 것이 확실히 있다면 生死는 시작이 없는 꼴이 되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없다.
27-19) kuta cid gata ka citki cidgacchetpuna kva cit/
yadi tasm dan distu sa s ra sy nna c sti sa //
만일 그 무엇인가가 그 어디에서 와서 다시 그 어딘가에서 어디엔가로 가는 것이라면, 그렇기 때문에 윤회는 시작이 없는 꼴이 되리라. 그러나 그런 일은 없다.
27-20) 今若無有常 云何有無常 亦常亦無常 非常非無常
이제 만일 상주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상한 것과 상주하면서 무상한 것과 상주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 것이 존재하겟느냐?
27-20) n sti cecch vata ka citko bhavi yatya vata /
vato ' vata c pi dv bhy m bhy tirask ta //
만일 그 무엇이건 常住하는 것은 없다면 상주하지 않는 그 무엇과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것>도, 또 <兩者를 떠난 이런 것>이 있겠느냐?
27-21) 若世間有邊 云何有後世 若世間無邊 云何有後世
만일 세간이 끝이 있다면 어떻게 後世(來生)가 있겠는가? 만일 세간이 끝이 없다면 어떻게 후세가 있겠는가?
27-21) antav n yadi loka sy tparaloka katha bhavet/
ath pyanantav l loka paraloka katha bhavet//
만일 世間에 한계가 있다면 어떻게 後世(來生)가 존재하겠는가? 그렇다고 세간이 無限하다고 하면 어떻게 後世가 존재하겠는가?
27-22) 五陰常相續 猶如燈火炎 以是故世間 不應邊無邊
五陰은 늘 상속하여 마치 등불의 불꽃과 같다. 그러므로 세간은 한계가 있거나 한계가 없어서는 안된다.
27-22) skandh n me a sa t no yasm dd p rci miva/
pravartate tasm nn nt nantavattva ca yujyate//
蘊들(=五蘊)의 이런 연속(=相續)은 바로 등불의 불꽃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無限하다거나 有限하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27-23) 若先五陰壞 不因是五陰 更生後五陰 世間則有邊
만일 선행하는 五陰이 파괴되고 그 오음을 因하지 않고서 다시 나중의 오음이 생기는 것이라면 세간은 한계가 있으리라.
27-23) p rve yadi ca bhajyerannutpadyeranna c pyam /
skandh skandh n prat tyem natha loko 'ntav n bhavet//
만일 선행하는 것들(五蘊)이 파괴되고 이 蘊들(오온)에 緣하여 (나중의) 저 蘊들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경우 세간은 有限하리라.
27-24) 若先陰不壞 亦不因是陰 而生後五陰 世間則無邊
만일 선행하는 오음이 파괴되지도 않고 또 그 오음을 因하지도 않고서 나중의 오음이 생기는 것이라면 세간은 한계가 없으리라.
27-24) p rve yadi na bhajyerannutpadyeranna c pyam /
skandh skandh n prat tyem n loko 'nanto bhavedatha//
만일 선행하는 것들(五蘊)이 파괴되지 않고 그 蘊들(오온)에 緣하여 (나중의) 이 蘊들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경우 세간은 無限하리라.
27-25) 若世半有邊 世間半無邊 是則亦有邊 亦無邊不然
만일 세계가 반은 유한하고 반은 무한하다면 이것은 유한하기도 하면서 무한하다는 것인데 그럴 수 없다.
27-25) antav nekade a cedekade astvanantav n/
sy dantav nananta ca lokastacca na yujyate//
만일 (세계가 시간적으로) 일부분은 有限하지만 일부분은 無限하다면 세계는 유한하면서 또 무한하기도 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27-26) 彼受五陰者 云何一分破 一分而不破 是事則不然
그렇게 오음을 취한 者가 어떻게 일부분은 파괴되고 일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느냐? 이것은 옳지 못하다.
27-26) katha t vadup d turekade o vina k yate/
na na k yate caikade a eva caitanna yujyate//
무엇보다도 우선 어떻게 取하는 主體의 일부분은 소멸되는데 일부분은 소멸되지 않는가? 그렇게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
27-27) 受亦復如是 云何一分破 一分而不破 是事亦不然
取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어떻게 일부분은 파괴되고 일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이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27-27) up d naikade a ca katha n ma vina k yate/
na na k yate caikade o naitadapyupapadyate//
도대체 어떻게 取의 일부분은 소멸되고 일부분은 소멸되지 않겠는가? 이것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27-28) 若亦有無邊 是二得成者 非有非無邊 是則亦應成
만일 한계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것, 이 양자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라면 한계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것, 이것도 역시 성립할 수 있으리라.
27-28) antavacc pyananta ca prasiddhamubhaya yadi/
siddhe naiv ntavatk ma naiv nantavadityapi//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양자가 만일 성립한다면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는다는 것도 기꺼이 성립할 것이다.
27-30) 一切法空故 世間常等見 何處於何時 誰起是諸見
일체의 존재가 空하기 때문에 세간은 상주한다는 등의 견해, 이 모든 견해를 어디서, 어느 때, 누가 일으키겠는가?
27-29) atha v sarvabh v n nyatv cch vat daya /
kva kasya katam kasm tsa bhavi yanti d aya //
그러면 일체의 존재가 空性이기 때문에 常住등의 견해들이 어디에, 무엇에 대해, 누구에게, 어째서 발생할 수 있겠는가?
27-30) 瞿曇大聖王 憐愍說是法 悉斷一切見 我今稽首禮
大聖王 瞿曇께서 연민의 마음에서 이 法을 설하셔서 모든 견해를 다 끊어 주셨기에 저는 이제 머리 조아려 예배드립니다.
27-30) sarvad iprah ya ya saddharmamade ayat/
anukamp mup d ya ta namasy mi gautamam//
(잘못된) 모든 견해를 제거하기 위해 연민을 갖고 正法을 설해 주셨던 가우따마 그분께 귀의합니다.
No. 1564 [cf. Nos. 1565-1567]
中論卷第一
釋僧叡序
中論有五百偈.龍樹菩薩之所造也以中爲名者.照其實也.以論爲稱者.盡其言也.實非名不悟.故寄中以宣之.言非釋不盡.故假論以明之.其實旣宣.其言旣明.於菩薩之行道場之照.朗然懸解矣.夫滯惑生於倒見.三界以之而淪溺.偏悟起於厭智.耿介以之而致乖.故知大覺在乎曠照.小智纏乎隘心.照之不曠.則不足以夷有無一道俗.知之不盡.則未可以涉中途泯二際.道俗之不夷.二際之不泯.菩薩之憂也.是以龍樹大士.析之以中道.使惑趣之徒望玄指而一變.括之以卽化.令玄悟之賓喪諮詢於朝徹.蕩蕩焉.眞可謂坦夷路於沖階. 玄門於宇內.扇慧風於陳枚.流甘露於枯悴者矣.夫百樑之 興.則鄙茅茨之仄陋.睹斯論之宏曠.則知偏悟之鄙倍.幸哉此區之赤縣.忽得移靈鷲以作鎭.險陂之邊情.乃蒙流光之餘惠.而今而後.談道之賢始可與論實矣.云天竺諸國.敢預學者之流.無不翫味斯論以爲喉衿.其染翰申釋者.甚亦不少.今所出者.是天竺梵志名賓伽羅.秦言靑目之所釋也.其人雖信解深法.而辭不雅中.其中乖闕煩重者.法師皆裁而裨之.於經通之理盡矣.文或左右未盡善也.百論治外以閑邪.斯文 內以流滯.大智釋論之淵博.十二門觀之精詣.尋斯四者.眞若日月入懷無不朗然鑒徹矣.予翫之味之不能釋手.遂復忘其鄙拙.託悟懷於一序.幷目品義題之於首.豈期能釋耶.蓋是欣自同之懷耳
中論觀因緣品第一(十六偈)
龍樹菩薩造梵志靑目釋
姚秦三藏鳩摩羅什譯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問曰.何故造此論.答曰.有人言萬物從大自在天生.有言從韋紐天生.有言從和合生.有言從時生.有言從世性生.有言從變生.有言從自然生.有言從微塵生.有如是等謬故墮於無因邪因斷常等邪見.種種說我我所.不知正法.佛欲斷如是等諸邪見令知佛法故.先於聲聞法中說十二因緣.又爲已習行有大心堪受深法者.以大乘法說因緣相.所謂一切法不生不滅不一不異等.畢竟空無所有.如般若波羅蜜中說.佛告須菩提.菩薩坐道場時.觀十二因緣.如虛空不可盡.佛滅度後.後五百歲像法中.人根轉鈍.深著諸法.求十二因緣五陰十二入十八界等決定相.不知佛意但著文字.聞大乘法中說畢竟空.不知何因緣故空.卽生疑見.若都畢竟空.云何分別有罪福報應等.如是則無世諦第一義諦.取是空相而起貪著.於畢竟空中生種種過.龍樹菩薩爲是等故.造此中論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以此二偈讚佛.則已略說第一義.問曰.諸法無量.何故但以此八事破.答曰法雖無量.略說八事則爲總破一切法.不生者.諸論師種種說生相.或謂因果一.或謂因果異.或謂因中先有果.或謂因中先無果.或謂自體生.或謂從他生.或謂共生.或謂有生.或謂無生.如是等說生相皆不然.此事後當廣說.生相決定不可得故不生.不滅者.若無生何得有滅.以無生無滅故.餘六事亦無問曰.不生不滅已總破一切法.何故復說六事.答曰.爲成不生不滅義故.有人不受不生不滅.而信不常不斷.若深求不常不斷.卽是不生不滅.何以故.法若實有則不應無.先有今無是卽爲斷.若先有性是則爲常.是故說不常不斷.卽入不生不滅義.有人雖聞四種破諸法.猶以四門成諸法.是亦不然.若一則無緣.若異則無相續.後當種種破.是故復說不一不異.有人雖聞六種破諸法.猶以來出成諸法.來者.言諸法從自在天世性微塵等來.出者.還去至本處.復次萬物無生.何以故.世間現見故.世間眼見劫初穀不生.何以故.離劫初穀.今穀不可得.若離劫初穀有今穀者.則應有生.而實不爾.是故不生.問曰若不生則應滅.答曰不滅.何以故.世間現見故.世間眼見劫初穀不滅.若滅今不應有穀而實有穀.是故不滅.問曰.若不滅則應常.答曰不常.何以故.世間現見故.世間眼見萬物不常.如穀芽時種則變壞.是故不常.問曰若不常則應斷.答曰不斷.何以故.世間現見故.世間眼見萬物不斷.如從穀有芽.是故不斷.若斷不應相續.問曰.若爾者萬物是一.答曰不一.何以故.世間現見故.世間眼見萬物不一.如穀不作芽芽不作穀.若穀作芽芽作穀者.應是一.而實不爾.是故不一.問曰若不一則應異.答曰不異.何以故.世間現見故.世間眼見萬物不異.若異者.何故分別穀芽穀莖穀葉.不說樹芽樹莖樹葉.是故不異.問曰.若不異應有來.答曰無來何以故.世間現見故.世間眼見萬物不來.如穀子中芽無所從來.若來者.芽應從餘處來.如鳥來栖樹.而實不爾.是故不來.問曰.若不來應有出.答曰不出.何以故.世間現見故.世間眼見萬物不出.若有出.應見芽從穀出.如蛇從穴出.而實不爾.是故不出.問曰.汝雖釋不生不滅義.我欲聞造論者所說.答曰
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
不自生者.萬物無有從自體生.必待衆因.復次若從自體生.則一法有二體.一謂生.二謂生者.若離餘因從自體生者.則無因無緣.又生更有生生則無窮.自無故他無.何以故.有自故有他.若不從自生.亦不從他生.共生則有二過.自生他生故.若無因而有萬物者.是則爲常.是事不然.無因則無果.若無因有果者.布施持戒等應墮地獄.十惡五逆應當生天.以無因故.復次
如諸法自性 不在於緣中
以無自性故 他性亦復無
諸法自性不在衆緣中.但衆緣和合故得名字.自性卽是自體.衆緣中無自性.自性無故不自生.自性無故他性亦無.何以故.因自性有他性.他性於他亦是自性.若破自性卽破他性.是故不應從他性生.若破自性他性卽破共義.無因則有大過.有因尙可破.何況無因.於四句中生不可得.是故不生.問曰.阿毘曇人言.諸法從四緣生.云何言不生.何謂四緣
因緣次第緣 緣緣增上緣
四緣生諸法 更無第五緣
一切所有緣.皆攝在四緣.以是四緣萬物得生.因緣名一切有爲法.次第緣除過去現在阿羅漢最後心心數法.餘過去現在心心數法.緣緣增上緣一切法.答曰
果爲從緣生 爲從非緣生
是緣爲有果 是緣爲無果
若謂有果.是果爲從緣生.爲從非緣生.若謂有緣.是緣爲有果爲無果.二俱不然.何以故
因是法生果 是法名爲緣
若是果未生 何不名非緣
諸緣無決定.何以故.若果未生.是時不名爲緣.但眼見從緣生果.故名之爲緣.緣成由於果.以果後緣先故.若未有果何得名爲緣.如甁以水土和合故有甁生.見甁緣知水土等是甁緣.若甁未生時.何以不名水土等爲非緣.是故果不從緣生.緣尙不生.何況非緣.復次
果先於緣中 有無俱不可
先無爲誰緣 先有何用緣
緣中先非有果非無果.若先有果不名爲緣.果先有故.若先無果亦不名爲緣.不生餘物故.問曰.已總破一切因緣.今欲聞一一破諸緣.答曰
若果非有生 亦復非無生
亦非有無生 何得言有緣
若緣能生果.應有三種.若有若無若有無.如先偈中說.緣中若先有果不應言生.以先有故.若先無果不應言生.以先無故.亦應與非緣同故.有無亦不生者.有無名爲半有半無.二俱有過.又有與無相違.無與有相違.何得一法有二相.如是三種求果生相不可得故.云何言有因緣.次第緣者果若未生時 則不應有滅
滅法何能緣 故無次第緣
諸心心數法.於三世中次第生.現在心心數法滅.與未來心作次第緣.未來法未生.與誰作次第緣.若未來法已有卽是生.何用次第緣.現在心心數法無有住時.若不住何能爲次第緣.若有住則非有爲法.何以故.一切有爲法常有滅相故.若滅已則不能與作次第緣.若言滅法猶有則是常.若常則無罪福等.若謂滅時能與作次第緣.滅時半滅半未滅.更無第三法.名爲滅時.又佛說.一切有爲法念念滅.無一念時住.云何言現在法有欲滅未欲滅.汝謂一念中無是欲滅未欲滅.則破自法.汝阿毘曇說.有滅法有不滅法.有欲滅法有不欲滅法.欲滅法者.現在法將欲滅.未欲滅法者.除現在將欲滅法.餘現在法及過去未來無爲法.是名不欲滅法.是故無次第緣.緣緣者
如諸佛所說 眞實微妙法
於此無緣法 云何有緣緣
佛說.大乘諸法.若有色無色有形無形有漏無漏有爲無爲等諸法相入於法性.一切皆空無相無緣.譬如衆流入海同爲一味.實法可信隨宜所說不可爲實.是故無緣緣.增上緣者
諸法無自性 故無有有相
說有是事故 是事有不然
經說十二因緣.是事有故是事有.此則不然.何以故.諸法從衆緣生故自無定性.自無定性故無有有相.有相無故.何得言是事有故是事有.是故無增上緣.佛隨凡夫分別有無故說.復次
略廣因緣中 求果不可得
因緣中若無 云何從緣出
略者.於和合因緣中無果.廣者.於一一緣中亦無果.若略廣因緣中無果.云何言果從因緣出.復次
若謂緣無果 而從緣中出
是果何不從 非緣中而出
若因緣中求果不可得.何故不從非緣出.如泥中無甁.何故不從乳中出.復次
若果從緣生 是緣無自性
從無自性生 何得從緣生
果不從緣生 不從非緣生
以果無有故 緣非緣亦無
果從衆緣生.是緣無自性.若無自性則無法.無法何能生.是故果不從緣生.不從非緣生者.破緣故說非緣.實無非緣法.是故不從非緣生.若不從二生.是則無果.無果故緣非緣亦無
中論觀去來品第二(二十五偈)
問曰.世間眼見三時有作.已去未去去時.以有作故當知有諸法.答曰
已去無有去 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
已去無有去已去故.若離去有去業.是事不然.未去亦無去.未有去法故.去時名半去半未去.不離已去未去故.問曰
動處則有去 此中有去時
非已去未去 是故去時去
隨有作業處.是中應有去.眼見去時中有作業.已去中作業已滅.未去中未有作業.是故當知去時有去.答曰
云何於去時 而當有去法
若離於去法 去時不可得
去時有去法.是事不然.何以故.離去法去時不可得.若離去法有去時者.應去時中有去.如器中有果.復次
若言去時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時 去時獨去故
若謂已去未去中無去.去時實有去者.是人則有咎.若離去法有去時.則不相因待.何以故.若說去時有去.是則爲二.而實不爾.是故不得言離去有去時.復次
若去時有去 則有二種去
一謂爲去時 二謂去時去
若謂去時有去是則有過.所謂有二去.一者因去有去時.二者去時中有去.問曰.若有二去有何咎.答曰
若有二去法 則有二去者
以離於去者 去法不可得
若有二去法.則有二去者.何以故.因去法有去者故.一人有二去二去者.此則不然.是故去時亦無去.問曰.離去者無去法可爾.今三時中定有去者.答曰
若離於去者 去法不可得
以無去法故 何得有去者
若離於去者.則去法不可得.今云何於無去法中.言三時定有去者.復次
去者則不去 不去者不去
離去不去者 無第三去者
無有去者.何以故.若有去者則有二種.若去者若不去者.若離是二.無第三去者.問曰.若去者去有何咎.答曰
若言去者去 云何有此義
若離於去法 去者不可得
若謂定有去者用去法.是事不然.何以故.離去法.去者不可得故.若離去者定有去法.則去者能用去法.而實不爾.復次若去者有去 則有二種去
一謂去者去 二謂去法去
若言去者用去法.則有二過.於一去者中而有二去.一以去法成去者.二以去者成去法.去者成已然後用去法.是事不然.是故先三時中.謂定有去者用去法.是事不然.復次
若謂去者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者 說去者有去
若人說去者能用去法.是人則有咎.離去法有去者.何以故.說去者用去法.是爲先有去者後有去法.是事不然.是故三
04b21 時中無有去者.復次若決定有去有去者.應有初發.而於三時中.求發不可得.何以故
已去中無發 未去中無發
去時中無發 何處當有發
何以故.三時中無發
未發無去時 亦無有已去
是二應有發 未去何有發
無去無未去 亦復無去時
一切無有發 何故而分別
若人未發則無去時.亦無已去.若有發當在二處.去時已去中.二俱不然.未去時未有發故.未去中何有發.發無故無去.無去故無去者.何得有已去未去去時.問曰.若無去無去者.應有住住者.答曰
去者則不住 不去者不住
離去不去者 何有第三住
若有住有住者.應去者住.若不去者住.若離此二.應有第三住.是事不然.去者不住.去未息故.與去相違名爲住.不去者亦不住.何以故.因去法滅故有住.無去則無住.離去者不去者.更無第三住者.若有第三住者.卽在去者不去者中.以是故.不得言去者住.復次
去者若當住 云何有此義
若當離於去 去者不可得
汝謂去者住.是事不然.何以故.離去法.去者不可得.若去者在去相.云何當有住.去住相違故.復次
去未去無住 去時亦無住
所有行止法 皆同於去義
若謂去者住. 是人應在去時已去未去中住.三處皆無住.是故汝言去者有住.是則不然.如破去法住法.行止亦如是.行者.如從穀子相續至芽莖葉等.止者.穀子滅故芽莖葉滅.相續故名行.斷故名止.又如無明緣諸行乃至老死是名行.無明滅故諸行等滅是名止.問曰.汝雖種種門破去去者住住者.而眼見有去住.答曰.肉眼所見不可信.若實有去去者.爲以一法成.爲以二法成.二俱有過.何以故
去法卽去者 是事則不然
去法異去者 是事亦不然
若去法去者一.是則不然.異亦不然.問曰一異有何過.答曰
若謂於去法 卽爲是去者
作者及作業 是事則爲一
若謂於去法 有異於去者
離去者有去 離去有去者
如是二俱有過.何以故.若去法卽是去者.是則錯亂破於因緣.因去有去者.因去者有去.又去名爲法.去者名爲人.人常法無常.若一者則二俱應常二俱無常.一中有如是等過.若異者則相違.未有去法應有去者.未有去者應有去法.不相因待.一法滅應一法在.異中有如是等過.復次
去去者是二 若一異法成
二門俱不成 云何當有成
若去者去法.有若以一法成.若以異法成.二俱不可得.先已說無第三法成.若謂有成.應說因緣無去無去者.今當更說
因去知去者 不能用是去
先無有去法 故無去者去
隨以何去法知去者.是去者不能用是去法.何以故.是去法未有時.無有去者.亦無去時已去未去.如先有人有城邑得有所起.去法去者則不然.去者因去法成.去法因去者成故.復次
因去知去者 不能用異去
於一去者中 不得二去故
隨以何去法知去者.是去者不能用異去法.何以故.一去者中.二去法不可得故.復次
決定有去者 不能用三去
不決定去者 亦不用三去
去法定不定 去者不用三
是故去去者 所去處皆無
決定者.名本實有.不因去法生.去法名身動.三種名未去已去去時.若決定有去者.離去法應有去者.不應有住.是故說決定有去者不能用三去.若去者不決定.不決定名本實無.以因去法得名去者.以無去法故不能用三去.因去法故有去者.若先無去法則無去者.云何言不決定去者用三去.如去者去法亦如是.若先離去者.決定有去法.則不因去者有去法.是故去者.不能用三去法.若決定無去法去者何所用.如是思惟觀察.去法去者所去處.是法皆相因待.因去法有去者.因去者有去法.因是二法則有可去處不得言定有.不得言定無.是故決定知.三法虛妄.空無所有.但有假名.如幻如化
中論觀六情品第三(八偈)
問曰.經中說有六情.所謂
眼耳及鼻舌 身意等六情
此眼等六情 行色等六塵
此中眼爲內情色爲外塵.眼能見色乃至意爲內情.法爲外塵.意能知法.答曰無也.何以故
是眼則不能 自見其己體
若不能自見 云何見餘物
是眼不能見自體.何以故.如燈能自照亦能照他.眼若是見相.亦應自見亦應見他.而實不爾.是故偈中說.若眼不自見何能見餘物.問曰.眼雖不能自見.而能見他.如火能燒他不能自燒.答曰
火喩則不能 成於眼見法
去未去去時 已總答是事
汝雖作火喩.不能成眼見法.是事去來品中已答.如已去中無去.未去中無去.去時中無去.如已燒未燒燒時俱無有燒.如是已見未見見時俱無見相.復次
見若未見時 則不名爲見
而言見能見 是事則不然
眼未對色.則不能見.爾時不名爲見.因對色名爲見.是故偈中說.未見時無見.云何以見能見.復次二處俱無見法.何以故
見不能有見 非見亦不見
若已破於見 則爲破見者
見不能見.先已說過故.非見亦不見.無見相故.若無見相.云何能見.見法無故見者亦無.何以故.若離見有見者.無眼者.亦應以餘情見.若以見見.則見中有見相.見者無見相.是故偈中說.若已破於見則爲破見者.復次
離見不離見 見者不可得
以無見者故 何有見可見
若有見見者則不成.若無見見者亦不成.見者無故.云何有見可見.若無見者.誰能用見法分別外色.是故偈中說.以無見者故何有見可見.復次
見可見無故 識等四法無
四取等諸緣 云何當得有
見可見法無故.識觸受愛四法皆無.以無愛等故.四取等十二因緣分亦無.復次
耳鼻舌身意 聲及聞者等
當知如是義 皆同於上說
如見可見法空.屬衆緣故無決定.餘耳等五情聲等五塵.當知亦同見可見法.義同故不別說
中論觀五陰品第四(九偈)
問曰.經說有五陰.是事云何.答曰
若離於色因 色則不可得
若當離於色 色因不可得
色因者.如布因縷.除縷則無布.除布則無縷.布如色縷如因.問曰若離色因有色.有何過.答曰
離色因有色 是色則無因
無因而有法 是事則不然
如離縷有布.布則無因.無因而有法.世間所無有.問曰.佛法外道法世間法中皆有無因法.佛法有三無爲.無爲常故無因.外道法中虛空時方神微塵涅槃等.世間法虛空時方等.是三法無處不有.故名爲常.常故無因.汝何以說無因法世間所無.答曰.此無因法但有言說.思惟分別則皆無.若法從因緣有.不應言無因.若無因緣則如我說.問曰.有二種因.一者作因.二者言說因.是無因法無作因.但有言說因.令人知故.答曰.雖有言說因.是事不然.虛空如六種中破.餘事後當破.復次現事尙皆可破.何況微塵等不可見法.是故說無因法世間所無.問曰.若離色有色因.有何過.答曰
若離色有因 則是無果因
若言無果因 則無有是處
若除色果.但有色因者.卽是無果因.問曰.若無果有因.有何咎.答曰.無果有因世間所無.何以故.以果故名爲因.若無果云何名因.復次若因中無果者.物何以不從非因生.是事如破因緣品中說.是故無有無果因.復次
若已有色者 則不用色因
若無有色者 亦不用色因
二處有色因.是則不然.若先因中有色.不名爲色因.若先因中無色.亦不名爲色因.問曰.若二處俱不然.但有無因色.有何咎.答曰
無因而有色 是事終不然
是故有智者 不應分別色
若因中有果因中無果.此事尙不可得何況無因有色.是故言無因而有色.是事終不然.是故有智者.不應分別色.分別名凡夫.以無明愛染貪著色.然後以邪見生分別戱論說因中有果無果等.今此中求色不可得.是故智者不應分別.復次
若果似於因 是事則不然
果若不似因 是事亦不然
若果與因相似.是事不然.因細果 故.因果色力等各異.如布似縷則不名布.縷多布一故.不得言因果相似.若因果不相似.是亦不然.如麻縷不成絹. 縷無出細布.是故不得言因果不相似.二義不然.故無色無色因
受陰及想陰 行陰識陰等
其餘一切法 皆同於色陰
四陰及一切法.亦應如是思惟破.又今造論者.欲讚美空義故.而說偈
若人有問者 離空而欲答
是則不成答 俱同於彼疑
若人有難問 離空說其過
是不成難問 俱同於彼疑
若人論議時.各有所執.離於空義而有問答者.皆不成問答.俱亦同疑.如人言甁是無常.問者言.何以故無常.答言.從無常因生故.此不名答.何以故.因緣中亦疑不知爲常爲無常.是爲同彼所疑.問者若欲說其過.不依於空而說諸法無常.則不名問難.何以故.汝因無常破我常.我亦因常破汝無常.若實無常則無業報.眼耳等諸法念念滅.亦無有分別.有如是等過.皆不成問難.同彼所疑.若依空破常者.則無有過.何以故.此人不取空相故.是故若欲問答.尙應依於空法.何況欲求離苦寂滅相者
中論觀六種品第五(八偈)
問曰.六種各有定相.有定相故則有六種.答曰
空相未有時 則無虛空法
若先有虛空 卽爲是無相
若未有虛空相.先有虛空法者.虛空則無相.何以故無色處名虛空相.色是作法無常.若色未生.未生則無滅.爾時無虛空相.因色故有無色處.無色處名虛空相.問曰.若無相有虛空.有何咎.答曰
是無相之法 一切處無有
於無相法中 相則無所相
若於常無常法中.求無相法不可得.如論者言.是有是無云何知各有相.故生住滅是有爲相.無生住滅是無爲相.虛空若無相.則無虛空.若謂先無相後相來相者.是亦不然.若先無相.則無法可相.何以故
有相無相中 相則無所住
離有相無相 餘處亦不住
如有峰有角尾端有毛頸下垂[古*頁].是名牛相.若離是相則無牛.若無牛是諸相無所住.是故說於無相法中相則無所相.有相中相亦不住.先有相故.如水相中火相不住.先有自相故.復次若無相中相住者.則爲無因.無因名爲無法.而有相·相·可相.常相因待故.離有相無相法.更無第三處可相.是故偈中說離有相無相餘處亦不住.復次
相法無有故 可相法亦無
可相法無故 相法亦復無
相無所住故.則無可相法.可相法無故.相法亦無.何以故.因相有可相.因可相有相.共相因待故
是故今無相 亦無有可相
離相可相已 更亦無有物
於因緣中.本末推求.相可相決定不可得.是二不可得故.一切法皆無.一切法皆攝在相可相二法中.或相爲可相.或可相爲相.如火以煙爲相.煙亦復以火爲相.問曰.若無有有.應當有無.答曰
若使無有有 云何當有無
有無旣已無 知有無者誰
凡物若自壞.若爲他壞.名爲無.無不自有.從有而有.是故言若使無有有云何當有無.眼見耳聞尙不可得.何況無物.問曰.以無有有故無亦無.應當有知有無者.答曰.若有知者.應在有中應在無中.有無旣破.知者亦同破
是故知虛空 非有亦非無
非相非可相 餘五同虛空
如虛空種種求相不可得.餘五種亦如是.問曰.虛空不在初不在後.何以先破.答曰.地水火風衆緣和合故易破.識以苦樂因故知無常變異故易破.虛空無如是相.但凡夫 望爲有.是故先破.復次虛空能持四大.四大因緣有識.是故先破根本.餘者自破.問曰.世間人盡見諸法是有是無.汝何以獨與世間相違.言無所見.答曰
淺智見諸法 若有若無相
是則不能見 滅見安隱法
若人未得道.不見諸法實相.愛見因緣故種種戱論.見法生時謂之爲有.取相言有.見法滅時謂之爲斷.取相言無.智者見諸法生卽滅無見.見諸法滅卽滅有見.是故於一切法雖有所見.皆如幻如夢.乃至無漏道見尙滅.何況餘見.是故若不見滅見安隱法者.則見有見無
中論觀染染者品第六(十偈)
問曰.經說貪欲瞋 愚癡.是世間根本.貪欲有種種名.初名愛次名著次名染次名 欲.次名貪欲.有如是等名字此是結使.依止衆生衆生名染者.貪欲名染法.有染法染者故.則有貪欲.餘二亦如是.有瞋則有瞋者.有癡則有癡者.以此三毒因緣起三業.三業因緣起三界.是故有一切法答曰.經雖說有三毒名字.求實不可得.何以故
若離於染法 先自有染者
因是染欲者 應生於染法
若無有染者 云何當有染
若有若無染 染者亦如是
若先定有染者.則不更須染.染者先已染故.若先定無染者.亦復不應起染要當先有染者然後起染.若先無染者.則無受染者.染法亦如是.若先離人定有染法.此則無因.云何得起似如無薪火.若先定無染法.則無有染者.是故偈中說若有若無染.染者亦如是.問曰.若染法染者先後相待生.是事不可得者.若一時生有何咎.答曰
染者及染法 俱成則不然
染者染法俱 則無有相待
若染法染者一時成.則不相待.不因染者有染法.不因染法有染者.是二應常.已無因成故.若常則多過.無有解脫法.復次今當以一異法.破染法染者.何以故
染者染法一 一法云何合
染者染法異 異法云何合
染法染者.若以一法合.若以異法合.若一則無合.何以故.一法云何自合.如指端不能自觸.若以異法合.是亦不可.何以故.以異成故.若各成竟不須復合.雖合猶異.復次一異俱不可.何以故
若一有合者 離伴應有合
若異有合者 離伴亦應合
若染染者一.强名爲合者.應離餘因緣而有染染者.復次若一.亦不應有染染者二名.染是法染者是人.若人法爲一.是則大亂.若染染者各異.而言合者.則不須餘因緣而有合.若異而合者.雖遠亦應合.問曰.一不合可爾.眼見異法共合.答曰
若異而有合 染染者何事
是二相先異 然後說合相
若染染者.先有決定異相.而後合者是則不合何以故.是二相先已異.而後强說合.復次
若染及染者 先各成異相
旣已成異相 云何而言合
若染染者先各成別相.汝今何以强說合相.復次
異相無有成 是故汝欲合
合相竟無成 而復說異相
汝已染染者異相不成故.復說合相.合相中有過.染染者不成.汝爲成合相故.復說異相.汝自已爲定.而所說不定.何以故
異相不成故 合相則不成
於何異相中 而欲說合相
以此中染染者異相不成故.合相亦不成.汝於何異相中而欲說合相.復次
如是染染者 非合不合成
諸法亦如是 非合不合成
如染 癡亦如是.如三毒一切煩惱一切法亦如是.非先非後非合非散.等因緣所成
中論卷第一
中論卷第二
龍樹菩薩造梵志靑目釋
姚秦三藏鳩摩羅什譯
觀三相品第七(三十五偈)
問曰.經說有爲法有三相生住滅.萬物以生法生.以住法住.以滅法滅.是故有諸法.答曰不爾.何以故.三相無決定故.是三相爲是有爲能作有爲相.爲是無爲能作有爲相.二俱不然.何以故
若生是有爲 則應有三相
若生是無爲 何名有爲相
若生是有爲.應有三相生住滅.是事不然.何以故.共相違故.相違者.生相應生法.住相應住法.滅相應滅法.若法生時.不應有住滅相違法.一時則不然.如明闇不俱.以是故生不應是有爲法.住滅相亦應如是.問曰.若生非有爲.若是無爲有何咎.答曰.若生是無爲.云何能爲有爲法作相.何以故.無爲法無性故.因滅有爲名無爲.是故說不生不滅名無爲相.更無自相.是故無法.不能爲法作相.如 角龜毛等不能爲法作相.是故生非無爲.住滅亦如是.復次
三相若聚散 不能有所相
云何於一處 一時有三相
是生住滅相.若一一能爲有爲法作相.若和合能與有爲法作相.二俱不然.何以故.若謂一一者.於一處中或有有相.或有無相.生時無住滅.住時無生滅.滅時無生住.若和合者.共相違法.云何一時俱.若謂三相更有三相者.是亦不然.何以故
若謂生住滅 更有有爲相
是卽爲無窮 無卽非有爲
若謂生住滅更有有爲相.生更有生有住有滅.如是三相復應更有相.若爾則無窮.若更無相.是三相則不名有爲法.亦不能爲有爲法作相.問曰.汝說三相爲無窮.是事不然.生住滅雖是有爲.而非無窮.何以故
生生之所生 生於彼本生
本生之所生 還生於生生
法生時通自體七法共生.一法二生三住四滅五生生六住住七滅滅.是七法中.本生除自體.能生六法.生生能生本生.本生能生生生.是故三相雖是有爲.而非無窮.答曰
若謂是生生 能生於本生
生生從本生 何能生本生
若是生生能生本生者.是生生則不名從本生生.何以故.是生生從本生生.云何能生本生.復次
若謂是本生 能生於生生
本生從彼生 何能生生生
若謂本生能生生生者.是本生不名從生生生.何以故.是本生從生生生.云何能生生生.生生法應生本生.而今生生不能生本生.生生未有自體.何能生本生.是故本生不能生生生.問曰.是生生生時非先非後.能生本生.但生生生時能生本生.答曰不然.何以故
若生生生時 能生於本生
生生尙未有 何能生本生
若謂生生生時能生本生可爾.而實未有.是故生生生時.不能生本生.復次
若本生生時 能生於生生
本生尙未有 何能生生生
若謂是本生生時能生生生可爾.而實未有.是故本生生時.不能生生生.問曰
如燈能自照 亦能照於彼
生法亦如是 自生亦生彼
如燈入於闇室照了諸物.亦能自照.生亦如是.能生於彼.亦能自生.答曰不然.何以故
燈中自無闇 住處亦無闇
破闇乃名照 無闇則無照
燈體自無闇.明所及處亦無闇.明闇相違故.破闇故名照.無闇則無照.何得言燈自照亦照彼.問曰.是燈非未生有照亦非生已有照.但燈生時.能自照亦照彼.答曰
云何燈生時 而能破於闇
此燈初生時 不能及於闇
燈生時名半生半未生.燈體未成就云何能破闇.又燈不能及闇.如人得賊乃名爲破.若謂燈雖不到闇而能破闇者.是亦不然.何以故
燈若未及闇 而能破闇者
燈在於此間 則破一切闇
若燈有力.不到闇而能破者.此處燃燈.應破一切處闇.俱不及故.復次燈不應自照照彼.何以故
若燈能自照 亦能照於彼
闇亦應自闇 亦能闇於彼
若燈與闇相違故.能自照亦照於彼.闇與燈相違故.亦應自蔽蔽彼.若闇與燈相違.不能自蔽蔽彼.燈與闇相違.亦不應自照亦照彼.是故燈喩非也.破生因緣未盡故.今當更說
此生若未生 云何能自生
若生已自生 生已何用生
是生自生時.爲生已生.爲未生生.若未生生則是無法.無法何能自生.若謂生已生.則爲已成.不須復生.如已作不應更作.若已生若未生.是二俱不生故無生.汝先說生如燈能自生亦生彼.是事不然.住滅亦如是.復次
生非生已生 亦非未生生
生時亦不生 去來中已答
生名衆緣和合有生.已生中無作故無生.未生中無作故無生.生時亦不然.離生法生時不可得.離生時生法亦不可得.云何生時生.是事去來中已答.已生法不可生.何以故.生已復生.如是展轉則爲無窮.如作已復作.復次若生已更生者.以何生法生.是生相未生.而言生已生者.則自違所說.何以故.生相未生而汝謂生.若未生謂生者.法或可生已而生.或可未生而生.汝先說生已生.是則不定.復次如燒已不應復燒.去已不應復去.如是等因緣故.生已不應生.未生法亦不生.何以故.法若未生.則不應與生緣和合.若不與生緣和合.則無法生.若法未與生緣和合而生者.應無作法而作.無去法而去.無染法而染.無 法而 .無癡法而癡.如是則皆破世間法.是故未生法不生.復次若未生法生者.世間未生法皆應生一切凡夫.未生菩提今應生菩提不壞法.阿羅漢無有煩惱.今應生煩惱. 等無角今皆應生.但是事不然.是故未生法亦不生.問曰.未生法不生者.以未有緣無作無作者無時無方等故不生.若有緣有作有作者有時有方等和合故未生法生.是故說一切未生法皆不生.是事不爾.答曰.若法有緣有時有方等和合則生者.先有亦不生.先無亦不生.有無亦不生.三種先已破.是故生已不生.未生亦不生.生時亦不生.何以故.已生分不生.未生分亦不生.如先答.復次若離生有生時者.應生時生.但離生無生時.是故生時亦不生.復次若言生時生者.則有二生過.一以生故名生時.二以生時中生.二皆不然.無有二法.云何有二生.是故生時亦不生.復次生法未發則無生時.生時無故生何所依.是故不得言生時生.如是推求.生已無生.未生無生.生時無生.無生故生不成.生不成故住滅亦不成.生住滅不成故有爲法不成.是故偈中說去未去去時中已答.問曰.我不定言生已生未生生生時生.但衆緣和合故有生.答曰.汝雖有是說.此則不然.何以故
若謂生時生 是事已不成
云何衆緣合 爾時而得生
生時生已種種因緣破.汝今何以更說衆緣和合故有生.若衆緣具足不具足.皆與生同破.復次
若法衆緣生 卽是寂滅性
是故生生時 是二俱寂滅
衆緣所生法.無自性故寂滅.寂滅名爲無.此無彼無相.斷言語道滅諸戱論.衆緣名.如因縷有布因蒲有席.若縷自有定相.不應從麻出.若布自有定相.不應從縷出.而實從縷有布.從麻有縷.是故縷亦無定性.布亦無定性.如燃可燃因緣和合成.無有自性.可燃無故燃亦無.燃無故可燃亦無.一切法亦如是.是故從衆緣生法無自性.無自性故空如野馬無實.是故偈中說生與生時二俱寂滅.不應說生時生.汝雖種種因緣欲成生相.皆是戱論非寂滅相.問曰.定有三世別異.未來世法得生.因緣卽生.何故言無生.答曰
若有未生法 說言有生者
此法先已有 更復何用生
若未來世中.有未生法而生.是法先已有.何用更生.有法不應更生.問曰.未來雖有.非如現在相.以現在相故說生.答曰.現在相未來中無.若無云何言未來生法生.若有不名未來.應名現在.現在不應更生.二俱無生故不生.復次汝謂生時生亦能生彼.今當更說
若言生時生 是能有所生
何得更有生 而能生是生
若生生時能生彼.是生誰復能生
若謂更有生 生生則無窮
離生生有生 法皆能自生
若生更有生.生則無窮.若是生更無生而自生者.一切法亦皆能自生.而實不爾.復次
有法不應生 無亦不應生
有無亦不生 此義先已說
凡所有生.爲有法有生.爲無法有生.爲有無法有生.是皆不然.是事先已說.離此三事更無有生.是故無生.復次
若諸法滅時 是時不應生
法若不滅者 終無有是事
若法滅相是法不應生.何以故.二相相違故.一是滅相.知法是滅.一是生相.知法是生.二相相違法.一時則不然.是故滅相法不應生.問曰.若滅相法不應生.不滅相法應生.答曰.一切有爲法念念滅故.無不滅法離有爲.無有決定無爲法.無爲法但有名字.是故說不滅法終無有是事.問曰.若法無生應有住.答曰
不住法不住 住法亦不住
住時亦不住 無生云何住
不住法不住.無住相故.住法亦不住.何以故.已有住故.因去故有住.若住法先有.不應更住.住時亦不住.離住不住更無住時.是故亦不住.如是一切處求住不可得故.卽是無生.若無生云何有住.復次
若諸法滅時 是則不應住
法若不滅者 終無有是事
若法滅相.是法無有住相.何以故.一法中有二相相違故.一是滅相.二是住相.一時一處有住滅相.是事不然.是故不得言滅相法有住.問曰.若法不滅應有住.答曰.無有不滅法.何以故
所有一切法 皆是老死相
終不見有法 離老死有住
一切法生時無常.常隨逐無常有二.名老及死.如是一切法.常有老死故無住時.復次
住不自相住 亦不異相住
如生不自生 亦不異相生
若有住法.爲自相住爲他相住.二俱不然.若自相住則爲是常.一切有爲法從衆緣生.若住法自住.則不名有爲.住若自相住.法亦應自相住.如眼不能自見.住亦如是.若異相住則.住更有住.是則無窮.復次見異法生異相.不得不因異法而有異相.異相不定故.因異相而住者.是事不然.問曰.若無住應有滅.答曰無.何以故
法已滅不滅 未滅亦不滅
滅時亦不滅 無生何有滅
若法已滅則不滅.以先滅故.未滅亦不滅.離滅相故.滅時亦不滅.離二更無滅時.如是推求.滅法卽是無生.無生何有滅.復次
法若有住者 是則不應滅
法若不住者 是亦不應滅
若法定住則無有滅.何以故.由有住相故.若住法滅則有二相.住相滅相.是故不得言住中有滅.如生死不得一時有.若法不住亦無有滅.何以故.離住相故.若離住相則無法.無法云何滅.復次
是法於是時 不於是時滅
是法於異時 不於異時滅
若法有滅相.是法爲自相滅.爲異相滅.二俱不然.何以故.如乳不於乳時滅.隨有乳時.乳相定住故.非乳時亦不滅.若非乳不得言乳滅.復次
如一切諸法 生相不可得
以無生相故 卽亦無滅相
如先推求.一切法生相不可得.爾時卽無滅相.破生故無生.無生云何有滅.若汝意猶未已.今當更說破滅因緣
若法是有者 是卽無有滅
不應於一法 而有有無相
諸法有時推求滅相不可得.何以故.云何一法中.亦有亦無相.如光影不同處.復次
若法是無者 是卽無有滅
譬如第二頭 無故不可斷
法若無者則無滅相.如第二頭第三手無故不可斷.復次
法不自相滅 他相亦不滅
如自相不生 他相亦不生
如先說生相.生不自生.亦不從他生.若以自體生.是則不然.一切物皆從衆緣生.如指端不能自觸.如是生不能自生.從他生亦不然.何以故.生未有故.不應從他生.是生無故無自體.自體無故他亦無.是故從他生亦不然.滅法亦如是.不自相滅不他相滅.復次
生住滅不成 故無有有爲
有爲法無故 何得有無爲
汝先說有生住滅相故有有爲.以有有爲故有無爲.今以理推求.三相不可得.云何得有有爲.如先說.無有無相法.有爲法無故.何得有無爲.無爲相名不生不住不滅.止有爲相故名無爲相.無爲自無別相.因是三相有無爲相.如火爲熱相地爲堅相水爲冷相.無爲則不然.問曰.若是生住滅畢竟無者.云何論中得說名字.答曰
如幻亦如夢 如乾 婆城
所說生住滅 其相亦如是
生住滅相無有決定.凡人貪著謂有決定.諸賢聖憐愍欲止其顚倒.還以其所著名字爲說.語言雖同其心則異.如是說生住滅相.不應有難.如幻化所作.不應責其所由.不應於中有憂喜想.但應眼見而已.如夢中所見不應求實.如乾 婆城日出時現而無有實.但假爲名字不久則滅.生住滅亦如是.凡夫分別爲有.智者推求則不可得
中論觀作作者品第八(十二偈)
問曰.現有作有作者有所用作法.三事和合故有果報.是故應有作者作業.答曰.上來品品中.破一切法皆無有餘.如破三相.三相無故無有有爲.有爲無故無無爲.有爲無爲無故.一切法盡無作作者.若是有爲.有爲中已破.若是無爲.無爲中已破.不應復問汝著心深故.而復更問.今當復答
決定有作者 不作決定業
決定無作者 不作無定業
若先定有作者定有作業.則不應作.若先定無作者定無作業.亦不應作.何以故
決定業無作 是業無作者
定作者無作 作者亦無業
若先決定有作業.不應更有作者.又離作者應有作業.但是事不然.若先決定有作者.不應更有作業.又離作業應有作者.但是事不然.是故決定作者決定作業.不應有作.不決定作者不決定作業.亦不應有作.何以故.本來無故.有作者有作業.尙不能作.何況無作者無作業.復次
若定有作者 亦定有作業
作者及作業 卽墮於無因
若先定有作者定有作業.汝謂作者有作.卽爲無因離作業有作者.離作者有作業.則不從因緣有.問曰.若不從因緣有 作者有作業.有何咎.答曰
若墮於無因 則無因無果
無作無作者 無所用作法
若無作等法 則無有罪福
罪福等無故 罪福報亦無
若無罪福報 亦無有涅槃
諸可有所作 皆空無有果
若墮於無因.一切法則無因無果.能生法名爲因.所生法名爲果.是二卽無.是二無故無作無作者.亦無所用作法.亦無罪福.罪福無故亦無罪福果報及涅槃道.是故不得從無因生.問曰.若作者不定.而作不定業有何咎.答曰.一事無尙不能起作業.何況二事都無.譬如化人以虛空爲舍.但有言說而無作者作業.問曰.若無作者無作業.不能有所作.今有作者有作業應有作.答曰
作者定不定 不能作二業
有無相違故 一處則無二
作者定不定.不能作定不定業.何以故.有無相違故.一處不應有二.有是決定.無是不決定.一人一事云何有有無.復次
有不能作無 無不能作有
若有作作者 其過如先說
若有作者而無業.何能有所作.若無作者而有業.亦不能有所作.何以故.如先說.有中若先有業.作者復何所作.若先無業云何可得作.如是則破罪福等因緣果報.是故偈中說.有不能作無無不能作有.若有作作者.其過如先說.復次
作者不作定 亦不作不定
及定不定業 其過如先說
定業已破.不定業亦破.定不定業亦破.今欲一時總破.故說是偈.是故作者不能作三種業.今三種作者.亦不能作業.何以故
作者定不定 亦定亦不定
不能作於業 其過如先說
作者定不定.亦定亦不定.不能作於業.何以故.如先三種過因緣.此中應廣說.如是一切處求作者作業.皆不可得.問曰.若言無作無作者.則復墮無因.答曰.是業從衆緣生假名爲有.無有決定.不如汝所說.何以故
因業有作者 因作者有業
成業義如是 更無有餘事
業先無決定.因人起業.因業有作者.作者亦無決定.因有作業名爲作者.二事和合故得成作作者.若從和合生則無自性.無自性故空.空則無所生.但隨凡夫憶想分別故.說有作業有作者.第一義中無作業無作者.復次
如破作作者 受受者亦爾
及一切諸法 亦應如是破
如作作者不得相離.不相離故不決定.無決定故無自性.受受者亦如是.受名五陰身.受者是人.如是離人無五陰.離五陰無人.但從衆緣生如受受者.餘一切法.亦應如是破
中論觀本住品第九(十二偈)
問曰.有人言
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誰有如是事 是則名本住
若無有本住 誰有眼等法
以是故當知 先已有本住
眼耳鼻舌身命等諸根.名爲眼耳等根.苦受樂受不苦不樂受.想思憶念等心心數法.名爲苦樂等法.有論師言.先未有眼等法.應有本住.因是本住.眼等諸根得增長.若無本住.身及眼等諸根.爲因何生而得增長.答曰
若離眼等根 及苦樂等法
先有本住者 以何而可知
若離眼耳等根苦樂等法.先有本住者.以何可說以何可知.如外法甁衣等.以眼等根得知.內法以苦樂等根得知.如經中 說.可壞是色相.能受是受相.能識是識相.汝說離眼耳苦樂等先有本住者.以何可知說有是法.問曰.有論師言.出入息視 壽命思惟苦樂憎愛動發等是神相.若無有神.云何有出入息等相.是故當知.離眼耳等根苦樂等法.先有本住.答曰.是神若有.應在身內如壁中有柱.若在身外.如人被鎧.若在身內.身則不可壞.神常在內故是故言神在身內.但有言說虛妄無實.若在身外覆身如鎧者.身應不可見.神細密覆故.亦應不可壞而今實見身壞.是故當知.離苦樂等先無餘法.若謂斷臂時神縮在內不可斷者.斷頭時亦應縮在內不應死.而實有死.是故知離苦樂等先有神者.但有言說虛妄無實.復次若言身大則神大.身小則神小.如燈大則明大燈小則明小者.如是神則隨身不應常.若隨身者.身無則神無.如燈滅則明滅.若神無常.則與眼耳苦樂等同.是故當知.離眼耳等先無別神.復次如風狂病人.不得自在.不應作而作.若有神是諸作主者.云何言不得自在.若風狂病不惱神者應離神別有所作.如是種種推求離眼耳等根苦樂等法.先無本住.若必謂離眼耳等根苦樂等法有本住者.無有是事.何以故
若離眼耳等 而有本住者
亦應離本住 而有眼耳等
若本住離眼耳等根苦樂等法先有者.今眼耳等根苦樂等法.亦應離本住而有.問曰.二事相離可爾但使有本住.答曰
以法知有人 以人知有法
離法何有人 離人何有法
法者眼耳苦樂等.人者是本住.汝謂以有法故知有人.以有人故知有法.今離眼耳等法何有人.離人何有眼耳等法.復次
一切眼等根 實無有本住
眼耳等諸根 異相而分別
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實無有本住.因眼緣色生眼識.以和合因緣.知有眼耳等諸根.不以本住故知.是故偈中說一切眼等根實無有本住.眼耳等諸根各自能分別.問曰
若眼等諸根 無有本住者
眼等一一根 云何能知塵
若一切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無本住者.今一一根.云何能知塵.眼耳等諸根無思惟.不應有知.而實知塵.當知離眼耳等諸根.更有能知塵者.答曰.若爾者.爲一一根中各有知者.爲一知者在諸根中.二俱有過.何以故
見者卽聞者 聞者卽受者
如是等諸根 則應有本住
若見者卽是聞者.聞者卽是受者.則是一神.如是眼等諸根.應先有本住.色聲香等無有定知者.或可以眼聞聲.如人有六向隨意見聞.若聞者見者是一.於眼等根隨意見聞.但是事不然
若見聞各異 受者亦各異
見時亦應聞 如是則神多
若見者聞者受者各異.則見時亦應聞.何以故.離見者有聞者故.如是鼻舌身中.神應一時行.若爾者.人一而神多.以一切根一時知諸塵.而實不爾.是故見者聞者受者.不應俱用.復次
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所從生諸大 彼大亦無神
若人言離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別有本住.是事已破.今於眼耳等所因四大.是四大中亦無本住.問曰.若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無有本住可爾.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應有.答曰
若眼耳等根 苦樂等諸法
無有本住者 眼等亦應無
若眼耳苦樂等諸法.無有本住者.誰有此眼耳等.何緣而有.是故眼耳等亦無.復次
眼等無本住 今後亦復無
以三世無故 無有無分別
思惟推求本住.於眼等先無.今後亦無.若三世無.卽是無生寂滅不應有難.若無本住.云何有眼等.如是問答.戱論則滅.戱論滅故.諸法則空
中論觀燃可燃品第十(十六偈)
問曰應有受受者.如燃可燃.燃是受者.可燃是受.所謂五陰.答曰.是事不然.何以故.燃可燃俱不成故.燃可燃.若以一法成.若以二法成.二俱不成.問曰.且置一異法.若言無燃可燃.今云何以一異相破.如 角龜毛無故不可破.世間眼見實有事而後可思惟.如有金然後可燒可鍛.若無燃可燃.不應以一異法思惟.若汝許有一異法.當知有燃可燃.若許有者則爲已有.答曰.隨世俗法言說.不應有過.燃可燃若說一若說異.不名爲受.若離世俗言說.則無所論.若不說燃可燃.云何能有所破.若無所說則義不可明.如有論者.破破有無.必應言有無.不以稱有無故而受有無.是以隨世間言說故無咎.若口有言便是受者.汝言破卽爲自破.燃可燃亦如是.雖有言說亦復不受.是故以一異法.思惟燃可燃.二俱不成.何以故
若燃是可燃 作作者則一
若燃異可燃 離可燃有燃
燃是火.可燃是薪.作者是人.作是業.若燃可燃一.則作作者亦應一.若作作者一.則陶師與甁一.作者是陶師.作是甁.陶師非甁.甁非陶師.云何爲一.是以作作者不一故.燃可燃亦不一.若謂一不可則應異.是亦不然.何以故.若燃與可燃異.應離可燃別有燃.分別是可燃是燃.處處離可燃應有燃.而實不爾是故異亦不可.復次
如是常應燃 不因可燃生
則無燃火功 亦名無作火
若燃可燃異.則燃不待可燃而常燃.若常燃者則自住其體.不待因緣人功則空.人功者.將護火令燃.是功現有.是故知火不異可燃復次若燃異可燃燃卽無作.離可燃火何所然.若爾者火則無作.無作火無有是事.問曰.云何火不從因緣生.人功亦空答曰
燃不待可燃 則不從緣生
火若常燃者 人功則應空
燃可燃若異.則不待可燃有燃.若不待可燃有然.則無相因法.是故不從因緣生.復次若燃異可燃.則應常燃.若常燃者.應離可燃別見有燃.更不須人功.何以故
若汝謂燃時 名爲可燃者
爾時但有薪 何物燃可燃
若謂先有薪燒時名可燃者.是事不爾.若離燃別有可燃者.云何言燃時名可燃.復次
若異則不至 不至則不燒
不燒則不滅 不滅則常住
若燃異可燃.則燃不應至可燃.何以故.不相待成故.若燃不相待成.則自住其體.何用可燃.是故不至.若不至則不燃可燃何以故.無有不至而能燒故.若不燒則無滅.應常住自相.是事不爾.問曰
燃與可燃異 而能至可燃
如此至彼人 彼人至此人
燃與可燃異.而能至可燃.如男至於女.如女至於男.答曰
若謂燃可燃 二俱相離者
如是燃則能 至於彼可燃
若離燃有可燃.若離可燃有燃.各自成者.如是則應燃至可燃.而實不爾.何以故.離燃無可燃.離可燃無燃故.今離男有女.離女有男.是故汝喩非也.喩不成故.燃不至可燃.問曰.燃可燃相待而有.因可燃有燃.因燃有可燃.二法相待成.答曰
若因可燃燃 因燃有可燃
先定有何法 而有燃可燃
若因可燃而燃成.亦應因燃可燃成.是中若先定有可燃.則因可燃.而燃成.若先定有燃.則因燃可燃成.今若因可燃而燃成者.則先有可燃而後有燃.不應待燃而有可燃.何以故可燃在先燃在後故.若燃不燃可燃.是則可燃不成.又可燃不在餘處離於燃故.若可燃不成.燃亦不成.若先燃後有可燃.燃亦有如是過.是故燃可燃.二俱不成.復次
若因可燃燃 則燃成復成
是爲可燃中 則爲無有燃
若欲因可燃而成燃.則燃成已復成.何以故.燃自住於燃中.若燃不自住其體.從可燃成者.無有是事.是故有是燃從可燃成.今則燃成復成.有如是過.復有可燃無燃過.何以故.可燃離燃自住其體故.是故燃可燃相因待.無有是事.復次
若法因待成 是法還成待
今則無因待 亦無所成法
若法因待成.是法還成本因待.如是決定則無二事.如因可燃而成燃.還因於燃而成可燃.是則二俱無定.無定故不可得.何以故
若法有待成 未成云何待
若成已有待 成已何用待
若法因待成.是法先未成.未成則無.無則云何有因待.若是法先已成已成.何用因待.是二俱不相因待.是故汝先說燃可燃相因待成.無有是事.是故
因可燃無燃 不因亦無燃
因燃無可燃 不因無可燃
今因待可燃燃不成.不因待可燃燃亦不成.可燃亦如是.因燃不因燃.二俱不成.是過先已說.復次
燃不餘處來 燃處亦無燃
可燃亦如是 餘如去來說
燃不於餘方來入可燃可燃中亦無燃.析薪求燃不可得故.可燃亦如是.不從餘處來入燃中.燃中亦無可燃.如燃已不燃未燃不燃燃時不燃.是義如去來中說.是故
可燃卽非然 離可燃無燃
燃無有可燃 燃中無可燃
可燃中無燃
可燃卽非燃.何以故.先已說作作者一過故.離可燃無燃.有常燃等過故.燃無有可燃.燃中無可燃.可燃中無燃.以有異過故.三皆不成.問曰.何故說燃可燃答曰.如因可燃有燃.如是因受有受者.受名五陰.受者名人.燃可燃不成故受受者亦不成.何以故
以燃可燃法 說受受者法
及以說甁衣 一切等諸法
如可燃非燃.如是受非受者.作作者一過故.又離受無受者.異不可得故.以異過故.三皆不成.如受受者.外甁衣等一切法皆同上說.無生畢竟空.是故
若人說有我 諸法各異相
當知如是人 不得佛法味
諸法從本已來無生.畢竟寂滅相.是故品末說是偈.若人說我相.如犢子部衆說.不得言色卽是我.不得言離色是我.我在第五不可說藏中.如薩婆多部衆說.諸法各各相.是善是不善是無記.是有漏無漏有爲無爲等別.異如是等人.不得諸法寂滅相.以佛語作種種戱論
中論觀本際品第十一(八偈)
問曰.無本際經說.衆生往來生死.本際不可得.是中說有衆生有生死.以何因緣故而作是說.答曰
大聖之所說 本際不可得
生死無有始 亦復無有終
聖人有三種.一者外道五神通.二者阿羅漢 支佛.三者得神通大菩薩佛於三種中最上故言大聖.佛所言說無不是實說.生死無始.何以故.生死初後不可得.是故言無始汝謂若無初後.應有中者.是亦不然.何以故
若無有始終 中當云何有
是故於此中 先後共亦無
因中後故有初.因初中故有後.若無初無後.云何有中.生死中無初中後.是故說先後共不可得.何以故
若使先有生 後有老死者
不老死有生 不生有老死
若先有老死 而後有生者
是則爲無因 不生有老死
生死衆生.若先生漸有老.而後有死者.則生無老死.法應生有老死老死有生.又不老死而生.是亦不然.又不因生有老死.若先老死後生.老死則無因.生在後故.又不生何有老死.若謂生老死先後不可.謂一時成者.是亦有過.何以故
生及於老死 不得一時共
生時則有死 是二俱無因
若生老死一時則不然何以故.生時卽有死故.法應生時有死時無.若生時有死.是事不然.若一時生則無有相因.如牛角一時出則不相因.是故
若使初後共 是皆不然者
何故而戱論 謂有生老死
思惟生老死三皆有過故.卽無生畢竟空.汝今何故貪著.戱論生老死.謂有決定相.復次
諸所有因果 相及可相法
受及受者等 所有一切法
非但於生死 本際不可得
如是一切法 本際皆亦無
一切法者.所謂因果相可相.受及受者等.皆無本際.非但生死無本際.以略開示故.說生死無本際
中論觀苦品第十二(十偈)
有人說曰
自作及他作 共作無因作
如是說諸苦 於果則不然
有人言.苦惱自作.或言他作.或言亦自作亦他作.或言無因作.於果皆不然.於果皆不然者.衆生以衆緣致苦.厭苦欲求滅.不知苦惱實因緣有四種謬.是故說於果皆不然何以故
苦若自作者 則不從緣生
因有此陰故 而有彼陰生
若苦自作.則不從衆緣生.自名從自性生.是事不然.何以故.因前五陰有後五陰生.是故苦不得自作.問曰.若言此五陰作彼五陰者.則是他作.答曰.是事不然.何以故
若謂此五陰 異彼五陰者
如是則應言 從他而作苦
若此五陰與彼五陰異.彼五陰與此五陰異者.應從他作.如縷與布異者.應離縷有布.若離縷無布者.則布不異縷.如是彼五陰異此五陰者.則應離此五陰有彼五陰.若離此五陰無彼五陰者.則此五陰不異彼五陰.是故不應言苦從他作.問曰 自作者.是人人自作苦.自受苦.答曰
若人自作苦 離苦何有人
而謂於彼人 而能自作苦
若謂人自作苦者.離五陰苦.何處別有人.而能自作苦.應說是人.而不可說.是故苦非人自作.若謂人不自作苦.他人作苦與此人.者是亦不然.何以故
若苦他人作 而與此人者
若當離於苦 何有此人受
若他人作苦.與此人者.離五陰無有此人受.復次
苦若彼人作 持與此人者
離苦何有人 而能授於此
若謂彼人作苦授與此人者.離五陰苦.何有彼人作苦持與此人.若有者應說其相.復次
自作若不成 云何彼作苦
若彼人作苦 卽亦名自作
種種因緣彼自作苦不成而言他作苦.是亦不然.何以故.此彼相待故.若彼作苦於彼亦名自作苦.自作苦先已破.汝受自作苦不成故.他作亦不成.復次
苦不名自作 法不自作法
彼無有自體 何有彼作苦
自作苦不然.何以故.如刀不能自割.如是法不能自作法.是故不能自作.他作亦不然.何以故.離苦無彼自性.若離苦有彼自性者.應言彼作苦.彼亦卽是苦.云何苦自作苦.問曰.若自作他作不然.應有共作.答曰
若此彼苦成 應有共作苦
此彼尙無作 何況無因作
自作他作猶尙有過.何況無因作.無因多過.如破作作者品中說.復次
非但說於苦 四種義不成
一切外萬物 四義亦不成
佛法中雖說五受陰爲苦.有外道人.謂苦受爲苦.是故說.不但說於苦四種義不成.外萬物.地水山木等.一切法皆亦不成
中論觀行品第十三(九偈)
問曰
如佛經所說 虛 妄取相
諸行妄取故 是名爲虛
佛經中說.虛 者.卽是妄取相.第一實者.所謂涅槃非妄取相.以是經說故.當知有諸行虛 妄取相.答曰
虛 妄取者 是中何所取
佛說如是事 欲以示空義
若妄取相法卽是虛 者.是諸行中爲何所取.佛如是說.當知說空義.問曰.云何知一切諸行皆是空.答曰.一切諸行虛妄相故空.諸行生滅不住.無自性故空.諸行名五陰.從行生故.五陰名行.是五陰皆虛妄無有定相.何以故.如 兒時色非匍匐時色.匍匐時色非行時色.行時色非童子時色.童子時色非壯年時色.壯年時色非老年時色.如色念念不住故.分別決定性不可得. 兒色爲卽是匍匐色乃至老年色爲異.二俱有過.何以故.若 兒色卽是匍匐色.乃至老年色者.如是則是一色皆爲 兒.無有匍匐乃至老年.又如泥團常是泥團終不作甁.何以故.色常定故.若 兒色異匍匐色者.則 兒不作匍匐.匍匐不作 兒.何以故.二色異故.如是童子少年壯年老年色不應相續.有失親屬法無父無子.若爾者.唯有 兒應得父.餘則匍匐乃至老年不應有分.是故二俱有過.問曰.色雖不定. 兒色滅已.相續更生乃至老年色.無有如上過.答曰. 兒色相續生者.爲滅已相續生.爲不滅相續生.若 兒色滅.云何有相續.以無因故.如雖有薪可燃.火滅故無有相續.若 兒色不滅而相續者.則 兒色不滅.常住本相亦無相續.問曰.我不說滅不滅故相續生.但說不住相似生故言相續生.答曰.若爾者.則有定色而更生.如是應有千萬種色.但是事不然.如是亦無相續.如是一切處求色無有定相.但以世俗言說故有.如芭蕉樹求實不可得.但有皮葉.如是智者求色相.念念滅更無實色可得.不住色形色相.相似次第生難可分別.如燈炎分別定色不可得.從是定色更有色生不可得.是故色無性故空.但以世俗言說故有.受亦如是.智者種種觀察.次第相似故生滅難可別知.如水流相續.但以覺故說三受在身.是故當知.受同色說.想因名相生.若離名相則不生.是故佛說.分別知名字相故名爲想.非決定先有.從衆緣生無定性.無定性故如影隨形.因形有影.無形則無影.影無決定性.若定有者.離形應有影.而實不爾.是故從衆緣生.無自性故不可得.想亦如是.但因外名相.以世俗言說故有.識因色聲香味觸等眼耳鼻舌身等生.以眼等諸根別異故.識有別異.是識爲在色爲在眼爲在中間.無有決定.但生已識塵識此人識彼人.知此人識爲卽是知彼人識.爲異是二難可分別.如眼識耳識亦難可分別.以難分別故.或言一或言異.無有決定分別.但從衆緣生故.眼等分別故空無自性.如伎人含一珠出已復示人則生疑.爲是本珠爲更有異.識亦如是.生已更生.爲是本識爲是異識.是故當知.識不住故無自性.虛 如幻.諸行亦如是.諸行者身口意.行有二種淨不淨.何等爲不淨.惱衆生貪著等名不淨.不惱衆生實語不貪著等名淨.或增或減.淨行者.在人中欲天色天無色天受果報已則減.還作故名增.不淨行者亦如是.在地獄畜生餓鬼阿修羅中受果報已則減.還作故名增.是故諸行有增有減故不住.如人有病.隨宜將適病則除愈.不將適病則還集.諸行亦如是.有增有減故不決定.但以世俗言說故有.因世諦故得見第一義諦.所謂無明緣諸行.從諸行有識著.識著故有名色.從名色有六入.從六入有觸.從觸有受.從受有愛.從愛有取.從取有有.從有有生.從生有老死憂悲苦惱恩愛別苦怨憎會苦等.如是諸苦皆以行爲本.佛以世諦故說.若得第一義諦生眞智慧者則無明息.無明息故諸行亦不集.諸行不集故見諦所斷身見疑戒取等斷.及思惟所斷貪 色染無色染調戱無明亦斷.以是斷故一一分滅.所謂無明諸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憂悲苦惱恩愛別苦怨憎會苦等皆滅.以是滅故五陰身畢竟滅更無有餘.唯但有空.是故佛欲示空義故.說諸行虛 .復次諸法無性故虛 .虛 故空.如偈說
諸法有異故 知皆是無性
無性法亦無 一切法空故
諸法無有性.何以故.諸法雖生不住自性.是故無性.如 兒定住自性者.終不作匍匐乃至老年.而 兒次第相續有異相現匍匐乃至老年.是故說見諸法異相故知無性.問曰.若諸法異相無性卽有無性法有何咎.答曰.若無性云何有法云何有相.何以故.無有根本故但爲破性故說無性.是無性法若有者.不名一切法空.若一切法空.云何有無性法.問曰
諸法若無性 云何說 兒
乃至於老年 而有種種異
諸法若無性則無有異相而汝說有異相.是故有諸法性若無諸法性云何有異相.答曰
若諸法有性 云何而得異
若諸法無性 云何而有異
若諸法決定有性.云何可得異性.名決定有不可變異.如眞金不可變.又如暗性不變爲明.明性不變爲暗.復次
是法則無異 異法亦無異
如壯不作老 老亦不作壯
若法有異者.則應有異相.爲卽是法異.爲異法異.是二不然.若卽是法異.則老應作老.而老實不作老.若異法異者.老與壯異壯應作老.而壯實不作老.二俱有過.問曰.若法卽異.有何咎.如今眼見年少經日月歲數則老.答曰
若是法卽異 乳應卽是酪
離乳有何法 而能作於酪
若是法卽異者.乳應卽是酪.更不須因緣.是事不然.何以故.乳與酪有種種異故.乳不卽是酪.是故法不卽異.若謂異法爲異者.是亦不然.離乳更有何物爲酪.如是思惟.是法不異.異法亦不異.是故不應偏有所執.問曰.破是破異猶有空在.空卽是法.答曰
若有不空法 則應有空法
實無不空法 何得有空法
若有不空法.相因故應有空法.而上來種種因緣破不空法.不空法無故則無相待.無相待故何有空法.問曰.汝說不空法無故空法亦無.若爾者.卽是說空.但無相待故不應有執.若有對應有相待.若無對則無相待.相待無故則無相.無相故則無執.如是卽爲說空.答曰
大聖說空法 爲離諸見故
若復見有空 諸佛所不化
大聖爲破六十二諸見.及無明愛等諸煩惱故說空.若人於空復生見者.是人不可化.譬如有病須服藥可治.若藥復爲病則不可治.如火從薪出以水可滅.若從水生爲用何滅.如空是水能滅諸煩惱火.有人罪重貪著心深.智慧鈍故.於空生見.或謂有空.或謂無空.因有無還起煩惱.若以空化此人者.則言我久知是空.若離是空則無涅槃道.如經說.離空無相無作門.得解脫者.但有言說
中論觀合品第十四(八偈)
說曰.上破根品中.說見所見見者皆不成.此三事無異法故則無合.無合義今當說.問曰.何故眼等三事無合.答曰
見可見見者 是三各異方
如是三法異 終無有合時
見是眼根.可見是色塵.見者是我.是三事各在異處終無合時.異處者.眼在身內色在身外.我者或言在身內.或言遍一切處.是故無合.復次若謂有見法.爲合而見不合而見.二俱不然.何以故.若合而見者.隨有塵處應有根有我.但是事不然.是故不合.若不合而見者.根我塵各在異處亦應有見.而不見.何以故.如眼根在此不見遠處甁.是故二俱不見.問曰.我意根塵.四事合故有知生.能知甁衣等萬物.是故有見可見見者.答曰.是事根品中已破.今當更說.汝說四事合故知生.是知爲見甁衣等物已生.爲未見而生.若見已生者.知則無用.若未見而生者.是則未合.云何有知生.若謂四事一時合而知生.是亦不然.若一時生則無相待.何以故.先有甁次見後知生.一時則無先後.知無故見可見見者亦無.如是諸法如幻如夢無有定相.何得有合.無合故空.復次
染與於可染 染者亦復然
餘入餘煩惱 皆亦復如是
如見可見見者無合故.染可染染者亦應無合.如說見可見見者三法.則說聞可聞聞者餘入等.如說染可染染者.則說瞋可瞋瞋者餘煩惱等.復次
異法當有合 見等無有異
異相不成故 見等云何合
凡物皆以異故有合.而見等異相不可得.是故無合.復次
非但見等法 異相不可得
所有一切法 皆亦無異相
非但見可見見者等三事異相不可得.一切法皆無異相.問曰.何故無有異相.答曰
異因異有異 異離異無異
若法從因出 是法不異因
汝所謂異.是異因異法故名爲異.離異法不名爲異.何以故.若法從衆緣生.是法不異因.因壞果亦壞故.如因樑椽等有舍.舍不異樑椽.樑椽等壞舍亦壞故.問曰.若有定異法.有何咎.答曰
若離從異異 應餘異有異
離從異無異 是故無有異
若離從異有異法者.則應離餘異有異法.而實離從異無有異法.是故無餘異.如離五指異有拳異者拳異.應於甁等異物有異.今離五指異.拳異不可得.是故拳異.於甁等無有異法.問曰.我經說.異相不從衆緣生.分別總相故有異相.因異相故有異法.答曰
異中無異相 不異中亦無
無有異相故 則無此彼異
汝言分別總相故有異相.因異相故有異法.若爾者.異相從衆緣生.如是卽說衆緣法.是異相離異法不可得故.異相因異法而有.不能獨成.今異法中無異相.何以故.先有異法故何用異相.不異法中亦無異相.何以故.若異相在不異法中.不名不異法.若二處俱無.卽無異相.異相無故此彼法亦無.復次異法無故亦無合
是法不自合 異法亦不合
合者及合時 合法亦皆無
是法自體不合.以一故.如一指不自合.異法亦不合.以異故.異事已成不須合故.如是思惟.合法不可得.是故說合者合時合法.皆不可得
中論卷第三
龍樹菩薩造梵志靑目釋
姚秦三藏鳩摩羅什譯
觀有無品第十五(十一偈)
問曰.諸法各有性.以有力用故.如甁有甁性布有布性.是性衆緣合時則出.答曰
衆緣中有性 是事則不然
性從衆緣出 卽名爲作法
若諸法有性.不應從衆緣出.何以故.若從衆緣出.卽是作法無有定性.問曰.若諸法性從衆緣作.有何咎.答曰
性若是作者 云何有此義
性名爲無作 不待異法成
如金雜銅則非眞金.如是若有性則不須衆緣.若從衆緣出當知無眞性.又性若決定.不應待他出.非如長短彼此無定性故待他而有.問曰.諸法若無自性.應有他性.答曰
法若無自性 云何有他性
自性於他性 亦名爲他性
諸法性衆緣作故.亦因待成故無自性.若爾者.他性於他亦是自性.亦從衆緣生相待故.亦無無故.云何言諸法從他性生.他性亦是自性故.問曰.若離自性他性有諸法.有何咎.答曰
離自性他性 何得更有法
若有自他性 諸法則得成
汝說離自性他性有法者.是事不然.若離自性他性則無有法何以故.有自性他性法則成.如甁體是自性依物是他性.問曰.若以自性他性破有者.今應有無.答曰
有若不成者 無云何可成
因有有法故 有壞名爲無
若汝已受有不成者.亦應受無亦無.何以故.有法壞敗故名無.是無因有壞而有.復次
若人見有無 見自性他性
如是則不見 佛法眞實義
若人深著諸法.必求有見.若破自性則見他性.若破他性則見有.若破有則見無.若破無則迷惑.若利根著心薄者.知滅諸見安隱故.更不生四種戱論.是人則見佛法眞實義.是故說上偈.復次
佛能滅有無 如化迦 延
經中之所說 離有亦離無
刪陀迦 延經中.佛爲說正見義離有離無.若諸法中少決定有者.佛不應破有無.若破有則人謂爲無.佛通達諸法相故.說二俱無.是故汝應捨有無見.復次
若法實有性 後則不應異
性若有異相 是事終不然
若諸法決定有性.終不應變異.何以故.若定有自性.不應有異相.如上眞金喩.今現見諸法有異相故.當知無有定相.復次
若法實有性 云何而可異
若法實無性 云何而可異
若法定有性.云何可變異.若無性則無自體.云何可變異.復次
定有則著常 定無則著斷
是故有智者 不應著有無
若法定有有相.則終無無相.是卽爲常.何以故.如說三世者.未來中有法相.是法來至現在.轉入過去.不捨本相.是則爲常.又說因中先有果.是亦爲常.若說定有無.是無必先有今無.是則爲斷滅.斷滅名無相續.因由是二見.卽遠離佛法.問曰.何故因有生常見.因無生斷見.答曰
若法有定性 非無則是常
先有而今無 是則爲斷滅
若法性定有.則是有相非無相.終不應無.若無則非有.卽爲無法.先已說過故.如是則墮常見.若法先有.敗壞而無者.是名斷滅.何以故.有不應無故.汝謂有無各有定相故.若有斷常見者.則無罪福等破世間事是故應捨
中論觀縛解品第十六(十偈)
問曰.生死非都無根本.於中應有衆生往來若諸行往來.汝以何因緣故.說衆生及諸行盡空無有往來.答曰
諸行往來者 常不應往來
無常亦不應 衆生亦復然
諸行往來六道生死中者.爲常相往來.爲無常相往來.二俱不然.若常相往來者.則無生死相續.以決定故.自性住故.若以無常往來者.亦無往來生死相續.以不決定故.無自性故.若衆生往來者.亦有如是過.復次
若衆生往來 陰界諸入中
五種求盡無 誰有往來者
生死陰界入卽是一義.若衆生於此陰界入中往來者.是衆生於燃可燃品中.五種求不可得.誰於陰界入中而有往來者.復次
若從身至身 往來卽無身
若其無有身 則無有往來
若衆生往來.爲有身往來.爲無身往來.二俱不然.何以故.若有身往來.從一身至一身.如是則往來者無身.又若先已有身.不應復從身至身.若先無身則無有.若無有云何有生死往來.問曰.經說有涅槃滅一切苦.是滅應諸行滅若衆生滅.答曰.二俱不然.何以故
諸行若滅者 是事終不然
衆生若滅者 是事亦不然
汝說若諸行滅若衆生滅.是事先已答.諸行無有性.衆生亦種種推求生死往來不可得.是故諸行不滅.衆生亦不滅.問曰.若爾者則無縛無解.根本不可得故.答曰
諸行生滅相 不縛亦不解
衆生如先說 不縛亦不解
汝謂諸行及衆生有縛解者.是事不然.諸行念念生滅故.不應有縛解.衆生先說五種推求不可得.云何有縛解.復次
若身名爲縛 有身則不縛
無身亦不縛 於何而有縛
若謂五陰身名爲縛.若衆生先有五陰.則不應縛.何以故.一人有二身故.無身亦不應縛.何以故.若無身則無五陰.無五陰則空.云何可縛.如是第三更無所縛.復次
若可縛先縛 則應縛可縛
而先實無縛 餘如去來答
若謂可縛先有縛.則應縛可縛.而實離可縛先無縛.是故不得言衆生有縛.或言.衆生是可縛.五陰是縛.或言.五陰中諸煩惱是縛.餘五陰是可縛.是事不然.何以故.若離五陰先有衆生者.則應以五陰縛衆生.而實離五陰無別衆生.若離五陰別有煩惱者則應以煩惱縛五陰.而實離五陰無別煩惱.復次如去來品中說.已去不去.未去不去.去時不去.如是未縛不縛.縛已不縛.縛時不縛.復次亦無有解.何以故
縛者無有解 無縛亦無解
縛時有解者 縛解則一時
縛者無有解.何以故.已縛故.無縛亦無解.何以故.無縛故.若謂縛時有解.則縛解一時.是事不然.又縛解相違故.問曰.有人修道現入涅槃得解脫.云何言無.答曰
若不受諸法 我當得涅槃
若人如是者 還爲受所縛
若人作是念.我離受得涅槃.是人卽爲受所縛.復次
不離於生死 而別有涅槃
實相義如是 云何有分別
諸法實相第一義中.不說離生死別有涅槃.如經說.涅槃卽生死.生死卽涅槃.如是諸法實相中.云何言是生死是涅槃
中論觀業品第十七(三十三偈)
問曰.汝雖種種破諸法.而業決定有.能令一切衆生受果報.如經說.一切衆生皆隨業而生.惡者入地獄.修福者生天.行道者得涅槃.是故一切法不應空.所謂業者
人能降伏心 利益於衆生
是名爲慈善 二世果報種
人有三毒.爲惱他故生行.善者先自滅惡.是故說降伏其心利益他人.利益他者.行布施持戒忍辱等不惱衆生.是名利益他.亦名慈善福德.亦名今世後世樂果種子.復次
大聖說二業 思與從思生
是業別相中 種種分別說
大聖略說業有二種.一者思.二者從思生.是二業如阿毘曇中廣說.
佛所說思者 所謂意業是
所從思生者 卽是身口業
思是心數法.諸心數法中能發起有所作故名業.因是思故起外身口業.雖因餘心心數法有所作.但思爲所作本.故說思爲業.是業今當說相
身業及口業 作與無作業
如是四事中 亦善亦不善
從用生福德 罪生亦如是
及思爲七法 能了諸業相
口業者四種口業.身業者.三種身業.是七種業有二種差別.有作有無作.作時名作業.作已常隨逐生名無作業.是二種有善不善.不善名不止惡.善名止惡.復有從用生福德.如施主施受者.若受者受用.施主得二種福.一從施生.二從用生.如人以箭射人.若箭殺人有二種罪.一者從射生.二者從殺生.若射不殺.射者但得射罪.無殺罪.是故偈中說罪福從用生.如是名爲六種業.第七名思.是七種卽是分別業相.是業有今世後世果報.是故決定有業有果報故.諸法不應空.答曰
業住至受報 是業卽爲常
若滅卽無業 云何生果報
業若住至受果報.卽爲是常.是事不然.何故.業是生滅相.一念尙不住.何況至果報.若謂業滅.滅則無.云何能生果報.問曰
如芽等相續 皆從種子生
從是而生果 離種無相續
從種有相續 從相續有果
先種後有果 不斷亦不常
如是從初心 心法相續生
從是而有果 離心無相續
從心有相續 從相續有果
先業後有果 不斷亦不常
如從穀有芽.從芽有莖葉等相續.從是相續而有果生.離種無相續生.是故從穀子有相續.從相續有果.先種後有果.故不斷亦不常.如穀種喩.業果亦如是.初心起罪福.猶如穀種.因是心餘心心數法相續生.乃至果報.先業後果故不斷亦不常.若離業有果報.則有斷常.是善業因緣果報者.所謂
能成福德者 是十白業道
二世五欲樂 卽是白業報
白名善淨.成福德因緣者.從是十白業道.生不殺不盜不邪 不妄語不兩舌不惡口不無益語不嫉不 不邪見.是名爲善.從身口意生是果報者.得今世名利.後世天人中貴處生.布施恭敬等雖有種種福德.略說則攝在十善道中.答曰
若如汝分別 其過則甚多
是故汝所說 於義則不然
若以業果報相續故.以穀子爲喩者.其過甚多.但此中不廣說.汝說穀子喩者.是喩不然.何以故.穀子有觸有形.可見有相續.我思惟是事.尙未受此言.況心及業.無觸無形不可見.生滅不住欲以相續.是事不然.復次從穀子有芽等相續者.爲滅已相續.爲不滅相續.若穀子滅已相續者.則爲無因.若穀子不滅而相續者.從是穀子常生諸穀.若如是者.一穀子則生一切世間穀.是事不然.是故業果報相續則不然.問曰
今當復更說 順業果報義
諸佛 支佛 賢聖所稱歎
所謂
不失法如券 業如負財物
此性則無記 分別有四種
見諦所不斷 但思惟所斷
以是不失法 諸業有果報
若見諦所斷 而業至相似
則得破業等 如是之過咎
一切諸行業 相似不相似
一界初受身 爾時報獨生
如是二種業 現世受果報
或言受報已 而業猶故在
若度果已滅 若死已而滅
於是中分別 有漏及無漏
不失法者.當知如券.業者如取物.是不失法.欲界繫色界繫無色界繫亦不繫.若分別善不善無記中.但是無記.是無記義阿毘曇中廣說.見諦所不斷.從一果至一果.於中思惟所斷.是以諸業.以不失法故果生.若見諦所斷而業至相似.則得破業過.是事阿毘曇中廣說.復次不失法者.於一界諸業相似不相似.初受身時果報獨生.於現在身從業更生業.是業有二種.隨重而受報.或有言.是業受報已業猶在.以不念念滅故.若度果已滅.若死已而滅者.須陀洹等度果已而滅.諸凡夫及阿羅漢死已而滅.於此中分別有漏及無漏者.從須陀洹等諸賢聖.有漏無漏等應分別.答曰.是義俱不離斷常過.是故亦不應受.問曰.若爾者.則無業果報.答曰
雖空亦不斷 雖有亦不常
業果報不失 是名佛所說
此論所說義.離於斷常.何以故.業畢竟空寂滅相.自性離有何法可斷何法可失.顚倒因緣故往來生死.亦不常.何以故.若法從顚倒起.則是虛妄無實.無實故非常.復次貪著顚倒不知實相故.言業不失.此是佛所說.復次
諸業本不生 以無定性故
諸業亦不滅 以其不生故
若業有性者 是則名爲常
不作亦名業 常則不可作
若有不作業 不作而有罪
不斷於梵行 而有不淨過
是則破一切 世間語言法
作罪及作福 亦無有差別
若言業決定 而自有性者
受於果報已 而應更復受
若諸世間業 從於煩惱生
是煩惱非實 業當何有實
第一義中諸業不生.何以故.無性故.以不生因緣故則不滅.非以常故不滅.若不爾者.業性應決定有.若業決定有性.則爲是常.若常則是不作業.何以故.常法不可作故.復次若有不作業者.則他人作罪此人受報.又他人斷梵行而此人有罪.則破世俗法.若先有者.冬不應思爲春事.春不應思爲夏事.有如是等過.復次作福及作罪者.則無有別異.起布施持戒等業.名爲作福.起殺盜等業.名爲作罪.若不作而有業.則無有分別.復次是業若決定有性.則一時受果報已.復應更受.是故汝說以不失法故有業報.則有如是等過.復次若業從煩惱起.是煩惱無有決定.但從憶想分別有.若諸煩惱無實.業云何有實.何以故.因無性故業亦無性.問曰.若諸煩惱及業無性不實.今果報身現有.應是實.答曰.
諸煩惱及業 是說身因緣
煩惱諸業空 何況於諸身
諸賢聖說.煩惱及業是身因緣.是中愛能潤生.業能生上中下好醜貴賤等果報.今諸煩惱及業.種種推求無有決定.何況諸身有決定果.隨因緣故.問曰.汝雖種種因緣破業及果報.而經說.有起業者.起業者有故.有業有果報.如說
無明之所蔽 愛結之所縛
而於本作者 不卽亦不異
無始經中說.衆生爲無明所覆.愛結所縛.於無始生死中.往來受種種苦樂.今受者於先作者.不卽是亦不異.若卽是人作罪受牛形.則人不作牛.牛不作人.若異則失業果報墮於無因.無因則斷滅.是故今受者於先作者.不卽是亦不異.答曰
業不從緣生 不從非緣生
是故則無有 能起於業者
無業無作者 何有業生果
若其無有果 何有受果者
若無業無作業者.何有從業生果報.若無果報.云何有受果報者.業有三種.五陰中假名人是作者.是業於善惡處生.名爲報.若起業者尙無.何況有業有果報及果報者.問曰.汝雖種種破業果報及起業者.而今現見衆生作業受果報.是事云何.答曰
如世尊神通 所作變化人
如是變化人 復變作化人
如初變化人 是名爲作者
變化人所作 是則名爲業
諸煩惱及業 作者及果報
皆如幻與夢 如炎亦如嚮
如佛神通力所作化人.是化人復化作化人.如化人無有實事但可眼見.又化人口業說法.身業布施等.是業雖無實而可眼見.如是生死身作者及業.亦應如是知.諸煩惱者.名爲三毒.分別有九十八使九結十纏六垢等無量諸煩惱.業名爲身口意業.今世後世分別有善不善無記.苦報樂報不苦不樂報.現報業生報業後報業.如是等無量作者.名爲能起諸煩惱業能受果報者.果報名從善惡業生無記五陰.如是等諸業皆空無性.如幻如夢.如炎如嚮
中論觀法品第十八(十二偈)
問曰.若諸法盡畢竟空無生無滅.是名諸法實相者.云何入.答曰.滅我我所著故.得一切法空.無我慧名爲入.問曰.云何知諸法無我.答曰
若我是五陰 我卽爲生滅
若我異五陰 則非五陰相
若無有我者 何得有我所
滅我我所故 名得無我智
得無我智者 是則名實觀
得無我智者 是人爲希有
內外我我所 盡滅無有故
諸受卽爲滅 受滅則身滅
業煩惱滅故 名之爲解脫
業煩惱非實 入空戱論滅
諸佛或說我 或說於無我
諸法實相中 無我無非我
諸法實相者 心行言語斷
無生亦無滅 寂滅如涅槃
一切實非實 亦實亦非實
非實非非實 是名諸佛法
自知不隨他 寂滅無戱論
無異無分別 是則名實相
若法從緣生 不卽不異因
是故名實相 不斷亦不常
不一亦不異 不常亦不斷
是名諸世尊 敎化甘露味
若佛不出世 佛法已滅盡
諸 支佛智 從於遠離生
有人說神.應有二種.若五陰卽是神.若離五陰有神.若五陰是神者神則生滅相.如偈中說.若神是五陰卽是生滅相.何以故.生已壞敗故.以生滅相故.五陰是無常.如五陰無常.生滅二法亦是無常.何以故.生滅亦生已壞敗故無常.神若是五陰.五陰無常故.神亦應無常生滅相.但是事不然.若離五陰有神.神卽無五陰相.如偈中說.若神異五陰.則非五陰相.而離五陰更無有法.若離五陰有法者.以何相何法而有.若謂神如虛空離五陰而有者.是亦不然.何以故.破六種品中已破.虛空無有法名爲虛空.若謂以有信故有神.是事不然.何以故.信有四種.一現事可信.二名比知可信.如見煙知有火.三名譬喩可信.如國無 石喩之如金.四名賢聖所說故可信.如說有地獄有天有鬱單曰.無見者.信聖人語故知.是神於一切信中不可得.現事中亦無.比知中亦無.何以故.比知.名先見故後比類而知.如人先見火有煙.後但見煙則知有火.神義不然.誰能先見神與五陰合.後見五陰知有神.若謂有三種比知.一者如本.二者如殘.三者共見.如本.名先見火有煙.今見煙知如本有火.如殘.名如炊飯一粒熟知餘者皆熟.共見.名如眼見人從此去到彼亦見其去.日亦如是.從東方出至西方.雖不見去以人有去相故.知日亦有去.如是苦樂憎愛覺知等.亦應有所依.如見人民知必依王.是事皆不然.何以故.共相信先見人與去法合而至餘方.後見日到餘方故知有去法.無有先見五陰與神合後見五陰知有神.是故共相比知中亦無神.聖人所說中亦無神.何以故.聖人所說.皆先眼見而後說.又諸聖人說餘事可信故.當知說地獄等亦可信.而神不爾.無有先見神而說者.是故於四信等諸信中.求神不可得.求神不可得故無.是故離五陰無別神.復次破根品中.見見者可見破故.神亦同破.又眼見 法尙不可得.何況虛妄憶想等而有神.是故知無我.因有我故有我所.若我則無我所.修習八聖道分.滅我我所因緣故.得無我無我所決定智慧又無我無我所者.於第一義中亦不可得.無我無我所者.能眞見諸法.凡夫人以我我障慧眼故.不能見實.今聖人無我我所故.諸煩惱亦滅.諸煩惱滅故.能見諸法實相.內外我我所滅故諸受亦滅.諸受滅故無量後身皆亦滅.是名說無餘涅槃.問曰.有餘涅槃云何.答曰.諸煩惱及業滅故.名心解脫.是諸煩惱業.皆從憶想分別生無有實.諸憶想分別皆從戱論生.得諸法實相畢竟空.諸戱論則滅.是名說有餘涅槃.實相法如是.諸佛以一切智觀衆生故.種種爲說.亦說有我亦說無我.若心未熟者.未有涅槃分.不知畏罪.爲是等故說有我.又有得道者.知諸法空但假名有我. 爲是等故說我無咎.又有布施持戒等福德.厭離生死苦惱畏涅槃永滅.是故佛爲是等說無我.諸法但因緣和合.生時空生.滅時空滅.是故說無我.但假名說有我.又得道者.知無我不墮斷滅故說無我無咎.是故偈中說.諸佛說有我亦說於無我.若於眞實中不說我非我.問曰.若無我是實.但以世俗故說有我.有何咎.答曰.因破我法有無我.我決定不可得.何有無我.若決定有無我.則是斷滅生於貪著.如般若中說菩薩有我亦非行.無我亦非行.問曰.若不說我非我空不空.佛法爲何所說.答曰.佛說諸法實相.實相中無語言道.滅諸心行.心以取相緣.生以先世業果報故有.不能實見諸法.是故說心行滅.問曰.若諸凡夫心不能見實.聖人心應能見實.何故說一切心行滅.答曰.諸法實相卽是涅槃.涅槃名滅.是滅爲向涅槃故亦名爲滅.若心是實.何用空等解脫門.諸禪定中.何故以滅盡定爲第一.又亦終歸無餘涅槃.是故當知.一切心行皆是虛妄.虛妄故應滅.諸法實相者.出諸心數法.無生無滅寂滅相.如涅槃.問曰經中說.諸法先來寂滅相卽是涅槃.何以言如涅槃.答曰.著法者.分別法有二種.是世間是涅槃.說涅槃是寂滅不說世間是寂滅.此論中說一切法性空寂滅相.爲著法者不解故.以涅槃爲喩.如汝說涅槃相空無相寂滅無戱論.一切世間法亦如是 問曰.若佛不說我非我.諸心行滅.言語道斷者.云何令人知諸法實相.答曰.諸佛無量方便力.諸法無決定相.爲度衆生或說一切實.或說一切不實.或說一切實不實.或說一切非實非不實.一切實者.推求諸法實性.皆入第一義平等一相.所謂無相.如諸流異色異味入於大海則一色一味.一切不實者.諸法未入實相時.各各分別觀皆無有實.但衆緣合故有.一切實不實者.衆生有三品有上中下.上者觀諸法相非實非不實.中者觀諸法相一切實一切不實.下者智力淺故.觀諸法相少實少不實.觀涅槃無爲法不壞故實.觀生死有爲法虛僞故不實.非實非不實者.爲破實不實故.說非實非不實.問曰.佛於餘處.說離非有非無.此中何以言非有非無是佛所說.答曰.餘處爲破四種貪著故說.而此中於四句無戱論.聞佛說則得道.是故言非實非不實.問曰.知佛以是四句因緣說.又得諸法實相者以何相可知.又實相云何.答曰.若能不隨他.不隨他者.若外道雖現神力說是道是非道.自信其心而不隨之.乃至變身雖不知非佛.善解實相故心不可 .此中無法可取可捨故.名寂滅相.寂滅相故.不爲戱論所戱論.戱論有二種.一者愛論.二者見論.是中無此二戱論.二戱論無故.無憶想分別.無別異相.是名實相.問曰.若諸法盡空.將不墮斷滅耶.又不生不滅或墮常耶.答曰不然.先說實相無戱論.心相寂滅言語道斷.汝今貪著取相.於實相法中見斷常過.得實相者.說諸法從衆緣生.不卽是因亦不異因.是故不斷不常.若果異因則是斷.若不異因則是常.問曰.若如是解有何等利.答曰.若行道者.能通達如是義.則於一切法.不一不異不斷不常.若能如是.卽得滅諸煩惱戱論.得常樂涅槃.是故說諸佛以甘露味敎化.如世間言得天甘露漿.則無老病死無諸衰惱.此實相法是眞甘露味.佛說實相有三種.若得諸法實相.滅諸煩惱.名爲聲聞法.若生大悲發無上心.名爲大乘.若佛不出世.無有佛法時. 支佛因遠離生智.若佛度衆生已.入無餘涅槃.遺法滅盡.先世若有應得道者.少觀厭離因緣.獨入山林遠離 鬧得道.名 支佛
中論觀時品第十九(六偈)
問曰.應有時以因待故成.因有過去時.則有未來現在時.因現在時.有過去未來時.因未來時.有過去現在時.上中下一異等法.亦相因待故有.答曰
若因過去時 有未來現在
未來及現在 應在過去時
若因過去時.有未來現在時者.則過去時中.應有未來現在時.何以故.隨所因處有法成.是處應有是法.如因燈有明成.隨有燈處應有明.如是因過去時.成未來現在時者.則過去時中.應有未來現在時.若過去時中.有未來現在時者.則三時盡名過去時.何以故.未來現在時.在過去時中故.若一切時盡過去者.則無未來現在時.盡過去故.若無未來現在時.亦應無過去時.何以故.過去時因未來現在時故.名過去時.如因過去時成未來現在時.如是亦應因未來現在時成過去時.今無未來現在時故.過去時亦應無.是故先說.因過去時成未來現在時.是事不然.若謂過去時中無未來現在時.而因過去時成未來現在時.是事不然.何以故
若過去時中 無未來現在
未來現在時 云何因過去
若未來現在時.不在過去時中者.云何因過去時.成未來現在時.何以故.若三時各異相.不應相因待成.如甁衣等物各自別成不相因待.而今不因過去時.則未來現在時不成.不因現在時.則過去未來時不成.不因未來時.則過去現在時不成.汝先說過去時中.雖無未來現在時.而因過去時.成未來現在時者.是事不然.問曰.若不因過去時.成未來現在時.而有何咎.答曰
不因過去時 則無未來時
亦無現在時 是故無二時
不因過去時.則不成未來現在時.何以故.若不因過去時.有現在時者.於何處有現在時.未來亦如是.於何處有未來時.是故不因過去時.則無未來現在時.如是相待有故.實無有時
以如是義故 則知餘二時
上中下一異 是等法皆無
以如是義故.當知餘未來現在亦應無.及上中下一異等諸法亦應皆無.如因上有中下.離上則無中下.若離上有中下.則不應相因待.因一故有異.因異故有一.若一實有不應因異而有.若異實有.不應因一而有.如是等諸法.亦應如是破.問曰.如有歲月日須臾等差別故知有時.答曰
時住不可得 時去亦 得
時若不可得 云何說時相
因物故有時 離物何有時
物尙無所有 何況當有時
時若不住不應可得.時住亦無.若時不可得.云何說時相.若無時相則無時.因物生故則名時.若離物則無時.上來種種因緣破諸物.物無故何有時
中論觀因果品第二十(二十四偈)
問曰.衆因緣和合現有果生故.當知是果從衆緣和合有.答曰
若衆緣和合 而有果生者
和合中已有 何須和合生
若謂衆因緣和合有果生.是果則和合中已有.而從和合生者.是事不然.何以故.果若先有定體.則不應從和合生.問曰.衆緣和合中雖無果.而果從衆緣生者.有何咎.答曰
若衆緣和合 是中無果者
云何從衆緣 和合而果生
若從衆緣和合則果生者.是和合中無果.而從和合生.是事不然.何以故.若物無自性.是物終不生復次
若衆緣和合 是中有果者
和合中應有 而實不可得
若從衆緣和合中有果者.若色應可眼見.若非色應可意知.而實和合中果不可得.是故和合中有果.是事不然.復次
若衆緣和合 是中無果者
是則衆因緣 與非因緣同
若衆緣和合中無果者.則衆因緣卽同非因緣.如乳是酪因緣.若乳中無酪.水中亦無酪.若乳中無酪則與水同.不應言但從乳出.是故衆緣和合中無果者.是事不然.問曰.因爲果作因已滅.而有因果.無如是咎.答曰
若因與果因 作因已而滅
是因有二體 一與一則滅
若因與果作因已而滅者是因則有二體.一謂與因.二謂滅因.是事不然.一法有二體故.是故因與果作因已而滅.是事不然.問曰.若謂因不與果作因已而滅.亦有果生.有何咎.答曰
若因不與果 作因已而滅
因滅而果生 是果則無因
若是因不與果.作因已而滅者.則因滅已而果生.是果則無因.是事不然.何以故.現見一切果.無有無因生者.是故汝說因不與果作因已而滅亦有果生者.是事不然.問曰.衆緣合時而有果生者.有何咎.答曰
若衆緣合時 而有果生者
生者及可生 則爲一時俱
若衆緣合時有果生者.則生者可生卽一時俱.但是事不爾何以故.如父子不得一時生.是故汝說衆緣合時有果生者.是事不然.問曰.若先有果生.而後衆緣合.有何咎.答曰
若先有果生 而後衆緣合
此卽離因緣 名爲無因果
若衆緣未合.而先有果生者.是事不然.果離因緣故.則名無因果.是故汝說衆緣未合時先有果生者.是事則不然.問曰.因滅變爲果者.有何咎.答曰
若因變爲果 因卽至於果
是則前生因 生已而復生
因有二種.一者前生.二者共生.若因滅變爲果.是前生因應還更生.但是事不然.何以故.已生物不應更生.若謂是因卽變爲果.是亦不然.何以故.若卽是不名爲變.若變不名卽是.問曰.因不盡滅但名字滅.而因體變爲果.如泥團變爲甁.失泥團名而甁名生.答曰.泥團先滅而有甁生.不名爲變.又泥團體不獨生.甁盆甕等皆從泥中出.若泥團但有名.不應變爲甁.變名如乳變爲酪.是故汝說因名雖滅而變爲果.是事不然.問曰.因雖滅失而能生果.是故有果.無如是咎.答曰
云何因滅失 而能生於果
又若因在果 云何因生果
若因滅失已.云何能生果.若因不滅而與果合.何能更生果.問曰.是因遍有果而果生.答曰
若因遍有果 更生何等果
因見不見果 是二俱不生
是因若不見果.尙不應生果.何況見.若因自不見果.則不應生果.何以故.若不見果.果則不隨因.又未有果.云何生果若因先見果.不應復生.果已有故.復次
若言過去因 而於過去果
未來現在果 是則終不合
若言未來因 而於未來果
現在過去果 是則終不合
若言現在因 而於現在果
未來過去果 是則終不合
過去果不與過去未來現在因合.未來果不與未來現在過去因合.現在果不與現在未來過去因合.如是三種果.終不與過去未來現在因合.復次
若不和合者 因何能生果
若有和合者 因何能生果
若因果不和合則無果.若無果云何因能生果.若謂因果和合時因能生果者.是亦不然.何以故.若果在因中.則因中已有果.云何而復生.復次
若因空無果 因何能生果
若因不空果 因何能生果
若因無果者.以無果故因空.云何因生果.如人不懷妊.云何能生子.若因先有果.已有果故不應復生.復次今當說果
果不空不生 果不空不滅
以果不空故 不生亦不滅
果空故不生 果空故不滅
以果是空故 不生亦不滅
果若不空.不應生不應滅.何以故.果若因中先決定有.更不須復生.生無故無滅.是故果不空故.不生不滅.若謂果空故有生滅.是亦不然.何以故.果若空.空名無所有.云何當有生滅.是故說果空故不生不滅.復次今以一異破因果
因果是一者 是事終不然
因果若異者 是事亦不然
若因果是一 生及所生一
若因果是異 因則同非因
若果定有性 因爲何所生
若果定無性 因爲何所生
因不生果者 則無有因相
若無有因相 誰能有是果
若從衆因緣 而有和合生
和合自不生 云何能生果
是故果不從 緣合不合生
若無有果者 何處有合法
是衆緣和合法.不能生自體.自體無故云何能生果.是故果不從緣合生.亦不從不合生.若無有果者.何處有合法
中論觀成壞品第二十一(二十偈)
問曰.一切世間事現是壞敗相.是故有壞.答曰
離成及共成 是中無有壞
離壞及共壞 是中亦無成
若有成若無成俱無壞.若有壞若無壞俱無成.何以故
若離於成者 云何而有壞
如離生有死 是事則不然
成壞共有者 云何有成壞
如世間生死 一時俱不然
若離於壞者 云何當有成
無常未曾有 不在諸法時
若離成壞不可得.何以故.若離成有壞者.則不因成有壞.壞則無因.又無成法而可壞.成名衆緣合.壞名衆緣散.若離成有壞者.無成誰當壞.如無甁不得言甁壞.是故離成無壞.若謂共成有壞者.是亦不然.何以故.法先別成而後有合.合法不離異.若壞離異壞則無因.是故共成亦無壞.若離壞共壞無有成者.若離壞有成成則爲常.常是不壞相.而實不見有法常不壞相.是故離壞無成.若謂共壞有成者.是亦不然.成壞相違.云何一時有.如人有髮無髮不得一時俱.成壞亦爾.是故共壞有成.是事不然.何以故.若謂分別法者.說成中常有壞.是事不然.何以故.若成中常有壞.則不應有住法.而實有住.是故若離壞共壞不應有成.復次
成壞共無成 離亦無有成
是二俱不可 云何當有成
若成壞共亦無成.離亦無成.若共成則二法相違.云何一時.若離則無因.二門俱不成.云何當有成.若有應說.問曰現有盡滅相法.是盡滅相法.亦說盡亦說不盡.如是則應有成壞.答曰
盡則無有成 不盡亦無成
盡則無有壞 不盡亦不壞
諸法日夜中念念常滅盡過去.如水流不住.是則名盡.是事不可取不可說.如野馬無決定性可得.如是盡無決定性可得.云何可得分別說有成.是故言盡亦不成.成無故亦不應有壞.是故說盡亦無有壞.又念念生滅常相續不斷故名不盡.如是法決定常住不斷.云何可得分別說言今是成時.是故說無盡亦無成.成無故無壞.是故說不盡亦無壞.如是推求.實事不可得故.無成無壞.問曰.且置成壞.但令有法有何咎.答曰
若離於成壞 是亦無有法
若當離於法 亦無有成壞
離成壞無法者.若法無成無壞.是法應無或常.而世間無有常法.汝說離成壞有法.是事不然.問曰.若離法但有成壞.有何咎.答曰.離法有成壞.是亦不然.何以故.若離法誰成誰壞.是故離法有成壞.是事不然.復次
若法性空者 誰當有成壞
若性不空者 亦無有成壞
若諸法性空.空何有成壞.若諸法性不空.不空則決定有.亦不應有成壞.復次
成壞若一者 是事則不然
成壞若異者 是事亦不然
推求成壞一則不可得.何以故.異相故.種種分別故.又成壞異亦不可得.何以故.無有別故.亦無因故.復次
若謂以眼見 而有生滅者
則爲是癡妄 而見有生滅
若謂以眼見有生滅者.云何以言說破.是事不然.何以故.眼見生滅者.則是愚癡顚倒故.見諸法性空無決定如幻如夢.但凡夫先世顚倒因緣得此眼.今世憶想分別因緣故.言眼見生滅.第一義中實無生滅.是事已於破相品中廣說.復次
從法不生法 亦不生非法
從非法不生 法及於非法
從法不生法者.若失若至二俱不然.從法生法.若至若失是則無因.無因則墮斷常.若已至從法生法.是法至已而名爲生.則爲是常.又生已更生.又亦無因生.是事不然.若已失從法生法者.是則失因.生者無因.是故從失亦不生法.從法不生非法者.非法名無所有.法名有.云何從有相生無相.是故從法不生非法.從非法不生法者.非法名爲無.無云何生有.若從無生有者.是則無因.無因則有大過.是故不從非法生法.不從非法生非法者.非法名無所有.云何從無所有生無所有.如 角不生龜毛.是故不從非法生非法.問曰.法非法雖種種分別故無生.但法應生法.答曰
法不從自生 亦不從他生
不從自他生 云何而有生
法未生時無所有故.又卽自不生故.是故法不自生.若法未生則亦無他.無他故不得言從他生.又未生則無自.無自亦無他.共亦不生.若三種不生.云何從法有法生.復次
若有所受法 卽墮於斷常
當知所受法 爲常爲無常
受法者.分別是善是不善常無常等.是人必墮若常見若斷見.何以故.所受法應有二種.若常若無常.二俱不然.何以故.若常卽墮常邊.若無常卽墮斷邊.問曰
所有受法者 不墮於斷常
因果相續故 不斷亦不常
有人雖信受分別說諸法.而不墮斷常.如經說五陰無常苦空無我.而不斷滅.雖說罪福無量劫數不失.而不是常.何以故.是法因果常生滅相續故往來不絶.生滅故不常.相續故不斷.答曰
若因果生滅 相續而不斷
滅更不生故 因卽爲斷滅
若汝說諸法因果相續故不斷不常.若滅法已滅更不復生.是則因斷.若因斷云何有相續.已滅不生故.復次
法住於自性 不應有有無
涅槃滅相續 則墮於斷滅
法決定在有相中.爾時無無相.如甁定在甁相.爾時無失壞相.隨有甁時無失壞相.無甁時亦無失壞相.何以故.若無甁則無所破.以是義故滅不可得.離滅故亦無生.何以故.生滅相因待故.又有常等過故.是故不應於一法而有有無.又汝先說因果生滅相續故.雖受諸法不墮斷常.是事不然.何以故.汝說因果相續故有三有相續.滅相續名涅槃.若爾者.涅槃時應墮斷滅.以滅三有相續故.復次
若初有滅者 則無有後有
初有若不滅 亦無有後有
初有名今世有.後有名來世有.若初有滅次有後有.是卽無因.是事不然.是故不得言初有滅有後有.若初有不滅.亦不應有後有.何以故.若初有未滅而有後有者.是則一時有二有.是事不然.是故初有不滅無有後有.問曰.後有不以初有滅生.不以不滅生.但滅時生.答曰
若初有滅時 而後有生者
滅時是一有 生時是一有
若初有滅時.後有生者.卽二有一時俱.一有是滅時.一有是生時.問曰.滅時生時二有俱者則不然.但現見初有滅時後有生.答曰
若言於生滅 而謂一時者
則於此陰死 卽於此陰生
若生時滅時一時無二有.而謂初有滅時後有生者.今應隨在何陰中死.卽於此陰生.不應餘陰中生.何以故.死者卽是生者.如是死生相違法.不應一時一處.是故汝先說滅時生時一時無二有.但現見初有滅時後有生者.是事不然.復次
三世中求有 相續不可得
若三世中無 何有有相續
三有名欲有色有無色有.無始生死中不得實智故.常有三有相續.今於三世中諦求不可得.若三世中無有.當於何處有有相續.當知有有相續.皆從愚癡顚倒故有.實中則無
中論卷第四
龍樹菩薩造梵志靑目釋
姚秦三藏鳩摩羅什譯
觀如來品第二十二(十六偈)
問曰.一切世中尊.唯有如來正遍知.號爲法王.一切智人是則應有.答曰.今諦思惟.若有應取.若無何所取.何以故.如來
非陰不離陰 此彼不相在
如來不有陰 何處有如來
若如來實有者.爲五陰是如來.爲離五陰有如來.爲如來中有五陰.爲五陰中有如來.爲如來有五陰.是事皆不然.五陰非是如來.何以故.生滅相故.五陰生滅相.若如來是五陰.如來卽是生滅相.若生滅相者.如來卽有無常斷滅等過.又受者受法則一.受者是如來.受法是五陰.是事不然.是故如來非是五陰.離五陰亦無如來.若離五陰有如來者.不應有生滅相.若爾者.如來有常等過.又眼等諸根不能見知.但是事不然.是故離五陰亦無如來.如來中亦無五陰.何以故.若如來中有五陰.如器中有果水中有魚者.則爲有異.若異者.卽有如上常等過.是故如來中無五陰.又五陰中無如來.何以故.若五陰中有如來.如床上有人器中有乳者.如是則有別異.如上說過.是故五陰中無如來.如來亦不有五陰.何以故.若如來有五陰.如人有子.如是則有別異.若爾者.有如上過.是事不然.是故如來不有五陰.如是五種求不可得.何等是如來.問曰.如是義求如來不可得.而五陰和合有如來.答曰
陰合有如來 則無有自性
若無有自性 云何因他有
若如來五陰和合故有.卽無自性.何以故.因五陰和合有故.問曰.如來不以自性有.但因他性有.答曰.若無自性.云何因他性有.何以故.他性亦無自性.又無相待因故.他性不可得.不可得故不名爲他.復次
法若因他生 是卽爲非我
若法非我者 云何是如來
若法因衆緣生.卽無有我.如因五指有拳.是拳無有自體.如是因五陰名我.是我卽無自體.我有種種名.或名衆生人天如來等.若如來因五陰有.卽無自性.無自性故無我.若無我云何說名如來.是故偈中說法若因他生是卽爲非我.若法非我者云何是如來.復次
若無有自性 云何有他性
離自性他性 何名爲如來
若無自性.他性亦不應有.因自性故名他性.此無故彼亦無.是故自性他性二俱無.若離自性他性.誰爲如來.復次
若不因五陰 先有如來者
以今受陰故 則說爲如來
今實不受陰 更無如來法
若以不受無 今當云何受
若其未有受 所受不名受
無有無受法 而名爲如來
若於一異中 如來不可得
五種求亦無 云何受中有
又所受五陰 不從自性有
若無自性者 云何有他性
若未受五陰.先有如來者.是如來今應受五陰.已作如來.而實未受五陰時先無如來.今云何當受.又不受五陰者.五陰不名爲受.無有無受而名爲如來.又如來一異中求不可得.五陰中五種求亦不可得.若爾者.云何於五陰中說有如來.又所受五陰.不從自性有.若謂從他性有.若不從自性有.云何從他性有.何以故.以無自性故.又他性亦無.復次
以如是義故 受空受者空
云何當以空 而說空如來
以是義思惟.受及受者皆空.若受空者.云何以空受.而說空如來.問曰.汝謂受空受者空.則定有空耶.答曰不然.何以故
空則不可說 非空不可說
共不共 說 但以假名說
諸法空則不應說.諸法不空亦不應說.諸法空不空亦不應說.非空非不空亦不應說.何以故.但破相違故.以假名說.如是正觀思惟.諸法實相中.不應以諸難爲難.何以故
寂滅相中無 常無常等四
寂滅相中無 邊無邊等四
諸法實相.如是微妙寂滅.但因過去世.起四種邪見.世間有常.世間無常.世間常無常.世間非常非無常.寂滅中盡無.何以故.諸法實相.畢竟淸淨不可取.空尙不受.何況有四種見.四種見皆因受生.諸法實相無所因受.四種見皆以自見爲貴.他見爲賤.諸法實相無有此彼.是故說寂滅中無四種見.如因過去世有四種見.因未來世有四種見亦如是.世間有邊.世間無邊.世間有邊無邊.世間非有邊非無邊.問曰.若如是破如來者.則無如來耶.答曰
邪見深厚者 則說無如來
如來寂滅相 分別有亦非
邪見有二種.一者破世間樂.二者破涅槃道.破世間樂者.是 邪見.言無罪無福.無如來等賢聖.起是邪見捨善爲惡.則破世間樂.破涅槃道者.貪著於我.分別有無.起善滅惡.起善故得世間樂.分別有無故不得涅槃.是故若言無如來者.是深厚邪見.乃失世間樂.何況涅槃.若言有如來.亦是邪見.何以故.如來寂滅相.而種種分別故.是故寂滅相中.分別有如來.亦爲非
如是性空中 思惟亦不可
如來滅度後 分別於有無
諸法實相性空故.不應於如來滅後思惟若有若無.若有無.如來從本已來畢竟空.何況滅後
如來過戱論 而人生戱論
戱論破慧眼 是皆不見佛
戱論名憶念取相分別此彼.言佛滅不滅等.是人爲戱論.覆慧眼故不能見如來法身.此如來品中.初中後思惟.如來定性不可得.是故偈說
如來所有性 卽是世間性
如來無有性 世間亦無性
此品中思惟推求.如來性卽是一切世間性.問曰.何等是如來性.答曰.如來無有性.同世間無性
中論觀顚倒品第二十三(二十四偈)
問曰
從憶想分別 生於貪 癡
淨不淨顚倒 皆從衆緣生
經說因淨不淨顚倒.憶想分別生貪 癡.是故當知有貪 癡.答曰
若因淨不淨 顚倒生三毒
三毒卽無性 故煩惱無實
若諸煩惱.因淨不淨顚倒.憶想分別生.卽無自性.是故諸煩惱無實.復次
我法有以無 是事終不成
無我諸煩惱 有無亦不成
我無有因緣若有若無而可成.今無我諸煩惱云何以有無而可成.何以故
誰有此煩惱 是卽爲不成
若離是而有 煩惱則無屬
煩惱名爲能惱他.惱他者應是衆生.是衆生於一切處推求不可得.若謂離衆生但有煩惱.是煩惱則無所屬.若謂雖無我而煩惱屬心.是事亦不然.何以故
如身見五種 求之不可得
煩惱於垢心 五求亦不得
如身見.五陰中五種求不可得.諸煩惱亦於垢心中.五種求亦不可得.又垢心於煩惱中.五種求亦不可得.復次
淨不淨顚倒 是則無自性
云何因此二 而生諸煩惱
淨不淨顚倒者.顚倒名虛妄.若虛妄卽無性.無性則無顚倒.若無顚倒.云何因顚倒起諸煩惱.問曰
色聲香味觸 及法爲六種
如是之六種 是三毒根本
是六入三毒根本.因此六入生淨不淨顚倒.因淨不淨顚倒生貪 癡.答曰
色聲香味觸 及法體六種
皆空如炎夢 如乾 婆城
如是六種中 何有淨不淨
猶如幻化人 亦如鏡中像
色聲香味觸法自體.未與心和合時.空無所有.如炎如夢.如化如鏡中像.但 惑於心無有定相.如是六入中.何有淨不淨.復次
不因於淨相 則無有不淨
因淨有不淨 是故無不淨
若不因於淨.先無有不淨.因何而說不淨.是故無不淨.復次
不因於不淨 則亦無有淨
因不淨有淨 是故無有淨
若不因不淨.先無有淨.因何而說淨.是故無有淨.復次
若無有淨者 何由而有貪
若無有不淨 何由而有
無淨不淨故.則不生貪 .問曰.經說常等四顚倒.若無常中見常.是名顚倒.若無常中見無常.此非顚倒.餘三顚倒亦如是.有顚倒故.顚倒者亦應有.何故言都無.答曰
於無常著常 是則名顚倒
空中無有常 何處有常倒
若於無常中著常.名爲顚倒.諸法性空中無有常.是中何處有常顚倒.餘三亦如是.復次
若於無常中 著無常非倒
空中無無常 何有非顚倒
若著無常言是無常.不名爲顚倒者.諸法性空中無無常.無常無故誰爲非顚倒.餘三亦如是.復次
可著著者著 及所用著法
是皆寂滅相 云何而有著
可著名物著者名作者.著名業.所用法名所用事.是皆性空寂滅相.如如來品中所說.是故無有著.復次
若無有著法 言邪是顚倒
言正不顚倒 誰有如是事
著名憶想分別此彼有無等.若無此著者.誰爲邪顚倒.誰爲正不顚倒.復次
有倒不生倒 無倒不生倒
倒者不生倒 不倒亦不生
若於顚倒時 亦不生顚倒
汝可自觀察 誰生於顚倒
已顚倒者.則更不生顚倒.已顚倒故.不顚倒者亦不顚倒.無有顚倒故.顚倒時亦不顚倒.有二過故.汝今除 慢心.善自觀察.誰爲顚倒者.復次
諸顚倒不生 云何有此義
無有顚倒故 何有顚倒者
顚倒種種因緣破故.墮在不生.彼貪著不生.謂不生是顚倒實相.是故偈說.云何名不生爲顚倒.乃至無漏法尙不名爲不生相.何況顚倒是不生相.顚倒無故何有顚倒者.因顚倒有顚倒者.復次
若常我樂淨 而是實有者
是常我樂淨 則非是顚倒
若常我樂淨是四實有性者.是常我樂淨則非顚倒.何以故.定有實事故.云何言顚倒.若謂常我樂淨倒是四無者.無常苦無我不淨.是四應實有.不名顚倒.顚倒相違故名不顚倒.是事不然.何以故
若常我樂淨 而實無有者
無常苦不淨 是則亦應無
若常我樂淨是四實無.無故無常等四事亦不應有.何以故.無相因待故.復次
如是顚倒滅 無明則亦滅
以無明滅故 諸行等亦滅
如是者如其義.滅諸顚倒故.十二因緣根本無明亦滅.無明滅故三種行業.乃至老死等皆滅.復次
若煩惱性實 而有所屬者
云何當可斷 誰能斷其性
若諸煩惱卽是顚倒.而實有性者.云何可斷.誰能斷其性.若謂諸煩惱皆虛妄無性而可斷者.是亦不然.何以故
若煩惱虛妄 無性無屬者
云何當可斷 誰能斷無性
若諸煩惱虛妄無性.則無所屬.云何可斷.誰能斷無性法
中論觀四諦品第二十四(四十偈)
問曰.破四顚倒.通達四諦.得四沙門果
若一切皆空 無生亦無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
以無四諦故 見苦與斷集
證滅及修道 如是事皆無
以是事無故 則無四道果
無有四果故 得向者亦無
若無八賢聖 則無有僧寶
以無四諦故 亦無有法寶
以無法僧寶 亦無有佛寶
如是說空者 是則破三寶
若一切世間皆空無所有者.卽應無生無滅.以無生無滅故.則無四聖諦.何以故.從集諦生苦諦.集諦是因苦諦是果.滅苦集諦名爲滅諦.能至滅諦名爲道諦.道諦是因滅諦是果.如是四諦有因有果.若無生無滅則無四諦.四諦無故.則無見苦斷集證滅修道.見苦斷集證滅修道無故.則無四沙門果.四沙門果無故.則無四向四得者.若無此八賢聖.則無僧寶.又四聖諦無故.法寶亦無.若無法寶僧寶者.云何有佛.得法名爲佛.無法何有佛.汝說諸法皆空.則壞三寶.復次
空法壞因果 亦壞於罪福
亦復悉毁壞 一切世俗法
若受空法者.則破罪福及罪福果報.亦破世俗法.有如是等諸過故.諸法不應空.答曰
汝今實不能 知空空因緣
及知於空義 是故自生惱
汝不解云何是空相.以何因緣說空.亦不解空義.不能如實知故.生如是疑難.復次
諸佛依二諦 爲衆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一義諦
若人不能知 分別於二諦
則於深佛法 不知眞實義
世俗諦者.一切法性空.而世間顚倒故生虛妄法.於世間是實.諸賢聖眞知顚倒性.故知一切法皆空無生.於聖人是第一義諦名爲實.諸佛依是二諦.而爲衆生說法.若人不能如實分別二諦.則於甚深佛法.不知實義.若謂一切法不生是第一義諦.不須第二俗諦者.是亦不然.何以故
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
不得第一義 則不得涅槃
第一義皆因言說. 言說是世俗.是故若不依世俗.第一義則不可說.若不得第一義.云何得至涅槃.是故諸法雖無生.而有二諦.復次
不能正觀空 鈍根則自害
如不善 術 不善捉毒蛇
若人鈍根.不善解空法.於空有失而生邪見.如爲利捉毒蛇不能善捉反爲所害.如 術欲有所作不能善成則還自害.鈍根觀空法亦如是.復次
世尊知是法 甚深微妙相
非鈍根所及 是故不欲說
世尊以法甚深微妙.非鈍根所解.是故不欲說.復次
汝謂我著空 而爲我生過
汝今所說過 於空則無有
汝謂我著空故.爲我生過.我所說性空.空亦復空.無如是過.復次
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
若無空義者 一切則不成
以有空義故.一切世間出世間法皆悉成就.若無空義.則皆不成就.復次
汝今自有過 而以 向我
如人乘馬者 自忘於所乘
汝於有法中有過不能自覺.而於空中見過.如人乘馬而忘其所乘.可以故
若汝見諸法 決定有性者
卽爲見諸法 無因亦無緣
汝說諸法有定性.若爾者.則見諸法無因無緣.何以故.若法決定有性.則應不生不滅.如是法何用因緣.若諸法從因緣生則無有性.是故諸法決定有性.則無因緣.若謂諸法決定住自性.是則不然.何以故
卽爲破因果 作作者作法
亦復壞一切 萬物之生滅
諸法有定性.則無因果等諸事.如偈說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衆因緣生法.我說卽是空.何以故.衆緣具足和合而物生.是物屬衆因緣故無自性.無自性故空.空亦復空.但爲引導衆生故.以假名說.離有無二邊故名爲中道.是法無性故不得言有.亦無空故不得言無.若法有性相.則不待衆緣而有.若不待衆緣則無法.是故無有不空法.汝上所說空法有過者.此過今還在汝.何以故
若一切不空 則無有生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
若一切法各各有性不空者.則無有生滅.無生滅故.則無四聖諦法.何以故
苦不從緣生 云何當有苦
無常是苦義 定性無無常
苦不從緣生故則無苦.何以故.經說無常是苦義.若苦有定性.云何有無常.以不捨自性故.復次
若苦有定性 何故從集生
是故無有集 以破空義故
若苦有定性者.則不應更生.先已有故.若爾者.則無集諦.以壞空義故.復次
苦若有定性 則不應有滅
汝著定性故 卽破於滅諦
若有定性者.則不應滅.何以故.性則無滅故.復次
苦若有定性 則無有修道
若道可修習 卽無有定性
法若定有.則無有修道.何以故.若法實者則是常.常則不可增益.若道可修.道則無有定性.復次
若無有苦諦 及無集滅諦
所可滅苦道 竟爲何所至
諸法若先定有性.則無苦集滅諦.今滅苦道.竟爲至何滅苦處.復次
若苦定有性 先來所不見
於今云何見 其性不異故
若先凡夫時.不能見苦性.今亦不應見.何以故.不見性定故.復次
如見苦不然 斷集及證滅
修道及四果 是亦皆不然
如苦諦性先不見者後亦不應見.如是亦不應有斷集證滅修道.何以故.是集性先來不斷.今亦不應斷.性不可斷故.滅先來不證.今亦不應證.先來不證故.道先來不修.今亦不應修.先來不修故.是故四聖諦.見斷證修四種行.皆不應有.四種行無故.四道果亦無.何以故
是四道果性 先來不可得
諸法性若定 今云何可得
諸法若有定性.四沙門果先來未得.今云何可得.若可得者.性則無定.復次
若無有四果 則無得向者
以無八聖故 則無有僧寶
無四沙門果故.則無得果向果者.無八賢聖故.則無有僧寶.而經說八賢聖.名爲僧寶.復次
無四聖諦故 亦無有法寶
無法寶僧寶 云何有佛寶
行四聖諦得涅槃法.若無四諦則無法寶.若無二寶云何當有佛寶.汝以如是因緣.說諸法定性.則壞三寶問曰.汝雖破諸法.究竟道阿 多羅三 三菩提應有.因是道故名爲佛.答曰
汝說則不因 菩提而有佛
亦復不因佛 而有於菩提
汝說諸法有定性者.則不應因菩提有佛.因佛有菩提.是二性常定故.復次
雖復勤精進 修行菩提道
若先非佛性 不應得成佛
以先無性故.如鐵無金性.雖復種種鍛煉.終不成金.復次
若諸法不空 無作罪福者
不空何所作 以其性定故
若諸法不空.終無有人作罪福者.何以故.罪福性先已定故.又無作作者故.復次
汝於罪福中 不生果報者
是則離罪福 而有諸果報
汝於罪福因緣中.皆無果報者.則應離罪福因緣而有果報.何以故.果報不待因出故.問曰.離罪福可無善惡果報.但從罪福有善惡果報.答曰
若謂從罪福 而生果報者
果從罪福生 云何言不空
若離罪福無善惡果.云何言果不空.若爾離作者則無罪福.汝先說諸法不空.是不然.復次
汝破一切法 諸因緣空義
則破於世俗 諸餘所有法
汝若破衆因緣法第一空義者.則破一切世俗法.何以故
若破於空義 卽應無所作
無作而有作 不作名作者
若破空義.則一切果皆無作無因.又不作而作.又一切作者不應有所作.又離作者.有業有果報有受者.但是事皆不然.是故不應破空.復次
若有決定性 世間種種相
則不生不滅 常住而不壞
若諸法有定性.則世間種種相.天人畜生萬物.皆應不生不滅常住不壞.何以故.有實性不可變異故.而現見萬物.各有變異相生滅變易.是故不應有定性.復次
若無有空者 未得不應得
亦無斷煩惱 亦無苦盡事
若無有空法者.則世間出世間所有功德未得者.皆不應得.亦不應有斷煩惱者.亦無苦盡.何以故.以性定故
是故經中說 若見因緣法
則爲能見佛 見苦集滅道
若人見一切法從衆緣生.是人卽能見佛法身.增益智慧.能見四聖諦苦集滅道.見四聖諦得四果滅諸苦惱.是故不應破空義.若破空義則破因緣法.破因緣法.則破三寶.若破三寶.則爲自破.
中論觀涅槃品第二十五(二十四偈)
問曰
若一切法空 無生無滅者
何斷何所滅 而稱爲涅槃
若一切法空.則無生無滅.無生無滅者.何所斷何所滅.而名爲涅槃.是故一切法不應空.以諸法不空故.斷諸煩惱滅五陰.名爲涅槃.答曰
若諸法不空 則無生無滅
何斷何所滅 而稱爲涅槃
若一切世間不空.則無生無滅.何所斷何所滅.而名爲涅槃.是故有無二門.則非至涅槃.所名涅槃者
無得亦無至 不斷亦不常
不生亦不滅 是說名涅槃
無得者.於行於果無所得.無至者.無處可至.不斷者.五陰先來畢竟空故.得道入無餘涅槃時.亦無所斷.不常者.若有法可得分別者.則名爲常.涅槃寂滅無法可分別故.不名爲常.生滅亦爾.如是相者名爲涅槃.復次經說.涅槃非有非無非有無.非非有非非無.一切法不受內寂滅名涅槃.何以故
涅槃不名有 有則老死相
終無有有法 離於老死相
眼見一切萬物皆生滅故.是老死相.涅槃若是有則應有老死相.但是事不然.是故涅槃不名有.又不見離生滅老死別有定法而名涅槃.若涅槃是有卽應有生滅老死相.以離老死相故.名爲涅槃.復次
若涅槃是有 涅槃卽有爲
終無有一法 而是無爲者
涅槃非是有.何以故.一切萬物從衆緣生.皆是有爲.無有一法名爲無爲者.雖常法假名無爲.以理推之.無常法尙無有.何況常法不可見不可得者.復次
若涅槃是有 云何名無受
無有不從受 而名爲有法
若謂涅槃是有法者.經則不應說無受是涅槃.何以故.無有有法不受而有.是故涅槃非有.問曰.若有非涅槃者無應是涅槃耶.答曰
有尙非涅槃 何況於無耶
涅槃無有有 何處當有無
若有非涅槃.無云何是涅槃.何以故.因有故有無.若無有.何有無.如經說.先有今無則名無.涅槃則不爾.何以故.非有法變爲無故.是故無亦不作涅槃.復次
若無是涅槃 云何名不受
未曾有不受 而名爲無法
若謂無是涅槃.經則不應說不受名涅槃.何以故.無有不受而名無法.是故知涅槃非無.問曰.若涅槃非有非無者.何等是涅槃.答曰
受諸因緣故 輪轉生死中
不受諸因緣 是名爲涅槃
不如實知顚倒故.因五受陰往來生死.如實知顚倒故.則不復因五受陰往來生死.無性五陰不復相續故.說名涅槃.復次
如佛經中說 斷有斷非有
是故知涅槃 非有亦非無
有名三有.非有名三有斷滅.佛說斷此二事故.當知涅槃非有亦非無.問曰.若有若無非涅槃者.今有無共合.是涅槃耶.答曰
若謂於有無 合爲涅槃者
有無卽解脫 是事則不然
若謂於有無合爲涅槃者.卽有無二事合爲解脫.是事不然.何以故.有無二事相違故.云何一處有.復次
若謂於有無 合爲涅槃者
涅槃非無受 是二從受生
若謂有無合爲涅槃者.經不應說涅槃名無受.何以故.有無二事從受生.相因而有.是故有無二事.不得合爲涅槃.復次
有無共合成 云何名涅槃
涅槃名無爲 有無是有爲
有無二事共合.不得名涅槃.涅槃名無爲.有無是有爲.是故有無非是涅槃.復次
有無二事共 云何是涅槃
是二不同處 如明暗不俱
有無二事.不得名涅槃.何以故.有無相違一處不可得.如明暗不俱.是故有時無無.無時無有.云何有無共合.而名爲涅槃.問曰.若有無共合非涅槃者.今非有非無應是涅槃.答曰
若非有非無 名之爲涅槃
此非有非無 以何而分別
若涅槃非有非無者.此非有非無.因何而分別.是故非有非無是涅槃者.是事不然.復次
分別非有無 如是名涅槃
若有無成者 非有非無成
汝分別非有非無是涅槃者是事不然.何以故.若有無成者.然後非有非無成.有相違名無.無相違名有.是有無第三句中已破.有無無故.云何有非有非無.是故涅槃.非非有非非無.復次
如來滅度後 不言有與無
亦不言有無 非有及非無
如來現在時 不言有與無
亦不言有無 非有及非無
若如來滅後若現在.有如來亦不受.無如來亦不受.亦有如來亦無如來亦不受.非有如來非無如來亦不受.以不受故.不應分別涅槃有無等.離如來誰當得涅槃.何時何處以何法說涅槃.是故一切時一切種.求涅槃相不可得.復次
涅槃與世間 無有少分別
世間與涅槃 亦無少分別
五陰相續往來因緣故.說名世間.五陰性畢竟空無受寂滅.此義先已說.以一切法不生不滅故.世間與涅槃無有分別.涅槃與世間亦無分別.復次
涅槃之實際 及與世間際
如是二際者 無毫釐差別
究竟推求世間涅槃實際無生際.以平等不可得故.無毫釐差別.復次
滅後有無等 有邊等常等
諸見依涅槃 未來過去世
如來滅後有如來無如來.亦有如來亦無如來.非有如來非無如來.世間有邊世間無邊.世間亦有邊亦無邊.世間非有邊非無邊.世間常世間無常.世間亦常亦無常.世間非有常非無常.此三種十二見.如來滅後有無等四見.依涅槃起.世間有邊無邊等四見.依未來世起.世間常無常等四見.依過去世起.如來滅後有無等不可得.涅槃亦如是.如世間前際後際有邊無邊有常無常等不可得.涅槃亦如是.是故說世間涅槃等無有異.復次
一切法空故 何有邊無邊
亦邊亦無邊 非有非無邊
何者爲一異 何有常無常
亦常亦無常 非常非無常
諸法不可得 滅一切戱論
無人亦無處 佛亦無所說
一切法一切時一切種.從衆緣生故.畢竟空故無自性.如是法中.何者是有邊誰爲有邊.何者是無邊.亦有邊亦無邊.非有邊非無邊.誰爲非有邊非無邊.何者是常誰爲是常.何者是無常.常無常非常非無常.誰爲非常非無常.何者身卽是神.何者身異於神.如是等六十二邪見.於畢竟空中皆不可得.諸有所得皆息.戱論皆滅.戱論滅故.通達諸法實相得安隱道.從因緣品來.分別推求諸法.有亦無.無亦無.有無亦無.非有非無亦無.是名諸法實相.亦名如法性實際涅槃.是故如來無時無處.爲人說涅槃定相.是故說諸有所得皆息.戱論皆滅
中論觀十二因緣品第二十六(九偈)
問曰汝以摩訶衍說第一義道.我今欲聞說聲聞法入第一義道.答曰
衆生癡所覆 爲後起三行
以起是行故 隨行墮六趣
以諸行因緣 識受六道身
以有識著故 增長於名色
名色增長故 因而生六入
情塵識和合 而生於六觸
因於六觸故 卽生於三受
以因三受故 而生於渴愛
因愛有四取 因取故有有
若取者不取 則解脫無有
從有而有生 從生有老死
從老死故有 憂悲諸苦惱
如是等諸事 皆從生而有
但以是因緣 而集大苦陰
是謂爲生死 諸行之根本
無明者所造 智者所不爲
以是事滅故 是事則不生
但是苦陰聚 如是而正滅
凡夫爲無明所盲故.以身口意業.爲後身起六趣諸行.隨所起行有上中下.識入六趣隨行受身.以識著因緣故名色集.名色集故有六入.六入因緣故有六觸.六觸因緣故有三受.三受因緣故生渴愛.渴愛因緣故有四取.四取取時以身口意業起罪福.令後三有相續.從有而有生.從生而有老死.從老死有憂悲苦惱種種衆患.但有大苦陰集.是故知凡夫無智.起此生死諸行根本.智者所不起.以如實見故.則無明滅.無明滅故諸行亦滅.以因滅故果亦滅.如是修習觀十二因緣生滅智故是事滅.是事滅故乃至生老死憂悲大苦陰皆如實正滅.正滅者畢竟滅.是十二因緣生滅義.如阿毘曇修多羅中廣說
中論觀邪見品第二十七(三十一偈)
問曰.已聞大乘法破邪見.今欲聞聲聞法破邪見.答曰
我於過去世 爲有爲是無
世間常等見 皆依過去世
我於未來世 爲作爲不作
有邊等諸見 皆依未來世
我於過去世.爲有爲無.爲有無爲非有非無.是名常等諸見依過去世.我於未來世.爲作爲不作.爲作不作爲非作非不作.是名邊無邊等諸見依未來世.如是等諸邪見.何因緣故名爲邪見.是事今當說
過去世有我 是事不可得
過去世中我 不作今世我
若謂我卽是 而身有異相
若當離於身 何處別有我
離有無身我 是事爲已成
若謂身卽我 若都無有我
但身不爲我 身相生滅故
云何當以受 而作於受者
若離身有我 是事則不然
無受而有我 而實不可得
今我不離受 亦不卽是受
非無受非無 此卽決定義
我於過去世有者.是事不然.何以故.先世中我不卽作今我.有常過故.若常則有無量過.何以故.如人修福因緣故作天而後作人.若先世我卽是今我者.天卽是人.又以罪業因緣故作 陀羅.後作婆羅門.若先世我卽是今我者. 陀羅卽是婆羅門.譬如舍衛國婆羅門名提婆達.到王舍城亦名提婆達.不以至王舍城故爲異.若先作天後作人.則天卽是人. 陀羅卽是婆羅門.但是事不然.何以故.天不卽是人. 陀羅不卽是婆羅門.有此等常過故.若謂先世我不作今我.如人浣衣時名爲浣者.刈時名爲刈者.而浣者與刈者雖不異.而浣者不卽是刈者.如是我受天身名爲天.我受人身名爲人.我不異而身有異者.是事不然.何以故.若卽是者.不應言天作人.今浣者於刈者.爲異爲不異.若不異.浣者應卽是刈者.如是先世天卽是人. 陀羅卽是婆羅門.我亦有常過.若異者.浣者卽不作刈者.如是天不作人.我亦無常.無常則無我相.是故不得言卽是.問曰.我卽是.但因受故分別是天是人.受名五陰身.以業因緣故分別是天是人是 陀羅是婆羅門.而我實非天非人.非 陀羅非婆羅門.是故無如是過.答曰.是事不然.何以故.若身作天作人.作 陀羅作婆羅門.非是我者.則離身別有我.今罪福生死往來.皆是身非是我.罪因緣故墮三惡道.福因緣故生三善道.若苦樂瞋喜憂怖等.皆是身非我者.何用我爲.如治俗人罪.不豫出家人.五陰因緣相續罪福不失故有解脫.若皆是身非我者.何用我爲.問曰.罪福等依止於我.我有所知身無所知故.知者應是我.起業因緣罪福是作法.當知應有作者.作者是我.身是我所用.亦是我所住處.譬如舍主以草木泥 等治舍.自爲身故隨所用治舍有好惡.我亦如是.隨作善惡等得好醜身.六道生死皆我所作.是故罪福之身皆屬於我.譬如舍但屬舍主不屬他人.答曰.是喩不然.何以故.舍主有形.有觸有力故能治舍.汝所說我無形無觸故無作力.自無作力亦不能使他作.若世間有一法無形無觸能有所作者.則可信受知有作者.但是事不然.若我是作者.則不應自作苦事.若是念者.可貪樂事不應忘失.若我不作苦而苦强生者.餘一切皆亦自生.非我所作.若見者是我.眼能見色眼應是我.若眼見而非我.則違先言見者是我.若見者是我.我則不應得聞聲等諸塵.何以故.眼是見者.不能得聞聲等塵故.是故我是見者.是事不然.若謂如刈者用鎌刈草.我亦如是以手等能有所作者.是事不然.何以故.今離鎌別有刈者.而離身心諸根無別作者.若謂作者雖非眼耳等所得亦有作者.則石女兒能有所作.如是一切諸根皆應無我.若謂右眼見物而左眼識.當知別有見者.是事不然.今右手習作左手不能.是故無別有作者.若別有作者.右手所習左手亦應能.而實不能.是故更無作者.復次有我者言.見他食果口中涎出.是爲我相.是事不然.何故.是念力故非是我力.又亦卽是破我因緣.人在衆中愧於涎出.而涎强出不得自在.當知無我.復次又有顚倒過罪.先世是父今世爲子.是父子我一.但身有異.如從一舍至一舍.父故是父.不以入異舍故便有異.若有我是二應一.如是則有大過.若謂無我五陰相續中亦有是過.是事不然.何以故.五陰雖相續.或時有用或時無用.如蒲桃漿持戒者應飮蒲桃酒不應飮.若變爲苦酒還復應飮.五陰相續亦如是.有用有不用.若始終一我有如是過.五陰相續無如是過.但五陰和合故假名爲我無有決定.如樑椽和合有舍.離樑椽無別舍.如是五陰和合故有我.若離五陰實無別我.是故我但有假名無有定實.汝先說離受別有受者.以受分別受者是天是人.是皆不然.當知但有受無別受者.若謂離受別有我.是事不然.若離受有我.云何可得說是我相.若無相可說.則離受無我.若謂離身無我但身是我.是亦不然.何以故.身有生滅相.我則不爾.復次云何以受卽名受者.若謂離受有受者.是亦不然.若不受五陰而有受者.應離五陰別有受者.眼等根可得而實不可得.是故我不離受.不卽是受.亦非無受.亦復非無.此是定義.是故當知.過去世有我者.是事不然.何以故
過去我不作 是事則不然
過去世中我 異今亦不然
若謂有異者 離彼應有今
我住過去世 而今我自生
如是則斷滅 失於業果報
彼作而此受 有如是等過
先無而今有 此中亦有過
我則是作法 亦爲是無因
過去世中我.不作今我.是事不然.何以故.過去世中我.與今我不異.若今我與過去世我異者.應離彼我而有今我.又過去世我.亦應住彼此身自更生.若爾者卽墮斷邊.失諸業果報.又彼人作罪此人受報.有如是等無量過.又是我應先無而今有.是亦有過.我則是作法.亦是無因生.是故過去我.不作今我.是事不然.復次
如過去世中 有我無我見
若共若不共 是事皆不然
如是推求過去世中邪見有無.亦有亦無.非有非無.是諸邪見.先說因緣過故.是皆不然
我於未來世 爲作爲不作
如是之見者 皆同過去世
我於未來世中.爲作爲不作.如是四句.如過去世中過咎.應在此中說.復次
若天卽是人 則墮於常邊
天則爲無生 常法不生故
若天卽是人.是則爲常.若天不生人中.云何名爲人.常法不生故.常亦不然.復次
若天異於人 是卽爲無常
若天異人者 是則無相續
若天與人異.則爲無常.無常則爲斷滅等過.如先說過.若天與人異.則無相續.若有相續.不得言異.復次
若半天半人 則墮於二邊
常及於無常 是事則不然
若衆生半身是天.半身是人.若爾則有常無常.半天是常.半人是無常.但是事不然.何以故.一身有二相過故.復次
若常及無常 是二俱成者
如是則應成 非常非無常
若常無常二俱成者.然後成非常非無常.與常無常相違故.今實常無常不成.是故非常非無常亦不成.復次今生死無始.是亦不然.何以故
法若定有來 及定有去者
生死則無始 而實無此事
法若決定有所從來.有所從去者.生死則應無始.是法以智慧推求.不得有所從來.有所從去.是故生死無始.是事不然.復次
今若無有常 云何有無常
亦常亦無常 非常非無常
若爾者.以智慧推求.無法可得常者.誰當有無常.因常有無常故.若二俱無者.云何有亦有常亦無常.若無有常無常.云何有非有常非無常.因亦有常亦無常故.有非有常非無常.是故依止過去世常等四句不可得.有邊無邊等四句依止未來世.是事不可得.今當說.何以故
若世間有邊 云何有後世
若世間無邊 云何有後世
若世間有邊.不應有後世.而今實有後世.是故世間有邊不然.若世間無邊.亦不應有後世.而實有後世.是故世間無邊亦不然.復次是二邊不可得.何以故
五陰常相續 猶如燈火炎
以是故世間 不應邊無邊
從五陰復生五陰.是五陰次第相續.如衆緣和合有燈炎.若衆緣不盡燈則不滅.若盡則滅.是故不得說世間有邊無邊.復次
若先五陰壞 不因是五陰
更生後五陰 世間則有邊
若先陰不壞 亦不因是陰
而生後五陰 世間則無邊
若先五陰壞.不因是五陰更生後五陰.如是則世間有邊.若先五陰滅已.更不生餘五陰.是名爲邊.邊名末後身.若先五陰不壞.不因是五陰而生後五陰.世間則無邊.是則爲常.而實不爾.是故世間無邊.是事不然.世間有二種.國土世間.衆生世間.此是衆生世間.復次如四百觀中說
眞法及說者 聽者難得故
如是則生死 非有邊無邊
不得眞法因緣故.生死往來無有邊.或時得聞眞法得道故.不得言無邊.今當更破亦有邊亦無邊
若世半有邊 世間半無邊
是則亦有邊 亦無邊不然
若世間半有邊半無邊.則應是亦有邊亦無邊.若爾者.則一法二相.是事不然.何以故
彼受五陰者 云何一分破
一分而不破 是事則不然
受亦復如是 云何一分破
一分而不破 是事亦不然
受五陰者.云何一分破.一分不破.一事不得亦常亦無常.受亦如是.云何一分破.一分不破.常無常二相過故.是故世間亦有邊亦無邊則不然.今當破非有邊非無邊見
若亦有無邊 是二得成者
非有非無邊 是則亦應成
與有邊相違故有無邊.如長相違有短.與有無相違.則有亦有亦無.與亦有亦無相違故.則有非有非無.若亦有邊亦無邊定成者.應有非有邊非無邊.何以故.因相待故.上已破亦有邊亦無邊第三句.今云何當有非有邊非無邊.以無相待故.如是推求.依止未來世有邊等四見皆不可得.復次
一切法空故 世間常等見
何處於何時 誰起是諸見
上以聲聞法破諸見.今此大乘法中說.諸法從本以來畢竟空性.如是空性法中無人無法.不應生邪見正見.處名土地.時名日月歲數.誰名爲人.是名諸見體.若有常無常等決定見者.應當有人出生此見.破我故無人生是見.應有處所色法現見尙可破.何況時方.若有諸見者應有定實.若定則不應破.上來以種種因緣破.是故當知見無定體.云何得生.如偈說.何處於何時.誰起是諸見
瞿曇大聖主 憐愍說是法
悉斷一切見 我今稽首禮
一切見者.略說則五見.廣說則六十二見.爲斷是諸見故說法.大聖主瞿曇.是無量無邊不可思議智慧者.是故我稽首禮
참고문헌
(1) 김인덕 著, 中論頌硏究, 불광출판사, 서울, 1995.
(2) 平川彰 外 共著, 講座 大乘佛敎-中觀思想?, 春秋社, 1982.
(3) 靑目 釋, 김성철 譯, 中論, 경서원, 1993.
(4) 淸辯 著, 이현옥 譯, 般若燈論釋, 동국역경원, 1997.
(5) 짠드라끼르띠 著, 박인성 譯, 쁘라산나빠다, 민음사, 1996.
(6) 길희성 著, 印度哲學史, 민음사, 1988.
(7) 라다크리슈난 著, 이거룡 譯, 인도철학사 2, 한길사, 1999.
(8) 문을식 譯, 대승불교, 여래, 1995.
(9) 공의 논리 카지야마 유이치 外 / 정호영 옮김 (민족사)
(10) 龍樹 의 마디아마카 哲學 자야데바 싱 / 金石鎭 역 (운주사)
(11) 佛敎 의 中心哲學 -중관체계에 대한 연구- 무르띠 지음 (경서원)
(12) 中觀哲學 楊惠南 지음 / 김철수 옮김 (경서원)
(13) 인도사상사, 나카무라 하지메(中村 元) 지음, 김용식,박재권 공역, 서광사, 1983.
'중관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관사상 (0) | 2022.11.20 |
---|---|
중관학파 Madhyamika 에 대하여 (0) | 2022.11.06 |
중론(中論) - 원문 및 해설 (1) | 2022.06.05 |
용수보살(龍樹菩薩, 나가르주나) - 공(空)사상의 확립자 (0) | 2022.01.09 |
[중론] 6. 부처님께 바치는 노래 ① (0) | 2021.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