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음식에 관한 불교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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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언
얼마 전 방영을 시작한 한 웹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소를 도축하지 않고도 붉은 육류를 즐길 수 있는 세포 배양육 개발에 성공하고, 어류도 세포 배양육으로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 드라마 속 세포 배양육은 가상의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10년 전부터 개발해 온 육류를 대체하는 인류의 새로운 먹거리로 기술의 힘을 빌려 만든 인공식품이다. 생명공학과 첨단 기술의 결합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푸드테크(Foodtech) 산업은 맛이나 식감이 어육류(魚肉類)와 동일한 배양육 생산을 가속화하고 있다. 머지않은 시일 내에 배양육이 우리의 식탁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가축을 살생하지 않고도 육류를 섭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배양육 소비는 합리적일까? 그리고 인류가 배양육을 먹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며, 그 핵심이 쇠고기 소비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기업들이 배양육 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고 한다. 서구의 학자들은 인류가 지구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여 여섯 번째 지구 멸망이 일어나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Anthropocene)로 진입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지질의 변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한 효과적인 대비책은 인류가 식단을 개선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발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23년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연간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등 4대 육류 소비량은 62.89kg이라고 한다. 음식점 1인분 150g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1인당 연간 약 419인분을 소비한다. 그러니까 거의 매일 육류를 섭취하는 셈이다. 동물성 식품은 체내에 필요한 단백질을 공급하는 주요 공급원으로 건강한 신체 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섭취가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 환경오염의 근원을 육류 섭취, 특히 쇠고기와 같은 붉은 육류 섭취가 문제라고 한다. 그렇다면 배양육을 섭취하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단 말인가? 환경오염 문제 이외에도 영양학 · 사회경제 · 윤리 등 다양한 관점에서 학제 간에 배양육 섭취에 관한 찬반 논쟁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배양육의 보급은 당장에 시급한 소 사육으로 발생하는 환경오염의 주범인 탄소 배출은 줄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사회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단순히 육류 섭취가 문제가 아니라 필요 이상의 과도한 육류 섭취로 영양분이 체내에 과잉 공급되어 성인병을 유발하고, 육류 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급량을 늘리면서 가축 사육 과정에서 온실가스 배출이 환경오염을 일으켜 육류 섭취 감소와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계의 경고를 반영하여, 2019년 16개국 37명의 과학자로 구성된 잇-랜싯위원회(The EAT-Lancet Commission)는 지속 가능한 지구환경 구축과 고른 영양소 섭취로 건강한 신체 유지를 위한 현실적인 대응책으로 전 인류를 위한 ‘인류세 식단(Food in the Anthropocene)’을 최초로 제시하였다.
인류세 식단은 음식 열량과 붉은 육류는 제한하고 과일 · 채소 · 견과류 등 식물성 식품의 섭취를 늘려 채식을 기반으로 하고 간헐적 육류를 소비하는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 식습관’을 권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류와 지구가 공존할 방법이라고 말한다. 잇-랜싯위원회는 붉은 육류와 함께 설탕 섭취도 줄여 선진국의 주요 사망원인인 심장 질환과 암으로 사망하는 사망자의 숫자를 줄이고 비만으로 야기되는 질병을 줄일 수 있다고 전망한다. 하지만 인류세 식단의 문제는 이 식단을 중 · 저소득 국가나 계층에게 적용하면 이들에게는 충분한 열량이나 영양공급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육류의 과도한 소비가 모든 국가가 초래한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육류 소비로 인한 환경 문제는 육류의 과소비에 있으며, 이는 육류에 대한 과도한 식탐이 초래한 것으로 음식 자체에 있지 않아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가리킨다.
붉은 육류 섭취와 함께 지구 환경오염 요인으로 지적되는 것이 ‘음식물 쓰레기’이다.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문제의 음식물 쓰레기는 식용 가능한데 버려지는 음식들로 특히, 가정에서 배출하는 음식물 쓰레기가 주범이다. 이 역시 식량이 부족한 국가나 계층보다는 선진국이나 중상위층에서 일으키는 문제다. 즉,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경제력으로 과도하게 음식을 소비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육류 소비를 줄인다고 해도 합리적 채소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극단적 채식주의 역시 그간의 육류 소비로 운영되는 사회 · 경제 체제에 혼란과 또 다른 환경오염 문제를 일으킬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채식주의를 고집한다고 해서 환경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일련의 세계적 식생활과 환경 문제에 불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붓다는 세속 생활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활하는 비구 · 비구니 출가자를 위해 일상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계율을 제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율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붓다가 계율을 제정한 목적은 승가의 화합과 안락을 추구하고, 정법을 이어가고, 무엇보다도 문제의 재발을 막아 바람직한 수행 생활로 번뇌를 제거하고 차단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그래서 율장에는 출가자에게 필수적인 식생활과 관련한 규정도 포함되어 있다. 식생활 규정은 비구계와 비구니계에 조문 수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공통적인 내용으로는 크게 음식 공급 · 섭취 · 보관 방법, 식사 규칙, 발우 사용 등과 관련된 조항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류 문명 발전과 식습관으로 벌어진 작금의 환경오염과 질병은 음식 소비에서 일으킨 탐욕이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율장에서 가르치고 있는 음식 섭취와 보관 등의 방법과 태도에 관한 조문을 살펴보면 현재 인류가 직면한 환경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실천 가능한 식생활 방법을 모색해 보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
2. 중도 채식주의
율장에서 음식 섭취와 보관 등의 식습관 관련 조문은 대체로 바일제(波逸提)와 중학법(衆學法)에 제정되어 있다. 율장에는 육식 금지를 단정적으로 규정하는 조문은 없으나 바일제에 해당하는 색미식계(索美食戒)를 통해 어 · 육류와 유제품을 포함한 버터 · 유지류 등 지방류, 꿀 · 사탕수수즙 등 당류 등의 맛있는 음식[美食]을 병이 없으면서 먹고 싶어 일부러 걸식하는 것을 규제한다. 이 조문이 제정된 연유는 비구들이 걸식이나 재가자의 초청식에서 미식을 받지 못하자 공양을 거부하거나 재가자를 꾸짖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병이 있어 치료 목적으로 미식을 걸식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식탐으로 인한 이들 음식의 걸식을 금지했다. 붓다는 출가자가 식탐으로 고기와 같은 미식을 일부러 걸식해 찾아서 먹는 것은 금욕 생활하겠다는 신념을 위배하는 것이지만, 건강을 위해 먹어야 할 때 걸식하는 것은 문제로 보지 않았다. 붓다는 6년간의 고행에서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생활이 삶에 유익하지 않음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거부하면서 중도적 삶의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붓다가 제안하는 식단은 온전히 채식만을 고집하는 비건주의(veganism)가 아니라 채식을 위주로 섭취하면서도 적절한 육식 섭취로 신체를 이롭게 하는 유연한 채식주의(flexible vegetarian), 즉 채식을 지향하면서 제한적 육식 섭취를 긍정하는 플렉시테리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인류세 식단이 추구하는 바와 결을 같이한다.
육류의 섭취는 가축을 살생해야만 가능하므로 불교에서 윤리 · 도덕적 삶의 생활방식으로 제시하는 오계의 불살생계(不殺生戒)는 대승불교에서 육식을 금지하며 불교도의 중요한 식생활 규범으로 규정한 불식육계(不食肉戒)와 동일한 윤리 · 도덕적 맥락을 취한다. 붓다는 중도 채식주의를 추구하지만, 그것을 지킬 수 없다면 대승불교의 불식육 교의를 고수하는 것이 옳다. 대승불교에서 제시하는 비건주의는 동물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서 오는 불평등의 윤리적 문제를 쟁점으로 하는데, 오늘날 육류 소비는 동물을 소비 대상으로 삼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영향도 크다.
한편 동물을 배제하고 식물 소비만을 지향하는 비건주의 음식 소비도 이와 관련된 복잡한 그물망 구조의 사회경제 시스템 안에서 정치 · 경제 · 환경 · 윤리적 측면의 또 다른 사회적 문제가 있는 쟁점들을 동반할 것이므로 우호적으로만 볼 수 없다. 이 세계는 인류와 동물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류와 식물, 식물과 동물 등 서로가 얽혀 있는 구조 속에서 구현된다. 또, 음식 공급에 어려움이 있는 저소득층에게 불식육계 실천의 강조는 자의적 실천을 유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경제적 · 사회적 위치를 구분할 뿐이다. 그 이외에도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육류 섭취가 필요한 이들에게도 적용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불식육계는 인류 모두가 건강하면서도 인류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비록 과도한 육식 소비자와 같이 특정한 대상을 중심으로 그 실천이 제한적일 수는 있지만, 이들에게 불식육계 실천 강조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따라서 붓다가 제시한 중도적 채식주의 태도만이 지금 인류가 직면한 문제에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중도적 식습관
1) 식탐과 음식량의 자각과 조절
환경오염과 건강 문제 해결을 위해 붓다와 인류세 식단이 제시하는 중도 채식주의를 지속하려면 채식이나 육식 모두 과도한 섭취와 소비를 방지하는 식습관이 중요한데, 이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음식에서 일어나는 식탐과 그것을 제어하려는 내적 갈등에서 종종 식탐에 굴복하고 만다. 그 결과 자신에게 필요 이상으로 음식을 섭취한 후, 만복(滿腹)으로 괴로워한다. 과연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식탐을 이기고 적정량만큼만 식사하는 중도적 식사는 배고픔과 포만감을 자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이 자각으로 ‘먹기’가 식탐에 연유한 행동인지 배고픔을 면하려는 행동인지를 구분할 수 있다. 식사하는 동안 행동과 마음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으로 식사량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식 작용은 밥을 먹는 동안에만 알아차림하는 것이 아니라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기 전부터 깨어 있으면서 그릇에 음식을 담고 섭취하는 모든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율장에서는 식사량 조절을 돕기 위해 걸식량을 제한하는 행동 규범을 제시한다. 불교에서 출가자는 어떤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해서 그것을 스스로 요리하거나 재가자에게 보시를 요구해서 먹을 수는 없으므로 출가자에게 음식을 선택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출가자가 배가 부를 때 음식을 더 먹을지 멈출지 스스로 음식량을 조절할 수 있는 선택권은 주어졌다. 한 번의 권리 위반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으나 그것이 차곡차곡 쌓이면 결국엔 건강 이상이나 음식을 보시하는 타자에게 문제를 안기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그래서 율장에서는 그 사소한 선택권을 습관화하여 방일하지 않고 지킬 수 있도록 규정을 마련해 둔 것이다.
먼저, 바일제에 포함된 수이삼발식계(受二三鉢食戒)가 그중 하나다. 이 조문의 인연담은 율장마다 상이한데, 주요 등장인물과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친정에 온 여인이 시댁으로 가져갈 달콤하고 기름진 빵[pūva]을 만들었는데 걸식 온 한 비구에게 보시한다. 이후 이 빵이 맛있다는 소문을 들은 비구들이 여인의 집에 몰려와 빵을 걸식하여 여인이 시댁으로 돌아가는 것이 늦어지고, 남편은 새 부인을 맞이한다. 이어진 인연담에서는 한 상인이 보시한 음식에 탐착한 여러 비구의 걸식으로 그가 상단과 떨어져 뒤처지면서 도적들에게 재물을 빼앗기는 일이 발생해 피해를 본다. 그래서 붓다는 한 집에서 세 발우 이상의 걸식을 금지하고, 누군가 걸식해 온 미식을 대중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는 수이삼발식계를 제정한다.
이 조문은 비구들이 음식에 탐착하여 시주자에게서 무분별하게 걸식하여 피해 준 것을 원인으로 하여, 일차적으로는 시주자에게 보시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나 그로 인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제정한 것이다. 비구들이 달고 기름진 빵과 같이 맛있는 음식에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 자기 제어 실패는 의도적인 걸식 행위로 이어지고, 신체 통제의 실패는 자신에게 기꺼이 음식을 제공한 시주자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안겨 주었다. 비구들은 그들의 식탐으로 걸식한 음식을 먹으면서 즉각적으로 입에서 반응한 맛으로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며 만족했겠지만, 그 행동이 이후에 불러올 결과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한 채 방관했다. 시주자가 음식을 보시할 경제적 능력을 상실했다면 비구도 걸식할 음식이 없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한 채 말이다.
바일제 이외에 중학법에서도 과도한 걸식을 제어하는 걸식량 조절에 관한 여러 조문이 포함되어 있다. 재가자의 초청식에서 비구들은 국이나 밥 등 음식이 발우에 넘칠 정도로 과하게 음식을 받지 말아야 하고[不羹飯等受], 음식을 받고도 또 받으려 하지 말아야 하며[不得以飯覆羹更望得], 병이 없는데도 제공하는 음식 이외의 음식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不得自為已索羹飯]. 이들 규정은 비구가 음식을 많이 먹으려는 욕망에 이끌려 과하게 음식을 받으려다 음식이 발우 밖으로 흘러내려 주위를 더럽히고, 다른 비구에게 돌아갈 음식량을 부족하게 만들고, 시주자가 준비한 공양 이외의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요구하여 시주자에게 불쾌감과 번거로움을 주어 제정되었다. 그래서 붓다는 일념으로 음식을 받아야 한다[一念受食]는 조문을 중학법에 제정했다.
이상의 조문들은 비구들이 걸식하는 데 시주자들의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한 행동의 제약과 대비책으로 비칠 수 있으나, 비구의 식탐이 자신을 비롯해 주변과 음식 제공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왜냐하면 비구와 시주자는 상호 의존적 관계이므로 한쪽의 행동이 다른 한쪽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시주자가 베푸는 공양을 받으면서 음식량을 조절하여 받으려면 식사 시작 전 얼마나 배가 고픈지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 배고픔 정도를 인지해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량을 가늠할 수 있어서다. 또, 음식량을 결정하여 처음에 먹으려고 한 분량만큼만 먹음으로써 그 양을 초과하여 먹는 음식이 배고픔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배불리 먹고도 식탐으로 촉발한 먹기인지를 인식할 수 있다.
비구들뿐 아니라 인류는 우리에게 유용한 음식을 제공하는 자연이 받을 피해를 몰각(沒覺)하고 음식의 맛에만 매료되어서는 자기 통제력을 상실하곤 한다. 그래서 더 많은 맛있는 음식을 얻으려 하는 나머지 인류가 살아가는 터전인 자연을 잃어 가고 있다. 붓다는 비구들에게 식탐을 경계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만약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걸식하여 음식을 먹되 함께 나누어 먹는 합리적 음식 공급 방법을 제시했다. 시주자 개인에게서 승가 전체가 얻을 수 있는 음식 총량을 제한하여, 시주자는 어떠한 손해 없이 자신의 보시 공덕을 계속해서 쌓을 기회를 얻을 수 있고, 다수의 비구에게는 음식 공급이 가능해진다. 이 가르침에서 인류도 제한적 음식량으로 서로 나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자연도 인류에게 변함없는 안락한 터전과 음식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인간과 자연의 공생관계 속에서 자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인간의 삶이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을 이어주는 음식을 매개로 한 인간의 행위가 양자에게 끼칠 결과를 숙고해야만 한다. 그것은 결국 인간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식사에 앞서 배고픔과 포만감을 항상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족식계(足食戒)에서는 배불리 만족하게 먹은 후에 더 먹는 것을 금지한다. 비구들이 시주자가 베푼 음식이 맛이 없어 조금만 먹고 다른 시주자 집에 가서 공양하여 앞선 시주자의 보시 공덕을 헛되게 해 비난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붓다는 비구가 족식(足食)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잔식법(殘食法)을 행하지 않고 먹으면 바일제를 범하는 조문을 제정한다. 족식에는 음식을 ‘충분히 만족하게 먹었습니다’라는 뜻과 그러므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라는 선언과 함께 행위적 의미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비구는 초청식에서 베푼 음식이나 걸식한 음식을 먹고 나면 반드시 족식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족식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면 재차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만족하게 먹었다’라는 것은 배가 부르다는 상징적 표현으로 음식을 더 먹는 것은 과식이다. 따라서 출가자는 맛없는 음식을 보시받아 먹기 싫어도 허기를 면하려면 먹어야 한다. 그런 훈련으로 식탐을 제어하는 식습관을 기르게 된다.
더는 먹을 수 없다는 극단적 제한은 식사를 멈추게 하지 않고 오히려 먹을 수 없다는 불안과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불만족감이 음식을 더 먹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혹 시주자가 제공한 음식이 많아 다 먹을 수 없으면 저장도 할 수 없어 음식을 버려야만 하고, 이 또한 시주자의 공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일이 되고 만다. 또, 개인에 따라서는 걸식한 음식량이 너무 적어 충분하게 섭취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래서 율장에서는 족식계의 부칙으로 잔식법 규정을 두어 걸식한 음식량이 많아 모두 먹을 수 없는 출가자는 공양 전에 미리 음식을 덜어 놓게 하고, 부족한 자는 이것을 가져다 더 먹을 수 있도록 한다. 보시받은 음식은 상황에 따라 걸식량과 섭취량에 불균형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규정에서는 그러한 걸식 상황을 반영하면서 출가자가 배고픔 정도를 자각하여 음식량을 조절하는 자기 규제 훈련 기회를 제공한다.
이렇듯 족식계는 출가자의 식탐과 과식을 경계하게 하고, 식사량을 조절하는 식습관을 기르는 규범이다. 이 규정은 이미 배가 불렀음에도 식사를 멈추지 않고 음식 맛에 이끌려 계속해서 먹으려는 식탐 조절의 실패를 일깨워 준다. 이미 포만감으로 충만한데도 자제력을 상실한 채 먹는 것에 집착하는 행동이 자신과 타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야 한다. 식탐과 과식이 타자에게 큰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음식을 더 먹으려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먹는 순간의 즐거움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 오늘날 음식으로 발병하는 비만 · 고혈압 · 당뇨 등의 성인병 발병 요인은 음식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과도하게 섭취하는 식습관에 있다. 인류세 식단에서 섭취를 줄일 것을 요구하는 붉은 고기나 설탕이 그러하다. 인류는 식탐과 과식으로 자연을 훼손하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인류에게 심각한 자연재해로 되돌아오고 있다.
2) 올바른 식사 태도
민족이나 공동체마다 그들만의 음식문화에는 고유한 식사 예절이 있어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식사 태도에 관한 윤리와 도덕규범을 제시한다. 식사 예절이 필요한 것은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과 함께 모여 식사하므로 모든 사람이 즐겁게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배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회와 같은 초청식에서 단순히 음식을 제공하고 받아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뿐 아니라, 식사를 마련해 베푸는 초대자와 그것을 받는 참석자가 서로 감사하는 마음의 표출로 차원 높은 정신문화를 일정한 행위 규칙으로 표출하는 방법이 식사 예절이다. 또, 한 공간에 모여 식사하는 사람들은 식사 예절을 매개로 상호작용하며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식사 예절은 음식을 먹을 때 지켜야 하는 의무 사항으로 그것을 따르는 공동체나 사회가 지닌 정신적 · 문화적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식사 규범이 있다. 물론 이 규범들은 출가자에게 제시한 규칙으로 그것을 지켜야 하는 주체에 따른 한정성은 있다. 그러나 이들 규범은 그것을 실천하는 데 꼭 불교 수행자여야만 하거나 혹은 불교도만이 지킬 수 있는 행동의 제시나 제약이 아니고 누구나 지킬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다. 율장에서는 식사 규범을 중학법에서 규정하고 있으며, 율장마다 세부 조항 수에 차이는 있으나 공통된 내용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밥을 편중되게 갈라서 먹지 않기[不得挑鉢中而食]
뭉친 밥을 입속에 던져 넣으며 먹지 않기[不得擲團食]
입을 벌리고 있으면서 밥을 집어 먹지 않기[不得張口待飯食]
혀를 내밀고 음식을 입에 넣으며 먹지 않기[不得吐舌食]
입안에서 밥을 돌려가며 먹지 않기[不得口中迴食食]
음식 묻은 손을 핥으며 먹지 않기[不得舐手食]
손가락을 빨며 먹지 않기[不得指食]
들이마시면서 먹지 않기[不得吸食食]
소리 내며 씹어 먹지 않기[不得㗘㗱食]
밥을 크게 뭉쳐 입안 가득 넣고 먹지 않기[不得大摶飯食]
음식을 입에 물고 말하지 않기[不得含食語]
위의 규정들이 제정된 이유는 비구들이 재가자의 초청식에서 출가자로서 위의(威儀)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식사해서 비난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조항은 비난의 대상이 된 행동들의 재발을 막고, 문제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시주자들은 비구들의 음식 먹는 모습을 마치 개 · 돼지 · 소 등의 짐승에 비유하며 힐난했다. 비구들이 허겁지겁 소란스럽게 먹는 모습에서 시주자들은 그들이 베푼 공양 공덕이 성스럽지 못하고 속되어진다는 생각을 품었던 듯하다. 비구들의 위의 없는 행동으로 경건하게 진행되어야 할 식사 시간을 무질서 상태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비구들에게서 공양의 감사함을 느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그러면 산만한 식사 행동은 비구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식사 예절 역시 번뇌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다는 전제에서 보면, 이런 행동은 식사량이나 배고픔과 포만감 상태를 알아차림하고 인지하는 데 방해 요소가 될 뿐이다. 비구들이 보인 행동은 음식 맛에 집중하며 게걸스럽게 먹는 행위에 가깝다. 이런 산만하고 부주의한 행동은 음식을 천천히 먹고 마음을 집중하면서 음식에 관한 자기 통제와 규제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런 태도로 식사한다면 식탐은 증가하고 음식량을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식사 예절은 인도의 전통적인 식사법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이므로 가령 손으로 음식을 먹는 행동으로 야기되는 문제적 행동은 모든 문화권에서 보이거나 적용할 수 있는 행동 규제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 조문들이 제시하는 바는 차분한 가운데 식사하며 식탐을 버리고 알맞은 양만큼만 식사하는 식습관 개선에 있다. 과연 우리는 식사할 때 어떤 태도로 먹고 있을까? 만약 붓다 시대에도 핸드폰이 있었다면 분명 붓다는 핸드폰을 보며 식사하는 것을 금지하였을 것이다. 식사량 조절을 위해서는 자신을 식탐으로 이끄는 행동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4. 합리적 음식 소비
한국불교의 발우공양은 발우에 담긴 음식은 한 톨의 양념도 남지 않고 모두 섭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음식물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환경친화적인 식사법이다. 그리고 발우공양에서 잔반(殘飯)이 없는 것은 공양 전부터 먹을 양만큼만 발우에 담기 때문이다. 이 식사법의 시작은 인도에서 불교 성립 단계에서부터 추구한 불교의 음식 소비 방식이다.
중학법에는 ‘발우 안에 남은 음식을 땅에 버리지 말라[不得鉢中殘食棄地]’라는 조문이 있다. 어느 날 거사의 집에 초대받은 비구들이 공양을 마친 후 발우를 씻은 다음, 그 물과 음식 찌꺼기를 땅에 버려 거사의 집을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이를 본 거사는 비구들이 굶주린 사람처럼 음식을 많이 받아서 국왕이나 대신과 같이 마구 버린다며 혐책(嫌責)하였고, 붓다는 이 일을 계기로 조문을 제정하였다. 이 규정에서 비구들이 거사로부터 비난받은 이유는 식탐으로 다 먹지도 못할 정도로 과도하게 음식을 받아 남겨서 버리고, 거기에 더해 거사의 집도 더럽혀서이다. 정성으로 만든 음식이 발우에 담기는 순간 그 운명은 비구의 위장으로 들어가 영양분이 될지 아니면 쓰레기로 버려질지 음식을 먹고자 하는 비구의 한 생각에 맡겨진다. 그 한 생각에 욕망이 가득 차는 순간 음식은 더러운 오염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비구가 버린 음식물 찌꺼기는 자기 만족감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식탐을 증명한다.
역설적이게도 삶의 풍요로움은 음식 과소비를 부추겨 맛의 쾌락을 좇으며 행복하다는 착각의 늪에 빠뜨리면서 인류를 생존의 갈림길에 서게 했다. 인류가 음식을 과잉 소비하면서 음식물 쓰레기 처리와 환경오염 문제를 얻었다.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 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음식물 구매와 소비가 있다는 암묵적 표시이다. 아무리 채식을 한다고 해도 버려지는 음식이 많다면 음식물 쓰레기로 인한 환경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질 뿐이다.
필요 이상의 과도한 양의 식사 준비와 식탐, 그리고 식재료 구매가 음식물 쓰레기의 배출을 유도한다. 바일제의 식잔숙식계(食殘宿食戒)는 먹고 남은 잔식을 보관해 두었다가 다음 날 먹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이다. 이 계를 범하지 않으려면 음식을 저장하지 않는 것이 옳지만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저장할 음식을 만들지 않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계가 제정된 이유는 비구가 먹고 남은 음식을 저장해 두어 다음 날 걸식할 필요가 없어 걸식하는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음식을 저장하였기 때문이다. 이 조문에서는 잔숙식을 금지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몇 가지 그 이유를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음식을 저장해 두는 것으로 출가자는 내일도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다. 걸식이 어려워 충분한 음식 섭취가 어려운 상황에서는 용납될 수 있는 행위다. 게다가 남긴 음식을 버리지 않아 저장해 두고 다음 날에라도 바로 먹으면 귀한 음식을 낭비하지 않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그런데 만약 언제든 걸식해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음식을 저장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생각해 볼 문제다. 음식 저장이 쉽지 않은 환경이거나 장기적으로 음식을 저장하면 음식이 부패해 건강 문제를 동반한다. 그렇게 부패한 음식은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질 수밖에 없다. 또, 저장한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버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예로 율장에서는 비구들이 걸식한 음식이 너무 많아 다 먹지 못하고 방 안에 두어 보관하자 벌레와 쥐가 들끓게 되고, 이를 본 거사들이 비구들을 힐난한 일을 음식 저장 금지 이유로 설명하기도 한다. 적절한 음식량만 걸식하면 음식이 남지 않으므로 저장할 음식이 없어서 버려질 음식도 없다.
이렇듯 율장에서는 한 번에 소비되지 못한 음식이 이후에 가져오는 인과관계의 설명으로 과도한 음식 저장 문제를 꼬집고 있다. 지금 인류가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에는 저장하였다가 먹을 수 없게 되어 버려지는 음식이나 식재료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냉장고를 가득 채운 음식들은 다 소비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연 이 음식들이 이렇게 쌓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시장바구니에 식재료를 담고, 음식을 만들고, 음식을 먹는 그 순간 내가 음식에 투사한 생각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결어
인류는 식탐을 충족해 행복을 얻으려 했지만, 오히려 환경오염, 비만과 같은 질병 등의 더 큰 고통과 마주하게 되었다. 음식을 먹는 것은 자율적인 주체적 행위이나 그 행위를 지속하기 위해서 이제는 어느 정도의 규칙이나 제어가 필요해 보인다. 과도한 음식 소비는 더는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오늘날 인류가 처한 환경 문제에 너무도 무관심하다 못해 태평해 보인다. 음식의 맛에 사로잡혀 먹고 싶은 욕구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무작정 먹기만 하는 것은 특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조절할 줄 아는 것이 인류가 음식을 먹는 행위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식탐을 다스리고 음식을 절제하여 자연과 인류가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쾌락을 좇는 삶과 식탐으로 얻을 기쁨과 즐거움을 포기하고 인류가 함께 공생하는 식습관으로 전환하는 삶 중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을까? 불교에서는 이타행을 최고의 삶의 가치로 여긴다. 그러므로 환경 문제에서 더는 교착상태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율장에서는 출가자들에게 식탐으로 과식하며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들을 참회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때의 참회는 일회성 반성이 아니라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올바른 생활 습관을 길러 유지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음식을 먹으면서 배고픔과 포만감에 집중하여 음식량을 조절하는 것은 이제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인류의 윤리 · 도덕적 필수 행동이 되어버렸다. 18세기 프랑스의 미식가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라고 말했다. 내가 먹는 음식이 나의 정체성을 대변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어떻게 먹는지가 곧 나다’라는 말로 치환하면, 내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준다.
‘어떻게 먹을 것인가’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대변하듯 불교도의 정체성은 맛에 탐착하여 먹으려는 의지로 음식을 대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식습관으로 확립될 수 있다. ■
한수진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응용불교학 박사). 불교문화, 음식, 계율, 음식명상 등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선시로 본 조선 후기 승려의 삶과 술〉 〈혼밥 문제 개선과 건강한 식생활 역량을 위한 불교 식생활 기반의 ‘마음챙김 식사’ 제안〉 〈한국불교 공양의례의 연원과 실제〉 〈律藏에 나타난 藥이 되는 飮⻝〉 등.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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