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서양철학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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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생의 영원한 물음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 참모습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존재론적 물음과 인생론의 문제(세계관과 인생관)는 철학이 풀어야 할 영원한 물음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부터 수많은 철학 사상에서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다양한 대답을 내놓았다. 동양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세계의 실상을 밝히고 그런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인간(중생)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얘기한 것으로, 동양의 존재론과 인생론(해탈론)을 대표하는 사상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동양에서 대승기신론 사상이 나타나고 발전한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기 서양에서 발달한 존재론과 인생론(구원론)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플로티노스(205~270)의 사상을 들 수 있다.
대승기신론과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비교해 보면 그 유사성과 상통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들은 둘 다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우주 만물의 생성을 설명하는 존재론을 펼치고, 이어서 그렇게 생겨난 만물(특히 인간)이 겪는 문제에서 벗어나 지고의 행복을 얻는 방법(해탈과 구원의 인생론)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각자 계승하고 있는 전통이 다르므로 다루는 부분이나 강조하는 점에서 서로 다른 점이 있지만, 전체적인 이론 구조와 지향하는 방향에서는 유사하고 상통하는 점이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대승기신론과 플로티노스 사상 양자의 존재론과 인생론을 서술하여 그 유사성이 잘 드러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한 후 이 글은 크지 않은 양자의 차이점을 구태여 드러내어 상술하지 않고, 오히려 양자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논리적인 난점들(약점과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양자는 비슷한 이론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그 속에 포함하고 있는 난점들도 매우 유사하다. 또 양자는 난점과 더불어 그러한 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사상의 싹도 포함하고 있다. 필자는 두 사상 속에 들어 있는 그러한 사상의 싹을 살리면서 존재의 해명과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해탈론, 구원론)을 제시해 보고자 하였다.
2. 대승기신론의 일심 개념
1) 대승기신론의 존재론
불교의 중심적인 문제는 인간(중생)이 겪는 괴로움의 원인을 진단하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실상을 올바로 깨닫는 것과 뗄 수 없이 결합하여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무엇보다도 존재론이자 인생론(해탈론 또는 구원론)이라 할 수 있다. 대승기신론은 초기불교에서 부파불교를 거쳐 대승불교의 반야 공 사상과 유식사상으로 이어진 불교사상을 계승하면서 심원한 불교의 존재론과 인생론을 제시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주관적 마음인 식(識)이 객관적인 경(境)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유식학의 설에서 주객을 모두 포괄하는 일심(一心)이라는 설로 나아가 그 일심의 구조와 작용으로 이 세상의 존재에 대해 해명하고,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대승기신론》이란 대승의 진리, 또는 깊은 뜻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려는 논서라는 뜻인데, 그 구조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인연분(因緣分), 입의분(立義分), 해석분(解釋分),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이다. 이 가운데 인연분과 입의분은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논을 지은 인연과 취지를 얘기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인 권수이익분은 이 논에서 말한 바를 공부하고 수행하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의 주요 논지는 주로 해석분과 수행신심분에서 전개되고 있다.
대승기신론의 존재론은 ‘해석분’에 나와 있는 일심이문(一心二門)의 논리를 통해 전개되고 있다. 일심이문이란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는 두 가지를 가리킨다. 심진여문은 우주의 근원인 일심의 본래 모습을 진여라고 하면서 설명하는 것이며, 심생멸문은 일심이 이 세상의 만물이나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심진여문에서는 일심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일심의 본래 모습인 진여를 유무불이이자 일다불이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이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진여의 자성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요 모양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유(有) · 무(無)를 함께 갖춘 모양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같은 모양도 아니요 다른 모양도 아니며, 같은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요 다른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며, 같고 다른 모양을 함께 갖춘 것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모양의 있음과 없음에 관한 얘기는 유무불이를, 같은 모양과 다른 모양에 관한 얘기는 일다불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심진여문에 관한 설명을 통해 《대승기신론》에서는 우주의 근원을 이루는 일심이라는 게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니며 동시에 유이면서 무이고, 하나도 아니요 여럿도 아니면서 동시에 하나이자 여럿이라는 유무불이와 일다불이 사상을 분명하게 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생멸문에서는 일심이 생멸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설명한다. 그 속에 수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분화되지 않은 진여에서 이제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시초가 되는 일심의 모습을 심생멸문에서는 여래장(如來藏), 아뢰야식(또는 아라야식: 원문에서는 아려야식(阿黎耶識))이라고 얘기한다.
심생멸문에서는 이어서 아뢰야식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각(覺) 또는 본각(本覺)과 불각(不覺)으로 얘기하고, 그 각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여기서는 본각을 다시 수염본각(隨染本覺)과 성정본각(性淨本覺)으로 설명하는데, 성정본각이란 본각의 본래 모습으로서 그것을 설명하는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심진여문에서 말한 일심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 수염본각이란 염(染)을 따라 즉, 더러움에 물들어 분별하는 상을 낳는 본각을 말한다. 불각에 대해서는 “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그 망념이 있게 된 것을 이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대승기신론은 이 세상의 온갖 현상과 사물을 불각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무명(無明), 더러움(染), 망념(妄念) 또는 망법(妄法)에 의해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망념이 잇달아 일어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부르면서 거기에서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는 사상(四相)이 생겨난다고 한다. 무명으로부터 모든 존재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는 얘기는, 무명으로부터 모든 염법이나 염심이 나온다고 하는 여러 구절에도 잘 나타나 있다.
본각과 불각에 관해 언급한 후, 불각에 대해 계속해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불각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지말불각이다. 지말불각으로 삼세(三細)와 육추(六麤)를 말하고 있다. 삼세는 유한한 유정의 마음이 움직여 주객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본래 둘이 아니었던 존재의 분열이 일어난 후 한 존재의 의식이 자신과 나머지 것들이 본래 둘이 아니었음을 알지 못하고 그것들을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자신을 의식하는 자기의식과 나머지 것들을 대상화하는 의식을 갖게 되는데, 삼세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주객분열이 일어나면 다시 육추라 부르는 여섯 가지의 지말불각이 일어난다. 세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그 요지만 얘기한다면, 그것들은 대상들을 분별하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집착하고, 명칭과 언설로 구분하고, 여러 가지 행동을 저지르고, 그 업에 의해 과보를 받는 것이다.
2) 대승기신론의 해탈론
이상과 같이 심진여문에 의해 세상의 근원인 일심의 본래 모습을 말하고, 심생멸문에 의해 이 세상의 만물과 현상의 생멸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 대승기신론의 존재론에 해당한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어서 생멸하는 현상 세계 속에 있는 인간(중생)이 겪는 여러 가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에 관해 논술하는데, 이 부분이 대승기신론의 해탈론이자 수행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중생은 무명과 불각으로 인해 여러 가지 업을 짓고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게 된다. 무명과 불각이 중생에게 배어들어 여러 가지 업을 짓고 고통을 받게 되는 과정을 대승기신론에서는 염법(染法)의 훈습(熏習)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생명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중생은 그러한 업으로부터 유래하는 수많은 생사의 고통을 느끼고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것을 열반을 구하는 마음이라고 하는데, 이것으로 향하는 길을 대승기신론에서는 정법훈습(淨法熏習)의 작용으로 설명한다. 정법의 훈습이란 유한한 중생이 본래 자신과 둘이 아니었던 만물과 더불어 진여로 되돌아가려는 자연스러운 성향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중생이 지닌 그런 성향이 활성화될 때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다만 유한자들이 각기 지니게 된 염(染)과 정(淨), 정신적인 성질과 물질적 성질의 정도에 따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선후 등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에 이어서 ‘대치사집(對治邪執)’이라는 항목에서 깨달음을 방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그릇된 견해인 사집(邪執) 또는 망집(妄執)을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이라고 하면서, 그 견해를 논파하고 있다. 인아견은 진여나 생멸하는 현상들을 실체화하는 오류이다. 법아견은 현상 세계를 구성하는 오온을 실체로 간주하는 것이다. 대치사집은 인아견에 속하는 여러 견해는 모두 실체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임을 밝히고, 현상 세계를 구성하는 오온도 실체가 아니라고 하여 법아견도 타파하는 것이다. 그것의 핵심은 모든 법을 포괄하는 법신, 일심이 유무불이요, 일다불이이고, 색심불이요, 염정불이라는 것이다. 또 오온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전변하는 것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후 대승기신론은 ‘분별발취도상’이라는 항목에서 깨달음을 향해 도를 닦아 나가는 발심의 단계를 얘기하고 있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관해 얘기한 후 ‘수행신심분’을 통해 신심과 신심을 성취하는 수행 방법에 관해 논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6바라밀 중 선정에 해당하는 지관문(止觀門)에 관해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지(止)의 수행은 처음에는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서 모든 상념을 없애고, 나중에는 행주좌와(行住坐臥) 등 모든 행위를 할 때도 모든 상념을 없애는 수행을 하며, 마침내 진여삼매에 들어가는 수행이다. 온전한 깨달음을 위해서는 지만을 닦아서는 안 되고 관(觀)도 함께 닦아야 한다. 관을 닦을 때는 모든 게 무상하고 고라는 것을 관한다. 그리고 모든 선한 공덕을 수행하고 모든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앉아서 지를 닦을 때 이외에는 모든 경우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을 관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대승기신론은 해석분과 수행신심분을 통해 이 세상의 존재와 인간(중생)의 해탈에 관한 존재론과 해탈론의 요지를 모두 모두 논했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 부분인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과 총결회향(總結廻向) 부분에서는 《기신론》을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의 이익을 말하고 그 공덕을 회향하여 중생계를 널리 이롭게 할 것을 기원하는 것으로 논의를 마무리 짓고 있다.
3. 플로티노스의 일자 개념
1) 플로티노스의 존재론
동양에서 대승기신론 사상이 나타나고 발전한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기에 서양에서 발달한 존재론과 인생론(구원론)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들 수 있다. 플로티노스의 사상은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대신 편집한 작품집 《엔네아데스(Enneades)》에 서술되어 있다. 《엔네아데스》는 총 6권으로 되어 있고 각 권은 9편씩의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보통 1권은 주로 도덕의 문제를 다루고, 2, 3권은 자연계를, 4권은 영혼을, 5권은 지성을, 6권은 일자를 주로 다룬다고 분류되고 있다. 하지만 각 권이 반드시 해당 주제만을 다룬다고 한정할 수는 없고, 다른 주제를 다루는 부분들이 뒤섞여 있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존재에 대한 플로티노스 논의의 출발점을 이전의 그리스 사상가들의 논의에 기초하여 존재에 관한 일반적인 고찰을 하는 부분으로 잡을 수 있다. 거기에서 플로티노스는 이전 철학자들이 얘기해 왔던 존재의 여러 가지 종류에 대해 언급하고 나서, 존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우선 존재가 단일체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것은 ‘다양한 단일체, 즉 단일성 내의 다양성’이라고 얘기한다. 또 그는 참된 존재인 실체를 이루는 기본적인 다섯 가지 종류(다섯 가지 구성요소)를 존재, 운동, 안정성, 동일성, 차이성으로 보고 다른 것들(예를 들자면 양, 질, 관계, 장소와 날짜, 시간, 행동과 수동성, 소유, 상황 등)은 기본적인 종류가 아니라고 간주한다. 플로티노스가 실체를 이처럼 운동과 안정성, 동일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존재, 그러므로 동정불이(動靜不二) · 일다불이적(一多不二的)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존재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플로티노스는 수많은 존재 가운데서 참된 실체(근원적 실체)는 ‘일자(hen)’ ‘지성(또는 정신, nous)’ ‘영혼(psyche)’라는 세 가지 ‘히포스타시스(hypostases)’뿐이라고 간주한다. 참된 실체가 세 가지라는 이런 주장은 《엔네아데스》의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플로티노스는 이것을 플라톤이 말하는 삼위일체설을 계승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견해를 이어받아 참된 존재의 순서를 일자, 지성, 영혼으로 얘기한다. 이 밖의 모든 다른 존재들은 참된 존재로부터 파생된 존재들이다. 플로티노스는 참된 존재는 모든 곳에 편재하며, 이후에 오는 모든 건 여기에 포함된다고 하면서, 참된 존재의 편재성을 방사하는 빛의 비유로 설명한다.
플로티노스의 존재론에 대한 해명은 세 가지 실체란 어떠한 것이며, 그것들로부터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생성되는 것인가를 고찰하는 것이 된다.
(1) 일자
우주 만물의 근원을 이루는 최초의 참된 실체는 일자이다. 그렇다면 이 일자는 어떤 존재인가? 플로티노스는 우선 이 일자는 알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모든 존재에 앞서 있고, 모든 존재를 낳는 초월적이고 무한한 일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규정도 불가능하다. 모든 것 앞에 서 있는 무한한 일자는 어떤 형상, 성질, 크기 등을 가진 사물을 초월한 존재이므로 형용이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우주 만물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에 관해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일자는 선하다고도,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심지어는 존재한다고조차도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우주 만물에 관해 설명하려면 그 근원인 일자에 관해서도 어떻게든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일자가 우주 만물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걸 산출하는 잠재적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일자가 모든 걸 산출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모든 걸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이면서도 여럿(일다불이)’이다. 만약 그것이 일다불이인 것이 아니라면 만물의 생성은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참된 존재인 일자가 일다불이란 건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플로티노스가 실체를 동일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존재로 파악했다는 것과 합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자는 어떻게 우주 만물을 산출하는 것일까? 이것을 플로티노스는 흔히 말하는 ‘유출’ 즉, 일자로부터의 넘쳐흐름이라는 것으로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플로티노스는 모든 존재는 완성에 이르면 생성을 하며, 그것은 심지어 무생물조차도 그러하다고 한다. 예컨대 불은 따뜻하게 하고, 눈은 추워지게 하며, 약물은 어떤 효능을 가지고 이는 것처럼 말이다. 하물며 무생물조차 그러하다면, 가장 완벽하며 강력한 일자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어떤 것보다 완성된 존재로서 모든 걸 생산한다.
(2) 지성
플로티노스가 일자 다음으로 들고 있는 참된 실체는 지성이다. 일자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지성은 일자 안에서 일자를 보는 것이다. 지성이 있다는 것,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아는 주체와 앎의 대상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지성은 앎의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중성을 포함한 존재이다. 지성이 일자에서 일자 다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인 존재로부터 이중적인 존재 즉, 둘로 구분되는 존재가 나타남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성은 일자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며 그 안에 머물러 있다. 다만 일자는 그 속에 다수성을 포함하고 있는 일다불이적 존재이면서 아직 그런 다수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존재라면, 지성은 이제 그런 다수성이 처음으로 드러나게 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플로티노스는 일다불이인 지성의 모습을 ‘다중이면서 하나’ ‘단일-복수’라고 표현한다.
지성은 다중성을 포함한 단일성으로서 무한한 존재이다. 그것은 그 이후 나타나는 모든 것의 원천이 된다. 플로티노스는 이후의 모든 걸 낳는 근원으로서의 지성을 씨앗에 비유하는데, 이것은 대승기신론에서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아뢰야식이 종자식이라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일자로부터 지성이 생겨난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플로티노스는 변하거나 움직이지 않는 일자가 지성을 생성하는 것을 움직이지 않는 태양이 방사선의 빛을 방사하는 것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성적 행위는 선을 열망하는 어떤 존재에서 선을 향한 움직임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한 부동의 일자로부터 이중성을 갖는 지성이 어떻게 생성되는가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설명은 비유에 그칠 뿐 매우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3) 영혼
플로티노스는 “영혼(soul)의 실체적 존재는 지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하면서 세 번째 참된 실체인 영혼을 생명의 원리로 보고 있다. 플로티노스는 우주 만물 전체를 생명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보통 무생물이라 부르는 것들조차도 사실은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혼은 생명의 원리이며 생명력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존재해야만 생명체와 만물이 있을 수 있다.
플로티노스는 영혼을 절대 영혼, 보편적인 영혼, 개별적인(특정한) 영혼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여기서 절대 영혼은 지성과 분화되지 않은 지성 속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명력이 우주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게 되면 보편적인 영혼 또는 세계영혼이 된다. 우주는 ‘보편적으로 포괄적인 하나의 생명체’이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에워싸고 있는 하나의 보편적인 영혼이 있다. 보편적인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여 분화함으로써 개별적인 영혼이 된다. 본래 구별과 분열이 없는 것이 영혼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육체와 결합하면서 분화한다. 이것은 영혼이 일다불이인 것으로서 동시에 분할 불가능하면서도 분할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혼에 앞서는 실체인 일자와 지성이 그랬듯이, 영혼 역시 그 속에 동일성과 차이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실체이다. 영혼이 그런 일다불이인 존재임을 플로티노스는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일자와 지성은 본래 일다불이이지만 그것들은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통일체로 있는 것인데, 영혼은 몸과 결합해 하나이면서도 나누어진 것이 된다. 플로티노스는 본래 지성 속에 있던 생명력인 영혼이 분화되어 육체와 결합해 개별적인 영혼, 개별적인 사물로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것을 보면, 영혼의 분화는 본래 일자와 지성이라는 무한 속에 포함되어 있던 유한, 통일성 속에 포함되어 있던 다양성이 발현되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혼의 움직임으로 인해 생명을 가진 이 세상의 만물이 생성된다.
2) 플로티노스의 인생론(구원론)
플로티노스의 존재론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만물은 영혼과 육체(물질)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만물 속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 만물 속의 영혼은 한편으로는 본래의 보편적인 영혼 또는 절대적인 영혼에 속하는 것으로 그것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개별 영혼은 육체와 결합함으로써 제한된 특수한 성격을 띠는 측면도 존재한다. 한정된 육체와 결합하게 된 영혼은 육체 때문에 갖게 되는 여러 가지 욕망이나 외부의 영향 등에 연관되고, 어느 정도는 그런 것에 관한 관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또 영혼은 육체와 결합된 삶으로 인해 여러 가지 세속적인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모든 영혼은 본래 일자와 지성 그리고 보편적인 영혼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근원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영혼에는 육체와의 결합으로 인해 빠져들었던 욕망이나 세속적 관심 등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을 인식하고 그리로 되돌아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이 언제나 열려 있다. 이러한 길을 찾아가 본래의 근원인 일자와 하나가 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인생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최고의 존재인 아버지 신, 일자와 하나 된 영혼은 모든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경멸하기 때문에 어떠한 두려움도 없고 알지도 못하며, 지고무상의 행복을 얻게 된다.
육체와 연관된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의한 타락과 악으로부터 인간(영혼)을 교화하고 그들의 기원으로 되돌려서 다시 절대자인 일자를 향해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플로티노스는 두 가지 훈련을 얘기한다. 그 첫 번째는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무가치함을 알도록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영혼의 본래 모습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인가를 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덧없는 모든 외적인 것에서 벗어나 완전히 영혼의 내면으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모든 감각적인 것들에 관한 관심과 욕망을 던져버리고 오직 우리 내면에 있는 일자를 성찰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과 그 근원인 지성, 그리고 일자에 대한 관조이다. 일자에 대한 관조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근원인 절대자, 일자와 하나가 된다. 이러한 일자와의 합일에 의해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행복과 안식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플로티노스의 인생론(구원론)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4. 동서의 만남과 회통
: 올바른 존재의 해명과 해탈 또는 구원
앞서 살펴본 대승기신론과 플로티노스 사상의 논리 구조는 매우 흡사하다. 우선 양자는 모두 우주 만물의 근원을 하나(일심, 일자)로 보았으며, 그 근원을 본질적으로 지적인 것(본각, 지성)으로 보고, 지적인 것의 작용에 의해 만물이 나타나는 걸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양자는 모두 그렇게 생성된 만물은 본래의 근원과 멀어지고 근원을 잊음으로써 고통을 겪고 악에 빠지게 되며, 그것이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라고 간주하였다. 나아가 양자는 모두 인간(중생, 영혼)이 그러한 자기 모습과 존재의 근원을 깨닫고 그리로 돌아가 합일을 이루게 될 때, 인생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하고 지고의 행복을 이룬다(해탈, 구원)고 주장하였다. 또 양자는 모두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이 세상 만물의 덧없는 실상을 보고, 영원한 근원을 관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상통하고 있다.
대승기신론과 플로티노스의 이론은 각기 몇몇 문제점 또는 난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양자의 이론은 매우 비슷한 논리 구조와 내용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속에 포함된 문제점이나 난점도 매우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 문제점을 살펴보고 그것을 해결하고 올바른 인생의 길(해탈 또는 구원의 길)을 찾기 위한 방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모든 존재의 근원을 일심이라고 하고 일심이 세상의 생멸하는 여러 현상으로 나타나는 시초가 될 때는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그러한 아뢰야식이 어떻게 해서 수많은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에서는 이 부분에서 아뢰야식에 관해 설명하면서 식(識)으로서 아뢰야식의 모습을 본각과 불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넘어가 버린다. 애초에 일심 또는 아뢰야식에서 어떻게 해서 생멸하는 수많은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어떻게 본각(깨달음)이 불각(깨닫지 못함)으로 되는가 하는 문제로 바뀌어 있다. 물론 만물의 근원인 일심과 본각을 동일시하고, 세상의 온갖 현상과 사물을 모두 불각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두 가지 문제를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승기신론에는 두 문제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다분히 있으며, 그래서 세상의 생멸하는 수많은 현상과 불각을 무명(無明), 더러움(染), 망념(妄念) 또는 망법(妄法)에 따라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처럼 생멸하는 수많은 현상 또는 불각 같은 것이 무명, 더러움, 망념 또는 망법에 따라 나타난다는 설명은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사실 무명이나 망념 같은 것은 뭔가를 모르고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서 불각과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불각, 또는 불각과 동일시되는 수많은 현상이 무명이나 망념으로부터 생긴다는 설명은 동어반복으로서 아무것도 설명하는 바가 없는 셈이다. 문제는 여전히 무명이나 망념이 어디에서 생기는가 하는 것이다. 만물의 근원을 애초에 마음[一心], 앎[識], 깨달음[覺]이며, 더러움이 없는 깨끗한 것으로 보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해서 마음과는 다른 물질적인 것, 앎이나 깨달음과는 다른 무명이나 불각, 깨끗함과는 다른 더러움이 생겨나는가를 설명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올바른 입장은 만물의 근원을 오로지 정신적이고 깨끗한 일심이라고 하기보다는 진여(眞如), 진성(眞性), 법성(法性), 법신(法身)이라고 하고, 그것을 일다불이, 유무불이로서 마음과 물질, 본각과 불각, 더러움과 깨끗함[染淨],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기신론 사상 속에 상당 부분이 이미 들어 있다. 그것은 심진여문에 관해 설명하면서 우주의 근원을 이루는 일심이라는 게 유무불이와 일다불이라는 걸 말하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나 있다. 또 《대승기신론》에는 만물의 근원인 진여의 자체상을 법신이라 하고, 법신이 색심불이(色心不二)라고 함으로써, 진여가 애초부터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부분도 있다.
앞의 문제와 연관된 또 하나의 문제는, 대승기신론에서 만물을 자성을 지닌 실체로 착각하면서 서로 다른 존재로 구분하고 차별하는 중생의 마음(무명)을 만물 자체를 낳는 원인인 것처럼 얘기하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현상 세계를 불러일으키는 일심이라는 마음과는 다르다고 봐야 한다. 그 둘을 같은 것으로 보고 모든 건 중생의 마음, 또는 나의 마음이 짓는 것이라고 본다면 주관적 관념론에 빠지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신을 그 속에 유한을 품고 있는 무한으로 보고 유한이라는 계기가 움직여 유한한 만물이 생겨나는데, 그렇게 생겨난 중생이 만물을 각기 독립적인 실체로서 간주하는 데서 무명과 망념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진여 법신으로부터 만물과 세상의 온갖 현상들을 나타나게 만드는 것이 무명이 아니라 본래 일다불이이고 유무불이인 만물과 세상의 온갖 현상들을 각기 자성을 지닌 실체로 잘못 아는 것이 무명이며, 불각이다. 본래 일다불이이고 유무불이로 통합되어 있던 무한한 근원(법신, 법성)으로부터 나타난 유한한 것들이 근원을 잊고 자신들을 실체로 착각하고 집착하는 무명과 불각에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벌어진다. 올바른 인생의 길, 해탈의 길은 그러한 존재의 실상을 올바로 깨닫고, 덧없는 유한한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생멸하는 현상이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대승기신론의 핵심적인 문제였던 것처럼, 플로티노스의 이론 역시 그러하다. 하나인 일자로부터 왜 그리고 어떻게 다수의 것이 생겨나는가, 다수의 것이 생겨남에도 일자는 어떻게 여전히 하나일 수 있는가? 이런 것이 플로티노스 존재론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대답은 상당히 애매하고 난해하다. 그는 종종 우주 만물의 근원인 일자를 완전히 단순한 것, 배타적으로 단일한 것이라 얘기함으로써 설명을 어렵게 만든다. 애초에 완전히 단순한 것이라면 거기서 다양성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려움이 가중되는 것은 영혼 이후에 나타나는 만물의 생성에 관한 설명 부분이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개념과 설명이 매우 애매하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는 영혼과 물질의 결합으로 만물의 생성이 이루어진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물질의 존재이다. 영혼만으로는 다양한 모습과 성질의 만물이 있을 수 없으므로 물질과의 결합이 필수적이라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애초에 물질이 있다면 영혼이 그런 물질과 결합해서 다양한 존재들을 생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물질의 존재 자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다. 이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설명은 매우 혼란스럽다. 그의 설명은 대단히 애매하고 종종 서로 모순이 되기도 한다.
플로티노스는 물질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인지, 영혼 등의 선행 원인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인지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데아와 지성 영역의 물질 모두 초월자의 성질 속에 영구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물질이 본래부터 존재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의 힘이 없다면 육체 자체는 어떤 형태로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 더 나아가 물질 자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함으로써, 물질은 영혼의 힘에 따라 생성되는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영혼과 물질의 결합에 의한 만물의 생성, 그리고 물질 자체의 존재에 관한 플로티노스의 설명이 포함하는 이 모든 난점은 한편으로는 우주 만물의 근원인 일자를 순전히 정신적인 것으로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모두가 유출된다고 보는 데서 오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플로티노스 존재론의 문제점 즉, 하나로부터 어떻게 여럿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어떻게 물질이 나오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일자가 본래 단일성 속에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플로티노스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앞의 서술에서 이미 보았듯이, 플로티노스는 곳곳에서 참된 실체인 일자, 지성, 영혼 모두가 하나이면서도 여럿(일다불이)인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우주 만물의 근원인 일자를 완전히 단순한 것, 전적으로 정신적인(지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고 수많은 다양성과 물질을 포괄하고 있는 일다불이인 것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일관되게 밀고 나간다면 플로티노스 존재론의 난점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플로티노스의 존재론을 합리적으로 구성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 만물의 근원인 일자는 모든 걸 통합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것은 일다불이이지만 아직 다(多)가 드러나지 않은 하나이다. 여기서 지성이 생겨난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탐색과 인식이다. 일자 속에 일다불이로 있던 지성과 물질적 성질 가운데 지성이 주도적인 측면인데, 그것이 먼저 깨어나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하며 여기서 이중성이 생겨난다. 지성은 동일하면서도 다양한 것이다. 그것은 보는 것이면서 보이는 것이 된다. 여기서 다(多)가 최초로 드러난다. 그러나 지성은 아직 일자 자체 내에 머무르고 있다. 이것이 영혼으로 나아가면서 물질과 결합하게 된다. 영혼은 잠재성으로 일자 속에 있던 물질과 결합하여 개별적인 사물이 된다. 즉 영혼이 분화하여 물질과 결합하거나 물질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또는 물질이 영혼에 참여함으로써 생명체에서 무생물에 이르는 모든 개별적 존재가 탄생하게 된다.
일자로부터 우주 만물이 생성되는 이유는 신의 계획에 의한 것이거나, 우연에 의한 것이거나, 필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일자의 본질이 그러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더 엄밀히 말하자면, 사실 유한한 만물이 무한한 일자로부터 따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우주 만물 모두는 무한한 일자의 품속에 있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현상은 무한한 일자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것을 깨닫고 우리 자신을 포함한 유한한 모든 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벗어버리고, 우리 속의 무한한 일자, 무한한 일자 속의 우리를 관조하고 일자와 하나 되는 것이야말로 지극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대승기신론과 플로티노스의 사상은 놀랍도록 유사하게 이 세상의 존재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의 길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는 대승기신론과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통해 존재와 인생에 관한 심오한 통찰에는 동서가 따로 없으며, 얼마든지 소통하고 회통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이찬훈 bulidang@naver.com.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 ·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논문으로 〈불이사상과 미래문명〉 〈화엄경 보살사상의 현대적 계승〉 〈불교생태학의 현황과 과제〉 〈중국 화론에 나타난 동양미학 사상 연구〉 등과 저서로 《둘이 아닌 세상》 《불이사상으로 읽는 노자》 《불교의 미를 찾아서》 《서양의 정의론, 동양의 정의론》, 역서로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 《한 권으로 읽는 동양미학》 등이 있다. 현재 인제대학교 인문문화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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