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참회(懺悔, skt. Ksama)

수선님 2024. 9. 8. 12:35

<참회(懺悔, skt. Ksama)>

 

육조 혜능(慧能) 대사는 <육조단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懺)이란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망 되게 시기 질투한 죄를 뉘우쳐 지난날에 지은 악업을 다시는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이 다음에 저지르기 쉬운 허물을 조심해 그 죄 됨을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라고 했다.

‘참((懺)’은 잘못된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고,

‘회(悔)’는 더 이상 이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참(懺)’은 과거의 죄를 뉘우치는 것이고,

‘회(悔)’는 앞으로 다가올 잘못을 미리 예방하는 것을 말한다.

‘참(懺)’이란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깊이 깨닫고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쳐 용서를 비는 것,

‘회(悔)’란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불⋅보살(佛菩薩), 스승, 대중(大衆) 앞에 고백하고 사과(謝過)하는 일. 이에 의해 멸죄(滅罪), 또는 면죄(免罪) 받는 것이다.

이러한 참회를 통해 숙세의 업장을 소멸하는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는 것만이 아니라 닦는 것도 참회이다. 진정한 참회란 안일과 쾌락을 추구하는 오욕심(五欲心)에서 벗어나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올바른 삶의 가치에 대한 확신과 변화에서 비롯된다. 가치관의 전환이나 생활의 변화가 없는 참회는 허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참회는 세상에 탐욕과 거짓과 어리석음이 있는 한 계속돼야 한다. 올바른 삶으로 회귀하려는 참된 마음인 참회정신이 침체되지 않도록 생활화해야 한다.

※오욕심(五欲心)이란 중생심을 가진 인간이 갖고 있는 다섯 가지 기본적인 욕망, 즉 식욕(食欲)ㆍ수명욕(壽命欲)ㆍ성욕(性欲)ㆍ재욕(財欲)ㆍ권력욕(權力欲), 다섯 가지 욕심을 말한다.

참회에는 사참회(事懺悔)와 이참회(理懺悔)가 있다.

사참회(事懺悔)는 매일 짓는 죄를 모두 참회하는 것이고,

이참회(理懺悔)란 죄의 본성(本性)이 본래 공(空)해 죄가 붙을 자리가 없음을 확실하게 깨닫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불심을 가다듬는 자체가 참회라는 것이다.

사참(事懺)은 부처님께 절을 하거나 독경을 하거나 참회의 진언을 외우는 등 행위와 동작으로 참회하는 것이며,

이참(理懺)은 지은 죄의 실상을 깨달아 다시는 재범하지 않는 참회를 말한다. 이 외에도 진참회(眞懺悔)가 있다.

<천수경>에 ‘진참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罪無自性 從心起(죄무자성 종심기 心若滅是 罪亦忘(심약멸시 죄역망)

罪忘心滅 兩俱空(죄망심멸 양구공) 是卽名爲 眞懺悔(시즉명위 진참회)

죄의 자성은 본래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니, 마음이 만약 비어지면 죄 또한 사라진다네. 죄도 마음도 사라져 모두 흔적 없이 텅 비어야 이를 일러 진참회라 한다네.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서 신통제일인 목건련(目犍連, Moggalāna) 존자께서는 말년에 데바닷타(提婆達多, Devadatta) 무리의 박해를 받아, 그들이 던진 돌을 맞고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는데, 도반 사리불(舍利弗, Sāriputta) 존자가 병문안을 와서 말했다.

“벗이여, 신통력을 가지고 왜 박해를 물리치지 않았는가?” 하시니,

“사리불이여, 이것은 내 자신의 전생의 과보네. 내가 전생에 아내에게 속아서 나의 부모를 해쳐 그 악업의 과보로써 지금의 고통을 받는 것이요.”라고 목건련이 말했다.

목건련 존자는 전생의 악업으로 인해, 자신이 신통력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돌을 맞은 것이다. 현세의 신통력보다 전생부터 지어온 업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다. 목건련 존자의 예만 보더라도 우리는 먼저 자신의 죄장(罪障)이 큼을 알고 숙업을 참회한 다음 바라는 바를 성취하고자 기도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두 비구 스님이 깊은 산 속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한 비구 스님의 누이동생이 오빠 스님이 출타중임을 알고, 평소 사모하던 혼자 남아 있는 비구 스님을 유혹해서 파계시켰다.

파계 후 정신을 차린 비구 스님은 통곡을 했고 여인은 도망을 갔다. 잠시 후 돌아온 오빠 스님은 도반 스님에게 전후 사정을 듣고 분노해 누이동생을 찾아 나서서 헤매다가 마침 절벽 위에서 쉬고 있던 누이동생을 보고 달려들자, 무서워서 뒷걸음치던 누이동생이 그만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한 비구 스님은 음계(淫戒)를, 한 비구 스님은 살계(殺戒)를 범했으니, 그 얼마나 괴롭고 막막했겠는가. 두 스님은 서로 붙들고 통곡하다가 참회를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그 당시 대율사인 우팔리(優婆離, Upali) 존자를 찾아가 사실을 고백했다.

이 때 우팔리 존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호통을 쳤다.

“두 비구는 4바라이(四波羅夷)를 저질렀으므로 교단에서 축출 당하고 죽어서는 지옥에 떨어지는 죄 중 하나를 범했으니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이룰 생각을 말라. 바라이죄를 범한 것은 마치 볍씨를 뜨거운 물에 담갔다 꺼낸 것과 같다. 이에 너희는 보리(菩提) 종자를 완전히 삶아버렸다.”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두 비구 스님은 자탄하며 바위에 머리를 찧으며 기사굴산을 내려오다가 유마 거사(維摩居士)를 만났다. 유마 거사는 수심이 가득한 두 비구 스님께 사연을 물으니, 두 비구 스님이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이에 유마 거사는 말했다.

“두 스님께서는 분명히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봅시다. 그 죄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하며, 두 스님을 향해 손바닥을 내미는데, 그 순간 두 비구 스님은 죄무자성(罪無自性)의 도리를 깨닫고 진실한 이참(理懺)을 하게 됐다.

그리하여 유마 거사는 말했다.

“죄는 자성이 없는데 마음을 쫓아 일어나는 것이니 마음이 만약 없어지면 죄도 따라 없어진다. 죄도 마음도 없어져서 두 가지가 다 공한 상태가 되면 이것을 이름 하여 진참회라고 하느니라(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忘 罪忘心滅兩俱空 是卽名爲眞懺悔).”라고 하는 게송을 읊었다. <천수경(千手經)>에도 나오는 그 게송이다. 대승적 차원의 참회, ― 이참회(理懺悔)를 설파한 것이다.

신라의 원효(元曉) 대사는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파계한 후, 걸인 행색을 하고 저잣거리에서 뒤웅박을 두드리며 “나무아미타불”과 광명진언(光明眞言), 무애가(無礙歌)를 부르면서 그 당시의 귀족불교를 탈피해 민중을 위해 불법(佛法)을 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니, 이와 같은 반야행, 보살행, 자비행, 무애행을 실천한 원효 대사의 삶이야말로 이참ㆍ사참을 동시에 이룬 진정한 참회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악을 선으로 돌리고 그릇됨을 올바름으로, 어리석음을 깨달음으로 돌려서 대 해탈을 이루게 하는 참회행을 함으로써 자신도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는 대승보살의 삶을 실천함이 진정한 이참회라 하겠다.

그렇다면 참회는 어떠한 요령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스님들에게는 이미 제도화된 스님들의 참회의식이 있다. 하지만, 그런 방법 말고, 중생들에겐 다음과 같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 요령은, 먼저 108배를 천천히 하면서 매 1배를 할 때마다 한 가지씩 참회하는 것이다. 욕심 부린 것, 성낸 것, 어리석었던 것의 순서로 하되, 우선 욕심 낸 것을 바로 지금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한 가지씩 참회한다. 이것이 끝나면 성낸 것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한 가지씩 참회한다.

다음에는 어리석었던 행동을 참회한다.

어리석음의 첫째는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이며, 인과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우러나온 모든 어리석은 짓을 한 가지씩 떠올리면서 과거로 거슬러 참회한다.

마지막으로 비록 지금 생각은 나지 않지만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일체를 108배 끝날 때까지 참회하는 것이다.

이러한 참회를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무조건적인 참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꼭 필요한 욕심이라든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화를 냈다든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참회해야 한다. 결국 욕심내고 화내고 어리석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급적이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요령으로 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참회뿐만 아니라, 기도나 참선 등도 마찬가지이다.

물방울이 돌을 뚫는 것은, 지속적으로 같은 장소에 떨어져 내리는 까닭이다. 분산돼서는 큰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요령으로 행하는 참회는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루 20-30분 정도씩만이라도 꾸준히 참회하다보면, 열흘 내지는 보름 정도만 지나도 몸과 마음이 한결 거뜬하고 개운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짊어지고 있던 업장의 무게가 덜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마음이 훨씬 가벼워짐을 느낄 때까지 계속해서 하고 나서, 참회를 통해 비워진 마음자리는 반드시 커다란 서원으로써 채워놓은 것이 좋다. 서원은 클수록 좋지만, 가급적이면 자신의 현재 상황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 더욱 좋다.

풀 한 포기의 고통에도 예민하게 같이 아파하고, 무한한 자연의 훼손에도 아파하고, 내 이웃의 불행도 아파하고, 누군가 눈물 흘리는 것에 가슴깊이 함께 아파한다. 그리하여 작은 적선이나마 어려운 사람을 위한 이웃사랑 등을 발원하는 것이다.

  수필가 피천득(皮千得, 1910~2007) 선행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 교수로 근무할 때 한 후배 교수가 피천득 선생에게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한마디 해주세요.”라고 하자, 피천득 교수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젊은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여러분에게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인 항일도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숨어 있기도 했고,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미안한 점이에요.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이런 참회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고운 마음씨를 가졌기에 그런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친일을 했어도 그 누구 한 사람 참회록 같은 것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쉽게 일제가 망할 줄 몰랐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꼭 큰 뉘우침만이 참회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저지른 잘못이 한둘이겠는가. 그걸 뉘우칠 줄 아는 마음이 진참회일 것이다.

그리고 참회진언(懺悔眞言)을 외는 경우,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이는 <천수경>에 나오는 진언으로 세세한 뜻은 아래와 같다.

<옴>은 ‘진언의 왕’이며 ‘우주의 핵심’이며 ‘항복, 조복, 섭복’ 등 여러 가지 의미와 신비한 힘을 가진 진언의 정형구에 해당한다.

<살바>는 ‘일체’라는 뜻이며,

<못자>는 ‘붓다’의 다른 표기이다.

<모지>는 ‘보리’의 뜻이며,

<사다야>에서 <사다>는 ‘살타’이며,

<야>는 ‘~에게’라는 뜻이다.

<사바하>는 앞의 일이 원만하게 성취되도록 하는 종결어미로 사용되며, ‘구경(究竟), 원만, 성취, 맡긴다, 귀의한다.’ 등의 뜻이 있다. 그래서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를 붙여서 해석해보면, ‘일체의 불⋅보살님에게 귀의합니다.’라는 뜻이 된다.

참회진언에 특별한 가르침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고 ‘부처님과 보살님들에게 귀의합니다.’이니,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죄는 자기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죄나 마음이 모두 공(空)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이 진정한 참회라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불⋅보살님들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불⋅보살님들께 귀의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불⋅보살님께 다 털어놓고 참회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는 참회를 하는 동안 마음이 열려 불⋅보살님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지르고서도 후회할 줄 모르는 자는 하등의 사람이요, 후회하면서도 고칠 줄 모르는 이는 중등의 사람이며, 잘못을 두 번 다시 범하지 않는 사람은 고등의 사람이라고 한다. ​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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