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사의 흥망성쇠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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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인도불교사의 전개는 4단계로 나누어 접근할 수 있는데, 그것은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이다. 부파불교 시대에 대중부 와 상좌부로 나누어졌는데, 이 상좌부가 현재 남방 상좌부불교 곧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불교의 근원을 이룬다고 한다. 그다음으로 대승불교가 등장하여 동아시아 곧 중국, 한국, 일 본, 베트남으로 전파되었다. 이어서 밀교가 등장하였는데, 이 밀교 는 히말라야산맥의 여러 나라, 곧 티베트, 네팔, 부탄 등으로 전파 되었다. 현재 불교는 미국과 서유럽에서 지식인의 종교로서 자리매 김하면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이러한 여러 나라의 불교 가운데 ‘불교사’의 백미를 꼽으라고 한 다면, 필자는 ‘중국 불교사’를 거론하고 싶다. 그 이유는 기원 전후 중국에 전파된 불교는 현재에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그래서 가장 오래된 불교 역사의 전개 과정을 펼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불 교의 근원은 ‘인도불교’라고 하겠지만, 기원후 12~13세기경에 명맥 이 단절되었다가 20세기에 들어서서 다시 조금 복원되고 있는 과정 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중국 불교사’는 말없이 흐르는 양쯔 강처럼 그 도도한 흐름을 펼치고 있다.
중국불교의 특징으로 일반적으로 다음 4가지를 거론할 수 있다. 첫째, 위경(僞經)의 성립이다. ‘위경’은 인도 문화권에서 성립된 것 이 아니고, 중국에서 작성된 경전을 말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 으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불교 교단 과 국가권력의 관계에서 볼 때, 중국불교는 국가권력에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교상판석(敎相判釋, 교판)을 중심 으로 한 종파(宗派)불교가 성립하였다는 점이다. 넷째, 출세간보다 세간(世間)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 대안을 제시할 때, 대만불교의 사례를 활 용하고자 한다. 중국과 대만이 같은 나라인가 다른 나라인가 하는 정치적 입장과는 별개로, 불교에서 보면 중국불교와 대만불교는 그 근원에서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함께 논의하고자 한다.
2. 중국불교의 전개
중국불교의 전개 과정은 다음의 5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것 은 소개기, 연구기, 건설기, 유지기, 쇠퇴기이다.
1단계는 후한(後漢) 시대의 끝 무렵, 불교가 소개된 시기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동서교통로가 개척되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 무제 때 장건(張騫)이 서역을 여행하였고, 그로 인해 서역에서 물자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 교역은 중앙아시아에 사는 이란계 민족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페르시아인과 인도인도 참여하였다. 당 시 중앙아시아에는 아쇼까왕이 전도사를 파견해서 이미 불교가 전 파되었으므로 중앙아시아 사람이 믿던 불교가 상인을 통해서 중국 에까지 전래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그 가 운데 신빙성이 제일 높은 것은 전한의 애제(哀帝) 원년인 기원전 2 년에 박사(博士) 제자(弟子) 경려(景廬)가 대월지왕(大月氏王)의 사자 이존(伊存)에게 부도경(浮屠經)을 구두로 전해 받았다[口授]는 설이다.
2단계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불교의 이론이 어느 정도 소화되어 연구되던 시기이다. 이것은 두 단계로 나누어서 접근할 수 있다. 먼 저, 동진(東晋) 시대의 격의불교(格義佛敎)이다. ‘격의불교’란 인도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중국의 사상(주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이해한 방식이라는 의미이다. 이 격의 불교에는 6가7종(六家七宗)이 있다. 그다음으로, 남북조 시대에 접 어들면서 인도불교의 여러 학파 불교가 연구되었다. 여기에는 열반 종, 성실종, 지론종, 섭론종 등이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면서 중 국불교는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게 되었다.
3단계는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중국불교의 독자적 종파를 세 운 시기이다. 이 시기에 중국불교는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었다. 불 교는 남조와 북조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서 불교가 외래종교의 범주에서 벗어나서 중국 민족의 문화 속에 융합되어 중국인의 종교가 되었다. 수나라와 당 나라 시대의 불교는 그 이전 시기의 불교를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그 이전의 불교를 초월한 것이다. 중국 민족의 문화와 완전히 융화 해서 새로운 중국불교로 성립된 것이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불교 이다.
이 시기에는 여러 종파가 성립되었지만, 그 가운데서 천태종, 화 엄종, 정토종, 선종이 ‘중국불교사’의 꽃이라고 할 정도로 널리 알려 졌다. 천태종과 화엄종은 뛰어난 불교철학으로 인도불교와 다른 독 자적인 체계를 가지는 종파이고, 선종과 정토종은 실천불교에 속하는데, 특히 정토종은 민간에까지 널리 침투하였다.
4단계는 송나라 시대에서 명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세 력이 유지되던 시기이다. 송나라 시대에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기보 다는 이미 사람들이 친숙히 알고 있는 것을 확실히 이해해서 소화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에 따라 귀족적이고 사변적인 불교는 힘 을 잃고, 민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불교, 곧 염불과 선 등이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이처럼 불교가 민중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일종 의 퇴화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 민중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중국의 민중 사이에 남아 있는 불교 의 모습은 대체로 송나라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송나라 시대에 당나라 시대만큼 불교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불교가 이미 중국인의 정신생활에 흡수되어 달리 내세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송나라 시대에 성립한 신유 학(新儒學)은 불교에 대항하는 이론 체계를 만들었는데, 이는 송대의 사람들이 불교를 상당히 소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원나라 시대에는 원나라 황실이 불교를 보호했으므로 불교사찰 과 승려의 숫자도 증가하였다. 그래서 원나라 시대 중기가 되면 불 교의 승려가 백만 명에 이른다고 하기도 했다. 이는 과장된 말이겠지만, 그만큼 승려가 많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시대에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 불교를 통제 하려고 하였지만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고, 명나라 시대의 끝 무렵 에 4대 고승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5단계는 청나라 시대에 불교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어 가던 쇠퇴 기이다. 중국의 지배자가 된 만주족의 청나라는 유교적 규율에 의 해서 중국인을 통제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불교나 도교 등을 이단으 로 판정하고 경계하였다. 종교 통제는 성조 강희제(1662~1722 재 위) 때 이미 시작되었고, 세종 옹정제(1723~1735 재위) 때도 계속 되어 청나라 시대 전반의 일관된 정책이 되었다. 물론 성조(강희 제)와 세종(옹정제)은 개인적으로 불교에 관심을 보였지만, 고종 건륭제(1736~1795 재위) 때는 중국의 고유문화가 중시되어 불교는 배척당했다.
3. 중국불교의 위기: 폐불과 공명첩(空名牒) 발행
중국불교사에서는 삼무일종(三武一宗)이라고 불리는 4차례의 불 교탄압 사건, 곧 폐불(廢佛) 사건이 있었다. 여기서는 중국불교의 위기 상황인 폐불 사건에 대해 살펴보고, 송나라 시대 이후에는 이 것이 공명(空名) 도첩 발행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1) 북위의 폐불
중국불교사에서 발생한 첫 번째 불교탄압은 북위 태무제의 폐불 이다. 태무제 때 국가정책의 추진자로서 재상 최호(崔浩, 381~450) 가 있었다. 최호는 신천사도(新天師道)의 창시자 구겸지(寇謙之, 363~448)와 모의하여 태무제가 불교를 탄압하도록 하였다. 최호는 태무제가 관중(關中)을 정복할 때와 북양(北凉)을 정벌할 때 군정 의 최고 고문이 되었다. 또한 구겸지의 ‘신천사도’도 ‘국교’로서 자리 를 잡았다.
438년에 최호와 구겸지가 모의하여 50세 이하의 사람은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승려제한 조칙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446년, 반란을 일으킨 개오(蓋吳)를 토벌하기 위해 장안으로 들어간 태무 제는 장안의 사원에서 승려의 비행(非行)을 발견하고 분노하였다. 이에 태무제는 최호가 제시한 주장, 곧 불교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 을 받아들여서 폐불의 조칙을 내렸다. 그에 따라 승려는 죽임을 당 하고 불상과 경전은 불태워졌다. 그때가 446년 3월이었다.
불교 쪽의 기록을 보면, “태평진군 7년(446)에 시작해서 불법을 훼손하고 없애고, 군사와 병사를 풀어서 사원을 약탈하며, 통치하 는 범위 안[統內]의 모든 승려를 환속시켰다. 사원 근처에서 방황하 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을 파견해서 모두 체포하고 잡히면 참수하였 다. 그래서 사원 안에는 두 번 다시 승려가 존재할 수 없었다”라고 하고 있다.
2) 북주(北周)의 폐불
중국불교사에서 일어난 두 번째 불교탄압은 북주의 무제(武帝, 560~578 재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무제는 상당히 현명한 황제 였다.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우문호(宇文護, 495~572)를 죽이고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고 나서 무제는 북제를 정벌하기 위해서 부국강병책을 택하였다. 그 정책의 하나로서 불교 사원을 정리하고 사원 소유의 땅으로 국가재정을 튼튼하게 하고자 하였다. 또 타락한 불교 승려를 숙청하였고, 불교 교단을 정리하고 탄압하였다.
567년에 도사 위원숭(衛元嵩)이 무제에게 불교를 탄압하라고 사 주하였다. 무제는 573년에 3교 가운데 유교를 제일로 삼고, 도교와 불교를 그 아래에 두었다. 574년 5월 17일에는 불교와 도교를 탄압 하였는데, 그 내용은 경전과 불상을 태우고 승려와 도사를 환속시 키는 것이었으며, 모든 음사(淫祀: 삿된 귀신에게 제사 지냄)를 금 지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국립종교연구소라고 할 수 있는 통 도관(通道觀)을 설립하였다.
북주의 불교탄압 사건의 경우 8개 주(州)에서 4만여 개의 사원을 귀족의 저택으로 사용하도록 하였고, 수많은 경전을 불태웠으며, 불교 승려 3백만 명을 환속시켰다. 불교탄압 기간은 5년이었지만, 이것이 불교계에 준 영향은 사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대단히 큰 것이었다.
3) 회창의 폐불
회창(會昌)의 폐불은 당나라 무종에 의해 회창 2년(842)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승려 가운데 도망병, 범죄자, 처자가 있는 자와 계행(戒行)을 닦지 않은 자는 환속하고, 승려가 주술 이외의 요술을 행하는 것을 금지하고, 승려가 사원의 문밖에 나오는 것을 금지하 며, 승려의 사유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회창 5년(845) 8월에 ‘훼불사륵승니환속제(毁佛寺勒僧尼還俗制)’를 발표하였다. 이때는 약간의 예외 조항을 두고, 그 밖의 모든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를 환속하도록 하였다. 예외 조항은 단 지 장안과 낙양에 각각 2개의 사원과 승려 30명을 남기도록 하고, 절도관찰사가 다스리는 곳 동주(同州), 화주(華州), 상주(商州), 여주(汝州)에는 사찰 1개소만 남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 찰을 3등급으로 구분해서 상등급의 사찰에는 승려 20명이 머물 고, 중등급 사찰에는 승려 10명, 하등급 사찰에는 승려 5명이 머 물도록 하였다. 그 외의 모든 사찰은 파괴하고 승려는 환속하도록 하였다.
환속한 승려와 사원의 노비는 양세호(兩稅戶: 1년에 2번 세금을 내는 백성)에 포함시켜서 세금을 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 은, 철, 동(銅)의 불상(佛像)과 불구(佛具: 불전에 있는 여러 도구)는 모두 녹여서 동전을 만들거나 농기구를 만드는 데 사용하도록 하였다.
회창의 폐불로 인해 파괴된 사원은 4,600개소, 초제란야(招提蘭若: 암자) 4만여 개소, 환속한 승려 26만 5백 명, 사원의 땅[寺田]을 몰수한 것이 수천만 경, 노비는 15만 명이라고 한다. 전하는 기록마 다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회창의 폐불로 인해 불교계가 엄청난 피 해를 입었다는 점은 모두 일치하고 있다.
회창의 폐불이 발생한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경제적 원인 을 살펴보면 불교사원이 증가하고, 승려의 숫자가 늘어나며, 사원 의 경제가 확장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사원과 승려는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생산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고, 세금의 면제 등 으로 인해 국고의 수입이 줄어들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였다. 그리 고 사원이 재산을 증식하게 된 것도 문제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왕 실이나 귀족이 토지를 기증한 경우도 있고, 사찰 안의 여러 영리 행 위로 인해서 재산을 늘어나게 한 경우 등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국가경제에 위협 요소가 되었고, 그에 따라 무종은 회창의 폐불을 단행한 것이다.
4) 후주(後周) 세종의 폐불
후주 세종(954~959 재위)은 오대(五代)의 시대에 뛰어난 임금으 로 평가받고 있고,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후주 세종의 정책을 기반 으로 하였다고 한다. 후주 세종이 단행한 불교탄압에 대해서 《자치 통감(資治通鑑)》에서는 현덕 2년(955) 5월과 9월, 두 차례를 기록 하고 있다.
현덕 2년 5월에는 칙액사원(勅額寺院), 곧 왕실에서 인정한 사원 만을 허용하고, 개인적으로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출가할 때 조부모, 부모, 숙부의 허락을 받도록 했으며, 수계의식은 5개 도시 의 계단에서만 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5개 도시는 동경(東京)의 개 봉부, 서경(西京)의 하남부, 대명부(大名府: 魏州), 경조부(京兆府: 長安), 청주(淸州)이다. 그리고 사신행(捨身行: 자신의 재산을 모두 바치거나 팔을 불태우는 행위 등)과 같은 백성을 미혹시키는 종교 의식을 금지하도록 하였고, 매년 승려에 관한 장부를 만들어서 관 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파괴되지 않고 남은 사원이 2,694개이고, 여기에 속한 비구 42,444명, 비구니 18,756명을 용인하였다. 파괴된 사원은 30,336개에 달하였고, 비구와 비구니 수십만 명이 강제로 환속하였다.
현덕 2년(955) 9월에는 백성이 동기(銅器)를 소유하는 것을 금지 하고, 이것을 강제적으로 사들여서 동전을 만들고, 동기를 5근 이상 소유할 경우에는 사형에 처할 것을 명하였다. 동(銅)으로 만든 불 상이나 불구(佛具)도 모두 동전으로 만든다고 선포하였다. 실제로 이렇게 회수된 동은 주원통보(周元通寶)라는 동전을 제작하는 데 사용되었고, 새롭게 편성된 금군(禁軍)에 속하는 병사의 급여로 사 용되었다. ‘금군’은 일종의 용병집단으로 식료와 음식 이외에 동전 을 봉급으로 받았다. 이는 당나라 시대 다음인 오대(五代)의 시대 부터 시작된 것이다.
또 세종은 자신이 내린 폐불의 명령[廢佛令]을 어겼을 경우에는 그것을 지키지 않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의 스승, 소속 사찰, 관할 담당의 관리까지도 처벌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승려의 경우 에는 형벌을 치른 뒤에 환속시키고, 사원의 경우는 파괴하도록 하 였다. 세종은 불상을 회수해서 동전을 만드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 게 여기는 신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卿)들은 불상을 훼손한다고 의심하지 말라. 부처는 선(善)한 도리를 가지고 사람을 교화하는 존재이니, 진실로 선(善)에다 뜻을 두면, 이것이 부처를 섬기는 것이다. 저 구리[銅]로 만든 모양이 어 찌 부처이겠는가? 또 내가 듣기로는 부처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존 재라고 하니, [불교 신도라면] 오히려 머리나 눈을 버려서라도 보시 해야 할 것이며, 만약 짐의 몸으로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면, 역시 아까워할 것이 아니다.”
이러한 내용은 후주 세종이 폐불에 관한 명령을 내렸지만, 이는 참된 불교의 정신을 손상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5) 송나라 시대와 그 이후 공명 도첩의 판매
앞에서 중국불교사에서 4차례 일어난 불교탄압 사건, 곧 폐불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송나라 시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접근방식이 나타난다. 그것은 송나라 황실에서 재정위기에 닥쳐서 공명 도첩 (空名 度牒)과 ‘자의대사(紫衣大師)’라는 호칭을 판매한 것이다.
도첩은 득도한 사람 중에서 경전 시험에 통과하면 부여하는 자격 증이었고, 승려는 도첩을 받으면 성인에게 부과되는 모든 세금과 노역을 면제받았다. 이 때문에 도첩은 상당한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도첩은 그 사람이 정식으로 득도한 사람이고 그 로 인해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명 등이 없는 도첩, 곧 공명첩(空名牒)을 살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도첩을 소유한 사람은 더 이상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칠 필요가 없었다. 부 유한 사람들은 여러 개의 도첩을 사기도 하였다. 그것은 승려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도첩은 일종의 ‘국 채’처럼 재산의 형태로 소유되기도 하였다. 또한 가격만 맞으면 다시 팔 수도 있었다.
공명 도첩이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 신종 때(1067년)부터 라고 한다. 공명 도첩은 해마다 증가해서 일 년에 1만 개로 한정하 였는데, 이미 다 팔려서 이듬해 몫까지 매출하는 일도 있었다. 휘종 때는 일 년에 3만 개 이상을 팔기도 하였다. 남송의 시대에는 공명 도첩을 판매하는 일이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 년에 5만~6만 개를 팔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승려가 증가하고 세금을 납 부하는 사람이 줄어들자, 고종은 소흥 12년(1142)부터 20년 동안 공명첩을 판매하는 일을 중지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 후 공명 도첩 판매는 다시 늘어났다.
공명첩의 가격은 신종 때는 130관이었으나, 때에 따라 올라가거 나 내려가기도 하였다. 휘종 무렵부터는 대량으로 공명첩이 발급 되었으므로 민간에서 판매하는 가격은 90관부터 100관까지 낮아졌 다. 남송 초기에는 다시 200관부터 500관으로 가격이 올랐다. 그러 다가 차츰 가격이 올라가서 700관~800관으로 시세가 형성되었고, 영종의 가정 1년(1208)에는 1,200관이 되었다. 이때에는 공명 도첩 이 완전히 화폐처럼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공명 도첩을 발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방관리가 재정의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 면, 긴급할 때와 보통의 때를 가리지 않고 공고를 내어 민간에게 도첩을 판매하거나, 때로는 강제로 판매해서 일시적으로 재정에 충당하였다.
또한 공명 도첩을 판매하면서부터 자의대사(紫衣大師)의 호칭도 팔기 시작하였다. 가격은 공명첩 가격보다 낮았는데 그것은 고객이 주로 승려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1130년에는 두 글자가 더 붙은 칭호, 곧 두 글자 사호(師號)는 100관 정도이고 네 글자가 더 붙은 칭호, 곧 네 글자 ‘사호’는 200관 정도였다. 1129년에는 ‘자의대사’ 호칭이 5천여 개가 팔린 것으로 집계되었다. ‘자의대사’라는 호칭 을 부여하는 관습은 당나라 측천무후 때부터 시작되었다. 측천무후 는 총애하는 승려 회의(懷義)에게 이 칭호를 내렸다. 이 칭호를 받 은 사람은 자색(紫色) 가사를 입을 수 있었는데, ‘자색’은 고위직 관리만 사용할 수 있는 색깔이었다. 이 자색 가사는 공식적인 가사와 다른 색깔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승려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들이 계속해서 명예로운 호칭을 부여하면서 ‘자의대사’ 는 국가가 승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예가 되었다. 따라서 세속적 은총과 명예를 갈망하는 승려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명나라 시대에도 황실에서는 공명 도첩을 판매하였다. 헌종 성화 20년(1414) 10월에 산서성, 섬서성에 기근이 발생하였는데, 이 기 근을 구제하기 위해 공명 도첩 1만 개를 제작해서 개당 좁쌀 10석 에 팔도록 하여, 판매 비용으로 기근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 였다. 세종 가정 18년(1539)에는 공명 도첩이 은 10냥에 판매되었고, 목종의 시대에는 은 5냥에 판매되었다.
6) 공명 도첩 등의 판매에 관한 불교사적 의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불교사에서는 4차례 폐불 사건이 있 었는데,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경제적 요인이었다. 사원과 승려 숫 자의 증가로 인해 사원경제가 팽창하는 것이 국가 재정에 문제가 되자, 부국강병책의 하나로 폐불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송나라 시대 이후부터는 이러한 폐불 사건이 본격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는 데, 그것은 공명 도첩 등을 판매해서 국가의 재정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공명 도첩 등을 판매하는 것은 유연한 형식의 폐불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공연히 시끄럽게 불교를 탄압한다는 인상을 주고, 그래서 불교 신도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조용히 국가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앞에 소개한 4차례의 폐불 사건보다 더 진화된 방식이다. 동시에 이는 중국 불교사의 전개에서 불교교 단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국가경제에 방해되는 쪽이었다는 것을 말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4. 현대중국의 불교 상황
현대중국의 불교 상황에 대해서는 두 단계로 나누어서 접근한다. 먼저 중화민국 시기의 불교계 상황을 간단히 알아보고, 그다음으로 1949년 이후의 현대중국의 불교계 상황에 대해 살펴본다.
1) 중화민국 시기의 불교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서 1912년에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 민국이 성립되었는데, 이 시기 불교계의 중요과제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근대식 교육을 도입하기 위해 사찰의 재산을 활용하 자고 정부에서 제안하였고, 이러한 제안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사찰 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모색한 것이다.
(1) 묘산흥학
묘산흥학(廟産興學)은 사찰과 도관의 재산을 활용해서 새로운 교 육 활동에 힘쓰자는 주장이다. 1898년에 호광(湖廣) 총독 장지동 (張之洞, 1837~1909)이 국정 혁신을 위해서는 교육개혁이 제일의 조건이라고 하며, 중국의 학문을 체(體)로 하고 서양의 학문을 용 (用)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신교육을 빨리 실시하기 위해서는 이미 부진에 빠져 있는 불교의 사원과 도교의 도관의 건물과 토지를 전용(轉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묘산 흥학 운동은 사원과 도관의 재산 10분의 7을 학교 교육에 쓰자는 것이다.
1930년에 정부는 감독사묘조령(監督寺廟條令)을 만들어서 사묘 (寺廟)는 소유 재산의 크기에 따라 초등교육과 도서관과 구제원(고 아원, 양노원, 보육소)과 빈민공창(貧民工廠)과 합작사(合作社: 협 동조합) 등을 경영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처럼 사묘의 재산을 전용 하자는 묘산흥학은 공공연하게 행해져서 1927년에 군벌 풍옥상( 馮玉祥)이 미신을 타도한다는 이유로 하남성의 백마사(白馬寺), 소림 사(小林寺), 상국사(相國寺) 등을 몰수하고, 승려 30만 명을 환속하 도록 하였다. 1930년에는 중앙대학 교수 태상추(邰爽秋) 등이 승벌 (僧閥)을 타도하고, 승려의 무리를 해산하며, 승가의 재산[廟産]을 징발해서 교육을 진흥시킬 것을 주장하고, 묘산흥학촉진회(廟産興學促進會)를 창립하였다. 이것도 전체적 관점에서 본다면, 일종의 폐불 사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 묘산흥학에 대한 불교계의 움직임
1912년에 천룡사(天龍寺) 경안(敬安, 1851~1912)은 상해에 중화 불교총회(中華佛敎總會)를 창설하고 사찰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경안은 1912년 결의문을 가지고 북경에 가서 관계자 와 교섭하던 중에 분사(憤死)하였다.
1924년에는 태허(太虛, 1889~1946) 등이 중국불교연합회(中國佛敎聯合會)를 세웠다. 그리고 1924년 7월에 세계불교연합회가 여산(廬山)에서 열렸다. 이는 태허가 그전부터 주장해 오던 것이다. 1929년에는 상해에서 중국불교회 제1차 대회가 열렸다. 1935년에 는 국민당의 지도 아래 중국불교회는 정당 활동에 준하는 모임으로 변화하였다. 그래서 불교계도 정치 문제와 관련을 맺게 되고 승려 의 선거권과 승려의 군사훈련 등의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이에 대 한 논쟁이 벌어졌다. 또한 승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도 검토하 게 되었다.
한편, 급진개혁파라고 할 수 있는 태허에 대해서 온건보수파인 원영(圓瑛) 등이 반대하였다. 따라서 태허는 중국불교연합회에서 탈퇴하고 남경에서 중국불학회(中國佛學會)를 세웠다.
2) 현대 중국의 불교
여기서는 현대 중국의 불교에 대해 3가지 항목으로 접근한다. 첫 째 1949년 이후 불교계의 변화과정을 간단히 서술하고, 둘째 오늘 날 시진핑 체제의 불교 정책에 대해 알아보고, 셋째 오늘날의 불학 원의 현황을 간단히 살펴본다.
(1) 현대 중국 불교계의 변화
①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였다. 이때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중국 정부에서는 신앙의 자유 정책을 실행하였 고, 불교도 어느 정도 보호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 정부가 불교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이유로서 다음의 3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중국의 역사에서 볼 때, 불교는 중국이 세계에 과시할 만한 문화의 하나라는 점이다. 중국인은 당나라 시대의 현장(玄奘, 600~664)과 의정(義淨, 635~713) 등 뛰어난 불교학자가 많음을 민 족적 긍지로 삼고 있다. 또 전국에 퍼져 있는 많은 건축물을 보호하 고 수리하는 데 노력했다.
둘째, 불교가 일본과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대부분의 아시 아 국가와 연결할 수 있는 정신적인 매개체라는 점이다. 중국인은 아시아의 여러 민족을 융화하는 데 노력하고 있고, 여러 민족의 공 통된 이념 가운데 하나가 불교라는 점을 중국 정부는 잘 알고 있다. 셋째, 중화인민공화국의 도덕 기준이 인민을 위해 힘쓴다는 것인 데, 이는 불교와 일치하는 점이 있다. 불교에서도 “국토를 장엄해서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한다[莊嚴國土 利樂有情]”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 중국에서는 1950년대 후반,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에 종교와 신앙에 대한 자유가 왜곡되고 짓밟혀 불교계의 여러 지도적 인물과 일반 신도들까지도 박해를 받았다. 사원은 물론이고, 불교와 관련 되는 물품과 서적들까지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필자는 문화대혁명 사건도 ‘중국불교사’의 흐름에서는 일종의 폐불 사건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왕조시대에서는 4차례 폐불 사건을 경험하면서 공명 도첩 등을 판매하는 방법으로 국가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현대 중국에서는 마르 크스 사상에 기초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③ 그러다가 문화대혁명 후 1978년 11차 삼중전회(三中全會)가 열린 이후부터는 무시되었던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 신도들은 신 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파괴되었던 사원들도 점차 복구되었다. 중 국불교협회는 중국의 여러 민족의 불교 신도가 연합해서 조직한 단 체이다. 이 단체의 제5차 전국대표회의(1987년 3월)에서 다음과 같 은 새로운 규칙을 통과시켰다. “인민정부가 종교와 신앙에 대한 자 유 정책을 관철할 수 있도록 협조한다. 각 민족의 불교단체는 세속 에서 실천불교가 갖는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사상을 제창하고, 불교 의 훌륭한 전통을 발양한다. 사회주의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 건설 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국의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고 세계평화 통일을 유지하고 보호한다.” 현재 중국대륙에서 불교의 교세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2) 현대 중국의 불교 정책
시진핑 체제에서 불교의 중국화를 위해서 5개년계획(2019~2023) 을 세웠는데, 그 주요 내용은 8대 중점사업이다. 그런데 그 내용에 는 중국공산당과 정부에서는 불교가 사회주의 정치의 영역에서 벗 어나지 않도록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두 가지 항목에 대해 살펴본다.
① 정치사상의 학습시스템의 구축이다. 현재 사찰 단위에서 추진되는 학습시스템에 다음의 두 가지 내용이 주목된다. 그것은 ‘4가지 진입 활동’과 ‘종교정책과 법규의 학습의 달’이다.
첫째, 4가지 진입활동[四進活動]은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는 사찰에서 오성홍기(五星紅旗)를 게양하는 것, 헌법과 법률과 법규를 학습하는 것,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을 선전하고 학습하는 것, 우수한 중화의 전통을 계발하는 것이다. 현재 사찰에서는 대중 이 참여한 가운데 오성홍기를 게양하고 하기하는 의식이 행해지고 있다. 그리고 사찰의 벽면에 공산당과 정부의 통지문과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의 선전물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또한 불교의 종교활 동을 전통적 윤리교육의 학습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둘째, ‘종교정책과 법규의 학습의 달’의 활동이다. 이 활동에서는 중국의 민법과 헌법과 공산당 정책과 시진핑 사상 등에 대한 학습 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2018년 항저우시 영은사(靈隱寺) ‘종교정 책과 법규의 학습의 달’ 활동에서는 변호사를 초청해서 ‘미성년자 보호법’에 대한 학습을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정부의 통지문에 대 한 교육, 곧 사찰 등에서 고아나 버려진 영아(嬰兒)를 받아들여서 종교인으로 양성하는 일이 불법(不法)이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② 불교사상을 사회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사 회주의 핵심 가치관에 부합하는 불교사상을 발굴하고 그것을 새롭 게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중국화’로 이어진다고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주장한다.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에는 국가 차원의 가치 지향(부강, 민주, 문명, 화해), 사회 차원의 가치이념(자유, 평등, 공정, 법치), 공민 차원의 가치 규범(애국, 敬業, 誠信, 友善) 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 말하는 선행(善行) 사상, 곧 모든 선(善)은 받들어 실천하고, 모든 악(惡)을 행하지 말라는 것[衆善奉行, 諸惡莫作]이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인 화해 사회를 구현하는 일 에 정신적 자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중국 근대에 주장된 인간불교의 전통에 따 르는 것이라고 중국 불교학계에서는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간불교 의 제창자로서 인순(印順) 법사는 배제하고 조박초(趙樸初)를 내세운다.
3) 현대중국의 불학원 현황
불학원(佛學院)은 중국 불교계의 대표적 교육기관이다. 교육방 식은 전통총림(傳統叢林)과 달리 일반 학교의 방식을 취하고 있지 만, 그 교육과목의 내용은 불학(佛學)을 중심으로 한다. 현재 중국 대륙에는 이러한 불학원이 60개소 이상이 있다. 그 가운데 ‘중국국 가종교사무국’의 인준을 거치고 정식으로 설립된 학원은 40개소이 다. 그 가운데 중국불교에 관한 것이 32개소이고, 티베트불교에 관 한 것이 7개소이며, 남방불교에 관한 것이 1개소이다. 그리고 앞에 서 중국불교에 관한 불학원이 32개소라고 하였는데, 그 가운데 27 개소는 고등(高等)불학원이고, 5개소는 중등(中等)불학원이다. 그 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2016년부터 매년 전국불교원교연석회 (全國佛敎院校聯席會)를 열고 있으며, 1년마다 하나의 주제를 정해 서 토론과 교류를 해오고 있다.
이러한 불학원에는 4,000여 명의 학인이 재학하고 있다. 한 통계 에 따르면 2015년 7월까지 신중국불교원교(新中國佛敎院校)에서는 이미 1만여 명의 불교 승가 인재를 배출했다고 한다.
5. 중국불교의 위기 상황이 시사하는 교훈과 대안 모색
이 글에서는 먼저 중국불교의 전개를 5단계로 나누어 보았고, 그 다음으로 중국불교의 위기 상황으로 4차례의 폐불과 공명(空名)의 도첩 등의 발행을 살펴보았으며, 그다음으로 현대 중국의 불교 상 황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러면, 중국불교사에서 4차례 폐불과 공명 도첩 등의 발행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을 경제적 차원에 서 바라본다면, 불교사원이 늘어나고 승려의 숫자가 증가하며, 사 원의 경제력이 팽창하는 것이 국가재정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 히려 방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국가(황실)에서는 부국강병 책의 하나로서 불교의 탄압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거시 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불교의 탄압이 실제로 효과가 작다고 판 단하고, 송나라 시대 이후로는 공명 도첩을 발행하는 것으로 바뀌 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 인가? 불교라는 종교가 철학이나 사상, 그리고 수행의 측면에서 뛰 어난 측면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기에 더해서 불교사 원과 승려의 경제적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다. 다시 말하자면 불교의 철학, 사상, 수행이 아무리 뛰어난 것이 라고 해도, 경제적 측면에서 국가와 사회에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 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이러한 측면에 관심을 갖고 대안을 고민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대안은 결국 불교사원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이고, 승 려 개인이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존재여야 할 것이며, 나아가 불교사원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단체로서 자리매김해야 할 것으로 요약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다만 필자의 환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대만불 교에서는 실제로 일정 부분 실현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는 대만불교의 발전을 이끈 신흥 4대종문 가운데 불광산사(佛光山寺)와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 자제종)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불광산사는 ‘포교’에 강점이 있고, 자제공덕회는 ‘봉사활동’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불광산사의 경제관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혜 로써 금전을 대체한다. 보시로 들어온 돈은 모두 공개하며 오직 불 사(佛事)에만 사용한다. 둘째, 권한이 있는 사람은 금전을 관리할 수 없고 금전을 관리하는 사람은 권한이 없다. 금전과 권한을 분리하는 것이 불광산사의 재무관리의 준칙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교사원 경영의 투명성 확보와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불광산사에서는 절을 맡고 싶거나 주지가 되고 싶은 사람 이 많지 않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런 직책을 맡은 사람에게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사원에 돈이 있으면 쟁론이 있기 마련이고 번거롭게 된다. 돈이 없으면 너무나도 좋다. 이 사람 도 오고 저 사람도 온다. 모두가 동참할 수 있고, 모두가 함께 돈을 조달할 방법을 생각한다. 따라서 사원이 너무 많은 재산을 축적해 서는 안 된다.
불광산사도 모두 고생하며 함께 이루어낸 것이다. 절이 완성된 뒤에도 출판사, 잡지사, 불학원, 불광연(佛光緣)미술관 외에도, 서 래(西來)대학, 남화(南華)대학, 불광(佛光)대학, 남천(南天)대학 등 의 불교대학교를 건립하였고, 러지엔위성TV(人間衛視) 설립, 〈인 간복보(人間福報)〉 창간 등 여러 사업을 실시하였다. 불광산사에서 는 재산을 축적하지도 않고 돈을 모으지도 않는다. 모두가 협력해 서 일하며, 여러 종류의 홍법(弘法)사업과 중생의 복지사업에 모든 돈을 사용한다.
또 불광산사를 이끈 성운(星雲, 1927~2023)은 자력갱생을 강조하였다. 비구는 적어도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교사가 될 자격을 갖 추거나 의술을 행하기 위해 남을 진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비구니라면 간호 업무에 종사하거나, 자선활동과 유아교육에 종사할 수 있어야 한다. 또는 편집 일이나 글 쓰는 일에 종사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비구와 비구니가 시주에 기대어 생활해서는 안 되 며, 불교에 기대어서 생활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나 아가 불교사원을 안식처로 삼는 것은 더욱 안 된다. 현대의 불교도 는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힘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성운은 불교도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힘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자제공덕회’의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자제공덕회’의 주요 사 업은 크게 8개 영역으로 전개되는데, 그것은 자선, 의료, 교육, 문 화, 국제구호, 골수기증, 환경보전, 지역사회 사업 등이다. 여기서 는 자선사업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자제공덕회’의 자선사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1999년에 시작된 ‘희망공사’를 거론할 수 있다. 1999년 9월 21일 대만 중부지역에 리 히터 7.3 규모의 강한 지진이 발생해서 2,318명이 죽었고 사회기반 시설의 상당수가 무너졌다. 그리고 지진이 발생한 중심 지역에는 구조대원조차 접근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여러 명의 자제공덕회 회원이 구조대원보다 먼저 도착해서 신속하게 구제 활동을 펼쳤다. ‘푸른 옷의 천사들’은 자제공덕회원을 일컫는 말이 되었는데, 이는 1999년 지진이 발생한 현지의 언론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제공덕회’에서는 대만 화폐로 80억 원(한화 약 3,200억원)을 모금해서 재난 지역에 40개 학교를 세워서 기증하겠다는 ‘희 망공사’를 발표하였고, 2003년 4월에 발표한 계획을 모두 완수하였 다. 또한 지진의 피해를 입은 곳에 자제공덕회 2만여 명의 자원봉 사자가 참여하였으며, 대만 화폐로 1억 6천만 원의 기금을 조성해 서 1,630채의 임시가옥을 건설하였다.
현재 ‘자제공덕회’의 자선활동은 대만 내 빈곤층 돕기, 어려운 사 람 돕기, 이웃에 관심 두기, 국제 이재민 구하기 등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자선사업의 국제화를 과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불교사원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단체가 되어야 한 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대만불교의 ‘불광산사’와 ‘자제공덕회’의 활동이 모두 완벽 하다는 것은 아니고, 비판의 눈길을 던질 수 있는 여지도 있을 것이 다. 그렇지만 이 정도의 사례라도 한국불교의 약진을 꿈꾸는 사람 에게는 가슴 설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도약을 위한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의 길은 사원 경영의 투명성 확보와 사회 봉사활동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
이병욱 lbw33@hanmail.net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고려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졸업(석사, 박사). 주요 논문 으로 〈천태지의 철학사상논구〉 등과 저서로 《고려 시대의 불교사상》 《인도철학 사》 《한국불교사상의 전개》 《불교사회사상의 이해》 등이 있다. 현재 중앙승가대고려대 강사이며 보조사상연구원 원장이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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