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서암스님 행장

수선님 2024. 9. 22. 14:43

서암스님 행장

 

대한불교조계종 제8대 종정을 역임하셨으며, 종립선원인 봉암사 조실인 서암 큰스님께서

2003년 3월 29일 오전 7시 50분경 세수 87세(1917년생),법납 68년으로

봉암사 염화실(염화실)에서 입적하셨다.

 

열반송涅槃頌

 

스님께서 입적하시고 나서 사람들이 스님의 열반송을 물으면 어떻게 할까요?

"나는 그런 거 없다."

그래도 한 평생 사시고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

"할 말 없다."

그래도 누가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달리 할 말이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오도송悟道頌

 

계룡산 나한굴에서 나고 죽는 것이 없는 것을 깨달으셨다고 하는데 오도송을 읊으셨습니까?

"오도송인지 육도송인지 그런 거 없어."

 

행장(略譜)

 

西紀1917년 10월8일 경북 안동군 녹전면 구송리에서 엄부(嚴父) 송동식님과 자모(慈母) 신동경님의 5男1女중 三男으로 탄생. 본명은 홍근

부친의 독립항쟁으로 참담한 유랑생활 도중에서도 마을 서당과 단양의 대강보통학교, 예천의 대창학원 등에서 한학과 신학문을 수학, 그 영민함으로 '천재소년'으로 불리워짐.

 

1932년(16세) 경북 예천 서악사에 출가, 3년간 머슴과 같은 고된 행자생활.

1935년(19세) 경북 문경 김룡사에서 화산스님을 은사로, 낙순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계

법명은 홍근(鴻根). 수계후 김룡사 강원에서 수학

1937년(21세) 김룡사에서 금오선사를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 대덕법계를 품수.

법호를 서암(西庵)으로 받음.

1938년(22세) 김룡사 강원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일본대 종교학과 입학.

1940년(24세) 당시 사형선고와 같은 폐결핵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귀국.

1941년(25세) '세상에서의 마지막 봉사'라는 생각으로 각혈을 하면서도 대창학원에서 학생 들을 지도.

1942년(26세) 죽음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헛되다고 돌이키시고,

'이제부터 생사의 근본도리를 놓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시고 김룡사 선원에 안거.

1943년(27세) 북쪽으로 만행중 철원 심원사에서 1년간 화엄경을 강의.

1944년(28세) 금강산 마가연에서 하안거. 대승사 바위굴에서 성철스님과 함께 동안거.

1945년(29세) 대승사에서 청담,성철스님과 하안거.

해방을 맞아 예천의 대승사 포교당에서 징병·징용당하여 죽음의 땅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는 보살행을 실천함과 동시에 불교청년운동을 전개.

1946년(30세) 계룡산 라한굴에서 단식하며 용맹정진 도중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한갓 공허한 그림자처럼 사라짐. 덕숭산 정혜사 만공스님 회상에서 안거

1947년(31세) 가야산 해인사에서 효봉스님 회상에서 안거. 망월사에서 금오스님을 모시고 동안거

1948년(32세) 지리산 칠불암에서 금오스님를 모시고 '공부하다 죽어도 좋다'는 서약서를 쓰고

도천스님등과 함께 결사정진.

1949년(33세) 광양 상백운암, 보길도 남은사에서 금오스님을 모시고 정진.

계룡산 사자암에서 금오스님을 모시고 정진. 계룡산에 정진굴을 짓고 동안거

1950년(34세) 계룡산 정진굴에서 하안거. 상원사 한암스님 회상에서 동안거

1951년(35세) 계룡산 정진굴에서 하안거. 속리산 복천암에서 동안거.

1952년(36세) 계룡산 정진굴에서 하안거. 청화산 원적사에서 동안거.

1953년(37세) 청화산 원적사에서 안거.

1954년(38세) 청화산 원적사에서 하안거, 속리산 중사자암에서 동안거.

1955년(39세) 청화산 원적사에서 안거.

1956년(40세) 청화산 원적사에서 안거.

1957년(41세) 청화산 원적사에서 안거.

1958년(42세) 청화산 원적사에서 하안거.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동안거.

1959년(43세) 함창포교당에서 안거.

1960년(44세) 동화사 내원암에서 하안거. 상주 청계산에 토굴을 짓고 동안거.

1961년(45세) 청계산 토굴에서 안거.

1962년(46세) 태백산 홍제암에서 안거.

1963년(47세) 김룡사 금선대·원적사·봉암사를 오가며 정진.

1964년(48세) 김룡사 금선대·원적사·봉암사를 오가며 정진.

1965년(49세) 태백산 각화사에서 금오스님을 모시고 안거.

1966년(50세)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서 안거.

1967년(51세) 김룡사 금선대에서 안거.

1968년(52세) 금정산 범어사 내원암에서 안거, 제주도 천왕사에서 동안거.

1969년(53세) 김룡사 금선대·상주 갑장사에서 안거.

1970년(54세) 원적사에 다시 주석. 구산선문 희양산 봉암사 조실로 추대되시었으나 고사하시고

선덕소임을 자청하여 원적사를 오가시다가,

1979년 이후부터 조실로 계시면서 승풍을 바로 잡으시며 낙후된 가람을 새롭게 중창,

조계종 종립선원으로 제정하여 선풍을 드날리며 납자들을 제접하심.

1975년(59세)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2개월 동안역임.

1991년(75세)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1993년(77세) 제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

1994년(78세) 종정직과 봉암사 조실을 사임하시고 거제도, 삼천포, 팔공산 등지를 거쳐서

태백산 자락에 가건물을 지어 무위정사라 이름하고 무위자적하심.

2001년(85세) 봉암사 대중의 간청에 의하여 8년 만에 봉암사 염화실로 다시 돌아와 한거하 심.

2003년(87세) 봉암사 염화실에서 3월 29일 오전 7시 50분 무렵에 열반.

나주 다보사에서 안거

백양사에서 안거

대승사 묘적암에서 안거

오대산 상원사에서 안거

지리산 묘향대에서 안거

 

스님의 자취

스님의 성은 송씨이시며, 이름은 홍근(鴻根)이시다.

스님의 모친께서 '고목에서 꽃이 피고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고 거북이 나타나는' 태몽을 꾸시고는 살고 계시던 풍기 땅에서 친정인 안동 구송리로 옮기시니, 거기에서 1917년 10월 8일 부친 송동식님과 모친 신동경님 사이에서 5남 1녀 중 셋째로 탄생하셨다.

 

* 유년 *

절개가 굳은 의인이셨던 스님의 부친께서 일제치하에서 풍기 일원의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함에 따라 가족은 삶의 터전을 잃고 안동 단양 예천 문경 등지를 떠돌게 되었으니, 스님께서는 추위와 굶주림의 참담한 유랑생활로 유년시절을 보내시었다.

"많이 배워라. 기상을 죽이지 마라"는 부친의 가르침과, 헌신적인 모친의 희생을 입고서 동네 서당과 단양의 대강보통학교, 예천의 대창학원 등에서 품팔이를 하시면서 한학과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인간의 삶과 진실이나 세계와 우주의 질서, 그 비밀에 접근하는 열쇠를 발견한 것처럼 스님께서는 책을 탐독했고, 틈만 나면 생각에 젖어 들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작가들의 책들을 즐겨 읽으셨다고 한다.

 

* 출가 *

타고난 영민함과 박학(博學), 깊은 사색(思索)을 지닌 스님께서는 인생에 대한 진지한 논쟁을 여러 사람들과 즐기셨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필적할 만한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책이나 선생들로부터 들은 것 말고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너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는 예천 서악사의 화산(華山) 노장님의 말씀에 최초의 부끄러움을 배우고 "제 인연은 스님에게 있습니다."는 말과 함께 머슴과 같은 행자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16세(1932년)의 일이다.

고된 생활 가운데에서도 당시 대 강백이셨던 화산스님께 초발심자경문, 치문, 의식 등을 틈틈이 배우며 출가 수행인으로서의 기반을 다지셨다.

 

* 수계 *

은사되실 화산스님이 3년이라는 긴 행자기간을 지내도 사미계를 주실 생각이 없자, 당시 경허(鏡虛)스님과 교분이 있던 장진사라는 분의 간청에 의해 비로소 본사인 김룡사에서 19세(1935년)의 나이로 낙순 화상을 계사로 모시고 사미계를 받게 되었다.

21세(1937년)에 김룡사 강원생활 중 금오(金烏)스님을 모시고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고, 그해 대덕법계를 품수하게 되었다.

김룡사 강원에서 경을 보실 때 스님의 영민함은 동학(同學) 가운데 출중하시어 가히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이 스님께 해당될 것이다.

 

* 유학과 귀국 *

목마른 학문의 열정을 적셔주기 위하여 결심하게 된 것이 일본 유학이었다. 그래서 강원에서 내전(內典)을 보는 동시에 유학준비를 독학으로 하여 21세(1937년)에 종비장학생의 자격으로 가난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선진 학문을 접하면서 드넓어지는 안목의 변화에 하루하루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힘든 노동과 배고픔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신도 모르게 육체는 깊은 병을 만들어 가고 있었고, 결국 당시 사형선고와 같은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24세(1940년)에 귀국하여, 다음해에는 '세상에서의 마지막 봉사'라는 생각으로 각혈을 하면서도 모교인 대창학원에서 학생들을 1년 동안 지도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한부의 인생이다'고 생각하며 남은 정열을 다 쏟아 부었으나 죽음은 쉽게 오지 않았다.

참으로 인간 생명을 물리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음을 절감했다.

'생사의 근본 도리!' 이것이 저절로 스님에게는 화두가 되어 있었다.

 

* 수행 *

죽음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헛되다고 돌이키시고 26세(1942년)에 스님은 김룡사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에 들어갔다.

여름과 겨울이 지나가면서 마음은 맑아지고 몸은 가벼워졌다.

이듬해 봄이 되어 북쪽으로 만행하시는 도중에 철원 심원사에서 스님의 학식을 흠모하는 여러 스님들의 간청에 못 이겨 화엄경을 1년간 강의하셨다.

28세(1944년)에는 금강산 마하연과 신계사에서 여름을 정진하시며 지나니, 어느덧 몸에 있던 병마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가을이 되자 다시 길을 떠나 묘향산 백두산 등지를 거쳐 다시 남으로 내려와 문경 대승사의 천연동굴에서 성철(性徹)스님과 함께 용맹정진 하셨다.

29세(1945년)에는, 광복이 되자 스님은 산에서 내려와 예천포교당에 머무시며 징병 징용당하여 죽음의 땅에서 돌아오는 동포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는 보살행을 실천함과 동시에 불교청년운동을 전개하시기도 하셨다.

 

* 깨달음 *

이듬해, 스님은 훌쩍 계룡산 골짜기에 있는 '나한굴(羅漢窟)'이라는 천연동굴로 들어가셨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살아서 이 바위굴에서 나가지 않으리라!' 목숨을 건 정진으로 머리는 풀어 헤쳐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갔으나, 스님의 의식은 오히려 맑아졌다. 나중에는 잠도 잊고 먹는 것도 잊은 채 선정삼매(禪定三昧)의 날들을 보내시다가, 한순간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본무생사(本無生死)라!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한갓 공허한 그림자처럼 사라진 것이다.

30세(1946년) 때의 일이었다.

 

* 계속되는 정진 *

계룡산에서 내려온 스님은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셨다.

만공(滿空)스님의 회상의 정혜사와 한암(漢岩)스님 회상의 상원사, 그리고 해인사 망월사 속리산 복천암 계룡산 정진굴 대승사 묘적암 등지에서 정진을 계속 하셨다.

32세(1948년)부터 34세(1950년)까지의 금오(金烏)스님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지리산 칠불암과 광양 상백운암 보길도 남은암 계룡산 사자암에서 금오스님을 계속 모시고 정진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칠불암에서의 '죽기 살기식'의 정진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일화로 남는다.

 

* 원적사 이후 *

36세(1952년) 이후부터는 문경군 농암면에 있는 원적사에 주로 주석하시게 되었다.

스님의 맹렬한 정진력과 깊은 지혜, 통쾌한 변재와 절도 있는 생활은 여러 수좌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스님의 주변에는 늘 스님의 도를 흠모하는 수좌들이 함께했다.

낮에는 대중들과 함께 정진하시고, 밤이 되면 혼자 산으로 올라가서 새벽예불 시간이 되어서야 내려오셨다. 그렇게 원적사에서도 스님의 정진은 칼날 같았다.

홀연히 스님은 원적사에서 자취를 감추시기도 했는데, 대중들은 뒤늦게야 스님께서 다른 곳에서 정진하시고 온 것을 알게 되었다.

범어사 동화사 함창포교당 태백산 홍제암 각화사 동암 상주 청계산 토굴 나주 다보사 백양사 지리산 묘향대 천축사 무문관 통도사 극락암 제주 천왕사 김룡사 금선대 상주 갑장사 등지에서도 한결같은 스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봉암사 이후 *

54세(1970년)에 스님은 봉암사 조실(祖室)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시고 선덕(禪德) 소임을 자청하여 원적사를 오고 가셨다.

당시 봉암사 대중들이 선방 벽에 붙어있는 용상방(龍象芳)에 스님의 법호를 조실자리에 붙이면 스님께서 떼어내고, 다시 대중들이 붙이면 스님이 다시 떼어내곤 하셨다.

59세(1975년)에는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 어려운 종단사태를 수습하고 2개월 만에 사퇴하셨다. 62세(1978년) 이후부터는 자연스럽게 봉암사 조실로 계시면서, 헤이해진 승풍(僧風)을 바로 잡으시고 낙후된 가람을 새롭게 중창하셨다.

한편 수행환경을 위해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산문(山門)을 일반인에게 통제하여, 오늘날 '모든 수좌들의 고향'으로서의 봉암사를 있게끔 하셨다.

75세(1991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맡아 성철스님을 종정으로 재추대하여 종단의 중심을 잡은 후에 미련 없이 산으로 돌아오셨다.

77세(1993년)에는 제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시었다.

그러나 스님은 이듬해에 종정직과 함께 봉암사 조실까지 사임하시고, 거제도 삼천포 팔공산 등지를 거쳐 태백산 자락에 가건물을 지어 '무위정사(無爲精舍)'라 이름하고 무위자적 하셨다.

85세(2001년)에 봉암사 대중들의 간청에 의하여 8년 만에 봉암사 염화실로 돌아와 한거(閑居)하고 계신다.

 

87세(2003년) 3월 29일 오전 7시 50분 무렵 봉암사 염화실에서 열반하셨다.

 

 

 

 

 

 

 

 

 

서암스님 행장

서암스님 행장대한불교조계종 제8대 종정을 역임하셨으며, 종립선원인 봉암사 조실인 서암 큰스님께서 2003년 3월 29일 오전 7시 50분경 세수 87세(1917년생),법납 68년으로 봉암사 염화실(염화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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