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할 수 있는가?
중국 당나라 때 운문(雲門) 스님이
정월 초하루날 원단(元旦)의 상당(上堂)에 올라가셔서
대중들한테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대들에게 과거(過去) 지나간 달의 소식은 묻지 않고
닥쳐오는 달의 그 소식을 한마디 말해 보아라'.
지나간 달의 소식은 그대들에게 아무런 해답(解答)을 구(求)하지 않고,
앞으로 당래(當來)하는 달의 소식을 한마디 말해보아라,
그리했단 말입니다.
이 때 대중(大衆)가운데 한마디 말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쉬운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운문대사(雲門大師) 스스로 자문자답(自問自答)으로 대답했습니다.
년년시호년(年年是好年)이요, 해마다 바로 좋은 해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날마다 바로 좋은 날이라.
-중략-
그런데 운문(雲門)스님께서는 과연 날마다 좋은 날이요,
해마다 좋은 해라는 이런 말씀을
꼭 재수가 좋고 운수가 좋은 사람한테만 그렇게 했을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의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운문스님 말씀은 절대로 재수가 좋고 운수가 좋고 그런 사람들한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보편적(普遍的)인 어떤 누구한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설사 자기가 금방 아파서 내일 죽어버린다 하더라도
그 사람한테도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이 해당됩니다.
불교 팔만사천의 법문의 모든 뜻이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해마다 좋은 해 날마다 좋은날 때마다 좋은 때입니다.
이렇게 해서 항시 행복스러운 것이 부처님 법문(法門)의 대요입니다.
바꿔서 말씀 드리면 인생고(人生苦)를 몽땅 소멸 시켜서
정말로 위없는 행복(幸福)을 우리가 체험하고 맛보고
자기 이웃들도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연유(緣由)로 해서 과연 인생고가 충만한 우리 중생(衆生)들이
날마다 좋은 날이 되고 해마다 좋은 해가 될것인가?
이것은 오직 하나의 문제 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바로 보면 날마다 좋은 날이고 해마다 좋은 해고,
그러나 바로 못보면은 그때는 날마다 불행한 날입니다.
사업(事業)에 이득을 좀 보고,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하더라도 이것은 결국은 불행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은 상대적인 그런 문제는 모두가 다 그 상대이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것은 그 행복같은 것이지 참다운 행복이 못되는 것이고
결국은 인생고(人生苦)로 끝나고 만단 말입니다.
가사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합시다.
우리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노력 없이 되겠습니까. 갖은 고생을 다 한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는 또 몹쓸 일도 하겠지요.
자기 양심(良心)에 가책된 일도 하고 또는 남한테 원망(怨望)도 받고,
자기 이웃은 배고픈데 자기만 배부르게 먹으니까
그 자체가 벌써 이것이 죄(罪)란 말입니다.
따라서 부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죄나 허물 위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헛깨비나 같은 것입니다.
모래위에 쌓은 탑이나 집이나 마찬가지로 금방 허물어지고 맙니다.
좀 오래간다 하더라도 자기 생명(生命)과 더불어서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략-.
내 몸뚱아리가 우리 중생의 육안으로 본 이렇게 존재하고,
내 미운 사람이 대상적으로저렇게 존재하고,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존재하고,
또는 그렇게 욕심을 내는 감투도 존재하고, 또는 다른 물질도 존재하고,
이런 차원에서는 날마다 좋은 날이 절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고(思考)의 패턴(Pattern),
우리의 생각이 의식전환(意識轉換)을 우리가 시키지 않으면
그러한 성자(聖者)의 보편적인 말은 우리한테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분명히 사업에 실패(失敗)하면 그냥 자결도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바른 견해라 하는 것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하는 반야의 사상 밑에서
사물(事物)을 이른바 통찰해야 됩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이제 80평생을 지내시다가 열반(涅槃)이 입박했습니다.
따라서 구시나가라(拘尸那碣羅)성(城)의
사라쌍수(娑羅雙樹)나무 밑에서 열반(涅槃)드셨습니다만,
사라쌍수 나무 밑에서 나무 잎파리나 그러한 것을 깔고서
거기에 누우셔서 당신 법의(法衣)만 덮고서,
오른쪽 팔뚝을 베시고서 그곳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우리 스승은 그렇게 해서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실 때가 입박해서 이웃 나라들 한테도 공포(公布)를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시나가라 근처에 있는 비아리국의 역사(力士)들이,
비아리국에는 아주 기운이 센 역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우리가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로 가시는 길을 좀 다듬어야 되겠다.
그래서 역사들이 운력을 부쳤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조그마한 소로길을 부처님께서 이제 통과하실 길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시원스럽게 가시도록 편하게 가시도록 길을 다듬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험로에서 집체만큼 큰 바위가 가로막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역사들이 몇십명이 모여서 그 바위를 움직일려고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바위를 치워버려야 험로를 걷지 않고서 부처님께서 편한 길로 가시는데-
지금같이 포크레인도있고 하면 오직히 좋겠습니까만은-
기운이 세다해도 쉽지가 않았겠지요.
그래서 땀을 펄펄 흘리고 이제 그렇게 운력을 모두 하는데
그네들이 기운은 좀 세어서 기운을 믿고서, 부처님 법(法)을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각국의 16왕자가 다 승상하므로
부처님을 자기들도 승상하기는 하는데 부처님 법을 모른단 말입니다.
따라서 기운을 믿고서 그 아주 행패가 심했습니다.
남의 것을 윽박질러서 빼앗아 먹기도 하고
그래서 피해가 심해서
부처님께서는 내가 열반에 들기전에 저네들을 제도(濟度)해야 하겠구나.
그렇게 맘을 먹었단 마입니다. 그래가지고서 허름한 수행자(修行者) 몸으로 변신을 했습니다.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경우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根氣)에 따라서
중생을 제도할 때는 몸을 바꾸는 것을 보고 동사섭(同事攝)이라 합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우리 범부(凡夫)들이 앉아서
이말하고 저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동사섭이 아니라
도인들이 중생의 근기를 보고서 근기에 맞추어서 몸을 변신하는
그것보고 동사섭 그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와같이 허름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변신했습니다.
우리는 아함경(阿含經)이나 화엄경(華嚴經)이나 법화경(法華經)이나
기타 경론(經論)에 있는 신통자재(神通自在)하는
그런 것을 절대로 미신이라고 생각을 마십시오.
저같은 사람도 부처님 덕택으로 가끔 비행기를 탑니다만은
한 삼백명이나 이백명이나 그 많은 사람 태우고 공중을 날아간다고 생각할 때에
그야말로 참 희귀한 신통(神通)이 아니겠습니까.
다 사람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몇백만의 부품(部品)이 그곳에 들어 있습니다.
인간(人間)의 마음이란 대체로 무엇인가?
인간의 머리란 대체로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이라 하는 이것은 무한공덕(無限功德)과 가능성(可能性)을 입력(入力)한
컴퓨터(Computer)나 똑같습니다.
원만한 자비(慈悲)도 그곳에 다 갖추고 있고,
즉 입력(入力)되어 있고 지혜(智慧)도 다 입력되어 있고
행복(幸福)도 어떠한 것도 우리 마음이라 하는 컴퓨터에 다 입력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무한의 컴퓨터, 따라서 '지혜 나오라' 하면 지혜가 나오는 것이고
'행복 나오라' 하면 행복이 나오고 그때는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 마음을 가리켜서 불심(佛心)을 가리켜서 여의주(如意珠)라,
여의보주(如意寶珠)라, 또는 마니보주(摩尼寶珠)라 합니다.
모두가 다 나온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성자(聖者)한테만 있는 것인가?
마음 이것은 모든 존재(存在)의 궁극적(窮極的)이고 보편적(普遍的)인
실체(實體)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한테나 다 갖추고 있습니다.
아직 계발(啓發)이 못된 사람도 역시 갖추고 있는 것은 똑같습니다.
잘 모른 사람들은 또 우리 인간(人間)한테만 갖추고 있고,
일반 동물(動物)들은 갖추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일반 동물한테도 똑같이 갖추고 있습니다.
동물(動物)이나 식물(植物)이나 무생물(無生物)이나
어떠한 미세한 존재(存在)나 모두가 다 불심(佛心)이라하는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근본실체(根本實體)는 똑같이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디에나 똑같이 갖추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산소(酸素)에나 수소(水素)에나 어디에나 갖추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사실은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불심이라 하는
청정무비(淸淨無比)하고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춘 마음뿐입니다.
그 위에서 물리적 원칙(原則)이나 화학적 변칙(變則)이나
이런 작용(作用)따라서 다시 말씀드리면
인과(因果)의 법칙(法則)따라서 이것이 되고 저것이 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우리같이 아직 공부가 안된 사람들은 안되겠지만은-
그런 불심(佛心)하고 하나가 딱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불심하고 하나가 다 되어버린 부처님께서 신통묘지(神通妙智)를 갖추는 것은
조금도 그때는 부사의(不思議)한 것도 아닌 것이고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저 과학(科學)이 기기묘묘(奇奇妙妙)한 것으로 해서
원자력(原子力)같은 무서운 힘을 내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데 그 원자력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의 성능인 불심(佛心)하고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가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그와같이 이제 당신 몸을 변신하셔서
허름한 수행자(修行者)로 나투셔서 그 역사(力士)들 앞에 가셨단 말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는 역사들 앞에 가셔서 하시는 말씀이
"동자(童子)들아!"
그야말로 나이도 많이 먹고 육중한 사람들한테 동자들아 하니까 다들 기가 차겠지요.
"동자들아, 그대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는가?"
라고 그렇게 핀잔 비슷하게 말씀을 하시니까,
아만심(我慢心)도 많고 행패(行悖)나 부리던 역사들이 더구나 골이 나겠지요.
그러나 부처님을 믿고, 그리고 승복(僧服)을 입었으니 함부로 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대체 누구인데 그와같이 오만불순하게 말을 하느냐고,
지금 눈으로 보면 알지 않느냐고,
이렇게 집체만한 바위를 우리가 못치워가지고 이렇게 애쓰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때 허름한 수행자로 변신하신 부처님께서는 미소를 띄우시면서
"아, 그것 하나 움직이지 못하느냐?"고 그러므로
더욱더 골이 나서, 그러면 그대가 한번 해보라고 말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손도 대지 않고 발가락 둘로해서 이제 훅 이렇게 올려버렸단 말입니다.
아! 그 바위가 몇십 미터 밖으로 굴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길 밖으로 굴러나간 것이 아니라 길 가운데로 갔단 말입니다.
또 치워야 쓰겠지요. 그러니 역사들이 그때는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 했겠지요. 참 저 사람이 보통 스님이 아니구나.
우리가 함부로 해서는 안되겠구나 했겠지요.
그래서 그때부터서는 아주 은근하게 공대(恭待)한단 말입니다.
기왕이면 길 밖으로 보내 주십시오.
이번에는 부처님께서 손으로 바위덩이를 들어서
저 공중(空中)으로 내 쏘아 던져버렸단 말입니다.
그러하니 윙 소리를 내면서 몇십명의 그 역사들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금방 자기들의 머리위에 떨어질 듯이 생각된단 말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이윽고 그 바위를 손바닥으로 받으셔서
훅 불어버리니 가루가 되어서 간 곳이 없단 말입니다.
그 역사들도 이젠 조금 눈의 틔고 귀가 조금 열리고 했겠지요.
부처님을 믿는다하니 더구나 신통자재(神通自在)하는 힘을 보니
부사의(不思議)한 그런 생각 때문에 정말로 진리(眞理)에 대한 회의가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신 다음에 부처님께서는
그야말로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춘
원만덕상(圓滿德相)인 모습으로 환원(還元)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그 역사(力士)들의 환희심(歡喜心)이
그야말로 참 청정(淸淨)한 마음이 얼마나 사무쳤겠습니까.
그때 역사들이 부처님한테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과연 그 돌은 실체(實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범부의 견해로는 공간성(空間性)도 있고 시간성(時間性)도 있고
도는 분명히 물질(物質)인 그 돌이 실체(實體)가 있다고 대답해야 되겠지요.
만약 실체(實體)가 있다고 대답하면
색즉공(色卽空)이라는 그 말이 맞지 않는단 말입니다.
부처님 도리(道理)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제법공(諸法空)이 아닙니까.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제법공(諸法空)입니다.
그렇게 역사가 몇십명 들어도 움직이지 못한 바위이지만 본 바탕은 역시 공(空)인 것입니다.
그래야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공(色卽空)도 맞고 오온개공(五蘊皆空)도 맞고 그렇게 되겠지요.
어째서 공(空)인가?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물질(物質)을 구성(構成)한 돌이나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나 내 몸뚱아리나
내내야 각 원소(元素)로 되어 있습니다.
각 원소는 또 전자(電子)나 양자(陽子)나 중성자(中性子)들이
적당히 결합(結合)해서 운동(運動)하는 것이 각 원소 아니겠습니까.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나 그런 미세한 소립자(素粒子)는 또 무엇인가?
이런 것이 본래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라 하는
하나의 정기(精氣)가 적당히 진동(振動)하고 적당히 운동(運動)해서
하나의 상(相)을 모양을 낸 것이 그것이
양성자(陽性子)요 중성자(中性子)요 전자(電子)요 그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현대물리학이 다 증명(證明)한 도리 아닙니까.
지금 이 가운데는 물리학 교수님도 계신데 제가 서투른 말을 해서 죄만스럽습니다.
지금 현대 물리학은-뉴톤식 고전물리학은 물질 따로 있고, 마음 따로 있다고 합니다만-
현대물리학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른바 양자역학(量子力學)은 그렇지 않고서
다만 에너지의 파동(波動)이 결국은 전자고 양성자고 중성자고 합니다.
그런것들이 적당히 결합되어서 그때는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그런것들이 모여서 분자(分子)가 되고
그래서 돌이 되고 다이아몬드가 되고 무엇 되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근본물질(根本物質)이 공(空)인지라,
근본물질이 에너지뿐이고 또는 정기(精氣)인, 그런 공(空)인지라.
그런 근본 미세한 물질이 이렇게 합하나 저렇게 합하나
공(空)은 공(空)이란 말입니다.
저는 가끔 말씀을 드립니다만은
제로(Zero)를, 영(零)을 몇십번 곱하나 더하나 나누나 영은 영 아닙니까.
그와 똑같이 물질이 아닌 원래 시간성(時間性)도 공간성(空間性)도 없는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모여서 모양이야 어떻게 나오든간에
그림자같은 모양을 어떻게 나투든간에 결국은 끝내 공(空)은 공(空)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부처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그런 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래가 공(空)자리입니다. 색즉공(色卽空)도-색(色)은 물질 아닙니까-
물질 바로 공이라. 이것도 물질을 분석(分析)해서 물질을 쪼갠 뒤에 공(空)이란 뜻이 아닙니다.
부처님 색즉공(色卽空)이란 물질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물질이 바로 공이거니 내 몸뚱아리도 이대로 바로 공(空)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이렇게 움직이는 지금 겉모습만 봅니다. 그림자만 봅니다.
따라서 내용은 실체는 못봅니다. 내용은 무엇인가?
내용 이것은 에너지고 우주(宇宙)의 정기(精氣)고
우리 불교식으로 하면 그때는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우리 불성(佛性)입니다.
따라서 성자(聖者)는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성자는 나를 보나 남을 보나
이렇게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잘생기고 못생기고 이제 그렇게 안봅니다.
나를 보나 남을 보나 모두가 다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인연(因緣)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냈구나,
이렇게 본단 말입니다.
산(山)도 냇(川)도 물(水)도 모두가 다 진여법성(眞如法性)이
인연 따라서 연기법(緣起法)으로 잠시간 모양을 냈을 뿐이란 말입니다.
잠시간입니다. 잠시간!
잠시간 모양을 내가지고서 그것이 머물러 있으면
공간성(空間性)도 있고 시간성(時間性)도 있을 것인데,
잠시간 인연(因緣) 따라서 모양을 나투어서도 순간 찰나도 머물러 있지 않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 참 절실한 말씀입니다.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이요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요,
또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이란 말이 있습니다.
과거도 얻을 수가 없고 미래도 얻을 수가 없고 현재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라 하는 것은
우리 중생심(衆生心)이 하나의 공간적(空間的)인 물질(物質)이 존재(存在)한다고 보고서
그것이 마멸되어 없어지고, 그것이 지나가면 과거(過去)라 하는 것이고,
아직 오지 않았으면 미래(未來)라고 하는 것이고,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지금 변동(變動)해 있으면
그것보고 현재(現在)라고 할 뿐이지 원래 과거, 현재, 미래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체(本體)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시간(時間)도 공간(空間)도 없습니다.
절대공간(絶對空間)도 절대시간(絶對時間)도 없고, 절대물질(絶對物質)도 없습니다.
이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도리(道理)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내일 당장에-괴테(Goethe)식으로 말하면
최후(最後)의 심판이 와서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네들은 슬퍼할런지 모르지만
우리 불교인(佛敎人)들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기 때문에
내일도 모레도 없어진 뒤에도 다 그때는 좋은 날 뿐입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설사 내 몸이 금방 사라진다 하더라도
생명(生命) 자체는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말씀을 합니다마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같은 어른이 태어났으니
석가족(釋迦族)은 그야말로 부자(富者)가 되고 감투를 많이 쓰고
오래살고 그랬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인과(因果)가 그렇게 안되어서
부처님의 종족(種族)인 석가족이 몽땅 함몰당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도 한 둘이 아니라 그 연연한 석가 귀족(貴族)들을,
여인들도 그 땅에 묻어서 죽이기도 하고 창으로 죽이기도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수백명이 당했습니다.
그리고 무거운 돌을 등에 엎고서 밧줄에 묶이어서 호수에 던져지고,
부처님의 종족이 그렇게 해서 죽을 때도 신통자재(神通自在)하고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바위덩어리도 훅 불어 버릴 수 있는 부처님인데
그런 것을 그대로 묵과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모순(矛盾)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런 대목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佛敎)도 별 볼일이 없구나.
그래서 그냥 신심(信心)이 떨어진 그런 분도 있습니다.
직접으로 그런 말을 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 신통자재(神通自在)하시는 분이 부처님 뿐만이 아니라,
특히 부처님 제자 가운데는 신통제일 마하목건련(摩訶目健連)이란
목건련(目健連) 존자(尊者)도 있었습니다.
목건련이 부처님한테-그때 아사세왕이 그렇게 잔인무도한 짓을 했습니다.-
아사세왕 그놈을 저쪽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밖으로 던져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부처님한테 말씀을 드렸단 말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지금 아사세왕이 내 말을 들으면 앙화를 면할 수가 있지만
업장(業障)이 무거워 선근(善根)이 없어서 도저히 내 말을 안들을 것이니
그대로 가만히 두어도 앞으로 이레가 못가서 생환지옥(生還地獄)이라,
산체로 지옥에 떨어진다.
그리고 지금 핍박을 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석가족(釋迦族)들은 죽자마자
생전에 부처님 법을 닦았기에 바로 도리천(?利天)에 가서 태어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한 도리(道理)-우리 생명(生命)이라는 것이
현상적(現象的)인 '이것만이 존재한다'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그런 것들이 상등(上等)이 되겠지요-
그러나 생사를 초월한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런 것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석가족도 오히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년년시호년(年年是好年)이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해마다 좋은 해요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죽으면 당장에 천상(天上)에 태어나서 인간세상(人間世上)보다는 훨씬 고통이 적단 말입니다.
-중략-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오직 부처님 뿐이요. 천지 우주가 다 화장세계(華藏世界)라,
다 부처님 나라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날이 좋은 날이요,
분명히 해마다 좋은 해입니다.
공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글-청화스님 법문 중에서
출처-공덕총림의 세계 덕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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