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性徹, 1912~1993) 큰스님 이야기

수선님 2024. 10. 6. 13:29

<성철(性徹, 1912~1993) 큰스님 이야기>

1) 출가

성철 스님은 1912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아버지 이상언(李尙彦)과 어머니 강상봉(姜相鳳)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이며 산청 단성초등학교와 진주고보를 졸업했다.

그는 어릴 적에 넉넉한 집안 살림에 남부럽지 않게 자랐으며, 한학을 두루 익히며 영민했다. 삶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품어가면서 홀로 동서고금의 철학, 종교, 사상서를 독파해 나갔다. 20세를 전후해서 불교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가 선불교 수행서인 <증도가(證道歌)>를 읽고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24세 때는 지리산 대원사에 40여 일 동안 화두를 들고 공부할 정도로 공부가 익자 효당(嚆堂, 최범술) 스님의 권유로 해인사로 들어갔다.

당시 25세의 청년이던 이영주(李英柱)는 가야산의 높은 산자락 백련암을 향해 가랑잎이 뒹구는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그 산길을 걸어 올라가 당시 해인사 조실이었던 동산(東山慧日, 1890~1965) 스님에게 귀의했다. 고승 동산은 청년 이영주의 머리를 예리한 삭도로 밀어주며 성철(性徹)이라는 법명을 내리고, 계를 주어 ‘문 없는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호는 퇴옹(退翁)이고, 성철 스님이 읊은 출가송이 전한다.

미천대업홍로설(彌天大業紅爐雪) ― 하늘에 넘치는 큰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 눈송이요,

과해웅기혁일로(跨海雄基赫日露) ―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수인감사편시몽(誰人甘死片時夢) ― 그 누구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 죽어가랴.

초연독보만고진(超然獨步萬古眞) ―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동산은 용성(龍城, 1864~1940) 스님의 제자인데, 용성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한국 불교계 최고의 고승이었다. 이로 인해 「용성 ― 동산 ― 성철」이라는 한국 선종의 대표적 선맥이 생겨난 것이다. 항상 다른 승려를 ‘선생’이라 부르던 용성 스님이 성철에게만은 ‘스님’이라는 칭호를 깎듯이 썼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단한 학식과 구도에 전념하는 모습이 제자의 제자, 손제라 하지만 존경스러워서라고 했다.​

성철 스님은 유학자 집안의 장남이었는데, 아들이 출가하자 아버지는 “석가모니가 내 원수다”라고 했단다.

당시만 해도 숭유억불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유학자 집안에선 승려로 출가하는 걸 천시하는 편이었고, 그것도 가문을 이을 장남이 그리했으니 아버지 입장에선 정말 반감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중에 가서 아들이 깨달음을 얻은 고명한 고승이 된 것을 보고 나서는 마음을 풀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이놈들아, 나는 성철 스님에게 간다!!”고 고함을 지른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성철 스님의 어머니 진주 강씨는 남편이 사망하기 2년 전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에 정식 출가는 안했지만 머리를 깎고 장삼을 입고 생활하면서 "다시 태어나면 스님이 되겠다."며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또한 성철의 아내 이덕명은 남편과 외동딸이 모두 출가하고 시부모도 사망한 이후 딸 불필(不必) 스님의 은사 인홍(仁弘) 스님의 권유로 출가해 일휴(一休)라는 법명을 받고 비구니로 삶을 마감했다.

성철 스님의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는 성철 스님을 시봉한 원택 스님이 저술한 <성철 스님 시봉 이야기>와 성철 스님의 딸 불필 스님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김택근 작가가 쓴 <성철 평전> 등이 있다. 그리고 성철 스님의 저서로 <선문정로>, <백일법분>, <돈오입도요문강설> 등이 있다.

2) 수행 정진

불가에 입도 이후 성철 스님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 위해 불가의 구도에만 전념했고, 대구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성전암(聖殿庵)에서 8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했으며, 10년의 동구불출(洞口不出)에, 불면(不眠)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철 스님’ 하면 떠오르는 트레이드 마크가 기워 입은 누더기 승복이라 할 만큼 철저히 무소유의 삶과 두타행을 이어갔다.

“성격이 보통사람과는 달랐지요. 70년대 초께 대학생 50여 명이 수련하러 왔다가 꾸벅꾸벅 조는 게 스님 눈에 띄었어요. 스님이 곡괭이를 들고 와서 선방 방구들을 다 찍어버렸답니다. 장좌불와 10년 동구불출의 스님인 만큼 스님은 ‘수행하는 놈의 자세’가 마음에 안 들면 추호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 원택 스님(상좌)

평소 제자들에게는 “책을 보지 말라”고 하셨지만 스님이 주로 거처한 백련암엔 일만 권의 장서가 있어, 동서고금의 주요 전적을 읽지 않음이 없었고, 심지어 기독교 성서조차도 훤히 꿰뚫고 계셨다. 그리하여 해인사 방장 취임 후 행한 ‘백일법문’은 너무도 유명하다.

일찍 명망 높은 승려로 알려져 수행하는 사찰에 툭하면 별별 사람들이 만나고 싶다며 왔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아니라 무슨 도술을 겨뤄보자는 식의 괴짜들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며 성철 스님에게 이를 인정받으려고 온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철 스님이 잘 설득해서 자신이 제대로 깨달은 게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순순히 돌아갔지만, 가끔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소란을 피우거나 성철 스님을 비방하는 자들도 있어서 골머리를 앓게 했다고 한다.

1978년 구마고속도로 개통 때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해인사를 찾아 성철을 만나려 했으나, 성철은 “세상에선 대통령이 어른이지만 절에 오면 방장이 어른이므로 3배를 안 할 바에야 만나지 않는 게 낫다”며 3배를 요구해 만남이 무산된 적도 있다.

역설적으로 고승으로 점차 명망이 높아가자, 정치인과 재벌 등 여러 유력자들이 해인사를 찾아 성철 스님을 만나고자 했으나 성철 스님은 아예 백련암 근처에 몇 년 동안 가시덤불을 쳐놓고, 수행하는 승려 두어 명 외에는 들이지도 않았다.

3) 만공(滿空) 화상과 청담(靑潭) 스님과의 인연

성철 스님은 1941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의 정혜사(定慧寺)에서 동안거를 했다. 정혜사에는 능인선원(能仁禪院)이 있다. 정혜사는 수덕사(修德寺)와 함께 599년 백제 지명(智明)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많은 고승 대덕이 수도한 곳이다.

1930년 만공(滿空, 1871~1946) 화상이 중수한 이후 사세가 크게 확장됐다. 지금은 덕숭총림 수덕사의 대표적 선원이다.

성철 스님이 이 절을 찾았을 때 능인선원에는 당대의 선지식으로, 참선수행자의 지도자이자 한국불교의 정신적 지주인 만공 화상이 주석하고 있었다.

성철 스님은 만공 스님 회상에서 평생의 도반 청담(靑潭, 1902~1971) 스님을 만났다. 당시 만공 스님의 회상에서 처음 만난 두 스님은 이후 평생토록 도반으로 지내면서 당대 우리 불교계를 이끌었다. 청담 스님은 성철 스님보다 세수로 10년 연상이다. 그러나 나이를 상관치 않고 두 분은 절친하게 지냈다. 성철 스님은 “청담 스님과 나 사이는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 그런 사이”라고 했다. 청담 스님 또한 “우리는 전생에 부부였던 모양”이라 했다.

성철 스님의 행장(行狀)에서 어느 한 기록 소홀히 넘길 것이 없지만 정혜사에서의 기록은 더욱이나 예사롭지 않다. 이때 성철 스님은 득도해 오도송을 남겼다.

황하서류곤륜정(黃河西流崑崙頂) ― 황하는 역류하여 곤륜산 정상을 흐르니

일월무광대지침(日月無光大地沈) ―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대지는 잠기네.

거연일소회수립(遽然一笑回首立) ― 갑자기 웃으며 고개 돌리고 서니

청산의구백운중(靑山依舊白雲中) ― 청산은 옛날 그대로 흰 구름 속에 있네.

깨친 사람은 깨친 사람만이 알아본다.

통도사 경봉(鏡峰, 1892~1982) 스님도 평소 이 말을 자주 일러주셨고, 목격도존(目擊道存), 눈이 마주치는 곳에 도가 있다고 했다.

만공 화상과 성철 스님의 대좌는 이미 그곳에 도가 있었고, 두 분 외에 제삼자가 끼어들 공간이 없었다.

만공 회상에서 청담 스님을 만난 성철 스님, 만공-성철, 청담-성철 사이의 일화는 두고두고 후학에게 많은 가르침을 일깨우고 있다.

성철 스님은 만공 회상에서 세 철을 지냈다. 1941년 정혜사에서 동안거, 그리고 그 이듬해 충남 서산군 간월도의 만공 화상 토굴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했다. 성철 스님 행장 가운데 한 선지식 아래서 세 철을 지낸 기록은 이때의 것뿐이다.

“스승과 제자가 무인도에 떨어졌다. 먹을 거라고는 없었다. 마침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잡아먹어야 그나마 한사람이라도 살아남을 그런 처지였다. 이럴 때 제자가 스승에게 말한다. ‘스님 저를 잡아 잡수시고 스님은 사세요.’ 그러자 그 스승은 ‘응, 그래’ 하면서 서슴없이 제자를 잡아먹었단다. 그 스승과 제자는 경허(鏡虛, 1849~1913) 스님과 만공 스님이다. 두 사제 사이는 그러했다.”

그런 경지의 만공 화상이 성철 스님을 깎듯이 챙겼고, 성철 스님 역시 그 회상에 손색없는 일원이었다. 한국 선불교의 도도한 인맥은 그렇게 흘러온 것이다.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읊고 나서 깨달음의 점검을 위해 만행에 들어 제방에서 정진했다.

그런데 1945년 늦봄, 14세 소녀가 문경 대승사(大乘寺) 산문을 넘어왔다. 청담의 둘째 딸 인순이었다. 인순은 ‘인간 사냥’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일제에 의해 저질러졌던 정신대(위안부) 징집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가 인순을 아버지가 계신 문경 대승사(大乘寺)로 보냈다.

인순이는 청담에게 어머니가 쓴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에는 딸을 산사로 보낼 수밖에 없는 전후 사정이 담겨있었고, 기왕에 절을 찾아갔으니 인순이를 설득해 출가시켜 달라고 쓰여 있었다.

청담은 당시 함께 정진하던 성철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출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소녀의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다. 그날 밤 청담과 성철은 인순이가 머무는 원주(院主) 방을 찾았다.

깜박이는 호롱불 아래서 성철이 얘기를 꺼냈다. 청담은 눈을 지그시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청담은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을 다시 지우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간청으로 하룻밤 파계를 한 후 얼마나 많은 참회 수행을 했던가. 그런데도 아직 마음이 저리는데 그 인연이 자신을 찾아왔으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성철은 처음 부처님 일대기를 얘기해줬다. 탄생, 출가, 고행, 깨달음, 열반까지 차례로 이어갔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성인의 삶이 관심 밖에 있을 뿐이었다.

다른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줘야 했다. 성철과 청담은 날마다 저녁 공양을 마치면 인순을 찾아갔다. 성철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위인, 장군, 왕들의 삶을 풀어놓았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인순의 마음을 뺏기에 충분했다.

인순은 성철 스님의 넓고도 깊은 지식에 큰 감동을 받았다. 스님들은 목탁 치며 염불이나 외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책을 보지 않고 얘기하는데도 선생님들보다 훨씬 아는 게 많았다. 성철은 매번 이야기 말미를 불교 교리로 돌렸다. 처음엔 은근히, 나중엔 노골적으로 출가를 권유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가고 인순이 문득 물었다.

“스님, 스님이 알고 있는 것 모두 제게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럼, 네가 중이 되면 다 가르쳐주지.”

“그럼 중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인순이는 성철의 ‘설득’에 끌려 승려가 되기로 했다. 인순은 대승사 부속 비구니 암자인 윤필암(潤筆庵)에서 월혜(月慧) 스님을 은사로 삭발했다.

10계를 설한 후 성철 스님은 “비구니계를 이끌 큰스님이 돼라”고 당부하며, 묘엄(妙嚴)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성철 스님의 유일한 비구니 제자가 된 것이다. 묘엄은 성철 스님의 바람대로 한국 비구니계의 동량으로 우뚝 솟아 수원 봉년사(奉寧寺)와 선가대학을 일으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4) 봉암사 결사(鳳巖寺結社)

일제 해방 직후인 1947년 당시 젊은 비구 스님들이 봉암사에 모여 왜색 불교를 퇴치하고 수행종풍을 진작시켜 활연대오(豁然大悟) 하기를 서원 결사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때 결사에 참가한 스님들이 서로가 수행하면서 지켜야할 18조항의 규약을 정했는데, 이를 공주규약(共住規約)이라 한다.

1924년, 일제는 모든 종단을 통합해 '조선불교조계종'을 설립했고, 조선총독부의 통제를 받게 했다. 당시 1300여개 절 주지는 도지사의 승인을 받도록 했으며, 나아가서 우리 민족의 정신을 흐리게 하려는 목적으로 스님들의 결혼을 장려해 스님들 90%가 결혼한 대처승이 됐다. 이렇게 해서 한국불교는 만신창이가 됐다.

이에 해방 직후인 1947년 당시 경북 문경의 대승사에서 함께 수행하던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이 뜻을 모았다.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47년 가을 봉암사에 모였다. 성철 스님을 중심으로 청담ㆍ효봉ㆍ보문ㆍ혜암ㆍ서암ㆍ법전ㆍ자운ㆍ우봉ㆍ향곡 스님 등 당시 30~40대 젊은 스님들은 "부처님 당시의 수행가풍을 되살리자"고 결의해 불교를 중흥시킨 중심이 됐으니, 이를 ‘봉암결사(鳳巖結社)’라고 한다. 이분들은 후에 우리나라 최고의 고승이 됐다. 봉암사 결사에 참여한 스님 중에서 훗날 종정 4명, 총무원장 7명이 배출됐다.

결사를 결맹(結盟)한 스님들은 곧 성철 스님의 주도 하에 봉암결사의 청규(淸規)인 전문 18조의 공주규약(共住規約)을 만들어 어떠한 사상과 제도도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과 역대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것은 배격하기로 해 조선 500년 동안의 억불정책과 일제 강점기에 왜색 불교화된 것을 회복시키기로 했다.

이때 주요 결의내용은,

• 부처님 법과 부처님 제자 외에는 다 정리한다.

• 칠성탱화, 산신탱화 등 '비불교적 요소'는 모두 절에서 몰아낸다.

• 비단 가사와 장삼도 모아서 태워버린다. 그리고 승복을 검소하게 바꾸었다. 이때 결의한 승복이 오늘날 조계종 승려들의 승복이다.

• 스님에게 '삼배'를 올리는 것도 이때 생겼다.

•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정신도 결의했다. 스님들이 직접 나무하고, 농사짓고, 밥하고, 물을 길었다. 소작료를 거부하고, 신도들의 보시도 받지 않기로 했다.

이 소문은 전국으로 퍼졌다. 전국의 수좌들이 몰려와 선방에는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봉암사 결사는 한국 불교를 다시 일으킨 역사적. 상징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한국불교 본래의 화두선풍(話頭禪風)을 재정립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 바로 봉암결사였다. ‘봉암결사’는 조선 500년의 탄압과 일제 36년의 왜곡을 떨어내고, 본지풍광(本地風光)으로 되돌아가는 역사적 계기였다.

5) 불필(不必) 스님 만나다

성철 스님은 출가하고 얼마 후 세속에 떼어놓고 온 부인이 딸을 낳았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 따님이 바로 불필(不必) 스님이다.

불필 스님은 1937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아버지 이영주와 어머니 이덕명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수경(壽卿)이었다.

수경이 아홉 살 되던 해, 언니 석순이 일신학교(현재의 진주여고) 입학을 앞둔 추석 무렵이었다. 언니가 밖에 놀러 나갔다가 들어와 자리에 누우면서 자기 손을 쳐다보더니 “엄마 나를 믿지 마.” 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3일 후에 죽고 말았다. 온 집안은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언니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한동안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수경에게 우상이나 다름없던 언니의 죽음으로 진주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다.’는 옛말을 들어 할아버지를 졸라 국민학교 4학년 때 서울 혜화국민학교로 전학했다.

당시 집안 살림이 넉넉했던 가문에서는 흔히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을 보냈고, 이미 삼촌(성철스님의 동생)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서울로 전학 와 보니, 서울 초등학교의 수업은 시골 학교와 놀랄 정도로 차이가 컸다. 어린 나이로 서울 생활 적응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에 큰 짐을 벗은 것처럼 마음은 홀가분했다고 한다.

처음 아버지를 만나게 해준 사람은 묘엄(妙嚴, 1931~2011) 스님이었다. 묘엄 스님은 성철 스님과 절친한 청담(淸潭) 스님의 딸이요, 성철 스님의 제자였다. 어느 날 묘엄 스님이 다른 비구니 스님과 함께 수경을 찾아왔다.

“큰스님께서 기장 월래 묘관음사(妙觀音寺)에 계시니 한번 가서 뵙도록 하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에 얼떨떨해 있는데, 서울에 같이 유학와 있던 삼촌이 “담임선생님께 스님을 찾아간다고 허락을 받고 한번 가보자”며 나섰다.

"평생 불러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아버지가 대체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 반(半), 자식을 팽개친 아버지에 대한 미움 반(半)에 "얼굴이라도 보자"며, 삼촌을 따라 나섰다. 삼촌을 따라가면서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미워한 아버지인데, 그래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 이것도 천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불필, 아버지 큰스님을 처음으로 뵙다---

묘관음사는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 있는 임제종 소속의 사찰이다. 성철 스님과 절친한 향곡(香谷 蕙林, 1912~1978) 스님이 주석하고 계신 사찰인데, 성철 스님은 봉암사 결사 후 빨치산의 위협에 생명이 위태로워 이곳에 와 계셨다.

기차를 타고 묘관음사에 도착하니 해질 무렵이었다.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 일주문도 없는 절에 들어서니 대나무가 우거진 절 초입에 누군지 모르는 무섭게 생긴 스님 한 분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스님이 바로 성철 스님과 절친한 도반인 향곡(香谷) 스님이었다. 향곡 스님이 말했다.

“철 수좌(성철스님)가 오늘 이상한 손님이 온다고 하드라면서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수경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친 혈육인 자신을 그렇게 내팽개쳐 놓은 아버지, 그래서 원망스러웠던 아버지가 애써 찾아온 딸을 피해 사라지다니, 향곡 스님이 뒤늦게 사실을 알고는 성철 스님을 찾아 나섰다. 조금 기다리자 향곡 스님이 다 떨어진 누더기에 부리부리하게 광채 나는 큰 눈만 보이는 스님과 함께 나타났다.

"저 분이 내 아버지인가" 하는 순간 눈 큰 스님이 소리를 질렀다.

“가라, 가!”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던 수경은 그 순간 "삼촌 돌아가요"라며 돌아섰다. 그 때 무서운 얼굴의 향곡 스님이 부드러운 미소로 붙잡았다. 자그마한 방으로 데려가선 과자며 과일이며 먹을 것을 내놓았다. 이렇게 성철 스님과 딸 수경은 첫 만남이 있었다.

그 다음해 6.25 전쟁이 발발했다. 수경은 피난민 대열에 섞여 걸어서 고향까지 내려갔다. 전쟁 통에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손녀를 할아버지는 ‘공부를 못 시키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서울에 보내지 않겠다.’ 하시며, 수경을 진주 사범학교에 입학시켰다.

사범학교 2학년 방학 때 통영 벽발산 안정사(安靜寺)의 토굴(천제굴)에 큰스님이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갔다.

큰스님이 딸 수경을 보자마자 ‘참 못됐다’고 말씀하셨다.

수경은 큰스님이 자신의 속마음을 잘 알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수경이 서투른 인사를 드리니,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물으셨다. “행복을 위해 삽니다.”

큰 스님의 물음에 답하고 난 뒤 이번에는 수경이 여쭈었다.

“행복에는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이 있는데, 어떠한 것이 영원한 것이고 어떠한 것이 일시적인 것입니까?”

“부처님처럼 도를 깨쳐서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 영원한 것이고, 이 세상의 오욕락(五慾樂)은 일시적인 것이다.”

큰스님의 말씀에 수경이 다시 말했다.

“나는 바보가 아닌 이상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이때 수경은 세속의 인연보다는 그저 큰스님으로서 존경하는 마음만 들었다. 큰스님과 수경 사이에 몇 가지의 선문답이 이어졌다.

“그런 것이 공부입니까?”

“화두를 해서 깨쳐야 한다.”

수경은 그 자리에서 바로 화두를 받았다.

“그러면 학교에 가지 않고 이 공부를 하겠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끝을 맺지 않으면, 큰일도 마찬가지다.”

학업을 일단 끝마치라는 큰스님의 말씀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 수업 시간에는 화두에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졸업반이 돼, 교생 실습 중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맡은 학급은 비록 1학년이지만 학급을 운영함에는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수경은 이 때 친구 옥자(백졸/百拙 스님)와 함께 출가를 결심했다. 그리하여 졸업 후 수경과 옥자는 가야산 부근 매화산 자락에 있는 청량사(淸凉寺)로 들어갔다. 이후 수경과 옥자는 성철 스님의 지시로 태백산 홍제사(弘濟寺) 인홍(仁弘, 1908~1997) 스님 곁으로 가서 정식 출가했다.

6) 종정이 되시다.

한때 종단 분규가 있었을 때,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됐으나, 이를 거절하고 해인사에서 구도에만 힘썼으며 속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1981년 종정이 돼 조계종을 이끌었다.

---10. 27 법란---

1980년 10월 27일은 흔히 말하는 ‘10.27 법난’ 일이다.

1980년 10월 27일 새벽, 25개 본사를 비롯한 전국 주요사찰에 군병력이 들이닥쳐 일대수색에 들어가 주지 이하 소임자들을 무조건 연행해간 사건이다. 5공 정권 출범 초기에 벌어진 여러 가지 비극적 사건 중 불교계에서 잊을 수 없는 악몽과 같은 깊은 상처였다. 신군부가 법란을 일으킨 이유도 확실치 않으나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宋月珠, 1935~2021) 스님이 전두환 지지 성명에 반대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을 방문해 성금을 전달하는 등 신군부에 밉보인 것이 원인이라는 해석이 있다. 또 일각에서는 신군부가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법난을 겪은 직후 종단을 추스르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81년 1월 10일 원로회의에서 성철 스님을 만장일치로 7대 종정으로 추대했다.

성철 스님과 해인사에 같이 머물던 자운(慈雲) 스님이 어인 일로 그때 서울에 와 있다가 해인사 성철 스님께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성철 스님의 목소리가 긴장됐다.

“뭐! 가만있으라고. 종단이 어려우니 안한다는 말 하지 말라고. 그런 법이 어디 있노. 한마디 상의도 안하고.”

한참을 듣더니, “음..., 알았소.”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뒷집을 지고 한참 동안을 맴돌았다.

“거참! 어렵게 됐네, 안한다는 말도 못하게 하네..., 쯧쯧.”

성철 스님의 절친한 도반인 자운 스님이 종단의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무조건 종정직을 맡으라고 강청한 것이다. 이렇게 해 ‘성철 종정’ ​시대가 열렸다.

가야산 깊숙한 곳에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성철 스님이 1981년 정월에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됨으로써 사람들 눈길을 끌게 됐다.

성철 스님이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자 대중매체들이 신비롭기까지 한 그의 수도생활을 다투어 소개하며, 그가 이번에야말로 백련암을 떠나 ‘저자(길거리)’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는 서울 조계사에서 있었던 종정 취임식에도 나가지 않고 백련암에서 적은 짧은 법어를 사람을 시켜 그 자리에 전했다.

---종정 수락 법어(1981)---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 따로 없으니

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중국 송나라 때 청원 유신(靑原惟信, 1067~1120) 선사 법어는 아래와 같았다.

「견산시산 견수시수(見山是山 見水是水) 견산불시산 견수불시수(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견산지시산 견수지시수(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

이 늙은이가 중생일 때는 산을 보면 곧 산이요 물을 보면 곧 물이드니, 진리를 좀 알게 되니, 눈이 차츰 열려 산을 봐도 산이 아니고 물을 봐도 물이 아니었네. 이제 불법 도리를 깨닫고 보니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더라. 이와 같이 산과 물에 대한 사람의 인식을 세 단계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역시 중국 송나라 때 야보 도천(冶父道川, 1127~1279) 선사의 아래와 같은 선시 구절이 전한다.

「산시산(山是山) 수시수(水是水) 불재하처(佛在何處)」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부처님이 어디에 계신다는 말인가, 하는 유명한 글이다. 이는 깨달은 사람의 안목을 뜻한다. 오랜 수행 끝에 드디어 깨친 단계에 이르렀으니 부처님을 뵐 수 있으리라 기대 했건만, 여전히 부처님은 보이지 않으니 부처님은 어디 계신가 하고 하소연을 하고 있다. 깨쳤다고 해서 부처님이 쉽게 그 앞에 불쑥 나타날 수는 없는 법이다. 아직 멀었다. 더 수행하고 더 닦아야 하리.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 했다. 비록 여덟 글자밖에 안 되는 짧은 구절이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불법의 대의를 놓치게 돼 수행하는데 있어서 많은 지장을 겪게 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조사어록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산과 물이 없어지거나 혹은 산과 물이 서로 뒤바뀌지 않음을 말한다. 깨달음을 얻어 분별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육신이 몸담고 있는 차별지(差別地)인 이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중생은 이 근본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연기한 겉모양이 진실한 것인 줄 알고 집착한다. 마치 저 파도를 진실한 모습인 줄 알고 집착하지만 파도는 그런 중생심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무정하게 스러져가므로 중생은 괴로워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파도는 아무런 허물이 없으며 다만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여겨서 스스로 집착해 괴로워하는 중생만 고달플 뿐이다.

성철 큰 스님께서 이런 화두 아닌 화두를 세상에 던졌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까? 삼천 배를 해야 만나주시던 성철 스님이다. 기를 쓰고 삼천 배에 성공한 몇몇 언론인들이 큰 스님께 여쭈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

성철 큰 스님이 답하셨다.

“이 사람들아, 산이니까 산이라 하고 물이니까 물이라고 하지. 그럼 당신들은 산을 뭐라고 부르는고? 물을 뭐라고 부르는고?”

큰 스님은 분별과 시비를 넘어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안목을 강조한 것이다.

군인들이 비록 구둣발로 심산유곡의 사찰들을 휘저어놓았지만 너희들 아무리 날뛰어봤자 산이 산이듯이 이 성철을 비롯한 한국 불교계는 끄떡도 하지 않고 그대로 물이 물이듯이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그러니 시회대중(時會大衆)이여, 분별하지 않고 여여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3000배---

생전에 성철 스님과 만날 때는 독특한 조건이 필요했는데, 누구를 불문하고 불상에 3,000배를 올려야 했다.

1982년 1월 1일 법정 스님과의 선문답에서 성철 스님은, “신도들이 자꾸 절에 와서 부처님은 아니 보고 나만 만나려고 하니 안 된 일이라며,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 왜 나를 만나느냐. 그래서 내가 3천 배를 하라고 하는 것은 나를 보러 온다는 사람들에게 이를 이용해 부처님에게 기도를 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께 3천 배를 하면 심적으로 변화가 오고 도움이 된다. 절대로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3천 배를 시키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간단히 말하면,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핑계 삼아 부처님에게 3000배를 시킴으로써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지 도움도 안 되는 나를 보라고 3000배를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7) 입적

시자인 원택 스님을 급하게 부른다는 전갈이 왔다. 원택 스님이 서둘러 뛰어오니, 성철 스님이 청청벽력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내 인제 갈란다. 너거 너무 괴롭히는 거 같애.”

가슴이 덜컹했다. 선승들은 스스로 열반의 순간을 택한다고 한다. 스님의 말씀에 예전에 없던 결연함이 배어 있다. 황망한 마음에 매달렸다.…

“불교를 위해서나 해인사를 위해서나 좀 더 계셔야 되지 않습니까.”

“아이다. 인제는 가야지. 내 할 일은 다 했다….”

큰스님은 말을 마치자 스르르 눈을 감았다. 80평생을 걸치고 다니던 육신을 털기로 마음먹은 스님, 말릴 수도, 돌이킬 수도 없었다. 1993년 11월 4일 합천 해인사 퇴설당에 여명(黎明)이 밝아올 즈음 스님이 입을 열었다.

“내 좀 일어나게 해봐라.”

거구의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일으켜도 자꾸 옆으로 넘어지려 해 내가 옆에 붙어 어깨에 스님을 기대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창밖에 빛이 환해질 무렵.

“참선 잘 하그래이.”

그리곤 아무 말이 없었다. 스르르 고개가 숙여지면서 숨소리도 가늘어졌다. 갑자기 세상이 '큰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 원택(성철스님 상좌)

말년에 접어들어서는 지병인 심장 질환으로 병고(病苦)를 앓다가 1993년 11월 4일 해인사 퇴설당에서 향년 82세(법랍 58세)를 일기로 열반하셨다.

---열반송(涅槃頌)---

생평사남녀군(生平欺男女群) ―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미천죄업과수미(彌天罪業過須彌) ―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활함아비한만단(活陷阿鼻恨萬端) ―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일수토홍괘벽산(一輪吐紅掛碧山) ―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성철스님 열반송’을 이해를 못하는 타 종교인들의 비난이 많았지만 성철 스님의 상좌 원택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맑고 투명함 그 자체 같다. 지장보살이 지옥에 들어가 지옥중생을 모두 구원하겠다는 원을 세웠듯이 성철 스님은 지옥에 있는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무간지옥'을 선택하신 것이다. 어떻게 무지한 인간들이 성철 스님을 안다고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하겠는가?”라고 했다.

열반 당시 다비를 거창하게 하지 말고 사리를 뒤지지 말라는 유지가 있었으나, 제자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다비식을 거창하게 열었다. 사리도 방송 카메라 앞에서 대대적으로 수습했다. 다비식 당일에는 지상파 라디오 방송 3사 및 BBS에서 모두 출동해 다비식을 생중계할 정도였다.

해인사를 비롯한 일대가 방문객으로 북새통을 이룬 것은 당연지사. 이 때 110여과의 상당히 많은 사리가 나와서 모여든 신도들도 "역시 큰스님"이라며 안도했다고 한다.

다비(화장)한 뒤 사리는 세간의 이목을 이끌었으며, 뒷날 사리탑에 모셨다.

뒷일을 소박하게 하라고 당부하셨건만 열반하신 후 그려진 탱화나 입상 같은 건 죄다 번쩍번쩍하다. 심지어는 꾀죄죄한 말사였던 백련암도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도록 포장하고 높은 누대를 쌓아 웬만한 사찰 규모로 키워버렸다. 현재는 백련암 오두막 뒤편에 성철 스님의 좌상을 모신 커다란 법당이 자리한다.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 성철 스님의 생가가 있다. 성철 스님이 열반한 후 생가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산청군에서 관광의 일환으로써 생가 복원에 나섰고, 불필 스님의 동의를 구해 생가를 복원했다. 다만 불필 스님은 생가만 덜렁 있는 건 의미가 없으니 관리도 할 겸, 사찰이 같이 있어야 한다 했고, 그래서 불사를 일으켜 겁외사(劫外寺)란 이름의 사찰이 2001년 3월 건립됐다. 통영대전고속도로의 바로 옆에 있으며 단성IC에서 3분이면 접근 가능하다.

---사리탑---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 정영호 전 단국대 교수, 김동현 전 문화재연구소장 등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는 “국보⋅보물 베끼는 사리탑 불사는 ‘헛불사(佛事)’”라며 ‘우리 시대의 디자인’을 권했다. 현상 공모에선 당선작을 내지 못했고, 사진가 주명덕씨의 추천을 받은 재일 설치미술가 최재은씨가 설계를 맡게 됐다.

원택 스님은 최씨와 함께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통도사 적멸보궁탑을 참배하며 기본 아이디어를 상의했다. 수많은 논의를 거쳐 사각형과 원, 구(球)와 반구(半球)로 구성된 인도 불교에서 시작된 단순하면서 파격적인 디자인이 확정됐다. 석재는 인도에서 공수했고, 일본 기술자들도 작업에 참여했다. 건립비용은 신도들이 십시일반 했고, 삼성그룹 고 이건희 회장과 부인 홍라희 여사가 큰 몫을 맡았다.

8) 추모의 글

➀ 불필 스님

불필 스님은 “다시 태어나면 큰스님의 상좌가 돼 시봉하고 싶다.”고 했다.

따님으로서의 애절하고 간절한 소망인 것이다. 그러나 부녀관계는 속세를 떠난 출가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만 존재한다. 성철 스님과 불필 스님 역시 출가 후에는 수행자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지중한 인연으로 큰스님의 딸로 태어났지만 큰스님은 내게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일 뿐이었다. 나는 큰스님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영결식과 연화대 다비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다비식 날 늦은 오후에야 금강굴 위 다비장에서 사그라지는 불꽃을 바라보며 절을 올릴 수 있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다해 다시 만나 뵐 것을 약속하는 아홉 번의 절이었다. 나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 큰스님의 상좌가 돼 시봉하고 싶다.”

➁ 성철 스님을 그리며 ― 법정 스님

성철(性徹, 1912~1993) 큰스님 입적 소식을 듣고 이튿날 해인사 퇴설당에 모셔진 스님의 영전에 분향하고 마주 서니 실로 감회가 무량했다.

2년 전 바로 이 방에서 스님을 친견했던 일이 마지막 대면이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내게는 또 이 퇴설당이 선문(禪門)에 첫걸음을 내디딘 인연 터이기도 하다.

퇴설당(堆雪堂)은 원래 해인사의 선원(禪院)이었다. 선종의 제2조인 혜가(慧可) 스님이 달마대사를 찾아가 허리께까지 눈이 쌓이도록 물러가지 않고 법을 구해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았던 구도의 고사에 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래서 정면 벽에 혜가(慧可)의 설중단비도(雪中斷臂圖)가 걸려 있었다.

선원(禪院)이던 퇴설당이 방장실(方丈室)로 개조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성철(性徹) 큰스님을 내가 처음 친견한 것은 1960년으로, 그때는 스님이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사람들을 피하려고 암자 둘레에 철책을 둘러치고 안거하던 시절이다.

불교사전 편찬 일로 자문(諮問)을 얻기 위해 운허(耘虛) 스님을 모시고 찾아갔었다. 그때 스님이 기거하던 방에 산비둘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자 비둘기가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았다. 무섭고 엄하다고 알려진 스님이 한 방에 비둘기를 거느리고 계시는 걸 보고 친화력이 내 마음에 전해 왔었다.

큰 인물 주변에서는 흔히 신화와 전설이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 들은 스님의 처지에서 볼 때 본분사(本分事)는 결코 아니다. 스님이 출가 수행자로서 평생을 한결같이 투철한 구도(求道) 정신으로 일관해 왔던 일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엄격했고 후학들에게는 옛 부처님과 조사들의 자취를 따르도록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하였다.

스님은 수행자가 지켜야 할 수칙으로 다섯 가지를 강조했다.

잠 많이 자지 말라.

말 많이 하지 말라.

간식하지 말라.

책 보지 말라.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

바꾸어 말하면 적게 자고, 적게 말하고, 적게 먹고, 지식에 안주하지 말고, 제자리를 지키라는 가르침이다. 진정한 수행자는 소욕(少欲)으로 지족(知足)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 그 연배의 스님네 중에서 스님처럼 책을 많이, 그리고 널리 읽은 분은 없을 듯싶은데, 책을 보지 말라고 한 것이다. 참선 수행자에게는 그것이 설사 부처나 조사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눈엣가시와 같다는 것, 스스로 탐구해서 몸소 체험하는 일만이 참으로 자기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신문사에서 기획물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 사전에 의논이 돼 기자들이 갔다. 일을 막 시작하려던 참인데 갑자기 안 하시겠다는 것이다. 까닭인즉, 몸도 고단하고 이런 때 사진을 찍으면 잘 안 나온다는 것이다. 기자들이 난감해하면서 어쩔 바를 몰라 하기에, 내가 대신 큰스님 방에 들어가 설득하기로 했다.

큰스님께는 대단히 죄송한 표현이지만, 어린아이 달래듯이 듣기 좋은 말로 차근차근 말씀드렸더니 못 이긴 듯이 인터뷰에 응하셨다. 인터뷰 끝에 기분이 좋으셔서 기자들과 함께 사진도 여러 장 찍으셨다. 이렇듯 어린아이 같은 면이 큰스님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스님은 어린아이들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들은 때 묻지 않은 천진한 부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해 여름, 부탁받은 일이 있어 백련암으로 스님을 뵈러 갔더니, 나를 보시자마자 “법정 스님도 변했네.”라고 하셨다. 왜요? 라고 물으니,

전에는 무명옷만 입더니 이제는 화학섬유로 된 옷을 입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사실 나는 고집스럽게도 면직 옷만을 입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자취를 하면서부터는 때도 덜 타고 빨아서 입기도 간편한 섬유 옷을 걸치기도 한다. 그리고 시주 것을 얻어 입는 처지에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주는 대로 입어야겠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큰스님께서는 당신이 입으려고 챙겨둔 무명옷 한 벌을 내 성미에 맞도록 행건까지 챙겨 주셨다. 나는 아직도 그 옷을 기워가면서 잘 입고 있다. 큰스님의 자상하고 인자한 성품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일이었다.

스님은 다음과 같은 열반송(涅槃頌)을 남기셨다. 음색을 달리해서 옮겨 보았다.

한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그 죄업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이리.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에 걸려 있다.

선사들은 마지막 남긴 말조차 그 표현이 거칠고 과격하다. 산 체험을 죽은 언어와 문자를 빌려서 쓰자니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열반송을 후학들은 자신의 선 자리를 되돌아보는 간절한 법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려, 온 누리를 환히 비추고 있다. ― 법정 스님

➂ 강경구 동의대 교수

---스님이 한국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우선 초인적 수행이다. 8년의 장좌불와(눕지 않고 좌선함)와 10년의 동구불출(암자의 문을 나서지 않음)을 통한 자기 점검은 불교의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신화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음은 확고한 깨달음이다. 성철스님은 일상생활은 물론 잠자는 중에도 화두 참구(參究·참선하며 진리를 탐구함)에 한결같은 삼매(三昧)가 있어야 하고 그것조차 뚫고 지날 때 깨달음의 차원이 열린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것을 깨달음의 표준으로 제시했다.

성철 스님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는 한국 불교의 수행⋅교육⋅포교⋅의식주의 모든 측면에서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현재의 조계종은 봉암사 결사의 초석 위에 세워졌다. 성철 스님이 시대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평가받게 된 것은 그 제자들, 특히 원택 스님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성철 스님이 대중에게 남긴 가르침의 핵심은

첫째는 물질을 넘어서는 정신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은 예외 없이 티끌로 돌아가지만, 정신은 불생불멸이라는 것이다. 불생불멸의 본래 정신이 우리의 영원한 자산이므로 그 계발에 힘써야 하며 우리 각자는 모두 절대적 존엄성을 갖춘 부처라는 점에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갖춘 본래 부처는 태양과 같다. 그런데 시비선악의 분별로부터 시작되는 번뇌 망상이라는 구름이 그것을 가리고 있으니, 구름을 걷어내고 본래 청정하고 완전한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불교를 믿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속이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머물지 않는 마음을 실천하되 가능하면 화두를 가슴에 품은 사람으로 삶의 모든 현장을 상대하자는 것이다.

셋째는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에 의지해 성립하는 존재이다. 남을 위한 기도를 할 때 자기를 위한 기도가 성취되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

 

 

 

 

 

 

 

 

<성철(性徹, 1912~1993) 큰스님 이야기>

<성철(性徹, 1912~1993) 큰스님 이야기> 1) 출가 성철 스님은 1912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blo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