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법문 (12편)

수선님 2023. 9. 17. 13:11

✻ 성철스님 법문 :

1. 참선하는 법

2. 내가 부처가 된 때

3. 구도자의 질문

4. 광수공양

5. 무심이 부처다

6. 영혼의 세계

7. 해탈의 길

8. 신심이 성지다

9. 불샐불멸과 중도

10. 일승법과 방편

11. 불,법,승

12. 부처님같이 존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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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투 : 성철스님 법문 / 2009. 8. 26

https://ntwo.tistory.com/m/category/%EC%84%A0%20%EC%88%98%ED%96%89/%EC%84%B1%EC%B2%A0%EC%8A%A4%EB%8B%98%20%EB%B2%95%EB%AC%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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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하는 법

 1.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이다'〔一切唯心〕라고 말합니다.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卽心卽佛이라고도 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에 담겨 있는 만치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다 봐야 할 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불교는 모르고 마는 것인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마음 '心' 자 한 자에 있습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心자 한 자 위에 서 있어서 이 한 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불교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일체 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고 三世諸佛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自初至終이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마음의 눈을 뜨자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자기의 본성, 즉 自性을 보는데 그것을 見性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불교에 관심이 있고 참선 좀 한다는 사람은 참선 시작한 지 한 사나흘도 안되어 모두 견성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곳에도 견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견성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大乘起信論에 보면,

보살지가 다하여

멀리 미세망상을 떠나면

마음의 성품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을 구경각이라 한다.

菩薩地盡

遠離徵細

得見心性

名究竟覺

  보살이 수행을 하여서 마침내 十地와 等覺을 넘어서서 가장 미세한 망상인 제8阿賴耶識의 根本無明까지 완전히 다 떨어져 버리면 眞如가 나타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견성이고 구경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妙覺이라고도 합니다.

  또 涅槃經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상정각을 이루면

부처님 성품을 볼 수 있고,

부처님 성품을 보면

무상정각을 이룬다.

成無上正覺

得見佛性

得見佛性

成無上正覺

  위 없는 바른 깨달음, 즉 성불이 바로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을 보는 것이고, 불성을 보는 견성이 바로 바른 깨달음인 성불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기신론에서 말씀하신 '구경각이 견성'이라는 것과 내용이 꼭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열반경에서는 더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의 지위가 십지가 되어도

불성은 아직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菩薩地盡十地

尙未明了知見佛性

  결국 보살의 수행단계가 十地가 되어도 견성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불해야만 견성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견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喩伽師地論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경지보살은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究竟地菩薩

如微闇中見物

  어두운 곳에서는 물건의 바른 모습을 볼 수 없듯이 십지나 등각위의 구경지보살이 불성을 보는 것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결국 일체만법의 본 모습인 자성을 보려면,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듯하는 수행단계를 지나서 밝은 햇빛 속으로 쑥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즉 구경각을 성취해서 성불하는 것이 바로 견성인 것입니다.

  그럼 禪宗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선종의 스님들 중에서도 운문종의 宗祖인 雲門스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십지보살이

설법은 구름일고 비오듯 하여도

견성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과 같다.

十地菩薩

說法如雲如雨

見性如隔羅穀

  십지보살은 法雲地보살이라 하여 법문을 할 때는 온 천지에 구름이 덮히고 비가 쏟아지듯 그렇게 법문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견성 즉 자성을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 같다는 말이니, 비단으로 눈을 가렸는데 어떻게 물체를 바로 볼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이 대승불교의 總論이라고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에서는 보살지가 다 끝난 구경각을 견성이라 했고, 부처님 최후의 법문인 열반경에서는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인데 십지보살도 견성 못했다고 하였고, 唯識宗의 所依經典인 유가사지론에서는 불성을 보는 것은 구경지보살도 어두운 가운데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하였고, 宗門의 조사인 운문스님은 십지보살도 견성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禪과 敎를 통해서 어느 점에서 보든지 간에 견성이 바로 성불이며, 그것은 보살수행의 십지와 등각을 넘어서 구경각을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지는 고사하고 삼현三賢도 아닌 단계, 비유하자면 층층대의 맨 꼭대기가 견성인데 그 첫째 계단에도 올라가지 못하고서 견성했다고, 道通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견성해서 다시 성불한다고 하니 대체 그 견성은 어떤 것인지 이것이 요새 불교 믿는 사람의 큰 病痛입니다.

  그렇다면 이 병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하면 普照스님이 지은 修心訣에서 비롯됩니다. 거기에 頓悟漸修라 하여 자성을 깨치는 것을 돈오라 하고, 돈오한 후에 오래 익힌 習氣를 없애는 漸修를 닦아야 한다고 하였고, 그 돈오한 위치가 보살의 수행 次第의 十信初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보조스님은 중국의 圭峯스님의 사상을 이어 받아서 돈오 점수를 주장했습니다만, 규봉스님은 십신초인 보살지를 돈오 즉 견성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또 그가 주장한 깨침이란 것은 단지 교학상의 이론을 아는 解悟를 말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돈오를 견성이라하면서 그 지위가 十信初라고 節要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려시대의 큰 스님인 보조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잘못 되었겠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經이나 論에서는 분명히 삼현 십지를 넘어선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을 견성이라 하고 있으니, 결국 보조스님의 수심결이 기신론보다 낫고, 열반경보다 낫고 유가사지론보다 낫다는 말인가? 또 종문의 대표적 스님인 운문스님보다 낫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보조스님이 수심결에서 말씀하신 것, 十地初에서의 돈오가 견성이라는 그 사상은 근본적으로 시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지보살이나 구경각이니 하는 그 깨달음의 경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표준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데 대해서 궁금증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宗門에 분명한 표준이 있습니다.

 

2

  화엄경 十地品에 보면,

"보살지가 7지(地)가 되면 꿈속에서도 장애를 받지 않고 공부가 여여하다."

  참선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고 있을 때에도 아무 장애를 받지 않고 공부가 한결 같으면 7지보살이라고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7지의 보살이 설사 꿈에는 공부가 一如하더라 해도 깊은 잠에 들면 캄캄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잠이 깊이 들어도 일여한 경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잠을 자는 것 같지만

실지는 잠을 자지 않는다.

外似現睡

實無睡也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어도 정신 상태는 항상 밝아 있어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항상 밝아 있는 정신 상태가 올 것 같으면 8지 보살 이상 즉 自在位라 합니다. 그런데 자재위에는 두 종류가 있어서 깊은 잠 즉, 숙면에서일여하여도 아리야식의 미세한 망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8지 이상의 자재 보살이고, 그 미세망상까지 완전히 다 끊어져 없어져 버리면 그 때에는 眞如가 드러나고 그것이 견성이고 부처님입니다. 그때는 如來位라 합니다.

  불교에서 수행하여 공부하는 단계를 보면, 첫째 動靜一如 즉 일상 생활에서 가고 오고 할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말을 하거나 안 하거나 변함없이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如如不變하여야 합니다.

  동정일여가 되어도 잠이 들어 꿈을 꾸면 공부는 없어지고 꿈속에서 딴 짓하며 놀고 있는데, 꿈에서도 일여한 것을 夢中一如라 합니다.

  몽중일여가 되어도 앞에서 말했듯이 잠이 깊이 들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잠이 꽉 들었을 때에도 여여한 것을 熟眠一如라 합니다.

  숙면일여가 되어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百千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된다 말입니다. 그리하여 깨쳐야만 그것이 실제 견성입니다.

  그런데 참선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숙면일여는 고사하고, 몽중일여도 고사하고 더구나 동정일여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견성했다, 깨쳤다고 인정해 달라고 나한테 온 사람만도 수 백명은 보았습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무엇인가가 정신을 확 덮어버립니다. 그 때에는 자기가 깨친 것 같고 자기가 부처님보다 나은 것 같고, 조사스님보다 나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그런 병이 있습니다. 이 병에 들어 놓으면 누구 말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래도 여러 가지로 설명해 주면 어떤 사람은 잘못된 줄 알고 다시 공부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병을 한동안 앓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젊은 스님 한 사람이 불교를 믿고 참선을 한다는 處士들 모임에 갔더라고 합니다. 약 백여명 모인 처사들 중에서 90명은 견성했더라는 것입니다.

'이럴 것이 아니라 해인사 큰스님께 가서 한번 물어보시오'

'뭐, 큰스님이니 작은스님이니 물어볼 것 있습니까'

  큰스님, 작은스님이 소용없다니, 그렇게 되면 부처님도 소용없습니다. 이리되면 곤란합니다. 좀 오래전의 일입니다. 70세 남짓 된 노인이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그 때에도 3천배 절하고서 내 방에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안 오려 했는데 옆의 사람들이 하도 가 보라고 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70이나 되면서 옆의 사람이 가보라 한다고 쫓아와, 이 늙은이야, 자기 오기 싫으면 안 오면 그만이지 대체 무슨 일로 옆에서는 그렇게 권했오?'

  '내가 40여년을 참선을 하는데 벌써 20년 전에 확철히 깨쳤습니다. 그 후 여러 스님들을 찾아 다니면서 물어 봐도 별 수 없어 이젠 찾아 다니지도 않는데, 그런데 '성철스님께 가보라'고 하도 이야기해서 할 수 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래 어쨌든 잘 왔오. 들어보니 노인은 참 좋은 보물을 갖고 있오. 잠깐 앉아 있는데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몇 시간도 금방 지나가 버리니 그런 좋은 보물이 또 어디 있겠오. 내가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딱 양심대로 말하시오. 거짓말하면 죽습니다. 그 보물이 꿈에도 있습니까?'

  '(눈이 둥그래지며) 꿈에는 없습니다.'

  '뭐, 꿈에는 없다고? 이 늙은 놈아! 꿈에도 안되는 그걸 가지고 공부라고 善知識이 있니 없니 하고 있어? 이런 놈은 죽어야 돼. 하루에 만 명을 때려 죽여도 괜찮아, 인과도 없어.'

  그리고는 실제 주장자로 두들겨 패주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맞고 있더만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더니 자기 공부가 틀린 줄 알고서 다시 새로 공부를 배우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영감이 살아 있습니다. 80세가 넘었는데도.

  이런 병폐가 실제 많이 있습니다. 꿈에도 안 되는 이것을 가지고 자기가 천하 제일인 듯이 하고 다닙니다. 여기 이 대중 가운데에도 나한테 직접 덤빈 사람도 몇 사람 있습니다. 요새도 보면 그 병을 못 버리고 무슨 큰 보물단지나 되는 것처럼 걸머 쥔 사람도 있습니다. 이상으로 견성이라고 하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떤 방법에 의하면 견성을 할 수 있는가?

 

3.

  불교에서는 성불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灌法을 한다, 呪力을 한다, 經을 읽는다, 다라니를 외우는 등등,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참선입니다. 견성성불하는 데에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입니다.

  참선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신도나 스님네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신부나 수녀도 백련암에 와서 3천배 절하고 화두 배워갑니다. 나한테서 화두 배우려면 누구든지 3천배 절 안하면 안 가르쳐 주니까.

  며칠 전에도 예수교 믿는 사람들 셋이 와서 3천배 절하고 갔습니다. 이 사람들한테 내가 항상 말합니다.

  '절을 하는데 무슨 조건으로 하느냐 하면 하나님 반대하고 예수 가장 많이 욕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라고 축원하고 절해라.'

  이렇게 말하면 그들도 참 좋아합니다. 이런 것이 종교인의 자세 아닙니까.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우리 종교 안 믿는 사람은 모두 다 나쁜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면 그는 점잖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를 욕하고 나를 해치려하면 할수록 그 사람을 더 존경하고 그 사람을 더 도우고 그 사람을 더 좋은 자리에 앉게 하라고 부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닦아야 된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교나 다른 종교인들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톨릭 수도원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왜관에 있는데 그 수도원의 독일인 원장이 나한테서 화두를 배운지 1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에도 종종 왔는데 화두 공부는 해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 와서 화두를 배운다고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네들 천주교에서는 바이블 이외에는 무엇으로써 교리의 依支로 삼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의 神學大典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아퀴나스는 그 책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자기 마음 가운데 큰 변동이 일어나서 그 책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버렸는데, 처음에는 금덩어리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썩은 지푸라기인줄 알고 차버린 그 책에 매달리지 말고, 그토록 심경변화된 그 마음자리, 그것을 한 번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화두를 부지런히 익히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도 화두를 배워서 실제로 참선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마음 닦는 근본 공부인 禪이란 것을 알아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話頭를 말하자면 또 문제가 따릅니다. 화두를 가르쳐 주면서 물어봅니다. 어떤 사람은 화두가 뭣인지도 모르고 옆에서 배우라고 해서 배운다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은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고는 뭐라고 뭐라고 아는 체를 합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화두 즉 公案이라 하는 것은 마음의 눈을 떠서 확철히 깨쳐야 알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여 비록 몽중일여가 되어도 모르는 것이고 또 숙면일여가 되어도 모르는 것인데, 그런데 망상이 죽 끓듯이 끓고 있는 데에서 어떻게 화두를 안다고 하는지, 이것이 조금 전에 말했듯이 큰 병입니다.

  그럼, 어째서 화두를 안다고 하는가? 껍데기만 보고 아는 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만 보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말 밖에 뜻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예전 宗門의 스님네들은 暗號密令이라고 하였습니다. 암호라는 것이 본래 말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릅니다. 하늘 '天'할 때 '天'한다고 그냥 '하늘'인 줄 알다가는 그 암호 뜻은 영원히 모르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안은 모두 다 암호밀령입니다. 겉으로 말하는 그것이 속내용이 아닙니다. 속내용은 따로 암호로 되어 있어서 숙면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큰 병통을 가진 이는 일본 사람들입니다.

  일본 駒澤大學에서 '禪學大辭典'이라는 책을 약 30여년 걸려서 만들었다고 하기에 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니 중요한 공안은 전부 해설해 놓았습니다. 그 책을 보면 참선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안이 전부 해설 다 되어 있으니까 내가 여러 번 말했습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 가장 나쁜 책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선학대사전이야. 화두를 해설하는 법이 어디 있어.'

  그런데 구택대학은 曹洞宗 계통인데 조동종의 宗祖되는 洞山良价화상이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스님의 불법과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를 위해 설파해 주지 않았음을 귀히 여긴다.

不重先師佛法道德

只貴不爲我說破

  화두의 생명이란 설명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또 설명될 수도 없고, 설명하면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죽어버립니다. 봉사에게 아무리 丹靑 이야기한 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습니다. 자기가 눈을 떠서 실제로 보게 해 줄 따름입니다.

  이처럼 조동종의 개조되는 동산양개화상은 화두란 설명하면 다 죽는다고, 설명은 절대 안 한다고 평생 그렇게 말했는데 후세에 그 종파의 승려들은 떼를 지어서 수 십년을 연구하여 화두를 설명한 책을 내놓았으니, 이것은 자기네 조동종이나 선종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조동종 양개화상에 대해서도 반역입니다. 이렇게 되면 조동종은 宗名을 바꾸어야 될 것입니다. 反逆宗이라고.

  일본에 이런 사람이 또 있습니다. 일본 불교학자로 세계적 권위자인 中村元이라는 학자가 있는데, 언젠가 해인사에도 왔더라고 전해만 들었습니다. 그의 저서로 「東洋人의 思惟方法」이라는 책이 있는데 유명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었습니다. 그 책 속에 보면 선종의 화두인 '삼서근'(麻三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부처님이냐고 물었는데 대해서 어째서 '삼서근'(麻三斤)이라고 대답했느야 하면 자연현상은 모든 것이 절대이어서 부처님도 절대이고, 삼서근도 절대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물었는데 대해 삼서근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딱 잘라서 단안을 해버렸습니다. 큰일 아닙니까. 혼자만 망하든지 말든지 하지 온 불교를 망치려고하니.

  그러나 그의 스승인 宇井伯壽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禪에 대해서는 門外漢이다' 이렇게 아주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이것이 학자적인 양심입니다. 자기는 안 깨쳤으니까, 자기는 文字僧이니까 선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만 기록했지 선 법문, 禪理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도 하지 않고 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학자의 참 양심입니다. 그런데 中村元은 화두에 대해 딱 단안을 내리고 있으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화두를 설명하려고 하면 불교는 영원히 망해버리고 맙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화두의 하나인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에 대해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선종에서 유명한 책인 碧巖錄에 頌을 붙인 운문종의 설두 스님이 공부하러 다닐 때 어느 절에서 한 道伴과 정전백수자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문득 보니 심부름하는 行者가 빙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간 후에 불렀습니다.

  '이놈아, 스님네들 법담하는데 왜 웃어?'

  '허허, 눈 멀었습니다. 정전백수자는 그런 것이 아니니,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흰토끼가 몸을 비켜 옛 길을 가니

눈 푸른 매가 언 듯 보고 토끼를 낚아가네

뒤쫓아온 사냥개는 이것을 모르고

공연히 나무만 안고 빙빙 도는도다.

白 橫身當古路

蒼鷹一見便生擒

後來獵犬無靈性

空向古椿下處尋

  뜰 앞의 '잣나무'라 할 때 그 뜻은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지 잣나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 눈 뜬 매는 토끼를 잡아가 버리고 멍텅구리 개는 '잣나무'라고 하니 나무만 안고 빙빙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전백수자라 할 때 그 뜻은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는 것이니 나무 밑에 가서 천 년 만 년 돌아봐야 그 뜻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금 전에 말했듯이 '화두는 암호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생각나는 대로 이리저리 해석할 수 없는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두에 대해 또 좋은 법문이 있습니다. 佛鑑懃선사라는 스님의 법문입니다.

오색비단 구름 위에 신선이 나타나서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누구나 빨리 신선의 얼굴을 볼 것이요

신선의 손에 든 부채는 보지 말아라.

彩雲影裏神仙現

手把紅羅扇遮面

急須著眼看仙人

莫看仙人手中扇

  생각해 보십시오. 신선이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빨간 부채로 낯을 가리었습니다. 신선을 보기는 봐야겠는데, 낯가리는 부채를 봤다고 신선봤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화두에 있어서는 모든 법문이 다 이렇습니다. '정전백수자'니 '삼서근'이니 '조주무자(趙州無子)'니 하는 것은 다 손에 든 부채입니다. 부채! 눈에 드러난 것은 부채일 뿐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 본 사람이 아닙니다. 빨간 부채를 보고서 신선보았다고 하면 그 말 믿어서 되겠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화두는 암호인데 이 암호 내용은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느냐 하면 잠이 꽉 깊이 들어서도 일여한 데에서 깨쳐야만 풀 수 있는 것이지 그 전에는 못 푼다는 것, 이 근본자세가 딱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이것이 견성인 것입니다. 동시에 '뜰 앞의 잣나무'라는 뜻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날 스님들은 어떤 식으로 공부했는가?

 

4

  임제종 중흥조로서, 五祖法演禪師, 悟克勤禪師, 大慧宗 禪師 이렇게 세 분이 삼대에서 임제종을 크게 진흥시켜 임제종이 천하에 널리 퍼지게 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대혜스님이 공부한 것은 좋은 참고가 됩니다.

  대혜스님이 공부하다가 스무 살 남짓 됐을 때 깨쳤습니다. '한 소식'해 놓고 보니 석가보다 낫고, 달마보다도 나아 천하에 자기가 제일인 것 같았습니다. '어디 한 번 나서 보자. 어디 누가 있는가.'하고 큰스님들을 찾아가 보니 모두 별 것 아닙니다. 자기가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기가 제일이라고 쫓아 다니는 판입니다. 당시 임제종 黃龍派에 湛堂無準선사가 계셨습니다. 대혜스님이 그 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병의 물을 쏟듯, 폭포수가 쏟아지듯 아는 체 하는 말을 막 쏟아 부었습니다. 담당스님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네 좋은 것 얻었네. 그런데 그 좋은 보물 잠들어서도 있던가?'하고 물어왔습니다.

  자신만만하여 橫行天下하여 석가보다도, 달마보다도 낫다하던 그 공부가 잠들어서는 없는 것입니다.

  '스님, 다른 것은 전부 다 자신있습니다. 그런데 잠들어서는 그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잠들어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석가, 달마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것은 병이야 병, 고쳐야 돼.'

  이렇게 자기 병통을 꽉 찌르니 항복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죽자고 공부하다가 나중에 무준선사가 병이 들어 죽은 후에는 그 유언을 따라 원오극선사를 찾아 갔습니다. 찾아가서 무슨 말을 걸어 보려고 하니 무슨 절벽같고 자기 공부는 거미줄 정도도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원오극근선사가 자기의 공부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기색이면 그를 땅 속에 파묻어 버리리라,는 굳은 결심으로 찾아갔는데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하, 내가 천하가 넓고 큰 사람있는 줄 몰랐구나.'

크게 참회하고

  '스님, 제가 공연히 병을 가지고 공부인 줄 잘못 알고 우쭐했는데, 담당무준선사의 법문을 듣고 공부를 하는데 아무리해도 잠들면 공부가 안되니 어찌 해야 됩니까?'

  '이놈아, 쓸데없는 망상 하지 말고 공부 부지런히해. 그 많은 망상 전체가 다 사라지고 난 뒤에, 그때 비로소 공부에 가까이 갈지 몰라.'

  이렇게 꾸중듣고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원오스님 법문 도중에 확철히 깨달았습니다. 기록에 보면 '神悟'라 하였습니다. 신비롭게 깨쳤다는 말입니다. 그때 보니 오매일여입니다. 비로소 꿈에도 경계가 일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원오스님에게 갔습니다. 원오스님은 말조차 들어보지 않고 쫓아냅니다. 말을 하려고 하면 '아니야, 아니야(不是 不是)' 말을 하기도 전에 不是 不是라고만 계속합니다. 그러다가 화두를 묻습니다.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有句無句 如藤倚樹」는 화두를 묻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는 환하게 알 것 같아 대답을 했습니다.

  '이놈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것 아니야. 공부 더 부지런히 해!'

  대혜스님이 그 말을 믿고 不借身命, 생명을 다 바쳐 더욱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참으로 확철히 깨쳤습니다.

  이렇듯 대혜스님은 원옹스님에게 와서야 잠들어도 공부가 되는 데까지 성취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확철히 깨쳤습니다.

  잠이 깊이 들어서도 일여한 경계에서 원오스님은

  '애석하다. 죽기는 죽었는데 살아나지 못했구나(可借死了不得活)'

  일체망상이 다 끊어지고 잠이 들어서도 공부가 여여한 그 때는 완전히 죽은 때입니다. 죽기는 죽었는데 거기서 살아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아나느냐?

화두를 참구 안하는

이것이 큰 병이다.

不疑言句

是爲大病

  공부란 것이 잠이 깊이 들어서 일여한 거기에서도 모르는 것이고, 견성이 아니고 눈을 바로 뜬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참으로 크게 살아나야만 그것이 바로 깨친 것이고, 화두를 바로 안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마음의 눈을 바로 뜬 것입니다.

  지금 까지 중국의 스님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나라 선문 중에 太古스님이 계십니다. 태고스님이 공부를 하여 20 여년만인 40 여세에 오매일여가 되고 그 후 확철히 깨쳤습니다. 깨치고 보니 당시 고려의 큰스님네들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印可해 줄 스님도 없고, 자기 공부를 알 스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임제정맥을 바로 이어 가지고 돌아온 스님입니다. 태고스님 같은 분, 이 동쪽 변방에 나신 스님이지만 그 분은 바로 깨치고, 바로 알고, 바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스님은 항시 하시는 말씀이

점점 오매일여한 때에 이르렀어도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

漸到寤寐一如時

只要話頭心不離

  이 한마디에 스님의 공부가 들어있습니다. 공부를 하여 오매일여한 경계, 잠이 아무리 들어도 일여하며 8지이상 보살경계, 거기에서도 화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몽중일여도 안된 거기에서 화두 다 알았다고 하고 내말 한번 들어보라 하는데 이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보고 아무리 좋은 약을 가지고 와서 '이 약만 먹으면 산다'하며 아무리 먹으라 해도 안먹고 죽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먹여서 살려낼 재주 없습니다.

  배가 고파 다 죽어가는 사람보고 滿盤珍羞를 차려와서 '이것만 잡수시면 삽니다'해도 안먹고 죽으니 부처님도 해 볼 재주 없습니다. 아난이 30여년을 부처님 모셨지만 아난이 자기 공부 안하는 것은 부처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오늘 법문을 요약하면, 불교란 것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마음 心자 한자에 있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만법을 다 알 수 있는 것이고, 삼세제불을 다 볼 수 있는 것이고, 일체법을 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 바로 자성을 보는 것이고 견성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든지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바로 떠야 되는데 그 가장 빠른 길이 화두입니다.

  이 화두란 것은 잠이 깊이 들어서 일여한 경계에서도 모르는 것이고 거기에서 크게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무슨 경계가 나서 크게 깨친 것 같아도 실제 동정에 일여하지 못하고 몽중에 일여하지 못하고 숙면에 일여하지 못하면 화두를 바로 안 것도 아니고 견성도 아니고 마음의 눈을 뜬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 근본표준이 어디 있느냐 하면 잠들어서도 일여하느냐 않느냐,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부지런히 화두를 하여 잠이 꽉 들어서도 크게 살아나고 크게 깨쳐서 화두를 바로 아는 사람, 마음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해서 하나라도 좋고 반쪽이라도 좋으니 실지로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생겨서 부처님 慧命을 바로 잇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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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처가 된 때

내가 부처가 된 이후로

지내온 많은 세월은

한량없는 백천만억 아승지로다.

自我得佛來 所經諸劫數 無量百千萬億阿僧祗

  이 구절은 법화경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있는 말씀인데 법화경의 골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성불한 뒤로 얼마만한 세월이 경과했느냐' 하면 숫자로써 형용할 수 없는 한없이 많은 세월이 경과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보통으로 봐서 이것은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인도에 출현해서 성불하여 열반하신 지 지금부터 2천 5백여 년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부처님 말씀이 자기가 성불한 지가 무량백천만억 아승지 이전이라고 했을까? 어째서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사실에 있어서 부처님이 2천 5백년 전에 출현하여 성불하신 것은 방편이고 실지로는 한량없는 무수한 아승지겁 이전에 벌써 성불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불교에 대한 기본자세, 근본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보통 물으면 '성불이다', 즉 부처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으례껏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실제 내용은 중생이 본래부처(本來是佛)라는 것입니다. 깨쳤다는 것은 본래부처라는 것을 깨쳤다는 말일 뿐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는 자기가 늘 중생인 줄로 알았는데 깨치고 보니 억천만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었는데 다시 무슨 성불을 또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성불한다, 성불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중생을 지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부처님이 도를 깨쳤다고 하는 것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한 본래모습 그것을 바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 일체 생명, 심지어는 구르는 돌과 서 있는 바위, 유정 무정(有情 無情) 전체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다 성불했다는 그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 합니다. 모를 때는 사바세계이지만 알고 보면 이곳은 사바세계가 아니고 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는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바로 깨쳐서 본래 자기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는 것, 이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온 시방법계가 불국토(佛國土) 아닌 곳, 정토(淨土) 아닌 나라가 없다는 이것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목표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을 합니다.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어 천당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본래 부처인 줄 확실히 알고 온 시방법계가 본래 불국토며, 정토인 줄 알면 그만이지 또 무슨 남에게서 받아야 할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불교에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절대로 구원이란 없습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도 따라 올 수 없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실제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서도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불(佛), 부처란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이르는 말입니다.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 아닌 것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사람은 물론 동물도, 식물도, 광물도, 심지어 저 허공까지도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또한 모든 처소시방법계 전체가 모두 다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즉 정토이며 불국토인 것입니다. 즉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부처고, 모든 처소가 전부 다 정토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바세계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내가 언제나 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천하를 비추고 환한 대낮이라도 눈 감은 사람은 광명을 못 봅니다. 앉으나 서나 전체가 캄캄할 뿐 광명을 못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우주법계 전체가 광명인 동시에 대낮 그대로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부처 아닌 존재 없고 전체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습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그러나 이것을 모르고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내가 중생이다', '여기가 사바세계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근본 병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눈을 떴나, 눈을 감았나,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광명이고,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암흑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부처이고, 전체가 다 불국토이지만, 마음의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중생이고 전체가 다 사바세계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저것 말할 것 없습니다. 누가 눈감고 캄캄한 암흑세계에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광명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부처님 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정토에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시 바삐 어떻게든 노력하여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가고 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천당에 가니 극락세계에 가니 하는 것은 모두 헛된 소리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내가 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더라. 본래부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실제는 내가 죽지 않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한다.

爲度衆生故 方便現涅盤

而實不滅度 常住此說法

  이 구절은 앞의 게송에 계속되는 구절인데, 무슨 뜻인가 하면 부처님께서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겁이 다하도록 절대로 멸하지 않고 여기 계시면서 항상 법문을 설한다는 것입니다.

  '여기'라 함은 부처님 계신 곳을 말함이지 인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계시는 곳은 전부 여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천백 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법계에 안나타나는 곳이 없으시니까 시방법계가 다 여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상주불멸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절대로 멸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상주불멸, 미래에도 상주불멸, 현재에도 상주불멸 이렇게 되면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화장찰해(華藏刹海), 무진법계, 극락정토 뭐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름이야 뭐라고 부르든 간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부처님은 항상 계시면서 설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석가모니라고 하는 개인 한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삼라만상 일체가 다 과거부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항상 무진법문을 설하고 있으며 무량불사(無量佛事)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저 산꼭대기에 서 있는 바위까지도 법당 안에 계시는 부처님보다 몇 백배 이상 가는 설법을 항상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위가 설법한다고 하면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열립니다. 그러면 거기에 서 있는 바위가 항상 무진설법을 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고 합니다.

  유정(有情) 즉 생물은 으례 움직이고 소리도 내고 하니까 설법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무정물(無情物)인 돌이나 바위, 흙덩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무슨 설법을 하는가 하겠지만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항상 설법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허공까지도 항상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온 시방세계에 설법 안 하는 존재가 없고 불사(佛事) 안하는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불교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제도하고 누구를 구원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오직 근본요(根本要)는 어디 있느냐 하면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부터 성불한 면목,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부터가 전체 불국토라는 것, 이것만 바로 알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참 좋은 법이야. 우리 모두가 불국토에 살고, 우리 전체가 모두 부처라고 하니 노력할 것이 뭐 있나, 공부도 할 것 없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안 좋은가.'

  이렇게도 혹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근본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토(佛土)이고, 본래 해가 떠서 온 천지를 비추고 있지만 눈감은 사람을 광명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이지만 눈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알간 거울에 먼지가 꽉 끼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래 깨끗하고 말갛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있는대로 다 비춥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먼지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명경(明鏡)에 때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하는 것,  여기에 묘(妙)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부처라는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불국토에 산다, 이것만 믿고 '내가 공부를 안해도 된다', '눈뜰 필요없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봉사를 못면합니다. 영원토록 캄캄 밤중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슨 자신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설사 우리가 눈을 감고 앉아서 광명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광명 속에 산다는 것, 광명속에 살고 있으니 눈만 뜨면 그만이라는 것, 설사 내가 완전한 부처의 행동을 할 수 없고 불국토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본래 부처라는 것, 본래 불국토에 산다는 그런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는 것은 눈을 뜨지 못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전후좌우에 황금이 꼭 차 있는 것을 알 것 같으면 눈만 뜨면 그 황금이 모두 내 물건 내 소유이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입니까?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바 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현실 이대로가 불생 불멸인데 이 불생불멸의 원리는 자고로 불교의 특권이요, 전용어가 되어 있다고.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원자물리학에서도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리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불교가 수승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원래 그런 원리가 있는데 요즘 과학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불교에 가까이 온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여 년 전에 우주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하셨고, 과학은 오늘에 와서야 자연의 불생불멸을 실증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내용은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존재는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여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무량불사를 하는 그런 큰 존재입니다. 다만 병이 어느 곳에 있느냐, 눈을 뜨지 못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님도 딱하시네. 내 눈은 멀쩡한데 내가 기둥이라도 들이받았는가. 왜 우리 보고 자꾸만 눈감았다. 눈감았다, 하시는고?'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껍데기 눈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한밤중에 바늘귀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눈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그런 눈은 안 통합니다. 속의 눈, 마음의 눈, 마음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명경에 끼인 때를 벗겨야 합니다. 명경의 때를 다 닦아내어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해가 대명중천(大明中天)하여 시방세계를 고루 비추고 있는 것이, 맑고 맑은 거울에 고요하게 그대로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울의 때를 벗기고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가? 가장 쉬운 방법이며 제일 빠른 방법이 참선(參禪)입니다. 화두(話頭)를 배워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두를 바로 깨칠 것 같으면 마음의 눈을 안뜰래야 안뜰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맙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 부처지 위에 들어간다, 한번 훌쩍 뛰면 눈 다 떠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법이 참선하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도 방법이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그 원인, 마음 눈이 어두워지는 원인이 있으니 그것을 제거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인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눈을 가린 삼독, 삼독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저절로 안밝아질래야 안밝아질 수 없습니다. 그 삼독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근본이냐 하면 탐욕입니다. 탐욕! 탐내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서 성내는 마음도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탐욕만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 나! 남이야 죽든가 말든가 알 턱이 있나, 어떻게든 나만 좀 잘 살자, 나만! 하는 데에서 모든 욕심이 다 생기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눈은 영영 어두워집니다. 캄캄하게 자꾸 더 어두워집니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마음 눈을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것, 나라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나깨나 나뿐 아닙니까? 그 생각을 완전히 거꾸로 해서 자나깨나 남의 생각 남의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기준을 남을 위해 사는 데에 둡니다. 남 도우는 데에 기준을 둔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삼독이 녹아지는 동시에 마음의 눈이 자꾸자꾸 밝아집니다. 그리하여 탐, 진, 치 삼독이 완전히 다 녹아버리면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다 없어져 버리는데 눈이 안보일 리 있습니까? 탐, 진, 치 삼독이 다 녹아버리는 데에 가서는 눈이 완전히 뜨여서 저 밝은 광명을 환히 볼 수 있고, 과거 무량아승지겁부터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방세계가 전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이득이 오느냐 하면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을!

  자기는 굶어 죽더라도 남을 도와주라고 하면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자신부터 한번 굶어보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70평생을 산다고 해도, 80살을 산다고 해도 잠깐 동안입니다. 설사 100살을 살면서 지구 땅덩어리의 온 재산을 전부 내 살림살이로 만든다고 해봅시다. 부처님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해도 또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온 시방법계를 내 집으로 삼고 내 살림살이로 삼았는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인생 100년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하고 잘 산다고 해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시방법계, 시방불토에서 무애자재한 그런 대생활을 한 그것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티끌 하나도 안됩니다.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안됩니다. 내용을 보면 10원짜리도 안됩니다.

  그러나 10원짜리도 안 되는 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서 남을 위해서만 살고 어떻게든 남을 위해서만 노력합니다. 그러면 저 무량아승지겁, 억척만겁 전부터 성불해 있는 그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10원짜리 나를 희생하여 여러 억천만원이 넘는 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괜찮은 장사가 아닙니까. 장사를 하려면 큼직한 장사를 해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사는 것은 공연히 10원 20원 가지고 죽니, 사니 칼부림을 하는 그런 식 아닙니까?

  아주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배고픈 호랑이에게 몸을 잡아먹히셨습니다. 몸뚱이까지 잡아먹히셨으니 말할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배고픈 호랑이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큰 욕심, 큰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물거품같은 몸뚱이 하나를 턱 버리면 그와 동시에 시방법계 큰 불국토에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크면 임금이 될 것이지만 이것도 가져봐야 별 것 아닙니다. 서푼어치의 값도 안되는 줄 알고 왕위도 헌신짝같이 차버리고 큰 돈벌이를 한 것 아닙니까?

  근래에 와서 순치황제(順治皇帝)같은 분은, 만주에 나와서 1년 동안 전쟁을 하여 대청제국(大淸帝國)을 건설한 분입니다. 이것은 중국역사상 가장 큰 나라입니다. 중국 본토 이외에도 남북만주, 내외몽고, 티벳, 인도지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해탈도를 성취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10원짜리 가치도 안 되는 것임을 알고 대청제국을 헌신짝처럼 팽개쳐버리고 그만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금산사(金山寺)라는 절에 가서 다른 것도 아니고 나무하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는 부목(負木)이 되었습니다. 대청제국을 건설한 만고의 대영웅 순치황제같은 사람이 절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나무해 주고 스님네 방에 불이나 때주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공부를 성취 안할래야 안할 수 없습니다.

  순치황제가 출가할 때, '나는 본시 서방의 걸식하며 수도하는 수도승이었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로 타락하였는가? (我本西方一衲子綠何流落帝王家)'하고 탄식하였습니다. 만승천자의 부귀영화를 가장 큰 타락으로 보고 만승천자의 보위(寶位)를 헌신짝 같이 차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욕심이 커서 그렇습니다. 대청제국이란 그것은 10원짜리도 못되고, 참으로 눈을 바로 뜨고 보면 시방법계에서 자유자재하게 생활할터인데 이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나간 이야기를 한 가지 하겠습니다. 6.25사변 때 서울대학에서 교수하던 문박사라고 하는 이가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스님네는 어째서 개인주의만 합니까?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사회와 국가도 다 버리고 산중에 참선한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혼자만 좋으려고 하는 그것이 개인주의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스님네가 개인주의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사회에 살면서 부모 형제 돌보고 있는데, 어째서 제가 개인주의입니까?"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당신 여태 50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 있는지 양심대로 말해 보시오."

  "참으로 순수하게 남을 위해 일해 본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스님네가 부모형제 버리고 떠난 것은 작은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을 위해 살기 위한 것이다. 내 부모 내 형제 이것은 작은 가족이야. 이것을 버리고 떠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 손발을 묶는, 처자권속이라고 하는 쇠사들을 끊어버리고 오직 큰 가족인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야!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당신이야말로 철두철미한 개인주의자 아닌가?"

  "스님 해석이 퍽 보편적이십니다."

  "아니야,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에 모두 그렇게 씌여 있어. '남을 위해서 살아라'하고. 보살의 육도만행(六度萬行) 6바라밀의 처음이 무엇인고 하니 베푸는 것이야.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도우는 것, 그것이 바로 보시(布施)야!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을 위해서 살아라 하는 것이야."

  "……."

  "그러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나 혼자 편안하게 좋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더 크고 귀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릴 뿐이야. 그래서 결국에는 무소유(無所有)가 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 중생을 품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려면 반드시 탐내는 마음 이것을 버려야 하는데, 탐욕을 버리려면 '나만을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하는 이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전에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불공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앞에 갖다 놓고 절하고 복비는 것이 불공이 아니고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도우는 것불공이라고.

  부처님께서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아주 간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신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중생을 잠깐동안이라도 도와줄 것 같으면 그것이 자기 옆에 갖다 놓는 것보다는 여러 억천만배 비교할 수 없는 공덕이라고.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 마음의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영원한 큰 살림살이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도와주는 것이 부처님에게 갖다 놓은 것보다 비유할 수 없는 만큼 큰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일본 천리교(天理敎)의 교주되는 사람이 '나카야마 미키'라는 여자 분입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도 굉장한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공부를 해서 자기 딴에는 마음의 눈을 떠버렸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자기 살림살이는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큰 살림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당신 마누라 였는데 오늘부터는 내가 당신 스승이야! 내가 깨쳤어! 내가 하나님이니까 내 말을 들으시오.'

  '미쳤나? 왜 이러지? 그래 어떻게 하라는 거요?'

  '우리 살림살이를 전부 다 팝시다. 이것 다 해봐야 얼마나 되나요. 모두 다 남에게 나누어줍시다. 그러면 결국에는 참으로 큰 돈벌이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큰 돈벌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재산을 다 팔아서 모두 남에게 줘버렸습니다. 이제 내외는 빈손이 되었습니다. 밥은 얻어 먹으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이익이 되는 것, 남에게 좋은 것, 남 도우는 것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몸으로 일본 역사상 유명한 큰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돈벌이는 크게 한 것입니다. 우선의 조그만 살림살이를 나눠주고서는.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도 큰 살림살이를 한번 해 봐야겠다'이렇게 작정하고 집도 팔고 밭도 팔고 다 팔 사람 있습니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 재산 온통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나누어 준다면! 그렇게만 되면 내가 목탁 가지고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을 위해 아침 저녁으로 예불하며 모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설사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생활방침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이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해 욕심부리는 것은 결국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자꾸 노력하면, 참으로 남을 돕는 생활을 할 것 같으면 결국에는 마음의 눈을 떠서 청천백일(靑天白日)을 환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것을 많이 할 것 없이 한가지라도 남을 도우는 생활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가 앞으로 바른 길로 서려면 승려도 신도도 모두 생활방향이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느냐 하면 남을 돕는 데로 완전히 돌려져야 합니다. 승려가 예전같이 산중에 앉아서 됫쌀이나, 돈푼이나 가지고 와서 불공해 달라고 하면 그걸 놓고 똑딱거리면서 복 주라고 빌고 하는 그런 생활을 그대로 계속하다가는 불교는 앞으로 영원히 없어지고 맙니다.

  절에 다니는 신도도 또한 그렇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자식이 머리만 아파도 쌀되나 가지고 절에 가서 '아이고, 부처님, 우리 자식 얼른 낫게 해주십시오'이런 식의 사고방식으로는 참된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 승려도, 신도도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 발전이 없습니다. 산중에 갇혀서 결국에는 아주 망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불교 승단에는 승려 전문대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을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을 사람들도 논을 팔아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키려고 합니다. 자식 공부 시키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인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도 승려를 자꾸 교육시켜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데 어떻게 포교하며 또 어떻게 남을 지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나중에는 법당의 기왓장을 벗겨 팔아서라도 '승려들을 교육시키자'하는 것이 내 근본생각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종단적인 차원에서 꼭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생명이 억천만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 있는데 왜 지금은 캄캄밤중에서 갈팡질팡하는가?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해서 그렇다. 그렇다면 마음의 눈을 뜨는 방법은?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깨치든지 아니면 남을 돕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떡장사를 하든, 술장사를 하든, 고기장사를 하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지 화두를 배워서 마음속으로 화두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화두를 하고, 행동은 남을 도우는 일을 꾸준히 할 것 같으면 어느 날엔가는 마음 눈이 번갯불같이 번쩍 뜨여서 그때에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 있다는 그 말씀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참으로 인간 세상과 천상의 스승이 되어서 무량대불사(無量大佛事)를 미래겁이 다하도록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춤뿐이겠습니까? 큰 잔치가 벌어질 텐데 그렇게 되도록 우리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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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의 질문

1. 생명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일체 만법이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이어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거래(去來)가 없고, 생명(生命)도 거래(去來)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엄(華嚴)에서도 "일체법불생(一切法不生)이요, 일체법불멸(一切法不滅)"이라 하였고 법화(法華)에서도 "제법(諸法)이 종본래(從本來)로 상자적멸상(尙自寂滅相)"이라 하였는데, 이 적멸상(寂滅相)은 생멸(生滅)이 끊어진 불변상(不變相)을 말함입니다.

  이 불생불멸을 진여(眞如), 법계(法界), 연기(緣起), 실상(實相), 법성(法性), 유식(唯識), 유심(唯心) 등 천명만호(千名萬號)로 이름하나 그 내용은 다 동일합니다. 이는 우주의 근본원리이며 불타(佛陀)의 대각 자체(大覺 自體)이어서 일체 불법(一切佛法)이 불생불멸의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불생불멸의 원리는 심심난해하여 불타의 혜안(慧眼)이 아니면 이 원리를 볼 수 없어 불교 이외의 종교나 철학에서는 거론치 못하였으며, 이 불생불멸은 자고로 불교의 전용어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고도로 발달되어 현대과학에서도 원자물리학으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여 불교의 이론에 접근하여 구체적 사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타는 3천 년 전에 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하였고, 과학은 3천 년 후에 불생불멸을 실증하여 시간차는 있으나 그 내용은 상통(相通)합니다. 진리는 하나이므로 바로 보면 그 견해가 다를 수 없습니다. 다만 불타의 혜안(慧眼)이 탁월함에 감탄할 뿐입니다. 불교가 과학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 접근한 과학이론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불생불멸의 상주법계(常住法界)에는 증감과 거래(去來)가 영절(永絶)한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입니다. 이 무진연기상의 일체 생명은 성상일여(性相一如)이며 물심불이(物心不二)여서 유정무정(有情無情)의 구별이 없고, 생명은 유정무정의 총칭입니다.

  그러므로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을 수 있어야만 생명의 참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니 개개(個個) 생명(生命) 전체가 절대여서 생멸거래가 없습니다. 무정(無情) 생명론은 너무 비약적인 것 같으나 유정(有情)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요, 무정(無情)도 항상 활동하고 있으니, 예를 들면, 무정물을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소립자(素粒子)들은 스핀(Spin)을 가져 항상 자동적으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바위들도 간단없이 운동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백억의 살아 있는 석가가 취하여

훈풍 끝에 춤추는도다.

百億活釋迦

醉舞春風端

2. 불교의 이상은 인간의 범주에 머물러야 합니까, 아니면 초월해야 합니까?

  불교에서 볼 때에는 생멸 즉 진여이며, 따라서 현실이 절대이므로 번뇌 즉 보리(菩提)이며(육조단경), 중생 즉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 일체를 초월하여 일체를 구족(具足)한 절대적 존재이니 다시 초월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타가 출현한 것은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전하는 것뿐이요, 중생을 제불로 변성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진금(眞金)을 어떤 사람이 착각하여 황토로 오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금을 아무리 오인하여 황토라 호칭하여 사용하여도 진금은 변함 없이 진금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진금을 다시 구할 것이 아니요, 오인된 착각 즉 망견(妄見)만 시정하면 진금 그대로입니다.

  이와 같이 일시적 착각으로 본래 진불(眞佛)을 중생으로 가칭하여 중생으로 행동하여도 진불은 변함 없으므로 불용구진(不用求眞)이요, 유수식견(唯須息見)하라. 즉 진(眞)을 구하지 말고 오직 망견(妄見)만 제거하면 됩니다.(신심명)

  이렇게 중생이 진불(眞佛)이며, 사바(娑婆)가 즉 정토(淨土)이며, 현실(現實)이 즉 절대(絶對)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편협한 망견을 고집하여 겨울의 얼음을 모르는 여름의 하루살이가 되지 말고 본래시불(本來是佛)의 진(眞)소식을 개오(開悟)하여야 합니다.

비로자나불의 이마 위 사람이

십자가두에 섰도다.

毘盧頂上人

十字街頭立

3. 진정한 뜻에 있어 인간회복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본래 일체를 초월하고 일체를 구족(具足)한 절대적 존재이니 이것을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합니다. 이 본래시불을 중생으로 착각하여 중생이라 가칭하며 중생으로 행동하고 있으니, 이 망견을 버리고 본래불(本來佛)인 인간면목을 확인하는 것이 인간회복입니다.

  진금(眞金)을 황토(黃土)로 착각하였으나 활연히 각성하여 진금(眞金)임을 확인하면 다시는 더 구할 것이 없음과 같습니다. 또한 면경(面鏡)과도 같습니다. 본래 청정한 면경이 일시적으로 때가 끼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나 그때만 닦아 버리면 청정한 그 면경이 그대로 드러나서 일체를 비출 것이니 다른 면경을 구할 것이 없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래면목, 즉 심경(心鏡)을 덮은 때와 먼지를 상세하게 규명하여 그 진애(塵埃)가 티끌만치도 없도록 철저히 제거함을 인간회복의 본령(本領)으로 삼고 있습니다.

  심경을 덮고 있는 이 진애인 망견을 추중( 重)과 미세(微細)로 양분하여 추중( 重)은 제6식, 즉 현재의식이며, 미세는 제8식, 즉 무의식(無意識)입니다. 이것만 완전히 제거하면 자연 통명(洞明)하여 진불인 본래면목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면경을 부수고 오너라.

푸른 하늘도 또한 몽둥이 맞아야 하는도다.

打破鏡來

靑天也須喫棒

4. 종교 안에서 인간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종교를 일반적으로 유한(有限)에서 무한(無限)으로, 상대(相對)에서 절대(絶對)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불교에서는 유한이 즉 무한이며 상대가 절대임을 주장합니다.

  일반 종교는 현실 외에 절대를 따로 세워서 자기가 생존하는 현실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무한의 세계에 들어감을 목표로 삼습니다. 불교에서는 현실이 즉 절대이어서 인간이 절대무한의 세계에 살고 있으니 절대세계를 다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절대'를 '상대'로 착각하는 망견(妄見)만 버리면 삼라만상이 전체가 절대이며 일체가 본래 스스로 해탈하니 불교의 진리는 인간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가령, 태양이 하늘 높이 밝게 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눈을 감고서는 "어둡다, 어둡다"고 소리치면 눈뜬 사람이 볼 때에는 참으로 우스울 것입니다. 그러나 어둡다 한탄하지 말고 눈만 뜨면 자기가 본래 대광명(大光明)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이와 같으니 다만 눈을 가린 망견만 버리면 자연히 눈을 뜨고 광명이 본래 충만해 있었음을 볼 것이니, 눈만 뜨면 인간이 본래 절대 광명 속의 대해탈인(大解脫人)임을 알 것입니다.

부처도 또한 찾아볼 수 없거늘

어떤 것을 중생이라 부르는가.

佛也見不得

云何名衆生

5. 불확실성의 이 시대에 사는 현대인의 방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될 것입니까?

  광명(光明)이 적조(寂照)하여 하사세계(河沙世界)에 편만(遍滿)하니 일체가 각각 자기 위치에서 태평(太平)을 구가하거늘, 무엇이 '불확실'하며 어떻게 '방황'하는지 '불확실', '방황' 등의 언구(言句)는 진정한 불교사전에는 없습니다. 다만 눈을 바로 뜨고 좌우를 두루 보십시오.

  광활한 대로(大路)는 우주보다 더 넓고, 혁혁한 광명은 수천 개 태양이 병조( 照)하는 것과 같아서 설사 천지가 붕괴하더라도 당황할 게 없습니다.

  생사(生死)다 해탈이다 함은 백일하(白日下)의 잠꼬대요, 불타니 보살이니 부름은 명경상의 먼지이니, 우리는 본래의 광명(光明)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수양버들은 실 끝마다 푸르고

복숭아꽃은 조각조각 붉도다.

楊柳系系綠

桃花片片紅

6. 욕망과 물질은 인간에게 있어 무엇입니까?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욕망과 물질은 무가(無價)의 진보(珍寶)입니다.

  자기 개인의 사리사욕을 떠나 국가 민족만을 위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인류라는 협소한 한계를 넘어서서 일체 생명을 위한 욕망과 물질이야말로 참다운 진보(珍寶)입니다.

  자기 개인을 위한 사리사욕은 물론 해독(害毒)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자아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일체를 위해서만 사는 삶은 제불(諸佛)의 본원(本願)이며 보살의 대도(大道)입니다.

만 섬 쌀을 배에 가득 싣고 마음대로 쏟으니

도리어 쌀 한 톨로 인하여 독이 뱀을 삼켰도다.

萬斛盈舟信手拏

劫因一粒甕呑蛇

7. 불교의 사회구제는 가능합니까?

  '구제'라는 어구는 불교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이 절대적 존재로서 일체의 생명이 불타 아님이 없으므로, 불교에 입문(入門)하는 첫 조건이 일체 중생을 부모와 같이 존경하고 사장(師長)과 같이 섬기며 부처님과 같이 시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奉仕)'가 있을 뿐 구제와 구원은 없습니다.

  남을 돕는 것이 불공(佛供)임을 항상 역설하지만, 이 '남'이라 하는 것은 절대자를 지칭함이며 절대자는 불(佛)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즉 불공입니다. 보통 남을 돕는다면 부자가 가난한 이를 돕는 태도인데, 이것은 참으로 남을 도울 줄을 모릅니다. 참다운 도움은 병든 부모를 자식이 모시듯, 배고픈 스승께 음식을 드리듯, 떨어진 옷을 입으신 부처님께 옷을 올리듯 하여 모든 '남'을 항상 받들어 모시는 태도만이 진정한 남을 돕는 것입니다.

  구제라 함은 이와 반대로 약하고 가난한 상대를 불쌍한 생각으로 돕게 되는 바, 이는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이니 불교에서는 구제란 있을 수 없습니다.(니체는 얼마나 값싼 동정을 그다지도 싫어했던가. 니체여!) 어디를 가나 배고픈 부처님, 옷 없는 부처님, 병든 부처님 등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 무수한 부처님들을 효자가 부모 모시듯이, 신도가 부처님 받드는 성심으로 섬기며 돕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니 '봉사'가 있을 뿐 구제는 없습니다.

사자는 여우소리를 내지 않도다.

獅子不作野干鳴

8. 한국 불교는 1980년대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불교에는 만고에 일관된 진리가 있을 뿐, 시대적이거나 지역적인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시하처(何時何處)를 막론하고 불교의 근본정신에 입각하여 만사를 행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일체 생명 즉 중생이 '본래시불(本來是佛)'의 기치를 높이 들고 생명의 절대를 널리 전하며, 모든 사심을 떠나 아무것도 구함이 없이 일체 중생불에서 신명을 다해 봉사하는 것뿐입니다.

천겁을 지나도 과거 아니요

만세에 걸쳐 항상 지금이로다.

歷千劫而不古

 萬世而長今

9. 수행하는 승려들에게 주고 싶은 스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지구가 광대하지만 무변한 허공의 먼 곳에서 바라보면 찾아볼 수도 없는 미소한 물체입니다. 허공이 그렇게도 광활하지만 진여법계에 비하면 대해(大海)의 일적(一滴)에 불과하므로 공생대각중(空生大覺中)은 여해일구발(如海一 發)이라, 즉 허공이 대각(大覺) 속에서 생기(生起)함은 대해(大海)의 물거품이 하나 일어남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체 생명의 본체인 진여법성(眞如法性)의 공용(功用)은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이어서 미진제불이 일시에 출현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언설하여도 법성공용(法性功用)의 일호(一毫)도 설(說)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불가사의한 무가진보(無價珍寶)를 일체 생명이 구유(具有)하고 있으니, 허망한 몽환 속의 구구한 명예와 이양(利養)은 일체 버리고 이 무진장의 보고(寶庫)를 활짝 열어서 일체를 이익케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탐타일립미(貪他一粒米)하여 실각만겁량(失却萬劫糧)이라, 즉 한 톨의 쌀알을 탐하여 만겁의 양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순치(順治)황제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창건한 영웅입니다마는 발심출가(發心出家)할 때에, 자기는 본시 서방의 걸식하며 수도하는 일개 납자(衲子)였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萬乘天子)로 타락하였는고[我本西方一衲子 緣何流落帝王家], 탄식하였습니다. 만승천자의 부귀영화를 가장 큰 타락으로 보고 보위(寶位)를 헌신짝같이 차버리는 용단이야말로 수도인(修道人)의 참다운 심정(心情)입니다.

  그러하니 우리 수행자들은 오직 대각(大覺)을 성취하기 위하여 일체를 희생합시다.

달밝은 깊은 산에 소쩍새 울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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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공양(廣修供養)

    어떤 도적놈이

    나의 가사장삼을 빌려 입고

    부처님을 팔아

    자꾸 죄만 짓는가.

    云何賊人

    假我衣服

    裨販如來

    造種種業

  누구든지 머리를 깎고 부처님 의복인 가사장삼을 빌려 입고 승려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도적 놈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려가 되어 가사장삼 입고 도를 닦아 도를 깨우쳐 중생을 제도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 자기의 생활도구로 먹고 사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전체가 다 도적놈이라고 {능엄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승려가 되어 절에서 살면서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실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가까이는 가봐야 하고 근처에는 가봐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는 못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의 정반대 방향으로는 안 가야 할 것입니다.

  나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

    人身難得

    佛法難逢

  다행히 사람 몸 받고 승려가 되었으니 여기서 불법을 성취하여 중생제도는 못 할지언정 도적놈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그 사람을 도적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이 사는 처소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곳은 절이 아니고 도적의 소굴, 적굴(賊窟)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이 됩니까? 도적놈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적에게 팔려 있으니 도적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지요.

  딴 나라는 다 그만두고라도, 우리나라에 절도 많고 승려도 많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의 딱지를 면할 수 있는 승려는 얼마나 되며, 또 도적의 소굴을 면할 수 있는 절은 몇이나 되며, 도적의 앞잡이를 면할 수 있는 부처님은 몇 분이나 되는지 참으로 곤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승려노릇 잘 못하고 공부를 잘 못해서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할지언정, 천추만고의 우주개벽 이래 가장 거룩하신 부처님을 도적 앞잡이로 만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도적놈 되는 것은 나의 업이라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지옥으로 간다 할지라도 달게 받겠지만 부처님까지 도적놈 앞잡이로 만들어서 어떻게 살겠느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든 우리가 노력해서 이 거룩하신 부처님을 도적의 앞잡이가 안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파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불공(佛供)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부처님 파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 영험하여 명(命)도 주고 복(福)도 주고 하니, 우리 부처님께 와서 불공하여 명(命)도 받고 복(福)도 받아 가라" 하면서 승려는 목탁을 칩니다.

  목탁이란 본시 법을 전하는 것이 근본 생명입니다. 유교에서도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목탁이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바른 법을 전하여 세상 사람이 모두 살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실정에서 목탁이 돈벌이에 이용 안 되는 절은 별로 없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목탁 치면서 명 빌고 복 빌고 하는 것, 그것은 장사입니다. 부처님을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허물을 반성하여 고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허물 있는 줄 알면서도 반성하여 못 고치면 더 큰 허물을 빚는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참다운 불공이 되는 것인가?

  내가 전부터 자꾸 불공 이야기를 해 오지만 우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교에서는 성경 한 권이며 지침이 되지만 불교에서는 팔만대장경이라 하여 듣기만 하여도 겁이 납니다. 장경각의 그 많은 경판은 엄청납니다. 저 많은 것을 보아서, 언제 어디서 불교의 근본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 호호망망(浩浩茫茫)합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는 전통적으로 정설이 있습니다.

  경(經) 중에서 부처님 말씀의 근본이며 가장 소중한 경은 {화엄경}과 {법화경}으로 이는 경(經) 중에서도 왕(王)이요, 불교의 표준입니다.

  그 중에서도 {화엄경}이 {법화경}보다 진리면에서 더 깊고 넓다 합니다. {화엄경}도 이것이 80권이나 되는데 어떻게 다 보겠습니까. 더구나 모두가 어려운 한문인데. 다행히도 {화엄경}을 요약한 경(經)이 또 한 권 있습니다. {보현보살행원품}인데 {약(略)화엄경}이라고도 합니다. {보현보살행원품}에 불교의 근본진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불교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인가가 모두 규정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불공하는 데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보현보살 십대원(十大願)의 광수공양(廣修供養)편입니다. 물론 다 알겠지만 거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심을 내어 온 천하의 좋은 물건을 허공계에 가득 차도록 다 모으고, 또 여러 촛등을 켜되 그 촛불 심지는 수미산 같고 기름은 큰 바닷물같이 하여 두고서 수많은 미진수 불(佛)에게 한없이 절을 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불공 중에는 가장 큰 불공으로 그 공덕도 또한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법공양(法供養)이란 것이 있습니다. 일곱 가지의 법공양 중에서도 중생을 이롭게 하라는 것이 그 골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물자를 당신 앞에 갖다 놓고 예불하고 공을 드리고 하는 것보다도 잠시라도 중생을 도와주고 중생에게 이익되게 하는 것이 몇 천만 배 비유할 수 없이 더 낫다고 단정하셨습니다.

  비유하자면, 장사를 할 때 밑천을 많이 들여서 이익이 적은 것을 할 것인가, 아니면 밑천을 적게 들여 이익 많은 장사를 할 것이냐 하면 누구든지 이익이 많은 장사를 하려 할 것입니다. 많은 물자를 올려놓고 불공을 하려면 그 비용이 많이 들지만 이익중생공양(利益衆生供養), 즉 중생을 잠깐 동안이나마 도와주는 것은 큰 힘 안 들므로 밑천이 적게 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의 이익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비용 많이 들여서 하는 불공은 중생을 잠깐 도와주는 그 불공에 비교할 것 같으면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 억만 분의 일로도 비유할 수 없을 만큼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누구든지 나에게 돈 갖다 놓고 명과 복을 빌려 하지 말고 너희가 참으로 나를 믿고 따른다면 내 가르침을 실천하라" 하셨습니다. 중생을 도와주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행원품의 다른 곳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길가에 병들어 거의 죽어가는 강아지가 배가 고파 울어댈 때 식은 밥 한 덩이를 그 강아지에게 주는 것이 부처님께 만반진수를 차려 놓고 무수, 수천만 번 절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이 크다"고도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 참으로 불공이요, 이를 행해야만 참으로 내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요즘 학생들에게 불공하라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학생들은 "우리도 용돈을 타 쓰는 형편인데 어떻게 불공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공은 반드시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정신으로, 또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이 모두 불공입니다. 우리가 몸, 마음, 물질 이 세 가지로 불공을 하려고 하면 불공할 것이 세상에 꽉 차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게을러서, 게으른 병 때문에 못 할 뿐입니다. 이렇게 불공하여야만 마침내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수련대회 때 3천 배 하고 백련암에 올라와 화두 가르쳐 달라고 말하면 "자, 모두 화두 배우기 전에 불공하는 방법 배워 불공부터 시작한 후 화두 배우자"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모두 눈이 둥그래집니다. 우리는 돈도 없는데 부처님 앞에 돈 놓고 절하라는 이야기인가 하고. 그런데 나중에 그 내용을 듣고 나서는 "모두 불공합시다" 하면 힘차게 "네" 하고 대답하는데, 진정으로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별히 주의를 시킵니다. 그것은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착한 일이지만 자랑하는 그것은 나쁜 일입니다. 애써 불공해서 남을 도와주고 나서 자랑하면 모두 자신의 불공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불공을 자랑과 자기 선전을 하기 위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공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할 재료를 만드는 것입니다. 입으로 부수어 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남모르게 도와주라!' 이것뿐입니다. 예수도 "바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학생들에게 이 말이 좋게 들리는가 봅니다. 자주 오는 편지에 "스님께서 말씀하신 남모르게 남 돕자는 그 말씀을 평생 지키고 노력하겠습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6.25사변 이후 마산 근방 성주사라는 절에서 서너 달 머무를 때입니다. 처음 가서 보니 법당 위에 큰 간판이 붙었는데 '법당 중창 시주 윤○○'라고 굉장히 크게 씌어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으니 마산에서 한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인데 신심이 있어 법당을 모두 중수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언제 여기 오느냐?"고 물으니 "스님께서 오신 줄 알면 내일이라도 곧 올 겁니다" 했습니다.

  그 이튿날 과연 그분이 인사하러 왔노라기에, "소문 들으니 당신 퍽 신심이 깊다고 다 칭찬하던데, 나도 처음 오자마자 법당 위를 보니 그 표가 얹혀 있어서 당신 신심 있는 것은 증명되었지"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칭찬을 많이 하니 퍽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간판 붙이는 위치가 잘못된 것 같아. 간판이란 남들 많이 보기 위한 것인데 이 산중에 붙여 두어야 몇 사람이나 와서 보겠어? 그러니 저걸 떼어서 마산역 앞 광장에 갖다 세우자고. 내일이라도 당장 옮겨 보자고."

  "아이구, 스님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겠어? 당신이 참으로 신심에서 돈 낸 것인가? 저 간판 얻으려 돈 낸 것이지."

  이 일화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주를 할 때 미리 조건을 내세웁니다. 비석을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석을 먼저 세워 줍니다. 그러면 돈은 내지 않고 비만 떼어먹기도 합니다.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몰라서 그랬다고? 몰라서 그런 것이야 허물 있나? 고치면 되지. 그러면 이왕 잘못된 것을 어찌 하려는가?"

  그랬더니 자기 손으로 그 간판을 떼어 내려서 탕탕 부수어 부엌 아궁이에 넣어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남모르게 돕는다는 이 불공을 비밀히 시작한 지가 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또 단체로, 의무적으로 시켰습니다. 만약 내가 시키는 대로 불공할 수 없는 사람은 내게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불공하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예를 들었더니 어떤 학생이 이렇게 질문해 왔습니다.

  "스님은 불공 안 하시면서 어째서 우리만 불공하라고 하십니까?"

  "나도 지금 불공하고 있지 않은가. 불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이것도 불공 아닌가."

  불공하던 예를 또 하나 들겠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서울이나 부산등 대도시 변두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나아졌지만, 어떤 분이 그런 동네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고 싶은데 어떤 방법으로 하면 소문도 안 나고 실천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우선 두어 사람이 그 동네에 가서 배고픈 사람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하고 명단을 만든 후, 또 다른 몇 사람이 그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쌀집에서 쌀을 사서 쌀표를 만들어 쌀 지고 다니면 소문만 금방 나 버리니, 한 말이든 두 말이든 표시한 쌀표만 가져가면 바로 쌀을 주도록 준비해 두지. 또 다른 사람이 명단을 가져가서 그 쌀표를 나누어주면 사람이 자꾸 바뀌니 어떤 사람이 쌀을 나누어주는지 모르게 되지. 또 누가 물어도 '우리는 심부름하는 사람이다'고만 답변하는 거야."

  처음에는 쌀표를 주며 쌀집에 가보라 하니 잘 믿지 않더니, 쌀집이 별로 멀지 않으니 한번 가보기나 하라고 자꾸 권했더니, 가서 쌀을 받아오더라는 겁니다. 그 후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하는 말이 "요새 우리 동네에 이상한 일이 생겼어. 어디서 온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이 쌀표를 주어서 곤란을 면했는데, 누군지 알 수가 없어. 아마 그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왔겠지?" 하더랍니다.

  또 마산의 어느 신도가 추석이 되어 쌀을 트럭에 싣고 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숨어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신문에서 그걸 알고 그 사람을 찾아내어 대서특필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왔기에 "신문에 낼 자료 장만했지?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더니 아무리 숨어도 신문에 발목이 잡혔다고 해명했습니다.

  "글쎄, 아무리 기자가 와서 캐물어도 발목 잡히지 않게 불공해야지. 불공은 남모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느 동네에 부자 노인이 불공을 잘하므로 이웃청년이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참 거룩하십니다. 재산 많은 것도 복인데, 그토록 남을 잘 도와주시니 그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 고약한 놈! 내가 언제 남을 도왔어? 남을 돕는 것은 귀울림과 같은 거야. 자기 귀 우는 것을 남이 알 수 있어? 네가 알았는데 좋은 일은 무슨 좋은 일인가? 그런 소리 하려거든 다시는 오지 말어."

  이것이 실지로 불공하는 정신입니다. 남 돕기 어렵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남 돕기는 쉬운데 소문 안 내기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꾸 예를 들어 말하는 것입니다.

  남자보다 여자는 본시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며 입이 조금 가볍습니다. 그래서 자랑은 여자들이 더 많이 합니다. 왜 여자를 약하고 모자란다고 하느냐고 반문도 받습니다.

  "힘 따라 짐을 져야 합니다. 키 따라 옷을 해 입혀야지요. 키 큰 사람은 옷을 크게 입히고, 키 작은 사람은 옷을 짧게 입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등입니다. 약한 걸 말해서 힘을 내도록 해야지요. 그래서 여자는 자랑하지 않게 더 주의해야 합니다."

  이제 예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미국의 보이스라는 사람이 영국의 런던에 가서 어느 집을 찾는데 안개가 심해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이곳저곳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열두어 살 되는 소년이 나타나 물었습니다.

  "선생님, 누굴 찾으십니까?"

  "어느 집을 찾는데 못 찾고 있다."

  "저는 이 동네에 사는데 혹 제가 아는지 주소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신사는 주소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집은 마침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오."

  어린이가 인도하여 안내해 준 집에 도착하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하도 고마워서 사례금을 주었더니 그 소년은 사양하고 결코 받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선생님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소년단원 회원인데 우리 회원은 하루 한 가지씩 남을 도와주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을 도와드릴 수 있었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드리겠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서 소년은 달아나 버렸습니다. 신사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에 와 보니 어린이도 남을 돕는 정신이 가득하여 돈도 받지 않고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고 남을 도우면서 오히려 일과를 할 수 있게 되어 고맙다고 하니, 이런 정신을 배워야겠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에서도 소년단을 시작하였습니다. 온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이 정신은 뻗어나가 우리나라에도 보이스카웃, 소년단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 소년을 찾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찾지 못하고, 소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이름 모를 소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 그 마을에 큰 들소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에 이렇게 새겼습니다.

  ―날마다 꼭 착한 일을 함으로써 소년단이라는 것을 미국에 알려준 이름 모르는 소년에게 이 동상을 바치노라.―

  간디 자서전을 보면, 그는 영국에 유학 가서 예수교를 배웠는데 예수교에서는 사람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그 후 불교에서는 진리에 눈떴는데 일체 생명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남의 종교를 말하는 것은 안되었지만, 비유하자면 예수교는 접시물이라면 불교는 바다와 같다 하였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사람만이 상대가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그 상대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미물이고 할 것 없이 일체 중생 이 모두 다 불공 대상입니다. 일체 중생을 돕는 것이 불공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고 또 궁행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놈 소리를 좀 면할지 모르겠습니다.

  6.25사변 전 문경 봉암사에 있을 때,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향곡스님 청으로 부산사람들 앞에서 법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불공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불공이란 남을 도와주는 것이지 절에서 목탁 두드리는 것이 아니며, 결국 절이란 불공 가르치는 곳이라고. 불공은 밖에 나가서 해야 하며 남을 돕는 것이 불공이라고. 그리고 행원품 이야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법문을 마치며 봉암사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후에 부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때는 각 도(道)마다 종무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경남 종무원에서 긴급회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절에서 하는 것은 불공이 아니고, 절은 불공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라 하고,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이라 했으니 결국 이것은 절에 돈 갖다 주지 말라는 말인데, 그러면 우리 중들은 모두 굶어죽으라는 소리냐. 그 말을 한 중을 어디로 쫓아 버려야 한다고 야단들이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니 서울에서도 누가 내려왔습니다. 서울의 총무원에서 똑같은 내용의 회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말할까? 당신들 뜻대로 하자면 부처님께서 영험하고 도력 있으니 누구든지 돈 많이 갖다 놓으면 갖다 놓을수록 복 많이 온다고, 절에 돈벌이 많이 되는 말만 해서 자꾸 절 선전할까? 당신도 천년, 만년 살 것 같애? 언제 죽어도 죽는 건 꼭 같애. 부처님 말씀 전하다 설사 맞아죽는다고 한들 무엇이 원통할까? 그건 영광이지! 천하의 어떤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해도 나는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전한 것뿐 딴소리는 할 수 없으니, 그런 걱정하지 말고 당신이나 잘 하시오!"

  우리 대중 가운데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까?

  "방장스님은 법문해 달라 했더니 결국 우리 먹고 살지도 못하게 만드는구나. 절에 불공 안 하면 우리는 뭘 먹고 살란 말인가?"

  걱정 좀 되지?

  나도 걱정이 조금 됩니다. 물론 우리 해인사 대중뿐 아니고 다른 곳에서도 이런 생각 할 사람이 있겠습니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를 믿든지 예수교를 믿든지 자기의 신념대로 하는데, 예수교를 믿으려면 예수를 믿어야지 신부?목사 같은 사람을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지 승려를 따라가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천당도 극락도 아닌 지옥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중간에서 소개하는 것이지, 내 말이라고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달을 가리키면 저 달을 보아야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대중도 다 알겠지만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에서는 불공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의 대상은 절 밖에 있습니다. 불공 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다 불공대상입니다. 이것이 불공 방향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목탁 치고 부처님 앞에서 신도들 명과 복을 빌어 주는 이것이 불공이 아니며, 남을 도와주는 것만이 참 불공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실천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 불교에도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남의 종교와 비교, 비판할 것은 아니지만, 예수교와 불교를 비교해봅시다. 진리적으로 볼 때 예수교와 불교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부 학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볼 때에도 예수교에서 보면 불교가 아무것도 아니고, 불교측에서 보면 예수교가 별것 아닐 것입니다.

  서양의 유명한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도 "예수교와 불교가 서로 싸운다 하면 예수교가 불교를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극단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리로 보면 그러하지만 실천면에서 보면 거꾸로 되어 있는 게 현실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참으로 종교인다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불교인은 예수교인 못 따라갑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인데, 참으로 자비심으로 승려노릇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남 돕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자비'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승려가 봉사정신이 가장 약할 것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진실로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갈멘수도원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월 초하룻날 모여서 무슨 제비를 뽑는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양로원, 고아원, 교도소 등 어려움을 겪는 각계각층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양로원'제비를 뽑으면 1년 365일을 자나깨나 양로원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고아원'에 해당되면 내내 고아원만을, '교도소'면 교도소 사람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기도로써만 이루어지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 안 합니다. 조금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남을 위한 기도의 근본정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인입니다. 그들은 먹고 사는 것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양계와 과자를 만들어내 팔아서 해결한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자기들 노력으로 처리하고, 기도는 전부 남을 위해서만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어찌 하는가? 불교에서도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데, 소승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승은 남만 위해 사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은 대승이지 소승이 아닙니다. 원리는 이러한데 실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쪽 사람들은 내 밥 먹고 남만 위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이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교를 본받아서가 아니라, 불교는 '자비'가 근본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인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 기준을 남을 돕는 데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백련암에 찾아온 한 여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절을 했느냐?"

  "스님, 저는 저를 위해 절하지 않았습니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절했습니다."

  "왜 빙빙 돌기만 하느냐?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직접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절해야지. 이것은 '모든 중생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비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는 거와는 다르지."

  아무 생각 없이 절을 하지 말고, 절하는 것부터가 남을 위해 절해야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내게 항상 다니는 사람에게는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108배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면 날마다 아침에 108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도 새벽으로 꼭 108배를 합니다. 그 목적은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음같이 발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남을 구함이 아니요

    모든 중생이 함께 같이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我今發心 不爲自求 人天福報

    願與法界衆生 一時同得 阿 多羅三 三菩提

그리고 끝에 가서는,

    중생들과 보리도에 회향합니다.

    ……廻向衆生及佛道

  일체 중생을 위해, 남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했으니 기도한 공덕이 많습니다. 이것은 모두 일체 중생에게 가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원합노니 수승하온 이 공덕으로

    위없는 진법계에 회향하오며

    願將以此勝功德

    廻向無上眞法界

  그래도 혹 남은 것, 빠진 것이 있어서 나한테로 올까봐 온갖 것이 무상진 법계로, 온 법계로 돌아가고 나한테는 하나도 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신라, 고려에 전해 내려온 참회법입니다. 중국도 중공 적화 이전에는 총림에서만이 아니고 모든 절에서 다 '참회'해 온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모두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 믿는 사람의 근본자세이며, 사명이며, 본분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내가 배가 고픈데 자꾸 남의 입에만 밥 떠 넣으라니 나는 굶으라는 말인가?"

  인과법칙이란 불교뿐만 아니라 우주의 근본원리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과보가 오는 것입니다. 병이 났다든지, 생활이 가난하여 어렵다든지 하는 것이 악한 과보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악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기억에는 없지만 세세생생을 내려오며 지은 온갖 악한 일들이 그 과보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인선과라, 이번에는 착한 일을 자꾸 행합니다. 그러면 좋은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남을 자꾸 돕고 남을 위해 자꾸 기도하면, 결국에는 그 선과가 자기에게로 모두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기도가 되며, 남을 해치면 결국 나를 해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면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또다시 내게로 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면 남을 내가 도우니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또 인과법칙에 의해 그 행복이 내게로 전부 다 오는 것입니다.

  생물 생태학에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해치면 자기가 먼저 손해를 보게 되고, 농사를 짓는 이치도 그와 같다 하겠습니다. 곡식을 돌보지 않으면 자기부터 배고플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배고파 굶어죽을까 걱정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같이 불공을 잘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공할 줄 모르고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 문앞에 서서 보니 지옥 속에서 고(苦)받는 중생들 모습이 하도 고통스럽게 보여서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그 모습을 보면 '아이고, 무서워라. 나도 저 속에 들어가면 저렇게 될 텐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 이런 생각이 들 텐데 이 사람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는 많은 사람의 고를 잠깐 동안이라도 나 혼자 대신 받고 저 사람들을 쉬게 해줄 수 없을까?, 편하게 해줄 수 없을까?' 하는 착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생각을 하고 보니 지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 천상에 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착한 생각을 내면 자기부터 먼저 천상에 가는 것입니다.

  요즘은 사회에서도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 스님들은 산중에 살면서 이런 활동에는 많이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오직 부탁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 말씀에 따르는 불공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석으로 부처님께 예불하면서 꼭 한 가지 축원을 합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축원문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세 번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해보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좋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절을 한 번 하든 두 번 하든 일체 중생을 위해 절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기도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돕는 사람, 일체 중생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앞머리에서 말한 부처님을 팔아서 사는 '도적놈' 속에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서로 힘써 불공을 잘해서 도적놈 속에 안 들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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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無心)이 부처다

  불교라고 하면 부처님이 근본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부처라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는 좀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원리 원칙을 생각한다면 곤란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번뇌망상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의 망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모든 망상을 떠났으므로 망심이 없는데 이것을 무심(無心)이라고 하고 무념이라고도 합니다. 중생이란 망상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생이라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저 미물인 곤충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비롯하여 십지등각(十地等覺)까지 모두가 중생입니다. 참다운 무심은 오직 제8 아라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은 구경각(究竟覺) 즉 묘각(妙覺)만이 참다운 무심입니다. 이것을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망상 속에서 사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니 망상이 어떤 것인지 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통 팔만 사천 번뇌망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구분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意識)입니다. 생각이 왔다갔다,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이것이 의식입니다. 둘째는 무의식(無意識)입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을 떠난 아주 미세한 망상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을 제6식(第六識)이라 하고 무의식을 제8식(第八識:아라야식)이라고 하는데, 이 무의식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8지보살도 자기가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아라한(阿羅漢)도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며 오직 성불(成佛)한 분이라야만 근본 미세망상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곤충 미물에서 시작해서 십시, 등각까지 전체가 망상 속에서 사는데, 7지보살까지는 의식 속에 살고 8지 이상, 10지, 등각까지는 무의식 속에서 삽니다. 의식세계든 무의식세계든지 전부 유념(有念)인 동시에 모든 것이 망상입니다. 그러므로 제8 아라야 망상까지 완전히 끊어 버리면 그때가 구경각이며, 묘각이며, 무심입니다.

  무심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본래의 마음자리를 흔히 거울에 비유합니다. 거울은 언제든지 항상 밝아 있습니다. 거기에 먼지가 쌓이면 거울의 환한 빛은 사라지고 깜깜해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망상은 맑은 거울 위의 먼지와 마찬가지이고, 무심이란 것은 거울 자체와 같습니다. 이 거울 자체를 불성(佛性)이니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망상을 다 버린다는 말은 모든 먼지를 다 닦아낸다는 말입니다. 거울에 끼인 먼지를 다 닦아내면 환한 거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맑고 밝은 광명이 나타나서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우리 마음도 이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제8 아라야식까지 완전히 떨어지면 크나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구름 속의 태양과 같습니다. 구름 다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고 광명이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서 시방법계(十方法界)를 비추인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일체 망상이 모두 떨어지는 것을 '적(寂)'이라 하고,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조(照)'라고 합니다. 이것을 적조(寂照) 혹은 적광(寂光)이라고 하는데, 고요하면서 광명이 비치고 광명이 비치면서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해인사 큰 법당을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무심이라고 해서 저 바위처럼 아무 생각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무심은 바꾸어 말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불생이란 일체 망상이 다 떨어졌다는 말이고, 불멸이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난다는 말이니, 즉 불생이란 적(寂)이고 불멸이란 조(照)입니다. 그러니 불생불멸이 무심입니다.

  무심을 경(經)에서는 정혜(定慧)라고도 합니다. 정(定)이란 일체 망상이 모두 없어진 것을 말하고, 혜(慧)라는 것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정혜등지(定慧等持)를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이 무심을 완전히 성취하면 또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성불(成佛)인 동시에 열반인 것입니다. 육조(六祖)스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상 대열반이여!

    두렷이 밝아 항상 고요히 비추는도다.

    無上大涅槃

    圓明常寂照

  흔히 사람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열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서 동시에 광명이 온 법계를 비추는 적조가 완전히 구비되어야 참다운 열반입니다. 고요함[寂]만 있고 비춤[照]이 없는 것은 불교가 아니고 외도(外道)입니다. 일체 망상을 떠나서 참으로 견성(見性)을 하고 열반을 성취하면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는데, 이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해탈이란 결국 {기신론(起信論)}에서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한 대로 "일체 번뇌망상을 다 벗어나서 구경락인 대지혜 광명을 얻는다[離一切苦 得究竟樂]" 이 말입니다.

  이상으로써 성불이 무엇인지 무심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불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본이 성불에 있는 만큼 실제로 적조를 내용으로 하는 무심을 실증(實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근본은 누구든지 다 평등합니다. 평등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항상 말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명경(明鏡)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것은 새삼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고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명경은 본래 청정합니다. 본래 먼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동시에 광명이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그러니 광명의 본체는 참다운 무심인 동시에 적조, 적광, 정혜등지(定慧等持)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대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참으로 청정하고 적조한 명경 자체를 상실한 것처럼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무리 깨끗한 명경이라도 먼지가 앉을 것 같으면 명경이 제 구실을 못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명경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먼지가 앉아 있어서 모든 것을 비추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명경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습니다. 먼지만 싹 닦아 버리면 본래의 명경 그대로 아닙니까?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명경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성(自性)이 본래 청정한데 어찌해서 중생이 되었나? 먼지가 앉아 명경의 광명을 가려 버려서 그런 것뿐이지 명경이 부서진 것도 아니고 흠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먼지가 앉아서 명경이 작용을 완전하게 못 한다 그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다운 명경을 구하려면 다시 새로운 명경을 만드는 게 아니고 먼지 낀 거울을 회복시키면 되는 것처럼 본래의 마음만 바로 찾으면 그만입니다.

  내가 항상 "자기를 바로 봅시다" 하고 말하는데, 먼지를 완전히 닦아 버리고 본래 명경만 드러나면 자기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라고 할 때 마음의 눈이란 것도 결국 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표현이 천 가지 만 가지 다르다고 해도 내용은 일체가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은 세속의 사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예전의 고인들의 책이나 얘기를 들어볼 것 같으면 유교, 불교, 도교, 유불선 3교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유교라든가 도교 등은 망상을 근본으로 하는 중생세계에서 말하는 것으로 모든 이론, 모든 행동이 망상으로 근본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망상을 떠난 무심을 증득한 것이 우리 불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먼지 앉은 그 명경으로써 말하는 것이고 불교는 먼지를 싹 닦은 명경에서 하는 소리인데, 먼지 덮인 명경과 먼지 싹 닦아 버린 명경이 어떻게 같습니까? 그런데도 유?불?선이 꼭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무심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십지등각(十地等覺)도 중생의 경계인데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더 말할 것 있습니까?

  중생의 경계, 그것이 진여자성을 증득한 대무심경계와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유?불?선 3교만 말했지만 요즘은 문화가 발달되고 세계의 시야가 더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온갖 종교가 다 있고 온갖 철학이 다 있는데 그것들과 불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동서고금을 통해서 어떤 종교, 어떤 철학 할 것 없이 불교와 같이 무심을 성취하여 거기서 철학을 구성하고 종교를 구성한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어떤 큰 철학자, 어떤 위대한 종교가, 어떤 훌륭한 과학자라고 해도 그 사람들은 모두가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에서 한 소리는 한마디도 없다, 그 말입니다.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불교에는 부처님이 근본인데 부처님이란 무심이란 말입니다. 모든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를 부처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심이 근본이니만큼 불교를 내놓고는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무심을 성취해서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혼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만큼 불교란 것은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도 따라올 수 없는 참으로 특출하고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망상 속에서 하는 것하고 망상을 완전히 떠난 것하고를 비교해서 생각해 봅시다. 다시 명경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명경에 먼지가 앉으면 모든 것을 바로 비추지 못합니다. 먼지를 안 닦고 때가 앉아 있으면 무슨 물건을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물건을 바로 비추려면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망상 속에서는 모든 사리(事理), 모든 원리,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망상이 눈을 가려서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진리를 알려면 망상을 벗어나서 무심을 증(證)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여 무심을 완전히 증득한 부처님 경계 이외에는 전부 다 삿된 지식이요, 삿된 견해[邪知邪見]입니다. 대신에 모든 번뇌망상을 완전히 떠나서 참다운 무심을 증득한 곳, 즉 먼지를 다 닦아낸 깨끗한 명경은 무엇이든지 바로 비추고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정지정견(正知正見)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은 망상 속에서 성립된 것인 만큼 사지사견이지 정지정견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정지정견은 오직 불교 하나뿐입니다.

  결국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하면 행동도 바로 못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눈감은 사람이 어떻게 바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먼지 앉은 명경이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는데 어떻게 바로 알 수 있으며,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으며,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른 행동이라 하는 것은 오직 참으로 무심을 증해서 적광적조(寂光寂照)를 증하기 전에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물었을 때 바로 앉고, 바로 보고, 바로 행하고, 바로 사는 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다 바로 알고 싶고, 바로 보고 싶고, 바로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캄캄해서 눈감은 봉사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로 살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바른 생활을 하자는 것이 불교인데 망상 속에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오직 무심을 증해야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지등각도 봉사입니다. 왜냐,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십지등각이 저 해를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해를 보는 것과 같아서, 비단이 아무리 엷어도 해를 못 보는 것은 보통의 중생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십지등각이 사람을 지도하는 것도 봉사가 봉사를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바로 이끌려면 자기부터 눈을 바로 떠야 하고, 바로 알아, 바로 행동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추려 보면,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모든 망상을 벗어난 것을 부처라 합니다. 모든 망상이 없으니 무심입니다. 그러나 그 무심은 목석(木石)과 같은 무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울의 먼지를 완전히 다 닦아 버릴 것 같으면 모든 것을 비추는 것과 같으며, 구름이 걷히어 해가 드러나면 광명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나지 않는 것을 불생(不生)이라 하고, 대지혜 광명이 항상 온 우주를 비추는 것을 불멸(不滅)이라 하는데,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이 무심은 어떤 종교, 어떤 철학에도 없고 오직 불교밖에 없습니다. 또 세계적으로 종교도 많고 그 교주들의 안목도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마는 모두가 조각조각 한 부분밖에 보지 못했단 말입니다.

  불교와 같이 전체적으로 눈을 뜨고 청천백일(靑天白日)같이 천지만물을 여실히 다 보고 말해 놓은 것은 실제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실제 무심을 증해야 되겠습니다. 밥 이야기 천날 만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직접 밥을 떠먹어야지요. 그렇다고 해서 없는 무심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본래 무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내가 자꾸 "중생이 본래 부처다" 하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중생들밖에 없는데 중생이 본래 부처란 거짓말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아까 명경의 비유는 좋은 비유가 아닙니까. 먼지가 앉은 중생의 명경이나 먼지가 다 닦인 부처님 명경이나 근본 명경은 똑같습니다. 본시 이 땅 속에 큰 금광맥이 있는 것입니다. 광맥이 있는 줄 알면 누구든지 호미라도 들고 달려들 것 아닙니까, 금덩이를 파려고.

  우리가 '성불! 성불!' 하는 것도 중생이 어떻게 성불하겠느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니 본래면목, 본래의 모습을 복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란 것을 확실히 자신하고 노력하면 본래 부처가 그대로 드러날 것이니 자기의 본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하여 우리의 참모습인 무심(無心)을 실증(實證)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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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세계

(方丈 大衆法語 1981년 음 10월 30일)

   지난 수천 년 동안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논란과 시비가 되면서도 완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한 문제로 영혼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 종교가는 영혼이 꼭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학자들은 영혼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싸움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내려왔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는가? 대승이나 소승이나 어느 경론을 막론하고 팔만대장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생사윤회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생전에 지은 바 업(業)에 따라 몸을 바꾸어 가며 윤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윤회는 우리 불교의 핵심적인 원리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윤회란 것은 확실히 성립되는 것인가? 근래 세계적인 대학자들은 윤회를 한다는 영혼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윤회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윤회는 부처님께서 교화를 위해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지 실제 윤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윤회가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면 겁이 나서 사람들이 행동을 잘하게 하려고 교육적인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근래 과학이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과학도 자꾸 발달함에 따라 영혼이 있다는 것이, 윤회가 있다는 것이, 또한 인과가 분명하다는 것이 점차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이 열릴 수 있는가? 해탈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그런 의문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확실한 판단을 내려야만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로서, 또 신앙생활하는 데에나 불교 포교를 하는 데에, 그리고 수행하여 성불하는 데에 근본적인 토대가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만 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세계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세계적으로 많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빙성이 높고 객관성을 띠고 있는 연구방법으로 전생기억(前生記憶)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두서너 살 되는 어린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들이 말을 배우게 되면서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전생에 어느 곳에 살던 누구인데 이러이러한 생활을 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따라서 조사를 해보면 모두 사실과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생기억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터키 남부의 '아나다'라는 마을에 '이스마일'이라는 어린애가 있었습니다. 그 집은 정육점을 하는데, 난 후 일 년 반쯤 되는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득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우리 집에 가겠다. 이 집에는 그만 살겠어요."

   "이스마일아,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가 네 집이지 또 다른 네 집이 어디 있어?"

   "아니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은 저 건너 동네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어. 내 이름도 '이스마일'이 아니고 '아비스스루무스'야. 아비스스루무스라고 부르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대답도 안 할 테야."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말했습니다.

   "나는 저 건너 동네 과수원집 주인인데 50살에 죽었어. 처음에 결혼한 여자는 아이를 못 낳아서 이혼하고 새로 장가를 갔어. 그리고는 아이 넷을 낳고 잘 살았지. 그러다가 과수원의 일하는 인부들과 싸움이 일어나서 머리를 맞아 죽었어. 마구간에서 그랬지. 그때 비명소리를 듣고 부인하고 애들 둘이 뛰어나오다가 그들도 맞아 죽었어. 한꺼번에 네 사람이 죽었지. 그 후 내가 당신 집에 와서 태어난 거야. 아이들 둘이 지금도 그 집에 있을 텐데, 그 애들이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그리고는 자꾸 전쟁의 자기 집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런 소리 못 하게 하면 웁니다. 그러다가 또 전생 이야기를 합니다. 한번은 크고 좋은 수박을 사왔습니다. 이 어린애가 가더니 제일 큰 조각으로 쥐고는 아무도 못 먹게 하는 것입니다.

   "내 딸 '구루사리'에게 갖다 줄 테야! 그 애는 수박을 좋아하거든."

   그가 말하는 전생에 살던 곳은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지방 사람이 간혹 이 동네에 오는 이가 있습니다. 한번은 웬 아이스크림 장수를 보더니 뛰어나가서 말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알 턱이 있겠습니까?

   "나를 몰라? 내가 '아비스스루무스'야. 네가 전에는 우리 과수원의 과일도 갖다 팔고 채소도 갖다 팔았는데 언제부터 아이스크림 장사하지? 내가 또 네 할례(割禮)도 해주지 않더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사실과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꾸자꾸 소문이 났습니다. 터키는 회교국으로서 회교 교리상 윤회를 부인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재생을 주장하면 결국 그 고장에서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비스스루무스'가 전생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자꾸 아이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우는 아이를 달래려면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입니다. 확인도 해볼 겸 아이를 과수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함께 가는 사람이 다른 길로 가려면

   "아니야, 이쪽 길로 가야 해."

   하면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앞장서서 과수원으로 조금도 서슴지 않고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과수원에는 마침 이혼한 전생 마누라가 앉아 있다가 웬 어린애와 그 뒤를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눈이 둥그렇게 되어 쳐다보았습니다. 어린애는 전생 마누라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더니 다리를 안으며 말했습니다.

   "너 고생한다."

   어린애가 중년의 부인을 보고 "너 고생한다"고 하다니! 부인은 더욱 당황했습니다.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너의 전생 남편인 '아비스스루무스'인데 저 건너 동네에서 태어나서 지금 이렇게 찾아왔어."

   또 아이들을 보더니

   "'사귀', '구루사리' 참 보고 싶었다."

   하면서 흡사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을 자기가 맞아 죽은 마구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전에는 좋은 갈색 말이 한 필 있었는데 그 말이 안 보이니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팔았다고 하니 무척 아까워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던 여러 인부들을 보지도 않고서 누구누구 하며 한 사람씩 이름을 대면서 나이는 몇 살이고 어느 동네에 산다고 하는데 모두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생의 과수원 주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결국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되어 '이스마일'이 여섯 살이 되던 1962년 학자들이 전문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 검토하기 위해 조사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때 일본에서도 다수 학자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조사 보고서에서 보면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전생기억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과수원 주인이 생전에 돈을 빌려 준 것이 있었는데 '아비스스루무스'가 죽어 버린 후 그 돈을 갚지 않았습니다. 그 돈 빌려 간 사람을 불렀습니다.

   "네가 어느 날 돈 얼마를 빌려 가지 않았느냐. 내가 죽었어도 내 가족에게 갚아야 할 것이 아니냐. 왜 그 돈을 떼어먹고 여태 갚지 않았어?"

   돈 빌려 간 날짜도 틀림없고 액수도 틀림없었습니다. 안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전생 빚을 받아냈습니다. 이것은 죽은 '아비스스루무스'와 돈 빌려 쓴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틀림없이 환하게 말하는데, 이것을 누가 어린애에게 말해 줄 것이며 또 어린애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이스마일'은 '아비스스루무스'의 재생이라는 데에 확정을 짓고 보고서를 냈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이스마일'의 예와 같은 전생기억의 사례는 학계에 보고된 것만 해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 중에 한두 가지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몇 해 전 스리랑카에서의 일입니다. 태어난 지 37개월된 쌍둥이가 자꾸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단이 아이를 전생에 살았다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근처의 주민들을 수백 명 모으고 그 가운데에 그 아이의 전생의 부모형제를 섞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더러 전생의 부모형제를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 "이 사람은 아버지, 이 사람은 어머니, 이 사람은 누나, 이 사람은 형님……" 하면서 가족을 한 사람 한 사람 다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의 전생기억을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세 살 되는 어느 아이는 전생 이야기를 하는데 그는 다이빙선수였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지금도 다이빙할 수 있겠니?"

   "그럼요, 할 수 있고 말고요. 전에 많이 했는데요."

   이리하여 세 살 되는 어린애를 높은 다이빙대 위에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린애는 다이빙을 하는 것입니다.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조금도 서툴지 않게 서슴없이 다이빙을 하는 것입니다. 전생기억이란 이런 식입니다.

   또 흔히 보면 천재니, 신동이니, 생이지지(生而知之)니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한번도 글을 배운 적이 없는데 글자를 다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책을 보여도 모두 읽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이지지라고 하는데 나면서부터 다 아는 것입니다. 이 생이지지가 바로 전생기억입니다. 전생에 배운 것이 없어지지 않고 금생에 그대로 가지고 넘어온 것입니다. 또 처음 가보는 곳인데도 낯이 설지 않고,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친근감이 가는 경우는 전생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생기억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우매하여 전생기억이 캄캄하지만 조금 희미한 사람도 있고 분명한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전생기억이 분명하여 증거가 될 만한 사람을 전문으로 조사 연구하는 학자와 단체가 있는데, 그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가 미국 버지니아 대학에 있는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입니다. 그는 세계 도처에 연락기구를 조직하여 전생기억을 가진 아이나 어른이 있어 연락해 주면 학자들을 보내어 갖가지로 조사 확인하여 그것이 확실한가를 알아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는 수년 동안에 600여 명의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그 중 대표적인 20여 명에 대한 사례를 뽑아서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윤회를 암시하는 스무 가지 사례(Twenty Suggestive Cases of Reincarnation)}라는 책입니다. 전생기억에 대한 보고서로는 가장 확신이 있고 그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운 유명한 책으로 세계 각국에서 많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 수년이 지난 1975년까지는 1,300여 명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습니다. 수십 명도 상당한 숫자인데 1,300명이라는 자료에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전생기억 이외의 차시환생(借屍還生)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나는 것이 아니고 내 몸뚱이는 아주 죽어 버리고 남의 송장을 의지해서, 즉 몸을 바꾸어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입니다. 1916년 2월 26일자 중국 신주일보(神州日報)에 보도된 사실입니다.

   중국 산동성에 최천선(崔天選)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무식한 석공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32살이 되는 해에 그만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장사지낼 준비를 다 마친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관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사람기척이 났습니다. 부랴부랴 관을 깨고 풀어 보니 멀뚱멀뚱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우리 아버지가 살았다."

   하며 그 부모, 부인, 자식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식구들을 하나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더니 정신착란이 되어서 집안식구들도 못 알아보고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기운을 차리고 건강도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식구들을 못 알아보고 또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본인도 퍽 답답한 것 같았습니다. 마침 주위에 붓과 벼루가 있는 것을 보더니 종이 위에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글을 아주 잘 씁니다. 유식하다 이 말입니다. 본래는 일자무식(一字無識)인데.

   그 글 내용을 보니, 이 사람은 중국사람이 아니고 안남(인도지나)사람이었습니다. 그곳에서도 글은 한자를 쓰지만 말은 다릅니다.

   "나는 안남 어느 곳에 사는 유건중(劉建中)이라는 사람인데 병이 들어서 치료하기 위해 땀을 낸다고 어머니가 두터운 이불을 덮어 씌워 땀을 내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여기 이렇게 와 있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자기는 죽어 버리고 안남사람의 혼만 산동으로 온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전생입니다. 전생이란 것이 반드시 몸뚱이가 죽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다시 나는 것만이 아니고 죽은 육신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데 영혼만이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차시환생이라고 합니다. 남의 육체를 빌려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기력을 완전히 회복한 후 중국말을 조금씩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러 달 동안을 가르쳐서 중국말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꾸 전생에 살던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꾸 소문이 났습니다. 나중에는 북경대학에서 데리고 가서 여러 가지로 정신감정을 해보고 치료도 하고 하였습니다만, 정신은 조금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또 그가 말한 안남에 사람을 보내어 조회를 해보았습니다. 과연 유건중이란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 확실하고 또 그가 말한 전생의 일이 모두 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 최천선이라는 사람이 죽었다 깨어났으니 안남 유건중의 혼이 최천선의 몸을 빌려 환생했다는 것이 완전히 증명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참 희귀한 일이라고 하여 정부에서 이 사람에게 내내 연금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모두 당사자가 전생기억을 갖고 있어서 이야기하는 경우들입니다만, 또 심리학에서 전생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최면술을 사용하여 그 사람의 전생을 알 수 있는 그 방법이 연구된 것인데, '연령역행(年齡力行)'이라는 것입니다. 최면을 걸어서 최면 상태에서 사람의 연령을 자꾸자꾸 후퇴 역행시키는 것입니다. 즉 스무 살 되는 사람을 최면을 걸어서 열 살로 만듭니다. 그러면 열 살 먹은 사람이 되어 그때의 행동이나 말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또 네 살이 되도록 만듭니다. 그러면 네 살 때의 노래를 하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한 살로 만들어 놓으면 울기만 합니다. 말도 못 하고. 이런 것을 연령역행(Age Regression)이라고 하는 것인데 심리학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의학에서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이 났는데 아무래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연령역행을 시켜서 그 원인을 조사해 봅니다. 그러면 10년이나 20년 전의 옛날에 그 원인 되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간첩이 잡혔을 때에도 이용합니다.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부인할 때 최면술을 사용하여 연령역행을 시킵니다. 그러면 이전에 간첩교육 받던 것을 모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녹음해 두었다가 다시 물어보면 꼼짝 못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전생 문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연령역행을 하여 한 살로 만들어 둡니다. 그러면 40∼50세 되는 사람도 손발을 바둥거리고 빽빽 울면서 어린애 몸짓만 할 뿐입니다. 이번에는 무엇을 묻느냐 하면,

   "네가 태어나기 1년 전, 2년 전에는 어디 있었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소 성명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 여기 해인사 골짜기에 사는 사람을 연령역행을 시켜 한 살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태어나기 3년 전을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소 성명이 바뀌어져서 전라도 어느 곳의 누구라든지, 일본 어느 곳 사람이라든지,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신과학에서 전생회귀(前生回歸)라고 합니다. 전생으로 돌아간다 이 말입니다. 전생으로 돌아가서 한 생뿐만이 아니고 이생, 삼생…… 여러 수십 생까지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정신 상태를 세 가지 단계로 나눕니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의식 상태입니다. 의식 상태 안에 잠재의식이 있고 잠재의식 속에 무의식 상태가 있습니다. 이것은 의식이 완전히 끊어진 그런 상태입니다.

   프로이드(Sigmund Freud)가 잠재의식은 어지간히 연구하여 발표하였지만 무의식에 대해서는 별로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 무의식 상태에 대해 큰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영국의 캐논(Sir Alexander Cannon) 박사입니다. 그는 원래 정신과 의사인데 영국 국가에서 주는 가장 최고의 명예인 나이트(Knight) 작위까지 받은 대학자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미국 등 5개국 학술원의 지도교수이기도 합니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전생 조사에 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영혼도 있을 수 없고 윤회도 없다고 철두철미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최면술을 이용한 무의식 상태에서 전생회귀를 시켜 보니 자꾸 전생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연령역행하여 열 살, 한 살, 출생 이전으로 역행시키면 전생, 삼생, 십생……, 저 로마시대까지로 역행되어 전생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른 사실의 기록과 조사해 보면 모두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1,382명에 대한 전생 자료를 수집하여 {인간의 잠재력(The Power Within)}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1952년).

   이 캐논보고서에 의하면 병이 들어서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지 않는데 전생회귀를 통해서 조사를 해보면 그런 병들이 전생에서 넘어온 것으로, 그 전생의 발병원인에 의거해서 치료하니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전생요법으로 거기에 보면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만 보면 겁을 냅니다. 바다를 구경한 적도 없고 큰 강 옆에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물만 보면 겁을 내는데 아무리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생회귀를 시켜 보니 그는 전생에 지중해를 내왕하는 큰 상선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상선의  상인들에게 죄를 지어서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닷물 속으로 던져져서 빠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러니 금생에 물만 보면 겁을 내는 것입니다. 이 원인에 의거해서 치료를 하니 병이 나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높은 계단을 무서워 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보니 그는 전생에 중국의 장군인데 높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곳만 보면 겁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캐논보고의 사례에 의거해서 학자들이 전생요법을 개발하여 요즈음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1977년 10월 3일자 {타임(Time)}지에 보면 이에 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잡지에서 자신 있게 보도할 때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전생이 있다는 것은 물론이고 병 치료에 있어서도 전생요법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는데도 전생과 윤회에 대한 의심을 갖는다면 불교를 안 믿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전생이 있고 윤회를 한다고 할 때 어떤 법칙에서 윤회를 하는가? 내가 마음대로 원하기만 하면 김씨가 되고 남자가 되고 할 수 있는가? 캐논보고에 의거해서 살펴보면 그것은 순전히 불교에서 얘기하는 인과법칙에 의한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인과법칙이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착한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생기고 나쁜 원인에는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긴다 이 말입니다. 이제 전생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떤 사람이 전생에 착한 사람이었는지 악한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서 그 사람의 금생의 생활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비교해 보면, 전생에 악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불행한 사람이고 전생에 착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전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받는 그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하는 그것이다.

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

   전생에 내가 착한 사람이었나 악한 사람이었나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내가 받는 것, 지금 행복한 사람이냐 불행한 사람이냐를 살펴볼 것입니다. 내생에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인가 불행하게 살 것인가를 알고 싶으면 지금 자신의 하는 일을 보면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는 인과(因果)를 인도말인 카르마(Karma:業)라고 하여 이제는 세계적인 학술용어가 되었습니다. 인과문제에 대해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Edgar Cayce)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전기도 많이 나와 있는데, 그를 '기적인'이라고 부르는데 기적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기적을 행사하느냐 하면, 남의 병을 진찰하는데 주소 성명만 가르쳐 주면 수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병을 모두 진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서 처방을 내고 병을 치료하는데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무려 3만 명 이상이나 치료를 했습니다. 미국 뉴욕에 앉아서 영국 런던에 있는 귀족들을 진찰할 수 있으며, 이탈리아의 로마에 있는 사람들도 진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구가 영국 런던에 갔는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케이시에게 물어봅니다. 그의 답을 듣고서 바로 뉴욕에 전화를 해보면 그의 말이 그대로 맞습니다.

   케이시가 병을 진찰해 보면 그 원인이 전생에서 넘어오는 것이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교도였습니다. 예수교에는 전생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종교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병 치료하는 것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학자들이 종교와 학문과는 다르다고 그를 설득하여 이것을 학문적으로 끝까지 조사해 보자고 의논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병 치료하는 것은 그만두고 전생 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500명의 전생을 조사하였습니다. 그의 사후에도 버지니아 비치(Virginia Beach)에서는 그의 원거리 진찰과 전생투시(前生透視)에 대한 수많은 기록을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으며 많은 책들이 발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능력의 비밀}과 {윤회의 비밀} 이 두 권은 공산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에드가 케이시의 전생투시에 의한 전생과 금생과의 인과를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낳고 사는 부부간에도 그 사이가 무척 나쁩니다. 그 전생을 알아보니 서로가 원한이 맺힌 사이입니다. 내외간에 잘 지내는 사람을 알아보니 전생에 아버지와 딸 관계이거나 혹은 어머니와 아들 관계입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하겠지만 우리들이 몰라서 그렇지 본래 인과란 그렇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업장은 두텁고 눈은 어두워 이해가 가지 않으니 곤란한 것입니다. 숙명통(宿命通:전생의 일을 훤히 아는 능력)을 하여 전생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서 이런 때에 현대의 과학자들이 연구한 전생과 윤회 및 인과에 대한 좋은 자료를 소개하면 부처님 말씀을 믿고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키가 작은 난쟁이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알아보니 부처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사람이 야망이 많아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면 내생에는 키 작은 과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남을 올려봐야 하고 남이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듯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를 한다, 인과가 있다는 것이 현대의 과학적 자료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이 우주의 진리를 다 깨달은 부처님께서 윤회를 말씀하셨으니 이것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캐논이라든지 케이시라든지 하는 과학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3천여 년 전에 모두 말씀하셨는데 현대과학이 이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불교 믿는 사람은 부처님 말씀 중에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내 이해가 부족한 줄을 알고서, 무조건 배척하거나 반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하며, 알고 또 바르게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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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의 길

 

   불교의 근본원리로서 “일체 만법이 하나도 멸하는 것이 없다” (一切萬法 不生不滅)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영혼만이 죽은 후에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멸하지 않고 그 형태만 바뀌어 갈 뿐이지 영원토록 윤회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양초에 불을 붙이면 양초는 타서 없어집니다. 이것은 양초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가 분산된 것이지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분산된 원소는 인체나 짐승, 나무 등에 모두 흡수되어 자꾸 도는 것입니다. 즉 물질의 원소는 하나도 없어지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영혼이 있어 인과에 의해 윤회를 한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요즘 세상을 보면 도둑질도 하고, 살인도 하고…. 온갖 짓을 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과법칙을 분명히 알면 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작자수(自作自受)!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을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불교의 근본은 바로 이 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영원하여 지은 바 업에 따라 윤회를 하며 영원토록 상주불멸인데 불교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고 묻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중생이란 나쁜 일은 많이 해도 착한 일은 많이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업을 짓고, 윤회를 하고, 고통을 받고… 그러나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법을 따라서 수도를 하면 결국에는 스스로 깨쳐 생사해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윤회도 인과도 모두 벗어나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스님, 불교에서는 윤회가 있다고 하는데 윤회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죽고 난 후에는 아주 그만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우선 편하게 살겠는데 내생이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니 겁이 나서……」

   「글쎄, 나도 인과가 없고, 내생도 없었으면 좋겠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잘못한 것이 더 많을 것이고 내생에 락(樂)보다는 고(苦)를 더 많이 받을 터이니 안과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우리가 없었으면 한다고 해서 없어질까?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해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안되지. 이미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자연의 법칙, 인과의 법칙에 의하여 윤회하는 것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영원히 자유 자재한 성불의 길, 해탈의 길로 가는 방법 밖에 없어. 그 길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어.」

   

   또 한번은 여름에 젊은 학생이 절을 4000배나 하고 백련암에 올라 왔읍니다. 다리가 아파서 걷지도 못하고 삼배를 하는데 잘 일어서지도 못했습니다.  

   「무엇을 묻고 싶어서 왔나?」

   「실제로 윤회가 있습니까?」

   「있다면 뭐하게?」

   「윤회가 확실히 있다면 대학이고 뭐고 다 버리고 윤회의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합니다.」

   「윤회의 문제라니?」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윤회가 있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싶습니다. 윤회가 없다면 걱정이 없으니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러나 윤회는 확실히 있어. 인과도 분명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딱 결정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아무리 말리더라도 나는 다른 길을 걷지 않겠습니다. 윤회를 벗어나는 길, 해탈의 길을 걷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학생은 승려가 되어 지금도 공부를 잘하고 있습니다. 경전에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 되기 어려운데 이미 되었고, 불법 듣기 어려운데 이미 듣나니, 이내 몸을 금생에 제도 못하면, 어느 생을 기다려서 제도하리요."

   우리가 도(道)를 닦아 성불하기 이전에는 영혼이 있어 자꾸자꾸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무한한 고(苦)가 따르는 것입니다.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이것이 소위 생사고(生死苦)라는 것입니다. 이 무한한 고를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천당을 갈 필요도 없고, 극락을 갈 필요도 없고, 오직 사람 사람마다 누구나 갖고 있는 초능력 즉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활용하면 극락이나 천당은 아무 소용도 없고 이 현실에서 무애자재한 대해탈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불교에서는 “영원한 생명, 무한한 능력”을 불성(佛性), 법성(法性), 진여(眞如)라고 표현하여 누구든지 이것은 똑같이 평등하게 갖고 있습니다. 이 능력을 개발하면 곧 부처이니 달리 부처를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생사해탈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불교의 근본진리, 구경진리를 바로 깨치면 그 깨친 경계는 영겁불망(永劫不忘)! 영원토록 잊어 버리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일상 생활에서 학문을 익힌다든지, 기술을 배운다든지 하는 것은 시간이 좀 지나면 희미해져 버리지만 도를 깨쳐 도를 성취하면 이 깨친 경계는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금생, 내생은 물론 여러 억천만생을 내려 가더라도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에 따르는 신비하고 자유 자재한 신통묘력(神通妙力)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 실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중국 송(宋)나라 때 곽공보(郭功甫)라는 시인이며 대문장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시인인데,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때 이태백의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 사랑들은 모두 그를 이태백의 후신(後身)이라고 하였는데, 그는 천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곽공보의 불교 스승이 누구냐 하면 귀종선(歸宗宣) 선사라는 임제종의 스님입니다. 한번은 선사께서 곽공보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가 앞으로 6년 동안을 네 집에 가서 지냈으면 좋겠다.」

   「이상하다, 스님께서 연세도 많은데 어째서 우리 집에 와서 6년을 지내 살려고 할까?」

   그날 밤이었습니다. 안방에서 잠을 자는데, 문득 자기 부인이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아이구, 여기는 스님께서 들어오실 곳이 아닙니다.」

   「자다가 왜 이러시오.」

   그는 부인을 깨워 물어 보았습니다.

   「이상합니다. 꿈에 큰스님께서 우리가 자는 이 방에 들어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불을 켜서 내가 보여 줄께 있어.」

   

   그리고서 낮에 온 편지를 부인에게 보여 주였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에 절에 가 보니 어젯밤에 스님께서 가셨다고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입적(入寂)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열달이 지나 부인은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모든 것으로 볼 때 귀종선 선사가 곽공보의 집에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선로(宣老)라고 지었습니다. “선 노스님”이라는 뜻입니다. 생후 일년이 지나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을 하면서부터 누구든지 “너”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제자 취급입니다. 그리고 법문을 하는데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도 큰절을 하고 큰스님 대접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문이 났습니다. 그 당시 임제종의 유명한 백운단(白雲端) 선사가 이 소문을 듣고 한번 찾아왔습니다. 백운단 선사를 보고 세살 된 아이가 “아하, 우리 조카 오네” 하였습니다. 전생의 항렬을 치면 백운단 선사는 귀종선 선사의 조카 상좌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사숙님”하고 어린애에게 절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백운단 선사 같은 큰스님이 넙적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스님과 헤어진지 몇 해가 되었습니까?」

   「한 4년 되지. 이 집에 와서 3년, 이 집에 오기 일년 전에 서운암에서 만나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 장소도 틀림없습니다. 백운단 선사가 보통의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아주 깊은 법담을 걸어 보았습니다. 세살 먹은 아이가 척척 받아 넘기는데,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법담은 장황하여 다 이야기 못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전등록(傳燈錄) 등의 불교 역사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것이 유명한 귀종선 선사의 재생입니다. 그 후 약속대로 한 6년이 지나자 식구들을 불러 놓고,

   「본시 네 집에 6년 동안 지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난 간다.」

   그러고는 그대로 죽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격생불멸(隔生不滅)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생을 바꾸어 태어나도 전생 일을 잊어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고통을 벗어 나서(離一切苦)

   영원한 구경락을 얻는다.(得究竟樂)

   이것은 기신론(起信論)에 있는 말인데 불교의 근본목표입니다. 본래 불교에서는 현실의 세계가 불타는 집이요, 괴로움의 바다(苦海)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속에서 그냥 고생만 하고 말 것인가?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따라 도를 닦아서 무상도를 성취할 것 같으면 일체 고통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절대적인 안락과 영원한 자유를 성취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목표이며 동시에 부처님께서 출가하시어 생, 노, 병, 사(生老病死)의 일체고를 벗어나서 구경락,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왕궁에서 천하 없는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하여도 죽으면 그만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일시적인 행복을 버리고 수도를 하시어 영원한 열반락을 얻었으니 이것이 불교의 해탈입니다.

   우리나라 신라시대 때 혜공(惠空)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신라 원효대사”하면 최고 아닙니까? 그 당시 원효대사의 선생 되는 스님이 바로 혜공스님이십니다. 원효스님이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혜공스님께 물었습니다. 두 스님이 함께 생활하며 나누신 말씀이 삼국유사라든지 다른 여러 기록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럼 혜공스님은 어떤 분인가? 혜공스님은 선덕여왕 때 재상 천진공(天眞公) 집의 종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평생 누구에게 글자 하나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생이지지(生而知之) 였습니다. 불교를 모릅니까? 유교를 모릅니까? 무소불통(無所不通),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한 때 화랑 구감공이 사냥을 나가다가 보니 혜공스님 들판에서 죽어 있는데 몸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습니다.

   "혜공스님이 큰 도인인 줄 알았는데 아무 소리도 없이 저렇게 돌아가시다니 묻어주는 사람도 없고 화장해 주는 사람도 없이 이렇게 썩어가고 있는가. 내가 화장이라도 해 드려야겠다."

   그리고서 신라 서울인 경주에 올라와 보니 어느 스님 한 분이 곤드레 만드레 술에 취해서 노래를 부르고 오는데 유심히 보니 혜공스님이었습니다. 한 혜공스님은 산에 엎어져 죽어 있고 또 한 혜공스님은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혜공스님이 승조(僧肇 : 383~4l4 중국스님, 구마라습 문하에서 역경사업에 종사) 법사가 지은 조론(肇論)을 보고 자기가 지은 것이라고 하며 전생에 자기가 승조법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혜공스님은 한번도 배운 적이 없었어도 모르는 것이 없어 원효스님이 물어 볼 정도였으며 신통력이 자재하여 신라시대 10대 성안으로 추앙 받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우리 불교 역사에 많이 있습니다. 그 좋은 실례가 달마대사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대사의 일화 가운데 총령도중 수휴척리(?嶺途中 手携隻履)라는 것이 있습니다. 총령 고개로 신발 하나만을 메고 서천으로 가 버렸다는 말입니다. 달마스님이 혜가(慧可)에게 법을 전하고 돌아가시자 웅이산(熊耳山)에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 몇 해 후 송운(宋雲) 이라는 사신이 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총령이라는 고개마루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 한 분이 신짝 하나를 메고 고개를 올라 오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바로 달마스님 이었읍니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너희 나라와는 인연이 다하여 본 국토 간다. 그런데 네가 인도로 떠날 때의 임금은 죽었어. 가보면 새 임금이 계실테니 안부나 전하게」

   과연 돌아와 보나 먼저 임금은 죽고 새 임금이 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도중에서 달마스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니, 달마스님 돌아가신지 벌써 3 년이 지났는데 총령에서 달마스님을 만나다니?」

   「아닙니다. 제 혼자만 본 것이 아니고 수십 명이 함께 그 분을 보았습니다.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달마스님 묘를 파 보자.」

   무덤을 파 보니 과연 빈 관이었습니다. 관은 비어있고 신이 한 짝 밖에 없었읍니다. 달마대사의 “수휴척리”라는 말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해탈이라고 하여 그저 그런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사후에도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신비한 어떤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영원한 생명 속에 든 무한한 능력을 개발할 것 같으면 귀종선 선사도 될 수 있고, 혜공스님도 될 수 있고, 달마대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공부만 부지런히 하면 자유 자재한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그 근본 골자가 어디 있느냐 하면 도를 깨쳐 영겁불망(永劫不忘)을 성취하면 영원토록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소개한 스티븐슨씨가 조사한 2000명 이상의 전생 기억은 아이들이 장난하는 물거품과 흡사한 것이지만 영겁불망, 이것은 허공이 무너질지라도 조금도 변함없는 대 해탈경계입니다.

   그러면 그 “영겁불망”이라는 관문은 어떻게 해야 돌파할 수 있는가? 자고로 영겁불망의 생사해탈을 성취하려면 가장 빠른 길이 참선(參禪) 입니다. 참선을 하는데 있어서는 화두(話頭) 가 근본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하여 바로 깨치면 영겁불망이 안 될래야 안될 수 없습니다. 영겁불망 죽은 후에나 알 수 있는 것이지 생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숙면일여(熟眼一如). 즉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妹)하지 않고 여여불변(如如不變)할 때 그때부터는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숙면일여라고 하여 깊은 잠이 들어서도 여여한 것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혹 생각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옛날의 조사스님 치고 숙면일여한 데에서 깨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식심분벌(識心分別)로서 봉사영혼 아닙니까? 봉사영혼이 되어서 업(業)따라 몸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업대로 떨어져 버립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 자유가 조금도 없고 업따라 가는 것을 “수업수생(隨業受生)”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경계가 되면 내 마음대로 입니다. 김씨가 되든, 박씨가 되든, 여자가 되든, 남자가 되든, 마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의왕생(隨意往生)”입니다.

   “수의왕생” 이것이 불교의 이상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원력에 의해 태어나고 중생은 업력에 의해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수의왕생이 될려면 숙면일여가 된 데에서 자유 자재한 그런 경계를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제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부처님 이상 가는 법문을 하고 큰 소리를 쳐도 몸 한번 바꿔지면 다시 캄캄해져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말입니다만 누구든지 아무리 크게 깨치고 아무리 큰 도를 성취했다고 해도, 그 깨친 경계가 동정에 일여(動靜一如) 하느냐? 몽중에 일여(夢中一如)하느냐? 숙면에 일여(熟眼一如)하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실제 깨친 경계가 이러 하여야 비로소 바로 깨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정일여도 안되고, 몽중일여도 안되는 그런 깨우침은 깨친 것도 아니고 실제 생사에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참선은 실제로 참선을 해 보아야 하고 깨침은 실제로 깨우쳐 봐야 합니다. 생사에 자재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깨침이어야 생각으로만 깨쳤다고 하는 것은 생사에 아무 이익도 없고 생사에 자유롭지도 뭇하며 그것은 깨침이 아니고 불교의 병(病) 이요, 외도(外道) 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공부가 실제로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어 영겁불망이 되도록 죽자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신명을 아끼지 말고 정진하여 불사의 해탈경계를 성취하고 해탈도인이 되어 미래겁이 다하도록 중생을 제도해야 될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입니다.(끝)

 

* 법문 출처: 해인지 <해인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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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信心)이 성지(聖地)다

어떤 것이 부처인고

금사탄 여울가의 마씨 부인이로다.

如何是佛

金沙灘頭馬郎婦

   이것은 임제종의 3세인 풍혈스님의 법문입니다. 어떤 스님이 풍혈스님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니

   "금사탄 개울가의 마씨 부인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는 곳(낙처), 즉 근본 뜻은 각자가 공부를 하여서 확철히 깨쳐서 참으로 자성을 밝혀야 알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이니 부지런히 공부할 뿐이고, 단지 '금사탄두마랑부'라는 말의 출처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섬서, 지금은 중국 섬서성에 '금사탄'이라는 유명한 강이 있습니다. 당나라 정원(貞元) 때,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는 천하일색의 여자가 이 강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방에서 돈 있는 사람, 벼슬 높은 사람 등 온갖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청혼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내 몸은 하나인데 청혼하는 이가 여러 사람이니 내 조건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시집가겠습니다."

   그리고는 {법화경} 보문품을 외우는 사람에게 시집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튿날 보니 20명이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스무 명이 다 외우고 달려왔습니다. 이번에는 {금강경}을 외워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시집간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보니 또 1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법화경}을 다 외워 오라는 것입니다. {법화경}은 좀 많은데도 그래도 이 처녀에게 장가들 욕심으로 죽자하고 외웠습니다. 마씨집 아들 즉 마랑(馬郞)이 사흘 만에 다 외우고 달려왔습니다.

   "참 빨리 외우셨습니다. 한번 외워 보십시오."

   줄줄줄 다 외우는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천하에 좋은 낭군을 찾아다니는 터인데 당신같이 좋은 낭군을 만났으니 이젠 한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시집가겠습니다."

   이렇게 결정되어 혼인날을 받고 성례(成禮)를 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부가 방으로 들어갔는데, 잠시 후 축하객들이 채 헤어지기도 전인데 신부가 아이구 배야, 아이구 머리야! 하더니 갑자기 데굴데굴 구르다가 덜컥 죽어 버렸습니다.

   마랑은 이 처녀에게 장가가기 위해 밤잠도 안 자고 외우고 또 외웠는데 신부가 죽어 버리다니. 그런데 금방 죽은 여인의 시체가 썩어서 그 당장 진물이 줄줄 흐르는 것입니다. 천하일색, 그 아름답던 사람이 그 당장에 죽더니 금방 오물이 흘러내리니 참으로 흉합니다. 아무리 만승천자(萬乘天子)가 좋다 해도 죽어서 썩으면 그만이듯이, 아무리 미인이지만 죽어서 썩으니 그만입니다. 부랴부랴 관을 짜서 산에 묻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죽기 전의 그 처녀가 마씨집 아들의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자신이 박복하다고 한탄하며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때 웬 스님 한 분이 마씨집 아들을 찾는 것입니다.

   "일전에 이곳에서 처녀 한 사람이 죽지 않았습니까. 그 묘소가 어디 있습니까?"

   묘소를 안내하니 스님이 갖고 있던 석장으로 묘를 탁 치니 묘가 둘로 갈라지면서 그 속에는 누런 황금뼈가 소복하게 쌓여 있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죽은 사람인데 석장(錫杖)으로 추켜드니 금쇄골(金鎖骨)입니다. 뼈 마디마디가 고리가 되어서 머리부분을 드니 발 뒤끝까지 끌려 올라왔습니다. 그때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그 처녀가 바로 관세음보살이야. 이곳 섬서성 사람들이 하도 신심이 없어서 너희들을 제도하기 위해 관세음보살님이 처녀 몸을 나투어 온 것이야. 이 금쇄줄을 봐!"

   {법화경}을 사흘 만에 다 외운 영리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구나!"

   "이렇게 관세음보살이 좋은 법문을 해주었으니 너희들은 불교를 부지런히 믿으라!"

   이렇게 말하고 그 스님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금사탄두마랑부', 금사탄 개울가의 마씨부인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고사에서만이 아니고 불교를 좀 아는 분은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관세음보살이 화현(化現)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된다고 하여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집니다. 관세음보살이 세인(世人)에게 나타난 사례는 아주 흔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보타락가산( 陀洛迦山)입니다.

   '보타'란 인도말로 '희다'는 뜻이고, '낙가'는 꽃이란 말입니다. '흰 꽃'이란 뜻입니다. 관음도량(觀音道場)은 백화도량(白華道場)입니다. 보타락가산에 조음동(潮音洞)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나는 못 가보았지만 사진으로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누구든지 정성껏 기도하면 수시로 관세음보살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중국에는 성지(聖地)와 명소가 많지만 돈이 많이 생기는 곳은 보타락가산입니다. 온 천하 신도들이 관세음보살 친견하려고 많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향을 꽂고 정성껏 기도를 하면 여러 수백 수천 명이 모여 있는데,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혹 법문도 하고 여러 동작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신심이 솟아나서 신도들이 돈을 막 쏟아 놓고 갑니다.

   그래서 해방 전까지만 해도 보타락가산 절 한 곳에만도 대중스님이 4천여 명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이 자꾸 와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후에는 돈을 쏟아 놓고 갑니다. 그런데 제일 문제되는 것은 사신공양(捨身供養)입니다. 관세음보살 친견에 너무 감격하여 "이 몸을 관세음보살께 바치겠다"고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몸을 공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신공양을 못하도록,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는 주변에는 이리저리 막아서 사람이 죽지 못하도록 조치를 했습니다. 그래도 흔히 사신공양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보타락가산의 관세음 현신(現身)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보타락가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금사탄두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금사탄두마랑부라는 이 이야기는 보통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고 선종의 가장 큰 종파인 임제종의 제3세 적손(嫡孫)인 풍혈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풍혈스님이 말씀하신 그 내용, 법문의 근본 뜻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확철히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으로, 그것은 공부해야 되는 것이며, 그 연유가 어찌 된 것인가를 나는 말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선가에서 유명하며 기적적인 법문이 있습니다.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문은 유명한 {벽암록(碧巖錄)} 100칙(百則)에도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문수보살이 말씀하신 이야기입니다.

   무착 문희(無着文喜)선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오대산에 갔다가 금강굴(金剛窟) 앞에서 웬 영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영감을 따라가니 아주 좋은 절이 있어서 그 절에 들어가 영감과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영감이 물었습니다.

   "남방 불법은 어떻게 행합니까?[南方佛法 如何住持]"

   "말세 중생이 계행이나 지키고 중노릇합니다[末法比兵 小奉戒律]."

   "절에는 몇 사람이나 모였는고?[多少衆]"

   "3백 혹은 5백 명 모여 삽니다[或三百 或五百]."

   무착스님도 한마디 묻고 싶었습니다.

   "여기는 불법이 어떠합니까?[此間如何住持]"

   "범인과 성인이 같이 살고, 용과 뱀이 섞여 살지[凡聖同居 龍蛇混雜]."

   "그럼 숫자는 얼마나 됩니까?[多少衆]"

   "앞으로 3, 3, 뒤로도 3, 3이지[前三三 後三三]."

   '용과 뱀이 섞여 살고 범인과 성인과 같이 산다'는 말은 보통으로 들으면 그저 그런 것 같지만 그 뜻이 깊은 곳에 있습니다. 겉말만 따라 가다가는 큰일납니다. 무착선사도 그 말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노인과 작별했습니다. 한참 나오다가 돌아보니 절은 무슨 절,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것에 대해 게송(偈頌)을 읊은 것이 있습니다.

   

시방세계 두루 성스러운 절

눈에 가득히 문수와 말을 나누나

당시는 무슨 뜻을 열었는지 모르고

머리를 돌리니 다만 푸른 산 바위 뿐이더라.

廓周沙界聖伽藍

滿目文殊接話談

言下不知開何印

廻頭只見翠山巖

   그 후에 또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법문을 들은 것이 있습니다. 불교 선문에서 흔히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누구나 잠깐 동안 고요히 앉으면

강가 모래같이 많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낫도다.

보배탑은 끝내 무너져 티끌이 되거니와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부처를 이루는도다.

若人靜坐一須臾

勝造恒沙七寶塔

寶塔畢境碎微塵

一念淨心成正覺

   이 게송을 아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 출처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착 문희선사가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하고 문수보살이 '직접' 문희스님에게 설한 법문입니다. 그러니 관세음보살 뿐 아니고 문수보살같은 그런 대보살들도 32응신 만이 아니라 3백, 3천, 몇 백천억 화신을 나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불법을 성취하여 대해탈부사의경계를 얻을 것 같으면 문수보살도 될 수 있고 관세음보살도 될 수 있고 보현보살도 될 수 있으며, 32응신이 아니고 백천 화신을 나타내어 자유자재하게 일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수보살을 보면 가장 유명한 성지가 중국의 오대산인데, 그곳에 가서 실제로 친견한 기록도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나타나는가 하면, 노인으로 또는 동자(童子)가 되어 나타나는 수가 있고 여러 가지로 몸을 나투어 비유로써 중생을 교화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신심이 있고 오대산에 가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면 문수보살을 직접 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대산에 가야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낙가산에 가야 관세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내가 실제 죽는 것 아니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한다.

爲度衆生故

方便現涅槃

而實不滅道

常住此說法

   '상주차설법(常住此說法)', 항상 여기 계시면서 설법하시는 것입니다. '여기'란 시방세계(十方世界), 처처(處處)가 여기입니다. 꼭 영축산만 여기가 아닙니다. 보타산이 어느 곳이냐? 사람 사람의 신심이 보타산입니다. 철저한 신심으로 기도를 하면 어디든지 나타납니다.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는 곳이 보타산입니다. 문수보살 나타나는 곳이 오대산입니다. 오대산이 따로 없고 보타산이 따로 없습니다. 사람마다 신심에 있습니다.

   신심(信心)! 신심으로 공부도 기도도 하면, 누구든지 살아서 관음도 문수도 볼 수 있으며 산 부처님도 볼 수 있습니다. 신심으로 공부하고 기도할 뿐이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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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생불멸과 중도

일체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는도다.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말씀인데 불교의 골수입니다. 결국 팔만대장경이 그렇게 많고 많지만 한마디로 축소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생불멸이 불교의 근본원리이고, 부처님은 뭘 깨쳤느냐 하면 불생불멸을 깨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하면 팔만대장경이 다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 만물 전체가 생자필멸(生者必滅)입니다. 난 자는 반드시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생자는 필멸인데 어째서 모든 것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하셨는가? 그것은 빨간 거짓말이 아닌가? 당연히 그런 질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났다고 하면 다 죽는 판입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은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이라고 하신 것인지, 이것을 분명히 제시해야 안 되느냐 말입니다. 그것도 당연합니다. 이것을 참으로 바로 알려면 도를 확철히 깨쳐서 일체가 나지도 않고 일체가 멸하지도 않는 이 도리를 바로 알면 그때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누구든지 의심 안할래야 안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인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합니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나니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니라.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이 법'이란 불생불멸의 법을 말합니다. 천삼라 지만상(天森羅 地萬象) 전체가 다 불생불멸의 위치에 있어서 세간의 모습 이대로가 상주불멸입니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생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고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우주 전체가 불멸입니다. 이것은 모든 만법의 참모습으로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라고 합니다.

   또 화엄경에서는 그것을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합니다. 한없이 한없이 연기할 뿐 그 본모습은 모두 다 불생불멸이며 동시에 이 전체가 다 융화하여 온 우주를 구성하고 아무리 천변만화한다 해도 상주불멸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동시에 모든 불교 문제가 다 해결되는데, 이것을 바로 모를 것 같으면 불교는 영영 모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모두 다 산중에 들어와서 눈감고 앉아 참선을 하든지 도(道)를 닦아 결국에는 깨쳐야지 안 깨치고는 모를 형편이니 이것도 또 문제 아니냐, 그것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설사 도를 깨치기 전에는 불생불멸하는 이 도리를 확연히 알지 못하더라도 요새는 과학만능시대이니 이것을 과학적으로 좀 근사하게 풀이를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하고, 과학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고로 여러 가지 철학도, 종교도 많지만 불생불멸에 대해서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되어서 요새는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빼앗기게 되었는가?

   과학 중에서도 가장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原子物理學)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데 성공해 버린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인쉬타인(A. Einstein)입니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이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두 가지로 각각 분리해 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이다. 서로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에는 에너지는 에너지 보존법칙, 질량은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데, 요새는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칙 하나면 가지고 설명을 하며 또 하나 밖에 없습니다. 즉 질량이란 것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素粒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입니다.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어떻게 서로 전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상상도 못해보았던 일입니다.

   50여 년 전 아인쉬타인이 등가원리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가 별개가 아니고 같은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였을 때 세계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몽상가니 미친 사람이니 하였습니다. 그런 이론, 즉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하고.

   그래도 아인쉬타인이라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닌 만큼, 학자들이 수십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성공의 첫 응용단계가 원자탄 수소탄입니다. 질량을 전환시키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하는데 핵을 분열시켜보면 거기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발생되는 에너지, 그것이 천하가 다 아는 원자탄인 것입니다. 이것은 핵이 분열하는 경우이고, 핵이 융합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수소를 융합시키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수소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전에는 에너지와 질량을 완전히 분리하여 별개의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만 과학적으로 실험한 결과 질량이 에너지로 완전히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자탄이 되고 수소탄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앤더슨(C. D. Anderson)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에너지를 질량으로 또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실험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은 광범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세그레(Emilio Segre)라는, 이탈리아의 학자로서 뭇솔리니에 쫓겨서 미국에 가서 산, 유명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형태의 각종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질량으로 전환되고, 또 각종 질량이 전체적으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이것이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 아주 알기 쉽습니다.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얼음은 질량에 비유합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이 없어졌습니까? 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 물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면 얼음이 없어졌습니까? 얼음이 물로 나타났을 뿐 얼음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다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 할 뿐이고, 그 내용을 보면 얼음이 즉 물이고, 물이 즉 얼음입니다.

   에너지 질량 관계도 이와 꼭 같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너지로 나타날 뿐, 질량과 에너지가 따로 없습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상대성이론에서 제창되었지만 양자론(量子論)에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물과 얼음이 서로서로 다르게 나타날 때에 물이 없어지고(滅), 얼음이 새로 생긴 것(生)이 아닙니다. 물 그대로 전체가 얼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물이 없어진 것 아니고(不滅), 얼음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不生), 모양만이 바뀌어서 물이 얼음으로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대로입니다.

   이와 꼭 같습니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 보면 전체가 서로 전환되어서 조금도 증감이 없습니다. 즉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불생불멸이니 의당 부증불감 아니겠습니까.

   

   동양사상을 잘 아는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에너지 질량 관계가 불생불멸이요, 부증불감 그대로라고 아주 공공연히 말합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불교 용어를 잘 모르니까 이런 표현을 그대로는 못해도 그 내용에서는 꼭 같이 에너지 질량 관계가 보존(保存)된다고 합니다. 보존된다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의 세계, 즉 법계(法界)라고 합니다. 항상 주(住)해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세계, 상주법계(常住法界)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에너지 질량의 등가원리에서 보면 우주는 영원토록 이대로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상주법계란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불생불멸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계는 어떻게 되는가, 자연계 즉 우주법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에너지가 질량이고, 질량이 에너지여서 아무리 전환을 하여도 증감이 없으며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주는 이대로가 불교에서 말하는 상주불멸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인쉬타인의 등가원리가 없었으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거짓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3000년 전에 진리를 끼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혜안(慧眼)으로 우주 자체를 환히 들여다 본 그런 어른입니다. 그래서 일체 만법 전체가 그대로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런 정신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3000여 년 동안을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구하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결과, 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둘이 아니고, 질량이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질량인 동시에 서로 전환하면서 증감이 없으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생불멸이라는 그 원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어버렸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원자물리학이 설사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서 그런 것이지 부처님이 본시 거짓말 할 그런 어른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요새 그냥 불교원리를 이야기하면 '너무 어려워서 알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내가 한 가지 예로써 불교의 근본원리인 불생불멸의 원리를 상대성이론, 등가원리에서 입증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것은 허황한 것이 아니고, 거짓말이 아니고 과학적으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흔히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불교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을 들어보자면 너무 높고, 너무 깊고, 너무 넓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는 거짓말 같고 허황하여 꼭 무슨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접근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설명한 바와 같이 불교의 근본원리인 불생불멸, 이것이 상대성이론에서 출발하여 현대 원자물리학에서 과학적으로 완전히 증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불교원리가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이처럼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이론을 모두 증명해 준다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불교원리를 설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또 현대물리학이 불교에 자꾸 접근해 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반야심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것은 무형(無形)을 말합니다.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유형과 무형이 서로 통하겠습니까?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예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가 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분자는 또 원자들이 모여 생긴 것이고, 원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 결국 소립자 뭉치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충동해서 문들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자꾸 자가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안 타날 때는 색(色)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空)입니다. 이리하여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 무형에서 유형으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또 요즘 흔희 '4차원 세계'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 4차원 세계라는 것도 상대성이론에서 전개된 것으로 이것을 수학적으로 완전히 공식화한 사람은 민코프스키(H. Minkopski)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4차원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 강연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시대가 온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오늘, 해인사에서...' 할 때에 '오늘'이라는 시간과 '해인사'라는 공간 속에서 이렇게 법문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차원의 공간과 시간은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인데, 그런 분리와 대립이 소멸하고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융합하는 세계, 그것을 4차원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화엄경에 보면 '무애법계(無碍法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애법계라는 것은 양변(兩邊)을 떠나서 양변이 서로서로 거리낌없이 통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해 버리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4차원의 세계, 즉 시공(時空) 융합의 세계로서 민코프스키의 수학공식이 어느 정도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든지 '불생불멸'이라든지 '무애법계'니 하는 이런 이론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中道法門)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녹야원에서 수행하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서 무슨 말씀을 맨 처음에 하셨는가 하면 '내가 중도를 바로 깨쳤다'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중도', 이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모순이 융합되는 것을 말합니다. 모순이 융합된 세계를 중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보통 보면 선(善)과 악(惡)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데 불교의 중도법에 의하면 선악을 떠납니다. 선악을 떠나면 무엇이 되는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중간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악이 서로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선이 즉 악이고, 악이 즉 선으로 모든 것이 서로 통합니다. 서로 통한다는 것은 아까 말한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는 식으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도법문이라는 것은 일체만물, 일체만법이 서로서로 융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모순과 대립을 완전히 초월하여 전부 융화해 버리는 것, 즉 대립적인 존재로 보았던 질량과 에너지가 융화되어 한 덩어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중도'라 하면 '중도 는 중간이다' 하는데 그것은 불교를 꿈에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라 하는 것은, 모순 대립된 양변인 생멸을 초월하여 생멸이 서로 융화하여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이 되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될 때 에너지는 멸하고 질량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생이 즉 멸인 것입니다. 질량이 생겼다(生)는 것은 에너지가 멸했다(滅)는 것이고, 에너지가 멸했다는 것은 질량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멸이 완전히 서로 통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종합해 본다면 불교의 근본은 불생불멸에 있는데 그것이 중도다. 그런데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관념론인가? 관념론은커녕 실증적으로, 객관적으로 완전히 입증되는 것이다. 즉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가 그것을 분명히 입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참으로, 과학적이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과학적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중도란 모든 대립을 떠나서 대립이 융화되어 서로 합하는 것인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대립 중에서도 철학적으로 볼 것 같으면 유무(有無)가 제일 큰 대립입니다. '있다' '없다'하는 것, 중도라고 하는 것은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니다(非有非無).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유와 무가 살아난다는 식입니다(亦有亦無).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3차원의 상대적 유무는 완전히 없어지고 4차원에 가서 통합하는 유무가 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무가 서로 합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유무가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이름한다(有無合故名爲中道)'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생불멸이라는 그 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서로서로 생멸이 없고 모든 것이 서로서로 융합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애자재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有卽是無 無卽是有).

   

   그런데 이것이 워낙 어려운 것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저 멀리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저 하늘의 구름같이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자물리학에서 실지로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인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원리가 실험적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니 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아니고 우리가 언제든지 손에 잡을 수 있고 만져볼 수 있는 그런 원리다, 이 말입니다.

   이런 좋은 법(法)이지만 아는 사람도 드물고,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도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흔히 중도를 변증법과 같이 말하는데, 헤겔(F. Hegel)의 변증법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직접 상통합니다. 즉 모든 것이 상대를 떠나서 융합됩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즉 없는 것, 없는 것이 즉 있는 것, 시(是)가 즉 비(非), 비가 즉 시가 되어 모든 시비, 모든 투쟁, 모든 상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모순과 대립을 떠날 것 같으면 싸움할래야 싸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극락이고, 천당이고 절대세계(絶對世界)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다(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이 말입니다. 보통 피상적으로 볼 때 이 세간(世間)이라는 것은 전부가 자꾸 났다가 없어지고, 났다가 없어지고 하는 것이지만 그 실상(實相) 즉 참모습은 상주불멸,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의 원리는 어디서 꾸어온 것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이 우주 전체 이대로가 본래로 불생불멸입니다. 일체만법이 불생불멸인 것을. 확실히 알고 이것을 바로 깨치고 이대로만 알아서 나갈 것 같으면 천당도 극락도 필요없고,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현실이 절대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눈만 뜨고 보면 사바세계 그대로가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의 세계를 딴 데 가서 찾으려 하지 말고 자기 마음의 눈을 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눈만 뜨고 보면 태양이 온 우주를 비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고 참다운 절대의 세계를 놔두고 '염불하여 극락간다' '예수믿어 천당간다' 그런 소리 할 필요가 있습니까? 바로 알고 보면 우리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경계선은 어디 있느냐 하면 눈을 뜨면 불생불멸 절대의 세계이고, 눈을 뜨지 못하면 생멸의 세계, 상대의 세계이어서 캄캄한 밤중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서로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완전히 뜨자 이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마음의 눈을 뜹시다'

⋯⋯⋯⋯⋯⋯⋯⋯⋯⋯⋯⋯⋯⋯⋯⋯⋯⋯⋯⋯

일승법과 방편

시방 국토 가운데

오직 일승법만 있고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는데

부처님의 방편설도 빼놓는다.

十方國土中

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

除佛方便說

   쉽게 말하자면 온 시방세계는 이대로가 항상 있는 세계[상주법계]이고, 걸림이 없는 세계[무애법계]이고, 하나의 참 진리의 세계[일진법계]인데, 이것을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일승법(一乘法)이라고 합니다. 우리 불교가 있음으로써 무애법계, 무장애법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본시 이 시방세계라 하는 것은 일진법계, 무애법계, 무장애법계인데 부처님이 그것을 바로 아시고 그것을 중생에게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방세계라 하는 것은 전체가 일승뿐입니다. 무애법계, 일승법계뿐이지 그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고, 온갖 말씀을 다 하셨습니다. 일승 이외의 법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것은 딴 것이 아니라, 못 알아들으니까 방편(方便)으로 이런 말씀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그것이 실설(實說)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부처님 법문을 알려면 일승법계의 소식을 알아야만 부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외의 방편설로는 모릅니다. 방편설은 실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시고서 '돈설화엄(頓說華嚴)'이라고, 처음 한꺼번에 {화엄경}을 설해 버렸습니다. {화엄경}을 설(說)해 놓으니 귀가 막히고 눈이 멀어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고 듣는 사람도 없고 하니, 아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모르는 것을 부처님 혼자 아무리 미래겁이 다하도록 말씀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말씀하시나 안 하시나 중생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귀가 어둡고 눈이 어두워 이러하니, 차차 키워 가지고 귀도 조금 듣고 눈도 조금 밝게 해 가지고 일승(一乘)법문을 해야 되겠다, 하고 물러섰습니다. '퇴설삼승(退說三乘)'이야, 물러서서 삼승법문을 설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막 나옵니다. 이런저런 말도 나오고, 유치원 아이를 보면 유치원 아이에 해당하는 법문을 하고, 초등학교 아이들을 보면 또 그에 해당하는 법문,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등 이렇게 여러 가지 수기설법(隨機說法)을 합니다. 이것은 사람 보아 가면서 옷 해 입히는 식입니다. 키 작은 사람은 짧은 옷 해 입히고, 키 큰 사람에게는 긴 옷 해 입히고,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 팔만 사천 법문이 벌어진 것입니다. 중생 근기가 팔만 사천으로 모두 다 각각 다르니, 그게 소위 방편설(方便說)입니다. 그것은 전부 실설(實說)이 아닙니다.

   처음에 일승법문, 돈설화엄 할 때 그때에 모두 알아 버렸으면 눈깔사탕 따위는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유치원 이야기,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 이야기 모두 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 알아들으니까 할 수 없이 유치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법문이 모두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어느 정도 커졌습니다. 부처님 법문을 알아들을 만큼 근기가 성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에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한 것입니다. 이것은 방편으로 말한 연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화엄경} 설한 것이 일승법문이고 최후에 또 {법화경} 설한 것이 일승법문인데, 화엄·법화 중간에 40년 동안 설한 그것은 전부 다 방편설입니다. 거기에 가면 온갖 법문이 다 있습니다. 온갖 것이 다 있는데 그것도 실제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 키우기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승(一乘)이란 것은 과연 어떤 것이냐. 이것도 생각해 봐야합니다. 그것은 실법(實法)이니까. 일승이란 화엄·법화가 일승을 대표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화엄·법화는 어떤 진리에 서 있는가? 화엄·법화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일승 원교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조직하여 집대성한 사람이 천태 지자(天台智者)선사입니다. {법화경}에 대해 천태 지자선사가 정의(定義)한 말씀이 있습니다.

   "원교라 함은 증도를 나타낸 것이니 양변을 막아 버렸다[圓敎者 此現中道 遮於二邊]."

   일승 원교란 것은 실지 그 내용이 중도(中道)인데 중도란 것은 양변을 여읜 것이라는 말입니다. 양변이란 유(有)와 무(無), 시(是)와 비(非), 선(善)과 악(惡), 이것이 전부 양변입니다. 상대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전부 양변으로 되어 있는데, 그 차별적 양변이란 것은 실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밝고 깨끗하면

양변을 쌍으로 막고

정히 중도에 들면

이제를 쌍으로 비춘다.

心卽明淨

雙遮二邊

正入中道

雙照二諦

   말하자면 도를 자꾸자꾸 많이 닦아 가지고 마음이 깨끗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자연히 밝을 것 아닙니까. 수도(修道)를 많이 해서 마음이 완전히 밝고 깨끗해져 버리면, 번뇌망상이 하나도 없이 얼음알같이 그렇게 깨끗해져 버리면, 그러면 양변을 여의는 것입니다. 그런 동시에 정(正)히 중도에 들어갈 것 같으면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그것도 양변과 같은 것인데 2제(二諦)를 쌍으로 비춘다는 말입니다.

   앞에서는 마음이 밝아 가지고 확철히 도를 깨칠 것 같으면 쌍으로 이변을 막아 버린다, 이변을 초월한다고 했고, 그러면 그것이 중도에 들어간 것입니다. 중도에 들어가면 '2제(二諦)를 쌍으로 비춘다'는 말은 진속이 서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2제(二諦), 진(眞)과 속(俗)이 서로 합하고 선(善)과 악(惡)이 서로 합합니다. 서로 융합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차별적인 선악이나 유무의 양변을 완전히 초월하는 동시에 이것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을 중도라 하며, 이것이 원교(圓敎)이고, 이것이 일승이다, 그 말입니다.

   천태스님 말씀은 {법화경} 위주인데, {법화경}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이란 것은 현실 이대로가 절대(絶對)라는 말로, 이것은 그 원리가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현실의 모든 차별적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양변이 서로 융합한다는 말에 있습니다.

   

   그러면 '차(遮)'와 '조(照)'라 하는 말, 양변을 초월한다[遮]와 양변이 서로 통한다[照] 하는 이것이 어떻게 다른가? 양변을 여읜다, 초월한다는 이 말은, 비유를 하자면 하늘에 구름이 꽉 끼어 있어 해가 안 보이지만 구름이 확 걷히면 해가 확연히 드러난다는 말과 같습니다. 양변을 초월한다는 말은 '구름이 걷힌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양변이 서로 통한다 하는 것은 '해가 드러났다' 이 말입니다. '구름이 걷혔다' 하면 으레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해가 드러났다'고 하면 '구름이 걷혔다'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遮)'와 '조(照)'가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쌍차쌍조(雙遮雙照), 쌍으로 걷히고 쌍으로 초월하고! 쌍으로 비추고 쌍으로 통하고!

   쌍으로 통한다 하는 것은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승원교, 중도라 하는 것은 모든 차별을 초월하고 모든 차별들이 원융무애하여 서로 융통자재한다, 이 말입니다. 이런 세계를 일승원교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진법계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평등하여 전부 진여(眞如)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융통자재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애법계(無碍法界)라 합니다. 유무도 가림이 없고, 시비도 가림이 없고, 선악도 가림이 없고, 이래서 모든 것이 무애자재, 무애법계인 것입니다. 일진법계(一眞法界) 즉 무애법계이고, 무애법계 즉 일진법계인데, 이것을 중도라 하고 이것을 원교라 하는 것입니다.

   

   법화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는데, 원교대종(圓敎大宗)이라고 하는 화엄에서는 일승을 어떻게 설명했는가,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화엄이라고 하면 요새 강원(講院)에서 배우는 {화엄청량소(華嚴淸凉疏)}라는 것이 있는데, 청량(淸凉)스님이 여기에서 화엄종취(華嚴宗趣)에 대해 정확히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곧 비추며 막고

곧 막으며 비추니

쌍으로 비추며 쌍으로 막아서

둥글게 밝아 일관하면

이 종취에 계합하는도다.

卽照而遮

卽遮而照

 照 遮

圓明一貫

契斯宗趣

   즉조이차(卽照而遮), 곧 비추면서 막는다. 결국 모든 것이 융통자재했다, 즉 모든 것을 초월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동시에 즉차이조(卽遮而照)니 모든 것이 융통한다는 말입니다. 즉 모든 것을 초월할 때에 모든 것이 다 융통해 버리고, 모든 것이 융통할 때 모든 것이 다 초월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쌍조쌍차(雙遮雙照)가 되지 않습니까. 쌍으로 다 통하고 양변을 초월했다, 즉 양변이 서로서로 융통하고 양변이 서로서로 초월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원명일관(圓明一貫), 둥글게 밝다, 모든 것이 다 원만구족(圓滿具足)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관할 것 같으면 계사종취(契斯宗趣), 화엄종취에 맞다 그 말입니다.

   근본요지는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화엄종취라는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쌍차쌍조에 있다, 그 말입니다. 쌍차쌍조라 하는 것을 확실히 바로 알면 이 화엄종취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청량국사(淸凉國師)의 화엄종취에 대한 정의입니다.

   천태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중도란 것이 쌍차쌍조이니 이것을 바로 알면 중도인 동시에 일승이고 원교이고 법화도리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청량스님은 "화엄이 원교인데 화엄도 또한 딴 것이 아니라 쌍차쌍조인데, 이 도리를 분명히 알 것 같으면 화엄도리의 종취를 알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화엄에 대해 천태스님, 청량스님이 말씀하신 것은, 원교라는 것은 같은데 화엄종에서는 {법화경}을 대승종교(大乘終敎)라 해서 '최후의 교리'이지 '원만원교'는 못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있으나, 그것은 서로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이리도 표현하고 저리도 표현한 것입니다.

   

   이랬든 저랬든 간에 불교에서 가장 구경인 최후 원리를 설한 경을 화엄법화라 하는데, 화엄·법화를 총칭하여 일승원교(一乘圓敎)라 합니다. 그러니 일승원교란 그 대표적인 천태스님, 청량스님 말씀과 정의에 의하면 쌍차쌍조하는 중도에 서 있는 것이 즉 화엄이요, 법화이다, 이것입니다.

   쌍차쌍조(雙遮雙照)라는 것, 이것이 이론적으로 들어가면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양변을 완전히 초월하여 양변이 완전히 합해서 통한다. 그러면 화엄의 사법계(四法界)가 벌어집니다. 이법계(理法界), 사법계(事法界), 이무애법계(理無碍法界), 사무애법계(事無碍法界)입니다. 결국 이무애법계, 사무애법계를 말하려고 이법계, 사법계를 말한 것인데, 이법계 중에 사법계가 있는 것이고, 사법계 중에 이법계가 있는 것이지 이법계 사법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이법계 사법계를 따로 세웠지만 각각 이법계 중에 사법계, 사법계 중에 이법계, 이렇게 하여 이사(理事)가 무애(無碍)입니다. 이사가 서로 거리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천삼라(天森羅), 지만상(地滿象)이 하나도 무애법계 아님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온 시방세계의 모든 존재가 중도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절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결론이 내려집니다. 이것이 화엄·법화의 근본이론입니다.

   그러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로서, 내 말했듯이 극락세계를 딴 데 가서 구할 것 없고 천당을 딴 데 가서 구할 것이 없습니다. 실지 근본원리인 쌍차쌍조하는 중도도리를 확실히 깨쳐 버리면 이대로 전체가 무애자재, 무장애법계인 것입니다.

   그러면 앉은 자리 선 자리가 극락입니다. 근본요지는 어디 있나 하면, 눈을 바로 떴나 못 떴나 이것입니다. 내가 항상 하는 소리이지만 해가 아무리 떠 있다고 해도 눈감고는 광명이 안 보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무애법계, 일승법계, 진여법계, 무장애법계에 살고 있지만 눈을 감고 앉아서 자꾸 "안 보인다, 안 보인다" 하면 그것 참 딱한 노릇 아닙니까.

   참으로 다행한 것은 우리가 눈을 떴든지 감았든지 간에 이 무장애법계, 광명의 세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눈을 감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자빠지고 엎어지고 하더라도 자기가 눈을 떠서 광명을 못 본다 그뿐이지 이 광명의 세계, 무애법계, 일진법계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사실을 확신하고 노력하여 눈만 뜨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진법계, 무애법계, 무장애법계 이외에 그와 모순되는 말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전부 방편설입니다. 방편가설일 뿐 실설(實說)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노력하여 실설을 따라가야지 방편가설인 줄 알면서 그것을 따라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방편가설을 따라간다면 그것은 좀 정신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나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유치원 꼬마들에게 아무리 대학 과정을 배우라고 해도 모르니 그것을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 할 수 없이 유치원 과정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일승이 실지로 근본법은 근본법이지만 일승을 위해서는 방편가설이 전부 다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시방국토(十方國土) 중에 유유일승법(唯有一乘法)이라, 일승법뿐입니다. 본래 전체가 일승법계고, 전체가 무애법계고, 전체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무이역무삼(無二亦無三),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는데 그러면 왜 부처님은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가? 그게 모두 방편설입니다. 설사 아무리 방편설을 설하였지만, 우리가 아무리 어둡다 어둡다 해대지만, 사람 개개인 전체가 다 광명 속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눈을 감았든가 떴든가 간에 눈을 감은 것과 뜬 것은 다르지만 광명 속에, 일진법계 속에, 무장애법계 속에 살고 있는 것만은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가장 구경법(究竟法)이냐? 그건 아닙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에는 일승법이 실(實)이고 삼승은 권(權)이라, 이렇게 봅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본다 해도 나중에 가서는 전체가 중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삼승도 중도 아닌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무애자재한 교리, 사법계(事法界)라든지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든지 무애법계, 일승원교라 하는 것이 우리 불교의 구경(究竟)이냐? 그게 아닙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인 선(禪)이란 것이 있습니다. 일승이니 하며 아무리 큰소리 해대지만 이것은 말에만 그칠 뿐, 말! 말이지 실은 아닙니다. '교'라 하는 것은 뭐라고 하든 '말'이지 '실'은 아닙니다. 아무리 일승이 실법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빨간 거짓말입니다. 일승 이야기 아무리 해봤자 밥 이야기는 배 안 부릅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것 가지고는 해탈 못 한다, 그 말입니다. 이것 가지고는!

   밥은 실제 떠먹어야 됩니다. 그러니 오직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려면 참선(參禪)을 해야 됩니다. 그것을 교외별전, 즉 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교'라 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이고 '선'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 마음을 전한 것인데, 말씀이란 것은 마음을 깨치기 위해 한 것이지 딴 것 아닙니다. 요리강의라는 것은 밥 잘 해 먹자는 것인데 밥 잘 해 먹자는 이외에 뭐가 있습니까. 요리강의를 천날 만날 해도 배가 부르는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교외별전에서 볼 때는 일승 아니라 더한 일승이라도 이것 전부가 방편이고 전부 가설인 것입니다. 실지에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진정(眞淨)스님 말씀이 있습니다.

다함이 없는 자성바다는 한 맛이나

한 맛이 끊어져야 나의 선이다.

無盡性海含一味

一味相沈是我禪

   무진성해(無盡性海), 다함이 없는 자성바다, 자성바다 전체가 한 맛이니, 일진법계 무애법계다 그 말입니다. 일미(一味)라 하는 그것이 즉 무애(無碍)입니다. 어째서 일미(一味)가 무애냐 하면 이 우주 세계라 하는 것은 차별로 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이 틀린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일미가 되려면, 한 맛이 되려면 서로 완전히 통해 버려야 됩니다. 안 통하면 한 맛이 안 됩니다. 결국 일미라 하는 것은 전부가 통하는 세계, 색과 공이 통하고 모든 것이 다 통해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안목에서 볼 때는 일미상침시아선(一味相沈是我禪)이라. 일미, 한 맛이란 것, 무애, 모든 것이 통했다는 것, 중도니 뭐니 해대지만 사실에 있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말입니다. 실지와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하는 소리 아닙니까.

   "손가락을 가지고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지 손가락을 보지 말라." 일승불교가 "실(實)이다, 실이다!"라고 하는 이것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은 아닙니다. 그러니 여기에 얽매여도 안 됩니다. 결국 화엄이니 법화니 하는 것이 "실이다, 실이다" 하고 자꾸 주장을 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동시에 이것도 방편가설입니다.

   화엄·법화 일승원교가 다 방편가설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만 비로소 자기 마음을 깨치는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 "일승원교가 참으로 우리 불교의 진리다, 그것이 구경(究竟)이다, 최고다"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실제에 있어서 우리가 항상 손가락에만 매달려 있지 달은 영원히 못 보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방세계가 전부 일승불교이며 일승도리인데, 일승도리라 하는 것은 무애법계 즉 중도에 서 있습니다. 이 중도란 불생불멸입니다. 또 양변을 여읜 것, 생멸이 완전히 통하는 무애법계란 말입니다. 이것을 '교'에서는 실이라 하여 구경법이라 하는데, 참으로 사실을 알고 보면 이것도 일종의 방편이고 가설이며, 달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은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화엄이고, 법화고, 일승이고, 원교고 다 내버려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저 태평양 한복판에.

   그리고 어떻게든 노력해서 손가락만 보지 말고 달을 봐야 되겠다 이것입니다. 예전에 늘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과 조사를 원수같이 보아야만

바야흐로 공부할 분(分)이 있도다.

見佛祖如 寃家相以

方有參學分

   그러면 예전 조사(祖師)스님들의 어록(語錄)은 모두 실(實)인 것 같은 생각이 들겠지요. 물론 화엄·법화와는 틀립니다. 그러나 나중에 참으로 바로 깨쳐 놓고 보면 조사스님의 어록도 사실에 있어서 '눈 속 가시[眼裏荊棘]'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초불월조(超佛越祖), 부처도 초월하고 조사도 초월하는 이런 출격대장부가 되어야만 비로소 횡행천하(橫行天下)하고 내 말 한번 들어보라 하든지 내 말 듣지 말아라 하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이 방편에 얽히고 저 방편에 얽히고 하여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하면 영원토록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또 이렇게 말하니, "허, 그러면 다 필요 없네. 그 뭐 화엄·법화도 필요 없고 조사어록도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런 것 다 뭐 할 필요 있나, '이 뭣고!'만 하면서 앉아 있으면 안 되겠나!" 그야 물론 그렇습니다. 그리 하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아직 그리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유치원에서는 유치원 과정이 필요하고 초등학교에서는 그 수준에 맞는 과정이 필요하듯이 모든 방편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아직까지 유치원 자격밖에 안 되는 사람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한번 뛰어 부처지 위에 들어간다)한다고 말만 그렇게 들었지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됩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조그만 돌도 하나 못 드는 어린애가 큰 바위를 들려고 한다든지 태산을 짊어지고 가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역량에 따라서 방편도 실이 되고 실도 방편이 되는 것이니까 우리가 모든 것에서 한 법에 국집(局執)해도 못쓰고 또 한번이라도 함부로 버려도 안 됩니다. 사람 사람이 그 정도에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원 근본은 "부처도 초월하고 조사도 초월해서 불타와 조사 보기를 원수같이 보아야만 참으로 공부할 분이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근본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서야 참으로 크게 눈을 뜨고 살불살조(殺佛殺祖)하는 그런 대출격장부가 될 것입니다.

   이만 했으면 방편이 무엇이다 하는 것, 그에 대해 무엇을 취하고 어떻게 해야겠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니, 강원에서는 경(經) 부지런히 익히고 선방에서는 화두(話頭) 부지런히 해 가지고 어떻게든 자기 하는 공부를 하루바삐 빨리 성취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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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佛) 법(法) 승(僧)

마음 청정이 부처요

마음 광명이 불법이요

청정하고 광명하여 거리낌없는 것이 스님이다.

心淸淨是佛

心光明是法

淨光無 是僧

   이것은 임제스님 법문인데, 실제로 심청정이 되고, 심광명이 되고, 정광무애가 되어야 바로 깨친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정하다, 깨끗하다 하면 어느 정도로 깨끗한 것인가? 구름 한 점 없는 허공, 그 허공이 참 깨끗합니다만 그것은 마음이 깨끗하다고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래서 허공이 깨끗하다는 그것도 또 한 방망이 맞아야 한다[虛空也須喫棒]고 말합니다. 마음 깨끗한 것에 비하면 허공도 깨끗한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것을 명경에 비유합니다. 먼지 한 점 없는 그 명경이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명경이 깨끗하다는 그런 유(類)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이 말했습니다.

   

명경을 부수고 오라

너와 서로 보리라.

打破鏡來

與汝相見

   그렇다면 불교에서 수행해 가는 차제(次第)로 보아서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참으로 깨끗한 마음, 청정한 마음인가?

   구경각을 성취하기 전에는 십지등각(十地等覺)도 심청정(心淸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지등각은 아주 거친 망상[ 重妄想]은 떨어졌지만 자신도 모르게 아라야의 미세한 망상[微細妄想]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의식세계인 제8 아라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떨어져야만 이것이 참다운 청정입니다. 그러면 허공보다 더 깨끗하고 거울보다 더 깨끗합니다. 이 자리는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무심경계로 진여자성이니, 성불, 견성이니 하는데, 이것은 말로써가 아니고 실제 경험에서 그 경지를 체득(體得)해야 됩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무심(無心)경계가 나타나면 목석과 같은 무심인가, 아닙니다. 거기에서, 그 깨끗한 마음에서 큰 광명이 나타납니다. 이 광명을 예전 스님들은 천일병조(千日 照)라고 말했습니다. 천일병조! 해가 하나만 떠도 온 세계가 이렇게 환히 밝은데 하나, 둘, 셋도 아니고 천 개의 해가 일시에 두루 비추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오히려 유한입니다. '천(千)'이라는 숫자가 있으니까.

   마음이 청정한 여기에 생기는 광명은 천 개의 해가 한꺼번에 비추인다 해도 오히려 적당하지 않은 광명이니 불가설(不可說), 말로써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방제불이 일시에 출현하여 하루 이틀도 아니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이 광명을 설명하려 해도 다하지 못하는 참다운 광명이다, 이 말입니다. 이제 심광명이라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광무애(淨光無碍), 즉 청정과 광명이 서로서로 거리낌이 없다,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이 있으면 빛이 있고 빛이 있으면 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청정은 불에다 비유할 수 있고 광명은 빛에다 비유할 수 있어서 불이 즉 빛이고 빛이 즉 불입니다. 빛 여읜 불이 따로 없고 불 여읜 빛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 둘이 될 수 없는 이것을 무애(無碍)라 합니다. 육조스님도 정과 혜를 말할 때 불과 빛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근본요점은 어디 있느냐 하면 심청정, 심광명을 성취하여 참으로 허공보다 더 깨끗하고 명경보다 더 깨끗한 무심경계만 증득하면 자연히 거기서 천 개의 해가 일시에 비추는, 비유할 수 없는 그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정광무애라 합니다. 빛 따로 있고 불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빛이 즉 불이고 불이 즉 빛이다, 이런 말입니다.

   이리하여 청정은 부처님[佛]이라 하고, 광명은 법(法)이라 하고, 무애는 스님[僧]이라 하여 불법승 삼보(佛法僧 三 )가 되는데 세 가지가 각각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불[火]이라 말할 때는 부처님을 표현하고, 빛이라 말할 때는 불법을 표현하고, 불이 즉 빛이고 빛이 즉 불이다 말할 때는 스님을 표현하는 것이니, 표현은 각각 달라도 내용은 똑같습니다. 불이 빛이고 빛이 불이지 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법승 삼보, 청정, 광명, 무애가 하나인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셋이 즉 하나이고, 하나가 즉 셋이다[三卽一 一卽三]고 합니다. 이 근본법을 바로 깨쳐서 실제로 증득할 것 같으면 그때에야 비로소 불법을 아는 동시에 모든 속박을 다 벗어나서 자유자재한 대해탈을 성취한 때입니다.

   

   그러면 모든 속박은 왜 생기느냐? 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으면 우리가 자유롭게 다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번뇌망상이 다 떨어지고 무심을 증득하여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경지를 성취할 것 같으면 모든 속박을 다 벗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합니다.

   눈감은 봉사에게 무슨 자유가 있습니까? 이리 가도 엎어지고 저리 가도 엎어지고 조금도 자유가 없지만 자기가 눈을 뜨면 온 천지를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를 봉사라 하는가? 크게는 산도 보고 작게는 먼지도 다 보는데 어째서 우리를 두고 눈감았다고 하는가?"

   한 가지 비유를 말하자면 우리가 깨쳤다는 것은 꿈을 깨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그 꿈속에서는 모든 활동이 자유자재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것 같지만 그것이 꿈인 줄 모릅니다. 일단 꿈을 턱 깨고 나면 "아하! 내가 참으로 꿈속에서 헤매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중생들이 세상을 살면서 그것이 꿈인 줄을 모릅니다. 꿈속에 사는 줄을 모릅니다. 실제 그 꿈을 깨고 나야 비로소 여태까지 꿈속에서 살았구나 하는 것을 참으로 알 수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아니면 꿈을 모르는 것과 같이, 깨쳤다는 것은 실지 마음의 눈을 떠서 깨어나기 전에는 이해하기가 참으로 곤란합니다. 예전 장자(莊子)도

   "크게 깨고 보면 큰 꿈을 알 수 있다[大覺然後知大夢]"고 하였습니다.

   중생이 번뇌망상의 유심(有心) 속에 사는 동안은 전체가 꿈입니다. 그래서 십지등각도 꿈속에 사는 줄 알아야 됩니다. 오직 제8 아라야 근본무명이 완전히 끊어져서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그때에야 꿈을 바로 깨친 사람, 즉 부처입니다.

   성불하기 전에는 꿈을 바로 깬 사람이 아니고 동시에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중생의 자유라 하는 것은 꿈속 자유이고 깨친 사람의 자유라 하는 것은 꿈을 깬 뒤의 자유이니, 꿈속에서의 자유를 어떻게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꿈과 생시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말한 깨쳤다는 것을 대강은 짐작할 것입니다. 깨쳤다는 내용이, 성불했다는 내용이 무심에 있는데 무심을 증하면 거기에서 대지혜 광명이 생기고 대자유가 생깁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꿈을 깬 사람,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 되어 대자유자재한 활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祖師)도 필요 없고, 팔만대장경도 다 필요 없습니다. 부처다, 조사다 하는 것은 다 중생이 꿈을 깨우기 위한 약에 지나지 않습니다. 약! 중생의 근본병인 꿈을 완전히 깨우고 나면 약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병이 있을 때 약이 필요하지 병이 다 낫고 나면 약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꿈을 완전히 깨워서 참다운 해탈을 성취하면 그때 가서는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도 필요 없는 참다운 대자유입니다.

장부가 스스로 하늘 찌르는 기운 있거니

부처가 가는 길은 가지 않는도다.

丈夫自有沖天氣

不向如來行處行

   내 길, 내가 갈 길이 분명히 다 있는데 무엇 한다고 부처니 조사니 하여 딴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느냐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참다운 대자유자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 일반에 대해 조금 이야기 하겠습니다.

   종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개 초월신(超越神)을 주장합니다. 이 현상계(現象界)를 떠난 저 천상에 있는 초월신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을 그 초월신에 맡기고 그 밑에 무조건 절대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초월신의 뜻대로 되게 해주시오, 이런 식입니다. 이리하여 죽고 나면 그 초월신이 사는 곳에 가서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초월신을 섬기면서. 그러나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일거일동이 초월신의 지배하에서 초월신의 뜻대로 살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초월신의 속박을 받는 것이니, 그런 사상은 노예도 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초월신은 주인이 되고 모든 사람은 종같이 되어 그 지배를 받아야 되니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기침도 한번 크게 못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의 주장은 다릅니다. 본시 인간이란 불성(佛性)이 다 있어서 자성(自性)이 청정하고 깨끗하여 거기에는 부처님도 설 수 없고 조사도 설 수 없습니다. '심청정'하여 깨끗하다고 한 거기에서는 부처도 때[垢]고, 조사도 때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고!

   그토록 깨끗한 곳,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곳에서는 부처의 지배도 받지 않고 조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어떤 지배도 받지 않는 대자유 대해탈 경계입니다. 어떤 속박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외부의 상대적인 무슨 지배를 받고 무슨 속박을 받고 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대 금기(禁忌)입니다. 이것이 대해탈인 동시에 성불이며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도 자유에 대해 많이들 말합니다. 인간은 자유이며 평등이라고. 그러나 참다운 자유는 심청정을 실제로 증하고 심광명을 증해서 청정과 광명이 거리낌없이 무애한 그 속에서 놀아야만 비로소 참으로 대자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고 무조건 복종하고, 이렇게 되면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해탈되어 있습니다. 해탈되어 있는데 번뇌망상 때문에 여러 가지 구속이 생겨났습니다. 번뇌망상만 완전히 끊어 버리고 무심을 증하여 본래의 대자유를 회복할 것 같으면, 그러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입니다. 내가 가장 높다 그 말입니다. '나'라는 것도 설 수 없는 것인데, 부처님께서 말로 표현하자니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다운 자유를 얻으려면 심청정, 심광명, 정광무애를 성취한 대해탈 경계를 성취하면 천상천하에 무애자재합니다. 그런 자유자재한 생활을 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목표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신론}에서 말하듯이 모든 고통을 벗어나서 구경락을 얻습니다[離一切苦 得究竟樂].

   설사 초월신을 숭배하여 그 세계에 가서 난다고 해도 거기에서도 신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그런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일체고(離一切苦)가 안 됩니다. 이일체고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속박도 받지 않고 어떠한 속박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대자유입니다. 이런 대자유는 우리 불교 이외에는 없다고 나는 단정합니다.

   불교에서 해탈이다, 자유다 하는 것에는 어느 종교 어느 사상에서도 따라올 수 없는 큰 자유자재가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내 물건이지만 이것이 진금(眞金)인가 잡철(雜鐵)인가, 그것도 구별 못 해서 되겠습니까. 실제 진금을 잡철로 착각해서는 큰일납니다.

   

   이 대자유를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불교부터 버려야 합니다. 자꾸 부처님 믿고 조사를 의지하고 하면 결국은 거기에 구애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법을 성취하려면 자기 마음이 본시 부처라는 것, 이것 이외에는 전부 다 안 믿어야 됩니다. 마음이 부처다[卽心是佛] 이것만이 바른 믿음[正信]이고, 이것 이외에 딴 것을 무엇이든 믿으면 그것은 삿된 믿음[邪信]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만 믿고 팔만대장경도 버리라고 항상 말합니다.

   고불고조(古佛古祖)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법을 성취하려면 부처와 조사를 원수와 같이 보라[見佛祖如寃家相似人]."

   부처와 조사를 원수와 같이 보라니!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자기 마음만 믿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이 부처고 자기 마음이 조사입니다. 자기 마음이 극락이며 자기 마음이 천당입니다. 자기 마음을 놓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처와 조사는 꿈 속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부처와 조사를 원수같이 보라고 하면 말 다한 것 아닙니까.

   예수교를 공부하는 어떤 사람이 벽에 부딪쳤습니다. 더 나아갈 수 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참선을 해보겠다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면 참선을 해야 되는데, 당신이 참선을 하려면 근본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입니까?"

   "스님네도 참선을 하려면 불교부터 버려야 되는데, 당신이 예수교를 버리지 않으면 이 공부는 못 해. 예수교라는 속박에서부터 벗어나야 돼!"

   "스님, 가서 생각해 보고 오겠습니다."

   "허허, 생각해 보고 온다는 말은 안 온다는 말 아냐? 예수교 못 버리면 아예 오지 말아. 그래서는 백년 해봤자 참선(參禪)이 안돼."

   내가 처음에 '심청정'이란 한 것은 부처와 조사도 설 수 없는 그런 청정을 말한 것입니다. 팔만대장경도 여기 와서는 때[垢]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대중들도 이것을 깊이 믿고 오직 자기가 본시 부처라는 것, 자기 마음 이외에 불법(佛法)이 없고, 자기 마음 이외에 부처가 따로 없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믿고 오직 화두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로만 깨치면 그 속에서 대자유자재한 부사의(不思議)해탈 경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요점은 어디 있느냐? 밥 이야기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실제로 밥을 먹느냐 안 먹느냐, 이것입니다. 공부 부지런히 해서, 화두(話頭) 부지런히 해서 내 말이 헛된 말이 안 되고 실제로 이것을 성취한 사람이 하나라도 생기도록 노력해야 안 되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만은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자기만을 믿으라'고 한다고 '옳지, 술 생각이 나는데 한번 가볼까?' 이렇게 했다가는 큰일납니다. 그것은 자기가 아닙니다. 망상이고 도둑놈이란 말입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자기'란 것은 '깨끗한 자기'를 말함이지 '거짓의 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을 성인인 공자(孔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70살이 되니 자기 생각나는 대로 한다[七十從心所欲 不踰矩]"고. 동으로 가고 싶으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고 싶으면 서쪽으로 가고, 앉고 싶으면 앉고, 무슨 짓을 해도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쁜 짓 안 한다는 말입니다.

   심청정(心淸淨), 허공보다 더 깨끗한 이 마음을 실제로 알고 보면, 직접 자기가 증득해 놓고 보면 이리 가도 대해탈 경계, 저리 가도 대해탈 경계, 부처님 행동 그대로입니다. 저 시방세계를 다 찾아봐도 술 먹고 싶어 날뛰는 그런 사람은 그 깨끗한 거울 속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태평양 한복판, 물이 깊고 깊어서 태풍이 불어 아무리 바닷물이 움직이고 움직여도 깨끗한 물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얕은 구정물을 보고서 "물은 꼭 같지?" 이렇게 나오면 그때는 깨끗한 물은 평생 못 보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참으로 허공보다 더 깨끗한 마음, 그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일체의 선과 악이 다 떨어진 곳이고 부처와 조사도 설 수 없는 곳입니다. 청정한 자기를 바로 믿고, 청정한 자기를 바로 깨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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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같이 존경하라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

觀彼怨家

如己父母

   이것은 {원각경(圓覺經)}에 있는 말씀입니다.

   중생이 성불 못 하고 대도(大道)를 성취 못 하는 것은 마음속에 수많은 번뇌, 팔만 사천 가지 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많은 번뇌 가운데서 무엇이 가장 근본 되는 것인가. 그것은 증애심(憎愛心),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가(禪家)의 3조 승찬대사는 그가 지은 {신심명(信心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도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이 증애심이 실제로 완전히 떨어지려면 대오(大悟)해서 대무심경계를 성취해야 합니다. 무심삼매에 들어가기 전에는 경계에 따라서 계속 증애심이 발동하므로 이 병이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대도를 목표로 하므로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 이것이 생활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가장 크게 죄를 지은 사람을 부모와 같이 섬겨라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입니다.

   '나쁜 사람을 용서하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또 모르겠지만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라 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나 하실 수 있는 말이지 다른 사람은 감히 이런 말조차 못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불교에서는 '용서(容恕)'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다고 잘못한 사람과 싸우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잘했고 너는 잘못했다, 그러니 잘한 내가 잘못한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의 불성은 꼭 같다[一切衆生 皆有佛性]'고 주장합니다. 성불해서 연화대 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나 죄를 많이 지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있는 중생이나 자성자리, 실상(實相)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겉을 보고 미워하거나 비방하거나 한층 더 나아가서 세속말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고 나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부처님같이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실례로 들어도 그와 같습니다. 부처님을 일생 동안 따라다니면서 애를 먹이고 해치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제바닷타[調達]'입니다.

   보통 보면 제바닷타가 무간지옥에 떨어졌느니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느니[生陷地獄] 하는데 그것은 모두 방편입니다. 중생을 경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어찌 됐건 그러한 제바닷타가 부처님에게는 불공대천의 원수인데 부처님은 어떻게 원수를 갚았는가?

   성불(成佛), 성불로써 갚았습니다.

죄와 복이 온 시방법계를

비춤을 깊이 통달했다.

深達罪福相

照於十方

   착한 일 한 것이 시방세계를 비춘다고 하면 혹시 이해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악한 짓을 한 무간지옥의 중생이 큰 광명을 놓아서 온 시방법계를 비춘다고 하면 아무도 이해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가장 선한 것을 부처라 하고 가장 악한 것을 마귀라 하여 이 둘은 하늘과 땅 사이[天地懸隔]입니다마는, 사실 알고 보면 마귀와 부처는 몸은 하나인데 이름만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다 해도 그 사람의 자성(自性)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고, 아무리 성불했다 하여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더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와 부처는 한 몸뚱이이면서 이름만이 다를 뿐 동체이명(同體異名)입니다. 비유하자면 겉에 입은 옷과 같은 것입니다.

   제바닷타가 아무리 나쁘다고 하지만 그 근본자성, 본모습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중에 제바닷타가 성불하여 크게 불사(佛事)를 하고 중생을 제도한다고 했습니다. 제바닷타가 성불한다고 {법화경}에서 수기(授記)하였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 행동, 공부하는 근본지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불교에 들어오는 첫째 지침은 '모든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같이 섬겨라'입니다. 우리 불교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물론 소나 돼지나 짐승까지도 근본자성은 성불하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불교 믿는 사람은 상대방이 떨어진 옷을 입었는지 좋은 옷을 입었는지 그것은 보지 말고 '사람'만 보자는 말입니다.

   

   옛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에 큰 잔치가 있어서 전국의 큰스님네들을 모두 초청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 한 분이 검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잔치에 초청되었습니다. 본시의 생활 그대로 낡은 옷에 떨어진 신을 신고 대궐문을 지나려니 문지기가 못 들어가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좋은 옷을 빌려 입고 다시 갔더니 문지기가 굽신굽신하면서 얼른 윗자리로 모셨지요. 다른 스님네들은 잘 차려진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이 스님은 음식을 자꾸 옷에 들이붓고 있습니다.

   "스님, 왜 이러시오. 왜 음식을 자꾸 옷에다 붓습니까?"

   "아니야, 이것은 날 보고 주는 게 아니야. 옷을 보고 주는 것이지!"

   그리고는 전부 옷에다 붓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비유입니까. 허름한 옷 입고 올 때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더니 좋은 옷 입고 오니 이렇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겉만 보고 사는 사람은 다 이렇습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법문하시면서 큰 짐을 지워 주시네. 그건 부처님이나 하실 수 있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나. 말 한마디만 잘못 해도 당장 주먹이 날아드는데 어쩌란 말인가'고 항의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나간 실례를 몇 가지 들겠습니다.

   옛날에 현풍 곽씨 집안의 한 사람이 장가를 들었는데, 그 부인의 행실이 단정치 못했습니다. 시부모 앞에서도 함부로 행동하고, 의복도 바로 입지 않고, 언행이 전혀 공손치 않아 타이르고, 몽둥이로 때리기까지 하고, 별 수단을 다 해봐도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양반집에서 부인을 내쫓을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이 {맹자(孟子)}를 펴놓고 읽다가 이런 구절에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한 것 없이 착하다.

악한 이고 착한 이고 간에 누구든지

그 본성은 다 착하여 모두가 요순과 똑같다.

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

   여기에 이르러 그 사람은 다시금 깨닫고 생각했습니다.

   '본래 요순같이 어진 사람인데 내가 잘못 알았구나. 앞으로 우리 마누라를 참으로 존경하리라'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전에 양반집에서는 아침 일찍 사당에 가서 자기 조상에게 절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음날 아침 도포 입고 갓 쓰고 사당에 가서 절을 한 후에는 제일 먼저 자기 부인에게 넙죽 절을 했습니다. 부인이 자기 남편을 보니 미친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를 보고 욕하고 때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정색으로 정장을 하고 절을 하니 말입니다.

   "당신이 참으로 거룩합니다"

   하면서 남편이 또 절을 합니다. 막 쫓아내는데도 한사코 따라다니며 절을 하고는

   "사람이란 본시 모두 착한 것이오. 당신도 본래 착한 사람인데 내가 잘못 보고 욕하고 때렸으니 앞으로는 당신의 착한 성품만 보고 존경을 하렵니다."

   이렇게 하기를 한달 두달이 지나다 보니 부인도 자기의 본래 성품이 돌아와서

   "왜 자꾸 이러십니까. 이제는 나도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제발 절은 그만 하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요·순임금과 똑같소. 그런 당신을 보고 내가 어찌 절을 안 할 수 있겠소?"

   하며 여전한 남편의 기색에, 결국 부인도 맞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날보고 요·순이라고 하는데 진짜 요순은 바로 당신입니다"

   하면서 서로가 요·순이라고 존경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했듯이,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전 인도에서는 조석(朝夕)으로 예불시간에 반드시 지송(持誦)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지르제타'라는 스님이 지은 150찬불송(讚佛頌)이 그것입니다. 의정(義淨)법사의 {남해기귀전(南海寄歸傳)}에도 보면, 의정법사가 인도에 갔을 때 전국 각 사찰에서 150찬불송을 조석으로 외우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베푼 은혜 천지보다 깊어도

그걸 배반하고 깊은 원수 맺는다.

부처님은 그 원수를

가장 큰 은혜로 본다.

恩深過覆載

背德起深怨

尊觀怨極境

猶如極重恩

   어떤 상대를 부모보다, 부처님보다 더 섬기고 받들고 하는데, 그는 나를 가장 큰 원수로 삼고 자꾸 해롭게 합니다. 이럴 때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그만큼 상대를 더 섬긴다는 말입니다.

원수는 부처님을 해롭게 해도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상대는 부처님 허물만 보는데

부처님은 그를 은혜로 갚는다.

怨於尊轉害

尊於怨轉親

彼恒求佛過

佛以彼爲恩

   존어원전친!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근본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잘해 주는데 상대방은 내게 잘해 주는 것은 하나도 없이 다 내버리고 자꾸 나를 해롭게만 합니다. 그런데도 섬기기만 하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상대를 받들고 섬긴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부처님 근본사상이고 불교의 근본입니다.

   

   전에도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교 믿는 사람 몇이 삼천 배 절하러 왔길래

   "절을 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 반대하고 예수님 제일 욕하는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도록 기원하면서 절하시오" 이렇게 말했더니 참 좋겠다고 하면서 절 삼천배를 다 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부처님 제일 욕하고 스님네 제일 공격하는 그 사람이 극락 세계에 제일 먼저 가도록 축원하고 절합시다."

   이제는 우리 불자들에게도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는 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게되면 일체 번뇌망상과 일체 중생의 병은 다 없어진다고 말입니다.

   중생의 모든 병이 다 없어지면, 그것이 부처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을 목표로 하고 사느니만큼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그때 자기 감정에 치우쳐 살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한편으로는 또 이런 의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교에서는 치고 들어오는데 자꾸 절만 하고 있으면 불교는 어떻게 되나? 상대가 한 번 소리지르면 우리는 열 번 소리질러야 겁나서 도망갈 텐데, 가만히 있다가는 불교는 씨도 안 남겠다. 자! 일어나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럴수록 자꾸 절하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원하는, 그런 사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전하고, 그런 사상으로 일상생활을 실천해 보십시오. 불교는 바닷물 밀듯 온 천하를 덮을 것입니다. 그것이 생활화되면 모든 사람이 감동하고 감복하여 '불교가 그런 것인가!' 하여 불교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애는 어느 곳에 있는가? 저쪽에서 소리지른다고 이쪽에서 같이 소리지르면 안 됩니다. 저쪽에서 주먹 내민다고 이쪽에서도 같이 주먹 내놓아서는 안 됩니다. 불지른다고 같이 불을 지르면 함께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쪽에서 아무리 큰 불을 가져오더라도 이쪽에서 자꾸 물을 들이붓는다면 어찌 그 물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은 물을 못 이길 것입니다. 나중의 성불(成佛)은 그만두고 전술(戰術), 이기는 전술로 말하더라도 불에는 물로써 막아야지 불로 달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근본은 어디 있느냐 하면, 모든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법문의 결론을 말하겠습니다.

실상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하니

귀천노유를 부처님으로 섬긴다.

지극한 죄인을 가장 존중하며

깊은 원한 있는 이를 깊이 애호하라.

實相無垢常淸淨

貴賤老幼事如佛

極重罪人極尊敬

深怨害者深愛護

   모든 일체 만법의 참모습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합니다. 유정(有情)·무정(無情) 할 것 없이 전체가 본래(本來) 성불(成佛)입니다. 옷은 아무리 떨어졌어도 사람은 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늙은이나 어린이나 전부 다 부처님같이 섬기고, 극히 중한 죄를 지은 죄인까지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동시에 나를 가장 해롭게 하는 사람을 부모같이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자세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근본지침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행동해야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고, 법당에 들어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은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는 여기에 있느니만큼 우리 서로서로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