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생불멸과 중도
(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하신 대중법어/1981년 1월 6일)
一切法不生 일체만법이 나지도 않고
一切法不滅 일체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若能如是解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諸佛常現前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는도다.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말씀인데 불교의 골수입니다.
결국 팔만대장경이 그렇게 많고 많지만 한마디로 축소하면
'불생불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생불멸이 불교의 근본원리이고,
부처님은 뭘 깨쳤느냐 하면 불생불멸을 깨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하면 팔만대장경이 다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 만물 전체가 생자필멸(生者必滅)입니다.
난 자는 반드시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생자는 필멸인데 어째서 모든 것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하셨는가?
그것은 빨간 거짓말이 아닌가?
당연히 그런 질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났다고 하면 다 죽는 판입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은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이라고 하신 것인지,
이것을 분명히 제시해야 안 되느냐 말입니다.
그것도 당연합니다.
이것을 참으로 바로 알려면 도를 확철히 깨쳐서
일체가 나지도 않고 일체가 멸하지도 않는 이 도리를 바로 알면
그때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누구든지 의심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인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합니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나니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니라.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이 법'이란 불생불멸의 법을 말합니다.
천삼라 지만상(天森羅 地萬象) 전체가 다 불생불멸의 위치에 있어서
세간의 모습 이대로가 상주불멸입니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생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고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우주 전체가 불멸입니다.
이것은 모든 만법의 참모습으로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라고 합니다.
또 화엄경에서는 그것을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합니다.
한없이 한없이 연기할 뿐 그 본모습은 모두 다 불생불멸이며 동시에
이 전체가 다 융화하여 온 우주를 구성하고 아무리 천변만화한다 해도
상주불멸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동시에
모든 불교 문제가 다 해결되는데,
이것을 바로 모를 것 같으면 불교는 영영 모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모두 다 산중에 들어와서 눈감고 앉아 참선을 하든지
도(道)를 닦아 결국에는 깨쳐야지 안 깨치고는 모를 형편이니 이것도 또 문제 아니냐,
그것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설사 도를 깨치기 전에는 불생불멸하는 이 도리를 확연히 알지 못하더라도
요새는 과학만능시대이니 이것을 과학적으로 좀 근사하게 풀이를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하고, 과학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고로 여러 가지 철학도, 종교도 많지만
불생불멸에 대해서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되어서 요새는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빼앗기게 되었는가?
과학 중에서도 가장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原子物理學)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데 성공해 버린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인쉬타인(A. Einstein)입니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이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두 가지로 각각 분리해 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이다.
서로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전에는 에너지는 에너지 보존법칙,
질량은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데,
요새는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칙 하나면 가지고 설명을 하며 또 하나밖에 없습니다.
즉 질량이란 것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素粒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입니다.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어떻게 서로 전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상상도 못해보았던 일입니다.
50여 년 전 아인쉬타인이 등가원리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가 별개가 아니고 같은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였을 때
세계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몽상가니 미친 사람이니 하였습니다.
그런 이론, 즉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하고.
그래도 아인쉬타인이라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닌 만큼,
학자들이 수십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성공의 첫 응용단계가 원자탄 수소탄입니다.
질량을 전환시키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하는데
핵을 분열시켜보면 거기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발생되는 에너지, 그것이 천하가 다 아는 원자탄인 것입니다.
이것은 핵이 분열하는 경우이고, 핵이 융합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수소를 융합시키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수소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전에는
에너지와 질량을 완전히 분리하여 별개의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만
과학적으로 실험한 결과 질량이 에너지로 완전히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자탄이 되고 수소탄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앤더슨(C. D. Anderson)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에너지를 질량으로 또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실험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은 광범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세그레(Emilio Segre)라는, 이탈리아의 학자로서
뭇솔리니에 쫓겨서 미국에 가서 산, 유명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형태의 각종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질량으로 전환되고,
또 각종 질량이 전체적으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이것이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 아주 알기 쉽습니다.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얼음은 질량에 비유합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이 없어졌습니까?
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 물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면 얼음이 없어졌습니까?
얼음이 물로 나타났을 뿐 얼음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다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 할 뿐이고,
그 내용을 보면 얼음이 즉 물이고, 물이 즉 얼음입니다.
에너지 질량 관계도 이와 꼭 같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너지로 나타날 뿐,
질량과 에너지가 따로 없습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상대성이론에서 제창되었지만
양자론(量子論)에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물과 얼음이 서로서로 다르게 나타날 때에 물이 없어지고(滅),
얼음이 새로 생긴 것(生)이 아닙니다.
물 그대로 전체가 얼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물이 없어진 것 아니고(不滅), 얼음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不生),
모양만이 바뀌어서 물이 얼음으로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대로입니다.
이와 꼭 같습니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 보면 전체가 서로 전환되어서 조금도 증감이 없습니다.
즉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불생불멸이니 의당 부증불감 아니겠습니까.
동양사상을 잘 아는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에너지 질량 관계가 불생불멸이요,
부증불감 그대로라고 아주 공공연히 말합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불교 용어를 잘 모르니까 이런 표현을 그대로는 못해도
그 내용에서는 꼭 같이 에너지 질량 관계가 보존(保存)된다고 합니다.
보존된다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의 세계, 즉 법계(法界)라고 합니다.
항상 주(住)해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세계,
상주법계(常住法界)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에너지 질량의 등가원리에서 보면
우주는 영원토록 이대로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상주법계란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불생불멸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계는 어떻게 되는가,
자연계 즉 우주법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에너지가 질량이고,
질량이 에너지여서 아무리 전환을 하여도 증감이 없으며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주는 이대로가 불교에서 말하는 상주불멸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인쉬타인의 등가원리가 없었으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거짓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3000년 전에 진리를 끼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혜안(慧眼)으로
우주 자체를 환히 들여다본 그런 어른입니다.
그래서 일체 마법 전체가 그대로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런 정신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3000여 년 동안을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구하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결과,
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둘이 아니고,
질량이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질량인 동시에 서로 전환하면서 증감이 없으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생불멸이라는 그 원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어버렸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원자물리학이 설사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서 그런 것이지
부처님이 본시 거짓말할 그런 어른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요새 그냥 불교원리를 이야기하면 '너무 어려워서 알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내가 한 가지 예로써 불교의 근본원리인 불생불멸의 원리를 상대성이론,
등가원리에서 입증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것은 허황한 것이 아니고,
거짓말이 아니고 과학적으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흔히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불교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을 들어보자면 너무 높고, 너무 깊고,
너무 넓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는 거짓말 같고 허황하여
꼭 무슨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접근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설명한 바와 같이 불교의 근본원리인 불생불멸,
이것이 상대성이론에서 출발하여 현대 원자물리학에서
과학적으로 완전히 증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불교원리가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이처럼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이론을 모두 증명해 준다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불교원리를 설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또 현대물리학이 불교에 자꾸 접근해 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반야심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것은 무형(無形)을 말합니다.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유형과 무형이 서로 통하겠습니까?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예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가 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분자는 또 원자들이 모여 생긴 것이고,
원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 결국 소립자 뭉치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충동해서 문들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자꾸 자가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안 타날 때는 색(色)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空)입니다.
이리하여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 무형에서 유형으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또 요즘 흔희 '4차원 세계'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 4차원 세계라는 것도 상대성이론에서 전개된 것으로
이것을 수학적으로 완전히 공식화한 사람은 민코프스키(H. Minkopski)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4차원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 강연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시대가 온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오늘, 해인사에서...' 할 때에 '오늘'이라는 시간과 '해인사'라는 공간 속에서 이렇게 법문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차원의 공간과 시간은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인데,
그런 분리와 대립이 소멸하고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융합하는 세계, 그것을 4차원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화엄경에 보면 '무애법계(無碍法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애법계라는 것은 양변(兩邊)을 떠나서
양변이 서로서로 거리낌없이 통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해 버리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4차원의 세계,
즉 시공(時空) 융합의 세계로서 민코프스키의 수학공식이
어느 정도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든지 '불생불멸'이라든지
'무애법계'니 하는 이런 이론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中道法門)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녹야원에서 수행하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서
무슨 말씀을 맨 처음에 하셨는가 하면 '내가 중도를 바로 깨쳤다'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중도', 이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모순이 융합되는 것을 말합니다.
모순이 융합된 세계를 중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보통 보면 선(善)과 악(惡)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데
불교의 중도법에 의하면 선악을 떠납니다. 선악을 떠나면 무엇이 되는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중간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악이 서로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선이 즉 악이고, 악이 즉 선으로 모든 것이 서로 통합니다.
서로 통한다는 것은 아까 말한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는 식으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도법문이라는 것은 일체만물, 일체만법이 서로서로 융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모순과 대립을 완전히 초월하여 전부 융화해 버리는 것,
즉 대립적인 존재로 보았던 질량과 에너지가 융화되어 한 덩어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중도'라 하면 '중도 는 중간이다' 하는데 그
것은 불교를 꿈에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라 하는 것은, 모순 대립된 양변인 생멸을 초월하여
생멸이 서로 융화하여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이 되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될 때 에너지는 멸하고 질량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생이 즉 멸인 것입니다.
질량이 생겼다(生)는 것은 에너지가 멸했다(滅)는 것이고,
에너지가 멸했다는 것은 질량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멸이 완전히 서로 통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종합해 본다면 불교의 근본은 불생불멸에 있는데 그것이 중도다.
그런데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관념론인가?
관념론은커녕 실증적으로, 객관적으로 완전히 입증되는 것이다.
즉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가 그것을 분명히 입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참으로, 과학적이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과학적일 수 는 없다는 말입니다.
중도란 모든 대립을 떠나서 대립이 융화되어 서로 합하는 것인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대립 중에서도 철학적으로 볼 것 같으면 유무(有無)가 제일 큰 대립입니다.
'있다' '없다'하는 것, 중도라고 하는 것은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니다(非有非無).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유와 무가 살아난다는 식입니다(亦有亦無).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3차원의 상대적 유무는 완전히 없어지고
4차원에 가서 통합하는 유무가 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무가 서로 합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유무가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이름한다(有無合故名爲中道)'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생불멸이라는 그 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서로서로 생멸이 없고
모든 것이 서로서로 융합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애자재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有卽是無 無卽是有).
그런데 이것이 워낙 어려운 것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저 멀리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저 하늘의 구름같이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자물리학에서 실지로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인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원리가 실험적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니 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아니고
우리가 언제든지 손에 잡을 수 있고 만져볼 수 있는 그런 원리다, 이 말입니다.
이런 좋은 법(法)이지만 아는 사람도 드물고,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도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흔히 중도를 변증법과 같이 말하는데,
헤겔(F. Hegel)의 변증법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직접 상통합니다.
즉 모든 것이 상대를 떠나서 융합됩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즉 없는 것, 없는 것이 즉 있는 것,
시(是)가 즉 비(非), 비가 즉 시가 되어
모든 시비, 모든 투쟁, 모든 상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모순과 대립을 떠날 것 같으면 싸움할래야 싸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극락이고, 천당이고 절대세계(絶對世界)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다(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이 말입니다.
보통 피상적으로 볼 때 이 세간(世間)이라는 것은 전부가 자꾸 났다가 없어지고,
났다가 없어지고 하는 것이지만 그 실상(實相) 즉 참모습은 상주불멸,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의 원리는 어디서 꾸어온 것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이 우주 전체 이대로가 본래로 불생불멸입니다.
일체만법이 불생불멸인 것을.
확실히 알고 이것을 바로 깨치고 이대로만 알아서 나갈 것 같으면
천당도 극락도 필요없고,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현실이 절대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눈만 뜨고 보면 사바세계 그대로가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의 세계를 딴 데 가서 찾으려 하지 말고
자기 마음의 눈을 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눈만 뜨고 보면 태양이 온 우주를 비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고 참다운 절대의 세계를 놔두고
'염불하여 극락간다' '예수믿어 천당간다' 그런 소리 할 필요가 있습니까?
바로 알고 보면 우리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경계선은 어디 있느냐 하면 눈을 뜨면 불생불멸 절대의 세계이고,
눈을 뜨지 못하면 생멸의 세계, 상대의 세계이어서 캄캄한 밤중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서로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완전히 뜨자 이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마음의 눈을 뜹시다'
우리는 태어 나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가? -- 틱낫한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없다
라부아지에라는 프랑스 과학자는
"태어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다"고 선언했습니자.
그는 불교 신자도 아니었고
별도의 종교적 수행을 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과학자였습니다.
그런데도 붓다가 발견한 똑같은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우리의 참된 본성에는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이런 본성을 깨달을 때에만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붓다는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사물들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한두 가지 조건이 빠져 있으면
사물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붓다는 뭔가가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틀린 것이라고 합니다. 실재의 세계에서는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통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없는 방에 앉아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방 안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방 안이 온갖 주파수와 전자신호로 가득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의 존건, 즉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라는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온갖 형태와 소리와 색깔들이
나타납니다. 전자신호난 주파수를 받아들여 소리나 화상으로 보여줄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없다고 해서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단지 조건과 원인들이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있다 없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개념일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일 뿐입니다.
위도 없고 아래도 없다
'우'나 '아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와 아래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틀립니다.
한 사람이 '위'라고 할 때 그것은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아래일 수 있습니다.
위와 아래라는 기준은 뭔가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하는 말입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이쪽 편에서 머리를 위로 하고 앉아 있는 것이 반대편에서 보면
아래로 하고 앉아 있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위'나 '아래'라는 말은 '있다' '없다'는 말처럼 실재를 반영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개념들은 우리를 주변 환경과 연결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개념들일 뿐이지
실재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재는 모든 생각과 개념들롤부터 자유롭습니다
"죽음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중에서
우리는 태어 나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가? -- 틱낫한
우리는 태어 나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생일이 언제인가요?"
하지만 이보다 더 재미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게도 한번 물어볼까요.
"구름아, 너는 생일이 언제니?
태어나기 전 어디에 있었니?"
구름에게 깊이 귀를 기울이면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제 구름이 태어나는 장면을 상상해봅니다.
구름은 태어나기 전에 바다 표면의 물이었습니다.
혹은 강물이었다가 수증기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수증기를 만드는 것은 태양이기에,
구름은 태양이기도 했습니다.
바람도 함께 있어서 물이 구름이 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구름은 이처럼 무無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형태의 변화만이 있을 뿐입니다. 무에서 유有가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구름은 비나 눈이나 얼음으로 변할 것입니다.
비를 깊이 바라보면 구름이 보입니다. 구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비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입니다.
비는 다시 풀로 모습을 바꾸고, 풀은 소의 몸속으로 들어가 우유가 되고,
세상으로 나와 우리가 먹은 아이스크림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 아이스크림을 먹게 된다면
그 아이스크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십시오.
"안녕, 구름아! 바로 너로구나!"
이로써 여러분은 아이스크림과 구름의 참된 본성에 대한 통찰과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은 아이스크림 속에서 바다를, 강을, 더위를, 태양을, 풀을, 소를 볼 수도 있습니다.
깊이 바라보면, 구름이 태어난 날자나 죽은 날짜는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다만 구름이 비나 눈으로 모습을 바꾼다는 사실만이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죽음은 없습니다. 언제나 이어짐만이 있습니다.
구름은 바다가, 강이, 태양의 열기가 이어진 것이고, 비는 구름이 이어진 것입니다.
구름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한 잔의 우유를 마실 때, 한 잔의 차를 마실 때,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호흡에 집중해보세요.
차를 마시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그것들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구름에게 인사하십시오.
붓다가 모든 것을 멈추고 깊이 바라보았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붓다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삶의 고苦 안에 있었지만 수행을 통해 그를 극복했습니다.
그리하여 깊은 지혜와 자비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스승으로, 형제로 부르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진정으로 죽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붓다가 죽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참이 아닙니다.
붓다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붓다가 수많은 모습으로 살아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붓다는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깊이 바라보면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으며 아무것도 죽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붓다의 새로운 모습이자 또 다른 연속체, 이어짐, 드러남입니다.
그러니, 나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나 자신뿐 아니라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면 붓다의 이어짐이 어디에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음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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