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숨』 - 죽음과 삶에 관하여 / 능행스님

수선님 2024. 10. 20. 13:02

긴말 필요 없이 『숨』은 생명이다. ‘숨 쉬면 살고, 숨 안 쉬면 죽는것이다.’능행스님은 비구니로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불교 호스피스 전문병원인 「정토마을」을 운영하면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스님은 병원을 운영한 지, 20여 년 만에 온몸으로 맞닥뜨린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성찰, 죽음의 결과물로 삶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고 한다. 이 책은 2015년 나왔다.

 

“20년 이생과 저생의 정거장 앞에서 온몸으로 죽음을 맞닥뜨린 경험을 이 책에 담았습니다. 그동안 제 곁에서 세상을 떠난 많은 분들과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지금 죽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당신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책‘프롤로그’에서 스님이 한 말이다.

 

어느 날 성문 밖으로 나갔다가 생로병사의 고뇌와 마주한 싯다르타는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출가를 결심했다. 그는 늙고 죽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각오를 하고 부왕에게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그러나 부왕은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줄 테니 출가의 뜻을 접어라고 설득한다.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제 소원은 죽음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늙고, 죽어가는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신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출가의 뜻을 버리겠습니다.”- 부귀영화를 버리고 부모 처자를 떠나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문제, 생로병사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싯다르타는 왕궁을 떠났다. 불교의 출발은 이렇듯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모두, 언젠가, 죽는다. 지금도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는 중인지 모른다. 그것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반드시 죽음으로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이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의 고통은 어떨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저 죽음의 바다로 가고 있으며,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이해할 뿐이다.

 

죽음에 직면할 때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할까?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까? - 죽음이란 곳으로 ‘한번 가 보자!’이렇게 말하면 내 친구들은 ‘그만 해라.’고 하면서 핀잔을 준다. ‘말이 씨가 된다? 왜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하느냐?’고 한다. 죽음은 외면한다고,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그것을 맞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을 진지하게, 또 죽음이 내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좀 더 떳떳하게, 진지하게, 그것을 맞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죽음이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실감 나지는 않는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와 연결된 것이 삶이라면, ‘죽음에 대한 걱정 때문에 삶을 망쳐서는 안 된다. 너무 바쁜 삶 때문에 죽음을 엉망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몽테뉴) 살아가면서 항상 죽음을 의식해야 한다. 지금 누가 미운가? 그러면 미운 그가 언젠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가 안쓰러워질 것이다. 잔소리가 싫고, 삶이 너무 힘들고 슬픈가? 잔소리마저 들을 수 없다면, 그런 일마저 없는 죽음에 이르렀다면, 지금의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그런 힘겨운 시간마저 아까울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아동도서 중에 〈영원히 사는 법〉이라는 책이 있다. 주인공 ‘피터’는 영원히 늙지 않는 비밀이 적혔다는 책을 찾아서 여행을 떠난다. 그러다 그는 젊지도, 늙지도 않는 이상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 노인이 말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끝없는 내일을 가졌다는 것뿐이야.”끝없는 내일이라니…. 삶이 유한하지 않고 끝없이 계속된다면 행복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우리는 가끔 죽지 않는 영원한 삶, 불멸을 꿈꿔본다. 그러나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죽음 앞에서 무너져 내리지만, 죽음을 마주할 때라야 비로소 삶의 진실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한국에는 없는 ‘카페’가 다른 나라에는 있다고 한다. 〈죽음카페(death cafe)〉가 그것이다. 밖에 나가면 그렇게도 많은 가페인데 싶지만, 그런 카페는 없다. 선뜻 문 열고 들어가기가 꺼려질 것도 같다. 그러나 미국, 영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 800개도 넘는 그 카페가 성업 중이고, 카페에서는 죽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고 한다.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고 하는데, 이미 죽음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 기피하고 덮어두어야 할 무엇이 아닌, 밖으로 드러내 이야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한국은 4(사)자조차 불길하게 여겨서 기피하고, 터부하고 부정적으로 본다. ‘죽음은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맞이하는 것’이어야 한다.

 

죽음의 원인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것은 질병에 의한 죽음이다. 다음은 화재, 전쟁, 천재지변, 교통사고 등 재해로 인한 사고사, 다음은 돌연사, 네 번째는 무엇이 그리도 급했든지, 무엇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든지, 급하게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경우다. 살아온 삶이 각양각색이듯이 죽음의 원인도, 마지막 순간의 모습도, 저마다 각기 다르다.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그저 홀가분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삶의 끈을 놓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일은 생각이 만든다.(一切唯心造) 행복도 불행도 그렇다. 내 삶이 주문(呪文)대로 되기를 바란다면 이런 주문은 어떨까?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분노는 내 몸과 정신을 불태워 버린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복이 많다. 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은 나를 사랑한다.’나무아미타불!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왜 내가 존재하는지, 내가 어떤 소용이 있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모르는 것이 죽음이다.”러시아의 대문호 토스토옙스키가 한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이 나이가 되도록, 아니 죽을 때가 되어도 내가 몰랐던 것, 죽으면 내가 가는 곳, 죽어도 남는 것, 그것들을 알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최소한 그때까지라도 알게 되기를 염원해 본다. 열반(涅槃)이란 모든 불교 수행자들이 궁극으로 꿈꾸는 것이다.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 일체의 번뇌가 소멸된 상태, 미혹과 집착을 끊고, 속박에서 해탈한다는 불교 최고의 경지가 열반이니까. 수행정진하다가 입적하신 큰 스님들은 그래서 ‘열반송’을 남긴다. 나옹선사 〈열반송〉이다.

 

칠십팔 년 고향으로 돌아가나니. 七十八年歸故鄕

이 산하대지 온 우주가 다 고향이네. 天地山河眞十方

삼라만상 모든 것은 내가 만들었으며 刹刹塵塵皆我造

이 모든 것은 본시 내 고향이라네. 頭頭物物本眞鄕

 

‘걸레스님’으로 유명했던 중광스님은 “괜히, 왔다 간다!”고 하며 웃었고, 불교를 알았던 조병화 시인은 “나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심부름을 다 마치고 어머니께로 돌아갑니다.”고 했으며,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죽음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의 어머니와 남편과 아들이 일찍 떠난 곳이라고 생각하면 그래서 나도 그들에게 간다고 생각하면, 죽음이 그리 두려운 것만은 아니예요.”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먼저 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거기 가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길 것도 같다.

 

능행스님은 자신이 비구니가 되게 된 데는 법정스님의 영향이 컸다면서 스님이 열반할 때 마음속으로 울었다면서 ‘세상의 큰 정신, 스승, 별 하나가 지는구나.’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법정스님은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수행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임을 강조하셨다. 이 말은 원래 하나의 물건도 없다는 뜻으로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빈손으로 와서 그 손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다가 다시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말 한마디에 천량 빚을 갚는다.’‘남아일언 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는 속담, 격언도 있지만, 말이 무섭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침 뉴스는 김건희 여사의 문자가 화제지만, 문자도 말이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한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面上無瞋 供養具 口裏無瞋吐妙香)

 

자비로운 그 손길이 참다운 불심이요

너그러운 말 한마디 그윽한 향이로다

속들이 곱고 고운 성실한 그 마음이

영원히 변함없는 부처님 마음일세

(心裏無瞋是珍寶 無染無垢是眞常)

 

「문수동자게(文殊童子偈)」로 짧지만 참다운 말과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이란,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하나의 인간이 되면서였다. 즉 혼자가 되는 과정이 삶이었다. 그것은 밝은 빛을 향해 한발짝 내딛는 과정이었으며, 죽음 또한 다르지 않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살아가고 다시 그 관계를 끊는 죽음 너머로 가는 것이다. 태아가 엄마와 분리되어 혼자가 되듯 우리는 죽음을 통해 많은 이들과 분리되어 홀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엄마 뱃속에서 7개월쯤 되면, 태아는 자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한다고 한다. 죽음도 그렇게 준비를 해야 한다. 다만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경우에 따라, 사람에 따라서 다르지만 ‘불치병’을 진단받으면 여러 단계의 감정과 심리상태를 겪게 된다고 한다. 1단계는 ‘부정’의 단계, 2단계는 ‘분노’의 단계, 3단계는 ‘타협’의 단계, 4단계는 ‘우울’의 단계, 그리고 마지막에 ‘수용’단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단계를 다 겪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분노하다가 바로 우울한 감정에 빠지기도 하고, 처음부터 타협을 시도하다 분노하기도 한다. 죽음을 앞두고는 다양한 감정 변화를 겪는데, 힘들어하는 환자에게 산 사람이나 간호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다.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어야 하고, 당신의 삶이 어땠는지, 그동안 무엇이 미안하고, 감사했는지,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말 한마디도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하고, 그래서 그 사람이 극락에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불교에서 ‘극락’이라고, 기독교에서는 ‘천당’이라고 부르는 거기는 어디며,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해야 갈 수 있을까? 《아미타경》에 부처님께서 “사리불이여, 그 국토을 어찌하여 극락이라 부르는지 아는가? 그 나라의 사람들은 오직 즐거움 속에서 살 뿐 아무런 고통이 없기 때문에 극락이라 한다.”라고 했다. 극락은 범어 ‘Suhamat’로 ‘행복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지구상의 온 인류가 죽어서 가고 싶은 곳이 극락이고, 천당일지 모른다. 거기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지는 않다. 죽음이 공평하게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듯이, 살아서 공덕을 짓고, 지혜를 쌓으며 ‘지금 여기’서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갈 수 있는 그곳이다.

 

“저곳은 정말 아름답군!”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다. 이곳이 아닌 저곳이 아름답다니? 믿음은 오늘보다 나은, 아름다운 다음생을 잉태한다. 믿음이란 생을 마감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중요하다. 죽으면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면, 몸을 떠나가는 의식도 불안과 두려움의 기운으로 떠돌게 된다. 양지에서 밝고 환한 꽃을 피우는 믿음, 그 믿음의 의지를 꼭 가질 필요가 있다. 의지는 스스로 가지기도 하지만 흔히, 보통 종교가 도와주기도 한다.

 

결혼을 앞둔 26살의 아가씨가 있었다. 친구들이랑 회를 먹고 급체한 것 같아서 병원을 찾았다가 급성 위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고, 앞으로 2개월이란 진단을 받았다. 물 한 모금은커녕 침도 삼키기 힘겨웠고, 복수가 차올랐다. 죽음을 모르던 아가씨에게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은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스님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이에요? 저는 종교에 대해 잘 몰라요. 제가 정말 살 수 없다면,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스님, 어떻게 해야 다시 태어날 수 있죠?”

 

그녀는 스님의 가르침대로 극락세계를 믿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어린 딸을 잃은 어머니는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딸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부처님이 안고 갔어. 병원에 올 때는 걸어서 왔는데, 부처님이 날 안고 극락으로 갔어.”그러면서 뜸뜬 자리를 보여주면서 “엄아 이것 봐 부처님이 다 없어지게 해주셨어. 나 하나도 안 아프고 흉터도 없어. 스님에게도 말해 줘. 나 극락에 와 있다고.”

 

“아름답게 피어났던 것처럼 아름답게 떠나야 한다. 그것은 다음 생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다. 이곳에서 마지막 희망을 준비하고 떠나면 그대의 의식은 환희의 나라로 가게 될 것이다.”능행 스님이 강조해 한 말이다.

 

삶이란 불꽃과 같다. 불꽃이 되어 터지기 전에는 한 줌의 화약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이 터지는 순간 불꽃이 활활 타올라 밤하늘을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으로 수 놓는다.(생각해 보면 우리 젊음도 그렇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재가 되어 떨어진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아직 터지지 않은 불꽃일 수도, 터지고 난 뒤 한 줌 재가 되어 버린 것일 수도 있다. 아름답기 그지없던 불꽃 같은 삶이 그립고 좋았다. 그러나 불꽃이 끄진 상태라고 할 수 있는 죽음도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는 새로 만나는 만남도 많지만, 서로 헤어지는 이별 또한 많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는 것도 이 순간과의 이별이다. 만나는 것 중에 이별하지 않는 것은 없다. 맺은 관계를 끊고 갈라서는 이별(離別)은 끊는 것, 갈라서는 것, 죽음도 이별과 다른 말 아니지만, 사람들은 홀로 타야 하는 이별이란 배를 앞에 두고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이승에 올 때 타고 온 배는 더 이상 이별의 강을 건널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잡았던 손을 놓을라치면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이별의 순간을 지켜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고통이다.

 

부처님께서도 열반에 들면서 오랜 인연의 고통에서 이별하는 제자들을 위로하며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겨나고, 또다시 인연 따라 사라진다.”우리 생은 영원하지 않다. 우주의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이고, 다시 먼 곳으로 인연 따라 떠나는 것이다. 육신이 소멸하고 난 뒤 영혼은 어디로 갈지 아무도 모른다. 육신의 장해(障害)에서 벗어나 이별이 없는 세상으로 가는지도 모른다. 다만 남아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기쁨과 용기를 갖고 이별을 아름답게 견디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 괴롭고 힘들더라도 저승보다 이승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닌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지는 ‘다리’라고 생각하면 죽음을 대하는 인식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고승들이 말했듯이 죽음은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는 과정이라고 하면, 가을이 깊어 한여름 무성했던, 푸르던 잎들이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고 해도 그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니다. 이듬해 봄이 되면 파릇파릇 새순이 돋는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는 말자.(굳게 스스로에게 약속하고 결심하자)

 

젊은 시절 카뮈는 “그토록 무르익은 공기와 풍요로운 하늘 가운데서 사람들이 해야 할 단 한 가지 일이란, 사는 것과 행복해지는 것뿐”이라고 했다. 욕망이자 본능인 행복이란 무엇인가? 초기 불교 경전인 《작은 업경》에는 “수명이 길고 병이 적으며 아름답고 체력이 강하며 부유하고 신분이 귀한 것”을 행복이라고 했다. 행복의 반대인 불행은 단명, 다병, 추함, 신분이 천함이다. 그리고 그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요소는 업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불교는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공식처럼 정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고통과 괴로움, 절망과 분노가 그들이 행한 업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가혹하고, 터무니없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한다. 행복한 삶은 행복한 죽음과도 연결된다. 살면서 추구하고자 하는 물질적, 정신적 욕망과는 이것은 별개의 문제로, ‘부유하다는 것, 명예가 높다는 것, 육신이 건강하다는 것’이 행복의 척도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으나, 그것은 개인적 척도일 뿐 일반적이지는 않다. 무릇 생명이 나고 죽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행복의 척도는 고통과 괴로움 없이 죽는 것이 아니겠는가! 21세기 들어 유행처럼 퍼진 웰빙은 건강한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삶의 현상과 더불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웰다잉이라는 죽음의 질도 높여야 한다. ‘잘 사는 만큼, 잘 죽는 것이 인간이 누려야 할 행복’의 조건인 것이다. 법정 스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생명의 기능이 다한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되므로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없애주면 고맙겠다.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는 곳이라면 아무 데서나 다비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지금 순간 살아 숨 쉬는 우리는 죽어본 적이 없다. 죽음은 우리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신대륙과 같은 곳이다. 거기가 어딘지, 어떤 곳인지, 어떻게 해야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밀려오는 거대한 죽음의 파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삶이란 배를 뒤로 돌릴 수도 없다는 사실 뿐이다. 죽음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서툰 항해사다. 하지만 올바른 죽음의 원리를 알고 있다면, 밤이 깊고 항로가 멀다 하여도 어느새 더 나은 삶, 새 삶에 당도해 있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빛이고, 아미타바이며 그대의 마음은 본래 텅 빈 것이고, 스스로 빛나며 저 큰 빛의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도 없다. 그것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이다.”-《사자의 서》중에서

 

 

 

 

 

 

 

 

 

 

『숨』 - 죽음과 삶에 관하여 - 능행스님

 긴말 필요 없이 『숨』은 생명이다. ‘숨 쉬면 살고, 숨 안 쉬면 죽는것이다.’능행스님은 비구니로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불교 호스피스 전문병원인 「정토마을」을 운영하면서 경험을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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