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는 글
이 글의 첫 출발을 ‘자비 없는 불교는 없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자비 없는 불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비행의 첫 출발은 ‘범천의 설법 요청’에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붓다는 자신이 증득한 법이 ‘세상의 흐름에 거스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입멸하고자 하였다. 이에 놀란 범천은 이 세상에는 번뇌에 적게 물들고 지혜로운 사람도 있다고 하면서 전법을 간절히 요청한다. 깊은 고뇌 끝에 붓다는 “불사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들은 어서 들으라.”고 선언한 후 옛 수행 친구가 있는 머나먼 바라나시로 첫 전법 여행을 떠난다. 이렇게 불교는 중생 구제의 자비심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자비는 바로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의 실천이다. 이 글의 목적은 자비를 현대의 윤리 이론에 접목해 자비 윤리의 보편적 성격을 규명하고, 자비 윤리의 실천 방향을 모색하는 데 있다. ‘자비 없는 불교는 없다’는 이 글의 서론이면서 동시에 결론이다.
2. 자비 윤리의 보편성과 현대 윤리
1) 자비의 정의와 상호윤리
자비의 의미는 초기 경전에서부터 대승 경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초기불교의 자비 규정은 자(metta)와 비(karuna)를 핵심으로 출발한다. 자비는 타인의 고통과 기쁨에 공감하여 자신의 마음이 타인이 겪는 마음 상태로 들어가 감정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현대사회의 여러 덕목과 연결해 자비를 정의하고 체계화하는 시도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자비 분야의 저명한 연구자로 알려진 크리스티나 펠드만(Christina Feldman)과 빌렘 쿠이켄(Willem Kuyken)은 전통적인 불교의 자비 개념과 진화론적 사고를 고려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자비는 고통과 비애와 비통에 대한 다면적인 반응이다. 자비 속에는 친절, 공감, 관대함, 수용이 포함된다. 용기와 인내와 평정이라는 실들이 골고루 사용되어 짜인 옷감이 바로 자비이다. 무엇보다 자비는 현실의 고통에 가슴을 열고 그것을 치유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초기불교에서부터 현대 불교학자의 정의까지 큰 흐름을 보면, 자비의 개념이 시간적, 공간적인 연기의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기본 핵심은 초기불교의 자비 개념인 모든 생명체가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비의 원천인 연기론에 바탕을 둔 윤리 이론을 ‘상호윤리(Mut-ual Ethics)’라고 한다. 상호윤리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 집단과 집단 간의 관계, 나와 자연과의 관계, 생물체와 생물체의 관계 등 삼라만상을 상호의존적 관계로 본다. 따라서 모든 존재와 현상은 하나의 그물코 안에 연결되어 있다. 연기론에 바탕을 둔 상호윤리적 접근은 오늘날 ‘거시 윤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기존 윤리학’의 한계는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고정적이고 불변적으로 보는 인식 틀에서 나왔다고 본다. 즉 시간의 변화에 따라 인간과 자연의 본성도 변화되고, 선과 악의 개념도 변화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변화의 틀에서 본 요나스의 생각은 연기론적 인식론에서 생성된 불교 윤리와 매우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연기론적 윤리 틀은 현대 윤리 이론에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현대 학문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복합체계이론에 바탕을 둔 ‘비판적 체계 윤리학’이다. 또한 ‘마음의 신체화’ 이론을 윤리학에 원용한 인지 과학자 마크 존슨(M. Johnson)의 ‘체험주의 윤리학’이 있다. 이러한 연기론적 윤리 틀의 그물코 안에서 타자 윤리, 배려의 윤리, 책임의 윤리, 생명의 윤리, 평화의 윤리 등이 나온다.
2) 자비 실천의 윤리적 디딤돌
(1) 진속이제(眞俗二諦)와 자비 실천
자비 실천의 토대 작업으로 ‘진속이제’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진제는 산스끄리뜨어 paramartha_satya의 번역으로 승의제(勝義諦) 또는 제일 의제라고도 하며, 출세간적 진리를 가리킨다. 속제는 samvrti_satya의 번역으로 세속제, 또는 세제라 하여 언어로 표현된 세속적인 진실을 말한다. 진속이제의 주제가 불교 논단에 등장한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어떻게 인간 삶의 현장에 뿌리내리고 실천하느냐의 고뇌에서 비롯되었다.
진제와 속제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게 전개되나 결국은 진속일여(眞俗一如)의 길로 가고 있다. 공 사상과 윤리의 관계도 진속이제의 문제로 연결된다. 일체가 공하여 선악이 없다면 불교 윤리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모든 것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공의 교설은 세속적 윤리를 부정하는 것인가?
공과 윤리의 관계를 치열하게 규명한 학자가 김성철 교수다. 그는 《공과 윤리-반야중관에 대한 오해와 이해》에서 용수 스님의 《중론》과 《대지도론》의 논서를 분석하면서 공과 윤리의 상관관계를 강조한다. 용수 스님은 공과 세속적 윤리를 분리하는 것을 사견(邪見)으로 보고 이러한 공관을 악취공(惡取空)이라 표현하고 악취공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 불능이라고 하였다.
공과 윤리는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진정한 윤리는 공사상에서 우러난다. 불교의 윤리는 공 사상을 바탕으로 하며 이는 세속적 윤리로 연결된다. 따라서 공성에 대한 자각의 깊이에 따라 윤리적 행위의 차원도 달라진다. 보살의 자비행이 바로 공성에서 나온 대윤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불교의 선악론
영국의 윤리학자 무어(G.E. Moore)는 윤리학의 특성을 ‘선’과 ‘악’이라고 표현되는 사물들의 속성을 연구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러면 불교의 선악론의 특징은 무엇인가. 불교의 선악에 대한 포괄적인 기준은 탐진치의 유무이다. 탐진치, 즉 탐욕, 성냄, 어리석은 마음이 악의 토대가 되고 무(無)탐진치의 마음이 선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불교의 선악론은 연기론과 공(空)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서양 윤리의 선악론과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불교의 선악론은 선도 악도 버리면서 동시에 선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불교 윤리에서 선과 악은 고정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관념과 현상이 그러하듯이 선악도 모든 유 · 무형의 존재처럼 공한 것이다. 따라서 선과 악은 연속적이며 양자 간에는 분명한 경계가 없다. 또한 선과 악은 상호 규정적이며, 상황 의존적으로 발생한다.
불교의 선악론이 제시하는 제일 큰 메시지는 선악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선악을 공으로 보기 때문에 나오는 자연적인 결론이다. 이것이 선과 악의 구별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선의 실천을 강조하고 악의 유혹을 넘는 지침이라 할 수 있다. 매 순간 상황의 변화에 따라 맞는 선을 분별해 내는 지혜를 갖고 이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3)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이해
자비 실천의 윤리적 토대로서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우리의 현실은 도덕적이라기보다는 비도덕적이기 때문이다. 도덕철학자 마일로(D. Milo)는 비도덕 행위들을 유형화하고 그 특징을 분석함으로써 도덕적 삶의 평가 문제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마일로는 행위자가 자신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해서 그것의 도덕성을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에 따라서 비도덕성의 유형을 여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즉 행위자가 자신의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유형으로 ‘외골수적 사악함(perverse wickedness)’ ‘도덕적 태만(moral negligence)’ 그리고 ‘무도덕성(amorality)’의 세 유형으로 나눈다.
외골수적 사악함이란 잘못된 도덕 원리를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행위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나쁜 일을 행하는 것이다. 도덕적 태만은 특정 사실에 대한 무지, 부주의, 태만의 결과로 비롯되는 비도덕적 행위이다. 즉 어떤 종류의 행위가 나쁘다고 알면서도 자기의 행위가 이런 종류에 속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이다. 무도덕성은 전혀 도덕 판단을 하지 않고 행하는 경우이다.
자신의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로 ‘선호적 사악함(preferential wickedness)’ ‘도덕적 나약함(moral weakness)’ ‘도덕적 무관심(moral indifference)’의 세 유형으로 구분한다. 선호적 사악함은 잘못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목적을 위해 양심의 가책 없이 도덕적 악행을 하는 경우이다. 도덕적 나약함은 도덕 행위를 실천할 수 있는 의지의 결핍에서 나온 것으로, 스스로 죄책감을 느낀다. 도덕적 무관심은 잘못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비도덕적 유형의 특징을 도표로 분류해 보면 위의 표와 같다.
위에서 본 비도덕적 유형들은 구체적으로 자비 실천을 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비(무)자비적인 요소를 어떻게 감소시키느냐가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자비 공동체 구현의 큰길
1) 행복과 함께 가는 자비의 길
붓다 가르침의 큰 목표 중의 하나는 ‘모든 중생이 행복한 삶’을 성취하는 데 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많이 사용되는 말이지만 제일 애매한 용어이기도 하다. 행복을 세 가지 유형인 ‘생존적 행복’ ‘관계적 행복’ 그리고 ‘실존적 행복’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첫 번째, ‘생존적 행복’은 생물적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다. 이러한 생물적 욕구의 본능은 쾌락으로 볼 수 있다. 쾌락은 부단히 자극을 요하는 신경생리적 조직의 자극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데서 발생한 긴장이 제거됨으로써 주어지는 만족감이다. 이러한 만족감은 일정한 한계를 넘으면 얼마 안 가서 자극력의 효과가 상실된다. 이러한 자극력이 반복되면서 더 큰 자극을 요구하게 된다.
현대사회는 쾌락의 자극을 확대해서 인간을 쾌락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생존적 행복은 욕망을 관리하는 지혜가 없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붓다는 욕망이란 용어 대신에 ‘갈애(渴愛)’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욕망 자체는 붓다에게는 무기(無記)이다. 무기는 선악을 가리기 이전의 상태라는 말이다. 갈애는 지나친 욕망이다. 욕망은 분모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분모가 적으면 전체는 커진다. 욕망을 줄이는 것은 분모를 줄이는 것이고 동시에 행복의 양은 커진다. 여기서 ‘채움’보다는 ‘비움’을 통한 행복의 길이 제시된다. 비움을 통한 행복의 길이 바로 자비행이다.
두 번째 행복 유형은 ‘관계적 행복’이다. 인간은 삶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것이 차지하는 행복의 비중도 매우 크다. 불교에서 ‘관계의 윤리’와 ‘관계적 행복’의 당위는 연기론과 무아사상에서 자연히 우러나는 것이다. 무아의 개념은 ‘나’와 ‘나의 삶’이 타인과의 연계성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함축한다. 나라는 존재의 유지와 발전은 타인과의 상호적이고 의존적인 관계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연기론적 존재의 모습은 결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존적 행복’은 실존적 욕구에서 오는 행복이다. 실존으로서의 삶은 인간에게 고유한 정신적 가능성을 실현하는 삶이다. 이성적 욕구, 심미적 욕구, 사랑의 욕구, 자유의 욕구, 창조적 욕구, 종교적 욕구 등이 실존적 욕구를 충족하고 실현한다. 이러한 실존적 행복을 추구하는 철학자와 성직자는 수없이 많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도 실존적 용어이다. 중세의 많은 철학자와 성직자들은 신에 대한 믿음과 헌신을 진정한 행복으로 보았다. 불교는 열반과 해탈을 통해 최고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불교 경전에 수없이 나타나는 내용을 보면 붓다의 행복관은 생존적 행복, 관계적 행복, 실존적 행복을 다 함께 중히 여기고 있다. 이를 중도적 행복관이라 표현할 수 있겠다. 중도적 행복관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숫따니빠따》 《행복경》이다. 《행복경》에 나타난 ‘고귀한 행복’의 내용을 보면 불교의 행복관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임을 알 수 있다. 즉 적절한 거주, 가족 돌봄, 생활 기술의 배움, 절제와 겸손,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경배, 청정 범행, 평정심 등이 행복의 요건으로 제시되고 있다.
2) 정의와 함께 가는 자비의 길
자비의 덕목이 정의와 충돌될 수 있다는 이론이 윤리학계에서 계속 제기되어 왔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를 넘어》라는 저서에서 ‘정의로운 자비’라는 소제목을 설정하고 자비와 정의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자비는 결코 잘못된 행동이나 부당함에 항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비는 허약함이나 수동적 태도를 장려하기보다는 용기와 강인한 기질을 요구한다. 달라이 라마는 자비의 핵심은 ‘행위’가 아닌 ‘행위자’에 있다고 본다.
“용서는 자비로운 태도의 필요 덕목입니다. 그러나 쉽사리 잘못 이해되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쨌든 이미 행해진 잘못을 잊는다면 용서하는 것이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를 다루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달라이 라마는 정의의 원리와 자비, 용서의 실천 사이에는 충돌이 없다고 보면서 정의의 개념은 그 자체가 바로 자비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붓다의 가르침을 정치철학의 측면에서 제시한 ‘연기론적 정의론’을 소개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석학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은 완전한 정의와 완벽히 공정한 제도에 골몰하는 ‘선험적 제도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여 가치판단의 복수성을 인정하고 비교 접근을 통해 부정의를 제거해 가는 방식으로 정의를 촉진하자고 제안한다. 즉, 고정불변한 정의론의 아트만(Atman)을 부정하고 ‘타자’와 함께 가는 ‘열린 정의론’을 주장한다. 붓다의 대기 설법을 연상하게 한다. 이렇게 연기론적 정의론에는 ‘자비’가 바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3) 평화와 함께 가는 자비의 길
박이문 교수의 《자비의 윤리학》은 자비를 윤리학적으로 접근한 한국 최초의 저서로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불교를 윤리적 종교로 보지 않으면서 자비를 보편적 윤리 덕목으로 내세운다. 기독교의 박애와 유교의 인의 덕목은 자기에서 타자에게 보내는 덕목인 데 반해, 자비는 항상 타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윤리라고 본다. 이렇게 타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에서 나오는 자비의 윤리는 사회적 갈등과 폭력을 해소하는 보편적 규범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박 교수는 자비의 윤리가 도덕적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틀이라고 강조한다. 도덕적 갈등을 해결할 때 자비심을 갖고 결정한다는 것은 남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원칙에 의해 도덕적 결정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한계가 있는 이상 자비를 갖지 않는 윤리적 태도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갈등 해결과 평화의 길을 자비에서 찾고 있다.
평화의 문제는 결국 갈등 해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평화의 종교로 평가된다. 불교의 전파 과정에서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예에서 나타난 성전(聖戰)의 개념은 없다. 불교의 가르침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관련된 내면 상태의 산물로 보는 ‘폭력’에 대해 철저히 거부한다. 공격성은 자아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그 자아를 보호하려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붓다 다르마의 목표는 자아의 개념과 이로 인한 갈등을 일으키는 두려움과 적대감을 해체하는 것이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의 실천은 중생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고통을 주지 말고, 생명을 빼앗지 않는 것이다. 붓다는 삶의 현장에서 늘 일어나는 살생이나 폭력에 대해 큰 공포와 혐오심을 자주 표현한다. ‘내 입장으로 바꿔 생각해서’라는 것이 붓다의 평화 철칙이다. 누군가의 괴로움이나 불행은 그것이 내게 일어났을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진실로 자비심이 길러질 것이다.
4) 다문화 사회와 함께 가는 자비
오늘날 다문화라는 용어는 지구촌의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여 다양한 형태로 논의되고 있다. 또한 지구촌 곳곳에서 다문화 사회의 균열과 갈등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폐쇄적 민족주의와 부족주의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우려도 깊어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가 지은 《사회의 재창조-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을 찾아서(The Home We Build Together)》에 잘 나타나 있다.
2005년 7월 7일 런던 중심가의 연쇄 폭탄테러로 50명 이상이 사망하고 700명이 다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 테러를 주도한 모슬렘 청년은 해외의 알카에다 조직이 아니라 영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청년이었다. 이 사태는 다양한 인종, 종교 집단의 문화를 인정하겠다는 다문화주의 정책의 적실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예는 프랑스를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다.
색스는 전체주의,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다문화주의가 등장하였지만, 정체성 약화로 오히려 사회통합이 아니라 분리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문화 사회를 ‘호텔로서의 사회’로 비유하고 호텔 투숙객의 생활 행태를 이야기하고 있다. 즉 격리된 다문화 사회일 뿐이지 ‘다문화적 공동체’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문화 사회의 갈등 문제는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된다. 정체성의 핵심은 자기를 구성하는 외적 요소들의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하나이며 영속적인 개체로 인식하는 개인이나 집단 차원의 자의식이다. 정체성의 출발점은 자아 중심성에 있다. 자아 중심성은 타자의 만남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나타난다. 다문화, 세계화 사회는 타자와 만남의 광장이 확장되는 사회이다. 따라서 자신의 자아는 타자와 공생할 수 있는 정신적 여백을 내장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아 의식을 필자는 ‘공생적 정체성’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근대성의 특징은 구성원을 정체성 위기 상태로 이끌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사회 구성원이 인종적 정체성, 지역적 정체성 또는 종교적 정체성 등 과거의 향수로 도피하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러한 현상을 색스는 ‘부족으로의 회귀’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문화주의가 폐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문화 사회 이전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고 또한 불가능하다. 오직 다문화주의를 넘어서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각 집단의 가치관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다문화주의를 한 차원 뛰어넘는 공동체적 연대의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하는 것이다.
다문화 사회는 인류 진화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런데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이에 역류하는 기운이 일어나고 타자에 대한 분별심이 미움과 차별로 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금 다문화 사회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 이와 함께 폐쇄적인 민족 정체성의 문제가 표출되기도 한다. 또한 서구인과 이룬 다문화 가정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지면서, 경제 후진국 사람과 이룬 다문화 가정에 대해서는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중적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례도 있다고 짐작된다. 색스가 지적한 대로 ‘부족에의 회귀’ 현상이 일어나 사회통합의 큰 장애로 등장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한국불교는 다문화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큰 정신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고, 또한 다문화 공동체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이 가능한 사찰이 전국에 펼쳐져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아시아 각국에서 온 불교도도 많고,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서구인도 늘어나고 있다. 불교가 다문화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공생적 정체성을 길러주고 따뜻한 자비 공동체를 구현할 수 있는 체계적인 실천 방안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비 윤리의 중요한 과제이다.
4. 자비 수행과 실천 방향
1) 자비와 깨달음의 관계
불교는 지혜와 자비라는 두 바퀴로 움직이는 수레라고 할 수 있다. 붓다의 지혜를 통해 깨달음을 이루고, 연기법의 지혜에서 우러나오는 자비를 통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깨달음과 자비의 관계는 불교 교리의 전개 과정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깨달음과 자비의 서열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정각을 이루기 전 보살이었을 때 닦은 자비행의 공덕으로 붓다가 되었음을 경전은 전하고 있다. 그 구체적 내용은 붓다의 전생을 그린 《본생경》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 보면 중생에 대한 무량한 자비행이 결국 붓다의 깨달음을 가져온 것이다. 자비의 실천이 선행되지 않고는 최상의 깨달음을 위한 지혜가 완성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자비는 깨달음의 지혜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었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지혜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확립되었지만, 자비는 그 위상이 약했다. 대승불교의 초기에도 지혜(반야)의 요소가 여전히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고 자비는 지혜의 보조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자비가 불교의 수행도에서 큰 위상을 확보하게 된 것은 초기불교에서 발아되어 대승 보살 사상의 전개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지혜와 자비 사상은 불교 교리에서 서로 상보적인 축이다. 그러나 두 사상이 항상 조화로운 것은 아니고 긴장 관계를 형성한 측면도 있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공(空)과 자비의 양립은 대승불교에서 새롭게 부여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혜와 자비의 긴장 관계는 불교 교리 발전에 큰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는 요소라고 하겠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함께 이루어진 세계가 바로 열반의 세계이다. 상구보리는 깨달음의 수행을 통해 이루어지고, 하화중생은 자비 수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열반의 세계로 가기 위해 깨달음과 자비의 두 바퀴가 있어야 한다. 깨달음과 자비의 관계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심우도(尋牛圖)라고 생각한다. 심우도는 자비를 깨달음의 열매로 그리고 있다. 심우도를 보면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이 생각난다. 《보리도차제론》은 티베트 불교 4대 종파의 하나인 겔룩파를 창시한 총카파(1357~1419) 대사가 지은 것으로 흔히 ‘람림(Lamrim)’으로 불리는데, 수행자를 하 · 중 · 상 삼사(三士)의 3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에서 수행해야 할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첫 단계는 하수도(下士道)로서 세속적인 가르침을 따라 삼악도를 벗어나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길이다. 두 번째 단계는 중사도(中士道)로서 번뇌를 끊고 열반을 얻고자 하는 출리심의 성취에 있다. 세 번째 단계는 상사도(上士道)로서 대보리심을 발하여 보살행을 행하는 길이다. 수행의 최고 단계를 자비에 두고 있다.
자비 또한 세 가지 유형이 있으니 이를 삼연자비(三緣慈悲)라 한다. 삼연자비 중에서 제일 높은 것은 무연(無緣) 자비이다. 다음은 법연(法緣) 자비, 현상세계의 제법을 무심으로 여실하게 널리 비추는 자비이다. 마지막은 중생연(衆生緣) 자비로서 아공(我空)에 입각하여 일체중생을 나와 하나로 느끼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중생의 세계에서 법연 자비와 무연 자비는 참으로 아득하게 보인다. 실천윤리적 측면의 자비는 중생연 자비에서 출발하고 중심이 되는 것이리라. 그리고 중생연 자비의 실천은 깨달음으로 가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할 것이다.
2) 자비의 체험과 방사(放射)
자비 수행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비를 체감하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도덕교육 이론에서는 도덕교육의 영역을 ‘인지적(認知的) 영역’ ‘정의적(情意的) 영역’ ‘행동적(行動的) 영역’으로 나누면서 도덕적 지식, 도덕 감정, 도덕적 행위가 통합되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도덕교육 이론을 자비의 실천에 대입해 볼 때, 자비의 체험은 ‘인지적 영역’과 ‘정의적 영역’이 합쳐지는 과정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자비의 체험은 먼저 연기법을 이해하고 공감한 후(인지적 영역), 이를 가슴으로 품고 자비의 진동을 느낄 때(정의적 영역) 일어난다.
자비를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게 체험하기 위해서는 연기법과 이의 줄기인 무아 그리고 공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라는 것은 수십 개의 껍질로 겹겹이 싸여 있는데, 이를 어떻게 쉽게 깨버릴 수 있는가. 게다가 오늘의 근대 문명은 개인주의와 이성이라는 틀에서 생성된 것이니 무아의 사유를 가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연기론을 인지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했다고 해서 이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자비행의 강한 의지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지적 단계에서 정의적 단계로 넘어서기 위해서는 치열한 자비 수행이 필요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비라는 용어를 ‘선한 동기’와 ‘자기희생’이라는 무거운 짐이 담겨 있는 덕목으로 느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스스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자비행을 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자비 행위를 위한 ‘체험 학습’이 필요하다. 불교의 실천윤리로서 보살행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오늘날 자비의 실천, 즉 보살행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대표적 행위가 사회봉사이다. 자비를 체험하고 자비 수행으로 나아가기 위한 봉사 체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도적, 의무적인 계기에서 시작한 사회봉사의 과정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체험한 후, 이를 통해 삶의 가치와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의 사례를 주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도덕적 행위의 정당화에 관한 여러 이론 중에서 ‘자기 이익설’을 자비 체험과 연관 지어 소개할 필요를 느낀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이기적(selfish)’이라는 말과 ‘자기 이익(self-interested)’이란 말은 행위의 동기에 적용할 때, 같은 의미가 아니다. 이기적 행동과 달리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반드시 타인의 희생을 대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불공정하거나 남을 해치게 하는 경우도 아니다. 오늘날 실용주의적 견해를 밝히는 사람들에게는 윤리 도덕적 행위가 삶의 성공을 위한 필수적 도구이기도 하다.
자비는 자리이타(自利利他) 행위이다. 즉, 나도 좋고 너도 좋고, 그래서 세상을 좋게 만드는 것이 자비의 기능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주제는 무엇을 자기 인생의 제일 큰 이익으로 설정하느냐의 문제이다. 무엇이 자기 삶의 최대 이익이 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가? 다양한 윤리학 이론에서 그 당위성으로 인해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론으로 ‘자아실현설’이 있다. 붓다의 지혜와 자비심을 통해 자기의 이익을 자아실현으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 수행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자비심 방사이다. 방사는 자비심의 대상과 그 영역을 확대해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비를 보편화하는 것이다.
길버트는 자비심을 계발하는 데에는 불교와 진화론 틀에서 나온 두 가지 원칙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인종과 성별, 문화 · 경제적 환경, 종교적 신념 등 많은 것으로 구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우리의 삶이 상호 간에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타인의 삶과 얼마나 엮여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다. 길버트는 자비의 원을 확장하는 원동력을 사무량심으로 삼아 타인을 위한 균형 잡힌 자비 훈련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염원하기’ ‘녹이기’ ‘동등하기’ 등 다양한 훈련법을 소개하고 있다.자비 수행법은 각자가 처한 공간과 시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나로부터 출발하여 가정과 직장, 사회와 국가, 그리고 지구촌과 우주 자연의 영역으로 확대하고 방사하면서, 자비 수행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는 각자가 계발해야 할 화두이다.
3) 자비 명상과 심리 치유
근래에 자비 명상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자비 명상은 초기불교에서부터 현대 불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인도 대승의 전통을 이어받은 티베트불교에서는 자비 수행이 모든 수행의 기초가 된다. 티베트불교의 자비 수행은 크게 세 가지 전통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첫째는 샨띠데바(685~783)의 《입보리행론》이다. 여기서는 대승 보살사상의 핵심을 보리심에 둔다. 보리심을 깨달음으로 가는 제일 중요한 길로 보는 것이다. 둘째는 아띠샤(982~1054)의 《보리도등론》이다. 깨달음을 서원하는 원보리심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행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역시 보리심을 깨달음의 원천으로 보는 것이다. 셋째는 쫑카빠(1357~1419)의 《보리도차제론》이다. 쫑카빠는 티베트불교 겔룩학파의 개조로서 소승과 대승의 차이를 보살의 보리심에서 찾고 있으면서 보리심을 일으키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티베트불교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보리심을 개발하는 여러 가지 자비 수행의 방법을 제시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똥렌(주고받음 수행)’, 관세음보살 자비 진언, 관세음보살 구루 요가 등이다. 오늘날 달라이 라마와 그의 제자 등에 의해 자비 수행과 자비 명상 방법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필자는 라마 예서 툽텐이 해설한 《달라이 라마의 자비명상법》을 지금도 애독하고 있다. 이 책은 관세음보살 구루 명상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이다. 이것은 관세음보살을 구루(스승)로 삼아 대자비와 대지혜의 삶으로 가기 위한 수행법이다. 나의 몸과 마음이 관세음보살의 몸과 마음과 하나 될 때까지 관세음보살의 에너지를 나의 가슴 차크라로 흡수하는 명상법이다. 관세음보살을 실제 스승의 모습으로 ‘시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 자신이 관세음보살의 자비 그 자체임을 깨닫기까지 솜처럼 부드러운 자비와 칼 같은 공성을 통찰하는 명상법이다.
깨달음에 치중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선불교의 전통에서도 자비 수행에 관한 많은 사례가 있다. 미산 스님은 한국 선불교가 단순히 깨달음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자비를 중시하고 실천한 여러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개발한 자비 프로그램인 ‘하트스마일 명상’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종래의 ‘깨달음’ 위주의 수행으로부터 자비 수행과 자비 실천의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자비 명상이 심리학과 심리 임상치료의 제일 큰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현대적인 자비 명상의 방법이 서구에서 계발되고 있는 것이다. ‘자비의 과학화’라는 용어가 심리학 계열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자비를 임상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나온 용어이다. 서구의 전통적인 심리치료는 프로이트학파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프로이트학파의 초기 정신 역동은 인간성의 어두운 면, 즉 성과 폭력성 등에 초점을 두었는데, 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이와 함께 심리치료자들은 자비의 개념과 잠재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새로운 임상치료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자비를 현대 과학과 연결시켜 수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달라이 라마와 친교했던 많은 신경과학자들이 자비를 수련했을 때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연구하면서 심리치료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이처럼 자비를 마음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대표적인 약재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으로 ‘수용전념치료(ACT: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hy)’와 ‘자비초점치료(CFT: Compassion-Foc-used Theraphy)가 있다. 수용전념치료와 자비초점치료는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다. 국내의 많은 심리학자와 심리치료사, 그리고 자비 명상 센터나 자비 수행 센터를 운영하는 스님들이 이 치료법을 원용하고 있다. 물론 자비의 과학화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고, 그 개념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자비의 과학화를 자비 수행과 자비 실천에 대한 구체적이고 치밀한 프로그램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사용해도 무방할 것으로 본다.
5. 맺음말-불교 복지의 큰 길을 찾아서
자비의 실천윤리 과제를 ‘불교 복지’와 연결시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불교 역사는 사회복지 실천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초기불교 수행자들은 오늘날의 시민적 성격과 유사한 경제윤리를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복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보시(布施)와 복전(福田) 사상을 동력으로 한 사회복지의 실천 내용은 초기 경전인 니까야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사회복지 운동 전통은 대승 경전 곳곳에서 다양하게 꽃을 피웠으며, 불교 사회복지의 전통은 불교 국가에서 여러 형태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 어느 때는 지표면 위에 도도히 강처럼 흐르기도 했고, 어느 시절엔 땅속으로 흘러 지하수로 맥을 이어가기도 했다.
해방과 6 · 25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불교의 복지적 역할은 매우 약화되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불교의 복지 전통이 되살아나고 있다. 한때 기독교계가 독점하다시피 한 종합사회복지관 또는 전문복지관 운영에 불교계가 대등한 위치로 참여하고 있다. 불교 자체 내에서 운영하는 복지 단체도 늘어나고 있고, 해외에 그 뿌리를 내리고 활발한 활동을 하는 단체도 늘어나고 있다. 승가와 불자가 개인적으로 복지 활동을 하는 사례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참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종래의 상구보리 하화중생에서 하화중생 상구보리로 변하고 있다.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증대하는 현실에서 불교 전법의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 자비행이라고 생각한다.
불교 복지는 단순한 사회복지의 개념을 넘어 생태 복지의 성격도 함께하고 있다. 연기론에 기반한 자연스러운 복지 개념이다. 불교 복지의 실천 방향은 크게 세 가지 틀, 즉 ‘개인 윤리의 차원’ ‘사회 윤리의 차원’ 그리고 ‘공동체 운동의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세 가지 차원의 실천이 유기적으로 접목될 때 비로소 중도적이고 효과적인 실천 방향이 나오지 않을까. 오늘의 한국불교가 풀어야 할 가장 큰 화두이다. ■
방영준
서울대 대학원 졸업(윤리교육 및 사회사상 전공). 성신여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사범대학장 역임. 아나키즘과 자유 공동체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 저서로는 《공동체, 생명, 가치》 《 아나키즘-저항과 희망》 《 붓다의 정치 철학 탐구》 등이 있음. 현재 성신여대 명예교수, 성신학원 운정장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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