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좌선(坐禪)에 대한 소견>

수선님 2025. 1. 30. 15:01

<좌선(坐禪)에 대한 소견>

좌선(坐禪)이란 앉아서[坐] 고요한[禪] 상태에서 삼매(三昧)에 드는 일이다.

다시 말해, 몸은 움직이지 않으나 마음속의 사유(思惟)로써 번뇌를 물리쳐서 그 마음이 아주 편안하고 깨끗하고 고요한 상태로 머물고자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선정수행(禪定修行)’이라 한다면 수행과정의 정신집중인 삼매(三昧)를 통해서 얻게 되는 마음의 고요하고 깨끗한 상태, 바로 그 정점을 ‘선정(禪定)’이라 할 수 있다. 즉, 몸으로는 올곧게 가부좌의 자세를 취하면서 마음으로는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삼매에 드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를 가다듬고 고요히 앉아서 화두(話頭)를 들건, 묵조(默照)를 하건, 관법(觀法)을 하건 간에 무언가 거기에는 마음의 작용이 바탕이 돼 있다.

화두를 들어도 화두에 대한 마음자세가 필요하고, 묵조를 해도 묵조에 대한 마음자세가 필요하며, 관법을 해도 관법에 대한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가운데서 묵조를 한다는 것은 몸으로 묵(默)하고 마음으로 조(照)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다음은 좌선에 대한 종광(宗光) 스님의 <육조단경> 이야기이다. 밖으로 초연하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정 좌선(坐禪)이다.

“선지식들아, 이 법문 중의 좌선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나니,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느니라.

만약 깨끗함을 본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진여가 덮인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일으켜 깨끗 하느니라.

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은 보지 아니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을 보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하는 망상이 생기느니라(善知識 此法門中坐禪 元不著心 亦不著淨 亦不言不動 若言看心 心元是妄 妄如幻故 無所看也 若言看淨 人性本淨 爲妄念故 蓋覆眞如 離妄念 本性淨 不見自性本淨 心起看淨 却生淨妄).”

다시 말하면 이렇다. 좌선은 마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또 경계 따라 움직이지도 않아야 한다.

좌선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을 어떻게 쓰고 가져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깨끗함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은 출가수행자들이 특별히 새겨들어야 한다.

수행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든지 깨끗하다든지 고고하다든지 하는 마음이 있으면 좌선이 아니다. 성품이 본래 청정한데 어디에 깨끗하고 더러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깨끗함에 집착하면 이것 또한 망상이다. 오히려 수행을 그르치게 된다. 또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이 좌선이 아니라는 뜻이다. 누차 이야기했듯이 만약 고요하게 앉아있는 것으로 수행의 척도를 삼는다면 하체를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가장 유리할 것이다.

물론 자세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몸이 바르지 못한 상태에서 제대로 수행하기는 어렵다. 자세가 반듯해야 수행도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다.

마음이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음에는 실체가 없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정말 본다는 말이 아니라 살핀다는 말이다.

육조 혜능(慧能) 대사께서는 마음은 본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한 것이 마치 허깨비와 같은 것이어서 볼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깨끗함에 집착하는 것 또한 마음의 분별일 뿐이다.

우리의 참다운 성품은 본래 깨끗하다. 우리 안에 내재된 불성은 본래 청정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중생인 까닭은 허망한 생각이 참다운 성품을 덮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여는, 불성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다. 그런데 마치 맑은 하늘에 구름이 생겨서 태양을 가리 듯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생긴다. 이런 것을 덜어내어 본래의 깨끗함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참선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성품은 깨끗함 그 자체인데, 그것을 모르고 자꾸 깨끗함에 집착하면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깨끗한 성품을 가리는 망상이며 번뇌가 된다.

그렇지만 우리의 수행 모습은 어떠한가. 오히려 우리의 탐욕을 부채질하고 욕망을 극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주의해야 한다.

간단하게 기도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의 기도 대부분은 욕망의 연장선에 있다.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거나, 진급을 시켜달라거나, 합격을 시켜 달라거나 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과연 수행이라 할 수 있겠는가. 참선을 하면서 무언가를 바라거나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아만(我慢)을 갖는다면 이것 또한 수행이라 할 수 없다.

“망상은 처소가 없다. 따라서 본다 하는 것이 도리어 허망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깨끗함은 모양이 없거늘, 도리어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말하면 이러한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된다.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면 이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 도(道)와는 어긋나고 오히려 등지는 것이다.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다(妄無處所 故知看者却是妄也 淨無形相 却立淨相 言是功夫 作此見者 障自本性 却被淨縛 若不動者 不見一切人過患 是性不動 迷人自身不動 開口卽說人是非 與道違背 看心看淨 却是障道因緣).“

공부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 거짓이다.

기적이 무엇인가. 기적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 내 마음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다. 마른하늘에서 금덩이가 떨어지는 것이 결코 기적이 아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다.

만약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한다면 깨끗함이 나를 묶고 속박해 부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고 바깥 경계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좌선(坐禪)의 요령으로, 무상(無相), 무념(無念), 무주(無住) 이것이 수행자가 견지해야 할 세 가지 틀이라 했다. 육조 대사의 말씀이다.

무상(無相)이란 집착하는 모습이 없다는 말이다. 상(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 모습을 말한다. 인식 주관이 허망 분별한 객관 대상의 형상, 특성, 감정 등에 얽매인다는 말이다. 대개 생각이나 가치관이 굳어진 것을 말한다.

무념(無念)이란 생각하되 생각에 꺼들려 집착하지 않음이다. 즉,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무주(無住)란 일정한 곳에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한다. 머문다는 말은 마음이 간다, 집착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무주란 마음을 내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선정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설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이다.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곧 어지럽게 되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라.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므로 선정이라고 이름 한다.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즉시에 활연히 깨쳐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는다.’고 했고, ‘보살계’에 말씀하시기를, ‘본래 근원인 자성이 깨끗하다’고 했다.

선지식들아, 자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봐라. 스스로 닦아 스스로 지음이 자기 성품인 법신이며, 스스로 행함이 부처님의 행위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니라.

보살계(菩薩戒)란 보살이 되고자 서원하고 발심하는 사람이 계를 받는 것[수계(受戒)], 곧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원력(願力)으로 지혜와 자비를 실현해 나가는 보살이 지켜야 할 실천덕목이다. 본래는 대승보살이 지켜야 할 계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승려 외에 속인의 경우에도 불도를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계율로 인식되고 있다.

대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되는 것이 앉음, 즉 좌(坐)이다. 밖의 경계에 초연해 지는 것이 앉음이다. 또 안으로는 맑고 밝음이 견지되는 것, 이것이 선(禪)이다. 늘 맑은 상태가 유지돼 가는 것이 선이다. 밖으로 경계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안으로 늘 맑음이 유지되면 그것이 바로 좌선(坐禪)이다. 아주 명쾌하고 간결하다.

그러나 쉽게 되지는 않는다. 노력과 정진이 필요하다. 그래서 조금씩 나아가는 것, 이것이 공부이다. 또 밖의 여러 가지 상황에 마음이 끌려 다니지 않는 것이 선(禪)이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 즉 산란하지 않는 것이 정(定)이다.

우리는 육근(六根)을 통해 육경(六境)을 반연(攀緣)한다. 우리가 맛을 보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할 때, 이런 감각들의 정보를 취합해 마음이 생각한다.

마음이 생각한다고 할 때 그 마음은 무엇일까?

유식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한다. 아뢰야식은 장식(藏識)이다. 일종의 기억창고라고 할 수 있다.

가깝게는 수십 년에 걸쳐 보고 들었던 것들이 기억돼 있고, 멀게는 과거의 무수한 전생의 기억들이 담겨있는 곳이다.

육근의 감각기관을 거쳐 들어온 정보들은 아뢰야식에 축적된 경험에 따라 분류되고 해석되면서 생각이 일어나게 된다. 누구를 안다고 했을 때 눈으로 보고 눈이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아뢰야식이 축적된 경험에 따라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정은 이런 생각의 자리가 끊어진 자리이다. 바깥의 경계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다. 앞서 밝혔듯이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은 무상(無相)이다. 또 안으로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것은 무념(無念)이다. 그래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걸림이 없으면 그것이 무주(無住)이다.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남을 헐뜯는다면 어떻게 제대로 좌선을 할 수 있으며 선정에 들 수 있겠나.

바깥으로 모습이 없어지는 것이 선이고 안으로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정이다. 이렇게 욕망에 물들지 않고 탐욕에 찌들지 않은 것이 본래 나의 모습이며 우리의 성품이다. 그리하여 무상이 되고 무념이 되는 것, 이것이 선정이다.

이런 까닭으로 얻게 되는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가 무주이다. 바깥으로 쫓아다니지 않고 안으로 명징해지면 진여는 절로 현현하게 된다. 이것이 <유마경>의 ‘즉시 그 자리에서 사리를 깨쳐서 본래 마음을 도로 되찾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모든 것은 본래 나에게 이미 구족해 있다. 밖에서 찾을 수가 없다.

다만 본래의 깨끗한 성품이, 내재된 불성이 잠시 욕망에 가려 흐리게 보일 뿐이다. ‘보살계’의 말씀처럼 사람은 본질적으로 청정한 존재이다. 그것이 흐려지는 것은 탐⋅진⋅치, 즉 삼독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본래의 그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선정이다. 밖으로 무상(無相)이, 안으로 무념(無念)이 돼서 궁극적으로 무주(無住)가 돼야 한다.

내 스스로가 본래 깨끗하다는 것은 누가 깨끗하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또 다른 사람이 더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다. 스스로만이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주인도 나고 우주의 주인도 나이다. 나만이 나의 참다운 성품을 드러나게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앉는 것은 그냥 앉아서 갖가지 생각을 하면서 명상이나, 사색을 한다고 하면 맞는 말이지만 좌선이라는 것은 선정에 듦을 말하는 것인데 무조건 아무나 가부좌 틀고 앉으면 좌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은. 앉거나 머물거나 행하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히 하거나, 이 모든 것 가운데 중생들의 번뇌를 벗어나는 성스런 의식의 세계에 듦을 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 종광(宗光) 스님

그러한 선(禪)의 세계에 듦에도 순서가 있어서,

1단계에서는, 초선정(初禪定)에 들며,

2단계에서는, 2선정(二禪定)에 들며,

3단계에서는, 3선정(三禪定)에 들며,

4단계에서는, 4선정(四禪定) 에들며,

5단계에서는,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에 들며,

6단계에서는,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에 들며,

7단계에서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 들며,

8단계에서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들며,

9단계에서는, 멸진정(滅盡定)에 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계의 첫 단계를 경험했거나 얻었다면 좌선을 하는 사람이라 하고 현인이나 성인의 경계에 들었다고 하는 것인데, 무작정 좌선이다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선에 대해서 바른 견해를 얻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정에 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행의 수행이 필요한데, 그러한 과정의 수행법 중에 추려서 표현된 것을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이라고 하는 37가지의 도를 닦는 법을 배워야 한다.

육조 혜능(慧能) 대사는 좌선에 대해 의미심장한 정의를 내렸다.

“이 법문 가운데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다.”

좌선은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다. 육조 대사는 바깥 경계에 생각이 꺼들리지 않는 것을 좌(坐), 안으로 자성을 보아 평화로운 것을 선(禪)이라 했다. 육조 대사의 좌선은 안팎의 경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되니, 거리나 시장에서도 가능하다.

반대로 선방이나 산중에 앉아 있어도 안팎의 경계에 꺼들리고 산란하면 좌선이 아니다. 우리가 선방에서 오랫동안 참선했더라도 입만 열면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하심하지 않고 대접 받으려 한다면 이것은 참선을 바르게 한 것이 아니다.

좌선이 가능해지면 좌선간심(坐禪看心)으로 들어가야 한다.

좌선을 통해 마음(본심, 본래면목)을 살핀다는 말이다.

사조(四祖) 도신(道信, 580~651) 선사가 강조한 선법이다.

처음 좌선간심(坐禪看心)을 닦을 때에는 홀로 한 곳에 앉아 먼저 몸을 단정히 정좌하고, 옷과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고 나서 몸을 이리저리 풀며 스스로 안마를 몇 번 해 뱃속의 탁기를 모두 토해내면 신심이 물 흐르듯 해서 본연의 성품을 얻게 돼 청허하고 편안하며 고요하게 된다.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어 편안해지면 능히 마음이 안정케 되니 그윽하고 유현하며, 정신이 맑고 예리하게 돼 심지가 밝고 깨끗해진다. 관찰함이 분명해지고 내외가 고요해지면 곧 심성이 적멸이라, 그와 같이 적멸해지면 불심(佛心)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유현하고 신령스러움이 다하지 아니하고 항상 있어 저절로 밝으니 이를 이름 해 불성(佛性)이라 한다. 불성을 본 자는 영원히 생사를 떠나니 이름 해 출세한 사람이라 한다.

도신(道信) 선사는 초심자가 좌선으로 마음을 살피게 하는 간심수행(坐禪看心)을 할 때 먼저 천태종 좌선의(坐禪儀)에서 설하고 있는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의 방법을 사용하라고 가르쳤다. 이른바 조신, 조식, 조심이란 몸의 조화, 호흡의 조화, 마음의 조화를 말하는 것인데, 이 세 가지의 조화가 좌선수행의 기본이라 했다.

호흡을 떠난 몸이 있을 수 없고, 몸을 여읜 마음이 없으니, 몸과 마음, 호흡이 조화를 이루어야 올바른 좌선을 수행할 수 있고, 좌선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바로 살필 수 있다.

그러므로 좌선간심하려는 초학자는 반드시 좌선의 기본인 조신, 조식, 조심의 도리를 알고 행해야 조도(助道)를 바로 세우는 길이 된다. 조도를 잘 행한 연후에야 마음의 성품이 적멸함을 깨달아 영원히 생사해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수행자는 좌선간심하는 자요, 진실로 출세한 사람은 생사해탈한 자유인이다. ― 한산수필에서

―――좌선의(坐禪儀)―――

좌선의는 좌선하는 방법을 간략하게 핵심만 서술한 글이다.

1. 장소를 택하는 법

• 가능하면 고요하고 안전해서 마음 놓고 좌선할 수 있는 곳을 택해야 한다.

• 될 수 있는 대로 노랫소리, 이야기 소리, 그 외의 잡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곳이 좋다.

• 좌선 도중 사람의 출입 염려가 없는 곳, 눈앞에 여러 가지 물건이 널려 있지 않은 곳이 좋다.

• 밤에는 너무 어둡지 않고, 낮에는 너무 밝지 않도록 광선을 조절한다.

•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통풍이 잘 되는 곳을 택한다.

• 연기나 냄새가 들어오는 것도 좋지 않다.

• 지나치게 장소나 환경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 달마 대사는 “밖으로 모든 인연을 끊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이 돼야 가히 도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2. 몸가짐

• 잠이 부족할 때, 극도로 피곤할 때는 피하라.

•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을 때, 배고플 때, 술을 마셨을 때는 피하라.

• 식후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좌선에 들어가야 한다.

• 음식을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약간 부족한듯하게 하라. 허리끈은 여유 있게 하고 모든 긴장을 풀어버리도록 하라.

• 호흡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하라. 약간 깊이 들이 마시고 천천히 내쉰다는 생각으로 하되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화두만 참구하라.

3. 의복(衣服)

• 너무 사치스러운 옷, 너무 두꺼운 옷, 너무 얇은 옷은 입지 않는다.

• 의복은 간편한 것으로 하고, 허리끈은 여유 있게 맨다. 목 언저리가 너무 덮이든가 목이 조이게 하지 말고, 발목도 조이게 하지 말아야 한다. 청바지 같이 몸에 꼭 끼는 옷은 좋지 않다.

3. 마음가짐

• 좌선법은 먼저 큰 서원을 세워야 한다.

• 몸과 마음을 통째로 화두에 바쳐 버렸다는 마음가짐으로 온통 화두와 하나가 돼야 한다.

• 좌선을 하다 보면 좌중에 여러 가지의 경계(境界, 心境)가 나타난다. 유달리 잠이 온다든가[수마(睡魔)], 갑자기 권태증이 난다든가, 몸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든가, 공포증 따위가 생기는 것이 그것이다. 또 갑자기 앞이 환히 밝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이 금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무지개 색깔이 보이기도 하고, 앞날의 일을 미리 알아맞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에 개의하지 말고 곧장 가야 한다.

4. 자세

• 좌선하는 방법에는 결가부좌와 반가부좌가 있다.

• 허리를 자연스럽게 반듯이 세우고, 몸이 등、머리、목、골절이 일직선이 되도록 하고, 양쪽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또한 몸을 지나치게 곧추세우면 호흡이 급하게 되고 마음이 불안하게 되니 주의해야 한다.

• 벽이나 의자 같은 것에 기대는 것은 일체 금물이다.

• 무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앉기 전후 10분 정도 가벼운 운동을 해야 한다.

• 좌선 도중 다리가 아플 경우 오른다리와 왼다리의 위치를 번갈아 가며 바꿔 앉는다(결가부좌로부터 반가부좌로, 반가부좌로부터 결가부좌로 옮겨도 좋다).

• 손은 둥글게 양쪽 엄지를 가볍게 서로 닿게 붙인다.

• 입과 이는 긴장을 풀고 살짝 다물며 혀를 말아 혓바닥 아래쪽이 입천장에 닿도록 한다.

• 눈은 반쯤 뜨되 부릅뜨지도 말고 감지도 말고 눈은 가늘게 떠서 졸음이 안 오도록 한다. 앞바닥에 시선을 내려놓는다.

• 몸이 안정되고 호흡이 조화된 후에는 하복부를 느슨하게 하고 모든 선악을 생각하지 말라(一切善惡都無思量). 잡념이 일어나면 곧 알아차려라. 알아차리면 곧 잡념은 사라진다(念起卽覺覺之卽失).

5. 좌선시간은 짧아도 열심히 하는 편이 좋다. 시간의 길고 짧은 것보다는 진정한 공부가 문제다. 일회에 30분에서 1시간가량이 적당하다. 선원에서는 보통 50분 좌선에 10분 휴식을 한다. 한꺼번에 길게 하는 것보다도 자주 짧게 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너무 시간에 구속되지 않아야 한다.

6. 좌선을 시작할 때에는 몸의 조절로부터 호흡의 조절로 들어간다. 즉, 굵은 곳(鹿)으로부터 가는 곳(細)으로 들어간다.

좌선이 끝날 때는 이와 반대로 가는 곳에서부터 굵은 곳으로 나와야 한다. 먼저 마음을 풀고, 다음 입을 열어 기를 토해낸다. 그로부터 서서히 몸을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손을 푼다. 이때 결코 조급하거나 난폭해서는 안 된다.

두 손바닥을 비비면 열이 난다. 이 열로 두 눈을 약간 눌러 준다. 목운동을 한다. 가부좌의 다리를 편다. 완전 휴식 자세를 취한다. 좌선을 오래 하면 인후(咽喉)에 열이 있는 듯이 느껴진다. 이 열이 5분쯤 있으면 식는다. 이때 아주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그것은 앉았을 때의 혈액순환이 서서 움직일 때의 순환으로 바뀌는 때문이다. 이때 까딱 잘못하면 병을 얻게 된다.

7. 경행법(經行法-布行)

경행이란 좌선을 오래해서 피로했을 때, 또는 몹시 잠이 올 때 일어나서 걷는 것을 말한다. 이때 눈은 전방 7, 8자 되는 곳에 두고 한 호흡 간에 반 발짝을 발의 길이 반 정도로 걸을 것. 이것을 일식반보반부(一息半步半趺)라 한다. 걷고 있는지 걷고 있지 않은지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로 걷되 몸은 좌우로 흔들어서는 안 된다. 몸이 흔들리지 않으면 옮기는 발에 전신의 무게가 들어온다.

경행시 손을 너무 내려가지 않도록 아랫배쯤에서 차수(叉手)한다. 말하자면 가벼운 걷기 운동으로서 산책 나가는 기분으로 한다. 손도 반드시 앞으로 차수할 필요는 없다. 뒷짐을 져도 좋고, 팔짱을 껴도 좋다. 각자가 자기 몸에 맞도록 한다.

8. 경책(警策) ― 좌선 중에 졸거나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 자세가 흐트러지면 죽비로 경책을 한다. 경책은 바른 수행을 돕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이다. 경책을 할 때는 소임자가 경책 받을 사람의 오른쪽 어깨 위에 죽비를 가볍게 올려놓고 지그시 누르면서 경책할 것을 알린다. 그러면 경책 받을 이는 졸음에서 깨어 합장해 머리를 왼쪽으로 가볍게 기울여 어깨로 경책 받도록 한다. 경책 받은 다음에도 합장하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다시 바른 자세로 되돌아간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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