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10)
-법성게 강의 (8)-
27) 이다라니무진보 (以陀羅尼無盡寶)
-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
28) 장엄법계실보전 (莊嚴法界實寶殿)
- 법계의 실다운 보배 궁전을 장엄하고
29) 궁좌실제중도상 (窮坐實際中道床)
- 마침내 실제 중도의 자리에 앉으니
30) 구래부동명위불 (舊來不動名爲佛)
- 옛부터 움직임이 없는, 그 이름 부처이네.
수행의 이익을 밝혀 전문(全文)을 마무리한 마지막 4구이다.
수행의 이익은 결국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던 부처의 성품을
계발하여 부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다라니란 모든 선법을 구족한 한량없는 공덕장(功德藏)을
밀교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곧 마음의 근원(心源), 거기에 갖추어진 비밀스런 공덕으로 일체 악을 차단한
순수하고 참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다라니'라 한 것이다.
이것은 한 없는 이익을 발생케 하여 온 세상을 부처의 세계로 꾸며 놓는 것이다.
법계의 실보전(實寶殿)은 부처가 거처하는 궁전이다.
이는 법성의 자리를 공간적으로 수식한 말이다.
여기에는 모든 상대적 차별을 뛰어넘어 만법이 하나로 회통되는
중도의 진리가 일승(一乘)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일승이 진리의 궁극으로 만법의 참된 근원이다.
이 참된 근원은 본래부터 어떠한 변화나 이동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알고 보면 본래의 제 모습이었던 것으로 근원에 돌아오고 나서
비로소 그러함을 깨닫게 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경지,
"실상(實相)은 이언(離言)이요, 진리(眞理)는 비동(非動)이라." 한 말처럼
고요 하고 동요가 없는 본래부터 여여한 그 모습이 부처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잠을 자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동서남북을 내왕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잠을 깨고 보니 정작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잠자리에 누워 있었을 뿐이었다.
꿈속에서는 이곳 저곳 다녔으나 깨고 보니 오고 간 일 이 없었던 것이다.
깨닫기 전의 중생이나 깨달은 뒤의 부처가 본질적 근원에서 볼 때 다른 것이 없다.
마치 돌 속에 들어 있는 금이나 순금으로 제련된 금이나 금의 성분은
다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번뇌와 망상 그리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속에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고 있다가
번뇌와 망상을 끊고 아집과 법집을 여의고 보니 본래의 자기 모습이 회복되어 나타났을 뿐,
번뇌와 집착을 가지고 있던 나를 떠난 별도의 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깨달음은 자기의 참된 성품자리에 돌아가는 복귀요, 또한 그것을 회복하는 일이다.
법성의 그윽한 이치는 불변(不變0과 수연(隨緣)으로 설명되면서
인연을 따라 변화하는 모든 법이 근원에 돌아가서 보면 변화되지 않는
불변의 바탕이 되어 고금을 꿰뚫고 동서를 관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도 감이 없는 것이요, 와도 옴이 없는 것이다.
의상스님은 이것을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라 설명하였다.
"가도 가도 본래 자리요, 이르고 이르러도 출발한 그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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