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에 펴신 최초의 설법은 고ㆍ집ㆍ멸ㆍ도(苦ㆍ集ㆍ滅ㆍ道) 사성제(四聖諦)이다.
사성제는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인 동시에 일생의 설법이다.
부처님은 성도 후 수 주일 동안 선정에 잠기신 후 자신의 법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교진여 등 다섯 비구를 찾아 베나레스의 녹야원으로 갔다.
그리고는 고ㆍ집ㆍ멸ㆍ도 사성제법을 설했다.
다섯 비구들에게 최초로 사성제를 설했다고 해서 그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최초로 깨달음에 이르는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는 뜻이다.
이 초전법륜에 의해서 불교교단이 성립된다.
불교교단이 성립하려면 불ㆍ법ㆍ승(佛 法 僧)의 3보(三寶)가 있어야 하는데, 사성제를 설한 초전법륜으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고 전할 제자들이 생긴 것이다.
부처님께서 베나레스의 녹야원에 머무르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법하셨다.
“네 가지의 성스럽고 참다운 진리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모든 것은 괴롭다는 진리요[苦聖諦],
둘째는 괴로움의 원인은 쌓임에 있다는 진리요[苦集聖諦],
셋째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요[苦滅聖諦],
넷째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의 진리[苦滅道聖諦]다.
만약 수행자로서 이미 모든 것이 괴롭다는 진리를 알고 이해하며[知],
괴로움이 원인이 쌓임에 있음을 알고 끊으며[斷],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를 알고 증득하며[證],
괴로움이 사라지는 방법의 진리를 알고 닦았다면[修],
그런 사람은 빗장과 자물통이 없고, 구덩이를 편편하게 고르고,
모든 험하고 어렵고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리라.
그는 어질고 성스러운 사람[賢聖]이라 부를 것이며 거룩한 깃대를 세웠다고 하리라.”
『잡아함경』 제15권 386경 「현성경(賢聖經)」
여기서 부처님은 괴로움의 세계라는 현실과 그 고통의 원인, 괴로움이 멸한 세계,
그리고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깨우쳐 주신다.
이 사성제의 실천구조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원리와 유사하다.
고, 즉 괴로움은 우리들이 앓고 있는 병의 증상에 해당된다.
그리고 집, 즉 미혹과 집착의 갈애(渴愛)는 발병의 원인이 된다.
멸, 즉 괴로움이 멸해서 평안한 상태는 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도, 즉 괴로움을 없애고 열반에 이르는 길은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현실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은 길고 먼 윤회의 길로 추락하는 경로를 나타내고,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하는 방도는 영원한 행복과 자유가 있는 열반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경로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파악한 현실의 괴로움은 어떤 것인가?
1) 괴로움
사성제의 첫 번째는 괴로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즉 고성제이다.
현실의 괴로움은 보통 4고ㆍ8고(四苦 八苦)로 분류한다.
생ㆍ노ㆍ병ㆍ사(生 老 病 死)라는 삶의 모든 과정에 대한 4가지 괴로움에 다른 4가지 괴로움,
즉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합해서 8고라 한다.
삶을 받는 괴로움, 늙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은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누구나 겪어야 하는 보편적인 괴로움이다.
또한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정든 환경을 떠나야 하는 괴로움,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하거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괴로움,
원하는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
마지막으로 5온은 나와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위와 같은 괴로움에 대한 여실한 인식이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괴로움을 늘 겪고 있으면서 인간 존재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이 진리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미운 사람을 만나면 당장 괴롭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내 망각하고 지낸다.
불교 수행의 출발점은 괴로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인데,
고의 실상을 바로 보는 순간 고통을 여의고 안락함[離苦得樂]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도 있고
전쟁 중에 상대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고통을 여의고 안심입명을 얻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실체를 바로 알아야 한다.
괴로움을 두려워하며 피할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 괴로움을 직시해야 한다.
고통의 무게를 못이겨 삶을 포기하거나 자살하는 사람들은 정말 헤어나오기 힘든 암흑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적진을 향해 달리는 용맹스런 장수처럼 고통을 직면해야 한다.
당당하게 괴로움과 맞설 때 그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여 원인과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2) 괴로움의 원인
사성제의 두 번째는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다. 즉 집성제이다.
집(集)이란 ‘함께 모여 일어난다[集起]’는 뜻이다.
무엇이 함께 모여 일어나는가?
인간의 근본 미혹으로 인한 욕망과 애착이 모여 괴로운 번뇌가 일어난다.
이것을 한 마디로 ‘갈애(渴愛)’라 한다.
욕망의 갈증과 존재에 대한 애착이다.
이 갈애가 바로 괴로움의 원인인 것이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기에 좋은 것, 듣기에 좋은 것, 좋은 향기, 좋은 맛, 감촉이 좋은 것만을 탐한다.
그 욕망의 정도는 끊임이 없다.
하나를 충족시키면 둘을 요구하고 둘을 들어 주면 셋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욕애(欲愛)’라고 한다.
좋은 것만을 탐닉하는 인간의 성향 이면에는 ‘나’라는 존재가 영원하여 좋은 것을 항상 향유하기를 바란다.
지금 이 목숨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
바로 이 생에 대한 갈애와 집착이 ‘유애(有愛)’이다.
이처럼 욕애와 유애를 추구하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허무를 탐닉한다.
이것을 무유애(無有愛)라 한다.
쾌락주의의 극치는 허무주의와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극단에 치우친 태도는 항상 고통의 원인이 된다.
고통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는 삶의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며 역동적이다.
부처님은 최초의 설법 중에서 “최초의 진리가 괴로움의 인식이고 괴로움의 원인을 여실히 관찰하고
인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괴로움에서 벗어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앞에서 자살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듯이, 이 말을 듣고 어떤 이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카드 빚에 쪼들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동반자살한 가족, 부도를 내고 자살한 중소기업체 사장,
일등에서 이등으로 떨어졌다고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어느 학생,
이들은 모두 자살을 결행할 정도로 이 세계의 고통을 절감했을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고통을 경험하고 자살함으로써 고통을 벗어난 사람들인가?”
물론 이것은 전제가 잘못된 어리석은 질문이다.
자살한 사람들은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고통을 절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고
이 어려움을 겪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는 괴로움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도피한 것이며,
삶에 대한 태도가 너무 소극적이고 무기력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오죽 괴로웠으면 자살까지 했겠냐고 묻겠지만,
사실 그들은 괴로움에 빠져 버려 헤어나오지 못하고 그 속에 함몰되어 버린 것이다.
괴로움에 대한 바른 인식과 괴로움의 원인을 관찰할 생각을 낸다는 것은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삶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성제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진리를 잘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다.
3) 괴로움의 소멸
사성제 중에서 멸성제는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
즉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 또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모두 사라진 평온의 경지를 나타낸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되었으니 괴로움도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
괴로움이 없는 인생, 이는 이미 중생의 삶이 아니라 열반과 해탈을 성취한 성자의 삶이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 병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여
병을 모두 치료했으니 이제 더 이상 환자가 아니다.
다시 말해 고통스러운 병과 그 원인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삼법인에서 언급한 열반적정의 상태이며,
12연기의 역관(逆觀)의 결과로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모든 존재현상은 끊임없이 생멸하고[無常],
생멸, 변화하는 현상들은 갈등과 갈애의 상태를 면치 못하며[苦],
이런 생멸하는 갈등과 갈애의 현상 이면에는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無我]’라는
진리를 확실히 체험하면 바로 그 상태가 열반적정인 것이다.
이렇게 괴로운 존재현상의 시작과 끝을 여실히 관찰하여 체득함으로써 해탈열반의 세계를 성취하게 된다.
즉 괴로운 존재현상을 떠나 어떤 열반적정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열반적정이며 해탈이고, 잘못 보면 괴로움이고 번뇌이고 무명(無明)이다.
여기에 멸성제의 현실적이고도 실천적인 의미가 있다.
고뇌와 무지로 점철된 삶의 질곡이 따로 있고 해탈열반의 이상세계는 저 멀리 존재한다면
고통의 삶을 극복하기 위한 수행은 불가능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너그러운 자비심과 공경으로 대하고,
좋은 말, 밝은 얼굴로 내 욕심을 접고 먼저 양보하며
남의 일을 같이 기뻐하고 상처를 안아주며, 감사하고 찬탄하며
모든 공덕을 함께 나누면, 바로 그 순간 괴롭고 힘든 고통의 삶이
지금 여기에서 신나고 기쁨이 넘치는 수행의 삶으로 전환된다.
멸성제의 현실적 성취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다음에 살펴볼 도성제(道聖諦) 즉, 8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다.
4)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 - 팔정도
사성제 가운데 도성제, 즉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 또는 8가지 수행방법[八正道]을 말한다.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선정(正定)이 그것이다.
팔정도는 불교의 종합수행법이며, 불교수행의 요체일 뿐만 아니라, 유구한 세월을 통해
많은 수행자들에 의해 계발되고 계승된 불교의 각종 수행법의 토대가 된다.
팔정도의 수행덕목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수행의 핵심 사항들이 종합적으로 집대성되어 있다.
팔정도의 각 덕목들은 정견을 얼마나 깊고 정확하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수행 결과가 달라진다.
또한 팔정도 수행의 출발점은 정념이고 그 노력이 정정진이며 이것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집중에너지가 형성되면 정정, 행동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정어, 정업, 정명이다.
다음에서 팔정도의 덕목들을 알아보자.
팔정도의 첫째는 정견이다.
정견은 ‘바르게 본다’ 또는 ‘바른 견해’라는 뜻으로서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듣고 공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이다.
정견은 사성제를 위시한 삼법인, 12연기설과 같은 불교의 핵심교리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하여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는 것이다.
정견은 모든 불교수행의 시작이며 끝이다.
정견이라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그 수행의 결과는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지적 능력이 바로 정견이다’라는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비구들이여, 정견은 [8정도 수행의] 시작이다.
왜 정견이 시작인가?
잘못된 견해는 잘못된 견해라고 이해하고 바른 견해는 바른 견해라고 이해한다.
『잡아함경』 제28권 「사견정견경」
그러므로 이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하기 전에 정견을 먼저 확립하도록 가르친다.
정견의 확립은 모든 존재의 실상을 무상과 고와 무아로 보고,
4성제의 관점에서 보아 모두 연기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적으로 파악해야 고정된 판단 근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정견으로 성숙하고, 정견을 통해서 정화될 수 있다.
자유로 가는 길, 즉 명확한 통찰력을 얻는 것을 출세간적 정견이라 한다.
정견은 불교 수행의 첫 걸음으로써 올바른 견해 없이 올바른 수행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불교 수행의 기초가 된다.
둘째는 정사유이다.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으로서 ‘생각할 바와 생각해서는 안 될 바를 잘 분간하여 마음을 쓰는 것’이다.
정사유란 ‘번뇌에서 벗어난 생각, 성냄이 없는 생각, 해를 끼치지 않는 생각’으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 중에서 탐진치 삼독(三毒)에 물든 생각을 경계하는 것이다.
아울러 온화한 생각, 청정한 생각, 자비로운 생각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즉 정견의 바탕 위에서 자기 생각의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여 그릇된 생각을 지양하고
올바른 생각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사유이다.
셋째는 정어로써 올바른 말을 뜻한다.
즉 정견과 정사유에 따라 항상 깨어있는 마음[正念]으로 올바른 언어생활을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거짓된 말, 남을 헐뜯는 말, 남을 상하게 하는 거친 말,
쓸데없는 잡담과 같은 옳지 못한 언어적 행위를 자제하는 것이다.
말을 하는 순간 바로 모든 선악시비와 갈등이 나타나기 때문에
말의 흐름을 잘 관찰하여 잘못된 구업(口業)을 짓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서 진실된 말, 남을 이롭게 하는 말, 부드럽게 화합하는 말을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어이다.
넷째는 정업이며 이는 올바른 행위를 의미한다.
이는 정어에서 의미하는 언어적 행위 외에 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동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며 음란한 행동을 하고 술에 취하는 것과 같이
몸으로 행하는 잘못된 신업(身業)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아울러 생명을 살리고 남에게 베푸는 자비로운 행동을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정어와 정업은 바른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는 바른 행위를 뜻한다.
다섯째는 정명으로서 올바른 생활을 뜻한다.
정명은 규칙적이고 건전한 생활을 하며 올바른 직업을 통해 정당하게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규칙적인 식사, 수면, 업무와 같이 건전하고 절제된 일상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남을 속이고 피해를 입히는 직업보다는 올바른 직업윤리를 지니고 정당한 직업을 통해 생활하도록 권장한다.
이렇듯 정명은 올바른 가정생활과 직업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정정진이며 올바른 노력을 의미한다.
정정진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목표를 향해 용기를 내어 물러섬이 없이 바르게 노력하는 것이다.
즉 모든 괴로움과 번뇌의 주범인 근본 무명을 반야지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에서 노력해야 한다.
탐려扁치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고,
이미 일어났으면 이를 극복하고,
반야지혜를 개발하여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난관을 이겨내면서 궁극의 경지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정정진이라 한다.
일곱째는 정념으로 바른 깨어있음, 바른 마음챙김, 바른 관찰,
바른 수동적 주의집중, 마음지킴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정념이란 4념처(四念處), 즉 신체, 느낌, 마음, 그리고 모든 현상은 항상 변하며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늘 새기며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 괴로움의 실상을 파악하여
찰나찰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잘 관찰하는 것이다.
이 정념수행은 단순히 4념처 수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수행법에 적용된다.
염불수행을 할 때는 불보살님의 명호가 생각생각 이어져야 하며,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는 화두챙김에 끊임이 없어야 한다.
팔정도의 마지막인 여덟 번째 정정은 올바른 정신집중 또는 올바른 선정을 의미한다.
즉 마음을 바르게 한 곳에 집중하여 삼매(三昧)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듯 정정은 올바른 정신집중의 노력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팔정도는 초전법륜에서 부처님이 제시한 대표적인 불교수행법으로서
여덟 가지 측면에서의 수행을 뜻한다.
이러한 팔정도를 계(戒 : 정어, 정업, 정명), 정(定 : 정정진, 정념, 정정), 혜(慧 : 정견, 정사유) 3학(三學)의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수행 내용에 따라 세 가지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삶과 사물에 대해서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다.
이는 팔정도의 첫 덕목인 정견에서 제시되는 것으로서 불교의 기본적 교리를 듣고
공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이다.
즉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 삼법인, 12연기, 중도설, 무아설 등을 깊이 궁구하여
삶과 존재의 실상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정립하는 것이다.
둘째는 올바른 견해에 근거하여 실천적 노력을 하는 것이다.
정사유로부터 정정진에 이르는 수행은 사고, 언어, 행동, 생활을 포괄하는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다.
셋째는 불교의 가르침을 실제로 체험하는 수행이다.
정념과 정정이 이러한 체험적 수행에 해당한다.
즉 정념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괴로움과 번뇌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닫고 정정을 통해 올바른 정신집중을 하여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난 적멸한 경지인 삼매를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팔정도 수행의 완성은 괴로움의 소멸[滅聖諦]이며,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존재해 있음을 확연히 체득한 것이다.
연기법의 체득은 지혜의 완성이며, 이는 팔정도의 첫 번째 덕목인 바른 안목[正見]을 온전히 갖춘 것이다.
모든 존재가 긴밀한 상호의존관계로 연기해 있음을 확실히 깨달았기에
이를 지혜(智慧)라 하고, 지혜는 자비(慈悲)의 실천을 전제로 한다.
지혜의 성취와 자비의 실천은 불교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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