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法印)이란 법의 도장이라는 뜻이다.
법이란 물론 진리를 말하고 인장은 진리로써 인증하는 증표를 나타낸다.
이 진리는 부처님께서 발견하셨으므로 부처님의 교법이라 하며 불교를 다른 종교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한 기준으로 사용된다.
삼법인의 사상과 일치하면 불교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삼법인은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법의 실상을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삼법인은 초기경전에는 주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의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삼법인이 어떤 맥락에서 설해지는가를 알기 위해서 초기경전에 자주 나타나는
무상럭疵무아에 관한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읽어보자.
부처님이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다가 이런 질문을 했다.
“비구들이여, 내가 물을테니 아는 대로 대답해 보라.
육체(色)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인가,
시시각각 변해서 무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이라면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육체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나의 것(我所)이며, 나(我)이며, 나의 본체(我體)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가 아닙니다(無我).”
“그러면 정신의 세계인 감수작용(受)과 개념작용(想), 그리고 의지(行)와 인식(識)은 어떠한가?”
“그것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며, 즐거운 것이 아니며, 나의 것도 나의 본체도 아닙니다.”
“참으로 그러하다.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옳다.”
『잡아함경』 제1권 34경 「오비구경(五比丘經)」
초기경전을 읽다 보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5온의 무상함, 괴로움,
그리고 무실체성을 강조하심을 발견하게 된다.
위의 경에서도 5비구들에게 조목조목 물으시며 5온은 무상한 것이며 괴로운 것이며
따라서 실체적 자아는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다.
이러한 일체법의 3가지 특성을 불교학자들이 삼법인이라 명명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무상함에서 괴로움을 유추할 수 있으니까 이것 대신 열반적정을 넣어
삼법인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관찰해야 할 현실상태는 무상럭疵무아의 일반적 연기현상이지만 성취해야 될 이상은
연기에 대한 관찰로 생기는 열반적정의 상태이다.
『증일아함경』 권18에는 아예 열반을 포함해서 사법인의 형태로 나타난다.
삼법인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실천하기 힘든 교설은 무아설이다.
예로부터 무아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불교학의 발전 양상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지금 분명 ‘나’라고 하는 것이 경험하고 있다.
이 경험하는 ‘나’가 엄연히 있는데 왜 ‘나’가 없다고 하는가?
우리가 여기서 무아로 부정되는 그 ‘나’라는 것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상식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 부정하신 것은 당시 외도들이 말하는 ‘영원불멸의 실체적인 나’ 혹은 ‘본체로서의 나’이다.
‘나’는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5온이며, 이것이 바로 지금 내가 현상적으로 경험하는 ‘나’인 것이다.
이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나’에 ‘진아(眞我)’와 ‘대아(大我)’같은 수식어를 붙여 놓으면
이를 ‘고정된 실체적인 나’로 착각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무아를 설명하면서 잠시라도 연기법의 원칙을 벗어나면 실체적인 관념의 ‘나’가 침입하여
무아의 참된 의미를 왜곡시켜 버린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상ㆍ고ㆍ무아의 삼법인 교설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을까?
이 교설의 실천적 의미는 무엇일까?
1) 무상설의 실천적 의미
일체의 삼라만상이 끊임없이 변해가며,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작은 미립자의 물질이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에너지에 불과하며,
원자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물리ㆍ화학적으로 찰나찰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자연과학도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무상의 원칙이 현대과학의 발달로 더욱 확실하게 증명되기는 하지만,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어떤 과학적인 지식을 주기 위해서 무상관을 가르친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참다운 삶, 가치 있는 삶, 영원한 삶을 얻게 하기 위한
실천적인 의미로 무상의 참뜻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기쁠 때보다 슬플 때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색하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진정으로 사랑하던 사람이 죽거나, 말기 암환자가 되어 죽을 날을 받아 놓았거나,
아니면 자신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불구의 몸이 되었을 때 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생에 대한 무상함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나이 순서대로 죽는 것도 아니며, 재산이 없는 순서대로 죽는 것도 아니다.
지식이 없는 순서대로 죽는 것도 역시 아니다.
누구나 갑자기 죽을 수 있으며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이처럼 무상함에 대해서 깊은 사색을 하면 할수록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고생하지 않고 유복하게 사는 사람들 중에 교만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실패를 모르고 승승장구로 일이 잘 풀려 성공한 사람은 자칫하면 자만에 빠지기 쉽고 일에 집착하기 쉽다.
이런 사람들은 무상관을 닦아야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무상의 법칙은 빈부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무상관을 통해서
터득할 때 인생의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에 상관없이 겸손한 마음으로 수행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상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인생은 좋은 쪽에서 나쁜 쪽으로의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지금 현재 소외되어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사노라면
복된 삶을 맞이할 수 있는 것도 모든 현상이 끊임없이 변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복권이 당첨되는 그런 극단적인 역전의 삶이 꼭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박복이 유복으로,
불행이 행복으로, 병약함이 건강함으로 역전될 수 있다.
역전의 인생이 가능한 것도 역시 바로 이 무상의 원리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무상의 긍정적인 면에 대한 관찰은 무상설은 염세적이며 비관적인 현실관이라는 오해를
바로 잡아 주고 무상의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2) 괴로움의 실천적 의미
불교에서 인간이 사는 곳을 사바세계라 한다.
고통을 참고 살아야 하는 세계라는 뜻이다.
인간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변화한다는 것은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들처럼 끊임없이 운동하며 서로 충돌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변화하는 현상은 이처럼 충돌과 팽팽한 갈등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므로 불안정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가 몸과 마음에서 지속될 때 우리는 이것을 괴로움, 고통, 고뇌 등이라 느낀다.
괴로움의 유형에 따라 일체개고를 3가지로 분류하는데, 고고(苦苦)는 괴로움 자체의 고통,
행고(行苦)는 시간적으로 덧없이 변하는 데서 오는 고통,
그리고 괴고(壞苦)는 공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부서지는 데서 오는 공허감의 고통이다.
첫째, 고고는 매우 일반적인 의미의 괴로움 자체를 말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 부조화의 상태에서 오는 고통이다.
불치병에 걸려 병실에 누워 신음하는 고통,
어두운 밤거리에서 치한들에게 두들겨 맞는 아픔,
감옥에서 고문을 받을 때의 고통,
힘든 노동으로 인해 몸살을 앓는 고통 등 여러 종류의 육체적 고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괴로운 것은 정신적인 압박감과 불안감, 그리고 모멸감과 수치심이다.
잘 모셔야 하는 홀어머니와 사랑하는 부인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보아야 하는 외아들은 괴롭다.
그토록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이 배신했을 때 정말 고통스럽다.
아들이나 딸이 대학시험에서 낙방하여 불량배들과 어울려 탈선하는 모습을 보는 부모들은 괴롭다.
인기나 명예를 잃는 것도 괴롭다.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이 인기를 잃고 무대 한쪽에서 빈 객석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허탈하다.
위의 고통들은 인간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겪을 수 있는 괴로움들이다.
이런 괴로움을 당할 때 고통에 대한 관찰을 하지 않는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만이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이중의 고통으로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고통의 진상을 아는 수행자는 누구나 겪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이 괴로움 또한 무상하므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통찰한다.
그래서 아픔에 또 다른 아픔을 불러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둘째, 행고는 모든 것이 시간적으로 변함으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으로
삼법인의 첫 번째인 제행무상에서 오는 괴로움이다.
아름다운 젊음을 잃어야만 하는 괴로움,
왕성한 정력과 혈기를 잃어가는 괴로움,
나이 먹고 능력 없이 회사 돈만 축내고 있다고 퇴출당해야 하는 괴로움,
세월의 변화에 따라 늙어 죽어야만 하는 괴로움 등이 있다.
그러나 행고를 관찰하는 수행자는 팽팽하고 생기 넘치는 얼굴에 험한 주름살이 생기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완숙의 미를 음미할 수 있으므로 이로 인한 더 이상의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력과 기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생리적인 현상임을 받아들이고
조신(調身)의 묘를 터득하게 되면 이로 인한 괴로움에 빠지지 않는다.
나이 때문에 회사에서 퇴출당했을 때, 자신의 능력에 맞는 다른 직업을 적극적으로 찾는다면
이로 인한 괴로움은 능히 극복할 수 있다.
늙음과 죽음에 대해서 한탄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는 늙음과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차분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면,
이로 인한 허탈감과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괴고는 어느 공간 속에 이루어져 있던 것이 부서지거나 없어지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예를 들면, 애지중지하던 값비싼 고려청자가 깨진 데서 오는 괴로움,
태풍이나 지진으로 인해 무너져 버린 집을 보는 괴로움 등 물리적인 무너짐에 대한 고통이 있다.
또한 가문이 무너지고, 우정이 깨지고, 결혼생활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심리적인 해체의 상태에서 오는 괴로움 역시 매우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괴고에 대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수행자는 깨진 고려청자를 보고 잠시 애석해 하더라도
원래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보관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여 그 물건에 대한 집착의 마음을 버린다.
태풍이나 지진으로 집이 무너져 버렸다면, ‘이 엄청난 재해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생각하며 애석한 마음을 정리한다.
가문, 우정, 결혼이 깨진 것에 대해서도 ‘죽어서 헤어지기도 하는데 인연이 다해서
깨진 관계를 어쩔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안정시킨다.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 그것을 붙잡고 있지 않고 놓아 버리면,
괴로움의 속성이 무상하여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
방하착(放下着)하여 마음을 비워 버리면 괴로움이란 실체가 없이
연기적으로 존재한 것이기에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3) 무아의 실천적 의미
괴로움만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괴롭다고 생각하는 ‘나’도 실체가 없다. 즉 무아이다.
위에서 연기법을 설명할 때, ‘나’라는 존재는 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연기해 있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이 몸도 내가 아니며, 느낌, 개념, 생각 등도 또한 내가 아니다.
이 몸이란 부모님을 의지해 태어난 것이며, 느낌, 개념, 생각 등이란 가정, 학교, 사회,
그리고 살아오며 부딪쳐 온 주위의 환경으로부터 배워 익혀 온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육신의 지ㆍ수ㆍ화ㆍ풍(地 水 火 風) 또한 이 우주의 가득한 그 물질을
잠시 인연에 맞게 빌어다 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늘 먹고 있는 밥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한 톨의 쌀이 있기 위해서 땅과 물, 태양빛과 공기가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농부의 피땀 어린 노력과 정성이 깃들어야 양질의 쌀을 얻을 수 있다.
이 쌀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밥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시 물[水]과 열[火]의 인연을 만나야 한다.
밥은 밥이지만 우리가 먹고 나면 밥은 더 이상 밥이 아닌 몸 속의 자양분으로 된다.
살이 되고 뼈가 되어 ‘내 몸’이 되는 것이다.
밥상의 국도 반찬도 과일도 먹고 나면 ‘내 몸’이 된다.
물도 물이지만 마시고 나면 ‘나’가 되고, 공기도 공기지만 들이마시고 나면 ‘나의 호흡’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본래부터 ‘나’ 혹은 ‘나의 것’이였던 것은 하나도 없다.
잠시 인연에 따라 나에게로 오면 그것을 보고 ‘나’라고 이름지어 집착하는 것일 뿐이다.
어머니의 뱃속에 처음 잉태되었을 때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한 방울의 이슬과 같았다.
이 이슬방울과 같은 몸이 어머니가 주신 자양분을 의지해서 지금 우리의 몸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까지 지금 이 모습, 이 세포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머리도 변하고 살결도 변한다.
끊임없이 ‘나의 모습’은 변한다.
이처럼 변화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나’는 ‘나’라고 할 만한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내 느낌, 생각, 가치관 등에서 ‘나’라는 실체를 찾아낼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좋다 혹은 싫다’라고 느낄 때 그 느낌이 ‘나’일까?
나의 느낌이며, 생각이며, 가치관이며 세계관들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모두가 다른 사람의 말이거나, 교육을 통해서 배웠거나, 살아오며 경험하고 환경에 의해
익혀 온 개념이나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는 가정, 이웃, 사회, 국가라는 환경 속에서 순간순간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책과 대중매체를 통해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받아들인 정보를 내 느낌, 내 생각, 내 사상, 내 가치관이라 한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배우고 익혀서 받아들인 느낌, 생각, 가치관, 관습, 고정관념들이
우리의 머릿속을 점령하여 온통 나의 가면을 덮어쓰고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허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성격의 온화함과 포악함, 몸매의 좋고 나쁨, 능력 혹은 지식의 차이, 근기의 우열, 이 모든 것들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원인과 조건들이 만났을 때 연기해 생겼을 뿐인데 ‘나’라는 주머니 속에 주워 담고는 좋으니 싫으니,
행복하니 불행하니, 잘났느니 못났느니, 날씬하니 뚱뚱하니, 크니 작니, 숱한 분별과 비교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나’와 남을 구분하여 비교하면 할수록, ‘나’라는 주머니는 자꾸자꾸 커져만 간다.
너무 커져 주체할 수 없어 결국 쓰러지게 된다.
그냥 놓아버리면 모든 분별심이 딱 끊어져 온통 환히 밝아지고 자유로운 줄을 모른다.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 모든 시비가 끊어지고 삶이 편안하고 맑아진다.
무아를 실천하면 삶이 복되고 넉넉해진다.
달려오는 기차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아이를 구하다 발목이 잘린 어느 역무원의 안타깝지만 아름다운 일화다.
일본인 지하철 승객을 구하려고 철길로 뛰어들어 목숨을 잃은 어느 한국 유학생의 국경을 초월한
감동적인 행위는 바로 무아적인 실천행이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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