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0-5. 10-6. 10-7
10-5 돌아가 쉬는 곳
大德(대덕)아 ?且識取弄光影底人(이차식취농광영저인)하라 是諸佛之本源(시제불지본원)이요 一切處(일체처)가 是道流(시도류)의 歸舍處(귀사처)니라 是?四大色身(시이사대색신)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며 脾胃肝膽(비위간담)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며 虛空(허공)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나니 是什?(시십마)가 解說法聽法(해설법청법)고 是?目前歷歷底勿一箇形段孤明(시이목전역역저물일개형단고명)한 是這箇(시자개)가 解說法聽法(해설법청법)이니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便與祖佛不別(편여조불불별)이니라
“대덕아! 그대들은 또한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을 확실히 알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삶의 모습[一切處(일체처)]이 도를 닦는 이들의 돌아가 쉴 곳이다.
그대들의 사대[地(지), 水(수), 火(화), 風(풍)]로 된 이 육신은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脾胃肝膽(비위간담)도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허공도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설법을 하고 법을 들을 줄 아는가?
그것은 그대들 눈앞에 역력하고 뚜렷한 아무 형체도 없이 홀로 밝은 이것이 바로 설법을 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줄 안다면 곧 할아버지 부처님과 더불어 다르지 않느니라.”
(강의)
이 단락의 말씀은 일반적인 불교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즉, 사람의 육신은 마음의 그림자고 그 그림자를 조종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다.
이 마음만 알면 모든 수행자들은 이 삶 이대로[一切處(일체처)]가 집으로 돌아가
두 다리 뻗고 편안히 쉴 곳이라고 하신다.
다음의 구절이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특히 49재 법문을 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사대육신이 말을 하거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비위간담도 그렇다. 허공도 말을 하거나 듣지는 못한다.
다만 얼굴을 통해서 늘 출입하고 있으면서 아무런 흔적도 없는 그 한 물건이 말을 하고 말을 듣는다.
임제스님은 앞에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 했다.
대개 한 물건[一物(일물)]이라는 말도 많이 쓴다.
한 물건을 가장 멋있게 표현한 고려 말 함허(涵虛,1376-1433)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
무한한 과거에서 무한한 미래에까지 고금을 꿰뚫고 있다.
작은 먼지 속에 있으면서 온 천지를 다 에워싸고 있다.
안으로는 별의별 신묘불측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온갖 상황에 다 대처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주인이고 만법의 왕이다.
크고 넓고 멀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높고 또 높아서 짝할 자가 없다.
참으로 신기하다. 몸을 구부리고 펴는 그 사이에 있고 보고 듣는 그 자리에 있다.
참으로 멀고 아득하여라.
천지보다 먼저 있었지만 그 시작이 없고 천지보다 뒤에까지 남아 있어도 그 끝이 없다.
아, 이것이 공(空)인가. 유(有)인가. 내 그 까닭을 알 수 없도다.”
청허당 서산스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생긴 것도 아니고 일찍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름 지을 길 없고 그 모양 그릴 수도 없다.”
이어서 주해하시기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옛 사람이 게송하시기를 ‘옛 부처님 나기 전에 뚜렸하게 밝았도다.
석가도 오히려 몰랐거니 가섭존자가 어떻게 전할 수 있으랴
[古佛未生前(고불미생전) 凝然一相圓(응연일상원) 釋迦猶未會(석가유미회) 迦葉豈能傳(가섭기능전)].’
이것이 한 물건의 생긴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이름 지을 길 없고 그 모양 그릴 수 없는 이유이다.”
한 단락 모두 기억해 둬야할 내용이다.
특히 識取弄光影底人(식취농광영저인)을 유념하라.
참으로 만고의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법어다.
但一切時中(단일체시중)에 更莫間斷(갱막간단)하야 觸目皆是(촉목개시)언마는 祇爲情生智隔(지위정생지격)하고 想變體殊(상변체수)로다 所以輪廻三界(소이윤회삼계)하야 受種種苦(수종종고)하나니 若約山僧見處(약약산승견처)하면 無不甚深(무불심심)하며 無不解脫(무불해탈)이니라
다만 모든 시간 속에 전혀 간격이 없어서 눈으로 보는 것이 모두 다 그것이지만,
그러나 감정이 생겨서 지혜가 막히고 생각이 변하여 본바탕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계에 윤회하여 가지가지 고통을 받게 된다.
만약 산승의 견해로 본다면 깊고 깊은 경지가 아닌 것이 없고 해탈 아닌 것이 없다.
(강의)
이 한 물건은 모든 시간 속에서 일초의 간격도 없다.
모든 공간 속에서 조금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다.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이다.
실로 만목청산(滿目靑山)이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도(道)가 무엇입니까?”
“그대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방안에 사람이 있고, 병풍이 있고, 벽이 있는 것을 봅니다.”
“도가 그렇게 그대의 눈을 찌르고 있건만 그래도 모르겠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지금 무엇을 듣고 있는가?”
“지금 마침 비가 내려서 비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도가 그처럼 그대의 귀를 찌르고 있건만 그래도 모르겠는가?”라는 문답이 있다.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늘 그렇게 있건만 그것에 대한 이해가 없다.
설사 설명을 들어도 믿음이 없어서 모를 뿐이다.
여시불(汝是佛). 그대가 바로 부처라고 한들 믿지 못하니 어떻게 하겠는가.
임제스님은 보고 듣는 것을 그대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공연한 감정이 생겨서
지혜가 막히고 생각이 변하여 본바탕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 말은 통현장자의 화엄논에서 언급한바 있다.
산승의 견해에서 보면 모두가 불가사의 하고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이다.
모두가 대 해탈 대 자유다. 무량광명, 모량복덕, 신통묘용이다.
짧은 글에 구절구절이 빛나는 다이아몬드다.
一切時中(일체시중) 更莫間斷(갱막간단) 觸目皆是(촉목개시) 情生智隔(정생지격) 想變體殊(상변체수).
10-6 마음은 형상이 없다.
道流(도류)야 心法無形(심법무형)하야 通貫十方(통관시방)하야 在眼曰見(재안왈견)이며 在耳曰聞(재이왈문)이요 在鼻?香(재비후향)하고 在口談論(재구담론)하며 在手執捉(재수집착)하고 在足運奔(재족운분)이라 本是一精明(본시일정명)이 分爲六和合(분위육화합)이니 一心旣無(일심기무)하면 隨處解脫(수처해탈)이로다 山僧與?說(산승여마설)은 意在什?處(의재십마처)오 祇爲道流(지위도류)가 一切馳求心(일체치구심)을 不能歇(불능헐)하야 上他古人閑機境(상타고인한기경)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마음의 작용은 형상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눈에 있을 때는 본고, 귀에 있을 때는 들으며, 코에 있을 때는 냄새를 맡고,
입에 있을 때는 말을 하며, 손에 있을 때는 잡고, 발에 있을 때는 걸어 다닌다.
본래 이 하나의 정밀하고 밝은 것[一精明·一心(일청명.일심)]이 나누어서 우리 몸의 여섯 가지 부분과 화합하였을 뿐이다.
한 마음마저 없는 줄 알면 어디서든지 해탈이다.
산승의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다만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일체치구심(一切馳求心)을 쉬지 못하고
저 옛사람들의 부질없는 동작과 언어와 가리키는 것들[機境]을 숭상하고 매달리기 때문이다.”
(강의)
모든 사물에 있어서 형상이 있는 것은 장애가 많아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마음은 모양이나 형상이 없어서 어디든 자유롭다,
하나의 마음이 눈에 있으면 보는 작용을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 작용을 한다.
코에 있을 때는 냄새를 맡는다. 이와 같이 걸림이 없다.
본래 하나의 마음이지만 육근과 화합해서 일체가 있다.
삼라만상도 마음이 육근을 통해서 존재함을 안다.
그러므로 이 한 마음이 없으면 어디에 있든지 자유로운 해탈이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모든 수행자들이 밖을 향해서 구하는 마음을 쉬지 못하고 옛 사람들의 부질없는 말이나 행위들,
즉 기경(機境)들을 높이 받들고 숭상하여 그것이 무슨 실다운 법이나 되는 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꽃을 든 것이나, 가섭이 미소한 것이나, 구지화상이 손가락을 든 것이나,
할을 하고 방을 쓰는 일들을 무슨 대단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받들어 모신다.
또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의 말씀들을 귀중하게 여겨서 혹 흠이 갈까하여 애지 중지한다.
거기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으려고 머리를 처박는다.
그들은 사람들을 속이려고 한 것이 아닌데 사람들 스스로가 속고 있다.
기경(機境)이라는 말은 선가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또 중요한 말이다.
기(機)는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사실을 보고 듣고 겪으면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다.
사실이나 경지가 인격화, 또는 체(體)화 된 것이다. 경(境)은 밖에 있는 것이다.
보여주고 들려주고 경험하게 해주는 어떤 사실이다.
예컨대 세존이 꽃을 든 것은 경이다.
그리고 가섭이 미소한 것은 기다.
또 멀리 연기가 일어나는 것은 경이다.
연기를 보고 불이 있는 줄을 아는 것은 기다.
불자를 들거나 방을 쓰거나 할을 하거나 선문답을 던지거나 하는 따위는 모두가 경이다.
그런 사실에 따라 반응하는 것, 상대의 마음의 작용에 따라 표현하고 답하는 것은 모두 기다.
모든 선문답은 흔히 일기 일경 일언 일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기 일경 일언 일구에서 깨닫기를 도모하는 것은 마치 아무런 탈이 없는 살갗을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다.
또 미망의 경계에 깊이 빠져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따르고 받드는 것을 임제스님은 크게 경계하고 있다.
오늘의 공부는 心法無形(심법무형) 通貫十方(관통시방)이다.
道流(도류)야 取山僧見處(취산승견처)하면 坐斷報化佛頭(좌단보화불두)라 十地滿心(십지만심)은 猶如客作兒(우여객작아)요 等妙二覺(등묘이각)은 擔枷鎖漢(담가쇄한)이요 羅漢?支(나한벽지)는 猶如厠穢(유여측예)요 菩提涅槃(보리열반)은 如繫驢?(여계려궐)이니 何以如此(하이여차)오 祇爲道流不達三祇劫空(지위도류불달삼지겁공)일새 所以有此障?(소이유차장애)니라 若是眞正道人(약시진정도인)인댄 終不如是(종불여시)니 但能隨緣消舊業(단능수연소구업)하고 任運著衣裳(임운착의상)하야 要行卽行(요행즉행)하며 要坐卽坐(요좌즉좌)하야 無一念心希求佛果(무일념심희구불과)니 緣何如此(연하여차)오 古人云(고인운), 若欲作業求佛(약욕작업구불)이면 佛是生死大兆(불시생사대조)라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의 견해를 취할 것 같으면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를 앉은자리에서 끊는다.
십지보살[十地滿心]은 마치 식객과 같다.
등각, 묘각은 죄인으로서 칼을 쓰고 족쇄를 찬 것이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뒷간의 똥오줌과 같다.
보리와 열반은 당나귀를 매는 말뚝과 같다.
어째서 이러한가?
다만 도를 배우는 이들이 3 아승지겁이 공(空)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장애가 있는 것이다.
만약 진정한 도인(道人)이라면 마침내 이와 같지 않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구업(舊業)을 녹인다.
자유롭게 옷을 입고 가게 되면 가고 앉게 되면 앉아서 한 생각도 불과(佛果)를 바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업을 지어서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가 오히려 생사의 큰 징조가 된다.’고 하였다.”
(강의)
부처님의 설법은 활과 같이 우회하여 말씀하시고, 조사들의 설법은 활줄과 같이 직선으로 말씀하신다.
부처님은 그 표현이 아름답고 부드럽다.
그러나 조사들의 표현은 직설적이고 때로는 매정하고 비정하다. 혹독하다.
부처님이고 보살이고 전혀 안중에 없다.
보통 사람들은 종이에 불(佛)이라는 글자만 써져 있어도 그 종이를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그런 마음으로 신행생활을 하는 후손들은 때때로 임제스님의 말씀을 입에 담기가 민망할 때가 있다.
임제스님의 견해는 이렇다. 매우 특별하다.
경악할 일이며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를 일이다.
보신불, 화신불을 앉은 자리에서 여지없이 부정해 버리고,
보살로써 최고의 경지에 오른 십지보살을 천한 나그네, 식객, 노숙자라고 하였다.
등각(等覺) 묘각(妙覺)이 어떤 자리인가. 그들을 칼을 쓰고 족쇄를 찬 죄인이라 하였다.
아라한이나 독각(獨覺)을 똥오줌이라고 하였다.
보리 열반은 당나귀를 메어두는 말뚝이라고 하였다.
보살의 수행계위를 아예 부정하지만 경전에서 나열하고 있는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능엄경에는 57위를, 인왕경에는 51위를, 영락경에는 52위를, 화엄경에는 52위,
또는 41위를, 대품경에는 42위를, 혹은 57위를, 또는 60위를 설하고 있다.
모두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방편이기 때문에 그 설이 구구하다. 열면 많아지고 합하면 적어진다.
그러므로 임제스님의 혹독한 말씀을 시원한 청량수로 받아드려야 한다.
나는 오직 나일뿐이다.
장부는 스스로 하늘을 뚫는 기개가 있고 뜻이 있다.
부처님이 가신 길을 가지 않는다. 무위진인으로서 당당하게 살라는 뜻이다.
불보살의 멍에에서 시원스레 벗어나라는 뜻이다.
조사와 아라한 벽지불,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것도
모두가 본래로 자유로운 사람들을 옭아 묶는 올가미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그곳에 붙들려 사는가.
삼아승지겁을 닦아야 비로소 성불한다는 그 시간성이 본래로 공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말을 들을 줄 아는 그 사람이 부처고 조사라는 사실을 아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며 무슨 시간이 걸리겠는가.
알려고 하는 자기 자신이 곧 그 사람인 것을.
그래서 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살아도 부처님이다. 조사님이다.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인줄 알고 있으나 모르고 있으나 그대로 다이아몬드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만 이해하면 공부 끝이다. 일없는 사람이다.
인연 따라 살 뿐 특별히 애쓸 일이 없다[隨緣無作(수연무작)].
이제 그 헐떡거리는 마음 좀 쉬어라 쉬어.
자신이 지금 그대로 부처요 조사인데 무얼 그리 찾아 헤매는가.
참선을 하든지 간경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반드시 이 이치를 알고 해야 한다.
임제스님은 다시 양나라 보지(寶誌)화상의 대승찬(大乘讚)이라는 글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만약 업을 지어서 부처를 구하면 부처야 말로 생사의 큰 원인[大兆]이다”
업을 짓는다는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 참선을 하고 6바라밀을 닦고
간경, 기도, 염불 등등의 모든 수행이라는 행위들을 말한다.
그러한 일을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사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큰 원인이 될 뿐이다.
영가스님도 증도가(證道歌)에서 말씀하셨다.
부처를 구하기 위해서 공을 베푼다면 그 부처가 언제 이루어 질 것인가
[求佛施功早晩成(구불시공조만성)].
눈이 밝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씀 하신다.
부처란 이미 되어 있는 사람이다.
새로 만들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너 모습 그대로다.
배고프면 발을 먹고 피곤하면 쉴 줄 아는 바로 그 사람이다.
거기에서 지금 무엇이 부족한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삼아승지겁동안 고행(苦行)을 해서 구한들 무엇이겠는가.
뼈만 남은 석가의 고행상을 구하는가.
그 고행상이 부처인가. 부처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슬프면 울 줄 알고 기쁘면 기뻐할 줄 아는 그 사람이 부처님이다.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피곤하면 쉴 줄 아는 그 사람이 부처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 보이나 생명이 없는 언어의 유희에서 눈을 돌려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는 살아 있는 사람 부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인불사상(人佛思想)이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이 임제록은 불교의 제1 교과서이다.
조계종의 제1 소의경전(所依經典)이다. 성불의 지름길이다.
우리나라의 불교가 모두 임제스님의 법을 이은 불교이며
임제스님의 법손임을 입만 열면 자랑을 하면서 왜 이 임제스님의 가르침을 모르는가.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불교를.
이제 우리 한국의 불자들도 이러한 본래의 불교로 돌아갈 때이다.
임제스님의 사상으로 돌아가서 당당하게 임제스님의 법손임을 자랑할 때이다.
참으로 천고의 일서(一書)다.
오늘의 공부는 隨緣消舊業(수연소구업) 任運著衣裳(임운착의상) 要行卽行(요행즉행)
要坐卽坐(요좌즉좌) 若欲作業求佛(약욕작업구불) 佛是生死大兆(불시생사대조).
10-7
연야달다가 머리를 잃다
大德(대덕)아 時光可惜(시광가석)이어늘 祇擬傍家波波地(지의방가파파지)에 學禪學道(학선학도)하며
認名認句(인명인구)하며 求佛求祖(구불구조)하며 求善知識意度(구선지식의탁)이로다 莫錯(막착)하라
道流(도류)야 ?祇有一箇父母(이지유일개부모)어니 更求何物(갱구하물)고 ?自返照看(이자반조간)하라 古人云(고인운), 演若達多失却頭(연야달야실각두)라가 求心歇處卽無事(구심헐처즉무사)로다
“대덕아! 시간을 아껴야 하거늘, 다만 옆길로만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선(禪)을 배우고 도(道)를 배운다고 하는구나.
이름과 글귀를 잘못 알고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한다고 하는구나.
선지식을 찾아가서 생각으로만 헤아리는 구나. 그렇게 잘못 알지 말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에게 다만 일개 부모[根本]가 있다.
다시 무슨 물건을 구하는가? 그대들 스스로 돌이켜 보라.
옛사람이 이르기를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머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다가
다시 구하는 마음이 쉰 그 순간에 아무런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강의)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하고 참선을 한다고 하면서 공연히 옆길로만 치닫는다.
책자를 통해서나 남의 이야기를 듣고 부처니 조사니 보살이니 하는 것을 찾는다.
그들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나름대로 헤아리고 사량 분별한다.
그러면서 아까운 시간들을 다 써 버린다.
인생은 짧다.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잠간 사이에 지나간다.
사람의 몸 만나기 어렵고 불법 공부하기 더욱 어렵다.
이렇게 어려운 것을 다행히 만났다.
천만금을 주고도 못 얻을 불교를 만났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제발 그릇 알지 말라. 우리들에게는 모두 우리들의 근본 마음자리가 있다.
그것을 버리고 다시 무슨 물건을 구하는가.
부디 잘 생각해 보라.
능엄경(楞嚴經)에서 연야달다가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잘못 생각하여 거울 안에는
사람의 머리가 있는데 자신의 머리는 어디 있는가? 라고 하여 자신의 머리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대의 머리는 그대로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갑자기 자신의 머리는 잃어버린 적이 없고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순간 머리를 찾으려는 마음이 쉬어버렸다. 더 이상 아무런 일이 없어졌다.
머리가 있는데 머리를 다시 찾을 일이 있겠는가.
쓸데없는 짓 그만들하고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라.
성불한다는 일이 그와 같은 이치이다.
이것이 성불의 지름길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진짜 불교공부다.
두상안두(頭上安頭)라는 말이 있다.
머리 위에 다시 또 머리를 하나 올려 둔다는 뜻이다.
머리를 두 개 포개어 달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어떻게 되겠는가.
틀림없이 요귀(妖鬼)이거나 아니면 있을 수도 없는 병신이다.
우리들은 이미 완전무결한 부처님인데 다시 부처를 찾아 헤매는 일이 그와 같다는 말이다.
속 터질 일이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이 이치는 수 억 만 번을 강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불교고, 공짜불교다.
돈도 들지 않으며 노력도 들지 않는다.
정말 바르고 좋은 가르침은 이렇게 쉽고 간단하고 편안하다.
그래서 과거의 모든 눈 밝은 선지식들은 전부 임제스님의 가르침과 그 사상을 받들고 숭상한다.
법주사에 있는 벽암(碧巖,1575-1660)스님의 비문에 “태고(太古,1301-1382)스님이 중국에 들어가서
부처님의 종지를 얻어서 우리나라에 돌아와 전한 것이 그 법이 벽암스님에게까지
여덟 번째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임제스님의 바른 종통(宗統)이다.”라고 하였다.
또 편양(鞭羊,1581-1644)스님의 어록에 “임제스님의 전통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이라야 근본과 연원이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태고스님은 중국에 들어가서 임제스님의 법을 이은
석옥(石屋,1272-1352)스님의 법을 잇고 와서 다시 환암(幻庵,1320-1392)스님에게 전하였다.
환암스님은 다시 구곡(龜谷)스님에게 전하고 구곡스님은 다시 정심(正心)스님에게 전하고 정심스님은 다시 운운”하였다.
또 대흥사에 있는 서산 청허(西山淸虛,1520-1604)스님의 비문에
“임제스님이 열여덟 번째 법을 전하여 석옥스님에게 왔고 태고스님은 석옥스님에게 전해 받았다.
이로부터 여섯 번 전해져서 우리 스님에게 전해졌다.
그 법의 원류가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전거는 부지기수다.
전거를 모두 소개하려면 따로 책을 한 권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들의 법손이 아닌가. 그들이 물려준 불교를 하고 있지 않은가.
배불숭유(排佛崇儒)의 피눈물 나는 아픈 역사를 딛고 물려준 것이다.
한국불교의 전통이 이와 같은데 그 정신은 모두 어디 갔는가.
하루 빨리 바르고 전통이 있는 정통(正統)불교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반드시
“빨리 사바에 돌아오셔서 임제문중에서 길이 인천의 안목을 지으소서.”라고 간절히 축원한다.
오늘의 공부는 ?自返照看(이자반조간). 演若達多失却頭(연야달다실각두) 求心歇處卽無事(구심헐처즉무사).
大德(대덕)아 且要平常(차요평상)인댄 莫作模樣(막작모양)하라 有一般不識好惡禿奴(유일반불식호오독노)하야 便卽見神見鬼(편즉견신견귀)하며 指東劃西(지동획서)하며 好晴好雨(호청호우)하나니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盡須抵債(진수저채)하야 向閻老前(향염노전)하야 呑熱鐵丸有日(탄열철환유일)이니라 好人家男女(호인가남녀)가 被這一般野狐精魅所著(피자일반야호정매소착)하야 便卽捏怪(편즉날괴)하니 ?屢生(할루생)이여 索飯錢有日在(색반전유일재)로다
“대덕들이여! 평상 생활 그대로이기를 바란다면 다른 모양을 짓지 말라.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머리 깎은 노예들이 있다.
그들은 문득 귀신을 보고 도깨비를 보며,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구분하며,
맑은 것이 좋으니, 비 오는 것이 좋으니 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모두 빚을 지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뜨거운 쇳덩이를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
공연히 아무 탈 없는 집안의 남녀들에게 일종의 여우와 도깨비의 정령이 붙어 있다.
마치 멀쩡한 눈을 비벼서 괴상망측하게 허공에서 헛꽃을 보는 일과 같이 되었다.
이 눈멀고 어리석은 것들아. 밥값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강의)
평상심이 도라고 했다. 도는 평상의 삶인 것이다.
그런 도를 위해서라면 아무런 조작이나 인위적인 꾸밈을 짓지 말라.
조작이나 꾸밈은 다 가짜다. 진실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사는 일 밖에 달리 무엇이 있는가.
도니 진리니 불법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이대로 사람이 사는 일이다. 평상의 삶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머리 깍은 노예들이 있다.
그들은 이상한 불교를 배워가지고 있지도 않은 귀신이나 도깨비들을 보고 그것에 노예가 되어 있다.
자신을 저버리고 부처를 말하고 조사를 말하는 이들도 다 그와 같다.
또 불교를 말하면서 동쪽이 어떠니 서쪽이 어떠니 하는 일도 있다.
그리고 맑은 날 비오는 날을 운운하는 괴상망측한 사람들도 많다.
관세음보살이 영험이 있느니, 지장보살이 영험이 있느니 한다.
무슨 산이 영험이 있느니, 무슨 섬이 영험이 있느니 한다.
이 진언이 좋으니, 저 다라니가 좋으니, 참선이 좋으니, 염불이 좋으니 한다.
간화선이 좋으니 묵조선이 좋으니 한다.
이 스님이 큰스님이니, 저 스님이 큰 도인이니 한다.
완전히 도깨비에 홀린 삶이다.
불교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라.
아니면 불교를 그만 두어라. 불교는 없다.
차라리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라.
사람의 일상의 삶을 버리고, 또 당당한 자기 자신을 버리고
밖으로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임제스님은 그와 같다고 본다.
이런 이들은 모두 염라대왕 앞에 가서 뜨거운 쇳덩이를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
공연히 아무 탈 없는 집안의 사람들에게 여우나 도깨비들의 정령이 붙어서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공연히 눈을 비벼서 허공에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것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본다.
야, 어리석고 눈 먼 놈들아, 시주들의 밥값이나 갚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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