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3-1. 13-2. 13-3. 13-4

수선님 2018. 1. 21. 12:24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3-1. 13-2. 13-3. 13-4

 

13-1 수처작주(隨處作主)하라

師示衆云(사시종운), 道流(도류)야 佛法無用功處(불법무용공처)요 祇是平常無事(지시평상무사) ?屎送尿(아시송요)하며 著衣喫飯(착의긱반)하며 困來卽臥(곤래즉와)라 愚人笑我(우인소아)나 智乃知焉(지내지언)이니라 古人云(고인운), 向外作工夫(향외작공부)는 總是癡頑漢(총시치완한)이라하니라

 

임제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불법은 애써 공을 드려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상대로 아무 일 없는 것이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이는 알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신 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고 고집스런 놈들이다.’ 라고 하였다.”

 

(강의)

우리나라 스님들은 임제가풍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사람이 죽었을 때

영결사나 조사나 추모사를 하는 자리에서도을 한다.

임제가풍을 쓰고 싶어 몸살이 난 사람들이다.

몸살이 나지 않고서야 간절히 애도를 해야 하는 자리에서 그 같은을 할 수 있겠는가.

큰스님들의 영결식에 가서 보면 얼마든지 만나는 광경이다.

그런데 그 외의 불교에는 실로 거품이 너무 많다.


위와 같은 임제스님의 올곧은 가르침은 어디 갔는가.

위의 글에서 불교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불교는 애써서 공을 드려가며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상대로 일없이 인연 따라 살면 된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제는 공연히 쉬운 불교를 어렵게 만들지 말고

정통 불교로 돌아가서 이와 같이 쉽게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불교의 지름길이다. 성불의 지름길이다.

옛 사람도자신 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고 고집스런 놈들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불교의 거품을 모두 걷어내고 바른 불교 쉬운 불교 간단한 불교로 가야한다.

참으로 옛 것이 새로운 것이다.


한국불교가 기왕 임제스님의 법을 이어 받았다면

이 임제록으로써 한국불교 개혁의 선언서로 삼았으면 한다.

기억해 둬야 할 구절이다.

佛法無用功處(불법무용공처) 祇是平常無事(지시평상무사).

불교를 아주 쉽고 편안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爾且隨處作主(이차수처작주)하면 立處皆眞(입처개진)하야 境來回換不得(경래회환부득)하야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종유종래습기오무간업)하야도 自爲解脫大海(자위해탈대해)니라 今時學者(금시학자)는 總不識法(총불식법)하고 猶如觸鼻羊(유여촉비양)이 逢著物安在口裏(봉착물안재구리)하야 奴郞不辨(노랑불변)하며 賓主不分(빈주불분)이라 如是之流(여시지류)는 邪心入道(사심입도)하야 鬧處卽入(요처즉입)이니 不得名爲眞出家人(부득명위진출가인)이요 正是眞俗家人(정시진속가인)이니라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그대로가 모두 참된 것이 된다.

어떤 경계가 다가온다 하여도 끄달리지 않을 것이다.

설령 묵은 습기와 무간 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죄업이 있다 하더라도

저절로 해탈의 큰 바다로 변할 것이다.

요즈음 공부하는 이들은 모두들 법을 모른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종과 주인을 가리지 못하며, 손님인지 주인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도[佛敎(불교)]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이해득실과 시시비비의 번잡스런 일에 곧바로 빠져버리니

진정한 출가인 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

그야말로 바로 속 된 사람[俗人(속인)]이다.”

 

(강의)

임제록에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구절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구절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상황에 끄달리지 말고, 주체적 인간으로 살면

무엇을 하든 그 하는 일과 그 있는 자리가 모두 진실한 진리의 삶이다.

상황과 처지에 끌려 다니면서 자신을 잊어버리지 말고, 상황과 처지의 주체적 역할을 하라.

어떤 일도 주체적 역할을 할 때 그 일은 곧 온전한 내 일이고, 온전한 나의 삶이다.

이것이 철저히 살고 철저히 죽는 전기생 전기사(全機生 全機死),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삶이다.


실로 천고의 명언이다. 이 한마디로 임제는 저 넓은 태평양이고, 허공이다.

수미산 꼭대기고, 히말라야 정상이다. 비상비비상천이고, 수 만 광년 저 바깥이다.

그러나 백보 끌어내려서 이렇게 해석하면 어떨까.

어디에 가건 지금 있는 그 곳이 바로 자신의 자리다.

그러므로 현재의 위치가 아닌,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기를 바라고 꿈꾸지 말라.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어떤 상황이든 만족하고 행복하라.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현재 자신이 있는 곳에 초점을 맞추어 행복을 누리라.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추어 언제나 배고픈 아귀가 되지 말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만족하고 넉넉하게 부자로 살아라.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 되면 설사 옛날에 익힌 업장과 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즉 부모를 죽인 일나, 성인을 죽인 일이나, 부처님의 몸을 헤치거나,

청정한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거나 하는 따위의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저절로 해탈의 대해에 노니는 것이 된다.

설사 인간이 저질을 수 없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대로 해탈이라는 뜻이다.

어떤 상황에 있든 주인이 되라[隨處作主(수처작주)].라는 말은

타인으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든 자신은 거기에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타인이 나를 때리고 욕하고 비방하고 모함하고 저주하고 질투하고 내 것을 빼앗아 가고 큰 손해를 입히고 훼방하여

큰 곤경에 처하게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이고 자신은 그것에 동요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는 것,

타인이 하는 일에 끌려가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자신의 본심으로 주체자가 되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다 행복하다.

그것이 진정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자신에게 불이익과 손해가 돌아오고 비방이 돌아오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것을 다 받아드리고 그것에 따라 반응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손님에게 맛난 음식을 잘 차려 대접하더라도[비방과 손해를 가하더라도]

손님이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그 음식은 결국 음식을 차려 대접한 사람에게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런데 요즘 공부하는 이들은 이러한 마음의 법을 알지 못한다.

마치 양이 풀이고 나무고 가시고 간에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것처럼 아무런 말이나 다 받아드린다.

삿된 말과 마군이의 말을 잘도 받아드린다.

비방과 손해와 때리고 욕하는 일들을 잘도 받아드린다. 분별력이 전혀 없다.

방편과 진실을 전혀 가리지 못한다. 정법과 사법을 전혀 모른다.

그 말 많은 불교를 잘 변별해서 이제는 거품을 걷어내고 적확한 불교를 공부할 때다.


진정견해가 참으로 요구되는 때다.

좀 더 부연해서 말한다면 이런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불교에 들어와 있다.

이해득실과 시시비비 등등 정치적이거나 불교 외적인 것들에 열을 올리고 빠져들어 가위 박사가 되어 있다.

불교 외적인 일들을 열거하기로 하면 끝이 없다.

정치문제 사회문제, 경제문제 환경문제, 명성과 이익,

학위나 운동이나, 예술이나 문필이나, 먹거리 마실거리 등등 종류도 너무 많다.


이런 것들에 정신이 빠져 있으면서 불교를 운위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과 같다.

임제스님은 이런 이들을참다운 출가인 이라 할 수 없다.

참으로 속된 사람이며 저질이며 속물 그 자체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높은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또는 영웅호걸의 큰 그릇이라 하더라도 불법지견(佛法知見)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13-2 참다운 출가인

夫出家者(부출가자)는 須辨得平常眞正見解(수변득평상진정견해)하야 辨佛辨魔(변불변마)하며 辨眞辨僞(변진변위)하며 辨凡辨聖(변범변성)이니 若如是辨得(약여시변득)하면 名眞出家(명진출가)니라 若魔佛不辨(약마불불변)하면 正是出一家入一家(정시출입가입일가)니 喚作造業衆生(환작조업중생)이요 未得名爲眞出家人이(미득명위진출가인)니라 祇如今(지여금)에 有一箇佛魔(유일개불마)하야 同體不分(동체불분)흠이 如水乳合(여수유합)이라 鵝王喫乳(아왕긱유)요 如明眼道流(여명안도류)는 魔佛俱打(마불구타)하나니 ?若愛聖憎凡(이약애성증범)하면 生死海裏浮沈(생사해리부침)이니라

 

대저 출가한 사람은 모름지기 평상 그대로의 참되고 바른 안목을 잘 가려내야 한다.

그리하여 부처와 마군을 구분하고 참됨과 거짓을 구분하며 범부와 성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이 가려낼 수 있다면 참된 출가라고 할 것이지만

부처와 마군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저 한 집에서 나와 또 다른 집으로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이는 업을 짓는 중생이지 진정한 출가인 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한 개의 부처인 마군이가 있어서 같은 몸이 되어 나눌 수 없는 것이 마치 물과 우유가 섞여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위의 왕은 우유만 먹는다.

눈 밝은 도인이라면 마군과 부처를 함께 쳐버린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의 바다에 떴다 잠겼다 할 것이다.”

 

(강의)

출가하여 불문(佛門)에 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특별한 조작이 없는 평상 그대로의 참되고 바른 견해를 가려내는 일이다.

또 무엇이 부처며 무엇이 마군이지도 가려내야 한다.

진실과 거짓, 범부와 성인도 가려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능력이 없다면 출가란 단지 한 집에서 나와 다시 한 집으로 들어가는 일에 불과하다.


업장을 소멸하려 와서 다시 업장을 짓는 중생일 뿐이다.

일개의 부처인 마군이[佛魔]가 있다고 한다.

때로는 부처라고도 하고 때로는 중생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부처인 마군이라고 하였다.

부처인 아귀도 가능하고 부처인 아수라도 가능하다.

인간은 본래로 수많은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황을 따라서 수시로 그 하는 짓이 다르다.


하지만 눈이 밝은 사란은 부처도 마군도 한꺼번에 쳐 없앤다.

그 사람 앞에는 성인도 범부도 존재할 수 없다.

범부와 성인을 나눠놓고 싫어하고 좋아한다면 생사의 바다에 출몰하는 것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 안에 중생이 새롭게 새롭게 부처를 짓고,

중생의 마음 안에 부처님이 순간순간 진리를 깨닫는다.”라는 말도 있다.

 

 

13-3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 如何是佛魔(여하시불마)오 師云(사운), ?一念心疑處(이일념심의처)가 是箇魔(시개마) ?若達得萬法無生(이약달득만법무생)하면 心如幻化(심여환화)하야 更無一塵一法(갱무일진일법)하야 處處淸淨是佛(처처청정시불)이니라 然佛與魔(연불여마)는 是染淨二境(시염정이경)이라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無佛無衆生(무불무중생)하며 無古無今(무고무금)하야 得者便得(득자편득)하야 不歷時節(불역시절)이요 無修無證(무수무증)하며 無得無失(무득무실)하야 一切時中(일체시중)에 更無別法(갱무별법)하니 設有一法過此者(설유일법과차자)라도 我說如夢如化(아설여몽여화)하노니 山僧所說(산승소설)이 皆是(개시)니라

 

무엇이 부처인 마군입니까?”

그대의 의심하는 그 한 생각이 바로 마군이다.

그대가 만약 만 법이 본래 태어남이 없는 이치[萬法無生(만법무생)]를 통달하면 마음은 환영과 같아지리라.

다시는 한 티끌 한 법도 없어서 어딜 가나 청정하리니 이것이 부처다.

그러나 부처와 마군이란 깨끗함과 더러움의 두 가지 경계다.

산승의 견해에 의한다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어서 얻을 것은 바로 얻는다.

오랜 세월을 거치지 않는다.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어서 모든 시간 속에서 더 이상 다른 법은 없다.

설사 이보다 더 나은 법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은 꿈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산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이것이다.”

 

(강의)

흔히 하는 말로는한 생각 의혹이 일어나면 곧 마군이다.

그리고 일체 삼라만상이 본래로 생멸이 없는 이치를 알아서 마음이 환화(幻化)와 같이 되어,

먼지 하나 일 하나 없이 텅 비어 버리면 이것이 부처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임제스님의 견해에 의한다면 부처도 중생도 없다.

예도 지금도 없다. 만약 얻을 것이 있다면 곧 바로 얻는다.

시간은 필요치 않다. 노력도 필요치 않다.


참선이니 간경이니 기도니 주력이니 육도만행이니 하는 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설사 그러한 것을 통해서 얻었다 손치더라도 옛날 그대로의 그 사람일 뿐이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없다. 본래 그 사람이다.

만약 달라진다면 그것은 머리위에 머리를 하나 더 얻는 것이다.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낸 것이다.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산승이 할 말은 이것이 전부다.

 

 

13-4 어느 곳에도 막히지 않는다

道流(도류)야 卽今目前孤明歷歷地聽者(즉금목전고명역역지청자)가 此人處處不滯(차인처처불체)하고 通貫十方(통관시방)하야 三界自在(삼계자재)하야 入一切境差別(입일체경차별)호되 不能回換(불능회환)하나니 一刹那間(일찰나간)에 透入法界(투입법계)하야 逢佛說佛(봉불설불)하며 逢祖說祖(봉조설조)하며 逢羅漢說羅漢(봉나한설나한)하며 逢餓鬼說餓鬼(봉아귀설아귀)하야 向一切處(향일체처)하야 游履國土(유리국토)하야 敎化衆生(교화중생)호되 未曾離一念(미증리일념)하고 隨處淸淨(수처청정)하야 光透十方(광투시방)하야 萬法一如(만법일여)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바로 지금 눈앞에서 호젓이 밝고 역력하게 듣고 있는 이 사람은

어디를 가나 막힘이 없고 시방세계를 꿰뚫어 삼계에 자유 자재한다.

온갖 차별된 경계에 들어가도 그 경계에 휘말리지 않는다.

한 찰나 사이에 법계를 뚫고 들어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말하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말하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말하고 아귀를 만나면 아귀를 말한다.

모든 국토를 다니며 중생들을 교화하지만 일찍이 일념을 떠난 적이 없다.

가는 곳마다 청정하여 그 빛이 시방법계에 사무쳐서 만법이 한결같다.”

 

(강의)

천고(千古)에 다시없을 법문이다.

그러나 무슨 특별하고 기상천한 일을 밝힌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들 평상사이다.

모든 사람들이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꾸밈없고 조작 없는 삶의 모습 그대로 드러낸 말이다.

지금 우리들 눈앞에 호젓이 밝고 역력하게 듣고 있는 이 사람, 천지는 오직 이 한 사람뿐이다.


만물도 오직 이 한사람 뿐 이다.

이 한사람이 능히 천지가 되고, 이 한 사람이 능히 만물이 된다.

그러면서 이 한 사람은 천지 삼라만상에 들어가 뒤섞이거나 휘말리지 않는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주인이요, 만법의 왕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말하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말하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말하고 아귀를 만나면 아귀를 말한다.


능대 능소 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한 생각을 떠난 적이 없다.

이것이 우리들 보통 사람들의 일상사다.

모두들 그렇게 살고 있는 모습들이다.

通貫十方(통관시방) 三界自在(삼계자재)는 우리들의 마음을 설명한 것이다.

중요하다.


출처 : 제이제이
글쓴이 : 제이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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