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

[스크랩] 5.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

수선님 2018. 1. 14. 13:35

5.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文殊師利, Majur)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 웃어른[上人]을 저는 상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실상(實相)에 깊이 통달하고, 진리의 요지를 훌륭하게 설하며, 변재에 걸림이 없고, 지혜는 막힘이 없습니다. 모든 보살에게 필요한 작법[法式]을 모두 알고 있으며, 모든 부처님의 비밀스러운 공덕[秘藏]을 모두 다 간직하고 있으며, 온갖 마군을 항복시키고 신통력을 마음대로 부리며, 그 지혜와 방편을 모두 원만히 이루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거룩한 뜻[聖旨]을 받들어 그를 찾아가 문병하겠습니다."


이에 모인 많은 보살과 대제자들·제석천·범천(梵天)·사천왕(四天王) 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이제 두 보살[大士]이신 문수사리와 유마힐이 함께 이야기하면 반드시 묘법을 설할 것이다.'

  

이 때에 8천의 보살들과 5백의 성문(聲聞)들, 백천의 천인들 모두가 뒤따라가고자 원하였다. 그래서 문수사리는 수많은 보살과 대제자와 천인들이 공경하게 둘러싼 가운데 비야리 대성으로 들어갔다.


장자 유마힐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지금 문수사리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고 있으니, 신력(神力)으로 방을 깨끗이 비워야겠다.'

  

그리고는 방안에 있는 것을 치우고 시자(侍者)들까지도 내보내고, 텅 빈 방안에는 오직 하나의 침상(寢床)만을 놓아두고, 앓는 몸을 눕혔다. 문수사리가 그 집에 들어가자 방안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고, 뎅그라니 침상 하나만 있는 것이 보였다.


유마힐은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문수사리여. 온다고 하는 상(相)이 없이 왔고, 본다고 하는 상이 없이 보았습니다."

문수사리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거사님. 만약 와 버렸다면 다시는 오지 않고, 만약 가 버렸다면 다시는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온다고 하지만 어디로부터 온 곳이 없고, 간다고 해도 어디로든 가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보이는 것은 또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 이런 이야기는 그만두겠습니다.


거사님, 이 병은 어찌 견딜만 하십니까? 치료가 되어 병이 덜함이 있습니까, 더하지는 않았습니까? 세존께서는 매우 걱정하시며 문병하라 저를 보내셨습니다. 거사님, 이 병은 무엇 때문에 생겼으며, 또 얼마나 오래되었고,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겠습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어리석음[痴]과 탐심[有愛]으로부터 나의 병은 생겼습니다. 일체 중생이 병들어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약 일체 중생의 병이 사라진다면 그 때 나의 병도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生死)에 들어섰으니, 생사가 있는 곳에 병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중생이 병에서 떠난다면 보살도 병이 없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장자(長者)에게 외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병에 걸리면 그 부모도 병을 앓고, 만약 아들의 병이 나으면 부모도 낫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을 사랑하기를 내 자식 대하듯 합니다. 중생이 병을 앓으면, 보살도 병을 앓으며,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의 병도 낫습니다."

  

유마힐이 또 말했다.

"이 병이 무엇으로 인하여 생겨났느냐면, 보살이 병든 것은 드넓은 자비[大悲]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거사님, 이 방은 어째서 텅 비어 있으며, 시자도 없습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모든 부처님의 불국토도 모두 공합니다."

  

또 물었다.

"무엇을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공(空)하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공(空)하다고 합니까?"

"공을 분별할 수 없기[無分別] 때문에 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까?"

"분별하는 것도 공합니다."

  

"그렇다면 공은 어디서 구해야만 합니까?"

"그릇된 62견(見)에서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62견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모든 부처님들께서 해탈하신 곳에서 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부처님들의 해탈은 어디서 구해야만 합니까?"

"일체 중생의 마음가짐[心行]에서 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 그대는 왜 시자가 없느냐고 물었지만, 모든 마군과 온갖 외도들이 모두가 나의 시자입니다. 왜냐하면, 온갖 마군들은 생사를 좋아하지만,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않고, 외도는 여러 가지 그릇된 견해를 좋아하지만, 보살은 이 그릇된 견해에 동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수사리가 말했다.

"거사님의 병세는 어떤 상(相)이 있습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나의 병은 병상이 없으므로[無形]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병은 몸과 관계된 병입니까, 아니면 마음과 관계된 병입니까?"

"몸과는 관계된 병이 아니니, 몸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과 관계된 병도 아니니, 마음은 허깨비[幻]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地)·수(水)·화(火)·풍(風) 4대(大)에서 어느 것이 병든 것입니까?"

"이 병은 지대(地大)의 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대를 떠나서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수대·화대·풍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병은 4대로부터 생기며, 중생에게 이러한 병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도 병든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물었다.

"보살은 병든 보살을 어떻게 위로해야만 합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몸은 무상하다고 설하여도 그 몸을 싫어하고 버리도록[厭離] 설하지 않고, 몸에는 괴로움이 있다고 설하여도 열반만 좋아하도록 설하지 않으며, 이 몸은 무아(無我)라고 설하여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 것을 설하고, 이 몸은 공[空寂]하다 설하여도 언제까지나 영원토록 공하다[畢竟寂滅]고 설하지는 않습니다. 전에 범한 죄를 뉘우치도록 설하여도 먼 과거에 몰입하라고는 설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병을 헤아려 남의 병을 마음 아파하고, 과거 무수겁(無數劫)에 걸친 괴로움을 알고서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마음먹습니다. (자신의 병을 헤아려) 지난날 닦은 공덕을 생각하며, 바른 생활을 염원합니다. 근심과 괴로움이 생기지 않도록 해서 항상 정진하는 마음을 내며, 훌륭한 의왕(醫王)이 되어서 온갖 중생의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발원합니다. 보살은 이같이 병든 보살을 위로하고 기쁨에 넘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말했다.

"거사님, 병든 보살은 어떻게 해서 그 마음을 다스리고 항복 받아야[調伏-조복] 합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병든 보살은 반드시 이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이 병은 모두가 전생의 망상(妄想)·전도(顚倒)·여러 가지 번뇌로부터 생긴 것이지 (나의 몸에는 병을 앓을 만한) 실체로서의 존재[實法]는 없다는데, 어떻게 병이 걸렸단 말인가? 왜냐하면, 이 몸은 4대(四大)가 결합한 것이므로 몸이라고 임시로 이름[假名]하였을 뿐이지, 이 4대에 주인[主]은 없고, 또한 몸에는 나[我]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이 병이 생기는 것은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집착[著我]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미 이같이 병의 근본을 알았으니, 곧 나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我想]도, 중생이라는 것에 대한 잘못된 생각[衆生想]도 없애 버리고, 물질이라는 생각[法想]을 일으켜야겠구나.'(아상, 중생상, 법상)


또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몸은 수많은 물질적인 것[法]이 합쳐져 이루어져 있다. 생겨날 때에는 다만 물질적인 것만이 생기고, 멸할 때에도 물질적인 것만이 멸한다. 또 이 물질적인 것(에는 마음이 없으므로) 서로 아는 일도 없으며, 생할 때에도 내가 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멸할 때에도 내가 멸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병든 보살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생각[法想]을 떠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생각도 그릇된 집착[顚倒]이다. 이 그릇된 집착이야말로 마음의 커다란 병이니,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어떠한 것을 떠난다 하는가? 그것은 나라고 하는 것과 내 것[我所]이라는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라는 것과 내 것이라는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가? 그것은 두 개의 (상대적인) 법(法)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두 개의 법으로부터 떠나는 것인가? 그것은 주관[內]·객관[外]의 온갖 존재를 마음에 두지 않고 평등한 마음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평등인가? 나[我]와 열반(涅槃)과 함께 평등하다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라는 것과 열반의 둘은 모두가 자성(自性, svabha)이 공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공하다 하는가? 다만 이름과 문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이 같은 두 가지 것[法]은 변함이 없는 실체성[決定性]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평등함을 얻으면 다른 병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공한 병[空病]만이 남지만, 이 공(空)과 병(病)도 또한 공인 것이다.'


이 앓고 있는 보살은 (이미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感受)하는 일이 없지만, (중생을 위하여) 온갖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하며, 또 부처님의 모든 공덕[佛法]을 아직 다 갖추지 않고, 또 모든 감수작용[受]을 없애 버리지 않고서 열반을 증득해야 합니다. 설령 자기의 몸이 괴로움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죄의 과보로) 괴로운 삶의 길에 떨어져 있는 중생[惡趣衆生]들을 생각하고 무한한 자비심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미 (괴로움을) 조복하였으므로, 일체 중생들의 고통도 조복해야만 한다.' 다만 그 병은 제거하지만 물질적인 것을 제거하지 않으며, 병의 근원을 끊어 없애기 위하여 이를 가르쳐 이끌어야 하니, 무엇을 병의 근원이라고 하는가 하면, 대상을 따라 마음이 일어나는 것[攀緣]이니, 마음이 대상을 따라 일어나면, 곧 병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마음이 일어나는 대상으로 삼는가? 삼계를 대상으로 삼습니다. 


어떻게 이 마음이 일어나는 대상을 끊습니까? 그것은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아야[無所有] 합니다. 만약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으면, 그 때 마음은 대상을 따라서 일어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요? 상대적인 생각[二見]을 떠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상대적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인가요? 주관을 보는 견해[內見], 객관을 보는 견해[外見]이니, (이들을 떠나는 것이)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無所得]입니다.

  

문수사리여, 이것을 앓고 있는 보살이 그의 마음을 조복한다고 하는 것이며, 또 노·병·사의 괴로움을 끊어 없앤다고 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깨달음[菩提]입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미 닦고 다스렸던 것이 지혜로운 이익이 되지 못합니다. 비유하면 원수와 싸워 이겨야만 용사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나와 남의) 늙음과 병과 죽음을 함께 없애는 자를 보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앓고 있는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이 병이 진실한 것도,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닌 것과 같이, 중생의 병도 진실한 것도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관할 때에 모든 중생들에 대해서 애욕에 물든 마음[愛見]으로 자비심을 일으켰다면 곧 그러한 생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밖으로부터 주어진 번뇌[客塵煩惱]를 끊어 없애고 자비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애욕으로 물든 자비[愛見悲]에는 생사에 피곤해 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니, 만약 이 (애욕에 물든 마음을) 떠날 수가 있으면 피곤해 하고 싫어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어떠한 곳에 태어나더라도 애욕에 물든 마음[愛見]에 덮이지 않을 것입니다. 태어나는 곳에 속박되는 일이 없고, 중생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하고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처럼, 만약에 자기가 (번뇌에) 결박되어 있으면서 남의 결박을 풀어 준다는 것,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결박되어 있지 않아야 남의 결박을 풀어 줄 수 있는 것, 이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반드시 (번뇌의) 결박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속박이라 하며, 무엇을 해탈이라고 합니까? 참선의 기쁨[禪味]에 집착하는 것이 보살의 속박[無方便慧縛]이요, 훌륭한 방편을 가지고 (참선의 기쁨을 맛보며) 사는 것이 보살의 해탈입니다. 또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이 있는 지혜는 해탈입니다. 지혜가 없는 방편은 속박이며, 지혜가 있는 방편은 해탈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라고 합니까? 보살이 애욕에 물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의 (세 가지 해탈문)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조복하는 것을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방편을 갖춘 지혜의 해탈[有方便慧解]이라고 합니까?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공·무상·무작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스스로를 조복시키지만 피곤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음을 방편을 갖춘 지혜의 해탈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지혜가 없는 방편의 속박[無慧方便縛]이라고 합니까? 보살이 탐욕과 분노와 사견(邪見) 등 온갖 번뇌에 얽혀 있으면서 많은 선근(善根)을 심고자 하는 것을 지혜가 없는 방편의 속박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지혜를 갖춘 방편의 해탈[有慧方便解]이라 합니까? 탐욕과 분노와 사견 등 온갖 번뇌를 떠나서 많은 선근을 심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회향(廻向)하는 것을 지혜를 갖춘 방편의 해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수사리여, 저 병을 앓고 있는 보살은 반드시 제법(諸法)에 대해 이같이 바르게 관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몸은 무상하며, 괴로움이며, 공하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아는 없다[非我]고 관하는 것, 이를 지혜라고 이름합니다. 이 몸은 병들었어도 항상 생사 속에 있으면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며, 피곤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것, 이를 방편이 라고 합니다. 또 자기 몸을 관하기를, 몸에서 병이 떠나지 않고 병이 몸을 떠나지 않아 이 병이나 이 몸이 새로 생긴 것도, 오래 묵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관하는 것, 이를 지혜라고 이름합니다. 설령 몸은 병들었어도 영원히 멸하지 않는 것, 이를 방편이라고 합니다.'


문수사리여, 병을 앓고 있는 보살은 마땅히 이같이 그 마음을 조복해야 합니다.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마음을 다스리지 않겠다는 마음[不調伏心]에도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만약 조복되지 않는 마음에 그대로 머문다면 이는 어리석은 사람의 법이며, 만약 조복한다는 마음에 머문다면 이는 성문(聲聞)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언제나 조복하는 마음에도, 조복하지 않는 마음에도 머물러 집착[住]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법을 떠나는 것이 보살행이고, 

생사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더러운 행위[汚行]를 하지 않고, 열반에 머물러 있어도 영원히 멸도해 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행이며, 

범부의 행도 아니고, 성자나 어진 사람의 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고, 

때묻은 행도 아니고, 청정한 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며, 모든 마군을 초월한 행이지만, 아직도 여러 마군을 항복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보살행이고, 

일체를 남김없이 아는 지혜[一切智, sarvajjna] 를 구하지만, 때가 아닌 때에 얻고자 바라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비록 제법이 공하여 불생(不生)이라고 관하고는 있지만, 깨달음의 경계[正位]에 들고자 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12연기[因緣]를 관하고 있으면서도 온갖 사견을 가진 중생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 보살행이며, 

중생을 자비심으로 감싸안고는 있어도 애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멀리 떠나 있기[遠離]를 즐겨 하지만 몸과 마음의 업이 다한 경계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삼계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법성(法性)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공을 관하면서 수행하지만 온갖 공덕의 뿌리를 심는 것이 보살행이며, 

무상(無相)의 도리를 알고 행하지만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 보살행이고, 

무작(無作)의 도리를 알고 행하지만 생(生)을 받아 세간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보살행이며, 

무기(無起, anabhisa skra)의 도리를 알고 살지만, 온갖 선행(善行)을 하는 것이 보살행이고, 

6바라밀(波羅蜜)에 정진하지만 중생의 마음[心]과 그 마음의 작용[心數法]을 두루 아는 것이 보살행이며, 

6통(通)을 행하면서도 번뇌[漏]를 끊어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4무량심(無量心)을 행하지만,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려고 탐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선정과 해탈과 삼매7)를 행하면서도 선의 즐거움만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4념처(念處)를 행하면서 신체[身]와  각[受]과 마음[心]과 존재[法]를 영원히 떠나고자 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4정근(正勤)행하면서도 (그 과보를 받지 않고) 심신의 노력을 버리지 않고 정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4여의족(如意足)을 얻고자 행하면서도 이미 자유자재한 신통을 얻고 있는 것이 보살행이고, 

5근(根)을 행하면서도 중생의 제근(諸根)의 예리하고 둔함을 아는 것이 보살행이며, 

5력(力)을 발휘하면서도 부처님의 10력(力)을 구하는 것이 보살행이고, 

7각지(覺支)에 정진하면서도 부처님의 지혜를 잘 분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8정도(正道, ryangi-kamrga)를 수행하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불도(佛道)를 행하고자 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지관(止觀) 37도법을 수행하면서도 결코 적멸(寂滅) 에 머물고자 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제법(諸法)은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님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뛰어난 상호(相好)로 스스로의 몸을 장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성문이나 벽지불에게 갖추어져 있는 위의(威儀)를 나타내면서도 (중생을 버리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이 보살행이고, 

제법이 궁극적으로는 공이라는 청정상[諸法究竟淨相]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연에 따라서는 스스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보살행이며, 

제불의 국토는 영원히 적정(寂靜)하며 공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갖가지 청정한 불국토를 나타내는 것이 보살행이고, 

불도를 얻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의 경계에 들면서도 더욱 보살의 수행을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이같이 설했을 때, 문수사리가 데리고 온 많은 대중과 그 중에서 8천의 천자들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

출처 : 붓다의 옛길
글쓴이 : 실론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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