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불도품(佛道品)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물었다.
"보살은 어떻게 해야 불도(佛道)에 통달할 수 있습니까?"
유마힐이 대답하였다.
"만약 보살이 도가 아닌 길[非道]을 간다면 곧 불도에 통달한 것입니다."
또 문수사리가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도가 아닌 길을 간다는 것입니까?"
유마힐이 답하였다.
"만약 보살이 5무간죄[無間]를 범하여도 괴로워하거나 성내는 일이 없는 것이며,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모든 죄나 번뇌가 없으며, 축생에 떨어지더라도 어리석음[無明]이나 교만한 마음 등의 허물이 없으며, 아귀에 떨어지더라도 공덕을 갖추고 있으며, 색계나 무색계의 도에 이르러서도 잘났다고 뽐내지 않습니다.
탐욕을 부리는 것을 드러내어도 온갖 번뇌에 물드는 일이 없으며, 성내는[瞋恚] 모습을 드러내어도 분노를 품는 일이 없으며, 어리석은 모습을 드러내어도 지혜로써 그 마음을 다스리며, 인색하고 탐욕스런 모습을 보이면서도 안과 밖의 모든 것을 보시하며,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며, 계율을 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마음은 편안하게 청정한 계율에 안주하고, 아무리 작은 죄에도 오히려 크게 조심하며, 성내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항상 너그럽게 참으며, 게으른 모습을 보여도 온 마음을 기울여 공덕을 닦으며, 마음이 혼란한 모습을 보여도 마음은 언제나 조용하게 선정을 닦으며,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도 세간과 출세간의 지혜에 통달해 있습니다.
아첨하거나 거짓된 모습을 보여도 훌륭한 방편으로 경전의 뜻에 따라 교화하며, 교만하게 뽐내는 모습을 보여도 중생에게는 마치 교량과 같으며, 온갖 번뇌에 들끓는 모습을 보여도 마음은 항상 청정합니다. 마군의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도 부처님의 지혜에 따르지 다른 가르침에는 따르지 않으며, 성문(聲聞)의 사이에 섞여도 중생을 위하여 아직까지 들어 보지 못한 가르침을 설하며, 벽지불(辟支佛)들 사이에 끼여도 대자비를 이룩하여 중생을 교화합니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도 보배를 낳는 손으로서[寶手] 공덕이 다하는 일이 없으며, 불구자[刑殘] 사이에 끼여도 온갖 상호(相好)를 갖추어 자신의 몸을 장엄하고, 비천한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도 부처가 될 소질[佛種性]을 가진 무리에 태어나서 온갖 공덕을 갖추고, 몸이 쇠약하고 추하고 비참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도 나라연(那羅延, nryaa)과 같이 힘센 몸을 얻어 모든 중생이 부러워 즐겁게 바라보는 대상이 되며, 늙고 병든 사람들 사이에 끼여도 영원히 병의 근원을 끊고 죽음의 공포를 초월합니다.
재물이 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항상 무상을 관하여 실제로 탐내는 것이 없으며, 아내와 첩과 채녀(采女)가 있는 것을 보여 주지만 항상 5욕의 진흙탕에서 멀리 떠나 있고, 말이 어눌하고 둔한 것같이 보이면서도 변재(辯才)를 성취하고 모든 것을 간직하여[持] 잊는 일이 없으며, 외도로 중생을 제도하는 모습[邪濟]을 보여도 부처님의 정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며, 온갖 세속의 길[道]에 두루 빠져드는 것처럼 보여도 그 인연을 끊고,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을 나타내 보여도 생사를 끊어 없애지는 않습니다. 문수사리여, 보살이 이같이 도 아닌 길[非道]을 행해 갈 수가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불도에 통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마힐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무엇을 여래의 씨앗[如來種, tathgata-gotra]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이 몸[有身, satkaya]이 여래의 씨앗이며, 무명(無明)과 생존의 욕망[有愛, bhava]이 씨앗이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씨앗이며, 4전도(顚倒, vipary)와 5개(蓋, paca-varani)가 씨앗이 되며, 6입(入, sat-yatana)이 씨앗이 되며, 7식처(識處)가 씨앗이 되며, 8사법(邪法)32)이 씨앗이 되며, 9뇌처(惱處)33)가 씨앗이 되며, 10불선도(不善道)가 모두 씨앗이며, 요점을 취해서 말한다면 62견(見)이나 모든 번뇌가 모두 부처의 씨앗이 됩니다."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무위(無爲, asa skta)를 보고 올바른 깨달음의 경계[正位]에 든 사람은 다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니, 비유하자면 마치 메마른 고원의 육지에서는 연꽃이 자라지 않지만 더럽고 습한 진흙 땅에서는 잘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같이 무위법을 보고 올바른 깨달음의 경계에 든 사람은 끝내 다시는 불법(佛法)에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될 것이며, 번뇌의 진흙 속에 있는 중생이라야 불법에 마음을 일으킬 뿐입 니다. 또 허공에 씨를 뿌리면 싹이 틀 수가 없지만 거름으로 비옥한 땅[糞壤之地]에서는 무성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위의 올바른 경계에 든 사람은 불법을 일으키는 일이 없습니다. 아견(我見)을 수미산과 같이 일으켜도 더욱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 불법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모든 번뇌가 여래의 씨앗이라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대해(大海)의 깊은 밑바닥에 들어가지 않으면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번뇌의 대해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체지(一切智)의 보물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섭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문수사리여. 이 말씀 명쾌하게 설하시니, 참으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온갖 번뇌가 여래의 씨앗입니다. 저희들은 이제 다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설사 5무간죄를 지을 정도라야 더욱 발심하여 불법을 일으킬 수 있다 하더라도, 지금 저희들은 영원히 (그 마음을)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성의 불구자[根敗]는 5욕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과 같이 성문으로 모든 번뇌를 끊어 버린 자는 불법에 있어서는 또다시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서원을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수사리여, 범부는 불법으로 다시 되돌아오지만 성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범부는 불법을 들으면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無上道心]을 내어서 불(佛)·법(法)·승(僧) 3보를 단절하지 않지만, 성문은 설사 목숨을 마치도록 불법·10력(力)·4무소외[無畏] 등을 들어도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영원히 일으키지 못합니다."
이 법회에 참석한, 보현색신(普賢色身)이라고 불리는 보살이 유마힐에게 물었다.
"거사님, 그대의 부모와 처자·친척·권속(眷屬)·하인[吏民]·벗[知識], 이들은 모두 어떤 사람들이며, 노비와 심부름꾼[僮僕], 코끼리와 말, 수레 따위는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이에 유마힐은 게송(偈頌)으로 답하였다.
반야바라밀다[智度]는 보살의 어머니이며
방편바라밀로 아버지를 삼고
일체 중생을 이끄는 스승도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태어나질 않네.
법의 기쁨[法喜]으로 아내를 삼고
자비심으로 딸을 삼고
성실을 아들로 삼아
필경(畢竟) 공함은 집으로 삼는다네.
여러 번뇌는 나의 제자요
뜻에 따라 다스려 가고
37도품은 선지식으로
이것들이 깨달음에 이르게 하네.
여러 바라밀다[度法]는 모두 다 도반이며
4섭법[攝]은 기녀(伎女)일세.
노래하고 법다운 말씀을 읊조리니
이들을 음악으로 삼는다네.
다라니[摠持]의 동산
무루법(無漏法)의 숲
7각의(覺意)의 청정하고 오묘한 꽃이 만발하고
해탈과 지혜의 열매가 무르익네.
8해탈[解]은 목욕하는 연못
삼매의 물[定水]이 가득 차
일곱 가지 맑은 꽃35)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거기 목욕하는 이는 모두 번뇌가 없는 이들[無垢人]이라네.
다섯 가지 신통력은 코끼리와 말로 치달리고
대승은 수레로 삼아
한마음[一心]36)으로 잘 몰아 가며
8정도의 길을 잘 간다네.
32상으로 장엄하고
80종호로 모습을 잘 갖추어
참괴(慚愧)의 옷을 입고
깊은 마음은 꽃다발로 삼네.
7재(財)37)의 보물을 재산으로
(佛法을) 가르침을 자애로운 휴식으로 삼아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깨달음으로 회향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네.
4선(禪)으로 자리펴고 앉아
정명(淨名)38)을 따라 살아가고
다문(多聞)으로써 지혜를 늘려가고
스스로 깨달음을 음악으로 삼네.
감로(甘露)의 법은 밥이고
해탈(解脫)의 맛은 국이 되어
맑은 마음으로 목욕하고
계품(戒品)으로 온몸을 향기롭게 바르네.
번뇌의 도적을 무찌르니
그 용감함은 누구도 비할 수 없어
네 가지 마군39)을 항복받아
승리의 깃발을 도량에 휘날리네.
생과 멸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생사를 보여 주고
온갖 국토(國土)에 남김없이 나타내니
마치 태양이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 것 같네.
시방 3세의 무량억(無量億)의 여래에게
공양을 올리면서도
그 모든 부처와 나의 몸을
분별하는 생각 전혀 없네.
모든 부처님의 나라와 중생들이
모두 공한 줄을 안다고 해도
항상 정토의 행을 닦아
모든 중생을 교화하네.
모든 중생의
모습과 소리와 몸가짐[威儀] 그 모두를
두려움 모르는 보살은
일시에 남김없이 나타내 보인다네.
온갖 마군의 소행을 알아
그들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서
훌륭한 방편의 지혜로써 선으로 이끌고
뜻에 따라 모두를 교화해 나타낸다네.
늙고 병들고 죽음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모든 중생을 성취하고자 함이니
모든 것이 허깨비[幻化]와 같음을 사무치게 알고
걸림없이 모든 걸 통달한다네.
어느 때는 겁(劫)이 다함을 보이기 위해
하늘과 땅이 모두 불타는 것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항상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무상함을 환하게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네.
무수억(無數億)의 중생이
함께 와서 보살을 청한다면
일시에 그들의 집에 다가가
불도로 나아가도록 교화한다네.
경전[經書]이든 주술서이든지
온갖 기술에 관련된 책이든지
남김없이 통달하여
중생들을 널리 이익되게 베푸시네.
세간의 온갖 도를 닦아
그 모든 길에서 출가하여
이로써 사람의 미혹을 풀어 주고
사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네.
어느 때는 해·달·하늘이 되고
그리고 범천과 세계의 주인이 되고
혹은 흙이 되고 물이 되며
혹은 바람이 되고 불이 된다네.
질병의 소겁 동안에는
온갖 약초가 되어
이것을 복용한 자는
온갖 독과 병을 없애 준다네.
기근의 소겁 동안에
몸을 바쳐 음식이 되어
먼저 그들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가시게 한 다음
가르침을 설하여 교화한다네.
전쟁[刀兵]의 소겁 동안에
그를 위하여 자비심을 일으켜
저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싸움이 없는 땅[無諍地]에 살도록 한다네.
만약 커다란 싸움터가 있다면
병력을 고르게 나누고 나서
보살은 위세(威勢)를 나타내
항복받아 화평하고 편안하게 한다네.
모든 국토 안에 있는
온갖 지옥까지도
서슴없이 찾아가 그곳에 이르러
힘써 그곳의 고뇌를 구제한다네.
모든 국토 안에서
모든 축생들이 서로 물고 뜯으면
보살은 그곳에 태어나
그들 모두에게 이익을 주네.
5욕의 몸을 받는 것처럼 보여 주어도
마음은 선정을 닦아 안온한 모습 보이고
마군이 찾아와 마음을 어지럽히려 해도
아무런 힘을 미치지 못하네.
불꽃 속에 연꽃을 피운다는 것은
매우 드물고 힘든 일일세.
욕정이 있으면서 선을 닦는 것도
이같이 매우 드물고 힘든 일이네.
어느 때는 음탕한 여인이 되어
온갖 호색한[好色者]을 유인해다가
욕정의 갈고리로 끌어들여서
다음에 불도(佛道)에 들게 한다네.
어느 때는 마을의 읍장이 되고,
혹은 상인을 이끌며
국사(國師)와 대신이 되어
중생을 복되고 이롭게 하네.
모든 빈궁한 자에게는
무진장한 곳간이 되어서
그들에게 베풀고 이끌어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내게 하네.
아상이 강해 교만한 자에게는
대역사(大力士)로 나타나
갖가지 뽐내고 교만한 마음을 굴복시켜
위없는 길[無上道]에 머물게 한다네.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무리가 있으면
그들 앞에 나타나 위로하고 안심시켜서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베풀어 주고
마침내 도심을 일으키게 한다네.
어느 때는 음욕을 떠나
다섯 가지 신통력을 가진 선인(仙人)이 되어
모든 중생을 이끌어
계율과 인욕과 자비로움에 머물게 하네.
공양을 구하는 자를 보면
그를 위하여 종이나 심부름꾼이 되고
그 마음을 기쁘게 하여
도심을 일으키도록 한다네.
사람이 구하는 것에 따라서
얻게 해 불도에 이끌어 들이고
뛰어난 방편의 힘으로
모든 것을 풍족히 마련해 준다네.
이와 같이 도는 무량하여서
행하는 것도 끝이 없으며
지혜는 또한 끝없이 무한하여서
무수한 중생을 해탈케 한다네.
가령 일체의 부처가
무량억겁에 걸쳐
그 공덕을 찬탄한다 해도
결코 다할 수 없다네.
그 어느 누가 이 같은 법을 들은 자라면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랴.
다만 저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을 제외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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