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

[스크랩] 9.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

수선님 2018. 1. 14. 13:36

9.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


유마힐은 수많은 보살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 보살은 어떻게 하여 상대적 차별을 뛰어넘는[不二] 법문(法門)에 깨달아 들어가는지 저마다 생각하는 대로 말씀해 보십시오."


모임 가운데 법자재(法自在)라고 하는 보살이 있어서 그가 말하였다.

"여러분, 생(生)과 멸(滅)을 서로 대립하는[二] 것이라 하지만, 존재하는 것[法]은 본래 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 멸하는 일도 없습니다. 이같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 것을 곧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고 합니다."


덕수(德守)보살이 말하였다.

"아(我)와 아소(我所)를 서로 대립하는 둘[二]이라고 하나, 아가 있음으로 해서 아소가 있는 것이요, 만약 아가 없으면[無我] 아소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불순(不眴)보살이 말하였다.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受]과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不受] 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존재하는 것[法]을 수(受)하지 않으면 그 때는 (사물을) 받아들일 수가 없으며,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취하는 일도 버리는 일도 없으며, 짓는 일도 행하는 일도 없습니다.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덕정(德頂)보살이 말하였다.

"번뇌[垢]와 청정함[淨]을 서로 대립한 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번뇌 그 자체의 본성[實性]40)을 보아도 청정한 모습[相]은 없고, 열반의 모습[滅相]을 따릅니다.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 합니다."

* 40) 이하의 문장을 현장은 "번뇌와 청정함이 둘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알 때, 분별은 없고 깊이 분별을 끊어서"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현장의 역문을 참고했다.


선숙(善宿)보살이 말하였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動]41)과 아상을 가지고 그 모양을 파악하는 것[念]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합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곧 아상으로 파악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아상으로 파악하는 일이 없으면 곧 분별이 없는 것이므로 이 경지를 잘 통달한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 41) 이 부분에 대해서 현장은 "산동(散動)과 사유(思惟)," 티베트 역에서는 "동요(動搖)와 집착(執着)"이라고 했다.


선안(善眼)보살이 말하였다.

"하나의 모습[一相]을 가진 것과 아무런 모습도 갖지 않는 것[無相]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합니다. 만약 어떤 모습이 있는 것[一相]을 어떠한 모습도 없는 것[無相]이라고 알고, 또 모습이 없는 것[無相]에도 얽매이지 않고서 평등을 체득하게 되면,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묘비(妙臂)보살이 말하였다.

"보살의 마음과 성문(聲聞)의 마음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지만, 마음의 모습[心相]은 공하고 허깨비와 같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면, 보살의 마음도 없고 성문의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불사(弗沙)보살이 말하였다.

"선(善)과 불선(不善)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선도 불선도 일으키지 않고 상이 없는 경지[無相際]에 들어서 이를 통달하면,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사자(獅子)보살은 말하였다.

"죄악[罪]과 복덕[福]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지만, 만약 죄악 그 자체의 본성에 통달하면 복덕과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되고, 금강과 같은 진실한 지혜로써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속박되는 일도 없고 해방되는 일도 없으면,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사자의(獅子意)보살은 말하였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를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만약 모든 법이 평등함을 알면, 그 때 번뇌[漏]라든가 번뇌가 없다고 하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생각43)에 집착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생각이 없는 상태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 43)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생각'을 나집은 '상(相)'이라고 했으나, 전문(前文)과의 관계로 보아 '상(想)'이 옳을 듯하고, 현장과 티베트 역도 '상(想)'이다. 또 이곳을 '상(相),' '무상(無相)'이라고 한다면, 앞의 선안(善眼)보살과 중복되므로 지금은 '상(想),' '무상(無想)'으로 번역했다.


정해(淨解)보살이 말하였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를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합니다. 그러나 일체 (유위의) 행위[數]를 떠나고 나면 마음은 허공과 같아져 (집착을 떠나) 맑은 지혜는 걸림이 없게 됩니다.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나라연(那羅延)보살은 말하였다.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합니다. 그러나 세간의 본성 자체가 공(空) (함을 깨닫는 것)이 그대로 출세간인 것이며,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들고 나는 일이 없으며, 넘치고 흩어지는 일도 없습니다.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선의(善意)보살은 말하였다.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생사 그 자체의 본성이 곧 생사는 이미 없으며, (사람을) 얽어매는 것도 없고, 그로부터 벗어날 것도 없으며, 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면 이를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현견(現見)보살은 말하였다.

"다하는 것[盡]과 다함이 없는 것[不盡]45) 둘이라 합니다. 그러나 사물[法]이 만약 끝내 다하고[盡], 만약 다하지 않는다고 해도, 모두 다한 모양[盡相]은 없습니다. 다한 모양이 없는 것은 곧 공(空)이며, 공하다면 곧 다한다든가 다하지 않는다고 하는 모양은 없습니다.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45. 이 부분은 현장 역, 티베트 역이 모두 일치하지 않고 뜻을 파악하기 힘들다. 『주유마힐경(注維摩詰經)』에 따르면 "무상은 공을 깨닫는 처음의 관문이니, 존재를 깨뜨려도 다 없어지지 않음을 부진(不盡)이라고 이름한다. 내지는 한 생각이라도 않으면 생할 것이 없으니, 생할 것이 없다면, 생이 다한다. 생이 다하면 곧 끝내는 공적[畢竟空]하니, 이를 진(盡)이라 이름한다"고 나집은 풀이하였다.(卍續藏 27, p. 504上)


보수(普守)보살이 말하였다.

"아(我)와 무아(無我)를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我)를 (찾아보아도 찾아내)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비아(非我)를 어떻게 찾아내 얻을 수 있습니까? 아의 본성[實性]을 보는 사람은 다시는 이 두 가지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전천(電天)보살은 말하였다.

"명(明)과 무명(無明) 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명의 본성은 곧 명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 또한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일체의 이치[數]를 떠나 있으니, 그 안에서 평등하여 상대적인 두 가지 차별이 없는 것,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희견(喜見)보살은 말하였다.

"색(色)과 그 색이 공한 것[色空]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색은 그대로가 공(空)한 것으로서 색이 멸함으로써 공한 것은 아니고, 색의 본성이 본래 공한 것입니다. 이같이 수(受)·상(想)·

행(行)·식(識)도 그대로가 공인 것입니다. 식(識)과 공(空)도 서로 대립한 둘이라 하나, 식 그 자체가 공한 것이지, 식이 멸했기 때문에 공한 것은 아닙니다. 식의 본성이 본래 공한 것입니다. 이같이 통달하는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명상(明相)보살은 말하였다.

"지·수·화·풍의 다른 것과 허공의 원소[空種]46)가 다른 것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합니다. 그러나 4대의 본성 그대로가 허공[空種]의 본성인 것입니다. 과거[前際]와 미래[後際]가 다 공하기 때문에 중간인 현재[中際]의 본성도 공한 것입니다. 만약 이같이 저마다의 원소의 본성을 알 수가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 46) 허공(虛空)을 말한다. 즉 공간으로서 일체가 걸림이 없이 그 안에 안주시킬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또 이 부분은 현장 역과 같이 "네 가지 원소(元素)와 공(空)과는" 하는 것이 더 이해를 빠르게 한다.


묘의(妙意)보살은 말하였다.

"눈[眼]과 색(色) 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합니다. 만약 눈의 본성(이 공하다는 것)을 알면, 색에 탐착하지 않을 것이며, 성을 내거나 어리석을 일이 없을 것이니, 이것을 적멸(寂滅)이라고 이름합니다. 이같이 귀[耳]와 소리[聲], 코[鼻]와 냄새[香], 혀[舌]와 맛[味], 신체[身]와 감촉[觸], 마음[意]과 마음의 대상[法] 등이 서로 대립하는 것을 둘이라고 하지만, 만약 마음의 본성을 알면 마음의 대상에 대해서 탐착하는 일도, 성내는 일도, 어리석을 일도 없을 것이므로 이것을 적멸이라고 이름하며, 그 안에 안주하는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무진의(無盡意)보살은 말하였다.

"보시(布施)와 공덕을 일체지로 회향하는 것[廻向一切智] 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합니다. 그러나 보시의 본성은 그대로 공덕을 일체지로 회향하는 본성인 것입니다. 이같이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와 공덕을 일체지에로 회향하는 것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지만, (지계 내지) 지혜의 본성은 그대로 그 공덕을 일체지에로 회향하는 것의 본성인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이 진실한 도리[一相]47)를 깨닫는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앞의 선안(善眼)보살이 "일상(一相)과 무상(無相)"이라고 대립해서 이야기했고, 또 선안(善眼)보살의 이야기와 지금 것이 같지 않으므로 현장 역 '일리(一理),' 티베트 역의 '일리취(一理趣)'를 참고하였다.


심혜(深慧)보살은 말하였다.

"공(空)과 차별의 모습을 떠나 있는 것[無相], 바라며 구하는 뜻이 없는 것[無作]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은 차별의 모습이 없으므로) 공은 그대로 차별의 모습을 떠나 있으며, (차별의 모습이 없으므로 바라고 구하는 일도 없으므로) 차별의 모습을 떠나 있는 것은 그대로 바라고 구하는 뜻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공이며, 차별의 모습을 떠나고, 바라고 구하는 뜻이 없으면 곧 마음[心]48)과 뜻[意, ]과 식별[識]이 없고, 하나의 해탈의 문[一解脫門]이라는 그 자체가 곧 세 가지 해탈의 문[三解脫門]이라는 것을 (체득하는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 48) 심(心)·의(意)·식(識)을 나집은 공 이하의 세 가지 것에 관계시켜 이것들이 없는 것에는 심·의·식의 세 가지 작용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지겸, 현장, 티베트 역에서는 모두 "이 세 가지 것을 바라는 생각이 없는 것[無作·無願]"이라고 했다.


적근(寂根)보살은 말하였다.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 그 가르침을 행하는 승단[衆]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부처님은 곧 가르침[法]49)이며, 가르침은 곧 그것을 실천하는 승단인 것입니다. 이 3보 모두가 무위(無爲)의 상(相)으로서 허공과 같은 것입니다. 또 일체법도 이와 같아서 이것을 알고 잘 행하는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 49) 이 부분을, 현장은 "불(佛)의 본성(本性 : 法性)은 그대로 법의 본성," 티베트 역에서는 "불의 본성은 가르침이다," "가르침의 본성은 승단(僧團)이다"고 했다.


심무애(心無碍)보살은 말하였다.

"신체[身]와 몸 멸하는 것[滅身]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지만, 신체는 그대로 신체가 멸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신체의 진실한 본성[實相]을 보는 사람은 신체도 신체가 멸하는 것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체와 신체의 멸과는 상대적인 차별이 없으며, 분별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상선(上善, Suvinta)보살은 말하였다.

"몸[身, kya]과 입[口]과 마음[意]과 그 행위[善]를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나 이 세 가지 행위[三業]에는 어느 것에도 행위[業]로서의 모습이 없습니다[無作相]. 몸의 행위로서의 모습이 없는 것은 그대로 입의 행위로서의 모습이 없는 것이며, 입의 행위로서의 모습이 없는 것은 그대로 마음의 행위로서의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이들 세 가지 행위로서의 모습이 없는 것은 일체법의 행위로서의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이같이 능히 행위가 없는 것[無作]을 아는 지혜에 따르는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복전(福田)보살은 말하였다.

"(욕계의 선행인) 복행(福行)과 (10악도의 악행인) 죄행(罪行)과 (색계, 무색계의 선행인) 부동행(不動行)50)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나 이들 세 가지 행의 본성[實性]은 그대로 공한 것입니다. 공이므로 거기에는 선행도 악행도 없습니다. 이 세 가지 행위에 아무런 차별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 50) 나집의 설명에 의하면, 복덕은 욕계의 선행으로 업의 과보를 가져오고, 악행은 10불선도(不善道)를 행하는 것으로 고의 과보를 가져오며, 무동행(無動行), 즉 부동행(不動行)은 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행위라고 주석했다.(卍續藏 27, p. 506下)


화엄(華嚴)보살은 말하였다.

"아(我)로부터 나와 남의 두 가지 구별을 일으켜 서로 대립한 두 가지라 하지만, 아의 진실한 모습을 (공이라고) 보는 사람[見我實相者]은 (남과 나라고 하는) 두 가지 분별[二法]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만약 이 두 가지 것에 집착[住]하지 않으면 (나와 남이라는) 식별함이 있을[有識, vijna] 수 없고, 식별되는 것[所識]도 없습니다.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덕장(德藏)보살은 말하였다.

"집착할 대상이 있는 것[有所得相]을 대립하는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제법이 공하다고 깨달아) 집착할 대상이 없다면[無所得] 취하거나 버릴 것은 없습니다.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는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월상(月上)보살은 말하였다.

"어둠[闇]과 밝음[明]을 서로 대립한 둘이라고 하나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으면 둘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예컨대 모든 마음의 작용이 다해 버린 적정한 삼매의 경지[滅受相定]에 들면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는 것과 같이 일체법의 모습도 그와 같기 때문이니, 그 안에서 평등하게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보인수(寶印手)보살은 말하였다.

"열반을 즐기는 것[樂涅槃]과 세간(世間)을 좋아하지 않는 것[不樂世間] 을 둘이라고 하지만, 만약 열반을 즐기지도 않고 세간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라면 곧 이 둘의 대립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 번뇌의 속박이 있으면[有縛] 해탈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만약 본래부터 속박된 것이 없다면 그 누가 해탈을 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면 곧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주정왕(珠頂王)보살은 말하였다.

"바른 길[正道]과 삿된 길[非道]을 서로 대립한 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른 길에 머무는 사람은, 이것은 삿되고 저것은 옳다고 분별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차별을 떠나는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낙실(樂實)보살은 말하였다.

"진실[實, satya]과 거짓[不實, ma]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보는 사람은 오히려 진실이라는 것 자체를 보지 않는데, 하물며 거짓을 보겠습니까? 왜냐 하면 (진실은)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지혜의 눈[慧眼]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이 지혜의 눈은 본다, 보지 않는다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 보살들이 제각기 설하고 나자 문수사리(文殊師利)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보살의 불이법문[不二法門]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제 생각 같아서는 일체법에 대해서 말이 없고[無言], 설함도 없으며[無說], 가리키는 일도 없고[無示], 식별하는 일도 없으며[無識], 모든 질문과 대답을 떠나는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물었다.

"저희들은 각자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였습니다. 당신께서 말하실 차례입니다. 어떤 것을 보살의 입불이법문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유마힐은 오직 아무런 말 없이[默然]51) 침묵하였다. 

* 51) 이것을 '유마의 일묵(一默),' '묵불이(默不二)'라고 하며, 이것을 찬탄해서 선가에서는 흔히 "유마의 일묵(一默)이 만뢰(萬雷)와 같다"고 한다.


문수사리는 감탄하여 말하였다.

"훌륭하고 참으로 훌륭합니다. 문자(文字)로도 언어의 설명[語言]까지도 전혀 없는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불이의 경지에 깨달아 들어가는 법문입니다."

  

이와 같이 입불이법문품을 설할 때, 이곳에 모인 대중들 가운데 5천의 보살들 모두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출처 : 붓다의 옛길
글쓴이 : 실론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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