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수행법(간화선)

[스크랩] 참선 수행(參禪 修行)-2

수선님 2018. 1. 28. 12:15

참선 수행(參禪 修行)

 

1. 참선(參禪)

불교 수행법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참선이다.

참선은 전통적으로 훌륭한 선사들이 이 방법을 통해서 도를 얻고 인격을 완성했다.

요즘은 많은 불자들이 참선을 자신의 수행법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 참선에도 크게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지관참선(止觀參禪法)이다.

이것은 마음의 온갖 산란한 번뇌를 그치고 고요하고 맑은 슬기로써

모든 존재(萬法)를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흔히 관법(觀法) 혹은 비파사나(Vipasyana)라고 말하기도 한다.

둘째는 묵조선(默照禪)이다.

이것은 참선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고 묵묵히 앉아서

모든 생각을 끊고 행하는 것이라는 데서 나온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화두를 갖지 않고 참선을 하는 방법을 묵조선이라고 한다.

셋째는 간화선(看話禪)이다.

이것은 화두(話頭)를 근거로 하여 참선하는 방법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달마조사로부터 전해 내려온 화두를 들고 좌선하는 방법이다.

간화선은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참선법이다.

선은 우리의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서 일사불란한 상태로 몰입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은 인간의 실존과 만나는 일이다.

자신의 진실한 생명을 바로 보는 방법으로 참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선의 본래 목적은 견성성불(見性成佛)에 있다.

자신의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는 것이 선의 목적이다.

마음의 본질을 깨닫는 가장 좋은 지름길이 바로 참선이다.

선은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이라고 해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가능하다.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사람의 기본적인 동작에서부터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한 어느 상태에서도 참선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앉아서 하는 선 수행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해서

흔히 좌선(坐禪)을 많이 행하고 있다.

참석의 방법 중 우리 나라에서는 화두를 들고 행하는 간화선이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화두란 쉽게 말해서 하나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은 철저한 문제의식을 마음속에 새겨서 참구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속에 오로지 문제의식만을 남겨 놓고 다른 어떤 것도 떠올려서는 안된다.

자신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든지 오직 자신의 문제 삼고 있는 화두만을 새겨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곧 의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선을 행할 때는 아주 고요하고 맑은 생각으로 몰입해야 한다.

참선은 인생의 근본 뿌리를 찾는 일이기 때문에 진지하고 철저히 행해야 한다.

전문적으로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적게는 삼 개월 혹은 일년 이상씩

철저히 모든 일상사를 다 배제하고 몰입해야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도 마음을 집중시키는 훈련을 계속 쌓는다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2.
참선(參禪)과 화두(話頭)

불교에서는 자기를 상실한 인간에게 참된 자기를 회복시키고,
인간과 천지만물의

근원을 밝혀내며, 인간의 참된 주체성을 곧바로 열어서 인간과 진리의 참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공부를 참선(參禪)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참선의 방법으로는 조용하게 앉아서 하는 좌선(坐禪)이 최상이라고 말한다.

 

한국 불교의 수행법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참선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간화선(看話禪)의 전통이 한국 불교의 큰 줄기를 형성하였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간화선이란 부처님이 설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화두(話頭)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수행해 나가는 참선법이다.

본래 참선법에는 간화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동종 (曹洞宗)의 선법인

묵조선(默照禪)의 전통도 있다.

그러나 한국 불교에서는 조동종보다는 임제종(臨濟宗)의 기풍이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참선이라고 하면 간화선의 선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반화되어 있다.

화두(話頭)란 공안(公案) 혹은 고칙(古則)이라고도 하는데, 공안은 본래 관청에서

사용되는 문서라는 의미이지만 공정하여 범하지 못하는 법령 정도의 의미이고,

고칙이란 옛 어른들이 남겨 놓은 법칙이라는 뜻이다.

불교의 화두는 진리를 깨우친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들의 말씀이기도 하고 몸짓이기도 하다.

화두는 참선하는 이에게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제공하는 일종의 참선 공부의

문제지라고도 할 수 있다.

참선하는 이가 이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수행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화두에는 1,700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무자(無字) 화두'이다.

옛날 중국의 유명한 선승이었던 조주(趙州) 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라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열반경}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조주 선사가 왜 ""라고 대답한 것일까?

바로 여기서 조주 선사가 무엇 때문에 무라고 말한 것인지를 뚫어내는 것이 바로 화두가 된다

 

간화선의 좌선법

 

좌선을 하려면 조용하고 정갈한 곳이 좋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점은 지나치게 장소나 환경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달마 선사는 “밖으로 모든 인연을 끊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이 되어야 가히 도에 들어 간다”고 하셨다.

육조 혜능 선사는 『육조단경』에서 “밖으로 모든 경계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좌坐라 하고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는 것이 선禪이다”라고 하셨다.

참으로 조사스님들의 고구정녕하신 가르침이다.

 

좌선하는 방법은 먼저 큰 서원을 세워야 한다.

바른 법에 대한 신심이 견고하여 영원히 물러나지 않겠다.

나고 죽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결정코 본래 면목을 깨달으리라.

반드시 부처님의 혜명을 잇고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리라.

이러한 원력을 양식 삼아 좌선할 때만이라도 모든 반연을 놓아 버리고

화두를 면밀히 참구해야 한다.

 

1. 좌선하는 방법에는 결가부좌와 반가부좌가 있다.

 

결가부좌는 오른쪽 다리를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자세다.

이때 두 다리를 허벅지 깊숙이 올려놓아야 자세도 안정되며 오래할 수 있다.

 

 

 

반가부좌는 좌복 위에 앉아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올려놓거나(길상좌)

오른쪽 다리 위에 왼쪽 다리를 올려놓는다(항마좌).

 

 

 

2. 허리를 자연스럽게 반듯이 세우고 양쪽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양쪽 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코와 배꼽이 수직이 되도록 한다.

 

 

 

3. 손은 길상좌일 경우 오른 손바닥을 왼발 위 단전 앞에 자연스럽게 놓고

그 위에 왼 손바닥을 포개어 얹는다.

양쪽 엄지를 가볍게 서로 닿게 붙인다(법계정인=t선정인).

 항마좌인 경우 그 반대로 하면 된다.

 

 

 

 

4. 입과 이는 긴장을 풀고 살짝 다물며 혀를 말아 혓바닥 아래쪽이 입천장에 닿도록 한다.

눈은 반쯤 뜨되 부릅뜨지도 말고 감지도 말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머리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12 미터 앞바닥에 시선을 내려놓는다.

 

5. 음식을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약간 부족한 듯하게 하라.

허리끈은 여유 있게 하고 가능한 말을 많이 하지 말며 모든 긴장을 풀어버리도록 하라.

 

6. 호흡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하라.

약간 깊이 들이 마시고 천천히 내쉰다는 생각으로 하되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화두만 참구하라.

 

7. 몸과 마음을 통째로 화두에 바쳐 버렸다는 마음가짐으로 온통 화두와 하나 되어야 한다.

좌선이 잘된다는 생각도 잘 안 된다는 생각도 모두 망상이니 오직 화두 참구만 애써 노력하라.

간절하고 진솔하게 하되 속효심도 해태심도 내지 말라.

 

8. 경책警策 - 좌선 중에 졸거나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 자세가 흐트러지면 죽비로 경책을 한다.

경책은 바른 수행을 돕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이다.

경책을 할 때는 소임자가 경책 받을 사람의 오른쪽 어깨 위에 죽비를 가볍게 올려놓고

지그시 누르면서 경책할 것을 알린다.

그러면 경책 받을 이는 졸음에서 깨어 합장하고 머리를 왼쪽으로 가볍게 기울여

어깨로 경책 받도록 한다.

경책 받은 다음에도 합장하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다시 바른 자세로 되돌아간다.

 

9. 좌선 시간은 50분 앉았다가 10분 포행하는 게 기본이지만 너무 시간에 구속되지 않아야 한다.

포행은 방선放禪 시간에 선방 안팎을 천천히 걸으면서 다리를 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포행 시에도 화두를 놓아서는 안된다.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좌선을 하되 자세한 사항은 경험있는 이에게 배워서 하는 것이 좋다.

 

 

간화선(看話禪)이란 무엇인가?

 

간화선(看話禪)이란 화두(話頭)를 참구하여 본래 성품을 바로 보는 참선법이다.

본래 성품을 보면 깨닫는 것이다.

화두를 타파하여 깨닫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견성성불이란, 자기 마음을 바로 보아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간화선을 화두를 참구하여 깨치는 수행법이라 하여 일명 화두선(話頭禪)이라고도 한다.

 

간화선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인도와 중국을 거치면서 자기 성품을 깨닫는

여러 참선법 가운데 가장 발달된 수행법으로 자리 잡았다.

간화선의 원류가 되는 조사선(祖師禪) 4세기경 달마 대사가 동쪽으로 건너와 전한 것에서 유래한다.

7세기경 당나라 시대에 6조가 된 조계 혜능(638~713) 선사가 돈오선법을 제창하면서

선종의 실질적인 기반을 확립하였다.

 

그 이후 당, 송 나라 시대를 거치며 수 많은 선지식들을 배출하였다.

12세기 중반에 이르면 대혜 종고(1089~1163) 선사가 조사와 수행자 사이의 문답을

정형화한 화두를 일상 생활 가운데 참구하는 간화선을 제창하였다.

대혜 선사가 제시한 간화선은 조사선의 핵심을 가장 잘 간직한 출가,

재가를 가리지 않는 생활 수행법이다.

간화선이 뛰어난 점은 깨달은 선지식이 깨달은 자리를 바로 보라고 제시한

화두를 타파하여 그 자리에서 견성 성불하기 때문이다.

 

화두(話頭)란 무엇인가?

 

화두(話頭)란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이 하신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긴 말이다.

이 말길과 생각의 길로는 알 수 없는 화두를 알기 위해 의심하여 온 마음이

화두가 하나가 되어 마침내 그 화두를 타파하면 견성성불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화두를 타파하면 꿈에서 깨어난 것과 같다.

또 하늘에 백천 개의 해가 비치는 것과 같다.

깨달은 세계는 허공과 같이 무한히 넓어 한정이 없다.

그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평등해서 우열이 없고, 귀천ㆍ친소ㆍ시비가 없다.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깨달으면 자주적이고 자율적이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한없이 자비로우며,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자유자재한 대자유인이 된다.

이 역동적인 현상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글로도 표현할 수 없다.

스스로 물을 마셔보아야 차고 더운 것을 아는 이치와도 같다

 

초심자가 간화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 가르침대로 발심(發心)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간화선 수행을 할 수 있다.

정견을 갖추고 진정한 발심이 되어 있고 눈 밝은 스승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기초 수행 없이 바로 간화선 수행을 해도 된다.

그러나 부처님 교법(敎法)에 대한 정견과 발심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간화선을 하려면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초심자들은 간화선 수행을 하기 전에 교법을 바르게 이해하여 확고한 신심(信心)을 세우고

수행을 통하여 기필코 깨닫고야 말겠다는 발심을 해야 한다.

 

간화선에서 정견을 중요시하는 까닭

 

부처님 가르침대로 발심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간화선 수행을 할 수 있다.

정견正見을 갖추고 진정한 발심發心이 되어 있고 눈 밝은 스승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예비단계나 기초수행이 필요 없이 바로 간화선 수행에 들어가도 된다.
그러나 부처님 법에 대한 정견과 발심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화두를 들고 애쓴다 해도 그 화두에 간절한 의심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초심자들은 바로 화두를 들기 전에 법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갖추고

진정한 발심을 하여 불퇴전의 신심과 크나큰 원력을 세워야 한다.
법에 대한 안목이란 정견을 갖추는 것이다.

정견正見이란 법에 의한 바른 가치관의 수립을 말한다.

그것은 중도 연기에서 바라보는 바른 세계관, 인생관의 정립이다.

그래야만 ‘불교란 무엇이고 어떤 가르침인가?, ‘왜 공부해야 하는가?,

왜 수행해야 하는가?’와 같은 불교 수행자가 갖춰야 할 기본을 충실히 갖출 수 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걷고 있다.

그가 길을 가는 목적은 무엇일까? 가고자 하는 곳에 행복과 평화, 기쁨과 자유

그리고 휴식이 있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여러 길로 그 목적지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빠르고 편하게 효율적인 길을 가려 할 것이다.

목적이 정확하고 가는 길을 안다면 나그네는 주저 없이 당당하게 길을 갈 수 있다.

 

서산 스님의 게송에 이런 글이 있다.

 

눈 온 들길을 걷는 나그네여
갈팡질팡 걷지 말라.
오늘 그대의 발자국은
뒷날 후인의 이정표가 되리라.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 덮인 광야란 삶의 현재 상황을 말한다.

그 눈 덮인 광야에서 어느 길을 가든 목적 의식을 가지고 똑바로 걸어가야 한다.

이리저리 갈팡질팡해서는 안 된다.

정견의 확립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 정견을 바탕에 두고 간화선에 들어갈 때 방황하지 않고 바로 걸어갈 수 있다.

정견의 확립은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연기·무아·공·중도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기 전부터

이미 갖추어져 있는 삶의 본 모습이다.

여기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어야 수행자로서 갈 길이 명확해진다.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면 수행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수행자의 삶의 목표도 뚜렷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곧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가 아주 분명해 진다는 말이다.


연기와 무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추면 그것을 자기 삶을 통해

실천해 나가야 하겠다는 간절한 염원이 생긴다.

그래서 연기와 무아에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여 이것이 인격화되는 길을 열어 간다.

간화선을 비롯한 모든 불교 수행은 이렇게 연기법을 인격화하고 내면화하기 위한 길이다.

법 곧 진리를 확인하고 그 진리대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법이 자신과 함께 하여 내가 걷는 길이 곧 진리의 길이 된다.

그럴 때 어떤 장애에도 걸리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아가 이런 사람의 발자국은 뒷날 다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훌륭한 귀감이 되는 것이다.

 

출처 : 제이제이
글쓴이 : 제이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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