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으로 '삶의 대전환'이 이루었으면, 이제 눈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를 가리켜 불가에서는 '회향(廻向)한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향해 정신 없이 달려왔다면 이제 '번뇌도 보살이요,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경지를 이해해야 할 때입니다.
얼음과 물은 똑같이 산소와 수소의 결합물입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그러나 얼음과 물은 분명 다릅니다. 이렇듯 번뇌와 부처는 다르지만, 번뇌는 수행의 열을 받으면 녹아서 부처가 됩니다. 같지만 동시에 같지 않은 이 오묘한 도리가 바로 '번뇌가 곧 보리[煩惱卽菩提]'라는 말입니다.
<보등록(普燈綠)>에 "진흙이 많으면 불상이 커지고, 물이 깊으면 배가 높아진다[泥多佛大 水長船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연히 진흙이 많을수록 큰 불상을 만들 수 잇고, 물이 깊을수록 큰배를 띄울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클수록 깨달음이 깊어지고, 얼음이 클수록 물의 양도 많아지며, 걸림이 많을수록 성취감이 커지는 것이지요.
아름다움과 추함, 깨달음과 번뇌, 깨끗함과 더러움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방금 꺾은 꽃은 아름답고 깨끗하며 신선합니다. 꽃이 있는 꽃병 주위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가득해지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셀레입니다. 그러나 오�괸 쓰레기통은 추하고 더러우며 악취가 코를 찌릅니다. 우리는 쓰레기통 주위를 쳐다보기조차 싫어서, 고개를 돌리고 코를 막기 일쑤입니다. 꽃병 주위에는 불결한 파리와 온갖 세균과 쥐들이 찾아들고 인상이 찌푸려집니다.
그러나 좀더 눈여겨봅시다. 길어야 일 주일, 머잖아 꽃은 시들어 시들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지혜의 눈으로 본다면 사실 곧 쓰레기가 되어 버릴 꽃의 본질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또한 쓰레기통도 지헤의눈으로 보면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안에 있던 더러운 것들이 땅으로 돌아가 비옥한 거름이 되어 싱싱한 야채나 아름다운 꽃을 핑루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다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면서 쓰레기를 볼 수 있고, 쓰레기를 바라보면서 향기로운 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꽃과 쓰레기는 둘이 아닙니다. 사실은 쓰레기도 꽃만큼이나 소중한 조재입니다.
'꽃과 쓰레기'의 관계를 이해하는 지헤로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는 도리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결국 해탈을 구할 곳은 중생의 마음과 행동인 것이지요. 착한 마음이든 악한 마음이든, 중생의 마음이든 부처의 마음이든, 마음은 한 곳에서 나옵니다. 악한 마음 나오는 고이 따로 있고 착한 마음이 나오는 곳이 따로 있다면 악한 마음이 나오는 곳만 막으면 그만이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착한 마음이 우리를 차지하면 부처가 되고, 악한 마음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 금세 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마음을 잘 관찰하여 연마하면 해탈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정우 「길을 묻는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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