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31. 14-32. 14-33
14-31 명자를 잘못 알고 있다
今時學人不得(금시학인부득)은 蓋爲認名字爲解(개위인명자위해)니라 大策子上(대책자상)에 抄死老漢語(초사노한어)하야 三重五重(삼중오중)으로 複子裏(복자리)하야 不敎人見(불교인견)하고 道是玄旨(도시현지)라하야 以爲保重(이위보중)하나니 大錯(대착)이로다 ?屢生(할루생)이여 ?向枯骨上(이향고골상)하야 覓什?汁(멱십마즙)고
“오늘날 학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대개가 이름과 문자를 잘못 알아서 알음아리를 내기 때문이다.
큰 노트에다가 죽은 노인들의 말씀을 베껴 가지고 세 겹 다섯 겹 보자기에 싸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오묘한 이치라 하며, 애지중지 하는데 아주 잘못된 일이다.
눈멀고 어리석은 바보들아! 그대들은 말라빠진 뼈다귀에서 무슨 국물을 찾고 있는가?”
(강의)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하지만 불교를 알지 못하는 것은
불교를 설명한 책이나 경전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트에다 돌아가신 노인들의 말씀을 기록하여 세 겹 네 겹 싸서 애지중지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노인들이란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일체 경전과 어록들을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는 것을 꾸짖는 말이다.
경전의 문지란 단지 말에 불과하다.
말을 기록한 먹과 종이에 불과하다.
사과를 설명한 책을 아무리 들려다 봐야 사과는 아니다.
불 이야기를 아무리 해 봐야 말이 입을 태우지는 않는다.
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불이 나오겠는가?
사과 이야기를 아무리 해 봐야 사과가 나오겠는가?
눈멀고 어리석은 이들이여, 마른 뼈다귀에서 국물을 기대하지 말라.
有一般不識好惡(유일반불식호오)하야 向敎中(향교중)하야 取意度商量(취의탁상량)하야 成於句義(성의구의)하나니 如把屎塊子(여파시괴자)하야 向口裏含了(향구리함요)라가 吐過與別人(토과여별인)하며 猶如俗人(유여속인)이 打傳口令相似(타전구령상사)하야 一生虛過(일생허과)로다 也道我出家(야도아출가)라하나 被他問著佛法(피타문착불법)하면 便卽杜口無詞(편즉두구무사)하야 眼似漆突(안사칠돌)하며 口如?擔(구여편담)하니라 如此之類(여차지류)는 逢彌勒出世(봉미륵출세)호대 移置他方世界(이치타방세계)하야 寄地獄受苦(기지옥수고)니라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어떤 무리들이 있어서 경전을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따져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마치 똥 덩어리를 입 속에 넣었다가 다시 뱉어서 다른 사람에게 먹여주는 것과도 같다.
또 속인들이 비밀한 말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것과 같으니 일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출가한 사람이다.’ 라고 떠벌리지만 불법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못한다.
멍하니 처다 보는 눈은 새까만 굴뚝같고 입은 서까래를 건 것 같구나.
이와 같은 무리들은 미륵 부처님이 나오시더라도 다른 세계로 옮겨가서 지옥에 살면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강의)
불교를 강의하고 경전을 설하는 사람들이 꼭 들어 두어야할 말씀이다.
똥 덩어리를 입 속에 넣었다가 다시 뱉어서 다른 사람에게 먹여주는 일이란 것을 알고 하자.
꼭 꼭 씹고 잘게 씹어서 세상을 향하여 냄새를 더욱 독하게 풍기면서 말이다.
불교를 강의하고 경전을 설하는 것을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두가 똥을 씹는 업이다. 온 세상에 악취를 풍기는 일이다.
이것은 좀 다른 뜻이지만 실은 불교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많아야 한다.
온 세상을 똥 세상으로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을 악취에 질식하도록 해야 한다.
불교의 진실은 어디가고 터무니없이 와전된 것을 꾸짖는 말씀이다.
말을 소리 내지 않고 입이 움직이는 모양만 보고 짐작하여 그 짐작한 것을
또 다른 사람에게 입 모양만 보여주고 한다.
이렇게 전하고 또 전하여 많은 사람에게 전했을 때 그 본의가 얼마나 와전되었을까?
얼마나 헛된 일일까?
그러면서도 입만 벌리면 ‘나는 출가하여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다.’라고 떠든다.
하지만 진정한 불교를 물으면 눈은 멍하니 초점을 잃어서 혼이 나간 사람 같다.
입은 꼭 다문 것이 한일자[一] 입을 하고 있다.
미륵불이 출세하더라도 불교를 깨칠 날이 없을 것이다.
14-32 참 부처는 형상이 없다
大德(대덕)아 ?波波地往諸方(이파파지왕제방)하야 覓什?物(멱십마물)하야 踏?脚板闊(답이각판활)고 無佛可求(무불가구)며 無道可成(무도가성)이며 無法可得(무법가득)이니라 外求有相佛(외구유상불)하면 與汝不相似(여여불상사)니 欲識汝本心(욕식여본심)인댄 非合亦非離(비합역비리)로다 道流(도류)야 眞佛無形(진불무형)이요 眞道無體(진도무체)요 眞法無相(진법무상)이라 三法混融(삽법혼융)하야 和合一處(화합일처)니 旣辨不得(기변부득)을 喚作忙忙業識衆生(환작망망업식중생)이니라
“큰스님들이여! 그대들은 바쁘게 제방을 쏘다니며 무엇을 구하는가?
그대들의 발바닥이 넓적하도록 걸어 다녔는가?
부처는 구할 수 없고, 도는 이룰 수 없으며, 법은 얻을 것이 없느니라.
밖으로 형상이 있는 부처를 구한다면 그대들과는 닮지 않은 것이다.
그대들의 본래 마음을 알고자 하는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참된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된 도는 실체가 없으며, 참된 법은 모양이 없다.
이 세 가지 법이 섞이고 융통하여 한 곳에 화합한 것이니,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을 망망한 업식중생이라고 한다.”
(강의)
불교를 알기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는가?
불법을 깨닫기 위해서 천하의 선지식을 찾아 얼마나 많이 헤매었던가?
읽어보고 찾아본 성인들의 말씀과 경전 어록들은 또 얼마나 되는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다 포기한 체 잠을 쫒아가며
먹을 것을 참아가며 살아 온 날들이 그 얼마던가?
인간으로서의 모든 미련들을 끊기 위하여
‘한 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세상에 돌아오지 않으리라[一入靑山更不還(일입청산갱부환)].’는
구절을 염불을 외듯 외우며 보낸 세월이 또 얼마던가?
‘부처는 구할 수 없고, 도는 이룰 수 없으며, 법은 얻을 것이 없는데.
’ 참으로 아득하고 망망한 업식중생(業識衆生) 그대로였다.
참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된 도는 실체가 없으며 참된 법은 모양이 없다.
모양 없는 모양도 없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양도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모양도 없다.
모양이 없다고 하는 그 모양도 없다.
그래서 ‘만약 물질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결코 부처를 볼 수 없으리라.’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형상에서 형상이 없음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하였다.
14-33 眞佛(진불), 眞法(진법), 眞道(진도)
問(문), 如何是眞佛眞法眞道(여하시진불진법진도)오 乞垂開示(걸수개시)하소서 師云(사운), 佛者(불자)는 心淸淨是(심청정시)요 法者(법자)는 心光明是(심광명시)요 道者(도자)는 處處無?淨光是(처처무애정광시)라 三卽一(삼즉일)이니 皆是空名而無實有(개시공명이무실유)니라 如眞正作道人(여진정작도인)은 念念心不間斷(염념심불간단)이라
“무엇이 참 부처며, 참 법이며, 참된 도인지 비옵건대 가르쳐 주십시오.”
“부처란 마음이 청정한 것이고, 법이란 마음이 밝은 것이며,
도란 어디에나 걸림이 없는 깨끗한 빛이다.
이 셋이 곧 하나이니 모두가 헛이름일 뿐,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도를 지어가는 사람이라면 순간순간 마음에 틈새가 없어야 한다.”
(강의)
불교는 심외무법(心外無法)이다.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이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
부처도 만들고 조사도 만들고 보살과 아라한도 만든다.
부처니 법이니 도니 하는 여러 가지의 이름을 쓰고 있으나 그 또한 한 마음이다.
한 마음이면서 또한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일체다.
그래서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이다.
한순간이 한량없는 시간이고, 한량없는 시간이 곧 한순간이다.
먼 과거의 그 많은 오욕과 영광과 숱한 우여곡절들이 모두 지금 이 한순간이다.
끝없는 미래도 역시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한순간이다.
지금 이곳에서 이 한순간의 이 마음밖에는 모두가 공이다. 무다.
없다. 마음도 없다. 그래서 나는 없다. 모든 것은 없다.
진정으로 도를 지어가는 사람이라면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서도
궁극적 진리의 현현이며 진리의 현현은 곧 없음이다.
그리고 무엇을 보든 무엇을 듣든 보고 듣는 이 모든 것이
곧 진리의 현현이며 이 진리의 현현은 곧 없음이라는 사실이다.
自達磨大師(자달마대사)가 從西土來(종서토내)로 祇是覓箇不受人惑底人(지시멱개수불인혹저인)이니 後遇二祖(후우이조)하야 一言便了(일언편요)하고 始知從前虛用功夫(시지종전허용공부)니라
“달마대사께서 인도에서 오신 것은 다만 남에게 속지 않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뒤에 2조를 만났는데 2조가 한마디 말에 곧 깨닫고 비로소 종전의 공부가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강의)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뜻에 대하여 그 말이 분분하다.
오고 간 행적도 이야기 하려면 장황하다.
어떤 사람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였다.
곧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라고도 하였다.
사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라고도 하였다.
임제는 다만 남에게 속지 않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달마는 2조 혜가(慧可)대사를 만났다.
혜가는 달마에게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 달라고 하였다
달마는 불안한 그 마음을 가져오면 편안하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혜가는 불안한 마음을 가져가기 위해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찾아진다면 어찌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겠는가?
나는 벌써 그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라는 말에 곧 바로 깨달았다.
알고 보니 종전의 공부가 헛된 공부였음을 비로소 알았다.
마음, 마음 하지만 마음마저 없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마음도 없는데 불안이 어디에 있겠는가?
山僧今日見處(산승금일견처)는 與祖佛不別(여조불불별)하니 若第一句中得(약제일구중득)하면 與祖佛爲師(여조불위사)요 若第二句中得(약제이구중득)하면 與人天爲師(여인천위사)요 若第三句中得(약제삼구중득)하면 自救不了(자구불요)니라
“산승의 금일의 견해는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다.
만약 제 일구에서 깨달으면 조사나 부처의 스승이 된다.
만약 제 이구에서 깨달으면 인간과 천상계의 스승이 된다.
만약 제 삼구에서 깨달으면 자기 자신마저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강의)
법어나 경문이나 기연(機緣)에 제 일구 제 이구 제 삼구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법어라도 듣는 사람이 받아드리는 데 따라 차별이 나눠진다.
경문이나 기연도 역시 그렇다.
사구(死句)와 활구(活句)도 역시 그렇다.
육조 혜능스님이 불교를 전혀 모를 때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마음의 문이 열린 일이 있다.
마치 부드러운 흙 위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
보통 불자들은 금강경이 뚫어지도록 읽어도 깜깜 무소식이다.
마치 차돌위에 물을 쏟아 붓는 것과 같다.
육조스님에게는 금강경이 제 일구가 되었다.
책이 뚫어지도록 읽은 보통 불자들은 금강경이 제 삼구에도 미치지 못했다.
작은 한 소리의 “할”에도 깨닫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스피커를 틀어놓고 고막이 터지도록 “할”을 외쳐대도 깜깜 무소식인 사람이 있다.
삼구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제 일구로 듣는 것은 마치 허공에다 도장을 찍는 것과 같고,
제 이구로 듣는 것은 마치 물에다 도장을 찍는 것과 같고,
제 삼구로 듣는 것은 마치 진흙에다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흔적이 남는 것에 대한 차이를 표현한 말이다.
도는 우주에 꽉 차있고 우리들의 곁을 한 순간도 떠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무슨 흔적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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