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28. 14-29. 14-30

수선님 2018. 2. 4. 13:50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28. 14-29. 14-30

 

 

14-28 전통과 계보가 있어야 한다
道流(도류)야 山僧佛法(산승불법)은 的的相承(적적상승)하야 從麻谷和尙(종마곡화상)과 丹霞和尙(단하화상)과 道一和尙(도일화상)과 廬山與石鞏和尙(여산여석공화상)하야 一路行?天下(일로행변천하)하나 無人信得(무인신득)하고 盡皆起謗(진개기방)이로다 如道一和尙用處(여도일화상용처)는 純一無雜(순일무잡)이라 學人三百五百(학인삼백오백)이 盡皆不見他意(진개불견타의)요 如廬山和尙(여여산화상)은 自在眞正(자재진정)하니 順逆用處(순역용처)를 學人不測涯際(학인불측애제)하고 悉皆忙然(실개망연)이요 如丹霞和尙(여단하화상)은 翫珠隱顯(완주은현)하야 學人來者(학인래자)가 皆悉被罵(개실피매)요 如麻谷用處(여마곡용처)는 苦如黃檗(고여황벽)하야 皆近不得(개근부득)이요 如石鞏用處(여석공용처)는 向箭頭上覓人(향전두상멱인)하니 來者皆懼(내자개구)로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의 불법은 확실하고 분명한 선문의 정통을 계승한 것이다.

위로부터 내려온 마곡화상과 단하화상(738-823)과 도일화상(709-788)과 여산화상과 석공화상은

한길로 조사선의 가풍을 천하에 두루 폈는데 아무도 믿지 않고 모두들 비방만 하고 있다.

예컨대 도일화상이 법을 쓴 것은 매우 순수하여 잡티가 없었다.

그 분으로부터 도를 배우던 3백에서 5백이나 되는 학인들은 모두 다 화상의 뜻을 보지 못하였다.

여산화상은 자재하시고 참되고 바른 분이었다.

순으로 혹은 역으로 법을 쓰는 것을 학인들이 그 경계를 측량하지 못하고 모두 다 갈팡질팡 하였다.

단하화상은 구슬을 굴리는 솜씨가 자유자재하여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찾아오는 학인들마다 모두 꾸지람을 들었다.

마곡화상이 법을 쓰는 것은 그 쓰기가 소태나무와 같아서 모두들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또 석공화상이 법을 쓰는 것은 화살 끝에서 사람을 찾는 것이어서 오는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강의)

세존이 자신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가섭에게 전하고, 가섭은 다시 아난에게 전하고,

아난은 다시 상나화수에게 전하고, 상나화수는 다시 우바국다에게 전하였다.

이렇게 하여 28대에는 보리달마에게 전해졌다.

보리달마는 동토(東土)에 와서 초조(初祖)가 되고

그 후에는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으로 전해졌다.

다시 남악에서 마조로, 마조에서 백장으로, 백장에서 황벽으로, 황벽에서 임제로 전해졌다.

본문에서 소개된 조사들은 모두 그 전통이 뚜렷하며 법을 활용하는 가풍이 독특하고 파격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조사들의 가풍이 재각각인 것을 생각해보면 깨달음의 경지는 같다고 하더라도

그 활용에 있어서는 다 타고난 성격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한 사람도 같은 이가 없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삶이란 결국 지금 사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단지 존재 일체를 보는 시각이 좀 달라졌을 뿐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달라질 필요도 없다.

각양각색의 다른 삶의 모습 그대로 깨달은 삶의 모습이다.

복숭아꽃은 붉고 배꽃은 희다. 황새 다리는 길고, 오리 다리는 짧다.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밤나무에는 밤이 열린다.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다.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나 차별한 것은 여전히 차별하고 평등한 것은 여전히 평등한 그대로다.

 

 

14-29 옷 입은 것에 속지 말라 1

如山僧今日用處(여산승금일용처)는 眞正成壞(진정성괴)하며 翫弄神變(완농신변)하야 入一切境(입일체경)호대 隨處無事(수처무사)하야 境不能換(경불능환)이니라 但有來求者(단유래구자)하면 我卽便出看渠(아즉편출간거)하나 渠不識我?(거불식아)새 我便著數般衣(아편착수반의)하면 學人生解(학인생해)하야 一向入我言句(일향입아언구)하나니 苦哉(고재)

 

산승이 오늘날 법을 쓰는 것은 진정으로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며

가지고 놀기도 하고 신통변화를 부리기도 한다.

일체 경계에 들어가지만 가는 곳마다 아무 일이 없어서 경계가 나를 빼앗지 못한다.

누가 찾아와서 구하는 이가 있으면 나는 곧 바로 그를 알아보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곧 몇 가지 옷을 입어 보이면 학인들은 알음알이를 내어

한결같이 나의 말 속으로 끌려 들어오고 마니 슬픈 일이다.”

 

(강의)

앞에서 다섯 분 선지식의 가풍을 간략히 소개하고 여기서는 임제스님 자신이

법 쓰는 가풍의 일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진정으로 만들고 부순다. 마술하는 사람이 구슬을 가지고 희롱하듯 보였다가 감췄다가 한다.

또는 하나를 보이다가 여러 개를 보이기도 한다. 그 신묘한 변화는 현란하다.

그리고 모든 경계에 자유자재로 드나든다.

청정한 경계나 더러운 경계나 성인의 경계나 범부의 경계나 부처의 경계나 중생의 경계에 다 드나든다.

그러나 그 모든 경계에서 아무런 일이 없다.


그래서 경계가 나를 빼앗거나 바꾸어 놓지 못한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어떤 상황이든 나는 그 상황에 따라가지 않고 나는 나로서 당당하게 주인으로 산다.

명예와 이익이 나를 유혹하더라도, 칭찬과 비방이 나를 흔들더라도 나는 여여히 동요하지 않는다.

가난과 고통이, 병고와 몰락이, 패배와 오욕이 나를 나락으로 빠뜨리더라도 나는 당당하고 유유자적하다.

내가 하는 일에 시기와 질투로써 헐뜯고 모함하고 욕하고 방해하더라도

나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그들을 가엽고 불쌍하게 생각한다.


가르치고 제도해야할 사람들로 생각한다.

함께 덩달아 열을 올리거나 시비를 삼지 않는다. 수처작주, 수처작주한다.

법을 씀에 있어서 사람들이 찾아오면 나는 그들을 곧 알아차린다.

여러 가지 옷을 바꿔 입어가며 변신을 해 보이듯이 작용에 변화를 보이면

학인들은 그 뜻을 모른 체 말에만 끌려 다닌다.

마치 흙덩이를 쫓아가는 삽살개 같다. 흙덩이를 던지는 그 사람을 물 줄 모른다.

슬프고 안된 일이다.

 


?禿子無眼人(할독자무안인)이 把我著底衣(파아착저의)하야 認靑黃赤白(인청황적백)이로다 我脫却(아탈각)하고 入淸淨境中(입청정경중)하면 學人一見(학인일견)하고 便生?(편생흔욕)타가 我又脫却(아우탈각)하면 學人失心(학인실심)하야 忙然狂走(망연광주)하야 言我無衣(언아무의)로다 我卽向渠道(아즉향거도)호되 ?識我著衣底人否(이식아착의저인부)아하면 忽?回頭(홀이회두)하야 認我了也(인아요야)로다

 

눈멀고 머리 깎은 중이나 안목 없는 사람들이 내가 입은 옷을 가지고

푸르거나 누르거나 붉거나 흰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

내가 옷을 벗어버리고 텅 빈 경계에 들어가면 학인은 한번 보고 기꺼운 생각을 낸다.

또 내가 다시 벗어버리면 마음 둘 바를 몰라 바쁘게 달아나면서 나에게 옷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그들에게그대는 내가 옷을 입는 그 사람을 아는가?’ 라고 물으면,

홀연히 머리를 돌려버리고 나를 잘못 알고 만다.”

 

(강의)

보통의 사람들도 몇 가지의 옷을 입고 변화를 부린다.

중국영화에 변검(?)이라는 것이 있다.

장예모가 감독한 세계영화제 최다수상작이다.

소매를 휘저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가면이 바뀌는

신기한 중국 전통의 가면술을 영화화 한 것이다.

인간의 한 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선지식이 사람을 교화하는 방편으로써는 근기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갖가지 옷을 바꿔 입는 것은 당연하다.


혹은 옷을 다 벗어버리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옷이 아니라 옷을 입는 그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다.

차별 없는 참사람, 곧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다.

무위진인을 어떻게 아는가? 지금 무엇이 무위진인인가? 하는 그 사람이다.

그것도 아니면 바람소리를 듣고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이다.

불법을 물으러 갔다가 죽도록 얻어맞은 그 사람이다.

그래도 모르겠으면이다.

 

 

14-30 옷 입은 것에 속지 말라 2

大德(대덕) ?莫認衣(이막인의)하라 衣不能動(의불능동)이요 人能著衣(인능착의)하나니 有箇淸淨衣(유개청정의)하며 有箇無生衣(유개무생의)와 菩提衣(보리의)와 涅槃衣(열반의)하며 有祖衣有佛衣(유조의유불의)니라 大德(대덕)아 但有聲名文句(단유성명문구)하야 皆悉是衣變(개실시의변)이라 從臍輪氣海中鼓激(종제륜기해중고격)하야 牙齒敲?(아치고개)하야 成其句義(성기구의)니 明知是幻化(명지시환화)니라

 

큰스님들이여! 그대들은 옷을 잘못 알지 말라.

옷은 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사람이 능히 옷을 입을 수 있다.

청정한 옷이 있고, 생사가 없는 옷이 있으며 보리의 옷과 열반의 옷이 있으며,

조사의 옷과 부처의 옷도 있느니라.

큰스님들이여! 다만 소리와 명칭과 문구 따위로만 있을 뿐 모든 것은 옷에 따라 변화하는 것들이다.

배꼽 아래 단전으로부터 울려 나와서 이빨이 딱딱 부딪쳐 그 글귀와 의미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은 분명히 환화임을 알아야 한다.”

 

(강의)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옷을 입는 것에 따라 달리 보인다.

도둑놈 사기꾼도 승복만 입고 있으면 수행하는 스님으로 알고 있다.

옷으로써 의식의 변화와 법을 쓰는 작용을 상징하여 말씀하신 것은 매우 뛰어난 발상이다.

선지식이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법어가 아니다. 옷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불교의 여러 가지 고급스런 옷들을 걸어놓고 전을 편다.

가끔씩 입어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옷만 입고 있어도 실제로 그와 같은 존재가 있는 것으로 속는다.

눈이 없는 사람들은 곧 바로 사기를 당한다.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그 사람은 옷에 관계없이 늘 그 사람이며 차별 없는 참사람이다.

청정이니, 생사가 없느니, 보리니, 열반이니, 조사니, 부처니 하는 명칭을 일컫는 소리는 모두 옷에 불과하다.

그 소리들은 사람이 소리를 질러서 나오는 음성이다. 먼 하늘가에 메아리 되어 흩어지고 만다.

불을 아무리 말해도 입은 타지 않는다.


아무리 조사와 부처를 말하더라도 말을 하는 즉시 흩어지고 만다.

그보다 천만 배 수승한 말을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허망 그 자체다. 환영이다. 실체가 없는 환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는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있는 것은 있는가?

무위진인을 말하고 있으나 그 역시 옷이다. 본체는 공적한 것이다.

먼 하늘 가로 흩어지고 마는 메아리 일뿐이다.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잠간 존재할 뿐이다.

그 역시 환영이요, 환상일 뿐이다. 공이다.

원인과 조건이 효과가 있는 동안만 잠간 있는 듯 하다가 공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본래 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무위진인도 연기며 공이다. 공이며 연기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법칙인 중도의 원리다.

 


大德(대덕)아 外發聲語業(외발성어업)하며 內表心所法(내표심소법)하고 以思有念(이사유념)은 皆悉是衣(개실시의) ??認他著底衣爲實解(이지마인타착저의위실해)하면 縱經塵劫(종경진겁)하야도 祇是衣通(지시의통)이라 三界循環(삼계순환)하야 輪廻生死(윤회생사)하나니 不如無事(불여무사)니라 相逢不相識(상봉불상식)하고 共語不知名(공어부지명)이로다

 

큰스님들이여! 밖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고 안으로 마음먹은 것을 표현하며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은 모두가 옷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들이 그렇게 걸치고 있는 옷을 오인하여 실다운 견해라고 여긴다면

한량없는 세월을 보내더라도 다만 옷에 대해서만 통달할 뿐이다.

삼계에 돌고 돌며 생사에 윤회하게 되니 차라리 아무 일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서로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함께 이야기해도 상대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격이다.”

 

(강의)

생각하고 말하는 것 모두가 옷이다. 주의 주장과 사상과 개념이 모두 옷이다.

의식 사량 계교 분별이 모두 옷이다. 사람들의 의식의 세계에서 펼치는 모든 것이 옷이다.

옷을 오인하여 실다운 견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헛일이다.

다만 옷에 대해서만 도통을 했을 뿐이다.

사량 분별과 세지변총(世智辯聰)만 발달해봐야 삼계를 돌고 돌며 생사에 윤회할 뿐이다.

아무런 일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서로 만나도 알지 못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도 상대의 이름을 모른다.’라는 말은 매우 적절한 인용이다.

우리가 사람을 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과연 알기나 하는 것인가?

평생을 함께 살아도 실로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불교를 알고 이치를 알고 진리를 알고 부처를 알고 조사를 알고

보살을 알고 나한을 안다는 것이 역시 그렇다.

다만 그와 같은 말과 외형을 따라 끝없이 윤회할 뿐이다.


출처 : 제이제이
글쓴이 : 제이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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