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25. 14-26. 14-27

수선님 2018. 2. 4. 13:50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시중(示衆) 14-25. 14-26. 14-27

 

 

14-25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다 쓴다

大德(대덕)아 山僧(산승)이 說向外無法(설향외무법)하면 學人不會(학인불회)하고 便卽向裏作解(편즉향리작해)하야 便卽倚壁坐(편즉의벽좌)하며 舌??(설주상악)하고 湛然不動(담연부동)하야 取此爲是祖門佛法也(취차위시조문불법야)하나니 大錯(대착)이로다 是?若取不動淸淨境(시이약취부동청정경)하야 爲是(위시) ?卽認他無明爲郞主(이즉인타무명위랑주)라 古人云(고인운), 湛湛黑暗深坑(담담흑암심경)이 實可怖畏(실가포외)라하니 此之是也(차지시야)니라

 

큰스님들이여!

산승이 밖에는 법이 없다고 말하면 공부하는 이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곧 안으로 알음알이를 지어서 벽을 보고 앉아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는 이것을 조사문중[祖門]의 불법이라 여기는데 크게 잘못 아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임이 없는 청정한 경계를 옳다고 여긴다면 그대들은 저 무명(無明)을 주인으로 잘못 아는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깊고 깊어 캄캄한 구덩이는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강의)

이 단락은 참선공부의 일종인 묵조사선(?照邪禪)을 비판하는 이야기다.

그 때는 화두의 성격을 띤 법어는 많이 있었으나 특별히 그 법어를 오늘날 화두처럼 참구하기를 지도하는 일은 없었다.

선문답을 알아듣지 못하면 스스로 참구하고 사유할 뿐이었다.

또 묵조사선이라고 지칭하는 말도 없었다.

뒷날 그런 폐단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나온 말이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뜨는 공부에 있어서 묵묵히 앉아 안으로 관하면서 생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조사문중(祖師門中)의 불법이라고 여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캄캄한 무명의 상태를 대기대용(大機大用), 전체작용(全體作用)의 주인공, 무위진인으로 오인한 것이다.

활발발하게 살아있는 큰 생명이 목석처럼 멍청한 상태가 되어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임제스님이 삼도발문(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를 통하여 깨달은 경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불법의 대의를 알고자하다가 생각이 이러한 무기공의 상태로 기우려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병을 없애기 위해 뒷날 대혜(大慧)스님은 선문답의 언어인 화두를 들고 참구할 것을 권하게 되었고,

화두를 참구하는 공부가 불교를 깨닫는 최 첩경의 방편이라 생각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若認他動者是(이약인타동자시)면 一切艸木(일체초목)이 皆解動(개해동)하니 應可是道也(응가시도야)니라 所以動者是風大(소이동자시풍대)요 不動者是地大(부동자시지대)니 動與不動(동여부동)이 俱無自性(구무자성)이니라 ?若向動處捉他(이약향동처탁타)하면 他向不動處立(타향부동처립)하고 ?若向不動處捉他(이약향부동처착타)하면 他向動處立(타향동처립)하나니 譬如潛泉魚(비여잠천어)가 鼓波而自躍(고파이자약)이니라 大德(대덕)아 動與不動(동여부동)은 是二種境(시이종경)이니 還是無依道人(환시무의도인)은 用動用不動(용동용부동)하나니라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는 것을 오인해서 옳다고 한다면 온갖 초목들도 다 움직일 줄 아니 그것도 응당 도이리라.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성질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땅의 성질이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모두 다 고정된 자성이 없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곳에 서 있다.

또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는 곳에 서 있다.

비유하자면 마치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결을 치면서 뛰어오르는 것과 같다.

큰스님들이여,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두 가지 경계이다.

의지함이 없는 도인[無依道人(무의도인)]이라야 움직임도 쓰고 움직이지 않음도 쓰느니라.”

 

(강의)

우리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옳으냐?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다.

불교를 한마디로 표현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중도(中道).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은 선과 악의 상대적 견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쪽으로든 치우쳐 있으면 그것은 편견이고 변견(邊見)이다.

잘못된 견해다.

그래서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무위진인은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다 쓰고 다 수용한다.


양변을 멀리 벗어나서 치우치지 않는다.

()와 조()의 동시적 삶을 산다. 그것이 불교적 삶이다.

왜냐하면 선과 악과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과 있음과 없음과 사랑하고

미워함과 주관과 객관과 번뇌무명과 보리열반과 부처와 중생과 성인과 범부 등

이 모든 것이 본래로 공인데 다만 연기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에 의해서 존재하므로 공이다.

공이기 때문에 연기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이런 이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도라고 한다.

존재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런 이치를 알아서 거기에 맞게 살면 그것이 중도적 삶이다.

중도적 삶을 사는 사람을 무의도인, 무위진인이라고 한다. 부처요 조사라고 한다.

그들은 혹은 동을 쓰고 혹은 부동을 쓴다.

영가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행할 때도 선이고 앉을 때도 선이다.

···정에 그 마음 편안하다.”라 하였다.

 

 

14-26 삼종근기로 판단한다

如諸方學人來(여제방학인래)하면 山僧此間(산승차간)은 作三種根器斷(작삼종근기단)이라 如中下根器來(여중하근기개)하면 我便奪其境而不除其法(아편탈기경이부제기법)하고 或中上根器來(혹중상근기래)하면 我便境法(아편경법)을 俱奪(구탈)하고 如上上根器來(여상상근기래)하면 我便境法人(아편경법인)을 俱不奪(구불탈)하고 如有出格見解人來(여유출격견해인내)하면 山僧此間(산승차간)은 便全體作用(편전체작용)하야 不歷根器(불역근기)니라

 

제방의 학인들이 찾아오면 산승은 여기서 세 가지의 근기로 그들을 판단한다.

중하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만 빼앗고 그 법을 없애지 않는다.

혹 중상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와 법을 함께 빼앗는다.

만약 상상의 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와 법과 사람을 다 빼앗지 않는다.

만약 격을 벗어난 뛰어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오면 나는 여기서 곧 전체작용을 나타내어 근기를 따지지 않는다.”

 

(강의)

사람들의 근기란 다양하다. 하필 세 가지 근기이겠는가.

부처님은 다양한 근기를 모두 헤아려서 알맞게 대처한다.

그러나 조사들은 법을 씀에 있어서 간단명료하다.

첫째 사람이 의지할만한 것이 될 경계는 부정해버리고 그 이치[]는 그대로 두고 상대한다.

둘째 경계와 법을 모두 다 부정하고 상대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어디에 몸 둘 바를 모른다.

셋째 경계와 법과 사람을 그대로 두고 상대한다. 이것은 좀 더 높은 차원이다.

그러나 모두 상식 안에서 법을 쓴다.


그러나 격을 벗어난 뛰어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오면 근기를 헤아리지 않고 전체를 작용한다.

이런 사람은 근기에 해당시키지 않는다.

전체작용이란 임제스님이 처음 황벽스님에게 불법의 대의를 물었을 때

황벽스님이 방을 써서 보여준 경우다

[黃蘗山頭(황벽산두) 曾遭痛棒(증조통봉)].

全體作用(전체작용) 不歷根器(불역근기). 좋은 말이다.

임제스님의 대기대용이 엿보인다.

 


大德(대덕)아 到這裏(도자리)하야 學人著力處(학인착력처)니라 不通風(불통풍)하며 石火電光(석화전광)도 卽過了也(즉과요야)니라 學人(학인)이 若眼定動(약안정동)하면 卽沒交涉(즉몰교섭)이니 擬心卽差(의심즉차)요 動念卽乖(동념즉괴)라 有人解者(유인해자)하면 不離目前(불리목전)이니라

 

큰스님들이여, 여기에 이르게 되면 공부하는 이가 힘을 한껏 써야 한다.

바람도 통하지 않고 전광석화까지도 곧 지나가 버린다.

학인이 만약 눈만 깜박여도 곧 교섭이 없어진다.

마음으로 헤아리려 하면 곧 틀리며 생각을 움직였다하면 바로 어긋나 버린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눈앞을 여의지 않을 것이다.”

 

(강의)

불교의 대의를 물었는데 사정없이 방을 후려 친 그 전체작용에 대해서 무어라고 입을 땔 것인가?

있는 힘을 다 해야 하리라. 바람도 통하지 않는 자리다.

전광석화보다도 빠르다. 날아오는 총알을 세 번 네 번 쪼개는 칼바람도 어쩌지 못한다.

학인이 눈도 깜박이지 못하는 자리다.

1초는 12찰나고, 1찰나에 9백번 생멸한다는 그 마음작용으로 무어라 일러도 이미 틀려버리고 어긋나 버린다.


너무 느려서 벌써 십만 팔 천리로 어긋나 버린 것이다.

사유심(思惟心)으로 전체작용의 경계를 헤아려서야 되겠는가.

이미 멀리 달아나서 그 낙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지금 이 순간 목전에서 떠나있지 않다는 것을.

 


大德(대덕) ?擔鉢囊屎擔子(이담발낭시담자)하고 傍家走(방가주)하야 求佛求法(구불구법)하니 卽今與?馳求底(즉금여마치구저) ?還識渠?(이환식거마)아 活??(활발발지)하야 祇是勿根株(지시물근주)라 擁不聚(옹불취)하며 撥不散(발불산)하야 求著卽轉遠(구착즉전원)이니 不求(불구)면 還在目前(환재목전)하야 靈音屬耳(영음속이)어니 若人不信(약인불신)하면 徒勞百年(도로백년)이니라

 

큰스님들이여, 그대들은 바랑에 똥짐을 짊어지고 옆으로 내달리며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데,

지금 그렇게 구하는 바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대들은 아는가?

활발발하게 작용하지만 그 뿌리가 없으니 움켜잡아도 모이지 않고 펼쳐도 흩어지지가 않는다.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구하지 않으면 도리어 눈앞에 있다.

신령스런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데 만약 이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 백년 세월을 헛수고만 할 뿐이다.”

 

(강의)

똥자루를 짊어지고 옆으로만 내달린다.”

옆이란 무엇인가? 치우친 소견이다.

유무, 선악, 동정, 고락, 증애, 역순, 시비 등등의 양변에 떨어진 견해다.

육조스님도 도명을 만나 첫 법문에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선악 시비의 옆길을 헤매지 말라는 뜻이다.

세존이 처음 성도하시고 다섯 비구들을 찾아간 것도 고행의 삶과 쾌락의 삶,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말고 중도적 삶을 살기를 권하기 위해서다.


나는 중도를 깨달았노라.”라는 <중도 대 선언(中道大宣言)>이 불타의 첫 일성이었다.

본래로 시비, 선악, 고락, 유무를 벗어난 지금 구하고 있는 그 사람을 아는 것이 문제의 열쇄다.

인간은 본래 그와 같은 치우친 견해가 아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그 본래 사람을 알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온 우주적 작용을 하지만 무슨 뿌리나 줄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움켜잡을 수도 없다. 흩어도 흩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구하거나 찾으면 찾아질 것 같으나 찾을수록 멀어지는 것이 또한 이 사람이다.

차라리 찾지 않으면 눈앞에 있다.

저 바람소리가 그 사람의 소리인가? 그 사람이 저 바람 소리인가?

지금 이 사람은 비시, 선악, 고락, 유무인가?

 

 

14-27 모두다 놓아버리라

道流(도류)야 一刹那間(일찰나간)에 便入華藏世界(편입화장세계)하며 入毘盧遮那國土(입비로자나국토)하며 入解脫國土(입해탈국토)하며 入神通國土(입신통국토)하며 入淸淨國土(입청정국토)하며 入法界(입법계)하며 入穢入淨(입예입정)하며 入凡入聖(입범입성)하며 入餓鬼畜生(입아귀축생)이나 處處討覓尋(처처토멱심)하야도 皆不見有生有死(개불견유생유사)하고 唯有空名(유유공명)이로다 幻化空花(환화공화)를 不勞把捉(불로파착)이니 得失是非(득실시비)를 一時放却(일시방각)하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한 찰나 사이에 연화장 세계에 들어가고 비로자나불의 국토에도 들어간다.

해탈국토에도 들어가고 신통국토에 들어가고 청정국토에도 들어간다.

법계에도 들어가며 깨끗한 곳에 들어가고 더러운 곳에 들어간다.

범부의 세계에 들어가고 성인의 세계에 들어가며, 아귀·축생의 세계에도 들어간다.

그러나 곳곳마다 찾고 또 찾아보아도 아무 곳에도 생사가 있음을 보지 못하고 허망한 이름만 있을 뿐이다.

환영이며 허깨비며 헛꽃인 것을 애써서 붙잡으려 하지 말고 이득과 손실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모두다 놓아버려라.”

 

(강의)

사람의 마음은 미묘 불가사의하다.

사람이 보고 듣고 감지하고 창조해내는 그 능력도 역시 무궁무진하다.

촌보도 움직이지 않고 일체 세계를 다 돌아다닌다.

한 순간에 삼천 가지의 삶을 산다[一念三千(일념삼천)]. 지옥, 아귀, 축생, 성인, 범부 등 없는 것이 없다.

작은 먼지 속에 앉아서 무한한 세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실이 분명하지만 그 종적을 찾아보면 어디에도 태어나고 죽고 가고 오고하는 일이 없다.

허망한 이름뿐이다.

극락세계도 화장세계도 지옥세계도, 해탈도 신통도 청정하고 더러운 곳도,

범부도 성인도 아귀도 축생도 모두가 헛된 이름뿐 실체는 없다.

그 인생이 어디쯤 왔던지 뒤돌아보면 영광도 오욕도 기쁨도 슬픔도 성공도 실패도 승리도 패배도 텅 비어 없다.


누구나 똑 같다. 부귀빈천 남녀노소 그 누구에게도 한결같다.

한바탕 꿈이고 스쳐가는 환영이다.

인생사 일체가 환영이며 허깨비며 헛꽃인 것을 애써서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말라.

이득과 손실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모두다 놓아버려라.

깃털처럼 가볍게 살라. 물처럼 흘러 가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살라.


이런 노래가 있다.

굽이쳐 넘실대며 흘러가는 길고 긴 강물, 그 물결에 휩쓸리듯 옛 사람들 모두 다 사라졌네.

옳고 그르고 이기고 지는 일 모두가 허망하여라.

청산은 예와 다름없건만 서산의 붉은 해는 몇 번이나 넘어 갔던가.

고금의 많고 많은 일들 한바탕 웃음에 붙여 보낸다.


신심명의 글이다. 다시 한번 음미해야 한다.

幻化空花(환화공화) 不勞把捉(불노파착). 得失是非(득실시비) 一時放却(일시방각).

인생은 결국 이것이다.


출처 : 제이제이
글쓴이 : 제이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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