參禪要旨
허운 화상(虛雲 和尙) 법어
대성(大晟) 신역(新譯)
길상사
목 차
허운 화상(虛雲 和尙) 약전(略傳) ............................... 1
참선요지 서(序) .............................................................. 3
제1부 참선 법문 Ⅰ ....................................................... 7
참선의 선결조건 ........................................................... 7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 11
화두참선법 .................................................................... 14
화두와 관심(觀心) ....................................................... 17
공부의 어려움과 쉬움 ............................................... 22
1. 초심자의 어려움과 쉬움 ........................................... 22
2. 구참자의 어려움과 쉬움 ........................................... 25
제2부 참선 법문 Ⅱ ....................................................... 29
이끄는 말 ...................................................................... 29
1. 깊이 인과(因果)를 믿어라 ........................................ 29
2. 계율을 엄수하라 ......................................................... 34
3. 신심(信心)을 굳게 지니라 ....................................... 36
4. 수행의 길을 정하라 ................................................... 37
참선 법문 .................................................................... 38
1. 좌선의 기초 ............................................................... 39
2. 객진번뇌(客塵煩惱) ................................................. 41
3. 화두방편(話頭方便) ................................................. 43
4. 의정(疑情) .................................................................. 45
5. 조고화두(照顧話頭)와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 50
6. 생사심(生死心)과 장원심(長遠心) .......................... 51
공부의 어려움과 쉬움 .............................................. 55
1. 초심자의 어려움과 쉬움 ........................................... 53
2. 구참자의 어려움과 쉬움 ........................................... 56
결론(結論) ................................................................... 63
제3부 참선 경어(警語) ................................................... 65
제4부 섣달 그믐날의 가르침 ....................................... 71
제5부 수행과 불(不)수행 ............................................... 75
원문(原文) ......................................................................... 79
역자후기 ............................................................................ 125
허운 화상(虛雲 和尙) 약전(略傳)
허운 스님은 1840년 중국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출생하였다. 속성(俗姓)은 소(蕭)씨이며, 19세 때 출가하여 그 다음해에 묘련(妙蓮) 화상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2, 30 대에는 각지의 대덕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경론(經論)을 배우다가, 43세에 발심하여 오대산(五臺山)을 향해 3보1배(三步一拜)로 나아가서 45세 때 오대산에 도착하였다.
이후로 각지의 명산(名山)과 고묘(古廟) 등지를 참배하고 49세 때는 티벳 라사까지 순력하였다. 그리고 계속 남하하여 50세 때는 인도, 실론, 미얀마의 불적(佛跡)을 참배하고 다시 북상하여 계족산(鷄足山)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53세 때는 구화산(九華山)에 도착하여 3년을 머물고, 56세 때 강소성(江蘇省)의 고호사(高昊寺)에서 정진하던 중 어느 날 끓는 물에 손이 데어 찻잔을 떨어뜨렸는데 잔 깨지는 소리에 깨쳤다.
61세에 다시 오대산과 오악(五岳, 태산, 화산, 형산, 항산, 숭산)을 참방하고, 63세에 곤명(昆明)의 복흥사(福興寺)에서 폐관(閉關, 독방에 문을 닫고 들어 앉음)했다가 65세에 출관(出關)하였다. 이후 각지를 다니며 경전 강의, 전계(傳戒) 등 중생교화와 가람(伽藍)의 중건불사(重建佛事)에 힘쓰기를 수십 년이었다.
97세부터 103세 사이에는 육조(六祖) 스님의 도량인 남화사(南華寺)에 머물고, 이듬해부터 수년간에 걸쳐 운문종(雲門宗)의 개창 도량인 운문사(雲門寺)를 복원하였다. 115세 되던 1954년에 강서성(江西省)영수현(永修縣)의 운거산(雲居山)으로 옮겨가서 진여사(眞如寺)를 중흥하고 여기서 주석하다가 1959년 10월 13일 세수 120세로 입적하였다.
스님은 젊은 시절 온갖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오직 불법을 구했으며, 갖은 병고와 액난에도 굴하지 않고 계율을 엄수하고 근고정진(勤苦精進)한 끝에, 종문(宗門)의 심인(心印)을 깊이 깨달아 단절되다시피한 5종 가풍을 다시 일으켰다. 외세의 침략과 공산 정권의 억압 하에서 승도(僧徒)를 수호하고 사찰, 불당의 파괴를 막았으며 대소 수십 개소의 가람을 복원하는 한편, 수많은 불자들에게 계(戒)를 주고 불문에 귀의시켰다. 그의 문하에서 출가하거나 수계한 재가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허운 스님의 행화(行化) 내력을 더 자세히 알려면 조성우, 「허운노화상 십난사십팔기」(虛雲老和尙 十難四十八奇), 보림사, 1992를 참고하라.
참선요지 서(序)
선(禪)은 가장 궁극적인 일[極則事]이며, 모든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다. 이 일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길이 소멸해 버린 자리[言語道斷 心行處滅]이며, 생각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다.
달마(達摩) 스님이 서쪽(인도)에서 오셔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不立文字 直指人心],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한다[見性成佛]’ 하였으니, 만약 어떤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아 버리면 곧 법왕(法王, 부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될 것이다. 앞으로는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隨緣] 과거의 업을 녹이고, 다시 새로운 재앙을 짓지 말라. 타고난 비공(鼻孔, 콧구멍. ‘본래 면목’을 뜻함)이 털끝만큼도 모자람이 없다. 자신의 옷 속의 구슬을 어찌 잃어버린 적이 있겠는가. 원래 찾을 것이 없다.
송대(宋代)에 와서 사람들의 근기(根器, 자질)가 점점 하열(下劣)해지자 조사(祖師) 스님들이 그 증세에 맞는 약을 베풀게 되어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법문을 열게 되었지만, 실은 화두도 망상(妄想)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독(毒)으로써 독을 공격하는 것이니, 자기가 참구하는 화두[所參話頭]로써 잡념을 대적하여 꾸준히 밀고 나가면 점점 주관[能]과 객관[所]이 함께 없어지고, 나타나는 업과 흐르는 식[現業流識]은 끊어지며, 헛된 마음[偸心]이 다 소멸되는 때에 도달하여, 어떤 경계(境界, 객관의 대상)나 인연[緣]을 만나게 되면, 무엇에 딱 부딪치듯, 열쇠가 자물쇠에 꼭 들어맞듯[觸著關棙], 홀연히 허공이 부서지고 대지가 가라앉으면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볼 것이다. 이렇게 되면 큰 일[大事]을 해 마친 것인데, 어느 시대나 이런 인물이 나오지 않는 때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성취하는 사람이 적어서 멀리 당(唐)대의 왕성함에 미치지 못하니 무슨 까닭인가. (요즘) 사람이 옛 사람들에 미치지 못하고, 법(法, 깨달음)이 종취(宗趣, 선종의 궁극적 이치)를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왕년에 나의 스승이신 허운(虛雲) 스님께서 운문산(雲門山)을 이끄실 때, 당시의 (수행자들의 이러한) 병을 구하기 위해, 남의 욕먹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고[不惜眉毛], 참선의 요지를 염출(拈出, 집어냄)하여 선후(先後)를 제시한 것이 상당히 많은데, 이미 스님의 어록[法彙]에 실려 있다. 이것을 읽어 본 사람은 자기가 나아갈 길을 분명히 알 것이다.
스님께서는 특별히 화두(話頭)와 화미(話尾)를 분별하여 말씀하시기를, “말[話]은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이 말의 머리[頭]이다” 하셨다. 또, “이른바 화두란 곧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一念未生之際]이며, 한 생각이 일어났다 하면 이미 화미(話尾)를 이룬다”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죽도록 문 두드리개[敲門瓦子]만 꼭 쥐고, ‘염불하는 자는 누군가’를 계속 염(念)할 뿐이니 이것은 염화두(念話頭)를 이룰 뿐이다. 이렇게 하면 의정(疑情)이 일어나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화미(話尾)에서 마음을 쓰는 것이어서 곧 생멸법(生滅法)이며, 결국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셨다. 무릇 이것은 예전 사람들이 말하지 못한 귀중한 말씀이다. 이 외에도 네 가지 경계(境界)의 병과 그 병을 대치하는 약을 가르치셨으니, 이 역시 노파심의 간절함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홍콩의 불경유통처(佛經流痛處) 임협암(林俠菴) 거사가 이 법문을 읽고 난 뒤에 더욱 이 구절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이것을 단행본 소책자로 만들어 널리 중생을 건지고자 하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임선생은 법을 가려내는 안목의 밝기가 마치 검은 용의 턱 안에서 구슬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
옛 성현 구여직(瞿汝稷)은 “만물 중에 사람으로 태어나고, 사람 가운데 남자가 되고, 남자로서 책을 읽고, 책 중에서도 불경[竺墳]을 읽을 줄 알고, 불경 중에도 선종[宗門]을 알았으니, 이것은 마치 젖을 구해 먹는 데 설산(雪山)에 사는 소의 우유를 얻고, 그 우유에서 다시 낙(酪)을, 낙에서 소(酥)를, 소에서 다시 제호(醍醐)를 얻은 것과 같다”고 했다.
아아,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을 듣기도 어려우며, 중국에 태어나기도 어렵고, 선지식을 만나기도 어렵다. 우리는 다행히도 스님의 출세(出世, 세상에 나오심)를 만나서 네 가지 어려움을 다 극복했으며, 임선생 등 여러 사람은 법을 듣고 믿어 대중에 공양하게 되었다. 경(經)에 이르기를 ‘여러 가지 공양 중에 법공양(法供養)이 최상이라’ 했으니, 이러한 공덕이 산수비유(算數比喩)로 어찌 미칠 수 있으리오.
가까운 분이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니, 수천 리 밖에서 소리와 기운이 서로 응한 것이다. 이는 5백 생(生) 전의 인연의 결과라, 내 못남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억지로 비단 위에 꽃을 더했으니, 여러 사람의 뜻에 따르느라 결국 부처님의 머리 위에 똥을 바른 셈[佛頭之糞]이다.
불기 2,500년(1956년) 丙申 초여름
말레이시아 불학사(佛學社) 도사실(道師室)
석융희(釋融熙) 서(序)
참선요지(參禪要旨)
제1부 참선 법문 Ⅰ
참선의 선결조건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明心見性]이다. 자기 마음의 오염(汚染)이 없어지면 진실로 자성(自性, 자기의 본래 성품)의 참 모습을 본다. 오염이란 바로 망상(妄想)과 집착(執着)이며, 자성이란 곧 여래(부처)의 지혜와 덕상(德相)이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다 같이 갖추고 있는 것으로,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無二無別]. 만약 망상과 집착을 여의면, 자기의 여래 지혜와 덕상을 증득(證得)하여 곧 부처가 될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곧 중생인 것이다.
다만 우리는 무량겁(無量劫)을 내려 오면서 어리석게 생사(生死)의 구렁텅이에 빠져 오염(汚染)된지 오래이므로, 능히 그 자리에서 단박에 망상을 벗어나 실답게 본래 성품[本性]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참선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의 선결조건은 바로 망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망상을 버릴 것인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것으로 “(마음을) 쉬면 곧 깨닫는다”[歇卽菩提]고 하신 이 ‘쉼’[歇] 만한 것이 없다.
선종(禪宗)은 달마조사께서 동토(東土, 중국)에 오시고부터 육조(六祖, 혜능 대사)에 이른 후에 선풍이 널리 퍼져 고금에 떨쳤다. 그러나 달마대사와 육조 스님께서 학인(學人, 도를 깨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 보통 스님네를 가리킴)들을 가르친 가장 긴요한 말씀 중에 “모든 인연을 한꺼번에 쉬어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屛息諸緣 一念不生] 하신 말씀 만한 것이 없다.
모든 인연을 한꺼번에 쉬어버린다[屛息諸緣] 함은 온갖 인연을 다 놓아 버린다[萬緣放下]는 뜻이며, 그래서 “온갖 인연을 다 놓아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萬緣放下 一念不生]라고도 하셨다. 이 두 구절의 말씀은 실로 참선의 선결조건이며, 이 두 구절의 말씀과 같은 결과에 도달하지 못하면 참선은 단지 말 뿐이고 성공할 수 없어, 그 문 안에 들어서는 것[入門]도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온갖 인연에 뒤덮히고 휘감겨 생각 생각이 생멸(生滅)한다면, 그대는 어디 참선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온갖 인연을 다 놓아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참선의 선결조건임을 우리가 이미 알았다면, 어째서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가. 수승한 사람은 한 생각을 아주 쉬어 버려 곧 바로 무생(無生,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의 마음자리)에 도달하고 단박에 깨달음을 증득하여 털끝만치도 얽매임이 없게 된다. 그 다음 사람은 이(理, 이치)로써 사(事, 현상)를 제(除)함으로써, 비로소 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번뇌와 보리(菩提, 깨달음),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모두 거짓 이름[假名]일 뿐이며, 원래 나와 자성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물은 다 꿈과 같고 환(幻)과 같으며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如夢幻泡影]. 나의 이 사대색신(四大色身, 地-水-火-風으로 된 육신)과 산하대지(山河大地)는 자성 가운데 있는 것으로서, 바다 가운데 뜬 거품[海中浮漚]과 같아 일어났다가 꺼졌다 하지만 본체를 장애함이 없다.
일체의 환(幻)과 같은 생주이멸(生住移滅) 현상을 따르면서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마음[欣厭取捨]을 일으키지 말고, 통째로 놓아버려[通身放下] 죽은 사람처럼 되면 자연히 육근 육진의 반연하는 식심[根塵識心]이 떨어져 나갈 것이며,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고 애착하는 마음[貪瞋痴愛]도 모두 소멸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몸을 통한 아프고 가렵고 괴롭고 즐거움[痛癢苦樂]과, 배고프고 춥고 배부르고 따뜻함[飢寒飽暖]과, 영화롭고 욕되고 살고 죽음[榮辱生死]과, 화복길흉(禍福吉凶)과, 헐뜯고 칭찬하고 얻고 잃음[毁譽得喪]과, 안전하고 위태롭고 험하고 평탄함[安危險夷] 등을 모조리 도외시해 버리고, 이런 식으로 헤아리는 것도 놓아 버리고, 하나도 놓고 일체도 놓아서 아주 완전히 놓아 버려야만, 모든 인연을 놓아 버렸다[萬緣放下]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인연을 다 놓아 버리면 망상은 스스로 없어지고 분별은 일어나지 않으며 집착을 멀리 여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되어, 자성광명(自性光明, 참나의 빛)이 온통 환히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참선의 조건이 구비된 것이며, 다시 노력하여 진실로 참구(參究)하면,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볼 수 있는 분(分)이 있게 된다.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근래에 참선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기를, ‘법(法)이라 하는 것이 본래 법이 아니며, 한 번 말[言詮]에 떨어지면, 곧 실다운 뜻이 아니다. 이 한 마음[一心]을 밝히면 본래 부처이며 바로 그 자리에서 아무 일도 없고, 모든 것이 제각기 눈 앞에 이루어져 있어[各各現成], 수행을 말하고 증득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마(魔)의 이야기다’ 한다.
달마스님이 동토(東土)에 오셔서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자신의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게 한다”[直指人心 見性成佛]고 하심으로써 대지의 모든 중생이 다 부처임을 아주 분명하게 일러 주셨다. 누구든지 바로 이 자리에서 이 청정한 자기의 성품을 알면, 일체에 수순(隨順, 남의 뜻에 따라 줌)하되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24시간 행주좌와(行住坐臥,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누움)에 마음이 도무지 변하지 않으니, 이것이 지금 다 이루어져 있는 부처[現成佛]이며, 마음 쓸 필요도 없고 힘 들일 필요도 없으며, 다시는 해야 할 일도 없어, 털끝만치도 말이나 생각이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부처를 이루는 일이 가장 쉬운 일이며 가장 자유로운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있는 일이므로 밖으로 구할 필요가 없다. 대지(大地)의 일체 중생이 오랜 겁이 지나도록 사생육도(四生六道)에 윤회하며 영원히 고통바다[苦海]에 빠지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고, 성불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얻기를 원한다면, 불조(佛祖, 부처와 조사)의 지극한 말씀을 진실로 믿어야 한다. 만약 일체를 놓아 버리고, 선(善)도 악(惡)도 모두 생각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서 부처를 이룰 것이다. 그래서 제불보살(諸佛菩薩,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과 역대(歷代) 조사께서 일체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겠다고 발원하신 것이니, 이것은 아무 근거 없이 공연히 큰 발원을 하고 큰 소리를 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법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며, 부처님과 조사께서 되풀이해서 천명(闡明)하시고 정녕(叮嚀, 간절하고 정성스러움)히 부촉(咐囑, 정법을 이어갈 것을 부탁하여 맡김)하신 진실한 말씀에는 터럭만큼도 헛되거나 거짓된 것이 없다. 대지의 일체 중생이 무량겁(無量劫) 이래로, 생사고해(生死苦海)에 빠져서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하면서 윤회를 그치지 않으니, 이는 마음이 미혹(迷惑)하고 전도(顚倒)되어 있어,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무지)과 합했기[背覺合塵] 때문이다. 마치 순금이 똥구덩이에 빠진 것과 같아서 사용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그 더러움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은 대자비(大慈悲)의 마음으로 부득이 팔만 사천 법문(法門,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을 설하여, 각양각색의 근기(根器)가 서로 다른 중생들의 탐진치(貪瞋痴)와 애착[愛]의 팔만 사천 습기(習氣)의 병을 대치(對治, 대응하여 치료함)하신 것이니, 마치 순금 빛깔 위에 여러 가지 가지 더러운 때가 끼어 있으므로, 그대로 하여금 대패[鏟]로 깎고, 솔[刷]로 털고, 물로 씻고, 헝겊으로 닦아내어 깨끗이 하도록 하신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모든 방편문(方便門)이 다 묘한 법[妙法]이며, 모두가 생사를 해결하여 성불할 수 있는 길[成佛道]인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의 근기에 적합한가 아닌가가 문제될 뿐, 굳이 법문의 높고 낮음을 구분할 것이 아니다.
중국에 전해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법문은 종(宗, 선종), 교(敎, 교종), 율(律, 율종), 정(淨, 정토종), 밀(密, 밀교)인데, 이 다섯 가지 법문은 각인의 근기와 성향에 따르기 위한 것이니 어느 한 문만 수행해도 무방하다. 한 문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니, 오래도록 변함없이 나아가면 반드시 성취할 것이다.
화두참선법
종문(宗門)은 참선을 위주로 한다. 참선이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明心見性]이다. 이것은 바로 자기의 본래면목을 참구하여 뚫는 것이니, 소위 ‘자성을 밝게 깨쳐, 본래 성품을 투철히 보는 것’[明悟自心 徹見本性]이다. 이 법문은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어 보이심으로부터 달마 대사께서 중국에 오셔서 전래하신 이후에 이르기까지 그 공부에 착수하는 방법은 여러 차례 변천이 있었다.
당(唐), 송(宋) 이전의 선사(禪師)들은 일언반구(一言半句)에 바로 도를 깨달았으며, 스승과 제자간의 전수(傳授)도 마음으로 마음을 인가하는 것[以心印心]에 불과하여 어떤 실법(實法, 전수되는 실체가 있는 법)도 있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묻고 답하는 것도 그때 그때 방편으로 속박을 풀어주는 것에 불과하여, 병에 따라 약을 줄 뿐이었다.
그러나 송대(宋代) 이후 사람들의 근기(根器)가 하열(下劣)해져서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니, 비유해서 말하면 ‘일체를 놓아라’[放下一切]거나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善惡莫思] 해도 도무지 놓지 못하며, 선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생각하는 식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가 되자 조사 스님들이 부득이 독으로써 독을 공격하는[以毒攻毒] 방법을 채택하여 학인(學人)에게 ‘공안(公案)을 참구하라’, 또는 ‘화두(話頭)를 보라’고 한 것이다. 심지어 하나의 죽은 화두[死話頭]를 물고 늘어지되 긴급히 계속하여 한 순간도 놓치지 않도록 한다. 마치 늙은 쥐가 나무궤짝을 뚫을 때 같이 한 군데만 계속 파면 뚫어질 때까지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한 생각[一念]으로써 만 생각[萬念]을 물리치는 것이니 이는 실로 부득이한 방법이다. 마치 나쁜 독이 몸 안에 있어, 칼로 째서 치료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것과 같다.
옛 사람들의 공안이 많으나, 후에 와서는 오로지 화두를 보라[看話頭]고만 가르쳤다. 예컨대 ‘이 송장 끌고 다니는 것은 누구인가’[拕死屍的是誰] 하는 화두나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어떤 것이 나의 본래면목인가’[父母未生前如何是我本來面目] 하는 화두를 보라고 하는 것이다.
근래에 와서 제방(諸方)에서 많이 쓰는 화두는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 하는 것인데, 이 화두는 실은 어떤 식으로 표현해도 다 마찬가지이며 모두 너무나 평범하여 별로 특별한 것도 없다. 요컨대, 경(經)을 읽는 것은 누구며, 주문을 외우는 것은 누구며,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것은 누구며, 밥을 먹는 것은 누구며, 옷을 입는 것은 누구며, 길을 가는 것은 누구며, 잠자고 깨어나는 것은 누구냐 하는 것들인데, 모두 같은 내용의 화두인 것이다.
‘누구인가[誰]?’라는 물음의 답은 바로 마음이다. 말[話]은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말의 머리[話之頭]요, 생각도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생각의 머리[念之頭]이다. 만법(萬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기므로 마음은 만법의 머리[萬法之頭]인 것이다. 실로 화두는 바로 생각의 머리[念頭, 생각 이전의 자리]이며, 생각 이전의 머리는 바로 마음이다. 요컨대 ‘한 생각 일어나기 전’[一念未生之前]이 바로 화두인 것이다.
화두(話頭)와 관심(觀心)
따라서 우리가 도(道)를 알려면 화두(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자리)를 보아야 하며, 이것이 곧 마음을 관하는 것[觀心]이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은 바로 마음이다. 그러므로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을 본다[看, 참구한다]는 것은 곧 마음을 관(觀)하는 것이다. 성품은 곧 마음이며,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反聞聞自性]고 하는 것은 관(觀)하는 자기 마음을 돌이켜 관하는 것[反觀觀自心]이다. ‘청정한 깨달음의 상[淸淨覺相]을 원만히 비추어 본다’고 할 때의 ‘청정한 깨달음의 상’이 바로 마음이며 ‘비추어 본다’[照] 함이 곧 관(觀)이다.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이며, 부처를 염하는 것[念佛]이 곧 부처를 관하는 것[觀佛]이고, 부처를 관하는 것[觀佛]이 마음을 관하는 것[觀心]이다. 그래서 ‘화두를 보라’[看話頭]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 화두를 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부처를 염하는 자기) 마음을 관하는 것[觀心]이며, 곧 자기 마음의 청정한 깨달음의 체[自心淸淨覺體]를 관조(觀照)하는 것이고, 또한 자기 성품의 부처[自性佛]를 관조하는 것이다.
마음이 곧 성품이고 깨달음이며 부처이다. 이것은 형상이나 고정된 처소[方所]가 없으므로 끝내 붙잡을 수 없다. 청정하게 본래 있는 그대로이며, 법계(法界)에 두루하여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고 가고 옴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본래 그대로 이루어져 있는[本來現成] 청정한 법신불(法身佛)인 것이다.
수행인이 육근(六根)을 모두 거두어 들여, 한 생각이 처음 일어나는 곳을 살피면서 이 하나의 화두를 비추어 보면, 생각을 떠난 청정한 자기의 마음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면밀하고 담담하게 고요히 비추어보면, 곧 바로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하고, 몸과 마음이 함께 고요하여 마침내 한 일도 없게 된다[無一事]. 이때부터는 주야육시(晝夜六時, 24시간)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여여부동(如如不動)하여, 날이 갈수록 공부가 깊어지면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고통은 없어지고 제도하는 일은 끝날 것이다.
옛날 고봉(高峯) 조사께서 이르기를,
“공부인은 이 화두를 살피기를, 마치 기왓장을 만 길이나 되는 깊은 못에 던지면 곧장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이 하라. 이렇게 하여 만약 7일이 되도록 깨닫지 못하면 내 머리를 자르라” 하셨다. 동참(同參, 같이 참구함)하는 이들이여, 이것은 몸소 겪어 본 분[過來人]이 하신 말씀으로 진실한 말씀이며, 사람들을 속이는 허망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어째서 현대인들은 화두를 드는 사람은 많아도, 도를 깨치는 사람은 적은가. 이것은 요즘 사람의 근기(根器)가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부인이 참선을 하면서 화두의 이로(理路, 화두를 참구해 들어가는 길)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동서남북으로 분주하게 오가며 스승을 찾고 법을 묻기만 하다가, 늘그막에 이르러서는 한 개의 화두도 분명하게 다루지 못하게 된다. 어떤 것이 화두인지, 어떻게 해야 화두를 든다고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고, 한 평생 언구(言句)와 명상(名相, 이름과 형상)에 집착하여 화미(話尾)를 가지고 마음을 쓰면서, “부처님을 참구하는 이는 누구인가?”, “화두를 비추어 보라” 하면서 계속 하다보니 화두와는 정반대로 어긋난다.
이렇게 해서야 어떻게 본연(本然)의 무위대도(無爲大道)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일체를 받지 않는[一切不受] 임금자리[王位]에 도달하리요. 금 가루도 눈에 들어가면, 눈이 멀 뿐인데 어떻게 큰 광명을 볼 수 있겠는가. 가련하고 가련하다. 훌륭한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 도를 배우니 그 뜻[志願]은 비범하지만 결과는 한 바탕 헛수고일 뿐이니, 매우 슬프고 불쌍한 일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차라리 천 년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하루 공부를 잘못하면 안 된다’고 했으니, 수행하여 도를 깨달음은 쉽고도 어려우며 어렵고도 쉬운 것이다. 이것은 전등을 켜는 것과 같아서, 알면 손가락 한 번 퉁기는 사이에 크게 광명을 놓고 만년의 어두움을 순간에 없애지만, 알지 못하면 기회는 놓치고 등불은 꺼져 번뇌만 더 늘어난다.
더러 참선을 하면서 화두를 들던 사람이 마(魔)에 집착하여 발광(發狂)하고, 피를 토하고 병이 나며, 무명(無明)의 불꽃이 커져 나와 남이라는 생각[人我相]이 깊어지는 것은 현저한 예가 아닌가.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잘 조화(調和)시켜서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기(氣)를 고르게 하기를 힘써서, (마음에) 걸림도 없고, 나와 남이라는 소견도 없어,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항상 현묘한 기틀에 오묘하게 계합[妙合玄機]할 수 있어야 한다.
공부의 어려움과 쉬움
1. 초심자의 어려움과 쉬움
참선이라는 이 한 법은 본래 분별(分別, 이치를 따져서 논하는 일)할 수 없지만, 다만 공부해 가는 데 있어서 초심자[初參]는 초심자대로 어려움과 쉬움이 있고, 구참자[老參]는 구참자대로 어려움과 쉬움이 있다. 그러면 초심자의 어려움이란 무엇인가.
몸과 마음이 순숙(純熟, 순수하게 성숙됨)하지 않아 들어갈 길[門路]을 찾지만 분명하지가 않고, 공부를 해도 향상되지 않으며, 마음이 조급하지 않으면 그저 눈만 껌벅거리며 세월을 보내게 되니, 결국 ‘첫해에는 처음이라 참구해 보는 것이고, 그 다음 해에는 벌써 오래 참구한 것처럼 되며, 3년이 되면 아예 공부를 놓는’ 결과가 되고 만다.
초심자의 쉬움이란 무엇인가? 오직 하나의 신심(信心)과, 장영심(長永心)과 무심(無心)만 갖추면 된다는 것이다. 소위 신심이란 것은 첫째, 나의 마음이 본래 부처이며 시방 세계의 모든 중생과 더불어 다르지 않음을 믿는 것이요, 둘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모든 법이 생사를 요달(了達, 완전히 통달함)하여 부처를 이루는 도(道)임을 믿는 것이다.
이른바 장영심(長永心)이란, 어떤 한 법을 선정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수행하되 내생(來生)과 후내생(後來生)에 이르도록 오로지 이와 같이 지켜가는 것이다. 참선이라는 것은 반드시 이와 같이 참구해야 하고, 염불도 반드시 이와 같이 염해야 하며, 지주(持呪, 주문의 지송)라는 것도 반드시 이와 같이 지송(持誦)해야 하고, 교학(敎學)이라는 것도 반드시 이와 같이 듣고 생각하고 수행[聞思修]해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법문을 수행하더라도 계(戒)가 근본이 된다. 과연 이와 같이 수행해 나가기만 한다면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위산(潙山)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누구든지 능히 이 법을 수행하되 3생(生)을 물러서지 않는다면 반드시 부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셨고, 또 영가(永嘉) 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만약 내가 허망한 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영원히 발설지옥(拔舌地獄)에 떨어져 헤아릴 수 없는 겁을 보낼 것”이라 하셨다.
이른바 무심(無心)이란, 일체를 놓아버려[放下一切] 마치 죽은 사람 같으며 종일토록 대중을 따라 움직이지만[隨衆起到], 다시는 일점의 분별이나 집착도 일으키지 아니하여 한 사람의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는 것이다.
초발심(初發心)의 사람이 이 세 가지 마음을 갖추고 만약 참선하여 화두를 든다면, 바로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하라. 그대 스스로 묵묵히 생각하다 몇 번 소리내어 아미타불을 부르고 이 염불하는 것이 누구이며, 이 한 생각은 어디서 일어나는 것인지를 보라. 그대는 알아야 한다. 이 한 생각은 내 입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내 몸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만약 그것이 내 몸이나 입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내가 죽고 나서도 내 몸과 입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왜 염불을 못하는가?
그대는 알아야 한다. 이 한 생각은 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니, 바로 그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포착하여 예리하게 살펴보기를,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쥐구멍 앞에서) 기다리듯이[如猫捕鼠], 모든 정신을 여기에 집중하여 일체 딴 생각이 없이 하되 완급(緩急)을 적당하게 할 것이니, 너무 조급하게 해서 병이 나게 해서는 안된다.
다니고 서고 앉고 눕는[行住坐臥] 동안 내내 이와 같이 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가면 공부가 깊어질 것이다. 그러다가 참외가 익어 꼭지가 떨어지듯,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무엇에 부딪치거나 밀치는 순간에도 홀연히 대오(大悟)할 것이다. 이때는 사람이 물을 마셔보고 그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서 곧 걸림 없는 경지[無礙之地]에 이르며, 네거리에서 자기 아버지를 만난듯이 큰 안락을 얻게 될 것이다.
2. 구참자의 어려움과 쉬움
오래 참구한 이의 어렵고 쉬움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오래 참구한 사람은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해 보았고, 공부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며 한 차례 단련되었으므로 몸과 마음이 순숙(純熟)해져서 공부길이 분명하며[理路淸楚], 마음먹은 대로 공부할 수 있으므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오래 참구한 사람의 어려움은, 자재(自在)하고 명백하므로 그 상태로 중간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화성(化城)의 중간에서 멈추고 마니, 보배 있는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고요한 곳에서는 공부를 잘 하다가도 움직이는 곳에서는 잘 하지 못하며[能靜不能動], 진실한 수용(受用, 닥쳐오는 경계를 지혜롭게 받아들임)을 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경계(境界)를 만나면 감정을 일으켜 취하거나 버리기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함이 완연하다.
거칠거나 미세한 망상[粗細妄想]이 여전히 굳게 자리잡고 있어서, 이제까지 해 온 공부가 마치 찬물이 바위를 만나 물거품을 일으키듯 하여 아무 작용도 일으키지 못한 채 피로하고 게을러지며, 결국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한다.
오래 참구한 사람은 이러한 곤란을 알았으면 일어나서 곧바로 본참화두(本參話頭, 평소에 참구하는 화두)를 들되, 정신을 바짝 차려서 백척간두(百尺竿頭, 백 척이나 되는 높은 장대의 꼭대기)에서 다시 매진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곧장 높고 높은 봉우리에 서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다니되 손을 놓고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면, 부처님이나 조사와 서로 마주 볼 것이며, 곤란함 속에서도 편안하게 머물러 있게 되니, 이 또한 쉬움이 아니겠는가.
화두란 바로 한마음[一心]이다. 우리의 이 한 생각 마음[一念心]은 안팎이나 중간에 있지 않으면서도, 또한 중간이나 안팎에도 있다. 그것은 허공과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곳에 두루하다. 그러므로 화두는 위로 끌어올리지도 말고 밑으로 끌어내리지도 말라. 위로 끌어올리면[提上] 도거(掉擧)가 일어나고, 아래로 끌어내리면[厭下] 혼침(昏沈)에 떨어져 본래의 심성(心性)을 어기므로 다 중도(中道)가 아니다.
사람들은 망상(妄想)을 두려워하여 망상을 항복받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여긴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망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망상에 힘을 허비하지도 말라. 망상을 항복받기 위해서는 그대는 그것이 망상인 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 그것에 집착하지도 말고 그것을 쫓아가지도 말며, 그것을 버리려고도 하지 말라. 오직 망상이 계속 이어지지만 않게 하면 망상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이른바 ‘망상이 일어나면 곧 망상인 줄 알 것이니, 망상인 줄 알면 그것은 곧 없어진다’[妄起卽覺 覺妄卽離]고 한 것이다.
만약 망상을 이용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면, 이 망상이 어디서부터 일어나는가를 살피라. 망상은 자성이 없어 당체(當體)가 공하므로 바로 되돌리면 ‘나’가 본래 없는[我本無] 마음의 성품[心性]인 자성청정한 법신불[自性淸淨法身佛]이 곧바로 현전(現前)한다.
진실로 말하면, 진여(眞如)와 망상이 일체(一體)이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 보리와 번뇌가 모두 본래 마음[本心]이요 본래성품[本性]이니, 분별할 필요가 없으며,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취하거나 버릴 필요도 없다. 이 마음은 청정하여 본래 부처이니 한 법도 필요치 않다. 어디에 허다한 방편[羅索]이 있겠는가. 참구하라(參)!
제2부 참선 법문 Ⅱ
이끄는 말
여러분들이 항상 와서 가르침을 청하니, 나는 매우 부끄러움을 느낀다. 여러분들은 날마다 힘들게 장작을 패고 농사를 짓고, 흙을 돋우고 벽돌을 나르며 하루가 금방 지나가 저녁이 되면, 도를 이루겠다는 생각을 잊어버린다. 어떤 것이 도를 위하는 진실한 마음[殷重心]이며, 실제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 이 허운(虛雲)은 부끄러워하며, 도(道)도 없고 덕(德)도 없어 법상에 오르지 않고 소위 법문을 설하지만, 다만 이것은 옛 사람들이 하신 몇 마디 말씀과 몇 구절을 이끌어 여러분의 질문에 대답할 뿐이다.
수행하여 도를 얻는 방법은 매우 많지만, 지금은 간략한 개요만 말하겠다.
1. 깊이 인과(因果)를 믿으라
말할 것도 없이 어떤 사람이든지 수행해서 도를 깨치려는 사람은 먼저 인과(因果)를 깊이 믿어야 한다. 만약 인과를 믿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면 도 공부에 성공하지 못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삼악도의 고통이 적지 않게 닥쳐올 것이다. 옛 스님[古德]이 이르기를, “전생의 일을 알고 싶은가. 지금 받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내생의 일을 알고 싶은가. 금생에 짓는 것이 그것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설사 백 천 겁이 지난다 해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으며 인(因)과 연(緣)이 서로 만날 때 과보를 역시 받게 된다” 하였다.
능엄경에 이르기를, “원인이 참되지 못하면 결과도 비뚤어진다”[因地不眞 果招紆曲] 하였다. 그러므로 좋은 원인을 심으면 좋은 결과를 맺고 악한 원인을 심으면 악한 결과를 맺는 것이다. 외[瓜]를 심으면 외를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는 것은 필연적인 도리인 것이다.
인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가 두 가지 고사(故事)를 들어 이를 증명하겠다.
1) 유리왕(琉璃王)이 석가족을 죽인 고사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 카필라성(城)에 고기잡이 하는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는 큰 못이 있었는데 어느 해에 가뭄이 들어 물이 말라 그 못의 고기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잡아먹히게 되었다. 이때 마지막으로 가장 큰 고기 한 마리가 나왔는데 이 고기 역시 삶아먹히게 되었다. 이때 전부터 고기를 먹지 않던 한 소년이 이 고기의 머리를 때리면서 희롱을 했다.
후에 석가 부처님께서 계실 때 파사익(波斯匿) 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었으며 석가족의 여인을 왕비로 얻어 한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유리(琉璃)라 하였다. 유리 태자는 어릴 때 석가족이 사는 카필라 성에서 자라고 공부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앉는 자리에 올라가 놀다가 사람들의 꾸중을 들었고, 그들에 의해 끌어내려졌으므로 마음에 분한 생각이 맺혔다.
그가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 문득 대군을 이끌고 카필라성을 공격하여 성내의 주민들을 모두 죽였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3일간 두통이 있으셨다. 여러 큰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법을 베풀어 저들을 구해주시기를 청했으나 부처님께서는, “결정된 업은 돌이킬 수 없다”[定業難轉]고 말씀하셨다. 목건련(目犍連) 존자는 신통력으로 석가족 5백인을 발우 안에 넣어 공중에 띄워 그들을 구하려 했지만, 발우를 내려 놓으니 모두 피로 변해 버린 것을 어찌 알았으리요.
여러 제자들은 그 이유를 부처님께 여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과거세에 마을 사람들이 고기 잡아먹은 그 이야기를 하셨다. 즉, 그때의 큰 물고기는 지금 유리왕의 전신(前身)이고, 그가 거느린 군대는 그때의 많은 물고기들이며, 이번에 죽은 카필라성 주민들은 그때 고기를 잡아먹은 사람들이고, 부처님은 그때의 소년으로 고기의 머리를 세 번 때렸기 때문에 이번에 3일간 머리가 아픈 과보를 받았다 하셨다. 결정된 업은 피하기 어려워서 석가족 5백인은 비록 목건련 존자가 구출하려 했으나 생명을 잃고 말았으며, 그 후 유리왕은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
원한과 원한은 서로 갚는 것이므로 끝날 날이 없으며, 인과는 진실로 있는 것이니, 가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2) 백장 스님이 여우를 제도한 고사
백장(百丈) 스님이 하루는 법상에 올라 법을 설하셨다. 법상에서 내려온 후, 사람들이 다 돌아갔는데, 한 노인이 돌아가지 않았다. 백장 스님이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저는 사람이 아니고 여우의 정령[野狐精]인데, 본시 이곳의 조실[堂頭]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스님이 저에게 ‘큰 수행인도 인과에 떨어집니까?’하고 묻기에 저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고 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대답 한 번 잘못하는 바람에 타락하여 5백 년 동안 여우의 정령이 되어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부디 스님께서 자비심으로 가르쳐 주십시오.”
백장 스님은, “그대가 나에게 물어보라.” 하니, 노인이 묻기를, “스님께 여쭙니다. 큰 수행인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이에 백장 스님이 답하기를,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 했다. 노인은 이 한 마디에 크게 깨달아 곧 절하고 말하기를, “이제 스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제가 여우의 몸을 벗게 되었습니다. 제 몸이 뒷산 바위 아래 있으니 바라건대 스님께서 죽은 중의 예법으로 장사 지내 주십시오”하였다.
다음 날 백장 스님은 뒷산 바위 아래를 막대기로 파서 한 마리의 죽은 여우를 발견하자 죽은 승려의 예법으로 화장해 주었다.
우리는 이 두 고사를 들었으니 인과가 가히 두려운 것이며, 비록 부처가 된다 하더라도 두통의 과보를 면할 수 없다는 것임을 확실히 알았다. 과보의 상응[報應]은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고, 결정된 업은 실제로 있어 피하기 어렵다. 우리는 그때그때 삼가고 두려워하여 원인을 만들지 않아야 할 것이다.
2. 계율(戒律)을 엄수하라
수행하여 도를 이루는 데는 첫째가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계율은 무상보리(無上菩提, 위없는 깨달음)의 근본이다. 계로 인하여 비로소 정(定, 선정)이 생기고, 정으로 인하여 비로소 반야(般若, 지혜)가 생긴다. 계를 지키지 않고 수행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능엄경에서 네 가지 청정한 가르침[四種淸淨明誨]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으니, 계를 지키지 않고 삼매(三昧)를 닦는다 하더라도 티끌세계[塵]를 벗어날 수 없으며, 비록 많은 지혜와 선정이 앞에 나타나더라도 역시 사마(邪魔)와 외도(外道)에 떨어질 것이라 하였다. 계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로써 알 수 있을 것이다.
계를 지키는 사람은 하늘(천인)과 용[天龍]이 옹호하고, 사마와 외도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지만, 계를 깨뜨린 사람은 귀신들이 큰 도적이라고 하면서 그의 발자취를 쓸어버린다.
옛날 계빈국(罽賓國, 서역에 있던 나라의 이름)에 절터가 있었는데, 독룡(毒龍)이 수시로 나타나서 그 근방에 해를 끼치므로 5백 명의 아라한이 함께 모여, 선정력(禪定力)으로 용을 쫓아내려고 했으나 쫓아내지 못했다. 후에 한 스님이 와서 선정에도 들지 않고 용을 향해서 한 마디 설하기를, “어진 이여, 여기서 멀리 떠나라” 하니, 이 독룡이 멀리 달아났다. 이 때 여러 나한들이 이 스님에게 무슨 신통(神通)으로 독룡을 쫓았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 스님은 “저는 선정의 힘을 쓰지 않고, 바로 계행을 지켜 가벼운 계율도 수호하기를 오히려 무거운 계율과 같이 지킵니다.” 라고 했다. 우리는 5백 아라한의 선정력이 계율을 엄수하는 한 사람의 스님에 미치지 못한 점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육조(六祖) 스님 말씀에, ‘마음이 평안하면 어찌 애써 계를 지킬 것이 있으며, 행동이 곧으면 어찌 굳이 참선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心平何勞持戒 行直何用參禪] 하였다” 한다. 그러나 내 감히 묻거니와, 그대의 마음은 평안하고 곧은가? 만약 달밤에 아름다운 여인이 알몸으로 그대를 껴안는다면 그대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는가? 또 어떤 사람이 이유 없이 그대를 욕하고 때린다면 그대는 성내는 마음[瞋恨心]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대는 원수와 친한 이, 미움과 사랑, 나와 남, 옳고 그름을 능히 분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확실히 그럴 수 있다면 그런 말을 해도 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허튼 소리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3. 신심(信心)을 굳게 지니라
생각건대 수행하여 도를 이루려면 먼저 굳은 신심을 지녀야 한다. 믿음은 도의 근본이요 공덕의 어머니이다[信爲道元功德母]. 말할 것도 없이, 무슨 일을 하든 신심이 없으면 잘 할 수가 없는 법이다. 우리는 생사에서 해탈하려면 이러한 견고한 믿음을 더욱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께서는, “대지의 일체 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서 능히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하셨고, 또 “온갖 법문(法門)은 중생의 마음의 병을 대치(對治, 증상에 대응하여 치료함)하기 위한 것이다” 하셨다. 우리는 마땅히 부처님의 말씀이 헛되지 않다고 믿고,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왜 우리는 지금까지 성불하지 못했는가? 그것은 모두 법답게 공부(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콩으로 두부를 만들지만 만약 그대가 만들지 않으면 콩이 저절로 두부로 변하지는 않으며, 만든다 하더라도 간수를 법대로 넣지 않으면 역시 두부가 되지 않는다. 만약 법답게 콩을 갈아서 끓이고 적당히 간수를 치면 반드시 두부가 된다. 도를 이루는 것도 이와 같아서, 그대가 노력하지 않으면 성불할 수 없으며, 법답게 노력하지 않으면 역시 성불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되 물러나거나 후회하지 않으면 반드시 성불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깊이 믿어야 하며, 또한 법답게 수행하면 반드시 성불한다는 것을 깊이 믿어야 한다.
영가(永嘉)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실상을 깨달으면 사람도 법도 없고,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소멸한다[證實相無人法 刹那滅却阿鼻業]. 만약 내가 헛된 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발설지옥에 떨어져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나오지 못할 것이다[若將妄語誑衆生 自招拔舌塵沙劫]” 하셨다. 이는 스님께서 자비심으로 후세 사람들의 신심을 다져주기 위해서였으며, 그래서 이러한 큰 맹세를 하셨던 것이다.
4. 수행의 길을 정하라
신심이 갖추어졌다면 곧 한 가지 법문을 정해서 계속 수행해야 하며, 이랬다 저랬다 바꾸어서는 안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염불도 좋고, 주력[持呪]도 좋고, 참선도 좋다. 여하튼 한 법문으로 일관되게 해 나가되 다시 물러서거나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도 이루지 못하고 내일도 그럴 것이며, 올해도 이루지 못하고 내년에도 역시 그러하며, 금생에도 이루지 못하고 내생에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위산(潙山)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삼생(三生)을 만약 물러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부처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하셨다.
어떤 이들은 수행의 길을 정하지 못하고 오늘은 이 선지식이 염불이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 한 이틀 염불을 해보다가, 내일은 다른 선지식이 참선이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또 한 이틀 참선을 해본다. 이렇게 동으로 갔다가 서로 갔다가 하면서 한 평생을 허비하다가 죽음에 이르면, 지금까지 한 것이 모두 허송세월이 되어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니, 이름은 그럴 듯 하나 어찌 한탄스럽고 헛되지 않겠는가.
참선법문(參禪法門)
수행 방법은 비록 많지만, 모든 부처님과 조사님들은 참선으로써 위없이 묘한 법문[無上妙門]을 삼으셨다. 부처님께서 능엄회상(능엄경을 설하시던 법회)에서 문수보살에게 원통(圓通) 법문을 말씀하실 때, 관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으뜸으로 치셨다. 우리가 듣는 자기의 성품을 들음을 돌이켜 듣기만 하면[反聞聞自性] 이것이 곧 참선이니, 여기에 선당(禪堂, 참선 수행처)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참선이라고 하는 이 한 법을 설명하겠다.
1. 좌선(坐禪)의 기초
우리의 일상 생활이 모두 도(道)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어딘들 도량(道場)이 아니겠는가? 본래 어떤 선당(禪堂)도 필요치 않으며, 앉는 것만이 선(禪)은 아닌 것이다. 소위 선당이니 좌선이니 하는 것은, 우리와 같이 장애가 깊고 지혜가 얕은 말세(末世)의 중생을 위해서 베풀어져 있는 것일 뿐이다.
좌선을 할 때에는 몸과 마음을 잘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작게는 병에 걸리고, 크게는 마(魔)가 붙게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선당 안에서 향을 들고 걷고 향을 피우고 앉는 것은 심신을 조절하려는 데에 그 뜻이 있다. 이 외에도 몸과 마음을 조절하는 방법은 많지만 중요한 것만 간략히 설명하겠다.
가부좌를 할 때에는 자연스럽고 바르게 앉아야 하며, 의식적으로 허리를 너무 꼿꼿이 세워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화(火) 기운이 위로 올라가므로 좌선이 끝난 다음, 눈곱이 끼고 입 냄새가 나며 기운이 머리로 솟구치고[氣頂] 입맛이 없어지기도 하며, 심할 경우에는 피를 토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리를 구부리거나 머리를 수그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쉽게 혼침(昏沈)에 떨어지게 된다. 만약 혼침이 온다고 느끼면 눈동자를 부릅뜨고 허리를 쭉 펴고 나서 가볍게 엉덩이를 옮기면 혼침이 사라질 것이다.
공부를 지나치게 급박하게 해서 마음이 어지럽고 초조할 때에는 모든 반연(攀緣, 집착의 대상이 되는 인연 경계)을 놓되 공부까지도 놓아 버리라. 향이 반 마디쯤 탈 때까지 쉬면 서서히 편안해질 것이다. 그런 뒤에 다시 화두를 들어 공부하라. 그렇지 않으면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누적되어 조급한 성격이 되거나 성을 잘 내게 되며, 심할 경우에는 미쳐 버리거나 마(魔)가 붙게 된다.
좌선을 할 때 수용(收用)하게 되는 경계는 매우 많기 때문에 다 언급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다만 그대가 그것에 집착하지만 않으면 장애가 그대에게 이르지 않을 것이다. 흔히 말하듯이 “괴이한 것을 보고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면 괴이한 것이 저절로 사라진다”[見怪不怪 其怪自敗]는 것이다.
비록 요망한 마군이나 괴상한 귀신이 와서 그대를 뒤흔들더라도 거기에 상관하지 말아야 하며,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또한 석가 부처님이 오셔서 그대에게 마정수기(摩頂授記, 정수리를 만져 주며 언제 성불할 것이라고 예언해 줌)를 주신다 할지라도 상관하지 말아야 하며, 기뻐해서도 안 된다.
능엄경에서 이른바 ‘거룩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을 좋은 경계라 한다. 만약 거룩하다는 생각을 내면 곧 온갖 삿된 것을 받게 된다’[不作聖心 名善境界 若作聖解 卽受羣邪]는 말은 이를 이른 것이다.
2. 객진번뇌(客塵煩惱)
그러면 공부는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능엄회상(楞嚴會上)에서 교진나(憍陳那) 존자가 객(客), 진(塵) 두 자를 말씀하신 것이 바로 우리들 초심자가 공부를 시작해야 할 곳이다.
그는, “마치 지나가는 손님[客]이 여관에 투숙하여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데, 먹거나 자고 나서는 짐을 꾸려 떠나야 하므로 오래 머물지 못하지만, 주인은 갈 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머물지 않는 이는 손님이요, 머무는 이는 주인[主]입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을 객(客)이라 하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또 비가 개고 해가 나와서 햇빛이 문틈으로 들어오면 허공에 티끌(먼지)들이 흔들리며 떠다니는 것을 보게 되는데, 티끌은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허공은 고요히 움직임이 없으므로, 깨끗하고 고요한 것은 허공이라 하고 흔들리는 것은 티끌[塵]이라 합니다. 흔들리는 것을 티끌이라 하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손님과 티끌은 망상(妄想)에 비유한 것이요, 주인과 허공은 자성(自性)에 비유한 것이다. 상주(常住)하는 주인은 손님이 오든 가든 본래 그를 따라가지 않는 것이니, 이는 상주하는 자성이 본래 문득 일어났다가 꺼지는 망상을 따르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른바 ‘스스로 만물에 무심(無心)하다면 만물이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항상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티끌은 스스로 흔들려서 본래 맑고 고요한 허공에 장애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망상이 스스로 일어나거나 없어지는 것일 뿐, 본래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자성을 장애하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른바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一心不生 萬法無咎]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손님[客]이라는 것은 비교적 거칠고 티끌[塵]이라는 것은 비교적 미세하다. 그러므로 초심자가 먼저 주인과 손님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게 되면 스스로 망상에 휩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허공과 티끌을 가려낼 수 있게 되면 망상이 더 이상 (공부를) 장애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알아차리면 억울한 꼴은 당하지 않는다’[識得不爲冤果]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세히 살펴보아 이해하게 되면 공부 길은 이것만으로도 깨달은 바가 많을 것이다[思過半].
3. 화두방편(話頭方便)
옛날의 조사(祖師)들은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에 하였으니, 저 달마 조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安心]든가, 육조(六祖) 대사의 ‘오직 견성만을 논한다[唯論見性]’는 것들은 단지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아차리면 되는 것으로서 화두를 보라고 하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후대의 조사들은, 사람들의 마음[人心, 타고난 근기]이 옛날과 같지 않아서 죽자 사자[死心塌地] 달려들지 않고 기틀 속임을 하는 일이 많으며[多弄機詐], 항상 다른 사람의 보배를 헤아려서 자기 집의 보배로 삼는 일이 허다함을 보시고, 부득불 각각 저마다 일가[門庭]를 세우고 제각기 솜씨[手眼]를 발휘하여 학인들에게 화두를 보게 하였다.
화두에는 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든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어떠한 것이 나의 본래 면목인가?’[父母未生前 如何是我本來面目] 등등이다. 그러나 대체로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念佛是誰] 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화두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화두라고 하는가? 화(話)는 말이요, 두(頭)는 말하기 전이니, 저 ‘아미타불’을 염(念)할 때‘아미타불’ 하는 말은 화(話)요, 이를 염하기 전이 화두다. 이른바 화두(話頭, 말머리)란 곧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一念未生之際]이니,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이미 화미(話尾, 말꼬리)를 이루게 된다. 이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을 ‘나지 않음’[不生]이라고 부르니, 들뜨지 않으며, 혼침에 빠지거나 고요한 경계에 탐착하지도 않고 공(空)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또 이를 ‘없어지지 아니함’[不滅]이라고 부르는데, 언제나 뚜렷이 밝아서[單單的的] 한 생각 빛을 돌이켜 다시 반조(返照)한다. 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不生不滅] (을 비추어 보는 것)을 일러서 화두를 본다(看話頭)고 하며, 혹은 ‘화두를 비춘다’(照顧話頭)고도 한다.
4. 의정(疑情)
화두를 보려면 먼저 의정(疑情)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화두를 보는 길잡이[枴杖]이다. 어떤 것을 의정이라 하는가? 가령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 할 때,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자기가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면 입으로 염불하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으로써 염불하는 것인가? 만약 입으로써 염불한다면, 잠들었을 때 입은 그대로 있는데 왜 염불할 줄 모르는가? 만약 마음으로써 염불한다면 또 그 마음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다. 이처럼 ‘누구인가?’에 가볍게 의심을 일으켜야 하며, 거칠게 의심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미세하면 미세할수록 더욱 좋다. 그리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이 의념(疑念)을 붙들고 또렷하게 비추어 보되 마치 물이 땅 위로 끊임없이 흘러가듯이 (이 화두를) 볼 것이며 딴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만약 의념(의정)이 있으면 달리 마음을 움직일 필요가 없고, 만약 의념이 없으면 가볍게 다시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처음 마음을 쓸 때에는 반드시 고요한 곳[靜中]에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움직임 가운데서[動中] 하는 것보다 힘을 얻기가 더 낫다. 다만 절대로 분별심은 내지 말아야 한다. 힘을 얻든 힘을 얻지 못하든 상관하지 말아야 하며, 그것이 동중(動中)이든 정중(靜中)이든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오로지 한 마음 한 뜻으로 공부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염불시수(念佛是誰,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하는 네 글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誰, 누구인가)자이며, 나머지 세 글자는 그것을 늘려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은 누구인가, 똥 누고 오줌 누는 것은 누구인가라든가, 무명(無明)을 타파하는 것은 누구인가, 혹은 능히 알고 느끼는 이것은 누구인가 해도 마찬가지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를 막론하고 이 ‘누구인가[誰]’ 하나를 들면 곧 쉽게 의념이 일어날 것이다. 말을 뒤집어서 사량복탁(思量卜度, 이리저리 생각하고 헤아림)할 것이 없으니, 이 ‘누구인가?’ 화두[誰字話頭]야말로 실로 참선의 묘법이라 할 것이다.
다만 ‘누구인가?’ 혹은 ‘염불시수’ 네 글자를 가지고 의심하되, 부처님 명호(名號) 부르듯이 한다든지(의심 없이 입으로만 염불하는 것을 말함), 이리저리 생각하거나 헤아리지 않고 오직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하고 찾는 것을 일러서 의정이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염불시수’ 넉 자를 염불하면서 입에 붙이고 다니지만 그것은 아미타불의 염불을 하는 것보다 공덕이 더 크지는 않다. 또 어떤 이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이리 저리 찾고 궁리하는 것을 의정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망상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이는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서 도로 밑으로 떨어지는 격이니, 올바로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초심인이 일으키는 의념은 아주 거칠어서, 문득 끊어졌다가 문득 이어지며 금방 익은 듯하다가 금방 설어지니 의정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저 생각이라고나 할 것이다. 그러나 점차 날뛰던 마음을 거두어 들이면 염두에 어떤 덩어리가 잡혀서 머물러 있게 되니, 비로소 참구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다시 점차 공부가 순숙(純熟, 익어감)해져서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일어나고, 자기가 어디 앉아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며 몸과 마음,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한 덩어리 의념이 현전(現前, 앞에 떠 있음)하여 간단(間斷, 사이가 끊어짐)없이 이어지는데, 이때 비로소 의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에야 어찌 공부한다고 말하겠는가? 그저 망상을 제거한다고나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이르면 참의심[眞疑]이 현전하니 비로소 참으로 공부하는 시절이라 할 것이다. 이 시절에 하나의 큰 관문이 있으니. 흔히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갈림길로 접어들게 된다.
1) 이 때에는 아주 맑고 깨끗하여 한없이 가벼워서[輕安], 만약 조금이라도 각조(覺照, 또렷이 비추어 봄)를 놓쳐버리면 곧 가벼운 혼침(昏沈) 상태에 빠지게 된다. 만약 눈 밝은 이[明眼人]가 옆에 있다면 한 눈에 발견할 것이다. 바로 이 경계를 일러서 ‘향나무 판자로 내려치니 즉시 하늘의 구름과 안개가 걷힌다’[一香板打下 馬上滿天雲霧散]는 것이다. 흔히 이 때문에 도를 깨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 또 이 때에는 아주 맑고 깨끗하며 텅 비어 있어서 만약 의정이 없으면 곧 무기(無記, 아무 것도 지각하지 못하는 무의식 상태)에 떨어져 마치 죽은 나무가 바위에 기댄 것같이 앉아 있게 된다. 혹자는 이를 일러서 ‘찬물이 돌에 부딪쳐 물거품이 인다’[冷水泡石頭]고 하였다. 이 때에는 다시 바로 화두를 들어야 하며, 들면 곧 깨어있어 비추어 보게 된다(깨어있다[覺] 함은 미(迷)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곧 혜(慧)요, 비추어 본다[照] 함은 어지러움[亂]이 없는 것이니 곧 정(定)이다.)
또렷하고 명료한[單單寂寂] 이 한 생각은 맑고 고요하게 비추며[湛然寂照], 여여하게 움직이지 않고[如如不動] 아주 신령스러워 어둡지 않으며[靈靈不眛] 항상 분명하고도 분명하게 지각하니 찬물에 연기 피어오르듯, 한 줄기로 면면히 이어져 끊이지 아니한다. 공부가 이 경지에 이르면 금강의 눈동자를 갖추어야 하니 다시 화두를 들 필요가 없다. 화두를 다시 든다면 이는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얹는 격이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에게 묻기를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하니, 스님이 말씀하시되, “놓아 버려라”[放下來] 하였다. 다시 묻기를,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놓아버립니까?”하니, 스님이 말씀하시되, “놓아버리지 않으려면 도로 짊어지고 가라”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때의 경계[風光]을 말한 것이다.
이 경계는 물을 마셔본 사람만이 그 차고 따뜻함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아서 언설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 경계에 이른 사람은 저절로 분명하게 알 것이지만, 여기에 이르지 못한 이는 말해주어도 소용없는 것이다. 이른바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검을 바칠 일이며, 시인이 아니면 시를 바치지 말라’[路逢劍客須呈劍 不是詩人不獻詩]는 것이다.
5. 조고화두(照顧話頭)와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어떤 이는 관세음보살의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 하는 것이 어떻게 참선이 되느냐고 묻는다. 내가 이제 말하겠다. ‘조고화두’(照顧話頭, 화두를 비춘다)라는 것은 바로 그대로 하여금 시시각각 밝고도 또렷한 일념으로 마음빛을 돌이켜[回光] 이 (한 생각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그 자리[不生不滅)]를 반조(返照)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이라는 것은 바로 그대로 하여금 시시각각 밝고도 또렷한 일념으로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들으라는[反聞聞自性] 것이다. 회(回)는 곧 반(反)이오,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는 것[不生不滅]은 곧 자성이다.
들음[聞]과 비춤[照]은 바로 흐를[順流] 때에는 소리[聲]를 따르고 빛[色, 형상]을 좇아가지만, 들음[聽]은 소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봄[見]은 빛을 넘어서지 못하며 분별(分別)이 뚜렷하다. 그러나 거꾸로 흐를[逆流] 때에는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키게 되어 소리와 빛을 좇지 아니하여, 원래 하나인 정명(精明)한 들음과 비춤이며 별개의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른바 ‘화두를 비춘다’거나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거나 하는 것이 절대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만약에 눈으로 본다거나 귀로 듣는다면 이는 소리와 빛을 좇아 사물에게 부림을 당하는 것이어서 순류(順流)라 부른다. 만약에 밝고 또렷하게 빛나는 한 생각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 가운데서 소리와 빛을 좇지 아니하면 이를 역류(逆流)라 하며, 화두를 비춘다고도 하고,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고도 한다.
6. 생사심(生死心)과 장원심(長遠心)
참선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사심(生死心, 생사가 목전에 걸려있다는 다급하고 절박한 마음)이 간절해야 하며, 동시에 장원심(長遠心, 오래도록 꾸준히 밀고 나가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점이다. 생사심이 간절하지 않으면 의정이 일어나지 않으며 공부가 제대로 향상되지 않는다. 그리고 장원심이 없는 것은 마치 하루 볕을 쬐고 열흘 추운 것과 같아서 공부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장원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진정한 의심이 일어나며, 진정한 의심이 일어날 때에는 번뇌를 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쉬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시절이 한번 이르면 자연히 물이 흐르는 곳에 도랑은 생기게 되는 법이다.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실을 이야기하겠다. 청(淸)나라 경자(庚子, 1900)년에 8국의 연합군이 북경에 쳐들어 왔다. 그때에 나는 광서황제(光西皇帝), 자희태후(慈禧太后) 일행과 함께 피난을 갔는데, 중간에 사정이 생겨서 도보로 섬서(陝西) 방면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날마다 수 십리씩을 도망갔는데, 며칠 동안 밥조차 먹지 못하였다. 어느 날, 노상에서 한 노인이 고구마줄기[番薯藤]을 쪄서 광서 황제에게 올렸다. 황제는 다 자시고 나자 그 노인에게 “이것이 뭔데, 이렇게 맛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황제는 평소에 상당히 거드름을 피우고 대단한 위풍을 보이며 살았지만, 어찌 일찍이 멀리 걸어 보았겠으며, 어찌 일찍이 반 끼나마 배를 곯아 보았을 것이며, 어찌 일찍이 고구마 줄기 따위를 자셔 보았을 것인가? 그러나 지금은 거드름도 피우지 못하고 위풍도 과시하지 못하면서, 길에서는 뛸 수도 있었고 배도 곯을 수 있었으며 채근(菜根)도 먹을 수 있었다. 어째서 그가 이처럼 체면불고하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연합군이 그를 죽이려고 하니 그는 살겠다는 일념으로 도망칠 생각만 한 것이 아닌가?’고.
그러나 뒤에 강화협상이 이루어져 어가(御駕)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게 되자 거드름도 피우게 되었고, 위풍도 과시하게 되었으며, 길에서 뛰지 않아도 되었고, 배를 곯지 않아도 되어, 조금이라도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어째서 그가 이 때에는 맛없는 음식이 안 넘어가게 되었을까? 연합군이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으므로 그는 살기 위해 도망칠 생각이 없어졌기 때문 아니겠는가?
만약 그가 항상 도망칠 때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간다면 안 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장원심이 없었기 때문에 순경(順境)을 만나자 예전의 태도가 다시 싹트게 된 것이다.
여러분은 동참하고 있는가? 무상살귀(無常殺鬼)가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의 목숨을 노리고 있으며, 더구나 저들은 아주 우리와 협상이라는 것은 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선뜻 장원하고도 간절한 마음을 내어 생사를 요달(了達)하여 해탈해야 할 것이다.
고봉 원묘(高峯原妙)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참선을 함에 있어서 기한을 정해놓고 공부를 이루려고 한다면, 마치 천 길 우물 밑에 떨어진 것과 같이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천 생각 만 생각이 오직 (생사에서) 벗어나려는 마음 뿐이어야 하며, 끝내 결코 두 생각이 없어야 한다. 참으로 이렇게 애써서 3일, 5일, 혹은 7일에 사무치지 못한다면 내가 오늘 큰 거짓말[大妄語]을 한 것이니, 길이 발설지옥[拔舌泥犁]에 떨어지리라”하였다.
저 노스님이 한결같이 자비심이 간절하여 우리가 장원하고도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렇게 다짐을 거듭하고 우리를 위해 보증하신 것이다.
공부의 어려움과 쉬움
공부인[用功人]에게는 두 종류의 어려움과 쉬움이 있으니, 첫째 초심자의 어려움과 쉬움이요, 둘째 구참자의 어려움과 쉬움이다.
1. 초심자의 어려움과 쉬움
1) 초심자의 어려움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의 보편적인 병통은 망상(妄想)과 습기(習氣)가 놓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명(無明)과 아만[貢高](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마음), 질투, 장애, 탐냄[貪], 성냄[瞋], 어리석음[癡], 애착[愛], 나태 등의 마음을 일으키고, 먹기를 좋아하며, 옳고 그름과 남과 나[是非人我]를 분별하고 뱃살만 불린다면 어떻게 도(道)와 상응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부잣집 출신은 습기(習氣)를 못 버려서 약간의 모욕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벼운 고통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어떻게 공부하여 도를 깨치겠는가? 그들은 본사(本師)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떤 신분의 사람으로서 출가하셨는지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얼마 안 되는 문자를 깨우쳐 글귀나 뒤적이며 옛 사람의 언구(言句)를 가지고 알음알이를 일으켜 스스로 대단한 양 큰 아만(我慢)을 일으키지만, 한 바탕 큰 병을 만나면 연신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섣달 그믐날(임종이 닥쳤을 때)이 되어서야 비로소 허둥거리지만 평소의 알음알이는 이때에 가서는 한 푼 어치도 쓸데가 없으니 비로소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
얼마간 도심(道心)이 있는 사람은 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모른다. 어떤 이들은 망상을 겁내어 없애고 없애도 종일토록 번뇌가 끊이지 아니하므로 스스로 업장(業障)이 두터움을 원망하고 이로 인해 도 깨칠 마음을 퇴실(退失)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어떤 이들은 망상을 맞닥뜨려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서 분연히 주먹을 부르쥐고 기운을 돋구며, 가슴을 내밀고 두 눈을 부릅뜨면서 마치 무슨 큰 일이라도 벌일 기세를 보인다. 결국 망상을 상대하여 한 바탕 사생결단을 내려는 것이나, 망상이 없어지기는커녕 도리어 사람의 피를 토하게 하고 발광하게 한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어떤 이들은 공에 떨어질까[落空] 두려워하나, 이미 그들이 귀신굴[鬼]에 태어난 것을 어찌 알겠는가. 비우려 해도 비워지지 않으며[空也空不掉], 깨달으려 해도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悟又悟不來]. 어떤 이들은 마음으로써 깨달음을 구하지만, 깨달음을 구하거나 성불을 생각하는 것이 모조리 큰 망상임을 어찌 알겠는가. 모래로는 밥을 짓지 못하는 법, 나귀해[驢年]가 되도록 구한다해도 결코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한 두 가지[一兩枝]의 그윽한 (꽃)향기만 맡고도 곧 환희심을 일으키지만, 이것은 눈 먼 거북이가 나무 구멍에 머리를 내민 격[盲龜鑽木孔]으로 우연히 얻은 것이지 참으로 공부가 익었기 때문이 아니며 환희마(歡喜魔)가 마음에 든 것임을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또 어떤 이들은 고요한 가운데[靜中]서는 매우 맑고 깨끗하여 공부가 잘 된다고 느끼지만, 움직임 가운데[動中]서는 되지 않으므로 시끄러운 곳을 피하여 고요한 곳을 찾는데, 이들은 이미 동정(動靜)의 두 가지 마왕(魔王)의 권속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상과 같은 부류는 많고도 많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길을 바로 들어서지 못하면 정말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깨어있음[覺]이 있어도 비춤[照]이 없으면 산란하여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不落堂], 비춤은 있으나 깨어있음이 없으면 죽은 물[死水] 속에 앉아 있다가 빠져 죽게 된다.
2) 초심자의 쉬움
공부가 비록 어렵다고는 하나, 일단 길만 바로 들어서면 또한 대단히 쉬운 것이다. 어떤 것이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의 쉬움인가. 무슨 묘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놓아 버리는 것[放下]이 그것이다.
어떤 것을 놓아 버릴 것인가? 일체의 무명번뇌(無明煩惱)를 놓아 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놓아 버릴 수 있는가? 우리가 장례행렬을 보낸다고 할 때, 그대는 시험삼아 저 시체에다 대고 몇 마디 욕설을 퍼부어 보라. 그 시체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를 몇 대 때려 보라. 그래도 반격하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 심술을 부리던 자도 심술을 부리지 않으며, 평소에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던 자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 나쁜 습관[習染]에 젖어 있던 자도 그것이 없을 것이다. 어떤 것도 분별하지 않고 어떤 것도 놓아 버리는 것이다.
여러분은 동참하는가? 우리의 이 몸뚱이는 숨 한 번 들이쉬지 못하면 곧 시체일 뿐이다. 우리가 놓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다만 몸뚱이를 소중히 여겨, 나와 남[人我], 옳고 그름[是非], 좋아하고 싫어함[愛憎], 취하고 버림[取捨]이라는 분별심을 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몸뚱이가 한 구의 시체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고 그것을 ‘나’라고 보지도 않을 것인데, 무엇을 놓아 버리지 못하겠는가. 오직 놓아 버려야 한다.
하루 24시간 중 행주좌와를 막론하고 온 몸이 통째로 하나의 의념이 되어, 평온하고[平平] 부드럽게[和和] 끊임없이 의심해 갈 것이며, 한 오라기 딴 생각도 섞지 말라. 일구화두(一句話頭)를 마치 천장검(天長劍)을 의지한 것처럼 하여, 마군(魔軍)이 오면 마군을 베고 부처가 오면 부처를 베라[魔來魔斬 佛來佛斬]. 어떤 망상도 겁내지 말라. 무엇이 그대를 어떻게 하겠는가.
또 무엇을 동(動)과 정(靜)으로 분별하며, 무엇을 집착하겠는가. 공(空)에 집착하면 망상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아서, 망상을 한 겹 더하는 격이 된다. 맑고 깨끗하다고 알면 이미 그것은 맑고 깨끗한 것이 아니고, 공(空)에 떨어짐을 두려워하면 이미 유(有)에 떨어진 것이며, 성불을 생각한다면 이미 마군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물 길어 오고 나무 해 오는 것[運水搬柴]이 묘한 도[妙道] 아님이 없고, 밭 매고 씨 뿌리는 것이 모두 선의 기틀[禪機]인 것이다. 하루 종일 다리를 틀고 않아야 비로소 공부하고 도를 닦는 것은 아니다.
2. 구참자의 어려움과 쉬움
1) 구참자의 어려움
오래 공부한 사람의 어려움이란 어떤 것인가? 오래 공부했다는 것은 참의심[眞疑]을 현전시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시절이다. 깨어있음과 비춤이 있으면 생사가 있고 깨어있음과 비춤이 없으면 텅 빈 데[空亡]에 떨어져 버린다. 이 경지에 이르면 정말 어렵다. 여기에 이르러 이 고비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서 나아갈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경지에서 정(定, 禪定) 중에 얼마간의 지혜를 일으켜 옛 사람의 몇 가지 공안을 건성으로 알아채고는 곧 의정을 놓아 버린다. 스스로 크게 깨쳤다고 생각하고는 시를 읊조리고 할(喝, 문답 간에 고함을 지르는 것)을 하며, 눈을 껌벅이고 눈썹을 치켜올리는가 하면, 선지식(善知識)을 자칭하면서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마구니 권속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달마 스님의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가히 도에 들어갈 수 있다’[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障壁 可以入道]고 하신 말씀과, 육조(六祖) 스님의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惡)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런 때 어떤 것이 명(明)상좌의 본래면목입니까?”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잘못 알고서, 마른 나무가 바위에 기댄 것 같이 앉아만 있는 것[坐在枯木岩]을 제일로 친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기루를 보배 있는 곳으로 알며 타향을 고향으로 여기는 것이니, 노파가 암자를 불질러 버린 것도 바로 이런 이들을 꾸짖기 위한 것이었다.
2) 구참자의 쉬움
오래 공부한 사람의 쉬움이란 어떤 것인가? 이 때가 되면 오직 자만하지 말고, 도중에 그만두지도 말고 면밀(綿綿密密)하게 공부해 나가야 한다. 면밀한 가운데 다시 면밀하게, 미세한 가운데 다시 미세하게 해야 한다. 시절이 한 번 도래하면 칠통(漆桶)의 밑바닥이 저절로 떨어질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선지식을 찾아가서 못을 뽑고 쐐기를 빼야 한다.
한산 대사(寒山大士)가 송(頌)하기를,
高高山頂上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서니
四顧極無邊 사방을 돌아봐도 끝이 없구나
靜坐無人識 고요히 앉아 있으니 아는 사람 없고
孤月照寒泉 외로운 달만 찬 샘에 비치네
泉中且無月 샘 가운데는 원래 달이 없으니
月是在靑天 달은 푸른 하늘 가운데 있다네
吟此一曲歌 내 노래 한 곡조 불러보노니
歌中不是禪 이 노래 속의 이것이 곧 선 아닌가.
하였다. 첫 2구는 홀로 드러난 참다운 실상[獨露眞常]은 어디에도 일체 속하지 않으며 온 대지에 밝고 밝아 털끝만큼도 걸리는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 다음 4구는 진여(眞如)의 묘한 체(體)를 설한 것이니, 범부는 아예 알 수가 없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나의 그 자리에는 이르지 못하므로 ‘아는 사람이 없다’ 한 것이다. ‘외로운 달만 찬 샘에 비치네’ 이하의 3구는 저 노인(한산 대사)이 방편으로 이러한 경계를 비유한 것이다. 마지막의 2구는 사람들이 달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로 알까봐 염려하여 우리들을 일깨운 것이다. 그러니 이 말씀이 모두 선(禪) 아닌가?
결론(結論)
나는 이제 비로소 큰 언덕 하나를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이것 또한 넝쿨[葛藤](어지럽고 복잡한 이론)을 펴는 것이요, 길을 갈래내는 일이다. 무릇 언설은 모두 실다운 뜻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스님네들은 몽둥이로 때리지 않으면 고함을 질렀으니, 어찌 이처럼 너절하게 늘어놓는 일이 있었겠는가?
지금 시절이 옛날 같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것일 뿐이다. 여러분은 동참하고 있는가? 구경(究竟)의 손가락은 누구이며 달은 누구인가? 참구하라[參].
제3부 참선경어(參禪警語)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란 곧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의 성품은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고요하여 한 물건도 없고 한 법도 받는 바 없으며, 닦아서 증득(證得)할 것도 없다. 신령스럽게 밝아 만덕(萬德)을 구족(具足, 다 갖춤)했으며, 묘용(妙用)이 항하(恒河,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아서 수행과 증득을 요하지 아니한다. 다만 중생이 미혹하여 생사에 빠져 오랜 겁이 지나도록 탐진치애(貪瞋痴愛)와 망상집착에 사로잡혀 오염이 깊은 까닭에 부득이 수행과 증득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도 이른바 수행이란 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不祥之物]이라서 부득이한 경우에나 쓴다고 한 것이다.
이제 타칠(打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이미 3주 반이 지나갔는데 이제 3주 반이 남아 있다. 남은 3주 반은 몸과 마음이 보다 순숙(純熟)하여 공부하기가 전에 비해 쉬울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처럼의 인연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 남은 3주 반 내에, 물이 말라서 돌이 드러나듯[水落石出] 마음자리를 밝혀냄으로써[發明心地], 이처럼 얻기 어려운 기연(機緣, 계기가 되는 인연)을 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난 20여 일 동안 여러분은 하루같이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애써 공부했으나 그 결과는 다음의 네 가지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첫째, 공부길[路頭]에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 화두가 잘 들리지 않고 흐리멍텅하게 대중을 따라 꾸벅거리며 졸고 있으니, 망상이 분분하게 일지 않으면 혼침에 떨어져 흔들리는 것이다.
둘째, 화두가 제대로 들려서 좀 잡히는 것이 있으나, 다만 죽도록 문 두드리개[敲門瓦子, 문을 두드리는 데 쓰는 물건] 하나를 붙들고 있을 따름이다.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를 (마음 속으로) 염하고만 있으니, 이러한 화두는 염화두(念話頭, 실다운 의심이 없이 생각으로 이어가는 화두)가 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면 의정이 일어나서 깨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화두가 아니라) 화미(話尾) 위에서 마음을 쓰는 것이며 생멸법(生滅法, 오래 갈 수 없는 것)이어서 결국 일념무생(一念無生)의 경지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잠시 해 보는 것은 상관없겠지만, 만약 구경(究竟)의 실다운 법이라고 생각한다면 깨달음을 어찌 기약하겠는가? 요즈음 선종에서 인물이 나지 않는 이유도 이처럼 화미에 마음을 쓰는 잘못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셋째, 어떤 이는 화두를 제대로 볼 줄 알아서 현전하는 일념무생을 비추거나, 혹은 염불하는 것이 곧 마음인 줄 알아서 이 일념이 일어나는 곳을 따라 들어가 곧장 한 생각도 없는 마음의 경계[無念心相]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차츰 적정(寂靜)을 체험하니 거친 망상[粗妄]이 이미 쉬어져 가뿐함[輕安]을 얻게 되고 이내 갖가지 경계가 나타나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몸이 어디 앉아 있는지도 모르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몸이 가볍게 둥실둥실 날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좋아하는 사람이나 물건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환희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두려운 경계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공포심을 일으키기도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음욕심(婬慾心)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이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나, 요는 이것이 모두 마(魔)이므로 집착하면 바로 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넷째, 어떤 이는 업장(業障)이 비교적 가벼워 공부길이 분명히 이해되고[理路明白] 공부가 제대로 되어 이미 정도[正軌]를 걷고 있다. 아주 맑고 상쾌하며[淸淸爽爽] 망상이 다 쉬어진 것 같고 몸과 마음이 자재하며 어떤 경계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경지에 이르면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어 앞으로 나아가기에 꼭 좋다. 다만 마른 나무나 바위 같은 경지에서 또 다시 많은 길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혼침에 빠져 머물러 버리며, 어떤 이는 약간의 알음알이를 얻어 시문(詩文)이나 지으면서 스스로 만족하며 아만(我慢)을 드높인다.
이상의 네 가지 경계가 다 병(病)이니, 내가 이제 그대들에게 이를 대치(對治)하는 약을 주겠다.
첫째, 화두가 아직 잘 들리지 않고 망상과 혼침이 많은 사람은,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 할 때의 그 ‘누구인가[誰]?’를 보라[看]. 망상과 혼침이 적어질 때까지 보다가 ‘누구인가’가 사라지지 아니할 때, 곧 그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보라.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되면 무생(無生)이니, 능히 일념무생을 보게 될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참으로 화두를 본다[看話頭]고 하는 것이다.
둘째,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는 말에 집착하여 화미(話尾)에 마음을 쓰며 생멸법으로 구경(究竟)을 삼는 이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들도 위에서 설명한 뜻에 비추어 공부하라. 곧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향하여 나아가 일념무생을 보도록 하라.
셋째, 무념을 관하여 이미 적정(寂靜)과 경안(輕安)을 얻어 어떤 관문에 도달한 이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들은 다만 본래 참구하던 화두만을 비추되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부처가 오면 부처를 베고 마군(魔軍)이 오면 마군을 베어, 한결같이 문제로 삼지 않기만 하면, 자연히 일이 없고 온갖 삿된 길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넷째, 망념이 이미 다하여 상쾌하고 몸과 마음이 자재한 이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들은 마땅히 옛사람이 설한 바,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할 때처럼, 하나[一]로부터 지극한 곳[至極處]을 향해 힘써 나아가서 곧장 높고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내려가서 두 손을 놓고 거침없이 나아가라.
이상에서 말한 것은 모두 말법(末法) 시대의 근기가 둔한 사람[鈍根人]들을 위해서 설한 방법이지만, 그 실은 종문의 상상일승(上上一乘)의 법문이다.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강설하신 법회)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신 뜻으로써 (가섭 존자에게) 경전 밖에 따로 전하시고[敎外別傳], 역대 조사(祖師)들이 오직 일심(一心)을 전하시어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심[直指人心 見性成佛]이 모두 계급(階級, 이런 저런 중간 단계)에 떨어지지 않고, 수행과 증득을 요하지 않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일언반구(一言半句)에 바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고 한 법도 가히 닦을 것이 없음을 알아버려서 곧 허망한 인연을 일으키지 않으면 바로 여여한 부처이니[不起妄緣 卽如如佛], 여기에 무슨 많은 군말이 필요하겠는가?
제4부 섣달 그믐날의 가르침
대중 스님 여러분, 오늘은 섣달 그믐이다. 대중들은 모두 한 해가 감을 알 것이다. 그러나 절에는 좋은 공양거리가 없으니 여러분은 차나 들라. 달력을 보면 1년에는 춘하추동의 4계절이 있고 열 두 달이 있으며, 24절기가 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제도에도 천시(天時)에 상응하여 유래한 것이 많으니, 농부는 봄에 밭을 갈고 여름에는 김을 매고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에는 갈무리하며, 공인(工人)들은 공사를 시작하고 끝내며, 상인들은 점포를 열고 닫는다. 학교는 개학하고 방학하며, 우리들 출가인은 결제(結制)와 해제(解制)를 하며, 소임을 맡았다가 물러난다. 어느 한 가지도 천시의 절령(節令, 절기)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일반인들은 해를 보내는 것을 하나의 커다란 매듭으로 여겨 한 해 동안의 일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며칠간 휴식을 한다.
여러분과 나는 (숙세의) 인연이 있어 요행히 오늘 운문산(雲門山)에 같이 살면서 편안하게 한 해를 보내게 되었으니, 이것은 부처님과 조사, 보살님들의 가피(加被)요 천룡(天龍)의 보호하심인 동시에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심은 공덕의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해를 편안히 보낼지라도 저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되며, 또한 우리는 환락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각별한 성찰과 참회를 깊이 하며, 정진 수행을 계속하여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꾀하며 널리 복덕(福德)과 지혜를 북돋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이 많은 이들은 죽음이 지척지간에 있으니 용맹스럽게 정진해야 하며, 젊은이들 역시 한가하게 날을 보내서는 안 된다. 황천길에는 노소의 구별이 없으며, 외로운 무덤은 소년의 것이 많은 법이다. 어쨌든 일찌감치 노력하여 생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써 으뜸가는 계책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본시 매일 차를 마시고 있는데 왜 오늘은 ‘보다(普茶)를 마신다’고 하는가? 이것은 선배들의 노파심이니, 보다를 마시는 것을 핑계삼아 여러분들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예전에 조주(趙州) 스님은 도풍(道風)이 고준(高峻)하여 사방에서 참례(參禮)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하루는 두 스님이 새로 왔다. 조주 스님은 한 스님을 가리키면서 “스님은 여기 와 본 적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 스님이 “와 본 적이 없습니다” 하니, 조주 스님은 “차나 마시라”[喫茶去] 하였다. 또 다른 스님에게 “스님은 여기 와 본 적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그 스님이 “와 본 적이 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조주 스님은 역시 “차나 마시라” 했다. 원주(院主)가 묻기를, “와 본 적이 없다는 스님에게 차를 마시라는 것은 그렇다 치고, 와 본 적이 있다는 스님에게도 차를 마시라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조주 스님은 “원주!”하고 불렀다. 원주가 “예”하고 대답하자, 조주 스님은 다시 “차나 마시라” 했다.
이렇게 세 사람 다 이익을 얻었는데, 후세에 이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전해져 ‘조주다(趙州茶)’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운문 조사(雲門祖師)에게도 있었으니, 어떤 스님이 찾아오자 운문 스님은 떡[餠]을 들어 보였으며, 그 스님은 곧 이해하였다. 그래서 세상에 ‘운문병 조주다’(雲門餠 趙州茶)라는 말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지금 여러분은 바로 차를 마시고 떡을 먹고 있다. 알겠는가? 만약 알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차를 마시는 자는 누구인가? 떡을 먹는 자는 누구인가? 대체로 옛 사람들은 생각 생각이 도(道)에 합치했고 걸음 걸음이 무생(無生)이었으며, 언뜻 한 가지를 알아차리면 그 자리에서 곧 깨달았다. 요즘 사람들은 범행이 청정하지 못하고 항상 동요하고 있으며, 생각 생각이 생멸을 거듭하고 업장은 두터우니 어떻게 법을 깨달을 것이며 어떻게 남을 교화할 것인가?
그러므로 여러분은 요컨대 일체를 놓아 버려서[放下一切] 범정(凡情, 범부의 마음, 중생심)과 망념(妄念)이 자기의 묘하게 밝은 참마음[眞心]을 더럽히지 않게 해야 한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다만 범부의 마음만 없애라. 따로 성인의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但盡凡情 別無聖解]라고 하였다.
여러분은 지금 땅콩[化生]을 먹고 있는데 만약 땅콩의 향미를 안다면 곧 범부인 것이니, 어떻게 해야 이 유무(有無)의 두 길을 떠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납승(衲僧, 수행승)의 본분사(本分事)이다. 그리고 비록 이러한 견해에서 벗어난다 할지라도 귀신굴에서 살 궁리를 꾸미고 있는 격이니 여러분은 자세히 참구해야 한다. (안이하게) 몸과 마음을 놓아버리고[放下身心] 절기가 바뀌는 대로 세월을 보내지 말라. 지금 바로 참구하라.
제5부 수행과 불수행(不修行)
수행한다고 하거나 수행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모두 부질없는 말이다. 그대와 내가 자신의 이 마음빛[心光]을 사무치기만 하면 그대로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수행한다고 하거나 수행하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신 경우를 보라. 출가하여 도를 묻고 6년 고행을 거쳐 도를 깨닫고 나서 밤에 샛별을 보면서 탄식하시기를,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온 세상의 중생들이 모두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을 가지고 있는데도,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만약 망상만 여읜다면 곧 청정한 지혜[淸淨智], 자연스러운 지혜[自然智], 스승 없이도 스스로 아는 지혜[無師智]가 저절로 현전할 것을......’ 하셨다. 그 후로 49년간 설법하시고 나서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하셨다.
그 뒤를 이은 조사들도 한 맥으로 법을 이어가면서 모두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이 셋이 차별이 없다[心佛衆生三無差別]’거나, ‘곧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견성성불하게 한다’고 인정하셨으며, 이런 저런 방법으로 설명해 주기도 하고 방망이[棒]를 휘두르거나 고함[喝]을 지르기도 하셨으니, 이는 모두 공부하는 이들의 망상과 분별을 끊기 위함이었다. 요컨대 그 분들은 모두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도록’ 한 것이며 조금도 방편적인 복잡한 수단[方便葛藤]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수행한다고도 하고 수행하지 않는다고도 한 불조(佛祖)의 뜻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대와 나의 이 현전하는 일념은 본래 청정하고 본래 구족하며, 두루 원만하여 묘용(妙用)이 항하사(恒河沙) 같이 한량없어서 삼세제불(三世諸佛)과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다. 다만 선악(善惡)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성불하고, 앉아서 천하태평을 이룰 수 있다. 이렇거늘 무슨 행을 닦을 것이며, 수행한다는 것이 어찌 헛소리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현전하는 이 한 생각 마음이 밖으로 치달아[向外馳求] 망상과 집착을 벗어나지 못하니, 무시이래(無始以來, 시작도 없는 옛적부터)로 생사에 윤회하여 무명번뇌(無明煩惱)가 더욱 물들고 더욱 두터워진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 마음이 곧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안 다음에는 깨닫지 못하여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며, 큰 일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리는 결단력[壯士斷腕]도 없어, 오래도록 망상 집착 가운데서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이다. 좀 낫다는 사람들도 종일토록 이리저리 선(禪)을 찾고 도(道)를 구하여 유심(有心)을 여의지 못하며, 그보다 못한 사람들은 탐진치애(貪瞋痴愛)가 타파할 수 없이 너무 강하여 도를 등지고 내달린다. 이러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생사에 유전(流轉)하여 그칠 때가 없으니, 수행하지 않는다 하면 어찌 공허한 소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대장부는 바로 알아차려서 깊이 고금의 사물이 모두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으며 그림자 같아서 자성(自性, 그 자체 독립적인 존재성)이 없는 줄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주관)과 법(객관)이 문득 공해지고[人法頓空] 모든 반연이 쉬어져서[萬法俱息] 일념이 만년되고[一念萬年] 곧바로 무생(無生)에 이르러야 한다.
이런 사람을 옆에서 보면 옷 입고 밥 먹고,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이 보통 사람과 똑같아서, 남들은 그가 자기의 청정하고 태평한 집 안에 앉아서 무진장의 보배를 누리며, 무심무위(無心無爲)하고 자유자재하며 동정여여(動靜如如)함을 알지 못한다. 차고 더움[冷暖]은 오직 자기만이 아는 것이다. 삼계(三界) 육도(六道)의 인간과 천인, 귀신들이 비단 그를 엿보고 깨뜨리지 못할 뿐 아니라 모든 부처와 보살들도 또한 저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이렇거늘 수행한다거나 수행하지 않는다는 말을 굳이 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뜻을 일으켜서 생사를 뼈아프게 생각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 정진 수행하고, 스승을 찾아 도를 물으며 힘써 참구해야 한다. 항상 선지식을 구하여 길을 지시받고 정(正)과 사(邪)를 가려야 한다. 그리고 ‘끊듯이[切], 갈듯이[磋], 쪼듯이[琢], 다듬듯이[磨] 하고’, ‘강물로써 씻고 가을 볕으로 쪼여’, 점점 정밀하고 순수하며[精純] 맑고 깨끗한[皎潔] 경지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니, 수행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옮겨 본 것으로, 한갓 어지러운 설명일 뿐이다. 눈 밝은 사람이 본다면 너절하게 늘어놓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조사(祖師)의 뜰에는 가을이 깊었고 성인(聖人)이 가신 지는 오래 되었으므로 보통 근기들을 위하여 부득이 이처럼 늘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논한다면 수행한다거나 수행하지 않는다거나 모두 헛소리일 뿐이다. 당장 이 자리에서 일 없다면[直下無事]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本無一物], 어찌 입을 벌릴 수 있겠는가?
보살들이여, 알겠는가? ■
원문(原文)
參禪要旨序
禪 極則事也 諸佛正法眼藏也 這事 言語道斷 心行處滅 非思議之所到. 達摩西來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若是箇漢 直下承當 卽爲法王寵子. 向去但隨緣銷舊業 更勿作新殃 娘生鼻孔 不欠分毫 自己衣珠 何曾有失 原不需參也.
宋代 人根漸劣 祖師對症施藥 始開參話頭法門 其實話頭亦妄想之一耳. 爲以毒攻毒 敎將所參話頭 抵敵雜念 刻刻提撕 漸至能所雙亡 截斷現業流識 到偸心死盡時節 遇境逢緣觸著關棙 忽然虛空粉碎 大地平沈 親見本來之性 於此而得大事了辦者代不乏人. 然成就人才 遠不能及唐朝之盛 何以故 人不如古故 法不會宗故.
往年吾師 虛雲老人 領雲門時 爲救時病 不惜眉毛 拈出參禪要旨 先後提示 累萬餘言 已輯載 老人法彙書內 讀之者 始恍然知歸焉. 老人特別指出 話頭話尾之分 曰 ‘話從心起 心是話之頭’ 曰 ‘所謂話頭 卽是一念未生之際 一念才生 已成話尾’ 曰 ‘死死握著一片敲門瓦子 念著念佛是誰 這箇話頭 成了念話頭 以爲如此可以起疑情得開悟 殊不知這是在話尾上用心 乃是生滅法 終不能到 一念無生之地’.
범
凡범凡此 皆言前人所未言之寶貴法語也 此外如指出四種境界病 及對治之藥 亦老婆心切 得未曾有. 香港佛經流通處 林俠菴居士 讀法彙竟尤愛此節 因而唱印單行小冊 廣渡有情 善哉善哉. 林公具此擇法眼晴 如探驪龍得其頷珠矣.
前賢瞿汝稷有言 ‘生於萬物之中 而得爲人 人而男 男而知讀書 於書知讀竺墳 於竺墳知宗門 是猶彀乳而得雪山之牛 復能得酪於乳 得生酥於酪 而熟酥而醍醐哉’. 嘻 人身難得 佛法難聞 中國難生 知識難遇. 吾人幸値老人出世 盡破四難 林公諸位 聞法信受 擧獻大衆. 經云 ‘諸供養中 法供養最’ 如斯功德 豈算數譬喩之所能及耶. 邇者飛函索吾爲序 數千里外 聲應氣求 五百世前 因晐果海 不辭譾陋 强添錦上之花 隨順衆情 竟著佛頭之糞.
時 佛歷 二千五百年 丙申 初夏 釋融熙 序 于馬來亞 佛學社 道師室
본문(本文)
參
參禪參禪的目的 在明心見性. 去掉自心的汚染 實見自性的面目 汚染就是妄想執著 自性就是如來智慧德相. 如來智慧德相 爲諸佛衆生所同具 無二無別. 若離了妄想執著 就證得自己的如來智慧德相 就是佛 否則就是衆生. 祗爲你我從無量劫來 迷淪生死 汚染久了 不能當下頓脫妄想 實見本性 所以要參禪. 因此參禪的先決條件 就是除妄想. 妄想如何除去 釋迦牟尼佛說的很多 最簡單的莫如 ‘歇卽菩提’ 一箇‘歇’字.
禪禪宗 由達摩祖師傳來東土 到六祖後 禪風廣播 震爍古今. 但達摩祖師和六祖 開示學人最緊要的 莫若 ‘屛息諸緣 一念不生’. 屛息諸緣 就是萬緣放下 所以 ‘萬緣放下 一念不生’. 這兩句話實在是參禪的先決條件 這兩句話如果不做到 參禪不但是說沒有成功 就是入門都不可能. 蓋萬緣纏繞 念念生滅 你還談得上參禪嗎.
‘萬緣放下 一念不生’ 是參禪的先決條件 我們旣然知道了那末 如何不能做到呢. 上焉者 一念永歇 直至無生 頓證菩提 毫無絡索. 其次則以理除事 了知自性 本來淸淨 煩惱菩提 生死涅槃 皆是假名 元不與我自性相于. 事事物物 皆是夢幻泡影. 我此四大色身 與山河大地 在自性中 如海中的浮漚一樣 隨起隨滅 無礙本體 不應隨一切幻事的生住移滅 而起欣厭取捨 通身放下 如死人一樣 自然根塵識心消落 貪瞋痴愛泯滅 所有這身子的痛痒苦樂 飢寒飽暖 榮辱生死 禍福吉凶 毁譽得喪 安危險夷 一槪置之度外 這樣才算放下 一放下 一切放下 永永放下 叫作萬緣放下 萬緣放下了 妄想自消 分別不起 執著遠離. 至此一念不生 自性光明 全體顯露 至是參禪的條件具備了 再用功眞參實究 明心見性才有分.
일ㅇ日來常有禪人來問話 夫法本無法 一落言詮 卽非實義. 了此一心 本來是佛 直下無事 各各現成 說修說證 都是魔話. 達摩東來 ‘直旨人心 見性成佛’ 明明白白指示 大地一切衆生都是佛. 直下認得 此淸淨自性 隨順無染 二六時中 行住坐臥 心都無異 就是現成的佛 不須用心用力 更不要有作有爲 不勞纖毫言說思惟. 所以說成佛是最容易的事 最自在的事 而此操之在我 不可外求. 大地一切衆生 如果不甘長劫輪轉于四生六道 永沈苦海 而願成佛 常樂我淨 諦信佛祖聖言 放下一切 善惡都莫思量 箇箇可以立地成佛. 諸佛菩薩及歷代祖師 發願渡盡一切罪生 不是無憑無據 空發大願 空講大話的.
上來所說 法爾如此 且經佛祖反覆闡明 叮嚀囑咐 眞語實語 幷無絲毫虛誑 無奈大地 一切衆生 從無量劫來 迷淪生死苦海 頭出頭沒 輪轉不已 迷惑顚倒 背覺合塵. 猶如精金投入糞坑 不惟不得受用 而且汚染不敢. 佛以大慈悲 不得已說出八萬四千法門 俾各色各樣根器不同的衆生 用來對治貪瞋癡愛等八萬四千習氣毛病. 猶如金染上了各種汚垢 乃敎你用鏟用刷用水用布等來洗刷琢抹一樣. 所以佛說的法 門門都是妙法 都可以了生死 成佛道. 只有當機不當機的問題 不必强分法門的高下. 流轉中國最普通的法門爲宗敎律淨密 這五種法門 隨各人的 根性和興趣 任行一門都可以. 總在一門深入 歷久不變 就可以成就.
宗宗門主參禪 參禪在‘明心見性’. 就是要參透自己的本來面目 所謂 ‘明悟自心 徹見本性’. 這箇法門 自佛拈花起 至達摩祖師傳來東土以後 下手功夫屢有變遷.
在재 在재 唐宋以前禪德 多是由一言半句 就悟道了 師徒間的傳授 不過以心印心 幷沒有什麽實法 平日參問酬答 也不過隨方解縛 因病予藥而已 宋代以後 人們的根器陋劣了 講了故不到譬如說 ‘放下一切’ ‘善惡莫思’ 但總是放不下 不是思善 就是思惡 到了這箇時候 祖師們不得已 採取以毒攻毒的辦法 敎學人參公案 或是看話頭 甚至于要齩定一箇死話頭 敎你齩得緊緊 刹那不要放鬆 如老鼠錹棺材相似 齩定一處 不通不止 目的在以一念 抵到萬念 這實在是不得已的辦法 如惡毒在身 非開刀療治 難以生效.
古人的公案多得很 後來專講看話頭 有的 ‘看拕死屍的是誰’ 有的 ‘看父母未生以前 如何是我本來面目’ 晩近諸方多用 ‘看念佛是誰’ 這一話頭 其實都是一樣 都很平常 幷無奇特 如果你要說 看念經的是誰 看持呪的是誰 看拜佛的是誰 看喫飯的是誰 看穿衣的是誰 看走路的是誰 看睡覺的是誰 都是一樣子
誰誰字下的答案 就是心 話從心起 心是話之頭 念從心起 心是念之頭 萬法皆從心生 心是萬法之頭 其實話頭 卽是念頭 念之前頭 就是心 直言之 一念未生以前 就是話頭. 由此 你我知道 看話頭就是觀心 父母未生以前的本來面目 就是心 看父母未生以前的本來面目 就是觀心 性卽是心 ‘反聞聞自性’ 卽是 反觀觀自心 ‘圓照淸淨覺相’ 淸淨覺相 卽是心 照卽觀也.
心卽是佛 念佛卽是觀佛 觀佛卽是觀心 所以說 ‘看話頭’. 或者是說 ‘看念佛是誰’ 就是觀心 卽是觀照自心淸淨覺體 卽是觀照自性佛. 心卽性卽覺卽佛 無有形相方所 了不可得. 淸淨本然 周徧法界 不出不入 無往無來 就是本來現成的淸淨法身佛. 行人都攝六根 從一念始生之處看去 照顧此一話頭 看到離念的淸淨自心 再緜緜密密 恬恬淡淡 寂而照之 直下五蘊皆空 身心俱寂 了無一事 從此晝夜六時 行住坐臥 如如不動 日久功深 見性成佛 苦戹度盡.
昔高峯祖師云 ‘學者能看箇話頭 如投一片瓦塊在萬深澤 直下落底 若七日不得開悟 當截取老僧頭去’ 同參們 這是過來人的話 是眞語實語 不是騙人的誑語啊.
然而爲什麽 現代的人 看話頭的多而悟道的人沒有幾箇呢 這箇由于現代的人根器不及古人 亦由學者對參禪看話頭的理路 多是沒有摸淸 有的人 東參西訪 南奔北走 結果뇨到老 對一箇話頭 還沒有弄明白 不知什麽是話頭 如何才算看話頭. 一生總是執著言句名相 在話尾上用心 ‘看參佛是誰’呀 ‘照顧話頭’呀 看來看去 參來參去 與話頭東西背馳 那裏會悟本然的無爲大道呢 如何到得 這一切不受的王位上去呢. 金屑放在眼裏 眼只有瞎 那裏會放大光明呀. 可憐啊 可憐啊 好好的兒女 離家學道 志願非凡 結果空勞一場 殊可悲憫.
古人云 ‘甯可千年不悟 不可一日錯路’. 修行悟道 易亦難 難亦易 如開電燈一樣 會則彈指之間 大放光明 萬年之黑暗頓除 不會則機壞燈毁 煩惱轉增 有些參禪看話頭的人 著魔發狂吐血羅病 無明火大 人我見深 不是很顯著的例子嗎. 所以用功的人 又要善于調和身心 務須心平氣和 無罣無礙 無我無人 行住坐臥 妙合玄機.
參禪這一法 本來無可分別 但做起功夫來 初參有初參的難易 老參有老參的難易. 初參的難處在什麽地方呢. 身心不純熟 門路找不淸 功夫用不上 不是心中著急 就是打盹度日 結果成爲 ‘頭年初參 二年老參 三年不參’. 易的地方是什麽呢. 只要具足一箇信心 長永心和無心. 所謂信心者 第一信我此心 本來是佛 與十方三世諸佛衆生無異 第二信釋迦牟尼佛說的法 法法都可以了生死 成佛道. 所謂 長永心者 就是選定一法 終生行之 乃至來生又來生 都如此行持. 參禪的總是如此參去 念佛的總是如此念去 持呪的總是如此持去 學敎的總是從聞思修行去 任修何種法門 總以戒爲根本 果能如是做去 將來沒有不成的.
潙山老人說 ‘若有人能行此法 三生若能不退 佛階決 定可期’ 又永嘉老人說 ‘若將妄語誑衆生 永墮拔舌塵沙劫’. 所謂無心者 就是放下一切 如死人一般 終日隨衆起到 不再起一點分別執著 成爲一箇無心道人 初發心人 具足了這三心 若是參禪看話頭 就看‘念佛是誰’. 你自己黙念幾聲 ‘阿彌陀佛’ 看這念佛的是誰 這一念是從何處起的. 當知這一念不是從我口中起的 也不是從我肉身起的. 若是從我身或口起的 我若死了 我的身口猶在 何以不能念了呢.
當知此一念是從我心起的 卽從心念起處 一覰覰定 驀直看去 如猫捕鼠 全副精神集中于此 沒有二念 但要緩急適度 不可操之太急 發生病障. 行住坐臥 都是如此 日久功深 瓜熟蒂落 因緣時至 觸著椪著 忽然大悟 此時如人飮水 冷暖自知 直至無礙之地 如十字街頭見親爺 得大安樂.
老老參的難易如何呢. 所謂老參 是指親近過善知識 用功多年 經過了一番煅練身心純熟 理路淸楚 自在用功 不感辛苦. 老參上座的難處 就是在此自在明白 當中停住了 中止化城 不到寶所 能靜不能動 不能得眞實受用 甚至觸境生情 取捨如故 欣厭宛然 粗細妄想 依然牢固 所用功夫 如冷水泡石頭 不起作用久之也 就疲懈下去 終于不能得果起用. 老參上座 知道了這箇困難 立卽提起本參話頭 抖擻精神于百尺竿頭 再行邁進 直到高高頂上立 深深海底行 撒手縱橫去 與佛祖覿體相見 困難安住 不亦易乎.
話頭卽是一心 你我此一心 不在中間內外 亦在中間內外 如虛空的不動而徧一切處. 所以話頭不要向上提 也不要向下厭 提上則引起掉擧 厭下則落于昏沈 違本心性 皆非中道. 大家怕妄想 以降伏妄想爲極難. 我告訴諸位 不要怕妄想亦不費力去 降伏他你只要認得妄想 不執著他 不隨逐他 也不要排遣他 只不相續 則妄想自離 所謂 ‘妄起卽覺 覺妄卽離’.
若能利用妄想做功夫 看此妄想從何處起. 妄想無性 當體立空卽復我本無的心性 自性淸淨法身佛 卽此現前 究實言之 眞妄一體 生佛不二 生死涅槃 菩提煩惱 都是本心本性 不必分別 不必欣厭 不必取捨 此心淸淨 本來是佛 不需一法 那裏有許多羅索 - 參.
제2부
諸제2부제제w제 제제諸位常時來請開示 令我很覺感媿. 諸位天天辛辛苦苦 砍柴種地 挑土搬磚 一天忙到晩 也沒打失辦道的念頭. 那種爲道的殷重心 實在令人感動.
虛雲慙媿 無道無德 說不上所謂開示 只是拾古人幾句涎唾 來酬諸位之問而已.
用功辦道的方法很多 現在且約略說說.
1. 無論甚麽人 尤其想用功辦道的人 先要深信因果. 若不信因果 妄作胡爲 不要說辦道不成功 三途少他不了. 古德云 ‘欲知前世因 今生受者是 欲知來世界 今生作者是’. 又說 ‘假使百千劫 所造業不亡 因緣會遇時 果報還自受’. 楞嚴經說 ‘因地不眞 果招紆曲’. 故種善因結善果 種惡因 結惡果 種瓜得瓜 種豆得豆 乃必然的道理. 談到因果 我說兩件故事來證明.
1) 釋釋迦佛前 迦毘羅閱城裏 有一箇捕魚村 村裏有箇大池 那時天旱 水고池裏的 魚類盡給村人取喫 最後剩下一尾最大的魚 也被烹殺. 祗有一箇小孩 從來沒有喫魚肉 僅那天敲了大魚頭三下來玩솨. 後來釋迦佛住世的時候 波斯匿王 很相信佛法 娶釋種女 生下一箇太子 叫作琉璃. 琉璃幼時 在釋種住的 迦毘羅閱城讀書 一天爲因戱坐佛的座位 被人罵他把他抛下來 懷恨在心. 及至他作國王 便率大兵攻打迦毘羅閱城 把城裏居民 盡數殺戮. 當時佛頭痛了三天. 諸大弟子 都請佛設法解救他們 佛說定業難轉. 目犍連尊者 以神通力用鉢攝藏釋迦親族五百人在空中 滿以爲把他們救出 那知放下來時 已盡變爲血水.
諸諸大弟子請問佛 佛便將過去村民喫魚類那段公案說出. 那時大魚就是現在的琉璃王前身. 他率領的軍隊 就是當日池裏的魚類. 現在被殺的羅閱城居民 就是當日喫魚的人. 佛本身就是當日的小孩 因爲敲了魚頭三下 所以現在要遭頭痛三天之報. 定業難逃 所以釋族五百人 雖被目連尊者救出 也難逃性命. 後來琉璃王生墮地獄. 怨怨相報 沒有了期 因果實在可怕.
2) 百丈老人有一天上堂 下座後 各人都已散去 獨有一位老人沒有跑. 百丈問他作什麽. 他說 ‘我不是人實是野狐精 前生本是這裏的堂頭 因有箇學人問我 “大修行人還落因果否”, 我說 “不落因果”. 便因此墮落 作了五百年野狐精 沒法脫身 請和尙慈悲開示’. 百丈說 ‘你來問我’. 那老人便道 ‘請問和尙 大修行人還落因果否’. 百丈答道 ‘不昧因果’. 那老人言下大悟. 卽禮謝道 ‘今承和尙代語 令我超脫孤身 我在後山巖下 祈和尙以亡僧禮送’. 第二天百丈在後山石巖 以杖發出 一頭死狐 便用亡僧禮將他化葬.
我們聽了 這兩段故事 便確知因果可畏 雖成佛也難免頭痛之報. 報應絲毫不爽 定業實在難逃. 我們宜時加警惕 愼勿造因.
2. 用功辦道首要持戒 戒是無上菩提之本 因戒才可以生定 因定才可以發慧 若不持戒而修行 無有是處.
楞嚴經四種淸淨明誨 告訴我們 不持戒而修 三昧者 塵不可出. 縱有多智禪定現前 亦落邪魔外道. 可知道持戒的中要. 持戒的人 龍天擁護 魔外敬畏. 破戒的人 鬼言大賊 掃其足跡.
從前在罽賓國近著 僧伽藍的地 有條毒龍 時常出來爲害地方. 有五百位阿羅漢 聚在一起 用禪定力去驅逐他 總沒法把他赶跑. 後來另有一位僧人 也不入禪定 僅對那毒龍說了一句話 ‘賢善遠此處去’ 那毒龍便遠跑了. 衆羅漢問那僧人 什麽神通把毒龍赶跑. 他說 ‘我不以禪定力 直以謹愼於戒 守護輕戒 猶如重禁’. 我們想想 五百位羅漢的禪定力 也不及一位嚴守禁戒的僧人.
或或云 六祖說 ‘心平何勞持戒 行直何用參禪’. 我請問你的心己平直沒有. 有箇月裏嫦娥 赤身露體抱著你 你能不動心嗎. 有人無理辱罵痛打你 你能不生瞋恨心嗎. 你能够不分別怨親憎愛 人我是非嗎. 統統作得到 才好開大口 否則不要說空話.
3. 想用功辦道 先要一箇堅固信心. 信爲道元功德母. 無論作甚麽事 沒有信心 是作不好的. 我們要了生脫死 尤其要一箇堅固信心.
佛說大地衆生 皆有如來智慧德相 只因妄想執著 不能證得. 又說了種種法門 來對治衆生的心病. 我們就當信佛語不虛 信衆生皆可成佛. 但我們爲甚麽不成佛呢. 皆因未有如法下死功夫呀.
譬如我們信知 黃豆可造豆腐 你不去造他 黃豆不自己變成 豆腐卽使造了 石膏放不如法 豆腐也會造不成. 若能如法磨煮去渣 放適量的石膏 決定可成豆腐. 辦道亦復如是 不用功固然 不可以成佛 用功不如法 佛也是不能成. 若能如法修行不退不悔 決定可以成佛. 故我們應當深信自己本來是佛 更應深信依法 修行決定成佛.
永嘉禪師說 ‘證實相 無人法 刹那滅卻阿鼻業 若將妄語誑衆生 自招拔舌塵沙劫’. 他老人家慈悲要堅定後 人的信心 故發如此宏誓.
4. 信心旣具 便要擇一 定一箇法門來受持 切不可朝秦暮楚. 不論念佛也好 持呪也好 參禪也好 總要認定一門驀直幹去 永不退誨. 今天不成功 明天一樣幹 今年不成功 明年一樣幹 今世不成功 來世一樣幹. 潙山老人 所謂 ‘生生若能不退 佛階決定可期’.
有等人不定主意 今天 聽那位善知識說念佛好 又念兩天佛 明天聽某位善知識說參禪好 又參兩天禪 東弄弄西弄弄 一生弄到死 總弄不出半點‘名堂’ 豈不寃哉枉也.
用功的法門雖多 諸佛祖師皆以參禪爲無上妙門. 楞嚴會上 佛勅文殊菩薩 揀選圓通 以觀音菩薩的耳根圓通爲最第一. 我們要反聞聞自性 就是參禪. 這裏是禪堂. 也應該講參禪這一法.
平
平常日用皆在道中行 那裏不是道場 本用不著甚麽禪堂 也不是坐才是禪的 所謂禪堂 所謂坐禪 不過爲我等末世障深慧淺的衆生而設.
坐坐禪要曉得善調養身心. 若不善調 小則害病 大則著魔 實在可惜. 禪堂的行香坐香 用意就在調身心. 此外調身心的方法很多 今擇要略說.
跏跏趺坐時 宜順著自然正座. 不可將腰作意挺起 否則火氣上升 過後會眼屎多 口臭氣頂 不思飮食 甚或吐血. 又不要縮腰垂頭 否則容易昏沈. 如覺昏沈來時 挺一挺 輕略移動臀部 昏沈自然消滅.
用功太過急迫 覺心中煩燥時 宜萬緣放下 功夫也放下來 休息約半寸香 漸會舒服 然後再起用功. 否則日積月累 便會變成性燥易怒甚 或發狂著魔.
坐禪有些受用境界很多 說之不了. 但爾不要去執著它 便礙不到爾. 俗所謂 ‘見怪不怪 其怪自敗’. 雖看見妖魔鬼怪來侵擾爾 也不要管他 也不要害怕. 就是見釋迦佛來替爾摩頂授記 也不要管他 不要生歡喜. 楞嚴所謂 ‘不作聖心 名善境界 若作聖解 卽受羣邪’.
用功怎樣下手呢. 楞嚴會上 憍陳那尊者說客塵二字 正是我們初心用功下手處. 他說 “譬如行客 投寄旅亭 或宿或食 宿食事畢 俶裝前途 不遑安住. 若實主人 自無攸往. 如是思惟 不住名客 主名主人. 以不住者 名爲客義. 又如新霽 淸暘升天 光入隙中 發明空中 諸有塵相 塵質搖動 虛空寂然. 澄寂名空 搖動名塵. 以搖動者 名爲塵義.” 客塵喩妄想 主空喩自性. 常住的主人 本不跟客人. 或來或往 喩常住的自性 本不隨妄想 忽生忽滅. 所謂 但自無心于萬物 何妨萬物. 常圍繞 塵質自搖動 本礙不著澄寂的虛空. 喩妄想子生滅 本礙不著如如不動的自性. 所謂 ‘一心不生 萬法無咎’.
此中客字較粗 塵字較細. 初心人先認淸了‘主’和‘客’ 自不爲妄想遷流. 進步明白了‘空’和‘塵’ 妄想自不能爲礙. 所謂 ‘識得不爲寃果’ 能於此諦審領會 用功之道 思過半了.
古代祖師 直旨人心 見性成佛. 如達摩祖師的安心 六祖的惟論見性 只要直下承當便了 沒有看話頭的. 到後來的祖師 見人心不古 不能死心塌地 多弄機詐. 每每數他人珍寶 作自己家珍. 便不得不各立門庭 各出手眼 才令學人看話頭.
話頭很多 如‘萬法歸一 一歸下處’. ‘父母未生前 如何是我本來面目’ 等等. 但以念佛是誰 爲最普通.
甚심십십마甚심甚麽叫話頭 話就是說話 頭就是說話之前 如念 ‘阿彌陀佛’是句話未念之前 就是話頭. 所謂話頭 卽是一念未生之際 一念才生 已成話尾. 這一念未生之際 叫作不生 不掉擧 不昏沈 不著靜 不落空 叫作不滅 時時刻刻 單單寂寂 一念回光返照. 這‘不生不滅’ 就叫作看話頭 或照顧話頭.
看話頭先要發疑情. 疑情是看話頭的枴杖. 何謂疑情 如問念佛的是誰 人人都知道是自己念. 但是用口念呢. 還是用心念呢. 如果用口念 睡著了還有口 爲甚麽不會呢. 如果用心念 心又是箇甚麽樣子 卻沒處捉摸. 因此不明白 便在‘誰’上發起輕微的疑念 但不要粗 愈細愈好. 隨時隨地 單單照顧定 這箇疑念. 像流水般不斷地看去 不生二念. 若疑念在 不要動著他. 疑念不在 再輕微提起. 初用心時 必定靜中比動中較得力些. 但切不可生分別心. 不要管他得力不得力 不要管他動中或靜中 爾一心一意的用爾的功好了.
‘念佛是誰’ 四字 最著重在箇 ‘誰’字 其餘三字 不過言其大者而已. 如穿衣喫飯的是誰 拉屎放尿的是雖 打無明的是誰 能知能覺的是誰. 不論行住坐臥‘誰’字一擧便最容易發疑念. 不待反覆 思量卜度作意才有. 故誰字話頭 實在是參禪妙法. 但不是將‘誰’字 或‘念佛是誰’四字作佛號念. 也不是思量卜度去找念佛的是誰叫做疑情. 有等將‘念佛是誰’四字 念佛停口 不如念句阿彌陀佛功德更大. 有等胡思亂想 東尋西找 叫做疑情 那知愈想妄想愈多 等於欲升反墮 不可不知.
初心人所發的疑念很粗 忽斷忽續 忽熟忽生 算不得疑情 僅可叫做想. 漸漸狂心收籠了 念頭也有點把得住了 才叫做參. 再漸漸功夫純熟 不疑而自疑. 也不覺得坐在甚麽處所 也不知道有身心世界 單單疑念現前 不間不斷 這才叫做疑情. 實際說起來 初時那算得用功 僅僅是打妄想 到這時眞疑現前 才是眞正用功的時候. 這時候是一箇大關隘 很容易跑入岐路.
1. 這時候淸淸淨淨無限輕安 若稍失覺照 便陷入輕昏狀態. 若有箇明眼人在旁 一眼便會看出他. 正在這箇境界 一香板打下 馬上滿天雲霧散 很多會因此悟道的.
2. 這時淸淸淨淨 空空洞洞 若疑情沒有了 便是無記 坐枯木岩. 或叫 ‘冷水泡石頭’. 到這時就要提 提卽覺照(覺卽不迷 卽是慧. 照卽不亂 卽是定) 單單寂寂 這一念 湛然寂照 如如不動 靈靈不眛 了了常知 如冷水抽烟 一線綿延不斷 用功到這地步 要具金剛眼睛 不再提. 提就是頭上安頭.
昔有僧問趙州老人道 ‘一物不將來時如何’. 州曰 ‘放下來’. 僧曰 ‘一物不將來放下箇甚麽’. 州曰 ‘放不下排起去’. 就是說這時節. 此中風光 如人飮水 冷暖自知 不是言說可能到. 到這地步的人 自然明白 未到這地步的人 說也沒用. 所謂 ‘路逢劍客須呈劍 不是詩人不獻詩’.
或問 ‘觀世音菩薩的反聞聞自性 怎見得是參禪’. 我方說照顧話頭 就是敎爾時時刻刻單單的的 一念回光返照 這‘不生不滅’. 反聞聞自性 也是敎爾時時刻刻單單的的 一念反聞聞自性. ‘回’就是反 ‘不生不滅’就是自性.
‘聞’和‘照’ 雖順流時循聲逐色 聽不越於聲 見不超於色 分別顯. 然但逆流時反觀自性 不去循聲逐色 則原是一精明‘聞’和‘照’ 沒有兩樣. 我們要知道所謂 照顧話頭 所謂反聞聞自性 絶對不是用眼睛來看 也不是用耳朶來聽. 若用眼睛來看或耳朶來聽 便是循聲逐色 被物所轉 叫作順流. 若單單的的一念在‘不生不滅’中 不去循聲逐色 就叫作逆流 叫作照顧話頭 也叫作反聞自性.
參禪最要生死心切 和發長遠心. 若生死心不切 則疑情不發 功夫做不上. 若沒有長遠心 則一曝十寒 功夫不成片. 只要有箇長遠切心 眞疑便發. 眞疑發時 塵勞煩惱不息而息. 時節一到 自然水到渠成.
我說箇親眼看見的故事 給爾們聽. 前淸庚子年間 八國聯軍入京 我那時跟光緖帝慈禧太后們一起走. 中間有一段 徒步向陝西方面跑 每日跑幾十里路 幾天沒有飯喫. 路上有一箇老百姓 進貢了一點番薯藤 給光緖帝 他喫了還問那人 是甚麽東西 這麽好喫. 爾想皇帝平日好大的架子 多大的威風 那曾跑過幾步路 那曾餓過半頃肚子 那曾喫過番薯藤. 到那時架子也不擺了 威風也不逞了 路夜跑得了肚子也餓得了 菜根也喫得了. 爲甚麽他這樣放得下 因爲聯軍想要他的命 他一心想逃命呀.
可是後來議好和 御駕回京 架子又擺起來了 威風又逞起來了 路又跑不得了 肚子餓不得了 稍不高興的東西也喫不下咽了. 爲甚他那時又放不下了 因爲聯軍已不要他的命 他已沒有逃命的心呀. 假使他時常將逃命時是心腸來辦道 還有甚麽不了. 可惜沒箇長遠心 遇著順境 故態復萌.
諸位同參呀. 無常殺鬼 正時刻要我們的命 他永不肯同我們‘議和’的呀. 快發箇長遠切心來 了生脫死吧.
高高峯妙祖說 ‘參禪若要剋日成功 如墮千丈井底相似 從朝至暮 從暮至朝 千思想萬思想 單單是箇求出之心 究竟決無二念. 誠能如是施功 或三日 或五日 或七日 若不徹去 高峯今日犯大妄語 永墮拔舌泥犁’. 他老人家也一樣 大悲心切 恐怕我們發不起長遠切心 故發這麽重誓來 向我們保證.
用功人有兩種難易 (1)初用心的難易 (2)老用心的難易
初
初用心的通病 就是妄想習氣放不下來 無明貢高 嫉妬障碍 貪瞋痴愛 懶做好喫 是非人我 漲滿一大肚皮 那能與道相應. 或有些是箇公子哥兒出身 習氣不忘 一些委屈也受不得 半點苦頭也喫不得 那能用功辦道. 他沒有想想本師釋迦牟尼佛 是箇甚麽人出家的. 或有些識得幾箇文字 便尋章摘句 將古人的言句作解會 還自以爲了不起 生大我慢 遇著一場大病 便叫苦連天. 或臘月三十到來 便手忙脚亂 生平知解 一點用不著 才悔之不及.
有有點道心的人 又摸不著一箇下手處. 或有害怕妄想 除又除不了 終日煩煩惱惱 自怨業障深重 因此退失道心. 或有要和妄想拼命 憤憤然提拳鼓氣 挺胸睛眼像煞有介事. 要與妄想決一死戰 那知妄想卻拼不了 倒弄得吐血發狂. 或有怕落空 那知早已生出‘鬼’. 空也空不掉 悟又悟不來. 或有將心求悟 那知求悟道想成佛 都是箇大妄想. 砂非飯本 求到驢年也 決定不得悟. 或有椪到 一兩枝靜香的 便生歡喜 那僅是盲眼烏龜鑽木孔 偶然椪著. 不是實在功夫 歡喜魔早已附心了. 或有靜中覺得淸淸淨淨很好過 動中又不行 因此避喧向寂 早作了動靜兩魔王的眷屬 諸如此類 很多很多. 初用功摸不到路頭實在難. 有覺無照則散亂 不能‘落堂’ 有照無覺 又坐在死水裏浸殺.
用
用功雖說難 但摸到路頭又很易. 甚麽是初用心的易呢. 沒有甚麽巧 放下來便是. 放下箇甚麽 便是放下一切無明煩惱. 怎樣才可放下呢. 我們也送過往生的. 爾試罵那死屍幾句 他也不動氣. 打他幾棒他也不還手. 平日好打無明的 也不打了 平日好名好利的 也不要了 平日諸多習染的 也沒有了 甚麽也 不分別了 甚麽也放下了.
諸位同參呀. 我們這箇軀賣子 一口氣不來就是一具死屍. 我們所以放不下 只因將它看重 方生出人我是非愛憎取捨. 若認定這箇軀賣子是具死屍 不去寶貴它 根本不把它看作是我 還有甚麽放不下. 只要放得下. 二六時中 不論行住坐臥 動靜閒忙 通身內外只是一箇疑念 平平和和 不斷的疑下去 不雜絲毫異念. 一句話頭 如倚天長劍 魔來魔斬 佛來佛斬 不怕甚麽妄想. 有甚麽打得爾閒.
又那箇去分動分靜 那箇去著. 有著空 如果怕妄想 又加一重妄想. 覺淸淨早已不是淸淨. 怕落空 已經墮在有中. 想成佛早已入了魔道. 所謂運水搬柴 無非妙道 鋤田種地 總是禪機. 不是一天盤起腿子打坐 才算用功辦道的.
甚麽是老用心的難呢. 老用心不用到眞疑現前的時候. 有覺有照 仍屬生死 無覺無照 又落空亡 到這境地實在難. 很多到此灑不脫 立在百尺竿頭 沒法進步的. 有等因爲到了這境地 定中發點慧 領略古人幾則公案 便放下疑情. 自以爲大徹大悟 吟詩作偈 瞬目揚眉 稱善知識 殊不知已爲魔眷. 又有等錯會了達摩老人的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墻壁 可以入道’ 和六祖的 ‘不思善不思惡 正與麽時 那箇是明上座本來面目’的意義 便以坐在枯木岩爲極則. 這種人以化城爲寶所 認異地作家鄕. 婆子燒庵 就是罵此等死漢.
甚甚麽是老用心的易呢. 到這時只要不自滿 主中輟 綿綿密密做去 綿密中更綿密 微細中更微細. 時節一到 桶底自然打脫. 如或不然 找善知識抽釘拔楔去.
寒山大士頌云
高高山頂上 四顧極無邊
靜坐無人識 孤月照寒泉
泉中且無月 月是在靑天
吟此一曲歌 歌中不是禪
首首二句 就是說獨露眞常 不屬一切 盡大地光皎皎地 無絲毫障碍. 次四句 是說眞如妙體 凡夫固不能識 三世諸佛也不到我的處所 故曰無人識. 孤月照寒泉三句 是他老人家方便譬如這箇境界. 最後兩句 怕人認指作月 故特別提醒我們 凡此言說 都不是禪呀.
結論
就是我方才說了一大堆 也是扯葛藤打閒岔. 凡有言說 都無實義. 古德接人 非棒則喝 那有這樣羅索. 不過今非昔比 不得不强作標月之指. 諸位同參呀. 究竟指是誰月是誰 參.
제3부
心卽是佛 佛卽是覺. 此一覺性 生佛平等 無有差別. 空寂而了無一物 不受一法 無可修證. 靈明而具足萬德 妙用恒沙 不假修證. 只因衆生迷淪生死 經歷長劫 貪瞋癡愛 妄想執著 汚染已深 不得已而說修說證. 所謂修者 古人謂不詳之物 不得已而用焉.
此此次打七 已經三箇半七 還有三箇半七. 下三箇半七 身心較爲純熟 用功當比前容易 諸位不可錯過因緣. 務要在下三箇半七內 弄箇水落石出 發明心地才不孤負這箇難得的機緣.
這二十多天來 諸位一天到晩起早睡遲 務力用功 結果出不了四種境界.
一者 路頭還有搞不淸的 話頭看不上 糊糊塗塗 隨衆打盹 不是妄想紛飛 就是昏沈搖撼.
二者 話頭看得上 有了點把握 但是死死握著 一片敲門瓦子. 念著‘念佛是誰’ 這箇話頭 成了念話頭. 以爲如此可以起疑情得開悟. 殊不知這是在話尾上用心 乃是生滅法 終不能到一念無生之地. 暫用尙可 若執以爲究竟實法 何有悟道之期. 晩近禪宗之所以 不出人了 多緣誤于在話尾上用心.
三者 有的會看話頭 能照顧現前一念無生. 或知念佛是心 卽從此一念起處 驀直看到無念心相. 逐漸過了寂靜 粗妄旣息 得到輕安 就有了種種境界出現. 有的不知身子坐在何處了 有的覺得身子輕飄飄的上騰了.有的見到可愛的人物而生歡喜心的 有的見到可怕的境界而生恐怖心的 有的起婬慾心的 種種不一 要知這都是魔 著卽成病.
四者 有的業障較輕的 理路明白 用功恰當 已走上了正軌的. 淸淸爽爽 妄想若歇 身心自在 沒有甚麽境界. 到此地步 正好振起精神 用功向前. 惟須注意枯木巖前又路多. 有的是在此昏沈而停住了. 有的是得了點慧解 作詩作文 自以爲足 起貢高我慢.
以上四種境界都是病 我今予爾們以對治之藥.
第一 如話頭未看上 妄想昏沈多的人. 你還是看‘念佛是誰’這箇誰字. 待看到妄想昏沈少 誰字不能忘了時 就看這一念起處. 待一念不起時 卽是無生 能看到一念無生 是名眞看話頭.
第二 關于執著‘念佛是誰’ 在話尾上用心以生滅法爲是的人. 也可照上述的意思 卽向念起處看到一念無生法.
第三 關于觀無念已得寂靜輕安 而遇到任何境界的人. 你只照顧本參話頭 一念不生 佛來佛斬 魔來魔斬 一槪不理他 自然無事 不落羣邪.
第四 關于妄念已歇 淸淸爽爽 身心自在的人. 應如古人所說 ‘萬法歸一 一歸下處’ 由一向至極處邁進 直至高高山頂上 深深海底行 再撒手縱橫去.
以以上所說 都是對末法時期的鈍根人說的方法 其實宗門上上一乘. 本師釋迦牟尼佛在靈山會上拈花之旨 敎外別傳. 歷代祖師 惟傳一心 直指人心 見性成佛 不落階級 不假修證. 一言半句卽了 無一法可得 無一法可修 當下就是不起妄緣 卽如如佛. 那裏有許多閒話呢.
제4부
諸位上座 今天又是臘月三十日了 大衆都認爲是過年 常住沒有好供養 請諸位多喫杯茶. 照曆書規定 一年有春夏秋冬四季 十二箇月 二十四箇節氣. 人事上的措施 多是應著天時而來的. 如農人的春耕夏耘 秋放冬藏 工人的起工停工 商人的開帳結帳 學敎的開學放假 我們出家人的結制解制 請職退職 無一不是根據天時節令而來的. 一般人認爲過年是一箇大關節 要把一年的事 作箇總結同時要休息幾天.
你你我有緣 僥倖今日同在雲門 平安過年 這時佛祖菩薩的可庇 龍天的護持 亦由大家累劫栽培之所感. 但我們自己平安過年 不可忘記那些痛苦不堪的人. 我們不可貪圖歡樂 要格外的省愼 深自懺悔 精進修持 自利利他 廣培福慧 年老的人 死在眉睫 固要猛進. 年輕的人 亦不可悠忽度日 須知黃泉路上無老少孤墳多是少年人. 總要及早努力了脫生死 方爲上計.
我們本來天天喫茶 何以今天名‘喫普茶’呢. 這時先輩的婆心 藉喫普茶提醒大家.
昔趙州老人道風高峻 十方學者參禮的甚重. 一日 有二僧新到 州指一僧問曰 “上座曾到此間否” 云 “不曾到” 州云 “喫茶去”. 又問那一僧云 “曾到此間否” 云 “曾到” 州云 “喫茶去”. 院主問曰 “不曾到 敎伊喫茶去且置 曾到 爲甚麽也敎伊喫茶去”. 州云 “院主” 院主應 “喏” 州云 “喫茶去”.
如是三人都得了利益. 後來傳偏天下 都說 ‘趙州茶’. 又如此地 雲門祖師 有學者來見 就擧起胡餠 學者就領會了. 所以天下相傳 ‘雲門餠’ ‘趙州茶’.
現在諸位 正在喫茶餠 會了麽. 如若未會 當體取喫茶作是誰 喫餠的是誰. 大抵古人 念念合道 步步無生 一經點醒 當下卽悟. 今人梵行未淸 常常在動 念念生滅 覆障太厚 如何點法 他亦不化. 所以諸位 總要放下一切 不使凡情妄念 汚染自己的妙用眞心. 古人說 ‘但盡凡情 別無聖解’. 你現在喫化生 若不知化生的香味 就同木石. 若知化生的香味 就是凡夫. 如何去此有無二途處. 就是衲僧本分事. 縱然超脫了這些見解 猶在鬼窟裏作活計 大家子細. 放下身心 莫隨節令轉 直下參去.
제5부
講講修行 講不修行 都是一句空話. 你我透徹了自己這一段心光 當下了無其事 還說甚麽修與不修. 試看本師釋迦牟尼佛的表顯. 出家訪道 苦行六年證道. 夜覩明星 嘆曰 “奇哉奇哉 大地衆生 皆有如來智慧德相 祗因妄想執著 不能證得. 若離妄想 則淸淨智 自然智 無師智 自然現前”. 以後說法四十九年 而曰 “未說著一字”. 自後歷代祖師 一脈相承 皆認定 ‘心佛衆生三無差別’ ‘直指人心 見性成佛’. 橫說竪說 或棒或喝 都是斷除學者的妄想分別. 要他直下 ‘識自本性 見自本性’. 不假一點方便葛藤. 說修說證 佛祖的意旨 我們也就皎然明白了.
你我現前這一念心 本來淸淨 本自具足 周徧圓滿 妙用恒沙 與三世諸佛無異. 但不思量善惡 與麽去 就可立地成佛 坐致天下太平. 如此有甚麽行可修 講修行豈不是句空話嗎. 但你我現前這一念心 向外馳求 妄想執著 不能脫離 自無始以來 輪轉生死 無明煩惱 愈染愈厚. 初不知自心是佛 卽知了亦不肯承當 作不得主 沒有壯士斷腕的勇氣 長在妄想執著中過日子. 上焉者 終日作模作樣 求禪求道 不能離于唯心. 下焉者 貪瞋癡愛 牢不可破 背道而馳. 這兩種人 生死輪轉 沒有已時 講不修行 豈不又是空話.
所所以大丈夫 直截了當. 深知古往今來 事事物物 都是夢幻泡影 無有自性. 人法頓空 萬緣俱息 一念萬年 直至無生. 旁人看他穿衣喫飯 行住坐臥 一如常人. 殊不知他安坐自己淸淨太平家裏 享受無盡藏寶 無心無爲 自由自在 動靜如如 冷暖祗他自己知道.
不惟三界六道的人天神鬼窺他不破 就是諸佛菩薩也撥他不何. 這樣還說箇甚麽修行與不修行呢. 其次的人 就要發起志向 痛念生死 發慚媿心 起精進行 訪道力參. 常求善知識 指示途徑 勘辨邪正. ‘如切如磋如琢如磨’ ‘江漢以濯之 秋陽以曝之’ 漸臻于精純皎潔 這就不能說不修行了.
上上來說的 不免遷上就下 仍屬一些葛藤 明眼人看來 要認爲 ‘扡泥帶水’ 然祖庭秋晩 去聖日遙 爲應羣機 不得已而如此羅索. 究實論之 講修行講不修行 都是空話 直下無事 本無一物 那容開口 菩薩呀 會嗎. ■
역자후기
이 참선요지는 이미 십 수년 전에 박경훈(朴敬勛) 거사님에 의해 번역되어 제방(諸方)에 몇 차례 법보시되었던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귀중한 가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채, 아는 이들 사이에서만 읽혀져 왔다. 역자는 이번에 서울 길상사의 시민선방 및 주말수련회의 참선교재로 이 책을 다시 번역하게 되었는데, 이왕 책을 새로 내는 김에 누구든지 시중에서 구해 볼 수 있도록 일반용으로도 출판하기로 하였다.
역자는 중국어에 이렇다 할 조예가 없으므로 이 번역은 박 거사님의 첫 번역을 원문과 대조하면서 사전을 일일이 찾아가며 문장을 바로잡고 다시 손질하는 것을 위주로 했다. 다만 제1부와 제2부는 소제목을 새로 넣으면서 목차를 다시 편성했으며, 제1, 2, 4부의 제목들은 전체적인 내용을 감안하여 다소 조정했다. 그리고 초보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의 주(註)도 달아 두었다. 그러나 아마 오류가 적지 않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기탄없는 지적과 조언을 바라며, 훗날 누군가 더 나은 번역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참선 공부는 쉽고도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비록 어렵다 해도 뚫고 나갈 길은 있는 법이다. 이 소책자가 참선에 뜻을 둔 많은 분들의 공부길에 조금이라도 어려움을 덜어준다면 역자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1998년 7월 16일 대성 합장
이 책을 번역한 대성(大晟) 비구는 기해(己亥, 1959년) 생이며, 1989년 순천 송광사로 출가, 계룡 화상(溪龍 和尙)을 은사(恩師)로 수계득도(受戒得度)하고 1992년 비구계를 수지(受持)하였다. 역서에 「진아여여: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이 있다.
법보시 초판 : 1,000부
재판 : 500부
참선요지(參禪要旨)
허운 화상(虛雲 和尙) 법어
역 자 대성(大晟)
발행인 청학(淸鶴)
초판 발행일 1998. 7. 27
재판 발행일 1998. 8. 6
발행처 길상사(吉祥寺)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23 * (02) 3672-5945, 5946
인쇄처 서경인쇄출판사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917-17 * (053) 422-0134
<법보시판, 비매품>
통융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kds11002/13479912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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