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3강
집필자 관음정사주지 법상(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거룩하신 삼보(三寶)님과 진여(眞如)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귀의하옵니다.
우리는 매일 한 가지 슬픈 일이 있는가 하면 한 가지 기쁜 일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웃었다가 울었다가 희망했다가 포기했다가 미워했다가 사랑했다가 합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하나의 일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마운 평범한 일들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시절은 여전하여 바야흐로 생명의 실상이 용솟음치고 실록이 완연합니다. 이를 실감하면서 거룩한 마음을 내시어 왕림해 주신 불자님들께 부처님의 자비원력이 늘 함께 하여 항상 평안하시길 빌어 봅니다.
불교는 이고득락(離苦得樂)하고 유심체안락(遊心體安樂)하기 위해서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원만하게 완성하신 분에 의해서 깨달음의 내용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는 가장 근본적인 종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근본적으로 완전자와 미완전자를 평등한 관계에서 가르침을 베푸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완전한 평등을 추구하도록 함과 동시에 스스로 그 이론을 실질적으로 체험하여 검증하도록 다양한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이론과 실천의 길은 매우 방대하여 이른바 8만4천 가지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체계적으로 자기에게 맞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다짐을 하여 절실하게 느끼고 생각을 집중하여 열심히 불교공부를 하게되면 그리 어려운 공부가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명심해야할 것은 불교를 공부하면서 자기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인식된 내용을 가지고 이해하며 판단을 내리고 자기가 선호하는 것만을 골라 공부의 길로 삼는다면 이는 근본적으로 불교공부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불교공부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있는 그대로의 생명의 실상을 자각하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의 말씀에 과거는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지금 지나가고 있기에 우리는 텅 비울 마음조차 애초에 없다는 자각으로 공부에 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본 논을 지은 직접적인 이유부터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본론을 지은 직접적 이유
問曰 修多羅中具有此法 何須重說
문왈 수다라중구유차법 하수중설
答曰 修多羅中雖有此法 以衆生根行不等受解緣別
답왈 수다라중수유차법 이중생근행부등수행연별
所謂如來在世衆生利根 能說之人色心業勝 圓音一演異類等解 則不須論 若如來滅後 或
소위여래재세중생이근 능설지인색심업승 원음일연이류등해 즉불수론 약여래멸후 혹
有衆生能以自力廣聞而取解者 或有衆生亦以自力少聞而多解者 或有衆生無自心力因於
유중생능이자력광문이취해자 혹유중생역이자력소문이다해자 혹유중생무자심력이어
廣論而得解者 自有衆生復以廣論文多爲煩 心樂總持少文而攝多義能取解者 如是此論
광론이득해자 자유중생부이광론문다위번 심락총지소문이섭다의능취해자 여시차론
爲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 應說此論
위욕총섭여래광대심법무변의고 응설차론
[번역] <묻는다> “경 가운데 이러한 법이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하여 모름지기 거듭 설명하려 하는가?”
<답한다> “경 가운데에도 이러한 법이 있긴 하나 중생의 근기(根機)와 수행이 같지 않으며, 수지(受持)하여 이해하는 연(緣, 반연)도 같지가 않다. 이른바 여래가 세상에 계실 적에는 중생의 근기가 예리하고 설법하는 사람도 색(色)·심(心)의 업이 수승하여 원만한 법음(法音)을 한 번 연설하면 다른 종류의 중생들도 똑같이 이해하였으므로 곧 반드시 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래가 돌아가신 후에는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널리 듣고서 취해서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적게 듣고 많이 아는 이가 있었으며, 혹 어떤 중생은 자심력(自心力)이 없어서 자세하게 논하는 것에 의하여 이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한 어떤 중생은 다시 자세하게 논하는 글이 많아 번거롭게 여겨 마음으로 총지(總持)와 같이 글의 분량이 적으면서도 많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하여 그런 것을 잘 이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아서 이 논은 여래의 광대하고 심오한 진리의 가없는 뜻을 총괄하고자 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 논을 설하려고 하는 것이다.”
[해설] 여기서도 논을 지은 이유를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난달에 말씀드린 여덟 가지 이유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겠고, 방금 말씀드린 내용은 직접적인 이유라 하겠습니다. 그 이유를 문답을 통해 직접 제시하였습니다. 즉, 경전에 이미 다 설해져 있는데 어찌하여 다시 거듭 설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으로써 경전에 설해져 있긴 하지만 중생의 역량과 실천하는 것이 같지 않고 이해하는 수준들도 같지 않아서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먼저 총괄적으로 언급하고서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중생의 능력이 뛰어나고 설법하는 분의 몸인 32상(相) 80종호(種好)를 갖춘 공덕의 모습과 지혜의 마음인 18불공법(不共法)을 갖춘 지혜의 능력도 탁월하고 원만하여 한 마디만 연설하여도 모든 중생들이 똑같이 다 알아듣고 깨달아 이해하였기에 반드시 논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에는 그렇지 않아서 어떤 중생은 자기의 역량으로 많이 자세하게 듣고 알아듣는 이가 있고, 혹은 어떤 중생은 자기 역량은 없지만 자세하게 논하는 것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자세하고 많이 논하는 것이 번거롭다고 해서 불법의 내용이 총괄적으로 집약된 다라니(dh ra )나 진언구(mantra-pada) 또는 경전의 핵심 내용이 집약된 사구게(四句偈)를 좋아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논은 부처님의 광대하고 심오한 깊은 뜻을 모두 총괄하려는 직접적인 이유에서 논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서론인 인연분을 마치고 다음부터는 입의분인 본문을 논설합니다.
2. 입의분(立義分)-근본 사상을 제시함
1) 법(法)과 의(義)
已說因緣分 次說立義分. 摩訶衍者 總說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法 二者義
이설인연분 차설입의분. 마하연자 총설유이종 운하위이 일자법 이자의
[번역] 이미 인연분(因緣分)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입의분(立義分)을 설할 것이다.
대승(大乘)이란 총괄하여 설명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법(法)이요, 둘째는 의(義)이다.
[해설] 앞에서는 논을 지은 근본 이유와 직접 이유를 밝히고서 여기서는 대승의 뜻을 정립하고 있습니다. 대승이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큰 수레를 비유로 들어 일체중생을 싫어 나르는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대승의 교상(敎相)에 대한 법(法, dharma)은 이치나 이법(理法)·진리·진리의 가르침·성질·존재·규범·규칙 등의 의미가 있고, 이에 대한 교의(敎義)가 바로 의(義, artha)인데 그 의미는 사정·대상·사물·자체·실체·실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이란 불교에서 설명하는 모든 가르침인 능전(能詮)의 내용이고, 의란 가르침의 내용에 대한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깊은 의미를 나타내는 소전(所詮)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총체적인 설법내용입니다. 불교공부는 바로 이를 많이 보고 들어 깊이 사유하여 실천하여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과 의는 각 경전마다 강조하는 핵심내용이 달라서 논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면 {대승기신론}에서 설명하고 있는 법과 의에 관한 핵심내용인 주제는 무엇일까요? 먼저 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일심이문(一心二門)
所言法者 謂衆生心 是心則攝一切世間法出世間法 依於此心顯示摩訶衍義
소언법자 위중생심 시심즉섭일체세간법출세간법 의어차심현시마하연의
何以故 是心眞如相 卽示摩訶衍體故 是心生滅因緣相 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
하이고 시심진여상 즉시마하연체고 시심생멸인연상 능시마하연자체상용고
[번역] 말했던 법(法)이란 이른바 중생심을 말한다. 이 마음이 곧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섭하며, 이 마음에 의지해서 대승의 뜻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이 마음의 진여상(眞如相)이 곧 대승의 체(體)를 나타내기 때문이고, 이 마음의 생멸하는 인연의 현상이 대승의 자체(自體)와 상(相)과 용(用)임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 말하는 법(法)이란 대승의 가르침을 둘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대승의 본체란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말해서 중생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마음은 모든 불각(不覺)의 세계인 세간과 각(覺)의 세계인 출세간의 법을 모두 포괄하여 섭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에 의지해서 대승의 뜻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의 진여의 모습이 대승의 본체를 나타내기 때문이고 이 마음이 나고 멸하는 원인과 조건의 모습이 대승의 자체와 현상의 모습과 작용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심이란 곧 우리의 마음이며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진여심(眞如心)이고 그 공덕을 갖추고 있는 여래장심(如來藏心)입니다. 이 마음을 진여와 생멸로 나누어 말하지만 본래는 한 마음 그 자체이면서 마음의 나타난 모습들이고 마음의 미묘한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일심(一心)과 이문(二門)을 설명한 것이며 법(法)입니다. 다음에 의(義)의 내용으로 삼대(三大)를 설명합니다.
3) 삼대(三大)
所言義者 則有三種 云何爲三
소언의자 즉유삼종 운하위삼
一者體大 謂一切法眞如平等 不增減故
일자체대 위일체법진여평등 부증감고
二者相大 謂如來藏具足無量性功德故
이자상대 위여래장구족무량성공덕고
三者用大 能生一切世間出世間善因果故
삼자용대 능생일체세간출세간선인과고
一切諸佛本所乘故 一切菩薩皆乘此法到如來地故
일체제불본소승고 일체보살개승차법도여래지고
[번역] 말했던 의(義)란 곧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체대(體大)이니, 이른바 일체의 법은 진여평등(眞如平等)하여 증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대(相大)이니, 여래장(如來藏)에 한량없는 본성의 공덕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용대(用大)이니,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선한 인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께서 본래 타시기 때문이며, 일체의 보살이 모두 이 법을 타고서 여래의 경지에 이르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대승이라는 명의(名義)가 어찌하여 중생의 마음에 속하는가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앞에서 논한 대승이란 법(法)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여기서는 그 의의(意義)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의(義)의 내용으로 체대(體大)·상대(相大)·용대(用大)가 있는데 이는 우주의 천지만물 갖가지가 삼대(三大)의 의미를 갖추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대의 진여는 평등하여 더하거나 감소하는 것이 없고, 상대는 여래의 창고로써 한량없는 본성의 공덕을 갖추고 있으며, 용대는 미혹의 세간과 지혜의 밝은 선한 인과를 드러낼 의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일체법(一切法, sarva-dharma)에 대해 초기불교에서는 십이처(十二處)·오온(五蘊)·십팔계(十八界),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라 하였고, 부파불교에서는 유위와 무위를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이라 세분하였으며, 중관불교에서는 속제(俗諦)와 진제(眞諦) 혹은 총괄하여 무자성(無自性) 공(空)이라 하였으며, 유식불교에서는 삼성(三性)과 삼무성(三無性) 혹은 오위백법(五位百法)으로 더욱 세분화하여 각기 다르게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세간과 출세간에 모두를 포함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주의 천지자연의 온갖 사물은 선한 인과도 있고 악한 인과도 있는데 어찌하여 선한 인과만을 언급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진여에는 본래 선과 악의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는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의 거칠고 미세한 작용이 모두 중생으로 하여금 처음에 세간의 선을 이루게 하고, 다음에 출세간의 선을 이루게 하며, 이어서 궁극에 진여가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덕을 드러내어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측면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께서 이 법에 의지하여 여래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 것입니다.
이를 연기론에 입각하여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 우주의 어떤 존재이든 그 자체의 본 바탕이 있고 그것이 나타내는 모습이 있으며 작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관통해 있고 공간적으로도 무한대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 대(大)라는 절대적 큼의 접미어를 붙여서 의미를 강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변에는 우리의 마음이 바탕을 이루어 진여(眞如)가 갖춘 본래의 덕을 드러낸 측면, 즉 세간을 벗어난 깨달음의 측면에서는 환멸연기(還滅緣起)하는 체대(體大)라 하고, 진여가 본래의 덕을 감춘 세간의 나고 멸하는 미혹한 측면에서는 유전연기(流轉緣起)하는 상대(相大)라고 하며, 이러한 두 측면에 작용을 일으키어 인연(因緣)을 지어 가는 것을 용대(用大)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연의 작용을 중생의 생멸(生滅)에 두느냐 현성(賢聖)의 해탈한 열반의 각성에 두느냐 따라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향해 가는 삶의 가치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이 입의분으로서 법(法)은 중생심(衆生心)인데 이 중생의 마음에는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나누어 논하였고, 의(義)에 세 가지가 있는데 체대(體大)·상대(相大)·용대(用大) 등의 의미가 있다고 논하였습니다. 다음 해석분에서 이에 대해 다시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논하고 있습니다.
3. 해석분(解釋分)-근본사상을 해석함
已說立義分 次說解釋分
이설입의분 차설해석분
解釋分有三種 云何爲三 一者顯示正義 二者對治邪執 三者分別發趣道相
해석분유삼종 운하위삼 일자현시정의 이자대치사집 삼자분별발취도상
[번역] 이미 입의분(立義分)을 설명하였다. 다음에는 해석분(解釋分)을 설명하겠다. 해석분에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셋인가? 첫째는 현시정의(顯示正義)요, 둘째는 대치사집(對治邪執)이며, 셋째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다.
[해설] 이 {기신론}의 대지(大旨)는 일심(一心)·이문(二門)·삼대(三大)·사신(四信)·오행(五行)·육자회향(六字廻向)이라고 이미 두 번에 걸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에 일심·이문·삼대는 앞의 근본사상을 제시하는 부분에서 논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해 다시 근본사상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곳이 바로 해석분입니다. 따라서 {기신론}의 중심적인 이론은 바로 이 해석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해석분은 세 가지로 나누어, 먼저 대승의 참된 의미를 나타내는 현시정의, 다음에 그릇된 인식인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을 타파하는 대치사집, 세 번째 올바르고 적당한 수행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분별발취도상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핵을 논하는 부분이 현시정의(顯示正義)라고 하겠습니다.
1) 현시정의(顯示正義)-올바른 뜻을 나타냄
顯示正義者 依一心法 有二種門
현시정의자 의일심법 유이종문
云何爲二 一者心眞如門 二者心生滅門
운하위이 일자심진여문 이자심생멸문
是二種門皆各總攝一切法 此義云何 以是二門不相離故
시이종문개각총섭일체법 차의운하 이시이문불상리고
[번역] 현시정의(顯示正義)라는 것은 일심법(一心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무엇이 둘인가? 첫째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둘째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니, 이 두 가지 문이 모두 각각 일체의 법을 총괄하고 있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이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앞의 입의분에서 설명한 일심(一心)·이문(二門)에 대해서 총괄하여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신론}에서는 하나의 일심법(一心法)으로 규정하고 이 일심의 법을 진여와 생멸로 나누어 우리 마음뿐만 아니라 우주의 천지만물의 모습과 작용까지도 포함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이고 둘이면서 둘이 아니라는 이이불이(二而不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천지만물인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그 본체(本體)가 없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를 있는 그대로 그렇고 그러한 진여이고, 그러한 모든 존재는 현상적으로 갖가지 차별과 특성을 갖추고 온갖 다른 모습과 작용을 하는 나고 소멸하는 작용을 하지만 본체를 떠난 현상은 없고 현상을 떠난 본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인 셈입니다.
예를 들면 땅과 물과 바람과 불에서 소생하는 동식물과 파도는 그 바탕에 각기 그 본성을 잃지 않지만 존재하는 만물은 각각의 원인과 조건에 따라서 다리 나타나고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여는 본체이면서 절대적이고 완전하게 평등하고 불변하며 대 해탈의 자유이고 불생불멸이고 부증불감이지만, 생겨나고 소멸하는 윤회의 괴로운 현상은 상대적이면서 천차만별이고 변해 달라지며 자유롭지 못하며 서로서로 의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변화무쌍하게 나고 소멸하는 세계는 우리 한 마음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음의 근본을 대승의 법체(法體)로 삼아 일체법을 모두 섭렵하여 불변(不變)인 진여문과 수연(隨緣)인 생멸문을 일여평등(一如平等)한 경지로 향하도록 수행하면 거기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에서 보면 진여(眞如)가 생멸(生滅)이요 번뇌(煩惱)가 보리(菩提)이며 생사(生死)가 열반(涅槃)이요 속박이 해탈임을 감득(感得)합니다. 그러므로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것은 한 마음의 나타남입니다.
(1) 심진여문(心眞如門)
* 이언진여(離言眞如)-말을 여읜 진여
心眞如者 卽是一法界 大總相法門體 所謂心性 不生不滅
심진여자 즉시일법계 대총상법문체 소위심성 불생불멸
一切諸法 唯依妄念 而有差別 若離妄念 則無一切 境界之相
일체제법 유의망념 이유차별 약리망념 즉무일체 경계지상
是故一切法 從本已來 離言說相 離名字相 離心緣相
시고일체법 종본이래 이언설상 이문자상 이심연상
畢竟平等 無有變異 不可破壞 唯是一心 故名眞如
필경평등 무유변이 불가파괴 유시일심 고명진여
以一切言說 假名無實 但隨妄念 不可得故
이지체언설 가명무실 단수망념 불가득고
[번역] 심진여(心眞如)란 바로 일법계(一法界)의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의 체(體)이니, 이른바 심성(心性)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망념(妄念)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니, 만약 망념을 여의면 일체 경계가 되는 모습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본래부터 언설상(言說相)을 여의었으며 명자상(名字相)을 여의었으며 심연상(心緣相)을 여의어서, 결국 평등하게 되고,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오직 일심(一心)일 뿐이니, 그러므로 진여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언설은 임시적인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요, 다만 망념을 따른 것이어서 그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심진여(心眞如)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의 진여란 한 법계의 절대적이고 총체적인 모습의 존재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본성은 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지만 일체의 모든 존재가 오직 망령된 생각에 의해서 천차만별이 생기기 때문에 만약 망령된 생각만 떨쳐버리면 육감의 모든 모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모든 존재가 본래부터 말로 표현된 개념을 떠나며 모든 존재를 문자로 이름 붙인 것도 떠나고 마음의 반연을 떠나서 결국에 절대 평등하여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이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마음뿐이므로 억지로 진여란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모든 존재는 말을 떠나서는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 바탕인 실상은 말의 표현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로 표현하는 순간 모든 존재는 변화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어의 표현에만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곧 망령된 생각의 집착일 뿐 실상은 언제나 얻을 수 없어 사라져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일법계(一法界)는 둘이 없는 진심(眞心)을 말하는 것으로 일(一)은 숫자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진여의 본 바탕이 평등하여 둘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一)이고, 법계(法界, dharma-d tu)에서 법(法)은 우주의 온갖 모든 존재를 말하고, 계(界)는 본체와 본성, 차별적인 경계, 근본적인 원인 등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법계는 우주 삼라만상의 근원적인 원인을 말합니다. 그리고 대총상(大總相, mah -s m nya)의 대(大)는 진여가 광대무변(廣大無邊)하여 우주의 모든 것을 포섭한다는 것이고, 총상(總相)은 모든 존재가 진여의 한 맛으로 평등하여 차별된 모습이 없는 무상(無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법계가 바로 일심이고 이것이 곧 광대무변한 진여의 평등일여(平等一如)한 맛인 차별된 모습이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본래의 본성이 홀연히 한 생각이 망동하여 차별하지만 그 실상은 한 생각을 지우고 보면 본래 있는 그대로입니다. 왜냐하면 망념은 물의 파도와 같아서 바람만 불지 않으면 곧 물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여의 본심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인 것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진여(眞如, tathata)는 우주 만물의 있는 그대로 상주하여 불변하는 본체로 생각이나 개념으로 밀칠 수 없는 진실한 경계를 말하는데 그 강조하는 점은 다르지만 궁극의 의미는 똑같고 표현은 다른 것으로 법계(法界)·법성(法性)·평등성·실제(實際)·허공계·부사의계(不思議界)·무상(無相)·승의제(勝義諦)·실상묘유(實相妙有)·여여(如如)·불성(佛性)·여래장(如來藏)·중도(中道)·제일의제(第一義諦)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망념(妄念, mithya 또는 sanjna 혹은 vikalpita)은 미혹한 생각·미망에 가려진 집착·잘못된 생각·근거도 없이 일어나는 진실하지 않는 생각·오온(五蘊)을 참된 자기라고 집착하거나 육근(六根)의 대상인 육경(六境)을 탐하고 집착하여 올바른 마음이라고 하는 생각을 말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 대해서 유식(唯識)의 삼성(三性) 가운데, 먼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parikalpa-svabhava)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범부가 망정으로 아(我)와 일체의 법(法)을 실제로 존재한다고 집착하고 잘못 알아서 두루 일체법을 사량분별하면서 이리저리 억측한 결과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 va)이 있는데, 이는 인연(因緣)에 의해서 생겨나는 일체의 온갖 존재를 말합니다. 여기서 타(他)란 존재의 근본 원인과 그 원인을 돕는 조연(助緣)을 말하는 것으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종자(種子)가 직접적인 원인이고 여타의 갖가지 조건들은 조연(助緣)이 되어 생사유전(生死流轉)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apanna-svabhava)은 원만하게 성취된 진실한 본성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일여평등(一如平等)한 진여이고 변계소집성이 바로 망념이고 의타기성은 연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어떤 길에 새끼줄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뱀으로 착각한 것은 변계소집성인 망념이고, 새끼줄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실상이 아닌 지푸라기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러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구성된 것으로 의타기성인 연기성(緣起性)이고, 본래의 지푸라기는 원성실성의 진여에 비유된다고 하겠습니다.
言眞如者 亦無有相 謂言說之極 因言遣言 此眞如體 無有可遣
언진여자 역무유상 위언설지극 인언견언 차진여체 무유가견
以一切法悉皆眞故 亦無可立 以一切法皆同如故
이일체법실개진고 역무가립 이일체법개동여고
當知一切法不可說不可念故 名爲眞如
당지일체법불가설불가념고 명위진여
[번역] 진여라고 말한 것도 또한 상(相)이 없는 것이니, 이른바 언설의 궁극은 말로 인해서 말을 보내는 것이다. 이 진여의 본체는 보낼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다 참이기 때문이며, 또한 주장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다 동일한 여여(如如)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일체의 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진여라고 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해설] 여기서는 진여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진여란 본래 말할 것이 없는데 억지로 말의 궁극을 통해서 말을 보낸다고 하지만, 이 진여의 본 바탕은 애당초 보낼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다 참된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세울 수도 없는 것으로써 일체법이 다 똑같은 여여(如如)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으로 이름하여 진여라고 하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問曰 若如是義者 諸衆生等 云何隨順 而能得入
문왈 약여시의자 제중생등 운하수순 이능득입
答曰 若知一切法 雖說無有能說可說
답왈 약지일체법 수설무유능설가설
雖念亦無能念可念 是名隨順 若離於念 名爲得入
수념역무능념가념 시명수순 약리어념 명위득입
[번역] <묻는다> “만약 이러한 뜻이라면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수순(隨順)해서 깨달아 들어갈 수 있겠는가?”
<답한다> “만약 일체의 법을 비록 설명하기는 하지만 설명할 수도 설명할 만한 것도 없으며, 생각하기는 하지만 역시 생각할 수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는 줄 안다면 이 이름이 수순이요, 만약 생각을 여읜다면 깨달아 들어간다고 한다.”
[해설] 앞에서 진여의 본성으로 귀환하는 것은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에 대해서 질문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법을 억지로 말하기는 하지만 실상은 말할 수도 말할 것도 없으며, 억지로 생각은 하지만 본래 생각할 수도 생각할 것도 없는 이것을 알게 되면 이것이 바로 진여에 수순하는 것이요, 이러한 진여의 무설무념(無說無念)한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어가면 그것이 곧 진여에 계합(契合)되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말을 여읜 진여(眞如)에 대해서 논설한 것입니다. 다음에는 말에 의지한 진여를 논한 것부터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성스러운 공덕이 함께 하시어 행복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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