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4강
집필자 관음정사주지 법상(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거룩하신 삼보님과 진여에 간절한 마음으로 귀명(歸命)하옵니다.
엊그제 봄인가 했더니 벌써 여름입니다. 짙푸른 산야에 수풀은 광합성을 계속하여 뜨거운 태양열을 생명에너지로 바꾸는 고마운 생명의 실상을 왕성하게 생산하는데 우리네 사람들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합니다. 이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견디어 내야 하나 하고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해서 계절의 순환을 거역하는 마음과 말들과 몸짓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승의 마음을 내시어 왕림해 주신 불자님들께 진심으로 찬탄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저는 불교공부를 하면서 원효성사의 말씀을 빌어 참회를 하곤 합니다. 즉, 법계의 진여는 여여(如如)한데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대하여 육정(六情)을 내어 분별하여 집착한 이 망상이 언제나 사라질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본래 없는 나는 거룩하신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과 진여(眞如)에 믿음을 내어 그와 같이 되겠다고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발했지만 진정으로 가슴 절이도록 그렇게 하고 있는가? 또 마음은 굴뚝같은데 몸이 따르지 않고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변명을 하고 있지나 않는가? 자고로 불교공부는 쉼 없이 꾸준하게 해도 구경에 본래의 자리를 회복하지 못하면 윤회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기 십상인데 어떻게 열심히 해야 하나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라도 집중된 마음을 내어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지난번에 공부했던 심진여(心眞如) 가운데 이언진여(離言眞如)에 대해서는 말씀드렸고, 오늘은 의언진여(依言眞如)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 의언진여(依言眞如)-말에 의지한 진여
復次此眞如者 依言說分別 有二種義 云何爲二
부차차진여자 의언설분별 유이종의 운하위이
一者如實空 以能究竟顯實故 二者如實不空 以有自體具足無漏性功德故
일자여실공 이능구경현실고 이자여실불공 이유자체구족무루성공덕고
[번역] 다시 다음에 진여라는 것은 언설에 의지하여 분별하면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히 공(空)한 것이니, 구경에 실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여실히 공(空)하지 않는 것이니, 자체에 번뇌가 없는 본성의 공덕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설] 지난달에 공부한 내용은 심진여(心眞如) 가운데 이언진여(離言眞如)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말에 의지하여 진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을 통해서 진여를 규명하려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언어와 인식의 영역에서 벗어난 진여는 생각을 떠나 생각 이전으로 들어가야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진여를 언어문자를 써서 알음알이의 영역에서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어떤 알음알이나 경험적 지식으로 '안다'는 것은 생각의 총체적인 모습인 망상(妄想)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모른다'는 것도 기억하고 말할만한 가치가 없는 무기(無記)일지도 모릅니다. 진여는 이 두 가지의 양극단을 벗어나 중도(中道)적 실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진여를 구태여 언설로써 설명하고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수행의 출발에 들어선 사람에게는 신심(信心)을 일으키게 하고 삶과 죽음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발심(發心)하게 하여 수행하도록 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언설(言說)에 의지하여 진여를 여실공(如實空)과 여실불공(如實不空)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였습니다. '여실(如實, yath -bh tam, tattva)'이란 '바뀌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진실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실한 텅 빔은 모든 존재하는 차별세계가 있는 그대로 총체적인 연기(緣起, pratitya-samutpada)의 하나된 모습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그리고 여실하게 텅 비지 않는 것도 또한 개별적인 연기의 실상을 나타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실공(如實空)이라는 것은 모든 망념(妄念)인 무명(無明)의 번뇌가 본래 연기하고 있기에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망상이 텅 비어서 말을 떠났기에 모든 희론(戱論)도 사라져 버린 있는 그대로 이기에 말에 의해 말해지는 일체 세계가 모두 본래 인연생기(因緣生起)하고 있는 텅 빔입니다.
그런데 여실불공(如實不空)은 망념(妄念)이 텅 비었으므로 진여가 아무 것도 없는 참으로 없는 전무(全無)하다거나 허무한 무(無)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일상의 존재는 비록 무명과 번뇌망상에 의해서 존재한다할지라도 있다는 것은 분명하고 또 텅 빈 부처님의 복덕(福德)을 불공(不空)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진여를 체득한 사람은 공(空)하여 마치 무루(無漏)한 무위(無爲) 속에 상응하면서 고통과 어려움을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중생들을 보면 대비심(大悲心)을 일으켜 기꺼이 도움을 주는 연기자체입니다. 이 연기하는 마음이 곧 공(空)하지 않는 불공(不空)입니다. 이렇듯 대비심을 일으키는 것은 마치 거울 속은 텅 비어있지만 물건이 거울 앞에 나타나면 그 물건의 양상이 거울 속에 나타난 것과 같아서 거울이 물건을 비추는 것은 공(空)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거울 속은 비어 있듯이 마음은 무량(無量)이며 그 자체가 변함이 없기에 본성(本性)으로 여실불공(如實不空)을 "무루(無漏)한 본성의 공덕(功德)"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여기서는 공(空)과 불공(不空) 총괄하여 논하였습니다.
所言空者 從本已來一切染法不相應故 謂離一切法差別之相 以無虛妄心念故
소언공자 종본이래일체염법불상응고 위리일체법차별지상 이무허망심념고
當知眞如自性 非有相 非無相 非非有相 非非無相 非有無俱相
당지진여자성 비유상 비무상 비비유상 비비무상 비유무구상
非一相 非異相 非非一相 非非異相 非一異俱相 乃至總說 依一切衆生
비일상 비이상 비비일상 비비이상 비일이구상 내지총설 의일체중생
以有妄心 念念分別 皆不相應 故說爲空 若離妄心 實無可空故
이유망심 염념분별 개불상응 고설위공 약리망심 실무가공고
[번역] 말했던 공(空)이란 본래부터 일체의 염법(染法)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체법은 차별의 모습을 여의었으며 허망한 심념(心念, 분별망상)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한다. 진여(眞如)의 자성(自性)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오,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지 않는 것도 아니오, 모양이 없지 않는 것도 아니며, 있고 없는 두 가지 모양도 아니며, 동일한 모양도 아니오, 다른 모양도 아니며, 동일한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오, 다른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며, 동일하니 다르니 하는 두 가지 모양도 아니다. 나아가 총체적으로 말해서 일체중생들이 허망한 마음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생각에 분별하는 것을 의지하기에 모두 서로 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空)이라고 설명할 뿐이다. 만약 허망한 마음을 여읜다면 사실은 공이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공(空)과 진여(眞如)의 본질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존재를 있다거나 없다거나 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는 네 가지 견해를 말하기도 하고 또 동일하다·동일하지 않다·동일하거나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부정하거나·긍정하는 네 가지 사된 견해를 전통적으로 말해 왔습니다. 이러한 여덟 가지 견해는 유(有)와 무(無)를 근거로 하여 말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모두 증명할 수 없는 무기(無記, avy k ta, 말할 가치가 없는 것)라고 합니다. 이것을 이른바 기억하거나 대답해야할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구백비(四句百非)로 거듭하여 부정에 부정을 계속하지만 결과가 나지 않는 희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것은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상호의존하고 상호소통하며 연기하기 때문에 분리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유나 무로 독립되었거나 실체적인 것은 생각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증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과 진여의 자성(自性, svabh va)은 이러한 모든 견해인 망념(妄念)을 떠나 있어 여실히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장아함경에서 만동자의 십사무기(十四無記)에 대해 침묵으로 답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참모습은 인연생기(因緣生起)하기 때문입니다. 이 연기법(緣起法)을 논리화하여 외도의 사된 견해를 {중론}에서는 타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부정논법인 귀류논증(歸謬論證)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연기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 것인데 이러한 중관의 지혜는 연기하는 것은 모두 무자성(無自性)으로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반야에 의해서 이 세상을 꿰뚫어 볼 때 모든 것은 자성이 없는 공이므로 희론(戱論)을 적멸(寂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가 다 공이기에 일체가 존재한다느니 존재하지 않는다느니 단절되어 없다느니 영원히 존재한다느니 하는 등의 사견(邪見)을 타파한 그것이 바로 부정논법입니다. {중론}의 [관사견품(觀邪見品)] 제27에 의하면 "일체법(一切法)은 공(空)인데 세간은 영원하다는 등의 견해 어느 때에 어느 곳에서 누가 이 모든 견해를 일으키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부정논법은 바로 일체법이 공하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므로 곧 부처님의 침묵인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적극적인 표현이며, 일체가 다 텅 빔입니다.
논해진 {기신론}의 "비유상(非有相)∼ 등"의 진여에 대한 부정도 바로 일체가 다 공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소언공자(所言空者)"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空)은 공(空)·불공(不空)의 여래장(如來藏, tath gata-garbha)연기인 진여연기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공과 불공의 연기에 대한 설명은 중관의 교설을 빌리어 설명하고는 있지만, 사실상 여래장의 교설에서의 공(空)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언진여(離言眞如)"의 언어도단(言語道斷)적 표현도 일체가 다 공하다는 중관의 귀류논증에서 온 팔불중도(八不中道)인데, 이것을 다시 자립논증(自立論證)에 의한 "의언진여(依言眞如)"의 설명으로 대치하여 공과 불공의 여래장·진여연기의 교설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기신론}에서 중관과 여래장의 교설이 만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의언진여의 공과 불공의 공을 설명할 때, 중관의 부정론법으로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는 부처님 시대의 외도들의 설을 부정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진여(眞如)가 여실히 공(空)하다는 것에 대해 좀더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허공은 비어 있어 작용이 없는 것 같으나, 실상은 고요한 호수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면 허공의 비어있는 성품(性品)이 작용하여 물안개가 사라지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여의 여실공(如實空)의 경계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허망한 마음인 망념의 물안개가 없으면 진여의 허공은 물안개를 사라지게 하는 작용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본문에 '허망한 마음을 여의면 공(空)이라고 할 것도 없다'고 논한 것입니다. '망심(妄心)을 여의면 공(空)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이 말은 공(空)이 무명번뇌에 상대해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은 실재 체험에서 어떻게 작용할까요? 무명과 번뇌망상으로 혼탁한 현실에서 공(空)을 감지하려면 이러한 여실히 텅 빔의 본질을 잘 파악한 시각(視覺)으로 볼 수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제 본 사람이 오늘 똑 같은 사람으로 보이고, 어제 본 그릇이 오늘 본 그릇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보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나 무정물(無情物)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사실인데 우리는 삶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러한 고정된 시각(視覺)은 몸의 움직임을 잘 주시하는 것으로도 바뀔 수 있습니다. 걸어갈 때나 누구와 대화할 때, 앉았을 때 등등 몸 움직임의 관찰이 반복 지속되면 통증이나 간지럼·저림 등이 포착되고 더 나아가서 몸 안에서 일어나는 맥박·진동 소리 등의 쿵쾅거림이 감지됩니다. 이렇게 하면 생각의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그러면 생각의 움직임이 일어난 곳으로 거슬러 가면 공(空)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집에서 회사로 출근했다면 회사에서 거슬러서 집을 보면 자신이 집에 없듯이 생각도 일어나는 그 곳으로 관찰하면 공(空)이라는 법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관계 속에서 삶의 실상이 연기하고 있다는 공(空)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체험으로 일상생활에서 공(空)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 어떠한 대상을 만나더라도 분별심(分別心)을 내지 않고 마음의 동요가 없게 합니다. 설거지를 할 때는 설거지만 하고 끝나고 난 뒤 내 시간을 가져야지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즉 설거지가 그대로 자기 시간이 되기 때문에 생활자체가 이분화(二分化)되지 않듯 지금 이 설법을 듣고 느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와 온 우주가 한 덩어리로 하나가 되는 경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계입니다. 즉 한결같다는 것은 생각으로 차단된 벽을 허문 경계입니다.
그리고 또 잠에서 깨기 전에 반쯤 깨어있을 때에는 이미 갖가지 생각이 분연히 일어나기 때문에 일어나는 생각의 근원(根源)인 공(空)으로 주시해 가면 비로소 꿈과 깨어있던 벽이 허물어지면서 하나로 관통되어 일여(一如)가 됩니다. 그러나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어도 아직 밖의 세계와 자신이 하나 된 경지가 생각의 흐름이 정지되어 일어나는 경계로서, 사실은 나와 하나 되는 대상은 실체로서 인정하는 기억이 선천적으로 일어나서 건립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직 공(空)에 의해 미세해져 가는 허망한 생각이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대상의 본질이 비어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더욱 정진을 거듭 계속하여 공(空)을 꿰뚫어 보는 관(觀)이 깊어지면 형상과 형상의 이면(裏面)에 가로놓여 있던 벽이 허물어집니다. 마치 찻잔의 모습인 현상과 찻잔의 속성이 비어 있는 본성이 하나로 관통하게 되듯이 정신적, 물질적 모든 것이 무아(無我)인 공(空)으로 이사(理事)가 함께 회통(會通)되는 경지에 이릅니다. 이 정도의 경지에 가면 비로소 보아도 보는 주체가 없이 보며, 들어도 듣는 주체가 없이 그냥 듣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와 대상이 하나라는 경계마저 벗어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보여 지는 대상도 없으며, 보는 주체도 없으니 주관과 객관, 안과 밖의 사이를 막고 있던 장벽이 하나로 관통되어 심경일여(心境一如)인 유무(有無)에 이끌리지 않게 되는 한결같은 경계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텅 빔에 의한 내적 깨달음이며 일행(一行)에 의한 일상(一相)의 무상(無相)한 경계의 체공(體空)이라고 하겠습니다.
所言不空者 已顯法體空無妄故 卽是眞心 常恒不變
소언불공자 이현법체공무망고 즉시진심 상항불변
淨法滿足 則名不空 亦無有相可取 以離念境界 唯證相應故
정법만족 즉명불공 역무유상가취 이리념경계 유증상응고
[번역] 말했던 불공(不空)이란 이미 법체(法體)가 공하여 허망함이 없다는 것을 나타냈기 때문에, 바로 진심(眞心)이며, 항상하여 변하지 않고 정법(淨法)이 만족하게 구족되면 불공(不空)이라 이름하며, 또한 취할 만한 형상이 없으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함으로써만 상응하기 때문이다.
[강의] 여기는 불공(不空)에 대한 정의가 내려지고 있습니다. 개체는 무아(無我)이고 공(空)하지만 상대가 있으므로 불공(不空)입니다. 이 세상에 독립된 개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연기입니다. 곧 연기의 깨달음은 개인에서 머물지 않기에 공(空)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심(眞心)이며 정법(淨法)입니다. 그러므로 진여의 불공(不空)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깨달음의 모습입니다. 즉 허망한 생각 때문에 나타나는 단절과 막힘, 독립체로서 홀로 동떨어져 있다는 환상을 놓아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는 고통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공(空)의 체득에 의해 허망한 생각이 사라지면 일어나는 갖가지 괴로움이 제거되고 연기실상으로 장엄되는 정토로 구현하는 힘이 불공(不空)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공(空)과 불공(不空)은 본래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닙니다.
여기까지가 심진여문(心眞如門)을 논한 것입니다. 이를 다시 정리해 보면 진여에는 이언진여(離言眞如)와 의언진여(依言眞如)가 있는데 이언진여는 마음의 진여를 절대적으로 논하여 일법계(一法界)인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의 체(體)라 하였고, 의언진여는 상대적으로 논하여 언설에 의하여 분별하는데 두 가지 의미로 소극적인 입장에서 여실공(如實空)과 적극적인 입장에서 여실불공(如實不空)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을 여윈 진여는 불이(不異)이고 말을 의지한 진여는 진망(眞妄)이 불일불이(不一不二)한 것으로 중관의 논리를 원용하여 논하였습니다.
(2) 심생멸문(心生滅門)
지금부터서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을 설명합니다. 마음의 생멸은 진여(眞如)가 자기 성품(性品)을 지키지 않고 반연(攀緣, 조건)을 따르는 것입니다. 심생멸문을 설명할 때 문(門)이란 통로를 말합니다. 이는 고통스런 생(生)과 사(死)의 연속적인 상태인 윤회로 통하는 길이기도 하며, 생과 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문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생멸하는 문은 중생으로부터 중생이 되는 이유를 밝히고 있으며, 또한 중생이 부처가 되는 길을 잘 제시하므로 심생멸문을 통해서 심진여문(心眞如門)으로 들어간다고도 합니다. 심생멸문에서는 마음의 생멸인 심생멸(心生滅)과 그 원인과 조건인 심생멸인연(心生滅因緣), 그리고 마음의 모습인 심생멸상(心生滅相)을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마음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을 논합니다.
心生滅者 依如來藏故有生滅心 所謂不生不滅 與生滅和合 非一非異 名爲阿黎耶識
심생멸자 의여래장고유생멸심 소위불생불멸 여생멸화합 비일비이 명위아리야식
[번역]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如來藏)에 의지하므로 생멸(生滅)하는 마음이 있다.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生滅)과 더불어 화합하여,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것을 이름하여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고 한다.
[강의] 여기서는 마음이 나고 멸하는 것을 설명하면서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밝히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중관사상에 입각해서 심진여문(心眞如門)을 설명하였는데, 여기서는 유식사상에 입각해서 심생멸문을 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효성사께서 {기신론}은 중관과 유식을 아우른 논서라고 말씀한 것이 입증되어지고 있습니다. 하여튼 심생멸문(心生滅門)의 심생멸(心生滅)이란 순간적으로 찰라에 변화하면서 나고 소멸하는 마음을 말함과 동시에 이 중생이 저 중생으로 고통스럽게 유전(流轉)하는 기로(岐路)와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환멸(還滅)하는 통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심생멸문에서 생(生)은 무명(無明)이 진여를 훈습(熏習)하여 나타나는 유전문(流轉門)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여 정법(淨法)으로 되돌아가는 환멸문(還滅門)이기도 합니다. 멸(滅) 또한 무명이 진여에게 영향을 주어 정법(淨法)이 변해 달라지는 유전문이 되는 반면,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여 염법(染法)인 번뇌망상을 소멸하게 하는 환멸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중생이 괴로움을 자각하여 생긴 문(門)을 말하므로 마음의 생멸문(生滅門)이란 곧 환멸문(還滅門)을 지칭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중생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데서 이 생멸문(生滅門)이 온전히 고해(苦海)에 윤회하는 유전문(流轉門)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중생이 중생임을 자각하고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닫는 것은 필연적이므로, 중생심의 심생멸문에는 중생으로 유전하는 문과 부처가 되는 환멸문이라는 두 가지 문이 열려서 결국에는 고해를 건너서 심진여(心眞如)의 세계로 들어가 복귀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여래장(如來藏, tath gata-garbha)이란 불성(佛性, buddha-garbha)이라고도 하는데 여래의 곳간으로 자성(自性)이 청정(淸淨, pari uddha)한 마음과 번뇌에 가려진 여래성을 포함하여 말합니다. 이 가운데 청정하다는 것은 번뇌가 텅 비어서 생멸하지 않으므로 생멸하는 미세한 생각마저 본래 없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여래장에 의지하므로 생멸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문을 일으키게 합니다. 첫째, 불생불멸의 청정한 마음과 생멸하는 마음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가? 둘째는 본래 청정한데 어디에서 생멸하는 마음이 나왔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 두 가지 의문은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生滅)과 더불어 화합하여 비일비이(非一非異)하다"는 문구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생멸(不生滅)과 생멸(生滅)이 비일비이(非一非異)로 화합한다는 것"이 불일(不一)이라고 한다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다르다'는 단견(斷見)과 불이(不異)라고 한다면 '있다'라는 것에 근거한 '동일하다'는 상견(常見)에서 벗어난 중도(中道)를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 바탕인 심체(心體)의 입장에서 보면 다르지 않는 것인데, 나고 멸하지 않는 마음과 나고 멸하는 마음은 그 근본 바탕이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멸하지 않는 마음 전체가 움직이면서 마음이 생멸하는 모습을 여의지도 않기 때문에 다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의 청정한 마음과 생멸하는 마음이 함께 공존하고 화합하며 생멸하는 마음도 또한 달리 어디에서 온 것이 아니게 됩니다. 이는 불생멸심이나 생멸심이나 다 바탕이 같은 마음의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다'고 보는 것은 진여법계(眞如法界)가 동일한 것인 줄 모르는 무명(無明)에 의해 마음이 움직인 탓입니다. 무명이 작용해서 고요한 마음의 본체가 인연을 따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상견(常見)에 떨어지게 되므로, 마음이 움직이면 앞의 두 가지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 사람이나 사물의 무상(無常)함을 접하게 되면 고통이 일어나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됩니다.
또 마음의 모습인 심상(心相)의 입장에서 보면 동일하지 않습니다. 즉 심상이 생멸하는 속에서도 늘 불생불멸의 심체(心體)를 잃지 않기 때문에 생멸하는 마음의 모습이 그 불생불멸과 동일할 수 없습니다. 만약 '동일하다'면 생멸하는 심상이 다 없어질 때에 심체도 따라 없어진다고 하는 단견(斷見)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생사(生死)의 기로에 선다면 마음이 흔들려 사후(死後)에 아무 것도 없다는 등의 단견(斷見)이 생겨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이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중도(中道, madhyam -pratipad)란 상대와 차별을 초월한 절대적인 진리인 불이(不二)이며 공(空)이며 연기(緣起)·진여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생멸(心生滅)의 정체(正體)입니다. 이 자리에는 부처다 중생이다 할 것도 없어서 따로 이 평등을 들것도 없는 일반적 평등성을 초월한 절대적 평등이요 무차별한 평등의 경계입니다. 즉 선(善)과 악(惡)의 차원에서 살신성인을 하거나 살인강도를 하거나 또는 진리를 깨치거나 깨치지 못했거나 관계없이 연기하는 실상은 모두 중도인 무차변(無差別)의 무외시(無畏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부처와 중생을 구분하고 중생의 상태를 벗어버리려고 수행하는 것일까요? 선과 악, 깨침과 못 깨침의 구분을 두는 것은 중생이 괴로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갖 괴로움에 시달리는 중생에서 벗어나 모든 속박을 벗은 부처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만약 있는 그대로에서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열반의 행복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합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깨치지 않고 행복했더라면 우리는 어려운 깨달음을 지향해 나아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몸을 가진 부처님도 깨닫기 전에는 괴로움에 시달리시다가 깨닫고 나서는 영원한 적정의 평화를 누리신 것입니다.
심생멸에서 불생멸과 생멸의 관계인 연기(緣起)의 실상은 먼저 무명과 번뇌 망상인 허망한 생각으로서 생멸의 상태이고, 다음에 무명번뇌가 다 사라지고 난 뒤에 작용하는 불생멸심의 신령스러운 앎의 작용으로서 생멸이 있습니다. 전자(前者)의 생멸하는 심상은 관(觀)을 통해 불생멸의 공성(空性)이 드러나면 사라지므로 비일(非一)이며, 후자의 심상은 공성에 의해 생멸 자체가 불생멸하는 심체의 신령스러운 앎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비이(非異)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닷물이 무명의 바람에 의해 파도가 일어나서 바닷물과 파도가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지만(마음의 모습) 바닷물이나 파도나 젖는다는 성질은 변하지 않는 것과(마음의 바탕) 같습니다. 따라서 전자의 생멸은 망념으로 괴로움을 가져오지만 후자의 생멸은 불생멸의 작용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심생멸은 괴로움을 해결하는 창구(窓口)로서 역할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아리야식(阿梨耶識, laya-vijna na)입니다.
즉, 불생멸과 생멸이 화합한 비일비이(非一非異)의 심생멸이 곧 중도(中道)인데, 그 중도의 마음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해결을 전제로 할 때, 생멸이 괴로움을 가져오기 때문에 망(妄)이라 하고, 그 망(妄)이 불생멸의 진(眞)에 의지하여 화합한 것을 아리야식이라 이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생하고 멸하는 것이 곧 아리야식입니다. 이때의 아리야식에 두 갈래가 생겨납니다. 첫째, 망(妄)이 진(眞)에게 영향을 주면 유전문(流轉門)이 생기고, 진(眞)이 망(妄)에게 영향을 주면 환멸문(還滅門)이 생깁니다. 유전문은 마음에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환멸문은 마음에 괴로움이 소멸하는 통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리야식은 마음이 발동하고 소멸하는 장(場)이며 바탕이요 근원입니다. 여기서 아리야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든 것을 갈무리하고 있기 때문에 장식(藏識)이라고 합니다. 이 장식은 능장(能藏)·소장(所藏)·집장(執藏)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식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근본식(根本識), 소멸하는 식이 아니기 때문에 불생불멸(不生不滅)한 무몰식(無沒識), 업력(業力)이 익어 성숙되어지면 다른 종자가 되어 나타나는 존재이므로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합니다. 참고로 여기서 유식의 아뢰야식은 생명하는 현상의 측면에서만 말하는 것이고, {기신론}의 아리야식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여와 생멸의 현상을 모두 포함한 측면에서 말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此識有二種義 能攝一切法 生一切法 云何爲二 一者覺義 二者不覺義
차식유이종의 능섭일체법 생일체법 운하위이 일자각의 이자불각의
[번역] 이 식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능히 일체법을 포섭하며 일체법을 낸다.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각(覺)의 뜻이고 둘째는 불각(不覺)의 뜻이다.
[강의] 여기서는 식(識)의 뜻을 특유하게 논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존재의 근원을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갈무리한 것이 이 식(識)이라는 것입니다. 마명보살은 여기에서 괴로운 현실을 전제로 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주체인 아리야식을 들어서 논하였습니다. 불변(不變)의 진여(眞如)가 연(緣)을 따를 때에 불안정한 현실세계가 전개되고 삶 자체가 괴로움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온갖 갈등의 주체인 아리야식이 깨어있지 못한 불각(不覺)의 모습이라면 그 해결은 오직 깨달음인 각(覺)에 의해서입니다. 즉, 아리야식은 괴로움의 주체인 동시에 그 괴로움을 해결하는 장(場)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감각부터 사그라져 자아의식인 말나식(末那識)은 소멸하지만 아리야식은 남습니다. 이 아리야식은 24시간 늘 깨어 있지만 의식(意識)이나 인식으로는 알 수 없고, 깊이 마음을 반조(返照)하여 관찰해 들어가야 만이 그 정체가 드러납니다. 앞에서 아리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 하였는데, 장(藏)은 기억창고의 의미로 일체 모든 행위의 여운이 저장되어지는 곳입니다.
예를 들어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일들이 문득 기억날 때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이라는 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 영상은 어딘가 저장되었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떠오릅니다. 우리의 의식은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 의식은 꿈도 없는 수면 상태나 기절했을 때는 인식하지 못합니다. 어린 시절의 일을 불현듯 떠올릴만한 기체(基體)는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행위의 이미지를 저장할만한 마음이 바로 장식(藏識)인 아리야식입니다. 또한 과거를 기억한 것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관통하는 생각의 흐름입니다. 과거 행위의 이미지가 그대로 마음에 저장되기도 하고 현재의 기억으로 재생되기도 합니다. 마치 영화를 재생시키는 필름과 같습니다. 이것이 아리야식에 잠재된 망(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망(妄)이 감각으로 나타나면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이며, 기억하고 분별하는 추리나 판단과 인식으로 나타나면 의식(意識)이라 하며, 더욱이 망(妄)이 강해져서 미세한 자아의식으로 나타나면 말나식(末那識)이라 하고, 객관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형색·음성·향내·미각·촉감 등의 오진경계(五塵境界)인 경계상(境界相)이라 하며, 주관으로 나타나면 전식(轉識)인 능견상(能見相)이라 하고, 주객미분(主客未分)의 아주 미세한 허망한 생각으로 나타난 일념(一念)은 무명업식(無明業識)이라 합니다. 이 무명업식의 근원은 법계(法界)가 하나인 줄 모르는 근본무명(根本無明)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근본무명을 시원(始原)으로 한 이 허망한 생각의 흐름 전체는 아리야식의 장(場)에서 일어난 일체 망념(妄念)으로 마음이 움직인 것이고 이것이 심체(心體)의 움직임인 동시에 진여가 연(緣)을 따르는 것이고 진여가 파도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망념도 정념(正念)으로 관찰해서 여실히 공(空)해지면 아리야식의 진(眞)이 나타나게 됩니다. 진여본각(眞如本覺)을 회복하면 진망화합체인 아리야식이 깨어지고 본래 불성(佛性)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불각(不覺)의 망을 깨친 각(覺)으로서 아리야식의 각과 불각이 일체법을 거두어들이고 일체법을 낸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각(覺)은 명(明)이고 불각(不覺)은 무명(無明)입니다.
아리야식의 각과 불각이 일체법을 거두어들이고 일체법을 낸다는 것은 전 우주적인 현상이며 삶의 문제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깨어 밝은 각(覺)과 깨어있지 못해 어두운 불각(不覺)이 주관적인 현상이라면 일체법(一切法)은 객관적 사실인 현실을 말합니다. 즉 각(覺)과 불각(不覺)은 일체법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이란 주관과 객관이 사라진 경계이므로 주관적 현상인 완전한 깨달음이 곧 객관적 현상인 일체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지 못해 어두운 불각이 그대로 현실세계의 불안정한 괴로움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일체법을 거두어들여서 생성해 내는 뜻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일체법이란 한 생각에 의해 좌우됩니다. 한 생각을 완전하게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에 따라 일체법이 달라집니다. 생각이 일어남에 의해 일체법이 전개되고 한 생각을 깨치면 일체법을 깨치므로 일체법은 한 생각인 각(覺)에 포섭되는 것이며, 한 생각을 깨닫지 못하면 일체법이 한 생각인 불각(不覺)에 포섭된 섭의(攝義)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지만 모두 한 생각일 뿐입니다.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다면 현재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많은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현재 이 순간은 찰라이므로 오직 한 생각입니다. 한 생각은 감각에서부터 아리야식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이러한 한 생각은 망념(妄念)인 무명(無明)으로 이 허망한 생각에 의지하면 일체법이 일체 허망한 세계로 나타납니다. 반면 이 망념을 깨치게 되면 일체 허망한 경계가 사라지고 하나의 모습인 허공과 같은 진여실상의 법계에 법신(法身)이 출현합니다. 이것이 망(妄)인 아리야식이 해체되면서 참된 일체법을 드러내는 도리인 각의(覺義)입니다. 다음부터는 각의(覺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공부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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