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6강
본 자료는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법회와 설법지에 연재한 내용입니다.
집필자 관음정사주지 법상(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거룩하신 삼보님과 진여에 귀의하옵니다.
날씨가 몹시 더운데 이렇게 마음을 내어 왕림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에 못지 않게 인생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밖으로 화려한 명예와 부러움을 사기보다는 안으로 참되고 조화로움이 충만해져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럴 때에 삶에 자신감이 생기고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어 정겹고 즐거운 정서가 교환됩니다. 이렇게 나누어진 정감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행복감을 안겨줍니다. 이것을 느낄 때에 우리는 삶의 보람과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 잡념 없이 기도를 올릴 때 자연스럽게 마음이 넉넉해짐을 느낍니다. 그때에는 삶의 고민 같은 것이 끼여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간절하게 기도를 할 때에는 마음이 절실해지고 겸손해지면서 텅 비워져 무엇이나 용납할 수 있는 넉넉함으로 우주를 담는 텅 빈 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겉으로는 번쩍거리고 잘사는 것 같아도 사실은 정신적으로 초라하고 궁핍한 마음의 한 구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작고 사소한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알뜰살뜰한 고마움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서는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우주적 조화로움과 일상생활 속에서 오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의 열반이란 고마운 자각일 것입니다. 우리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통해 행복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여유를 가질 때 삶의 고마움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도심이나 시골의 길을 가다가 후미진 곳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한 송이 꽃에서도 얼마든지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꽃을 통해 우주적인 생명의 활발한 전율과 아름다움 그리고 열반의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다정한 친구나 부모자식, 일가친척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을 통해서도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데 있는 것이지 크고 많고 높은 곳에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텅 빔으로 넉넉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가 저 먼 하늘나라나 극락을 갈망하는 것은 아마 텅 빔의 여유가 있기에 갈망하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주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아무 부족함 없이 소박한 기쁨을 잃지 않는 마음가짐이야말로 행복한 삶의 화신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진정으로 삶을 즐길 줄 아는, 깨달음을 실현한 삶이고 지혜로운 이의 길입니다.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생의 소박한 기쁨을 잃지 않는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을 살 줄 아는 깨달은 지혜입니다. 그것은 소유욕에서 벗어난 모자람이 없는 텅 빔의 원만한 삶입니다. 이것이 본래 갖추어져 있는 깨달음의 발현입니다.
지난번에는 각(覺)의 개념과 시각(始覺)에 대해서 공부를 하였고, 이 번에는 본각(本覺)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본각에는 수념본각(隨念本覺)과 성정본각(性淨本覺)이 있다고 논합니다. 먼저 수념본각에서는 지정상(智淨相)과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의 작용을 논하고, 다음에 성정본각에서는 자성정(自性淨)과 이구정(離垢淨)으로 나누어 본각의 체(體)와 상(相)을 논합니다.
* 수염본각(隨染本覺)-오염을 따른 본래의 깨달음
復次本覺隨染分別 生二種相 與彼本覺不相捨離
부차본각수염분별 생이종상 여피본각불상사리
云何爲二 一者智淨相 二者不思議業相 智淨相者 謂依法力熏習
운하위이 일자지정상 이자부사의업상 지정상자 위의법력훈습
如實修行 滿足方便故 破和合識相 滅相續心相 顯現法身 智淳淨故
여실수행 만족방편고 파화합식상 멸상속심상 현현법신 지순정고
[번역] 다시 다음에 본각(本覺)이 오염을 따라 분별하여 두 가지 상을 내어서 저 본각과 더불어 서로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다.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지정상(智淨相)이요, 둘째는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다. 지정상이란 법력(法力)의 훈습(熏習)을 의지하여 여실히 수행해서 방편을 만족하므로 화합한 식상(識相)을 파하고 상속(相續)의 심상(心相)을 멸하여 법신(法身)의 지혜가 순정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해설] 앞에서 깨달아 가는 시각(始覺)의 네 단계를 밝혔습니다. 여기서는 안으로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는 시각이 되는 이유와 밖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이유를 본래 깨어 있는 본각(本覺)의 작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각이 염(染)을 따른다는 것은 염의 자극을 받아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본각의 작용으로 지혜의 깨끗한 모습인 지정상(智淨相)과 말과 생각을 떠난 경지에서 남을 도와주는 능력인 업(業)의 모습인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염(染)은 깨끗함을 오염시킵니다. 오염된 물을 마시면 탈이 나듯 무명(無明)과 번뇌망상이 청정한 마음을 오염시키면 갈등과 의심, 두려움 등과 같은 여러 괴로움이 발생하게 됩니다. 염(染)은 괴로움의 원인인 동시에 그 자체가 곧 괴로운 망상(妄想)입니다. 본각이 번뇌망상과 괴로움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본각의 작용인 법력(法力)의 훈습(熏習)이 일어나 염을 소멸시킵니다. 즉 안으로 자기의 번뇌망상을 제거합니다. 그 결과는 지혜의 청정한 모습인 지정상(智淨相)입니다. 또 밖으로도 중생의 염을 제거합니다. 그러므로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라고 하였습니다.
법력(法力)의 훈습(熏習)은 염의 자극을 받아 본래 깨어있는 본각(本覺)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각이 무명번뇌를 깨트릴 수 있는 힘을 본래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깨달음의 자발성(自發性)을 말합니다. 마치 잠들어 있는 사람을 툭 건드리면 깨어나듯이 염(染)의 자극을 받으면 본각의 자발성인 법력훈습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금강삼매경}과 {법화경}에 설해진 [장자궁자(長者窮子)]의 비유처럼 자식이 가출하여 극빈하여 온갖 고초를 겪고 있는 자식에게 돈이 너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자 자식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그것은 본래 너의 돈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본각의 법력입니다. 또 자기 집인 줄 알게 하는 가르침, 즉 삶과 죽음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을 바르게 아는 정견(正見)을 바로 세우는 것이 법력훈습입니다. 그리하여 가르침을 받고 집으로 들어가서 온갖 궂은 오물을 치우다가 집안 살림을 맡게 되고 결국 아버지(부처님, 본각)의 유산인 법력(法力)의 훈습(熏習)을 물려받아 자기가 집주인임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법력훈습은 오물에 비유된 번뇌망상을 제거하고 전 존재의 주인임을 깨닫게 합니다.
즉 '본각의 법(法)'이란 마치 허공의 세계와 같이 텅 비어 있어서 기복(起伏)과 상하(上下)와 생멸(生滅)이 없는 불변(不變)의 텅 빈 성품을 말합니다. 그러한 본각의 법이 현상의 온갖 변화하는 것을 만나면 그 변화하는 현상을 제거하는 '힘(力)'으로 나타납니다. 허공에 향의 연기가 피어오르더라도 허공은 변함없으나 그 향의 연기가 허공에서 자연 소멸되듯이, 법력의 본각이란 허공이 염이란 향의 연기를 만나 작용하는 것이며, '훈습(熏習)'이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므로 실제로 무명과 번뇌망상을 제거하는 것이 법력(法力)의 훈습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현상의 온갖 변화는 본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생긴다는 것은 법계가 하나인 줄을 모르는 데서 주객이 나누어지고 주객이 상대하여 마음의 기복이 생기며 상하로 보는 차별이 일어나게 됩니다. 주관이 객관을 인식할 때 객관의 형상에 따라 주관의 인식이 변화해서 생멸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무명으로 인한 번뇌망상인 염이 허공과 같은 본각에 나타나면 허공과 같은 본각의 진리가 힘이 되어 무명과 번뇌망상을 제거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번뇌망상을 지닌 중생이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홀연히 마음에서 일어난 분별이 사라지면 그대로가 진여(眞如)요 본각(本覺)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여실(如實)하게 수행에서 무명과 번뇌망상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이며 여실이란 의미는 법에 맞는 것을 의미하므로 곧 여실한 수행이란 법에 맞는 수행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즉,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며 그 자리가 수행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에 맞는 수행이란 무엇일까요? 법이란 추상적인 말과 생각을 떠나 있으므로 이미지가 없으며 의도적이거나 작위적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조건에 맞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마음이 통일되어 있는 지(止)를 동반한 관(觀)입니다. 이러한 관(觀) 자체는 본래 어떤 이미지가 없으며 전혀 의도적이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 관이 법력훈습이며 관이 지혜로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 지혜의 순정(淳淨)한 지정상(智淨相)입니다.
그러므로 이 관이 아니면 불생멸(不生滅)과 생멸(生滅)이 화합한 아리야식을 타파(打破)할 수가 없습니다. 화합(和合)한 식(識)을 타파한다는 것은 염의 자극으로 법력의 훈습이 발동되어 화합식이 둘로 갈라지기 시작한다는 뜻이며, 또한 화합식 가운데 생멸하는 마음이 완전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속식(相續識)이 소멸하고 상속식보다 더 미세한 자아의식인 말나식과 아리야식이 완전하게 소멸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미세한 망념(妄念)인 아리야식까지 완전 소멸되는 것은 곧 법신이 나타난 것이며 지혜의 순정함입니다. 이것이 염을 따르면서 염을 소멸하여 나타난 본각의 지정상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식학에서는 제10 법운지(法雲地)에서 획득된다고 하였습니다.
此義云何 以一切心識之相 皆是無明 無明之相 不離覺性 非可壞
차의운하 이일체심식지상 개시무명 무명지상 불리각성 비가괴
非不可壞 如大海水 因風波動 水相風相不相捨離 而水非動性
비불가괴 여대해수 인풍파동 수상풍상불상사리 이수비동성
若風止滅動相則滅 濕性不壞故 如是衆生自性淸淨心 因無明風動
약풍지멸동상즉멸 습성불괴고 여시중생자성청정심 인무명풍동
心與無明俱無形相 不相捨離 而心非動性 若無明滅相續則滅 智性不壞故
심여무명구무형상 불상사리 이심비동성 약무명멸상속즉멸 지성불괴고
[번역] 이 뜻이 무엇인가? 일체 모든 마음의 모습은 모두 무명이다. 무명의 모습은 깨어있는 성품을 여의지 않으니 파괴되는 것도 아니오 파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치 큰 바다 물이 바람으로 인하여 파도가 칠 때, 물의 모습과 바람의 모습이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하지만 물의 성품은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바람이 그쳐 사라지면 물의 움직이는 모습도 소멸한다. 그러나 물의 젖는 성품은 파괴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와 같이 중생의 자성이 청정한 마음은 무명의 바람으로 인하여 움직여서 마음과 무명이 함께 형상이 없어서 서로 버리고 떠나지 않으나 마음은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다. 만약 무명이 멸하면 상속하는 마음도 멸하지만 지혜의 성품은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해설] 본각이 오염을 따르면서 오염을 소멸하는 과정과 그 결과인 지혜의 깨끗한 모습인 지정상(智淨相)을 바람과 바다와 파도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그쳐 사라진다'는 것은 무명의 바람이 없어지는 것을 말하며, '물의 움직이는 모습도 소멸한다'는 것은 무명의 바람에 의해 일어나 상속하는 마음과 객관의 모습을 띤 마음과 주관의 모습을 가진 마음과 한 생각 일어난 주객미분(主客未分)의 업(業)의 모습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물의 젖는 성품은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은 지혜의 성품이 파괴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본각이 염을 따르나 그 지혜의 성품은 염이 사라지고 난 뒤라도 변함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명과 번뇌망상을 제거할 수 있는 수행의 기본원리입니다. 무명의 바람에 의해 물결치는 업(業)의 모습과 상속하는 물든 염(染)의 마음인 파도가 바닷물의 젖는 성품인 불멸(不滅)하는 지혜의 성품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파도와 같이 움직이는 물든 마음은 제거의 대상이지만, 물의 젖는 성품인 지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땅을 파서 공간(허공)을 만든다고 땅의 성품이 공(空)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땅의 성품이 텅 빈 것과 같아서 땅의 모습이 허상임을 알면 땅의 성품이 그대로 허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땅을 없애서 허공을 얻는다면 땅과 허공을 분리시켜 보는 것으로 이는 취사선택하는 마음이며 조작(造作)하는 것으로 수행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땅이 그대로 허공과 같이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취사선택할 수 없는 것이고 유(有)나 무(無)로 증명할 수 없으며 작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번뇌가 곧 보리(菩提)이듯 파도가 그대로 바닷물이듯, 수행의 원리란 바로 불이(不二)의 법이며 이 법은 형상이 없으므로 취하고 버리거나 분별하여 판단하거나 생각으로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법은 말과 생각을 떠나야만 하는 것으로 말과 생각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나 법은 이미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아야 비로소 법과 상응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법이 수행의 원리를 제공한다면 법과 상응할 수 있는 것은 말과 생각을 떠난 것이므로, 이것이 무명과 번뇌망상을 소멸시키고 법과 상응할 수 있는 수행의 기본원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과 생각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관찰을 함께 하는 관(觀)입니다. 이 관(觀)은 지혜의 다른 표현으로 지혜에는 고정된 이미지가 없습니다. 대상을 집중 관찰하더라도 관속에는 대상의 이미지가 없으므로 아는 것에 속하지 않아서 법과 상응할 수 있고, 반면에 상이 없는 무상(無相)의 법(法)인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열반(涅槃)을 알기 때문에 모르는 것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법과 상응할 수 있습니다. 세간(世間)이 있는 그대로를 파괴하지 않고 실상(實相)을 구하고, 번뇌를 없애지 않고 있는 그대로에서 열반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부처님의 경지는 불생멸(不生滅)의 관(觀)으로 가야만 이를 수 있습니다. 생멸하는 생각으로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 생각이 불지(佛智)에 의해서 파악된 진리를 생각하더라도 생각은 너고 멸함으로 수행 중에 생각이 바뀌기 때문에 나고 멸하지 않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법에 맞는 수행이란 곧 취사선택하거나 유무로 판단하여 작위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조작하는 것은 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있는 그대로의 비어 있는 법을 체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파도와 같이 일어나는 생각의 염(染)이 생기는 것은 바로 무명(無明)으로 인한 것입니다. 무명이란 깨어있는 성품인 각성(覺性)을 여의지 않기에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염의 파도치는 상(相)의 본질이 곧 바닷물이므로 오염의 모습은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임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무명은 파괴되는 것입니다. 무명이란 법이 하나인줄을 모름일 뿐, 본래 본각인 진여(眞如)의 모습이나 본각이 무명으로 착각되고 착각되기 때문에 마음은 주객으로 나누어지고 모든 존재가 이분화되어 개개가 분리 독립체로 나타나므로 중생은 이로 인하여 괴로움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괴로움을 겪으므로 본각이 작용하여 하나인 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 법력훈습이 곧 관(觀)입니다. 관으로 염을 계속 깨트려 나가면 무명(無明)이 곧 명(明, 본각)으로 전환됩니다. 이 관을 통해 무명이 본래 명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이분화의 무명이 사라집니다. 있지도 않은 허상이나 이를 착각하고 환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 관이 법력의 훈습이며 시각(始覺)과 더불어 비로소 무분별의 지혜로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데 이것이 곧 지혜의 깨끗한 모습인 지정상(智淨相)입니다.
不思議業相者 以依智淨 能作一切勝妙境界 所謂
부상의업상자 이의지정 능작일체승묘경계 소위
無量功德之相 常無斷絶 隨衆生根 自然相應 種種而現 得利益故
무량공덕지상 상무단절 수중생근 자연상응 종종이현 득이익고
[번역] 부사의업상이란 지혜의 깨끗함을 의지하여 능히 일체 탁월하고 미묘한 경계를 짓는다.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모습이 항상 단절함이 없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서로 상응하여 갖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해설] 법력훈습은 염(染)속에서 작용하는 시각(始覺)이며 지정상(智淨相)은 시각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내면 속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은 이 지정상이 밖으로 향하여 중생의 근기에 따라 그 염을 제거하는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을 거듭하는 수많은 세월의 윤회 속에서도 작용하는 법력훈습의 시각은 변함없이 자기를 정화하는 본각의 특성인 한편, 밖으로는 중생의 염을 정화시키는 것으로 그것이 부사의업상입니다.
그러면 중생을 구제하는 부사의업상은 한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깨친 부처이든 못 깨친 중생이든 모두 연기(緣起)합니다. 연기란 서로 동시적으로 관계하여 의존(依存)한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동시(同時)라면 평등하여 어느 것도 시초가 될 수 없고, 끝이 될 수 없습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무한이요 무량입니다. 이렇듯 중생이 시작이 없기 때문에 중생을 구제하는 업(業)의 작용도 시작이 없고 중생이 끝이 없기 때문에 중생구제의 업의 작용도 끝이 없습니다. 이것을 도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어 부사의(不思議)한 업의 모습인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중생구제의 부사의업상의 작용은 {화엄경}의 게송에 "마치 사람이 꿈속에서 갖가지 일을 조작하기를 억천만년을 지날지라도 한 밤이 끝나지 않듯이 보살이 법성(法性)에 머물러 중생을 위해 갖가지 일을 나타내 보이는 것에 무량한 겁은 끝이 있을 수 있지만 중생구제 하는 일념의 지혜는 다함이 없다"고 하는 일념지(一念智)와 다르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 성정본각(性淨本覺)-본성이 청정한 본래의 깨달음
復次覺體相者 有四種大義 與虛空等 猶如淨鏡
부차각체상자 유사종대의 여허공등 유여정경
云何爲四 一者如實空鏡 遠離一切心境界相 無法可現 非覺照義故.
운하위사 일자여실공경 원리일체심경계상 무법가현 비각조의고
二者 因熏習鏡 謂如實不空 一切世間境界 悉於中現 不出不入 不失不壞
이자 인훈습경 위여실불공 일체세간경계 실어중현 불출불입 불실불괴
常住一心 以一切法卽眞實性故 又一切染法 所不能染 智體不動 具足無漏 熏衆生故
상주일심 이일체법즉진실성고 우일체염법 소불능염 지체부동 구족무루 훈중생고
三者法出離鏡 謂不空法 出煩惱碍智碍 離和合相淳淨明故
삼자법출리경 위불공법 출번뇌애지애 이화합상순정명고
四者緣熏習鏡 謂依法出離故 변照衆生之心 令修善根 隨念示現故
사자연훈습경 위의법출리고 변조중생지심 영수선근 수념시현고
[번역] 다시 다음에 각의 본체와 모습이란 네 가지 대의(大義)가 있는데 허공과 더불어 같기가 마치 깨끗한 거울과 같다. 무엇이 넷이 되는가? 첫째는 여실공경(如實空鏡)이다. 일체 마음의 경계의 모습을 멀리 벗어나 어떠한 법도 나타낼 수 없는 각조(覺照)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훈습경(因熏習鏡)이다. 여실불공(如實不空)으로서 일체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무엇이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오, 잃지도 않고 파괴될 것도 아닌 상주하는 일심(一心)으로 일체법이 곧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체의 오염된 법이 이를 오염시킬 수 없어서 지혜의 체(體)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무루(無漏)의 지혜를 구족하여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출리경(法出離鏡)이다. 이른바 불공법이 번뇌의 장애와 지혜의 장애를 벗어나서 화합의 모습을 여읜 순정하고 밝은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연훈습경(緣熏習鏡)이다. 이른바 법출리경을 의지하므로 두루 중생의 마음을 비추어서 선근을 닦게 하여 염(念)을 따라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해설] 앞에서는 무명번뇌의 속박 속에서도 일체의 액난(厄難)을 벗어나 불생불멸을 회복시키는 본각의 작용을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본각 자체의 성품에 대하여 여실공경(如實空鏡)·인훈습경(因熏習鏡)·법출리경(法出離鏡)·연훈습경(緣熏習鏡)의 네 종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네 종류의 각성(覺性)이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중생이 중생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근본 이치와 원리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여기서 허공과 깨끗한 거울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허공은 비어 있어 공적(空寂)하면서도 일체에 두루하지 않는 것이 없고, 밖으로 그 크기를 한정할 수 없으며, 안으로도 그 작기를 측량할 수 없고 그 자체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어떠한 형상도 일체를 받아들이어 온갖 것이 안주합니다. 허공은 파괴되거나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건립과 파괴가 자유로워 가고 옴에 걸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깨끗한 거울은 일체를 비추면서도 공적하여 주객의 구별이 없습니다. 즉 대상을 비추면서도 역으로 상대방이 자기의 얼굴을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알게 하는 것이 거울의 역할입니다. 이는 거울 속이 허공과 같아 비어 있으면서도 온갖 대상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울 속에서는 비추어진 대상의 실체가 없기에, 온갖 모습을 비추더라도 거울 자체는 오염되거나 얼룩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작용이 깨달음의 본질적 개념에 있기 때문에 이를 허공과 거울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허공에 햇빛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내용을 정리하여서 {기신론}에서는 네 가지로 표현하여 상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여실공경(如實空鏡)의 의미는 각체(覺體)가 공적(空寂)한 것임을 뜻합니다. 본래 깨어있는 마음인 본각(本覺)은 마치 비어 있는 허공이나 깨끗한 거울 속과 같다는 것입니다. 본래 비여 있는 이 자체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절대 무(無)는 아닙니다. 무언가 있기에 대상을 받아들이면서 비추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비추어진 형상은 사실 어떤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허공이나 거울 같이 본래 비어 있는 깨달음인 여실(如實)한 공(空)은 주객의 개념을 떠나 허망한 인식작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끊어야 할 단견(斷見)도 있어야 할 상견(常見)도 없습니다. 이 자리는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 또는 철학을 가지고 도식화 할 수 없습니다. 이는 허망한 인식작용에 의한 일체 차별의 모습을 본래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각성(覺性)이 있으므로 일체를 인식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깨달음을 돈오(頓悟)라고 표현할 때, 돈(頓)은 망념이 일시에 사라져 주객의 경계가 없어진 것을 말하고, 오(悟)는 주객이 사라져 비어 있는 그 자리에 어떠한 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자각(自覺)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돈오할 수 있는 것은 여실공경(如實空鏡)의 각체(覺體)가 중생 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으므로, 무명과 번뇌망상을 제거할 수 있는 수행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훈습경(因熏習鏡)은 여실(如實)한 불공(不空)의 마음이 거울과 같기에 일체 세간의 모습을 다 비추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고난(苦難)을 만나면 중생의 고난을 비추어 주고, 중생의 기쁨을 만나면 중생의 기쁨을 차별 없이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훈습경(因熏習鏡)에서 인(因)은 사물이나 사람 등의 대상이 자체의 성품이 텅 비어 없는 무자성(無自性)한 공(空)인 연기(緣起)임을 깨닫게 하는 원인이란 뜻이며, 훈습(熏習)은 수행자에게 깨닫도록 영향을 준다는 뜻이며, 거울인 경(鏡)은 깨달음의 체성(體性)을 비유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물 속에 달이 뜰 수 있도록 하는 깨달음의 성품인 것입니다. 즉 주관과 객관이 무형상(無形相)이라 아름다움과 추함, 큼과 작음, 색깔 등의 모습을 인식할 수 없으므로 여실히 공한 무분별(無分別)입니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물이 달을 뜨게 하듯이, 무자성공(無自性空)이라는 깨달음의 본질인 각성(覺性)은 일체의 모든 형상을 나타내므로 여실히 공하지 않은 불공(不空)인 것입니다. 이 각체(覺體)는 무형상의 존재가 무자성한 공임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나타낸다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여실한 불공(不空)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원인이므로 인훈습경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과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하면 고요한 선정(禪定)이 일어나는데, 이 선정이 거울 역할을 하는 각체의 모습입니다. 아울러 모든 존재가 선정이라는 거울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나타난 형상이 무자성(無自性)한 공(空)인 연기실상의 나타남이므로, 이 각체에 의해 나타난 일체법이 독립된 실체로서 모습을 지니지 않을뿐더러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잃지도 파괴되지도 않는 무자성 공임을 깨닫게 하는 지혜의 본체인 지체(智體)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맑은 물에 뜬 달을 손으로 건질 수 없듯이 모든 존재의 무자성한 공을 아는 것을 무분별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며 이 무분별지혜가 곧 깨달음 자체입니다.
이 각체가 수행의 근원으로 괴로움을 자각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발심수행하기만 하면 모든 존재가 무자성한 공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수행자가 몸과 마음이 허공과 같이 비고 거울과 같이 맑고 밝다면 몸과 마음에 비쳐진 모든 것인 법(法)은 무자성한 공임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부터 선종(禪宗)에 이르기까지 모든 깨달음에 대한 기술은 바로 존재의 본질을 비추는 깨달음의 체성(體性)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원인인 인훈습경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해인삼매(海印三昧)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깨달음의 바다에 삼세(三世)에 걸친 일체의 진리가 나타나는 것이 마치 끝이 없는 큰 바다 표면에 모든 사물이 도장을 찍듯이 선명하게 비치는 것에 비유하였고, 유식(唯識)에서는 깨달은 부처님의 마음을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대혜어록(大慧語錄)에서는 "오랑캐나라 사람이 오면 오랑캐나라 사람이 비춰지고, 한(漢)나라 사람이 오면 한나라 사람을 나타낸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깨끗한 거울인 명경(明鏡)에 사물이 비칠 때 대상의 모습에 따라 있는 그대로 뚜렷하게 비추듯, 조금도 왜곡시키거나 감추는 것이 없는 신령스럽게 밝은 마음의 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감수작용과 개념작용을 배제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지혜의 작용이며 깨달은 실상입니다.
셋째, 법출리경(法出離鏡)의 '법(法)'은 공하지 않는 법인 불공법(不空法)입니다. 법(法)이란 곧 일체법(一切法)으로 크고 작은 형상적 상대성, 움직임과 고요함이라는 운동의 상대성, 전체와 부분이라는 구조적 상대성, 그리고 빠르고 느리다는 시간적 상대성을 벗어나 있습니다. 이것이 진여이고 불법(佛法)입니다. 이러한 상대성은 언어와 생각의 세계에서만이 가능한 착각일 뿐, 법계가 하나인줄 모르는 무명(無明)의 지애(智碍) 또는 소지장(所知障)이며 번뇌장인 번뇌애(煩惱碍)입니다. 즉 안으로 정적인 번뇌의 장애와 대상을 모르는 지적인 장애입니다. 각체인 마음의 거울에 비춰진 법은 형상 그 자체가 무자성한 공으로 무명과 번뇌망상을 벗어나 있고 진(眞)과 망(妄)의 화합한 모습을 떠나 있으므로 '출리(出離, nai kramya)'라고 한 것이며 떠난 모습이 밝고 깨끗하므로 '경(鏡)'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불공(不空)의 법(法)은 무시간적(無時間的)이고 무형상적(無形相的)인 공(空)이므로 빠름과 느림의 돈점(頓漸)이 있을 수 없으며 장애가 사라진 열림의 열쇠이고 깨침의 문입니다. 이 법출리경에 의해 걸림이 없는 영원한 대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법출리경(法出離鏡)에서의 법은 삶과 죽음을 떠난 것이지만 삶과 죽음이 그대로 법(法)이기도 합니다. 상반된 듯하지만 법은 이렇듯 모순의 동일성이라는 성격을 갖습니다. 이러한 법의 성격을 잘 나타낸 것이 관법(觀法)인데, 위빠사나인 관법(觀法)수행에서 몸을 관찰하다보면 몸의 형태가 변하거나 솜처럼 부드러워지기도 하고 속이 텅 빈 경험을 하다가 종내는 몸의 형태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몸이 진정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몸을 규정하고 있던 고정관념이 사라짐으로써 사라진 것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육안으로 보면 형태가 있으나 꿈과 같고 환과 같습니다. 관법 수행을 통해서 몸이 본래 비어 있는 것을 심안(心眼)으로 본 것입니다. 즉 관의 집중과 통찰이 마치 전자현미경처럼 되어 몸의 본질이 비어 있다는 것을 비쳐본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법안(法眼)을 획득한 지혜의 단계입니다.
이렇게 몸이 불생불사(不生不死)가 본질이라면 보이는 몸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으로 허공의 꽃이거나 환에 지나지 않습니다. 관조해보지 않는 몸에는 삶과 죽음이 그대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생사의 근원이란 본래 없기 때문에 본래 공(空)함을 여실히 알게 되면 몸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공적(空寂)함으로 이 둘 관계가 다르지 않습니다. 생사(生死)가 있다고 보는 것은 무명과 번뇌망상 때문입니다. 무명과 번뇌망상마저 본래 공적하다는 것을 알게되면 법이 본래 생사를 떠나 있다는 것이 알아집니다. 있는 그대로 그 자리가 여여(如如)한 진여(眞如)요, 깨달음의 실상이요, 열반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은 상대적 한계의 사고 영역을 벗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법을 아는 방법은 오로지 집중과 통찰하는 관(觀)에 의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집중에 의해 선정(禪定)의 연못 또는 거울에 달이 뜨듯이 법이 나타나고 도리어 이 법에 의해 통찰이 일어납니다. 즉 몸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무상(無常)과 고(苦)와 공(空)과 무아(無我)와 최종으로 불생불사의 열반(涅槃)이라는 법을 통찰하여 체득하는 것이며, 온 세계, 온 우주가 모두 몸에 나타나는 법과 같은 것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볼 때 생사를 본래 떠나 있는 법의 각체인 법출리경(法出離鏡)이 도리어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의 열반을 아는 지혜가 계발되도록 하고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는 문이 됩니다. 원효성사께서, '모든 보살이 도(道)에 들어가는 것이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바로 이 문을 통하여 출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법(法)은 곧 무명에 의해 진(眞)과 망(妄)의 화합으로 생사(生死)의 고통스런 윤회를 되풀이하는 식(識, 마음)을 깨트릴 수 있는 지혜를 일으키는 훈습(薰習)의 힘이고 법계가 하나임을 깨닫는 통로인 관문입니다.
넷째, 연훈습경(緣熏習鏡)은 생사를 떠난 출리(出離)인 법이 바로 깨침의 문이 되어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법은 괴로움을 자각하게 하고 벗어나게 합니다. 마치 목마른 갈증을 해소시키는 감로(甘露)와 같은 법문입니다. 법사의 설법이 곧 법문이요, 삼라만상의 자연계가 무상(無常)이나 공(空) 등의 법을 설하는 무정설법(無情說法)임으로 중생은 이 영향을 받아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무상(無常)한 법을 볼 수 있는 지혜가 계발됩니다. 왜냐하면 중생의 마음에 비쳐진 법은 선의 뿌리를 내리게 합니다. 법은 시간적으로 무상하면서 동시에 상호관계의 연기이므로 법의 영향을 받은 중생은 사람과 동식물·자연 등과 함께 하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마음이 바로 착함입니다.
나와 남이 함께 좋아지게 하므로 선이라고 하는 것이고, 함께 하는 선행(善行)은 보시행과 같이 단절을 이어주고 막힌 것은 소통하게 하므로 선행으로 나와 남이 날줄과 씨줄로 짜여져 불이(不二)의 그물인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실현합니다. 연기실상과 닮아지는 동시에 법계연기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선(善)은 깨달음의 뿌리가 되고 그 뿌리는 깨달음의 싹이 되어 마음의 땅인 심지(心地)를 뚫고 올라와 깨달음의 꽃이 피고 깨달음의 열매인 불과(佛果)를 맺게 합니다.
이와 같이 법은 중생의 마음에 선의 뿌리를 심기 때문에 연훈습경이라 합니다. 즉 '선근을 닦게 한다'는 것은 법이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의 연기임을 중생의 마음에 비추어서 중생의 마음을 각성시킵니다. 따라서 각성시키는 무상(無常) 등의 법이 깨달음의 조건이 되므로 연(緣)이라 한 것이고, 각성은 깨달음에 인도하는 선근(善根)이 되며, 이 선근이 깨닫게 하므로 훈습이며, 이러한 모습이 또 다른 각체이므로 경인 거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여실공경·인훈습경·법출리경·연훈습경은 각체(覺體)의 각기 다른 면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때 각체는 개개인의 각체로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내용이 연기(緣起)이기 때문입니다. 연기란 모든 존재가 그물과 같이 상호연관이 되어 있는 불이(不二)의 법계(法界)를 말하는 것이므로 개인의 깨달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깨치고 보면 전 존재가 한 덩어리의 법계연기이기에 개개인이 모두 각체일 뿐만 아니라 전 우주 또한 그대로 각체입니다. 일즉일체(一卽一切)요 일체즉일(一切卽一)이며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입니다. 여실공경(如實空鏡)과 법출리경(法出離鏡)은 이러한 각체의 공적(空寂)이면서 일체법인 실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중도(中道)이므로 공적함은 생하고 소멸함이 없으나 일체법에는 생멸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상반되는 각체의 두 모습이 동일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두 각체, 즉 여실공경과 법출리경은 언어로 분석하고 분별 사유함에 의해서 나누어진 것입니다. 말과 생각에 근거하지 않고 관지(觀智)로써 하나로 꿰뚫어 보아야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모든 법의 생하고 사라짐, 곧 변화는 마음인 각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그 자체의 자성입니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일체 모든 법 자체가 곧 마음의 자성이란 사실을 알면 지혜의 몸을 성취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깨달음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곧 이것으로서 일체 모든 것이 마음의 성품인 각체이며 일체 모든 곳에 두루한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마음의 성품인 일체법은 각체이니 공(空)하여 무성(無性)이기 때문에 법이 생(生)하여도 무생(無生)의 생(生)이요, 멸(滅)해도 무멸(無滅)의 멸(滅)입니다. 다만 마음과 인연 따라 색도 되고 공도 되어 법계에 두루합니다. 일체 법을 생사(生死)로 보는 것은 업(業)을 따라 나타난 것이요, 생사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은 관(觀)으로 통찰함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이렇듯 감춰지고 드러남은 비록 다르다 해도 근본자리인 하나의 성품인 각체(覺體)는 한번도 그 자리에서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인훈습경(因熏習鏡)과 연훈습경(緣熏習鏡)은 일체 모든 존재가 인(因)과 연(緣)으로 생긴 것입니다. 이는 여실공경과 법출리경의 다른 표현입니다. 즉 인연에 의해서 서로 훈습(熏習)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근거는 자성이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체법은 연(緣)에서 생겨나기에 일체법이 스스로 존재한다면 구태여 연(緣, 조건)을 기다려 생겨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을 기다려 생겨남으로 스스로 바탕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여 말하자면 법출리경의 일체법은 결정된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연기(緣起)하는 자체이며 이것이 여실공경인 각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인훈습경과 연훈습경은 영향을 주면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즉 본각자체인 각체(覺體)가 허공과 같이 비어 있는 인훈습경(因熏習鏡)이고, 중생의 고난을 만나면 중생 자신의 업장(業障)을 없애주는 훌륭한 조건인 연훈습경(緣熏習鏡)의 원인 역할을 합니다. 향이란 연기가 허공에서 사라지듯이 중생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정각(正覺)을 이룬 쪽에서 중생에게 고(苦)를 자각하여 벗어나게 하려고 영향을 주는 것은 연훈습경이요, 영향을 받아 고(苦)에 대한 자각과 벗어나려는 마음인 중생의 입장에서는 인훈습경이 됩니다. 즉 일체가 법의 모습으로 연이 되어 영향을 주는 쪽은 연훈습경이요, 영향을 받아 법을 깨치는 쪽은 인훈습경입니다. 즉,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 깨치고자하는 주체요, 그 깨침에 도움을 주는 간접적인 원인이 불·보살과 선지식의 스승들 또는 산하대지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각체가 있으므로 개개인이 영향을 주기도하고 받기도 하므로 서로가 인이 되는 동시에 연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세계는 인과 연의 훈습경(熏習鏡)으로 존재하며, 이 세계뿐 아니라 모든 존재가 각체의 인연으로 존재하는 법계연기입니다. 말하자면 인식주관과 인식대상 모두가 무상(無相)의 상(相)이므로 거듭 거듭 다함이 없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화엄법계가 그대로 인과 연의 훈습경인 깨달음의 본체인 각체(覺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열반경}에서, "불성(佛性)을 보려면 시절인연(時節因緣)을 관하라"라고 설한 시절인연은 법계연기인 각체의 두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의 각체(覺體)의 나타남을 믿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이상 본각의 내용을 다시 간략히 정리해 보면 본각에는 수염본각(隨染本覺)과 성정본각(性淨本覺)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수념본각에서는 자기의 본각을 자각하는 지정상(智淨相)과 일체 중생의 본각을 자각하게 하는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의 작용을 논하고, 다음에 성정본각에서는 자성정(自性淨)에 여실공경과 인훈습경을 논하였고, 이구정(離垢淨)으로 법출리경과 연훈습경이란 내용으로 본각의 체(體)와 상(相)을 논하였습니다. 이상으로 각(覺)에 대해서 논한 것입니다. 다음에는 불각(不覺)에 대해서입니다. 불각의 내용은 기신론에서 가장 어렵다는 내용으로 주의가 요망됩니다....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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