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8강
집필자 관음정사주지 법상(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거룩하신 삼보(三寶)와 진여본각(眞如本覺)에 귀의하옵니다.
이제 조석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이 감돌아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계절입니다. 이런 계절의 느낌은 우리들의 마음에 근본적인 절대적 고독감을 자아내게 합니다. 가령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게으른 사람에게는 후회와 함께 결실의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코스모스와 국화가 핀 거리와 들판을 거닐며 해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본래 마음을 더듬어 보면 원래 청정한 마음이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나아가 창공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아는 것은 좁은 세상에 갇혀있기 때문에 알 수 있듯이, 또 감옥에 갇힌 자가 자유를 갈망하듯이 우리가 인연의 사슬에 매여 있기에 인연의 사슬을 풀어 자유의 기쁨을 갈망합니다. 이러한 소망을 이루게 해주는 공부가 참 불교공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공부할 마음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공부를 가르치는 일이 매우 쉬고 보람도 얻습니다. 그런데 공부할 마음이 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은 그만큼 어렵고 고단하기만 합니다. 불교공부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교공부는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이어주는 반야의 용선(龍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교공부는 배워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워 아는 것을 스스로 깊이 사유하여 깨달아 실천하지 않으면 세상의 알음알이 놀음과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확고하고 깨끗한 믿음과 항상 가장 낮은 곳으로 거쳐하고 흐르는 누운 풀과 물처럼 겸허함과 게으름이 없는 정성스런 부지런함으로 해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는 중생의 본질적인 양상인 불각(不覺)의 본체(本體)에 대하여 공부해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우리의 현실적인 불각무명(不覺無明)이 작용하는 측면을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나고 소멸하는 인연(因緣)과 그 양상이 있다고 논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고 소멸하는 인연에 대해서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생멸(生滅)의 인연(因緣)
* 오의(五意)의 전기(轉起)
復次生滅因緣者 所謂衆生 依心意意識轉故 此義云何
부차생멸인연자 소위중생 의심의의식전고 차의운하
以依阿黎耶識 說有無明 不覺而起 能見能現 能取境界 起念相續 故說爲意
이의아리야식 설유무명 불각이긱 능견눙현 능취경계 기념상속 고설위의
[번역] 다시 다음에 생멸하는 인연이란 이른바 중생이 마음을 의지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이 전변(轉變)하기 때문이다. 이 의미가 무엇인가? 아리야식을 의지함으로써 무명이 있고 불각(不覺)이 일어나 능히 보고 능히 나타내며 능히 경계를 취해 염(念)을 일으켜 상속한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의(意)가 된다고 설한다.
[해설] 여기에서는 일심(一心)의 생멸은 진여본각과 망상의 불각이 서로 인(因)이 되고 연(緣)이 되는 것을 밝혀 아리야식이 일체법을 낸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중생들이 장원겁(長遠劫)에 걸쳐서 생사를 상속하며 단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유독 의(意) 하나의 허물이 가장 지중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여래장(如來藏)의 일심을 의지하여 의(意)와 그 의식(意識)이 전변(轉變)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여래장은 범어로 따타가따 가르바(tath gata-garbha)로 여래의 태아 또는 태·불성·부처의 본질·깨달음의 성질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여튼 위의 본문을 다시 이해하기 쉽게 해석해 보면, 여래장이 무명불각의 양태로 생멸하는 인연이란 이른바 중생이 여래장의 마음을 의지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이 생멸의 인연으로 전변(轉變)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意)가 생멸의 인연으로 상속하며 전변한다고 한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아리야식을 의지하여 무명이 있고, 그 무명이 있음으로 해서 불각이 일어나서 망상의 견해인 능견을 일으키고, 그 그림자의 모습인 경계의 모습으로 능히 나타내며, 다시 그 경계의 상을 집착한 마음으로 능히 취하고 그에 대한 분별망념을 일으켜 그 망념이 끊임없이 상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멸하면서 상속하는 원인은 의(意)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래장심을 의지한다"는 것은 {능가경}에서 말하길, "여래장이 생멸을 한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아리야식인 식장(識藏)이 바로 여래장과 상즉(相卽)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장심을 의지하였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래장심은 본래 생멸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멸로 상속하게 된 것은 의(意)이며, 두 가지 미혹한 번뇌를 일으켜 갖가지 업(業)을 짓는 것은 그 의(意)의 식(識)입니다.
이는 생멸하는 상속의 인연인 의와 의식이 여래장심을 의지하여 이루어짐을 나타내어 그 명제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이 문제를 따져 묻고 풀이하여 말하길, "이 의미가 무엇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면, "무엇 때문에 생멸로 상속하는 인연이 의(意)때문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마명보살은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무명불각이 일어남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중생이 생멸하는 근원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래장심을 의지한다"는 것은 진여일심은 본래 생멸이 없는 것인데, 단지 일념무명이 망심으로 요동하여 진여일심의 자체를 훈습하여 그 때문에 본래 완전하고 밝았던 진여를 미혹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무명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무명은 진여를 의지해서 일어나 다시 여래장심을 훈습하여 불생불멸의 여래장이 생멸하는 장식으로 변하게 합니다. 이럴 경우 진여가 근본종자인 원인이 되고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는 반연이 되어 아뢰야식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무명이야말로 삼세 가운데 최초의 근본무명업상(根本無明業相)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일심은 진여본각과 망상의 무명불각에 동시에 서로 소통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최초의 무명업상은 그래도 아직은 주관과 객관으로 나뉘지 않아 끝내 상대적인 의존관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여일심이 무명업상으로 나오긴 했으나 나오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단지 무명이 그 상태로 머물러 있지를 않고 도리어 아리야식을 훈습한다면 본래 지니고 있던 본각 지혜의 광채가 능견(能見)의 허망한 견해로 변하여 능견상(能見相)이 되어 차별의 모습이 없는 진여 자체로 하여금 객관의 세계인 허망한 경계로 경계상(境界相)을 삼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능견상과 경계상이 나뉘고 인식의 주관과 그 대상인 객관이 상대적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그 결과 허망한 견해로 허망한 경계상을 실제인양 능취(能取)하고, 그 망심과 경계가 하나로 화합하여 다시 능취한 경계상에 대해 분별망념을 일으켜 집착한 지상(智相)으로 전개되어 그에 대한 분별이 끊임없이 상속하며 단절하지 않는 상속상(相續相)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생멸이 끊임없이 상속하는 것은 의(意)가 상속하는 것이지 여래장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여가 인(因)이 되고 무명이 연(緣)이 된 것이, 다시 무명인 종자가 인(因)이 되고 무명의 허망한 견해로 나타난 경계가 연(緣)이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삼세(三細)에서 다시 육추(六 )의 모습으로 전개됩니다. 이러한 전개과정을 관찰해 볼 때 생사가 장원겁에 걸쳐 상속하면서 단절하지 않는 원인은 결국 의(意)의 허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본 논서에서 의(意)를 나타내어 그것을 생멸하는 주체로 삼고, 칠식(七識)인 말라식과 팔식(八識)인 아뢰야식을 통합하여 의(意)라고 명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음 문장에선 이 의(意)에 다섯 종류가 있다고 상설합니다.
此意復有五種名 云何爲五 一者名爲業識 謂無明力不覺心動故 二者名爲轉識 依於動心
차의부유오종명 유하위오 일자명위업식 위무명력불각심동고 이자명위전식 의어동심
能見相故 三者名爲現識 所謂能現一切境界 猶如明鏡現於色像 現識亦爾 隨其五塵對至
능견상고 삼자명위현식 소위능현일체경계 유여명경현어색상 현식역이 수기오진대지
卽現無有前後 以一切時 任運而起 常在前故
즉현무유전후 이일체시 임운이기 상재전고
[번역] 이 의(意)에 다시 다섯 가지 명칭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이름하여 업식(業識)이라 하는데, 이른바 무명의 세력이 불각의 망심으로 요동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름하여 전식(轉識)이라고 하는데, 요동하는 마음에 의지하여 능견(能見)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름하여 현식(現識)이라 하는데, 이른바 일체의 경계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마치 밝은 거울에 색상과 형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현식(現識) 또한 그러하여 그 오진(五塵)을 따라 대상이 이르러 곧 나타나지만 전후가 없다. 왜냐하면 일체의 시간에서 임의로 운행하며 일어나 항상 목전에 있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다섯 가지 가운데 세 가지 미세한 마음의 양상을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업식(業識)하는데, 이른바 무명의 세력이 불각의 망심으로 요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생주이멸의 일심사상 가운데 최초의 생상(生相)이 바로 의(意)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둘째는 전식(轉識)하는데, 불각의 망심으로 요동하는 업식을 의지하여 경계상을 능견(能見)하기 때문에 전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본각(本覺)의 진지(眞智)를 전변(轉變)하여 허망한 견해를 일으키는 것도 역시 의(意)라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셋째는 현식(現識)하는데, 이는 이른바 일체의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 마치 밝은 거울에 모든 색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현식(現識)도 또한 그러하여 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이란 오진(五塵)의 경계의 양상이 상대적으로 이르러 옴을 따라 나타나지만 시간적인 전후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시간에서 임의로 운행하며 일어나 항상 목전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현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정미로우면서 밝은 식(識)자체에 오진(五塵)의 경계가 완전하게 나타나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오진의 경계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임의로 운행하며 항상 일어나서 막아 억이지 않고 그것을 지니고 잃지 않아 항상 목전에 있는 것도 또한 의(意)의 세력으로 취하여 경계로 삼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삼세(三細)에 대한 재설명입니다. 다음 다섯 가지 가운데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四者名爲智識 謂分別染淨法故 五者名爲相續識 以念相應不斷故 住持過去無量世等 善
사자명위지식 위분별염정법고 오자명위상속식 이념상응부단고 임지과거무량세등 선
惡之業 令不失故 復能成熟現在未來苦樂等報 無差違故 能令現在已經之事 忽然而念
악지업 영불실고 부능성숙현재미래고락등보 무차위고 능령현재이경지사 홀연이념
未來之事 不覺妄慮
미래지사 불각망려
[번역] 넷째는 이름하여 지식(智識)이라고 하는데, 이른바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이름하여 상속식(相續識)이라고 하는데, 염(念)이 상응(相應)하여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한량없는 세간 등과 선악의 업에 안주하고 지니어 잃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다시 현재와 미래의 고락 등의 과보를 성숙시켜 막아 어기지 않기 때문이며, 현재와 이미 지나간 일들을 홀연히 생각하여 미래의 일을 불각에 망령(妄靈)되이 생각하게 한다.
[해석] 여기서는 다섯 가지 마음의 양상 가운데 삼세(三細)는 앞에서 설명하였고, 육추(六 ) 가운데에 미세한 두 가지를 설명합니다. 즉, 넷째는 지식(智識)인데, 염법과 정법을 무명망념으로 분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팔식((八識)에 오진의 경계를 완전하게 나타낼 수 있기는 하지만 단지 나타나기만 했을 뿐이지 망념의 분별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염법·정법을 분별하고 정법이라고 받아들여진 것은 취하고 염법으로 받아들여지면 버리는 데까지 이른 것도 의(意)가 주체가 되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육추 가운데 지상(智相)에 해당하겠습니다.
다음 다섯째는 상속식(相續識)하는데, 염법·정법을 분별하는 망념이 서로 호응하면서 단절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분별하는 망념이 생각 생각에 상속하면서 단절하지 않는 것을 나타내어 그것을 지적하고 그 원인을 의(意)로 귀결시켰습니다. 최초의 일념(一念)이란 무명이 삼세(三細)를 일으키긴 했으나 마음과 경계가 아직은 화합하지 않았으므로 망견(妄見)과 망경(妄境)이 서로 호응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지식(智識)의 분별망념으로 인해서 망경(妄境)을 취하여 실재의 경계로 집착하고 생각 생각이 반연하여 나고 소멸하면서 단절하지 않는 것을 상속상(相續相)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의(意)가 전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이상의 삼세(三細)와 이추(二 )를 모두 의(意)라고 명칭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과거세의 한량없는 선악 등의 업에 굳게 안주하고 그것을 지녀 잃지 않으려 합니다. 이러한 상속식에서 염념이 상속한다고 하는 것은 자체 내에서의 상속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과거세의 선악업 등에 안주하고 집착하여 잃지 않는 것도 다른 생(生)의 생사가 상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의(意)가 선악(善惡)과 염정(染淨) 등의 법을 집착하고 취하여 아뢰야식에 간직한 처소로써 만법의 종자를 삼는 것을 아애집장(我愛執藏)이라고 이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자는 잃거나 무너지지 않아 미래세에 장원겁에 걸쳐서 생사의 종자인 원(因)이 되는 것도 역시 의(意)의 세력입니다. 이러한 세력에 의해서 다시 현재와 미래세의 고락 등의 과보를 성숙시켜 벗어나지 않으려 합니다. 즉, 앞에서 간직한 선악의 종자로써 인(因)을 삼아 미래세의 생사고락의 과(果)를 감득하는 것도 역시 의(意)의 세력임을 밝힌 것입니다. 현재에 상속하고 이미 지나간 일들인 과거를 홀연히 생각해내어 분별하게 하고, 미래의 일을 무명불각의 망상으로 염려하게 합니다. 이는 중생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생각 생각이 경계의 양상을 반연하는 것은 간직된 종자(種子)의 습기(習氣)가 안에서 훈습하고 현행(現行)으로 발기하여, 염념(念念)이 단절되지 않고 목전에 나타나 업을 일으키는 것도 역시 의(意)의 세력임을 밝힌 것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생멸하는 마음의 양상을 다시 정리해 보면, 생멸의 인연은 최초에 진여로서 종자인 인(因)을 삼고, 무명불각의 일념이 허망하게 진여를 요동하는 무명의 조건인 연(緣)이 되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 때문에 무명이 여래장진심을 굴려 장식(藏識)의 무명업상(業相)이 된 것입니다. 이윽고 무명망념이 도리어 업식을 훈습하여 여래장심이 다시 굴러 능견(能見)인 능견상(能見相)과 능현(能現)인 경계상(境界相)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무명불각의 삼세(三細)를 낸 것입니다.
능견상과 경계상이 한번 성립하고 망심(妄心)과 망경(妄境)이 상대적으로 의존하자, 망념으로 망경을 취하여 나의 소유를 삼았습니다. 그리고는 그에 대한 청정과 더러움을 분별하여 그것을 집착으로 버리지 않고 갖가지로 분별하면서 생각 생각이 상속하여 장원겁에 걸쳐서 나고 죽으면서 윤회합니다. 이는 무명이 종자가 되고 경계상이 조건이 되어 다시 육추(六 )의 두 가지 양상을 생겨나게 한 것입니다.
이를 다시 총괄하면 모두 의(意)가 염념(念念)이 상속하는 것이 그 근본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삼세이추(三細二 )를 모두 의(意)라고 이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식론(八識論)]에서 말하기를, "삼세이추를 통틀어 사량(思量 : 意)이라고 명칭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의(意)는 생멸의 근본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논서에서 말하길, "중생이 여래장심을 의지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이 전변(轉變)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다만 생멸로 상속하는 것은 의(意)가 구르는 것이며, 이혹(二惑)의 번뇌를 일으켜 삼업(三業)을 짓는데 이르러서는 의식일 뿐입니다. 이 의식은 의(意)에서 발현한 식(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의식을 따로 설명하여 의(意)가 그 근본임을 나타냅니다.
참고로 지난날 주석가들은 '이 논서에는 칠식(七識)을 수립하지 않았다'라고 말하였으나 지금 이 지상(智相)과 상속상(相續相)으로써 의(意)를 삼는다면 바로 이것이 칠식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량(思量)인 칠식(七識)을 바로 의(意)라고 이름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한 삼세이추(三細二 )를 모두 의(意)라고 이름하는 것은 바로 {유가론(瑜伽論)}에서 말한 작의(作意)에 해당하는데, 왜냐하면 염념(念念)이 생멸하는 것은 의(意)가 일어났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意)로써 생멸의 근원을 삼은 것입니다.
* 삼계유심(三界唯心)-삼계는 오직 마음일 뿐
是故三界虛僞 唯心所作 離心則無六塵境界
시고삼계허위 유심소작 이심즉무육진경계
此義云何 以一切法 皆從心起 妄念而生 一切分別 卽分別自心 心不見心
차의운하 이일체법 개종심기 망념이생 일체분별 즉분별자심 심불견심
無相可得 當知世間一切境界 皆依衆生無明妄心 而得住持 是故一切法
무상가득 당지세간일체경계 개의중생무명망심 이득주지 시고일체법
如鏡中像 無體可得 唯心虛妄 以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故
여경중상 무체가득 유심허망 이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고
[번역] 그러므로 삼계(三界)는 허망한 거짓으로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일 뿐이다. 마음을 여읜다면 육진(六塵)의 경계(境界)란 없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일체법은 모두 마음을 따라 일어나 망녕된 생각에서 나왔으니 일체의 분별은 바로 자기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다.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기에 (애초에 없는 자기 마음의) 모습은 얻을 수도 없다. 당연히 세간의 일체경계는 모두가 중생의 무명(無明)에 의한 망상심을 의지해서 머물러 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마치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본체는 얻을 수 없다. 오직 마음의 헛된 망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겨나면 갖가지 법(法)이 생겨나고, 마음이 소멸하면 갖가지 법도 소멸하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삼계에 나고 죽으면서 윤회하는 허물을 결론지어 그 책임을 의(意)로 귀결시키고 있습니다. 여래장에는 본래 삼계에 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인 허망하고 거짓된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계가 오직 심의식(心意識)일 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삼계의 모습이 있는 것은 의(意)가 여래장심을 의지하여 일어났을 뿐입니다. 만일 이 망상인 의(意)의 여래장심을 의지하여 일어났을 뿐이라고 한다면 이 망상인 의(意)의 일념(一念)이 생상(生相)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육진의 모습이란 본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육진(六塵)의 모습이 공적(空寂)하다면 허망한 견해도 끊기게 되고 여래장의 일심이 완전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육진경계가 다시 무엇을 따라서 있겠습니까? 결국 생사는 의(意)가 여래장심을 의지하여 일어났을 뿐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미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이 의(意)라고 말했다면 무엇 때문에 여래장심을 의지하여 생멸한다고 말하였는가 하고 은밀하게 자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그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심(一心)이란 법계총상(法界總相) 그 자체입니다. 본래 불생(不生)하여 궁극에 한 법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일체법은 모두가 망념을 따라서 의(意)가 일어나 나왔을 뿐이지 일심이란 자체가 일체법으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제법은 심식이 발현했을 뿐인데도 무명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허망한 마음으로 분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분별의 대상인 만법은 자기의 일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마음 밖에 따로 실재하는 만법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분별의 대상인 만법은 모두가 허망한 분별로 있는 허상일 뿐입니다. 진여의 일심은 차별적인 모습이 없는데 어떻게 자심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진여의 일심은 본래 모습이 없다는 것을 완전하게 이해한다면 삼계의 만법이 단박에 공적해 질 것입니다. 당연히 현재 있는 삼계의 차별하는 양상은 중생의 허망한 마음을 의지하여 주지(住持)할 뿐입니다. 삼계의 허망한 양태는 허깨비 같은 무명의 업력으로 지어졌을 뿐 본래 실재가 아닙니다. 이는 마치 거울에 나타난 허상처럼 중생의 허망한 마음의 분별로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뜻이 무엇인가로부터 모든 법이 여래장심을 따라서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을 따져 묻고 밝힌 것입니다. 이는 논제의 중점을 만법을 내는 근본을 일념무명으로 귀결시킨 것입니다. 실제로 진여일심은 본래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이 없지만 최초의 일념무명이 허망한 마음으로 요동하였기 때문에 이윽고 광대하여 차별적인 모습 없는 진여일심이 삼계의 허망한 차별법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이야말로 삼계의 모든 허망한 법이 일심에서 일어나 망념을 따라 나온 것입니다.
즉, 일념무명이 원래 독립된 자체가 없고 일심진여를 의지하여 성립하였음을 추리해 본다면 허망한 생각의 근본이 바로 진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계의 모든 법은 오직 진여의 한 마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허망한 생각으로 분별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의 한 마음입니다. 이는 이른바 "자기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취하여 허깨비로 허깨비의 법을 이루지 않는다"말했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단지 중생은 일심이 본래 차별적인 모습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망한 삼계의 세계가 분별로 요동하면서 공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할 것은 중생의 허망한 법은 모두가 허망한 마음을 의지하여 현재에 안주하고 미래의 종자를 지닐 뿐 진여의 일심 가운데는 궁극에 그 허망한 법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념이 진여일심을 미혹하면 삼계의 만법이 일제히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이 무명으로 나오면 갖가지 법이 나온다"고 말하였고, 만일 일념에 실재하는 무명이 생겨나는 양상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안다면 삼계가 단박에 텅 비어 고용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명의 허망한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 법도 사라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논서는 일심이 곧바로 진여임을 지적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게 하였습니다. 다만 일념무명이 실재로는 생겨나는 양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바로 불지(佛地:本覺)가 발현할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무념(無念)·무심(無心)임을 관찰할 수만 있다면 불지(佛智)로 향한다"했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하게도 중생이 원래부터 생각 생각이 상속하여 아직 허망한 생각을 여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삼계에 나고 죽으면서 윤회하는 고통이 단절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상은 의(意)가 상속하는 양상을 밝혔고, 다음은 의식(意識)을 밝힙니다.
* 의식(意識)
復次言意識者 卽此相續識 依諸凡夫 取著轉深 計我我所 種種妄執 隨事攀緣
부차언의식자 즉차상속식 의제범부 취착전심 계아아소 종종망집 수사반연
分別六塵 名爲意識 亦名分離識 又復說名分別事識 此識依見愛煩惱增長義故
분별육진 명위의식 역명분리식 우부설명분별사식 차식의견애번뇌증장의고
[번역] 다시 다음에 의식(意識)이란 것은 바로 이 상속식(相續識)이다. 모든 범부가 취하고 집착한 것에 의지하여 더욱 깊어져서 아(我)와 아소(我所)를 헤아려 갖가지를 허망하게 집착하고, 현상의 반연을 따라서서 육진(六塵)을 분별한다. 이름하여 의식(意識)이라 하며, 또 이름하여 분리식(分離識)이라 하기도 하며, 또 다시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이 식(識, 아리야식)은 견(見)번뇌와 애(愛)번뇌를 의지하여 증가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해설] 이 부분은 {기신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사학과 유식학에 설해진 번뇌론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견혹(見惑)의 88사(使)와 수혹(修惑)의 10사(使) 등 108번뇌 삼계(三界)·구지(九地)·삼업(三業) 등을 먼저 공부하여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자세한 부분은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부파불교의 수행과정과 유식불교의 수행과정을 결부시켜 그 내용들을 추적해 가다보면 끊어야할 번뇌와 수행하여 얻을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대략 말씀드리자면, 부파불교의 수행과 득과를 오위(五位)체계로 설명하는데, 이는 자량위(資量位)·가행위(加行位)·견도위(見道位)·수도위(修道位)·무학위(無學位) 등이라고 하고, 유식학의 오위체계는 자량위(資量位)·가행위(加行位)·통달위(通達位)·수습위(修習位)·구경위(究竟位)라고 합니다. 이러한 부파와 유식의 수행계위의 단계는 명칭과 그 수행의 내용도 바뀌어지며 번뇌의 숫자도 증가되어집니다. 그런데 수행의 중추적인 내용은 부파교학에서는 오정심관(五停心觀)을 비롯한 사념처관(四念處觀)과 사성제(四聖諦)가 되고, 유식교학에서는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과 모든 수행을 총괄한 십바라밀(十波羅蜜) 등이 핵심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여튼 의식(意識)에 대해서 말해 보면, 바로 이 무명업식이 굴리어 대상을 취하여 상속하는 의식에서 모든 범부가 취하고 집착하는 것이 더욱 깊어집니다. 육근(六根)으로 아(我, 나)를 헤아리고 육경(六境)으로 아소(我所, 내 것)를 헤아려 나의 모습을 갖가지로 허망하게 집착하고, 전도된 허망한 경계의 현상을 따라 반연하면서 육진을 분별합니다. 이를 의식이라 명칭하며, 육근의 작용을 의지하여 육진의 경계를 따로따로 취하기 때문에 분리식(分離識)이라 이름하기도 하며, 다시 과거와 미래, 육근과 육경의 갖가지 현상의 형상을 분별하기 때문에 분별사식(分別事識)이란 명칭을 붙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 아뢰야식이 지말무명인 견일처주지번뇌(見一處住地煩惱)인 견도혹(見道惑)과 욕애주지(欲愛住地)·색애주지(色愛住地)·유애주지(有愛住地)의 삼애번뇌(三愛煩惱)인 삼계사혹(三界思惑)인 수도혹(修道惑)을 의지하여 이 두 가지 미혹이 아뢰야식을 훈습하여, 아뢰야식으로 하여금 이 분별사식으로 증가하여 자라나게 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의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는 의식이 바로 앞의 상속식이지만 단지 범부가 외부의 육경(六境)을 취하여 나(我)와 내 것(我所)으로 집착하고 육진(六塵)을 반연하여 나의 수용(受用)으로 삼는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계속에서 분별한다는 뜻에서 의(意)의 식(識)이라고 명칭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의식은 상속식을 근본 뿌리로 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속하는 분별로 아애(我愛)를 깊이 집착하여 견사이혹(見思二惑)을 일으키고 삼업(三業)을 짓는 것은 바로 의식일 뿐입니다. 이는 육추상(六 相) 가운데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의식이 밖으로는 오색근(五色根)을 의지하여 오진(五塵)을 분별하고 오경(五境)을 취하여 집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리식이라고 명칭하였습니다. 다시 이 의식은 안으로 육근과 밖으로 육경의 갖가지 사상(事相, 현상)을 총체적으로 반연하기 때문에 또는 분별사식이라고 명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 의식은 견도혹(見道惑)인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와 수도혹(修道惑)인 삼애(三愛) 등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오주지무명번뇌(五住地無明煩惱)에서 앞의 오의(五意)는 모두가 근본무명주지를 의지하고, 지말무명번뇌인 이 의식이 의지하는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욕애주지(欲愛住地)·색애주지(色愛住地)·유애주지(有愛住地)인 사주지번뇌(四住地煩惱)는 견사이혹을 일으켜 삼업을 짓게 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상은 일심(一心)의 나고 소멸하는 인연이 무명이 진행되는 흐름을 따라 생사의 염법(染法)을 일으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 의(意)와 의식(意識)을 구상(九相)에 의하여 간략히 혹업고(惑業苦)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의(意)는 삼세(三細)의 업상(業相)인 무명업식(無明業識)과 전상(轉相)인 전식(轉識), 현상(現相)인 현식(現識)과 육추(六 )의 지상(智相)인 지식(智識)과 상속상(相續相)인 상속식(相續識) 등이고, 의식(意識)은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은 미혹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업상(起業相)은 업(業)에 해당하고, 업계고상(業繫苦相)은 고(苦)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을 한 구절로 말씀드리면 미혹에 의해서 업을 지어 고통을 받는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은 일심(一心)이 나고 소멸하는 인연을 의지해서 생멸의 염법(染法)에 나아가 진여의 정법으로 환원함으로써 깨달음에는 돈(頓)과 점(漸)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밝힙니다.
* 탄연기심심(歎緣起甚深)-연기의 매우 심오함을 찬탄함
依無明熏習所起識者 非凡夫能知 亦非二乘智慧所覺 謂依菩薩
의무명훈습소기식자 비범부능지 역비이승지혜소각 위의보살
從初正信 發心觀察 若證法身 得少分知 乃至菩薩究竟地 不能盡知
종초정신 발심관찰 약증법신 득소분지 내지보살구경지 불능진지
唯佛窮了 何以故 是心從本已來 自性淸淨 而有無明 爲無明所染
유불궁료 하이고 시심종본이래 자성청정 이유무명 위무명소염
有其染心 雖有染心 而常恒不變 是故此義唯佛能知
유기염심 수유염심 이상항불변 시고차의유불능지
[번역] 무명의 훈습을 의지하여 일으킨 식(識)은 범부가 알 수 없고, 역시 이승의 지혜로도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보살이 최초 정신위(正信位)로부터 발심하고 관찰하여 만약 법신(法身)을 증득하면 약간의 부분에서 알 수 있다. 나아가 보살이 구경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끝까지 다 알지는 못하며, 오직 부처님만이 궁극까지 아신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본래부터 자성이 청정하지만 무명이 있게 되었다. 무명 때문에 오염이 되어 그 염심(染心)이 있다. 비록 오염된 마음이 있다 해도 항상 변치 않는다. 그러므로 이 뜻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무명(無明)이란 염법에서 진여정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간략히 밝혀 생멸의 인연이 생기하는 것이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즉, 범부로부터 이승(二乘)과 보살과 부처님의 경지를 설하면서 근본무명을 알 수 있는 경지를 설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명의 훈습을 의지하여 일으킨 근본무명업식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역시 이승의 지혜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설명하기를, 십신(十信)의 처음인 정신위(正信位)로부터 발심하고, 삼현위(三賢位)를 지나 수행하면서 관찰하여 십지(十地)의 초지(初地)인 법신(法身)에 이르러야만 무명(無明)의 실상을 약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나아가서는 법신보살의 구경의 경지인 십지(十地)까지 거치고서야 비로소 근본무명을 거의 간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다 알지는 못하고, 유일하게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러야 만이 끝까지 추궁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이 근본무명업식은 매우 심오하여 가장 극도로 미세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무명이 나고 소멸하는 망상을 돌이켜 진여의 본각으로 귀결하려 한다면 이 근본무명업식을 타파해야만 일심의 근원을 증오하게 되며, 바로 그것이 구경각(究竟覺)입니다. 그런데 이 근본무명업식은 참으로 심오하기 때문에 깨닫는 공부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부가 알 경계가 아니며, 역시 이승의 지혜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문과 연각은 제육의식(第六意識)만을 알았을 뿐, 그 근본업식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보살이 수행하여 십신(十信)의 초위(初位)인 정신위(正信位)로부터 발심하고 관찰하여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 등의 계위(階位)를 지나는 동안에 단지 비량(非量)의 추리로 추측해서 그것을 관찰하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행한 약간의 수행분야에서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십지(十地)의 초지(初地)인 정심지(淨心地)에 오른 법신보살이라 할지라도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사상(四相) 가운데 주상(住相)만을 깨달을 뿐이며, 십지의 궁극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역시 구경까지는 다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그들이 깨달은 분야만큼은 알지만, 유일하게 부처님만이 완전히 이해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근본업식은 매우 심오하여 타파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근본업식은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본래 생멸의 오염은 없었던 것인데, 이 청정한 자성이 모르는 사이에 한 생각이 문득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자성의 밝음은 본래 오염되지 않으면서 오염되었기 때문에 알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의 자체는 본래 청정하여 이처럼 오염되었으면서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견도(見道) 이상의 성문(聲聞)과 삼현위(三賢位)보살과 십성(十聖)인 십지(十地)보살이 도달하여 아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불과를 얻은 등각이나 묘각의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오염된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일심 자체는 청정하여 상주하고 항상하여 변치 않는다고 할까요? 왜냐하면 중생의 망상은 생각 생각이 5진(塵)의 경계를 반연하고 분별하지만 본래 스스로 이것은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미 이 마음이 본래부터 자성이 청정했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무명이 있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6근(根)이 6경(境)을 대하여 잘못 안 것이고, 문득 한 생각이 일어나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 육근의 잘못 안 경계와 일념을 놓아버리고 무념(無念)한 무심(無心)에 이르면 본래의 자성이 청정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알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약간 수행하여 조금 알고 있는 식견으로는 구경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쌍하게도 요즈음 불교를 신행(信行)하는 사람들은 이 근본업식의 진행하는 모습도 체득(體得)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이 도를 깨달은 것으로 자부하고 착각합니다. 그러한 수행자들이야말로 어찌 증상만(增上慢)을 부리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깊이 숙고해 볼일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여 근본무명이 제거되지 않았다면 모두가 중생입니다. 불교 수행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불신(不信)과 게으름과 교만인 증상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완전한 깨달음을 완성하고자 마음을 발하여 누운 풀처럼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쉼 없이 정진하는 불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상은 단박 깨닫기가 어려운 돈오(頓悟)를 설명하였습니다. 다음은 이 무명을 알기 어려운 까닭을 풀이해 갑니다.
* 무명(無明)은 문득 일어난 한 생각
所謂心性常無念故 名爲不變 以不達一法界故 心不相應 忽然念起 名爲無明
소위심성상무념고 명위불변 이불달일법계고 심불상응 홀연념기 명위무명
[번역] 이른바 마음의 본성은 항상하여 망념이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불변(不變)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법계(一法界)를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의 (본성에) 상응하지 못하여 [홀연히 망념을 일으킨 것을 이름하여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해설] 여기서는 무명(無明)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무명(無明)이란 범어로 아비디야(avidy , 무명)·모아(moha, 어리석음)·아갸나(aj na, 무지)입니다. 이는 지혜가 없어서 사물의 실상을 밝게 알지 못한 것이고 또는 지혜가 없는 어리석음이며 아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거기에 매몰되어버린 무지(無知)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 위에서, "이 마음이 원래부터 자성이 청정하고 무염(無念)인데 무엇 때문에 무명이 있게 되었는가?"하고 무명(無明)의 근원을 제시합니다. 즉, 일진법계(一眞法界)임을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심의 자체가 진여법계와 스스로 상응하지 못하여 [홀연히 망념(妄念)을 일으키는 것을 무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홀연히 일어난 망녕(妄 )된 한 생각을 일으킨 곳이 지극히 미세하여 불가사의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불가사의하게 훈습(熏習)하기 때문에 알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불가사의한 것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부나 이승·보살의 경지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홀연히 일어난 한 생각만 단박에 끊어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진여의 자리요 하나의 진실한 진리의 세계에 안주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차이가 있어서 어렵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수행하여 닦아 끊어 가는 점수(漸修)를 밝힙니다.
이상은 진여(眞如)의 정법(淨法)으로 환원하는 인연을 간략히 밝혔습니다. 다음은 수행의 위치에서 견사이혹(見思二惑)을 끊는 측면에서 이승(二乘)은 물론 보살지의 단계를 제시하여 진여의 정법으로 환원하는 인연을 밝힙니다....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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