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스크랩]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9강

수선님 2018. 3. 11. 12:32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9강

 

 

 

                                                                              집필자 관음정사주지 법상(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거룩하신 삼보(三寶)와 진여본각심(眞如本覺心)에 귀의하옵니다.
  이제 만물의 수고로움과 계절이란 인고(忍苦)의 반연으로 들판의 곡식과 열매들이 알알이 여물어 수확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싸늘한 바람이 불고 차가운 서리가 산야를 채울 때면 우리는 냉철한 이성을 발휘하여 감성을 정화하여 조화를 이루는 용맹스런 수행력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홀연히 일어났던 한 생각이 무명(無明)이란 구름이 되어 청정한 마음을 가리고 있어, 우리를 근본적인 절대적 고독감에 젖어들게 합니다. 본래로 저 푸르고 해맑고 밝은 가을의 창공처럼 우리들의 본래 마음도 그렇다는 것을 믿고 불퇴전(不退轉)의 정진을 이어가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구경에 완전하고 올바른 깨달음을 완성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공부도 이제 서서히 결실을 맺어 가는 듯합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생멸의 인연에 대해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다음에 생멸의 양상에 대해서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육염(六染)에 대해서입니다.

 

 

* 육염(六染)인 지말무명(枝末無明)을 여의어 끊어감

 

染心者有六種 云何爲六 一者執相應染 依二乘解脫 及信相應地遠離故 二者不斷相應染
염심자유육종 운하위육 일자집상응염 의이승해탈 급신상응지원리고 이자부단상응염
依信相應地 修學方便 漸漸能捨 得淨心地 究竟離故 三者分別智相應染 依具戒地漸離

의신상응지 수학방편 점점능사 득정심지 구경리고 삼자분별지상응염 의구계지점리

乃至無相方便地 究竟離故 四者現色不相應染 依心依色自在地能離故 五者能見心不相 

내지무상방편지 구경리고 사자현색불상응염 의심의색자재지능리고 오자능견심불상

 應染 自在地能離故 六者根本業不相應染 依菩薩盡地 得入如來地能離故
응염 자재지능리고 육자근본업불상응염 의보살진지 득입여래지능리고

 

[번역] 염심(染心)에는 여섯 종류가 있다. 무엇이 여섯인가? 첫째는 집상응염(執相應染)이다. 이승의 해탈과 신상응지(信相應地)를 의지하여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이다. 신상응지를 의지해서 방편을 배우고 닦아 점진적으로 버려 정심지(淨心地)를 얻어서 궁극에 여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이다. 구계지(具戒地)를 의지하여 점점 여의어 나아가다가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에 이르러서야 구경에 여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이다. 색자재지(色自在地)를 의지해서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다. 심자재지(心自在地)를 의지하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다. 보살진지(菩薩盡地)를 의지하여 여래지(如來地)에 깨달아 들어가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의] 앞에서는 근본무명(根本無明)에 대해 언급하였고, 여기서는 지말무명(枝末無明)인 육염(六染)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행의 계위에서 자세하게 요약하여 이혹(二惑)을 여의는 점차(漸次)와 심천(深淺)의 정도를 논변하고, 정법(淨法)으로 환원(還元)하는 인연을 자세하게 밝힌 것입니다. 앞에서 정법으로 환원하는 단계를 간략히 제시하면서 "최초의 근본 무명을 단박에 타파하는 일은 삼현(三賢)과 십성(十聖)의 경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오직 부처님만이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선 수행지위에 의지하여 점진적으로 염심(染心)을 여의는 단계를 상세하게 제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염심(染心)에는 여섯 종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로 집상응염(執相應染)인데, 이는 육추 가운데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승이 소승사과(小乘四果)의 마지막 계위인 무학위(無學位)에 이르러 견도혹(見道惑)과 수도혹(修道惑)인 지말번뇌를 끝까지 여의고 해탈한 경지와 십해(十解) 또는 십주(十住) 이후에 신근(信根)을 성취하고 물러남이 없는 신상응지(信相應地)를 의지하여 이 오염된 마음을 멀리 여의기 때문에 집상응염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인데, 이는 육추 가운데 상속상(相續相)에 해당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신상응지를 의지해서 유식의 기초적인 관법(觀法)인 심사관찰(尋思觀察, 살피고 생각하여 관찰함)의 방편을 배우고 닦아 십신(十信)에서 십회향(十廻向)에 이르기까지입니다. 이는 점진적으로 버려 십지(十地)의 초지(初地)인 정심지(淨心地)에서 삼무성(三無性)을 증득하고 진여가 두루두루 충만하여 법집분별(法執分別)이 현행(現行)하지 않아야만 마침내 이를 여의기 때문에 부단상응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삼현(三賢)에서 초지(初地)에 이르기까지입니다.


  세 번째는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인데, 이는 지상(智相)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삼취정계(三聚淨戒)를 빠짐없이 갖춘 구계지(具戒地)인 제이지(第二地)를 의지하여 칠지(七地) 이전까지에 있는 미세한 경계의 분별을 수행지위마다 그 분야만큼 점점 여의다가 삼매관(三昧觀)에서 나와 경계를 반연하면서도 분별하는 것이 없는 칠지의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이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분별지상응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제2지(地)에서 제7지(地)까지 이르러야 이 오염된 마음을 여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인데, 이는 삼세 가운데 현상(現相)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제팔지(第八地) 가운데서 삼종세간(三種世間)의 자유자재한 색성(色性)을 체득하여, 마음가는 대로 색의 본성과 간격이나 장애가 없는 색자재지(色自在地)를 의지해서 이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현색불상응염이라고 합니다. 이는 제8지(地)인 부동지(不動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다섯 번째는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인데, 이는 견상(見相)입니다. 왜냐하면 제구지(第九地) 가운데서 중생의 심의식이 진행하는 십종조림(十種稠林)을 훌륭하게 아는 심자재지(心自在地)를 의지하여 이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능견심불상응염이라고 하였습니다.


  여섯 번째는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인데, 이는 무명업상(無明業相)에 해당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십지종심(十地終心)의 금강유정(金剛喩定)인 보살진지(菩薩盡地)를 의지하여 무구지(無垢地)인 여래지(如來地)에 깨달아 들어가 미세한 습기(習氣)의 종자와 그에 따른 심념(心念)이 모두 다하면 이를 멀리 여읠 수 있기 때문에 근본업불상응염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신상응지(信相應地)는 십신(十信)으로부터 십주(十住)에 들어가 생공관(生空觀)으로 깨달아 들어가 견혹(見惑)과 사혹(思惑), 즉 분별사식을 증장하는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와 삼애(三愛)의 번뇌를 홀로 타파한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 수행지에서는 마음의 굳은 의지를 발기하여 지말무명을 끊기는 했으나 그 수행력이 아직은 충만하지 못하여 집취상과 계명자상의 거친 번뇌만 우선 떨어져 단지 견혹과 사혹만을 끊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에 집상응염(執相應染)은 육추(六 )의 양상 가운데서 집취상과 계명자상입니다. 이는 견일처주지인 견도혹과 삼애번뇌인 수도혹이 제육식(第六識)에 소속하기 때문에, 이 염심(染心)은 이승(二乘)이 끊는 염심(染心)입니다.


  이어서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은 육추의 양상 가운데 상속상입니다. 천태교학(天台敎學)에서는 이것으로써 삼계의 안과 삼계의 밖의 진사혹(塵沙惑)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삼현보살은 이 진사혹을 끊어야만 십지의 초지인 정심지(淨心地)에 오른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주의 초주(初住)인 신상응지(信相應地)로부터 십지의 초지에 이르러야만 이 염심을 여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심지에선 망념으로 분별하는 번뇌장과 소지장인 이장(二障)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분별상응염(分別相應染)은 육추 가운데서는 미세한 분야에 속하는데, 이는 바로 지상(智相)이며 구생아집(俱生我執, 태어나면서 갖춘 나에 대한 집착)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십지 이상의 법신보살이 근본무명을 타파하려는 굳은 의지를 발현하기는 했으나, 초지로부터 7지에 이르기까지는 유상관(有相觀)이 많아 단지 구생아집만을 타파할 뿐입니다. 즉 진여법공관(眞如法空觀)을 닦으면서 관(觀)에 들어갔을 때와 나왔을 때가 다르기 때문에 경계상에 있어서 미세한 유상(有相)의 분별이 많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수행의 단계에선 아직도 구생법집(俱生法執)을 타파하진 못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은 현식(現識)인데, 이는 제팔지(第八地)에서 평등진여를 증득한 부처님의 세계로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과 중생세간과 기세간(器世間)인 삼종세간(三種世間)에서 색성(色性)의 자유자재한 것을 체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염심을 여읠 수 있습니다. 


  더욱 나아가면 능견불상응염(能見不相應染)은 전식(轉識)으로 능견상입니다. 제구지(第九地)에선 중생의 망상심이 진행하는 십종조림(十種稠林)을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십종조림을 {화엄경}에서, "이 구지보살은 여실한 지혜로 중생의 허망한 무명의 마음이 진행하는 양상을 안다. 첫째는 심조림(心稠林)이며, 둘째는 번뇌(煩惱)조림, 세 번째는 업(業)조림, 네 번째는 근(根)조림, 다섯 번째는 해(解)조림, 여섯 번째는 성(性)조림, 일곱 번째는 요원(樂願)조림, 여덟째는 수면(隨眠)조림, 아홉째는 수생습기상속(受生習氣相續)조림, 열째는 삼취차별(三聚差別)조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열 가지를 낱낱이 빽빽한 숲이라는 의미의 조림(稠林)이라 한 것은, 이들 모든 법이 조밀하기가 마치 숲과 같기 때문에, 중생의 망상으로 진행하는 무명염법을 거기에 비유한 것입니다. 제구지에선 그러한 망상심이 진행하는 낱낱의 차별적인 모습을 훌륭하게 알기 때문에 이 염심을 능히 여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에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은 근본무명업식인데, 바로 업상(業相)입니다. 이는 십지의 수행심이 가득 차서 등각(等覺)의 금강도에 이른 뒤에 이 염심을 끊으면 바로 여래의 과해(果海)에 들어갑니다. 이상은 육염심을 여의고 진여정법으로 환원하는 수행의 점차적인 과정입니다.


  한편 위에서 말하기를 "무명에 오염되어 염심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육염심 모두가 근본무명을 뿌리로 의지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육염심은 모두가 개체로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무명의 차별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육염심이 사라지고 나면 무명 또한 자연스럽게 따라서 사라질 것입니다. 다음에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을 여의어 끊는 것에 대하여 다시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유식학에서는 십지(十地) 각각에 무명(無明)과 진여(眞如)를 분류하여 밝혔습니다. 그런데 기신론에서는 이를 통합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 근본무명(根本無明)을 여의어 끊음

 

不了一法界義者 從信相應地觀察 學斷入淨心地 隨分得離 乃至如來地
불요일법계의자 종신상응지관찰 학단입정심지 수분득리 내지여래지  
能究竟離故 言相應義者 謂心念法異 依染淨差別 而知相緣相同故
능구경리고 언상응의자 위심념법이 의염정차별 이지상연상동고
不相應義者 謂卽心不覺  常無別異 不同知相緣相故
불상응의자 위즉심불각 상부별이 부동지상연상고

 

[번역] 일법계의 의미를 요달(了達)하지 못하는 자는 신상응지(信相應地)로부터 관찰하여 배우고 끊어서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면 (수행하는) 부분을 따라서 여읠 수 있으며, 나아가 여래지(如來地)까지 이르면 구경에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응(相應)한다는 의미는 심법(心法)과 염법(念法: 心所)이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오염과 청정함의 차별을 의지해서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불상응(不相應)이란 의미는 이른바 마음에 즉(卽)해서 깨닫지 못하기에 항상 별다름이 없지만 지상과 연상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석] 홀연히 망념을 일으키는 근본무명 때문에 일심법계의 의미를 밝게 통달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자도 역시 신상응지로부터 관찰하여 방편을 배우고 그것을 끊어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면 수행한 분야만큼 여읠 수 있으며, 나아가 여래의 경지까지 이르면 이를 끝까지 여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육염심(六染心)의 상대적으로 호응한 상응(相應)과 상대적인 구별이 없어 서로가 호응하지 않는 불상은(不相應)의 소연경(所緣境)이 같고 다르다는 것을 풀이한 것입니다. 즉, 육염심 가운데 집상응염(執相應染)과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과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인 세 가지 염심을 상응(相應)이라고 말한 것은 심왕(心王, 마음의 주체)과 심소법(心所法, 마음의 작용)이 각자 상대적으로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왕(心王)과 심소념(心所念)의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다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가령 심왕이 염법을 알면 심소법도 심왕과 동일하며, 심왕이 정법을 능연(能緣)하면 심소법도 또한 그와 동일합니다. 


  또한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과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과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과 무명(無明)이 서로 호응하지 않는 불상응(不相應)의 의미를 말하자면, 서로 호응하지 않는 이 넷의 염심은 진여일심에 상즉한 무명불각이므로 진여일심과 무명불각이 항상하여 심왕과 심소와 그 소연경(所緣境)이 따로 구별되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식을 해서 아는 주체의 모습인 심왕·심소 즉 알음알이의 양상인 지장(知相)은 그 소연경(所緣境)인 염정법(染淨法)의 차별적인 양상인 연상(緣相)이 상대적이어서 동일하지 않은 상응과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 "일심법계의 의미를 통달하지 못한 자는 등등"이라는 것은 바로 홀연히 망념을 일으키는 무명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신상응지로부터 관찰 운운하여 여래지에 이르러야만 끝까지 이 염심을 여읠 수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일승실교(一乘實敎)인 화엄학에선 무명을 끊어 가는 단계를 42가지 단계를 설정하여 구분하였습니다. 이 42가지 단계란 52위(位)에서 십신(十信)을 초주(初住)인 발심주(發心住)에 포함시켜서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을 말하고 있는데, 그 근거가 여기에서 처음 십주의 초주인 신상응지로부터 마음의 굳은 의지를 발기하여 무명을 42단계의 계위로 끊어 가는 의미가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생멸하는 인연은 그 의미가 염법생멸과 정법생멸의 의미를 함께 포괄합니다. 이는 염법으로의 유전(流轉)생멸이 아닌 정법으로 환원하는 환멸(還滅)인연입니다.


  즉, 대상을 반연하여 아는 주체인 능연(能緣)의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인 지상( 知相)과 인식해서 알아질 대상인 소연경(所緣境)의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주체인 주관과 대상인 객관의 세계가 하나로 화합한 동일한 모습이 아닙니다. 가령 심왕이 심소념법인 염법이나 정법을 주관적으로 반연해서 알면 심왕의 분별인 인식작용인 심소도 역시 심왕을 따라 그와 동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해서 아는 양상인 지상(知相)과 알아질 대상인 객관의 소연경(所緣境)의 양상이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상응(相應)한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불상응(不相應)이란 일심진여에 상즉(相卽)한 무명인 불각[卽心不覺]의 염심이므로 아직은 심왕과 심소염법의 상대적인 의존관계로 나뉘지 않아서 소연경인 외부의 세계와 더불어 상대적인 의존관계에서 호응하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셋의 염심은 항상하여 상대적인 구별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의존관계로 호응하지 않는다고 하여 불상응(不相應)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무명인 불각이 진여일심을 훈습하여 근본무명업식을 이루어 삼세를 생기한 측면에서 일심에 상즉한 무명이란 불각을 요약해서 이 셋의 염심에서는 아직 심왕과 심소가 나뉘지 않았기 때문에 불상응(不相應)이라고 말하였습니다.

 

又染心義者 名爲煩惱碍 能障眞如根本智故 無明義者 名爲智碍 能障世間
우염심의자 명위번뇌애 능장진여근본지고 무명의자 명위지애 능장세간
自然業智故 此義云何 以依染心能見能現 妄取境界 違平等性故 以一切法
자연업지고 차의운하 이의염심능견능현 망취경계 위평등성고 이일체법
常靜無有起相 無明不覺 妄與法違故 不能得隨順世間一切境界種種知故
상정무유기상 무명불각 망여법위고 불능득수순세간일체경계종종지고

 

[번역] 또 염심(染心)의 의미란 번뇌애(煩惱碍)라고 이름하는데 진여의 근본지(根本智)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무명의 의미란 이름하여 지애(智碍)라고 하는데 세간의 자연업지(自然業智)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 의미가 무엇인가? 염심을 의지하여 능견(能見: 能見相)이 능현(能現: 境界相)을 허망하게 경계를 취하여 평등한 본성을 어기기 때문이다. 일체법은 상주하고 고요하여 상(相)을 일으킴이 없다. 무명(無明)인 불각(不覺)이 망념(妄念)과 더불어 법(法)이 상위(相違)하기 때문에 세간의 일체경계를 수순(隨順)하여도 갖가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염심(染心)과 무명(無明)의 의미를 번뇌의 장애와 지혜의 장애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앞에서 설명한 육염심(六染心)의 의미를 번뇌애(煩惱碍)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염심이 시끄럽게 요동하면서 상속하여 진여의 근본지(根本智)를 장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근본무명의 의미를 지애(智碍)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무명이 육염의 생멸상으로 차별하여 세간의 자연업지(自然業智)를 장애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염심이 근본무명을 뿌리로 의지하고 있으므로 그 자체는 동일하지만 무명과 염심이 장애하는 측면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육염심이 시끄럽게 요동하고 상속하면서 번뇌로 장애하기 때문에 본각 가운데 지정상(智淨相)인 근본실지인 여리지(如理智, 이치에 맞는 절대의 지혜인 근본무분별지)를 장애합니다. 근본무명이 생하고 멸하면서 진행하여 육염심의 모습으로 차별이 나기 때문에 진여일심과 평등한 이치를 장애하여, 그 무명 때문에 일진법계의 이치를 혼미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각 가운데서 부사의업용(不思議業用)에 해당하는 여량지(如量智, 모든 현상의 작용에 응한 지혜인 경험적 지혜)인 세간의 자연업지(自然業智)의 작용을 장애합니다. 


  그리고서 육염심이 번뇌애가 되고, 근본무명이 지애(智碍)가 된다고 한 이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가를 따져 물었습니다. 진여와 평등한 근본여리지는 주관과 객관의 상대적인 차별상이 없었는데, 지금은 육염심을 의지하여 전상(轉相)으로 능견(能見)인 능견상(能見相)에 의해서 보고 현상(現相)으로 능현(能現)의 경계상(境界相)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이유를 경계상을 의지하여 일어난 허망한 세 가지 상응염심으로 경계를 취해서 집착하여 평등한 진여성의 자체를 마주보며 서로 어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체의 진여의 법성은 본래 상주하고 번뇌가 고요하여 무명망념의 차별상으로 일어남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명이기에 일체의 진여법성은 상주불변하여 번뇌가 고요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망념의 분별이 일체의 법성과 서로 어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간의 일체경계를 수순(隨順)하면서 갖가지로 아는 여량지를 얻지 못하는 이유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질문한 의도를 말해 본다면, "근본무명은 미세함으로 근본여리지(根本如理智)를 장애해야 하고, 육염심은 근본무명이 인지할 만큼 거친 양상으로 진행함으로 세간자연업지인 여량지(如量智)를 장애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지 않고 그 반대로 장애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음 문장에서 번뇌애가 근본여리지를 장애하는 까닭은 능견(能見)과 능현(能現)은 세 가지 불상응염심(不相應染心)이며, "허망하게 경계를 취한다"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상응염심(相應染心)입니다. 이는 본래 진여법계와 평등한 근본실지는 주관과 객관의 상대적인 양상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육염심의 번뇌 때문에 경계를 허망하게 분별하고 취하여 주관과 객관이 상대적으로 의존하면서 그 자체를 마주보며 평등한 이치를 서로 어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번뇌애가 근본여리지를 장애하는 것입니다. 세간의 모든 법은 상주불변하여 번뇌가 고요히 사라진 양상이어서 무명의 차별양상으로 일어나 시끄럽게 요동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평등한 제법의 본성은 여량지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명으로 혼미하여 허망한 생멸이 있습니다. 따라서 세간의 모든 법은 번뇌가 고요하다는 것을 밝게 이해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제법의 본성과 더불어 어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량지를 장애하여 세간의 갖가지 앎을 수순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상에서는 육염심이 생멸하는 인연을 풀이하였는데, 즉, 번뇌애인 번뇌장(煩腦障)과 지애(智碍)인 소지장의 자체인 육염심과 근본무명을 설명하였고, 이어서 그 양상을 따져 묻고 답하였습니다. 다음에서는 육염심이 생멸하는 양상을 설명합니다.

 

 

  3. 생멸(生滅)의 양상

 

復次分別生滅相者 有二種 云何爲二 一者  與心相應故 二者 細與心不相應故
부차분별생멸상자 유이종 운하위이 일자 추여심상응고 이자 세여심불상응고
又 中之  凡夫境界  中之細 及細中之  菩薩境界 細中之細 是佛境界
우추중지추 범부경계 추중지세 급세중지추 보살경계 세중지세 지불경계
此二種生滅 依於無明熏習而有 所謂依因依緣 依因者 不覺義故
차이종생멸 의어무명훈습이유 소위의인의연 의이자 불각의고
依緣者 妄作境界義故 若因滅則緣滅 因滅故 不相應心滅 緣滅故 相應心滅
의연자 망작경계의고 약인멸즉연멸 인멸고 불상응심멸 연멸고 상응심멸

 

[번역] 다시 다음에 분별하는 생멸의 양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을 두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거친 것과 더불어 마음이 상응(相應)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미세한 것과 더불어 마음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거친 것 가운데의 거친 것은 범부의 경계요, 거친 것 가운데의 미세함과 미세한 것 가운데의 거친 것은 보살의 경계이며, 미세한 것 가운데의 미세한 것은 부처의 경계이다.


 이 두 가지 생멸이 무명훈습에 의지해서 있는 것이다. 이른바 인(因)을 의지하고 연(緣)을 의지한다. 인(因)을 의지한다는 것은 불각(不覺, 무명)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연(緣)을 의지한다는 것은 망녕되게 경계를 짓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因)이 소멸하면 연(緣)도 소멸하며, 인(因)이 소멸하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 마음이 소멸하고, 연(緣)이 소멸하였기 때문에 상응하는 마음도 소멸한다.

 

[해석] 여기에서는 입의분 가운데서, "이 마음이 생멸하는 모습"이라고 했던 것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즉, 일심진여는 본래 상대적인 차별상이 없는데 무명의 생멸로 인하여 삼추와 삼세의 무명과 이혹(二惑)과 육염심으로 그 양상이 나타납니다. 본문은 육염심의 망념을 분별하는 생멸의 양상에 거친 마음의 상응과 미세한 마음의 불상응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으로 지상(智相)·집취상(執取相)·계명자상(計名字相) 등 세 가지 거친 양상은 외경(外境)이 있어 심법(心法)과 상대적으로 호응하기 때문에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미세한 생멸의 양상으로 미세한 불상응염심(不相應染心)은 심법(心法)과 외경(外境)이 아직 나뉘어지지 않아 외경이 심법과 더불어 아직은 상대적으로 호응하지 않기 때문에 미세한 생멸양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 가운데서도 집상응염심(執相應染心)은 삼계 안의 범부인 삼현위(三賢位)가 깨달을 경계입니다.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 가운데서 미세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인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과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과 나아가 미세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 가운데서도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인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과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은 십지(十地)보살이 깨달을 경계이며, 그리고 미세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 가운데서 미세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인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은 주관과 객관이 아직 나뉘지 않고 생멸로 진행하는 양상도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오직 부처님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경계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거친 마음의 의식과 미세한 마음의 의식이란 2가지 분별생멸양상의 의식(意識)은 모두가 근본무명주지(根本無明住地)를 의지하고 일어나 훈습(薰習)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를 구별해서 말한다면 이른바 근본무명(根本無明)의 인(因)을 의지하여 세 가지 미세한 불상응염심(不相應染心)을 내고 경계의 연(緣)을 의지하여 세 가지 거친 상응염심(相應染心)을 냅니다. 여기서 인(因)을 의지한다는 것은 근본무명불각 때문에 세 가지 미세한 양상을 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연(緣)을 의지한다는 것은 경계의 반연(攀緣)함을 의지하여 망심으로 세 가지 거친 양상의 경계를 일으킨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를 수행으로 대치하여 근본무명의 원인이 사라지면 무명으로 일으킨 현식(現識)의 경계인 연(緣)도 따라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근본무명의 원인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를 의지해서 일어난 세 가지 미세한 불상응염심도 따라서 사라지고, 경계의 반연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를 의지하여 일어난 세 가지 거친 상응염심도 따라서 사라집니다.


  상응(相應)한다는 것은 분별지·집취상·계명자상의 세 가지 거친 양상입니다. 이는 밖으로 오진(五塵)의 경계상이 있어 심법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호응하고, 다시 심왕(心王, 인식의 주체)과 심소(心所, 인식작용)도 서로 따라서 호응을 합니다. 불상응(不相應)은 심법과 경계상이 아직은 상대적으로 나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까지 삼추와 삼세로 생멸하는 모습을 논변하였고, 다음은 수행하는 사람의 측면에서 오염된 마음의 번뇌를 끊어 가는 수행과정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집취상과 계명자상의 두 염심은 이는 거친 양상 가운데서도 거친 양상이므로 삼계내범(三界內凡)인 삼현위(三賢位)에서 깨달을 경계입니다. 분별지상과 상속상은 거친 양상 가운데서는 미세한 의식의 양상에 해당하며, 전상(轉相)과 현상(現相)의 두 염심은 미세한 양상 가운데서는 거친 의식의 양상에 해당하므로 이는 십지(十地) 가운데서 초지 이상의 법신보살이 깨달을 경계입니다. 근본무명업상의 경우는 미세한 양상 가운데서도 미세한 양상에 해당하므로 부처님만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육염심을 깨달아 여의어 가는 대체적인 단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친 의식의 양상과 미세한 의식의 양상인 두 가지 생멸(生滅)하는 양상이 근본무명을 의지해서 있다"는 것은 이 육염심이 인(因)과 연(緣)을 의지해서 나왔으므로 역시 인(因)과 연(緣)을 의지해서 사라진다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최초에 근본무명의 불각(不覺)으로 인해서 세 가지 미세한 생멸하는 양상이 나왔고, 세 가지 미세한 양상 가운데는 거친 양상인 경계상(境界相)이 연(緣)이 되어 여섯 가지 거친 생멸하는 양상이 증가해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근본무명(根本無明)의 요인이 사라졌다면 경계의 반연(攀緣)도 역시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의 요인이 사라지면 세 가지 미세한 양상이 사라지고, 반연(攀緣)이 사라지면 여섯 가지 거친 양상이 사라집니다. 이는 상대적인 의존관계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형세입니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12연기의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을 상기해 보면 무명(無明)이 명(明)이 되는 것과 같이 불각(不覺)이 각(覺)이 되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問曰 若心滅者 云何相續 若相續者 云何說究竟滅 答曰 所言滅者 唯心相滅 非心體滅
문왈 약심멸자 운하상속 약상속자 운하설구경멸 답왈 소언멸자 유심상멸 비심체멸

 

[번역] 묻기를, "마음이 사라지면 어떻게 상속할 수 있겠는가? 만일 상속하게 한다면 어떻게 구경에 사라진다고 말하는가?" 답하길, "'사라진다'라고 말한 것은 마음의 양상이 사라질 뿐이지 일심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강의] 여기에서는 문답을 통하여 망상으로 생멸하는 양상은 사라져도 일심의 근본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대체로 질문한 사람의 의도는 망상심을 일심의 자체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멸하는 양상이 사라지면 일심 또한 따라서 사라지는 것인가 하고 의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응염심이 사라진다면 그 자체인 일심도 사라져야 하는데 아직 없어지지 않은 삼세의 불상응염심이 어찌 상속한다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상응염심이 사라진다면 불상응염심이 어떻게 상속할 수 있겠으며, 불상응염심의 자체인 일심은 사라지지 않는다면 근본무명의 미세한 염심도 상속하며 사라지지 않아야만 한다. 그런데 어떻게 끝내 근본무명이 사라진다고 말하는가?"하는 것입니다.


  그 의도를 말해 보면, 근본무명은 일심을 의지하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이 사라지지 않으면 무명의 상속도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고 의심하였습니다. 답변한 의도는 망염(妄染)의 심상(心相)만 사라질 뿐, 일심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일심 자체마저 사라진다면 단멸(斷滅)의 공(空)에 떨어지는데 누구라서 불과(佛果)를 증득하겠습니까? 이는 마치 물이 파도를 여의면 본래 물 그대로인 것과 마찬가지이고, 흙으로 다기를 빚어내었지만 다기를 부수어 흙으로 돌아가는 격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은 본래 청정한데 갑자기 한 생각이 일어나 세 가지 미세한 마음과 여섯 가지 거친 마음의 의식을 만들어 내어 풍랑을 일으킨 격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바탕은 본래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다음에서는 망념의 심상은 사라져도 자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로 밝힙니다.

 

如風依水而有動相 若水滅者 則風相斷絶 無所依止 以水不滅 風相相續 唯風滅故
여풍의수이유동상 약수멸자 즉풍상단절 무소의지 이수불멸 풍상상속 유풍멸고
動相隨滅 非是水滅 無明亦爾 依心體而動 若心體滅 則衆生斷絶無所依止 以體不滅
동상수멸 비시수멸 무명역이 의심체이동 약심체멸 즉중생단절무소의지 이체불멸
心得相續 唯癡滅故 心相隨滅 非心智滅
이득상속 유치멸고 심상수멸 비심지멸

 

[번역] (이를 비유하면) 마치 바람이 물을 의지하여 파도를 움직이는 모습이 있는 것과도 같다. 만일 물이 사라진다면 바람의 모습도 단절하여 의지할 대상이 없겠지만 물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바람의 모습이 상속한다. 단만 바람의 모습만 사라질 뿐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모습도 따라서 사라질지언정 이 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근본무명도 또한 그러하여 일심의 자체를 의지하여 요동하는 것이다. 만일 일심의 자체마저 사라진다면 중생은 단절하여 의지할 대상이 없겠지만, 자체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상속할 수 있다. 다만 어리석음만 사라질 뿐이기 때문에 마음의 양상이 따라서 사라질지언정 마음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다.

 

[해설] 여기에서는 무명의 망심(妄心)이 사라질지언정 일심의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를 들어 밝혔습니다. 즉, 바람은 무명에 비유하였고, 파도로 움직이는 모습은 파랑처럼 생멸하는 일심무명의 양상에 비유하였습니다. 무명의 법을 물로 비유한 것 가운데 "물의 자체가 사라지면 바람의 모습이 단절하여 바람이 의지할 대상이 없다"고 하는 것은 큰 파도와 미세한 파도의 차별이 있는 것은 바람의 세력을 의지하여 파도에 크기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즉, 마치 바람이 물을 의지하여 파도를 움직이는 모습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파도의 자체인 물마저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면 바람의 모습도 단절하여 의지할 대상이 없겠지만 물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바람의 모습이 상속합니다. 상속하는 바람의 모습만 사라지기 때문에 파도로 움직이는 물의 모습도 따라서 사라질지언정 물의 자체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무명도 그러하여 일심의 자체를 의지하여 요동하면서 세 가지 미세한 작용과 여섯 가지 거친 작용의 양상으로 상속하게 됩니다.
  만일 일심 자체마저 사라진다면 중생의 나고 멸하면서 서로 이어지는 것이 단절하여 의지할 대상이 없겠지만, 일심의 자체는 근본무명과 함께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무명의 세 가지 미세한 작용과 여섯 가지 거친 작용으로 상속합니다. 다만 무명(無明)이란 불각(不覺)의 어리석은 양상만 사라지기 때문에 상속하는 일심(一心)의 생멸하는 양상이 따라서 사라질지언정 일심(一心)의 본각(本覺)인 마음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큰바람이 사라지면 큰 파도 즉, 여섯 가지 거친 작용은 사라지나 작은 바람에 의한 희미한 파도인 세 가지 미세한 작용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육추상의 염심이 사라지긴 했으나 삼세의 염심은 오히려 계속됨을 비유하였습니다. 마치 큰 파도는 중지하였으나 그 여파로 희미한 파도가 그래도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비유한 의미는 무명인 법의 의미까지를 두 겹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명의 법을 물의 비유에 합치한 가운데, 만일 일심의 자체마저 사라진다면 중생의 생멸하는 상속의 양상이 단절하여 의지할 대상이 없어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중생이 여래장심을 의지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이 생멸상으로 전변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의 자체가 사라진다면 중생이 단절하여 상속이 의지할 대상이 없게 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의미는 {능가경}에 나오는 이종생주멸(二種生住滅) 가운데서 상생주멸(相生住滅: 육추)은 사라지나 유주생주(流注生住 : 삼세)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십지의 법신보살이 삼세상을 간직한 근본이숙식(里熟識)을 의지하여 마지막 불과(佛果)로 깨달아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신보살의 수행은 이 유주생주(流注生住)를 의지한다고 하겠습니다. 또 선종(禪宗)에서는 이것을 진상유주(眞常流住)라고 명칭합니다.


  이상의 육염심으로 생멸하는 인연의 양상 가운데서 두 단계의 큰 과목이 있는데, 첫째는 염법과 정법의 생멸이며, 두 번째는 염법과 정법이 서로를 의지하고 생멸하는 양상입니다. 앞에서 염법과 정법이 생멸하는 양상의 설명은 이미 끝이 났고, 다음에서는 염법과 정법이 서로 의지하고 돕는 훈습(薰習)을 밝힙니다....나모아미타불

 

 

출처 : 청산백운
글쓴이 : mang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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