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12강
집필자 관음정사주지 법상(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거룩하신 삼보(三寶)와 진여(眞如)에 귀의하옵니다.
이 우주는 허공이 끝이 없기에 세계가 끝이 없고, 세계가 끝이 없기에 중생이 끝이 없고, 중생이 끝이 없기에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작용하는 형태도 또한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경계는 한계 지을 수가 없기에 우리 중생의 분별로는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자기 견해에 빠져 갖가지 오류를 범하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본의를 망각하여 또 다른 새로운 견해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작용은 한계가 없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일체중생을 인도하고 제도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중생의 소질과 능력의 차이로 온갖 방편을 제시해 주어야 하기에 본래의 진리의 몸을 나타내어 각각의 시공을 초월해 구제하시고자 삼신(三身)으로 나투시어 응병여약(應病與藥)을 처방하여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는 우리에게 기쁨과 만족을 줍니다.
우리는 날마다 달마다 기쁨과 행복을 갈구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무지한 과욕과 허영에 찬 사리사욕, 잘못된 견해에 빠져 고집하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치유하는 방식은 이미 부처님께서 본 논에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를 공부하는 것은 기쁨이고 행복의 첩경입니다. 그리고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의 행복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누구나 가져가서 사용하기만 하면 올 한해도 만족스런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지난번에 이어서 삼대(三大) 가운데 용대(用大)의 나머지를 살펴보고 두 가지 삿된 집착에 대치하는 가르침과 발심하여 수행해 나아가는 도정을 살펴보겠습니다.
* 응신(應身)과 보신(報身)
此用有二種 云何爲二 一者依分別事識 凡夫二乘心所見者 名爲應身 以不知轉識現故
차용유이종 운하위이 일자의분별사식 범부이승심소견자 명위응신 이부지전식현고
見從外來 取色分齊 不能盡知故 二者依於業識 謂諸菩薩從初發意 乃至菩薩究竟地心所
견종외래 취색분제 불능진지고 이자의어업식 위제보살종초발의 내지보살구경지심소
見者 名爲報身 身有無量色 色有無量相 相有無量好 所住依果 亦有無量種種莊嚴 隨所
견자 명위보신 신유무량색 색유무량상 상유무량호 소주의과 역유무량종종장엄 수소
示現 卽無有邊 不可窮盡 離分齊相 隨其所應 常能住持 不毁不失 如是功德 皆因諸波
시현 즉무유변 불가궁진 이분제용 수기소응 상능주지 부단불실 여시공덕 개인제바
羅蜜等無漏行熏 不思議熏之所成就 具足無量樂相 故說爲報 又爲凡夫所見者 是其 色
라밀등무루행훈 부사의훈지소성취 구족무량락상 고설위보 우위범부소견자 시기추색
隨於六道 各見不同 種種異類 非受樂相 故說爲應
수어육도 각견부동 종종이류 비수락상 고설위응
[번역] 이 작용이 두 가지가 있는데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분별사식을 의지하여 범부와 이승(二乘)의 마음에 보이는 것을 이름하여 응신(應身)이라 한다. 전식(轉識)의 나타남임을 모르기 때문에 밖에서 온 것으로 보고 색의 분제(分齊, 색상의 한계)를 취하지만 능히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업식(業識)을 의지한 것으로 이른바 모든 보살이 처음 뜻을 발함으로부터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보이는 것을 이름하여 보신(報身)이라고 한다. 몸에는 한량없는 현색(顯色)이 있고, 현색에는 한량없는 형상이 있으며, 형상에도 한량없는 상호(相好)가 있다. 머무는 의보(依報)의 과보(果報)도 또한 한량없는 갖가지 장엄이 있다. 나타난 것을 따라서 곧 끝이 없어 궁극에 다할 수가 없고 한정된 모습을 여의었기에 그 상응함을 따라서 항상 주지(住持)하면서 훼손하지 않고 퇴실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공덕은 다 모든 바라밀(波羅蜜) 등의 무루(無漏)한 수행의 훈습(薰習)과 불가사의한 훈습으로 인해서 성취한 것으로 한량없는 안락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에 설하여 보신(報身)이라고 한다. 또 범부에게 보여지는 이것은 그 거친 현색으로 육도(六道)를 따라서 각각 보는 것이 동일하지 않아 갖가지 다른 무리가 안락한 모습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설하여 응신(應身)이라고 한다.
[해설] 앞에서 말한 용대(用大)는 부처님의 입장에서 논한 것이고, 여기서는 중생의 입장에서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을) 둘로 나누어 논하였습니다. 먼저 본래 법신(法身)의 작용은 오직 식(識)일뿐임을 모르고서 밖의 육진(六塵)이 실제로 있다고 헤아리는 분별사식을 의지하여 범부와 이승(二乘)의 사람이 마음으로 보는 법신의 작용이 있는데, 이를 분별사식의 분별로 보는 응화신(應化身)이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보신의 미세한 모습은 전식(轉識)에서 나타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 밖의 육진에서 온 것으로 보고 나타난 색깔의 한정된 경계를 취합니다. 그 이유는 몸과 마음은 부분적인 한계가 없다는 것을 끝까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십해(十解) 이후로 법신보살이, 심식(心識)일 뿐 외진의 색상(色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업식(業識)에 의지하여 보는 불신의 작용입니다. 이는 모든 법신보살들이 처음 뜻을 발한 십해(十解)로부터 보살의 구경지인 법운지에 이르기까지 허망한 마음으로 보는 불신의 모습을 보신(報身)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물질과 불이(不二)인 법신(法身)은 한량없는 색신(色身)이 있고, 법신(法身)을 의지한 색신은 한량없는 공덕상(功德相)을 갖추었으며, 그러한 공덕상엔 한량없는 32상(相)과 80종호(種好)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正報)의 삶의 주체인 불신(佛身)이 안주하여 의지하는 과보토(果報土)의 의보(依報)인 삶의 환경도 한량없는 갖가지 공덕으로 장엄(莊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살을 따라 나타내는 불신이 바로 끝없어 끝까지 다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이 보살은 색(色)·심(心)이 나뉘는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업행(業行)을 따라서 불신이 감응하여 항상 머물면서 삼재(三災, 불의 재난·물의 재난·바람의 재난에 초선천 또는 제삼선천이 무너지는 것)에도 무너지지 않고 유실되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은 정보(正報)와 의보(依報)의 공덕상은 다 온갖 육바라밀 등의 번뇌가 없는 청정한 진리를 수행한 훈습(熏習)과 불가사의한 본래 깨달은 내훈(內熏)으로 성취하여 한량없는 안락한 공덕의 모습을 빠짐없이 만족하였기에 보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범부가 보는 불신은 거친 물질의 현상으로 육도(六道)의 중생이 각기 보는 것이 같지 않아서 그것을 따라서 갖가지 다른 종류의 중생이 안락함을 받지 못하는 불신의 모습으로 감응하기 때문에 이를 응신(應身)이라고 하였습니다.
* 다시 밝히는 응신(應身)과 보신(報身)
復次 初發意菩薩等所見者 以深信眞如法故 少分而見 知彼色相莊嚴等事 無來無去離於
부차 초발의보살등소견자 이심신진여법고 소분이견 지피색상장엄등사 무래무거리어
分齊 唯依心現不離眞如 然此菩薩猶自分別 以未入法身位故 若得淨心所見微妙其用轉
분제 유의심현불리진여 연차보살유자분별 이미입법신위고 약득정심소견미묘기용전
勝 乃至菩薩地盡見之究竟 若離業識則無見相 以諸佛法身 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
승 내지보살지진견지구경 약리업식즉무견상 이제불법신 무유피차색상질상견고
[번역] 다시 다음에 초발의(初發意)보살 등이 보는 것은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약간의 분야를 보고서 그 색상과 장엄 등의 현상이 옴도 없고, 감도 없어, 분제(分齊)를 여의고 오직 마음을 의지해서 나타났을 뿐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은 오히려 스스로 분별할 뿐이지 아직은 법신의 계위엔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정심지(淨心地)를 체득하여 보는 미묘한 그 작용은 더욱 수승해지며, 나아가 보살지가 다하여 보는 것이 구경이다. 만약 업식(業識)을 여의기만 한다면 볼 만한 모습이란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이런 저런 현색의 모습으로 번갈아 드는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 다시 보살이 수행의 경지에 따라 부분적으로 불신(佛身)을 보는 단계를 밝히고 있습니다. 처음 마음을 발한 이후 삼현(三賢)보살 등이 보는 불신은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약간의 수행 분야에서 보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 색상과 장엄 등의 현상이 도솔천으로부터 정반왕궁으로 강탄해 오심도 없고, 구시라성의 사라쌍수에서 열반에 들어가심도 없어, 물질과 마음의 한계를 여의고 마음의 분별을 의지해서 나타났을 뿐 진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추리하고 관찰하여 안다고 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삼현보살은 그래도 분별사식으로 분별할 뿐, 아직은 진여법신보살의 지위엔 깨달아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정심지(淨心地)를 체득한 초지의 법신보살인 경우는 보이는 불신이 미묘하여 불신의 작용은 더욱 수승해지며, 보살지가 다한 십지만심(十地滿心)의 법운지(法雲地)에 이르면 불신의 근원을 끝까지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전상(轉相)과 현상(現相)이 의지하는 근본무명의 업식을 여의기만 한다면 볼 만한 보신의 모습이란 애초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불의 법신은 진여가 평등하여 이런 저런 색상의 모습으로 교차하면서 보여지는 모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불신을 얻는 순서로써 현상 즉 실상이고 무명이 곧 진여임을 밝게 알아 불가사의한 경지에 들게 되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問曰 若諸佛法身離於色相者 云何能現色相 答曰 卽此法身是色體故 能現於色 所謂從
문왈 약제불법신리어색상자 운하능현색상 답왈 즉차법신시색체고 능현어색 소위종
本已來 色心不二 以色性卽智故色體無形 說名智身 以智性卽色故 說名法身遍一切處
본이래 색심불이 이색성즉지고색체무형 설명지신 이지성즉색고 설명법신변일체처
所現之色無有分齊 隨心能示十方世界 無量菩薩 無量報身 無量莊嚴 各各差別 皆無分
소현지색무유분제 수심능시시방세계 무량보살 무량보신 무량장엄 각각차별 개무분
齊 而不相妨 此非心識分別能知 以眞如自在用義故
제 이불상방 차비심식분별능지 이진여자재용의고
[번역] <묻는다> 만약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색상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색상을 나타낼 수 있는가? <답한다> 이 법신은 곧 색상자체이기 때문에 색상을 나타낼 수 있다. 이른바 원래부터 색(色)과 심(心)이 둘이 아니다. 왜냐하면 색의 자성이 곧 지혜이기 때문에 색상의 본체엔 형상이 없기에 지신(智身)이라고 설명한다. 지성(智性)이 곧 색상이기 때문에 법신은 일체의 처소에 두루 하다고 설명한다. 나타난 색상도 분제(分齊)가 없기에 마음을 따라서 능히 시방세계의 한량없는 보살과 한량없는 보신과 한량없는 국토의 장엄을 나타낼 수 있다. 각각의 차별이 다 분제(分齊)가 없어서 서로가 방해하지 않는다. 이는 심식(心識)의 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진여(眞如)의 자재(自在)한 작용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문답을 통해 다시 진여법신의 색심불이(色心不二)의 궁극적인 양태와 관계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즉, 법신진여(法身眞如)가 색상을 여의면 모습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묻고 답한 것입니다. 묻길,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색상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보신(報身)과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의 색상을 나타낼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이에 답하길, "바로 이 법신이 색상자체이기 때문에 색상을 나타낼 수 있다"고 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색법(色法)과 심법(心法)이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색법의 자성이 법신의 본각지(本覺智)에 서로 맞붙어 있어서 색상의 자체인 법신의 본각지엔 보신과 화신인 색상의 형상이 없기 때문에 이를 지혜의 몸이라 설명하였습니다.
또 지성(智性)이 색상에 서로 맞붙어있기 때문에 법신은 그 작용인 보신과 화신의 색상이 일체의 모든 곳에 두루 가득할 때 마치 물이 널리 가득하게 모든 파도 가운데 있는 것처럼 일체의 처소에 두루 하다고 하였습니다. 법신인 진심이 색상의 차별에 걸림이 없이 두루 충만하므로 그 진심의 작용으로 나타난 색상도 역시 원융무애하여 색상과 진심이 상대적으로 나뉘는 분야의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마음을 따라서 시방세계의 한량없는 보살과 한량없는 보살이 감득하는 한량없는 보신과 한량없는 국토의 장엄을 나타내는 이 모든 색상이 각각의 차별이 있지만 모두가 상대적으로 나뉘는 분야의 한계가 없어 서로가 방해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망상의 심식(心識)으로 분별해서 알 수 있는 경지는 아니고 일심진여가 자유자재하게 차별의 색상으로 작용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대승의 정의를 명확하게 제시한 가운데 큰 문단의 과목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처음엔 생멸의 동요와 진여의 고요함이 한결같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어 고요한 일심진여에서 생멸의 동요를 일으켜, 여기 진여생멸의 두 문에 이르러서 그 분별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다음 두 번째는 생멸의 색상을 하나로 화합하여 실제의 진여로 들어가 동(動)과 정(定)이 둘이 아님을 나타내어 논합니다.
* 생멸문(生滅門)으로부터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감
復次顯示從生滅門 卽入眞如門 所謂推求五陰 色之與心 六塵境界畢竟無念 以心無形相
부차현시종생멸문 즉입진여문 소위추구오음 색지여심 육진경계필경무념 이심무형상
十方求之 終不可得 如人迷故謂東爲西 方實不轉 衆生亦爾 無明迷故謂心爲念 心實不
시방구지 종불가득 여인미고위동위서 방실불전 중생역이 무명이고위심위념 심실부
動 若能觀察 知心無念 卽得隨順入眞如門故
동 약능관찰 지심무념 즉득수순입진여문고
[번역] 다시 다음에 생멸문으로부터 곧 진여문에 들어감을 나타낸다. 이른바 오음(五陰)을 추구해 보면 색(色) 그것은 심(心)과 더불어 존재한다. 육진의 경계는 필경에 무념(無念)이고, 마음도 형상이 없다. 시방세계에서 그것을 추구해 보지만 끝내 얻을 수 없다. 마치 사람이 미혹했기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고 말하나 방향은 실제로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무명의 미혹 때문에 마음을 일러 염(念)이라고 하나 마음은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다. 만일 능히 관찰하여 마음이 무념(無念)인 줄 알면 곧 수순하여 진여문에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논해온 이론의 궁극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생멸엔 본래 생멸이 없는 진여임을 관찰하게 하여 생멸문로부터 진여문으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먼저 생멸문에서 그 실제를 명확하게 제시하여 바로 불생불멸의 진여문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이른바 중생을 이루고 있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추구해 보았더니 색법은 심법과 더불어 존재하는데,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으로 구성된 색법인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 등의 경계는 필경에 자체가 무념(無念)이고, 심법이란 심식(心識)을 떠나 밖으로 분별할 만한 허망한 생각의 모습이란 애초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시방세계에서 그것을 구해 보았으나 끝내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비유하여 마치 사람이 미혹했기 때문에 동쪽을 두고 서쪽이라고 말하지만 방향은 실제로 미혹을 따라서 전변하지 않는 것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에 미혹했기 때문에 진심을 생각이라고 말하나 움직이는 생각을 추구해 보았더니 허망한 생각이 이미 사라진 과거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 잠시도 머묾이 없는 현재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참 마음은 머묾이 없기 때문에 허망한 생각의 양태로 일어나지 않기에 실제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만일 이를 수행방편으로 관찰해보면 진심엔 요동하는 허망한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곧 진심을 수순하여 관찰하여 무념(無念)인 줄 알면 진여문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무념(無念)이 무심(無心)이고 진심(眞心)·진인(眞人)·원각(圓覺)입니다.
제2항 대치사집(對治邪執)
* 두 가지 사된 집착
對治邪執者 一切邪執皆依我見 若離於我則無邪執 是我見有二種 云何爲二 一者人我見
대치사집자 일체사집개의아견 약리어아즉무사집 시아견유이종 운하위이 일자인아견
二者法我見
이자법아견
[번역] 삿된 집착을 대치하는 것은 일체 삿된 집착 모두가 아견(我見)을 의지한다. 만일 아견을 여읜다면 삿된 집착이 없을 것이다. 이 아견에 두 가지가 있는데,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인아견(人我見)이요, 둘째는 법아견(法我見)이다.
[해설] 여기서는 삿된 집착인 이집(二執) 또는 이견(二見)의 대치를 총괄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삿된 집착을 대치하는 것은 일체의 삿된 집착이 모두가 아견(我見)을 의지하기에 만일 그렇다면 아견을 여읜다면 일체의 삿된 집착도 따라서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견은 두 가지인데, 첫째 인아견(人我見)이란 오온(五蘊)에 실제로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아(我)가 있다고 헤아린 아집(我執)입니다. 이는 불법 안에서 대승의 가르침을 최초로 배우는 사람이 그 가르침을 미혹하여 허망한 마음으로 집착하여, 말을 따라 그 의미에 집착하는 자이지 외도들이 일으키는 견해는 아닙니다. 다음에 법아견(法我見)은 오온 등 일체법에 각자의 자체적인 자성이 있다고 헤아리는 것인데, 이는 바로 이승(二乘)의 사람들이 일으키는 견해로 법집(法執)이라 하겠습니다. 먼저 다섯 가지 인아견(人我見)입니다.
1. 다섯 가지 아견(我見)
人我見者 依諸凡夫 說有五種 云何爲五 一者聞修多羅說 如來法身畢竟寂寞 猶如虛空
인아견자 의제범부 설유오종 운하위오 일자문수다라설 여래법신필경적막 유여허공
以不知爲破著故 卽謂虛空是如來性 云何對治 明虛空相是其妄法 體無不實 以對色故
이부지위파착고 즉위허공시여래성 운하대치 명허공상시기망법 체무불실 이대색고
有 是可見相令心生滅 以一切色法本來是心 實無外色 若無色者 則無虛空之相 所謂一
유 시가상견령심생멸 이일체색법본래시심 실무외색 약무색자 즉무허공지상 소위일
切境界唯心 妄起故有 若心離於妄動 則一切境界滅 唯一眞心無所不遍 此謂如來廣大性
체경계유심 망기고유 약심리어망동 즉일체경계멸 유일진심무소불변차위여래광대성
智究竟之義 非如虛空相故
지구경지의 비여허공상고
[번역] 인아견(人我見)이란 모든 범부들을 의지하여 다섯 가지가 있다고 설한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 수다라(경전)에서, "여래의 법신은 궁극적으로 적막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고 설함을 듣고 집착을 파하기 위함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곧 허공이 여래의 성품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다스려 대치해야 하는가? 허공의 모습 또한 허망한 것임을 밝혀야 한다. 자체가 없는 것으로 실제가 아니다. 색에 대치하기 때문에 있다고 한 것으로, 이것은 볼 수 있는 모습이면서 마음으로 하여금 나고 멸하게 한다. 일체 색법은 본래 마음이기 때문에 실제로 밖의 색은 없는 것이다. 만약 색이 없는 것이라면 곧 허공의 모습도 없는 것이다. 이른바 일체 경계가 오직 마음일 뿐인데 허망하게 일어나 짐짓 존재한다. 만약 마음이 허망하게 준동함을 여의면 곧 일체 경계도 소멸하여 오직 하나의 참된 마음만이 두루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광대한 성품과 지혜의 궁극적 의미가 허공의 모습과 같지 않다고 하는 이유이다.
[해설] 여기서는 다섯 가지 인아견(人我見) 가운데 첫 번째를 논하고 있습니다. 경전에서, "여래의 법신(法身)은 필경 번뇌가 적막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라고 하는 것을 듣고, 중생은 법신이란 색상도 형상도 없는 공무(空無)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 허공과 같다고 말씀하신 뜻은 색상과 형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이 그 근본의도를 알지 못하고 이 말씀을 들으면 여기에 집착하여 허공이 바로 여래의 성품이라고 집착합니다. 그래서 이 집착을 대치함에 텅 비어 걸림이 없는 허공의 모습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의 허망한 망상으로 진여자체엔 실제가 아닌 허망한 존재의 허공과 같은 모습이란 애초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연하여 일체 색법은 본래 마음이고 실제로 마음 밖에 모든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색이 없는 것이라면 곧 허공의 모습도 없어서 일체 경계가 오직 마음일 뿐인데 허망하게 일어나 짐짓 존재하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마음이 허망하게 준동하지 않으면 곧 일체 경계도 모두 사라져서 오직 하나의 진실한 마음만이 우주법계에 충만하여 두루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여래의 광대한 성지(性智)인 구경의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망정으로 존재하는 허망한 법으로 있는 허공의 모습과는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二者聞修多羅說 世間諸法畢竟體空 乃至涅槃眞如之法 亦畢竟空 從本已來 自空離一切
이자문수다라설 세간제법필경체공 내지열반진여지법 역필경공 종본이래 자공리일체
相 以不知爲破著故 卽謂眞如涅槃之性 唯是其空 云何對治 明眞如法身自體不空 具足
상 이부지위파착고 즉위진여열반지성 유시기공 운하대치 명진여법신자체불공 구족
無量性功德故
무량성공덕고
[번역] 두 번째는 수다라에서 설한, "세간의 모든 법은 필경에 자체가 공적하며, 나아가 열반인 진여의 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필경에 공적하다. 본래부터 스스로 공적하여 일체의 색상을 여의었다"고 함을 듣고, 그것은 집착을 타파하기 위함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진여열반의 성덕은 오직 공적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대치해야만 하겠는가? 진여의 법신자체가 공적하지 않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한량없는 본성의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진여열반을 단멸(斷滅)의 공으로 여기는 집착을 타파한 것입니다. 즉, 세간과 출세간법은 거짓 명칭일 뿐이고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은 정말로 있다고 헤아리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내 그 자체인 진여의 법신자체 모두가 공적하다고 말하여 그들의 변계를 타파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자들은 집착을 타파한 말인 줄 모릅니다. 이윽고 그 말에 집착하여 진여열반은 단멸의 공이라고 허망하게 헤아립니다. 이를 대치하는 방법은 진여법신의 자체는 여실하게 공적하지 않다는 것을 밝혀 주어야만 단멸(斷滅)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루(無漏)의 본성공덕을 빠짐없이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문장에서는 허공을 진여법신이라고 잘못 집착하였고, 여기에서는 영원히 생명이 끊어진 법신은 단멸(斷滅)한 공이라고 집착한 것입니다. 이 모두는 공견(空見)에 떨어진 자들입니다.
三者聞修多羅說 如來之藏無有增減 體備一切功德之法 以不解故 卽謂如來之藏 有色心
삼자문수다라설 여래지장무유증감 체비일체공덕지법 이불해고 즉위여래지장 유색심
法自相差別 云何對治 以唯依眞如義說故 因生滅染義 示現說差別故
법자상차별 운하대치 이유의진여의설고 인생멸염의 시현설차별고
[번역] 세 번째 수다라에서 말씀한, "여래의 장은 증감(增減)이 없어 체(體)에 일체공덕의 법을 구비하였다"는 것을 들으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곧 여래의 장엔 색법과 심법이 있어 자체의 모습을 차별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오직 진여의 의미에만 의지하여 설명하였기 때문에 생멸(生滅)하는 오염의 의미로 인해 시현(示現)하여 차별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여래장의 본성이 색법(色法)이 심법(心法)과 동일하다고 생각한 잘못된 집착을 타파한 것입니다. 여래장의 본성자체엔 모든 공덕의 미묘한 덕상을 갖추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자체에서 일으킨 공덕이므로 그것은 본래 색법과 심법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이내 여래장은 색법과 심법을 차별하는 것이 동일하다고 잘못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장의 진제(眞諦)를 망법인 색심의 차별법과 동일하다고 잘못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대치한 법으로 일체법은 본래 차별이 없고, 오직 진여가 생멸의 인연을 의지하여 일체법이 있으므로 법마다 모두 진여(眞如)여서, 법마다 유일한 진여일 뿐임을 말한 것입니다. 일체법이 유일한 진여일 뿐이라면 색법과 심법이 둘이 아니어서 원래 차별이 없습니다. 단지 생멸하는 모습의 오염된 의미로 인해서 모든 진여의 공덕상의 차별을 제시해서 나타냈을 뿐입니다. 이는 진여가 망정으로 인해서 생멸상의 오염으로 뒤집힌 것을 상대하여 진여공덕상의 차별이 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로 진여자성이야 어찌 생멸상인 색법과 심법의 차별과 동일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상은 여래장이 색법과 심법이 동일하다고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을 타파한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중도(中道)의 실상을 나타낸 설명이라 하겠습니다.
四者聞修多羅說 一切世間生死染法 皆依如來藏 而有一切諸法不離眞如 以不解故 謂如
사자문수다라설 일체세간생사염법 개의여래장 이유일체제법불리진여 이불해고 위여
來藏 自體具有 一切世間生死等法 云何對治 以如來藏 從本已來 唯有過恒沙等諸淨功
래장 자체구유 일체세간생사등법 운하대치 이여래장 종본이래 유유과항사등제정공
德 不離不斷不異眞如義故 以過恒沙等煩惱染法 唯是妄有 性自本無 從無始世來 未曾
덕 불리부단불이진여의고 이과항사등번뇌염법 유시망유 성자본무 종무시세래 미증
與如來藏相應故 若如來藏體有妄法 而使證會永息妄者 則無有是處故
여여래장상응고 약여래장체유망법 이사증회영식망자 즉무유시처고
[번역] 네 번째는 수다라에서, "일체 세간의 생사하는 염법이 모두 여래장을 의지해서 일체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고 있다"는 말씀을 듣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른바 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여래를 갈무리한 것으로써 본래부터 오직 항하사 등을 능가하는 모든 청정한 공덕이 있을 뿐이다. 여의지도 않았고 단절하지도 않아 진여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항하사 등을 능가하는 번뇌의 염법은 오직 허망한 존재일 뿐 본성엔 본래부터 없는 것이어서 시작이 없는 세월로부터 아직 일찍이 여래장과 더불어 상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여래장 자체에 허망한 법이 있다면, 하여금 증회(證會)함에 영원히 망상을 쉬게 하는 것이라면 옳다고 긍정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여래장에 생사염법이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집착을 타파한 것입니다. 경전에 일체 세간의 나고 죽는 윤회의 오염된 존재가 모두 여래장을 의지하여 있으며 일체 모든 염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는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빠짐없이 갖추어 있다고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대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실(如實)한 불공(不空)의 여래장의 본성은 본래부터 지금까지 항하사를 지나도록 물들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지만 인연을 따라서 물들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장은 본래 모든 공덕을 여의지도 않았고 단절하지도 않아 진여와 다름없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며, 항하사를 지나는 번뇌의 염법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의 허망으로 있는 유정(情有)일 뿐, 여래장의 본성엔 본래부터 없는 것이기에, 시작이 없는 세월로부터 아직까지 여래장과 서로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질의 이치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래장 자체에 정말로 허망한 오염된 법이 있다면 진여를 증득하여 망상을 쉬게 한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五者聞修多羅說 依如來藏故有生死 依如來藏故得涅槃 以不解故 謂衆生有始 以見始故
오자문수다라설 의여래장고유생사 의여래장고득열반 이불해고 위중생유시 이견시고
復謂如來所得涅槃 有其終盡還作衆生 云何對治 以如來藏無前際故 無明之相亦無有始
부위여래소득열반 유기종진환작중생 운하대치 이여래장무전제고 무명지상역무유시
若說三界外 更有衆生始起者 卽是外道經說 又如來藏無有後際 諸佛所得涅槃與之相應
약설삼계외 갱유중생시기자 즉시외도경설 우여래장무유후제 제불소득열반여지상응
則無後際故
즉무후제고
[번역] 다섯째는 수다라에서, "여래장을 의지하기 때문에 생사법이 있고, 여래장을 의지하기 때문에 열반을 체득한다"는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생은 시작이 있다"고 말하고, 시작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다시 "여래가 체득한 열반은 그것이 끝내 다하면 도리어 중생이 된다"고 말한다.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여래장은 시간적으로 전제(前際)가 없기 때문에 무명의 현상도 역시 시작이 없다. 만일 삼계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으로 일어난 자가 있다고 말한다면 바로 이것은 외도의 경전에서 말한 것이 된다. 또 여래장은 후제(後際)가 없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 체득하신 열반도 그와 더불어 상응하면 후제가 없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생사의 시작과 열반의 끝이 있다고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고 있습니다. 경전에서 여래장을 의지하기 때문에 소과 소생이 있고 여래장을 의지하기 때문에 열반을 체득한다는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명의 시작과 원인이 여래장이 있기에 중생이 나고 죽는 고통스런 윤회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진여를 의지하여 허망한 생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진여가 먼저이고 허망한 생사가 뒤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생사법은 시작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사의 시작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다시 여래가 얻은 열반은 그것이 끝내 다하면 다시 중생이 된다고 잘못 안다는 것입니다. 이를 대치하는 방법으로 여래장은 시간적으로 전제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의지하여 일어난 생사의 무명도 역시 시작이 없다고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삼계 밖에 중생이 있어서 생사를 일으킨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외도의 견해이지 불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또 여래장은 후제가 없기에 모든 부처님께서 체득하신 열반도 그와 함께 상응하면 후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열반이 다할 때가 있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잘못된 아견(我見)은 범부가 불법의 말씀을 듣고 허망한 육식으로 분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말에 대한 집착을 떠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하지 못하고 허망한 마음으로 언설(言說)에 집착하여 이러한 변계(遍計)를 잘못 일으켰을 뿐입니다. 다음은 법아견(法我見)에 대해서입니다.
2. 법아견(法我見)
法我見者 依二乘鈍根故 如來但爲說人無我 以說不究竟 見有五陰生滅之法 怖畏生死
법아견자 의이승둔근고 여래단위설인무아 이설불구경 견유오음생멸지법 포외생사
妄取涅槃 云何對治 以五陰法 自性不生 則無有滅 本來涅槃故
망취열반 운하대치 이오음법 자성불생 즉무유멸 본래열반고
[번역] 법아견(法我見)이란 이승의 둔근을 의지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단지 인무아(人無我)만을 설하셨는데 설한 것은 구경이 아니다. 오음이 생멸하는 법이 있다고 보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열반을 허망하게 취한다.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오음의 존재로서 자성이 불생(不生)이라면 소멸도 없어서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이승(二乘)의 둔근(鈍根)에 대하여 아공(我空)의 도리인 인무아(人無我)를 설하여 실증을 낼 만한 생사가 있고, 그에 반대되는 증득할 만한 열반도 있다는 말씀을 듣고 생사법과 열반법이 따로 있다고 집착하는 법아견(法我見)을 타파한 것입니다. 여래께서는 성문과 연각에게 생사의 오음이 무상(無常)하다는 것만을 설하고 생사가 원래 자성이 없으므로 그것이 바로 진상(眞常)의 열반임을 설하진 않았습니다. 이것이 아함경에 설해진 핵심주제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겐 생사가 바로 열반인 구경의 법무아(法無我)인 법공(法空)을 말씀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허망하게 이러한 법아견을 일으킨 것입니다. 생사과 열반이 아(我)가 망정으로 헤아릴 대상의 법(法)이 되기 때문에 법아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에선 대치하는 법을 밝힘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집착을 여의게 하였고, 다음에선 이 두 집착을 끝내 여읨을 밝힙니다.
* 구경에 집착 여읨을 밝힘
復次究竟離妄執者 當知染法淨法皆悉相待 無有自相可說 是故一切法 從本已來 非色非
부차구경리망집자 당지염법정법개실상대 무유자상가설 시고일체법 종본이래 비색비
心 非智非識 非有非無 畢竟不可說相 而有言說者 當知如來善巧方便 假以言說引導衆
심 비지비식 비유비무 필경불가설상 이유언설자 당지여래선교방편 가이언설인도중
生 其旨趣者 皆爲離念歸於眞如 以念一切法 令心生滅 不入實智故
생 기지취자 개위이념귀어진여 이념일체법 영심생멸 불입실지고
[번역] 다시 다음에 구경에 허망한 집착을 여읜다는 것은 마땅히 알라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은 모두 다 상대(相待)하는 것으로 자상(自相)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색법(色法)도 아니고 심법(心法)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고 업식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필경에 설명한 만한 양태가 아니다. 그런데도 언어의 설명이 있게 된 것은 마땅히 알라 여래께서 선교방편(善敎方便)인 언어의 설명을 빌림으로써 중생을 인도한 것이다. 그 종지의 취지란 모두가 허망한 생각을 여의고 진여로 귀결시키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법을 생각함으로써 마음이 생멸(生滅)하여 진실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삿된 집착을 대치하여 구경에 언어의 집착을 잊고 결국 무념(無念)으로 귀결하여 진여에 계합하는 이치를 밝혀 한결같은 언설의 특성을 버리도록 하였습니다. 구경에 허망한 집착을 여읜다는 것은 생사의 염법(染法)과 열반의 정법(淨法)이 모두 서로 기대하는 의존관계이므로 설명할 만한 자체의 특성이란 애초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색법(色法)도 아니고 심법(心法)도 아니며, 심법은 본각(本覺)의 지혜도 아니고 무명의 업식(業識)도 아니며, 색법은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지만 참으로 없는 것도 아니어서 필경에 설명한 만한 고유한 독특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설명이 있게 된 것은 여래께서 훌륭한 가르침의 방편인 언어의 설명을 빌림으로써 중생을 인도한 것이므로 그 의도가 언어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의 종지(宗旨)와 그 종지로 나아가는 것은 모두가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의 삿된 집착의 허망한 관념을 여의고 진여에로 귀결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 생사와 열반의 법을 허망한 관념으로 잘못 집착하면 일심이 생멸하여 진여의 진실한 지혜에 깨달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삿된 집착에 대한 대치는 끝났고, 다음에 발심(發心)하여 최상의 완전한 깨달을 얻어 열반에 안주하는 곳으로 향해 가는 도(道)의 모습을 밝힙니다.
제3항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
본 항은 해석분(解釋分) 가운데 마지막 부분을 이루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을 설명한 것으로 첫째 현시정의(顯示正義)와 둘째 대치사집(對治邪執)을 전장에서 교리를 중심으로 논하였습니다. 이 항에서는 실천을 주로 하는 세 가지 발심하여 불도로 향해 나아가는 수행의 형태에 대해서입니다. 먼저 총괄하여 설합니다.
分別發趣道相者 謂一切諸佛所證之道 一切菩薩發心修行趣向義故 略說發心 有三種 云
분별발취도상자 위일체제불소증지도 일체보살발심수행취향의고 약설발심 유삼종 운
何爲三 一者信成就發心 二者解行發心 三者證發心
하위삼 일자신성취발심 이자해행발심 삼자증발심
[번역]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란 이른바 일체 모든 부처님이 증득하신 도(道)에로 일체보살이 발심(發心)하고 수행하여 취향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간략히 발심을 말하자면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을 셋이라 하는가? 첫째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요, 둘째는 해행발심(解行發心)이요, 셋째는 증발심(證發心)이다.
[해설]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란 뜻을 일으켜 발심하고 수행하여 모든 부처님께서 체득하신 최상의 도에 나아가는 행상(行相)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을 간략히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해행발심(解行發心)·증발심(證發心)이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신성취발심이란 신심을 성취시키고 결심을 발하는 내용의 발심이고, 다음에 해행발신은 이해와 실천을 확고하게 하여 가행정진하고자 하는 발심이며, 끝으로 증발심은 법신을 증득하고 진심을 드러내는 발심입니다. 즉, 믿음·이해·수행·증득하는 과정에서 발심하여 완전한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을 종합한 것입니다.
이를 좀더 살펴보면, 보리심(菩提心)을 발한 것에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십신(十信)을 성취하여 십주(十住)의 발심주(發心住)에서 삼지(三智)와 오안(五眼)이 일시에 발기한 신성취발심입니다. 둘째는 십행위(十行位) 가운데에서 법공진여(法空眞如)를 이해하고 십바라밀(十波羅密)을 순차적으로 실천합니다. 그 십행이 순수하게 익숙해지면 회향심을 발기하여 십회향위(十廻向位)에 들어가는 해행(解行)발심입니다. 셋째는 초지부터 십지까지 법신보살과 등각(等覺)·묘각(妙覺)이 지니는 마음가짐의 증(證)발심입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발심은 52계위(階位)를 수행하는 점차를 총괄하지만 그 수행의 정도가 동일하지 않아서 신성취발심과 해행발심은 상사발심(相似發心)이라 하고, 증발심은 진실발심(眞實發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발심에 있어서 이전까지는 한결같이 진여와 생멸의 두 문을 밝혀 이 두 문을 진여의 일심(一心)에 귀결시켰습니다.
1.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信成就發心者 依何等人 修何等行 得信成就 堪能發心 所謂依不定聚衆生 有熏習善根
신성취발심자 의하등인 수하등행 득신성취 감능발심 소위의부정취중생 유훈습선근
力故 信業果報 能起十善 厭生死苦 欲求無上菩提 得値諸佛 親承供養 修行信心 經一
력고 신업과보 능기십선 염생사고 욕구무상보리 득치제불 친승공양 수행신심 경일
萬劫 信心成就故 諸佛菩薩敎令發心 或以大悲故 能自發心 或因正法欲滅 以護法因緣
만겁 신심성취고 제불보살교령발심 혹이대비고 능자발심 혹인정법욕멸 이호법인연
能自發心 如是信心 成就得發心者 入正定聚 畢竟不退 名住如來種中 正因相應 若有衆
능자발심 여시신심 성취득발심자 입정정취 필경불퇴 명주여래종중 정인상응 약우중
生 善根微少 久遠已來 煩惱深厚 雖値於佛 亦得供養 然起人天種子 或起二乘種子 設
생 선근미소 구원이래 번뇌심후 수치어불 역득공양 연기인천종자 혹기이승종자 설
有求大乘者 根則不定 若進若退 或有供養諸佛 未經一萬劫 於中遇緣 亦有發心 所謂見
유구대승자 근즉부정 약진약퇴 혹유공양제불 미경일만겁 어중우연 역유발심 소위견
佛色相 而發其心 或因供養衆僧 而發其心 或因二乘之人敎令發心 或學他發心 如是等
불색상 이발기심 혹인공양중승 이발기심 혹인이승지인교령발심 혹학다발심 여시등
發心 悉皆不定 遇惡因緣 或便退失 墮二乘地
발심 실개부정 우악인연 혹변퇴실 타이승지
[번역] 신성취발심이란 어떠한 사람들을 의지하여 어떻게 수행을 닦아야만 믿음을 성취할 수 있고 능히 발심을 감당할 수 있는가? 이른바 부정취(不定聚)의 중생이 의지하여 훈습한 선근의 힘이 있기 때문에 업과 과보를 믿고 능히 십선(十善)을 일으켜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고자 한다. 모든 부처님을 만나 몸소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信心)을 수행하여 일만 겁을 지나서 신심을 성취하기 때문에 제불보살이 가르쳐서 발심하도록 한다. 혹은 대비심 때문에 능히 스스로 발심하기도 하고, 혹은 정법이 소멸하려 함으로 인해서 정법을 보호하려는 인연 때문에 능히 스스로 발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신심을 성취하여 발심한 사람은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 필경에 물러나지 않는다. 이름하여 여래종(如來種) 가운데 안주함이라고 하는데, 정인(正因)과 서로 호응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중생이 선근이 미소하여 오래고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번뇌가 깊고 두텁다면, 비록 부처님을 만나고 또 공양을 올릴 수 있지만, 그러나 인간·천상에 태어날 종자를 일으키며, 혹은 이승(二乘)의 종자를 일으키기도 한다. 설사 대승을 구하는 자가 있다 해도 선근이 곧 일정하지 않아 혹 정진하기도 하고 혹 퇴실하기도 한다. 혹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해도 아직 일만 겁을 나지 못한 중간에 외연(外緣)을 만나면 또한 발심하기도 한다. 이른바 부처님의 색상을 보고 그 마음을 발하기도 하며, 혹은 여러 스님들께 공양함으로 인해서 그 마음을 발하기도 하며, 혹은 이승인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마음을 발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사람에게 배워서 마음을 발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등의 발심은 모두가 다 일정하지 않아 악한 인연을 만나면 혹 문득 퇴실하여 이승의 지위로 떨어진다.
[해설] 여기에서는 어떤 사람을 의지하여 어떠한 수행을 닦아야만 신심을 성취하여 발심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두 가지 문답입니다. 즉, 부정취(不定聚)의 중생은 문훈(聞熏)과 본각(本覺)의 내훈(內熏)과 전세에 훈습한 선근의 여력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업과 그 과보를 믿고 십선(十善)을 일으켜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위없는 보리를 구하려합니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을 만나 직접 받들어 공양하고 열 가지 신심(信心)을 수행합니다. 그리하여 일만 겁이 지나도록 그 수행을 계속하여 십종신심을 성취하기 때문에 제불보살이 십신(十信)이 충만한 마음에서 십주(十住)로 발심하여 나아가도록 가르칩니다. 혹은 제불보살의 대비심 때문에 스스로 십주에 마음을 내기도 하고, 혹은 정법이 소멸하려 하면 정법을 보호하려는 인연 때문에 스스로 마음을 내기도 합니다. 이처럼 십신의 마음을 성취하여 십주에서 발심한 사람은 정정취(正定聚)로 들어가 초주(初住)인 발심주(發心住)에서 범부나 소승의 지위에서 끝까지 물러나지 않습니다. 이를 여래의 종자인 습종종(習種性) 가운데 머문다고 하는데, 성불하는 정인(正因)과 서로 호응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부정취(不定聚)의 성품을 지닌 사람은 내인(內因)과 외연(外緣)이 미소하고 하열하기 때문에 물러나 버립니다. 어떤 중생은 숙세에 훈습한 선근종자가 미소하여 오래고 먼 세월에 걸쳐서 탐욕·성냄·어리석음의 번뇌가 매우 두텁습니다. 그는 부처님이나 불상을 만나 공양을 올린다고 해도 인간과 천상에 태어날 종자인 오계(五戒)와 십선(十善)·팔재계(八齋戒) 등을 닦을 마음만 일으키며, 혹은 인간과 천상의 생사를 두려워하여 이승의 종자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설사 대승을 구하는 자가 있다고 해도 선근이 일정하지 않아 정진하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승을 구하는 자가 혹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해도 아직 일만 겁을 지나지 못한 그 중간 과정에서 외연을 만나면 발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외연을 만나다'하는 것은 혹 부처님의 색상을 부처로 보고 발심하기도 하며, 혹은 색상에 집착하여 여러 스님들께 공양함으로써 발심하기도 하며, 또는 이승인의 하열한 가르침으로 인해서 발심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사람의 자취에서 배우고 발심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보살의 자비와 지혜의 마음이 아닌 이러한 발심은 모두가 부정취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악한 인연을 만나면 곧 바로 후퇴하여 이승(二乘)의 지위로 떨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나모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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