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14강
집필자 관음정사주지 망우법상(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거룩하신 삼보(三寶)와 진여(眞如)에 귀의하옵니다.
엊그제 강의를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일년을 훌쩍 지나 종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견식이 천박한 알음알이로 여러 자료를 취합하여 지면을 채우다 보니 마명보살의 의도에 부합함이 저어되지나 않았는지 염려가 됩니다. 하여튼 이 인연으로 대승에 대한 깨끗한 믿음과 가르침에 대한 정념(正念)을 구족하시어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돈독히 하시고, 사섭법(四攝法)과 육바라밀(六波羅密)로 모든 중생을 섭수하시어 열반(涅槃)의 평화를 완성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이후 보다 해박한 강사를 만나시거든 망상분별에 가린 진여(眞如)의 여래자성을 드러내시어 아름다운 연꽃을 피워 각해(覺海)가 원만한 자각각타(自覺覺他)의 열매를 거두시길 빕니다. 그러면 마지막 지면을 채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에는 발심(發心)의 나머지 부분과 더불어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가운데 사신(四信)과 사행(四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나머지 지관문(止觀門) 부분과 권수학이익분(勸修學利益分과 유통분(流通分)을 모두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제5 지관문(止觀門)
云何修行止觀門 所言止者 謂止一切境界相
운하수행지관문 소언지자 위지일체경계상
隨順奢摩他觀義故 所言觀者 謂分別因緣生
수순사마타관의고 소언관자 위분별인연생
滅相 順毘鉢舍那觀義故
멸상 순비발사나관의고
云何隨順 以此二義漸漸修習 不相捨離 雙現前故
운하수순 이차이의점점수습 불상사리 상현전고
[번역]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해야 하는가? 말했던 지(止)란 이른바 일체 경계의 현상을 그치는 것이다. 사마타란 관의 의미를 수순(隨順)하기 때문이다. 말했던 관(觀)이란 이른바 인연으로 생멸하는 현상을 분별하는 것이다. 위빠사나란 관찰의 의미를 수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해야 하는가? 이는 두 의미로써 차츰차츰 수습하여 서로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두 가지가 목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지관의 의미와 쌍수(雙修)할 것을 논하였습니다. 먼저 지(止, samatha)란 만법유식(萬法唯識)의 이치를 깨달은 지혜로써 외부적인 육진(六塵)의 일체 경계를 분별하는 마음의 양태를 그쳐서 무심(無心)해진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마타의 공관(空觀)인 지(止)를 수순하여 만법유식의 도리를 관찰하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관(觀, Vipasyana)이란 인연으로 생멸하는 양상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빠샤나의 가관(假觀)을 수순하여 생멸하는 제법의 인연은 환유(幻有)임을 관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관을 수순해야 하느냐 하면 지(止)와 관(觀)은 차츰차츰 수습하여 서로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지(止)와 관(觀)이 쌍으로 목전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행은 참선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지(止)에만 중점을 두고 수행하면 혼침(昏沈, 침울함)에 빠지기 쉽고, 관(觀)에만 중점을 두고 수행하면 도거(掉擧, 들뜸)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지관(止觀)을 쌍수(雙修)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바라밀 가운데 선정과 반야를 마땅히 정(定)과 혜(慧)의 두 문으로 나누어서 말해야 하는데도 지금은 선정인 정(定)을 지(止), 반야의 혜(慧)를 관(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수행의 인지(因地)에 있어선 지관(止觀)이고, 과위(果位)에 있어선 정혜(定慧)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지와 관을 쌍으로 닦고 함께 운행하는 인지의 수행단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와 관을 하나의 방편문으로 묶은 것입니다. 사마타의 의미를 다시 말한다면 그 의미가 공관(空觀)에 해당하겠습니다. 지(止)의 방편문을 닦으면서 공관의 의미를 수순한다고 말한 의도는 지(止)에 상즉(相卽)한 관(觀)이란 즉지지관(卽止之觀)을 드러낸 것인데, 그 바른 의도는 관에 있습니다. 즉 지(止)를 통해 관(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태학(天台學)에선 지관(止觀)을 삼지(三止)와 삼관(三觀)으로 수립하였습니다. 먼저 지(止)에 대해서입니다. 삼지(三止) 가운데 첫째는 체진지(體眞止)입니다. 이는 삼관에서 공관(空觀)에 해당하며, 그 의미는 목전의 제법이 진여성공(眞如性空)인 이치를 체득하여 거기에 계합하면 모든 생멸의 인연이 스스로 고요해져 일심은 진여의 이치를 환하게 관조하면서 일진법계로서의 만법이 여여(如如)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즉지지관(卽止之觀)입니다. 즉 망상의 분별은 목전에 전개된 만법을 마주하여 일어납니다. 그런데 지금 만법은 유식일 뿐이란 도리를 깨달은 지혜로써 외진(外塵)의 만법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였습니다. 일심으로 생멸하는 외진의 모습에 대한 분별망상이 그치고 나면 분별할 대상이 없는 지(止)입니다. 이것이 체진지(體眞止), 즉 만법의 자체인 진여성공을 체득하여 모든 번뇌가 저절로 고요한 것을 체득한 것입니다. 이렇게 번뇌가 고요한 자리에 나아가서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인연으로 생멸하는 모든 현상을 분별하는 것이 관(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즉지지관(卽止之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타의 공관(空觀)의 의미를 수순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여문을 관찰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근본실지를 이룹니다.
다음에 관(觀)이란 인연으로 생멸하는 양상을 분별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위빠사나란 관찰의 의미를 수순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 천태의 지관수행의 이론인 삼지삼관에서 두 번째인 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에 해당하겠습니다. 이는 삼관 가운데서 가관(假觀)에 해당하며, 그 의미는 일심과 세계는 둘이 아닌 하나의 이치로 항상 여여(如如)하긴 하나 다시 일심으로 인연생멸하는 환영같이 존재는 제법을 관찰하는 것이 방해되지 않습니다. 환유인 제법은 자성이 없이 생멸하는 인연관계이므로, 그것은 있다 해도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어서 그 자성은 항상 스스로 공적한 일심진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법의 인연을 관찰하면서 육도만행을 버리지 않는다고 관(觀)해도 일심중도는 항상 한가한 적정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지와 별개가 아니라 관(觀)에 상즉(相卽)한 지(止)라는 즉관지지(卽觀之止)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빠사나가 관의 의미를 따르게 되는데, 이는 생멸문을 관찰하여 수행한 후에 얻은 권지(權智)를 성취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인데, 이는 삼관에서 중도관(中道觀)에 해당하겠습니다. 그 의미는 진여성공에 거처하면서도 육도만행을 버리지 않고, 가유(假有)의 세계를 거닐면서도 일심중도가 청정하여 공(空)과 유(有)의 이변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공(性空)의 이치와 가유(假有)의 현상이 일시에 나타나 이(理)와 사(事) 둘이 아닌 일심중도의 이치가 환하여 본체와 현상을 일시에 조감합니다. 이는 공과 유를 융합하여 일심중도에 오묘하게 계합(契合)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지(三止)를 따라서 삼관(三觀)을 성취합니다. 그렇다면 삼관과 일심이 본래 차별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는 지와 관을 합하여 밝히고 쌍으로 수행하여, 쌍차쌍조(雙遮雙照)하는 중도관(中道觀)을 갖춘 삼관(三觀)의 이치를 분명하게 말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치가 실제로 빠짐없이 만족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공관과 가관의 두 문을 완전하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 가운데서 일심중도관이 스스로 밝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승으로 향해서 나가는 중요한 문입니다. 그 때문에 여기의 오종방편문 가운데 앞의 사종방편문은 지관문을 보조하여 일심중도를 성취시킨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논서의 근본 의도는 지관 하나의 방편문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다음의 문장에서 지관을 수행하는 양상을 낱낱이 나타냅니다.
若修止者 住於靜處 端坐正意 不依氣息
약수지자 주어정처 단좌정의 불의기식
不依形色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 乃至不依見
불의형색 불의어공 불의지수화풍 내지불의견
聞覺知 一切諸想 隨念皆除 亦遣除想
문각지 일체제상 수념개제 역견제상
以一切法本來無想 念念不生 念念不滅 亦不得隨
이일체법본래무상 염념불생 염념불멸 역부득수
心外 念境界後 以心除心 心若馳散 卽當攝來
심외 염경계후 이심제심 심약치산 즉당섭래
住於正念 是正念者 當知唯心無外境界
주어정념 시정념자 당지유심무외경계
旣復此心亦無自相 念念不可得 若從坐起
기부차심역무자상 염념불가득 약종좌기
去來進止有所施作 於一切時 常念方便 隨順
거래진지유소시작 어일체시 상념방편 수순
觀察 久習淳熟 其心得住 以心住故 漸漸猛利
관찰 구습순숙 기심득주 이심주고 점점맹리
隨順得入眞如三昧 深伏煩惱 信心增長
수순득입진여삼매 심복번뇌 신심증장
速成不退 唯除疑惑 不信誹謗 重罪業障
속성불퇴 유제의혹 불신비방 중죄업장
我慢懈怠 如是等人 所不能入
아만해태 여시등인 소불능입
[번역] 만일 지(止)를 닦는 자라면 고요한 처소에 안주하여 단정히 앉아 의식을 바르게 해야 한다. 호흡을 의지하지 말며, 형상과 색상에 의지하지 말며, 허공을 의지하지 말며, 지(地)·수(水)·화(火)·풍(風)을 의지하지도 말며, 나아가서는 견문각지(見聞覺知)까지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일체 모든 상념을 생각을 따라서 모두 제거하되 역시 제거한다는 일념마저도 버려야 한다. 일체법은 본래 상념이 없어서 생각 생각이 나지 않으며 생각 생각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또한 마음 밖을 따라서 경계를 생각한 뒤에 마음으로써 마음을 제거하려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 마음이 만일 치달아 흩어진다면 곧 당장에 거두어 들여 정념(正念)에 안주해야 한다. 이런 정념(正念)이란 것은 오직 마음일 뿐 외부의 경계란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이미 다시 이 마음까지도 또한 자체의 모습이 없으므로 생각마다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앉은 곳에서 일어나 가고 오며 나아가고 멈추며 시위작동하는 것이 있으면서 일체의 시간에 항상 방편(方便)을 생각하여 수순하며 관찰해야 한다. 오랫동안 수습하여 순일하게 익숙해지면 그 마음이 안주할 수 있다. 마음이 안주할 수 있기 때문에 점점 맹렬하고 날카로워져서 수순하여 진여삼매에 들어갈 수가 있다. 번뇌를 깊이 조복받고 신심이 더욱 자라나 신속하게 불퇴전을 성취한다. 오직 의혹하는 것과 불신하는 비방과 중죄업장(重罪業障)과 아만(我慢)과 해태(懈怠)하는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능히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해설] 여기서부터는 지관을 수습하며 수행하는 양태를 자세하게 논하여 마음을 닦아 선정에 들어가는 방법을 빠짐없이 제시하였습니다. 즉, "고요한 처소에 안주한다"는 것은 외부의 조건이 심난하고 시끄러운 처소를 버리는 것입니다. 천태의 {소지관(小止觀)}에선 선정에 들어가는 시초에 우선적으로 조신(調身)·조심(調心)·조식(調息)을 배우라고 밝혔는데, 이 가운데서 "단정히 앉는 것"은 몸을 고르게 하는 조신에 해당하겠습니다. 자세를 앞으로 숙이지도 않고 위로 바짝 쳐들지도 않기 때문에 "단정히 앉는다"고 합니다. 또한 "의식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마음을 고르게 하는 조심입니다. 마음이 혼침에 빠지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아서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함이 쌍으로 흐르기 때문에 "의식을 바르게 한다"고 합니다. 또한 호흡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호흡은 고를 필요가 없습니다.
또 "호흡과 형체와 색상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의 집착을 여읜 것이고, "오대(五大)인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의 집착을 여읨이며, "보고 들어 지각한 경험적인 지식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마저 여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선덕(禪德)께서 말하길, "안으로는 몸과 마음을 벗어버리고 밖으로는 세계를 버려라. 모름지기 망상인 심의식(心意識)을 떠나서 참구하고, 범부·성인이라는 상대적인 길에서 벗어나 배우며, 망상과 그 경계를 떠나서 참구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의지하지 말라"고 한 이 모든 말은 고덕이 말씀한 "벗어남"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일체 모든 상념"으로부터 "상념마다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 데까지의 다섯 구절은 마음 쓰는 방법을 명확하게 제시한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근본 진심을 미혹하고 한결같이 망상에 의지하는 측면에서만 멋대로 일을 하기 때문에 지금 지(止)방편문을 수습하여 망상을 제거하는 것으로써 최상을 삼았습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능가경}에서는 "위로부터 모든 성인들이 서로가 전수했던 것이 망상엔 자성이 없다"고 한 이 한 마디 말로써 정확한 요점을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망상에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망상을 제거해야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일체 모든 상념을 상념이 일어나는 그대로 따라서 제거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면 이 일념이란 직심으로 진여법을 올바르게 염하는 일념입니다. 지금 마음을 쓰는 데 있어서 이 일념만을 홑으로 이끌어내어 그것만을 위주로 하고 다시는 제이념(第二念)이란 없습니다. 이 일념이 망상무성(妄想無性)의 진여법을 관조하는 힘으로써 망상이 일어나는 곳을 보기만 하면 그것을 따라서 즉시 일념을 관조하고 타파하여 그 자리에서 소멸시키고 다시는 분별망상이 상속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영가대사(永嘉大師)가 말한 "상속하는 분별심을 끊는다"는 것에 해당하겠습니다. 참선하는 요점이 이 일념을 벗어나지 않는 그 요점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에 "또한 제거했다는 일념마저 버린다"고 한 것은 상념을 제거하는 주관적인 일념까지도 버리는 것입니다. 최초의 일념으로써 상념을 제거하여 망상의 상념이 사라지고 나면 바로 이 주관적인 일념까지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버려야 할 객관인 상념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이 일념마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올바른 생각인 정념(正念)이라고 말하였다면 또 무엇 때문에 그 정념마저 버려야 하느냐 하면 이 주관적인 정념의 일념은 객관의 상념을 버리기 위해서 그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수립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여일심의 자체는 본래 망상을 여의었는데 또 무슨 주관적인 일념인들 용납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래 망상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있지 않습니다. 망상이 이미 본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가령 일념을 수립하여 망상을 상대한다면 다시 그 일념은 망상의 근본이 되어버립니다. 그 때문에 이 일념마저도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진여일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과 망상이 함께 끊기고 주관과 객관을 모두 다 잊은 것을 정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념마저 성립하지 않으면 상념마다 나온 실재가 없게 되고, 상념마다 생멸의 인연으로 나온 실재가 없다면 상주하는 광명이 목전에 나타나고 실지의 고요와 권지(權智)의 관조가 환하여 상념마다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하는 이것이 참선하는 확실한 종지입니다.
다음에 "마음 밖으로 생각하는 경계를 따라서, 그런 뒤에 마음으로써 마음을 제거하지 말라"고 한 이 말은 마음을 잘 쓰지 못하는 병통을 제시한 것입니다. 즉 일념으로 관조한 힘으로써 다시는 망상을 따라 마음이 구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망상을 따라 밖으로 경계를 생각한 뒤에, 도리어 마음으로써 마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경계를 제거한다면 이는 주관적인 망상으로써 객관의 모습인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생멸하는 망상을 쫓으면서 생사에 유전하게 되어버립니다. 이처럼 마음을 썼다간 끝내 생멸하는 망상을 여의지 못하게 되므로 이야말로 마음을 잘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만일 마음이 경계로 치달아 흩어지면 그 자리에서 거두어 들여 정념으로 귀결시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망상은 나오자마자 바로 그곳에서 즉시 망상이 성공(性空)한 이치를 관조하고 망상을 타파하여 그를 따라서 마음이 구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정념으로 귀결하여 마음이 외부의 경계의 반연을 따르길 기다린 뒤에야 그것은 망상분별이라는 것을 깨닫고 거두어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론을 제시하여 알아야 할 것은 경계가 마음의 모습일 뿐 마음 밖에 실재하는 경계란 없다고 하였고, 밖으로 마음의 양상인 경계뿐만 아니라, 다시 안으로 이 마음까지도 역시 자체의 양상이란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상념마다 그 실재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안의 마음과 밖의 경계에서 일체의 번뇌가 고요히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상념마다 훈습하여 수행한다면 자연히 진여를 체득하고 그와 하나로 계합(契合)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즉지지관(卽止之觀)입니다.
다음에 수행자가 앉아 있을 때는 지(止)를 닦을 뿐만 아니라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거래(去來)하고 나아가고 멈추면서 하는 일이 있거든 일체의 시간에 항상 지방편(止方便)을 사유하여 움직이지 않는 진여법성의 도리를 수순하며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수습하여 순일하게 익숙하여지면 그 마음이 지방편을 성취하여 안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안주할 수 있기 때문에 점점 맹렬하고 날카로운 선정을 얻어 진리의 본성을 수순하면서 진여삼매에 깨달아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번뇌를 깊이 조복받고 신심이 더욱 자라나 십신(十信)이 원만해지면 십주(十住)와 십지(十地)에 들어가 신속하게 불퇴전(不退轉)의 경지를 성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직 진여의 이치에 망설이면서 의혹하는 것과 불신하는 일천제(一闡提)와 비방하는 외도(外道)와 오역사중(五逆四重)의 중죄업장(重罪業障)과 자기를 스스로 자랑하며 스스로 뽐내는 아만(我慢)자와 방일하여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은 제외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여섯 종류의 장애 가운데서 하나의 장애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깨달아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를 제시하였는데, 여기서 지(止)란 항상 단정히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을 따라 닦고 익히면서 잠시도 폐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찰을 오래 하고 나서 차츰차츰 순일하게 익숙해지면 그 마음이 자연히 진여삼매에 안주한다는 것입니다. 번뇌를 점차 조복받고 신심이 더욱 자라나게 되면 신속하게 불퇴전의 경지를 성취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삼매는 십신(十信)을 능히 원만하게 성취하고 십행(十行)을 행하려는 자라면 모두가 얻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불신하는 마음으로 악업의 장애를 중지하고 아만을 부리는 자는 제외되어, 그들은 깨달아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깨달아 들어가지 못할 근기로써 그 반대인 유일하게 십신을 성취해야만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 때문에 불법의 큰 바다엔 신심(信心)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신심(信心)은 도(道)의 근원이요, 모든 공덕의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이란 삼세를 이어주고 무한한 우주로의 확장을 시켜주는 바탕입니다. 우선 내 자신의 진여불성의 자성을 믿고 그러한 불성자성은 이 우주의 모든 존재자가 다 진여법성의 나타남임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불성(佛性)이요, 우주의 존재들에 있어서는 법성진여입니다.
1. 지(止)의 수승한 공능을 밝힘
復次依是三昧故 則知法界一相 謂一切諸佛法身
부차의시삼매고 즉지법계일상 위일체제불법신
與衆生身平等無二 卽名一行三昧 當知
여중생신평등무이 즉명일행삼매 당지
眞如是三昧根本 若人修行 漸漸能生無量三昧
진여시삼매근본 약인수행 점점능생무량삼매
[번역] 다시 다음에 이 삼매를 의지하기 때문에 곧 법계가 일상(一相)임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일체 제불의 법신이 중생의 몸과 더불어 평등하여 둘이 없다. 곧 이름하여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한다. 마땅히 알라 진여는 삼매의 근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수행하여 점점 능히 한량없는 삼매를 낼 수 있다.
[해설] 여기에서는 지관을 수행하여 얻어지는 수승한 이익을 결론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앞에서 진여삼매를 언급하였는데 이 삼매를 자세하게 논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 진여삼매를 의지하기 때문에 법계가 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일체 제불의 진여법신이 중생의 본각법신과 평등하여 둘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한량없는 삼매를 내는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서 수행자는 진여가 바로 삼매의 근본이고 어떤 사람이 진여삼매를 수행하면 점진적으로 한량없는 삼매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진여삼매에 의지하면 법계가 하나의 모습임을 안다고 한 말은 법계는 바로 십법계(十法界)의 성인과 범부, 염법과 정법의 차별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적인 모습이 어떻게 평등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진여삼매를 의지해야만 제불의 법신과 중생의 본각법신이 평등하여 둘이 아니라는 것을 총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행삼매이며 유일무이한 진여인 항하사와 같은 제불의 법계엔 끝내 염정의 차별적인 모습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평등합니다. 결국 진여는 모든 삼매의 근본이므로 불가사의한 위대한 작용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진여삼매를 수행한다면 점진적으로 한량없는 삼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지관을 수습하는 방편은 끝이 났고, 다음에서는 마군의 일을 논합니다.
2. 마사(魔事)를 밝힘
或有衆生 無善根力 則爲諸魔外道鬼神之所惑亂
혹유중생 무선근력 즉위제마외도귀신지소혹란
若於坐中現形恐怖 或現端正男女等相
약어좌중현형공포 혹현단정남녀등상
當念唯心 境界則滅 終不爲惱 或現天像菩薩像
당념유심 경계즉멸 종불위뇌 혹현천상보살상
亦作如來像相好具足 若說陀羅尼 若說
역작여래상상호구족 약설다라니 약설
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 或說平等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혹설평등
空無相無願 無怨無親 無因無果 畢竟空寂 亦知
공무상무원 무원무친 무인무과 필경공적 역지
是眞涅槃 或令人知宿命過去之事 未來之事
시진열반 혹령인지숙명과거지사 미래지사
得他心智 辯才無碍 能令衆生 貪著世間名利之事
득타심지 변재무득 능령중생 탐착세간명리지사
[번역] 혹 어떤 중생이 선근의 능력이 없으면 곧 모든 천마와 외도와 귀신(鬼神)에게 미혹되어 어지럽게 된다. 혹 앉아 있는 중에 형상을 두렵게 나타내고, 혹은 단정한 남녀 등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땅히 오직 마음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경계가 곧 소멸하여 마침내 뇌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천상과 보살상을 나타내기도 하며, 또는 여래의 모습인 상호(相好)를 구족한다. 혹은 다라니를 설하기도 하며, 혹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를 설하기도 한다. 혹은 평등·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무원(無怨)·무친(無親)·무인(無因)·무과(無果)하여 필경에 공적함을 설하고, 또한 이것이 진실한 열반이라고 안다.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숙명통(宿命通)으로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알게 하기도 하며, 타심통(他心通)의 지혜를 얻어 변재(辯才)가 걸림이 없게 하기도 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명예와 이익에 대한 일을 탐하고 집착하게 하기도 한다.
[해설] 여기에서는 선근이 없는 수행자에게 나타나는 갖가지 마군의 현상과 대치방법을 밝혔습니다. 어떤 중생이 선근의 힘이 없으면 모든 천마와 외도와 퇴척귀(退 鬼)와 정매신(精魅神)에게 미혹되어 어지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천마와 퇴척귀와 정매신이 오진(五塵)을 세 가지로 변작(變作)하여 사람의 착한 마음을 무너뜨립니다. 그리하여 혹 좌선 중에 두려운 형체를 나타내어 공포심을 불러 일으켜 뜻을 잃게 하며, 혹은 단정한 남녀 등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마땅히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러한 세 가지 오진(五塵)의 경계는 마음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세 가지 오진(五塵)의 경계가 즉시 사라져 끝내 뇌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수행하는 도중에 나타나는 갖가지 현상입니다. 혹은 천상의 모습과 보살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며, 또한 여래의 모습이 되어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원만하게 갖추고 다라니를 설하기도 하며,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의 육바라밀을 설하기도 하며, 혹은 평등·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삼해탈(三解脫)과, 원수나 친함도 없으며, 원인이나 결과도 없는 이들이 필경 공적한 이것이 진실한 열반이라 설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숙명통(宿命通)으로 과거의 일이나 미래의 일을 알게 하기도 하고, 타심통(他心通)의 지혜를 얻어 말하는 재주가 걸림이 없게 하기도 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명예와 이익에 대한 일을 탐하고 집착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능엄경}에선 마군의 현상을 빠짐없이 밝혔는데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선정 가운데서 오음이 아직 무너지지 않은 상태를 의지하여 나타난 마군의 일어난 현상과 종류가 있어 그 깊고 옅은 정도가 일정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마군의 현상은 혹은 천마와 모든 악한 귀신과 정매망량(精魅망량) 모두가 찾아와 너를 뇌란시키며, 혹은 너의 오음마(五陰魔)와 심마(心魔)가 스스로 재앙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단지 그 개괄적인 내용을 간략히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마군과 외도와 귀신은 대체로 수행의 인지에서 선정을 닦으면서 악한 습기와 삿된 견해 때문에 이 가운데 타락한 자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선정의 기분(氣分)에서 훈습으로 발현하였기 때문에 형체를 나타내어 뇌란케 할뿐입니다. 즉 "마음일 뿐임을 관찰하면 마군의 경계가 즉시 사라진다"는 것은 외부의 마군이 아무리 뒤흔든다 해도 실제로는 자신에게 있었던 악한 습기를 따라서 그것이 선정으로 청정해진 마음에 훈습된 것이 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자기의 심식에 그들 외부의 마군의 자질이 의탁하여 변화로 나타난 그림자가 해를 끼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일 뿐 외부에 실재하는 마군의 경계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오직 마음일 뿐임을 관찰한다면 마군의 경계는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다음에 일어난 현상은 습기로 일어나는 마군의 현상입니다. 이들 마군은 수행을 하는 사람이 과거의 여러 생에 불법을 친근히 하고 익히긴 했으나 그 모습에 집착한 마음을 잊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혹은 일체가 공적하다는 단멸의 공견(空見)을 익혀 그것을 구경의 극치로 삼고 숙명에 대한 지견(知見)을 탐구하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선정으로 인해 훈습되었던 것이 발현하여 삼매 가운데서 이러한 마군의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근본 수행의 인지가 올바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세간의 명예와 이익에 대한 일을 탐하고 집착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것은 바로 자기의 마음이 변화하여 나타났을 뿐입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수행하는 도중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여 어떤 시각화되고 청각화 된 내용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식이 팽배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공부에 있어서 그러한 욕구는 결국 마군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결과는 현상적으로 그 내용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자기 스스로 의식의 변화를 감지할 뿐입니다. 또 수행이 잘 된 사람은 외형적으로도 모습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의식화되었던 마음이 풀어지면 얼굴이 저절로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변하고 얼굴에서는 빛이 난다고 합니다. 이것을 오로라라고 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수행이 어느 정도 된 사람에게는 그대로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도 집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에 사무량심으로 가득 차 있고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여기고 이분화 된 의식이 되어 있지 않다면 수행이 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又令使人數瞋數喜 性無常准 或多慈愛
우령사인삭진삭희 성무상준 혹다자애
多睡多病 其心懈怠 或卒起精進 後便休廢 生於
다수다병 기심해태 혹졸기정진 후변휴폐 생어
不信多疑多慮 或捨本勝行 更修雜業
불신다의다려 혹사본승행 갱수잡업
若著世事種種牽纏 亦能使人得諸三昧 少分相似
약착세사종종견전 역능사인득제삼매 소분상사
皆是外道所得 非眞三昧 或復令人若一日若二日
개시외도소득 비진삼매 혹부령인약일일약이일
若三日 乃至七日住於定中 得自然香美
약삼일 내지칠일주어정중 득자연향미
飮食 身心適悅 不飢不渴 使人愛著 或亦
음식 신심적열 불기불갈 사인애착 혹역
令人食無分齊 乍多乍少顔色變異 以是義故
령인식무분제 사다사소안색변이 이시의고
行者常應智慧觀察 勿令此心 墮於邪網
행자상응지혜관찰 물령차심 타어사망
當勤正念不取不著 則能遠離是諸業障
당근정념불취불착 즉능원리시제업장
[번역] 또 사람으로 하여금 자주 화를 내고 자주 기뻐하여 성품이 일정한 기준이 없게 하며, 혹은 자애가 많고 졸음이 많고 병이 많아 그 마음이 게으르게 하기도 하며, 혹은 창졸간에 정진을 일으키다가 후에 문득 그만두기도 하며, 불신하는 마음을 내어 의심이 많고 생각이 많다. 혹은 본래의 수승한 수행을 버리고 다시 잡스러운 행위를 닦기도 한다. 혹은 세간의 일에 집착하여 갖가지에 이끌리어 얽매이기도 하며, 또는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삼매를 얻게 하여 약간의 분야에서 서로 비슷하게 하기도 하는데, 다 이것은 외도가 얻은 것이지 진실한 삼매는 아니다. 혹은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혹 하루, 혹 이틀, 혹 사흘에서 나아가 칠일에 이르기까지 선정 속에 안주하면서 자연스럽게 향기롭고 맛있는 음식을 얻고 몸과 마음이 쾌적하고 기뻐서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애착하게 한다. 혹은 또 사람으로 하여금 음식에 일정한 한계가 없게 하여 금방 많이 먹었다 잠시 적게 먹기도 하여 안색이 변하여 다르게도 한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수행자는 항상 마땅히 지혜로 관찰하여 하여금 이 마음이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정념(正念)을 부지런히 닦아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면 곧 능히 이러한 모든 업장을 멀리 여읠 수 있다.
[해설] 여기서는 수행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상적인 현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번뇌의 마군을 논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수행하는 가운데 본래의 수행을 버린 위와 같은 현상은 번뇌의 마군입니다. 이 마군은 일찍이 외도의 삼매를 익혀 아직 번뇌를 끊지 않아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불법을 의지하여 수행한다 해도 올바른 선정에 들어가진 못합니다. 그러므로 숙세의 습기가 훈습으로 발현하여 이러한 일이 나타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또 중생은 오욕락(五欲樂) 가운데 있으면서 음식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에 대한 많은 욕심으로 탐욕과 집착의 마음을 냅니다. 과거 지난 숙세로부터 익힌 습기가 농후하여 원래부터 아직까지 일념간에도 음식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선정 속에 있다 할지라도 욕심의 습기가 훈습으로 발현하여 몸과 마음을 알맞게 기쁘게 합니다. 그 때문에 그에 대한 깊은 애착의 마음을 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 관찰하고 정념을 부지런히 닦아 취하지도 집착하지도 않는다면 멀리 여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식욕은 곧 바로 성욕과 직결됩니다. 먹는 음식에 따라서 몸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가 바뀝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나라의 음식문화가 그 나라의 국민의식을 반영하는 것과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불교의 수행자는 음식에 주의를 기울여 먹어야 하겠습니다.
3. 간략하게 거짓과 참이 다름을 밝힘
應知外道所有三昧 皆不離見愛我慢之心
응지외도소유삼매 개불리견애아만지심
貪著世間名利恭敬故 眞如三昧者 不住見相
탐착세간명리공경고 진여삼매자 부주견상
不住得相 乃至出定亦無懈慢 所有煩惱漸漸微薄
부주득상 내지출정역무해만 소유번뇌점점미박
若諸凡夫 不習此三昧法 得入如來種性
약제범부 불습차삼매법 득입여래종성
無有是處 以修世間諸禪三昧 多起味著
무유시처 이수세간제선삼매 다기미착
依於我見繫屬三界 與外道共 若離善知識所護
의어아견계속삼계 여외도공 약리선지식소호
則起外道見故
즉기외도견고
[번역] 마땅히 외도에게 있는 삼매는 모두가 아견(我見)·아애(我愛)·아만(我慢)의 마음을 여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세간의 명예와 이익·공경을 탐내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진여삼매(眞如三昧)라는 것은 상(相)을 봄에 안주하지 않으며, 상(相)을 얻어도 안주하지도 않으며, 나아가서는 선정에서 나와도 역시 게으름과 아만이 없어 있던 번뇌가 점점 희미하게 엷어진다. 만일 모든 범부가 이 진여삼매법을 닦지 않고 여래종성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옳다고 할 곳이 없다. 세간의 모든 선삼매(禪三昧)를 닦음으로써 다분히 선미(禪味)의 집착을 일으킨다. 아견(我見)에 의지하여 삼계에 얽매이고 속박되어 외도와 더불어 함께 한다. 만일 선지식의 호념(護念)하는 바를 떠난다면 곧 외도의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외도의 삿된 선정과 불교의 올바른 정념을 논변하여 진여삼매의 수행을 제시하였습니다. 즉, 외도의 삼매는 모두가 아견(我見)·아애(我愛)·아만(我慢)의 마음을 여의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안으로 삿된 선정에 집착하고 밖으론 세간의 명예와 이익·공경을 탐내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선정에 있을 때 선미(禪味)에 집착하지 않는 진여삼매는 안으론 마음을 잊었기 때문에 현상을 봄에 안주하지 않으며, 밖으로는 경계를 잊었기 때문에 현상을 얻어도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나아가서는 선정에서 나와도 역시 선정을 믿는 게으름과 아만(我慢)이 없어서 있던 삼독번뇌가 점점 희미하게 엷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만일 모든 범부가 이 진여삼매법을 닦지 않고 십지(十地) 이후의 불퇴전(不退轉)의 계위인 여래종성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경계의 모습만을 취하는 세간의 모든 선삼매(禪三昧)인 사선(四禪)과 사공정(四空定) 등을 닦으면 경계의 현상에 대한 선미에 집착한 마음을 많이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아(我)를 여의지 못하였으므로 아견(我見)에 의지하여 삼계(三界)에 얽매이고 속박되어 외도가 얻은 선정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선지식의 보호하여 생각해줌을 떠난다면 외도의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외도는 아애(我愛)·아견(我見)·아만(我慢)의 전도된 습기에 의지하여 닦으므로 모두가 마군의 업을 이룹니다. 그 때문에 안으로는 삿된 견해에 집착하고 밖으론 사된 욕구에 집착합니다. 이는 이른바 착란으로 삼매를 수습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진여삼매(眞如三昧)는 담연(湛然)하고 고요한 일심(一心)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잊고 영상(影像)이 사라졌으며 게으름과 아만을 여의고 번뇌가 사라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하는 사람은 이 진여삼매를 인유(因由)하여 여래종성에 깨달아 들어가지 않은 자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세간의 모든 선정삼매는 모두 아견에 집착하여 외도의 선정과 함께 합니다. 만일 그들을 선지식이 제도하고 보호하지 않는다면 외도의 나약한 견해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 때문에 {능가경}에선 "외도를 멀리 여의고 가장 수승한 선지식을 친근히 해야 한다"고 절실하게 훈계하였습니다.
여기서는 그야말로 불교의 수행자가 가장 경계해야할 내용을 논하였습니다. 불교에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으면서 수행을 한답시고 자기 자신만을, 자기 견해만을, 자기를 높이기를 한없이 합니다. 그리고 명예와 이익과 공경과 존경에 사로잡혀 평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외도들이나 하는 것이지 불자가 취할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불자가 명심해야할 것은 불교 수행은 결코 명성이나 명예 그리고 이익과 공경과 존경을 위해 자기만 옳고 자기 견해만 높이는 아만을 부리다간 불교 수행의 문턱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4. 현세의 이익을 보여 수행을 권장함
復次精勤專心修學此三昧者 現世當得十種利益
부차정근전심수학차삼매자 현세당득십종이익
云何爲十 一者常爲十方諸佛菩薩之所護念
념운하위십 일자상위시방제불보살지소호
二者不爲諸魔惡鬼所能恐怖 三者不爲九十五種
이자불위제마악귀소능공포 삼자불위구십오종
外道鬼神之所惑亂 四者遠離誹謗甚深之法
외도귀신지소혹란 사자원리비방심심지법
重罪業障漸漸微薄 五者滅一切疑諸惡覺觀
중죄업장점점미박 오자멸일체의제악각관
六者於如來境界信得增長 七者遠離憂悔
육자어여래경계신득증장 칠자원리우회
於生死中勇猛不怯 八者其心柔和 捨於驕慢
어생사중용맹불겁 팔자기심유화 사어교만
不爲他人所惱 九者雖未得定 於一切時
불위타인소뇌 구자수미득정 어일체시
一切境界處 則能減損煩惱不樂世間
일체경계처 즉능감손번뇌불락세간
十者若得三昧 不爲外緣一切音聲之所驚動
십자약득삼매 불위외연일체음성지소경동
[번역] 다시 다음에 정성스럽게 정진하여 마음을 오로지 집중하여 이 삼매를 닦아 배우는 자는 현세에 열 가지 이익을 얻게 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항상 시방의 제불보살이 보호하고 염려해주신 바가 되고, 두 번째는 모든 천마·악귀들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세 번째는 95종의 외도와 귀신이 미혹하여 산란하게 하지 못한다. 네 번째는 매우 심오한 법을 비방함을 여의고 중죄업장이 점점 미세하게 엷어지며, 다섯 번째는 일체의 의심과 모든 그릇된 각(覺)과 관(觀)을 소멸하고, 여섯 번째는 여래의 경계에서 신심이 더욱 증장(增長)할 수 있다. 일곱 번째는 근심과 후회를 멀리 여의어 생사 가운데에서도 용맹하여 겁약(怯弱)하지 않는다. 여덟 번째는 그 마음이 유연해지고 조화로워 교만을 버리므로 다른 사람의 뇌란(惱亂)하는 바가 되지 않는다. 아홉 번째는 비록 선정을 얻지 못했지만 일체의 시간과 일체의 경계에 처해서 곧 번뇌를 손감(損減)시켜 세간을 즐기지 않는다. 열 번째는 만일 삼매를 얻으면 외연의 일체 음성에 놀라거나 요동하지 않는다.
[해설] 여기서는 진여삼매(眞如三昧)를 닦는 현세에 10가지 유익함을 논하였습니다. 즉, 진여삼매로써 부처님의 마음에 오묘하게 계합(契合)하기 때문에 보호하고 염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릇된 습기와 삿된 견해를 여의었기 때문에 천마와 외도의 사된 미혹한 산란을 여윕니다. 자기의 일심을 심오하게 믿기 때문에 비방을 여의고, 습기가 점점 제거되기 때문에 업장이 희미하게 엷어지며, 곧은 마음으로 진여법을 올바로 사념하기 때문에 의심을 소멸하고 올바르게 관찰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는 결정적인 신심을 얻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세계를 믿고 근심을 떠나 생사에서 겁을 내지 않습니다. 여덟 번째는 주관인 아(我)를 여의고 따라서 상대적인 인(人)마저 잊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뇌란을 당하지 않습니다. 아홉 번째는 번뇌가 감소하여 덜어졌기 때문에 세간의 맛을 즐기지 않습니다. 열 번째는 고요한 마음으로 외연을 잊었기 때문에 외부의 조건에 의해서 마음이 놀라서 움직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진경계 가운데서 유독 성진(聲塵)인 음성만을 말한 것은 선정에 들어갔을 땐 이근(耳根)을 제외한 나머지 오근(五根)은 모두가 닫힙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근만이 텅 비어 막힘이 없이 소통되기 때문에 음성에 요동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요동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물의 흐름 속에 들어가면 처소를 잊는다'고 한 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불자가 수행하는데 소리를 듣는 것에 동요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불자가 무슨 수행을 하다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으면 곧 이끌려갑니다. 수행자는 반드시 경계해야할 일입니다. 간경을 하든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참회를 하든 그것으로 끝장을 보아야 합니다. 방법은 달라도 구경에 이르는 도달점은 동일한 목적지입니다. 여기서의 수행법은 사마타인 지(止)방편입니다. 이상에서 지(止)방편문의 수행은 끝이 났고 다음에서는 관(觀)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5. 네 가지 관(觀)을 설함
復次若人唯修於止 則心沈沒 或起懈怠 不樂衆善 遠離大悲 是故修觀
부차약인유수어지 즉심침몰 혹기해태 불락중선 원리대비 시고수관
[번역]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지(止)만을 닦는다면 곧 마음이 침몰하여지고 혹은 게으름을 일으키어 뭇 착한 행위를 즐겨 행하지 않으므로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된다. 그러므로 관(觀)을 닦아야만 한다.
[해설] 여기서서는 지(止)만 닦는 수행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여 관(觀)수행을 겸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지(止)인 사마타만을 닦는다면 곧 마음이 침몰하여지고 혹은 게으른 마음을 일으키어 모든 착한 행위를 즐겨 행하지 않으므로 자기를 유익하게 하는 이익을 잃고, 나아가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되어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것을 잃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관(觀)의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 지관쌍수(止觀雙修)를 권장하였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침몰한다"는 것은 진여에서 오로지 고요함으로만 취향하기 때문에 마음이 공적의 세계에 쉽사리 침몰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두 가지 실수가 있게 됩니다. 첫째는 게으름을 피우며 모든 선업을 수행하지 않으므로 자리(自利)를 잃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법상관(法相觀)으로써 그것을 다스리고 정진관(精進觀)으로써 성취하게 합니다. 두 번째 대비심을 멀리 여읜다면 이타(利他)를 잃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대비관(大悲觀)으로써 그것을 대치하고, 대원관(大願觀)으로써 성취하게 합니다. 다음에 이를 자세히 논하고 있습니다.
1) 법상관(法相觀)
修習觀者 當觀一切世間有爲之法 無得久停須臾變壞 一切心行念念生滅 以是故苦 應觀
수습관자 당관일체세간유위지법 무득구정수유변괴 일체심행염념생멸 이시고고 응관
過去所念諸法恍惚如夢 應觀現在所念諸法猶如電光 應觀未來所念諸法猶如於雲忽爾而
과거소념제법황홀여몽 응관현재소념제법유여전광 응관미래소념제법유여어운홀이이
起 應觀世間一切有身悉皆不淨 種種穢汚無一可樂
기 응관세간일체유신실개부정 종종예오무일가락
[번역] 관(觀)을 수습하는 자는 마땅히 일체 세간의 유위의 법은 오래 머물 수 없어 잠시 사이에 변하고 무너지며, 일체 마음의 진행이 생각 생각에 생멸한다. 이 때문에 괴로움으로써 관찰해야 한다. 마땅히 과거에 생각했던 모든 법은 황홀한 꿈과 같다고 관찰해야 하며, 마땅히 현재에 생각한 모든 법도 마치 번개 불과 같다고 관찰해야 하며, 마땅히 미래를 생각할 모든 법도 마치 구름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관찰해야만 한다. 마땅히 세간의 일체 존재의 몸은 모두가 청정하지 않아 갖가지 더러움으로 오염되었기에 한 가지도 즐거움이 없다고 관찰해야 한다.
[해설] 근본불교 이래 전통적으로 관법수행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이것이 사념처관(四念處觀)입니다. 즉, 몸은 부정(不淨)하고, 감수작용은 괴로움이며, 마음은 무상(無常)하고, 모든 존재는 무아(無我)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를 통합해서 관수시고(觀受是苦)를 항상 수행하여 관신부정(觀身不淨)으로 종결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관(觀)방편을 닦아 익히는 자는 일체 세간의 유위법은 오랫동안 정지할 수 없어 잠깐 사이에 변하고 무너지며, 일체 심의식의 진행은 생각 생각이 생겨나고 소멸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관찰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생각했던 모든 법은 그 자체가 없어 꿈처럼 황홀하고, 현재에 생각한 모든 법은 마치 전광과 같으며,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은 마치 구름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간에 일체 존재하는 몸은 모두가 청정하지 못하고 온갖 더러움으로 오염되었기에 하나도 즐거움이 없다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을 수습하는 데는 넷이 있는데, 첫 번째는 법상관(法相觀)이며, 두 번째는 대비관(大悲觀), 세 번째는 대원관(大願觀), 네 번째는 정진관(精進觀)입니다. 처음의 법상관을 넷으로 나눈 첫째가 무상관(無常觀)이고, 둘째는 고관(苦觀)이며, 셋째는 무아관(無我觀)으로 과거는 주재하는 자체가 없는 무아(無我)이기에 그 실체를 쫓기 어렵고, 현재는 찰나찰나에 흐르며 안주하지 않고, 미래는 본래 아직 나타나지 않아 단지 인연이 집합하여 홀연히 있으므로 시방세계의 시간 속에서 실재하는 법을 찾아보아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부정관(不淨觀)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법상관(法相觀)으로 범부들의 네 가지 전도(顚倒)된 견해인 상(常)·낙(樂)·아(我)·정(淨)에 집착하는 망상을 제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법은 상주하여 항상하다고 집착하는 것은 무상관(無常觀)으로, 즐거움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은 고관(苦觀)으로, 상일주재(常一主宰)한 아(我)에 집착하는 마음은 무아관(無我觀)으로, 청정하다고 집착하는 마음은 부정관(不淨觀)으로 대치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법의 내용이 {기신론}에 언급된 특이한 관법수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념처관(四念處觀)도 역시 사전도(四顚倒)를 대치하는 수행법인데 여기서는 새로운 관법을 제시하여 대치시키고 있습니다. 하여튼 이상으로 네 가지 법상관에 대한 수행의 설명은 끝이 났습니다. 다음은 나머지 관법(觀法)입니다.
2) 대비관(大悲觀), 대원관(大願觀), 정진관(精進觀)
如是當念 一切衆生從無始世來 皆因無明所熏習故令心生滅 已受一切身心大苦 現在卽
여시당념 일체중생종무시세래 개인무명소훈습고령심생멸 이수일체신심대고 현재즉
有無量逼迫 未來所苦亦無分齋 難捨難離而不覺知 衆生如是甚爲可愍 作此思惟 卽應
유무량핍박 미래소고역무분제 난사난리이불각지 중생여시심위가민 작차사유 증응
勇猛立大誓願 願令我心離分別故 遍於十方修行一切諸善功德 盡其未來 以無量方便救
용맹립대서원 원령아심리분별고 변어시방수행일체제선공덕 진기미래 이무량방편구
拔一切苦惱衆生 令得涅槃第一義樂 以起如是願故 於一切時一切處 所有衆善 己堪能不
발일체고뇌중생 영득열반제일의락 이기여시원고 어일체시일체처 소유중선 기감능불
捨修學心無懈怠 唯除坐時專念於止 若餘一切悉當觀察應作不應作
사수학심무해태 유제좌시전념어지 약여일체실당관찰응작불응작
[번역] 이와 같이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 일체중생은 시작이 없는 세월로부터 흘러오면서 모두가 무명으로 인해서 훈습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게 되었다. 이미 일체 몸과 마음에 큰 괴로움을 받았고,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의 괴로울 것도 또한 분제(分齊)가 없어 버리기 어렵고 여의기 어려워서 그것을 자각하여 알지 못한다. 중생이 이와 같이 매우 불쌍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유를 짓고서 곧 마땅히 용맹하게 큰 서원을 세워야 한다. 하여금 나의 마음이 분별을 여의도록 원하였기 때문에 시방에 두루하여 일체 모든 좋은 공덕을 수행하고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써 일체 고뇌하는 중생을 빼어내어 구제하여 하여금 열반의 제일의(第一義)인 즐거움을 얻게 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원을 일으켰기 때문에 일체의 시간과 일체의 처소에 있는 많은 선행을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만큼 버리지 않고 배움을 수행하면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다. 오직 앉아 있을 때 지(止)에 전념하는 것만은 제외한다. 혹은 나머지 일체를 다 감당함에 응당 지어야 할 것과 응당 짓지 않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한다.
[해설] 여기서는 앞에서 언급한 나머지 삼관(三觀)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할 것은 일체 중생은 아주 오랜 세월로부터 흘러오면서 모두가 무명이란 원인에 의해서 물들여졌기 때문에 마음과 의식이 생겨나고 소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과거에 이미 일체 몸과 마음의 큰 괴로움을 받았고, 현재에도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의 괴로움 또한 한계가 없어 버리거나 여의기 어려운 데도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중생은 이와 같은 실정이기에 매우 가련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가련한 중생을 생각하면서 용맹하게 큰 서원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분별을 여의길 바라기 때문에 시방세계에 두루 편만하여 일체 모든 훌륭한 공덕을 수행하고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 일체 고뇌하는 중생을 빼어내어 구제하여 열반이란 제일의(第一義)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고 다짐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원을 일으켰기 때문에 일체의 시간과 장소에 있는 뭇 선행을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만큼을 따라서 버리지 않고 배워 닦으면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도록 합니다. 그러나 오직 앉아 있을 때 사마타인 지(止)를 전념하는 것을 제외한 그 나머지 일체는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에서 해야 하는지 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다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비관(大悲觀)은 중생은 괴로움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싫증을 내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움 또한 한이 없기에 이것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심오한 대비가 아니면 그들을 구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원관(大願觀)은 일체중생을 일심의 자체와 동일하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제하리라고 발원합니다. 즉, 분별을 여의었다는 것은 동체대비이고, 미래제가 다한다고 하는 것은 오랜 시간의 마음이며, 일체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는 것은 광대한 마음이며, 열반을 얻게 한다고 하는 것은 제일심(第一心)입니다. 그리고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정진관(精進觀)입니다. 다음에는 지관쌍수(止觀雙修)에 대해 종합해서 논합니다.
6. 지관쌍운(止觀雙運)을 밝힘
若行若住若臥若起 皆應止觀俱行 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 而復卽念因緣和合善惡之業
약행약주약와약기 개응지관구행 소위수념제법자성불생 이부즉념인연화합선악지업
苦樂等報不失不壞 雖念因緣善惡業報 而亦卽念性不可得 若修止者 對治凡夫住著世間
고락등보불실불괴 수념인연선악업보 이역즉념성불가득 약수지자 대치범부주착세간
能捨二乘怯弱之見 若修觀者 對治二乘不起大悲狹劣心過 遠離凡夫不修善根 以此義故
능사이승겁약지견 약수관자 대치이승불기대비협렬심과 원리범부불수선근 이차의고
是止觀二門 共相助成不相捨離 若止觀不具 則無能入菩提之道
시치관이문 홍상조성불상사리 약지관불구 즉무능입보리지도
[번역] 혹 가거나 혹 머물거나 혹 눕거나 혹 일어남에 모두 마땅히 지관(止觀)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이른바 비록 모든 법을 생각하지만 자성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곧 인연으로 화합한 선악의 업과 고락 등의 과보가 잃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임을 생각한다. 비록 인연이 화합한 선악업보를 생각한다 해도 그러나 또한 생각하는 자성은 얻을 수 없다. 만약 지(止)를 수행하는 자는 범부가 세간을 집착하여 안주하는 것을 대치하면 능히 이승의 겁약한 견해를 버릴 수 있다. 만약 관(觀)을 수행하는 자는 이승(二乘)이 대비를 일으키지 않는 편협하고 용렬한 마음의 허물을 대치하면 범부가 선근을 수행하지 않는 것을 멀리 여의게 한다. 이러한 의미이기 때문에 이 지관의 두 문은 공통으로 서로가 돕고 성취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 만일 지관을 갖추지 않는다면 보리의 도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일상의 수행에서 지(止, amatha)와 관(觀, Vipasyana)을 쌍수(雙修)하라고 다시 강조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비록 제법을 깊이 사유더라도 자성은 망령된 생각을 따라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지(止)이고, 망령된 생각을 그친 그 자리에서 곧바로 갖가지 인연화합에 의해서 선악의 업과 고락 등의 과보가 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觀)에 해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진여는 불생(不生)의 본체로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으며 선악의 업보를 생각하더라도 자성은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止)와 관(觀)의 두 방편은 서로 도와서 평등한 가운데 차별이 있고, 차별이 있는 가운데 평등한 것으로 평등의 본체에 들어가는 것은 지(止)이고, 다시 차별의 법을 관찰하는 것은 관(觀)입니다. 지(止)를 닦으면 차별에 집착하여 세간에 안주하는 범부의 마음을 다스리고, 또한 이승(二乘)의 비겁하고 나약한 견해를 버리게 하며, 관(觀)을 닦으면 자리이타의 대비심을 일으키지 않는 이승의 비겁하고 용렬한 마음을 다스려 선근을 닦지 않는 범부를 멀리 떠나 자리이타를 다 갖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사마타와 위바사나는 서로 도와 떠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지 않으면 보리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지관(止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선행을 광대하게 닦아 중생을 거두어 교화한다는 것은 지(止)에 상즉(相卽)해서 일으키는 즉지지관(卽止之觀)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비록 인연업보를 깊이 사유한다"는 것은 관(觀)의 수행이며, "사유하는 자성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은 관(觀)에 상즉(相卽)한 즉관지지(卽觀之止)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止)의 공적함에 거처한다 해도 만행의 관(觀)을 버리지 않고, 관(觀)으로 생사의 세계를 거닌다 해도 그 자리에서 지(止)이므로 한결같은 성품은 고요하여 담담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을 두고 지관(止觀)을 쌍수(雙修)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 사마타를 수행하는 자는 범부가 세간에 안주하여 집착하는 것을 대치하면 이승의 비겁하고 나약한 견해를 버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자는 이승인이 대자비를 일으키지 않는 편협하고 근기가 낮은 마음의 허물을 대치하면 범부가 선근을 수행하지 않는 것을 멀리 여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지관의 두 문은 공통으로 서로가 돕고 성취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만일 지관을 함께 다 갖추지 않는다면 깨달음의 불도에 깨달아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관을 함께 닦아 범부로 하여금 세간에 염증을 내게 하기 때문에 뭇 선행을 부지런히 닦게 되고, 이승은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대비심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서로가 돕는 수행의 철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 어느 쪽에도 집착하여 안주함이 없어야만 보리의 도로 곧장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지관을 쌍수(雙修)하여 운행하는 데서 얻어지는 이익입니다. 앞에서부터 누차 강조해온 수행의 요체를 결론짓고 있습니다. 즉, 지(止)인 사마타만 수행하면 혼침에 빠지거나 단공(斷空) 또는 악취공(惡取空)에 떨어져 버려서 허무주의에 침잠(沈潛)합니다. 반면에 관(觀)인 위빠사나만 수행하다보면 수행자의 마음이 들떠서 도거(掉擧)를 야기하여 온갖 대상에 현혹되어 번뇌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듭니다.
7. 물러나지 않는 방편과 염불왕생을 밝힘
復次衆生初學是法 欲求正信 其心怯弱 以住於此娑婆世界 自畏不能常値諸佛親承供養
부차중생초학시법 욕구정신 기심겁약 이주어차사바세계 자외불능상치제불친승공양
懼謂信心難可成就 意欲退者當知 如來有勝方便攝護信心 謂以專意念佛因緣 隨願得生
구위신심난가성취 의욕퇴자당지 여래유승방편섭호신심 위이전의염불인연 수원득생
他方佛土 常見於佛 永離惡道 如修多羅說 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陀佛 所修善根廻
타방불토 상견어불 영리악도 여수다라설 약인전념서방극락세계아미타불 소수선근회
向願求生彼世界 卽得往生 常見佛故 終無有退 若觀彼佛眞如法身 常勤修習畢竟得生住
향원구생피세계 즉득왕생 상견불고 종무유퇴 약관피불진여법신 상근수습필경득생주
正定故
정정고
[번역] 다시 다음에 중생이 최초로 이 법을 배우고 올바른 신심을 구하지만 그 마음이 겁약하다. 이 사바세계에 머묾으로써 스스로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몸소 받들고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두려워서 말하길, "신심은 성취하기 어렵다"라고 하면서 의식으로 물러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에게는 수승한 방편이 있어 신심을 거두어 보호하신다. 이른바 뜻을 전일(專一)하게 하여 염불한 인연으로 원을 따라 타방의 불국토에 태어나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고 영원히 악도를 여읜다. 저 수다라에서 설하신 것처럼 만약 어떤 사람이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전일하게 염하고 수행한 선근을 회향하여 저 세계에 왕생(往生)하기를 구한다면 곧 왕생하여 항상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침내 물러남이 없다. 만약 저 부처님의 진여의 법신을 관찰하고 항상 부지런히 수습한다면 필경에 왕생하여 정정취(正定聚)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중생 가운데 근기가 하열한 이를 위하여 퇴전하지 않는 방편을 제시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어떤 중생은 이 법을 최초로 배우고 올바른 신심을 구하고자 하지만 그 마음이 비겁하고 나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사바세계에 머물면서 스스로 모든 부처님을 항상 만나서 직접 받들고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두려워하면서 말하기를, '신심은 성취하기 어렵다'라고 하면서 의식으로 물러나고자 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걸맞은 말씀이라 여겨집니다. 우리는 조그만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만 물러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공부는 현실적으로 나타난 이득이 없는 듯하기 때문에 그만 중도에 그만 두어버립니다. 그것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땅히 여래에게는 수승한 방편이 있기에 신심을 거두어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생각을 오로지 하여 집중된 간절한 의식으로 염불한 인연으로 원을 따라 타방의 불국토에 태어나 항상 부처님을 뵙고 영원히 삼악도를 여읠 수 있습니다. 정토삼부경에서 말씀한 것처럼 어떤 사람이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전일(專一)하게 염불하고 수행한 선근을 회향하여 그 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갈구하면 반드시 왕생하여 항상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절대 수행에서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 부처님의 진여인 법신을 관찰하고 항상 부지런히 수습한다면 필경에 왕생하여 그는 정정취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대승을 처음 배우는 중생은 올바른 신심을 체득하지 못하여 안으로는 마음이 하열하고 밖으로는 수승한 인연이 결여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에서 물러나 그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수승한 방편을 시설하시어 그 마음을 거두어 보호하십니다. 그 의도를 말해 본다면 전일한 의식으로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을 구하는 것인데, 이는 부처님을 의지함으로써 그의 신심에 보호되는 것입니다. 이는 즉 아미타불을 항상 염하고 서방정토에 왕생하여 불퇴의 수행지에 거처하는 것과 같은 경우인데 이것이 그 수행입니다. 그러나 정토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을 요약한다면 세 단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극락세계의 구품연지(九品連池)에 연꽃이 아직 피어나지 않아 신심과 수행이 원만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이는 단지 물러남이 없는 탁월한 인연에 거처하는 측면에서만 요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불퇴위(不退位)라고 이름합니다. 두 번째는 극락세계에 연꽃이 피어나고 아미타불을 뵙는 것인데, 이는 십신위(十信位)가 원만하게 갖추어져 그 수행의 분야만큼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보고 정정취(正定聚)에 안주라는 것인데, 이야말로 진실한 불퇴위라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삼현위(三賢位)의 수행이 원만하여 십지 가운데서 초지에 깨달아 들어간 것인데, 거기에서 두루 원만하게 충만한 진여의 법신을 증득하고 끝없는 불국토에 태어납니다. 이는 본문의 후위(後位)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수행신심분은 끝이 났고, 다음은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입니다.
제5장 권수학이익분(勸修學利益分)
1. 바른 믿음을 권함
已說修行信心分 次說勸修利益分 如是摩訶衍諸佛秘藏我已總說 若有衆生
이설수행신심분 차설권수이익분 여시마하연제불비장아이총설 약우중생
欲於如來甚深境界 得生正信遠離誹謗入大乘道 當持此論 思量修習究竟能至無上之道
욕어여래심심경계 득생정신원리비방입대승도 당지차론 사량수습구경능지무상지도
[번역] 이미 수행신심분은 설명하였으므로 다음은 권수이익분을 설한다. 이와 같이 마하연의 모든 부처님의 비장(秘藏)은 내가 이미 총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매우 깊은 경계에서 올바른 신심을 내고 비방을 멀리 여의어 대승의 도(道)에 들어가고 싶다면, 마땅히 이 논서를 지니고, 사량하고, 수습하면 구경에 능히 위없는 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앞을 결론짓고 수행의 이익을 말하여 수행할 것을 권장하였습니다. 이 {기신론}으로써 여래의 광대하고 심오한 법을 총체적으로 포섭하고 이상에서 그것을 빠짐없이 밝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총체적으로 설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서 믿음의 이익과 비방의 손해를 밝혀 수행하도록 권장하였습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라고 한 다음부터는 문(聞)·사(思)·수(修) 삼혜(三慧)의 이익을 총체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즉, {기신론}을 듣고 받아 지니어 아는 것은 문혜(聞慧)이고, 그 내용을 깊이 사유하여 알아 가는 것은 사혜(思慧)이며, 직접 수행하여 깨달아 증득한 것은 수혜(修慧)입니다. 이 세 가지 지혜가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 주체적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설명했던 일심이문(一心二門)은 모든 부처님이 증오한 매우 심오한 경계이므로 깨달아 들어갈 객체적 대상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삼혜(三慧)로 수습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과 여러 보살과 선지식들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즐겨 듣고 가져서 그것을 깊이 사유하여 직접 스스로 체험해 깨달아 가는 과정을 총체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부파불교 수행법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수행의 과정으로 세속지를 완성하는 수행의 단계라고 하였습니다. 하여튼 다음에는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若人聞是法已 不生怯弱 當知此人定紹佛種 必爲諸佛之所授記 假使有人能化三千大千
약인문시법이 불생겁약 당지차인정소불종 필위제불지소수기 가사유인능화삼천대천
世界滿中衆生令行十善 不如有人於一食頃正思此法 過前功德不可爲喩
세계만중중생령행십선 불여유인어일식경정사차법 과전공덕불가위유
[번역]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문을 듣고 나서 겁약(怯弱)한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사람은 결정적으로 부처가 될 종자를 이어서 반드시 제불의 수기(授記)한 바가 됨을 알아야 한다. 가사 어떤 사람이 능히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하여금 십선을 행하게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일식경(一食頃)에 이 법을 올바로 사유함만 같지 못하여 앞의 공덕을 능가하여 비유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의 이익을 나타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법문을 듣고 나서 비겁하고 나약한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사람은 결단코 부처가 될 종자를 계승하여 반드시 모든 부처님이 수기를 받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이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불망어(不妄語)·불기어(不綺語)·불양설(不兩舌)·불악구(不惡口)·무탐(無貪)·무진(無瞋)·불악견(不惡見) 또는 불사견(不邪見) 등의 열 가지 선행을 행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밥 한 끼니 먹는 동안 이 법을 올바르게 사유하는 것이 보다 더 뛰어난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신론}에서 밝힌 일심(一心)의 진여(眞如)는 성불하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논을 믿고 받아들여 비겁하고 나약한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반드시 부처가 될 종자를 계승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문혜(聞慧)의 공능(功能)입니다. 다음에 사혜(思慧)의 이익을 따로 나타내었습니다. 십선법은 다함이 있는 유루의 법이지만 이 진여법에 일념이라도 신심을 낸다면 부처를 이룰 종자가 됨으로 그것은 어떤 유루의 공덕으로도 비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復次若人受持此論觀察修行 若一日一夜所有功德無量無邊不可得說 假令十方一切諸佛
부차약인수지차론관찰수행 약일일일야소유공덕무량무변불가득설 가령시방일체제불
各於無量無邊阿僧祇劫 歎其功德 亦不能盡 何以故 謂法性功德無有盡故 此人功德亦復
각어무량무변아승지겁 탄기공덕 역불능진 하이고 위법성공덕부유진고 차인공덕역부
如是無有邊際
여시무유변제
[번역]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논을 받아 지니고 관찰수행하기를 하루 낮과 밤 동안 하여 소유한 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어 설명할 수도 없다. 가령 시방의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각자 한량없고 끝없는 아승기겁토록 그 공덕을 찬탄하더라도 또한 다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른바 법성(法性)의 공덕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공덕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끝이 없다.
[해설] 여기에서는 수혜(修慧)의 이익을 따로 나타내었습니다. 다음으로 어떤 사람이 이 논문을 받아 지니고 관찰수행하기를 하루 24시간 동안 하여 소유한 공덕은 한량없고 끝없어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는 것입니다. 가령 시방의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각자 한량없고 끝없는 오랜 아승기겁의 세월동안 그 공덕을 찬탄한다 해도 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여(眞如)의 법성(法性)에 어울리는 공덕은 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그 사람의 공덕도 다시 이와 같아서 변제의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기신론}을 의지하여 수행을 하면 그 수행이 한량없고 끝없는 진여법성에 걸맞기 때문에 비록 하루 24시간 동안만을 수행한다 해도 그 공덕은 갓이 없으며, 진여법성은 다함이 없기 때문에 찬탄으론 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여(眞如)의 본성이 공(空)한 공덕도 역시 다하지 못함을 찬탄하는 것으로써 결론지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역대 조사들이 누누이 강조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진여의 본성이 공(空)한 이치를 스스로 체득하는 것만이 참다운 진여본성의 공덕에 계합(契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경(看經)을 하든 예배·참회·염불·참선을 하든 진여본성에 계합한 수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피상적으로 의례적으로 의식을 따르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행을 하든 자기 본래의 면목을 철관(徹觀)하는 수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비방함을 멀리 여윔
其有衆生於此論中毁謗不信 所獲罪報經無量劫受大苦惱 是故衆生但應仰信不應誹謗 以
기유중생어차론중훼방불신 소호죄보경무량겁수대고뇌 시고중생단응앙신불응비방 이
深自害亦害他人 斷絶一切三寶之種 以一切如來皆依此法得涅槃故 一切菩薩因之修行入
심자해역해타인 단절일체삼보지종 이일체여래개의차법득열반고 일체보살인지수행입
佛智故 當知過去菩薩已依此法得成淨信 現在菩薩今依此法得成淨信 未來菩薩當依此法
불지고 당지과거보살이의차법득성정신 현재보살금의차법득성정신 미래보살당의차법
得成淨信 是故衆生應勤修學
득성정신 시고중생응근수학
[번역] 그 어떤 중생이 이 논서 가운데서 훼방하고 믿지 않는다면 얻는 죄의 과보는 한량없는 겁을 지나도록 큰 고뇌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다만 마땅히 우러러 믿어야만 하고 마땅히 비방하지 않아야 한다. 깊이 스스로를 해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게 함으로써 일체 삼보의 종자를 끊어지게 한다. 왜냐하면 일체 여래께서 이 법을 의지하여 열반을 얻으셨고, 일체 보살의 인지(因地)의 수행을 하여 불지(佛智)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라. 과거의 보살이 이미 이 법을 의지하여 정신(淨信)을 성취하였고, 현재의 보살도 지금 이 법을 의지하여 정신을 성취할 수 있으며, 미래의 보살도 마땅히 이 법을 의지하여 정신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마땅히 부지런히 수행하며 배워야 한다.
[해설] 여기에서는 훼방하는 죄를 들어 엄격하게 훈계하고 수행하라고 권하고서 부처님과 보살들도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여 정신(淨信, Pra ada)과 불지(佛智)와 열반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입증하고 있습니다. 즉, 어떤 중생이 이 {기신론}에 대해서 훼방을 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얻은 죄의 과보로 한량없는 세월을 경유하면서 큰 고뇌와 고통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불자라면 우러러 믿고 비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스스로를 해치고 다른 사람도 해를 끼쳐 일체 삼보의 종자가 끊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일체 여래와 보살께서 이를 의지하고 수행하여 열반과 불지(佛智)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과거와 현재·미래의 보살이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성취했고 성취하며 성취할 수 있기에 중생이라면 믿고 부지런히 수행하며 배워야만 하겠습니다.
여기서 "어떤 중생이"라고 한 다음부터는 불신하는 죄를 들어 훈계함으로써 수행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이 논서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혜명(慧命)이며, 삼보가 될 종성(種性)이며, 중생의 법신(法身)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비방을 하고 믿지 않는다면 부처가 될 종자를 끊고 삼보를 단절하며 중생의 법신을 해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훼방은 자신을 해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해를 끼쳐 그 죄의 과보가 한량이 없습니다. 일체의 여래께선 이것을 의지하여 열반을 증득하셨고, 보살은 이를 의지하여 부처님의 지혜의 세계에 들어가 성불하게 되므로 굳이 믿기만 할 뿐 훼방하진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마땅히 알라"고 한 다음부터는 신심을 결론짓고 수행하라고 권하였습니다. 모든 부처님은 이미 이 법으로 인하여 성불하였으며, 삼세의 보살도 모두가 이를 의지하여 인지(因地)의 수행을 하였고 하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믿어 닦아야 하겠습니다.
제3 유통분(流通分)
회향송(廻向頌)
諸佛甚深廣大義 我今隨分總持說 廻此功德如法性 普利一切衆生界
제불심심광대의 아금수분총지설 회차공덕여법성 보익일체중생계
모든 부처님의 매우 심오하고 넓고 위대한 뜻,
제가 이제 분수를 따라 모든 지혜를 총괄하여 설하고,
이 공덕을 회향하오니 진리의 본성과 같아져서,
일체 중생의 세계가 두루두루 이익이 되게 하소서!
[해설] 여기에서는 총체적으로 결론짓고 그 공덕을 회향하였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매우 심오하고 매우 광대하며, 매우 위대한 의미를 마명보살은 지금 분수를 따라서 그 의미를 총체적으로 수지하여 설명하였고, 이 공덕을 회향하여 법성(法性)과 같이 일체 중생계에 두루 이익이 되길 발원하면서 유통분(流通分)을 삼았습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첫 구절은 대승의 의미를 결론지었고, 다음 구절은 의미를 서술한 문장을 결론지었으며, 뒤의 두 구절은 그 공덕을 회향하였습니다. 첫 구절에서 매우 심오하고, 광대하며, 위대하다는 것은 체(體)·상(相)·용(用) 삼대(三大)의 의미를 말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법계총상법문입니다. 지금은 그 의미를 일만일천여 단어로 남김없이 다 포섭하였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설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른바 "적은 문장으로 많은 의미를 포섭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논서를 지은 근본적인 의도는 중생들이 의심을 버리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일심법계인 진여의 본성과 중생계로 회향하여 두루두루 모두에게 이익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체 중생들이 진여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발기하고, 그것을 의지하고 수습하여 진여삼매(眞如三昧)를 성취하게 하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진여삼매에 의해서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른바 축원문에서 "삼처(三處)로 회향되어 실제로 원만하여지이다"하는 회향삼처실원만(廻向三處實願滿)에 해당하겠습니다. 여기서 "법성(法性)"이란 말은 진여(眞如)의 보리(菩提)를 완성하여 도달한 경지이며, "일체 중생계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였는데, 그 일체는 욕계·색계·무색계뿐만 아니라 거듭거듭 다함없이 펼쳐진 우주법계의 중생에게 이익을 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기신론}을 구조와 내용에서 볼 때에 일심(一心)·이문(二門)·삼대(三大) 등은 이론철학적인 부분으로 유심진여연기(唯心眞如緣起) 또는 여래장연기사상이라 할 수 있겠고, 사신(四信)·오행(五行)은 자력적인 윤리실천이며, [나무아미타불]의 육자(六字)회향은 종교적이고 타력적이고 신앙적인 것으로 종합적인 수행체계라고 하겠습니다. 나아가 본론은 소승에 대립되는 대승이 아니라 대승과 소승을 아우른 모든 교리(敎理)와 실천사상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론의 대요(大要)는 중생의 한 마음인 일심(一心)을 마음의 바탕과 마음의 양태로 나누어 이문(二門)으로 삼고, 마음의 바탕은 불변(不變)한 것으로 보고, 마음의 양태는 수연(隨緣)하지만 마음의 바탕인 본성의 공덕을 떠나지 않아 진여에 훈습(薰習)될 수 있다는 지혜의 작용인 삼대(三大)를 밝혔습니다. 이러한 훈습은 허망한 마음을 제거하여 진여에 계합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여 사신(四信)과 오행(五行)의 자타력(自他力)을 밝히고, 나아가 근기가 하열한 중생을 위해 타력염불의 방편도 설하였습니다. 다시 요약하면 불교의 당체(當體)와 나타난 현상 그리고 자비롭고 지혜로운 작용을 지적하여 그 현묘한 이치에 계합해 가는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상으로 기신론강의를 마치려 합니다. 본 논의 글은 쉽지만 법의 내용과 그 의미는 한 번 보고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자꾸 여러 번 반복해서 봄으로써 그 이치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주의 하셔야할 점은 기신론에 설해진 망념(妄念)을 가지고 정념(正念)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논은 비록 북방에 전해진 대승논서 가운데 최상의 위치를 점유하지는 못하였지만 매우 심오한 불교교리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과 한국의 여러 조사들께서 이 논에 관심을 가지고 천착(穿鑿)하여 불교의 이론과 신앙과 수행체계를 수립하여 의지하였습니다. 특히 중국 정영사 혜원스님과 화엄교학의 대성자인 법장스님과 우리 나라 원효성사의 3대소가 유명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능가경}과 {능엄경}·{금강삼매경}·{화엄경}, 그리고 부파칠론과 {아비달마구사론}·{중론}과 {섭대승론}·{구경일승보성론}·{대승장엄경론}·{유식삼십송}·{이입사행론}·{금강사매경론} 등을 참고해 본다면 큰 소득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주신 인연에 깊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부디 대승의 깨끗한 믿음과 물러남이 없는 실천을 통해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완성하시길 빕니다....나모아미타불
이상으로 대승기신론 강의를 마칩니다.
여러 번 자꾸 정독하시어 마음에 새기고 이해하여 실천하시길 빕니다.
'대승기신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승기신론(한글-원순역) (0) | 2019.04.07 |
---|---|
대승기신론(한문/한글-원순역) (0) | 2019.04.07 |
[스크랩]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13강 (0) | 2018.03.11 |
[스크랩]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12강 (0) | 2018.03.11 |
[스크랩]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11강 (0) | 2018.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