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스크랩]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11강

수선님 2018. 3. 11. 12:33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11강

 

                   

                                                                                집필자 관음정사주지 법상(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거룩하신 삼보(三寶)와 진여(眞如)에 귀의하옵니다.
  인간이란 정신과 육체의 결합으로 시간과 공간의 어느 한 지점을 점유하여 연속적으로 경유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편의로 설정한 시간은 이제 해를 바꾸어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모를 불안한 요소가 의식을 잠식하여 올해도 무사하고 건강하며 행복한 나날이기를 갈망하면서 기원합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엄습하는 불안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란 의지처(依支處)를 만들어 의존하면서 안정을 얻어 시공을 장식하려 합니다. 


  인간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의지처가 되는 것은 각자의 경험적 이해와 견해에 따라 다르겠지만, 불자가 공통적으로 삼는 것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실현한 분들을 의지하여 가장 안정된 상태를 이루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능을 제공하는 원리가 바로 진여(眞如)와 무명(無明)에 대한 완전한 이해의 선행조건입니다. 나아가서 이러한 불안을 해소한 존재에 대한 확신이 바로 수행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무명을 승화시켜 진여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여의 발현이 불성의 발현이고 불성의 개현(開顯)이 바로 삼보를 생생하고 활발발하게 하는 본래성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먼저 개척하여 실현한 존재가 바로 부처님이시며 승가이기에 우리는 이에 의존하면서 그와 같이 되려는 의식을 발하여 그 가르침을 공부합니다. 올해도 모든 불자의 가정에 무한 능력을 구족하신 불·보살님과 신장님들의 가피(加被)와 가호(加號)가 함께 하여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과 다달이 이어지길 삼보전에 비옵니다.    


  지난번에는 훈습의 의미와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서로 도와서 훈습(薰習)되는 양태에 대한 일부를 살펴보았고, 이번에는 훈습의 나머지를 살펴보고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에 대해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용훈습(用熏習)-지혜의 작용에 배어듦

 

用熏習者 卽是衆生外緣之力 如是外緣 有無量義 略說二種 云何爲二 一者差別緣 二者

용훈습자 즉시중생외연지력 여시외연 유무량의 약설이종 운하위이 일자차별연 이자

平等緣 差別緣者 此人依於諸佛菩薩等 從初發意始求道時 乃至得佛 於中若見若念 或

평등연 차별연자 차인의어제불보살등 종초발의시구도시 내지득불 어중약견약념 혹

爲眷屬父母諸親 或爲給使 或爲知友 或爲怨家 或起四攝 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 以起

위권속부모제친 혹위급사 혹위지우 혹위원가 혹기사섭 내지일체소작무량행연 이기

大悲熏習之力 能令衆生增長善根 若見若聞得利益故 此緣有二種 云何爲二 一者近緣

대비훈습지력 능령중생증장선근 약견약문득이익고 차연유이종 운하위이 일자근연

速得度故 二者遠緣 久遠得度故 是近遠二緣分別 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增長行緣 二
소득도고 이자원연 구원득도고 시근원이연분별 부유이종 운하위이 일자증장행연 이

者受道緣
자수도연

 

[번역] 용훈습(用薰習)이란 곧 중생의 외연적인 힘이다. 이와 같은 외연에 한량없는 의미가 있지만, 간략히 두 가지만을 설하겠다.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차별적인 조연이요, 두 번째는 평등한 조연이다. 차별적인 조연이란 이 사람이 제불보살 등을 의지하여 처음으로 뜻을 내어서 비로소 불도를 구한 때로부터 나아가 불과를 얻는 데에 이르기까지 그 도중에 혹 보기도 하며 혹 염하기도 하며 혹은 권속·부모·모든 친척이 되기도 하며, 혹은 급사가 되기도 하고, 혹은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 되기도 하며, 혹은 원수의 집이 되기도 하며, 혹은 사섭법(四攝法)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아가 일체 해야 할 한량없는 수행의 외연에 이르기까지도 대비로 훈습하는 힘을 내어 중생들로 하여금 선근을 더욱 자라나게 하여 혹 보기도 하고 혹 듣기도 하면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 연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근연(近緣)인데 신속하게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원연(遠緣)인데 구원(久遠)으로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근연과 원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증장행연(增長行緣)이며, 둘째는 수도연(受道緣)이다.

 

[해설] 여기서는 진여법신의 작용에 의해서 배어드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는 바로 발심(發心)하여 불도를 구하는 중생들을 부처님과 보살들이 외부에서 돕는 밖의 조연에 의해서 배어든 것입니다. 이러한 외연의 훈습하는 작용에 한량없는 의미가 있지만, 간략히 두 가지만 언급하고 있는데, 첫째는 분별사식의 훈습으로 발심한 범부와 소승에게 감응하여 훈습해 주는 차별하는 조연(助緣)의 훈습작용이며, 다음은 업식에서 훈습하여 수행하는 모든 보살을 위하여 평등하게 외연으로 훈습해 주는 평등한 조연의 훈습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두 외연의 훈습하는 작용은 제불보살이 진여법신을 증득하고 나면 자연히 불가사의한 지혜와 자비의 작용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중생들의 느낌이 부딪쳐 오는 대로 감응하여 나타나는 대비원력으로써 갖가지 몸의 형상과 부처님의 사업(事業)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중생들의 근욕성(根欲性)을 따라서 성취시키면서 발심하여 불도를 구하는 중생들을 위해 외부에서 돕는 조연의 훈습을 합니다. 이는 법신의 작용으로 진여의 작용입니다. 중생이 갖추고 있는 본각의 심체가 바로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법신입니다. 그 법신 자체가 동일하게 평등하므로 그 작용도 또한 동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 발심하는 진여훈습의 작용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낸 정도에 따라 모든 부처님이 그 훈습작용을 성취해 주는 외연을 감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차별적인 인연이란 삼승인(三乘人)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을 의지하여 처음 마음을 발하여 비로소 삼승의 도과(道果)를 구함으로부터 불과를 얻는 데에 이르기까지 수행하는 그 중간에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몸과 형상을 보기도 하며 그 공덕을 깊이 간절하게 생각하기도 하며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자비원력으로 중생을 포섭하여 받아들이기도 하고, 혹은 권속·부모·모든 친척이 되기도 하며, 낮은 곳에 거처하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혹은 심부름하는 급사가 되어 주기도 하고, 같은 도반(道伴)으로서 발심하기를 권하기도 하며, 혹은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 되기도 하며, 생사에서 공포를 느끼고 불도에로 들어가게 하려고 하기도 하며, 혹은 원수의 집안이 되기도 하며, 혹은 사섭법(四攝法)을 일으켜 그들을 섭수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공부에는 올바로 발심한 자에게는 모든 경계와 모든 존재가 불‥보살의 자비스런 나타남이라 하겠습니다.


  다음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이 수행해야 할 한량없는 수행으로부터 외부의 인연에 이르기까지 대비로서 훈습하는 세력을 일으켜서 중생들로 하여금 착한 근성을 더욱 자라나게 하여,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모습과 형상을 수행하다가 혹 뵙기도 하고 혹 그 음성을 듣기도 하면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중생을 성취시키는 외연은 망상의 의식적인 조작이나 인위적인 작위가 없는 지극히 자연스런 대비(大悲)로 훈습하는 위신력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중생들이 허망한 마음으로 조작하는 경지가 아니고, 삼신(三身) 가운데서 응화신(應化身)이 중생들이 처해 있는 개별적인 상황에 따라서 알맞게 작용해 주는 차별적인 인연입니다. 


  그리고서 앞에서 말한 차별적인 조연을 다시 설명하였습니다. 이 차별연의 의미를 시간적으로 구별하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근연(近緣)으로 신속하게 생사를 건널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원연(遠緣)으로 구원(久遠)의 오랜 세월을 수행하고서야 생사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근연과 원연을 분류하여 구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이 외연이 되어 삼승(三乘)의 수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수행을 증장하여 정관(正觀)으로 들어가게 하는 증장행연(增長行緣)이며, 둘째는 삼승의 수행하는 사람이 견도위(見道位)에 들어간 뒤에 직접 진여를 증득하게 하는 수도연(受道緣)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을 외연으로 훈습하여 구제하는 주체인 부처님의 교화를 시간적으로 멀고 가까운 차별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이 오래고 가까운 두 가지 바깥 인연인 조연의 훈습은 중생이 처음 발심하여 마지막 성불하기까지의 시종인과에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적인 훈습과정인 멀고·가까움을 말하였습니다. 가령 예를 든다면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전생에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 교주로 출현하였을 때 그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일승도(一乘道)를 이룰 외연의 종자를 심었다가 지금에야 그 열매가 성숙하여 각자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았는데, 이는 구연(久緣)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또 가령 부처님이 성도하여 사바세계의 교주로 머무시면서 영산회상에서 교화할 근기인 중생들이 부처님을 뵙고 새로 발심한 것은 가까운 인연이며, 그들 중생은 다시 근연을 통해 장래에 득도할 인연을 지었는데, 이는 시간적으로 먼 인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은 차별연을 총체적으로 시간적인 오램과 가까움의 측면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또 경전에 말씀하시길, "내가 지금 세간에 출현하여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일체중생에게 개시(開示)하여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은 믿게 하고, 이미 믿은 자들은 그 믿음이 더욱 자라나게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증장연에 해당하겠습니다. 다시 말씀하시길, "이미 믿음이 더욱 자라난 자들이 각자 여래가에 태어나 진여가 자라나게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수도연에 해당하겠습니다. 가령 수행의 위치에서 시간적인 원근을 요약한다면 이승삼현위(二乘三賢位)에서 더욱 자라나게 하는 차별적인 외연의 훈습력은 근연이며, 십지에서 불과를 성취하는 것은 원연에 해당하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구(久)·근(近)의 차별은 총체적으로 중생들 번뇌가 두텁고 엷은 정도에 따른 개별적인 상황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지, 진여본질의 세계에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문자의 차별에 집착하지 말고 그 의도를 잘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平等緣者 一切諸佛菩薩 皆願度脫一切衆生 自然熏習恒常不捨
평등연자 일체제불보살 개원도탈일체중생 자연훈습항상불사
以同體智力故 隨應見聞 而現作業 所謂衆生依於三昧 乃得平等見諸佛故
이동체지력고 수응견문 이현작업 소위중생의어삼매 내득평등견제불고

 

[번역] 평등연(平等緣)이란 일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모두가 일체 중생을 도탈(度脫)하기를 원하셨기에 자연스럽게 훈습하시면서 항상 (중생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동체(同體)의 지력 때문에 보고 들음을 따라서 출현하시어 업을 지으신다. 이른바 중생들이 삼매에 의지하여 이에 평등하게 모든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평등한 조연(助緣)을 밝히고 있습니다. 평등한 조연이란 일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은 일체 중생을 평등한 마음으로 고통으로부터 구제하여 해탈하기를 근본적으로 원하는 힘인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중생의 상황 즉, 근성과 역량에 따라 감응의 작용을 일으켜 자연스럽게 훈습하면서 상주불변하고 항구하게 중생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근본지(根本智)의 인연에 동체(同體)의 지혜로 항상 버리지 않고 훈습하는 위신력 때문에 중생들이 몸의 형상을 친견하거나 진리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이것이 수행하여 얻는 후득지(後得智)의 감응으로 나타나 온갖 불사를 짓습니다. 이는 이른바 십주(十住) 이후의 중생들이 삼매력에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의 법체의 역량이 평등함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평등연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모두가 일체중생이 생사의 세계를 건너 해탈하도록 수행의 인지에서 본래 서원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 성인과 범부의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에 동일한 진여 자체가 동일한 본체로 대비의 지혜인 근본지(根本智)로 항상 훈습하면서 중생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생은 모든 부처님의 한 마음 안의 중생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생각 생각에 훈습하여 아직까지 중생을 일념에서 잠시라도 버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 가운데 진여삼매(眞如三昧)와 관불삼매(觀佛三昧)에 들어가는 자가 있기만 하다면 그가 과거 숙세에 익혔던 견문(見聞)을 따릅니다. 그리고는 즉시 그들 삼매(sam dhi) 가운데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고 중생들의 도를 성숙시켜 성취시킵니다. 예를 든다면 보현보살이 한량없는 세계와 한량없는 중생들에게 두루두루 몸을 나타내는 것과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음성을 따라 감응하는 것과 지장보살이 중생의 원력을 따라서 조그만 선행을 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먼저 과보를 받게 하여 원력에 부응하게 하는 등의 이 모두가 평등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 체용합설(體用合說)-본체와 작용을 종합한 해설

 

此體用熏習分別 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未相應 謂凡夫二乘初發意菩薩等 以意意識熏

자체용훈습분별 부유이종 운하위이 일자미상응 위범부이승초발의보살등 이의의식훈

習 依信力故 而能修行 未得無分別心 與體相應故 未得自在業 修行與用相應故 二者已

습 의신력고 이능수행 미득무분별심 여체상응고 미득자재업 수행여용상응고 이자이

相應 謂法身菩薩 得無分別心 與諸佛智用相應 唯依法力 自然修行 熏習眞如 滅無明故

상응 위법신보살 득무분별심 여제불지용상응 유의법력 자연수행 훈습진여 멸무명고

 

[번역] 이 자체와 작용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아직 서로 호응하지 못한 것으로, 이른바 범부·이승·초발의보살 등이 의(意)와 의식으로 훈습하면서 신력(信力)에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할 수는 있지만, 아직 무분별심(無分別心)이 자체와 더불어 서로 호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 자재업(自在業)으로 수행하여 작용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진 못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미 서로 호응하는 것이다. 이른바 법신보살이 무분별심(無分別心)을 체득하여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작용과 더불어 서로 호응한다. 오직 법력(法力)만을 의지하여 자연히 수행하며 진여(眞如)를 훈습(熏習)하여 무명(無明)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먼저 진여의 자체와 지혜의 작용이 아직 상응하지 못함과 이미 상응한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진여의 자체와 지혜의 작용에 아직 상응하지 못함을 밝혔습니다. 이 진여 자체와 그 훈습하는 작용을 분별하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진여 자체와 그 훈습하는 지혜의 작용에 서로 호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범부와 이승인과 처음 뜻을 발한 보살 등은 오의(五意)로 훈습하고, 범부와 이승은 의식으로 훈습하면서 믿는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할 수 있을 뿐 아직 무분별심(無分別心)으로 진여의 자체와 더불어 서로 호응하진 못하기 때문이며, 진여의 자체를 증득한 데서 일어나는 자재업지(自在業智)로 수행하여 진여 그 작용의 훈습과 더불어 아직은 서로 호응하진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불보살이 능훈(能熏)하는 진여의 자체인 근본지(根本智)와 그 작용으로 얻은 방편지(方便智)는 평등하지만 훈습을 받을 대상인 중생의 근기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종합적으로 밝힌 것입니다. 즉, 범부와 이승과 초발의보살은 단지 오의(五意)와 의식(意識)을 의지하여 훈습할 뿐이므로 발심의 정도가 얕아 오직 십신(十信)의 힘을 의지하여 수행할지언정, 아직은 십지(十地)의 진여삼매에는 깊이 깨달아 들어가진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념의 분별이 없는 진여일심인 무분별심(無分別心)이 근본지인 진여자체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진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자체에 깨달아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작용인 부사의한 자재업지(自在業智)로 얻는 방편지를 얻어 자체훈습의 작용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훈습의 차별이 중생이 처한 개별적인 상황의 차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중생의 역량에 따라서 얕은 단계에서 수행한 과보는 얻었지만 보다 깊고 높은 단계에는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다음에 이미 상응하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는 진여 자체와 그 작용의 훈습에 이미 서로 호응하는 훈습입니다. 즉, 진여의 이치를 증득한 십지의 법신보살이 진여 자체인 무분별심을 체득하여 모든 부처님의 근본지(根本智)와 그 수행하여 얻은 작용인 방편지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여법신의 세력만을 의지하여 팔지(八地) 이상에선 일부러 의도적으로 수행하려는 노력이 없이도 자연히 수행이 되며 진여법신을 훈습하여 근본무명과 지말무명을 소멸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는 능히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와 구제를 받는 대상인 십지 이상의 보살이 진여 자체와 그 훈습하는 작용이 평등함을 종합해서 밝힌 것입니다. 그래서 십지 이상의 보살은 무분별심을 증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진여의 자체와 그 작용인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할 수 있는 자입니다. 법신보살은 진여법으로 훈습하는 세력만을 의지하여 의지적인 노력 없이도 임의로 운행하며 정진수행하기 때문에 진여법 자체와 그 작용인 훈습과 더불어서 서로 호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진여인 근본지로 진여의 평등한 이치를 관조하기 때문에 "진여 법신의 세력"이라 말하였고, 임의로 운행하며 의도적인 수행공부의 노력을 허비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수행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진여(眞如)의 근본지(根本智)로 자연히 수행하면서 진여를 훈습하기 때문에 근본무명과 지말무명인 이혹(二惑)을 소멸시켜 모든 부처님의 진여자체와 그 작용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종합해서 말하자면 초지에서 칠지(七地)에 이르기까지는 유상관(有相觀)이 많으므로 진여자체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고, 팔지(八地) 이후 무상관(無相觀)을 닦을 땐 그 작용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며, 이승인과 삼현위보살은 육식(六識)을 의지하여 진여의 이치를 비교하여 추리로 관찰하기 때문에 자체와 작용 어느 쪽에도 서로 호응하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은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서로 의지하여 훈습하는 것을 밝히는 가운데 염법·정법의 훈습은 이미 끝났고, 다음은 염법과 정법의 훈습이 끝까지 다하고 못한 의미를 밝힙니다.

 

 

* 염정(染淨)의 진부진(盡不盡)의 의미

 

復次染法 從無始已來 熏習不斷 乃至得佛後則有斷 淨法熏習 則無有斷
부차염법 종무시이래 훈습부단 내지득불후즉유단 정법훈습 즉무유단 
盡於未來 此義云何 以眞如法 常熏習故 妄心則滅 法身顯現 起用熏習 故無有斷
진어미래 차의운하 이진여법 상훈습고 망심즉멸 법신현현 기용훈습 고무유단

 

[번역] 다시 다음에 염법은 시작 없는 때로부터 이미 오면서 훈습이 단절하지 않다가 나아가 불과를 체득한 후에 곧 단절한다. 정법의 훈습은 곧 단절함이 없이 미래를 다한다. 이 의미가 무엇인가? 진여법으로 항상 훈습하기 때문이다. 허망한 마음이 곧 사라지면 법신이 나타나 용훈습을 일으키기 때문에 단절함이 없다.

 

[해설] 여기서는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의 훈습이 단절하고 단절하지 않는 의미를 총괄하여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염법의 훈습은 시작은 없어도 그 끝남이 있지만 진여정법의 훈습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명염법의 종자인 근본무명은 진여를 의지해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여는 시작이 없는 것이고 끝도 없게 됩니다. 이러한 무시무종(無始無終)인 진여의 청정한 진리의 훈습 때문에 무명이 끊겨 다하면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홀연히 일어난 한 생각의 무명이 사라져 다할 때 진여(眞如)인 진리의 몸이 환하게 나타나 그 자체에서 불가사의한 위대한 정법에 배어들어 익혀짐이 다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생멸문(生滅門) 가운데 이 망심(妄心)이 생멸(生滅)하는 인연의 양태라는 "시심생멸인연상(是心生滅因緣相)"에 대해 풀이하여 마쳤습니다. 이후부터 일심(一心)의 체(體)와 상(相)과 용(用) 삼대(三大)의 의미를 논서의 처음에 나타낸 이 마음이 생멸로 인연하는 모습에서 마하연(摩訶衍, 대승)의 자체와 모습과 그 작용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시심생멸인연상(是心生滅因緣相) 능시마하연자체상용고(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에 대해서 풀이하게 됩니다.

 

 

  제4절 삼대(三大)

 

  1. 체대(體大)와 상대(相大)

 

復次眞如自體相者 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 無有增減 非前際生 非後際滅 畢竟常恒

부차진여자체상자 일체범부성문연각보살제불 무유증감 비전제생 비후제멸 필경상항

從本已來 性自滿足一切功德 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 遍照法界義故 眞實識知義故

종본이래 성자만족일체공덕 소위자체유대지혜광명의고 변조법계의고 진실식지의고

自性淸淨心義故 常樂我淨義故 淸凉不變自在義故. 具足如是過於恒沙 不離不斷不異不

자성청정심의고 상락아정의고 청량불변자재의고 구족여시과어항사 부리부단 부리부

思議佛法 乃至滿足 無有所少義故 名爲如來藏 亦名如來法身
사의불법 내지만족 무유소소의고 명위여래장 역명여래법신

 

[번역] 다시 다음에 진여의 자체와 모습이란 일체 범부·성문·연각·보살·제불이 증감이 없다. 이전에 나지도 않았고, 이후에 소멸하지도 않는다. 필경에 영원하고 항상하여 본래부터 본성 자체가 일체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었다. 이른바 자체에 광대한 지혜광명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며, 법계를 두루 비추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분별하여 아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자성청정심이란 의미이기 때문이며, 상(常)·락(樂)·아(我)·정(淨)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청량하고 불변한 자유자재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항하사를 지나도록 여의지 않으며, 단절하지 않고, 다르지 않으며, 불가사의한 불법을 원만하게 갖춤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부족함이라곤 없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여래장(如來藏)라 하며, 또는 이름하여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고도 한다.

 

[해설] 여기에서는 삼대(三大) 가운데 먼저 진여(眞如)의 자체와 모습과 작용인 공능(功能)을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진여의 본질인 체대(體大)와 그 모습인 상대(相大)입니다. 일체 범부·성문·연각·보살·모든 부처님이 수행하여 증오(證俉)한 정도에 따라서 증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주하여 범부 이전에 나오지도 않았고, 항구하여 불과위(佛果位)의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경(畢竟)에 영원히 머물고 항구불변하여 원래부터 자성에 일체 공덕의 모습을 만족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법계(十法界)인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불 등의 전체가 진여(眞如)로써 그 자체와 모습을 삼고 있습니다. 이는 즉 본 논서의 첫 부분에서 언급했던 "일법계(一法界)인 대총상(大總相)의 법문체(法門體)"입니다. 이러한 법문체인 진여는 범부와 성인이 균등하게 타고나 미혹과 깨달음의 차별 어느 쪽에도 소속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깨달음을 따라 증가하지 않고, 범부의 미혹을 따라 감소하지도 않습니다. 진여는 본래 저절로 허망하지 않고 불변의 영원한 진리로 무명업식을 따라 제법의 차별로부터 나오는 것도 없는 불생(不生)이고, 인연의 부분적인 진리를 따라서 사라지는 것도 없는 불멸(不滅)입니다. 그리하여 광대하게 십법계를 포용하여 서로 걸림이 없이 융합하고 소통합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공덕을 만족하게 갖추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에 진여의 체대(體大)에 대한 공능(功能)입니다. 이른바 자체에 근본지(本覺智)의 밝음에 광대하고 원만한 지혜광명의 의미이기 때문이고, 진여(眞如)의 본각(本覺)은 법계를 두루두루 보편(普遍)하게 관조할 수 있게 비추는 공능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관조하는 작용을 일으킬 땐 진실하게 분별하여 아는 의미이기 때문이고, 견사(見事)의 이혹(二惑)과 육염(六染)을 여읜 자성은 자성청정심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자성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란 열반의 사덕(四德)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공능의 의미이기 때문이고, 자성의 덕은 옮겨 유전함이 없이 청량하고 변치 않고 자유자재한 공능의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항하사를 능가하는 본성의 공덕을 빠짐없이 만족하게 갖추어서 진여의 자체를 여의지 않고, 시작이 없는 옛적부터 상속하면서 단절하지 않았으며, 진여의 자체와 한결같아서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진여의 자체에 상즉(相卽)하여 있는 항하사와 같은 성덕의 불가사의한 불법을 원만하게 갖춘 데에 이르기까지 이르러 조금도 부족함이라곤 없는 의미의 공능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이라 명칭하며, 또는 여래법신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여 또는 여래의 자성이 갖춘 공덕의 양상을 말한 것입니다. 즉, 자성의 본각(本覺)에는 항상 광채가 빛나 관조하여 미혹되고 오염된 어두움이 어둡게 하지 못한다는 여실한 공(空)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체에 대지혜광명이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비로자나(毘盧蔗那)인 법신진여의 본질입니다. 본각의 참다운 지혜로 진여법계의 이치를 관조하여 그 이치를 끝까지 사무치지 않는 것이 없고, 방편의 지혜로 사물이 처해 있는 상황을 조감하여 사물의 작용마다 끝까지 추궁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물의 상황에 따라 완전하게 관조하면서도 생멸(生滅)의 인연을 잊고, 모든 육근(六根)을 의지해서 발현한 육경(六境)을 분별로 인식하는 망상을 여읩니다. 그러므로 "진실하게 분별하여 안다"고 하였습니다.


  여래장의 성품은 이혹(二惑)과 육염(六染)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자성청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시간적으로 과거·현재·미래가 다하도록 변함이 없는 것을 상(常)이라 말하고, 중생의 괴로움 속에 있어도 그 괴로움이 간여하지 않는 것을 낙(樂)이라 하며, 생사에 처하여도 그 생사에 구속되지 않는 것을 아(我)라 하고, 삼세육추의 생멸하는 모습으로 편력하면서도 오염되지 않는 것을 정(淨)이라고 합니다. 불타는 뜨거운 탐진치(貪瞋癡)의 번뇌를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청량(淸凉)이고, 생(生)·주(住)·이(異)·멸(滅)이란 일심의 사상(四相)으로 번뇌가 옮길 수 없기 때문에 불변(不變)이며, 악업이 얽어매지 못하므로 자재(自在)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항하의 모래와 같은 성스러운 덕상(德相)이 진여자체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불리(不離)라 하였고, 시작이 없는 이래로 상속하기 때문에 부단(不斷)이고, 진여와 더불어 평등하여 한결같기 때문에 불이(不異)이며, 자성과 그 지닌 덕상이 융합하고 융통하여 일다(一多)가 걸림이 없고 이사(理事)가 교대로 사무쳐서 염법(染法)·정법(淨法)이 상대적인 둘로 나뉘지 않기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성의 덕성은 모든 중생들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지만, 이를 깨달은 부처만이 끝까지 증득하기 때문에 불법이고, 제법을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어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만족이며, 한량없는 성덕을 함용하고 포섭할 수 있기 때문에 여래장이고 또는 여래법신이라고 명칭하였습니다. 또한 본 논서의 첫 부분에서 여래장심은 대총상대법문체(大總相大法門體)라고 하였기에 여래장심(如來藏心)으로 귀결한 것입니다. 다음에 이를 문답으로 거듭 밝힙니다.

 

 

* 체대상대(體大相大)를 거듭 밝힘

 

問曰 上說 眞如其體平等 離一切相 云何復說體有如是種種功德 答曰 雖實有此諸功德

문왈 상설 진여기체평등 이일체상 운하부설체유여시종종공덕 답왈 수실유차제공덕

義 而無差別之相 等同一味 唯一眞如 此義云何 以無分別離分別相 是故無二 復以何義

의 이무차별지상 등동일미 유일진여 차의운하 이무분별리분별상 시고무이 부이하의

得說差別 以依業識生滅相示 此云何示 以一切法 本來唯心 實無於念 而有妄心 不覺起

득설차별 이의업식생멸상시 차운하시 이일체법 본래유심 실무어념 이유망심 불각기

念 見諸境界故 說無明 心性不起 卽是大智慧光明義故 若心起見 則有不見之相 心性離

념 견제경계고 설무명 심성불기 즉시대지혜광명의고 약심기견 즉유불견지상 심성리

見 卽是遍照法界義故 若心有動 非眞識知 無有自性 非常非樂 非我非淨 熱惱衰變 則

견 즉시변조법계의고 약심유동 비진식지 무유자성 비상비락 비아비정 숙뇌쇠변 즉

不自在 乃至具有過恒沙等妄染之義 對此義故 心性無動 則有過恒沙等諸淨功德相義示

부자유 내지구유과항사등망염지의 대차의고 심성무동 즉유과항사등제정공덕상의시

現 若心有起 更見前法可念者 則有所少 如是淨法無量功德 卽是一心 更無所念 故滿足

현 약심유기 갱견전법가념자 즉유소소 여시정법무량공덕 즉시일심 갱무소념 고만족

名爲法身如來之藏 
명위법신여래지장

 

 [번역] <묻는다> 위에서 설명하기를, "진여 그 자체는 평등하여 일체의 모습을 떠났다"고 하였다. 어떻게 다시 자체에 이와 같은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설하는가? <답한다> 비록 실제로 이 모든 공덕의 의미가 있어서 차별의 모습은 없고 평등하고 동일한 한 맛으로 오직 하나의 진여일 뿐이다. 이 의미가 무엇인가? 분별이 없으므로 분별의 대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둘이 없다. 다시 무슨 의미로서 차별하여 설할 수 있는가? 업식의 생멸하는 모습에 의지하여 나타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일 뿐, 실제론 망념이 없지만 망심이 있어서 몰람결에 망념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본다. 그러므로 설하여 무명이라고 한다. 마음의 본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바로 그것이 대지혜광명의 뜻이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견을 일으키면 불견의 모습이 있지만 마음의 본성이 견을 여의면 곧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요동하면 진실하게 식별하여 아는 것이 아니며 자성이 없어서 비상(非常)·비락(非樂)·비아(非我)·비정(非淨)이다. 장열하는 번뇌로 쇠잔하여 변하면 자유자재하질 못한다. 나아가 항하사 등을 능가하는 망염의 의미를 갖추고 있기에 이 뜻을 상대함으로 심성이 요동함이 없으면 항하사 등을 능가하는 모든 청정한 공덕상(功德相)의 의미로서 시현(示現)할 수가 있다. 만일 마음이 일어나서 다시 목전의 법을 생각할 것을 보는 자는 곧 부족한 것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법의 한량없는 공덕은 곧 일심이므로 다시 생각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원만한 구족(具足)이기에 이를 이름하여 법신여래(法身如來)의 장(藏)이라고 한다.

 

[해설] 여기서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입장에서 진여의 작용을 자문자답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물음으로 앞에서 설명하길, "진여 그 자체는 평등하여 일체의 차별적인 모습을 떠났다고 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시 진여의 자체에 이와 같은 갖가지 공덕의 차별적인 모습이 있다고 하는가"라고 자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답하길, 비록 실제로 이러한 모든 공덕의 모습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텅 빈 진여(眞如)의 자체에는 차별적인 모습이란 없고 평등하고 한결같은 진여일 뿐이라고 간결하게 답하고서 다시 의문을 제기 하면서 답하였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인가? 허망하게 분별하는 주관적인 허망한 마음이 없기 때문에 분별할 객관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주관·객관의 상대적인 의존관계가 없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진여자체와 그 공덕상은 두 모습이 없다고 제기한 의문에 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진여의 자체와 그 지닌 공덕상이 둘이 아니라면 다시 무슨 의미 때문에 차별적인 공덕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업식의 생멸하는 모습에 의지하여 그것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진여는 본래 허망한 생각으로 요동하지 않아 차별적인 모습이란 없는데도 공덕의 모습인 이 의미는 무엇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인 유심(唯心)일 뿐, 실제론 허망한 생각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허망한 업식심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무명의 불각(不覺)으로 인하여 허망한 생각을 일으켜 모든 차별적인 경계를 주관이 보기 때문에 이를 무명의 업식심이라고 설명하지만, 마음의 본질에서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바로 그것이 대지혜광명의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심성에서 허망한 견해를 일으킨다면 보지 못하는 모습도 있겠지만, 심성이 허망한 견해를 여읜다면 바로 법계를 두루두루 관조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무명의 망심인 염법을 의지하여 진여정법에 상반되었으므로 진여엔 망심의 상대인 대지혜광명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허망한 마음으로 요동하면 진실하게 식별하여 아는 것은 아니며, 허망한 마음으로 움직이는 염법은 자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망상으로 요동하면 망상이며 망상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망상은 실제의 자성은 없이 움직였다 하면 생멸염법의 인연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알 수 있는 것은 망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진실하게 식별하고 알아 염법을 여읜 진여정법이라는 점입니다.


  나아가 상(常)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정(淨)도 아닌 심성을 태우는 삼독의 뜨거운 네 가지 전도(顚倒)된 번뇌가 망염으로 천류하면서 쇠잔하며 변하면서 업에 속박되어 자유자재하질 못하게 됩니다. 이 염법에서 진여로 다시 돌이킨다면 진여자체엔 네 가지 전도(顚倒)된 번뇌의 반대인 진상(眞常)·진락(眞樂)·진아(眞我)·진정(眞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나아가서는 항하사를 능가하는 허망한 오염의 의미를 갖추고 있는데, 이 의미를 상대적으로 마주하기 때문에 심성이 허망한 생각으로 요동하지 않으면 항하사를 능가하는 모든 청정한 공덕상(功德相)의 의미로서 나타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허망한 마음을 일으킴이 있어 허망한 생각으로 분별할 만한 목전의 법을 다시 본다면 진여의 본성공덕에 부족한 오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법의 한량없는 공덕은 바로 일심(一心)이므로 다시 일심 밖에서 허망한 생각으로 분별할 만한 대상의 세계란 본래로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에 청정한 공덕상이 빠짐없이 만족한 것입니다. 이를 법신여래를 간직한 곳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앞의 여실공(如實空)의 진여자체만을 집착하여 여실불공(如實不空)인 그 공덕상을 의심하며 따져 물었던 것입니다. 이상에서 진여의 체대와 상대의 풀이는 끝났고, 다음에서는 진여의 지혜작용인 용대(用大)를 풀이합니다.

 

 

  2. 용대(用大)

 

復次眞如用者 所謂諸佛如來 本在因地 發大慈悲 修諸波羅蜜 攝化衆生 立大誓願 盡欲

부차진여용자 소위제불여래 존재인지 발대자비 수제바라밀 섭화인지 입대서원 진욕

度脫等衆生界 亦不限劫數盡於未來 以取一切衆生如己身故 而不取衆生相 此以何義 謂

도설등중생계 역불한겁수진어미래 이취일체중생여기신고 이불취중생상 차이하의 위
如實知一切衆生及與己身 眞如平等無別異故 以有如是大方便智 除滅無明 見本法身 自
여실지일체중생급여기신 진여평등무별이고 이유여시대벙편지 여멸무명 견본법신 자
然而有不思議業種種之用 卽與眞如等遍一切處 又亦無有用相可得 何以故 謂諸佛如來

연이유부사의업종종지용 즉여진여등변일체처 우역무유용상가득 하이고 위제불래여 

唯是法身智相之身 第一義諦無有世諦境界 離於施作 但隨衆生見聞得益故說爲用
유시법신지상지신 제일의제무유세제경계 이어시작 단수중생견문득익고설위용

 

[번역] 다시 다음에 진여의 작용이란 이른바 제불 여래께서 본래 인지(因地)에 계시면서 대자비심을 발하시어 모든 바라밀을 닦아 중생을 포섭하여 교화하시고, 대서원을 세워 다 평등하게 중생계를 제도하여 해탈시키고자 하시고, 또한 겁수(劫數)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를 다하며, 일체의 중생을 자기 몸과 같이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의 모습을 취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무슨 의미 때문인가? 이른바 여실히 일체중생과 더불어 자기 몸이 진여로 평등하여 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방편지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제거하여 소멸하고 본래의 법신을 보면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갖가지 작용이 있다. 곧 진여와 더불어 평등하여 일체처에 빠짐이 없으며, 또한 역시 작용하는 양태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른바 제불여래는 오직 법신지상(法身智相)의 몸일 뿐이고, 제일의제(第一義諦)엔 세제(世諦)의 경계가 없어 시위작용(施爲作用)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단만 중생의 보고 들음을 따라서 이익을 얻게 할뿐이기 때문에 작용한다고 설한다.

 

[해설] 이 앞에서는 진여의 본체와 형태를 논하였고, 여기서는 진여의 작용을 논한 것입니다. 모든 존재에 본체와 양태가 있다면 그 작용도 있습니다. 즉, 마치 흙이 모든 물건의 형태를 이루는 바탕이라면, 그 흙에 의해서 이루어진 모습이 있고, 그것이 작용하는 기능이 있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여의 작용도 이것을 인격화해서 제불여래의 오묘한 지혜의 작용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는 불교가 이론에만 치중하는 철학과는 달리 종교적인 측면에서 실천수행을 논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여에 대해서 다른 종교에서는 우주의 실상을 본체와 양태의 관계를 현상적인 실재에 드러난 우주삼라만상의 미묘한 작용을 인격화해서 신으로 표현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를 제불여래의 지혜와 자비의 작용으로 본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 즉 여래께서는 부처가 되는 근본 요인을 닦는 보살이 되었을 때에 대자비심을 내어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여 일체중생을 포섭하여 교화하기고, 부처의 경지에 이르도록 원대한 서원을 세워 겁수(劫數)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의 궁극까지 시방삼세의 모든 중생을 다 평등하게 자기 몸과 같이 여기시어 제도하여 해탈시키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몸을 취하는 않는데, 그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의 세계는 일체중생과 더불어 부처님의 몸이 진여로 평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대한 방편의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근본무명을 소멸하여 본래적인 진리의 몸을 보고 증득하여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지혜의 작용을 발휘한다고 논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여와 더불어 평등하여 일체의 우주법계삼라만상에 빠짐없이 존재하면서 작용하지만 그 작용의 양태는 얻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를 갖춘 진리의 몸으로 일정한 형태가 없기 때문이고, 제일의제(第一義諦)인 열반·진여·실상·중도·법계·진공의 심오한 일정한 형태가 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일정한 모습이 없는 찰라적으로 있는 세제(世諦)의 경계가 없어서 무위(無爲)로 작용을 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에 상응하여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에 지혜의 작용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은 삼대(三大)의 원론적인 이론이고, 다음에는 삼대의 구체적인 설명으로 불신(佛身)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 지점을 연속적으로 통과하는 연기적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람직한 만남을 추구하면서 소중한 인연이길 고대합니다. 모든 존재가 좋은 인연 또는 선한 인연으로 시간과 공간을 잘 가꾸어 아름답고 훌륭하게 장식되길 소망합니다. 지극히 즐겁고 행복한 만남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의 만남입니다. 이 인연을 통해서 우리는 우주의 나그네가 아닌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올해도 불자님들의 가내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피력이 늘 함께 하여 모든 불안하고 불행한 일들이 평온한 시간과 공간으로 되길 축원하옵니다....나무아미타불

 

 

출처 : 청산백운
글쓴이 : mang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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