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단계
1) 색계(色界)의 4선정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전주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 사마타 수행에는 여덟 가지 단계의 선정이 있다. 여기에는 색계 4선정과 무색계의 4선정이 있다. 각 단계마다 다른 특성들이 있다. 선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즉 ① 위타카 (겨냥하는 마음) ② 위짜라 (고찰하고는 지속하는 마음) ③피티 (환희심) ④수카 (행복감) ⑤사마디 (일념/삼매)가 있다.
초선정(初禪定)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 중 ① 위타카와 ②위짜라가 현저하게 나타나며 피티(환희)와 수카(행복감)가 일어난다. 피티는 바라는 것을 성취함에 따른 만족감이라면, 수카는 성취했을 때 오는 실질적인 체험이다. 마음이 5장애로부터 벗어남에 따라 마음은 보다 더 효과적으로 집중할 수 있고 그 결과 5장애는 더욱더 침범하지 못하게 된다. 청정도론에서는 피티와 수카를 이와 같이 설명한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 오는 환희가 피티이고 물을 먹었을 때 오는 시원함이 수카이다.” 초선정이 숙달되면 자유자재로 원하는 시간만큼 선정에 들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자주 넘어지지만 계속 연습하면 숙달된다. 수행에서 통달해야 할 것이 있다. 즉 ①입정(入定) ②성취(成就) ③선정(禪定)의 시간 ④출정(出定) ⑤다시 살펴보는 것 이것은 모든 선정수련(I~8선정)에 해당한다.
2선정(二禪定)
초선정에서 현저했던 위짜카와 위짜라가 고요하게 되면서 2선정으로 들어간다. 피티·수카·사마디와 함께 일념이 되어 내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 초선정과 2선정의 차이점을 보면 초선정의 경우에는 5장애로부터 보호의 성격이 강한 반면 2선정에서 피티가 현저하면서 집중 상태가 일어난다. 초선정에서 2선정으로 나아갈 때는 지금까지 이용했던 주재를 이용하든가 아니면 다른 알맞은 주재를 이용해도 된다 (이것은 4선정까지 적용된다). 이 주재로서 배움의 상, 고정된 상, 우파자라 사마디, 앗파나 사마디로 나아가는데 숙달 될수록 거치게 되는 단계적인 시간 길이는 짧아진다.
마음은 더욱더 예리해지고 집중력은 깊어간다. 깊어진 체험에서 오는 분명한 확신을 얻게 된다. 계속 수행한다면 부처님이 약속한 결실을 얻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환희와 정신적 육체적 평온함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때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즐거움에 집착할 위험이 있다. 지금까지의 삶 중에서 가장 깊은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은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진보는 할 수 없다. 이때의 환희나 즐거움을 분명하게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집착이 일어나면 즉각 제거하고 배의 움직임(혹은 사념처 중 다른 주제) 관찰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면 계속 진보할 수 있다.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라.
3선정(三禪定)
환희가 점차 줄어들고 알아차림과 집중력이 계속 깊어진다. 현상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점점 깊어진다. 7각지 중 평등각이 나타난다. 마음은 순경계(즐거움), 역경계(불쾌함)에 흔들리지 않고 몸과 마음에서 깊은 평온이 일어난다. 수행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몇 시간이고 앉아서 좌선할 수 있다. 몸은 청정해지고 가벼우면서도 건강해 진다. 이것이 3선정의 특성이며 행복감과 일념의 요소가 현전한다. 현상의 생과 멸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은 더욱더 깊어간다.
두 번째 선정에서 세 번째 선정으로 나아감은 수행상의 대전환점이다. 보통의 경우, 수행자는 마음이 설레이는 흥분이나 전율에 자연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피티 (환희 )가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즐거움의 요소 중 하나이다. 이것은 마음에 물결을 일으킨다. 이것은 수행의 사춘기이다.
이것을 체험할 때 틀림없이 정진력을 향상시킨다. 가능한 한, 주의 깊게 관찰해야한다. 수행자가 이러한 현상에 집착하는 한, 더 이상의 진보는 없다. 경전에는 이것을 어미 소와 송아지 (2선정)에 비유한다. 어미 소가 송아지를 제때에 젖을 떼지 않으면 사람에게 많은 젖을 줄 수 없게 된다. 세 번째 선정에서는 행복감의 절정에 이르게 된다. 가장 달콤하다. 그렇지만 수행자는 집착하지 않고 무심하게 계속 성성적적(醒醒寂寂)하게 관찰해 나가야 한다. 그러면 통찰은 더욱더 예리해지고 명료하게 될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를 지나 ‘사라짐의 지혜’의 단계로 접어듦에 따라 대상의 처음과 중간 부분이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마음은 현상이 계속해서 사라져가는 부분만을 감지한다. 알아차리는 순간 즉각 사라진다. 종종 몸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오직 사라져가는 현상만이 계속하는 것 같다. 수행자가 혼란하거나 당황해 하는 수가 있다. 왜냐하면, 너무나 빨리 사라지는 현상에 당황해 하고 불안 해 하기 때문이다. 대상을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사라져 버린다. 빈 허공만 남긴 채 그 다음 현상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버린다. 현상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모르는 채 계속 사라짐만 보게 된다. '무엇이 일어났는가?' 울 수도 있다. 지금까지 잘해 왔는데 이제는 조절할 수도 없고 하나도 제대로 관찰할 수도 없다. 이때는 냉정하게 계속적인 현상의 흐름을 주시해야 한다. 이것을 '사라짐의 지혜'의 단계라 부른다. 여기에는 더 이상 육체적, 정신적 행복감이나 평온함이 없고 육체의 고통이나 불편함이 없다. 다만 중립적인 무심한 상태의 마음이다.
4선정(四禪定)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가 성숙되고 있는 동안에 두 번째 선정의 환희는 세 번째 선정의 요소인 행복감에 양보한다. 보다 부드럽고 미묘한 평온함이다. 세 번째 선정이 네 번째 선정으로 진보했을 때는 평등심과 일념만이 현전한다.
마음은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으며, 편안하지도 불편하지도 않고 무심한 평등심이 일어난다. 평등심은 마음을 균형시키는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다. 마음은 완전히 청정하고, 예리하고 날카롭다. 현상의 미묘한 성질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명료함과 함께 감지된다. 이러한 것은 초선정 ·2선정 ·3선정에서도 있어 왔지만 더욱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성질에 의해 감추어져 왔던 것이다. 마치 태양이 있으면 달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선정의 각 단계는 행복감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초선정에서는 5장애를 떨쳐버리고 보호되어 있는 즐거움이다. 두 번째는 선정에서는 집중의 행복감이다. 좋은 집중은 환희의 형태로 일어난다. 세 번째 선정은 평온한 행복감으로 알려져 있다. 네 번째 선정에서는 지해의 행복감을 경험한다.
사마타 선정은 분별·관념과 착(着)이 따라다니는 유위법(有爲法)인 반면 위빠싸나 선정은 분별 ·관념과 착을 제거하면서 지혜를 계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정은 모두 조건화된 상대적인 현상의 영역이다. 이러한 영역을 초월하면 궁극의 행복, 실재적인 행복을 맛본다. 그것이 위빠싸나 수행의 궁극적인 대열반(Pari-flibbana)이다.
2)무색계(無色界)의 선정(禪定)
지금까지 살펴 본 색계의 4선정도 감각적인 인식과 마음의 자극을 정화했지만 아직도 어느 정도의 물질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주제를 집중의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반면 무색계의 4선정은 인간의 환경을 둘러싸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내·외적 요소들을 뛰어넘어 지극히 미묘한 의식의 상태로 들어간다. 이것이 형상이 없는 비물질적인 선정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5선정(무색계 초선정=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색계의 4선정을 성취했지만 아직도 물질적인 요소들을 모두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색계의 선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색계의 선정은 무색계의 선정보다 섬세하지 못하고 거칠은 면이 있기 때문에 4선정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공무변처로 집중을 돌려야 한다. 처음 대상에 집중한 후에 그 대상을 최대한으로 멀리 확장시켜서 공무변처로 집중을 전환함으로써 물질적인 대상을 제거한다. 이때 물질적 대상을 제거할 때는 이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고 다시 살펴보지도 않고 오로지 집중을 공무변처 쪽으로 향한다. 예를 들면, 마치 독사에 쫓겨서 겁에 질려 정신없이 도망간 사람이 있을 때 그가 나뭇가지나 땅위에서 독사와 비슷한 형체를 보면 겁이 나서 얼른 고개를 돌리듯이 색계의 대상에서 공무변처로 향하는 것도 이와 같다 이렇게 하여 무색계의 첫 번째인 공무변처로 성취한다.
6선정(무색계 2선정=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
5선정에서 나온 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5선정의 상태를 다시 살펴 본후 아직도 보다 높은 단계의 수준만큼 평화롭지 못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이것은 1선정에서 8선정까지는 모든 과정에서 이와 똑 같은 식으로 살펴봄) 공무변처를 바탕으로 해서 일어났던 식무변처에 집중한다. 즉 공무변처정에 머물며 현저하게 나타났던 의식에 집중한다. 이렇게 하여 식무변처의 근접삼매와 고도의 삼매를 성취하게 된다. 공무변처를 완전히 뛰어 넘게 됨에 따라 식무변처에 머물게 된다.
7선정(무색계 3선정=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7선정은 글로 표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6선정에서 나온 후, 아직도 다음 단계의 선정 수준만큼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을 살펴보고 무소유처로 집중을 전환한다. 이것을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체험하기는 어렵다. 수행이나 철학에서 ‘0’의 순자나 무(無)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인식하기 어렵다.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유해서 설명했다.
“법당에 승려들이 모여 있는 것을 한사람이 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승려들이 회함을 끝내고 모두 돌아간 후 그 사람이 돌아와서 문 입구에서 법당을 봤을 때 거기에는 오직 아무것도 없는 격리되어 있는 빈 상태만 있다. 그 사람은 그 많은 승려들이 죽었거나 이곳을 떠나갔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만 없는 것만 바라볼 뿐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무소유처정의 근접삼매와 고도의 삼매를 성취한 후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을 뛰어넘어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 머문다.
8선정(무색계 4선정=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7선정도 인지하기가 어려운데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8선정을 묘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상(想)도 아닌 비상(非想)도 아닌 상태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오직체험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청정도론의 설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7선정을 체험한 수행자는 보다 높은 단계의 8선정을 목표로 나아간다. 상(想)은 병이며, 종기이며, 창살과 같은 것이다.”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는 평화스럽고 장엄한 것이다. 그리하여 무소유처정의 집착을 버리고 비상비비상처의 평화로움으로 집중을 향한다.”
이렇게 8선정을 완전히 성취하게 된다. 그러나 8선정은 요가·수피·도가 등의 수행법과 본질적으로 틀린다고는 할 수 없다. 부처님 자신도 깨치기 전에는 이 수행법을 통달했지만 만족할 수 없어 두 분의 스승을 버리고 보리수나무 아래로 갔던 것이다.(8선정에 대한 설명은 개요만 살펴봤다. 체험으로 수행하고 싶은 사람은 선정과 위빠사나를 완전히 통달한 선지식 밀에서 수행하길 바란다. (더욱 자세한 설명은 1부 부처님의 견성체험담과 청정도론 참조) 그 수행법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법이다.
멸진정(滅盡定), 오매일여(寤寐一如) 이상의 경지
사마타 수행에서는 8선정이 최고의 단계이다. 여기에서 소개할 멸진정은 사마타의 8선정과 위빠싸나의 아나함(불환과 不還果) 이상의 경지를 성취한 사람 (구경각 아라한)이 누릴 수 있는 경지이다. 이것은 지고의 장엄한 선정이다. 이 멸진정은 비상비비상처정의 성취와 아나함 이상을 성취한 상태이므로 모든 의식과 정신작용·감정·인식 등이 일시적으로 정지된 상태로 엄격히 구분된다. 8선정만 수련하면 비상비비처정에만 머문다. 위빠싸나만 수련하면 아나함, 아라한과에만 도달한다. 이 모두를 수련한 사람은 멸진정에 든다. 초선에서 8선정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지혜로써 삼법인을 철견하고 8선정을 성취한 후 멸진정(滅盡定)에 든다. 실제로 이 양자 모두를 성취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위빠싸나 지혜 수련으로 열반을 성취한 사랑에게는 사마타 선정은 관심이 없고 마치 어린애들 장난처럼 생각한다.
청정도론에서는 멸진정에 드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것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수행자는 사마타의 정(定)과 위빠싸나의 지혜[慧]로써 1선정에서 7선정까치 차례로 올라간다. 매번 단계의 선정에 들어서 묘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삼법인을 관찰한다. 이렇게 하여 7선정까지 들어간다. 7선정에서 나온 후, 얼마동안 멸진정에 머물 것인가를 미리 마음으로 시간을 결정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 8선정에 든 후 바로 멸진정으로 나아간다. 이 상태에서 7일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의식과 신체의 기능이 정지되어 마치 죽은 사람같이 보인다.”
중부경전에서 사리풋타와 다른 비구와의 대화에서 멸진정과 죽은 상태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죽은 사람의 경우는 목숨이 끝나고 몸(호흡)·말(생각·의식) 정신적 기능이 모두 파괴되고 몸에 꼭 필요한 열도 다 소진된다, 그러나 멸진정에 도달한 사람의 경우는 몸(호흡)·말(의식)·정신적 기능(行)이 정지되었지만 목숨이 다한 것은 아니다. 몸에 꼭 필요한 열도 다 소진된 깃이 아니고 기능들도 파괴되어 버린 것이 아니다."
선문정로에서 성철스님은 멸진정을 '사중특활(死中得活)' '승묘경계(勝妙境界)'로 설명하여 구경각 이전의 '오매일여(寤寐一如)'와 유사한 경계로 보았으나 경전상의 멸진정은 오매일여와. 구경각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고 분리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선문정로의 내용을 간추려보겠다.
“일념불생(一念不生)한 앞뒤가 끊어진 경계를 규봉은 돈오돈수라했다. 그러나 명안종사들은 승묘경계라 하여 배척했다. 승묘경계도 대병(大病)이니 정안지식(正眼知識)을 참견하여 심신이 적멸한 사지(死地)에서 대활하지 않으면 정오가 아니다. 이 경계에도 언구(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대병이다. 승묘경계(勝妙境界)에도 오매일여의 몽중일여(7지)와 숙연일여(8지)가 있는 것과 같이 7지 무상정(無想定)과 8지 멸진정(滅盡定)이 있다. 여기에서도 불조공안은 투과 못한다. 6식의 거친 의식이 멸진한 8식의 무기가 대사(大死)이다. 이 대사의 무기까지 영멸해야 진대사(眞大死)이고 상적상조(常寂常照)이다. 이것이 구경열반이다.”
멸진정 ·우상정 ·무소유정의 차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라자가하 성에 노니시면서 죽림 칼란다 동산에 계시었다. 그때에 존자 사리풋타는 오후에 연좌에서 일어나 존자 마하 코오티라가 있는 곳으로 가서 문안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사리풋타 존자는 말하였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묻고 싶은 일이 있는데 들어 주겠소" 코오티라 존자는 사뢰었다 "사리픗타 존자여! 마음대로 물으시오 나는 들은 뒤에 생각해 보리다. "존자 사리풋타가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착하지 않은 것[不善]은 착하지 않다고 말하고 착하지 않은 뿌리[不善根]는 착하지 않은 뿌리라고 말하는데 어떤 것이 착하지 않는 것이며 어떤 것이 착하지 않은 뿌리인가요?"
"몸의 악찬 행과 입과 뜻의 악한 행은 착하지 않은 것이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착하지 않은 뿌리요. 이것을 착하지 않은 것이라 하고 이것을 착하지 않은 뿌리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존자 사리풋타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착한 것은 착하다 말하고 착한 뿌리는 착한 기관이라 말하는데, 무엇이 착한 것이며 무엇이 착한 기관인가요?"
"몸의 묘한 행과 입과 뜻의 묘한 행은 착한 것이요 탐욕과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착한 뿌리요 이것을 착한 것이라 하고 이것을 착한 뿌리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지혜는 지혜라 말하는데 어떤 것이 지혜인가요?”
"이러한 것을 알기 때문에 지혜라 하오. 어떤 것을 아는 것인가. 괴로움의 진리를 알고 이 괴로움의 집기를 알며 이 괴로움의 멸함을 알고 이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을 아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알기 때문에 지혜라 하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존자 사리풋타는 이렇게 찬탄 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는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식별(識別)은 식별이라고 말하는데 어떤 것이 식별인가요?”
코오티라 존자는 대답하였다. "식별은 식별하기 때문에 식별이라고 말한다. 어떤 것을 식별하는가, 색을 식별하고 소리를 식별하고 냄새를 식별하고 맛을 식별하고 촉감을 식별하고 법을 식별하는 것이다. 식별은 식별하기 때문에 식별이라 하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픗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지혜와 식별의 이 두 법은 합해지는 것[合]인가, 갈라지는 것 [別]인가. 또는 이 두 법을 따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요?"
"이 두 법은 합해지는 것으로서 갈라지는 것이 아니요. 또 이 두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없는 것이요."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아는 것을 당신은 무엇으로써 아는가요?"
"아는 것을 나는 지혜로써 아오.(알아차림이 지혜(반야)의 전주곡이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푼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지혜는 어떤 뜻이 있고 어떤 훌륭함이 있으며 어떤 공덕이 있는가요?"
"지혜는 싫어하는 뜻이 있고 욕심이 없는 뜻이 있으며 진리를 보는 뜻이 있소."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어떤 것이 바른 소견인가요?"
"괴로움을 참답게 알고 괴로움의 집기를 알며 괴로움의 멸함을 알고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을 알면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하오." (정념(알아차림)에서 정견(正見)이 나온다. 정념은 8정도를 내포한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인연으로 바른 소견이 바른 소견이 생기는 가요? 두 가지 인연으로 바른 소견이 생기오. 어떤 것이 둘인가. 첫째는 남에게서 듣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요. 이것을 두 가지 인연으로 바른 소견이 생기는 것이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존자 사리풋타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거둠이 있어 바른 소견을 거두어 마음해탈의 결과와 슬기 해탈의 결과를 얻고 마음 해탈의 공덕과 슬기 해탈의 공덕을 얻는 가요?"
"다섯 가지 거둠이 있어 마음 해탈의 결과와 슬기 해탈의 결과를 얻고 마음 해탈의 공덕과 슬기 해탈의 공덕을 얻소. 어떤 것이 다섯이오. 첫째는 진리의 거둠이요 둘째는 계의 거둠이며 셋째는 널리 들음의 거둠이오, 넷째는 그침의 거둠이며, 다섯째는 관찰의 거둠이오, 이것을 다섯 가지 거둠이 있어 바른 소견을 거두어 마음 해탈의 결과와 슬기 해탈의 결과를 얻고 마음 해탈의 공덕과 슬기 해탈의 공덕을 얻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어떻게 미래의 존재 [有]가 생기는 가요?"
"어리석은 범부는 무지하고 들은 것이 적고 무명에 덮이고 애욕에 얽매이고 착한 벗을 만나지 못하고 거룩한 법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법을 모시지 못하고 그러므로 미래의 존재가 생기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어떻게 미래의 존재가 생기지 않는 가요?"
"만일 무명(無明)이 이미 다하여 혜명(慧命)이 생기면 반드시 괴로움이 다할 것이니 그러므로 미래의 존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느낌이 있는 가요?
"세 가지 느낌이 있소. 곧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소. 이것들이 무엇을 인연하여 있는가 하면 부딪침을 인연하여 있소"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느낌[受]과 생각[想]과 의도[思]의 이 세 가지 법은 합해지는 것인가. 갈라지는 것인가. 또 이 세 가지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요?"
존자, 코오티라는 대답하였다. "느낌과 생각과 의도의 이 세 가지 법은 합해지는 것이오. 갈라지는 것이오. 또 이 세 가지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없는 것이오. 무슨 닭인가. 느낌이 느끼는 것은 곧 생각이 생각하는 것이고, 의도가 의도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법은 합해지는 것이오. 갈라지는 것이 아니요. 또 이 세 가지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없는 것이오."("가지 법은 합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념처(위빠싸나)는 동시에 작용한다는 것을 경전에서 설명한다. 몸의 움직임이든 호흡이든 마음이든 하나를 관찰하면 신·수·심·법이 동시에 수행된다. 이것의 극치가 마하반야바라밀이다.)
사리풋타 존자는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탸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멸(滅)은 어떤 상대가 있는가요?" 코오티라 존자는 대답하였다. "멸은 상대가 없소"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다섯 가지 감각기관[五根]은 제각기 다른 행과 다른 대상이 있어서 각각 제 대상을 느낀다. 곧 눈·코·귀·혀·몸 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제각기 다른 행과 다른 대상이 있어서 각각 제 대상을 느끼는데 무엇이 그들 때문에 그 대상을 다 느끼며 무엇이 그들의 의지[依]가 되는 가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제각기 다른 행과 다른 대상이 있어서 각각 제 대상을 느낍니다. 곧 눈·귀·코·혀·몸이 다섯 기지 감각기관은 제각기 다른 행과 다른 대상이 있어서 각각 제 대상을 느끼는데, 의지에 의하여 그 대상을 다 느끼며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의지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모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차여! 의지는 무엇을 의지하여 머무르는 가요?"
"의지는 목숨을 의지하고 목숨을 의지하여 머무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목숨은 무엇을 의지하여 머무르는 가요?
"목숨은 따뜻한 기운을 의지하여 머무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락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목숨과 더운 기운, 이 두 법은 합해지는 것인가 갈라지는 것인가요. 또 이 두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인 가요?"
"목숨과 더운 기운, 이 두 법은 합해지는 것이요 갈라지는 것이 아니며 또 이 두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없는 것이요. 무슨 까닭인가 목숨으로 인하여 더운 기운이 있고 더운 기운으로 인하여 목숨이 있으며 만일 목숨이 없으면 곧 더운 기운이 없고 더운 기운이 없으면 곧 목숨이 없기 때문이오. 마치 기름과 심지로 인하여 등불을 켤 수 있는 것과 같소. 거기에 불꽃으로 인하여 빛이 있고 빛으로 인하여 불꽃이 있으며 만일 불꽃이 없으면 곧 빛이 없고 빛이 없으면 곧 불꽃이 없소. 이와 같이 목숨으로 인하여 더운 기운이 있고 더운 기운으로 인하여 목숨이 있으며, 만일 목숨이 없으면 곧 더운 기운이 없고 더운 기운이 없으면 곧 목숨이 없는 것이오. 그러므로 이 두 법은 합해지는 것이요. 갈라지는 것이 아니며 또 이 두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없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터티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법이 있어 산몸이 죽은 뒤에 몸이 무덤 사이에 버려져 나무처럼 무정한가요?"
"세 가지 법이 있어 산몸이 죽은 뒤에는 몸이 무덤 사이에 버려져 나무처럼 무정해지오. 어떤 것이 셋 인가. 첫째는 목숨이오. 둘째는 더운 기운이며, 셋째는 식별이오. 이 세 가지 법이 있어 산몸이 죽은 뒤에는 몸이 무덤 사이에 버려져 나무처럼 무정해지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죽음과 멸진정(滅盡定)에 듦과는 어떤 차별이 있나요?"
"죽음은 목숨이 이미 끝나고 더운 기운이 이미 떠나며 모든 감각기운이 무너지는 것이요. 비구가 멸진정에 든 것은 목숨이 끝나지 않고 더운 기운이 떠나지 않으며 모든 감각기관이 무너지지 않소. 죽음과 멸진정에 듦과는 이러한 차별이 있소."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멸진정에 든 것과 무상정(無想定)에 든 것과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요?"
"비구가 멸진정에 들면 생각과 느낌이 멸하오. 그러나 비구가 무상정에 들면 생각과 느낌이 멸하지 않소. 멸진정에 든 것과 무상정에 든 것과는 이러한 차별이 있소."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치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멸진정에서 일어나는 사람과 무상정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요?"
"비구가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에는 ‘나는 멸진정에서 일어난다.’라고 생각하지 않소. 그러나 비구가 무상정에서 일어날 때에는 나는 생각이 있다. 나는 생각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오, 멸진정에서 일어나는 사람과 무상정에서 일어나는 사람과는 이러한 차별이 있소."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비구가 멸진정에 들어갈 때에는 몸의 행과 입과 뜻의 행 가운데서 어느 법이 먼저 멸하는가요?"
"비구가 멸진정에 들어갈 때에는 먼저 몸의 행이 멸하고 다음에 입의 행이 멸하며 나중에 뜻의 행이 멸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픗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비구가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에는 입과 뜻의 행 가운데서 어느 법이 먼저 생기는가요?"
"비구가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에는 먼저 뜻의 행이 생기고 다음에는 입의 행이 생기며 나중에 몸의 행이 생기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비구가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 몇 가지 부딪침에 부딪치는가요?"
"비구가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에는 세 가지 부딪침에 부딪치오. 어떤 것이 셋인가? 첫째는 움직이지 않는 부딪침이요, 둘째는 소유가 없는 부딪침이며, 셋째는 모양이 없는 부딪침이오. 비구가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에는 이 세 가지 부딪침에 부딪치는 것이오."(오매일여·무상정·멸진정을 구체적으로 점검, 탁마하는 과정이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공(空), 원이 없음, 모양이 없음의 이 세 법은 뜻도 다르고 말도 다른가요. 혹 뜻은 하나인데 말이 다른가요."
"공(空)과 원이 없음과 모양이 없는 이 세 법은 뜻도 다르고 말도 다르오." (평등지(平等智) 아닌 차별지(差別智)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법 거량은 이렇게 서로의 체험담을 진솔하게 나누는 것이 진정한 탁마일 것이다. 서로의 경계를 문자로만 거량하다가 뒤에서 비판하는 일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오매일여가 되는지 동정일여가 되는지를 진실하고 냉정하게 살려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인연이 있어 움직이지 않는 정(定)이 생기는 가요?"
"네 가지 인연이 있어 움직이지 않는 정이 생기오. 어떤 것이 넷 인가? 만일 비구가 탐욕을 떠나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떠나 내지 제사선(四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닐면, 이것을 네 인연이 있어 움직이지 않은 정이 생기는 것이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언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인연이 있어 무소유정(無所有定)이 생기는가요?"
"세 가지 인연이 있어 무소유정이 생기오. 어떤 것이 셋 인가? 만일 비구가 일체의 색이라는 생각을 지나 내지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얻어 성취하여 노닐면 이것을 세 가지 인연이 있어 무소유정이 생기는 것이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無想定)이 생기는 가요?"
"두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이 생기오. 어떤 것이 둘인가. 첫째는 일체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오. 둘째는 생각이 없는 계층을 생각하는 것이오, 이것을 두 인연이 있어 무상정이 생기는 것이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에 머무르는가요?"
"두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無想定)에 머무르오. 어던 것이 둘인가? 첫째는 일체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오. 둘째는 생각이 없는 계층을 생각하는 것이오. 이것을 두 가지 이연이 있어 무상정에 머무르는 것이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에서 일어나는가요?"
"세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에서 일어나오. 첫째는 일체의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요 둘째는 생각이 없는 계층(無想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이 몸과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處)을 인으로 하고 목숨기관(命根)을 연으로 하는 것이오. 이것을 세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하오." 이와 같이 그 두 분은 착하고 착하오, 라고 서로 찬탄하고 서로 말한 바를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절대의 세계
열반은 시간·공간의 제약적인 조건에서 벗어난다. 열반은 모든 부정적 ·긍정적· 상대적· 분별적 개념을 벗어나므로 부정도 긍정도 아닌 중도(中道)이다. 열반은 어떠한 논리나 표현도 넘어선 법부의 생각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절대의 세계이다.
잡아함경 249에서 "여섯 가지 부딪쳐 들이는 기관이 다하고 욕심을 떠나 멸하고 쉬고 마친 뒤에도 '남음이 있는가'한다면 이것은 곧 빈말이요, '남음이 없는가'하면 이것도 빈말이다. '남음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면 이것도 빈말이다. '남음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가'하면 이것도 빈말이다. 만일 여섯 가지 부딪쳐 들이는 곳이 다하고 욕심을 떠나 멸하고 쉬고 마친 뒤에는 모든 거짓을 떠난 반열반이라고 말하면 곧 부처님 말씀이다."이것은 아난 존자의 질문에 대한 사리풋타 존자의 설명이다. 열반에 관해서 부처님은 우다나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비구여!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 없으며 갓이 없는 공간[空無邊處]도 아니며, 갓이 없는 의식 [識無邊處]도 아니며, 무소유처(無所有處)도 아니며, 이 세계도 아니며, 저 세계[非想非非想처]도 아니다. 비구여!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며, 서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도 아니며 태어남도 아니다. 거기엔 세움도 없고, 소유도 없고 근거지도 없다. 고(苦)의 멸(滅) 이것이 열반이다. 비구여, 태어나지도 않고, 시작도 없고, 형상(조건)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태어나지 않고 시작도 없고 조건 지워지지 않는 것이 없다면, 태어나고 시작하고 조건 지워지는 것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태어나지 않고 시작하지 않고 조건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태어나고 시작하고 조건 지워지는 것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느니라.
조건 지워진 곳에는 변화가 있다. 조건 지워지지 않는 곳에는 변화가 없다. 변화가 없는 곳에는 평온이 있다. 평온이 있는 곳엔 욕망이 없다. 욕망이 없는 곳엔 가고 옴이 없다. 업이 소멸한 가고 옴이 없는 곳엔 죽음도 태어남도 없다. 죽음도 태어남도 없는 곳엔 이 세계도 아니고 저 세계도 아니고 그 둘 다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고(苦)의 끝인 열반이다."
그러면 열반은 어디에서 실현되는가?
밀린다 왕문경에 의하면 "계를 지키고 올바른 지혜를 가진 자는 열반을 실현한다. 그가 어디에 있더라도 특별한 장소에서 불은 일어나지 않지만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 지면 불은 일어난다. 마찬 가지로 열반은 특별한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질 때 열반은 달성된다."
상응부경전에서 로히탓사가 이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부처님은 "고(苦)의 존재, 고(苦)의 시작, 고(苦)의 멸(열반), 열반에 이르는 길은 의식을 가진 이 육체 안에 있다고 선언하노라."라고 했다. 그러므로 열반은 죽은 다음이나 천상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계· 정· 혜로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탐·진'·치를 제거하고 실상을 청견할 때 지금, 여기 오온이 생 ·멸하는 곳에서 실현된다.
대승경전에 나타난 열반
대승경전 모두가 열반의 상태와 열반에 이르는 길에 관해서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수행과 관련된 부분만 간략히 살펴보겠다.
현재 남방불교에선 오온을 무상·고·무아로 보아 열반을 오온과 분리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북방불교에서는 오온, 12연기와 사제, 열반, 깨달음, 중도, 견성해탈을 하나로 보는 특성이 있다. 능엄경에서도 오온, 육입, 십이처, 십팔계에서 여래장을 보인다. 이러한 것은 잡아함경 296, 인연경에 12연기가 진여이며 공(空)이라는 내용과 상통한다. 그리고 대승 불교의 또 하나의 수행상 특징은 번뇌를 제거 한다기 보다는 번뇌 즉 보리이므로 번뇌가 지혜로 전환하는 것이다. 마치 흙탕물이 맑은 물이 되듯이.
그리하여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한 것이 상(常), 락(樂), 아(我),정(淨)으로. 탐·진·치가 계·정·혜의 완성으로. 무명이 지혜로. 6근6식이 6신통으로 전환한다.
결국 불교의 핵심인 사제, 연기, 증도를 공(空)의 측면에서 보아 우주전체를 대상으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입장에서 지혜와자비로 자타일시 성불도(自他一時 成佛道)를 대승불교의 요체로 한다.
부처님의 최후 가르침은 "마음집중으로 게으르지 말고 해탈을 이룰 때까지 정진 하여라"였다. 지금 현재 이 순간 우리들의 몸 안에서 부처님이 찾아낸 위빠싸나가 전승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위빠싸나로 열반에 이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우리자신의 내부에서 탐·진·치의 독화살을 뽑고 스스로 몸과 마음을 청견해야 하는 것이 당면 숙제이다. 체험으로 열반을 증득했을 때 지금까지 설명한 군더더기 말들은 환(幻)처럼 사라지고 일체의 고통이 없는 영원한 열반을 우리 스스로 맛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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