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불교 시대의 역사적 상황
우리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자. 증오 속에 있으면서도 증오 없이 미워해야 할 사람들 속에서도 미움 없이 우리 자유롭게 살아가자. -Dhp. 197.
이것은 《담마파다(Dhammapa?a, 法句經)》 197게송이다.
널리 알려진 행복과 평화에 관한 붓다-담마이다.
그러나 이 담마는 단순한 명상의 언어가 아니다. ‘로히니(Rohin.沖) 강 분쟁과 평화 사건’이라는 절박하고 살벌한 전쟁위기에서 행한 현장의 절규이다.1)
이 설법의 결과, 로히니 강물을 피로 물들일 뻔했던 석가족(Sa?iyas)과 꼴리아족(Koliyas)의 군사 대결은 평화적으로 해결되고 수많은 주민들이 법의 눈을 뜨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붓다-담마는 선정 삼매의 추상적 언어이기 이전에, 치열한 현장의 발언이며 문제 해결의 수단인 것으로 보인다. 붓다-담마의 이러한 현장성(現場性)은 45년간에 걸친 붓다의 전법과정을 통하여 줄기차게 관철되고 있다.
이것은 붓다-담마가 본질적으로 역사적·민중적 운동의 산물이며, 따라서 불교 연구는 역사적·민중적 상황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선행돼야 한다는 방법론적 당위성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 이 사건은 Dhammapa?a-At.t.hakatha?Dhammapa?a-Commentry, 法句經 古註釋書) 15, 1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 거해, 《법구경》 2(고려원, 1992), pp. 412~416. 拙稿, 《초기불교개척사》(도서출판 도피안사, 1991), pp. 190~194.
‘초기불교(初期佛敎, Early Buddhism)’라는 관행적 용어를 대신하여, 본론에서 ‘초기 붓다운동’이란 보다 역동적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초기불교를 치열한 한 시대의 역사적·민중적 운동으로 인식하려는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초기불교에 대한 이왕의 접근방식은 대개 ‘초기불교=초기교리(근본교리)’라는 교리적·교조적 입장을 견지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초기불교 연구를 교리연구로 과도하게 편중시켜, 결과적으로 불교를 탈역사·탈민중적 순수관념체계로 고착시킴으로써 초기불교가 담지했던 탁월한 시대정신으로서의 적응기능을 박탈하고 만 것으로 보인다. 우리 시대의 한국불교 내지 세계불교가 격변하는 인류사적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불교 일반의 고질적 취약성도 기존의 연구방식이 온존시켜 온 이런 비(非)현장적 관념성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민중적 통찰이 결여된 교리연구·수행연구가 호흡이 소멸된 유체(遺體)를 해부하는 일과 크게 다를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초기 붓다운동은 기원전 7∼5세기 북동인도의 역사적 상황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이 시기의 급변하는 정치·경제·사회적 변화가 새로운 정신적 탐구를 추동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빤데(G. C. Pande)는 《불교 기원 연구(Studies in the Origins of Buddhism)》에서 이렇게 논술하고 있다.
기원전 6∼5세기 중국, 인도, 그리고 지중해 세계에서 지적(知的)·정신적 진보와 더불어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변화들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들이 사회적 갈등의식을 조성하고 문제 탐구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 분명하다. 사회적 변화와 고통은 의심의 여지없이 종교와 철학에서의 새로운 출구와 연결되어 있다.2)
2) G. C. Pande, Studies in the Origins of Buddhism(Delhi: Motilal Banarsidass Pub., 1995), pp. 310∼311.
정치적으로, 초기 붓다운동 당시의 북동인도는 ‘16대국(十六大國, sodasa maha?anapa?a)의 쟁패’로 표현될 정도로 폭력적 정복과 침략전쟁이 빈번하였다.3) 꼬살라(Kosala)·마가다(Magadha) 등 강력한 군주국들이 취약한 공화국들을 압도하는 가운데, 군주들을 중심으로 하는 폭압적 통치구조가 ‘물고기의 법칙(matsya-nya?a)’, ‘강자(强者)의 정의(正義)’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다.4)
3) E쳓ienne Lamotte, History of Indian Buddhism(La Neuve: De L’Institut Orientaiste De Louvin, 1988), p. 7. 拙稿, 앞의 책, pp. 96∼98. 4) 피야세나 딧사나야케/정승석 역, 《불교의 정치철학》(대원정사, 1988), p. 175. 拙稿, 앞의 책, pp. 102∼103.
이러한 폭력·폭압의 시대에, 다수 민중들은 군주들의 노예로 전락되고 살벌한 전쟁터로 내몰려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강요당하였다. 초기 율장(Vinaya) 《大品(Maha?vagga)》 기록되어 있는 ‘마가다 전사들의 집단 군역탈출과 출가 사건’은 이 시대 민중들의 고통과 저항을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특히 주목된다.5)
5) Maha?vagga(Mv.) 1, 40, 1-4.
경제·사회적으로, 기원전 7∼5세기 북동인도에는 심대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농업과 목축분야에서의 생산력의 증대, 수공업 기술의 발달과 전문화, 상인·대상들에 의한 활발한 상품거래와 교통로의 확장에 따른 원거리 교역의 확대, 해외무역의 발달, 화폐와 금융제도의 진전 등 북동인도 지역의 전면적인 경제 발전은 이 시대의 인도사회가 이미 농업중심의 부족사회를 벗어나 상공업 중심의 도시사회로 전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6)
6) 拙稿, 앞의 책, pp. 111∼112.
리즈 데이비스(Rhys Davids)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이 시기의 북부인도에는 바라나시(Ba?a?.as沖)·라자가하(Ra?agaha)·사밧티(Savatthi)·꼬삼비(Kosamb沖) 등 14개의 주요 상업도시가 번창하고 있었다.7)
7) T. W. Rhys Davids, Buddhist India(Delhi: Motilal Banarsidass, 1981), pp. 34∼41.
이들 도시들이 초기 붓다운동의 중심기지로 역할한 것은 붓다운동의 역사성을 더욱 명료하게 입증하는 사실로 인정된다.
도시경제의 발달은 거사(居士, gahapati)·장자(長者, set.t.hi) 등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상인계층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한편, 수많은 도시 빈민들을 양산함으로써 심각한 사회적 과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슈만(H. W. Schumann)은 도시의 양상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왕궁 맞은 편에는 실제로 기둥에 의하여 지탱되는 단 하나의 지붕으로 된 회의장이 4면이 개방된 채 있었고, 시장(市長)의 집이 있었다. 그 다음에 귀족 등 관리들의 집들이 있었고, 근교에는 노동자들과 노비들이 진흙집과 기둥 위에 세운 대나무집에 살고 있었다.
그들 또한 그들 직업에 따라 모여 살고 있었다. 목수들·가구공들·마차제조공들·나무조각가들·소목장이들·금속공들·석수들·방직공들·염색공들·재봉공들·도공들·피혁공들·페인트공들·화환제작공들·동물취급자들·푸줏간종사자들·어부들·요리사들·이발사들·목욕탕업자들·세탁꾼들·마을 하인들의 거리들이 있었다.
이들 직업 각각이 사종성(四種姓, caste) 속의 작은 카스트(sub-caste, ja?i)를 형성하였다. 카스트 체제 밖에는 카스트 속의 사람들과는 사회적 접촉이 없는 아웃-카스트(out-caste)들이 있었다.8)
8) H. W. Schumann, The Historical Buddha(London: Arkana, 1986), pp. 25∼26.
도시 빈민들과 하층 카스트·아웃-카스트(不可觸賤民)들, 이들이 바로 초기불전 속에 흔히 등장하는 ‘도적들’ ‘5백 명의 도적들’의 실체와 관련 깊은 것으로 보인다. 앙굴리마라(An?ulima?a)도 이러한 집단도적의 두목으로 보는 분석도 있다.9)
9) Ibid., p. 126.
정복전쟁의 확대와 폭압적 군주권의 강화, 카띠야(khattiya-caste, 끄샤뜨리야) 그룹의 성장, 도시경제의 발달과 자산가(vessa, 바이샤) 그룹의 대두, 도시빈민과 하층 카스트·아웃-카스트들의 집단화, 다수 민중들의 고통과 저항의식의 성숙 등으로 표현되는 기원전 7∼5세기 북동인도의 정치·사회적 격동은 그 자체로서 기존의 브라만적 가치관의 위기와 새로운 정신적 질서에 대한 강력한 욕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붓다운동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깊이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종교학자 토카레프는 이렇게 논술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전통적인 세계관의 위기를 조성하였다. 사람들은 이제 위대한 브라마(Brahma? 자신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여겨지는 카스트 제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금욕주의와 유랑하는 수도생활이 광범하게 확산되었고, 이것은 상류 카스트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조차도 기존의 제도에 대한 불만족이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단적 교리, 분파, 그리고 순세파(順世派, Ca?va?a)와 같은 무신론적 철학체계까지 발흥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불만족·불성실성, 그리고 절망감을 반영한 새로운 믿음 중의 하나가 바로 불교였다.10)10) S. 토카레프/한국종교학회 역, 《세계의 종교》(사상사, 1991), p. 316.
2. 초기 전법운동의 주역들
1) 출가 대중의 주역들 쿠주따라(Khujjutara?는 꼬삼비의 우데나(Udena) 왕의 왕비 사마와띠(Sa?a?at沖) 부인의 꽃시중 노비이다. 어느 날, 쿠주따라는 수마나(Sumana)의 꽃가게에서 붓다를 친견하고 담마를 들었다. 그 즉시 쿠주따라는 법의 눈을 뜨고 깨달음의 길(預流)로 들어서 성자(聖者, A?iya)가 되었다. 그는 궁중으로 돌아와 사마와띠 왕비와 5백 궁녀들 앞에서 붓다-담마를 설하였다. 그 즉시 왕비와 5백 궁녀들이 법의 눈을 뜨고 성자가 되었다. 왕비와 궁녀들은 쿠주따라를 ‘어머니 스승(a mother and a teacher)’으로 받들고 수행하였다. 그들은 붓다를 친견하고 싶었으나 궁중을 떠날 수 없어, 궁중 벽에 구멍을 뚫어놓고, 매일 아침 붓다가 탁발하러 길을 가실 때 구멍을 통하여 붓다를 우러러 보고 경배하였다.
우데나 왕의 후궁 마간디야(Ma?andya?가 사마와띠 왕비에게 원한을 품어 음해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마간디야는 사악한 무리들과 결탁하여 왕비의 궁에 불을 질렀다. 왕비를 비롯하여 쿠주따라와 5백 궁녀들은 피하지 못하고 불길 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붓다의 가르침을 지켜 마음집중(念處)하여 삼매에 들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고요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삼보헌신(三寶獻身)으로 불멸(不滅)을 실증한 것이다.
붓다는 이 소식을 듣고 대중들에게 담마를 설하였다.
마음집중은 죽음을 벗어나는 길 마음집중하지 못함은 죽음의 길 마음집중하면 결코 죽지 않는다. 마음집중하지 못한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과 같다. -Dhp. 21 ; Dhp-Com. 2. 1 11)
11) Dhammapa?a-Commentry 1(tr. Eugene Burlingame), pp. 247∼293 brief. ; 《법구경》 1(거해 역), pp. 97∼113. 拙稿, 앞의 책, pp. 288∼292.
이 ‘쿠주따라 여인과 5백 궁녀 견성 순교사건’은 초기 불교사에서 매우 유명한 사건으로 《담마빠다》 21∼23게송에 해당된다. 이 ‘쿠주따라 사건’은 오랜 수행-선정 없이도 진지하게 통찰하면 누구든지 즉시 눈뜰 수 있는 대중견성-만인견성의 역사적 현장을 여실하게 보임으로써 깨달음에 관한 이전의 왜곡된 고정 관념을 타파하는 데 큰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쿠주따라 사건’이 초기 전법운동의 실상에 관하여 많은 의미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전법은 초기 붓다운동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해내는 가장 실제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붓다운동은 곧 전법운동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 논의가 전법 없이는 불교 없으며, 전법 없는 불교는 이미 불교일 수 없다는 기본적 명제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원전 589년 성도로부터 기원전 544 입멸에 이르기까지,12) 붓다의 45년이 전도전법의 고행난행으로 점철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도 이러한 진실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트레버 링(Trevor Ling) 교수가 불교를 ‘전도의 종교(a religion of mission)’로 규정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13)
12) 불기(佛紀)의 연대 산정에 관해서는 많은 이설들이 착종하고 있으나, 본론은 1956년을 불멸(佛滅) 2500년으로 인정한 세계불교도협의회의 공식 연대를 존중 채택한다. 따라서 붓다 연기는 기원전 624년 탄생∼기원전 544년 입멸이 된다.; 中村 元 /김지견 역, 《佛陀의 世界》(김영사, 1984), pp. 181∼182. 拙稿, 앞의 책, pp. 26∼27. 13) Trevor Ling, Buddha, Marx and God( New York: St. Martin’s Press Inc.), p. 42.
초기 전법운동은 붓다를 비롯한 사부대중들에 의하여 역동적으로 추구되었다. 붓다와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의 사부대중들이 전법운동의 주역을 담당한 것이다. 붓다와 비구·비구니 등 출가대중의 경우, 그들은 유행자(遊行者, parivra?aka)·사마나(saman.as, 沙門)로서 전도전법이 그들의 본분사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법 본분은 매일 일상적으로 준수되는 탁발행(托鉢行)에 의하여 담보되었다. 초기불교가 전통적인 은둔자의 삶을 청산하고 탁발 유행자의 길을 택한 것은 전도전법의 길로서의 불교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크나큰 성공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빤데는 이렇게 논하고 있다.
숲 속의 삶(은둔자의 삶)에 대한 탁발 유행승들의 승리는 브라만교에는 없었던 보다 후기에 거둔 승리이다.14)
비구·비구니 등 출가대중의 탁발 유행은 곧 가장 민중적인 전도전법의 실천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전도전법이 탁발 유행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초기불전의 기록들로 비춰볼 때, 바로 이 탁발 유행이 초기 붓다운동-전법운동의 성공을 이끌어낸 가장 실제적인 방법의 하나였던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한 것으로 생각된다.
후일 사원의 장원화(莊園化)가 진행되면서 출가대중들이 탁발 유행을 포기하며 아비담마(abhi-dhamma)와 선정을 본분사로 표방하게 되고, 이것이 전도전법 의지의 쇠퇴로 귀결되면서 인도불교가 쇠망의 길을 걷게 된 역사적 사실은 우리 시대의 불교도들에게도 심각한 경종으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탁발 유행은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만나고 담마를 전파함으로써 개인적·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추구하는 가장 본질적인 출가수행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탁발 유행의 삶을 거의 망각해버린 한국·일본 등 동북아시아 불교권이 자기 정체성의 문제에 있어 심각한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15)
15) 拙稿, 앞의 책, p. 207.
《우데나(Udena)》에서는 마하까샤빠 비구의 탁발행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붓다께서 라자가하 대나무숲 절(竹林精舍)에 머물러 계실 때이다. 그때 마하까샤빠 장로(thera)는 핍팔라 석굴에서 중병을 앓고 있었다. 얼마 후, 마하까샤빠 장로는 병에서 회복되었다. 그때 그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라자가하로 탁발하러 가면 어떨까?’
그때 5백 명의 하늘 사람(天人, devata?)에게는 마하까샤빠 장로에게 공양 올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일어났다. 그러나 마하까샤빠 장로는 모든 하늘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아침에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라자가하의 가난한 사람들의 거리, 궁핍으로 크게 고통 받는 사람들의 거리, 베짜는 사람들의 거리로 밥을 빌러 들어갔다. 붓다께서 마하까샤빠 장로가 가난한 사람들, 궁핍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베짜는 사람들의 거리로 밥을 빌러 가는 것을 보았다. 붓다께서는 이 일을 살피고 이러한 우다나(uda?a, 게송)을 읊으셨다.
다른 사람의 부양을 받지 않고 잘 이해하고 마음이 순해지고 근본 위에 선 사람 번뇌가 소멸되고 잘못을 떠난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수행자라고 일컫는다네. -Ud. 1. 6 16)
16) Udena(P. T. S.), p. 5.
2) 재가 대중의 주역들 우바새·우바이, 재가 대중들 또한 출가 대중들과 더불어 초기 전법운동의 주역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재론의 여지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재가 대중들이 단순히 출가 대중들에 대한 외호세력으로 머물지 않고 교단의 한 주역으로서 역동적인 전도전법 활동을 전개한 것은 ‘쿠주따라 사건’에서도 이미 명쾌하게 드러나고 있다.
천민 출신의 한 여성이 담마를 듣는 즉시 견성하고 왕비와 5백 궁녀 앞에서 당당히 담마를 설하고 전파하며 그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고 그들의 ‘어머니 스승’으로 존경받는 이 사건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은 초기교단의 실상에 새삼 개안(開眼)하며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쿠주따라 사건’은 초기불교사에서도 널리 일컬어진 사건으로서, 붓다도 쿠주따라 여인을 재가법사로 공공연히 인정하고 있다. 붓다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담마에 대하여 학식이 있고 담마를 해설(설법)할 수 있는 나의 재가 여성제자(우바이) 가운데서 쿠주따라가 가장 탁월하다. -Dhp-Com. 1, p. 282 17)
17) cf. An. 1. 47(text i. 27).
재가법사(在家法師, dhamma-bha?.aka, dhamma-teacher)의 존재 여부에 관하여 많은 논쟁이 있어 왔고 일부 논자들이 재가법사의 근거를 대승경전 《법화경(法華經)》 〈법사품(法師品)〉에서 구하고 있으나, 이것은 전혀 과문의 소치인 것으로 보인다. 붓다는 초기 불전 《앙굿따라 니까야(An?uttara-nika?a)》에서 분명히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나의 재가 남자제자(우바이) 가운데서 법사 제일은 마치까산다의 거사 찌따(Citta)이다. -An. 1. 14(text i. 25)18)
18) “Monks, chief among my disciples, lay-followers, of Dhamma-Teacher, is Citta, the house-father of Macchikasanda,” ; The Book of The Gradual Sayings 1(P. T. S.), p. 23.
《앙굿따라 니까야》의 ‘제일가는 제자들의 품’에서는 사부대중의 법사(法師)들을 이렇게 거명하고 있다.-An. 1. 14. 1(text i. 23); An. 1. 14. 27(text i. 26)19)
19) Ibid., pp.16∼25.
●비구 법사 : 뿐나(Punna? ●비구니 법사 : 담마디나(Dhammadinna? ●우바새 법사 : 시따(Citta) ●우바이 법사 : 쿠주따라(Khujjuttara?
초기불교 시대 재가법사의 존재와 출가대중과의 평등한 전법활동은 더 이상 다툴 수 없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초기 전법운동이 소수의 특별한 인물들-법사들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는 해석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계층의 사람들,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붓다운동에 동참하여 전법운동의 평등한 주역으로 헌신하고 있고 또 이로 인하여 희생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초기 붓다운동-전법운동은 각계각층 진보적 시민 그룹들의 거대한 시민연대운동으로서 역동적으로 민중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 초기 붓다운동의 이러한 시민연대적 특성은 빈번했던 시민들의 공양거부운동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20)
20) 拙稿, 앞의 책, pp. 311∼314, 328∼340.
이 가운데서 이 시대의 지배세력을 형성하는 귀족들-까티야(Katthiyas, 끄샤뜨리야)와 상인들-베싸(Vessas, 바이샤)들의 활동이 뚜렷하고, 상인들의 역할이 특히 주도적인 것으로서 주목된다. 초기불교는 ‘도시의 종교’ ‘상인들의 종교’로 불릴 만큼 초기 붓다운동은 상인-자산가 그룹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사밧티의 자산가 ‘수닷따(Sudatta, Ana?hapin.d.ika, 給孤獨) 장자의 제타숲 절(祈園精舍) 기증 사건’에서 보듯21) 도시 상인·자산가들의 축적된 부(富)가 초기 붓다운동-전법운동의 물적(物的)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상인·대상(隊商) 그룹들이 육로와 해상의 교역로를 통하여 붓다-담마를 널리 전파하여 끊임없이 변방으로 불교 세계를 확대시켜 나간 주역들이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변방으로 떠나는 대상들을 위하여 붓다가 담마를 설하여 그들을 격려하거나(《雜阿含經》 980, 〈念三寶經〉),22) 무인 광야에서 도적들을 만난 상인들이 붓다-담마를 염하며 극복해가는 사건들이 흔히 등장하고 있다.
21) Cv. 6. 4. 1-5. 22) 한글대장경 《雜阿含經 3》, pp. 16∼17, brief.
이것은 상인·대상 그룹들의 목숨을 건 전법-개척과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역사적 현장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슈만은 이렇게 논술하고 있다.
불교의 사회적 적응과 확산에 있어서 베싸-상인들이 담당한 역할에 대해서 지금까지 거의 언급된 적이 없다. 상인들은 부유한 재가대중으로서 여타의 어떤 사람들보다 더 많이 사원을 헌납하는 지위에 있었고, 또 그들은 빈번히 왕래하는 그룹으로서 담마의 지식을 먼 지방으로 실어다 날랐다. 고따마의 교의가 동서남북 모든 방면으로 길을 잡아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대상들의 거친 우차(牛車)에 의해서였다.23)
23) H. W. Schumann, Ibid., p.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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