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수심법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의 정의
1)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이 있다는 것과 그 괴로움을 어떻게 소멸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하여 가르침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만나는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무명과 갈애라고 하셨습니다. 무명은 어리석음으로, 잘못된 견해를 의미합니다.
다시 잘못된 견해란 몸과 마음이 무상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괴로움인 몸과 마음을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몸과 마음은 찰나생멸하며 흐르는 것인데도 이 안에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있다는 환상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견해가 몸과 마음에 대한 갈애를 일으켜 모든 괴로움을 만드는 단초가 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이와 같이 오랫동안 자신을 지배한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눈을 갖추는 것, 즉 통찰지혜를 닦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있는 그대로’ 본 수행을 통해서 생긴 지혜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 수행방법으로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의 원인은 사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무지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우선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보는 ‘알아차림’이라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을 분리해 놓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무 선입견이나 욕심이나 성냄 없이 그냥 몸과 마음을 알아차림으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 실천 방법으로 우선 현재 이 순간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현상을 마음이 알아차립니다. 물질적 현상이란 몸의 움직임이나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느낌입니다. 그리고 다시 몸의 느낌에 대하여 좋아하거나 싫어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때로는 그 순간의 마음을 보아서 선심이나 불선심을 사실대로 알아차립니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는 것입니다.
2)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현재 이 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이고,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선한 마음의 작용인 '알아차림'이라는 기능을 이용하여,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부딪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에 의한 정보를 가지고 보았습니다. 한 대상을 놓고 100명이 보면 100개의 견해가 나옵니다. 정말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직접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대상을 단순명료하게 '있는 그대로' 어떤 군더더기도 붙이지 않고 보는 힘을 길러야합니다.
지금까지 잘 들어보지 못한 위빠사나라는 용어는 부처님 당시의 언어인 빨리어 입니다.
vipassana 에서 vi는 '분리하다'라는 뜻이며, pasana는 '통찰, 직관'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는 이 순간의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이란 네 군데를 알아차릴 대상으로 해서 마음이 직접 이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직접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행위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는 몸과 마음이 실제로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바르게 통찰하게 되는 수행입니다.
우리들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의 기능인 알아차림(sati)은 현재의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 대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선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실제로 양 손바닥을 마주 대고 마음을 손으로 기울여 느껴지는 대로 알아차려보십시오.
현재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의도가 일어나는지, 사실 그대로 현재의 자신을 구경해보십시오.
이렇게 현재를 지켜보면, 그들은 여러 가지 느낌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느낌의 변화를 지켜보는 순간 마음속에 다른 근심걱정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근심걱정이 없는 순간의 마음은 평온하고 고요합니다. 이런 고요함은 몸과 마음이란 대상을 좀더 '있는 그대로' 보게 하며, 점차 모든 대상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 특성을 통찰하는 안목과 지혜가 생깁니다.
이 통찰 지혜는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계속 변화하고(無常), 불만족스럽고(苦), 실체는 없다는(無我) 삼특상입니다.
말이나 글이 아닌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무상하고 괴로움덩어리이며
실체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면 점차 무명으로 인한 갈애와 집착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와 집착이 줄어들면 그만큼 탐진치를 내는 힘이 줄어들고 그 힘은 새로운 괴로움의 원인을 심지 않게 됩니다.
3) 위빠사나 수행의 근거가 되는 경전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 당시 붓다께서 수행자들에게 직접 설하신 빨리어 상좌부 경전인 대념처경(마하사띠파타나 숫타)을 근거로 수행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중생들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고,
아픔과 고뇌를 사라지게하고, 숭고한 길에 도달하게 하고
닙바나를 실현하게 하는 길, 즉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낸다.
그는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낸다.
그는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낸다.
그는 담마에 대하여 담마를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낸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담마)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이란 행위를 해서 자신을 정화하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마지막에 닙바나(열반)를 실현하게 하는데 수행의 목표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괴로움의 원인을 가르쳐 주시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로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실천하는 수행자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 궁극적인 행복(열반, 깨달음)을 증득하여 괴로움의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해탈 열반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며 몸과 마음이 있는 존재라면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사실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알아차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입니다.
그래서 이론과 더불어 직접 수행을 하면서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가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의 힘이 쌓이면 실제 생활에서 괴로움이 있을 때 알아차림을 하게 되고,
또 알아차림으로 인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 알아차림 수행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더욱 열심히 알아차림으로 정진하게 됩니다. 이런 정진이 삶을 보람되게 하고 마음도 고요해져 안정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생긴 지혜는 자신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하지만, 또한 함께 사는 가족과 이웃에도 그 평온과 행복의 향기가 퍼져나가 모두 함께 행복하고 평온해집니다.
4) 알아차림은 번뇌를 소멸하는 8정도 수행
그러면 실제로 어떻게 괴로움을 소멸하는 8정도를 닦는 수행을 해야 할 것인가?
알아차림을 하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어떻게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내는 것이 가능한가?
알아차림(사띠)이란 몸 느낌 마음 법의 4가지 알아차릴 대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행위입니다.
또한 위빠사나( vi + passana)라는 말은 부처님 당시의 언어인 빨리어 입니다.
vi 는 '분리하다' '여러 가지' 라는 뜻이며 passana 는 통찰한다. 꿰뚫어 본다. 직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대상을 분리해서, 여러 가지 면(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측면에서 통찰한다는 뜻 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지혜를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지혜라고 합니다.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이란 현재의 몸과 마음인데 그것은 느낌을 통해서 알게 되고,
그 느낌을 법(담마, 마음의 대상)으로 맞이하여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현재의 몸과 마음이 대상이 되며, 그 이외에 다른 대상들은 위빠사나의 일차적인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입니다.
현재의 대상(오온)을 "있는 그대로" 청정하게, 좋아하거나 싫어함 없이,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 없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은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이 편안하고 바른 마음가짐일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계속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도록 계속 알아차림을 이어가면 위빠사나의 지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무엇을 바라거나 없애려는 마음을 가지고 알아차림을 하면 그것은 바른 마음가짐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수행자를 불안하게하고 들뜨게 하여 알아차림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제 실제로 알아차림을 어떻게 하는지 실제로 한 번 해 봅시다.
먼저 양 손바닥을 마주 대어 봅니다.
눈을 살며시 감고 마음을 손바닥에 보냅니다.
그리고 마음을 계속 손바닥에 머물러 있게 합니다.
그리고 지금 마음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아차립니다.
어떤 느낌을 알게 됩니까?
따뜻함, 축축함, 단단함, 부드러움, 점차 더워지는 열기, 열기의 변화 등등을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은 "단지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에 마음을 보내면 저절로 알게 되는 느낌"들을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리면 됩니다. 어떤 개념이나 생각으로 사족을 붙이지 않고 그냥 지켜봅니다.
자 ! 다시 한번 손바닥에 마음을 보내고 지금 느껴지는 느낌에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려 봅시다. 잠깐 동안 다시 해보십시오. 따뜻함, 부드러움, 촉촉함, 진동, 딱딱함의 느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또는 이런 느낌들이 그대로 있는지 알아차려보십시오.
자, 이제 잠깐 풀고, 지금 여러분들이 손바닥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느낌에 마음을 집중하여 알아차리는 동안 어떤 욕망이나, 괴로움, 불만족이 있었습니까?
무엇을 바라거나 근심 걱정을 했습니까?
사실 그런 생각들이 들어올 틈이 없었지요?
만일 근심걱정을 했다면 그 순간은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이렇게 오직 알아차림(사띠)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마음에 근심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순간이며, 마음에 때가 끼지 않는 깨끗한 상태로, 저절로 계율이 지켜지며, 마음이 청정해지는 순간이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으로 계율을 지키면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면 마음이 들뜨지 않고 고요해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와 같이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알아차림이 잠깐 동안이나마 괴로움이 없는 순간을 만들었습니다.
수행은 이와 같이 알아차리는 순간을 이어가고 또 늘려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림이 이어지는 동안 번뇌가 없어 그 순간 괴롭지 않으며, 또한 마음이 안정되어 바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선업을 행할 수 있으며, 이런 바른 마음가짐은 현재의 몸과 마음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 지혜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에 여러 번 나오는 '반야바라밀다'는 지혜바라밀입니다.
바로 대상(현재의 몸과 마음, 오온)을 객관화해서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의 통찰 지혜 수행을 말합니다.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만이 지혜의 완성인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번뇌를 소멸하는 훌륭한 수행을 만난 소중한 인연을 잘 가꾸어, 나와 남이 모두 함께 행복하고 평온하며, 궁극에는 열반을 성취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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