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알아차림에 대하여
1) 알아차림의 의미
불교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가르침이며, 그 방법은 8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며, 8정도는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행위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불교 수행의 핵심은 알아차림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때 수행의 대상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신, 수, 심, 법)이며, 수행자는 이 대상을 객관적으로 비작용으로 사실대로 알아차려주기만 하는 마음의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sati. 사띠)으로 시작해서 알아차림으로 끝이 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띠(sati)라는 말은 위빠사나(vipassna)처럼 빨리어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 하는 뜻은 기억과 알아차림이며, 중국에서는 생각 념(念)자로 번역이 되었으며, 념(念)자를 파자해보면 현재를 마음이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경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올 때 sati. 사띠를 념(念)자로 번역하고, 이것이 다시 우리나라로 넘어올 때 기억(念)으로만 그 뜻이 넘어왔습니다. 우리는 기억하면 보통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sati의 기억(念)은 현재 이 순간에 대한 기억, 즉 깨어있는 마음 상태가 알아차림입니다. 이처럼 빨리어 사띠(sati)는 기억과 동시에 알아차림이란 뜻이 함께 포함된 단어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위빠사나를 소개하는 책에서는 사띠를 알아차림, 마음챙김, 주시하다 등으로 여러 가지로 혼용하고 있지만, 우리 명상원에서는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통일하여 사용합니다. 현재를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서 보는 것, 즉 현재에 마음을 두는 것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84000법문을 축약하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37조도품으로 축약되며, 이는 다시 8정도로 축약되고, 다시 계. 정. 혜 3학으로 축약되며, 계정혜 삼학은 다시 알아차림(사띠, sati)하나로 귀결 됩니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알아차림(사띠)입니다. 매 순간 알아차림으로 깨어있어, 번뇌거리가 들어와도 번뇌를 따라가지 않는 지혜로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될 새로운 행위를 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알아차림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지금 여기에서 실천한다면, 이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8정도 수행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2) 알아차림의 대상
알아차림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의 기능입니다. 대상은 실재하는 것,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 즉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입니다.
알아차림은 현재 부딪친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며,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알아차림이란 "할 때 하는 것을 아는 것"으로 지금 자기가 하는 일에 마음을 집중하여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은 지금 여기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몸과 마음을 깨어서 보는 것이지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는 지금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현상을 대상으로 알아차려 몸과 마음의 성품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실재(實在)는 인식론입니다. 즉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실재입니다. 세간에서는 존재하는 것을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취급합니다만 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실재(reality)로 취급합니다. 즉 6근과 6경이 부딪쳐 지금 인식하고 있는 것이 실재(reality)입니다.
우리에게 항상 손이 있지만 지금 마음이 어떤 생각을 골몰히 하고 있다면 그 순간 손은 없는 것이고, 생각이라는 정신적 현상이 있습니다. 이때는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실재하는 것으로 알아차릴 대상인 법(dhamma)이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것, 인식할 수 없는 것은 대상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여 인식할 수 있는 실재(reality)가 알아차릴 바른 대상이며, 그 순간에 법이며, 이 법(dhamma)에서만 찰나 생멸하며 흐르는 제법의 성품을 통찰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실재(reality)가 제법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줍니다. 실재가 아닌 관념적 존재는 무상, 고, 무아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통찰지혜를 닦는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현상이나 정신적 현상을 대상(reality)으로 알아차립니다.
3) 알아차리는 방법
알아차림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알아차리며, 그 현상의 변화를 지켜봄으로서 알아차림을 이어갑니다. 마치 카메라맨이 사진을 찍을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렌즈에 담아오듯이, 수행자도 대상을 분리해서 사실대로 객관적으로 마음이 담아옵니다. 여기에 대상에 대한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개입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위빠사나를 한 알아차림입니다.
또한 영화를 보는 관객은 영화의 줄거리에 개입하여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못하고 그냥 영화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관객은 다만 마음을 현재의 스크린에 두기만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도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어떤 개입도 하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에 마음을 두고 그냥 구경하기만 합니다. 이 말은 현재 일어난 현상에 대해 좋고 싫고 하는 분별로 어떤 작용을 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녹음이 우거진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있을 때. 알아차림은 밖의 경치를 열심히 보는 것이 아니라 녹음이 우거진 경치를 보고 있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선 지금 경치를 본다는 것을 알고(色), 그 순간 일어나는 좋거나 싫은 느낌(受)이나, 녹음에 연계되어 일어나는 생각(想)이나, 의도(行)나, 마음상태(識)를 알아차립니다. 즉 마음이 밖의 경치로 나가지 않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순간 나타나는 실재하는 대상(法)에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리는 행위가 사띠(sati)인 알아차림이며,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지를 개발하는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또한 지금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항상 현재로 돌아와 알아차리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길들여온 탐진치의 습성대로 행동하는 마음에게 현재를 깨어서 알아차리도록 일을 시키는 새로운 선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색수상행식 중에서 행(行)에 속합니다.
만일 마음이 알아차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밖으로 나가 부딪치는 대상에 대하여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다시 탐진치의 습성에 힘을 실어줍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하면, 그 순간의 대상을 알아차리느라 좋아하거니 싫어할 틈이 없습니다. 탐진치는 깨어있지 못하고 자기만의 정보인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에 휘둘릴 때 일어나는 불선한 마음의 작용이며, 알아차림은 깨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선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4) 수행자의 마음가짐.
그럼 수행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알아차림을 해야 할까요? 알아차림을 잘 하려면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합니다.
수행자에게 원하는 마음, 성냄이나 슬픈 마음, 근심 걱정이 있는 마음으로 수행을 하면 알아차림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또 억제하지 않고, 무엇이든 나타나는 대로 차분하게 지켜보려는 의도를 내어 경험하는 것을 다 받아들이는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 자세일 때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된 상태라서 비로소 알아차림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오온의 작용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오직 알아차림(사띠)과 노력(위리아)과 지혜(빤냐)로서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력이란 힘을 주어 대상에 강하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현재를 알아차리려고 마음을 새로 내는 것입니다.
이런 바른 마음가짐을 갖기 위해,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몸과 마음을 가만히 느껴봅니다. 먼저 몸이 긴장했는지 알아차려서 몸의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에도 바라는 것이 있는지 알아차려서 마음의 긴장을 풀고, 그래서 편안해진 마음으로 알아차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마음이 선택하는 대상을 따라가면서 가볍게 부드럽게 알아차림을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수행자는 몸과 마음이 안정되면서 몸과 마음의 자연적인 성품인 법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초보 수행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수행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행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줄이려고 하는 것인데, 오히려 수행을 하면서 수행이 잘 되길 바라고, 수행이 잘 안되면 괴로워하고, 또한 수행이 잘 되면 좋아하여 아만심(치심)을 키웁니다. 오히려 수행을 하면서 탐진치의 잠재 성향을 더 키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수행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입니다.
수행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대상을 보고 들으면서 일어나는 느낌에 따라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버리는 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바탕에 있는 탐진치가 시키는 대로 행위를 했다면, 수행은 이 탐진치의 거센 물살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즉 알아차림이라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가는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탐진치를 벗어나는 수행은 처음에는 잘 안되게 되어있습니다. 이때는 잘 안되는 것을 알아차려야하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잘 안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바로 어리석은 마음이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좋은 현상이 있기를 바라지도 않고(집중이 잘 되길), 또 싫은 대상을 없애려고도 하지 않고(통증이나 망상 졸음 등이 없어지길), 나타나는 대로 모두 그냥 알아차리기고 지켜보기만 합니다. 수행자는 나타난 현상을 구경할 의무가 있지 어떤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즉 현재 나타난 대상은 그것이 원하는 것이거나 싫어하는 것이거나 간에
다 알아차릴 법으로 받아들여 알아차려 줄 뿐입니다.
비록 망상이나 통증이나 졸림이라도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려주면 이 과정에서 알아차리는 힘이 차츰차츰 쌓여갑니다. 그래서 이런 원하지 않는 현상도 수행을 도와주는 친구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시비, 선악, 좋고 나쁜 것은 관념이며, 그것의 실재는 그런 현상이 한 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으로, 수행자에게는 오직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5) 그럼 수행에서 알아차림이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첫째, 알아차림은 "안이비설신의" 의 6군데 감각기관을 지키는 문지기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보통 6문을 통해 6경의 대상을 받아들일 때, 대상에 대한 좋거나 싫은 느낌이 일어나고 즉시 탐심과 성냄으로 행위를 합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는 마음의 작용이므로 당연히 6문으로 들어오는 탐욕과 성냄을 들어오지 못하게 지킵니다. 만일 이때 문지기인 알아차림이 없다면 그 순간 탐진치가 주인이 되어 자신의 선업인 계율과 고요함을 도둑맞는 것입니다.
둘째, 알아차림은 불선업을 선업으로 바꾸어줍니다. 당연히 대상에 대하여 탐진치가 일어날 때 알아차리면, 즉시 관용 자애 지혜의 선한 마음으로 바뀌어 선한 말과 행위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냥 탐진치의 마음은 즉시 불선업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이 가장 큰 선업을 행하는 순간이 됩니다.
셋째, 알아차림이 있으면 저절로 계율을 지키게 되고, 그 결과 마음아 안정되어 사마디(삼매. 집중하는 힘)가 생깁니다. 마음이 고요하여 대상에 집중된 상태에서만 바른 견해인 지혜가 생기고, 이런 작은 지혜들이 모여서 궁극에는 열반(닙바나)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이 계정혜 3학의 시작이며, 결국 열반으로 향하는 첫걸음입니다.
넷째, 이런 알아차림의 결과로 몸과 마음의 자연적인 성품을 통찰하게 됩니다. 마치 관객이 영화를 그냥 열심히 보면 영화가 끝날 때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수행자가 몸과 마음을 영화 보듯이 계속 지켜보면, 수행자는 몸과 마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 됩니다. 즉 몸과 마음은 찰나 생멸하는 무상한 것이고, 이런 오온은 집착의 덩어리로 괴로움이고, 이런 조건에 의해 생멸하며 흘러가는 과정을 원하는 대로 조정할 수 있는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다는 특성을 통찰하게 됩니다. 이런 통찰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놓는 힘이 됩니다. 이렇게 통찰지로 집착이 소멸되면 그만큼 괴로움도 소멸합니다.
5) 그러면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유익한 알아차림을 챙기지 못하고 자주 놓치게 될까요?
첫째,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별다른 특별한 것이 아닌 것 같아 시시하게 생각하여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내지 않습니다. 알아차리는 행위가 감각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 바탕에는 알아차리면 무엇이 좋을까? 하는 의심이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알아차림을 놓치고 행위를 해보면 그 결과가 반드시 괴로움으로 돌아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는 일이 결코 시시하거나 무의미한 일이 아닌 가장 값진 일임을 알게 됩니다.
둘째, 그동안 살아오면서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 본적이 없어서, 자꾸 알아차려야 하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또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바로 나와 동일시해서 집착해버립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꾸준히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점차 알아차림을 하는 새로운 습관이 생깁니다.
셋째, 알아차림의 힘은 약하고, 탐진치를 일으키는 힘은 강해서 알아차림을 하다가도 대상에 휩쓸려서 알아차림을 놓쳐버립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 한 시간동안에 "한 호흡"만이라도 제대로 알아차려 보아야 합니다. 제대로 알아차린 한 호흡이 두 호흡 세 호흡으로 늘어나면서 알아차리는 힘이 차츰 강화됩니다.
6) 그럼 알아차림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 방법으로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 "지금 자세는 바른가?" "지금 내 몸이 무엇을 하는가?" 하고 항상 현재의 몸과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물음을 떠올려 즉시 현재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지금 움직이는 몸에 마음을 붙여서 알아차림을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일어남. 세수함. 식사. 이야기함. 걷고 있음. 앉음. 운전함, 집안 일 등등을 하면서 그 상황을 마음이 지켜봅니다. 그러다가 이 과정에서 불쑥 일어나는 마음들과 생각들 느낌들 의도 등이 있으면 그들에 대하여 알아차림을 해봅니다. 이런 과정에서 알아차리는 힘이 길러지며, 점차 알아차리는 것이 능숙해지면 나중에는 저절로 알아차림이 따라 다니게 됩니다.
둘째, 알아차림을 한 뒤에는 알아차린 대상에 대해 "그랬구나"하고 알고 시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상을 붙잡고 시비를 하면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사실대로 '그랬네!' 라고 알고 놓아버리고, 바로 지금 새롭게 나타난 대상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과 마음은 계속 생멸하면서 흐르고 있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나타난 현재의 대상을 다시 알아차려서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알아차림이 이어집니다.
만일 알아차렸다고 좋아하거나, 알아차림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등등으로 생각하며 시비하고 판단 분별하면 이미 그 순간 알아차림을 놓치고 망상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나타난 현상에 대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하고 그 원인을 알려고 하는 것도 그 순간 망상에 빠진 것으로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셋째, 알아차림에는 마침표가 없습니다. 항상 이어져야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매 순간 생멸하면서 이어지므로 계속 새로운 대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현재의 대상을 다시 알아차려서 알아차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수행자라면 열반을 얻어 윤회가 끝날 때 까지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지금 알아차림을 놓치고 이미 탐진치로 행위를 했다면 그 상황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현재를 다시 알아차린 순간 이미 알아차림이 없는 불선심은 과거로 사라지고 알아차림이라는 선업을 지금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늦은 알아차림이라도 알아차리면 그만입니다. 이미 알아차림을 놓친 과거는 실재하는 것이 아닌 것, 그것을 붙잡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알아차림을 한 뒤에 “내가 알아차렸다!” 하고 마침표를 찍으면 그 순간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어떤 대상이라도 마음이 두 순간을 머물러 있으면 알아차림을 놓치고 그 대상을 집착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항상 알아차림이란 티켓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이 티켓은 최상의 행복(열반, 깨달음)인 윤회의 종식, 불사(不死)의 문으로 들어가는 티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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