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관념과 실재
1) 관념(모양)과 실재(성품)란?
지금까지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아주 객관적으로 마치 남의 일처럼, 또 관객이 영화 보듯이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의 실재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데도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몸과 마음의 형상, 모양, 이름 등으로 관념화 한 것(빤냐띠. concept)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몸과 마음에서 지금 경험하는 실재하는 느낌(빠라마타. reality)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빤냐띠는 사마타(선정)수행의 대상이 되고, 빠라마타는 위빠사나(통찰)수행의 대상이 됩니다. 둘 다 수행자의 알아차릴 대상인 법이기는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 말하는 법은 빠라마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빤냐띠는 세간법(속제)이고, 빠라마타는 출세간법(진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에서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이 그 순간의 실재하는 법, 빠라마타 입니다. 몸과 마음은 물질의 법과 마음의 법과 마음의 작용이라는 법이 매순간 생멸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현장입니다. 매 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법은 81가지로, 각각의 법은 고유한 특성이 있으며, 이 법들은 반드시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조건적 특성이 있으며, 또한 모두 무상 고 무아라는 보편적 특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법의 성품을 통찰한 결과로 깨달음에 도달하기 때문에 궁극적 진리, 빠라마타 담마, 진제라고 합니다.
수행에서 관념과 실재의 구분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행자가 관념과 실재의 구분하지 못하면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앉아서 실재가 아닌 관념을 잡고 자기 생각에 빠져 망상을 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는 것은 이론을 듣고 사유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점차 구분이 확연해지는 것입니다. 일단 이론적으로 관념과 실재에 대한 설명은 하지만, 이 설명을 바탕으로 실제 수행을 하면서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는 안목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알아차릴 대상으로서 빤냐띠(관념)와 빠라마타(실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는 생활 속에서 관념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관념과 실재를 구별할 필요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빤냐띠와 빠라마타에 대하여 개념으로라도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자가 한 대상에 몰입해서 근본 집중 상태로 들어가는 사마타 수행은 빤냐띠(관념)를 수행 대상으로 하지만,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는 실재를 대상으로 분리해서 성품을 보는 위빠사나 수행은 찰나집중으로 매 순간의 빠라마타(실재)가 대상이 됩니다.
실제로 수행을 할 때 우선 빤나띠인 모양에 마음을 기울여서 마음이 안정되면, 다시 빠라마타인 느낌에 마음을 기울여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이렇게 실재(빠라마타)를 대상으로 위빠사나하는 수행을 할 때 몸과 마음의 특성을 볼 수 있게 됩니다.
2) 빤냐띠 ( pannatti, 관념적 진리 )에 대하여...
빤냐띠, 관념적 진리는 실재(reality)를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붙여진 세간의 관념(concept. 想. 相) 개념, 명칭, 이름, 모양을 말합니다. 그래서 관념은 세속의 진리 속제(俗諦)입니다. 어떤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세속의 언어로 이름이나 명칭, 숫자, 나이, 여성, 남성, 사람, 동물, 아름다움, 추함 이라는 개념적인 도구를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상적인 관용어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하여 설정된 방편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실재(reality)는 지금 일어난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이지만,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그를 표현하기 위해 아무개, 사람, 남자, 여자, 아름답다, 추하다, 옳다, 그르다 등으로 그 모습에 명칭을 붙여서 관념화하고, 시비 판단 분별하는 것이 모두 다 빤냐띠 입니다.
이렇게 관념은 실재를 표현하기 위해 시설된 방편으로, 인위적인 것이며 박제화 된 개념인데, 우리는 그 관념(concept) 자체를 실재(reality)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여 관념에서 다시 시비분별을 일으켜 번뇌를 만듭니다.
그러므로 번뇌의 소멸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위빠사나 수행은 관념 속에서 그 관념이 의미하는 실재(reality)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념을 관념이라고 알고, 관념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념(빤냐띠)이나 명칭은 이름이라서 한 번 정해지면 변하지 않습니다. 한 번 관념화 되면 항상 그것을 바탕으로 대상을 받아들이고 사유하여 관념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실재' reality는 지금 여기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인데, 관념은 이미 설정된 개념이므로 지금여기에서 인식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과거의 것입니다. 그래서 빤냐띠는 고유한 특성이 없어 위빠사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관념(빤냐띠)이나 명칭은 변화가 없기 때문에 관념, 모양, 명칭을 대상으로 그 대상에 집중하는 사마타수행을 하면 몰입이 가능하여 근접 삼매를 거쳐 근본삼매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마타의 집중은 대상과 하나가 되어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초선에서 사선의 선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에 보면 사마타 수행의 주제 40가지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표상(이미지. 相)을 대상으로 하여 근본 집중을 한 결과 색계나 무색계 선정을 얻습니다.
40가지 명상 주제.
* 까시나 열가지 - 1) 땅, 2) 물, 3) 불, 4) 바람, 5) 청, 6) 황, 7) 적, 8) 백, 9) 허공, 10) 광명,
* 부정함 열 가지 - 1) 부었음, 2) 검푸름, 3) 곪음, 4) 끊어짐, 5) 갉아먹음, 6) 흩어짐, 7) 난도질, 8) 피가 흐름, 9) 벌레 바글거림, 10) 해골이 됨.
* 수념 열 가지 - 1) 부처님, 2) 가르침, 3) 승가, 4) 계율, 5) 보시, 6) 천신, 7) 고요함, 8) 죽음, 9) 몸, 10) 들숨날숨.
* 무량 네 가지 - 1) 자, 2) 비, 3) 희, 4) 사(평온)
* 음식에 혐오
* 사대의 분석
* 무색계 네 가지 - 1) 공무변처, 2) 식무변처, 3) 무소유처 , 4) 비상비비상처
이들 모두 합하면 40가지가 됩니다. 이들 수행 주제는 모두 준비단계, 또는 근접 삼매를 닦으며, 수행 주제에 따라 근본삼매를 성취하기도 합니다.
3) 빠라마타 (paramattha,궁극적 진리, 실재하는 성품 )에 대하여.
빠라마타는 자연적인 것, 근본법, 최승의법입니다. 불교에서 실재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인식할 수 있는 법을 빠라마타 담마라고 하며, 궁극적 진리, 진제(眞諦)입니다. 아비담마에서 법을 4위 82법으로 분류합니다. 심법-1법, 심소법-52법, 물질-28법, 열반-1법 입니다.
궁극적 진리 (빠라마타 담마)에는
1) 마음(識) -심법
2) 마음의 작용( 受 想 行) -심소법
3) 물질 (色 - 지수화풍) -색법
4) 열반 - 열반법
1) 2) 3)의 법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유위법이며, 4)의 열반법은 원인 결과가 없는 무위법입니다.
법이란 고유한 특성을 가진 것으로 그 특성은 인식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온(五蘊)만이 실재(實在)하는 법, 빠라마타, 최승의법입니다. 다만 이런 오온(몸과 마음)을 '나' ‘남’ ‘아무개’ '여자' '어른' '아이' 등으로 부르는 것은 관념, 빤냐띠이며, '아무개'라는 이름이 가진 실재, 빠라마타는 그의 현재의 마음과 마음의 작용과 물질입니다.
위빠사나가 빠라마타(실재)를 수행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대상들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실재하는 성품(빠라마타)은 모두 지금 여기에서 마음이 느낌을 통해서 아는 것으로, 이 느낌은 매순간 변화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 대상이 일어났다 소멸되고, 다음 대상이 생성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어느 한 대상에 깊게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찰나마다 올라오는 대상과 그 대상을 아는 마음으로 찰나집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의 집중은 깊은 집중(근본삼매)이 아니고, 찰나 집중이지만, 이와 같이 빠라마타를 대상으로 하는 찰나 집중은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어 마음에 번뇌가 없는 고요함을 얻습니다. 이런 고요한 마음은 찰나마다 변하는 대상의 무상한 성품과 괴로움과 무아를 통찰하게 됩니다. 찰나 집중으로 오온에서 무상, 고, 무아를 보고, 오온에 대한 염오와 이욕으로 집착을 끊으면 해탈 열반을 실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물질과 마음과 마음의 작용의 법들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점차 이런 것들이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 조건적 특성들을 알아차리고, 이런 것들이 모두 다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무상, 고, 무아의 보편적 특성까지 통찰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수행자가 처음부터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은 마음을 몸에 붙여서 몸의 움직이는 모양(빤냐띠)을 잡고 더 집중이 되면 몸의 느낌(빠라마타)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힘이 쌓이면 마음이나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고, 알아차림의 힘이 축적되면서, 원인과 결과의 상관관계를 보는 눈이 열리고, 다시 물질과 정신의 변화에서 무상의 법을 볼 수 있는 힘이 차츰 익어간다고 이해해야합니다.
수행자가 오온이 무상, 고, 무아라고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빠사나의 지혜(통찰지)가 아니고 사유이며, 이 사유는 탐진치라는 번뇌를 끊는 힘이 없습니다. 수행으로 직접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보고 이해할 때만이 탐진치라는 번뇌를 끊어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빠라마타 담마는 궁극적 진리, 최승의법입니다.
4. 실수행에서는 빤냐띠로 시작하여 빠라마타를 알아차립니다.
관념과 실재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재를 표현한 관념(모양. 이미지. 想, 相)안에 대상의 고유한 특성이 있고 이것을 느낌으로 알아차려서 궁극적 실재(빠라마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 하는 단계에서는 모양(빤냐띠)이 잘 잡힙니다. 수행자가 계속 모양인 빤냐띠에 알아차림으로 마음을 집중하다 보면 마음이 안정되어 점차 느낌인 빠라마타가 잡힙니다. 점차 빤냐띠(모양)는 작아져 인식 대상이 되지 못하고 빠라마타가 점점 크게 느껴져 느낌만이 인식됩니다.
그래서 좌선이나 경행을 할 때 먼저 잘 잡을 수 있는 대상의 모양(相)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집중이 되면 점차 모양에서 느낌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면 대상의 실재하는 고유한 특성(빠라마타)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빠라마타에 집중하면 빤냐띠는 사라지고 오직 실재하는 성품만 남습니다.
신념처에서 호흡을 볼 때 배의 일어나고 꺼지는 모양을 주 대상으로 보는 것은 마음을 수행 주제에 집중하기 위한 과정이고, 마음이 대상에 잘 집중이 되면 모양은 사라지고 수축 팽창하는 느낌이 커집니다. 그러면 그 느낌을 대상으로 실재를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경행에서 발을 알아차릴 때, 발의 움직이는 모양을 대상으로 하면 모양(빤냐띠)을 보는 것이며, 발의 움직임에서 느낌을 보면 실재(빠라마타)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손을 합장하고 있으면서, 지금 합장하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대상의 모양(빤냐띠)을 본 것이지만,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알아차리면 실재(빠라마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매운 고추를 먹으면서 고추다, 맵다는 개념을 떠올리면 명칭(빤냐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며, 고추의 ‘매운 맛’을 혀에서 직접 느끼면서 매운 맛의 변화를 알아차리면, 고추라는 이름이 가진 고유한 특성인 매운 맛(빠라마타)을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좌선 중 호흡을 볼 때도 배의 일어나고 꺼지는 모양을 알아차리거나 "일어남, 꺼짐"하면서 명칭을 붙이면 모양(빤냐띠)을 보는 것으로 일종의 마음 집중을 위한 사마타 수행이 되며,
그 결과로 마음이 호흡에 잘 집중되어 호흡의 밀고 당기는 느낌이 나타나면 호흡이라는 명칭이 가진 물질의 고유한 특성을 본 것입니다. 이때 호흡의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위빠사나 수행으로 전환 된 것입니다.
염불, 절, 화두 수행들도 대상의 관념이나 모양을 잡고 있으면 사마타 수행이 되지만, 그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재 자신의 몸의 느낌들에 마음을 집중하면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 수행과 사마타 수행은 하나의 대상에서 대상의 모양(相)을 보는가, 대상의 성품을 보는가 따라 구별되며, 찰나 집중을 하는가, 근본 집중을 하는가에 따라 구별됩니다.
세간에서는 빤냐띠와 빠라마타를 구분하지 못하고, 빤냐띠가 전부인줄 압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모양(아름답고 추함, 젊고 늙음)과 명칭(직위, 학벌, 재산, 숫자), 또는 명분에 가치를 두고 모양새(빤냐띠)를 위해 노력합니다. 이것이 계속 윤회하는 세계에 머물게 하는 속제이며 세간의 관념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출세간을 향하는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모양(빤냐띠)보다는 성품(빠라마타)을 더 중요시합니다. 모양, 관념,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단자 빤냐띠라고 알뿐, 모양에 가치를 두지 않고, 오직 그 모양 안에 실재하는 성품에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모양(빤냐띠. 개념, 관념)에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많은 괴로움을 만드는 관념은 오온을 ‘나’라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관념에서 그 실재인 오온의 법을 보지 못하여 ‘나’를 집착을 하고 괴로움을 생산합니다.
만일 좌선 중에 모기가 수행자를 물었다면, 이때 모기가 나를 물었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은 즉시 여러 생각을 불러내서 알아차림을 놓치고 화를 내거나 걱정을 합니다. 그동안 쌓아놓은 여러 가지 정보들의 관념에 빠져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실재하는 것은 따끔거림 가려움 등의 느낌이 그냥 그 자리에서 생멸하면서 흘러가고 있는 것뿐입니다.
즉 그 순간 몸에서 경험하는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면, 모기는 해충이라는 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모기로 인해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물린 곳의 느낌을 대상으로 보아서 느낌의 변화를 보고 느낌의 무상한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나이가 들어 피부가 거칠고,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는 하얗고, 치아도 부실할 때, 이런 자신의 모습을 관념으로 보면, 나이, 주름살, 나(我), 치아, 흰 머리카락 등등이 내 것이라는 관념에서 슬프고 싫고 한탄스럽고 괴롭습니다. 계속 이런 생각이 다시 그에 연결된 다른 생각을 불러오면서 점점 슬픔과 비탄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나 나이들은 자신의 실재를 알아차려 보면, 몸은 단지 지수화풍 사대의 변화로 나타난 현상이며, 변화를 괴로워하는 느낌과 생각으로 일어난 불만족스런 마음만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항상 하지 않습니다. 항상 함께 생멸하므로 한 순간에는 하나의 색수상행식이 한 찰나에 일어났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늙었다 슬프다를 느끼는 '나'는 없고, 그런 느낌을 느끼는 그 순간의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바람처럼 스쳐지나갔을 뿐인데, 이런 현상이 나의 것이라고 붙잡는 것은 관념을 붙잡은 것입니다.
위빠사나는 현재 자신의 몸을 마음이 분리해서 객관적으로 그 실재하는 성품을 알아차리는 것인데, 실재를 보지 못하고 관념을 받아들이면 생각이 만들어낸 세속적 관념에 휘둘려 괴로움이 생기며 실재하는 대상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대상의 실재를 보면 단지 그런 느낌과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질 뿐으로, 알아차리는 마음은 평온하게 현재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지혜를 만듭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대상에서 이것이 관념인지 실재인지 구별할 수 도 없고, 바로 관념에 빠져 괴롭습니다. 이렇게 괴로울 때 자신이 관념에 빠진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실재하는 것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수없이 거쳐야합니다. 이 과정에서 점차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는 힘이 생기며 지금 경험하는 실재는 법으로서, 단지 알아차릴 대상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실재를 법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 꾸준하게 알아차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수행은 수없이 알아차림을 놓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알아차리는 노력을 할 때 발전합니다. 이런 시행착오의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며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 코스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관념에 휘둘릴 때마다 “그랬네!” 하고 객관화해서 알아차리고, 다시 이 순간의 실재하는 것으로 돌아와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관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관념의 그물에 걸리면 바로 자기 생각의 노예가 되어 고정관념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면 이때라도 관념에 걸린 것을 알아차리고 그 순간의 실재인 몸, 느낌, 마음, 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래서 빤냐띠(모양)를 중요시하고, 빠라마타(성품)를 가볍게 여기는 것을 지혜 없음(무지)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괴로움의 원인은 대부분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고, 관념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관념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5. 신념처 수행의 이익과 수행 중 나타나는 장애 (0) | 2018.04.15 |
---|---|
[스크랩] 4. 신념처 - 물질의 빠라마타 (0) | 2018.04.15 |
[스크랩] 2. 알아차림에 대하여 (0) | 2018.04.15 |
[스크랩] 1. 신수심법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의 정의 (0) | 2018.04.15 |
[스크랩] 0-1 근본불교는 불교공부의 출발점 (0) | 2018.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