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스크랩] [종범 스님] 화엄경은 어떤 경전인가

수선님 2018. 4. 22. 12:49

[불교란 무엇인가] 종범 스님

화엄경은 어떤 경전인가



부처와 중생이 하나임을 설한 경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상을 기본으로 보살도의 실천을 통해 부처님의 세계를 구현해 나가는 것을 설한 경전입니다. 이 『화엄경』은 워낙 방대한 경전이라 전체 내용을 다 설명 드릴 수 없으므로 여기서는 『화엄경』의 세계에 대한 설명과 함께 『화엄경』 전체 39품 중 제 38품인 「이세간품」을 중심으로 이야기할까 합니다.
 

『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줄인 말입니다. 『화엄경』은 일반적으로 『화엄경』 또는 「화엄부」라고 부릅니다. 80권, 60권, 40권 등 권수별로 부를 때는 『화엄경』, 이를 합쳐 부를 때는 「화엄부」라고 합니다. 보통은 80권 『화엄경』을 가지고 공부를 합니다. 화엄학의 대가였던 중국 청량 징관 선사가 편찬한 『신역화엄경칠처구회송석장』에 따르면 『화엄경』의 방대함과 기본 골격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차경팔십권(此經八十卷) 사만오천게(四萬五千偈) 칠처구회설(七處九會說) 삼십구품장(三十九品章) 『화엄경』의 권수가 80권이고, 게송만 4만 5000개다. 7곳에서 9회의 법회를 열었고, 각 품과 장은 39이다. ”
 

그럼 위에서 말한 일곱 곳과 아홉 번의 법회를 연 곳은 어디일까요? 처음 법회를 연 곳은 보리수 밑이고, 2회는 보광명전, 이후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타화전에서 법회를 봉행했으며, 다시 보광명전에서 7, 8회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인도 기원정사에서 했습니다. 그래서 초회보리장(初會菩提場), 이회보광전(二會寶光殿), 삼회도리천(三會小刀利天), 사회야마천(四會夜摩天), 오회도솔천(五會도率天), 구회급고독(九會給孤獨) 등이 『화엄경』의 주요 구성 목차입니다. 이렇게 무슨 품을 어디에서 설하시고 어디에 기록하셨는지를 적어 놓은 것이 『화엄품목』이라는 책입니다.
 

 

구성을 밝힌 「약찬게」와 내용과 사상을 담은 「법성게」
 

 

흔히 7처를 말할 때는 지상 3처, 천상 7처라고 합니다. 또 품수는 초회 보리장 6품, 2회 보광명전 6품, 3회 도리천 6품, 4회 야마천 4춤, 5회 도솔천 3품, 6회 타화전 1품, 7회 보광명전 11품, 8회 보광명전 1품, 9회 급고독 1품 등입니다. 이렇게 하여 7처 39품이란 숫자가 나옵니다. 이후 대중들을 위한 화엄사상이 나옵니다. 이것이 의상대사의 「법성게(法性偈)」와 「약찬게(略纂偈)」인 것입니다. 보통은 80권의 방대한 분량을 읽고 연구한다는 것이 어려워 「약찬게」를 외고 「법성게」를 주로 독송합니다.
 

먼저 「약찬게」에는 『화엄경』의 구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약찬의 ‘찬’은 ‘엮을 찬’입니다. 품수와 등장 인물과 품수의 이름 등의 중요한 정보와 항목을 묶어 놓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상이 없습니다. 반면 의상 스님의 「법성게」를 보면, 『화엄경』의 구성에 대한 말은 일절 없고 오로지 그 내용과 사상만이 담겨 있습니다. 『화엄경』에서 설명하는 우주와 깨달음을 도표로 구성한 것이 「법성게」입니다. 그래서 「법성게」를 반시(盤詩)라고 합니다. 법성을 노래한다는 뜻이지요. ‘7언 30송 210자’로 된 「법성게」의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법성은 원융해 둘이 없고, 제법은 부동해 적멸상이다. 이름도 모양도 모두 없으니, 증득한 지혜로만 알 수 있다.” 


 

법성은 둘이 아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법성(法性)은 무엇일까요? 온 우주 법계의 본성입니다. 그것은 원융해서 둘이 없습니다. 원융은 시작이 바로 끝이고, 끝이 곧 시작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이고, 보이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융입니다. 그래서 진리에는 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에는 둘이 있습니다. 그래서 법성과 생각이 들어맞으면 되는데, 맞지 않아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 역시 둘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 참과 거짓, 있고 없음 등으로 나눠 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둘이 아닙니다. 원융성으로 보면 깨달음이고, 이원성으로 보면 분별입니다. 모든 고통과 대립은 둘에서 오는 것입니다. 원융에서 보면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고, 나쁜 것이 좋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좋은 것에 집착할 것도 못 되고, 나쁜 것을 싫어할 것도 못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성원융무이상’입니다.
 

제법은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본래 고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법성의 세계는 어떻게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그릴 수가 있을까요? 인간은 지혜와 생각이 있는데, 생각은 항상 둘로 보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생각이 곧 둘입니다. 그런데 지혜로 보면 본래 고요함과 원융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혜와 생각’입니다. 지혜로 돌아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생각에 매이면 모든 고통이 생깁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요? 자기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자기 감정을 스스로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럼, 감정의 성격은 무엇인가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감정은 자기를 사랑하는 노력이기에, 자기나 하나를 모두 우주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없으면, 사람도 우주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을 볼 때는 그 사람들을 전체 중에 하나로 봅니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자신을 보는 것과 다른 이가 나를 보는 데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한테 관심을 가져 주길, 사랑해 주길 바라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감정입니다. 감정은 둘로 보는 데서 나옵니다. 나와 내가 아닌 것, 즉 본래 고요하다는 법성은 원융하다는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의 윤회세계가 다 이렇습니다.
 

『화엄경』 초회 6품은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 「보현삼매품(普賢三昧品)」, 「세계성취품(世界成就品)」,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 「비로자나품(毘盧자那品)」 등입니다. 초회 6품은 부처님이 성불했을 때의 광경을 설명한 것이 특징입니다. 다른 경전에는 이런 부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법계는 지혜의 세계
 

 

화엄의 부처님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대방광불이라 합니다. 대방광불은 부처님의 세계를 이릅니다. 원효 스님의 『화엄경』 서문에 보면 “대방광불화엄경은 법계가 끝이 없는 세계다. 법계는 지혜의 세계다. 인간이 지닌 지혜가 곧 불지혜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성이다. 좋은 지혜를 잘 펴 쓰면, 무궁무진하다. 이를 대방광”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대는 끝이 없고, 방은 법칙이 있고, 광은 안 통하는 데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체와 용을 말합니다. 지혜의 본체와 작용에 대한 것입니다. 이를 부처님이 화엄을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온갖 공덕을 짓고 회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보살은 자기가 지은 복을 자기가 탐하지 않습니다. 복은 많이 짓되, 항상 보시하고 회향하는 것이 화엄수행입니다.
 

우선, 초회 6품의 「제 1세주묘엄품」에 보면 기막힌 시작을 볼 수 있습니다. 『화엄경』은 시성정각(始成正覺), 처음부터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다음은 정각의 세계를 설명합니다. 깨닫고 보니 보이는 세계 자체가 달라졌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어느 때 부처님께서 마갈제국 아난야 법보리장에서 처음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었다. 그 땅은 경고하여 금강으로 됐다. 가장 묘한 보배들과 여러 가지 훌륭한 꽃과 깨끗한 마니로 장엄하게 꾸며졌으므로 온갖 빛깔들이 그지없이 나타났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불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지혜로써 해결되고 완성됩니다. 지금 이 순간 무량한 억겁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는 데 걸림이 없게 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면, 삼세에 들어가 평등하고 몸이 일체 세간에 가득이 없는 데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은 세계이고 우리들의 세계입니다. 시공은 깨달음으로 연결합니다. 시공을 극복하는 불교적 방법입니다. 지혜를 얻을 때, 모든 고통이 사라집니다.
 

「제 2여래 현상품」의 핵심은 다음 게송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

부처님 몸이 온 법계에 가득하니, 일체 중생 앞에 모두 나타나시었다. 인연 따라 가지 않은 데 없지만, 언제나 보리좌에 항상 계신다.”
 

“불신상현현(佛身常顯現), 법계실충만(法界悉充滿), 항연광대음(恒演廣大音), 보진십방국(普震十方國).

부처님 몸이 항상 나타나 법계에 가득히 찼다. 늘 광대한 음성을 내어 시방국토를 모두 진동하신다.”
 

이는 바로 지혜의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친 마음의 지혜, 세계를 못 깨친 생각의 세계와 다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둠과 공포를 만드는 생각의 세계를 벗어나 지혜의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어리석은 업력에 빠지면 고통 없는 곳에서 고통을 만들게 됩니다.
 

우리는 『화엄경』을 통해 일상에서 지혜를 계발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지혜로 돌아가면 모두 해결됩니다. 때문에 어리석은 감정을 해결하려면, 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학습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관조(觀照), 자기를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에는 특히 자기를 챙기고 돌아보는 노력이 중요한 때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원망을 많이 하고 사는 것이 요즘 세상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 챙기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자기 마음을 늘 관조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에게 바라는 마음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수련입니다. 마음공부를 말합니다. 끊임없이 닦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공부를 제대로 익히면, 자기 마음을 스스로 관조할 수 있게 되고, 이것이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불교는 깨달음을 말하는 종교
 

 

『화엄경』 「이세간품」은 부처님께서 보광명전에서 설하신 것으로, 부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 잘 설명해놓은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세간품」은 세간을 떠난다는, 즉 세간을 여읜다는 뜻입니다. 세간 속에 있으면서 세간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보이고 들리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물든다고 합니다.
 

간단히 세간법이라 하면 세상과 세상 사이, 즉 세속법, 출세간법이라 하면 세속을 떠난 세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반야심경』에 나오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는 말의, 그 오온법(五蘊法)이 바로 세간법입니다. 오온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즉 사람의 몸을 지칭하는 말인데, 불교에서는 육체를 이루는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생각을 이루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이 합쳐져 인간을 이룬다고 봅니다. 또 12처라 하여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로 나누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육근(六根), 육식(六識), 육경(六境)으로 분류하고 이를 18계라고 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 오온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몸과 몸을 중심으로 감각되어지는 인식의 대상을 모두 합쳐서 세간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오온색신(五蘊色身), 즉 오온으로 보이는 몸입니다.
 

그렇다면 출세간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불을 올릴 때 계향(戒香), 정향(淨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의 오분향(五分香)을 올립니다. 이 하나하나는 공덕법신(功德法身)이라는 것인데, 색신(色身)이 색으로 나서 색으로 소멸하면 색신인데, 이 색신이 부처님의 교법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면 법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적으로는 오온색신은 세간법이고, 오분법신은 출세간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색신은 무엇일까요? 생로병사 삼세윤회하는 것이 색신입니다. 이것이 세간법이고, 해탈, 열반, 불생불멸 이것이 출세간법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시고 설법을 펴셨는데, 성불하고 앉아 계신 부처님의 세계를 ‘미묘한 깨달음을 다 만족하시고’라고 적어놓았습니다. 불교는 창조를 말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말합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고, 문제의 해결 역시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바르게 보고 아는 것
 

 

그럼 우리가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일까요? 깨달음이란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즉 참답게 아는(여실) 것과 바르게 보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짚으로 새끼를 꽈놓은 동그랗게 된 것을 언뜻 보고 뱀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견(무명)이고 망견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뱀이 아니라 새끼를 꼬아놓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것을 정견이라고 합니다. 있는 걸 있는 것으로, 없는 걸 없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나라는 건 없습니다. 오온은 형질일 뿐이지요. 아(我)에서 무아를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것이 소승불교입니다. 소승불교는 무상, 무아를 알아야 해탈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화엄경』은 무아에서 법신(法身)을 보는 것입니다. 원명(圓明)을, 신령스럽게 밝은(靈明) 것을 보는 것입니다. 중생에게는 원명, 원각의 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원명, 원각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제사 지낼 때에도 문자로 된 경전 말고 원명으로 된 경이 있다고 합니다. 종이와 먹이라는 물질로 된 것이 아니라 한 글자도 서술하지 않았지만 항상 대광명을 밖으로 뿜어내는 경이 있고, 그것을 법신이 보고 듣고 하는 것,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러면 내 몸 어디에 법신이 있는 걸까요? 모두 가지고 다니는 법신을 보는 것, 그 법신을 보는 게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그렇게 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세간과 출세간, 이런 게 다 없어지고 취하고 버리는 것, 생사 열반이 다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괴로움일 것입니다. 이 괴로움은 형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욕망과 두려움이 사라졌을 때 고통은 없어지지요. 결국 두려움이란 보이고, 들리고, 기억되어지는 형상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형상, 즉 물질의 형상은 자세히 보면 실체가 없습니다. 이를 무상이라 합니다. 형상은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사라집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이것을 영원한 것으로 알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안 이루어질까봐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형상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바로 알면 무상법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물이 얼면 얼음이 되지요. 즉 얼음이라는 형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얼음은 실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따뜻하면 녹아버리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얼음이라는 형상을 보고 욕심을 내고,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깨닫게 되면 형상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되고 무상법을 통달하게 됩니다. 깨달음의 세계인 부처님 세계는 시간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시간은 생각일 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일념(一念)이 무량겁(無量劫)이고 일찰나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은 세계를 바로 믿으면 작은 티끌 속에서 우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화엄경』이고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이 구절만 바로 알아도 우리 몸에서 법신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는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빠르게 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빠르게 하려는 긴장감과 욕심에 가려 더 더디게 됩니다. 스스로만 급한 것이지, 사실은 급한 게 아닙니다. 
 

 

신심으로 닦아나가면 모두 부처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게 된 동기가 바로 고통을 없애고, 생사윤회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하여 도를 닦으셨는데, 부처님도 80세에 돌아가셨다면 죽음과 생사윤회를 해결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는 해결을 하셨습니다.
 

죽지 않는 것으로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이 없음을 깨달음으로 해결을하신 것입니다. 깨달음으로 보면 죽는 그대로가 죽지 않는 것입니다. 밝은 낮의 세계를 알면 어둠이 와도 어둠이 없는 것이므로 불생이며, 어둠이 사라져도 사라진 것이 아니므로 불멸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보면 모든 것이 불생불멸법이고, 해탈열반법이고, 극락법입니다. 그것을 알았으면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익혀야 합니다. 시간시간 무엇을 하건 항상 죽고 삶이 없는 참세계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불자의 생활입니다. 죽고 늙음, 또 아픔을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모두가 어둠인 것입니다. 걱정, 근심 없이 순간순간을 잘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탐욕과 나태를 조심하여야 하고, 탐욕은 이 몸을 중심으로 생겨나므로 아플 걱정, 죽을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부지런히 닦는 사람은 탐욕에 빠지기 쉽고, 탐욕이 없는 사람은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성불할 수 없고, 욕심 많은 사람이 성불할 수 없습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게으르지 말고 끝까지 신심으로 닦아나가면 모두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또 신심을 항상 간직하여야 합니다. 자동차가 연료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듯이 불자에게 있어서 연료란 신심입니다. 그 신심이라는 연료가 떨어지지 않게 항상 채워져 있는지를 점검하면서 게으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항상 닦으면 그것이 복 받는 길이고, 극락 가는 길이고, 성불하는 길입니다. 불자들 스스로 많이 닦아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성불하십시오.


[출처: 불교와 문화]

 

출처 : 海印의 뜨락
글쓴이 : 혜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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