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불교

너는 내 업(業)의 표상이다/진우스님

수선님 2018. 4. 22. 12:56

너는 내 업(業)의 표상이다.


[오늘의 명상]

모진 말도 잘 들어주는 그대 귀는 보석 없이도 빛나고


늘 상 베푸는 그대의 손은 팔찌 없이도 빛이 나네.

그대는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온 몸에서 진리의 향기가 나고

차별 없이 보는 그대의 눈은 맑은 감로(甘露)와 같다네.




[덧붙임]


여기서 “그대”란 상대를 말한다.

내가 대하는 모든 상대는 나의 업(業)에서 나온 표상이다.

즉, 내 마음에 없는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며

보일 수도 들릴 수도 없는 것이다.

꿈을 꾸는 것도 내 마음에 있는 것이고,

헛것을 보는 것도 내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가 내 마음에 있는 것이니,

미운 것도 싫은 것도 나의 업에서 나온 내용들이다.

만약, 미운 마음과 싫은 마음, 고통과 괴로운 마음이 나에게 없다면,

도저히 인식되거나 생각할 수도 없으며, 상상조차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과 감정 등의 마음이 왜 나에게 있는 것일까?

전생부터 경험되어온 것들이 세포 하나하나 마다 유전되어

DNA(deoxyribonucleic acid)로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아뢰야식(阿賴耶識), 즉, 업식(業識)이라 부른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즉,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업식(業識)이 유사한

업식과 유유상종(類類相從)하여 결합된 대상이 곧 부모가 되는데,

그러므로 부모와 떨어질 수 없는 정(情)을 나누게 되는 것이고,

모든 면에서 비슷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을 못하거나 현재 경험을 하지 않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예기치 못하는 성격과 성품, 성질이 돌출적으로 나올 때가 있을 것인데,

이는 아뢰야식(업식)에 저장된 전생 경험이 때가 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감정의 기복이다.

감정은 고락사(苦樂捨)로 일컫는 삼수(三受)작용을 말하는데,

기분이 좋거나 나쁘거나,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세가지 감정을 말한다.

일체의 모든 행위는 감정으로 귀결된다.

감정 또한 전생의 경험과 그 경험이 축적되어 무의식(無意識) 또는

잠재의식인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인과적(因果的)으로

순간순간 발생되면서 온갖 행위를 하게 만드는데,

이는 좋고 싫은 분별심(分別心)으로 이어져서 인과의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 저장된 업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 업은 전생부터 이어져온 저장물들이 인과적으로 때가 되면

나타나게 되는 것인데, 이를 집약하면 좋고 싫은 기분인 분별된 감정이

인과적으로 악순환하는 것이므로, 문제는 감정의 인과를 끊어야

기분 나쁜 고통과 괴로움도 사라진다는 결론이다.

오늘의 시어(詩語)는 내 앞에 나타난 상대의 대상이 보석이면

내 마음이 보석인 것이고, 상대가 빛으로 보이면 내 마음이 빛나는 것이 되고,

상대에게서 진리의 향기가 난다면 내 마음속에 진리의 향기가 들어있는 것이고, 상대의 눈이 감로라면 내 마음이 맑은 감로라는 뜻이다.

그러니 일체가 유심조(唯心造-오직 내마음이 만들어냄)요,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오직 마음)이라,

나를 상대하는 대상과 나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바로 내 마음이 투영된 모습이라 할 것이니,

먼저 내 마음의 업을 깨끗이 해야 나를 감싸고 있는 것들이 깨끗해 질 것이고,

내 마음에 분별심이 없어야 인과의 악순환이 끊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기도와 참선은 나의 업을 맑게 해 줄 것이며,

보시와 정진은 내 마음의 분별심을 사라지게 할 것이니,

이를 항상 잊지 않고 실행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 진우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