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부란?
팔리어 Therava 를 상좌부라고 부르고, 그의 Thera 는 장로 또는 상좌라는 뜻이고 vada 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석가가 죽은 후 100년쯤 되어 교단(敎團)은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로 나뉘었는데, 후에 이 상좌부로부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갈라져 나왔고, 거기에서 다시 독자부(犢子部)•정량부(正量部)•화지부(化地部)•법장부(法藏部) 등으로 나뉘어 불기(佛紀) 300년경에 11부파가 되었으며, 설일체유부에서 음광부(飮光部)•경량부(經量部) 등으로 분파하여 결국 20부파가 되었다. 이 상좌부의 교의(敎義)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다만 설일체유부만이 전해진다.
상좌부 불교,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
상좌부 불교(Theravada Buddhism)는 장로(長老) 또는 상좌(上座)들의 불교라는 뜻이기 때문에 장로 불교라고도 한다. 상좌부 불교는 불교의 온전한 한 부파(部派)로 스리랑카를 위시한 몇몇 국가에서 수행하고 있는 불교라 할 수 있으나,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는 지역적으로 어느 특정 국가에서 수행하고 있는 불교라 할 수 없으며 나아가 불교의 한 부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상좌부 불교의 경우처럼 불교의 한 부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부파의 승단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조문(條文)인 바라제목차(Patimokkha)가 있어야 하지만, 소승 불교나 대승 불교는 별도의 특정한 바라제목차를 갖추고 있지 않다. 이는 소승 불교나 대승 불교라는 용어가 어떤 불교적 흐름을 나타내는 어휘로는 사용될 수 있으나 특정 부파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특히 소승, 즉 작은 수레(Small Vehicle)을 나타내는 어휘인 히나야나(Hinayana)나 대승, 즉 큰 수레(Great Vehicle)을 나타내는 어휘인 마하야나(Mahayana)는 상좌부 불교의 파알리 문헌은 물론 그 주석서 또는 《도사(島史,)》나 《대사(大史, Mahayana)》 같은 불교 역사서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단어들이다. 이는 대승이나 소승이란 말이 적어도 파알리 불전 이후에 시작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며, 소승 불교와 상좌부 불교를 혼용하는 것은 잘못이라 할 수 있다.
또 한 상좌부를 소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 못 부르는 것이라고 한 어떤 학자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오랜시간동안 일부 학자들을 제외 하고는 대승 계통의 학자들은 상좌부 전통과 불교에 대해서 직접적인 지식을 갖기가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 대승의 논객들은 그들이 소승이라고 비판했던 불교와 남방상좌부 불교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근본 불교 이니 기초불교이니 원시불교이니 초기 불교이니 하는 용어를 갖다 붙이기 시작했다.
많은 대승 불교도들이 소승이라고 지칭했던 불교는 일반적으로 [설일체유부]라는 오래 전에 역사에서 사라진 부파 불교의 한 종파에 불과했던 것이고 다시 말해서 이미 죽은 말에다가 채찍질을 열중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시한번 불교의 발전과 전래 상황을 간단하게나마 한번 살펴보자
1) 원시불교 - 상좌부와 대중부 - 부파 불교 - 부파와 대승불교 함께 공존 - 대승 계통의
사상이 중앙 아시아로 전래 - 중국 - 한국및 일본
2) 원시불교 - 상좌부와 대중부 - 상좌부 본파가 실론섬으로 전래 됨 - 남방 국가로 전파
대승불교 -일체중생의 제도(濟度)를 목적으로 하는 불교. 대승이란 산스크리트의 마하야나(mahāyāna)를 번역한 말이며 <많은 사람들을 태우는 광대한 탈것>이라는 뜻이다.
소승불교(Hinayana)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입멸 후 100∼200년 뒤, 불교교단이 18∼20부파로 분열되어 논쟁을 벌인 때의 불교. 아비달마불교라고도 한다.
남방불교-스리랑카•미얀마•타이•라오스•캄보디아 등 남방 여러 나라에서 숭상되는 불교. 이에 비해 인도에서 서역(西域)을 거쳐 한국•중국•일본 등 북방에 전해진 불교는 <북방불교>라고 한다. 원시불교에서 갈려진 상좌부(上座部)의 불교가 전해졌으므로 <남방상좌부불교> 또는 <테라바다(Theravāda)>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초기 대승의 신봉자들이 소승이라고 폄훼하고 비판했던 부파불교 들은 이미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또한 초기 대승 신봉자들에게 상좌부라는 존재 자체가 거의 알려져 있지도 않았을 가능성은 너무나 농후하다.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 대상은 고대의 여러 부파들 그중에서도 특히 [설일체유부]라는 부파불교 였기 때문이다.
남방 상좌부 불교의 성립과 역사
BC 483년경에 석가모니가 죽은 이후 약 300년에 걸쳐 인도에서 그의 제자들이 형성한 여러 부파들에서 이루어진 불교를 가리키는 말. 여러 경전들에서 '18부파' 혹은 '20부파'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경전들마다 그 내용이 상당히 다르며, 여러 연대기에 나오는 부파 명칭을 모두 합하면 30개 이상이 된다.
불교 공동체에서 최초의 분열은 석가모니가 죽은 지 약 100년 뒤 바이샬리(지금의 비하르 주)에서 열린 제2차 결집의 결과 발생했다. 이때 율(律 Vinaya)보다 스승으로부터 전래되는 행동규범을 중시하여 아사리파(阿 梨派 acariyavadin : acariya는 산스크리트로 '스승'이라는 뜻)라고 불린 바이샬리의 비구들은 상좌부(上座部 Sthaviravadin)에서 갈라져나와 대중부(大衆部 Mahasanghika)라는 독자적인 부파를 형성했다. 대중부는 붓다를
상좌부 내의 분열은 BC 3세기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거•현재•미래의 3세와 법체(法體)의 실재를 주장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 stiv din)가 명확한 분별을 한다고 하여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yavadin)라 자처하던 상좌부에서 분리하여 나갔다. 그밖에 상좌부로부터 파생된 부파로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푸드갈라라는 '인격'의 존속에 관하여 독특한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불교 고유의 무아론(無我論)에서 파생되는 난점을 극복하고자 했던 정량부(正量部 Sammatiya)와 독자부(犢子部 Vatsiputriya)가 있다. 또한 교리를 체계화한 논(論 Abhidharma)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석가모니의 말씀으로 전하는 경(經 sutra)의 권위만을 인정하는 경량부(經量部 Sautrantika), 발생지역과 창시자의 이름에서 그 명칭을 얻었으리라 추정되는 화지부(化地部 Mahisasaka)•법장부(法藏部 Dharmagupta),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으로 전파되어 오늘날 스리랑카•미얀마•타이•캄보디아 등지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된 상좌부 불교의 기원인 상좌부(산스크리트로는 Sthaviravadin, 팔리어로는 Therav din) 등이 있다.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
붓다 입멸 이후 인도에서는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되풀이했다. 기원전 4세기 중엽에는 마가다 왕국이 가장 강력했고, 하란캬•싸이슈나가•난다의 뒤를 이어 나타난 마우리야 왕조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해 나갔다. 기원전 4세기경 페르시아를 멸하고 인도에 침입해 펀잡 지방을 점령했던 알렉산더가 죽자 인도에서는 이민족의 침입과 정복에 자극 받아 국민의 자주 의식이 높아져 있었다. 이때 찬드라굽타는 그리스 군대를 내몰고 펀잡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
마우리야 왕조의 시조 찬드라굽타 마우리야(B.C.324∼297)는 난다 왕조의 계보에 속했었으나 그의 어머니 무라 데위의 이름에서 공작(孔雀)이라는 뜻을 지닌 마우리야(Mauriya)를 국호로 택했다. 찬드라굽타는 난다 왕국도 정복했으며 기원전 322년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했다. 찬드라굽타는 인도의 마키야벨리라는 신하 까우띨리야의 보필에 힘입어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마우리야 왕조가 인도 대륙을 통일한 것은 아리안의 도래 이후 선주민이었던 드라비다인들과 아리안들의 갈등에서 아리안들의 완전한 승리와 외세에 대한 인도인의 독립을 뜻하고, 이를 계기로 아리안들이 완전히 인도 대륙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쇼카 왕(B.C.273∼232)은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아쇼카 왕은 남부 타밀 지역을 제외하고는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북쪽으로는 카시미르•네팔, 동쪽으로는 칼링가까지 정복하는 등 마우리야 왕조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아쇼카 왕은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주변의 국가들을 병합하기 위한 전쟁을 했다. 기원전 261년 칼링가 국을 무력으로 정벌하면서 전쟁의 잔인함을 직접 경험하게 되어 정복전쟁 포기 선언을 했다. 이로서 아쇼카 왕은 이민족이나 다른 국가를 공격할 만한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롭게 지낼 것을 자발적으로 선언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었다.
집권 초기에 자이나교 신자였던 왕은 불교에 귀의해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으며 인도 역사상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최초의 왕이 되었다. 왕은 자신이 신앙하는 진리를 국민들이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 법칙을 발표해 암벽이나 석주에 새겨 놓았다. 법칙의 내용은 깊은 사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살생 금지, 수렵 폐지 같은 국민에 대한 도덕적 훈계들이었으며, 특히 법대관(法大官)을 설치해 종교적으로 평등정책을 펼쳐서 불교뿐만 아니라 브라만교•자이나교•아지비카 등 다른 종교들도 동시에 보호하였다.
아쇼카 왕의 불교와 관련한 중요한 치적으로는 불전의 제3차 결집과 전도사의 파견을 들 수 있다. 제3차 결집의 내용에 대해서는 파알리어로 기록된 남전의 자료들과 한문으로 기록된 북전의 자료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 남전으로 전하는 불전의 제3차 결집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쇼카 왕으로부터 후원을 받은 승가에 6만의 외도가 들어와 7년씩이나 포살을 하지 않는 등 불교 교단이 크게 타락하자, 아쇼카 왕이 이런 혼란을 막고자 아호강가에서 목갈리풋타티사를 초청해 분별설 이외의 비정통들을 모두 교단에서 추방하고 천 명의 아라한을 모아 《논사(論事, Kathavatthu)》를 지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북전에는 근본분열을 대천(大天, Mahadeva)과 관련된 승가의 논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쇼카 왕의 불교와 관련된 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 세계화의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된 전도사의 파견이다. 아쇼카 왕은 외국으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작업을 한 최초의 왕이었다.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은 남방 상좌부 불교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해당 지역의 전설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역사적 기록에 의한 것이든 남방 상좌부 불교가 성립되는 최초의 사건들은 이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과 관련이 있다. 전도사의 파견은 아홉 차례에 걸쳐 있었다. 여덟번째는 미얀마, 아홉번째는 스리랑카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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