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실(悉)은 "모두 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개(皆)와 같은 의미죠.
그러므로 아래와 같은 용어로도 쓰입니다.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의 성품이 있다.
위 내용은 열반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불성(佛性)[buddha-dhatu]
dhatu라는 뜻은 요소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브로 불성은 부처의 요소라고 해석됩니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요소!!!
누구에게 불성이 있냐면 <일체중생>에게 있습니다.
돌맹이나 물, 불같은 것에 있지 않고 모든 중생에게만 불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각과 마음이 있는 유정들이 곧 중생입니다.
육도윤회하는 모든 중생들이 곧 유정입니다. 지옥/아귀/축생/인간/수라/천상계의 모든 존재들!!!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숨겨져 있습니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 부처의 요소가 있다!!!
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품이라고 해서 어떤 독립적인 실체라고 여기면 큰 오산입니다.
실체란 영원불변의 상주성을 띈 그 무엇을 뜻 합니다.
불성에 실체가 있다라고 여기면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용수보살의 중론에서는 空에 어떤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대단히 큰 중병이라
그 누구도 그 중병을 고쳐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空이 곧 佛性입니다.
空에는 그 어떤 실체라고 여길만한게 티끌만큼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空을 아무것도 없는 無라고 여기면 안됩니다.
空은 상주론과 단멸론의 양변을 떠난 <중도>이기 때문입니다.
왜 불성이 <있다>라고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세속법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부처의 도나 과를 얻었다라는 것도 역시나 세속법을 따라서 그렇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얻은게 없습니다.
진제의 측면에서는 일체가 차별이 없어서 모두가 공해서 뭘 얻을만한 실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속법에는 온갖 차별이 있어서 수다원도 얻고 아라한도 얻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불성이 있다라는 것도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본질적으로는 불성에도 역시나 실체가 없다고 해서 불성이 없다라고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참 희안한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 그 어떤 중생이 도를 닦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 진리를 설하실 때는 그래서 이 세속법에 따라서 진리를 표현하신게 있고,
또 하나는 완전한 진리의 측면에서 진리를 표현하신게 있습니다.
이것이 속제와 진제입니다.
이걸 제대로 잘 구분해야만 합니다.
속제는 이 세속법에 따라 말과 언어로써 표현할 때 쓰이는 것이고,
진제는 열반 그 자체에 대해서 설명할 때 쓰이는 표현입니다.
하나는 세속법에 따라 진리를 설명한 것이고, 또 하나는 완전히 진리에 입각한 설명인 것 입니다.
그래서 불처의 성품/요소가 있다...라고 표현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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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도 실체가 없어서 <무아>이며 <공>이고,
모든 법(진리)에도 실체가 없어서 <무아>이며 <공>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중생공과 법공이라고 부릅니다. 중생공을 아공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실체가 없는 중생이 실체가 없다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 입니다.
그래야만 모든 집착이 다 떨어져나가는 것 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나에게도 실체가 있고, 진리에도 실체가 있다.........이렇게 생각합니다.
실체라는 뜻은 영원불변의 상주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실체가 있다면 일체의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중생이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실체가 있다고 여겨서 그렇습니다.
뭔가 영원불변의 실체가 있다라고 여기면 어떻게 될까요?
절대 집착에서 못벗어나는 것 입니다.
그런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며 법(진리)이며 승가입니다.
깨달음/진리란 무엇일까요?
<실체를 얻을 수 없음> 바로 이것 입니다.
이게 곧 공이며, 이것이 곧 무소득 반야바라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깨달으면 모든 집착이 떨어져 나가는 것 입니다.
그 어디에도 즉 존재에게도 진리에도 고정불변의 영원한 실체가 없음을 알아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것 입니다.
그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 어디에 집착하겠습니까?
집착할 대상이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모든 걸 내려놓고 쉬게 됩니다.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것이 바로 진실한 도이며, 진실한 진리입니다.
본질적으로 따져보면 도를 닦는다 함은 뭘 얻기 위한게 아닙니다.
버리기 위함입니다.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를 닦는다함은 곧 항상 버리는 행입니다.
바로 상사행(常捨行)이 곧 도를 닦는 과정입니다.
상사행(常捨行)이 곧 반야바라밀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되돌아봤을 때
집착이 점점 더 강해져간다면 그건 삿된 도를 닦는다는 증거입니다.
집착이 강해져 가는가, 집착이 사라져 가는가...이것도 역시나 제대로 잘 살펴야 합니다.
자기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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