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제(眞諦)와 속제(俗諦)!!!
이런 단어를 처음 들어보신 분들께서는 반드시 이 둘의 뜻을 명확하게 배우셔야 합니다.
또 들어봤더라도 정확하게 구분을 못하시는 분들은 자료를 찾아서 배우셔야만 합니다.
일단 개념과 뜻부터 제대로 배우고나서 직접 깨달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크게 이 두가지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세간법이고 또 하나는 출세간법입니다.
왜 이렇게 세간과 출세간으로 나뉘어져있을까요?
바로 해탈이란 이 세간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세간을 벗어나는 진리인 출세간의 진리도 역시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 진리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해야만,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라는 것은 후기 대승불교에서 만들어낸 창작의 용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초기경전인 니까야/아함경에도 역시나 이 진제와 속제가 등장합니다.
속제는 산스크리트어로 samvrti-satya이며, 빨리어로는 sammuti-sacca입니다.
진제는 산스크리트어로 paramārthasatya이며, 빨리어로는 paramatta-sacca입니다.
제(諦)라는 것은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성제에서도 역시나 이 제(諦)를 씁니다.
두가지 진리이므로 이제(二諦)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입니다.
각각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1. 속제(俗諦)
속제란 글자 그대로 세간에서의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속제를 세속제라고도 부릅니다.
이 세간이 흘러가는 것에서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속제란 상대적인 진리인 것 입니다.
이 세속이란 상대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영원하다의 상대적인 것은 영원하지 않다 무상이요,
행복하다의 상대적인 것은 고통이다라는 고요,
실체가 있다의 상대적인 것은 실체가 없다라는 무아입니다.
2. 진제(眞諦)
진제란 진실한 진리라는 뜻 입니다.
한글로 번역된 니까야에는 궁극의 진리라고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더 이상이 없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뜻이죠.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진짜 알려주시려는 것은 바로 이것 입니다.
바로 이 진제로써 해탈하기 때문이죠.
승의제, 제일의제라는 용어로도 쓰입니다.
제일의라는 것은 곧 열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진제란 출세간의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진리인거죠.
진제에는 속제처럼 상대될만한게 없습니다.
왜냐면 텅비어 그 어떤 모습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멸진열반>입니다.
용수보살(나가르주나)께서 집필하신 중론(중송/중론송)의 제24 관사제품(觀四諦品)에
진제와 속제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있어서 이곳에 옮겨 옵니다.
용수보살의 중론을 읽을 때는 문맥을 대단히 잘 파악해야 합니다.
질문자의 글이 있고, 용수보살께서 대답하는 글이 있는데 그걸 파악못하면 뒤죽박죽이 됩니다.
아래는 중론의 관사제품(觀四諦品)입니다.
......................................................................................................................................................
諸佛衣二諦 爲衆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一義諦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이제(二諦:진제/속제)에 의거하여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
첫째는 세속제(世俗諦)이며, 둘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진제)이다.
若人不能知 分別於二諦 則於深佛法 不知眞實義
만일 사람이 이제(二諦)를 능히 분별하여 알지 못한다면,
불법(佛法)의 심오함에서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
* <원해여래진실의>에서 진실의란 바로 진제를 의미합니다.
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 不得第一義 則不得涅槃
만일 속제(俗諦)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일의(第一義諦:진제)를 얻을 수 없다.
제일의제(진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을 수 없다.
# 설명
제일의제인 진제는 허공과 같아서 그 어떤 설명이나 단어, 또는 말이나 논리로써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습없는 열반의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더라도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고통에서 건져내 주시기 위해서
말과 언어로써 진제(제일의제)를 설명해주시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진제를 세속의 방식(속제)으로써 알려주실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말과 언어가 아니면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진제는 말과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중생에게 가르치려면 말과 언어가 아니면 가르칠 방도가 없는 것 입니다.
비유한다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은 속제요, 달 자체는 바로 진제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달의 비유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진제 자체엔 달과 같은 모습이 없기 때문이죠.
이 세속법의 방식대로 진제를 설명하실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 입니다.
모습없는 모습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죠.
또 위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진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을 수 없다."
깨달음이란 곧 진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제를 깨달아야 해탈이 가능한 것 입니다. 속제는 다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무상/고/무아는 속제에 해당하고, 空은 진제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삼해탈문이 바로 空/無相/無願입니다.
무상(無常)으로는 해탈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무상(無常)은 진실한 진리(진제)도 아닙니다.
만약 무상(無常)이 진실한 절대진리라면 당연히 열반에도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그럼 열반도 무상(無常)하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 뜻은 곧 열반도 고통이란 얘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무상(無常)은 절대 진리가 아니고,
이 세간에서만 적용되는 상대적인 진리.......즉 속제인 겁니다.
이 세간에서야 발생한 모든 것이 실체가 없어서 반드시 변화하니 무상(無常)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세간을 벗어난 출세간...즉 열반에는 적용이 안됩니다.
그래서 이 진제와 속제를 구분해서 알지 못하면,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용수보살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출세간(열반/제일의제/진제/승의제)에는 공하여 그 어떤 모습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번째 해탈문이 바로 無相해탈문입니다.
모습이 없으므로 영원하다고 할 것도 없고, 또 영원하지 않다고 할 것조차 없는 것 입니다.
고통이 있다고 할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 조차 없는거죠.
내가 있다 없다..이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희론을 떠난 중도인 것 입니다.
뭐가 어떻다라고 따질만한게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정말로 중생들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은 空입니다.
이 空이 바로 해탈문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空에 접근하게 하려면 무상/고/무아를 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해탈의 공식이 다음과 같습니다.
무상-->고-->무아-->空-->무소유-->염오-->이욕-->해탈-->해탈지견
무상한 것은 곧 영원하지 않아 고통이며,
무상한 것에는 스스로의 성품(자성/실체)가 없어서 무아이니,
실체가 없으므로 곧 텅빈 것 입니다.
空을 대다수가 아무것도 없다는 無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위의 게송 다음에 나오는게 근기가 둔한 자들은 다 그렇게 오해한다라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아주 없는 無가 아닙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에 영원한 실체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변화하는거죠.
그러므로 몸과 마음은 존재하되 거기에 실체가 없어서 空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에는 진실이 없고, 또한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므로
몸과 마음이란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같고, 그림자 같고, 거품같고, 아지랭이 같고, 파초와 같은 것 입니다.
위의 중론 게송에 나와 있듯이
속제의 방식으로 진제를 설명해주지 않으면 깨달을 방법이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걸 가장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바로 허공입니다.
진제를 허공에 비유해서 설명해주는 것이죠.
진제를 설명해주려면, 오로지 비유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겁니다.
왜냐면 모습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허공도 역시나 모습이 없죠.
그래서 진제를 허공에 비유해서 설명해주시는 겁니다.
이 진제라는 것은 각자 자기의 마음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속제를 통해서 진제에 도달해야 한다고 나와 있듯이,
바로 우리의 찰라생 찰라멸하는 그 생멸하는 마음을 관찰하다가 불생불멸의 그 본래 마음을 깨닫는 것 입니다.
진제는 허공과 같다는 표현과 같이, 이 불생불멸심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空이 곧 진실이고 그러므로 진제입니다.
그러나 이 空에도 또한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18공중에 공도 역시 공하다라는 뜻의 空空이 있습니다.
깨달아야 할 것은 진제입니다.
딱 잘라 말한다면 곧 空입니다. 空이 곧 해탈문이라서 그렇습니다.
이 空은 대승만의 것이 아닙니다.
대소승 공통이죠.
그래서 니까야에도 나와 있고, 청정도론이나 아비달마 길라잡이에도 역시나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서 이 空이 어느 위치에 나와 있을까요?
바로 열반/해탈이라는 가장 중요한 곳에서만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대소승을 막론하고, 이 空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공을 깨닫는다는 의미는 연기법을 깨닫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인과 연의 상호화합에 의해 법이 생기는 것이 바로 연기법입니다.
그러므로 법에는 독립적인 스스로의 영원한 성품이 있을 수 없으므로 무아이며 空인 것입니다.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구별못하면, 해탈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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