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선과_위빠사나수행법비교(김사업)_200407 - 오곡도불학연구원장

수선님 2018. 5. 6.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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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마(위빠사나) 자료 컬럼 2


 

                            선과_위빠사나수행법비교(김사업)_200407 -

 

                           오곡도불학연구원장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김 사 업(金仕業)*

* 오곡도불학연구원장


 目 次



Ⅰ. 머리말

Ⅱ. 선과 위빠사나의 어의와 다양한      수행 계통

   1. 선과 위빠사나의 어의 해석

   2. 선과 위빠사나의 다양한 수행

      계통

Ⅲ. 선과 위빠사나 수행법의 원리와      그 비교

   1. 선 -「삼백 육십 뼈마디와 팔만        사천 털구멍을 총동원한 의문 덩        어리로 화두 참구」

   2. 위빠사나 -「몸과 마음에서 일        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에 대        해 전심전력으로 주의를 집중하여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아는 것」

   3. 선과 위빠사나 수행법의 원리        비교

Ⅳ. 선과 위빠사나 수행법의 실제 체      흠을 통한 비교

   1. 일본 임제종에서의 선 수행 체

      험

   2. 미얀마 쉐우민 센터에서의 위         빠사나 수행 체험

   3. 선과 위빠사나 수행 체험의 항

      목별 비교

Ⅴ. 맺는말

 

 

 

 

 




Ⅰ. 머리말


우선 다음의 두 인용문부터 주목해보자.


A.

어느 스님이 한 고승에게 와서 물었다.

"스님도 도를 닦기 위해 노력하십니까?"

"그럼!"

"어떻게 노력하십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네."

"그거야 모든 사람이 다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들도 스님처럼 도를 닦는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지 않네."

"왜입니까?"

"사람들은 밥 먹을 때 밥은 먹지 않고 갖가지로 머리나 굴리고 있고, 잠 잘 때는 잠자지 않고 온갖 것을 꾸미고 비교하고 있지. 그게 나와 다른 까닭이야."

그 스님은 아무 말도 못했다.


B.

"음식 먹을 때는 그 맛을 느끼려 하고 걸을 때는 걷기만 하라."


인용문 A에서 고승은 밥 먹을 때 밥 먹는 것과 하나가 되고, 잠 잘 때 잠자는 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 진리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중 사람들처럼 밥 먹을 때 쓸데없는 생각을 하거나 온갖 번뇌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온 존재를 다하여 밥 먹는 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인용문 B도 A와 같은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A의 고승이 때와 장소를 달리하여 A와 동일한 취지에서 한 말이 B라고 해도

허물 잡기가 힘들 정도이다.

 

A의 고승은 당나라 때의 뛰어난 선승인 대주 혜해(大珠慧海) 스님이고,

B를 말한 분은 미얀마를 대표하는 위빠사나 수행승 중의 한 분인 우 빤디따 사야도

( 인용문 A의 원문은  平野宗淨, 『禪の語錄6, 頓悟要門』

(東京: 筑摩書房, 1981. 제1쇄 1969), p.137에 실려 있다.

 

여기에 실린 원문은 여러 판본을 대조하여 교정한 것이다.

U Pandita Sayadaw, 1921∼)이다.

 

 인용문 B는 2002년 10월 우 빤디따 스님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인터뷰 내용으로, 2002년 10월 30일자 법보신문(678호)에 실려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선()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북방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고, 위빠사나(vipassan )는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 남방 상좌부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전통적인 수행법인 선 이외에 위빠사나 수행법도 전해져서 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수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서로 다른 전통의 수행법을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닦아온 위의 두 스님의 말씀이 매우 닮아 있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과연 선과 위빠사나는 어떤 수행법이며, 그 차이점은 무엇이고 유사점은 또 무엇일까?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의도이다. 먼저 선과 위빠사나의 주요 텍스트에 나와 있는 관련 사항을 살펴보고, 필자의 실제 수행 체험에 바탕하여 두 수행법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실제 수행 체험에 바탕하여 논하는 부분에서, 비교가 되는 구체적 대상은 선에서는 일본 임제종의 간화선 수행법이며, 위빠사나에서는 미얀마 마하시 계통의 수행법과 고엔카의 수행법이다. 한국선을 비교 대상에 넣지 않은 것은 냉철한 객관적 시각을 놓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선은 윤기나도록 우리 손때가 반지르르하게 묻은 것인 만큼, 한국선을 비교 대상에 넣는다면 비교하는 사람이나 비교한 것을 보는 사람이나 냉철한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선과 마찬가지로 간화선을 수행하는 일본의 임제선을 위빠사나의 비교 대상으로 택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선과 위빠사나를 보다 더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선과 일본선의 비교라는 부수적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필자는 일본 유학 시절 쿄토 대학(京都大學)의 선 수행 모임인 지성회에 참석하여 임제종 쇼오코쿠지(相國寺) 전문 수행도량에서 선 수행을 했으며, 근래에는 일본 임제종 16 대본산의 하나인 고오가쿠지(向嶽寺) 전문 수행도량을 세 차례 방문하여 스님들과 똑같이 수행하면서 집중수행(攝心 셋신)을 한 바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고엔카(S. N. Goenka) 계통의 10일 집중수련회와 미얀마의 우 자나카(U. Janaka) 사야도가 직접 지도한 20일 집중수련 코스에 참가했으며, 미얀마 양곤에 있는 쉐우민 담마 수카 또야(Shwe Oo Min Dhamma Sukha Tawya)에서 한 달 반 동안 위빠사나를 수행하고 돌아왔다.



Ⅱ. 선과 위빠사나의 어의(語義)와 다양한 수행 계통


1. 선()과 위빠사나(vipassan )의 어의(語義) 해석


 

선()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 원어는 '디야나(dhy na)'이고, 빨리어 원어는 '자나(jh na)'이다. 중국인들이 디야나를 발음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 '선나(禪那)'였고, 나중에 이를 줄인 것이 '선()'이었다. 일설에는 서북 인도에서 실크로드에 걸쳐 사용된 속어 가운데 '잔'(jh n, jh na에서 어미 'na'가 탈락된 것)이라 발음된 말을 소리 그대로 옮긴 것이 '선()'이라고도 한다. 디야나를 의역한 한자어도 여럿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정려(靜慮)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생각한다는 뜻이다.


 

원래 디야나는 인도의 모든 정신 문명에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요가(yoga)에서 나왔다. 요가를 실천하는 과정에 나오는 정신 정화법의 한 단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가나 디야나나 크게 보면 같은 수련법이었다. 즉 마음을 일정한 대상에 결부시켜 그 대상과 마음이 하나가 됨으로써, 마음의 혼란스러움을 가라앉히고 지혜를 체득하는 수련법이었다.

 cf.

  ·柳田聖山 외, 『 敎の思想 7 無の探求<中國禪>』(東京: 角川書店, 1971(4판), 초판 1969), p.11.

  ·高崎直道, 『 敎入門』(東京: 東京大學出版會, 1991(7쇄), 초판 1983), pp.156 ∼160.


불교는 이 디야나를 수용하여 주요한 수행법으로 발전시켰다. 계정혜(戒定慧) 삼학 가운데 '정'과 사선팔정설(四禪八定說), 육바라밀 중의 선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인도 불교의 선정법은 5세기 말경 보리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이래, 가장 성공한 종파 중의 하나를 잉태하면서 독특하게 전개되어 갔다.


 

한편, 위빠사나는 빨리어 위빠사나(vipassan )를 발음 그대로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때로는 '위파사나' 또는 '비파사나'로 표기되기도 한다. 접두사 '위(vi)'에, '보다(passati)'의 명사형인 '봄'을 뜻하는 '빠사나(passan )'가 결합되어 위빠사나(vipassan )가 되었다. '위'라는 접두사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뛰어남(visesa)' '다양함(vividha)'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위빠사나는 '뛰어난 관찰' '통찰' 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관찰함'을 원뜻으로 한다.


 

'뛰어난 관찰'은 일반적인 관찰이 아니라 현상의 본성을 꿰뚫어 본다는 의미이므로 '통찰(insight)'이라고 해도 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관찰함'이라고 할 때의 여러 가지 방식이란,

무상.고.무아의 관점을 말한다. 따라서 위빠사나의 원뜻은 '통찰' 또는 '무상.고.무아의 관점에서 관찰함'이고, 이러한 두 가지 뜻을 다 포함시켜 간단하게 말하면 '지혜로써 관찰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찰하는 것이 지혜로써 관찰하는 것인가? 위빠사나 수행 계통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을 그 순간에, 아무런 분별과 어떻게 하고자 하는 의지 작용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2. 선과 위빠사나의 다양한 수행 계통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선은 중국에서 독특한 과정을 거쳐 정착된 수행법이다. 중국에서 선은 육조 혜능 대에 이르러 신수(?∼706)의 북종선과 혜능(638∼713)의 남종선으로 나누어졌고, 혜능 이후에는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갈라지면서 복잡하게 전개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默照禪)의 구별도 생겼다.


 

간화선은 옛 선사들을 깨달음으로 이끈 화두(話頭)를 온 몸과 마음를 다하여 참구한다.

 

반면, 묵조선은 좌선을 통해 무분별(無分別) 속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김으로써 진리가 본래부터 어디에나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묵조란 묵묵히 다만 좌선하는(只管打坐) 가운데 저절로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청정한 성품의 작용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화두의 유무에 따라 간화선과 묵조선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묵조선에서 화두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화두는 선 수행자를 깨닫게 하기 위한 문제를 말하며, 옛 선사들의 말씀이나 문답 등이 화두로 사용된다. 화두는 분별로써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그래서 수행자의 전신을 의문 덩어리로 만드는 문제이다. 이러한 화두가 약 1700개나 된다.

 

화두(話頭)라는 말 자체는 옛 선사들의 말씀이나 문답을 뜻하며,

두()는 의미 없는 접미사이다.


 

화두의 한 예를 들어보자. 어느 날 한 수행승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 부처로서의 본성)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했다. "없다()." 이것이 유명한 무자(無字) 화두이다. 불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는 것을 기본 교리로 한다. 따라서 당연히 조주 스님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주 스님의 답변은 의외로 "무"였다. 조주 스님 같은 고승이 아무렇게나 함부로 대답할 리 없다. 개에게 왜 불성이 없을까? 이것이 무자 화두이다.


 

선 수행자는 온 몸과 마음을 의문 덩어리로 뭉쳐 '무' 이 한마디에 몰두해야 한다. 이렇게 자나 깨나 심신의 기력을 다하여 '무'를 참구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이 찾아온다고 한다.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공안이라는 말은 원래 법률용어로서, 관공서에 비치된 판례 조문을 뜻했다. 판례가 지금의 법률 문제를 푸는 데 나침반 역할을 하듯이, 선 수행의 나침반이 바로 공안, 즉 화두이다.


 

위빠사나 수행 전통에도 여러 갈래가 있어 그 수행법이 단일하지는 않다. 이 중 우리 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우리 나라 사람이 가장 많이 수행하는 위빠사나는 미얀마 계통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1904∼1982)와 미얀마 태생의 인도인 고엔카 지(S. N. Goenka J , 1924∼) 계열의 것이다. '사야도'는 미얀마 말로써 '스승님'이라는 뜻이고, '지'는 존칭의 접미사이다.


 

19세기 후반까지 미얀마에서 위빠사나 수행이란 숲 속에서 수행에 전념하는 일부 수행승에게 국한된 일이었다. 그 후 1910년대를 지나면서 전문적인 수행 센터가 설립되고,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에게까지 위빠사나 수행이 널리 실천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적어도 24가지 이상의 유명한 위빠사나 수행법이 수많은 수행 지도자에 의해 수백 곳의 수행 센터와 사원에서 지도되고 있다.

 Gust f Houtman. "The Tradition of practice among Burmese Buddhists." Diss. London University, 1990. p.14.


참고로, 마하시 계통의 수행법은 기본적으로 『대념처경』(大念處經, Mah satipa h na-Suttanta)을 바탕으로 하면서, 『청정도론』과 기타의 경론, 주석서, 복주를 바탕으로 정립되어 있다. 이 수행법은 마하시 사야도의 직제자인 쉐우민 사야도, 우 빤디따 사야도, 우 자나카 사야도 등과 이 분들의 제자들에 의해 전수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위에 열거한 직제자들은 각기 자신의 수행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김재성, 「마하시 수행법과 『대념처경」

(근본불교 학술대회 자료집 『대념처경의 수행이론과 실제』, 2002), p.192.


한편, 고엔카 위빠사나 수행법은 미얀마의 고승 레디 사야도(Ledi Sayadaw, 1846∼1923)

계통의 수행법에 속한다고 알려져 있다.



Ⅲ. 선과 위빠사나 수행법의 원리와 그 비교


선과 위빠사나 두 전통에서 오랜 세월동안 수행자들이 수행의 매뉴얼로 삼아온

텍스트의 내용을 중심으로 두 수행법의 원리를 비교하고자 한다.

 

텍스트로서

 

선에서는 『무문관(無門關)』을 택했고,

위빠사나에서는 『대념처경』(大念處經, Mah satipa h na-Suttanta)을 택했다.


 

『무문관』은 중국 남송 시대의 선승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2∼1260) 스님이

저술한 것으로서 선가의 안팎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책 중의 하나이다.

 

『대념처경』은 위빠사나 수행의 주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어,

위빠사나 수행의 근본 경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텍스트의 시작 부분에 각각의 수행 원리가 간략히 제시되어 있는데,

그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하에서 인용하는 짧은 경문으로 어떻게 선과 위빠사나 수행의 방대한 모습을 조망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의 수행 체험에 의하면 아래의 인용문만으로도 두 수행법의 원리에 관한한 주요한 전체적인 모습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분들도 이 생각에는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실 것으로 믿는다. 인용문에서 다소 미진한 부분은 논의를 전개하는 중에 보충 설명했다.


1. 선 - 「삼백 육십 뼈마디와 팔만 사천 털구멍을 총동원한 의문 덩어리로 화두 참구」


 

『무문관』 제1칙 '조주구자'(趙州狗子), 즉 무자(無字) 화두 부분에서 무문 혜개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선(禪)을 참구하자면 조사의 관문(화두)을 뚫어야 하고, 오묘한 깨달음을 얻자면 분별심이 없어진(心路絶) 체험을 철저히 해야 한다. 조사의 관문을 뚫지 않고 분별심이 없어지지 않으면, 모두 풀이나 나무에 들러붙어 있는 허깨비나 다름없다. …(중략)…

 

이 관문을 뚫고 싶은 자 없는가. 삼백 육십 뼈마디와 팔만 사천 털구멍을 총동원하여, 온몸을 의문 덩어리로 뭉쳐 '무(無)'(각자의 화두) 이 한 마디를 참구하라. 낮이나 밤이나 손에 들고 놓지 말라. [그러나 이 '무'를] 허무의 무나, 유(有)에 대한 무(無)로 이해하지 말라. 뜨거운 쇳덩이를 삼킨 것처럼 뱉어내려 해도 나오지 않는 [의문 덩어리가 된 가운데], 지금까지의 잘못된 지식, 그릇된 깨달음을 말끔히 다 털어버리고, 오랫동안 지속하여 익고 익으면 자연히 안(마음.나)과 밖(대상.만상)이 하나로 된다.…(중략)…

 

[이렇게 해서] 어느 날 갑자기 한 소식이 터지면 …(중략)…

 

삶과 죽음의 벼랑에서 대자유를 얻고, 육도와 사생의 윤회 가운데서도 유유히 노니는 삼매를 얻는다. 어떻게 화두를 들어야 하나? 가지고 있는 모든 기력을 다하여 '무'(각자의 화두) 하나만 들어라. 이렇게 멈춤이 없다면, 불씨만 갖다대어도 법의 등불이 금방 확 타오르듯이, [깨달음이 문득 찾아온다.]

 

 平田高士, 『禪の語錄18, 無門關』(東京: 筑摩書房, 1981. 제1쇄 1969), p.14에 실린 위 인용문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이 원문은 『大正新脩大藏經』, 『續藏經』에 실린 『禪宗無門關』과 町元呑空冠註의 『改定評唱冠註無門關』을 비교하여 교정한 것이다:


 

   "參禪須透祖師關, 妙悟要窮心路絶. 祖關不透, 心路不絶, 盡是依草附木精靈. …(중략)… 莫有要透關底 . 將三百六十骨節, 八萬四千毫竅, 通身起箇疑團, 參箇無字, 晝夜提 . 莫作虛無會, 莫作有無會. 如呑了箇熱鐵丸相似, 吐又吐不出, 蕩盡從前惡知惡覺, 久久純熟, 自然內外打成一片. …(중략)… 騫然打發, …(중략)… 於生死岸頭, 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戱三昧. 且作 生提 . 盡平生氣力, 擧箇無字. 若不間斷, 好似法燭一點便著."



위의 인용문은 무자 화두를 소개하고 난 뒤 바로 설하는 내용이므로 '무()'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무'가 나오는 자리에 각자가 지니고 있는 화두를 대입해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에서의 '무'는 모든 화두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인용문에 나타난 선 수행의 원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선 수행은 화두 참구이고, 이를 통해 해탈한다.


 

선() 수행을 한다는 것은 화두를 참구해서 뚫는 것이고, 화두를 뚫어 한 소식이 터지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바로 이 자리에서 대자유, 즉 해탈을 얻고, 괴로움 속에서도 유유히 노닐 수 있는 삼매를 얻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불교의 목적인 해탈과 열반이 화두 참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 혼신의 힘을 다해 밤낮으로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


 

화두를 참구하되 흐리멍덩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삼백 육십 뼈마디와 팔만 사천 털구멍을 총동원하여 온몸을 의문의 덩어리로 뭉쳐서, 시뻘겋게 단 쇳덩이를 삼켰는데도 뱉어낼 수 없을 때의 심정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기력을 다해 낮과 밤을 가리지 말고 참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3) 화두 참구를 통해 종전의 그릇된 지식과 분별심이 없어진다.


 

인용문 앞부분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분별심이 없어진 체험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인용문 마지막 부분에서는 모든 기력을 다하여 화두 하나만 계속 들면, 불씨만 갖다대어도 등불이 금방 확 타오르듯이, 깨달음이 문득 찾아온다 했다. 앞뒤의 문장을 연결하여 보면, 혼신의 힘을 다해 화두를 들면 분별심이 없어지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분별심이 없어진 체험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번역한 원문은 '궁심로절(窮心路絶)'이다.

심로(心路)는 '마음의 작용'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뜻한다. '심로(心路)가 끊긴()' 상태는 체험적으로는 분별심이 없어진 상태이므로 그렇게 번역했다. 분별심이 없어진 상태에선 당연히 번뇌도 일어나지 않는다.

뜨거운 쇳덩이를 삼킨 것처럼 화두에 몰두하면 종전의 그릇된 지식과 잘못된 깨달음을 다 털어버릴 수가 있다는 뜻도 인용문 중간쯤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릇된 지식과 잘못된 깨달음도 분별심의 일종이다.


4) 화두 참구에는 지혜가 동반된다.


 

어둠이 사라진 것이 밝음이듯이, 분별심이 없어진 그대로가 지혜이다. 화두 참구를 통해 분별심이 없어지므로 지혜도 화두 참구에 동반되는 것은 당연하다. 인용문에서 무자 화두를 들 때 "허무의 무나, 유()에 대한 무()로 이해하지 마라"고 했다. 허무 사상이나, 유와 무를 둘로 분리해서 보는 이원적 사고로 무를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지식, 잘못된 깨달음, 분별심의 대표적 예이다. 인용문의 전후문맥으로 보았을 때 그런 식으로 무를 이해하지 말라는 것은, 그런 분별심은 내려놓고 의심 덩어리로 무를 참구하라는 것이다. 분별심을 내려놓는 데서부터 지혜가 시작되니, 이 구절을 통해서도 화두 참구에 지혜가 동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혜능 선사는 "견성(見性)을 말할 뿐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는 않는다"(有論見性, 不論禪定解脫)고 하여 선, 즉 화두 참구가 견성이라는 지혜를 체득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화두 참구에 지혜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혜능 선사는 그와 같은 말씀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위빠사나 -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에 대해 전심전력으로 주의                    를 집중하여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아는 것」


 

선 수행의 방법을 단적으로 '화두 참구'라 한다면 위빠사나 수행법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 그 답을 제공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근본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대념처경』(大念處經, Mah satipa h na- Suttanta)이다. 경의 앞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A. 비구들이여, 이것은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괴로움과 고뇌를 없애기 위한, 올바른 길에 이르기 위한, 열반을 체득(體得)하기 위한 하나의 길(ek yano maggo)이다. 바로 그것은 '사띠(sati)의 네 가지 확고부동한 확립(pa h n )'(四念處)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B. 비구들이여,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는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에 대해서도 똑같이 반복된다]을 대상으로 하여 몸(느낌·마음·법)을 거듭 거듭 관찰하는(anupass , 隨觀) 수행을 하면서 머문다. 전심전력으로( t p ), 분명한 앎을 지니고(sampaj no), 사띠를 지니고(satim ),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고뇌를 제어하면서 [머문다]. …(중략)…

 

 D gha-nik ya. PTS ed.. Vol.2. p.290:

   "Ek yano aya  bhikkhave maggo satt na  visuddhiy  sokapariddav na  samatikkam ya dukkhadomanass na  atthagam ya yassa adhigam ya nibb nassa sacchikiriy ya, yadida  catt ro satipa h n . Katame catt ro? Idha bhikkhave bhikkhu k ye k y nupass  viharati t p  sampaj no satim , 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vedan su vedan nupass  viharati t p  sampaj no satim , 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citte citt nupass  viharati t p  sampaj no satim , 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dhammesu dhamm nupass  viharati t p  sampaj no satim , 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C. 또는 몸(느낌·마음·법)을 대상으로 하여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거듭 거듭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머문다. 또는 몸(느낌·마음·법)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거듭 거듭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머문다. 또는 몸(느낌·마음·법)을 대상으로 하여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거듭 거듭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머문다. …(중략)… D. 그리고 그는 무언가에 매달리지 않고 머물고,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느낌·마음·법)을 대상으로 하여 몸(느낌·마음·법)을 거듭 거듭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머문다.

 

 D gha-nik ya. PTS ed.. Vol.2. pp.292 ff:

   "Samudayadhamm nupass  v  k yasmi  viharati, vayadhamm nupass  v  k yasmi  viharati, Samudayavayadhamm nupass  v  k yasmi  viharati.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 ci loke up diyati. Evam pi bhikkhave bhikkhu k ye k y nupass  viharati."(이 정형구가 몸·느낌·마음·법에 대한 관찰과 관련해서 꽤 자주 반복된다.)



인용한 경전 내용을 전체적으로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들의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열반을 얻게 하는 것은

 '사띠 (sati)의 네 가지 확고부동한 확립' 에 있다. (A)


 

(2) '사띠(sati)의 네 가지 확고부동한 확립'은


 

  ①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 어떤 현상이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쉽게 말해

나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을 그 순간 순간 놓치지 않고(C),

  ② 전심전력으로, 분명한 앎과 사띠를 지니고, 탐착심과 고뇌를 제어하면서(B),

무언가에 매달리지 않고 그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서(D) 거듭 거듭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띠(sati)의 네 가지 확고부동한 확립'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이다.


1) 위빠사나 수행은 사띠(sati)를 네 가지로 확고부동하게 확립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열반을 얻는다.


 

인용문 A에서 우리들의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열반을 얻게 하는 것은 '사띠(sati)의 네 가지 확고부동한 확립'에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화두 참구가 아니라, 사띠를 네 가지로 확고부동하게 확립하는 것이며, 이것을 통해 열반, 즉 불교의 목적은 성취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띠(sati)의 네 가지 확고부동한 확립'이란 무엇인가?

 

우선, 사띠의 의미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빨리어 사띠(sati)는 보통 염()으로 한역되는데, 그 외에 수의(守意, 마음을 지킴), 의지(意止, 마음 작용이 그침), 억념(憶念, 마음에 깊이 새겨 잊지 않고 항상 생각해냄) 등으로 한역되기도 한다. 이 사띠(sati)에 대한 우리말 번역은 실로 다양해서, '알아차림' '마음 챙김' '마음 지킴' '마음 새김' '마음 집중' '마음 모음' '주시' '관찰' '각성' '수동적 주의집중' 등으로 옮겨지고 있다. 이 많은 용어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근본불교 학술대회 자료집 『대념처경의 수행이론과 실제』(서울: 홍원사 출판부, 2002), pp.60∼61.


먼저, 미얀마 우 실라난다(U S l nanda) 사야도의 The Four Foundation of Mindfulness에 나와 있는 사띠에 대한 설명부터 살펴보자. 이 책은 『대념처경』을 빨리어 주석서와 복주, 그리고 마하시 사야도의 미얀마어 주석을 바탕으로 상세히 해설하고 있다.


사띠는, 돌이 날아가 벽을 치는 것과 같다. 돌을 던지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내어야 한다. 에너지를 내어 돌을 던지면 돌은 벽을 친다. 돌이 벽을 치듯이 사띠는 관찰 대상을 친다. 대상이 호흡이든, 배의 움직임이든, 몸의 활동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마음은 그 대상에게로 간다. 대상을 치는 것이 사띠이다.

 

 U S l nanda. The Four Foundation of Mindfulness. Boston: Wisdom Publications, 1990, p.21.



위의 인용문에 의하면 사띠란 '마음이 관찰대상으로 가서 그것을 치는 것'이다. 필자는 이 설명을 포함한 여러 관련 자료를 검토하고 생각한 끝에, 사띠를 '수행상의 관찰대상에 늘 주의를 집중하는 마음 작용'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합장한 두 손바닥의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대답하기 위해서 두 손바닥에 주의를 집중하는 작용이 '사띠'라고 이해하고 있다.


 

인용문 B는 확고부동하게 확립된 사띠란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전심전력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분명한 앎(正知, sampaja a)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떤 대상에 대한 확고한 사띠는 그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과 항상 짝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띠와 분명한 앎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수레의 두 바퀴,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관계라 할 수 있다. 사띠가 있으면 분명한 앎이 있고, 분명한 앎이 있으면 반드시 사띠가 동반되어 있다.


 

사띠와 분명한 앎이 이와 같은 관계에 있기 때문인지, 실제 위빠사나를 가르치는 많은 현장에서 사띠를 '대상에 대해 알아차리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알아차림'이라는 사띠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는 이런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필자가 참가한 고엔카 위빠사나 국내 집중수련회에서도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고 있었고, 미얀마 양곤의 쉐우민 센터에서도 사띠는 '알아차림'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한 예를 들면, "마음 챙김(正念, samm -sati)이란 놓치지 않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이다. (우 빤디따 스님 강의, 김재성 옮김, 『위빠사나 수행의 길』(서울: 푸른세상, 2002), p.210.)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할 경우, 과연 사띠 그 자체의 작용만 드러내었느냐도 문제되지만, 'sampaja a(분명한 앎)', 'paj n ti'(to come to know, to understand, 이 단어를 '알아차리다'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다

 

 임승택,

「『대념처경』의 이해」(근본불교 학술대회 자료집 『대념처경의 수행이론과 실제』, 2002), p.38의 주39에 나와 있는 번역이 그 한 예이다.) 등을 어떻게 '알아차림'과 확연히

   구별되게 번역하는가도 문제이다.

그러나 일반 수련자에게는 사띠를 '알아차림'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숨이 들고 날 때 코 언저리의 감각을 알아차리시오", "어떤 대상에 대해 일어나는 욕심내는 마음을 알아차리세요"하면, 바로 코 언저리와 탐욕심에 사띠를 두게 된다. 사띠에 대한 복잡한 개념 설명을 할 필요도 없고 듣는 즉시 이해하기도 쉽다. 제대로 된 사띠가 있는 곳엔 언제나 분명한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에 꼭 틀렸다고도 할 수 없다.


 

이 절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필자는 사띠를 '수행상의 관찰대상에 늘 주의를 집중하는 마음 작용'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는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사띠에 대한 또 하나의 우리말 번역어를 첨가하여 혼란을 초래하는 대신, 그냥 빨리어 sati를 발음 그대로 옮겨 '사띠'로 표기하고자 한다. 단, 본 논문에 나오는 '사띠'의 의미는 '수행상의 관찰대상에 늘 주의를 집중하는 마음 작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이러한 사띠의 네 가지 확고부동한 확립이 열반으로 이끈다고 했다. 사띠의 네 가지 확고부동한 확립이란 무엇일까? 인용문 B와 C와 D에 나와 있는 방식으로 몸(身, k ya)과 느낌(受, vedan )과 마음(心, citta)과 법(法, dhamm )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 그것이다.


2) 대상을 놓치지 않게 전심전력으로 사띠를 두어야 한다.


 

'사띠의 네 가지 확고부동한 확립'으로 번역한 빨리어 원문은 '짜따로 사띠빳따나(catt ro sati-pa h n )'이며, 보통 사념처(四念處)로 한역된다. 짜따로(catt ro)는 넷이란 뜻이고, 사띠(sati)가 염(), 빳따나(pa h n )가 처()로 한역된 것이다. 빳따나(pa h n )는 '확고부동한 확립'을 의미한다. '사띠의 네 가지 확고부동한 확립'에서 네 가지란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가리킨다. 이들에 대해 사띠를 확고부동하게 확립하는 것이 '사띠의 네 가지 확고부동한 확립'이다.


 

인용문 B, C, D에 나와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이 넷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띠를 확고부동하게 확립하는 것인지 알아보자. 이 넷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쉽게 말해 나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을 그 순간 순간 놓치지 않고(C), 전심전력으로, 분명한 앎과 사띠를 지니고, 탐착심과 고뇌를 제어하면서(B), 무언가에 매달리지 않고 그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서(D) 거듭 거듭 관찰하는 것이다.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앉고 서고 할 때 신체 각 부위의 움직임(몸과 법의 현상), 호흡할 때 코 언저리의 감각이나 복부의 움직임(몸.느낌.법의 현상), 걸을 때 발바닥의 느낌, 식사를 할 때 음식 맛이 순간 순간 바뀌는 것, 차고 가렵고 딱딱한 느낌, 신비한 느낌(이상은 느낌과 법의 현상), 남들보다 많이 가지려는 탐욕심, 시기 질투하는 마음, 통증에 대해 긴장하고 싫어하는 마음, 화, 혼침과 졸음, 들뜸과 의기소침,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이상은 마음과 법의 현상) 등등이다. 쉽게 말하면 나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 위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 '사띠의 네 가지 확고부동한 확립'이다. 이 중에서 인용문 B에 나와 있는 '전심전력'( t p )에 주목해 보자. 이러한 관찰이 맥 빠진 상태에서 진행되면 안 되고 온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모아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청정도론』 PTS판 제464쪽에 나와 있는 대로, 사띠는 "잊지 않는 것을 기능으로 한다(asammosa-ras )." 이것은 시합 중의 배드민턴 선수가 배드민턴 볼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듯이, 대상을 항상 시야에 넣어두고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게송에 의하면 사띠는 또한 "둥둥 떠다니지 않는 것을 특성으로 한다 ( 우 빤디따 스님 강의, 김재성 옮김, 『위빠사나 수행의 길』

(서울: 푸른세상, 2002), pp.239.

apil pana-lakkha )." 대상의 주위로 맴돌지 않고 대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말이다. 또 사띠는 "견고한 생각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한다(thirasa  -pada h n )"고 했다. 사띠를 두려는 생각이 확고하고 강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제대로 된 사띠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상의 『청정도론』 내용에 따르면, 사띠는 대상이 생겨나서 지속되다가 소멸하는 전과정의 모든 부분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것이며, 관찰대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선 사띠를 두려는 생각이 강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전심전력으로 사띠를 두어야 한다는 뜻이며, 이렇게 할 때 분명하게 알 수 있고 열반으로 이끄는 관찰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3) 사띠가 확고할 때에는 탐욕과 집착 등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인용문 B와 C에 나타나 있듯이 사띠가 확고부동하게 확립되기 위해선, 다시 말해 위빠사나 수행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사띠와 분명한 앎을 지님과 동시에 그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탐욕과 집착 등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은 사띠를 두는 대신에 번뇌를 억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사띠를 확고하게 둠으로써 저절로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정도론』 PTS판 제464쪽에서 사띠는 "보호하는 것을 나타남으로 한다(rakkha-paccupa h n )"고 했다. 사띠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을 때 번뇌의 공격으로부터 마음을 보호해주어, 번뇌는 들어올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하지 못한 생각들을 받아들일 틈을 주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보호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띠는 감각의 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에 비유되기도 한다.

 

 Sa yutta-nik ya. PTS ed.. Vol.4. p.194; A guttara-nik ya. PTS ed.. Vol.4. p.111:

   "Dov rikoti kho bhikkhu satiy  eta  adhivacana ."(비구여, 문지기란 곧 사띠를 가리킨다.)


필자가 경험한 위빠사나 지도자들은 실제로 사띠를 통해 번뇌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도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우 자나카 사야도는 망상이 일어날 때 망상의 내용을 알아차리지 말고 망상 그 자체를 알아차리라고 했다. 망상의 내용을 알아차리고 있다면 망상은 여전히 진행될 것이지만, 망상 그 자체를 알아차린다면 망상은 멈춘다고 했다. 그래서 망상이 일어나는 순간 "망상, 망상, 망상,……"하고 명칭을 빠르게 붙이며(labelling) 신속하게 알아차리라고 했다. 우 실라난다 사야도나, 우 빤디따 사야도도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이 내용은 우 자나카 사야도의 저술인 Vipassana Meditation. Yangon: Subang Jaya Buddhist Association, 2003, pp.143∼144에도 나온다.

 U S l nanda. The Four Foundation of Mindfulness. Boston: Wisdom Publications, 1990, p.49 참조.

 우 빤디따 스님 강의, 김재성 옮김, 『위빠사나 수행의 길』(서울: 푸른세상, 2002), pp.230∼231 참조.


쉐우민 사야도도 생전의 법문에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일어난 즉시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 명칭은 붙일 필요가 없지만 일어난 즉시 관찰하지 않으면 '나'와 '내 것', '좋고 나쁜 것'에 집착하게 되고, 탐욕.화냄.어리석음이 일어나게 된다고 했다.

 1999년 8월 3일에 있은 쉐우민 사야도의 법문 내용.



4) 확고부동한 사띠에는 지혜가 동반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띠가 확고하게 두어져 있을 때는 마음에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마음은 관찰 대상에 깊이 들어간다. 앞에서는 설명을 생략했지만 사띠는 대상을 조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원하는 무언가를 얻고 싫어하는 어떤 것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고, 눈앞의 관찰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한 것이다. 사띠가 이런 것이고, 이런 사띠가 확고부동할 때 지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인용문 B에 나오는 '분명한 앎'은 이 지혜를 말한다. 확고한 사띠에는 지혜가 동반된다는 것을 경전이 증명하는 대목이다. 분명한 앎에 해당하는 빨리어는 삼빠잔냐(sampaja a)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삼빠잔냐는 '분명하고 정확하게, 주어진 대상의 특징.기능.나타남을 빠뜨림 없이, 오근(믿음.노력.사띠.선정.지혜)의 균형 상태에서 아는 것'이다.

 U S l nanda. 앞의 책, p.51.


이러한 분명한 앎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주석서는 말한다. '이로움(s tthaka)에 대한 분명한 앎', '적절성(sapp ya)에 대한 분명한 앎', '대상(gocara)에 대한 분명한 앎', '무지가 없는(asammoha) 분명한 앎'이 그것이다. 여기서의 '무지가 없는 분명한 앎'이란 모든 현상의 무상(無常)·고()·무아(無我)에 대해 체험적으로 꿰뚫어 아는 것이다. 수행자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에 대해 이 네 가지 종류의 분명한 앎을 마음에 두고 관찰해야 한다.

 '네 가지 분명한 앎'에 대해서는 U S l nanda. 위의 책, pp.52∼59와, 우 빤디따의 『위빠사나 수행의 길』, pp.219∼232 참조.



3. 선과 위빠사나 수행법의 원리 비교

이상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선 수행의 중심에는 화두 참구가 있고, 위빠사나 수행의 중심에는 사띠가 있다. 화두는 분별로써는 해결할 수 없는, 그래서 수행자의 전신을 의문덩어리로 만드는 문제이다. 사띠는 '수행상의 관찰대상에 늘 주의를 집중하는 마음 작용'이다. 『대념처경』에 의하면, 수행상의 관찰대상은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이다.

두 수행법의 원리 비교를 위해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수행 원리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 - 「삼백 육십 뼈마디와 팔만 사천 털구멍을 총동원한 의문 덩어리로 화두 참구」

     1) 선 수행은 화두 참구이고, 이를 통해 해탈한다.

     2) 혼신의 힘을 다해 밤낮으로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

     3) 화두 참구를 통해 종전의 그릇된 지식과 분별심이 없어진다.

     4) 화두 참구에는 지혜가 동반된다.

위빠사나 -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에 대해 전심전력으로 주의를 집중하여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아는 것」

     1) 위빠사나 수행은 사띠(sati)를 네 가지로 확고부동하게 확립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열반을           얻는다.

     2) 대상을 놓치지 않게 전심전력으로 사띠를 두어야 한다.

     3) 사띠가 확고할 때에는 탐욕과 집착 등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4) 확고부동한 사띠에는 지혜가 동반된다.


두 수행법의 원리상의 공통점부터 알아보겠다.


1) 특정 대상에 전심전력으로 쉼 없이 집중한다.

두 수행법 모두 특정 대상에 전심전력으로 쉼 없이 집중한다는 원리상의 공통점을 갖는다. 선에서 집중하는 대상은 화두이고, 위빠사나에서 집중하는 대상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이다. 집중 대상은 달라도 쉼 없이 전심전력으로 집중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같다.

주의할 점은 전심전력으로 쉼 없이 집중하는 것이 긴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긴장과 스트레스를 불러올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긴장과 스트레스 없이도 '전심전력'이 될 수 있다.

'전심전력'을 판가름하는 척도는 긴장과 스트레스가 아니라, 선의 경우는 얼마나 화두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는가에 있고, 위빠사나의 경우는 대상을 놓치지 않고 얼마나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고 있는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화두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다면 화두를 전심전력으로 참구하고 있는 것이고, 대상을 놓치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전심전력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심전력이 되면, 긴장과 스트레스가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편안하고 고요한 경지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러한 집중을 통해 온갖 분별과 번뇌가 쉬게 되고 지혜가 생겨난다.

두 수행법 모두 위와 같이 집중함으로써 온갖 분별과 번뇌가 멈추고 지혜가 생겨난다고 하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가진다.


3) 수행의 목표는 동일하다.

두 수행의 목표는 해탈과 열반으로 동일하다. 물론 이 목표는 화두 참구와 사띠의 확고부동한 확립을 통해 각각 이루어진다.


이제 두 수행법의 차이점과 다음 연구과제로 남겨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두 수행법의 차이점으로 우선 집중 대상의 상이를 들 수 있다. 양 수행법이 특정 대상에 집중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그 집중 대상이 서로 다르다. 선 수행에서의 집중 대상은 분별심이 발붙일 데 없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의 화두이고, 위빠사나 수행의 집중 대상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이다.

집중 내용에도 차이가 있다. 화두에 대한 집중은 직관적 색채가 짙은 반면에,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생멸하는 현상들에 대한 집중은 분석적 경향이 있다. 집중의 결과 얻어지는 지혜에 대해, 선에서는 자신의 본성이 곧 부처의 성품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자각하는 것이라 하고, 위빠사나에서는 모든 현상이 무상(無常).고().무아(無我)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자각하는 것이라 한다.

두 수행법의 집중 대상과 집중 내용, 지혜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 등의 여건 상 다음 기회에 논해야 할 것 같다.



Ⅳ. 선과 위빠사나 수행법의 실제 체험을 통한 비교


이 장에서는 필자의 선과 위빠사나 수행 체험에 대부분 의존하여 두 수행법의 여러 가지 점을 비교하고자 한다. 먼저 두 수행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알 수 있는 선의 독참(선문답)과 위빠사나의 인터뷰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 다음, 항목별로 두 수행법을 비교하겠다. 독참과 인터뷰는 둘 다 수행자가 스승을 만나 자신의 수행 진행 사항에 대해 보고하고 점검받는 것이다. 이때 수행자는 수행 때 있은 체험을 보고하거나 경지를 보이고, 이에 대해 스승은 수행을 고쳐 주고 더 나아간 가르침을 주기도 하며 더욱 향상하게끔 수행자를 격려하기도 한다.


1. 일본 임제종에서의 선 수행 체험

일본 임제종에서는 12월 1일부터 로오하츠 오오젯신(臘八大攝心)이라 불리는 일년 중 가장 혹독한 집중수행(大攝心)이 시작된다. 8일 새벽까지 계속되는 이 기간 중, 수면 시간은 약 1시간에 불과하다. 새벽 3시에 기상하여 다음 날 새벽 2시에 취침한다. 아침 예불 1시간, 저녁 예불 30분, 식사와 청소 시간을 제외하고는 온 종일 좌선한다. 하루 약 15시간 30분 정도 좌선하는 셈이다. 이틀에 한 번 『벽암록』에 대한 방장 스님의 강의가 1시간 내지 1시간 30분에 걸쳐 있다. 독참은 매일 1인당 5차례 있다. 독참 때 스승과 수행자 간에 선문답이 이루어진다.

아무리 추운 겨울날에도 일본 선방에는 불기 한 점 없다. 난방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다. 땅바닥은 차디찬 기왓장. 방석 밑의 다다미에는 온기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스님들은 맨발에 내의도 입지 않는다. 내의를 입었다가는 방장 스님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진다. 여름 옷차림이나 겨울 옷차림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여름에는 너무 두꺼운 승복이어서 땀투성이가 되지만, 겨울에는 너무 얇아 찬 기운이 종횡무진으로 속살을 왕래한다. 여기에다 한겨울에도 선방의 출입문과 그 많은 창문들을 모두 다 활짝 열어놓고 좌선한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바람까지 부는 날이면 그 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12월의 집중수행 기간에는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야좌(夜座, 또는 隨座)라 하여 법당 밖 옥외 툇마루에 앉아 추위와 정면으로 부딪치며 좌선한다. 고깔모자 하나 쓰고 담요 한 장 어깨에 걸치고 눈 내리는 정원을 마주 하여 앉아, 살을 에는 삭풍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화두를 든다.

독참(獨參)이란, 수행자가 매일 정기적으로 스승과 일대일로 만나 화두에 대한 자신의 경지를 보이고 점검받는 것이다. 입실(入室)이나 참선(參禪)도 비슷한 의미로 통용된다.

일본 임제종에서는 화두만 주고 깨달을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는 법이 없다. 정기적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스승에게 화두에 대해 깨달은 바를 보이도록 한다. 평상시에는 매일 1∼2회, 집중수행 기간에는 매일 4∼5회씩 독참 시간이 정해져 있다. 그러니 집중수행 기간에는 4∼5시간마다 독참이 있는 셈이다. 이 독참(선문답)을 통해 납자들은 깨닫기도 하고 마음을 다잡아 정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수행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참 시간이 이렇게 많을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 들지 모르지만, 수행은 시간의 양도 중요하겠지만 수행의 질, 다시 말해 얼마나 화두에 몰입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하루 다섯 차례의 독참에서 제대로 대답을 못했을 때 생기는 분한 마음(忿心)과 다음 독참 시간에는 제대로 된 답을 말해야겠다는 각성이 화두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한마디로 독참은 수행자의 마음을 다잡아 매진케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필자의 독참 체험을 읽어보면 독참하는 방법에 대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소개한 독참 내용은 필자의 독참 체험 중 극히 기본적인 것만 간추린 것이다.


본당 복도에는 작은 향로에 향 하나가 무심히 타고 있고, 그 뒤에는 독참을 알리는 높이 3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종이 놓여 있다. 이 종을 환종(喚鐘)이라 부른다. 바로 그 뒤에는 돗자리가 깔려 있다. 거기에 전후로 열을 지어 꿇어앉아 독참의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다. 자기 차례가 되면 환종을 두 번 땅땅 치고 방장 스님 방으로 나아가는데, 종소리는 '들어갑니다'라는 신호이다.

멀리 떨어진 방장 스님 방에서 요령 소리가 났다. 이것은 지금 점검받고 있는 독참자의 퇴출을 명함과 동시에 다음번 독참자를 부르는 신호이다. 이 신호에 따라, 다음 독참자는 자기 앞에 있는 종을 작은 당목(撞木)으로 두 번 친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일어나 머리가 돗자리에 닿도록 깊숙이 절하고, 합장한 채 방장 스님 방으로 통하는 복도를 걸어간다. 한없이 조용하고 침착하나, 머뭇거리지 않고 재빠르게 나아간다.

방장실에 들어가서 예를 갖추고 앉으니, 가부좌하고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는 방장 스님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감은 듯한 눈에서는 섬뜩이는 광채가 빛나고 있었고, 주위는 스님의 선정의 힘에 의해 한없는 적정(寂靜)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힘과 고요함이 하나가 된 순수한 기운이었다. 처음 인사드리면서 뵈었던 인자한 얼굴과는 180도 다른 인상이었다.

스님은 조용히 눈을 감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먼저 화두를 주겠다." 말씀에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조주 스님의 '무'자 화두이다. 내용은 알고 있을 테니까 더 이상 설명은 하지 않겠다. 지금까지 익힌 학문은 완전히 버리고, '무' 그 자체가 되어라. 결코 쉽지도 않고 오래 앉아 있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몇 년씩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주일 만에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도 있다. 이번 일주일 만에 '무'를 꿰뚫고 가라. 머리에서 나온 답은 소용이 없다. 온몸, 전신으로 나온 답이라야 살아있다. '무'와 내가 둘이 아니라(不二), 하나가 되게 하라. 자신을 잊고, 만사를 잊고, '무'와 하나될 때까지 계속 좌선하라."

찌링찌링. 방장 스님은 옆에 놓인 요령을 집어서 흔들었다.


화두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와 조주 스님의 그 뜻을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앞뒤가 꽉 막혀 어떤 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 생각도 일으킬 수 없는 순수한 의문 상태, 이것은 온갖 문제를 불러 일으켰던 기존의 사고방식이 작동을 멈추었음을 의미한다. 독참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방장 스님 면전에 나아가 뭐라고 내보일 것은 없었다. 다음 독참 시간.


"무와 하나가 되었느냐?"

"……."

"화두를 학문적으로 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뭐고, 저것은 뭐다'라고 하는 머리가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는 살아있는 화두가 될 수 없다. 살아있는 화두란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이 화두에 대한 의심 하나로 뭉쳐진 것'을 말한다. 화두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워야 하고, 자기 자신이 완전히 죽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새로운 경지가 펼쳐지게 된다.

  독참은 자신의 경지를 보이는 것이다. 독참 때마다 항상 조금씩 진보가 있어야 한다. 남의 흉내를 내거나 꾸며서 말해서는 안 된다. 솔직하고 순수하게 답하라. 무와 하나가 되어라. 무가 말하고, 무가 예불하고, 무가 밥 먹고, 무가 청소하도록 하라.

  크게 죽으면 크게 산다(大死大活). 완전히 버려야 다시 살아난다(絶後再甦).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무와 하나가 되어 봐라."

찌링찌링.


다음 독참.


"하나가 되었느냐?"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는 것은 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야."

방장 스님은 노한 목소리로 야단을 치시고는 곧 요령을 흔들었다.

찌링찌링.


독참 때 조그만 주장자를 무릎 옆에 두고 사자왕처럼 단좌한 방장 스님은 그저 수행자가 하고 있는 것을 묵묵히 보고 들을 뿐이다. 수행자의 경지가 제법 되었다 싶으면 불쑥 또다시 앞뒤를 꽉 막히게 하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지만, 삿된 견해를 보이거나 지푸라기만한 답을 내보인 다음 더 이상 내놓는 게 없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요령을 찌링찌링 울릴 뿐이다. 그러면 일체의 언동을 중지하고, 곧 합장예배, 물러나가야 한다.

이후 며칠 동안 좌선 때는 물론이고 밥 먹을 때 청소할 때 등등 거의 하루 종일 '무'에 매달렸다. 그러나 방장 스님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독참 때마다 비슷한, 짧은 말씀을 남기시고는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령을 흔들었다.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것은 다 보였고, 쥐어짜낼 수 있는 것은 다 짜내었는데도 아직 화두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 독참은 정말 힘들어진다. 선문답에서 오가는 문답은 상대와 찻잔을 기울이며 편하게 나누는 대화가 아니다. 선문답에서 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상대에 들이대는 칼날과 같다. 이 칼날 같은 한 마디를 상대와 내가 주고받으며 지금 여기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선문답이다. 매번 똑같은 답만 되풀이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새로운 경지도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의지할 데 없이 오직 홀로 힘에 겨운 방장 스님과 다시 직면해야 한다는 어려움은 경험해 본 자만이 안다.

이렇게 독참이 어렵기 때문에 고참 스님들은 독참을 주저하는 신참들을 억지로 방장실로 몰아넣는다. 겨우 쥐어 짜낸 답을 가지고 독참하지만 간단하게 퇴짜 맞고 막 방장실을 쫓겨나온 신참을 고참 스님들은 호통치며 "다시 한번 더 독참해"하고 몰아친다. 가면 또 방장 스님에게 호되게 질타 당할 것이고, 가지 않으면 고참들에게 욕먹고 후려 맞을 지도 모른다. 진퇴양난.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곧 방장실로 가는 길을 선택하고 만다.

신참들이 무엇보다도 당황하는 예부터의 이 전통은 깊은 안개 속에 갇혀 곤혹에 곤혹을 거듭해 온 수행 미숙자들에게, 용맹심을 불러일으키고, 활로를 찾게 하려고 하는 절절한 마음의 표현이다. 여기까지 몰아넣지 않으면 한 마음이 되지 않고 한 마음이 되지 않는 한 깨달을 수 없다. 선배들의 깨닫게 하고자 하는 불심(佛心)의 행위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이 전통을 '불심행'(佛心行)이라 부른다.

다음 독참.


"무와 하나가 되었느냐?"

"나는 처음부터 무였습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냐?"

"……"

말문이 꽉 막혀버렸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무와 하나가 되어라."

찌링찌링.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자체가 분별심에 의한, 단지 쓸데없는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부끄러웠다.


"무를 보았느냐?"

"보는 자도 보이는 대상도 없었습니다."

"설명은 필요 없다. 보았으면 본 것을 그대로 보여 봐라. 자아, 어떻게 보이더냐."

"……"

찌링찌링.


형체가 없는 무, 보일 방법이 없는 무를 '보여 봐라'고 했다. 내가 모르고 있던 허점을 또 한번 찔리는 순간이었다. 비로소 나는 눈앞에 보이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표현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경험을 비유적으로 말하거나 심리적인 기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사실을 한 치의 첨삭도 없이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보이기 위해선 우선 그렇게 본 바가 있어야 한다. 체득(體得)한 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음 독참.


"무를 보았느냐."

"예."

"이것이 무엇이냐?"

노스님은 옆에 놓인 주장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무-"

"으음, 이 요령 속으로 들어가 봐라."

스님께서는 갑자기 요령을 뒤집으며 요령 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하셨다.

"……."

"아직 아(我)가 남았군."

찌링찌링


'요령 속으로 들어가 봐라'고 하는 것이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새로운 화두라기보다 무자 화두와 관련된 많은 화두 중의 하나였다. 무자 화두 하나만 완전히 꿰뚫으면 그 자리에서 척척 답할 수 있는 무와 관련된 화두였다.

무자 화두의 한 측면만 뚫었을 때 관련된 화두 하나는 통과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관련 화두를 제시하면 그만 막혀 버리고 만다. 두 번째를 통과하고 난 뒤 세 번째에서 막힐 수도 있지만, 그 경지가 깊다면 네 번째.다섯 번째……가 한꺼번에 뚫린다.

여기에 소개한 독참 내용을 보면 변죽만 울린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 없이는 진척이 없다. 선문답은 직접 해보아야 그 생명과 진가를 알 수 있다. '무'와 관련된 화두는 원칙적으로 공개를 불허하는 것이지만, 초심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소개했다.


2. 미얀마 쉐우민 센터에서의 위빠사나 수행 체험

앞서 밝힌 대로 필자는 고엔카 지와 우 자나카 사야도의 위빠사나 집중수행에 참가했고 미얀마 양곤의 쉐우민 센터에서 수행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일본 선방처럼 무서운 직일(直日, 선방에서 스님들을 지휘 감독하는 직책) 스님이 죽비를 장검처럼 들고 선방을 돌지 않는다. 졸아도 누가 깨워주지는 않는다. 많은 것이 자율적으로 진행되지만 사방에 같이 수행하는 사람들의 눈이 있다. 수행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그 눈은 직일 스님의 장군죽비처럼 무섭게 인식된다. 게다가 수시로 사야도와 주지 스님이 경내를 다니시며 수행자들의 상태를 점검한다.

선 수행도 그러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허락 없이 수행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엄금이다. 쉐우민 사야도 생전에 미얀마 수행자 한 사람이 허락을 받지 않고 센터의 정문을 나갔다가 바로 그 자리에서 쫓겨났을 정도이다. 그리고 수행처에서는 철저히 묵언(noble silence)해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정기적으로 수행자가 스승을 만나 자신의 수행에 대해 보고하고 점검받는다. 이를 흔히 인터뷰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쉐우민 센터에서 인터뷰했던 내용을 좌선·행선·일상생활의 셋으로 나누어 그 중 극히 기본적인 일부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쉐우민 센터에서의 인터뷰는 이틀에 한 번 있었다.


1) 좌선에 관한 인터뷰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 때 느껴지는 코끝과 윗입술 사이의 감각을 지켜보고 있는데 졸음이 밀려왔습니다. 졸지 않고 코언저리의 감각을 아무리 지켜보려고 해도 졸음 때문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거렸습니다."

"처음 이삼일 동안은 졸리고 망상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억지로 졸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졸리면 졸리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

"언제 졸았는지 졸고 난 뒤에야 졸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어떻게 알아차립니까?"

"처음에는 잘 안 될지 모르지만, 졸릴 때 알아차리고 다시 알아차리고 하면 된다. 졸리는 것을 문제 삼지 마라."


"좌선 중에 갑자기 미워하는 사람이 떠올라 괴로웠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는 괴로움을 겪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걸 알아라. 상대는 자신을 미워하는 지도 모르는데 미워하는 나만 괴로움을 당한다. 미움으로 인한 자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잘 살펴라. 억지로 없애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괴로운 느낌을 계속 주시하고 바라보라. 생각으로만 미워하는 마음을 버려야지 하면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진심으로 지혜의 마음을 갖고 미움 때문에 생긴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면 저절로 미움이 사라지게 된다. 미움이란 상대보다 자신을 먼저 태워놓기 마련이다."


"노력하려고 하는데 힘이 들고 피곤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욕망이 노력하려고 하는가? 지혜가 노력하려고 하는가? 이것을 잘 봐야 한다."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계속되는 가운데 양손과 팔에 가벼운 진동과 미세한 열이 있었습니다. 손바닥에서는 규칙적인 맥박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바닥에 납작 붙은 느낌만 남고, 몸은 사라졌습니다. 실제로 허리를 펴고 손을 들어봐도 몸은 다 있었습니다. 그때 몸 앞에 긴 터널이 한없이 전개되었는데,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사라졌습니다. 다시 사띠를 몸으로 옮겼더니, 여전히 바닥에 몸이 납작 붙은 느낌만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몸이 사라졌다고 안 것은 지혜를 본 것이다. 몸은 관념이고 실제로 있는 것은 느낌뿐이다. 시각적으로 보인 터널은 관념, 즉 망상에서 나온 것이다."


"수행이 잘 되어가도 더 잘 되어야지 하는 마음이 있으면 수행이 더 안 됩니다. 그럴 때 마음을 보면 원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좋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욕망이 붙는다."


2) 행선에 관한 인터뷰

행선(行禪, walking meditation)은 걸으면서 하는 수행이다. 미얀마 마하시 계통의 수행법에서 특히 많이 사용한다. 우 자나카 사야도가 가르치는 행선 수행은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걸으면서, 걸을 때의 발을 들어서 앞으로 이동하고 바닥에 놓는 과정을 분리하여 '듦', '나아감', '놓음'하고 명칭을 붙이며 관찰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똑같은 과정을 '(발을 들고자 하는) 의도', '듦', '나아감', '놓음', '닿음', '눌림'의 다섯 과정으로 나누어 명칭을 붙여가며 알아차린다.

반면 쉐우민 센터의 행선 수행은 대상을 발에 국한시키지 않고 명칭도 붙이지 않는다. 평상시보다 조금만 천천히 걸으면서 발이든 손이든, 한쪽 코너 끝에서 돌아설 때의 어깨 근육의 움직임이든, 걸을 때 떠오르는 생각이든 무엇이든 알아차리면 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걷는 매 순간에 무엇이든 하나씩 놓치지 말고 세밀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참고로, 고엔카의 수행에서는 좌선만 있고 행선은 없다.


"행선할 때 집중은 잘 안 되고, 다리가 아팠습니다."

"다리 아픔으로 인해 나타나는 싫어하는 마음을 보는 습관을 들여라."


"축축한 마룻바닥에서 끈적끈적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느끼자 걸음 걷기가 불편했습니다."

"불편하다고 동요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주시하라."


"어제는 부드럽게만 느껴지던 마룻바닥에서 오늘은 습한 기운만 유독 많이 느꼈습니다. 습한 기운을 느끼는 순간 다리가 무겁고 허리가 아팠습니다."

"평정을 유지하는 마음에서 사띠를 두면 대상에 대해 반응을 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고통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3) 일상생활에 관한 인터뷰

"오늘 점심때는 좋아하는 음식이 나왔기에 과식을 했습니다. 과식하지 않는 방법은 없습니까?"

"사띠를 두고 식사를 하면 자신에게 알맞은 양으로 잘 조절할 수 있다."


"아직도 알아차림 없이 그냥 먹는 일이 많습니다만, 발전적인 것은 알아차림 없이 그냥 먹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씹는 것을 계속 알면서 씹고, 씹을 때마다 음식 맛이 변하고, 혀에 닿는 촉감도 변한다는 것을 알면서 씹어야 한다. 또 성급하게 먹으려고 하는가, 탐심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들을 챙기면서 차분하게 먹어야 한다."


"싫어하는 음식에는 손이 가지 않습니다."

"싫어하는 음식이 돼지고기라면, 그것을 돼지고기로 보지 말고 단지 음식으로 보아라. 즉 그냥 보는 것으로 그치면, 싫다 좋다 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한 숟가락 먹으면서 마음 자세를 보고, 또 한 숟가락 먹으면서 마음 자세를 보고, 그렇게 계속 먹을 때마다 마음 자세를 보면서 먹어라.

  식사 때뿐만 아니라 여타 일상생활에서도 사띠를 두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 모기장을 걷고, 이불을 걷으며, 화장실에 가서 대소변을 보는 것 등 순간순간 하고 있는 어떤 형태의 움직임이든 하나하나에 사띠를 두어야 한다. 어느 하나에 사띠를 둘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한다. 화장실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아야 한다."


3. 선과 위빠사나 수행 체험의 항목별 비교

1) 독참과 인터뷰

선과 위빠사나 수행 원리를 살피기 위해 제Ⅲ장에서 인용한 두 텍스트의 내용과 그 설명 방식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 가능한 사실이지만, 선은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반면에, 위빠사나의 설명은 반복적이고 분석적이다. 선의 설명에서는 간단명료한 만큼 굉장한 힘과 박력을 느낄 수 있고, 위빠사나의 설명은 상대적으로 부드럽다.

필자가 체험한 바로는 실제 수행에서도 설명 방식에 나타난 특징들이 그대로 역역하게 나타난다. 선 수행에는 힘과 박력이 넘친다. 특히 일본 임제종의 스님들은 걸을 때나, 식사할 때나, 예불할 때나, 방장 스님과 선문답할 때나, 심지어 죽비를 내려칠 때조차도 힘과 박력이 넘쳐흐른다. 필자가 체험한 위빠사나 수행, 즉 고엔카 지.우 자나카 사야도.쉐우민 센터에서의 수행은 이에 비해 훨씬 부드러웠다. 여기에서 부드럽다는 말은 수행을 게을리 한다는 뜻이 아니라, 전반적인 분위기가 부드럽다는 말이다. 아직 경험하지 못해본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도 힘과 박력에서만큼은 임제종을 능가하지 못하리라고 조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임제종의 독참과 위빠사나의 인터뷰에서도 이 점은 잘 나타난다. 독참에서는 스승이나 제자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부딪친다. 여기서 오가는 언동은 상대에게 들이대는 칼날과 같다. 수행자가 내보인 경지에 대한 통과.불통과만 있지 90% 통과, 50% 통과는 없다. 물론 스승의 자상한 조언도 독참 때 더러 듣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참은 치열함의 극한이다. 스승(방장 스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이다. 독참이 아닌 때는 그렇게 자상할 수 없는 스승이지만 말이다. 반면, 위빠사나의 인터뷰는 전반적으로 부드럽다. 마치 담임선생님과 상담하는 것과 같은 분위기이다.


2) 울력과 행선

일본 임제종 스님들의 일과에서 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음식 장만은 물론 설거지 등 뒤처리도 스님들이 다 했기 때문에 스님들의 육체 노동 시간은 상당히 많았다. 부엌일을 전담하는 공양주 보살을 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울력은 오전뿐 아니라 오후에도 있었는데, 울력 시간에 스님들은 경내 청소를 하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경내 묘지를 손질했다. 스님들은 모두 '사무에(作務衣)'라는 푸른 색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에는 흰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일을 시작했다.

울력, 즉 육체 노동은 선을 선이게 하는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이다. 선방에서는 흔히 '동중(動中)의 공부는 정중(靜中)의 공부보다 뛰어나기가 백천만 배'라는 말을 한다. 스님들이 하는 울력은 결코 세간에서 하는 그런 노동이 아니다. 누구의 명령에 의한 것도 아니고, 보수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각자 소리 없이 치열하게 화두를 챙기며 낙엽을 쓸고 풀을 뽑는다. 좌선의 동적(動的) 표현이 바로 울력인 것이다.

선에서는 왜 육체 노동을 중시할까? 일본의 유명한 선학자 스즈키 다이세츠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스님들이 육체적으로 과다하게 일하는 경향은 없었다. 식사는 걸식으로 해결했다. (스즈키의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인도의 이러한 전통은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과 같은 남방 불교권에서는 아직도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선(禪)이 꽃핀 중국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중국인들은 무언가 구체적인 일을 성취하기를 바랐다. 육체적 노동에 종사하여 손과 발을 움직이고, 도구를 다루지 않고는 현실의 생활은 의미가 없다고 중국 스님들은 생각했다. 중국인들이 가진 이러한 실천성이 불교를 단순한 명상 생활로 떨어지게 하는 것을 막았다. 이 사실은 선방 생활에서 분명하게 증명된다.

 鈴木大拙, 『禪堂の修行と生活』(鈴木大拙禪選集 제6권)(東京: 春秋社, 2001), pp.85∼86.



중국 불교인들은 그들의 사고방식 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명상만 할 수는 없었고, 육체 노동을 병행해야 했다. 선사들이 노동을 중시한 이유가 단순히 이것뿐이라면 무언가 미흡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스즈키 다이세츠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명상자는 문제를 분명하게 꿰뚫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명상하고 있는 시간 동안만이다. 이것이 그의 일상생활의 모든 경험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 꿰뚫음은 단순히 관념적인 것이며, 어떠한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곧 사라져 버린다. 이런 이유로 선사들은 제자들이 농원이나 숲이나 산중에서 열심히 일하기를 바랐다.

 鈴木大拙, 위의 책, p.86.



수행승들의 일상생활이란, 밥하고 빨래하고 농사짓고 땔감 마련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일상생활에서 좌선을 통해 깨달은 것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또는 좌선할 때와 마찬가지로 화두와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사들은 이 점을 간파하여 제자들에게 일하게 했다. 좌선에서 얻은 체험이 얼마나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다. 또 좌선을 통해 얻은 체험을 일상생활에 적용시켜 그 체험을 심화시키는 한편, 화두에 더욱 몰입케 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있었을 것이다. 선방에 앉아서 화두를 드는 것보다 일하면서 화두 드는 것이 더 힘들다. 일하면서도 성성하게 화두가 들린다면 대단한 수준으로 화두에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다.

육체 노동에 담긴 이러한 의미를 통찰하여 선방 생활에 근로정신을 제도적으로 확립한 분이 중국의 종교적 천재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 선사였다. 그는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저술하여 선종 교단의 규칙은 물론, 선방의 생활과 수행 규칙을 처음으로 제정하였다.

백장 선사는 연로해서도 매일 아침 밭일을 거르지 않았다. 이것을 보다 못한 제자가 하루는 괭이를 감추어 버렸다. 그랬더니 노선사는 방안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식사를 마다하셨다. 제자가 의아해서 식사를 재촉하자, 그는 명언을 남겼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이 정신은 이후 천 년 이상을 선방 수행승들의 골수에 맺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미얀마의 마하시 계통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앉아서 하는 좌선(坐禪, sitting meditation)과 걸으면서 하는 행선(行禪, walking meditation)을 거의 반반씩 병행한다. 1시간 좌선에 1시간 행선하는 식이다.

그러나 선에서는 행선이 없다. 몇 시간 좌선 후에 선방의 대중이 일렬로 서서 10분 정도 걷는 경행(經行)은 있다. 이것은 오랜 좌선으로 인한 다리의 통증을 완화하고 졸음을 쫓아서 심기일전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물론, 이때에도 좌선 중의 삼매를 지속시켜야 하지만, 시간의 양이나 위상에서 위빠사나의 행선과는 전혀 다르다.

현실성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중국의 토양에서는 좌선 이외의 수행 형태가 행선보다는 육체 노동(울력)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식사는 걸식이나 신자들의 보시로 해결하고 승원이나 숲 속에서 오직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문화에서는 행선이 좌선과 같은 비중으로 행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선의 문화에서는 그냥 걸으면서 수행하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고 농원이나 산림에서 일하면서 수행하는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산 작업을 해가면서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선의 본질적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3) 일상공부 중시

선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이나 어느 정도 수행이 진행되었을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의 수행이다. 각 가정이나 직장에서 일상적인 일을 하는 순간 순간을 수행과 병행시키는 것이 가장 중시된다. 앞 절에서 밝혔듯이 선에서는 '동중(動中)의 공부는 정중(靜中)의 공부보다 뛰어나기가 백천만 배'라 하며, 일상생활 속에서 화두를 성성적적하게 드는 것을 좌선 중에 화두 드는 것보다 훨씬 높이 평가한다.

쉐우민 센터나 우 자나카 사야도도 일상생활 한 가운데서의 수행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다. 양쪽 다 수행을 잘하고 있는가의 척도를, 일상생활의 매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잘 알아차리고 있는가에 두었다.


4) 신비 체험에 대한 태도

수행 중에 신비한 체험을 할 때가 더러 있다. 필자는 일본에서의 선 수행 중에 몸이 없어진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독참 때 방장 스님께 이 일을 말씀드렸다.


"갑자기 제 몸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손과 발이 어디에 있는지, 몸통이 어디에 붙었는지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온몸 전체를 통해 느껴지는 감각이라곤 왼쪽 손등과 손바닥에 느껴지는 차가움뿐이었습니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두움 속의 촛불 하나처럼 그 부분만이 나와 단절되어 허공에 떠있으면서 감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머리는 정적의 한 가운데에 있는 양 한없이 고요하고 맑았습니다."

"그것은 마경(魔境, 마구니의 경계)이다. 좋은 의미로는 피나게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피나게 하지 않으면 마경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때로는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경우도 있다. 이런 마경이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유혹되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는 여러 경계가 수시로 나타날 텐데 거기에 끌려가지 말고 오직 무자 화두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마경이 깨달음인 줄 알고 좋아하기 시작하면 끝이다."


고엔카의 위빠사나 수행 중에는 좌선을 할 때마다 심한 어깨 통증으로 7일을 시달렸다. 8일째 되던 날 어깨 통증이 어느 순간 씻은 듯이 사라지면서 몸과 마음이 고요함 그 자체가 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분은 마치 열반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았다. 필자도 모르게 이 상태가 더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다음에 다시 한 번 더 경험하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수행을 지도했던 법사께 보고했더니, 그 느낌에 이끌려가지 말고 주어진 관찰 대상을 계속 알아차리면서 없는 듯이 지나치라고 했다.

쉐우민 센터와 우 자나카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유사한 체험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그 느낌과 느낌에 대한 마음의 반응을 평정심을 유지한 채 놓치지 말고 알아차리라고 했다. 임제종과 고엔카 위빠사나의 경우와 큰 차이가 없는 지도 방식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선과 위빠사나 양 수행에서는 신비 체험이 깨달음의 전조인 양 착각하거나, 그 느낌에 이끌려가지 말라고 가르친다.



Ⅴ. 맺는말


불교 수행법은 불교 역사가 오랜 만큼 다양하다. 중국.한국.일본 등 북방 대승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선이나 염불 등의 수행을 해왔고, 스리랑카.미얀마.태국 등 남방 상좌부불교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왔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족첸이나 마하무드라의 수행을 한다. 수행법은 이처럼 다양하지만 모두가 불교의 가르침을 자신의 전존재에 사무치게 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하는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고 생각한다.

본 논문이 선과 위빠사나 두 수행법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논하는 과정에서 두 수행법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잘못이다. 많은 질정을 바란다.


                          

첨부파일 선과_위빠사나수행법비교(김사업)_200407.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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