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굿따라 니까야(증일)

아홉의 모음 - 제4장 대품 품(A9:32-9:41. Mahā-vagga)

수선님 2018. 5. 20. 11:53

제4장 대품 품

Mahā-vagga


머묾 경1(A9:32)

Vīhār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띠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 “비구들이여,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이 있다. 무엇이 아홉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이 있다.”


머묾 경2(A9:33) 

1. 비구들이여,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의 증득을 설하리라. 이제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의 증득인가?”


2.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들이 소멸한 그곳에서, 감각적 쾌락들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갈애와 사견이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그 삼매의 구성요소로 감각적 쾌락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감각적 쾌락들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감각적 쾌락들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를 지닌, 멀어짐으로부터 생겨난 기쁨(희열.喜)과 즐거움(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얻어 머뭅니다. 여기서 감각적 쾌락들이 소멸하고, 감각적 쾌락들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한 뒤 절하고 합장하여 그를 예경할 것이다.”


3. “비구들이여,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소멸한 그곳에서,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갈애와 사견이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그 삼매의 구성요소로 감각적 쾌락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부터 고요해져,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있는 제2선(二禪)을 얻어 머뭅니다. 여기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소멸하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한 뒤 절하고 합장하여 그를 예경할 것이다.”


4. “비구들이여, 기쁨과 즐거움 소멸한 그곳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갈애와 사견이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그 삼매의 구성요소로 감각적 쾌락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기쁨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기쁨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正念)과 알아차림(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을 얻어 머뭅니다. 여기서 기쁨과 즐거움이 소멸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한 뒤 절하고 합장하여 그를 예경할 것이다.”


5. “비구들이여, 평정과 즐거움이 소멸한 그곳에서 평정과 즐거움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갈애와 사견이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그 삼매의 구성요소로 감각적 쾌락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평정과 즐거움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평정과 즐거움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함(捨念淸淨)이 있는, 제4선(四禪)을 얻어 머뭅니다. 여기서 평정과 즐거움이 소멸하고, 평정과 즐거움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한 뒤 절하고 합장하여 그를 예경할 것이다.”


6. “비구들이여, 물질[色. 물질적 현상]에 대 인식(지각)이 소멸한 그곳에서, 물질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갈애와 사견이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그 삼매의 구성요소로 감각적 쾌락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물질에 대한 인식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물질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얻어 머뭅니다. 여기서 물질에 대한 인식이 소멸하고, 물질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한 뒤 절하고 합장하여 그를 예경할 것이다.”


7. “비구들이여,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한 그곳에서,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갈애와 사견이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그 삼매의 구성요소로 감각적 쾌락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뭅니다. 여기서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하고,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한 뒤 절하고 합장하여 그를 예경할 것이다.”


8. “비구들이여,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한 그곳에서,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갈애와 사견이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그 삼매의 구성요소로 감각적 쾌락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뭅니다. 여기서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하고,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한 뒤 절하고 합장하여 그를 예경할 것이다.”


9. “비구들이여,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한 그곳에서,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갈애와 사견이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그 삼매의 구성요소로 감각적 쾌락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뭅니다. 여기서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하고,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한 뒤 절하고 합장하여 그를 예경할 것이다.”


10. “비구들이여,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한 그곳에서,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문다. 참으로 그런 존자들은 갈애와 사견이 없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그 삼매의 구성요소로 감각적 쾌락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은 어디에서 소멸하며, 누가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뒤 머무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뭅니다. 여기서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이 소멸하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할 것이다. ‘훌륭합니다.’라고 그의 말을 기뻐하고 반가워한 뒤 절하고 합장하여 그를 예경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의 증득이다.”


열반 경(A9:34)

Nibbān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사리뿟따 존자이시여"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들이여, 열반은 행복입니다. 도반들이여, 열반은 행복입니다.”


2. 이렇게 말하자 우다이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여기서 느껴지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이라 합니까?”


3. “도반 우다이여, 여기서 느껴지는 것이 없는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도반이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쾌락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섯입니까?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매혹적인 (쾌락을 자극하는 것)것들입니다. 

도반이여,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매혹적인 것들입니다. 

도반이여,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매혹적인 것들입니다. 

도반이여,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매혹적인 것들입니다. 

도반이여,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觸]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매혹적인 것들입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쾌락입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쾌락을 조건으로 일어난 행복과 기쁨을 감각적 쾌락의 행복이라 합니다.”


4.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감각적 쾌락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감각적 쾌락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이유로 열반은 행복과 같다고 알아야 합니다.”


5. “다시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거친 사유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이유로도 열반은 행복과 같다고 알아야 합니다.”


6. “다시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즐거움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즐거움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이유로도 열반은 행복과 같다고 알아야 합니다.”


7. “다시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평정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평정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이유로도 열반을 행복과 같다고 알아야 합니다.”


8. “다시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물질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물질이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이유로도 열반은 행복과 같다고 알아야 합니다.”


9. “다시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공무변처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공무변처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이유로도 열반은 행복과 같다고 알아야 합니다.”


10. “다시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식무변처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식무변처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이유로도 열반은 행복과 같다고 알아야 합니다.”


11. “다시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무소유처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에게 무소유처와 함께한 인식에 대해 마음의 기울임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병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이유로도 열반은 행복과 같다고 알아야 합니다.”


12. “다시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뭅니다.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써 사성제를 본 뒤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합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이유로도 열반은 행복과 같다고 알아야 합니다.”


소[牛] 경(A9:35)

Gāvī-sutta 

1.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리석고, 우둔하고, 들판을 모르고, 바위가 울퉁불퉁한 돌출한 산을 걷는데 서투른 산악의 소가 있다 하자. 그 소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보리라.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먹으리라.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보리라.’라고. 그런데 그가 앞 발을 확고하게 잘 내려놓지도 않은 채 뒷 발을 들어 올린다 하자. 그러면 그는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지 못할 것이고,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먹지 못할 것이고,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보지 못할 것이다. 또 그 곳에 서서 ‘나는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보리라.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먹어보리라.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보리라.’라고 생각했던 그 장소로 안전하게 돌아오지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 산악의 소는 어리석고, 우둔하고, 들판을 모르고, 바위가 울퉁불퉁 돌출한 산을 걷는데 서투르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비구가 있어 어리석고, 우둔하고, 들판을 모르고,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무는데 서투르다. 그는 그 표상을 반복하지 않고, 닦지 않고, 많이 익히지 않고, 바르게 확립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물리라.’라고. 그러나 그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머물 수가 없다. 



그러자 다시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물리라.’라고. 그러나 그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물 수도 없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비구는 두 가지 모두를 잃었고 두 가지 모두로부터 떨어졌다고 한다. 마치 어리석고, 우둔하고, 들판을 모르고, 바위가 울퉁불퉁 돌출한 산을 걷는데 서투른 산악의 소처럼.”


2.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현명하고, 영민하고, 들판을 잘 알고, 바위가 울퉁불퉁 돌출한 산을 걷는데 능숙한 산악의 소가 있다 하자. 그 소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보리라.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먹으리라.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보리라.’라고. 그가 앞발을 확고하게 잘 내려놓은 뒤 뒷발을 들어 올린다 하자. 그러면 그는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갈 것이고,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먹을 것이고,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시게 될 것이다. 또 그곳에 서서 ‘나는 전에 가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보리라.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먹으리라.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보리라.’라고 생각했던 그 장소로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 산악의 소는 현명하고, 영민하고, 들판을 잘 알고, 바위가 울퉁불퉁 돌출한 산을 걷는데 능숙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비구가 있어 현명하고, 영민하고, 들판을 잘 알고,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무는데 능숙하다. 그는 그 표상을 반복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바르게 확립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물리라.’라고. 그러면 그는 아무 어려움 없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반복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바르게 확립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머물리라.’라고. 그러면 그는 아무 어려움 없이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반복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바르게 확립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물리라.’라고. 그러면 그는 아무 어려움 없이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반복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바르게 확립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물리라.’라고. 그러면 그는 아무 어려움 없이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반복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바르게 확립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물리라.’라고. 그러면 그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반복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바르게 확립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물리라.’라고. 그러면 그는 아무 어려움 없이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반복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바르게 확립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물리라.’라고. 그러면 그는 아무 어려움 없이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그 표상을 반복하고, 닦고, 많이 익히고, 바르게 확립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물리라.’라고. 그러면 그는 아무 어려움 없이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


3.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런 증득에 입정하기도 하고 출정하기도 할 때 그의 마음은 유연해지고 수행에 적합하게 된다. 마음이 유연하고 수행에 적합하게 되면 무량한 삼매를 잘 닦게 된다. 그는 잘 닦은 무량한 삼매를 통해 최상의 지혜로 실현시킬 수 있는 법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기 위해 그의 마음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는 이런 원인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그는 만일 원하기만 하면 여러 가지 신통변화를 나툰다. 그는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 여럿에서 하나가 된다. 그는 나타나고 사라짐에 담장이나 성벽이나 산에 걸림없이 넘나드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와 같다. 땅 속에서 걸림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마치 물 속에서와 같다. 그는 물 위를 거침없이 가는 것이 마치 땅 위에서와 같다. 그는 공중에서 가부좌를 행하는 것이 마치 날개 달린 새와 같다. 그는 대신변과 대위덕을 지닌 달과 태양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는다. 그는 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력을 미친다[神足通]. 

그는 이런 원인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그는 만일 원하기만 하면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를(天耳界) 통해 멀거나 가까운 하늘사람과 인간의 두 소리를 듣는다.[天耳通] 

그는 이런 원인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그는 만일 원하기만 하면 다른 중생,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차린다. 그는 탐욕을 지닌 마음을 탐욕을 지닌 마음이라고 알고, 탐욕에서 벗어난(떠난) 마음을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린다. 그는 성냄을 지닌 마음을 성냄을 지닌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알아차린다. 그는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을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이라고 알아차리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을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산란한 마음을 산란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린다. 그는 광대한 마음을 광대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광대하지 못한 마음을 광대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린다. 그는 위가 있는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리고, 위가 없는 마음을 위가 없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린다. 그는 삼매를 얻은 마음을 삼매를 얻은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삼매에 얻지 못한 마음을 삼매에 얻지 못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린다. 그는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린다. [他心通] 

그는 이런 원인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그는 만일 원하기만 하면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한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한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宿命通]

그는 이런 원인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그는 만일 원하기만 하면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그는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본다(알아차린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그들은 고귀한 분들을 비방하고, 잘못된 견해(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래서 이들은 육체가 파괴된 뒤 죽어서 괴로운 곳, 나쁜 곳, 즐거움이 없는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고귀한 분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하늘 나라에 태어난다.'고. 이와 같이 그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 차린다.[天眼通] 

그는 이런 원인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그는 만일 원하기만 하면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꿰뚫어 안다.[漏盡通] 

그는 이런 원인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이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선(禪) 경(A9:36)

Jhāna-sutta 

1. “비구들이여, 초선(初禪)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제2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제3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제4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공무변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식무변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무소유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비상비비상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2. “‘비구들이여, 초선(初禪)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이건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不還者]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궁수나 궁수의 제자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마든 표적으로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 쏘고 전광석화와 같이 꿰뚫고 큰 몸을 쳐부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이건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초선(初禪)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한 것은 이런 이유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3. “‘비구들이여, 제2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제3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제4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이건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궁수나 궁수의 도제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만든 표적으로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 쏘고 전광석화와 같이 꿰뚫고 큰 몸을 쳐부수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

[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이건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제2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제3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제4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로 그렇게 말했다.”


4. “‘비구들이여, 공무변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궁수나 궁수의 도제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표적을 만들어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 쏘고, 전광석화와 같이 꿰뚫고, 큰 몸을 쳐부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여기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공무변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로 그렇게 말했다.”


5. “‘비구들이여, 식무변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궁수나 궁수의 도제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만든 표적으로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 쏘고, 전광석화와 같이 꿰뚫고, 큰 몸을 쳐부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여기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식무변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로 그렇게 말했다.


6. “‘비구들이여, 무소유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궁수나 궁수의 도제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진흙더미로 만든 표적으로 연습을 한 뒤에 나중에는 멀리 쏘고, 전광석화와 같이 꿰뚫고, 큰 몸을 쳐부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여기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건 인식이건 형성이건 의식이건, 그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사라짐[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무소유처를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로 그렇게 말했다."


7.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인식이 함께한 선정의(삼매의) 증득[等地]이 있는 한 완전한 지혜로 꿰뚫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리고 비상비비상처의 증득과 상수멸의 이 두 경지는 증득에 능숙하고 증득에서 출정하는 것에 능숙한, 삼매를 닦는 비구들이 증득에 들었다가 출정한 뒤에 바르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註) 여기서 왜 비상비비상처를 언급하지 않았는가? 미세하기 때문이다. 그 경지에서는 네 가지 정신의 무더기들도 미세하여 명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식이 함께한 [선정의] 증득[等地]이 있는 한 완전한 지혜로 꿰뚫음이 있다.’는 것은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음이 함께한 증득이 있는 한, 거친 법들을 명상하는 자에게 완전한 지혜로 꿰뚫음이 있고, 그는 아라한과를 얻는다. 그러나 비상비비상처는 미세하기 때문에 인식이 함께한 삼매의 증득이라 말하지 않는다.

”바르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은 ’이것은 고요하고 수승하다.‘라고 궁극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칭송해야 하고 찬양해야 한다는 말이다.(AA.ⅳ.198)


아난다 경(A9:37)

Ānand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숲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아난다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아난다 존자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2.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도반들이여. 

도반들이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는 재가에서도 기회를 터득할 수 있음을 깨달으셨습니다. 이는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게 하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참으로 눈도 있을 것이고 형상들도 있지만 그 형상들의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귀도 있을 것이고 소리들도 있지만 그 영역들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코도 있을 것이고 냄새들도 있지만 그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혀도 있을 것이고 맛들도 있지만 그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몸도 있을 것이고 감촉들도 있지만 그 영역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3. 이렇게 말하자 우다이 존자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그러면 인식을 가진 자가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인식이 없는 자가 경험하지 않습니까?”

“도반 우다이여, 인식이 있는 자가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인식이 없는 자가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도반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인식을 가진 자가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4.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5.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6. “도반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7. “도반 우다이여, 한때 나는 사께따에서 안자나 숲의 녹야원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자띨라가히야 비구니가 내게 다가왔습니다. 와서는 내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섰습니다. 한 곁에 서서 자띨라가히야 비구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이 삼매는 탐욕에 이끌리지 않고, 성냄을 밀쳐내지 않으며, 애써 노력하여 오염원들을 제지하고 방해한 상태가 아니고, 해탈했기 때문에 확고하며, 확고하기 때문에 지족하고, 지족하기 때문에 안달하지 않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이 삼매는 어떤 결실이 있다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까?’

도반 우다이여, 이렇게 말하자 나는 자띨라가히야 비구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띨라가히야여, 탐욕에 이끌리지 않고, 성냄을 밀쳐내지 않으며, 애써 노력하여 오염원들을 제지하고 방해한 상태가 아니고, 해탈했기 때문에 확고하며, 확고하기 때문에 지족하고, 지족하기 때문에 안달하지 않는 이 삼매는 완전한 지혜를 결실로 가진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도반 우다이여,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바라문 경(A9:38)

Brāhmaṇa-sutta 

1. 그 무렵 세상의 이치에 능통한 두 명의 바라문이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바라문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2. “고따마 존자시여, 일체를 아는 자[一切知者]요, 일체를 보는 자[一切見者]인 뿌라나 깟사빠는 무제한적인 지와 견을 공언합니다. ‘내가 가거나 서 있거나 잠을 자거나 깰 때에 언제나 지와 견이 확립되어 있다.’라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끝이 없는 지혜로 끝이 있는 세상을 알고 보면서 머무른다.’라고.

고따마 존자시여, 일체를 아는 자[一切知者]요 일체를 보는 자[一切見者]인 니간타 나따뿟따도 무제한적인 지와 견을 공언합니다. ‘내가 가거나 서 있거나 잠을 자거나 깰 때에 언제나 지와 견이 확립되어 있다.’라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끝이 있는 지혜로 끝이 있는 세상을 알고 보면서 머무른다.’라고.

고따마 존자시여, 이 두 사람은 지혜를 말하면서 서로서로 반대되는 말을 하는데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말을 합니까?”


3. “바라문들이여, 그만하라. ‘이 두 사람은 지혜를 말하면서 서로서로 반대되는 말을 하는데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말을 합니까?’라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어라. 나는 그대들에게 사성제의 법을 설하리라. 이제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바라문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4. “바라문들이여, 예를 들면 네 사람이 사거리에 서 있는데 그들은 최고의 걸음걸이와 속력을 갖추었으며 최대의 보폭을 갖추었다 하자. 그들의 빠른 속력은 마치 능숙한 궁수가 훈련을 통해서 능숙하고 숙련되어 가벼운 화살로 힘들이지 않고 종려나무의 그늘을 가로질러 신속하게 쏘는 것과 같고, 큰 보폭은 마치 동쪽 바다에서 서쪽 바다를 한 걸음으로 걷는 것과 같았다 하자.


그때 동쪽 방향에 서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걸어서 세상의 끝에 도달하리라.’고 한다 하자. 그는 백년의 수명을 가졌는데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고는 것을 제외하고 대소변 보는 것을 제외하고 수면으로 피로를 푸는 것을 제외하고 백년을 살면서 계속해서 걷더라도 세상의 끝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말 것이다.


그때 서쪽 방향에 서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걸어서 세상의 끝에 도달하리라.’고 한다 하자. 그는 백년의 수명을 가졌는데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고는 것을 제외하고 대소변 보는 것을 제외하고 수면으로 피로를 푸는 것을 제외하고 백년을 살면서 계속해서 걷더라도 세상의 끝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말 것이다.


그때 북쪽 방향에 서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걸어서 세상의 끝에 도달하리라.’고 한다 하자. 그는 백년의 수명을 가졌는데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고는 것을 제외하고 대소변 보는 것을 제외하고 수면으로 피로를 푸는 것을 제외하고 백년을 살면서 계속해서 걷더라도 세상의 끝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말 것이다.


그때 남쪽 방향에 서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걸어서 세상의 끝에 도달하리라.’고 한다 하자. 그는 백년의 수명을 가졌는데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고는 것을 제외하고 대소변 보는 것을 제외하고 수면으로 피로를 푸는 것을 제외하고 백년을 살면서 계속해서 걷더라도 세상의 끝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말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바라문들이여, 나는 이렇게 달려가서 세상의 끝을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라문들이여, 그러나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5. “바라문들이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쾌락을 성자의 율에서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6. “바라문들이여,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매혹적인(감각적 쾌락을 자극하는 것)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觸]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바라문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성자의 율에서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7. “바라문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바라문들이여, 이를 일러 ‘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한다. 

이를 두고 다른 자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한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역시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8. “바라문들이여,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바라문들이여, 이를 일러 ‘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한다. 

이를 두고 다른 자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한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역시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바라문들이여, 여기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바라문들이여, 이를 일러 ‘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한다. 

이를 두고 다른 자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한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역시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바라문들이여,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바라문들이여, 이를 일러 ‘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한다. 

이를 두고 다른 자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한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역시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9. “바라문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바라문들이여, 이를 일러 ‘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한다. 

이를 두고 다른 자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한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역시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10. “바라문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바라문들이여, 이를 일러 ‘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한다. 

이를 두고 다른 자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한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역시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11. "바라문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문다.

바라문들이여, 이를 일러 ‘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한다. 

이를 두고 다른 자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한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역시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12. "바라문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문다.

바라문들이여, 이를 일러 ‘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문다.’라고 한다. 

이를 두고 다른 자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한다. 

바라문들이여, 나도 역시 ‘이 사람은 세상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13. “바라문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써 사성제를 본 뒤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다. 

바라문들이여, 이를 일러 ‘이 비구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세상의 끝에 머물고 세상에 대한 애착을 건넜다.’라고 한다.”


천신 경(A9:39)

Deva-sutta 

1. “비구들이여, 옛날에 신과 아수라들 간에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에서 아수라들이 이겼고 신들이 패배했다. 

비구들이여, 패배한 신들은 퇴각했고 아수라들은 북쪽을 향해서 추격을 가했다. 그때 신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수라들이 추격하는구나. 우리는 아수라들과 두 번째 전쟁을 하리라.’라고.”


2. “비구들이여, 두 번째로 신들은 아수라들과 전쟁을 했다. 두 번째도 아수라들이 이겼고 신들이 패배했다. 

비구들이여, 패배한 신들은 퇴각했고 아수라들은 북쪽을 향해서 추격을 가했다. 그때 신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수라들이 추격하는구나. 우리는 아수라들과 세 번째 전쟁을 하리라.’라고.”


3. “비구들이여, 세 번째로 신들은 아수라들과 전쟁을 했다. 세 번째도 아수라들이 이겼고 신들이 패배했다. 

비구들이여, 패배한 신들은 두려워서 신의 요새로 들어갔다. 신의 요새로 들어간 신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제 공포를 주는 이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에 왔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머물고 아수라들과 전쟁을 하지 않으리라.’라고. 

아수라들에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들은 이제 공포를 주는 이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으로 갔다. 이제 그들은 스스로 머물 것이고 우리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4. “비구들이여, 옛날에 신과 아수라들 간에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에서 신들이 이겼고 아수라들이 패배했다. 

비구들이여, 패배한 아수라들은 퇴각했고 신들은 남쪽을 향해서 추격을 가했다. 그때 아수라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들이 추격하는구나. 우리는 신들과 두 번째 전쟁을 하리라.’라고.”


5. “비구들이여, 두 번째로 아수라들은 신들과 전쟁을 했다. 두 번째도 신들이 이겼고 아수라들이 패배했다. 

비구들이여, 패배한 아수라들은 퇴각했고 신들은 남쪽을 향해서 추격을 가했다. 그때 아수라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들이 추격하는구나. 우리는 신들과 두 번째 전쟁을 하리라.’라고.”


6. “비구들이여, 세 번째로 아수라들은 신들과 전쟁을 하였다. 세 번째도 신들이 이겼고 아수라들이 패배했다. 

비구들이여, 패배한 아수라들은 두려워서 아수라의 요새로 들어갔다. 아수라의 요새로 들어간 아수라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제 공포를 주는 이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에 왔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머물고 신들과 전쟁을 하지 않으리라.’라고. 

신들에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수라들은 이제 공포를 주는 이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으로 갔다. 이제 그들은 스스로 머물 것이고 우리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7.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그때 비구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 나는 공포를 주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에 왔다. 이제 나는 스스로 머물 것이고 마라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라 빠삐만에게도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 비구는 공포를 주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으로 갔다. 이제 그는 스스로 머물 것이고 우리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8.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부터 고요해져,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그와 같이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그와 같이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그와 같이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그때 비구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 나는 공포를 주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에 왔다. 이제 나는 스스로 머물 것이고 마라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라 빠삐만에게도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 비구는 공포를 주는 것들로부터 보호해줄 곳으로 갔다. 이제 그는 스스로 머물 것이고, 우리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9. “비구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물 때, 이를 일러 ‘이 비구는 마라를 쳐부수었다. 마라의 눈을 완전히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의 시야를 뛰어넘었다.’라고 한다.”


10. “비구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물 때, 이를 일러 ‘이 비구는 마라를 쳐부수었다. 마라의 눈을 완전히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의 시야를 뛰어넘었다.’라고 한다. 


비구가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물 때, 이를 일러 ‘이 비구는 마라를 쳐부수었다. 마라의 눈을 완전히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의 시야를 뛰어넘었다.’라고 한다. 


비구가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물 때 이를 일러 ‘이 비구는 마라를 쳐부수었다. 마라의 눈을 완전히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의 시야를 뛰어넘었다.’라고 한다. 


비구가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물면서 통찰지로써 사성제를 본 뒤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할 때, 이를 일러 ‘이 비구는 마라를 쳐부수었다. 마라의 눈을 완전히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의 시야를 뛰어넘었다.’라고 한다.”


나가 경(A9:40)

Nāga-sutta 

1. “비구들이여, 밀림에 사는 나가가 먹이를 찾아 나섰을 때 숫코끼리나 암코끼리나 어린 코끼리나 새끼 코끼리가 앞서 가면서 풀끝을 먼저 잘라 먹으면 밀림에 사는 나가는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 한다. 

비구들이여, 밀림에 사는 나가가 먹이를 찾아 나섰을 때 숫코끼리나 암코끼리나 어린 코끼리나 새끼 코끼리가 앞서 가면서 드리워져 있는 부러진 가지 잎들을 먼저 먹어버리면 밀림에 사는 나가는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 한다.

비구들이여, 밀림에 사는 나가가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숫코끼리나 암코끼리나 어린 코끼리나 새끼 코끼리가 앞서 가면서 웅덩이의 물을 혼탁하게 만들어버리면 밀림에 사는 나가는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 한다.

비구들이여, 밀림에 사는 나가가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암코끼리들이 자기의 몸을 스치면서 지나가면 밀림에 사는 나가는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 한다.”

註) 나가 : 힘센 코끼리나 용을 뜻한다. 여기서는 힘센 코끼리를 말한다. 


2. “비구들이여, 그때 밀림에 사는 나가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나는 숫코끼리나 암코끼리나 어린 코끼리나 새끼 코끼리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나는 풀끝이 잘려나간 풀을 먹고, 드리워져있는 부러진 가지 잎들을 먹고, 혼탁해진 물을 마시고, 내가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암코끼리들이 내 몸을 스치면서 간다. 그러니 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서 혼자 머물러야겠다.’라고. 그는 나중에 무리에서 빠져나와서 혼자 머물면서 풀끝이 잘려나가지 않은 풀을 먹고, 드리워져있는 부러진 가지 잎들을 먹지 않고, 혼탁하지 않은 물을 마시고,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암코끼리들이 그의 몸을 스치면서 지나가지 않게 되었다.


비구들이여, 그때 밀림에 사는 나가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전에 나는 숫코끼리나 암코끼리나 어린 코끼리나 새끼 코끼리에 둘러싸여 살았다. 나는 풀끝이 잘려나간 풀을 먹었고, 드리워져있는 부러진 가지 잎들을 먹었고, 혼탁해진 물을 마셨고, 내가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암코끼리들이 내 몸을 스치면서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 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서 혼자 머물면서 풀끝이 잘려나가지 않은 풀을 먹고, 드리워져있는 부러진 가지 잎들을 먹지 않고, 혼탁하지 않은 물을 마시고,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암코끼리들이 그의 몸을 스치면서 지나가지 않게 되었다.’라고. 그는 코로 나뭇가지를 잘라서 그것으로 몸을 문지르고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3.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가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과 왕과 대신들과 외도들과 외도의 제자들에 둘러싸여서 머물 때 비구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나는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과 왕과 대신들과 외도들과 외도의 제자들에 둘러싸여서 머문다. 그러니 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서 혼자 머물러야겠다.’라고.


그는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똑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 머문다. 욕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악의와 성냄을 제거하여 성냄이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의 정을 일으켜 악의와 성냄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여 해태와 혼침 없이 머문다. 광명상(光明想)을 가져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며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들뜨지 않고 머문다. 안으로 마음이 고요하여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의심을 제거하여 의심을 건너서 머문다. 유익한 법들에 아무런 의심이 없어져서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그는 마음의 오염원이고 통찰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이들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여,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문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그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써 [사성제를] 본 뒤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다. 

그는 기뻐하면서 가려운 곳을 없앤다.”


따뿟사 경(A9:41)

Tapuss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말라에서 우루웰라깝빠라는 말라들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우루웰라깝빠로 탁발을 가셨다. 우루웰라깝빠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와와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내가 낮 동안의 머묾을 위해 큰 숲으로 들어가 있는 동안 그대는 여기에 있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낮 동안을 머물기 위해서 큰 숲으로 들어가서 어떤 나무 아래 앉으셨다.


2. 따뿟사 장자가 아난다 존자에게 찾아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따뿟사 장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 존자시여, 저희 재가자들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에 물들어 있고 감각적 쾌락을 탐합니다. 이처럼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에 물들어 있고 감각적 쾌락을 탐하는 저희 재가자들에게 출리(出離)라는 것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저는 이 법과 율에서는 젊은 비구들의 마음은 ‘이 출리는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모두 출리에 들어가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이렇듯 이 법과 율의 비구들과 많은 사람들 간에 다른 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출리입니다.”

“장자여, 이 논점은 세존을 뵙고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장자여, 같이 세존을 뵈러갑시다. 뵙고서 이 문제를 세존께 말씀드립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라고 따뿟사 장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3. 아난다 존자는 따뿟사 장자와 함께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따뿟사 장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저희 재가자들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에 물들어 있고 감각적 쾌락을 탐합니다. 이처럼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고 감각적 쾌락에 물들어 있고 감각적 쾌락을 탐하는 저희 재가자들에게 출리라는 것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존자시여, 저는 이 법과 율에서는 젊은 비구들의 마음은 ‘이 출리는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모두 출리에 들어가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고 들었습니다. 존자시여, 이렇듯 이 법과 율의 비구들과 많은 사람들 간에 다른 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출리입니다.’라고.”


4. “참으로 그러하다, 아난다여. 참으로 그러하다, 아난다여. 아난다여, 나도 깨닫기 전, 아직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출리는 좋은 것이다. 멀리 여읨은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출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출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출리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출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출리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출리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되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출리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출리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물렀다. 

아난다여, 내가 이와 같이 머물 때에 감각적 쾌락이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숙고함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감각적 쾌락이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숙고함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5. “아난다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무르리라.’라고,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가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거친 사유가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친 사유들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거친 사유가 없음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거친 사유가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기 거친 사유들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거친 사유가 없음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거친 사유가 없음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거친 사유들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거친 사유가 없음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거친 사유가 없음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물렀다. 

아난다여, 내가 이와 같이 머물 때 거친 사유와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숙고함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거친 사유와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숙고함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6. “아난다여, 그런 내게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희열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희열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쁨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기쁨 없음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기쁨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기쁨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기쁨 없음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기쁨 없음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기쁨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기쁨 없음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기쁨 없음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 고 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물렀다. 

아난다여, 내가 이와 같이 머물 때 기쁨이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숙고함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기쁨이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숙고함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7. “아난다여, 그런 내게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정과 즐거움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평정과 즐거움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평정과 즐거움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upekkha.捨)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물렀다. 

아난다여, 내가 이와 같이 머물 때 평정이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평정이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8. “아난다여, 그런 내게 ‘참으로 나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 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공무변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공무변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물질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공무변처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공무변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물질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공무변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공무변처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물질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공무변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공무변처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인식)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머물렀다. 

아난다여, 내가 이와 같이 머물 때 물질이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물질이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9. “아난다여, 그런 내게 ‘참으로 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식무변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식무변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공무변처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식무변처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식무변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공무변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식무변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식무변처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공무변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식무변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식무변처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식(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머물렀다. 

아난다여, 내가 이와 같이 머물 때 공무변처가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개 병이었다.

아난다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공무변처가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10. “아난다여, 그런 내게 ‘참으로 나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무소유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무소유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식무변처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무소유처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무소유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식무변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학습하고, 무소유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무소유처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식무변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릭혔다. 무소유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무소유처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넘어선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 머물렀다. 

아난다여, 내가 이와 같이 머물 때 식무변처가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식무변처가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11. “아난다여, 그런 내게 ‘참으로 나는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소유처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무소유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무소유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무소유처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 머물렀다. 

아난다여, 내가 이와 같이 머물 때 무소유처가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아난다여, 예를 들면 행복한 자에게 병날 만큼의 괴로움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내게 무소유처가 함께한 인식에 마음을 기울임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게 병이었다.”


12. “아난다여, 그런 내게 ‘참으로 나는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무르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상수멸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했다.


아난다여, 그러자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상수멸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가?’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많이 익히지 못했다. 상수멸에 대한 이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상수멸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히고, 상수멸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상수멸에 들어갈 것이고 청정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안정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위험을 보고 그것을 많이 익혔다. 상수멸에 대한 이익을 얻고 그것을 받들어 행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이것은 고요하다.’라고 보면서 상수멸에 들어갔고 청정한 믿음을 가졌고 안정되었고 해탈하게 되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각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인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물렀다. 

그리고 나는 통찰지로써 사성제를 본 뒤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했다.”


13. “아난다여, 나는 이러한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의 증득[九次第住等地]을 순서대로나 역순으로 자유롭게 증득하고 출정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하고 사문∙바라문을 포함하고 신과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에서 내 스스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천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나 나는 아홉 가지 차례로 머묾의 증득을 순서대로나 역순으로 자유롭게 증득하고 출정했기 때문에 나는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하고 사문∙바라문을 포함하고 신과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에서 내 스스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내게는 ‘내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내 마지막 태어남이며, 이제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라는 지와 견이 일어났다.”



제4장 대 품이 끝났다.네 번째 품에 포함된 경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두 가지 ① ~ ② 머묾 ③ 열반 ④ 소[牛] ⑤ 선[禪] ⑥ 아난다 ⑦ 바라문 ⑧ 천신 ⑨ 나가 

⑩ 따뿟사이다.












실론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0945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